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의 고쿄 위치에 있던 건축물에 대한 내용은 에도 성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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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거 [ruby(皇居, ruby=こうきょ)] | The Imperial Palace | |
<colbgcolor=#BD0029> 형태 | 궁전 |
개장 | 1968년 |
소유주 | 궁내청 |
주소 | |
도쿄도 치요다구 치요다 1-1 (東京都千代田区千代田1-1) | |
연락처 | +81 3-3213-1111 |
황거 이중교(二重橋), 정문석교(正門石橋) |
[clearfix]
1. 개요
황거([ruby(皇居, ruby=こうきょ)], 고쿄)는 일본 도쿄도 치요다구 중심에 있는 궁궐로, 천황과 황후의 거처이다. 황거의 총관리는 궁내청이, 보안은 경찰청에 속한 황궁경찰본부가 맡고, 의료는 궁내청 병원에서 전속 담당한다.2. 명칭
황거(皇居)라는 명칭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인 1948년에 붙여진 호칭으로, 본래는 에도 막부의 총본산이자 쇼군인 도쿠가와 가문이 기거하던 에도 성이 있던 곳이었다.영어명은 The Imperial Palace. 가끔씩 별칭으로는 Black House라고도 불린다.[1]
황거 이외에도 여러 호칭이 있다. 내리(內裏)·어소(御所)[2]·대내(大內)·구중(九重)·궁중(宮中)·금중(禁中)·금리(禁裏)·황궁(皇宮)[3]·황성(皇城)·궁성(宮城)[4]처럼 동아시아에서 전통적으로 사용하는 호칭도 있고, 대내산(大內山)·백부(百敷)·자지정(紫之庭)·봉동(蓬が洞)·대궁(大宮)·운지상(雲之上)·운거(雲居)와 같은 일본 고유의 명칭도 있다.
황거에서 천황이 주거하는 곳을 어소(御所, 고쇼)라고 부른다. 각종 공식행사와 정무를 보는 궁전과 궁내청사 등도 황거에 있다.
3. 역사
1868년 11월 26일 에도 성에 입성하는 메이지 천황 |
메이지 천황은 옛 에도 성의 니시노마루 어전(西ノ丸御殿)을 궁전으로 삼았다. 1873년 니시노마루 어전이 화재로 소실되자, 옛 기슈 번 저택 자리였던 아오야마 어소(현재 아카사카 이궁)가 임시 황거로 되었다. 1879년 니시노마루의 궁전 신축이 결정되었고, 1888년 메이지 궁전(明治宮殿)이 완공되면서 같은 해에 황성 역시 궁성(宮城)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1924년 김지섭 의사의 니주바시 의거와 1932년 이봉창 의사가 도쿄 경시청에서 쇼와 천황에게 폭탄을 투척한 사쿠라다몬 의거가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1945년 5월 24일 있었던 도쿄 대공습으로 불타버린 메이지 궁전터의 사진. 당시 일본군, 40대의 소방차를 포함한 경찰 소방대, 민정문관 등 약 1만의 인력이 동원되어 소화 작업에 들어갔으나 결국 정전(正殿)을 포함한 27동이 전소되었다. 쇼와 천황은 도쿄가 폭격을 받던 기간 내내 일본 황실 도서관의 지하 방공호에서 생활하였기에 무사할 수 있었다. 천황가의 보물인 삼종신기는 이때 도쿄 궁성에 보관되어 있지 않아 유실되지 않았다고 한다. |
이후 태평양 전쟁 말기인 1945년 5월 미합중국 육군의 공습으로 메이지 궁전이 소실되었다. 1948년 궁성이라는 명칭이 폐지되면서 그 뒤로는 현재의 명칭인 황거(皇居)로 불리고 있다. 소실된 메이지 궁전터에는 1968년에 현재의 신궁전이 세워졌다. 소실 이전 메이지 궁전은 비교적 화려한 편이었지만 신축된 궁전은 깔끔한 현대식이다.
4. 일반참하
자세한 내용은 일반참하 문서 참고하십시오.5. 시설
[참고] | |
황거의 지도 |
5.1. 궁전
사진 | 설명 |
정전(正殿) '정전'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황거의 중심 건물이며 마쓰노마(松之間)·다케노마(竹之間)·우메노마(梅之間) 등 3개 방으로 나뉜다. 신년축하의례·훈장수여·궁중행사·외국 국가원수 및 고위인사 접견 등 공식적인 주요행사를 여기에서 거행한다. | |
풍명전(豊明殿) 면적 915 m²(약 277평)로 궁전 내에서 가장 넓은 방이다. 궁중만찬회나 천황의 생일 거행되는 연회 등 주로 대규모 인원이 참석하는 연회장으로 사용하는 공간이다. | |
연취(連翠) 면적 371 m²(약 112평)로 풍명전보다는 작은 규모이다. 연회장으로 사용하는 공간이라는 점에서는 풍명전과 기능이 동일하지만, 보다 소규모 인원이 참석하는 조촐한 연회장으로 사용한다. | |
장화전(長和殿) 길이 163 m에 달하는 길쭉한 건물로, 황거 방문객의 휴식공간, 각종 리셉션, 일반 참하의례 등 다목적으로 사용한다. 특히 일반 참하의례 때는 장화전 동쪽 정원에 운집한 군중을 향해 황실이 이곳 베란다 중앙부에 서서 손을 흔드는데, 1969년 1월 2일 새 궁전이 완공된 뒤 진행된 첫 일반 참하 도중 위에서 서술된 파칭코 구슬 저격 사건이 일어나 왼쪽 사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베란다 중앙부가 방탄유리로 교체되는 소동이 있었다. | |
(사진) | 표어좌소(表御座所) 정전 뒤에 있는 건물로, 천황의 집무실로 사용되며 남동과 북동의 2개 동으로 나뉘어있다. |
(사진) | 천초·천조의 간(千草·千鳥の間) 천황을 알현하는 사람들이 대기하는 공간으로, 원래 다른 구역이었으나 후에 통합되었다. |
5.2. 어소
사진 | 설명 |
어소(御所) 후키아게 어원(吹上御苑) 내에 있으며 천황과 황후가 거주하는 공간이다. 1991년에 착공해 1993년 12월 8일부터 사용한다. 2019년 5월 1일부터 나루히토 천황을 맞이하기 위하여 약 9개월간 리모델링이 예정되어서 나루히토 천황 및 마사코 황후 일가가 어소에 들어감은 나중의 일이 될 것이다. 참고로 해당 어소 내에는 삼종신기를 보관하는 전용 구역이 있다고 한다. 참고로 공식명은 그냥 '어소'지만, 일본 내 다른 어소와 구별하고자 '후키아게 어소(吹上御所)'라는 명칭으로 부르기도 한다. | |
후키아게 대궁어소(吹上大宮御所) 후키아게 어원(吹上御苑) 내에 있다. 1961년에 완공된 이래 쇼와 천황(히로히토)과 고준 황후(나가코) 부부가 생전에 거주하던 공간이었다. 1989년 1월 7일 쇼와 천황의 사망 후 황태후가 된 고준 황후가 이곳에서 지냈다. 2000년 6월 16일 고준 황후가 사망한 후로는 주인 없는 공간이 되어 사용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2019년 4월 30일에 아키히토가 퇴위하고 아들인 나루히토 황태자가 새 천황으로 즉위하면서 저절로 아내인 미치코 황후와 함께 상황·상황후의 자격(신분)으로 이곳에 머물 수 있다는 관측이 나왔다. 다만 20년 가까이 빈 집이었던 관계로 이곳을 사용하려면 수리 및 재건축이 필요할 것이나 결국에는 이곳에 가는 게 아니라 다카나와 황족저로 가서 임시로 지내다가 리모델링을 마친 아카사카 어소에서 지낼 예정이라고 한다. |
5.3. 동어원
구 에도 성 혼마루와 니노마루, 산노마루 구역으로, 천수대(天守台)와 대번소(大番所), 동심번소(同心番所)등 구 에도 성의 모습이 곳곳에 남아있는 구역이다. 황거 복원 사업의 일환으로 1960년 1월 29일에 결정된 각의에 근거, 구 에도 성 유지를 정원으로 정비해 1968년 9월에 완성했다. 일반 개방은 같은 해 10월 1일부터 시작되었다.사진 | 설명 |
천수대(天守台) 구 에도 성의 천수대로, 그 규모에 감탄하게 된다. 원래는 천수각도 있었으나 화재로 소실되었고, 굳이 천수각이 필요하지 않았던 당시의 정세, 재건에 드는 비용 등을 고려하여 천수대만 남겨놓았고 천수의 역할은 후시미야구라에게 넘겨준다. | |
동심번소(同心番所) 동심[7]이 에도 성으로 등성하는 지방 번주들을 감시하였던 곳이다. | |
대번소(大番所) 에도 성의 혼마루 진입로를 경비하였던 경비소였고, 경비는 주로 역사나 동심이 맡았다. | |
백인번소(百人番所) 에도 성의 혼마루 대수삼문을 감시하였던 경비소로, 철포백인조(鉄砲百人組)와 동심 100명이 순환감시를 하였다. | |
산노마루 상장관(三の丸尚蔵館) 황실에 소장되어 전해지던 미술품들이 1989년 6월 국가에 기증되자 이를 체계적으로 보존, 관리하고 일반에 공개하기 위해 1992년 9월에 착공해 1993년 11월 3일에 개관했다. 현재 이곳에는 다이쇼 천황의 차남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의 아내인 세츠코(勢津子) 친왕비[8](1909-1995)의 유증품과 쇼와 천황의 아내 고준 황후의 유증품, 다이쇼 천황의 3남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 친왕의 아내인 키쿠코(喜久子) 친왕비[9](1911-2004)의 유증품이 추가되어 미술품 약 9천여 점이 소장되었다. | |
스와의 다옥(諏訪の茶屋) 동어원 내 니노마루 정원에 위치한 휴게용 건물로, 구 어부 5개동 중 회원부(懐遠府)의 건물이었다. 당시에는 의화단 운동의 전리품을 보관한 전각이었으나 현재 동어원으로 이축된 상황이다. |
5.4. 궁내청
사진 | 설명 |
궁내청 본청(宮内庁本庁) 일본 황실을 관리하는 내각부 산하 조직인 궁내청 본청사이다. 황거의 풍명전과 회랑으로 연결되었고, 황거 단체관람 시 집합소 중 하나가 이 건물 바로 뒤에 있다. | |
궁내청 서릉부(宮内庁書陵部) 궁내청 산하의 서릉부 본청사로, 황실의 공문이나 능묘를 관리하는 부서이다.[10] | |
궁내청 악부(宮内庁楽部) 궁내청 식부직 산하의 조직인 악부의 본청사로, 궁중 음악회 등을 개최하는 곳이다. 도화악당을 관리하는데 도화악당과 회랑으로 연결되었다. | |
도화악당(桃華楽堂) 쇼와 천황의 아내인 고준 황후의 회갑을 기념해 1966년 2월에 건립되었다. 음악당의 명칭 '도화(桃華)'는 고준 황후의 오시루시(お印)[11]인 복숭아(桃)에서 따온 것. 고준 황후는 생전에 큰며느리 미치코 황후가 평민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몹시 미워하여 호된 시집살이를 시킨 것으로 유명한데, 악당 건립 당시에도 빼먹지 않고 에피소드(?)를 남겼다. | |
(사진) | 궁내청 병원(宮内庁病院) 궁내청 산하의 국립병원으로, 황실 구성원 및 궁내청이나 황궁경찰 직원등이 이용할 수 있다. |
5.5. 황궁경찰
사진 | 설명 |
황궁경찰본부(皇宮警察本部) 일본 황실을 호위하는 일본 경찰청 산하의 특수경찰인 황궁경찰의 본청사이다. 원래 이 건물은 추밀원 청사였으나 1947년 추밀원의 폐지와 함께 경시청 산하의 건물로 이관되었고, 1949년에 황궁경찰본부로 독립했다. 다만 추밀원 청사 건물이 좁은 탓인지 실질적인 경찰 업무는 추밀원 북쪽의 신청사에서 본다. | |
제녕관(済寧館) 황궁경찰본부 산하의 무도장이다 1883년에 건축을 시작하고, 이후 여러 번 개축을 하여 현재의 건축물은 1933년에 완공된 형태이다. | |
(사진) | 황궁경찰학교(皇宮警察学校) 황궁경찰본부 산하의 경찰학교이다. |
5.6. 궁중삼전
궁중삼전(宮中三殿)이란 천황가 전용의 신사 겸 종묘라고 할 수 있는 시설이다. 우리나라의 종묘 및 중국의 구단팔묘에 대응한다. 좁은 의미에서 '궁중삼전'이라고 하면 현소·황령전·신전 등 3개 건물만 가리키지만, 넓은 의미로는 세 건물에 부속된 보조전각들도 포함한다. 당연히 세부사항은 공개되지 않는다.사진 | 설명 |
현소(賢所) (사진의 가운데 건물) 궁중삼전에서 가장 중요하고, 위치도 가장 중심에 있는 건물. 궁중삼전 중에서 야타노카가미의 복제를 봉안한 전각이다. | |
황령전(皇霊殿) (사진의 왼쪽 건물) 궁중삼전 중 현소의 서쪽에 있는 건물. 역대 천황과 황족들의 혼령을 모신 곳으로 천황가의 종묘라 할 수 있다. | |
신전(神殿) (사진의 오른쪽 건물) 궁중삼전 중 현소의 동쪽에 있는 건물. 천신지기(天神地祇), 즉 하늘과 땅의 온갖 신령들을 두루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전각이다. 원래는 신기성(神祇省)에서 신령들을 모셨으나 1872년에 이전되어 현소 및 황령전과 함께 부속되었다. | |
(사진) | 산가전(神嘉殿) 11월 30일 신상제(新嘗祭) 및 신년 사방배(四方拜)를 개최하는 전각이다. |
(사진) | 능기전(綾綺殿) 궁중삼전 참배 시 천황 일가가 제례복으로 환복하고 대기하는 전각이다. |
(사진) | 동궁편전(東宮便殿) 궁중삼전 참배 시 황태자 일가가 제례복으로 환복하고 대기하는 전각이다. |
(사진) | 좌악사·우악사(左幄舎·右幄舎) 기타 참배객들이 제례 참관 시 대기하는 전각이다. |
(사진) | 신악사(神楽舎) 제례 시 신악(神楽)을 연주하는 전각이다. |
(사진) | 주악사(奏楽舎) 제례 시 아악(雅楽)을 연주하는 전각이다. 어우차사와 붙어 있다. |
(사진) | 어우차사(御羽車舎) 신여(神輿)[12]를 보관한 전각으로, 주악사와 붙어있다. |
(사진) | 선사(膳舎) 제례용 음식을 준비하는 전각이다. |
(사진) | 어찬전(御饌殿) 제례용 공물을 바치는 전각으로, 황령전과 연결된다. |
5.7. 어부(御府)
후키아게 어원 궁중삼전 권역 남쪽에 위치한 황실 창고 5개동을 뜻하는 단어로, 일본 제국시기에 벌어진 전쟁의 승전 기념품 등을 국가적으로 관리하는 시설이었다. 그래서인지 황거 내에서도 매우 중요한 시설이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로는 아예 공개는커녕 언급도 잘 되지 않는다. 현재 5개동 중 회원부(懐遠府)는 아예 해체되어 동어원 내 니노마루 정원으로 이축되어 스와의 다옥이 되었고, 나머지 건물들은 위성지도로 존재 자체는 확인되지만 제대로 관리받는지는 불명이다.[13] 패전 후 전시되던 각국으로부터의 전리품은 거의 다 해당국에 반환되었으며 일본군이 쓰던 무기 등도 관계기관 및 대학 등에 양도된 상태로 본래의 전시, 수장기능은 사라졌다.다만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뤼순에서 가져온 홍려정비(鴻臚井碑)라는 석각이 있는데, 이는 발해의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책봉하고 돌아오던 당의 사신이 돌아오던 길에 우물을 파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바위에 내역을 새긴 것으로, 발해사 연구의 중요한 사료가 된다. 그런데 크기 때문인지 이것은 반환이 되지 않았고 또 공개도 되지 않고 있어 중국에서는 반환을 요구하고, 일본 내 학자들도 공개를 요구한다.
당연한 것이지만, 이를 꾸준히 관리하고 공개한다는 것은 일본의 과거사 및 재무장 등과도 연결된다. 자칫했다가는 주변국과 외교관계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천황은 물론 궁내청에서도 언급하기를 꺼리는 곳이다. 현재 황거 내부에서 가장 베일에 쌓인 구역이라고 볼 수 있으며, 그래서인지 일본의 역덕들에게 의외로 많은 관심을 받는 곳이기도 하다.
사진 | 설명 |
(사진) | 진천부(振天府) 청일전쟁 전리품 및 전몰자의 초상을 보관했던 전각이다. 해당 건물 서쪽에는 유광정(有光亭)이라는 전각이 있는데, 해당 전각에서는 1895년 웨이하이(威海) 전투의 전리품을 따로 보관 했었다. |
(사진) | 건안부(建安府) 러일전쟁 참전자의 유품을 보관했던 전각이다. 현재 일부 건물은 도치기현 나스정에 양도되어 나스정 민속자료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
(사진) | 준명부(惇明府)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군 전리품을 보관했던 전각이다. |
(사진) | 현충부(顕忠府) 중일전쟁 전리품을 보관했던 전각이다. |
회원부(懐遠府) 의화단 운동의 전리품을 보관한 전각이었으나 현재 동어원 내 니노마루 정원으로 이축되어 스와의 다옥(諏訪の茶屋)으로서 일반 공개되고 있다. |
5.8. 기타
사진 | 설명 |
창명관(窓明館) 황궁경찰권역 근처에 있는데, 황거 내부참관 신청자들이 맨 먼저 모이는 곳이다. 내부에는 간단한 기념품 등도 판매한다. | |
(사진) | 모미지야마 어양잠소(紅葉山御養蚕所) 데이메이 황후가 건립한 양잠소로 잠신(蠶神)[14]에게 제례를 올리기도 하는 곳이다. '양잠소'란 단어에 존칭의 뜻으로 어(御) 자를 붙였다. 해당 양잠소에서 생산한 비단은 의전용으로 사용된다. 동아시아권에서는 잠신에게 올리는 제례를 거의 필수로 여겼고 한국, 중국, 베트남 모두 잠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선잠단을 설치하고 황후/왕후가 이를 주관하였다. 이를 일본도 따른 것. |
(사진) | 생물학연구소(生物学研究所) 쇼와 천황이 건설한 생물학 연구소로, 현재는 아키히토 상황이 어류연구를 하는 곳이다. |
후시미야구라(伏見櫓) 본 문서 맨 위에 있는 이중교 사진에도 함께 찍힌, 황거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건물. 야구라(櫓)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 적이 다가오는지 감시하는 성루이다, 황거에는 후시미야구라 이외에도 여러 성루(야구라)들이 있다.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후시미야구라가 무너져 복구공사를 하던 중, 1925년 6월 29일에 건물 밑에서 시신 16구를 발견했다. 그런데 발견된 시신들이 똑바로 서 있는 자세로 오래된 동전을 머리 위에 얹은 희한한 모습이었다고 하면서, 에도 막부가 구 에도 성을 지을 당시 후시미야구라가 자꾸 무너지자 이를 주술적으로 막아보겠다고 바친 인간제물이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다. 궁내청은 이런 소문을 부정하고 에도 막부가 에도 성을 짓는 과정에서 해당 위치에 있던 사찰과 묘지를 이전하다가 남은 시신들이라고 발표하였으나, 시신들이 발견된 이야기는 황거의 대표적인 괴담으로 남았다. 발견된 시신들은 인근 사찰 조조지(増上寺)[15]에서 수습하였다. |
6. 관광
일반인의 경우 동어원(東御苑) 구역은 자유롭게(월,금, 연말연시 제외) 출입이 가능하나, 그 외에 참관이 허가된 구역은 일본 황실을 관리하는 부서인 궁내청에 사전에 신청하여 허가를 받아야만 단체 가이드 투어로 둘러볼 수 있다. 굳이 인터넷으로 예약을 하지 않더라도 선착순 3백 명까지 투어에 참가할 수 있다.[16] 물론 이 경우도 모든 구역이 참관 가능한 것은 아니고 장화전 외관과 궁내청 청사 등 일부 구역을 한바퀴 돌아보는 것에 한정되며, 정전과 어소, 궁중삼전과 후키아게 어원은 관람이 불가능하다. 요금은 무료이며 한국어 가이드도 있다. 궁내청 참관 안내 사이트대개 도쿄도 여행에서 한 번쯤은 들르는 장소이며 다른 여행 코스와 묶어서 둘러보기에도 좋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궁궐 구경이라고 기대하고 갔다가 정말 외관만 돌아오는 것인데다 제2차 세계 대전 때 많은 부분이 파괴되어 지금 볼 수 있는 곳들 중 오래된 부분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특별히 관심이 있지 않았던 일반적 관광객들은 실망하는 경우가 꽤 많다. 특히 여름에는 땡볕을 휴식시간도 없이 걸어다니니... 역덕들에게는 좋은 기회겠지만 일반적 관광객에게는 별로 추천하지 않는 곳이다.
히가시교엔 기준으로 JR 도쿄역에서 도보로 10분, 도쿄메트로 오테마치역에서 도보 5분, 타케바시역에서 도보 5분 가량 소요된다. 황거 자체가 부지가 상당히 넓기 때문에 그 외에도 다양한 광역전철 및 지하철 역에서 도보로 이동 가능하다.
도쿄역과 국회의사당, 야스쿠니 신사, 일본 무도관과 가까우며, 북서쪽 해자인 치도리가후치는 벚꽃 명소이다.
7. 기타
- 일본국 헌법에서 천황은 국가원수가 아니라 그냥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이라고만 규정되었다. 그러나 일본 안팎에서도 실질적으로는 천황을 영국처럼 실권만 없는 국가원수로 예우하기 때문에, 황거는 외국의 국가원수들이 일본을 방문하면 총리를 만난 뒤 제일 먼저 찾는 곳이기도 한다. 이때 그들의 경호를 위해서 황거 관람은 당연하고 황거 앞 2블럭(황거 앞은 고급 호텔이 밀집해 있음)까지 경찰이 차량 통행 및 사람 보행을 엄격히 통제한다. 이런 교통통제는 외국의 국가원수가 탄 차량이 통과하면 풀리지만, 그래도 황거는 여전히 통제 상태를 유지한다.
- 국회 보고 정보 <헤이세이 15년(2003년) 국유재산 증감 및 총계산서>라는 문서에 따르면, 국유 재산으로서 황거의 가치는 2188억 1000만 엔이라고 한다.[17]
- 황거의 위치 자체가 도쿄의 중앙부이자 녹지대이기 때문에 황거의 해자 주변은 달리기 코스로 인기 있다. 황거를 방문하면 꼭 한 번쯤은 그 주변을 달리며 운동하고 있는 사람들, 일명 황거 러너들을 쉽게 볼 수 있을 정도.
- 황거 와다쿠라 방면에서 직선으로 600 m 정도 거리에 도쿄역이 있는 데 천황 내외가 지방 공무로 도쿄역을 이용할 때 여기에서 차량을 타고 도쿄역 내 천황 전용 건물까지 이동한다고 한다.
- 황거 및 아카사카 어소에는 궁내청 직원들 이외에도 주변 환경 미화를 담당하는 자원봉사자들이 있다. 천황 부부는 이들이 모인 곳을 친히 찾아와 감사인사를 하며, 황궁 차원에서도 자원봉사자들에게 자그마한 선물을 준다고 한다.
- 2021년 나루히토 일가가 어소로 이전하기 1주일 전에 임시로 이 궁전의 일부를 개수하여 거차하기로 결정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궁전 내에는 샤워시설이나 식당 등이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 황거 내 마차 창고에서 화재가 발생했던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 스즈메의 문단속에서 도쿄의 뒷문이 황거의 깊숙한 지하에 위치했다.
[1] 백악관이 White House라고 불리고, 청와대가 Blue House, 중난하이가 Red House라고 불리듯이 색깔 별 별칭이다.[2] 교토 어소 등 여러 어소에 쓰인다.[3] 황궁경찰본부에 쓰인다.[4] 궁성사건에 쓰인다.[5] 京이라는 한자는 쿄라고 발음할수도 있지만 케이라고 발음하기도 한다.[참고] 위 지도에서 기타노마루 공원과 황거 외원은 에도 성의 권역은 맞으나 황거 권역은 아니다. 일본 경찰법 제 29조에 따르면 황거 및 어소 일원은 황궁경찰본부가 담당하도록 하지만 해당 지역은 경시청이 관리하고, 궁내청이 제공하는 황거 안내도에도 저 두 권역은 제외되었다.[7] 봉행 등에 소속된 에도 막부의 하급관리[8] 마츠다이라 카타모리의 손녀이며, 이방자 비의 이종사촌 여동생[9] 마지막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손녀이자, 방계 황족 아리스가와노미야 가문의 외손녀.[10] 한국 역덕들 사이에서는 알게 모르게 '일본이 한국에서 약탈한 역사 서적들을 바로 이곳(서릉부)에 몰래 숨겨두고 공개하지 않는다.'는 음모론으로 소소하게 알려지기도 했다.[11] 일본 황족에게 주어지는 개인 표식. 주로 식물이며, 사용하는 물건 등에 붙는다.[12] みこし. 신을 모신 가마로, 마쓰리 등에서 자주 볼 수 있다.[13] 위성지도를 보면 건물 출입부에 잔디가 잔뜩 자라고 나무도 우거져서 진천부와 현충부는 지붕만 약간 보이는 수준이다. 유광정은 아예 위성사진으로 확인조차 되지 않으며, 그나마 잘 보이는 건안부와 준명부도 지붕에 풀이 잔뜩 자랐다. 이로 보아 사실상 이 어부 권역 건물군은 그냥 버려져서 방치된 모양이다.[14] 양잠(養蠶), 즉 누에치기의 신이다. 보통은 중국 신화 속 황제(黃帝)의 아내인 서릉씨(西陵氏) 누조(嫘祖)가 처음으로 누에로부터 비단을 만들었다 하여 잠신으로 여겼다.[15] 아미타불을 본존으로 모시는, 1393년에 창건된 정토종 사찰이다. 1590년에 도쿠가와 쇼군가의 보리사(菩提寺: 집안 조상들의 명복을 비는 사찰)이 되었고, 1598년 현 위치로 이전하여 이후로 크게 번창했다.[16] 다만 휴일이나 연말연시에는 금방 마감되니 인터넷 예약을 권한다.[17] 한화로 약 2조 2154억 7300만 원이다. 한때 캘리포니아주 전체 부동산 가격, 혹은 캐나다 전체 부동산 가격과 맞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