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성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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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색: 2015년 기준으로 총 인구 100명 미만인 성씨 한자 표기가 다르더라도 한글 표기가 같으면 합산됨 | }}}}}}}}} |
杆城 李氏 간성 이씨 | |
관향 |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
시조 | 이순정(李順正)[1] |
중시조 | 이송로(李松老) 이경(李擎) 이홍(李洪) |
집성촌 |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함경남도 안변군 배화면 |
링크 | 간성이씨의 후손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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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강원도 간성군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이씨이긴하지만 현재 전국에 407명 밖에 존재하지 않는 희귀 성씨이다.시조를 찾지 못한 성씨였는데, 고려 말엽 지역 관직인 도령낭장(部將)을 지낸 중시조 이송로(이송노)(李松老)를 중심으로 하여 족보가 전해지고 있다. 한국족보정보 사이트에서도 중시조인 이송로를 시조로 소개하고 있다.
현재까지 밝혀진 바로는 이송로의 조부인 고려 정7품 별장을 지낸 이순정(李順正)이 시조로 파악된다. 강릉원주대학교 박도식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간성 이씨를 본관으로 한 최초의 자료는 공민왕 21년(1372)에 작성된 '박득현준호구(朴得賢准戶口)'와 '박유간준호구(朴惟幹準戶口)'다. 이 준호구에는 박득현의 처이자 박유간의 어머니가 간성 이씨로, 그 어머니의 조부로 이송로, 고증조부(고조부)로 이순정을 소개하고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서는 강원도 간성군에 토성(土姓)이 둘로, 송(宋)·이(李)라며 간성 송씨와 함께 소개하고 있다. 간성 송씨는 대가 끊긴 것인지 현재 전해져 오지 않는다.
간성 이씨는 간성이 본관이지만 오히려 집성촌을 강릉, 안변에 두었고 그 중 안변에서 발달했다. 특히 안변 지역의 호장 층이었는데, 안변의 관직을 두루 담당하고 향리를 지냈는 듯 하다.
조선시대 사마방목과 문과방목에는 중종 때부터 정조 때까지 과거에 급제한 자가 총 12명으로 찾아진다.
2. 분파
이경(李擎)을 파조로 해, 집성촌으로 함경남도 안변군(현 강원도)에 거주하는 안변파와 이홍(李洪)을 파조로, 집성촌을 강원도 강릉시에 두는 강릉파가 존재한다.2.1. 우여곡절이 많은 성씨
간성 이씨는 6.25 전쟁을 겪으며 족보가 손실되거나 그 수의 대다수가 안변군. 즉, 북한 지역에 남으며 시조와 시초를 파악하는 것이 한동안 힘들었다. 때문에 일부 간성 이씨는 이씨 중 큰 성씨인 전주 이씨나 성주 이씨로 흡수되기도 했다.이 때문에 간성 이씨의 유일한 웹사이트인 다음 카페 간성 이씨의 후손들은 한동안 '우리의 시조를 찾아' 라는 슬로건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간성 이씨 족보 무오구보서에 따르면 성주 이씨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사료된다. 성주 이씨에는 실제로 간성공파가 소수 남아있기도 하다. 이 간성공파는 갈라진 간성 이씨가 성주 이씨로 재흡수된 것으로 보고 있는 이들도 있다.
수가 적은 성씨인데다 조선 후기 이택징 등이 붕당 활동을 한 영향인지 심지어는 선조를 빼앗기기도 했다(...) 간성 이씨의 선조 중 한명으로 선조 대에 군수를 지낸 이여기(李汝機)는 1656년 효종, 1797년 정조 때 국조방목에는 '간성 이씨'이며 부친이 '이심'으로 나오나 1801년 순조 후 국조방목에는 우계 이씨로 탈바꿈 되어 있었다.# 현재는 정정되어 대부분의 사이트에서 이여기는 간성 이씨로 등록되어 있으나 약 200년 가까이 우계 이씨로 잘못 기록된 일이 일어난 것이니 얼토당토 없는 사건이다. 사실 우계 이씨에는 이안준을 부친으로 두는 다른 이여기가 존재하기에 선조 대의 군수 이여기와 헷갈린 것으로 추정된다. 더구나 우계 이씨도 강릉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이렇게 동명이인을 헷갈렸을 가능성이 더 높다.
현대에 와서 생긴 일을 넘어 역사 속에서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선조 중 이택징은 정조 시대에 활동했던 문신으로 북청부사로 치적이 뛰어나 포상을 받은 적이 있는 인물이다. 어느 날 정조가 규장각에 일방 정치를 진행하고 시파 중심의 등용을 하자 이에 대해 규장각은 임금의 사적인 기관이지 공적인 기관이 아니다라는 상소를 올렸다. 이는 당연히 당시 개혁적 행보를 걷고 있던 정조의 심기를 건들었고, 정조는 이에 대해 뿌리 깊은 음해세력으로 인해 믿을 만한 신하를 찾기 어려워 이를 이용한 것이라는 답을 했다. 이러한 해명에 대해 이택징은 정조의 뜻을 이해했다며 죄를 문책해달라고 청했고, 정조는 유념토록 하고 그대는 사퇴하지 말고 직무를 수행토록 하라는 용서를 했다. 이러한 사례는 정조의 소통의 정치와 이택징과 정조가 봉건적 군신관계와 붕당정치사에서 보기 드물게 극단적으로 대립하거나 하명되지 않고, 설득과 양보로 정치를 했다는 점으로 현대에도 인용이 되곤 한다.
다만, 이 사례가 여기서 끝나는 것은 아닌데 이후 대사헌은 이택징을 반역죄로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후 같은 신하인 이유백(李有白)이 이택징을 옹호하는 상소를 올리게 된다. 문제는 이유백이 옹호 상소를 올리는 도중 중전을 비판하는 내용을 실은데다 이가 이유백의 대역부도죄 사건으로 연결되었고, 반대파에서 이택징이 역적질을 도모했다며 모함해 결국 이택징은 이유백의 사건과 연결되어 이유백과 함께 사형 당한다. 이후 이택징과 함께 간성 이씨 일부는 노비로 몰락하거나 유배, 죽임을 당했다. 순조 대에 이르러서야 복관되었으며 유배되었던 이들도 석방되었다고 한다.[2]
3. 인구 현황
2015년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총 407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대부분이 성주 이씨로 흡수되다 보니 그렇게 된 듯.4. 인물
그 수가 적은 성씨이다 보니 인물도 적다. 우여곡절이 많아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은- 이택징(李澤徵) : 조선 후기의 문신. 북청부사, 정언 등을 지냈다.
- 이삼준(李三俊) : 조선 중기의 문신. 도호부사를 지냈다.
- 이여기(李汝機) : 조선 중기의 문신. 전라남도 태안군의 군수를 지냈다.
- 이순원 :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