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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사적 제117호 경복궁 | ||
<colbgcolor=#bf1400> 경복궁 강녕전 景福宮 康寧殿 |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세종로) | |
건축시기 | 1395년 (창건) 1554년 (중건) 1867년 (중건) 1888년 (중건) 1995년 (복원) |
<colbgcolor=#bf1400> 강녕전[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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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복궁의 건물로, 임금의 정식 침전이다. 왕도 사람이므로 자신만의 생활공간이 당연히 필요했다. 강녕전이 바로 그런 곳이었다. 쉽게 말해 왕의 집이다.편전인 사정전의 북쪽, 중궁전인 교태전의 남쪽에 있다.
2. 이름
조선 초 재상이던 삼봉 정도전이 지었다.'강녕(康寧)'은 말 그대로 '편안함'을 뜻한다.[2]《서경(書經)》 - 〈홍범〉편에서 '홍범구주(洪範九疇)'란 원칙[3]이 나오는데, 거기서 언급한 다섯 가지 복(오복: 五福) 중 세 번째인 '강녕(康寧)'에서 따왔다.
'강령전'으로도 알려져 있다. '寧'을 '령'으로 읽고 쓰는 경우가 많아서 그런 듯 하다.[4] 그러나 그것은 활음조 현상 때문이다. '寧'의 앞 글자에 받침이 없는 경우 '녕'으로 발음하기 힘들어 편의상 그렇게 부르고 쓰는 것일 뿐이다. 강녕전의 경우, '녕' 앞의 글자 '강'에 받침이 있기 때문에 원래대로 강녕전으로 읽는 것이 맞다.
현판 글씨는 1995년에 서예가 여초 김응현(金膺顯. 1927 ~ 2007)이 쓰고 각자장[5] 철제 오옥진(吳玉鎭. 1935 ~ 2014)이 새겼다.
3. 역사
1394년(태조 3년) 경복궁 창건 당시에 처음 지었다. 1433년(세종 15년) 고쳐지었으며 1553년(명종 8년)에 화재로 사라진 뒤 재건했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불탔고 270여 년 뒤인 1867년(고종 4년)에 다시 지었다. 그러나 1876년(고종 13년)에 다시 화재를 입었고 1888년(고종 25년)에 재건했다.<colbgcolor=#bf1400> 경복궁 침전 복원 사업. 복원 중인 강녕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 <colbgcolor=#bf1400> 1992년에 대한민국 정부에서 만든 문화영화 〈대목장의 우두머리 목수, 도편수의 '경복궁 강녕전 복원과정〉 |
4. 구조
- 정면 11칸, 측면 5칸의 1층[6]으로 조선 왕궁의 정식 침전 중 가장 규모가 크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조선 전기에는 정면 7 ~ 9칸이었으나 경복궁 중건 이후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장대석을 높게 쌓은 기단 위에 주춧돌을 놓고 민흘림 두리기둥을 세운 뒤, 쇠서 2개를 둔 이익공 공포 양식으로 지었다. 동, 서 양 측면의 툇마루 부분은 긴 돌 기둥을 세워 마치 누각처럼 보이게 했는데 이는 17세기부터 유행했던 궁궐 건축 양식의 특징이다. 건물 가운데엔 넓은 월대를 세워 위엄을 돋보이게 함과 동시에 위에 언급한 것처럼 행사 때 활용할 수 있게 했다.
<colbgcolor=#bf1400> 강녕전 내부 구성도 |
- 가운데 3칸을 대청으로 놓고 좌, 우 양 옆에 9칸의 온돌방을 두었다. 건물 4면의 가장자리 칸들은 툇마루로 구성했는데, 정면의 대청과 통하는 툇마루는 밖으로 드러나게 하여 출입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리고 툇간과 대청 사이의 출입문을 위로 올릴 수 있는 분합문으로 만들여 공간을 언제든 개방 또는 분리 가능하게 만들었다.
<colbgcolor=#bf1400> 강녕전 내부 온돌방. 왼쪽이 동온돌, 오른쪽이 서온돌이다. |
강녕전 대청과 대청 천장의 단청. |
- 내부는, 대청의 경우 한 공간으로 뚫려있으며 천장은 우물 반자[7]로 막고 단청을 아름답게 칠하여 화려함을 부각했다. 온돌방의 경우 양쪽 방 모두 각각 9칸인데, 대청 쪽 방은 3칸을 한 칸으로 통하여 공간을 넓게 했다. 가운데 방은 왕이 머무는 공간이고 기타 방은 왕을 보조하는 상궁들이 머물렀다. 원래 각 방의 장지문마다 십장생 등 그림을 그려넣어 장식했으나 지금은 창호지만 발라져있다.#
- 시각적으로 다른 건물과 비교했을 때 눈에 띄는 차이점이 있는데 바로 지붕에 용마루가 없는 것이다. 이 것을 일컬어 '무량각(無樑閣)'이라고 하는데, 강녕전 뿐 아니라 다른 궁궐의 왕과 왕비의 정식 침전 지붕은 다 저렇다. 이유에 대한 여러 가설이 있다. 가장 유명한 것은 왕의 침전의 경우, 용(=왕)이 계신 곳 위에 불경스럽게 또 용이 누르고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이고, 왕비의 침전의 경우 새로운 용이 만들어지기에 한 건물에 두 용이 있어선 안 되어서 만들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또 다른 설은 당시 동아시아 최선진국이었던 중국의 건축 양식을 모방했으나 조선에 익숙하지 않은 양식을 모든 건물에 적용하긴 어려웠기 때문에[8] 가장 존귀한 왕과 왕비의 집에만 선진 건축 기술을 적용했다는 설이다. 사실 용마루와 용과 관련 된 전통 기록은 하나도 없으며, 당장 중국만 가도 자금성의 황제와 황후 침전엔 용마루가 있고, 일반 서민 가옥들에 용마루가 없는 집들이 많은 것으로 보아 후자의 설이 좀 더 설득력이 있다. 서양 문물이 들어오면서 중국 문물에 대한 인식이 상대적으로 떨어진 대한제국기에 지은 경운궁의 침전 함녕전은 용마루가 있다.[9]
- 평상시엔 왕의 침전으로 쓰였지만 이따금씩 주요한 행사가 열리기도 했다. 왕비가 신하들 및 내, 외명부와 왕족들에게 조회를 받는다던가, 궁중 잔치라던가, 또는 왕실 혼례의 일부 의식 등 여러 행사들이 이 곳에서 많이 열렸다. 이럴 경우, 대청에 앉을 자리를 마련하고 월대까지 한 공간으로 묶어 활용했으며 좌, 우 온돌방은 행사 핵심 인물들의 준비 공간으로 사용했다. 1890년대 고종 재위 중반에 서양과 교류를 시작하던 시기엔 각 나라 외교관들을 접견하는 장소로도 이용했다.[10]
- 부속 건물로 연생전(延生殿), 경성전(慶成殿), 연길당(延吉堂), 응지당(膺祉堂)이 있다. 원래 각 건물과 강녕전 본전을 연결하는 복도각이 존재했었는데 그 흔적이 측면 양쪽 가장자리 퇴간 부분에 창문이 아닌 문이 달려있는 것이다. 처음엔 창호문과 기와를 갖춘 일반적인 건물 형태로 있었는데 1873년(고종 10년) 경복궁에서 일어난 화재로 고종이 복도각의 모습을 비만 피할 수 있게끔 바꾸라고 지시하면서 지붕도 철 지붕으로 바뀌고 벽체도 사라졌다. 1876년(고종 13년) 화재 때 없어진 뒤 1888년(고종 25년) 강녕전과 함께 재건되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철거된 것으로 추정된다.[11] 복도각은 다시 복구되지 못했으며 1990년대 후반에 강녕전을 복원할 때도 지어지지 못한 채 현재까지 이어진다.강녕전 복도각에 대해 자세하게 다룬 글.
5. 부속 건물
5.1. 연생전(延生殿)
景福宮 延生殿자세한 내용은 경복궁 연생전 문서 참고하십시오.
5.2. 경성전(慶成殿)
景福宮 慶成殿자세한 내용은 경복궁 경성전 문서 참고하십시오.
5.3. 연길당(延吉堂)
景福宮 延吉堂자세한 내용은 경복궁 연길당 문서 참고하십시오.
5.4. 응지당(膺祉堂)
景福宮 膺祉堂자세한 내용은 경복궁 응지당 문서 참고하십시오.
5.5. 강녕전 동행각(康寧殿 東行閣)
}}} ||<colbgcolor=#bf1400> 강녕전 동행각 내부 구성도 |
상궁과 나인들의 거처인 정면 15.5칸, 측면 1.5칸의 행각이다. 북쪽부터 흥안당(興安堂).계광당(啓光堂),지도문(志道門),수경당(壽慶堂)으로 이루어졌다.
5.6. 강녕전 서행각(康寧殿 西行閣)
}}} ||<colbgcolor=#bf1400> 강녕전 서행각 내부 구성도 |
상궁과 나인들의 거처인 51.5칸의 행각이다. 북쪽부터 융화당(隆和堂),대재문(大哉門),자안당(資安堂),건상당(建祥堂),내성문(乃成門),의안당(宜安堂)으로 이루어졌다.
5.7. 강녕전 남행각(康寧殿 南行閣)
}}} ||<colbgcolor=#bf1400> 강녕전 남행각 내부 구성도 |
상궁과 나인들의 거처인 정면 37칸, 측면 1.5칸의 행각이다. 동쪽부터 안지문(安至門),청심당(靑心堂),정문인 향오문(嚮五門),연소당(延昭堂),용부문(用敷門),건의당(建宜堂)으로 이루어졌다.
5.8. -침채고(沈菜庫)-
<colbgcolor=#bf1400> 《북궐도형》의 침채고 내부 구성도 |
함원전 북쪽에 있던 침채(김치)를 보관했던 정면 6칸, 측면 1.5칸의 창고이다. 원래는 침전 구역을 복원할때 같이 복원할 예정이었으나 당시 구역이 태원전 권역에 있던 제30경비단과 일부가 곂쳐서 미복원됐다.
6. 대중매체에서
- 궁궐 촬영이 비교적 쉬웠던 2000년대 이전 조선을 배경으로 한 사극에서 침전으로 많이 나왔다. 제일 처음 등장한 작품은 KBS 드라마 《찬란한 여명》. 마침 드라마 방영 시기와 복원 공사하던 때가 맞물려 1860년대의 경복궁 중건 장면을 실제로 공사 중이던 현장에서 촬영했다. 희한하게 조선 후기 경복궁이 없던 시절에도 나오는데 창덕궁의 희정당이라고 현판을 바꾸거나(...) 아니면 재현을 무시하고 강녕전 현판 그대로 달고 나온다.
- 2001년 ~ 2002년 방영 된 SBS 드라마 《여인천하》에선 국가의 공식 행사를 하는 모습도 많이 나왔다. 원래는 근정전에서 촬영하려 했으나 하필 당시 근정전을 보수하는 공사 때문에 궁여지책으로 강녕전이 공식 행사장으로 나온 것. 하긴 강녕전에서 행사가 많이 열렸던 것도 사실이니 아주 재현이 엉망인 것은 아니긴 하다.
그래도 즉위식을 침전에서 하는 건 좀 아니지 않나
- 조선 왕궁을 재현한 전라북도 부안의 부안영상테마파크와 경상북도 문경의 《대왕세종》 세트장에 각각 강녕전 세트가 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부안의 강녕전 세트는 사정전 현판을 달고 있다. 반면 《대왕세종》 세트장의 강녕전은 제 모습대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 다만
예산이나 부지 문제 때문인지정면이 11칸이 아닌 9칸이다.
[1] 두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2] 편안할 강(康), 편안할 녕(寧).[3] 세상을 다스리는데 필요한 아홉가지 큰 원칙.[4] 대표적인 예로, 인명으로는 무령왕(武寧王), 효령대군(孝寧大君), 이어령(李御寧) 등을, 이외에는 보령시(保寧市), 고령가야(古寧伽倻), 태령전(泰寧殿)을 들 수 있다. 자세한 것은 '寧' 항목 참조.[5] 나무판에 글자나 그림을 새기는 각자(刻字)의 제작 기능을 가진 장인.[6] 보통 한옥의 경우 단층(單層)이라 표현한다.[7] 서까래가 안보이게 천장을 가리고 평평하게 만드는 구조물.[8] 실제로 전통 가옥을 용마루 없이 지으면, 서까래를 고정하기 어려워 굉장히 힘들다고 한다.[9] 사실 함녕전은 경복궁의 침전 중 하나였던 만화당(萬和堂)이거 아니다을 옮겨 지은 것이다. 그래도 황제의 침전인데 용마루를 그대로 냅둔 것을 봐서는 무량각에 그렇게 크게 신경을 쓰지 않은 게 맞는 것 같다.[10] 당시 고종은 주로 건청궁에서 거주했다.[11] 확실한 것은 연생전과 이어지는 복도각이 경성전과 연결된 복도각보다 오래 남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