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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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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청
忠淸北道廳 | Chungcheongbuk Province Government
파일:충청북도청.jpg
<colbgcolor=#6f448c><colcolor=#fff> 슬로건 충북을 새롭게, 도민을 신나게
주소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상당로 82 (성안동)
국가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광역시도 충청북도
직원 수 1,157명[1]
예산 7조 7,242억 원 (2023년)
도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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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초선)[2]
부지사 정선용 (행정)
김수민 (정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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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위치3. 역사
3.1. 조선 시대3.2. 충주에서 청주3.3. 동헌 시절3.4. 중앙공원 시절3.5. 오늘날
4. 이전 논의5. 조직
5.1. 휘하 시/군청5.2. 산하기관
5.2.1. 지방공기업5.2.2. 지방출연기관
6. 역대 도지사7. 이용 가능한 대중교통8. 관련 문서9. 둘러보기10.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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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충청북도도청.

2. 위치

현재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상당로 82 (성안동)에 있다. 본래 연못이었던 곳을 메꾼 것이라서 비좁은 도심지 내에서 (시청에 비해서는) 비교적 넓직한 부지를 차지하고 있다. 그래도 법령 기준에는 약간 미달해 공간을 물색중이다.# 북쪽에는 충청북도의회가 있다.

남쪽이 정문이지만 핵심 대로인 상당로가 서쪽으로 나있어서 그쪽 문으로 출입하는 게 더 편하다. 도로명주소도 서문을 기준으로 부여되어있다.

도청 정류장은 건너편 정류장이 서문 바로 건너편에 있고, 도청 쪽 정류장은 남쪽으로 길 건너서 좀 더 남쪽에 있다.

북부출장소제천시 남산로 10(동현동)에, 남부출장소옥천군 옥천읍 동부로 78(문정리)에 있다.

3. 역사

현재 대한민국에서 도청 역할로 쓰이고 있는 대한민국 도청 청사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광역시로 인한 도청 이전이 없었던 도는 충청북도, 강원도, 전라북도가 있는데[3] 이 중 전라북도청과 강원도청은 다음과 같은 청사 이전이 있었다.

여담으로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지방관청 중 제일 유명한 서울특별시청1926년, 옛 전라남도청1930년, 옛 충청남도청경상남도청1932년에 지어진 건물들인데, 지금은 모두 시청/도청의 기능을 넘겨준 상황이다. 충청북도청은 이들 네 곳보다 나중(1937년)에 지어졌지만, 아직 현역으로 사용 중인 오래된 건물로서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 제55호로 지정되어 있다.

당시 일본과 조선의 공공청사 또는 대학건물 등에서 보이던 건축 양식으로 지어졌으나 민족 자본으로 지어져 의미가 더해지는 건물이다.

3.1. 조선 시대

본래 감영청주, 감사는 충주에 나뉘어있었으나 1602년 공주로 옮겼다.

1896년 충청도충청남도충청북도로 쪼개지면서[6] 충청북도에도 충주에 관청이 새로 마련되었다(순종 칙령 36호). 그와 동시에 '감영'(監營)이란 명칭 대신 '도관찰부'(道觀察府)라는 말을 자주 쓰게 되었다.[7]

3.2. 충주에서 청주

충청북도 도관찰부를 1908년 6월 5일 충주에서 청주로 이전했다(순종 칙령 30호).[8] 1923년 오오쿠마 슌포(大熊春峰)[9]가 쓴 청주연혁지(淸州沿革誌)[10] 17장: 관찰부의 이전(觀察府の移轉) 28쪽에서는 "때는 메이지 41년 6월 5일, 그날은 청주 시민의 잊어서는 안 될 기념일로 (중략) 자자손손 전해 특별히 청주 데이로서 영원히 기억해야만 하지 않을까 하고 절실히 권고하고 싶다."[원문](굵음 처리는 원문의 방점)라고 하고 있다(...). 무슨 삼겹살 데이도 아니고[12][13] 확실히 오늘날 청주시 성장의 기반이 된 결정적인 시기이기는 한데, 아쉽게도(?) 6월 5일이라는 날짜는 오늘날 청주 시민에게 잘 알려져있지 않다.

반대로 충주에서 '도청[14]을 빼앗기고 도시가 쇠락했다'라는 이야기가 꽤 있다. 근데 사실 충주에 도청이 있었던 건 12년밖에 되지 않는다.# 아마 이 도청 이전이 한강영남대로를 축으로 한 전통적인 교통로가 쇠락하고 경부선 축이 새로 부상하게 된 상징적인 사건이기에 그렇게 이야기하는 듯하다.[15]

일각에서는 이 도청 이전이 수탈을 위해서라고 주장하지만 교통이 편리한 곳에 행정 중심지를 두는 것은 오늘날의 관점으로 보아도 타당한 일이므로 그렇게 보긴 어렵다. 뒤의 의견서에서 경성부와의 교통을 언급하고 있는데, 관치 시절이니만큼 수도와의 왕래 편의성이 더욱 중요했을 것이다.

3.3. 동헌 시절

도 관찰사가 시도 관할하던 전통이 이때까지 있었는지는 몰라도 청주목에서 쓰던 청녕각(淸寧閣)[16][17]을 이어서 도청으로 쓴 듯싶다. 디지털청주문화대전 - 청주를 에두르며 방어하던 청주읍성 이 건물을 쓰던 시절 건물을 증축했던 도면이 국가기록원에 남아있다.#

파일:DC_b16dVwAA5Lup.jpg
오늘날 청주시청 제2청사(구 청원군청) 뒤에 있는데 청원군청과 아슬아슬하게 붙어있는 것이 꽤 기묘하다. 콘크리트로 개조되었으며 청원군청 군청사의 일부로 사용하기도 했다. 개조 당시의 모습 아무리 봐도 문화재로 보존해두는 느낌은 아니었다. 콘크리트로 개조되어있던 것은 2007년 목조 양식으로 복원하였다.# 1982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09호로 지정되었다.

청녕각이라는 편액(扁額)[18]은 중앙공원의 병마절도사 영문으로 이동했다가 1988년 11월에 다시 옮겨왔다. 본래 동헌 건물이 청녕각인 걸 다들 잊어버리고 병마절도사 영문이 청녕각인 줄로 알고 있었다가 뒤늦게 동헌 건물이 청녕각이라는 사실이 다시 알려졌다. 충북inNEWS 이후 2007년 복원 과정에서 상량문(上樑文)[19]이 발견되면서(위 개조 당시의 모습 링크) 청녕각이라는 것이 다시금 확실해졌다.

동헌이 도청으로 쓰였다는 것은 '청녕각'이라는 이름으로 유추한 것이다. 위 기사에서도 보면, 앞서 이야기한 청주연혁지에서 청주로 관찰부를 옮기는 이야기를 하면서 "청주에 28칸 관아 건물이 있어서 옮겨도 청사가 부족하지는 않다"(37쪽)[20]라고 했는데 이는 마침 7*4 = 28칸인 청녕각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동헌 = 청녕각이라는 사실도 비교적 최근에 밝혀진 사실이어서 그런지 동헌 건물이 도청으로 쓰였다는 이야기는 웹에서 찾기가 어렵다. 만약 이것이 맞는다면 1928년에 이전했을 때에는 약 200m 정도 남쪽으로 옮긴 것이 된다. 한편 아래 도청 본관 링크에서는 1908년 이전 직후부터 도청 청사가 중앙공원에 소재해있었다고 되어있어 차이가 난다.

150년 전에 시청으로 쓰였던 건물이 약 20년간 도청으로 쓰였고 오늘날까지 남아있으니 지방 도시로서는 꽤 잘 보존된 셈이다. 다만, 도청 주변을 이루고 있던 청주읍성은 1911년 철거되어 크게 훼손되었다.

3.4. 중앙공원 시절

1928년 운주헌 앞에 단층 건물을 지어 도청 건물로 쓰기도 했다.디지털청주문화대전 - 청주 충청북도청 본관 운주헌(運籌軒)은 오늘날 중앙공원에 있었다(위 청주읍성 링크).[21] 이 일대의 건물들은 본래 충청도 병마절도사가 쓰던 건물이었는데, 위 37쪽의 인용 원문에서는 그 글이 쓰여지기 1년 전인 1907년 (8월 1일)에 정미 7조약으로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어 오늘날의 중앙공원에 있는 병마절도사 건물들도 비어있으니 청사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도 들어있다. 애당초 청주로 도청을 옮길 때부터 이 부지와 건물들을 염두에 두고 있던 것.

아마 청녕각이라는 편액이 병마절도사 영문으로 간 것은 이 시기인 듯하다. 1911년 청주읍성을 철거하면서 조선총독부의 의도적인 문화 말살의 일환이라는 설도 있다(위 충북inNEWS 기사).

1937년 현 위치로 이전한 이후에는 병마절도사 영문(營門)만 남고 철거되었기에 지금은 모습을 찾기 어렵다.

3.5. 오늘날


파일:대한민국 국장.svg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
54호 55호 56호
춘천 죽림동 주교좌성당 충청북도청 본관 대한통운 제천영업소

지금 쓰고 있는 건물은 1937년에 지어진 것이다. 본래 연못이었던 곳을 메워 지었다고 한다(위 도청 본관 링크). 본래 2층 건물이었으나 1959년 3층으로 증축했다.# 근래에는 서관에 한 층을 더 올리기도 했다.

동쪽에는 청주중앙초등학교(개교 당시엔 동정국민학교)[22]가 있었으나 2015년 이전하였고, 그 건물을 도청에서 인수해서 도의회로 사용 중이다. 하지만 구 중앙초등학교 건물을 철거하고 충청북도청 제2청사와 충청북도의회를 신축하기로 하여 2021년 10월부터 철거공사가 시작되었다. 지상 5층 건물로 신축하며 2024년 완공 예정이다.

4. 이전 논의

건물도 오래되다보니 청주시청 청사만큼은 아니지만 충청북도청 역시 이전 관련 논의가 있다. 2018년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자유한국당 충청북도지사 후보 박경국이 도청 이전을 공약으로 내세우며 도의회 공사를 잠시 멈추자고 주장했으나 낙선하였다. 구체적인 이전 위치를 밝힌 견해는 없었으나 서쪽으로 확장되는 청주시의 추세상 서쪽으로 이전할 가능성이 있다.[23] 그러나 청주시 동쪽이 밀리는 추세 속에서 그나마 행정 중심지라는 이점까지 잃으면 타격이 크기 때문에[24] 위치를 정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닐 듯하다.

그러나 다른 도시로 이전하는 일은 청주시광역시가 되지 않고서는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해방 이후 광역시 승격 외에는 도청을 다른 도시에 내준 전례가 없었고, 1995년 지방자치제도가 실시된 이후부터는 충북 인구의 반이 청주 시민이니 그런 결정이 내려지기 더욱 어려워졌다.[25] 만약 청주가 광역시가 된다면 진천군/음성군에 있는 충북혁신도시#[26], 또는 과거 도관찰부가 있던 충주시로 이전할 가능성이 있다.

다만 지속적으로 도내 불균형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어 기존 청주시 권역으로 이전을 강행 할 경우 도내 갈등이 증폭될 수 있다.[27][28]

800억 가량을 들여 신청사를 건설하기로 하면서 이전 논의는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5. 조직

5.1. 휘하 시/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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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의 기초자치단체 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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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시
제천시 청주시 도청 충주시
제천시청 청주시청 충주시청
자치군
괴산군 단양군 보은군 영동군
괴산군청 단양군청 보은군청 영동군청
옥천군 음성군 증평군 진천군
옥천군청 음성군청 증평군청 진천군청 }}}}}}}}}}}}}}}

5.2. 산하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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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출연기관 충북문화재단 | 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 | 충북연구원 | 충북신용보증재단 | 충북인재양성재단 | 충청북도기업진흥원 | 충북과학기술혁신원 | 충청북도 청주의료원 | 충청북도 충주의료원 | 충북학사 | 충북여성재단 | 충북테크노파크 | 오송바이오진흥재단
}}}}}}}}} ||

5.2.1. 지방공기업

5.2.2. 지방출연기관

6. 역대 도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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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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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윤하영
제2대
이광
제3대
이명구
제4대
정현모
제5대
정낙훈
제6대
김학응
제7대
정인택
제8대
황종률
제9·10대
조대연
제11대
고광도
제12대
최세인
제13대
신명순
제14대
김효영
제15대
정해식
제16대
태종학
제17대
오용운
제18대
정종택
제19대
김종호
제20대
임성재
제21대
강우혁
제22대
노건일
제23대
민태구
제24대
주병덕
제25대
이동호
제26대
이원종
제27대
김덕영
제28대
허태열
제29대
주병덕
제30·31대
이원종
제32대
정우택
제33-35대
이시종
제36대
김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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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이용 가능한 대중교통

7.1. 버스

도청(1501)
청주시 시내버스
상당공원 방면
지하상가 방면
청주대교 방면

8. 관련 문서

9.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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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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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초등학교 · 중학교 · 고등학교(과학중점고) · 각종학교 · 특수학교 · 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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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여담


[1] 국가직 공무원 제외.[2] 민선 8기.[3] 참고로 충청남도와 경상남도는 일제강점기에 이미 도청 이전이 한 번 있었다. (충청남도청: 공주→대전 / 경상남도청: 진주→부산)[4] 이때에 선화당 등 당시 남아 있던 전라 감영 건물들도 같이 소실되었다.[5] 참고로 이때에 아예 도청을 이리시로 이전하자는 안건이 도의회에 상정되어 표결까지 갔으나 단 한 표 차이로 부결되었다.[6] 본래 좌도/우도의 구분이 있었고(도(행정구역) 문서로.) 특히 충청도는 그 경계가 현 남북도와 거의 일치하지만 이는 지역상의 구분일 뿐 관리가 각각 파견되지는 않았다.[7] 이후 1910년 일제강점기가 되면서 도청으로 이름이 바뀌고 관찰사라는 이름도 '도장관'(道長官)으로 하였다가 1919년 오늘날의 '도지사'가 되었다.[8] 일성록에서도 해당 기사가 등장한다.[9] 위 기사에서는 이름 부분을 '쇼지'로 읽고 있으나 음독하여 しゅんぽう(슌포)가 맞는 듯하다. 심지어 어떤 기사에서는 '온보'라고 잘못 읽기도 했다.#[10] 국회도서관에 소장중이며 전자책으로도 제공 중이다.#[원문] 時維れ[ruby(明治四十一年六月五日, ruby=・・・・・・・・・・)]此日は清州市民の忘れべからざる記念日で、苟も居を此地に構ふる者は子々孫々に傳へ、特に[ruby(清州デー, ruby=・・・・)]として永遠に記憶せねばならぬ事を痛切に勸告したい。[12] 원문 자체에서 외래어 표현인 デー(데-) 라고 나와 있다.[13] 여담으로 해당 일자는 환경의 날로 지정되어있다. 대개 청주(시민)의 날 하면 청주와 청원이 통합한 7월 1일로 기억하고 있다.[14] 사실 '도청'은 1910년에 개칭된 것이기에 충주에 '도청'이 있었던 적은 없기는 하다. 여기서는 '도관찰부'를 의미한다. 아래 비슷한 예로 언급되는 충남도청의 이전은 1931년이기에 충주와 달리 공주에는 '도청'이 있던 적이 있다.[15] 충남도청이 대전으로 이전한 것도 이와 결부되어 자주 언급되나, 충남도청 이전은 1931년으로 시기상으로는 약 20년 뒤의 일이다. 그리고 공주에는 조선 후기 내내 감영이 위치해있었으므로 중심지 이동에 대한 충격이 훨씬 더 컸을 수 있다.[16] 본래 1656년(효종 7) 5월 24일 목사 심황이 초창했으며, 이후 1732년(영조 8) 목사 이병정이 중수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청녕각). 영조(재위 1724∼1776) 때는 근민헌(近民軒)이라 했으며 고종 5년(1868)에는 이덕수(李德洙)가 다시 지으면서 청녕각이라 하였다.문화재청 - 청녕각[17] 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청주목사 이덕수가 1825년 개축했다고 되어있으나 1868년에 같은 이름의 사람이 또다시 등장한다. 40년간 같은 사람이 목사일 리는 없으니 동명이인이거나 어느 한 자료가 틀린 듯하다.[18] 건물의 이름을 나타내는 액자[19] 마룻대(용마루 밑에 서까래가 걸리게 된 도리, '상량')에 집을 새로 짓거나 고친 내력, 까닭과 공역(工役)한 날짜, 시간 등을 적은 글. 일반 가옥에서는 마루에서 올려다 보이지만 공공건물에서는 가려져 보이지 않게 한다.[20] 이전은 1908년에 이루어졌으니 1923년 간행된 청주연혁지의 저자가 이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 1908년 이전 당시 조선통감부 서기관이었던 카미야 타쿠오(神谷卓男)가 조선통감부 내무차관(内務次官)에게 보낸 글을 인용한 것이다.[21] 상당산성 내의 관아 역시 이름이 '운주헌'(運籌軒)이었다고 하지만# 도청을 산성 안으로 이전할 리 없으니 같은 이름의 다른 건물인 듯하다. 도심지의 운주헌이 병마절도사 건물이었으니 군사 관련 시설로서 산하 청사 비슷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순신의 서재 이름도 '운주당'(運籌堂)인 데에서도 알 수 있듯이 확실히 군사적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인 듯하다. 운주(運籌)는 "지혜롭게 계책을 짬"이라는 뜻이라고 한다.#[22] 위키백과와 학교 홈페이지에서는 1946년에 개교했다고 했으나 1941년 총독부 직원이 파견된 문서가 있는 걸로 보아 일제강점기에 개교한 듯하다. 일제강점기 일본인학교였던 곳은 해방 이전의 역사를 단절하고 해방 이후에 새로 개교한 것으로 처리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 경우인 것으로 보인다.[23] 공식적으로 발표된 것인지는 불명이나, 청주 지웰시티 개발 당시 청주시청이 들어올 수도 있다면서 홍보한 적이 있다.[24] 가까운 사례로 이웃한 대전이 있다.[25] 이 때문에 청주시가 광역시로 승격되는 것 역시 어렵다.[26] 근래에 도청 이전은 내포신도시, 경북도청이전신도시, 남악신도시 등 신도시에 배치시키는 경향이 있으므로 그 경향성과도 잘 맞는다.[27] 충주시의 경우 충주기업도시, 음성군과 진천군은 충북혁신도시가 들어왔지만 제천시단양군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북부권 홀대론이 심화될 수 있다.[28] 특히 제천시와 단양군은 북부에 위치한 강원특별자치도원주시에는 혁신도시와 기업도시가 모두 들어와서 발전하고 있기 때문에 소외감이 더 클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