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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0-03-09 13:31:34

야마구치 모모에

야마구치 모모에
山口 百恵 | Momoe Yamaguchi
파일:GOLDEN☆BEST-山口百恵-コンプリート・シングルコレクション.jpg
본명 미우라 모모에 ([ruby(三, ruby=み)][ruby(浦, ruby=うら)][ruby(百, ruby=もも)][ruby(惠, ruby=え)], Momoe Miura) [1]
출생 1959년 1월 17일 (만 [age(1959-01-17)]세, 염소자리, 개띠) | 일본 가나가와 현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510px-Flag_of_Kanagawa_Prefecture.svg.png 요코스카 시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40px-Flag_of_Yokosuka%2C_Kanagawa.svg.png[2]
국적 일본 파일:일본 국기.png
신체 158cm| A형
최종학력 히노데 여자고등학교[3]
직업 가수, 배우 (1973 ~ 1980 / 은퇴)
가족 남편 미우라 토모카즈, 아들 미우라 유타로(1984년생), 미우라 타카히로(1985년생)
소속 호리프로(ホリプロ)
1. 개요2. 데뷔까지3. 활동
3.1. 결혼과 은퇴
4. 은퇴 이후5. 여담6. 발매 싱글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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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가수로 1970년대를 대표하는 가수이자 배우였다.

1973년 4월에 배우, 이어 5월에 음반을 내며 가수로도 데뷔. 당시 중학생이었는데, 같은 또래인 사쿠라다 준코, 모리 마사코와 함께 꽃의 중3 트리오로 불렸다. 정식 데뷔 전인 1972년에 <스타 탄생!>에서 우승자 사쿠라다 준코 다음으로 준우승을 해 얼굴을 알린 뒤, 그 이후로는 우승자 준코를 쌈싸먹고도 남을 커리어를 냈기 때문에 트리오 중에서도 최고격의 대접을 받는다. 70년대를 풍미한 대표적인 아이돌로 다수의 명곡을 불렀다. '아이돌'이라는 단어가 일본에 생겨나게 한 존재. 일명 '전설의 아이돌', '불세출의 가희'. 은퇴한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쇼와 일본 가요계의 3대 가희로 회자되고 있다.[4]

1980년대 일본 아이돌 중에서 마츠다 세이코나카모리 아키나[5]가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하다면, 1970년대 일본 아이돌 중에서 전세계적인 지명도는 야마구치 모모에가 가장 으뜸.

2. 데뷔까지

1959년 1월 17일 도쿄 도 시부야 구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일본 가나가와 현 요코스카 시로 이사해, 중학교 2학년의 나이로 데뷔하기까지 요코스카 시에서 지냈다.

1972년 12월, 오디션 프로그램 <스타 탄생!> 에서, 마키바 유미의 <회전목마>를 부르며 준우승해 20개의 사무소에서 지명을 받았다. 가수가 되려고 한 계기는 또래인 모리 마사코가 TV에서 활약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나도 모리 씨처럼 되고 싶다" 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그리고 둘은 친구가 된다 데뷔 당시의 캐치프레이즈는 '커다란 소니, 커다란 신인'.[6]

3. 활동

파일:010.gif

원래는 발랄한 이미지의 아이돌 가수였지만, 1978년도에 일본국유철도의 테마송으로 나온 <좋은 날의 여행(いい日旅立ち)>이 전일본적인 히트를 치면서 국민 아이돌이 되었다. 사실 마냥 발랄한 이미지의 아이돌 가수라고 보기도 어려웠던 게, 1974년 그녀의 첫 히트곡인 <어느 여름 날의 경험(ひと夏の経験)>은 15살 소녀가 부르기에는 가사 내용이 검열삭제스런 곡이었다. 일명 '소녀성'을 표현한 노래.[7][8] 그래서 당시 일본의 학부모 단체에서는 이 노래가 방송에 나오지 못하도록 단체활동까지 서슴지 않을 정도로 거세게 비난했다. 사실 본인도 이런 노래에 대해 심한 거부감을 느꼈으며, 그래서인지 노래를 부를 때마다 종종 뻘쭘해했다. 어쨌든 모모에는 처음부터 과감한 노래를 불렀기에 여느 아이돌과는 다르게 성숙한 이미지로 가수 생활을 하게 됐다.

그 이전에도 <가을의 코스모스(秋櫻)>라는 사다 마사시가 제공한 곡으로 아이돌 이미지에서 벗어나고자 했지만 <좋은 날의 여행>이 나오기 전까지 아이돌의 이미지에서 완전히 탈피하지는 못했었다. 이 가사의 내용은 원래 사다 마사시의 여동생 사다 레이코의 이야기로, 레이코가 결혼적령기가 될 무렵 그걸 걱정하는 자신의 어머니의 이야기를 다룬 내용이다. 모모에는 가족 이야기라면 지긋지긋해서 관심을 두지 않으려 했기에 이 곡을 이해하기 힘들어했지만, 훗날 결혼을 앞두고 "이 곡을 이제서야 이해했다"고 사다 마사시에게 이야기하며 그 노래를 은퇴 콘서트에서 불렀다.

10대임에도 40대를 연상케하는 중후한 보컬링이 특징. 이러한 특이점은 <曼珠沙華(만주사화)>라는 곡에서 절정에 달하여 엔카에서도 그 기질을 많이 보여주었다. <만주사화>의 경우 아키 요코 작사, 우자키 류도 작곡[9]인데, 이 작사/작곡가와 연계하여 그야말로 한 시대를 풍미하는 곡들이 수없이 탄생된다. 또 일본의 전설적인 싱어송라이터 타니무라 신지가 작곡한 "좋은 날의 여행"과 "이치에" 등은 평범한 틴에이저 아이돌은 절대 소화할 수 없는, 어른스러움이 물씬 풍기는 노래들인데, 모모에는 이 곡들을 연달아 히트시키면서 아이돌을 넘어서 명실상부한 일본의 가희(歌姬)로 우뚝 서게 된다.

햇병아리 아이돌을 넘어서 확고부동한 스타의 자리를 차지하면서 선곡의 자유가 그녀에게 주어졌는데, 그녀가 선택하여 취입한 노래들은 지금도 일본 가요계를 빛내주는 명곡들이다. 특히 타니무라 신지, 우자키 류도/아키 요코 콤비의 작품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전성기를 활짝 열어젖힌다. 고작 10대의 안목과 비전이라 보기 어려울 정도로 전위적이고 독창적이었으며 노련했던 것.
<만주사화> (1980). 섬칫할 정도의 카리스마와 아우라, 10대라고 도저히 보기 힘든 중저음의 보컬과 처연한 눈빛이 인상적이다.
시대를 뛰어넘은 명곡 <플레이백 Part.2> (1978).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냉담하고 무정한 음색, 표정, 제스처. 그녀의 퍼포먼스는 쿨&시크 그 자체였다.
모모에는 이 곡으로 홍백가합전의 홍팀 토리(마지막 무대)를 맡게 되면서 명실상부한 가요계 정상의 위치를 굳건히 한다. 70년대 중후반, 단 7년여의 활동기 동안 그녀가 만들어낸 매출은 당시 금액으로 700억엔. 이 금액은 물가를 고려해 현 시점의 조정환율로 산출해도 천문학적 수준이다.
일본국유철도의 캠페인이자 동명의 캠페인 송이었던 <좋은 날의 여행 (1978)>[10]
마지막 노래 <이별의 저편>.
팬들에게 헌정하는 노래로, 1980년 은퇴 콘서트에서 울먹이며 노래를 부르다 마이크를 무대에 내려놓고 퇴장하는 장면이 매우 유명하다.[11]

이 밖에도 퍼포먼스가 인상적인 <절체절명>, <요코스카 스토리> 등 약 7년 반의 활동에서 수많은 명곡을 남겼다. <좋은 날의 여행>, <이별의 저편>, <가을의 코스모스>는 아직도 일본 여가수, 심지어 남자 가수들도 콘서트 라이브에서 즐겨 부르는 노래이다. <만주사화>는 엔카 가수들에게 흔히 불리운다.
은퇴 30주년 기념[12] "야마구치 모모에 특집" 명곡 퍼레이드.
동영상 내내 탄식을 내뱉고 "凄い"(엄청나네) "かっこいい"(멋지다)를 연발하며 그녀의 아우라에 홀리기 시작하는 패널들의 표정도 포인트. 특히 광팬인 마츠모토 히토시는 진행자임에도 불구하고 넋을 뺀 표정으로 그녀의 퍼포먼스에서 눈을 돌리지 못한다. 실제 패널들의 대화에서도 그녀의 아우라는 그녀가 침묵하고 있어도 상대가 반해버릴 정도였다고 술회하는 장면이 나온다.

3.1. 결혼과 은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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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멋대로인 저를 용서해주셔서 고마워요.
행복하게 살겠습니다.
무도관 은퇴 콘서트에서의 야마구치 모모에[13]

당시 20살이었던 1979년 10월, 함께 영화를 촬영하며 친밀해진 7살 연상의 배우 미우라 토모카즈[14]와의 교제를 발표, 1980년 3월에 약혼 발표와 은퇴 소식을 알리고 10월 일본 무도관 콘서트에서 은퇴 콘서트를 연 다음 달인 11월 19일 미우라와 결혼 후 연예계를 은퇴하였다. 다만 아내와 달리 미우라는 아직도 연기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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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딩 사진. 둘 다 미모가 정점에 달했다.

절정의 인기가도를 달리고 있던 때에 은퇴했기 때문에 은퇴 이유에 대해 여러 추측이 있다. 언론에 대한 혐오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고, 후술한 가정환경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어서, 미우라와의 결혼은 그저 형식적인 동기부여라는 이야기도 있다. 그렇지만 결국 모모에 본인이 인정한 공식적인 은퇴 이유는 결혼이며, 평범한 주부로 돌아가서 가정을 돌보기 위한 것. 그 말대로 결혼 후에는 일절 미디어에 본인 측으로부터는 출연하지 않고 있다.

4. 은퇴 이후

은퇴 후 6년이 지나고 찍힌 영상. 결혼 은퇴 후, 1980년 NHK에서 홍백가합전에 출연 의사를 물었으나 고사를 했고, 1982년 안 루이스의 곡을 작사해준 것 외에는 공식적인 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종 매스미디어는 그녀의 행적을 집요하게 추적했었다. 카메라는 늘 그녀 곁을 떠나지 않았고 남편 미우라 토모카즈에 의하면 장남 유타로의 통학을 위해 자동차 운전면허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통원하는 날이면 늘 학원 주변에 카메라맨들이 북적였다고 한다. 보다못한 미우라가 일본 인권 옹호국에 요청을 넣어서야 진정되기는 했지만 모모에는 미우라에게 "자신이 한때 연예계에 있었다는 것을 후회하고 싶지 않다."라는 말을 했었다고 한다. 유타로의 입학식에도 인권 옹호국에 요청을 넣었으나 이번에는 담당자가 거부하였다. 어김없이 카메라맨들은 들이닥쳤고 카메라 앵글을 아이에게 줌인하자 아이가 무서워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보다못한 모모에가 해당 카메라맨에게 직접 귀싸대기를 날리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곧 주간지에도 보도되었다고 한다. 예전보다는 관심이 줄었들었지만 지금도 간간히 사진이 찍히는 걸 봐서는 어지간히도 모모에 가족을 괴롭혀왔던 모양. 아래는 은퇴 이후 찍힌 사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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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아이 탄생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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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오랜만에 포착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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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남편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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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가장 최근에 찍힌 사진.

2019년 7월, 은퇴 이후 30여 년간 만들어 온 퀼트를 집대성한 퀼트 작품집 『시간의 꽃다발』이 발간되었다. 모모에가 본인 명의의 서적을 [15] 발간하는 것은 1980년 은퇴 직전에 남긴 자서전 『푸른 시절』 이후 39년만이다. 이 책을 통해 작품에 얽힌 비화와 본인의 최근 사진까지 공개하였다고 하니 사실상 39년만의 셀털인 셈.

5. 여담

6. 발매 싱글

발매년도 제목 순위 비고
1973년 그럴 즈음 (としごろ) 37위
푸른 과실 (青い果実) 9위
금지된 놀이 (禁じられた遊び) 12위
1974년 봄바람의 장난 (春風のいたずら) 11위
한여름의 경험 (ひと夏の経験) 3위
작은 감상 (ちっぽけな感傷) 3위
겨울의 색 (冬の色) 1위
1975년 호수의 결심 (湖の決心) 5위
여름을 여는 청춘 (夏ひらく青春) 4위
작은 욕망 / 고마워요 당신 (さやかな欲望/ありがとうあなた) 5위
하얀 약속 / 산비둘기 (白い約束/山鳩) 2위
1976년 사랑에 달리고 / 빨간 운명 (愛に走って/赤い運命) 2위
요코스카 스토리 (横須賀ストーリー) 1위
펄 컬러에 흔들리고 (パールカラーにゆれて) 5위
빨간 충격 (赤い衝撃) 3위
1977년 첫사랑 책 (初恋草紙) 4위
몽선 안내인 (夢先案内人) 1위
이미테이션 골드 (イミテイション・ゴールド) 2위
코스모스 (秋桜) 3위
빨간 인연 (레드 센세이션) (赤い絆(レッド・センセーション) 5위
1978년 처녀자리 궁 (乙女座宮) 4위
플레이백 Part2 (プレイバックPart2) 2위
절체절명 (絶体絶命) 3위
좋은 날의 여행 (いい日旅立ち) 3위
1979년 아름다움 사일런트 / 만주사화 (美・サイレント/曼珠沙華) 5위
사랑의 폭풍 (愛の嵐) 5위
부드럽게 부르고 (しなやかに歌って) 8위
애염교 (愛染橋) 10위
1980년 사육제 (謝肉祭) 4위
록큰롤 위도우 (ロックンロール・ウィドウ) 3위
작별의 저편 (さよならの向う側) 4위
하나의 은혜 (一恵) 2위


[1] 결혼 전의 본명은 활동명과 같이 '야마구치 모모에'였으나, 미우라 토모카즈와의 결혼 이후 남편의 성을 따라 미우라 모모에가 되었다.[2] 태어난 곳은 시부야지만 자란 곳은 가나가와 현 요코스카 시로, 야마구치 모모에 본인이 요코스카 출신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요코스카로 표기.[3] 현재 히노데 고교는 2000년부터 남녀공학으로 바뀌었다.[4] 다른 2명은 미소라 히바리나카모리 아키나이다.[5] 그녀는 오디션에서 모모에의 싱글 <夢先案内人>을 불러 합격, 데뷔했다.[6] 원문은 '大きなソニー、大きな新人'.[7] 심야식당 코믹스에서 '리바운드의 여왕' 마유미가 불렀던 노래가 바로 이 노래다.[8] 여담으로 AKB48 멤버들도 이 노래를 불렀다. 그것도 미성년자 멤버들이(...).[9] 두 사람은 메이지대학 동문이자 부부이다. 또 두 사람 모두 가수, 배우 등의 일을 하는 엔터테이너이기도 하다.[10] 현재 도카이도, 산요 신칸센 JR 니시니혼 소속의 차량의 차내 멜로디로도 쓰이고 있다.[11] 이 노래는 장국영이 "바람아 계속 불어다오(風繼續吹/풍계속취)"로 리메이크해서 그의 대표곡이 되었다. 이 노래는 영화 종횡사해 삽입곡으로 나온 바 있다. 또한 장국영은 1989년 자신의 고별 콘서트에서 야마구치 모모에가 그랬던 것처럼 이 노래를 부르면서 울먹거렸다.[12] 은퇴한 지 수십 년이 지난 연예인을 기념하는 프로그램은 일본에서도 극히 드물다. 미소라 히바리나 이시하라 유지로와 같은 전설적 엔터테이너의 특집 프로그램은 종종 있지만, 살아있으면서 은퇴한 지 30년이 지난 흘러간 가수를 특집 프로그램으로 재조명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야마구치 모모에의 일본 내 위상을 역설하는 장면.[13] 장남인 미우라 유타로가 아라시니시야가레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저 하얀 마이크는 결혼 후 모모에의 집에 보관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린 유타로와 타카하로는 그 의미도 모르고 마이크를 꺼내서 놀았고(...) 아버지 토모카즈와 어머니 모모에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봤다고 회상했다.[14] 일본 드라마 유성의 인연의 카시와바라 형사, 장미 없는 꽃집의 의사원장, 도쿄 DOGS - 최악이자 최고의 파트너의 수사반장 역을 맡은 바 있다. 서부경찰오키타 고로 형사로도 유명하고.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 아웃레이지에서 보스를 배신하고 조직을 장악했다가 후속작에서 다시 후배들에게 뺏기는 야쿠자 역을 하기도 했다.[15] 다만 야마구치 모모에 명의가 아니라 결혼 후 명의인 미우라 모모에로 발간했다. 저자 소개 역시 전 아이돌/배우 정도로 짧막하게 설명해 아이돌 시절과 거리를 두고 있다.[16] 작가인 사쿠라 모모코가 모모에의 팬이라고 한다.[17] Peaky SALT. 현재는 밴드 활동은 멈춘 상태[18] 그 날 Peaky SALT의 짧은 출연 시간 대부분이 야마구치 모모에와 미우라 토모카즈에 관한 얘기만 하다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