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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메이너드 케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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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인스 남작
John Maynard Keynes[1], 1st Baron Keynes
CB[2] FBA[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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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칭 케인스 경
The Lord Keynes
출생 1883년 6월 5일
잉글랜드 케임브리지셔 케임브리지
사망 1946년 4월 21일 (향년 62세)
잉글랜드 서식스주 틸턴
국적
[[영국|]][[틀:국기|]][[틀:국기|]]
작위 제1대 틸턴의 케인즈 남작[4]
직업 경제학자, 철학자, 언론인
신체 198cm
학력 이튼 칼리지 (졸업)
케임브리지 대학교 킹스 컬리지 (수학 / 학사)
주 경력 베르사유 조약 영국 대표단
파리 강화 회의 재무성 수석대표
전후 국제 통화 제도 논의 핵심 멤버
차관 도입 협상 영국 측 대표
왕립 인도 통화위원회 위원
브레턴우즈 협정 영국대표
잉글랜드 은행 이사
국제경제회의 영국대표
사상 자유주의(새자유주의)
정당
배우자 리디아 로포코바 (1925년 결혼)[5]
종교 무종교(무신론적 불가지론)[6]
서명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JM_Keynes_signature.jpg

1. 개요2. 생애3. 평가
3.1. 마르크스주의
4. 성향5. 어록6. 여담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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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경제학자.

거시경제학을 창시하고 정립했다고 평가받는다. 경제학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뤄지는 인물 중 한 명으로, '완전 고용을 실현·유지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개입 없이 시장에만 경제를 맡기는 자유방임주의가 아닌 정부의 개입과 보완책이 필요하다'는 케인스주의를 주창했다.[7] 이러한 케인스의 이론은 오늘날 거시경제학의 기초가 되었으며, 여전히 경제학계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2. 생애

1883년 영국 빅토리아 여왕 치세의 청교도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저명한 경제학자이자 논리학자였으며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강사(교무계원)이기도 했다. 어머니는 시의원이었다. 나중에 어머니는 시장까지 지낸다. 말하자면 전형적인 부르주아 계층에서 태어난 셈. 이후 남동생 하나와 여동생 하나가 더 태어난다. 엘리트 교육을 받으며 자라나 뼈대있는 가문 자제들만 다닌다는 이튼 칼리지를 졸업했다. 이튼 고등학교 재학 시절 케인즈는 각종 상을 휩쓸었는데, 연극에도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1902년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입학한 케인즈는 당대의 최고 엘리트과 사도들(Apostles)이라 불리는 학내 비밀 클럽에 가입한다. 그 사도들에는 화이트헤드, 리튼 스트레이치, 이엠 포스터, 레너드 울프, 무어 등이 있었다고 한다. 케인스는 경제학을 전공하지는 않았고[8] 다만 대학원 시절에 경제학 수업을 청강한 적은 있다. 그의 전공은 수학이었으며 오히려 철학을 공부하고 싶어했다고 한다. 그래서 학위를 딴 이후에 케임브리지에 남아서는 주로 철학 강좌를 청강하러 다녔다고 한다. 또 수학과 생활이 싫었는지 친구에게 "나는 지금 내 지성을 탈진시키고, 내 감성을 파괴시키며, 내 천성을 썩히는 중이다."라고 징징대기까지 했다. 실제 그는 수학 실력이 나쁘진 않았지만, 수학을 싫어했다고 한다. 이런 울분 때문인지(...) 훗날 경제학이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수식에 빠져 산다고 맹공을 펼치기도 했다. 물론 상대적인거라 어릴땐 수학 천재 소리도 듣던 사람이었다. [9][10] [11]

이튼 칼리지 때의 수학 천재 명성과 다르게 대학 학점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케인스는 수학과 졸업시험에서 전체 12등을 차지했으나 어려서부터 수학 천재 소리를 듣고 자랐던 그가 수학과 졸업시험에서 12등을 차지한건 자존심 상한 일이었는지 아니면 수학이 싫었는지는[12] 몰라도 2부 시험 응시를 하지 않고 공무원 시험을 보기로 결심한다. 1905년 공무원 시험을 준비해 이듬해 합격한다. 이 때 응시자 전체 차석이라는 어마어마한 성적을 거뒀으나, 경제학 영역과 수학 영역 이 두 과목에서만 총점을 엄청 까먹는 바람에 케인즈는 수석에서 차석으로 밀려나 버렸다. 이 때 케인즈는 자신의 경제학 파트 점수를 보고 "시험관이 나보다 경제학을 모르는거 같다."라는 의미심장한지 아니면 짜증이 섞인 토로인지 모를 말을 남겼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할 때 즈음, 스승 알프레드 마셜이 쓴 '경제원론 1'을 접하게 되는데 이 책이 케인즈의 인생을 바꾼 계기가 된다. 알프레드 마셜은 경제학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경제학적 직관'과 '실용주의' 를 강조해, 수식 같은거 없이 경제학적 직관에 기반을 두면서 경제학 이론을 설명했는데 이게 딱 케인즈가 좋아할 만한 스타일이었던 것. 케인즈는 이 책을 통해 경제학에 흥미를 느껴 경제학 공부를 시작했고 마셜은 이런 케인즈의 열의와 노력이 기특해 케인즈의 논문에 응원의 메시지를 적기도 했다. 그리고 이 응원의 메시지를 본 케인즈는 친구에게 "어쩌면 난 경제학에 재능이 있을지도 몰라"라는 말을 남겼는데, 이 말은 경제학 역사상 가장 겸손한 말이자 위대한 경제학자가 막 경제학에 입문할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는 말로 자주 인용되는 문구가 되었다. 마셜은 케인즈를 아껴 그에게 같이 케임브리지에 남아 경제학 연구를 하자고 종용했지만, 케인즈는 당시엔 이 제안을 거절하고, 약 2년간 인도 사무부(India Office)에서 근무한다. 하지만 관청 생활에 염증을 느꼈는지 이후 마셜의 제안을 받아들여, 1909년부터 모교였던 케임브리지에서 경제학 강사로 일하게 된다. 케인즈는 이후 1911년 당시 영국의 최대 경제단체였던 왕립경제학회의 공식기관지인 '이코노믹 저널'의 편집장으로 임명되었다. 고작 28살 때의 일이었다.

1914년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영국 재무성의 근무위촉을 받아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며 이후 정부대표로 발탁되어 베르사유 조약에도 개입했다. 이 때 베르사유 조약, 특히 영국과 프랑스의 강력한 대(對) 독일 압박에 불만을 표시한 걸로 전해진다. 그의 저서 중 하나인 <평화의 경제적 귀결(Economic Consequences of Peace)>에서 그는 베르사유 조약이 전후 참전국들의 경제적 회생과 유럽의 경제적 안정성 모두 놓친 조약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베르사유 조약의 과도한 전쟁 배상금이 가져올 문제를 언급했다.[13] 이후 과도한 전쟁배상금이 2차대전 발발의 씨앗이 되면서 케인즈의 예언은 맞아 떨어지게 되었다.

1920~30년대 케인스는 잇따라 확률론(1921), 화폐개혁론(1923) 등을 발간하며 자신의 이론을 정립시킨다. 프랭크 램지의 지도교수로 활약하기도 했으며, 케임브리지에 램지와 같이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을 데려오려는 노력을 하기도 하였고[14], 이탈리아의 경제학자 피에로 스라파와 같이 수학과 철학을 논하기도 했다고 한다. 1936년 세계 대공황의 영향이 아직 가시지 않았던 시점에 그는 자신의 대표 저작이자 이후 세상을 바꾼 책인 <고용, 화폐, 이자에 관한 일반 이론(General Theory of Employment, Interest and Money)>을 펴낸다.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때에도 영국 재무성에서 일했으며 1944년 브레튼우즈 체제를 만드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는 본래 가상의 국제 공용통화인 방코르(Bancor)를 사용하여 그것을 기축 통화로 삼는 새로운 국제통화체계를 만들고자 하였으나, 그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달러를 기축통화로 하는 금본위제브레튼우즈 체제가 만들어진 것. 다만 이후 국제통화기금에서 케인즈의 Bancor안을 일부 차용하여 가치가 거의 변동하지 않는 개념화폐인 특별인출권(SDR)을 만들긴 한다.

1942년 남작 작위에 서임되었고, 1946년 4월 21일 사망했다. 자녀가 없어서 작위는 사라졌다.

3. 평가

케인스는 기존 자본주의에 중대한 수정을 가한 경제학자이다. 그는 시장이 가격 등을 통해 자동으로 수급이 조정되지 않는 경우가 있으며, 세계 대공황이 그 경우에 들어맞음을 주장했다. 그는 물가나 임금 등 명목 변수의 경직성, 시장에 부정적인 전망이 팽배해 금융이 급속도로 냉각되는 현상(금융가속도 효과로 나중에 발전됨) 등을 대공황의 요인으로 꼽았다. 이에 대한 처방으로 그는 정부 재정의 확대를 주장했다. 이는 그 이전까지 세계 경제학의 기본 원리였던 세이의 법칙을 정면으로 반박한 행동이었고 또 이것이 맞아 떨어졌다. 세이의 법칙 자체는 문제가 많이 제기된 이론이었다. 오히려 당대 경제학자들은 수급 차이가 단기적으로는 분명 존재하지만, 장기적으로 저절로 사라진다고 보았다. 호경기와 불경기, 노동 부족과 실업이 일시적으로 나올 수도 있지만 장기적으로 일정한 균형에서 머무르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케인스는 이런 관점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하였다. 이에 대한 케인스의 반박이
그 장기적 계획은 현재 사안에 대해 잘못 알려주고 있다. 장기적으로 우리는 모두 죽는다.
The long run is a misleading guide to current affairs--in the long run we are all dead.
이다. 당시 경제학계에서는 세이의 법칙에 의하든, 단기 경기 변동을 인정하든 상관없이 이론적 결론은 모두 외부에서 손을 대지 말고 경제가 안정될 때까지 시장의 자율적 회복력을 믿고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는 처방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경제학의 장기 개념은 사람의 일생보다 훨씬 길 수도 있는 것이고, 당장 공황이 닥친 상태에서 가만히 있으라는 것은 죽을 사람 다 죽고 나서 새로 경제 구조를 이끌어 내도 장기적 균형이 되는 것은 큰 차이가 없다는 소리와 같다. 조악하게 비유하면, 인구는 사회의 생산량에 비례하기 때문에 전염병이 생기거나 전쟁이 나서 사람이 죽어도, 혹은 우연히 대풍작이 들어서 인구가 상승하여도 그게 끝나고 시간이 지나면 전쟁과 전염병, 풍작 이전의 수준으로 결국은 돌아가게 된다. 이게 장기적 균형이라면 전염병이 도는 와중에 사람을 구하겠다고 하는 것은 사회 생산량에 따른 인구 균형에 큰 효과도 주지 못하면서 오히려 그 시스템을 망치기 때문에 치료하지 말고 죽게 내버려 두라는 것과 같다고 본 것이다.

케인스의 처방을 간단히 말하면 공급이 수요보다 많아지면 정부가 개입해 수요를 창출시켜 해결하라는 것. "빈 병을 땅에다 파묻고 정부가 사람을 고용해 빈 병을 파내라"는 이를 설명하는 유명한 글귀다. 물론 더 효율적인 방법을 찾으라는 식으로 부가 설명하긴 했다만.

그전까지 경제학계에서는 '보이지 않는 손'이 경제 문제를 장기적으로는 해결해 준다고 믿었기에 케인스의 이론은 많은 반향을 일으켰다. 지금이야 불황이라고 하면 정부가 나서서 무언가 해야한다는 생각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지만, 1920년대의 경제학자들에게 이런 생각은 금기와도 같았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같은 학자들은, 시장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터이니 힘든 시간이지만 버텨 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허나 실업자가 길거리에 넘쳐나고 실업자가 아닌 사람들이라도 월급삭감이나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던 상황이었고 공산주의, 파시즘 등이 득세하며 자본주의 체제 자체에 대한 회의감과 환멸감이 강해졌다. '내버려 두고 버티게 해라'는 주장은 경제학자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그저 배부른 소리로 느껴졌고, 경제학자들의 말을 따른 정치인들도 손가락질을 당하여 줄줄히 실각해나갔기에 정치인들도 이들의 말에 대해서 회의적으로 변할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시장이 모든 것을 해결할 것이라고 믿던 경제학자들의 조언을 받아 긴축정책을 시행한 허버트 후버[15]하인리히 브뤼닝은 지지율이 개박살 냈다. 이런 시기에 등장한 케인즈의 이론은 인간이 그저 시장에 지배받는 동물이 아니라, 스스로 나아가 시장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고 미래를 개척할 수 있는 존재임을 입증하는 일종의 빛과도 같았다.

여담으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영원하지 않고, 노예제나 봉건제와 같이 역사 속에서 잠시 지나가는 과정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케인스의 이론이 없었으면 마르크스의 말대로 자본주의는 멸망까지는 아니더라도 지금처럼 강력한 체제로 거듭나지는 못했을 것이다. 고전적 이론에 의하면 시장 시스템을 유지할 경우 경기는 아무리 불경기를 맞이하더라도 가만히 내버려만 두면 결국 자체적인 회복력으로 원형으로 돌아올 수 있다. 그리고 이건 대부분의 사회 구조나 체제에도 적용되는데, 문제는 다시 회복되어서 살아나기도 전에 바닥을 찍거나 찍어가는 과정에서 그 과정을 참다 못한 사람들이 체제나 시장 자체를 엎어버릴 수도 있다라는 것이다. 이걸 노동자들이 하면 그게 바로 공산주의 혁명이 된다. 이럼 장기적으로 회복할 자본주의 시장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다. 실제로 모든 체제나 시스템 등은 이렇게 무너진다.

게다가 미국의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이 시행한 뉴딜 정책이 케인스의 이론이 어느 정도 맞다는 것을 증명하자, 이후 케인즈학은 세계 각국 경제 정책의 기본 지침이 된다. 참고로 루스벨트가 케인스의 이론을 받아들여 뉴딜을 추진한 것으로 아는 사람들이 상당하지만, 정확히는 비슷한 시기에 따로 제시한 것으로, 루스벨트의 정책과 케인스의 이론이 알고보니 비슷했던 것이다. 루즈벨트는 케인스의 이론을 참고하긴 했지만 임기 초반만 해도 감명깊게 받아들이진 않았고, 더군다나 케인스의 유효수요 이론은 단기적 경제처방인 반면 루스벨트의 뉴딜은 경제 처방이라기보다는 정치적 정책에 가까웠다. 뉴딜의 광대한 범위 안에 케인스 이론의 일부가 들어간 셈. 다만 이후 케인즈가 자문을 해주기도 했다고 한다.

그의 저서에 일관성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있는데[16], 이 부분에서 비주류 경제학자들은 그가 철학적 사상을 토대로 확고한 경제적 신념이 있었던 학자라기보다는 기존 체제에서 좋은 삶을 누리는 엘리트로서 체제 유지를 위해 그때그때 필요한 논리를 전개한 지배계층의 수호자 겸 대변인이였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때문인지 세간에 뉴딜 정책의 정책적 기초가 되었다고 흔히 알려진 <고용·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만 해도 사실은 케인스 자신이 보기에 체제 유지를 위해 적절한 행위를 하는 걸로 보이는 루스벨트 뉴딜의 '이론적 정당화'를 위해 저술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견해도 있다. 당장 이 책은 뉴딜이 시행된 이후인 1936년에 발간되었다(루스벨트는 뉴딜을 최소 후보 시절인 1932년부터 주장했다). 다만 일반이론이 1936년에 출간되었다고 해서 불과 4년 전에는 그 구상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식의 논법도 너무 확대해석이 들어간 가정이긴 하다. 그리고 이 책이 출간되고 난 이후 세계 경제학의 기조가 바뀐건 사실이다.

한편, 당시 주류 경제학계는 케인스의 주장을 극히 이단적인 생각으로 치부했다. 케인즈를 비판한 이들이 '통화론자(=통화주의,monetarism)'나 '새고전학파' 등의 원류이다. 새고전학파는 New Classical School로서 본문의 설명처럼 케인즈 경제학을 비판하면서 등장한 시카고 대학 중심의 거시경제학파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신고전주의 혹은 신고전학파는 'Neo'classical School로서 케인즈의 스승인 마셜이 창시하다시피 한 것이다.

케인즈의 후학들은 여러 분파로 갈렸다.
이들의 논쟁은 현재 진행형이기도 한데, 1970년대 이후 스태그플레이션이 터지면서 케인스의 이론이 다소 의심받는 경우도 생기자 이때 등장한 것이 통화주의 및 새고전주의였다. 이 때부터 정부는 개입을 하긴 하되 너무 간섭하진 않는 방향으로 가야한다는 일종의 정반합적인 절충적 흐름이 창출되었다. 왜냐하면 정부가 너무 비대해져도 능률과 효율이 떨어지고 부정부패 등이 만연해질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17]

다만 당시 스태그플레이션의 원인은 케인스 이론이 잘못됐다기보단 안그래도 심각한 미국의 무역 적자에 불안감을 가진 달러 보유국들이 달러를 다른 통화로 바꾸려 들면서 달러의 가치가 하락하고, 그에 맞춰서 석유값까지 폭등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이러면 달러로 살 수 있는 재화가 줄어들며, 이는 원자재 가격에도 크게 영향을 미친다. 결국 공급은 감소하게 되며, 수요는 석유값 폭등 등을 이유로 동반하락한다. 거기에 돈을 들이부은 미국 정부의 삽질이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 즉, 정부의 개입이 나쁜게 아니라 오히려 정부가 케인즈의 이론을 따랐다면 다른 방식으로 개입을 했어야 한다는 것이다.[18] 또한 케인즈는 정부지출이 생산성 있는 길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석유파동 당시 경제정책들이 비생산성·비효과성·비효율성 같은 문제가 있음에도 방임한 정부들의 책임이 크다.

한편, 새고전학파는 합리적 기대 이론의 전기 새고전학파와 실물 경기 변동 이론의 후기 새고전학파로 나눌 수 있다. 전기 새고전학파의 출현을 논하려면 약간의 부연설명이 필요한데, 1950년대 들어 시카고학파 중 통화주의 학파가 출현해서 재정정책 대신 통화정책의 '가능성'을 제시했고[19], 케인즈학파가 이에 수긍하면서 대신 재량적 통화정책을 제시했다. 이러자 70~80년대 들어 합리적 기대(合理的 期待)를 배경으로 한 루카스의 이론이 시카고 대학에서 발흥하면서 재량적 통화정책은 결국 물가만 올릴 뿐이며, 애초에 민간은 과거 변수에 따라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것[20]이 아니라 온갖 잡다한 변수를 통해 움직이기 때문에 과거 변수를 추론해서 정책을 설계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잘못된 것이라는 루카스 비판이 나왔다. 이 결과 케인즈 이론은 당분간 무덤에 들어가야 했다.

그렇게 1930년대 거시경제학의 탄생 이래 케인스 경제학은 70~80년대 일시적 부침을 겪기도 했지만, 90년대 이후 신학파가 들어서고 2천년대 세계금융위기 등을 겪으며 평가받아 지금도 여전한 주류 경제학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물론 상기했듯 서로 논쟁하며 정반합이 꾸준히 이뤄져서, 이젠 내용은 비슷한데 명칭만 다른 정치적 레토릭 싸움이 된 측면도 어느 정도는 있어 보인다. 실제 통화주의와 그 후학인 전기 새고전주의와 케인스 경제학은 큰 틀에서 단기적으로는 총공급곡선은 우상향하므로 정부 개입이 일정 부분 효과가 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소용없다는 견해를 공유한다. 다만, 단장기 기간이나 효과를 보이는 정책 등의 기술적, 세부적 관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3.1. 마르크스주의

알튀세르의 제자이자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철학자로 잘 알려진 발리바르는 본인 저서 <역사유물론 연구>에서 경제사의 개념화가 가지는 난점을 서술하며 케인즈주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한 바가 있다. 고전파적 경제자유주의가 외부적인 이데올로기적 질서의 개입으로부터 근본적으로 독립적이면서도 고유한 자연적 법칙들을 통해 기능하는 경제체계를 표상했다면, 케인즈주의의 경우 이를 국가의 개입을 전제하는 다른 표상으로 대체하기는 했으나 근본적으로는 고전적 자유주의적 표상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고전적 자유주의적 표상이 수요-공급 균형으로 대표되는 자생적 운동을 통한 하나의 체계를 규정한다면, 케인즈주의적 표상은 적절한 경제정책을 통해 균형을 이루어내야만 하는 체계 또한 기술한다는 차이점이 있지만 그 두가지 결과 모두 체계의 구조 내에 자연적으로 기입되고 이미 규정된 것으로, 교체와 주기 등만을 보여주는 경제적 사실들에 대한 일화적(anecdotique) 역사로 일축된다.

이러한 표상은 현실 역사를 쟁점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근사적 사실을 통해 예증되는 이론적 도식[21]으로서 '순수한' 경제적 법칙이라는 관념을 보존하려고 하는데, 사적 유물론에 따르면 이데올로기와 독립되고 순수한 경제 법칙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일화적 일축은 전혀 과학적이지 않다.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케인즈주의는 마르크스가 행했던 가치 발생에 대한 고전파의 엉터리 설명과 상품물신화에 대한 비판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고 볼 수 있다.

4. 성향

케인스는 오늘날 좌우 리버럴 진영이나 사민주의까지 포함하는 다수 진보 세력들의 경제 관념에 큰 영향을 끼쳤고, 정치적으로도 당시 영국 보수당에 대립하던 영국 자유당 당적을 가진 자유주의적인 성향이 있던 사람이었으며, 성적으로는 양성애자기도 했다. 물론 그는 새자유주의자였지 사회주의자는 아니었고, 특히 마르크스주의에 대해선 매우 비판적이었다.[22]
자본론에 대한 저의 생각은 쿠란에 대한 생각과 같습니다. 그것이 역사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또한 그 책을 시대의 반석처럼 여기며 영감을 얻고 있는 사람들 중에 멍청이가 아닌 사람도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으로는 이런 책이 왜 이같은 반향을 가져왔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 음침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학문적 논쟁거리들은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서 대단히 부적절해 보입니다. 쿠란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이런 책들이 불같은 기세로 세계의 절반을 휩쓸 수 있었을까요? 저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제 이해에 문제가 있는 거겠지요. 선생님은 자본론과 쿠란을 둘 다 믿으십니까? 아니면 자본론만 믿으십니까? 하지만 자본론의 사회학적 가치가 어떻든간에, 경제학적 가치가 0이라는 것은 확신합니다.[23] [24]

그는 1930년대 파시즘이 대두하자 마치 이에 대한 대항마인양 '가장 총명하고 뛰어난 사람들'이 모였다는 대학가에서 마르크스주의가 전쟁·파시즘·실업의 치유책으로 환영받는 현실을 개탄했다. 당연히 러시아 혁명도 좋게 보지 않았는데, 그는 혁명을 반대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첫째, 기존의 질서는 개혁이 불가능할 정도로 불량한 것이 아니며, 둘째, 혁명이 가져다 줄 훗날의 체제가 현 체제보다 낫다는 확신이 없고, 셋째, 설사 새로운 체제가 전복된 그것에 비해 낫다는 것이 증명됐다 할지라도, 과연 그것이 혁명 과정에서 치르게 될 희생을 보상할 만한 것인지 누구도 확답을 줄 수 없다.

그는 자유방임주의자들이나 사회주의자들 모두 자본주의와 자유시장 체제를 동일시하고 자본주의의 변화 가능성을 외면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소련 경제학자들 앞에선 집단주의적 기조를 따라 개조된 자유주의만이 무정부주의적 자본주의와 마르크스주의적 공산주의 모두에 대한 진정한 대안이라는 내용의 연설문 "나는 자유주의자인가?"를 낭독하기도 했다.[25]

케인스는 당시 보수 진영 지도자들은 자본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참신한 수단과 볼셰비즘(레닌주의)을 구별할 능력조차 없다고 혹평했고, 사민주의 세력은 정의감은 인정하지만 계급투쟁이 일어날 경우 자신의 계급을 대변하지 못하기에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고 했다.[26] 그래서 자유당이 제대로만 한다면 인류의 진보를 위한 가장 최선의 선택이 될 것이라고 하며 매력을 느낀 것.

실제 케인스는 엘리트 계층 출신이었고, 인명 부분을 보면 알겠지만 남작위까지 가진 귀족이었다. 때문인지 아래 문장에서도 보듯 계급관 등 특정 부분은 오히려 당대 기준으로도 상당히 보수적인 엘리트주의자였다. 그는 만약 민주주의에서 엘리트가 배척당한다면 대중들이 조작이나 감언이설에 속아 넘어갈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How can I accept a doctrine which sets up as its bible, above and beyond criticism, an obsolete text-book which I know to be not only scientifically erroneous but without interest or application for the modern world? How can I adopt a creed which, preferring the mud to the fish, exalts the boorish proletariat above bourgeois and the intelligentsia who, whatever their faults, are the quality in life and surely carry the seeds of all human advancement? Even if we need a religion, how can we find it in the turbid rubbish of the red bookshop? It is hard for an educated, decent, intelligent son of Western Europe to find his ideals here, unless he has first suffered some strange and horrid process of conversion which has changed all his values.

어떻게, 과학적으로 틀렸을 뿐만 아니라 흥미도 현대 세계에의 실용적 가치도 없는 한물간 책 따위를, 그 한심한 교리를 어떤 비평을 초월하여 성경처럼 떠받들 수 있겠는가? 어떻게 촌티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부르주아 계급과 지식인 계급(여러 오점을 제쳐 두더라도 결국 삶의 질을 높여주었으며, 인류 발전의 밑바탕이 될 계급들)보다 높게 보라는, 물고기보다 흙탕물을 선호하라는 그런 한심한 교리를 받아들이란 말인가? 설령 우리에게 어떤 신념이 필요하다 하더라도, 그걸 어떻게 빨간 서점의 혼탁한 쓰레기 속에서 찾을 것인가? 서유럽의 교육받고 품위 있으며 지적인 어떤 젊은이가 이런 곳에서 이상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 젊은이의 가치관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을 어떤 지독한 종교적 개종에 시달리지 않는 한 말이다.
- Keynes, John Maynard (1931). Essays in Persuasion

케인스는 진보의 씨앗을 가지고 있는 부르주아지식인 계급보다 교양 없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찬양하는 신조에 거부감을 표했다. 그는 자유와 인권이 보장받는 사회에서 유산계급이 문화를 선도해가는 것이 맞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그는 무산계급도 환경의 변화를 통해 얼마든지 문화를 이끄는 주체가 될 수 있다고 말하며, 태생적 우월성을 주장하던 일부 보수적 생물학자들의 논쟁에 반기를 표했다. 공산주의도 비판은 했지만, 개인과 공동체의 소유욕에 대한 인식 변화에 끼친 영향은 놀라웠다고 평하기도 했다.

케인즈가 좌파 성향의 경제학자라는 인식이 있지만 그는 자본주의에 호의적이었으며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27] 한편으로 이자생활자의 안락사 운운하는 거친 발언(비유적인 말이나 다소 의도적으로 거친 표현을 사용함)을 하기도 하는 등 한국에서 '일반적인 보수적 이념'쯤으로 포장받는 아나코 자본주의와는 완전히 거리를 두기도 했다. 또한 케인스는 일생에 걸쳐 다양한 관심사를 가지고 여러 분야에서 활약했고 [28] 그만큼 한 가지 사안에 대해서도 여러 복합적 평가를 내렸는데, 이 모든 것을 종합할 때 케인스의 단편적인 발언을 두고 현대 정치/경제 기준으로 좌파다 우파다 논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적어도 극우나 극좌가 아닌 것은 확실하지만)

또한 그는 종교와 마르크스주의가 '과학적으로 엉터리인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것이 불러오는 도덕적 가치나 열정을 보며 종종 긍정적 가능성을 발견했다.[29] 그에게 소련은 기독교를 대신한, 신 없는 믿음과 열정이 자리잡은 곳이었다.

한 가지 웃픈 사실은, 케인스는 명백한 반공주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일평생 공산주의자로 매도당했다는 것이다. 케인스가 1925년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러시아 출신의 무용가인 리디아 로포코바(Lydia Lopokova)와 결혼하고 리디아의 친척 방문을 위해 러시아로 출발하자 '역시 케인스는 공산주의자다.'라는 비난성 발언까지 들었을 정도.

5. 어록

#1, #2를 참고할 것.
이 장기적 계획은 현재 사안에 대해 잘못된 안내를 하고 있다. 장기적으로 우리는 모두 죽는다.[30][31]
But this long run is a misleading guide to current affairs. In the long run, we are all dead.
- 존 메이너드 케인스, <화폐개혁론> 1923년 -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아이디어를 잊는 것이다.
자유방임 자본주의는 1914년 8월에 끝났다.
자본주의는 가장 사악한 사람들이 공공의 선을 추구하기 위해 가장 사악한 행동을 하리라는 놀라운 형태의 믿음이다.
Capitalism is the astounding belief that the most wickedest of men will do the most wickedest of things for the greatest good of everyone.
그런데, 이와 같은 사태는 어느 정도의 개인주의(個人主義)와 완전히 양립할 수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또 이자 생활자들의 안락사(安樂死)를, 또 따라서 자본의 희소가치를 최대한 이용하려는 자본가의 누적적인 압력이 안락사 당하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경제학자들의 사상은 옳든 틀리든 일반인들의 상상과는 달리 훨씬 더 막강하다. 세상은 이들에 의해 지배된다. 그리고 어떤 지적 영향력으로부터도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실무가들조차도 대개는 죽은 경제학자들의 노예에 불과하다.
정부가 낡은 병에 돈을 가득 채워 넣은 후 그것을 어느 폐광에다 묻어두고는, 기업들에게 마음대로 그 돈을 파 가도록 내버려 둔다고 가정해 보자. 그때부터는 모두 그 돈을 파내기에 혈안이 될 터이므로 실업이 줄어들고, 실질소득과 부도 증가할 것이다. 물론 이 방법보다는 그 돈으로 주택을 짓거나 하는 편이 더 현명하다. 그렇지만 최소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가격이 신축적이라 주장하는 고전파 이론은 경제가 이렇게 움직이고 있다고 설명하는게 아니라 이렇게 움직여야 한다는 당위를 설명하고 있는지 모른다. 이렇게 실제와 당위를 혼동하기 시작하면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당신이 은행에서 100파운드를 빌린다면 그건 당신의 문제다. 하지만 당신이 100만 파운드를 빌렸다면, 그건 이제 은행의 문제다.[32]
If you owe your bank a hundred pounds, you have a problem. But if you owe a million, it has.
정부 기능의 확대는 자유방임에 대한 침해가 아니다. 나는 그것이 자본주의의 붕괴를 막는 유일한 수단이라는 점에서 지지한다.
- 존 메이너드 케인즈,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 1936년 -
남는 것은 전쟁뿐.
-베르사유 조약에 명시된 전쟁배상금 조항에 대한 케인즈 평가,[33]

6. 여담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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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어 발음이 [keɪnz\]이기 때문에 "케인즈"라는 표기도 주로 사용되지만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용례의 표기 원칙 제6장: 표기의 원칙에 "어말의 -s[z\]는 ‘스'로 적는다."라는 조항이 있기 때문에 "케인스"가 규정 용례이다.[2] Order of the Bath[3] Fellow of the British Academy[4] 1942년 남작 작위 서임, 1st Baron Keynes of Tilton in the County of Sussex.[5] 리디아 로포코바 케인스 남작부인(Lydia Lopokova, Baroness Keynes, 1892년 10월 21일 ~ 1981년 6월 8일,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본명은 리디야 바실리예브나 로푸호바(Ли́дия Васи́льевна Лопухо́ва)이다.[6] Milo Keynes, "Essays on John Maynard Keynes" (Cambridge University Press · 1975), 11쪽, #[7] 수정자본주의란 말이 있는데 이는 영미권 경제학에서 학술적으로 쓰는 용어는 아니고, 케인스주의를 일본에서 한자식으로 번역하면서 생긴 용어로 보인다.[8] 애초에 케인즈가 대입했을 당시엔 독립된 경제학과가 없었다. 최초의 경제학과는 공교롭게도 케인즈가 입학하고 1년 뒤 그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최초로 생겨났다.[9] 그러나 그의 주변엔 논리학에 관한 인상적인 업적을 남긴 버트런드 러셀은 물론이고 프랭크 램지같은 쟁쟁한 수학 천재들이 있었기 때문에 케인스가 상대적으로 수학에 자신감이 없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심지어 스리니바사 라마누잔이나 앨런 튜링도 그와 동시대에 케임브리지에 있었다.[10] 이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 '수학'을 숫자 계산놀음으로 바라보는 경제학자 및 여러 비전공자들의 맥락에서야 "케인스가 수학을 싫어했다"고 주장할 수 있겠으나, 케인스와 교류하던 전공자들의 눈에서는 케인스가 '수식화'를 싫어했을지언정 '수학'을 싫어했다고 볼 이유는 없었다는 것이다. 수학기초론수학철학이라는 분야에서 자연현상과는 전혀 상관없는 철저히 인본주의적인 논리적 사고만으로 러셀의 역설, 불완전성 정리, 정지 문제 같은 대업이 이뤄진 시기가 그 시대였던 점에서 알 수 있다. 수학은 그 어떤 사회과학보다도 문사철스러운 학문이며, 동시대를 살아간 러셀, 화이트헤드, 비트겐슈타인, 멩거, 프레게, 힐베르트, 괴델, 튜링 같은 거성들도 다들 철학자들이었다. 이들 역시 현실 세계의 철학과 정치 등을 놓고 난상토론을 벌이다 고초를 겪기도 했다. 철학으로서의 경제학을 정립한 공로를 인정한다면, 단지 경제학과 교수에게 유혹당하여 직관과 실용성을 중시하는 경제학 연구에 재미를 붙였을 뿐 케인스의 연구야말로 그 어느 동기들 못지 않게 수학자다운 연구였다 볼 수 있는 셈이다. 이는 후세에 케인스의 사상적 대척점으로까지 평가받는 오스트리아 학파카를 멩거, 루트비히 폰 미제스프리드리히 하이에크 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미제스는 실용성보다 논리를 중요시하며 형식과학에 가까운 인간행동학을 제창한 결과 아예 '논리학자'로 평가받기까지 했다. 멩거의 경우도 부자가 비슷한 사고방식을 견지한 철학자였지만 아버지는 그런 철학으로 경제학을 연구했고 아들은 수학을 연구했다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11] 꼭 그렇게 거창하게 합리화시키지 않더라도, 중등교육 시절에 수학 천재였던 사람이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하고 나서 수학을 싫어하게 되는 경우는 자주 존재한다. 중등 수학과 대학 이상의 고등 수학은 분위기가 확연히 다르며, 계산과 풀이를 중시하는 중등 수학에서 잘하다가 해의 존재 여부, 해의 유일성 여부 같은 추상적인 주제에 집중하는 고등 수학을 접하면서 흥미를 잃는 경우도 많다. 한국 대학 2학년에서 배우는 전공인 (고급)해석학이 분수령인데, 이 과목을 공부하면서 고등 수학이 자신의 체질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입시 수학 천재들이 꽤 많다. 케인즈도 그러한 경우였을 가능성이 높다.[12]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경제학자들 중에 하나로 손꼽히는 사람이 수학을 싫어했다는 이야기엔 여러 정황이 있다. 우선 이튼에서의 수학천재 명성과 달리 케임브리지 수학과에서 2류 학생으로 전락한 케인즈는 수학과 학부생활을 힘들어했고, 본인이 만든 저작물과 이론의 정립에 수학을 거의 활용하지 않았다. 지금 케인즈가 만들었다고 알려진 수학 관련 거시경제 이론이나 방정식들은 대부분 폴 새뮤얼슨 같은 후대 경제학자들이 케인스가 말로 풀어쓴 이론을 수학으로 옮겨놓은 것이다. 또 케임브리지 최고의 천재들 중 하나로 손꼽히는 사람이 다른거 다 압도적으로 잘하는데 이상하게 수학을 활용하는 것만 상대적으로 못하는 것도 특기할 만한 사항. 다만 케인즈는 이튼 칼리지에 다닐 당시 수학 경시대회에서 많은 상을 휩쓸어 수학 천재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고 케임브리지 수학과에 입학했으니 절대적인 기준에서 수학을 못하는건 아니었다. 하지만 수학 천재로 불리던 시절에도 케인즈는 토론회 같은 활동을 훨씬 더 좋아했고, 잘 안 알려졌을뿐 수학 외의 곳에서 훨씬 더 큰 두각을 보인 학생이었단 것. 이후에 경제학계에 발을 담갔을 때 경제학자들의 수학 놀음을 강하게 비판하고 자꾸 수학을 싫어하고 기피하는 모습과 발언을 보이면서, 사실상 케인즈가 수학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억지로 수학 공부를 해왔다는게 확실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13] "이건 20년짜리 휴전조약에 불과하다."는 내용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이건 프랑스 장군인 페르디낭 포슈의 발언이고 케인즈는 그냥 남은 건 전쟁 뿐이라며 짧게 던졌을 뿐이다. 포슈는 반대로 '독일에 대한 제약이 너무 부족하다'는 의미에서 말한 것. 이는 그가 프랑스군이라서 감정적으로 반응한게 아니라 실제 베르사유 조약의 약점을 지적한 것이다. 즉, 결론을 내리면 케인스와 포슈 두 발언이 모두 옳을 정도로 베르사유 조약의 내용이 불안정했다는 것이다.[14] 케인스는 비트겐슈타인을 서슴없이 신이라고 묘사할 정도로 그의 천재성에 깊은 존경심을 드러냈으나,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성격대로 케인스에게도 매우 짜증을 부렸던 모양이다. 케인스는 이를 매우 피곤해했으며 그 때문인지 비트겐슈타인과의 친분은 그의 말년으로 갈수록 점점 멀어진다.[15] 처음에는 재무장관인 앤드루 맬런이나 경제학자들의 말을 따라서 말 그대로 아무런 조치 없이 그대로 냅두었지만 경제상황이 지속적으로 악화되어나가자 뒤늦게 현실을 깨닫고 앤드루 맬런을 해임하고 재정을 대대적으로 투입했다. 그러나 이미 경제상황을 개선시키기에는 너무 늦었던 상황이었던지라 1932년 대선에서 참패했다.[16] 다만 케인스는 전혀 오류가 없는 맹목적 경제 모델의 설정보다는 당면한 문제들에 대한 학문의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경제적 사고의 본질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17] 연장선상에서 작은 정부론자들은 애당초 정부 권한이 적어야 부정부패나 독재로 흐를 가능성도 적다고 주장한다. 다만 반대로 말하면 정부의 권한이 작아질수록 재벌 등 다른 사회집단들의 부정부패나 갑질 횡포가 더 심해질 여지 역시 있다. 또 전염병 유행처럼 급박한 위기 상황에선 이런 주장이 더 힘을 잃기 쉽다. 적정선이 필요한 것.[18] 당시 선진국들은 석유를 헐값에 사들였고 이는 사우디아라비아같이 석유말고는 경제수단이 없는 국가들에게 치명적이었다. 석유파동이 비록 전세계 경제에 악영향을 주기는 했으나 당시 산유국들 입장에서는 석유의 제값을 받기 위한 몸부림이었다.[19] 다만, 이들이 제시한 것은 준칙 위주의 보수적인 정책 운용이었다. 또 유의할 것은 통화주의 학파는 신자유주의 견해와는 어긋난다. 기본적으로 신자유주의론자들은 중앙은행이 적극적인 통화정책을 쓰는 것을 반대한다.[20] 이를 적응적 기대(適應的 期待)라고 한다.[21] 예컨대 역사적 조건에 의해 나타난 '위기'를 '주기'로 해석한다든지[22] 물론 마르크스주의는 사회주의의 한 분파일 뿐이긴 하다. 당장 당시부터도 좌파 아나키스트 좌파 자유지상주의자 등은 마르크스주의나 이에 기반하여 나온 배타/폭력적 공산주의에 반대했다. 여기서 정치적으로 유의미하게 성장한 세력 중 하나가 사회민주주의 그룹. 실제 사민주의자들은 뉴딜 이후 케인즈주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23] 케인스에게 자본론을 읽어보라고 권한 버나드 쇼에게 보낸 답장 중, 1934년.[24] 깎아내리는 글에서 굳이 사회학적 가치를 언급한 것은 하술되어 있듯이 마르크스주의가 낳은 부수적 효과에 대해서 일부 긍정평가했기 때문이다.[25] 출처: '존 메이너드 케인스(로버트 스키멜스키 저)'.[26] 다만 그는 당시 노동당이 실행 가능한 통치 철학이 없다고 비판했지만, 한때는 자유당, 노동당의 연립정부를 염원하기도 했으며(지지층이 꽤 겹쳤다), 이런 연대를 위한 행동 강령을 마련하는 데 힘을 쏟기도 했다.[27] 하지만 실질적으로 철학도였던 (정식교육을 받지 않았으나, 당시 트리니티 칼리지에서는 러셀,램지를 비롯하여 그런 경우가 많았다) 케인스는 마르크스 개인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다.[28] 각 분야에서도 사교/학문/외교/대중적 글쓰기를 가리지 않았다[29] 이 점에서 그의 태도는 종교를 자연적인 문제 뿐만 아니라 도덕적인 관점에서도 혐오한 러셀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다. 비슷한 시기에 러셀은 자유가 없는 소련사회를 공격하기 위해 종교에 대한 그의 혐오를 끌어들였다.[30] 인간은 누구나 죽으니 주어진 시간 최선을 다하자 같은 철학적 내용이 아니라, 허구한 날 장기 관점에서의 경제밖에 논하지 못하는 고전학파를 비판하면서 한 말이다. 정확한 맥락은 "장기적으로 우리는 모두 죽는다. 그러나 지금 한창 폭풍우가 몰아치고 있는데 폭풍우가 지나가면 바다는 다시 평온해진다는 말밖에 못 하는 경제학자라면 무능하다는 평가를 받지 않겠는가?"[31] 물론 경제학적인 의미는 그렇지만 케인스 본인의 철학적 관점이 전혀 반영되지 않은 어록은 아니다. 그는 비트겐슈타인을 비롯해 현재에 영원의 의미를 부여하는 지식인들과 알고 지냈으며 현세를 중시하는 블룸즈버리 그룹의 일원이기도 했다. 이때문에 2013년 하버드 교수 니얼 퍼거슨은 케인스가 양성애자였으며 아이가 없었기 때문에 미래를 도외시했다는 발언을 했는데, 이 발언이 리버럴 진영에서 한동안 논란이 되기도 했다.[32] 석유 재벌 진 폴 게티도 같은 말을 했다.[33] 케인즈는 독일에 대한 연합국의 배상금 요구에 크게 비판하였다.[34] 군의관으로도 활약해서 1, 2차 세계대전에 다 참전했다. 최종 계급은 공군 소장.[35] 옛날이나 지금이나 주식투자에서 대박치는 경제학자는 드물다. 케인즈의 앞 세대 경제학자인 어빙 피셔를 예로 들면, 1920년대에 경제학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해서 주식 시장의 큰손이 되었지만 매도 타이밍을 잡지 못하고 주가가 계속 오를 것이라는 예측만 했다가 결국 본인의 재산은 물론 학문적 명성마저 날려먹고 조롱거리로 전락했다. 대표적으로 “주식시장은 앞으로 꺼지지 않는 영원한 고점에 도달했습니다.”라는 발언을 했는데, 대공황을 목전에 둔 시점이었다. 그의 발언이 있고 얼마 가지 않아 검은 목요일이 다가왔고, 피셔의 위 발언은 주식 시장의 역사에서 가장 조롱을 많이 받은 말이 되었다.[36] 한편 마르크스는 죽기 1년 전쯤에 엥겔스가 요양 여행가라고 보내준 돈으로, 자신의 경제적 감각이 어떤지 한 번 시험해보려고 미국 북부 철도회사와 철강회사 주식에 투자하여 2주 만에 4000파운드를 벌어들인 적이 있다. 이때가 1880년대였으니, 4000파운드를 지금 한국 돈으로 계산해보면 대략 4억 6800만원으로 상당한 거금을 벌어들인 셈이었다.[37] 다른 투표자들도 동시에 그러한 기준으로 투표를 한다면 이것은 아주 복잡해진다. 나는 다른 투표자들이 그 자신외의 또다른 투표자들이 미인이라 생각할 여인으로 예측되는 여인을 찍어야 한다. 그리하여 Everything depends on everything el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