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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무라 켄[1] 志村 けん|Shimura Ken | |
<colbgcolor=#ffffff><colcolor=#000000> 본명 | 시무라 야스노리 ([ruby(志村康徳, ruby=しむらやすのり)], Shimura Yasunori)[2] |
출생 | 1950년 2월 20일 |
도쿄도 키타타마군 히가시무라야마정 (現 도쿄도 히가시무라야마시) | |
사망 | 2020년 3월 29일 (향년 70세) |
도쿄도 신주쿠구 |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게닌, 사회자 |
부모 | 아버지 시무라 켄지 어머니 시무라 와코 |
형제자매 | 형 시무라 토모유키, 시무라 미사오 |
학력 | 도쿄도립구루메 고등학교 (졸업)[3] |
신체 | 169cm[4] |
데뷔 | 1972년 |
소속사 | |
동기 | 기타노 다케시 쇼후쿠테이 츠루베 |
SN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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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코미디언.2. 설명
그의 생전 대표 캐릭터인 바보 영주 (바카도노(バカ殿))로 분장한 모습 |
8시라구! 전원집합(8時だョ!全員集合)의 대표 콩트인 교실 콩트에 출연한 모습. |
시무라 켄과 사쿠라다 준코의 부부 콩트. |
일본 콩트 코미디의 본좌[6]이자 오와라이 빅3 이전 일본 예능 방송계의 황제로[7] 한국으로 치면 코미디의 황제로 불린 이주일과 비슷한 지위와 관록으로 볼 수 있다. 공교롭게도 생전 담배를 많이 피웠고 이것이 직간접적으로 사망과 관계되었다는 것도 두 사람의 공통점이다.[8]
별명은 일본의 희극왕. 예능계에서 후배들이 붙여준 별명 역시 에도 막부의 초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가리키던 별칭인 '오고쇼(大御所)'. 별명부터 그의 어마무시했던 위치를 쉬이 알 수 있다.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게닌(개그맨)이라면 타모리, 아카시야 산마, 기타노 다케시[9]의 '빅 3'[10][11] 정도이며 더 긴 경력과 1세대로서 이전 시대부터 최근까지 일세를 풍미한 점으로 이들보다 시무라 켄의 위상을 더 위에 두는 경우도 상당하다. 실제로 시무라 켄 사망 당시, 아카시야 산마가 "더 드리프터즈가 없었다면 나와 비트 다케시(기타노 다케시)의 대표작인 우리들은 익살족[12]도 없었을 것이다."라고 라이벌이자 후배로서 그에게 존경심을 표하는 추모 메시지를 남기기도 했다.#
1970년대부터 TV를 점령했던 게닌 1세대로, 60대의 고령임에도 예능계에서 왕성한 활동을 보였다. 일에 몰두하느라 결혼도 안 했으며,[13] 그 명성과 어마어마한 재산 때문에 접근한 이들이 많지만 모두 이어지진 못했다.[14] 원로 게닌임에도 비교적 최근까지 각종 버라이어티에 활발하게 등장했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고령층부터 젊은층까지 어마어마한 범위의 세대를 아우르는 국민적 인지도를 자랑했다.[15]
국내에서 시무라 켄의 인지도를 한국으로 치면 이경규에 비교하는 글이 이따금 보이지만 사실 국내에서 시무라 정도의 경력에 이정도로 폭넓은 세대에서 인지되는 개그맨은 선뜻 예시를 들기가 어렵다. 굳이 비슷한 사람을 찾자면 오히려 바보 영주 - 영구와 같은 상징적인 캐릭터가 존재하는 심형래나 깊은 관록의 원로 개그맨인 이주일이 전성기의 폼을 어느정도 유지하면서 최근까지 꾸준히 활약한 것으로 보는게 가장 정확하다.
굳이 2020년 비교될 만한 인물을 찾아보자면 한국에 대입시킬만한 인물은 이경규가 맞는 편이다. 이경규와는 10살 차이긴 하지만, 비교할만한 한국의 스타중에서 가장 근접한 나이대고 일본이 아무래도 예능계 발전이 빨랐다보니 데뷔와 활약 당시의 상황이 비슷했던 편이다. 행보면에서도 두 사람 모두 자신들을 대표하는 프로그램[16]으로 최전성기를 구가했고 이후 잠시 침체기를 겪었지만, 트랜드에 맞게 자신들의 개그를 변형시키며 부활에 성공했다. 노년이 된 후에도 예능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나올 때면 망가지는 역할은 물론이며 후배들에게 공격당하는 역할도 잘 소화하며 재미를 보장하고 있다는 점 또한 같다. 그리고 이경규 역시 10대부터 노인층까지 한국인 대부분이 아는 인지도를 가지고 있다.
대선배인 우에키 히토시가 노력하는 범재의 인상이 강하다면 이쪽은 게으른 천재. 웃기는 건 일본 제일이라 자부하던 카토 챠를 2인자로 만든 일본 코미디계의 1인자다. 그러나 사후 나카모토 코지 등 주변인들의 회고에 의하면 게으른 천재와는 거리가 멀었으며, 오히려 노력가이자 완벽주의자였다고 한다.
드리프터즈 멤버 중 가장 막내인데, 자주 노인 분장을 맡았다. 이카리야 쵸스케 생전에 같이 찍은 영상을 보면 또래로 보인다. 참고로 둘의 나이 차이는 19살. 이카리야가 일찍 결혼했으면 아들뻘이다. 시무라는 후배 다운타운과 함께 한 토크쇼에서 "그런 사람을 무대 위에서 사정없이 때려대는 게 또 재미있는 점 아냐" 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일본의 학부모 교사 연합회(PTA)가 좋아하는 프로그램, 싫어하는 프로그램을 동시에 프로듀스하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천재 시무라 동물원'은 '어린이에게 보여주고 싶은 프로그램'에 거의 매번 들어간다. 싫어하는 프로그램은 '바보 영주'로 아이러니하게도 섹드립[17] 때문이 아니라 수박 빨리 먹기, 파이 던지기 등 먹을 것을 낭비한다는 컨셉 때문에(...) '어린이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프로그램' 10위권 안에 항상 들어간다.
말년에는 주로 잘나가는 사회자로 활동했지만 사실 콩트 코미디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다. 80년대부터 만자이나 토크쇼 위주로 트렌드가 바뀐 일본 방송가에서도 자신은 토크에 약하다며 토크쇼에 게스트 출연하는 것을 거부하고[18] 계속해서 콩트 코미디를 만들며 최전선에서 뛰었다.
시무라 군이나 수염 댄스, 부부 콩트 같은 시무라 켄의 개그는 당시 한국 개그 프로그램에서 많이 참고해갔다. 하지만 말이 참고 수준이지 아예 표절인 경우도 허다했는데 1970년대와 80년대 당시에는 개편철만 되면 예능 PD들이 포맷이나 아이템 구성을 하기위해서 부산에 내려간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왔고 아이디어가 떨어진 출연진들이 일본 프로그램에 나온 콩트 내용까지 베껴 써먹기도 했다. 그래서 1970~80년대에 대한민국애서 방영한 코미디 프로그램들을 보면 일본스러운 색채가 은근슬쩍 나기도 했다.
특히, 시무라 켄 같은 스타일의 캐릭터와 코너로 재미를 많이 본 대한민국 개그맨들이 비로 이주일, 심형래, 이창훈이었다. 그래서 대한민국 코미디계의 대표적인 바보 캐릭터들은 모두 시무라 켄의 영향권 안에 있다는 말까지 하는 사람도 있다. 이경규나 이봉원도 일본 유학 시절에 비트 다케시나 시무라 켄의 연기를 깊게 연구한 적 있으며 이경규는 일본 방송국에서 실제로 시무라 켄과 대면한 적도 있다. 하지만 시무라 켄이 그다지 이경규에 대해 흥미를 보이지 않자 실망하고 절치부심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19]
3. 커리어
가부장적인 엄격한 가정에서 3남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군인에 교감까지 역임한 엄한 아버지 때문에 집안은 항상 무거운 분위기여서, 당시에는 드물었던 텔레비전의 개그 프로그램 혹은 라쿠고를 보면서 우울한 기분을 잊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근엄함을 유지하겠다고 웃음을 억지로 참아가며 코미디 방송을 시청하고 있는 것을 보고, 아버지가 겉으로는 엄하지만 저런 것을 좋아하는 의외의 면모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며, 이 때의 경험을 계기로 중학교 때부터 게닌을 지망하게 되었다고 한다.어머니는 시무라 스스로가 '나의 가장 큰 팬'으로 칭할 정도로 아들의 예능을 좋아했고 바보 영주에도 출연해서 "야스노리, 왜 결혼을 안 하는 거니?"[20] 하는 대사를 하기도 했다. 시무라의 어머니는 2015년에 96세로 별세.
그 근엄의 시절.
이후 1968년 고교 졸업 직전에 유명한 밴드이자 콩트 그룹인 더 드리프터즈(ザ・ドリフターズ - The Drifters 줄여서 '도리후')의 심부름꾼[21]으로 개그맨 활동을 시작[22], 1972년에 역시 다른 선배의 심부름꾼을 하고 있던 이야마 준(井山淳)과 함께 개그 콤비 맥 봉봉을 결성해서 연예계에 데뷔했다. 당시 그의 예명은 오늘날과 발음이 똑같고 표기만 다른 志村健. 게다가 보케가 아닌 츳코미 역할이었다고 한다.
한동안 견습생으로서 관객들에게 소개되던[23] 시무라 켄은 1974년 3월 31일, 아라이 츄의 탈퇴와 함께 정식으로 도리후의 멤버가 된 후 일본의 전설적인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인 <8시라구! 전원집합(8時だョ!全員集合)>[24]에 레귤러로 출연을 시작했다.[25] 처음에 그는 도라후의 다른 멤버들과는 이질적인 콘셉트로 그다지 큰 인기를 얻지 못하였지만[26] 1976년 자신의 고향을 주제로 한 테마곡 히가시무라야마 타령이 대히트한 것을 계기로[27][28] 차츰 역량을 발휘하기 시작하여 수염 댄스(77년)를 비롯한 히트 코미디를 양산하며 70년대 후반부터는 도리후 내에서도 가장 큰 인기를 얻는 멤버가 된다. 전원집합과 동시기에 방영한 녹화 콩트 프로그램 드리프 대폭소에서도 에이스 멤버로 활약했다. 도리후 시절에는 주로 연령대가 비슷한 카토 챠와의 콤비 플레이로 유명하였다. 두 사람의 콤비는 "카토켄"이라는 애칭으로 일본 대중들에게 무척 친숙하다.
1985년 전원집합이 종영한 이후 시무라 켄은 <카토쨩 켄쨩의 기분 좋은 TV (1986 ~ 1992)>[29] , <바보 영주 (1986 ~ 2020)>, <시무라 켄의 괜찮다 (1987 ~ 1993)>[30][31]등으로 제 2의 전성기를 맞았다. 이 시기에 우에키 히토시의 히트송 '운쟈라게'를 커버하여 마찬가지로 히트시켰다.
하지만 90년대 들어 다운타운, 웃짱난짱으로 대표되는 오와라이 3세대가 떠오르기 시작하면서 시무라 켄은 점점 방송에서 설 자리를 잃었고 1996년에는 사망설까지 나올 정도로 슬럼프를 겪었다. 그러나 당시 시무라는 칸무리 프로그램 몇 개가 종영했을 뿐 딱히 입원할 만한 건강상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사망설의 정확한 근원은 지금도 여러 가지 설만 떠도는 상태이다. 같은 드러프터즈의 일원 타카기 부가 전해들었던 발생 원인 중 하나는 '시무라 켄'이라는 전혀 다른 사람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와전되었다는 것. 본 항목 시무라의 본명은 '켄'이 아닌 '야스노리'이므로 코미디언 시무라가 사망했다면 병원 차트에도 '시무라 야스노리'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이후 어릴 때 시무라를 보며 자란 후배 연예인들의 언급을 통해 다시 대중들의 주목을 받은 시무라는 2000년대 부터 각종 예능 버라이어티에 게스트로 출연을 시작, 2004년부터 방영을 시작한 <천재! 시무라 동물원>의 성공으로 마침내 제3의 전성기를 맞으며 다시 활발히 활동했다. 다만, 단독 개그는 바보 영주 정도만 이어나갔으며, '시무라 동물원'을 제외한 대부분의 방송 활동은 토크 프로그램 게스트, 코미디 프로그램 사회자 및 심사위원 등에 집중되어 있었다. 고령에다 일본 예능계에서의 입지에도 불구하고 망가질 때는 여전히 사정없이 망가졌다.
2016년에는 기린맥주의 츄하이 효케츠(氷結)의 텔레비전 광고[32]모델로 출연하여 초반엔 시그니처 캐릭터인 바카도노 분장을 하고 특유의 바보 연기를 보여주다가 장면이 바뀌면서 진지한 표정으로 멋들어지게 샤미센을 연주하는 모습을 보였다.[33] 이 광고에서 시무라는 그가 기간 한정 멤버로 활동한 도쿄 스카 파라다이스 오케스트라와 시무라의 샤미센 스승인 아가츠마 히로미츠와 협연을 선보였다. 참고로 시무라는 아가츠마에게 약 10년 동안 샤미센 연주를 배웠다고 한다. 이처럼 시무라는 노년기에 접어들면서 그동안 바보 연기에 가려졌던 간지나는 모습이 재조명 되기도 했다.
3.1. 사망
복수의 매체를 통해 시무라 켄이 2020년 3월 17일부터 피곤함을 보였고 19일에는 발열과 호흡곤란 증상을 일으키며 20일에 입원, 23일에 코로나 19 양성 판정을 받았다는 소식이 보도되었다. 시무라는 한때 하루에 담배 60개비를(3갑) 피우는 골초였으며, 2016년 폐렴으로 사경을 헤멘 후 이를 계기로 담배를 끊었지만, 그 당시의 폐 손상이 여전히 남아 회복이 더뎠다고 한다. 입원 중 잠시 상태가 호전되기도 했었으나 26일부터 상태가 다시 악화되어 인공 심폐기기까지 동원하여 집중 치료에 들어갔지만,#1 #2 결국 3월 29일 밤 11시 10분에 도쿄 도내 소재 병원에서 향년 70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1 #2감염 경로는 불명이나, 지인들의 말로는 장사를 하고 있는 지인들이 코로나 사태로 인한 경영난을 호소하자 이들을 격려하기 위해 시무라가 매우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돌아다녔다고 한다. 금전적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고. 정황상 시무라 켄은 도쿄 긴자의 고급 유흥주점 후지사키에 들렸다가 코로나에 감염된 것으로 추정된다. 3월 24일 후지사키의 마담과 호스티스 2명이 코로나 양성 판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시무라 켄의 사망 사실은 3월 30일 오전에 알려졌는데 이 시간대에 일본 지상파에서는 생방송으로 아침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도중이었고, 상단 자막으로 속보를 내보내며 시무라 켄의 사망 소식을 일제히 알렸다. 각 방송국에서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진행자나 패널들은 놀라움과 함께 고인의 사망을 추모하는 분위기로 방송을 이어갔으며, 특히 닛테레의 아침 정보 프로그램인 슷키리에 패널로 출연 중인 콘도 하루나[34]는 고인을 추모하며 오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고인의 사망에 대해 연예계 각지에서 추모의 목소리가 나왔으며, 정계에서도 고인을 애도하는 코멘트가 나왔다. 더 드리프터즈의 다른 멤버들도 "이카리야 씨 다음이 우리 중에 가장 젊은 시무라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죽기 전에 다 같이 콩트를 한 번 더 해 보고 싶었는데 우리보다 먼저 가다니..."라며 비통함을 감추지 않았다.
사망 사실이 알려진 당일 대한민국의 포털 사이트 등에서도 시무라 켄의 이름이 실시간 검색어 상위권에 오르고 언론 등에서 소식으로 보도되기도 했다.
사망하기 직전 시무라 켄은 2020 도쿄 올림픽의 성화 봉송주자로 선정되었으나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때문에 시무라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고 말았고 올림픽도 1년 연기가 되어버렸다.
비슷한 시기에 미국에서는 유명 배우 마크 블럼이 코로나 19 감염으로 사망했는데 둘 다 1950년생 동갑이다. 이렇듯 유명인의 사망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의 위험성에 대해서 경각심을 더 느낀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실제로 일본은 얼마 전까지 코로나의 심각성에 대한 인지가 약해 꽃놀이 가자는 분위기가 꽤 있었으나 시무라의 죽음으로 인해 그동안 밀집지역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모여 사실상 통제가 안되던 일본의 거리가 한산해지는 등, 젊은 층 위주로 위기감을 갖자는 의견이 확산되고 있다.
NHK는 고인을 추모하는 의미에서 사망 발표가 난 당일 오후 11시 50분에 고인이 출연했던 패밀리 히스토리를 긴급 편성해 재방송했으며, 2020년 4월 4일과 5일 추모 프로그램을 추가 편성 및 방영, 6일에는 츠루베 가족에 건배에서 예정되어있던 방송을 뒤로 미루고, 과거 2010년 3월 29일과 4월 5일에 방송한 것을 재구성해 추모 프로그램을 편성해 방영했다. 생전에 출연해 5월 초에 등장할 예정이었던 연속 TV 소설 방영분도 방영했다. 후지 테레비에서는 4월 1일 오후 7시부터 시무라 켄 추모 방송을 편성해 방영했으며, TV 아사히 역시 4월 5일에 특집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고인이 생전 출연했던 후지 테레비의 시무라로 나이트(志村でナイト)는 4월 1일부로 종영했다. 해당 프로그램 자체는 2018년 10월 10일부터 시작했었지만, 실질적으로 1996년 10월 9일부터 계속된 시리즈로, 같은 시간대에 제목, 출연진, 설정을 바꿔가며 시무라 켄의 콩트 개그를 방송하는 고정 프로그램이였다. 4월 29일부터는 동시간대에 시무라로 나이트의 출연진이었던 언터처블의 시바타, 치도리의 다이고가 진행을 맡고, 생전의 시무라와 교류가 있었던 게스트[35]를 초청하여 함께 시무라의 콩트를 보면서 시무라 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무라 친구(志村友達)'가 편성되어서 시리즈의 계보를 이었으며, 2021년 3월 24일에 동 프로그램이 종영되면서 25년에 걸친 시무라 켄 시리즈의 막을 내렸다. 레전드급 프로그램이 편성돠었던 시간대라는 중압감을 생각해서인지 종영 후 당분간은 해당 시간대에 다른 프로그램을 편성하지 않고 드라마 재방송 시간대로 활용할 예정이라고 한다.
닛폰 테레비의 시무라 동물원은 시무라 켄의 사망 이후 시무라 켄 특집 방송을 편성해 그를 추모하는 시간을 가졌다.[36] 한동안 프로그램은 시무라 동물원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유지한채 아이바 마사키를 메인 MC로 내세워 프로그램을 이어나갔으나 이후 제작진 측은 같은해 7월 발표에서 "시무라 씨의 조언으로 설계하고 시무라 씨의 추억이 담긴 스튜디오에서 시무라 씨라는 존재없이 프로그램을 계속 이어나가기가 어려워 내부 논의를 거쳐 9월 방영을 끝으로 종영을 한다."고 발표했다. 시무라 동물원 종영 이후로는 시무라 동물원에서 메인 MC를 맡던 아이바 마사키가 MC를 맡아 'I LOVE 모두의 동물원(가제)'을 방영한다.기사
고인의 시신은 코로나 전염의 우려가 있어 유족들[37]조차 사망하는 순간이나 이후 화장 절차까지도 함께하지 못했으며, 곧바로 화장 처리한 유골이 유족에게 인계됐다. 시무라의 3살 위인 형은, 동생의 마지막 모습을 보지 못했다고 오열하며 인터뷰하기도 했다.
2021년 6월 21일 고향 히가시무라야마시에 동상이 세워졌다.# 영상에는 유족 대표로 시무라 켄의 형님 중 한 분이 나왔는데 한 눈에 보아도 형제라는 것을 알 만큼 닮았다.
2021년 12월 27일, 후지 TV에서 특집 드라마 시무라 켄과 도리후의 대폭소 이야기가 방영 되었는데 여기서는 시무라 켄의 어린 시절(회상으로 등장), 드리프터즈의 심부름꾼, 정식멤버를 거쳐 중견 개그맨이 되는 과정과 카토 챠, 이카리야 쵸스케와의 인간 관계를 담고 있다. 특히 드라마 중간에 나오는 도리후의 여러 일들과 콩트는 그 당시와 싱크로율 100% 이다. 여기서 시무라 켄 역할은 야마다 유키가 맡았고 특히 이카리야 쵸스케 역의 엔도 켄이치는 팬들이 전부터 예상했던 캐스팅이라 더욱 주목을 받았다. 시무라 켄의 소울 메이트 카토 챠는 카츠지 료가 호연했다.
4. 주요 캐릭터
- 이상한 아저씨(変なおじさん): 원형 탈모에 분홍색 내복, 거기다 복대라는 OME스러운 패션으로 총 무장한 아저씨. 시무라의 칸무리 방송인 '괜찮다(だいじょうぶだぁ)'에서 최초로 등장했으며 주 패턴은 아리따운 여성의 근처로 침투하여 변태적이고 엽기적인 행각을 일삼다가 여성의 보호자들에게 들키는 순서. 오키나와 민요인 하이사이 오지상을 패러디한 '헨나 오지상'이라는 노래와 춤을 불러 히트했으며, 정체가 들켰을 때 "뭐야 좌네는(なんだチミは)!"[38]라는 소리를 듣고 "그렇습니다. 제가 이상한 아저씨입니다!(そうです、 私が変なおじさんです!)"라고 대답하며 상기한 헨나 오지상 춤을 추는 패턴은 시무라를 대표하는 명대사로 회자되고 있다. 시무라 본인이 이 민망한 의상을 입고 편의점에서 물건을 사 오는 벌칙 미션을 수행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후배 코미디언들을 대상으로(남녀 불문) 제2대 이상한 아저씨를 뽑는 행사까지 열렸을 정도. 시무라의 노화로 인한 시력 저하 때문인지 최근에는 얇은 안경을 쓰고 등장하여 세월의 흐름을 보여주기도 했다. 바보 영주에서도 이 캐릭터가 종종 출연하였다.
- 시무라 군 : 8시다 전원집합 시절의 교실 콩트에서 등장한 캐릭터. 콩트에 출연하는 학생들 중 교실에서 가장 열심히 나대며 수업을 방해하고 이카리야 선생님의 화를 돋구는 말썽쟁이 캐릭터이다. 예를 들어 이카리야 선생이 일본 지도를 펴놓고 출연진에게 각 지역을 설명하라고 하는데, 시무라 혼자만 홋카이도를 "기타카이도"로 읽고 시코쿠는 "욘고쿠"로 읽어서[39] 나머지 출연진들이 발랑 나자빠지게 만든다. 8시다 전원집합 오프닝 콩트에서 시무라 켄이 맡은 캐릭터들 중에서 대중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았던 캐릭터로 봉숭아 학당의 맹구도 시무라 군의 컨셉을 일정 부분 차용한 것이다.
- 히토미 할머니(ひとみ婆さん): 나이가 들어 눈도 어둡고, 귀도 어두운 데다 손도 떨고 졸음도 많아 주변의 속 터지는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개그 캐릭터. 그야말로 젊은이들이 노인들에게 느끼는 답답한 기운을 극한까지 끌어올려 웃음으로 승화한 캐릭터이다. 노화 때문에 "뭣이라고?(なんだって?)"를 입에 달고 살며, 자기를 애칭으로 '히짱(ひぃちゃん)'이라 부르길 요구하는 부담스러운 할머니. 심지어 지금보다 수위가 훨씬 높던 80년대 시절에는 용변 조절이 잘 안 된다거나 처지는 가슴을 내놓는[40] 흠좀무한 개그까지 했었다. 보통 스튜어디스나 가이드, 점원, 마사지사, 아들을 찾아 상경한 할머니 등의 역할로 출연하며 이때 걸음걸이나 발음 등 하나하나 디테일한 노인 연기에 감명을 받았다는 후배 코미디언들의 증언이 많다. 시무라는 24살에 드리프터즈의 정식 멤버가 된 직후부터 팀 내 최연장자인 이카리야 이상으로 노인 연기를 많이 해 왔다.
- 부부 콩트: 전원집합 시절(70년대 중반)부터 시무라 켄이 사망하기 전까지 조금씩 변형을 거쳐 이어져왔던 유구한 역사의 콩트. 게스트로 출연한 여성 출연진들과 콤비를 짠다. 그 종류로는 보케 천연 새색시가 "난 몹쓸 여자로군요(私ってダメな女ね)" 하며 과도하게 비관적으로 나오면 시무라가 이를 달래주는 콩트, 바가지 긁는 아내를 주체하지 못하고 부부싸움에 이르는 콩트, 손님들 앞에서는 생글생글 웃는 아내가 남편 앞에서는 무서운 악처로 돌변하는 콩트 등 매우 다양하다. 지금까지 아내 역을 맡아 봤던 여성 스타들로는 사쿠라다 준코, 마츠다 세이코, 마츠모토 이요, 이시노 요코, 호리 치에미, 켄 나오코, 유카 그리고 일회성 출연이었지만 마츠코 디럭스(...) 등이 있다. 드물긴 하지만 과거에는 사와다 켄지가 남편, 시무라가 부인으로 여장하여 진행한 부부 콩트도 있었다.
- 수염 댄스(ヒゲダンス): 카토 챠와의 콤비. 엄청나게 큰 콧수염을 붙이고 배경음악에 맞춰 춤을 추며 흡사 김병만의 달인(개그콘서트)처럼 다양한 기예를 선보인다. 다만 이쪽은 거의 대사가 없고 류담과 같은 소개 역도 없어서 진행이 매우 다르며, 순수하게 중심 잡기, 칼에 과일 던져서 꽂기 등의 기예만을 보여준다. 수염 댄스 테마곡
- 신(神様): 드리프 대폭소에서만 등장한 캐릭터. 분명 일본의 전통 복장을 입긴 했는데 얼굴에는 매우 안 어울리는 동글 안경을 쓰고 있어 몹시 튄다(...). 등장인물들이 신에게 소원을 빌거나 '카미(神)'와 일본어 발음이 같은 단어들로 말장난을 할 때마다 등장한다. 신을 영접한 등장인물들이 "당신은 신인가요?"(あなたは神様ですか?)하고 물으면 "그럴리가 있냐, 난 신이라구."(とんでもねえ、あたしゃ神様だよ)라며 동문서답한다. 물론 등장인물들에게 하나도 도움은 되지 않는다.
5. 유행어
- 도리후 시절 만들어낸 유행어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역시 히가시무라야마 타령. 시무라가 무대에서 이걸 부르려 하면 이카리야가 "매번 변함없이 재미 없으니까 그만 하라"며 제지하고, 시무라가 관객들에게 "그럼 올해는 그만할까요?" 하고 물어서 관객들의 호응을 유도하는 것이 고정 패턴. 4번가에서 1번가로 갈수록 점점 막장이 되어가는 무대 매너가 일품.[41]
- 시무라는 종종 히가시무라마야 타령을 부르면서 백조의 호수 패러디라며 가랑이에서 백조 머리가 툭 튀어나오는 발레 복장을 하고 나왔는데, 이것이 일본 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일본의 창작물에서 가랑이 사이에 백조 머리가 달린 옷이 나오면 이것을 패러디한 것이다.[42] 다만, 일본의 발레리나 중에서는 시무라가 발레를 모욕했다며 그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다소 선정적일 수 있어 링크로 대체한 사진
- 그 밖에 대표적인 유행어로는 바보 영주에서의 "아잉~"[43] 츳코미 하면 떠오르는 말투인 "오마에, 소레와 나이다로(너, 그건 아니지)!"가 있다. 참고로 일본 수어에서 아잉~ 포즈는 시무라 켄을 의미한다.
- 한국에서 가위바위보를 하기 전에 "안내면 진거!"를 하듯 일본에서는 가위바위보를 하기 전에 '처음에는 바위!(사이쇼와 구!)'라고 외치고는 하는데, 이것도 시무라 켄이 고안해 낸 것이다. 8시다 전원집합 녹화를 마치면 도리후 멤버들은 항상 스태프들과 모여서 뒤풀이로 술자리를 가졌고 술자리가 파하기 전에는 술값 내기를 했다고 한다. 이때 시무라 켄의 제안으로 술에 취한 상태에서 게임에 집중하고 심리전에 말리지 않기 위해서 첫 번째내는 걸 주먹으로 정하고 가위바위보를 하기 시작했는데 이 규칙을 기반으로 시무라 켄과 나카모토 코지가 전원집합의 코너 중 하나로 가위 바위 보 코너를 만들었고 해당 코너가 유행, 일본 전역으로 퍼져서 이제는 일본인 전부가 사용하는 말이 되었다. 그리고 2000년대 후반 이후에는 이것이 한국 코미디언들에 의해 수입되어 "남자는 주먹 가위바위보"로 정착했다.[44]
6. 대인관계
6.1. 오와라이 BIG 3와의 관계
- 비트 다케시: 시무라보다 3년 연상이지만 1972년에 연예계에 같이 데뷔한 비트 다케시는, 칸 영화제의 인터뷰에서 "다케시 군단은 드리프터즈를 의식해서 만들어졌다"라고 말할 정도로 드리프터즈에 가입해서 먼저 브레이크한 시무라의 개그를 무척 높게 평가하였다. 그 결과 1999년에 1년간 방영했던 "신출귀몰! 타케시무켄"에서 같이 공연한 이후, 두 사람이 여러 방송이나 특방에서 같이 나오는 횟수가 많아졌다. 특방의 엔딩으로 다케시의 텝댄스와 시무라의 샤미센의 협연을 하기도 했다. 이런 교류를 통하여, 두 사람은 다른 연예인들과 회식을 마치고 자기가 내겠다고 좋게 다투는 에피소드도 나올 정도로 친한 사이가 되었다.
- 타모리: 두 사람 모두 전국민적인 인기를 얻는 게닌으로 자리잡고 서로 취미나 기호가 비슷하다[45]는 것을 알게된 후 사적으로 친하게 지내는 사이로 발전했다. 다만, 친해지기 전까지는 애매한 관계였다. 나이는 타모리가 시무라 켄보다 많지만 시무라 켄이 연예계 데뷔를 먼저한 선배에다 타모리가 게닌으로 데뷔할 무렵에 이미 시무라 켄은 게닌으로서 한창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무라 켄은 대본과 합이 칼같이 정해져있는 콩트 코미디를 주로 하는 코미디언이었다면 타모리는 자유로운 애드립을 섞어서 토크를 하는 예능 프로그램의 사회자로서 성공했다. 실제로 시무라 켄은 한 인터뷰에서 "타모리의 인간성이나 개그 실력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로 그의 개그 스타일은 내 취향이 아니다."리고 말하기도 했다. 게다가 시무라 켄은 콩트 코미디에 대한 애착이 강해서 자신은 토크가 약하다는 이유로 예능 프로그램 출연에 NG를 걸었기에 타모리의 대표 프로그램인 <모리타 카즈요시 아워! 웃어도 좋다고!>의 텔레폰 쇼킹 코너에 카토 챠의 소개로 2007년에서야 처음 출연했다. 이때 두 사람은 서로 편하게 토크를 주고 받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후 시무라 켄은 2013년에 나오코 켄과 함께 "켄켄 ♀♂"으로 게스트로서 다시 한번 출연했다. 이외에 타모리가 진행하는 <정글TV : 타모리의 법칙>과 뮤직 스테이션에 시무라 켄이 게스트로서 출연하기도 했다.
- 아카시야 산마: 오와라이 Big3 중에서 유독 아카시야 산마가 시무라 켄을 어려워했는데 그 어떤 게스트가 나와도 기가 안죽고 분위기를 주도하는 산마가 어려워하던 몇 안되는 선배가 시무라 켄이었다. 그래서 두 사람이 방송에 같이 출연한 적도 아카시야 산마의 대표 칸무리 방송인 <산마노만마>에 시무라 켄이 게스트로 1번 출연한 것을 제외하면 전무하다. 일단 개그 스타일[46]과 고향[47]이 다른 것도 이유 중 하나겠지만 데뷔 시기부터 전성기 기간, 심지어 나이까지 산마가 완전히 후배여서 그렇다. 딱히 시무라 켄이 군기를 잡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시무라는 산마의 개그 실력을 높이 평가했고 산마와 사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6.2. 다른 게닌들과의 관계
- 도리후의 멤버들 중 동기나 후배 게닌들과의 사이가 가장 좋았다. 비슷한 시기에 데뷔하고 개그 스타일이 제법 일치하는 요시 이쿠조나 이웃지역 출신이자 교우관계인 도코로 죠지 하고도 친한 사이였다.
- 쇼후쿠테이 츠루베와도 친해서, 가족끼리도 친하고 매년 1월 1일 같이 프로그램을 할 정도였다. 사후 시무라의 집을 방문한 츠루베는 자신이 시무라와 함께 찍은 사진을 오린 게 영정사진으로 있었다고 회고했다.
- 톤네루즈에게 연예계 활동에 대해 많은 조언을 해주는 멘토 역할을 했다고 한다. 톤네루즈에게 소속사 오피스 A to Z에서 독립하여 그들만의 전용 소속사를 만드는게 어떠냐고 처음 제안한 것도 시무라 켄이었다고. 사적으로도 친했다. 원래는 이시바시 타카아키와 중학교 시절부터 찬했던 친구[48]가 시무라 켄의 매니저로 들어간 것이 인연이되어 시무라 켄과 이시바시가 친하게 지냈으나 나중에는 오히려 시무라와 키나시 노리타케의 사이가 무척 좋아진 나머지 한때는 키나시와 시무라 두 사람이 콤비를 결성해서 활동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 후배 중에서는 타카 앤 토시를 가장 아끼는데, 타카 앤 토시의 개그 스타일을 마음에 들어 하며 호평하였고, 이후에도 바보 영주에 타카 앤 토시가 자주 등장했다.
- 하마다 마사토시하고도 의외로 친한 사이인데, 이카리야를 대신하여 시무라를 때리거나 시비 거는 존재는 하마다가 유일하다고 말했기 때문.[49] 이후 리액션 개그에 능력이 부족한 게닌들의 실력을 향상시키는 새해 특방에서 같이 활약했다.
- 칸사이 게닌인 치도리도 의외로 시무라 켄에게 "그들의 만자이는 장인의 경지다"라고 높은 평가를 받았다.
7. 신인 예능인 발굴
- 생전 시무라 켄은 코미디언이 아닌 연예인들 중 뛰어난 개그 감각을 가졌다고 느낀 사람들을 자신의 콩트 방송에 적극적으로 출연시켜서 이들이 인기 예능인으로 할동할 수 있는 기틀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 일본의 배우 에모토 아키라의 코미디 연기력을 눈여겨봐서 자신의 콩트 방송에 출연해달고 부탁했다. 이후 에모토는 시무라의 콩트 방송에 단골로 출연하는 게스트가 됐고 시무라의 페르소나적 존재로 개성적인 캐릭터들을 연기해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에모토는 "콩트는 시무라씨와 밖에 하지 않는다"라고 말할 정도로 시무라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
- 일본의 가수 타시로 마사시의 끼를 인정해서 자신의 콩트 방송에 레귤러로 출연시키며 타시로 마사시가 '말장난의 제왕'이라는 수식어를 지닌 인기 예능인으로 활동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시무라는 그의 동료 쿠와노 노부요시의 개그 감각도 높게 평가했고 바보 영주의 주요 배역인 가로를 맡은 원로 코미디언 아즈마 하치로(東八郎)가 사망하자 2대 가로 역으로 쿠와노 노부요시를 캐스팅하였다. 타시로 마사시가 2000년에 지하철에서 여성의 속옷을 도촬하려다가 체포당하고 2001년에는 각성제 소지와 사용이 발각되어 다시 체포되자 시무라 켄과 쿠와노 노부요시는 타시로에게 격노하여 "그 새끼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악의 짓을 저질렀다. 그의 존재를 연예계에서 완전히 없애고 싶다"는 코멘트를 남겼다.
- 일본의 가수 출신 배우 이시노 요코의 개그 감각을 인정해서 자신의 콩트 방송에 레귤러로 출연시키며 그전까지 별 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던 연예인인 그녀가 예능인으로서 대중들에게 인기를 얻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이시노 요코에게 "콩트 연기는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경험과 감성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너는 절묘한 개그 감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함께 콩트를 할 때 기분이 좋다"라고 칭찬을 한 적도 있다고 한다.
8. 사생활
- 사후 카미누마 에미코[50] 등 업계인들이 밝힌 바에 따르면, 실제 성격은 낯을 가리고 굉장히 신사다운 성격이었다고 한다.
- 생전 인터뷰에서 "나는 분장을 하지 않으면 사람들을 전혀 웃기지 못한다."고 말할 정도로 코미디언이 아닌 생활인으로서의 시무라 켄은 누가 봐도 문화인이었다. 그러나 생전의 시무라 켄은 코미디언으로서의 이미지가 옅어질까봐 자신이 대중들에게 문화인으로 비춰지는 것을 굉장히 싫어했다고 한다. 시무라 켄은 자서전 <이상한 아저씨>에서도 "방송에서는 절대로 자신의 평소 생활상을 보여주지 않을 것이다."라고 서술하였다.
- 평상시 롤스로이스, 스트레치드 리무진을 이동에 사용했으며 메르세데스-벤츠 V클래스 V350, 닷지 램 밴, 캐딜락 에스컬레이드 등 고가의 자동차를 많이 소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다만 시무라 켄은 생전에 운전면허를 따지 않았기 때문에 전용 운전기사를 고용해서 자신의 차를 몰게했다고 한다.
- 경마를 좋아해서 직접 경주마를 소유하기도 했었다. 일본 중앙경마에서 약 15두 정도의 말을 소유했었다고. 시무라 켄 본인이 직접 인터뷰 등에서 언급한 적이 있고, 경마장에도 여러번 얼굴을 비추었지만 어째선지 경주마의 마주였던 과거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편이다. 팬들은 일단 본명인 시무라 야스노리 명의로 마주 생활을 했던데다 소유마 전부가 중앙에서는 단 1승도 못 올렸던지라 주목을 받지 못했고 1997년부터 2014년 까지만 활동해서가 아닐까 추측 중이다.
- 샤미센과 기타[51]를 능숙히 연주했으며 집에 레코드, CD가 600장 넘게 있었던 음악 애호가였다. 특히, 비틀즈와 미국의 소울 음악을 매우 좋아해서 이에 영감을 받은 개그를 선보이고는 했다. 야마시타 타츠로 등 음악인과의 대담을 하기도 하고 음악평론 잡지에 평론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 주당이었다. 바보 영주 출연을 계기로 시무라의 절친이 된 치도리의 다이고는 행사, 녹화에 늦었을 때 어제 시무라 켄과 술을 마셨다고 핑계를 대면 다들 이해해 줄 정도였다고 한다. 나인티나인의 오카무라 타카시가 회고하기를, 술 마시고 술자리를 끝낼 때는 커다란 햄버거를 꼭 먹었다고 한다.
- 하루에 담배 3갑(60개비)을 피는 골초였다. 2016년 폐렴으로 사경을 헤멘 후 담배를 끊었으나 이미 폐건강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안 좋아진 상태였고 결국 2020년에 코로나 바이러스에 걸려 사망했다.
8.1. 연애사
- 시무라 켄은 생전에 자신이 직접 예능인으로 키운 여배우 이시노 요코, 일본항공의 스튜어디스, 긴자의 고급 캬바쿠라 마담 등 수 많은 연인들을 사귀었다고 알려져있다. 그와 동거 생활을 했던 여자들 수만 10명이 넘었다고. 시무라 켄 말년에 찍힌 파파라치 모음.
- 생전 시무라 켄은 "어머니에게 내 자녀를 보여주고 싶다."며 결혼에 대해 긍정적이었지만 여성들과 장기간 관계를 맺는 것에 어려움을 겪었고 평소 유흥업소도 즐겨 찾았기 때문에 "나는 결혼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인가 보다." 라고 스스로를 평가했다고 한다
- 시무라 켄이 자서전 '이상한 아저씨'를 통해 공식적으로 밝힌 사실혼 관계였던 여성은 2명이다.
- 첫번째 여성은 16살의 직업학교 여성으로 시무라 켄의 아이까지 낳았다고 한다. 두 사람은 법적으로 결혼할 수 있는 나이였지만 당시 19살의 나이로 드리프터즈의 심부름꾼으로서 일하고 있던 시무라 켄의 월급은 약 15,000 엔이었기에 도저히 아이의 양육비를 댈 수 없었고 두 사람은 상의 끝에 갈라서기로 결정했다. 이 때 시무라 켄은 아버지의 퇴직금 잔여금을 어머니를 통해 빌려서 상대 여성에게 전달하고 그녀의 부모님 집에 찾아가서 도게자를 하며 사과했고 상대방 부모님께 많이 혼났지만 어떻게든 해결했다고 한다.#
- 두번째 여성은 3년간 시무라 켄과 사실혼 관계였고 시무라 켄은 그녀와 결혼까지 고려할 정도로 그녀를 사랑했지만 결국 헤어졌다. 시무라 켄과 헤어질 때 이 여성은 자신이 시무라 켄과 사실혼 관계였다는 것을 언론에 유포시키지 않는 대신에 시무라 켄이 갖고 있는 재산의 절반을 달라고 요구했고 시무라 켄은 그녀의 요구를 받아들여서 그녀와 헤어질 때 재산의 절반을 그녀에게 주며 스캔들이 터지는 것을 막았다고 한다.
9. 기타
- 나가시노 전투에서 전사한 다케다 가문의 가신 야마가타 마사카게의 가신이었던 시무라 마타자에몬이 그의 조상이라고 한다. 시무라 마타자에몬이 전사한 마사카게의 시신을 빼돌려 전장에서 탈출해 마사카게의 무덤을 만들었다고 한다.
- 당시 최고의 인기를 자랑하던 개그 콤비인 콩트 55호[52]의 심부름꾼이 될 생각도 있었다고. 하지만 음악적인 면 때문에 드리프터즈에 들어가기로 했다. 콩트 55호에 들어갔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 1981년에 나카모토 코지와 함께 불법 경마 도박 혐의로 체포되어 1개월간 근신한 적이 있다. 하지만 당시 나카모토는 약식기소되어 벌금형을 받았지만 시무라는 도박 금액이 적었기 때문에 기소유예로 끝났다. 자세한 건 나카모토 코지 항목 참고.
PC 엔진으로 시무라 켄을 주인공으로 한 횡 스크롤 액션 게임이 발매되기도 하였다. 한국에서는 오락실에서 PC 엔진 통에 시간제 가동되었는데 일본 오와라이를 모르는 한국의 아케이드 키드들에게는 그냥 이주일 2라고 통했다. 참고로 이주일 1은 이거.[53] 원제는 <카토짱 켄짱>으로 전원집합 종영 후 방영한 콩트 코미디 프로그램 카토쨩 켄쨩의 기분 좋은 TV내 꼭지였던 시트콤 <탐정 이야기>를 모토로 삼아 개발된 게임이다. 게닌 후배이자 시무라 켄의 술친구인 치도리의 야마모토 다이고가 술자리에서 어릴 적에 이 게임을 플레이했다는 얘기를 하면서 플레이시에 주로 카토짱을 많이 골랐다고 하자, 은근슬쩍 불편한 얼굴을 했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2011년에 '쿠라베루 쿠라베라'[54]라는 일본 방송에 시무라 켄의 초청을 받아 김병만, 류담, 노우진(달인 팀)이 출연했는데, 이 날 출연분에서 3인조는 달인 코너의 차력 개그 몇 가지를 선보였고 시무라 켄은 이를 보고 "일본에서는 이제 슬랩스틱 콩트 코미디가 점점 사라져가고 있어서 아쉬운데 이렇게 한국에서 명맥을 이어가서 매우 기쁘다"라며 매우 좋아했다. 사실 한국의 여러 유명 공개 코미디 코너들 중에서도 달인이 유독 일본에 먹히기 좋은 코너이기도 하다. 달인의 개그 스타일은 김병만의 노력과 노우진, 류담의 서포트로 이루어지는 만국 공통적으로 먹힐 수 있는 슬랩스틱과 가벼운 만담 캐릭터극 정도로 진행되며 특히 원맨쇼, 토크쇼류의 코미디가 유독 발달한 미국보다 오와라이 트리오, 콤비 같은 팀 형태의 코미디언이 존재하고, 만자이 개그가 자리잡은 일본에서는 더더욱 먹히기 좋다.[55] 김병만은 패널 석에 앉아 있던 시무라 켄을 보고 반가워하며 "한국 개그맨들은 당신의 비디오를 보고 연구를 한다. 나도 DVD를 통해서 당신의 개그를 접했다."라는 말을 했다.
[1] 활동명인 시무라 켄의 '켄'은 아버지의 이름 '켄지(憲司)'에서 딴 것이다.[2] 아버지 시무라 켄지(志村憲司)가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를 좋아했기 때문에 이름의 양 끝의 글자 徳과 康을 뒤집어서 명명했다고 한다.[3] 훗날 방송대학에 입학해 학사학위를 땄다.[4] 이자와 오피스 공식 프로필[5] 현재는 블로그가 지워진 상태다.[6] 간토에서 특히 선호도가 높은데, 후지 TV에서 맡는 시무라 켄의 30분짜리 칸무리 프로그램도 만자이 선호도가 강한 간사이TV에서는 방송이 안 된다. (대신에 선 텔레비전에서 틀어준다.) 시무라 본인도 간사이 게닌과는 칸무리에서 잘 방송하지 않았다.[7] 빅3 중 비트 다케시와는 데뷔 시기가 1972년으로 같고 TV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기도 비슷하지만(시무라 켄은 1974년, 비트 다케시는 1975년) 시무라 켄은 TV에 데뷔한 이후 비교적 빠르게 전국민적인 인기를 끈 반면, 다케시는 1980년에 만자이붐이 일어나기 전까지 긴 무명시절을 겪었다. 참고로 시무라의 전성기 시절에 타모리와 산마는 갓 데뷔한 신인이었다. 데뷔 시기나 빅3 이전 시대를 풍미한 점으로 볼 때 사실상 빅3 위에 존재하는 인물이다.[8] 이주일이 삽시간에 인기 코미디언으로 떠오른 것은 한국 코미디계의 대부라 불리던 김경태가 연출해서 1980년에 TBC에서 방영한 토요일이다! 전원출발에서 주연으로 출연한 것에서 비롯되었는데 이 프로그램은 제목부터 포맷, 심지어 방송 시간대 까지 시무라 켄이 소속되어 있던 더 드리프터즈가 주연한 8시다 전원집합을 모조리 카피해 온 것이었다.* 시무라 켄은 70년대 후반부터 프로그램의 에이스 역할을 도맡아했는데 이주일이 토요일이다 전원출발에서 맡은 역할들 역시 시무라 켄이 주연한 콩트를 카피한 것이었다. 심지어 1977년에 8시다 전원집합에서 시무라 켄이 카토 챠와 같이 정장을 입고 가짜 수염을 달고 나와서 음악에 맞춰 엉뚱한 춤을 추는 '수염 댄스'라는 콩트를 했는데 여기서 영향을 받아 이주일의 상징적인 개그인 '수지 큐'가 탄생한 것 또한 암묵적이긴 하지만 공공연한 사실로 인정되고 있다. 이를 부정하기엔 복장부터 전체적인 컨셉이 너무 흡사하고 시기적으로도 시무라 켄의 수염 댄스가 2~3년 정도 더 앞선다. 굳이 차이가 있다면 기예를 중간에 펼치는 수염 댄스와는 달리 수지 큐는 그런 게 없었다는 정도.[9] 통칭 비트 다케시.[10] 후지 TV에서 만들어낸 단어.[11] 굳이 여기서 더 넣자면 쇼후쿠테 츠루베나 시마다 신스케를 포함 시킬 수 있다.[12] 1980년대 일본 코미디계를 대표하는 토요일 저녁 8시에 방영된 콩트 프로그램. 당시 10년 넘게 국민적인 코미디 프로그램이던 더 드리프터즈의 8시라구! 전원집합에 대항하기 위해 후지테레비에서 야심차게 준비한 프로그램으로서 당시 인기가 크게 치솟기 시작하던 비트 다케시를 중심으로 아카시야 산마, 시마다 신스케를 비롯한 요시모토 흥업 소속 칸사이 게닌들을 대거 출연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전원집합과 익살족의 시청률 대결은 "토요일 8시의 전쟁"으로 불릴 정도로 일본 예능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시청률 경쟁으로 유명했으며 게닌 1세대와 게닌 2세대간의 세대교체이기도 했다. 참고로 여기 출연진들은 1980년부터 The Manzai라는 TV 만담 쇼에 출연하여 대중들의 주목을 받은 루키들이었는데 처음에는 콩트에 적응을 못해서 상당히 애를 먹었다고 한다.[13] 생전 시무라 켄은 "어머니에게 내 자녀를 보여주고 싶다."며 결혼에 대해 긍정적이었지만 여성들과 장기간 관계를 맺는 것에 어려움을 겪었고 평소 유흥업소를 즐겨 찾았기 때문에 "나는 결혼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인가 보다." 라고 스스로를 평가했다고 한다.[14] 이것때문에 AV배우 출신 연예인인 미히로의 연예 활동에 대해 시무라 켄이 후견인 노릇을 해줄때 '여자에 무심한 그가 이렇게 챙기다니!'라며 열애, 결혼설 등이 돌았다. 시무라 켄측에 의하면 재능이 있어 키워주고 싶은 것이라고는 하는데... 실제로 이 사람의 오랜 행적과 미히로의 뛰어난 연기력을 보면 사실일수도 있긴 하다. 그런데 미히로를 높이 치는 건 사실이겠지만 키워주고 싶다기 보다는 미히로의 연기력과 그 자질을 높이 사서 그만큼 투자를 하면 나중에 뿌린 만큼 거둔다는 계산 하에 행동했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15] 코로나 19 감염으로 사망후 열린 추모공간에는 20대뿐 아니라 교복을 입은 어린 학생들도 많이 보였다.[16] 시무라 켄은 바보 영주, 이경규는 몰래카메라.[17] 전성기 시절의 바보 영주는 골든타임에 여자들이 모두 헐벗고 나오는 프로였는데 여기서 섹드립이나 스킨쉽을 통한 개그가 AV 뺨쳤다. 그 시절의 영상들은 유튜브에서 찾아볼 수 있다.[18] 실제로 시무라 켄은 본인과 동급의 연예인들이 거의 다 한번씩은 출연한 경력이 있는 유명 토크쇼 테츠코의 방에 단 한번도 출연한 적이 없다.[19] 이는 출판된 이경규 회고록에 나오는 내용으로, 자서전 저술 시점에서는 "나 같아도 아시아 어느 나라에서 굉장히 유명한 코미디언이 왔다고 해도 심드렁했을 것이다. 내가 그 사람의 연기를 본 적이 없는데 알 게 뭔가?"라고 적어놓았다.[20] 바보 영주가 꿈에서 미인을 만나고자 베개 밑에 야한 사진을 넣어두고 잠에 들었는데, 그의 장난에 당한 가신들이 베개 밑의 야한 사진을 몰래 어머니 사진으로 바꾸어 놓았다. 결국 꿈속에서 어머니의 꾸지람을 들은 바보 영주는 소스라치게 놀란다는 스토리. 야스노리는 시무라의 본명.[21] 정확히는 츠키비토(付き人)라고 해서, 일본의 도제제도 상에서 제자의 일종으로서 잡무를 하는 계급을 뜻한다. 예능인일 경우 어느정도 매니저의 역할도 겸한다. 현재와는 달리 당시 일본 코미디업계에서는 이렇게 스승이 될 사람에게 츠키비토 같은 제자로 시작해야 입문할 수 있었다. 다케시 군단이 대표적 사례. 사실 이는 일본의 코미디가 라쿠고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인데 라쿠고계도 비슷한 도제 제도와 악습이 있다. 반면 배우는 가부키의 영향을 받아 '먼저 뜨는 놈이 선배'라고 해서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고 한다.[22] 처음에는 이카리야 쵸스케의 심부름꾼이었다가 1년만에 그만두고 바텐더를 하며 먹고 살다가 다시 카토 차의 밑에 들어가서 심부름꾼으로 생활하였다고 한다. 참고로 도리후의 준 멤버였던 스와 신지도 처음엔 카토 챠의 운전수였다. 이때 시무라는 도리후 멤버들이 남긴 도시락 잔반을 긁어모아 억지로 1인분을 만들어 배를 채울 정도로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 다만, 운전 면허가 없다는 이유로 당시 코미디언으로서 큰 인기를 끌고 있던 카토에게 운전을 시키고 자기는 조수석에 편히 앉아 간다든지, 식객인데도 멋대로 목욕물에 먼저 들어간다든지 하는 아이러니한 상하관계를 만들기도(...).[23] 원래는 10분의 시간이 배당되었지만, 점점 시간이 줄어 나중에는 4분까지 줄어든 적도 있다고 한다. 그래도 굴하지 않고 열심히 소재를 짜고 공연을 계속했다고...[24] 1969~1985년 TBS에서 방송한 공개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방영 당시에 그야말로 전 국민적인 인기를 끌었다.(그 인기는 전성기의 무한도전급이라고 생각하면 될 듯) 현재도 여전히 전설(최고 시청률 50.5%)로서 자주 회상되고는 한다. 심지어 동시대에 KBS 2에서 '토요일 전원출발'이라는 인기 쇼가 있을 정도였는데 이름은 당연히(?) 저기에서 유래되었을 것으로 추측. 뭐 이건 가요톱10과 더 베스트 10의 관계처럼 80년대 방송가가 다 그 모양이긴 했지만...[25] 이때 그의 나이 24살이었는데, 잘생긴 인상 덕분인지 그 당시를 보여주는 자료화면이 나올 때마다 방송에 출연한 여성 패널들의 탄성이 쏟아져나온다. 그리고 꼭 따라다니는 반응은 "시무라상 저때는 머리숱 엄청 많았네요!"[26] 시무라 켄은 도리후 내에서 유일한 전후세대(베이비부머)였고 리더 이카리야 쵸스케와의 나이차는 무려 19살, 가장 나이차가 적게 나는 카토 챠와의 나이차도 7살이었을 정도로 다른 멤버들과 나이차가 많이 났다. 그래서 다른 멤버들은 전원집합 종영(1985, 쇼와 60) 이후 코미디언으로서의 전성기가 끝났고 리더 이카리야 쵸스케는 배우로 전업, 나카모토 코지는 행사 진행자, 타카키 부는 음악 활동에 집중하게 되었으며 카토 챠는 시무라 켄과 잠시 콤비로서 활동하다가 일본 거품 경제 시절이 끝날 무렵에 연예계에서 은퇴했다.[27] 원래는 제일 맏형인 이카리야 쵸스케가 항상 "어이, 히가시무라야마의 촌놈"이라고 놀리면 이 타령으로 받아치며 놀곤 했었다고 한다. "그렇다" 코너 중에 유명 민요를 부르는 기획이 있었는데 시무라가 반 장난삼아 이 곡을 불렀던 것이 히트한 것이라고.[28] 이 곡은 대히트를 쳐서 히가시무라야마 시를 전국적인 네임드 시로 만들었다. 지금도 히가시무라야마역 앞에는 시무라 켄의 나무가 남아있다.[29] 방송사상 최초로 시청자 홈비디오 코너를 선보인 것으로 유명한 프로그램.# 해당 프로그램의 1부로 방영된 시트콤 <탐정 이야기>도 유명하다. 당시 라이벌 프로그램인 <우리들은 익살족>을 제치고 예능 프로그램 시청률 1위를 달성하였다.[30] 타시로 마사시, 이시노 요코와 함께 출연했었다.[31] 주로 선정성이 강한 성인 코미디를 선보인 콩트 프로그램. 여성을 대상으로한 성추행 기믹이라 지금 보면 문제가 많다. 여시나 메갈같은 페미나치보다야 백배는 낫지만. 사실 80년대만 해도 일본 방송가의 규제가 엄격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무라 켄 등의 보케 캐릭터들이 콩트에서 여자 게스트 가슴을 막 주물러대는 장면 정도는 흔하게 방송을 탔었다.[32] 이 때 효케츠는 새롭게 가자(あたらしくいこう) 라는 캠페인을 진행하면서 시무라 외의 다른 연예인이나 유명인의 평소와 다른 모습을 주제로 광고를 찍었다. 이 캠페인에 타카하시 미나미, 마키 요코, 사카나군, 가와사키 무네노리 등이 모델로 나왔다.[33] 하지만 마지막에 바카도노가 "오케이~!"를 외치며 끝내면서 희극인으로서의 아이덴티티도 잊지 않았다.[34] '천재 시무라 동물원'의 레귤러 패널로서 수년간 시무라 켄과 호흡을 맞춘 여성 코미디언 후배이다.[35] 제 1회 게스트가 타조 클럽이었다.[36] 추모 방송에서 MC 아이바를 비롯한 출연진들은 영상을 보면서 계속 눈물을 흘려 진행을 힘들어하기도 했다.[37] 시무라 켄이 평생 독신이었기 때문에 형들과 조카들이 유족 자격으로 시무라 켄의 유골을 인계받았다.[38] '난다 키미와'를 새는 발음으로 '난다 치미와'로 바꾼 것이 포인트.[39] 둘 다 일본어로 홋카이도(북해도)와 시코쿠(사국)을 훈독으로 잘못 읽은 것.[40] 실리콘으로 만든 가짜 가슴이긴 했다.[41] 참고로 시무라 켄 덕에 지역 홍보 효과가 되었는지 히가시무라야마역의 발차 멜로디가 "히가시무라야마 타령"이다. 또한 히가시무라야마역 앞에는 시무라 켄 나무가 있다.[42] 한국에 가장 잘 알려진 것으로는 Mr.2 봉쿠레 같은 것이 대표적.[43] 크레용 신짱 만화책을 보면 신짱이 이 유행어를 종종 사용한다.[44] 한국 쪽에는 원래 '안 내면 술래 가위바위보'란 가락이 있었는데, 이게 1박2일 복불복 등에서 '남자는 주먹'이란 말이 이 가락과 묘하게 합쳐진 것.[45] 주당, 요리를 잘하는 것, 악기 연주가 취미인 음악 애호가[46] 시무라는 콩트와 몸개그, 산마는 만자이와 토크.[47] 시무라는 칸토, 산마는 칸사이[48] 시마자키 신이치(島崎伸一), 현재는 제작 프로덕션 경영[49] 바보 영주 특집방송에서 시무라 대신에 하마다가 바카도노의 복장을 하고 등장하는 몰래카메라를 한 적이 있다.(하마다와 시무라 이외의 출연진은 모두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후 진짜 바카도노가 등장해서 둘이 티격대다가 하마다가 하늘같은 대선배인 시무라를 하리센으로 정말 인정사정없이 두들겨 팼는데, 시무라도 당황하면서 "지금 예능계에서 날 두들겨 패는건 너밖에 없다 이놈아!!"라고 했다.[50] 간사이의 유명 MC. 거침없는 입담, 독설로 유명하다. 자신이 먼저 사진촬영을 요청하기도 할 정도로 시무라 켄의 팬이라고 밝혔다.[51] 생전 아꼈던 기타는 펜더의 스트라토캐스터였다고 한다.[52] 하기모토 킨이치와 사카가미 지로가 1966년에 결성한 개그콤비. 드리프터즈의 라이벌로 꼽혔다. 70년대에 접어들며 인기가 줄어들어 1975년 사실상 콤비가 해산돠었다. 해산 이후 하기모토 킨이치는 한동안 MC로 대활약, "시청률 100%의 사나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인기를 얻었다. 실제로 1985년까지만 해도 후지TV는 게닌 Big3 중 한명으로 아카시야 산마 대신 하기모토 킨이치를 꼽았다.[53] 웃기게도 그건 비리 정치인을 비꼬는 게임이다.[54] 일본과 타국의 여러 현상들을 조사해 비교하는 프로그램이다. 카라도 나왔다.[55] 일본은 이미 3명 이상의 인원으로 펼치는 그룹만자이도 있다. 트리오는 보케2+츳코미1이 일반적인데 일본 식으로 비교하자면 김병만, 노우진은 보케, 류담은 츳코미를 맡고 있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