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1-21 02:27:15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생활상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
1. 개요2. 분야별 생활상
2.1. 기업2.2. 군사2.3. 건설2.4. 컬처2.5. 결혼식2.6. 패션2.7. 자동차2.8. 소비 문화 전반
3. 어두운 면모4. 참고자료
4.1. 유튜브 영상4.2. 기사4.3. 인터넷 글

1. 개요

1980년대 일본의 코카콜라 광고[1][2] 거품 붕괴 초반인 1992년 도쿄1080p[3] 촬영한 영상[4][5]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 시기 일본의 생활상을 다룬 문서.

2. 분야별 생활상

2.1. 기업

2.2. 군사

2.3. 건설

2.4. 컬처

2.5. 결혼식

파일:하데콘_01.jpg파일:하데콘_02.jpg
미우라 토모카즈 & 야마구치 모모에 칸다 마사키 & 마츠다 세이코

2.6. 패션

파일:패션_버블.jpg
패션 변천을 잘 보여주는 사진. 가장 왼쪽부터 버블기-2000년 전후-2010년대 패션이다

2.7. 자동차

버블경제 시기 일본 자동차에 대한 에피소드

2.8. 소비 문화 전반

소비문화도 대단했는데 해외여행객이 1986년 552만 명을 기록하며 500만 명을 넘긴 것을 시작으로 버블 말기인 1990년에는 연간 1100만 명을 기록하며 출국자가 1000만 명을 넘겼으며, 버블 붕괴 후인 1995년에는 1500만 명을 넘기고 1996~1997년에는 해외 여행객이 1700만 명에 육박했다. 참고자료 이때 주로 미국, 남미, 유럽, 아프리카, 중동 같이 매우 먼 지역들은 물론 급부상하던 한국, 동남아, 호주, 인도 같은 지역으로도 여행을 자주 갔다.[61] 당시 서양권의 일류호텔에는 일본인 단체객들로 만원을 이뤘고, 하와이 해안의 맨션과 별장 상당수가 일본인 소유였으며,[62] 서양의 부호와 아랍 왕족 정도만이 들렀던 고급 브랜드점에 일본의 '평범한 젊은이들'[63]이 줄을 섰고, 틈틈이 고급요리도 즐겼다는 것은 당연했다.[64]

페라리, 롤스로이스, 벤틀리 같은 고급수입차가 거리에 넘쳤고[65] 롤렉스, 샤넬, 루이비통 같은 초고가 명품이 일본에서 불티나게 팔렸으며[66] 심지어 여대생들도 그런 명품을 예사로 걸치고 다닐 정도였다. 당시 일본 대학생이 하루 두 시간씩 일주일만 아르바이트를 하면 현재 300만원 선인 중간 레벨의 루이비통 가방을 살 수 있었기에[67] 한국에서 100만원 이상에 팔리는 루이비통 지갑도 당시 고등학생용 선물 정도로 여겨질 정도였다고 한다. 출처 심지어 1980년대 중반 에르메스·루이비통·샤넬·구찌와 같은 명품 브랜드 고객의 70% 정도가 일본인이었을 정도였다.[68] 하도 일본에서 명품이 너무 많이 팔린 나머지 오늘날의 명품 이미지를 확립시킨 것도 버블경제 시기 일본의 명품 열풍이라는 설도 있을 정도였다.[69] 성인식, 결혼식 등에 입는 후리소데가(특히 장인이 만든 것들) 기본적으로 60~100만 엔에 수백만 엔짜리 기모노도 많이 팔렸다. #[70][71]

뿐만 아니라 2020년대 한국에서 비싼 식사와 호캉스가 유행인 것도 원조는 버블경제 시기 일본이라고 한다. 한국에서 일본 오마카세가 유행한 것처럼 버블기 일본에서는 이탈리아 음식이 이타메시(イタメシ/イタ飯)[72][73]라는 이름으로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했으며, 고급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는 2인 식사에 보통 2만~3만 엔[74] 수준이었는데도 평범한 대학생들이 가득찼을 정도였다.[75] 프랑스 레스토랑도 인기를 끌었지만 격식을 차려야 하고 너무 비싸다는 이유로[76] 일반인들은 특별한 날에만 들르는 정도였다.[77] 80년대 일본의 음식 유행 회사의 접대나 송년회는 고급 레스토랑이나 회원제 위주로 행해졌다. #[78] 와인도 마찬가지라 일본에서 로마네 콩티를 너무 많이 사들인 나머지 로마네 콩티의 가격이 오를 정도였다. #[79] 80년대 일본의 식문화

크리스마스에는 청년층들이 고급 호텔과 고급 레스토랑으로 몰려들었는데, 그 중에서도 아카사카 프린스 호텔(약칭 '아카프리')은 크리스마스에는 스위트룸까지 만석이 될 정도였던 만큼 다음 해 예약까지 있을 정도였고, 최상층의 칵테일 라운지는 대기 2시간이었던 데다가, 구관의 프렌치 레스토랑에는 1개의 수십만 엔 상당의 로마네 콩티가 넘쳐났다고 한다. # 아예 '진심 크리스마스(本気クリスマス)'라는 말까지 생김과 동시에 크리스마스가 연인끼리 데이트하는 날이라는 인식이 정착된 게 버블 시기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 버블시기 일본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방법 구글에 'バブル時代 クリスマス'라고 검색해보면 현 기준으로도 어마어마하게 호화로운 에피소드들을 엿볼 수 있다.

일본 디스코 댄스클럽인 마하라자[80]줄리아나 도쿄[81]는 그런 일본 젊은층의 소비문화와 유행을 주도하던 중심으로 일본 거품경제의 상징적 존재였다. 여성 고객들이 자발적으로 반라로 클럽 무대[82]에 올라 춤을 추었다. 한국에도 같은 이름의 클럽이 이태원에 생기기도 했다. 토미오카 고교 댄스부가 2017년 패러디로 재현한 춤이 바로 그 시대의 스타일과 춤이다.

3. 어두운 면모

'24시간 싸울 수 있습니까'를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운 자양강장제 '리게인' 광고[83]

상기와 같은 버블기의 생활상이나 소비 행태에 대해서 당시를 경험한 일본 중장년층은 다소 과장되었다는평을 내리기도 한다. 버블기라고 해서 너나 할 것 없이 명품을 두르거나 최고급 외제차를 타는 삶을 누린 것은 아니었고, 집값이 너무 비싸 상당수 가정에서 대출금 상환에 얽매인 삶을 사는 이들도 많았는데, 즉슨 당시 졸부[84] 등 상류층들의 생활을 서민이 보편적으로 누렸던 것처럼 과장되게 묘사한다는 것이다. 일본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떠도는 버블기 증언 상당수가 거짓이라는 주장도 있다.#[85][86]

버블기 일본의 평범한 서민 생활상은 지금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당시 일본의 가계 저축률만 해도 30%를 넘었으며, 이것은 세계적으로도 가장 높은 수준이었다. 오죽하면 당시 한국의 저축 장려 캠페인에서 사용된 상투적 표현이 '선진국이 되려면 일본의 저축을 본받자'였을 정도. 또한, 당시 한국을 비롯한 해외의 일본에 대한 평가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부자 나라, 가난한 국민이었다.[87] 즉, 양극화 현상이 강하게 두드러지던 시대라는 뜻이다.[88]

따라서 버블 경제 덕에 부유층이나 부동산과 주식을 통해 재력을 얻은 신흥 부유층은 대도시와 휴양지에 집을 가지거나 추가적인 투자를 통해 재산을 더 크게 불렸고, 빈곤층도 어느 정도 혜택을 누렸지만, 이도 저도 아닌 중산층 이하는 그저 보너스를 더 받는 수준에 머무르거나, 그것도 아니면 비싼 부동산 가격 탓에 대출 상환에 매달리거나, 교외로 밀려나 장거리 출퇴근에 시달리기 일쑤였다. 소득을 감안해도 지나치게 비싼 물가[89][90]에 고통받아야 했던 것이다.

즉, 버블 경제의 혜택을 일본인 1억 2,361만 명[91] 모두가 누리지는 못했다는 이야기이며, 때문에 당시 일본인 중에는 주관적으로도 객관적 기준으로도 자신들이 풍요롭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일본의 좌파 성향 경제학자 테루오카 이츠코(暉峻淑子, 1928~)의 1989년 저서 '풍요로움이란 무엇인가(豊かさとは何か)'[92]에서 버블 시기 그림자라고 할 수 있는 서민의 열악한 생활상이 노골적으로 묘사된다. 당시 기준으로 선진국 최장 근로시간[93], 긴 통근 시간[94], 토끼굴과 비교되는 좁은 집[95], 방치 수준의 노인 복지 등을 버블 경제 시기의 어두운 면으로 꼽고 있다.

단, 이렇게도 팍팍한 삶을 살았던 평범한 일본 서민조차 타 아시아 국가와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풍요를 누렸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가령, 일본의 가구당 에어컨 보급률이 1991년 60%, 1995년 70%를 돌파한 것과 달리(#) 1993년/1996년 한국의 가구당 에어컨 보급률은 각각 6%/14%였다.(#) 또한, 일본은 이르면 80년대 후반부터 대다수의 가정이 집에 TV 2대는 갖추고 있었던 것과 달리(#) 한국은 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 무렵에야 거의 모든 가정이 집에 TV 1대를 갖추는 것을 성사시킬 수 있었다. # 당시 한국도 아시아에서 어느 정도 여유롭게 사는 편을 넘어 '중진국의 최대' 수준의 경제력을 갖춘 나라였음에도 이 정도로 격차가 컸다.

버블 시기에 이슬람권 산유국과 일본을 제외하면 아시아에서 서민 생활 수준이 어느 정도 풍요로웠다고 할 만한 곳은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이스라엘 정도밖에 없었다.[96][97] 그리고 양극화가 심했다고 해도 생활보호대상자[98] 수는 전반적으로 하향 추세[99]였다.[유의사항]

정리하자면 당시 일본은 초호화 생활을 영위한 소수의 부유층 VS 절대 다수의 팍팍하게 살아간 서민층 구조였다고도 볼 수 있다.[101][102][103] 사실 버블 시기 일본 서민들이 살기 고단했다는 것도 1인당 GDP만 높았을 뿐이었지 실제로는 객관적 기준으로도 빈곤하게 살았다는 뜻이 아닌, 수치상으로는 북유럽 국가도 능가하고 스위스, 룩셈부르크에 비견되던 1인당 GDP에 비해서는 살기 고단했다는 것에 더 가깝다. 결정적으로 저런 부자들의 호화 생활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다 있는 일이기에[104] 당시 한국에서도 버블시기 부유층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105]

다만, 이를 부유한 국가의 국민이 부리는 배부른 투정으로 해석해서는 곤란하다. 내외적 이유로 국가가 고평가되어 상대적으로 자산이나 금전 가치가 올라간 것처럼 평가된다 한들, 일반 서민이 국내에서 벌어서 상대적으로 낮은 GDP 혹은 국제적인 저평가 등에 의해 당면한 물가가 비교적 낮게 느껴지는 외국[106]에서 생활하는 방식[107]은 대체로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결국, 부유한 국가에서도 서민은 서민이며, 외부의 상상만큼 경제적 풍요를 쉽게 누리지는 못한다. 앞서 언급된 테루오카 이츠코의 저서가 베스트셀러가 된 것[108]이 이를 반증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4. 참고자료

4.1. 유튜브 영상

국제적 스타가 등장하던 TV 광고[109]
버블기 초입 사회 분위기를 비판한 하마다 쇼고의 곡 'J.BOY'[110][111]

4.2. 기사

4.3. 인터넷 글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문서의 r1900
, 4번 문단
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문서의 r1900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1] CF 속 미소 짓는 여주인공은 마츠모토 타카미(松本 孝美, 1965년생)다. 연인으로 나온 남자는 일본계 미국인인 켄 브레니스(ケン・ブレニス 일본에서 활동하다가 나중에 버블경제가 꺼지고 잃어버린 10년이 도래하자 미국으로 다시 건너갔다). 참고로 2분쯤부터 나오는 광고는 1980년대 한국에서도 거의 똑같이 리메이크되어서 방영된 바 있다. 심혜진이종원이 출연했으며 CM송도 한국어 가사였다. 코카콜라 내부 정책에 따라 일본의 원본을 정식으로 로컬라이징을 했다. 다른 영상들이 있는 버전도 있다.[2] 이는 단지 광고를 카피한 게 아니라, 3저 호황을 비롯한 경제 성장을 이뤄낸 당시 한국의 분위기도 일본 버블 경제의 영향을 받아서 패션, 영화, 드라마 등에 걸쳐 일부 일본과 비슷한 부분은 있었다. 한국에서 리메이크한 코카콜라 광고도 당시 한국 중산층 이상의 분위기에 잘 어울렸고 일부 젊은이들은 광고 속에 나오는 샐러리맨들처럼 되기를 바라며 대학생활을 즐겼다.[3] 실 해상도는 1440x1050i[4] 1992년이면 세계적으로 1280×720 HD 영상은커녕 DVD(480p)급 SD영상을 보던 시절이다. 선진국들도 VHS에 만족해야 했고, 수평 해상도 420픽셀인 레이저디스크는 부자나 매니아의 전유물이었으며, 개발도상국에는 그조차도 없었다. 그런데 1991년부터 일본은 시범적으로나마 MUSE 방식의 HDTV(하이비전) 본방송을 내보내기 시작했으며, 공개 HD 시험방송은 무려 1989년부터 시작했다. 심지어 HD 시범 녹화는 무려 1982년에 시작했다![5] 이에 자극받은 유럽은 Eureka 95 프로젝트를 수립하고 이에 기반한 HD-MAC을 개발, 1992년 공개 HD 시험방송을 시작해 맞불을 놓았다. 미국에도 1993년에 찍은 HD 데모 영상이 있긴 하지만 미국이 (비공개로) 첫 HD 시험방송을 시작한 것도 일본이 HD 정규 방송 시작을 선언하기 직전인 1994년이었으며, 미국에서 공개 HD 시험방송은 1996년, 공개 HD 본방송도 1998년 시작하며 일본보다 7년 늦었다. 참고로 한국은 2000년 HD 시험 방송이 시작되었고 정규 HD 방송은 2002년에야 시작하여 일본보다 무려 11년이나 늦었다.[6] 정규 방송 시작을 선언한 것은 1994년이지만 사실상 1991년부터 본방송을 시작했다고 봐도 무방하며, 심지어 공개적인 HD 시범 방송은 이미 1989년부터 시작했다. 얼마나 빠른 것이냐면, 미국이 비공개로 첫 HD 테스트 방송을 시작한 것이 1994년이었고 공개적인 HD 시험 방송을 시작한 것은 1996년, HD 본방송을 시작한 것은 1998년이다. 버블 경제 시기 일본은 공개 HD 방송에서 미국을 무려 7년이나 앞선 셈이었다! 발매 초 하이비전 TV 가격도 당시 일본인의 4~8개월치 봉급 수준의 거액이었으며, 심지어 본방송 시작 전에는 거의 당시 일본인의 1년치 봉급을 넘는 수준으로 비싼 제품까지 있었다고 한다. 당연히 이 때문에 본방송 시작 전 일본에서 HD TV는 겨우 2천 대에 불과했고, 이조차 대다수가 호텔, 터미널, 대형 공공 건물 등에서 사간 것이었다.[7] 참고자료 버블 훨씬 전인 1983년 출시되어서 취소선 처리.[8] 참고자료 심지어 게임보이용 전자수첩 소프트웨어도 나왔다. #[9] 참고자료(AVGN의 리뷰)[10] 일본어 위키백과 문서 버블 끝물인 1990년 12월 출시되었다.[11] 컴퓨터 칩을 이용했다고 한다. 참고자료 1 참고자료2[12] 1980년대 일본 전자 기업들이 완전한 오리지널은 아니더라도 각각의 8, 16비트 컴퓨터 아키텍처를 갖고 있었던 것을 상기해 보자. 현재 일본의 8대 전자 회사로 일컬어지는 대형 전자기업 중 NEC, 후지쯔, 샤프, 히타치 등은 CPU에서 모니터 브라운관까지 대부분의 부품을 자사 공장에서 만들어서 자사 소프트웨어로 돌리는 PC를 출시할 수 있었다.[13] 츠츠미 요시아키도 2005년 증권거래법 위반 혐의로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후 2007년에는 억만장자 순위에서도 제외될 정도로 몰락했다.[14] 사실 중남미의 잃어버린 10년(1980년대)나 러시아의 잃어버린 10년(1990년대)과 비교해 봐도 그 차이가 크다. 저 두 사례는 기본임금과 복지혜택마저 줄어드는 초유의 사태였던 데 반해서 일본은 최소한 1997년까지는 미약하게나마 임금이 올랐다. 이후부터는 쭈욱 침체지만.[15] 면접 거마비만 모아서 차를 산 사람도 있었을 정도. 이 즈음부터 일본 내에서 점점 인력이 부족해지던 시기라 타 기업에 신입 사원 유출을 막기 위해 면접 이후 지원 여부에 상관없이 면접자들을 하와이로 관광 보내 주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그동안 다른 회사 면접을 보러 가지 못하게 위해 돈을 부어서 견제를 한 것이다.[16] 1량당 가격 40만 엔. 차체만 구입하는 조건은 25만 엔이었다. 운송비는 자기 부담. 당시 일본인의 평균 월급이 27만 엔 정도였으니 두달치 월급을 가지고 전동차 1량을 충분히 살 수 있었던 셈.[17] 그래도 오사카를 뺀 나머지 노선들은 신칸센이 없거나 있어도 너무 오래 걸려서 장사는 잘 되었다. 2020년대 이후로도 도쿄발 오키나와, 삿포로, 후쿠오카 노선은 장사 잘 되는 축에 들어가는 일본 국내선으로, 좌석 공급량은 유지하되 기종만 747보다 효율이 좋은 보잉 777, 보잉 787, A350으로 바꿔 계속 운항 중이다.[18] DC-8&보잉 727 완전 퇴역[19] 보잉 737 클래식 운용 시작[20] 사족으로 일본항공에서 협동체가 완전히 사라졌던 날(JA8031(DC-8-62)가 퇴역한 1988년 5월 26일)과 협동체가 다시 복귀한 날(JA8991(B737-446)가 인도된 1995년 5월 31일)은 7년으로부터 5일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21] 2000년대 이후 에미레이트 항공이나 하던 운영을 당시 일본항공이 했다. 그렇다고 에미레이트처럼 환승승객 장사를 한 것도 아니고, 순수히 인바운드 수요만으로 저렇게 했다.[22] 정확히는 747 최대 '주문' 항공사다. 진짜 747 최대 운용 항공사는 오일머니의 힘을 입어 131대의 747을 운용한 사우디아 항공이다.(다만 이쪽은 하지 기간의 대량수송을 위해 단기 임차한 기체가 많은지라...)[23] 다만 소고는 버블경제 이전에도 호화 전략을 택했다.[24] 1985년 개점한 요코하마점[25] 1993년까지 대폭 확장된 치바점. 다만 이는 '소고 타운'이라고 불렸던 만큼 단일 매장이라 하기는 힘들다.[26] 여담으로 소고는 2000년 파산했고, 현재는 매점 수가 고작 4개밖에 없는 소규모 브랜드 신세다.[27] 대한민국 해군은 당시 2차대전때 쓰던 기어링급 구축함이 막 퇴역을 하고 있었으며 현대해전에 걸맞지 않는 울산급 호위함, 포항급 초계함이 주력이었고 그나마 현대 해전에 조금이나마 어울릴만한 광개토대왕급 구축함 도입 사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대한민국 공군 또한 F-16PB(Block 32) 도입이 진행 중이었으며, KF-16(Block 52) 도입(KFP 사업)은 추진 중이었다. F-15K 도입(FX 사업)은 1990년대부터 추진된다.[28] 당시 기준으로 월 10만 엔. 단, 해당 만화에서는 엔화가 아닌 미화 900달러로 나온다.[29] 당시 일본의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이 한국의 평균적인 직장인보다 더 많이 벌 정도였다.(...)[30] 연간 노동시간이 2,200시간 정도였다. 한국의 연간 노동시간은 2023년 기준으로 1,874시간이다.[31] 문을 닫은 이유가 적자 때문인게 아니라 처음부터 10년간 한정 운영이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동호인들 덕에 마지막까지 흑자였다고 전해진다.(...) 다만 정확히는 1993년부터 2002년까지 운영한 거라 버블 시기와는 무관하며, 지금은 이케아 일본 1호점이 생겼다. 그러나 이 이케아는 엄밀히 말해서 최초의 일본 1호점은 아니다. 일본에서 한 번 실패를 겪은 뒤 2000년대에 재진출해서 리부트로 1호점을 다시 세웠는데 공교롭게도 자우스가 있던 자리라고 한다.[32] 지브리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도 이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치히로의 부모님이 작중 주요 배경이 되는 유바바의 목욕탕과 부속시설을 거품경제 당시 만들어졌다가 망한 테마파크로 오해한다.[33] 유니버설 스튜디오 재팬은 2001년 개장이라 해당되지 않는다.[34] 출처: 사카이야 타이치 지음, 이승홍 옮김, 분열하는 경제대국, 1992, 한국능률협회, 136쪽[35] 높이가 10km(!!!)에 달하는 건물로 구상되었다. 참고로 에베레스트 산의 높이가 8,848m다.[36] 심지어 네옴의 첫 구상조차 도쿄 바벨타워 구상보다 스케일이 작다.[37] 1989년 11월에 방영된 NHK 스페셜 - Tokyo 스피드 ~ 21세기 디자인 도시~'에 간단히 언급된다. 방송 자체는 당시 전 세계의 유명 건축가, 디자이너, 사업가 등이 빠르게 변화하는 동경을 주목하고 동경에 몰려든다는 내용의 다큐멘터리이다. 여담이지만, 턴 A 건담을 디자인한 시드 미드도 출연한다.[38] 1988년에 발표된 사일런트 뫼비우스에 '전뇌도시 동경'이라는 표현이 등장하지만, 관련성은 불명이다.[39] 물론 버블 당시의 일인지라 버블 시대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는 현재의 젊은층은 수록되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이 많다.[40] 1991년 환율로 약 303,600원 정도[41] 한국에서는 아라포를 세대 명칭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지만, 아라포는 그저 40대 근처라는 뜻일 뿐, 고정된 특정 세대를 뜻하지 않는다.[42] 그 외에도 고급 레스토랑, 해외에서 결혼식을 올리기도 했으며, '엄선한 결혼(こだわり婚)'이라며 주택이나 리조트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경우도 있었다..[43] 일본에 도입된 해는 1977년이었다. 다만 비용 문제 때문에 현재는 거의 다 철거되어 2022년 현재는 단 5곳의 결혼식장만 곤돌라를 유지하고 있다. 참고자료[44] 칼이 들어가는 부분만큼은 진짜 케이크였다.[45] 4~5번 갈아입는 경우도 많았다. 주로 시로무쿠-이로우치카케(기모노의 일종)-웨딩드레스-컬러드레스 식. 웨딩드레스는 이탈리아제 콘스탄티노가 유행했다고 하며, 다이애나비의 결혼식도 일본 결혼식의 화려함에 많은 영향을 줬다고 한다.[46] 출처 피로연 장소가 자택에서 호텔, 결혼식장으로 바뀌면서 결혼식에 많은 돈이 들게 되어 축의금이 오른 거라고 한다.[47] 반면 한국은 1988년 기준 축의금이 1만 원이었고, 1991년에는 대개 2만 원대였으며, 3만 원대 축의금이 보편화된 것도 1996년이었다. #[48] 미우라 토모카즈 & 야마구치 모모에 부부나 간다 마사키 & 마츠다 세이코 부부는 억 엔 단위로 결혼식을 올렸으며, 고 히로미의 결혼식은 시청률이 47.6%였다.[49] 화려한 결혼식이라는 뜻. 1990년대 중후반에서 2000년대 초중반까지는 지미콘(地味婚)이라고 해서, 100만 엔 미만의 피로연을 하거나 식만 올리는 소탈한 결혼식이 유행했지만, 2010년대에 들어서 결혼식에 300만 엔 이상의 비용을 쓰는 이케무코(イケ婿)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즉, 일본인 전체의 결혼관이 변했다기 보다는, 지미콘이 트렌드이던 당시에 혼인한 이들이 버블 붕괴의 직격탄을 맞은 잃어버린 세대에 해당하는 경우가 많아서 일시적으로 소박한 결혼식을 택했다는 시각이 있다. 실제로 2007년에 초혼한 개그맨 진나이 토모노리는 당시의 지미콘 트렌드와는 정반대로, 참석자만 600명에 달하는 화려한 결혼식*으로 유명세를 탔다. 여담으로, 이 결혼식과 피로연은 TV로 생중계될 정도였는데, 이는 진나이보다는 신부인 후지와라 노리카의 명성 덕이 크다. 참고로, 2022년 현재 일본의 평균적인 결혼식 비용은 304만 엔. #[50] 결혼식 트렌드를 좀 더 잘게 나누어 90년대를 지미콘, 2000년대를 20~30명 규모의 앳홈콘(アットホーム婚), 2010년 전후를 앳하트혼(アットハート婚)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결혼식 트렌드는 당연하게도 웨딩 업체의 마케팅인 경우가 많아서 시대가 흘렀다고 이전 트렌드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고 플랜에 추가되는 형식, 즉 선택지로서 존속하고 있다. 여담이지만, 앳하트혼 이후에 웨딩 업체에서 밀었던 2010년대의 결혼식 플랜은 쉐어드콘(シェアード婚)이라고 해서, 몇 커플이 함께 식을 올려 총비용을 줄이는 이른바 '공유혼'이었다.[51] 물론 세계적으로 오버핏이 유행한 경향이 있었으나[52] 2024년 기준 50대 중후반에서 60대 초반[53] 2024년 2월 아시아경제 기사에서는 완렌 보디콘을 '몸에 달라붙는 정장 원피스 차림'이라고 정의했으나, 꼭 정장일 필요는 없다. 참고[54] 이를 하이소카 붐이라 불렀다.[55] 소형차는 2000년대 이후다.[56] 1988~1990년 일본 최다 판매 승용차는 코롤라, 마크II, 크라운 순이었는데, 때때로 월간 판매량에서는 크라운이 코롤라를 제치고 최다 판매를 기록한 적도 있었다.[57] 현 벤츠 C클래스의 전신이다. 당시 상대는 BMW의 3시리즈.[58] 아기벤츠(子ベンツ) 혹은 작은 벤츠(小ベンツ)로 해석 가능.[59] 토요타의 준중형 세단. 한국에서 흔히 쓰는 "강남 쏘나타"와 비슷한 표현이다.[60] 전술하였듯 지금 대한민국에서 돌아다니는 오래된 병행 수입 차량 대부분이 이시기 일본에서 출고된 차를 한국에 들여온 것이다. 해당 차량들이 출시되었던 시기의 초록색 바탕의 지역 번호판 대신 현행 흰색 번호판을 달고 있는 경우 십중팔구 해당된다. 1987년 수입차 시장 개방 이전 대한민국에서 수입차를 구입할 수 있는 방법은 주한미군의 중고차를 구매하거나 신성일포드 머스탱처럼 운송료, 관세, 수입쿼터까지 붙여서 원래 자동차 가격의 몇 배나 되는 부대비용까지 들여서 수입하는 것이었다. 1987년 수입차 시장 개방 이후에는 정식 딜러를 통한 구입이 가능하게 되었지만 2000년대 FTA 체결 이전까지 수입차는 여전히 국산차보다 많이 비쌌다. 그럼 여기서 우핸들이면 우측통행인 대한민국의 도로에서 운전하기 힘들지 않을지 의문이 들 수 있는데 일본에서는 수입차가 많지 않던 시절부터 좌핸들=수입차=부의 상징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그래서 불편을 감수하더라도 수입차는 좌핸들로 뽑는 경우가 많았다. # 일본의 중고차 사이트들에서도 한국에서 우핸들 수입차를 찾는 것보다 좌핸들 수입차들을 훨씬 많이 찾아볼 수 있다.[61] 1990년 당시 한국의 내국인 출국자 수는 (일본의 1972년과 비슷한) 156만 명이었으며, 500만 명을 넘긴 것도 1999년에 1000만 명을 넘긴 것은 2005년이고 1500만 명을 넘긴 것은 2014년이다. 참고자료 1 참고자료 2[62] 당시 하와이의 별장이나 와이키키 해변의 호텔 1/3 이상이 일본인의 소유였다.[63] 다만 하술하듯 정황상 저들이 순수 서민일 리는 없고, 버블 시기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졸부 집안 출신일 가능성이 높긴 하다.[64] 출처: 사카이야 타이치 지음, 이승홍 옮김, 분열하는 경제대국, 1992, 한국능률협회, 135쪽[65] 참고자료 1990년 기준 롤스로이스 실버 스피릿 II가 2750만 엔에 벤틀리 터보 RL은 3150만 엔의 당시 기준으로도 엄청난 가격이었으나(당시 일본 직장인의 평균 연봉이 438만 4000엔이었다) 구매 대기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사람들이 많았고 버블 붕괴 후인 90년대 말에는 중고차 시장에 고급차들이 원가에 비해 매우 저렴한 가격으로 나돌았을 정도.[66] 여담으로 샤넬과 루이비통은 각각 1980년/1978년 처음으로 일본에 매장을 세웠는데(특히 샤넬은 일본에 처음 진출한 매장이 부티크 직영점이었다), 한국에서 이들 브랜드의 매장이 1991년에야(정확히는 샤넬은 화장품 매장이 먼저 진출했고, 의류 매장은 1997년에야 한국에 진출했다) 세워졌던 것과 비교하면 매우 빨리 진출한 셈이다. 물론 한국에서도 이들 브랜드는 면세점에는 이미 80년대 중반부터 진출해 있었다. 덤으로 에르메스 역시 한국에 1997년에야 진출한 것과 정반대로 일본에는 이미 1978년부터 진출해 있었다.[67] 다만 후술할 2022년 기사를 보면 아르바이트를 1개월 정도 하면 루이비통 가방을 살 수 있었던 것으로 나온다. 아무래도 버블 시기 일본이라도 후자가 훨씬 현실성이 높다. 물론 이 역시 당시 일본에서는 '나이키 운동화 하나 사는' 수준에 당시 일본 여고생들의 필수품 수준이었다.[68] 1996년 이전까지만 해도 한국에서 유명한 백화점으로 꼽히던 곳들조차 루이비통은 입점시키지도 못하고 샤넬 화장품 정도만 팔던 수준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당시 한국과 일본 간의 경제적 격차가 어떠했는지를 실감할 수 있다. 덤으로 에르메스는 당시 한국에 아예 진출도 하지 않았다.[69] 일본의 버블경제 시기 이전까지만 해도 명품은 일부 명문가의 특별한 기호품(嗜好品)이었지 비싸더라도 1만 달러짜리 가방과 같은 터무니 없는 수준은 아니었다고 한다.[70] 심지어 사업가 집안 출신이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성인식에 무려 690만 엔의 후리소데를 썼다는 증언도 있다. 출처 당연히 지금도 버블 시기 수준 가격의 후리소데는 존재하지만, 버블 시기만큼 많지는 않다고 하며, 평균적인 후리소데 가격은 버블 시기보다 더 싸졌다.[71] 다만 기모노 산업이 1조 8000억 엔으로 피크를 기록했던 시점은 버블 훨씬 전인 1974~1975년이었다. 출처[72] '이탈리아 식사'를 의미한다. 2010년대 후반에 들어 버블 경제를 돌아보는 특집 등에서 언급되고는 있으나, 기본적으로는 사어화했다는 인식이 더 크다.[73] 사족으로 당시 가장 유행하던 이타메시는 티라미수였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이탈리아 음식이 유행했던 이유는 부드럽고 세련되면서도 격식을 딱히 차리지 않아도 된다는 인식 때문이었으며, 마침 본고장에서 배운 일본인 셰프들이 귀국해 가게를 차린 것도 버블 시기였다. 덤으로 이 열풍(과 엔화 가치 상승으로 수입품 가격이 싸진 것)으로 이전에는 귀했던 이탈리아산 식재료들을 슈퍼에서 '손쉽게' 살 수 있을 정도로 구하는 게 쉬워졌다고 한다. 참고자료[74] 당시 환율 기준으로 1만 엔은 5~6만 원 남짓 수준이었다. 그리고 버블 말기인 90년대 초반에 한국의 근로자 평균 월급이 60만 원 남짓이었던 것과 달리 동시기 일본의 샐러리맨 평균 월급은 30만 엔(당시 환율로 환산하면 약 150~190만 원)이었다.[75] 90년대 중반까지 한국에서 피자도 고급 외식 취급받던 것과 대조되는 양상이다. 참고자료[76] 당시 고급 프랑스 레스토랑 코스 메뉴는 1인분에 1만 엔 대를 넘어 2만~3만 엔 대도 있었다고 한다. 비싼 건 이탈리아 레스토랑의 2배 가격이었던 셈. 참고 인터뷰: https://r.gnavi.co.jp/g-interview/entry/yajirobe/4558 "버블 경기가 시작한 1984년에는 프랑스 최고봉 (미쉐린) 3성 레스토랑 지점(라 뚜르다장 도쿄점, 다만 현재는 파리점이든 도쿄점이든 모두 1성급으로 떨어졌다)이 도쿄 호텔 뉴 오타니 내에 오픈했으나, 개점과 동시에 사람들이 몰려든 나머지 예약이 불가능해질 정도로 프랑스 코스 요리가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테이블 매너와 긴장된 분위기 탓에 제대로 이야기도 못 한 채 식사를 끝마쳤고, 2명에 4~5만 엔 하는 가격에 당황했다. 이러한 경위를 거쳐, 조금 더 캐주얼한 이탈리안이 주류가 되었다"는 취지의 내용. 참고로 당시 일본 샐러리맨 평균 월급이 약 22만 9000엔(한화로 78만 원)이었다.[77] 사족으로 버블 훨씬 전인 1981년 기준 워커힐 호텔의 프랑스 레스토랑 '세라돈'의 1인당 가격이 1만 2천~2만 5천 원 정도였다. # 당시 노조 가입 근로자 임금이 25만 원 하던 때였다. # 프랑스 고급 레스토랑의 1인분 가격이 거의 근로자의 2~3일치 봉급 수준인 것은 1인당 GDP가 세계 평균에도 미치지 못하던(대략적으로 2010년대 후반 이후 중국과 비슷한 포지션이다) 한국이나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20개국 중 하나이던 일본이나 똑같았던 셈이다.(...)[78] 한 근로자는 송별회, 환영회를 고급 중식 코스로 했다고 하며, # 심지어 고급 요리이던 닭새우 테르미도르가 하도 고액 연회에 많이 올라온 나머지 고급 요리 취급도 받지 못하게 될 정도가 되었다.(...) #[79] 정작 이들은 로마네 콩티를 마시고는 '별 거 아니다'고 느꼈다고... 덤으로 당시 일본의 졸부들이 '로마콘의 핀돈 분할'이라며 로마네 콩티를 돔 페리뇽 로제 샴페인(핑크색 돔 페리뇽이라며 '핑돔'이라고 불렀다)과 섞어 폭탄주로 마셨다는 일화가 유명하다.[80] 1982년 오사카에서 개업한 디스코 클럽으로, 오사카 본점보다는 도쿄 아자부주반 지점이 더 유명했다. 시기적으로는 이 클럽의 영업 시기가 진짜 거품경제 시대와 일치한다. 다만 줄리아나와 달리 복장 규정이 까다로운 등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컨셉은 아니었다.[81] 엄밀히 말하면 1991년 처음 개장했으므로 거품경제와는 관련이 없긴 하나 적어도 1995년까지는 사회 분위기가 거품경제 시기와 거의 차이가 없어서 버블 시절의 문화라고 봐도 무방하긴 하다. 실제로 일본인들 스스로도 줄리아나 도쿄를 거품경제 시기의 상징들 중 하나로 여긴다.[82] 오다치다이(お立ち台)라고 한다. 원칙적으로는 누구나 자유롭게 올라갈 수 있게 되어 있지만, 눈에 띌 정도로 춤을 잘 추는 사람이 올라갈수록 클럽 입장에서도 바람직하기에 엄선(?)한 여성들이 올라가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카리스마적인 일부 여성은 패션이나 춤 등에서 다른 여성에게 영향을 주는 존재가 되기도 했는데, 일명 '아라키 스승' 혹은 '오다치다이의 여왕'으로 불렸던 아라키 구미코가 그중 하나이다.[83] 버블기 기업 문화의 상징과도 같은 광고로, 과로가 만연하던 당시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영웅본색 3에 출연하기도 한 도키토 사부로(時任三郞)가 광고의 메인 캐릭터를 맡았다.[84] 나리킨(成金). 주로 집안에 매각할 만한 여분의 토지가 있는 사람들이나, 부동산에 투기한 사람들이나, 살고 있는 집을 저당잡힌 차 돈을 빌러 증권시장(주로 건설회사)에 투자한 사람들이 그랬다. 반면 당시 일본에서 명망 높은 기업가들은 한국에서도 검소하게 사는 것으로 유명했다.[85] 한국에도 이름이 알려진 저명한 독신 연구가 아라카와 가즈히사(1963년생, 버블 초기인 1987년에 취업한 '신인류 세대'이다)의 증언이다. 아라카와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대다수의 사람들은 버블이 붕괴했다는 것도, 그 당시가 버블이었다는 감각도 없었으며, 오히려 주가 폭락 이후인 1990~1994년이 가장 사회적 분위기가 좋았던 데다가 경기가 나빠진다는 것을 인식해도 본격적으로 불경기임을 실감하게 된 것은 1997년부터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1997년은 일본은 물론 한국도 IMF 외환위기의 여파로 경기가 급속도로 나빠졌던 시기였다. 또한, 단카이 주니어이자 빙하기 세대인 저술가 하야미즈 겐로는 2023년 10월 26일 부인공론 기사를 통해 "경기가 좋은 시대. 버블 시대를 살아 보고 싶었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지만, 당시 일반 서민은 호경기에 오히려 분개하고 있었다. 돈을 버는 것은 주식을 가진 자와 토지를 가진 자뿐. 서민은 마이 홈을 꿈꾸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오히려, '호경기가 끝나고 땅값이 원래대로 돌아오면 좋은데...'야말로 당시 서민의 대표적인 목소리라고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86] 다만 버블 시기 에피소드 중 가장 유명한 '1만 엔 지폐를 흔들어 택시를 잡았고,(다발을 흔드는 경우도 많았다) 아무리 근거리라도 택시를 타야 했다'는 일화는 확실히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87] 일본의 고소득을 아득히 뛰어넘는 고물가와 (당시 중진국에 불과했던) 대한민국의 서민들 집보다도 더 작은 일본 서민들의 집 등 당시 일본 일반인들의 삶이 한국인보다 나을 게 없다고 생각하는 분위기도 분명히 있었다. 물론 저런 이미지에서 일본인들은 돈 있다고 흥청망청 안 쓰니 일본이 강대국이 된 것이라는 식의 결론을 내기도 했지만 어쨌던 돈 있다고 일반인들이 흥청망청 쓰고 살던 시기와는 한참 거리가 멀었던 것.[88] 이는 한국의 X세대도 마찬가지다. 오렌지족이니 야타족이니 하는 상류층의 문화가 자주 매스컴에 노출되다보니 당시 대부분의 청년들이 사치를 일삼은 것 같지만, 실상은 사회초년생때부터 평균 연 2600시간대의 장시간 노동에 허덕이는 경우가 많았고, 아무리 자동차가 한창 대중화되었다는 시대였지만 고급승용차는 돈 있는 사람들의 전유물이었으며, 그때나 지금이나 부익부 빈익빈은 변함 없었다. 그리고 당시 언론은 "선진국 일본에는 과소비란 말이 없이 절약하며 산다"며 한국의 경제 발전에 따른 소비를 '과소비'라며 매우 경멸적으로 보면서 일본인의 절약정신을 본받으라는 식의 기사를 써댔다. 예시[89] 특히 엔화 고평가로 인해 외국인들에게는 진짜 살인적인 수준이었다. 1989년 기준 커피 한 잔에만 7달러(2024년 환율로 17.5달러)였을 정도였으니 미국의 투자은행가조차 "제3세계 이민자들이 미국에 왔을 때 느끼는 감정을 이제야 알겠군. 이 나라에서는 아무 것도 살 형편이 못돼."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또한 이 시기에 일본을 방문한 피터 린치조차 일본은 사과 한 개가 5달러나 하고 아무 보잘것없는 식사 한 끼가 100달러가 넘는 가격에 팔린다고 자서전에서 비꼰 바 있다.[90] 한국과 비교하자면, 1990년 기준 한국의 평균적인 봉지라면 가격이 200원(38엔)이었던 것과 달리 동년 기준 닛신식품컵라면 가격은 155엔(825원)이었다. 당시 한국에서 짜장면 가격이 1000원 남짓이었다. 1990년 일본의 평균 월급이 약 283,800엔으로 닛산 컵라면 1,830개를 살 수 있는 데 반하여 한국 평균 월급 548,500원(1989년 기준)으로 봉지 라면 2,742개를 살 수 있음을 생각하면, 경제 수준 차이를 고려해도 일본의 물가가 지독한 수준이었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다. 그 외에도 당시 일본에 갔던 사람의 증언(하술할 월간조선 기사에 나온다)으로는 한국의 콜라 한 병 값이 100원 정도였는데 일본 자동판매기의 캔콜라가 100엔이었다고 한다.[91] 1990년 기준[92] 한국에서는 2007년에 '부자 나라, 가난한 시민'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었다. 일본에서는 2000년까지 무려 47쇄본까지 발행했을 정도로 베스트셀러였는데, 그만큼 이 책에 담긴 일본의 모습에 공감하는 이들이 많았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참고로 2024년 현재도 판매 중이다.[93] 버블 시기 내내 일본의 근로시간은 2000시간대였다. 한국이 2000년대까지 근로시간이 비정상적으로 길어서 그랬지, 당시 일본도 충분히 긴 근로시간으로 해외에서 악명이 자자했다.[94] 왕복 통근 시간이 2~3시간에 달하는 것은 기본이었다. 도쿄 땅값이 너무 비싸 사이타마(당장 버블 중반에 처음 나온 짱구는 못말려의 배경이 사이타마현이다), 치바 같은 외곽에 집을 마련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당시에 많이 썼던 방법이 신칸센 연선지역에 주거지를 마련하는것으로, 이러면 집값과 월세비도 아끼고 출퇴근 시간도 동시에 줄이는 일석이조를 노릴수 있었지만, 이것도 교통비를 제공해주는 회사에 근무해야 가능했지, 교통비를 제공해주지 않는 회사에 근무할 경우에는 비싼 신칸센 탑승비용을 자비로 부담해야했기 때문에 어림도 없었다.[95] 책에서 묘사된 바로는 방 너비가 출입문과 같은 수준의 약 0.78평짜리 방조차 있었다. 이 방에 접이식 침대와 세면 시설 등 모든 것이 갖춰져 있는데, 한국의 고시원과 비슷하거나 못한 수준으로, 일반적인 일본의 아파트보다도 처참했던 것으로 알려진다.[96] 한국도 사람들이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안정된 시기로 여기는 3저 호황부터 1997년 외환 위기 직전까지의 시기인 1986년부터 1997년까지와 외환위기를 막 벗어난 2001년부터 2006년까지의 호황기에도 전자의 시기에는 연평균 노동시간이 2500시간을 훌쩍 넘겼던 데다가 후자의 시기에는 현재진행형으로 심각하게 거론되는 청년실업 문제와 부동산 가격의 폭등 문제가 처음 대두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시기의 한국은 명백히 각 가정의 가처분소득이 증가하고 주5일제 도입 등 복지정책이 조금씩 확충되던 시기였으므로 서민들의 경제력이 크게 상승한 시기였던 것도 맞다. 때문에 이 시기에 대한 향수가 생겨나는 것이고 이 점이 일본인들이 버블경제 시기를 긍정적으로 인식하는 것과 같은 부분이다.[97] 물론 싱가포르, 홍콩, 대만도 일본만큼 1년에 몇 번씩 해외여행 가거나 좋은 집 사거나 이런 일들은 하기 좀 힘들었다. 당시 한국과 비슷한 수준이었던 말레이시아와 한국&말레이시아보다도 가난했던 타 동남아 국가들, 최빈국이던 중국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여기에 이스라엘 역시 1980년대 초중반에는 1,000%에 육박하는 초인플레이션으로 신음하던 적이 있어 마냥 여유로웠다고 보기는 어려웠다.[98] 한국으로 치면 기초생활수급자. 여담이지만, 한국에서 기생수라고 비하해서 부르듯, 일본에서는 나마뽀(ナマポ)라는 비하어로 부르기도 한다.[99] 빈곤 가정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고, 버블 경제가 시작된 1985년(약 1.2%)을 기점으로 줄어들기 시작해서 1995년(0.7%)까지 지속적으로 하향 곡선을 그렸고, 버블이 붕괴한 1991년 기준으로는 이미 0.7%대였다. 다만, 본격적으로 취업 빙하기가 시작된 것으로 보는 1996년부터 다시 급격히 증가했고, 고령화 등과 맞물려 증가 일로를 달리고 있다. 일본 후생노동성 2017년 발행 '생활보호제도의 현상에 대해'[유의사항] 단, 이러한 일시적 감소는 버블기의 호경기에 따른 긍정적 변화만은 아니고, 80년대에 발생한 야쿠자의 부정 수급 등 여러 사회현상에 따라 생활보호 대상 기준이 엄격한 방향으로 수정된 것도 한몫한다는 견해도 있다는 점을 감안해서 통계를 해석할 것을 권장한다. 특히, 편모 가정에 대해서는 자립 권장으로 방향이 바뀌어 생활보호 대상에서 탈락한 편모 가정이 많았다고 한다. 또한, 자립 가능한 고령자조차 탈락하는 경우가 있어, 고령자 자살을 부추기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101] 다만, 당시 일본인들은 이런 생활상에도 만족하며 살았다고 판단할 수 있는 자료가 있다. 1989년, 요미우리 신문이 조사한 결과 일본인의 92% 가량이 현재 생활이 행복하다고 느끼고 일본인 90.6%가 자신이 중류층이라고 인식했던 반면(중하류층을 제외해도 70% 가량의 일본인들이 자신을 중산층이라 느꼈다는 이야기가 된다) 하류층이라 인식한 사람은 4.2%로 상류층(3.5%)과 그다지 큰 차이는 없었다. #[102] 한편, 국가에서 매년 조사하는 국민생활기초조사(国民生活基礎調査) 기준으로는 1989년 기준 '(삶이) 매우 힘들다', '힘든 편이다'를 선택한 사람이 37.7%, '보통이다'를 선택한 사람이 53.8%였다. 소위 '하류'에 해당하는 '매우 힘들다'와 '힘든 편이다'를 택한 이들은 이후로 줄곧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반면 중류 의식 조사로는 자신을 중류층으로 평가하는 사람의 비율이 반 세기 가까이 유사한 비율을 유지하고 있으며, 2020년대에 들어서야 50% 아래로 내려갔다.[103] 일본 내에서는 이러한 '중류 의식'을 잘못된 인식으로 지적하는 이들도 있다. 자신을 평균에 해당하는 중류로 판단하는 오류가 일본의 격차 문제 해소를 늦추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적이 전혀 근거가 없지는 않은 것이 후생노동성 소득 분포 조사에서 가령 2009년에는 61.3%가 평균 소득에 미치지 못하는 연간 소득을 올린 것으로 나옴에도 중류 의식 조사에서는 40% 남짓만이 자신을 중하 혹은 하류로 평가하여 인식과 현실 사이의 차이를 보여 준다. 일본에서는 2023년 기준, 세대 소득 기준 연간 500만 엔을 '중류 가정'으로 인식하는 풍조가 있으나, 연간 500만 엔을 과연 '중산층'으로 볼 수 있는가를 차치하고서라도, 이러한 가정 자체가 실제로는 전체의 10%에도 미치지 못한다.[104] 당장 1인당 GDP가 2000달러대에 불과한 인도에서도 무케시 암바니 같은 갑부들은 문자 그대로 왕처럼 살고 있으며, 김씨 3대, 모부투 세세 세코,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로버트 무가베, 장 베델 보카사 같은 후진국 독재자들의 사치는 그야말로 눈이 돌아갈 정도.[105] 예시(1994년 한국 부유층의 결혼식)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 '호화결혼식'을 검색하면 당시 한국에서도 일본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호화결혼식이 팽배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으며, 1996년 국회의원 이강희도 경비행기를 동원한 아들의 호화 결혼식으로 곤욕을 치렀다. 1990년 한국의 평균적인 결혼 비용은 1769만 원이었던 것과 달리 동년 기준 일본은 (1987년과 같은) 700만 엔(3727만 원)이었다고 하는데, 일본이 결혼식 비용이 대부분이었던 것과 달리 한국은 예단과 예물 비용이 큰 몫을 차지했다고 한다. 그리고 1996년 한국 도시인들의 평균적인 결혼 비용은 3000만 원에 부유층은 그의 두세배는 더 들였다고 한다. 두 나라 간 소득 수준 격차를 고려하면 당대 언론이 한국의 호화결혼식을 질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던 셈. #1 #2[106] 현지에서 벌어서 먹고 사는 현지인 입장에서는 비싸거나 적정 물가일 수 있음에도. 가령, 2020년대 초반 현재 한국 평균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여러 이유로 일본 물가가 ‘싸다’고 느끼지만, 정작 현지 일본인 사이에서는 자국 물가가 ‘비싸다’는 의견이 많다. 또한, 한국인이 즐겨 찾는 여행지인 동남아시아도 여행 물가는 한국인 입장에서 무척 저렴하게 느껴지지만, 현지인에게는 그렇지 않다.[107] 실제로 스위스에서는 물가가 높은 자국 슈퍼가 아닌, 국경이 맞닿은 독일의 저렴한 슈퍼에서 쇼핑하는 이들도 더러 있지만, 이는 특수한 경우다.[108] 문고본이기에 비교적 저렴한 편이었다. 여담이지만, 1990년 발행된 9쇄 기준 세금 포함 550엔이었고, 2024년 현재 판매 중인 것은 968엔이다.[109] 뮤직비디오를 활용한 광고도 있었지만, 재닛 잭슨이나 마이클 J. 폭스, 존 트라볼타처럼 직접 출연한 사례도 있었다.[110] 80년대 일본은 이전까지의 급격한 경제 성장으로 배금주의가 심화되어, 본격적인 버블기에 들어서기 전부터 버블의 예조(予兆)가 나타났던 것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흐름을 우려한 작품이 문화계 일각에서 등장하기도 했는데, NHK 연속 TV 소설 '오싱'이나 가수 하마다 쇼고의 곡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하마다는 1980년대 초반부터 MONEY(1984년 발표) 등 배금주의 등을 비판하거나 풍자하는 노래를 발표했는데, 1986년 발표한 J.BOY는 그 정점으로 볼 수 있다. 다만, 당시 사회를 비판했던 이 노래는 아이러니하게도 금전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고, 이후 J-League, J-Pop 등 J 컬쳐 명명법의 시초가 되었다*는 견해가 있다.[111] "J. Boy 내걸었던 이상도 지금은 멀리 있고. J. Boy 지켜야 할 긍지도 보이지 않네. 끝없이 이어지는 생존 경쟁 달리다 지쳐. 집도 일도 던져버리고 목숨조차 던진 친구. 그리고 나는 마음의 공백을 채우고자 산처럼 쌓인 일을 끌어안고 억지로 견뎌내네. J. Boy 미덥지 못하고 풍요로운 이 나라에. J. Boy 무엇을 걸고 무엇을 꿈꿔야 하나"라는 가사를 통해, 당시 일반적인 일본인이 느끼던 사회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112] 1984년부터 도쿄에 거주중인 샌디에고 출신의 미국인 유튜버이다. 어깨에 캠코더를 메고 길거리, 상가, 주택가, 전철역, 공원 같은 일상적인 장소를 1인칭 시점으로 촬영한 영상이 주를 이루며, 버블이 절정을 찍고 꺼질 무렵인 1990~1993년에 촬영한 영상의 비중이 높다. 3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도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도쿄 시민들의 일상이 담긴 영상을 꾸준히 업로드하고 있다.[113] 30여 년 후 한국에서도 코로나 19로 인해 '나를 위한 선물'격으로 '보복 소비'가 유행한 바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