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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파일:attachment/radiation.png
국제 원자력 사고 4~7등급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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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시마 제1 원자력 발전소 사고
[ruby(福島第一原子力発電所, ruby=ふくしまだいいちげんしりょくはつでんしょ)][ruby(事故, ruby=じこ)]
Fukushima Daiichi nuclear disaster
파일:Fukushima.gif
감시 카메라에 포착된 3호기가 폭발하는 모습[1]
원자력 사고 요약도
<colbgcolor=black><colcolor=white> 사고 레벨 7등급 - 대형 사고
발생 일시 2011년 3월 12일 15시 36분경(UTC+9)[2]
사고 D[dday(2011-03-12)]일
사고 유형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
사고 지점
[[일본|]][[틀:국기|]][[틀:국기|]] 후쿠시마현 오쿠마마치[3] 옷토자와기타하라 22번지
후쿠시마 제1 원자력 발전소
사고 원인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으로 인한 쓰나미로 비상디젤발전소 침수
비상디젤발전기 가동 불가로 멜트다운 발생
누출 방사능 52경 베크렐[4] 이상
피폭자 불명
사망자 없음[5]
1. 개요2. 경과3. 오염
3.1. 방출량 및 측정 관련3.2. 피폭과 갑상선암 관련3.3. 수질-토양 오염과 식품 관련3.4. 노심용융 관련3.5. 루머
4. 반응 (일본 내)
4.1. 피난 지시 및 보상4.2. 원전 폐쇄 및 전력 부족4.3. 책임자 처리4.4. 관료주의의 병폐4.5. NPT 위반
5. 반응 (해외)6. 관련 작품
6.1. 다큐멘터리6.2. 기타
7. 관련 문서8.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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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2011년 3월 11일 일본 후쿠시마 제1 원자력 발전소에서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한 쓰나미로 인해 발생한 원자력 발전소 사고다.

2. 경과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경과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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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 사건 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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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ccccc,#323232> 2011년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요약
2012년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요약
2013년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요약
2014년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요약
2015년~ 2015년 이후 (2015년 요약) | (2016년 요약) | (2017년 요약) }}}}}}}}}

아래는 사건의 간략한 요약이다.
  1. 최초 대지진 발생. 원자로 자동 셧다운.
  2. 대지진 후 외부 전원 공급망인 송전탑의 기능 상실.
  3. 외부 전원이 상실 됐지만 발전소 내 비상용 디젤 발전기와 UPS로 자가 발전하여 냉각수(이소콘)를 공급할 수 있었으므로 문제는 없었음.
  4. 대지진 이후 대 쓰나미 발생.
  5. 대 쓰나미 발생 후 발전소 침수. 변전 설비도 침수.
  6. 변전실 침수로 비상발전기로부터 전력을 못 받게 됨. 백업용 배터리 작동. 배터리 설계 용량은 8시간.
  7. 이동식 발전기 및 여분의 배터리 급파. 그러나 열악한 도로를 이용하느라 6시간 후에나 현장 도착.
  8. 여러 차례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이동식 발전기 연결 실패. 이유는 지하실의 전원 연결부의 침수와 적절한 케이블의 부재.
  9. 결국 배터리 방전. 전원 공급 중단. 냉각 시스템 운용 정지.
  10. 순환하지 못한 냉각수가 끓어오르고 핵연료가 외부로 노출되어 온도 급상승.
  11. 그 와중에 고온 상황에서 연료봉(Zr)과 증기가 반응하여 수소 발생.
  12. 발생한 증기와 수소로 인해 격납용기 내부 압력 상승, 이에 격납용기 파손을 막기 위해 증기 배기.
  13. 이때 증기와 함께 배기된 수소가 원자로 건물 내부에 농축되어 수소 폭발 발생, 원자로 건물 파손.
    • 3월12일 오후 15시 36분 1호기 폭발.
    • 3월14일 오전 11시 01분 3호기 폭발.
    • 3월15일 오전 06시 14분 4호기 폭발.
  14. 한편 핵연료에서 계속해서 발생한 열로 노심용융 발생.(2호기)
  15. 원자력 발전소 주변 30km 지역 철수 권고 (여행경보 3단계)

2.1. 상세 경과

이 사고는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으로 인한 15m[6]에 달하는 쓰나미가 원전을 덮치면서 시작됐다. 지진을 감지한 원자로는 안전을 위해 자동으로 셧다운됐고 발전소와 전력망을 잇는 송전선로가 끊어졌으며 이에 외부 전력 없이 원자로를 냉각시킬 수 있게 비상발전 체계가 작동됐지만 몇 분 지나지 않아 쓰나미가 원전 앞을 가로막고 있는 5m 높이의 방파제를 넘어 원전을 덮쳤고 1~4호기 원자로 지하가 침수됐다.

비상발전기는 고지대에 설치해 침수를 면했으나 변전 설비가 건물 지하에 있는 바람에 침수됐고, 그에 따라 냉각수를 공급하는 순환 펌프에 전력 공급이 중단되면서 노심 온도가 계속 올라갔다. 3월 12일 남아있던 냉각수가 모두 증발하면서 노심의 온도가 섭씨 1,200도[7]까지 상승했으며 결국 원자로 3기가 노심용융을 일으켰고, 연료봉에 있던 지르코늄의 산화 반응을 통해 발생한 수소와 수증기로 격납용기 내부 압력이 상승하자 격납용기 파손을 막기 위해 벤트를 실시하게 되었다.[8]

하지만 벤트가 이뤄진 직후 수소 폭발로 인해 원전 건물 4개가 손상됐으며, 그와 동시에 격납용기도 손상되면서 태평양을 포함한 일대가 방사능으로 오염됐다. 다수의 원자로가 동시에 녹아내린 최초의 사고이며, [age(2011-03-11)]년이 지난 현재도 사고 수습은 진행 중이다.

바닷물이라도 끌어와서 원자로를 식혔다면 해결됐을 것이지만 신속하게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소금간수를 비롯한 각종 불순물이 녹아 있는 바닷물을 원자로에 집어넣는 순간 그 원자로는 즉각 폐기 처분이 확정되며, 그 원자로를 하나 짓는 데 들어가는 엄청난 비용이 아깝다는 게 그 이유이다. 이는 그 원자로 건설 비용조차도 아득히 뛰어넘는 천문학적 피해를 고려하지 않은 소탐대실적인 판단이다. 이러한 평가는 다소 결과론적일 수 있으나 초기 대응이 신속하지 못했다는 점만큼은 확실히 일본 정부와 도쿄전력의 실책이었다.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는 현재 방출되는 방사능 물질을 차단하기 위해 석관을 만들어 원자로를 봉인한 상태지만 후쿠시마는 아직 원자로의 노심을 완전히 냉각시키지 못했으며, 여기서 지속적으로 소량의 방사성 낙진이 나오고 있다. 완전히 원전이 정지하는 Cold Shutdown 상태까지는 아직 20년 정도가 더 걸릴 것으로 예측된다.[9]

체르노빌은 1기의 원자로가 폭발했지만 후쿠시마는 손상된 원자로 4개 중 3개가 폭발했다. 다만 전체적인 총 방사성 물질의 유출량은 체르노빌 원전에 비해 적다.[10] 악티나이트 원소의 유출량은 체르노빌의 약 0.001% 수준이며, 방사성 아이오딘은 약 10%, 세슘-137은 약 15% 정도가 유출됐다. 이러한 사실은 2000년의 UNSCEAR 보고서와 2013년에 발표된 SOTE 원자력 논문에 정확히 기재되어 있다. 이는 노심이 체르노빌과는 달리 공기 중에 노출되어 있지 않고 침수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석관으로 봉인하고 수만 년에 달하는 시간에 맡겨야 할 정도로 답이 없는 체르노빌보다는 복구 가능성이 조금이나마 존재한다.

비록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은 자연재해지만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는 명백한 인재다. 먼저 침수 위험지인 지하에 전력 설비를 지은 것부터가 심각한 설계결함 실수이며, 이후 상황을 낙관한 도쿄전력이 엄청난 비용이 들 것을 우려한 나머지 해수의 투입을 망설였다가 사태 해결의 유일하고도 절호였던 기회를 놓쳐 일이 커진 것도 큰 문제였다.

심지어 간 나오토일본 총리의 증언에 의하면 도쿄전력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 당시 총리였던 자신에게조차도 정보를 제대로 전달하지 않았다고 한다. 정보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경우에는 주로 '3가지 패턴'이 있었다고 한다. '첫째'는 현장 자체의 판단이 틀린 경우로 예를 들어 지금은 멜트다운(원자로 노심용융)이 언제 시작됐는지 알지만 당시에는 사고 당일 밤 10시까지는 아직 물이 있다고 생각했고, 거기다 수위를 재는 측정기가 오작동했다고 한다. '2번째'는 현장에서는 정확히 알고 있는 정보가 도쿄전력 본사를 통해 총리인 자신에게 오면서 손실되거나 잘못 전달된 경우이며 마지막 '3번째'는 도쿄전력 본사가 책임질 일을 만들지 않기 위해 아예 자신들에게 불리한 정보를 숨기려고 하는 경향 때문에 정확한 정보가 전달되지 않은 경우 '총 3가지 패턴'으로 정보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었다고 한다. #

2021년부터 폐로 작업이 시작됐으며, 예정대로 진행된다면 2041년부터 2051년까지 완료될 예정이다. TEPCO에서 관련 자료와 폐로 과정을 대중에 공개하고 있다. #

일본 민주당 정권의 추락을 가속화시켰고, 이듬해 치러진 2012년 중의원 선거에서 정권을 자유민주당한테 넘겨주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인류 역사상 2번째 7등급 원자력 사고다. 국제 원자력 사고 4~7등급 중에서는 유일하게 21세기 이후에 일어난 사건이다. 첫 번째 7등급 원자력 사고는 그 악명 높은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다.

2013년 일본 중의원에서 특정비밀보호법이 통과되며 더 이상의 진행 경과 정보를 얻기 어려워졌으며, 기존 인용 링크도 거의 지워졌다. 원래 일본의 언론사들은 1~2년만 지나도 사이트를 개편해서 기존의 기사를 지워 버린다. 1990년대 기사도 아직 남아서 볼 수 있는 대한민국과는 대조적이다[11]. 그래서 아카이브를 보거나 일본 국회도서관에 가서 보존되어 있는 자료를 볼 수밖에 없다.

2.2.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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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오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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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방출량 및 측정 관련

3.2. 피폭과 갑상선암 관련

3.3. 수질-토양 오염과 식품 관련

오염수 → 처리수, 오염토 → 제염토로 물과 흙은 처리 과정을 거친다. 과학적 처리 전과 후의 용어를 혼용하는 것에 유의할 것. 그리고 처리수/제염토는 최대한 희석/분산시키는 것이 방사능 농도를 자연 수준까지 낮추는 방안이다.
파일:153892916.jpg 파일:0195cb7c7d220b80c75aa2e2f4fc4128.jpg
2012년, 제염 전 오염토에서의 샘플 채취[13] 2018년, 제염 후 오염토 옆에서의 벼 수확[14]

3.4. 노심용융 관련

3.5. 루머

4. 반응 (일본 내)

4.1. 피난 지시 및 보상

4.2. 원전 폐쇄 및 전력 부족

4.3. 책임자 처리

4.4. 관료주의의 병폐

일본관료주의도 이 사태의 수습에 큰 지장을 주었다. 도쿄전력은 물론 사기업이지만 일본 정부에 맞먹을 정도로 조직의 관료주의가 심각한데 이 사태 수습에도 심각한 모습을 보여줬다. 파도 파도 나오는 도쿄전력의 비리와 삽질과 은폐는 일본 언론은 물론 전 세계 언론에게도 집중적인 까임 대상이 되었다.

일본 정부는 상대적으로 무시당하는 분위기였지만 일본의 관료 조직의 보신주의와 책임 회피, 비밀주의가 맞물려 최악의 모습을 보여줬다. 이 사태는 결국 맹신에 가까운 일부 일본 국민의 신뢰를 깎아 버렸으며, 애당초 안 믿던 사람들은 더더욱 못 믿게 됐고 후쿠시마 사람들은 물불 안 가리고 분노했다. 더욱이 IAEA의 권고를 무시하고 반경 40km의 주민들을 대피시키지 않는다든가, 자국 국민은 물론이고 다른 나라들에도 실제 사태의 심각성을 계속 숨기는 듯한 태도 등등 복지부동의 절정을 보여주면서 까였다.

하다못해 공산 국가인 소련도 비록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가 터진 직후의 크렘린은 관료 장벽으로 사태 파악도 못 하고 있었지만 이틀 정도가 지나 일단 상황을 알게 된 다음에는 나름대로 민첩하게 움직였다. 예컨대 프리피야트 주민 소개는 일당독재 국가라는 점을 감안해도 놀라운 속도로 이루어졌는데, 짐을 싸는 데 2시간을 준 다음 나머지 3시간 반만에 주민을 차량으로 실어 날랐다. 짐을 싸는 시간이 짧은 것은 이미 오염이 심각했기 때문에 최소한의 필수품 외에 모든 가재도구와 재산은 버려져야 했기 때문이다.

반면 일본은 대피 지시도 어영부영 늦은 데다 출입 금지도 제대로 안 되어 주민들이 짐을 챙기기 위해 자꾸만 금지 지역으로 들어갔다. 사실 이들을 탓하기만 할 수가 없는 게, 후쿠시마 원전 사고 당시 긴급 피난을 하는 바람에 귀중품조차 제대로 챙기지 못한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다. 지금 와서 그걸 챙기러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소련은 1986년 당시에도 다양한 로봇을 많이 투입해서 고방사능 지대를 청소했다. 그러나 로봇 강국에 인권을 중시한다는 선진국 일본은 매뉴얼에 없었으니 만들어 둔 로봇도 없고, 개량해서 투입할 수 있는 로봇도 없고, 러시아미국이 지원해 준다는 로봇도 체면 때문에 거부하다가 결국 미국 로봇을 쓰기로 하는 등 추태를 보였다.

더욱 큰 문제는 사태가 심각해지면서 다른 나라에도 피해가 가는데도 일본 정부는 여전히 정보를 공개하기를 꺼리는 눈치라는 것이다. 일본이 원전 방사능에 오염된 폐수를 무단 방출해 한국이 "미국에게는 알렸으면서 왜 우리에겐 알리지 않았느냐"고 항의하자 일본 정부는 이에 대해 "우리는 미국에도 방류 사실을 사전 통보한 적이 없다"고 답변했다. #

4.5. NPT 위반

일본이 원전에 핵무기를 제작할 수 있는 플루토늄이나 우라늄을 숨겨 놔서 감추려고 했다는 의혹이 다수 국가의 언론에서 제기되었다. 실제로 미국이 구조 및 방제 작업을 도와준다고 하자 거절했는데 이게 증식로가 있기 때문이라는 가설도 있으며, 무려 4톤의 농축 우라늄을 신고하지 않았다는 것이 드러났다. # 이는 명백히 핵확산금지조약에 위반되는 행위다.

5. 반응 (해외)

5.1. 대한민국

5.2. 미국

5.3. 중국

5.4. 유럽연합

프랑스는 전기 74%를 원자력 발전소가 공급하는 나라라서 그런지 제일 난리였다. 가장 먼저 사고 레벨을 6등급으로 올려 잡고 정부 차원에서는 일본 내 프랑스인들을 가장 강경하게 대피시켰으며 언론들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독일은 이 시점까지 원자력 발전소가 절반 정도 문을 닫았다. 2000년대 초반 사민-녹색당 연립정권(적녹연정) 시절 '2030년까지 원전을 모두 폐쇄하고 친환경 재생 에너지로 대체한다'는 계획을 세웠으나 기민당이 집권하면서 이 방침을 뒤엎었다. 특히 기한이 지난 노후 원자로 수십 개를 연장 운영하기로 방침을 세웠다. 그런데 이 사고가 하필 지방 선거를 불과 1달 앞둔 시점에 일어났다. 집권 여당이었던 기독교민주당은 하루 아침에 입장을 뒤집어 노후 원자로의 중단 방침을 밝혔으나 이에 야당은 "부랴부랴 선거용 제스처를 하는 것"이라며 비판했다. 결국 지방 선거에서 기민당은 대참패하고 녹색당, 독일 사민당이 싹쓸이했다. 특히 기독교민주당이 58년동안 차지해오던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의회도 녹색당한테 넘어갔다. 한국으로 치면 대구광역시장대구광역시의회를 진보 정당이 싹쓸이한 수준.

이탈리아는 앞서 1987년 11월 국민투표에 따라 1990년에 모든 원전 가동을 멈췄다.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총리는 원전 재가동을 목표했으나 이 사고가 터졌고, 2011년 6월 12~13일에 원전 재개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가 실시되자 투표율 57%에 95% 반대가 나왔다. 베를루스코니 총리는 국민의 뜻에 따라 원전 재개 공약을 폐기했다. #

6. 관련 작품

6.1. 다큐멘터리

6.2. 기타

7. 관련 문서

8. 링크


[1] 자세히 보면 버섯 형태의 구름이 보인다. 오해할 수 있지만 원자폭탄의 버섯구름이 아니고 수소 폭발로 일어난 것일 뿐이다.[2] 1호기의 수소 가스가 폭발하는 시점이다.[3] 후쿠시마현 하마도리의 중심 마을이다.[4] 520페타 베크렐이며, 국제원자력기구에 따라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에서 누출된 총량의 10% 수준인 것으로 조사됐다.[5] 2018년 일본 정부 발간 문건을 출처로 피폭으로 인한 사망자가 1명이라고 주장하는 의견도 있으나, 원문의 "The first claim for case of lung cancer was approved by MHLW in August 2018, and this was also the first case involving death.", "such cases shall be approved as an industrial accident unless non-work-related factors are clear" 를 보면 방사선 피폭으로 인한 사망자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 요인으로 생긴 질병이 아닌 것이 확실하다면" 산업재해로 인정한다는 뜻이다. 방사선 피폭으로 인해 사망한 사람이 아직 없다는 것은 전 세계 원자력공학과의 교재로 널리 쓰이는 Introduction to Nuclear Engineering, 4th edition. Published by Pearson (July 1, 2022) © 2023. John R. Lamarsh 의 챕터 11.8 후쿠시마 다이이치 사고 부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6] 컴퓨터 분석 결과는 약 13.1m.[7] 원전 운용에서 반드시 지켜야 하는 마지노선. 1200도 이상으로 올라가면 우라늄을 감싸고 있던 지르코늄이 물과 만나 급격히 산화되면서 열과 수소를 내놓아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냉각할 수 없다. 지르코늄 참고.[8] 이 시점에 원전 건물 내부에는 이미 방사능이 누출되어 있었다.[9]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는 2000년경에 정지했다.[10] 체르노빌은 2000년 기준 약 5,300PBq의 방사성 물질이 유출됐고 후쿠시마는 2014년 기준 약 520PBq이 유출됐다.[11] 한국도 웹사이트 개편 등으로 URL이 바뀌어서 기존 링크가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지만, 기사 자체는 대부분 바뀐 URL에 남아 있어서 검색 등으로 다시 찾을 수 있다.[12] 같은 7등급 원전 사고인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의 경우 사고 관련 근로자는 28명이 사망했고 UNSCEAR 및 WHO의 사고 후 18년 동안 피폭 후 세대에 대한 역학조사 결과 18명이 더 확인되어 총 46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Sources and effects of ionizing radiation—UNSCEAR 2008 Report. Volume II_ EFFECTS. Scientific Annexes C, D and E.).[13] 한편 한국의 일부 네티즌들은 해당 사진을 두고 "후쿠시마 주변에서 시중에 판매할 쌀을 채취하는 모습"이라며 거짓 선동을 하기도 했다. 한국에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미국의 배우인 토머스 맥도넬트위터에 해당 사진을 올리면서 "일본 후쿠시마에서 방사능 벼를 추수하는 현장이다. 일본에 오는 외국 관광객들에게 주로 먹인다."와 같은 글을 올려서 여러 비난을 받기도 했다.[14] 이렇게 수확된 쌀은 일본 식품안전검증과정을 거쳐 실제로 출하돼서 일본 전역에서 판매된다.[15] 해당 문단 편집본의 소스 : 기즈모도, 캐나다 CTV (상기 2건은 일본 영자지 Japan Times를 인용함) RT 보도 / 영어권 회의주의/팩트체크 블로그인 snopes.com의 평가.[16] 아버지는 요요기제미날의 창립자 중 한 명이며 남자 5명 형제인데 이 중 장남 타카오는 신일본제철 부사장과 규슈석유 회장, 4남 츠네히사는 도쿄전력 회장, 5남 노리오는 마루베니 사장을 역임하여 삼형제가 상장기업의 사장을 역임한 유례 없는 사례다. 이 셋은 산업계의 카츠마타 3형제로 유명하며 차남도 일본도로공단 이사, 3남은 도쿄대학 명예교수를 맡아 형제가 모두 대단히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