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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6 00:36:35

김홍일(군인)/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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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년 ~ 청년기2. 러시아 내전시베리아 전역
2.1. 대한독립군비단 사령관2.2. 대한의용군 중대장 시절2.3. 한인특립보병대 연대장 시절2.4. 한인특립보병대 해체 사건과 사임
3. 중국 국민혁명군 시절
3.1. 국민혁명3.2. 북벌 이후3.3. 사쿠라다몬 의거훙커우 공원 의거3.4. 국방건설기 군수설계위원 재직
4. 중일전쟁
4.1. 우한 전역4.2. 샹가오 전투와 2차 창사 전투4.3. 중일전쟁에서 겪은 지연전 경험의 의의4.4. 1941년 이후
5. 한국광복군 참모장 취임6. 8.15 광복건군기
6.1. 국부군 복귀, 한교사무처장직 수행6.2. 귀국6.3. 국방개론 저술
7. 6.25 전쟁
7.1. 한강 방어선 전투7.2. 김홍일의 방어 성공과 전략적 가치7.3. 육군 종합학교장, 그리고 퇴역
8. 제7대 외무부장관9. 정계 활동10. 사망

1. 유년 ~ 청년기

1898년 9월 23일, 평안북도 용천군 양하면 오송동(現 룡천군 오흥리)의 김해 김씨 집안 [1]에서 김진건(金振健)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열 살도 되기 전 러일전쟁이 벌어졌는데, 고향인 용천이 전쟁의 첫 전투인 압록강 전투에 휘말리는 바람에 러시아군과 일본군이 싸우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2] 그는 이를 계기로 외세에 짓밟히는 망국의 설움을 느꼈으며, 군인의 길을 꿈꿨다. 하지만 김홍일이 열 살 되던 해에 대한제국군이 일본의 강압으로 해체되고 열세살 되던 해에는 조국인 대한제국마저 아예 패망하면서, 일제 치하에서 살기 싫었던 그의 집안은 만주선양시로 이사한다.

김홍일의 아버지 김진건은 언젠가 중국이 다시 일어설 것이며,[3] 한중 양 민족이 연대하여 치욕을 떨쳐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아들을 만주의 중국 학교로 보냈다. 하지만 김홍일은 중국어를 전혀 못 했고, 동급생들에게 인종차별까지 당하자 소외감을 느껴 곧 자퇴해버리고 말았다. 대신 그는 다시 일제강점기의 조선으로 건너가 오산학교에서 남강 이승훈, 고당 조만식 선생 문하에서 수학했고, 졸업한 이후에는 이승훈 선생의 주선으로 황해도 신천군의 경신학교[4] 교사로 근무했다. 하지만 민족학교들을 예의주시하던 일본 경찰의 탄압은 갈수록 심해졌다. 김홍일 또한 일본 제국 육군 헌병에 잡혀 고문과 회유를 받았고, 교사직을 그만둬야 했을 뿐 아니라 석방된 후에는 집 밖 30리 이상을 넘어갈 수 없는 처분을 받았다. 그러자 그는 만주에서 사업을 하던 형의 권유에 따라 내전 중이던 중화민국으로 망명하였다. 망명 후 3개월 후 처음으로 본국의 가족에게 서신을 전했는데 이를 전해준 사람이 당시 일본군의 육군 장교였고 후에 6.25전쟁에서 함께 싸우게 되는 이응준이었다고 한다.

1918년 상하이에 도착했고, 그는 여기서 다양한 루트를 통해 군관학교 입학을 시도했다. 그는 한동안은 허탕을 쳤지만, 개천절 기념 행사장 만찬자리에서 만난 항일구국단 단장인 중국인 항일운동가 황줴의 도움으로 입학 기회를 잡았다. 황줴는 구이저우성 독군[5] 유현세(류센스)의 아들인 유강오와 아는 사이였고, 김홍일과 그를 주선해 주었다. 그리고 유강오는 김홍일의 처지를 듣더니 아버지에게 연락하여 그가 구이저우 육군군관학교 (중국 육군 귀주 강무당)에 입학할 수 있게끔 허락을 받아냈다. 다만 귀주 강무당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정식 과정에 앞선 6개월짜리 예비학생훈련인 입오생 훈련을 마쳐야 했는데, 김홍일이 강무당에 찾아온 시점은 이미 입오생 훈련이 중간 정도 지난 때였다. 따라서 원래대로라면 다음 해까지 입학할 수 없었지만, 류셴스는 독군 직권으로 김홍일이 바로 정식 사관양성과정에 들어갈 수 있도록 특별히 조치해 주었다. 이때 그는 입학을 위해서 왕웅이라는 중국식 이름도 만들었고, 도움을 준 황줴에 대한 보답으로 그가 활동하는 비밀결사인 흥아사에도 가입했다.[6]

이후 1차 세계대전 종전 기념행사가 상하이 국제 조계에서 성대하게 열릴 때쯤 김홍일은 동료인 진대균, 그리고 귀주군 1사단 참모장 이자인과 함께 귀주로 향했고, 중간에 광동에 도착하여 신규식의 일을 잠깐 거들며 선전물을 인쇄하는 것을 도왔다. 이 선전물은 민족이 대동단결하여 국제정세의 기회를 포착하기를 호소하는 내용과 파리 강화 회의에서 광동정부 대표 왕정팅이 한국의 독립을 지지해 주기로 했다는 사실을 담고 있었다. 이 문서를 손으로 일일이 썼는데, 신규식 선생도 호텔이 아니라 일부러 병원에서 지낼 만큼 금전적으로 어려운 상황이었기에 인쇄기는 꿈도 못 꿨던 모양. 이때 신규식이범석을 도왔던 때처럼 김홍일 일행에게 운남 강무당 입학을 제안해주었는데 [7], 김홍일은 황개민과 유강오의 호의를 저버릴 수 없어 거절했다. 반면 진대균은 그 요청을 받아들여 운남으로 향했다. 이후 그는 다시 길을 떠났고, 강에서 강도를 만나거나 [8] 묘족 마을을 지나치는 등 우여곡절 끝에 귀주에 도착했다. 정식 사관양성과정이 시작되기까지는 약 한달이 남았던 시점이었는데, 그동안 그는 독군 류셴스의 호의로 그의 부관과 함께 귀주 곳곳을 둘러보며 지냈다. 류센스는 거기다 그를 독군 직속 대기관으로 특별발령시켜 월 15원의 월급까지 줬다고. [9]

이후 시작된 귀주 강무당의 정식 과정은 전술, 축성, 병기, 지형, 기마, 측화 및 보병교련을 비롯한 다양한 훈련 과정을 포함하고 있었고, 교관들은 당대 동아시아 최고의 군사학교인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엘리트 출신들이었다. 하지만 이때도 그는 만주에서 중국인 학교를 다닐 때처럼 언어 문제로 인해 수업을 전혀 따라가지 못했다. 심지어 차렷 구령조차 못 알아들었다고. 한문을 알았기에 교재를 읽을 수는 있었다는게 불행 중 다행이었지만, 이 때문에 한번은 교관이 교재를 읽어보라는 말에 당황해서 한국식 발음으로 읽었다가 망신을 당했다. 발음이 왜 그러냐는 말에 봉천 사람[10] 이라 그렇다고 답했는데, 하필이면 그 교관이 봉천군에서 근무하다 온 사람이라 북방 관화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웃기는 소리 말라며 다시 호통을 치길래 본적만 봉천이지 실은 몽골계라서 그렇다고 둘러대며 어물쩡 넘어갔다고.

이외에도 점호 시간에 허둥대서 동료가 도와준다거나, 긴급집합 때 각반을 놓고 나와 다시 찾으러 들어갔다가 총까지 잃어버릴 뻔하는 등 초반 한두달 동안에는 거의 고문관이나 다름없었다. 류셴스도 이런 문제가 터질 것을 걱정해서 정식 과정이 시작되기에 앞서 강무당 교장 허잉친 [11]에게 특별히 언질을 넣었고, 허잉친은 김홍일이 수업을 따라갈 수 있도록 조교를 특별히 붙여 주어 교련 과정을 무사히 마치게 도와주었다. 김홍일 본인도 밤을 새며 필사적으로 노력하여 5달 뒤면 중국어도 자력 필기가 가능한 수준이 되었고, 주변 동기들에게 필기 내용을 알려 줄 정도로 나아졌다. 그리고 12월이 되자 [12] 200명 중 15등이라는 성공적인 성적으로 졸업할 수 있었다.[13] 이때 소총은 소구경화되고 대포는 갈수록 대구경화된다는 졸업논문을 제출했는데, 결과적으로 제식 소총 구경이 작아지고 야포는 대형화되었다는 것을 보면 전장의 변화를 정확하게 파악했던 셈이다.

이후에는 후난성에 있는 병과학교인 육군실시학교에 입학하여 6개월간 산포 병과 교육을 이수했다. 2차 호법운동이 벌어지자 허잉친 휘하 혼성여단 소속 기관총소대장으로 참전했다가 콜레라에 걸려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입원해 있던 중에 구이저우성에서도 연성자치운동[14]이 벌어져 독군 류셴스가 왕원화에게 추방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때 김홍일은 귀주군을 떠나 상하이로 가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을 찾아가 향후 진로에 대한 조언을 구했는데, 노백린은 러시아극동 공화국에서 독립운동가들을 통합한 항일 부대를 결성하려 한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 말을 듣고 김홍일은 내전 중인 러시아로 향했다.

2. 러시아 내전시베리아 전역

2.1. 대한독립군비단 사령관

러시아 내전(시베리아 내전) 당시 러시아령 시베리아는 백군과 적군 간 이념 전쟁의 장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와 연계된 수많은 군소 민족들의 무장투쟁과 독립운동이 벌어지는 장이기도 했다.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유럽에서 넘어온 체코슬로바키아 군단[15][16]은 내전의 주요 세력으로써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장악하고 있었고, 코사크를 중심으로 한 우크라이나인들은 만주와 조선 바로 옆에 젤레나 우크라이나란 이름의 국가[17]를 세웠다. 그리고 몽골 계통의 부랴트인들도 민족운동을 시도하고 있었다. 연해주의 가장 큰 소수민족들 중 하나였던 재러 조선인들은 사상에 따라 백군과 적군에 갈라져서 복무하고 있었지만, 대부분의 한인 독립운동가들은 체코 군단 반란 사건을 계기로 백군에 일본군이 개입하자 민족자결을 지지한다는 레닌의 말을 믿고 사회주의에 대거 가담해 독립운동을 전개해나갔다.

한동안은 연합군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지원을 받는 백군이 우세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러시아 전역에서 점차 볼셰비키 적군이 유리해졌다. 1920년이 되면 시베리아에서도 백군의 알렉산드르 콜차크 정부가 민심 이반으로 멸망 직전에 놓였으며, 1차 대전이 종전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붕괴하고 체코슬로바키아가 독립하자 남의 나라 내전에 개입할 명분이 없어진 체코슬로바키아 군단과 연합군도 본국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본 제국만은 다른 연합군이 귀국하는데도 백군의 잔여 세력을 지원하며 연해주에 끈덕지게 남았다. 외면적으로는 1920년 3월 벌어진 니콜라예프스크 사건에서 일본 민간인들이 한-러 빨치산들에게 학살당한 것에 대한 보복이 그 이유였지만, 진짜 이유는 항일 세력들을 제압함으로써 만주와 조선에서의 패권을 안정적으로 지키고, 러시아령 극동 지역에서 각종 이권들을 챙기기 위해서였다. 니콜라옙스크 사건이 벌어진 지 1달 후 일본군은 기습적으로 연해주 4월 참변을 일으켜 볼셰비키를 무장해제시켰고, 한인들 수백명을 대량학살[18]하며 남연해주를 장악했다. 그리고 봉오동, 청산리 전투를 계기로 남만주에서도 잔혹한 토벌을 벌여 한국 독립운동 단체들을 밀어냈다. 그러자 연해주와 만주에 근거지를 놓고 활동하던 다수의 독립운동 부대들은 북상하여 러시아 극동 공화국의 자유시(스보보드니 시)로 결집했다. 이들은 통합된 항일 군단을 만들고, 볼셰비키 적군과 연대해 공통의 적인 일본군을 몰아낼 준비를 했다.

바로 이 시기에 김홍일도 자유시로 향하다 대한독립군비단(大韓獨立軍備團)을 만나 이들을 시베리아로 이끈다.[19] 군비단은 이범윤의 의군부 출신 대원들이 만든 단체였는데, 의지는 넘쳤지만 전체인원이 2백 명이 넘는데 소총은 스물한 정뿐이었다. 그리고 제대로 군사 교육을 받은 이도 지도자 임표[20]와 또 다른 한 명 정도를 빼면 없었기 때문에[21], 그들은 김홍일이 귀주 사관학교 출신의 장교라는 사실을 알자마자 곧바로 사령관으로 모셨다.

여정은 곳곳에 일본군이나 마적단, 중국 군벌들이 활개치는 만주를 가로질러야 하는 대장정이었다. 한번은 도중에 천보산 은광[22]에 세워진 50명 규모의 일본군 초소를 무조건 지나쳐야만 했다. 물론 정면충돌로는 답이 없었기에, 그는 일단 밤을 틈타 일본군 초소가 보이는 고지에 참호를 파 모든 소총수들을 집중적으로 배치했고, 이들이 초소를 감시하는 사이에 무기가 없는 대원들을 서둘러 이동시켰다. 자정이 되어 이동이 마무리되고 소총수들도 철수할 무렵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일본군들이 기습했는데, 이미 고지에 참호까지 파놓았던 군비단의 공격을 이기지 못하고 패주했다.

2.2. 대한의용군 중대장 시절

그렇게 어렵사리 만주를 통과한 그들이 중간경유지인 이만(Има́н)[23]에 도착했을 무렵, 자유시에서는 자유시 참변이 벌어져 많은 독립운동 부대가 볼셰비키에게 몰살당한다. 이후 김홍일은 자유시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이만에서 현지 한인 공산당연합회와 연대하여 군비단을 고려혁명의용군으로 개편했다. 당시 이만 지역은 일본의 지원을 받는 임시프리아무르정부 백군과 소비에트 러시아의 지원을 받는 극동공화국 적군의 접경지대[24]라 볼셰비키의 통제가 느슨했다. 이런 이유로 러시아 볼셰비키의 통제 하에서 한인부대를 무장해제시키는 데 앞장선 고려혁명군과 달리, 이만의 한인 공산당원들은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다. 직후 자유시 참변으로 흩어진 연해주의 독립군 부대까지 속속 합류하자 고려혁명의용군은 재편된 대한의용군사회의 주축이 되었다. 무기는 여전히 부족했지만, 그래도 노련한 베테랑들과 김규면, 이용[25], 마용하 등 명망 높은 독립운동가 다수가 합류하여 인적 자원 자체는 크게 증강되었다. 김홍일은 귀주에서의 경험을 살려, 대한의용군 제3중대장직과 6개월 속성 과정의 사관학교 교관직을 수행했다. 이후 볼셰비키 적군 아무르 강 함대의 요청을 받아 일본군의 동향 및 내부 통신을 도청하였고, 휘하 부대를 이끌어 일본군의 외곽 초소를 급습해 내부 문건을 탈취하기도 했다.

그리고 1921년 11월, 빅토린 몰차노프 소장[26]의 백군이 그간의 평형을 깨고 시베리아 내륙으로 진군했다. 당시 내외적으로 철수 압력을 받고 있던 일본이, 적군과의 회담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해 극동 러시아 지역의 이권을 보장받고자 백군을 앞세워 공세에 나선 것이었다. 그러자 주력군이 서쪽에 있었던 볼셰비키 극동 공화국군은 이만을 버리고 하바로프스크까지, 그리고 이후 베라까지 퇴각해야 했다. 이때 대한의용군 부대들은 가장 첫번째로 백군을 마주한 이들이었고, 그 중 김홍일은 1, 3중대를 통솔하고 있었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그날 밤은 유달리 조용했는데, 갑자기 후방의 이만시에서 포성과 총성이 들려왔다고 한다. 불안감에 적군 사령부에 연락을 취했지만 처음에는 괜찮다고 답하더니 재차 연락했을 때에는 아예 받지를 않길래, 이대로 가다간 백군에게 양면에서 포위당할 위험이 크다고 판단하여 날이 밝는 대로 재빠르게 철수, 비킨에서 사상자 없이 적군과 재회했다. 반면 한운용이 이끄는 대한의용군 2중대의 제1소대는 퇴각 타이밍을 놓쳐, 이만에서 쇄도하는 백군에게 포위당하고 말았다. 그들은 이에 맞서 끝까지 싸웠지만 한운용 본인을 포함한 대다수가 중과부적으로 전사했다. 나머지 두 소대는 한운용의 명령을 받아 먼저 퇴각했기에 무사히 김홍일과 재회했다.

이후 비킨에서부터 김홍일은 철수 대열의 후미에서 백군을 저지하며 퇴각행렬을 성공적으로 엄호했다. 두 개 중대가 그의 휘하에 있었기에, 그는 한 부대가 응전하면 다른 한 부대가 엄호하에 퇴각하는 방식을 번갈아가며 사용했다. 얼마 후 백군의 공격이 잦아들자 그는 본인이 최후방에 남아서 낙오되는 병사들을 부축하고 무기를 대신 들어주었는데, 시베리아 겨울의 혹한 속에서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면서 낙오병들의 무기란 무기는 전부 들고가는[27] 바람에 그대로 실신해서 얼어죽을 뻔했다가 극동공화국 군대에 구조된 적도 있었다. 구조된 후에는 적군으로부터 보급을 받아 기운을 차리고 하바로프스크에 도착하여 우측 방어선에서 도시를 방어했다. 다만 모스크바에서 파견해줬다는 바실리 블류헤르[28]의 본대가 아직도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곧 도시를 버리고 또 후퇴해야만 했다. 이때 일부 러시아인 빨치산들이 후퇴만 해대는 사령부 방침에 반발하며 하바로프스크 재탈환 작전을 독단적으로 추진하자 김홍일도 그들의 제안을 받아 휘하 부대를 이끌고 참전하여 시내를 탈환했다. 다만 전력의 열세가 명백했고, 손실을 우려한 적군 사령부에서 퇴각 명령을 내려 다시 도시를 버리고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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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초 벌어진 인-볼로차예프카-하바로프스크 일대 전투의 작전도. 김홍일이 동상 때문에 참가하지 못했던 탈환전 당시의 모습이지만, 전체적인 전황을 볼 수 있어 첨부한다. 검은 화살표가 적군, 큰 회색 화살표가 퇴각하는 백군이다. 인(Ин)역은 지도 중간에 있는 큰 원 안에 표시되어 있고, 볼로차예프카(Волочаевка)는 그 오른쪽에 대부분의 화살표들이 복잡하게 모여드는 지점이다. 하바로프스크(Хабаровск)는 지도 오른쪽 끝에 아무르 강과 우수리 강이 모이는 지점에 있다.

멀리 물러난 극동공화국과 대한의용군은 인역 전투에서 백군의 공세를 저지시켰고, 혹독한 나머지 겨울 동안 이루어진 반강제적인 휴전 상태 동안 전열을 가다듬다 이듬해인 1922년 블류헤르의 본대와 함께 볼로차예프카역 전투에서 백군을 패퇴시켰다. 하지만 김홍일은 하바로프스크 탈환 후 퇴각할 때 발에 동상을 입어 후방 병원으로 후송되는 바람에 휘하 부대원들과 달리 인과 볼로차예프카 전투에는 참가하지 못했다. 적군 사령부에서 보내준 장갑열차를 탔는데 깜박하고 방한처리 안 된 장화를 신는 바람에 왼쪽 종아리가 얼어버렸다고. 원래대로라면 다리를 꼼짝없이 잘라야 했지만, 옆에 있던 구한말 의병 출신의 60대 노병이 찬 물에 다리를 담가 얼음을 벗겨내는 방법으로 응급처치를 해주어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신경이 손상을 입은 것은 어쩔 수가 없어 한동안 병원 신세를 져야만 했다.

그가 돌아올 때쯤 볼로차예프카 전투가 끝났지만 대한의용군은 더 이상의 추격전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대신 극동공화국 정부에서는 대한의용군을 적군 직속 부대인 한인특립보병대로 개편하여 인에서 하바로프스크까지 이어지는 지역을 경비하게 했다. 그동안 대한의용군을 제외한 나머지 한인부대들은 적군의 선봉으로써 백군과 일본군의 후미를 추격하며 밀어붙혔다. 일본은 곧 중립을 선언하며 블라디보스토크로 물러났고, 1922년 9월에는 스파스크에서 백군의 마지막 조직적인 저항이 분쇄되었다. 백군이 분쇄된 후 남은 일본군 부대들도 차례대로 물러나면서 러시아 내전이 끝났다.

2.3. 한인특립보병대 연대장 시절

퇴각 도중, 그리고 인과 볼로차예프카에서의 전설적인 활약으로 대한의용군의 명성은 정점을 찍었다. 하지만 이후 의용군에 군정위원으로 새로 들어온 박 모이세이가 볼셰비키 직속의 이르쿠츠크파일 것이라는 의심으로 인해 자유시 참변의 생존자들이자 기존 지도파벌인 상해파가 동요하기 시작했다. 고려공산당 내부에는 상해와 이르쿠츠크 두 파벌이 있었는데, 상해파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했기에 공산주의보다 민족주의 성향이 더욱 강하여 러시아 볼셰비키와는 독립적으로 움직일 것을 추구했다면, 이르쿠츠크파는 공산주의 성향이 강해 볼셰비키에게 직접 통제를 받는 것을 선호했다. 그래서 이들은 같은 공산주의 계열이지만 사이가 무척 나빴다. 당장 자유시 참변부터가 두 파벌 간의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다만 모이세이가 이르쿠츠크파일 것이라는 상해파 사람들의 의심은 과도한 것이었다. 당장 김홍일부터 모이세이와 여러번 이야기하곤 잘은 모르겠어도 그가 이르쿠츠크파는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고 회고했고, 러시아 내전기 독립운동의 권위자인 윤상원 교수 또한 2014년의 논문에서 그가 이르쿠츠크파가 아니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하지만 모이세이가 모스크바 대학 정치학과에서 제대로 공산주의를 배웠고, 동기생 중에는 이미 장관이 된 인물이 있을 정도로 소련 내부사정에 밝은 인물이라는 것은 김홍일도 잘 아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모이세이에 대한 의심과는 별도로 볼셰비키가 대한의용군에 대한 뒷조사를 하고 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동안은 백군 잔당과 일본군의 공세로 정신이 없었지만 볼로차예프카 전투 이후 백군 세력이 아작나며 한숨 돌리고 나서는 반독립적 부대였던 한인부대를 조사할 여유가 생긴 것. 볼셰비키는 이로써 의용군 부대원들 중 상당수가 자유시 참변 당시의 상해파 생존자들이라는 것을 눈치챘고, 공산주의보다는 민족주의 성향이 더 강했던 대한의용군의 사상적인 면을 걸고 넘어졌다. 그러자 의용군의 많은 이들이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상하이로 돌아갔다. 대표적으로, 자유시 참변 당시 극동 공화국군에 압송당하다 탈출한 적이 있었던 대한의용군 사령관 이용은 박일리야 등과 함께 김홍일을 찾아와 위험을 호소하곤 그에게 군권을 이양했다. 그리곤 자신을 따르는 10명의 간부들을 이끌고 밤중에 슬그머니 사라졌다.

김홍일은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용을 대신해 한인특립보병대 사령관으로 복무했다. 회고록에서의 언급을 보면 그와 모이세이는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파벌싸움에 질려서 이런 정치 논쟁에 거리를 두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그와 모이세이는 부대를 나름 잘 갖춰 놓는데는 성공했지만, 관할 지역이 너무 넓다는 문제가 있었다. 3개 보병중대와 1개 기관총중대, 1개 특무중대 약 800명이 5백리를 관장하자니 부대 운용이 쉽지 않았다고. 그러나 가끔 국경을 넘어 러시아측 한인촌을 습격해 오는 중국 마적단을 토벌하는 게 주된 군사작전일 정도로 안정적인 지역이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다만 이때 소련 법에는 도적들에게 3년형 이상을 구형할 수 없었기에, 고작 그 정도 솜방망이 처벌에 만족할 수 없던 그의 부대원들은 포로로 잡은 마적단원들을 풀어주곤 탈출했다며 뒤에서 쏘아버리는 방식으로 사살했다. 현대 기준으로 포로 학살이자 엄연한 전쟁범죄인 잘못된 행위였지만, 자서전에 이 사실이 버젓이 쓰인 것으로 보아 김홍일 본인이나 그 부대원들 모두 나라 잃은 동포들이 타국에서도 타민족 도적떼에게 설움을 받는다는 사실에 분노하여 이런 '복수' 행위를 별 죄책감 없이 자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는 별 일이 터지지 않았기에, 부대원들은 주둔하는 마을 사람들의 집에서 숙식하며 집안일을 돕는게 일이었다. 도중에 연대장 지위에서 일대의 러시아인 부대의 사열을 받으며 민족적인 자긍심에 흠뻑 빠지기도 했다고.

2.4. 한인특립보병대 해체 사건과 사임

다만 이런 생활이 쭉 이어지자 그는 세계 혁명과 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을 부르짖는다는 볼셰비키들이 적극적인 대일 공세를 취하지 않는 것, 그리고 자신과 한인부대의 헌신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을 그저 적군 소속의 지역 치안대로 활용하는 것에 강한 불만을 가졌다. 거기다 한인 운동가들 사이에 분열도 여전히 극심했기에, 그는 더 늦기 전에 상부에서 통합된 한인부대를 만들어 일본과의 전투에 투입해달라고 청원했다. 하지만 상부에서는 그가 주둔중인 지역 코사크 마을들이 백군 지지성향을 보이고 있는데다 일본은 곧 물러갈 것이기에 당장은 통합이 필요없다는 이유를 들며 이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불만은 쌓여갔지만, 그래도 그는 언젠가 자신의 청원이 받아들여지리라 믿고 일단은 임무에 전념했다.

하지만 이때쯤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간 분열 사태가 대한의용군에까지 영향을 끼쳐 2중대가 집단 탈영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소련 중앙에서 고려공산당에게 대회를 열어 내부 분열사태를 봉합하라고 지시하자 양 파벌이 대회 개최에 앞서 자신들의 지지자들을 늘려 정통성을 인정받고자 무리한 행동을 했던 것이었다. 김홍일의 회고에 따르면 이 사건의 원인인 박일리야는 상해파였는데,[29] 그는 후방에서 경비나 서지 말고 어서 일본군과 맞서싸우자고 부대원들을 선동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의 성급한 선동에 넘어간 2중대 부대원들은 국경을 넘다가 소련군과 충돌하여, 장교들은 전부 사살당하고 병사들은 무장해제당했다. 그리고 적군은 2중대의 무장 탈영사태를 빌미로 3중대마저 무장해제시켜 치타로 보내버리곤 사령관인 김홍일에게는 결과만 사후에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이를 나중에야 안 김홍일과 박모이세이는 사령부로 달려가 격하게 항의했지만, 사령부에서는 단체 탈영은 묵과할 수 없는 사안인데다, 한인부대의 행적으로 인해 중국 및 일본과 외교 문제를 일으킬 염려가 있어 전부터 내부적으로는 한인부대를 서부의 옴스크로 보내기로 결정했었다고 통보했다. 이 말을 들은 그는 고려공산당 계파들이 연합해도 모자랄 판에 주도권을 놓고 파벌싸움만 하다 조급한 행동으로 남은 세력마저 날려먹었다는 것, 그리고 소련군이 자신들의 항일 의지를 자신들의 내전 종식에만 이용해먹었을 뿐이라는 사실에 분노했다.[30]

물론 대한의용군 해체 사태는 어떤 국가던 중앙의 통제에서 벗어난 소수민족의 부대가 자국 내에서 반독립적으로 행동하면서 군 기강을 무너뜨리고(탈영) 외교 문제(마적단 토벌, 항일군단 결성)를 일으키는 것을 그냥 넘어갈 리 없다는 것, 그리고 소비에트 러시아가 그동안 공산주의에 대한 편집증적 공포를 가지고 쳐들어온 해외 열강으로 인해 내전을 몇 년씩이나 끌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해가 되는 일이다. 소련 입장에서는 계속해서 전쟁을 벌이기보다는 방금 전까지 최대의 적이었던 일본을 몰아낸 것에서 만족하고, 오랜 전쟁으로 파괴된 조국을 재건하는 것에 힘쓰는 선택이 최선이었다. 또한, 세계혁명이론이 유럽에서 독일 공산당헝가리 공산당의 적화 실패와 연합군의 내전 개입, 그리고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의 패전으로 좌절된 것도 영향을 끼쳤다. 다시 말하자면 소련 정부의 주장이 타당한 것은 사실이며, 내전 종식 시점의 소련은 한국 독립운동가들이 한반도로 쳐들어가 일본을 몰아내게끔 도와 줄 여력이나 입장이 못 되었다.

하지만 김홍일의 말처럼 소비에트 러시아가 한국 민족주의 독립운동가들을 토사구팽했다는 시각도 맞다. 그동안 볼셰비키들은 민족자결주의를 부르짖으며 제국주의에 시달리는 피지배 민족들의 '해방'을 약속했었고, 조선인들과 같은 여러 민족들이 그 말을 믿고 조국을 위해 적군의 밑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소련의 볼셰비키들은 위기를 넘기자 일국사회주의로 돌아서서 쓱 입을 씻고는 구 러시아 제국의 판도를 지키는 데 머물렀다. 거기다 민족자결주의를 내세울 땐 언제고, 내전이 끝나갈 무렵이 되자 통일된 사회주의 조국을 내세우며 소련 내 각 민족들의 독립적인 움직임을 탄압하였으니, 결국 그들에게 협조한 한국의 민족주의 독립운동가들은 국가 형태만 전제군주정에서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바꾼 제국주의 러시아에게 속은 셈이었다.

김홍일은 곧 극동 공화국이 대한의용군의 항일활동을 도와주기로 했던 약속을 어겼다며 격하게 성토하는 내용이 적힌 사표를 내곤 부대를 해체했고, 상부와 담판지어 1, 3중대 부대원들의 사후 1년간의 생활보장을 약속받고는 러시아를 떠났다. 어찌나 화가 났는지, 중간에 소련군에서 사람을 보내 프룬제 군사대학에 입학시켜 줄 테니 남아 달라고 요청했지만 단칼에 거절했다고.

곧 만주로 내려온 그는 실력양성운동에 잠시 몸담으며 명동중학교를 설립하였다. 이 학교는 민족운동가 양성을 목적으로 했는데, 졸업생들의 중국 대학 진학을 염두에 두어 중국의 교육제도를 기반으로 하되 국어한국사, 한국지리를 추가한 형태로 운영되었다. 신입생들은 30명이었다. 교사는 김홍일을 포함해 셋이었는데, 그 중에서 그는 중국어수학, 그리고 체육을 가르쳤다. 그동안 그는 러시아 출신 한인 빨치산들이 한국의용군사위원회를 결성하자 그도 여기 참여하여 만주로 내려온 다른 독립운동 단체들을 규합했다.

다만 이 단체는 상해파 고려공산당원들이 중심이 된 공산주의 성향의 독립운동&항일 단체인 적기단과 연계되어 있었는데, 김홍일은 자서전에서 적기단에 관한 언급은 단 한번도 한 적이 없다는 점이 의문이다. 그 정확한 이유는 김홍일 본인만이 알겠지만, 시베리아 내전기 독립운동 연구의 권위자인 윤상원 교수는 본인이 2014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이를 두 가지 가능성을 놓고 해석했다. 하나는 김홍일 본인이 자신의 활동이 적기단과 연계되어 있다는 것을 몰랐다는 것. 김홍일은 이들의 성향엔 거리를 살짝 두고 단지 항일운동 동지로만 여겼다는 해석이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적기단 산하인지 알고 있었지만 자서전에서 일부러 누락했다는 것이다. 자서전을 쓰는 1960~70년대 시점에서, 그것도 국민혁명군과 6.25전쟁 당시의 한국군에 몸담았던 거물이 명백한 공산주의 단체와 연계해서 활동했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은 정치적으로 상당히 위험했을 것이기 때문이다.[31]

3. 중국 국민혁명군 시절

3.1. 국민혁명

하지만 곧 만주로 잠입해 독립운동가들을 색출하던 일본 육군 헌병에 정체가 탄로난 그는 창춘으로 도피해 한동안 생활했고, 결혼도 거기서 했다. 이후 북벌을 준비하는 중국국민당의 소식을 듣고 상하이로 갔다가 그곳에서 다시 국민정부의 본거지인 광둥성으로 향했다. 여기서 그는 시베리아에서 같이 싸웠던 전 대한의용군 사령관 이용[32], 그리고 동로군사령부에 있던 귀주 강무당 동창생인 하집오를 통해 국민혁명군 소교(소령)가 되었고, 허잉친이 지휘하는 동로군 휘하에서 국민당의 1차 북벌에 참여하였다.

이때 그가 포함된 동로군의 공격 대상은 푸젠성과 장시성에 주둔 중인 쑨촨팡(손전방) 휘하의 직예군벌군이었다. 여기서 그는 항공대 장교들을 포섭하는 공을 세운다. 이 때 포섭된 손전방 항공대원들은 비행기 주요 부품을 분해하는 등 직예군의 비행활동을 의도적으로 방해하며 동로군에 합류하였는데, 이 중에는 후일 공군의 아버지로 기록되는 최용덕 장군, 공군의 아주머니로 일컬어지는 한국인 1호 여류비행사 권기옥 여사 등이 있었다. 이후 1차 북벌이 종료되고 난징에서 국민정부가 수립되어 열병식이 거행되자, 그는 강무당 은사이자 상관인 허잉친의 연락참모로써 나란히 말을 타고 부대를 사열하는 영광을 얻기도 했다.

1926년 12월 중교를 거쳐 1927년 3월에는 상교로 진급하였다.[33]

1927년 7월에는 저장성에 새로 편성된 독립경비연대의 부연대장 겸 1대대 대대장 등을 역임하였다. 이때 상황은 난징 국민정부에게 상당히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북벌 도중 천도논쟁4.12 상하이 쿠데타를 거치면서 국민당 정부는 장제스의 난징 국민정부와 국민당 좌파가 이끄는 우한 국민정부로 분열된 상태였는데, 장제스의 난징 국민정부군이 산동성으로 올라가 있는 틈을 타 우한 정부의 군대가 동쪽으로 진군해 안후이성까지 진출했다. 한편 밀려났던 쑨촨팡의 직예군도 다시 반전, 장강 이남으로 남하하며 수도 난징을 위협했다. 이때 김홍일은 22사단 소속으로 항저우 남단의 진화시 용담에서 직예군을 4일간 저지하면서 시간을 벌었다. 그리고 22사단이 적을 묶어놓는 동안 천사오콴 중장의 국민혁명군 해군 함대가 장강을 거슬러 올라와 강을 뒤에 놓고 배수진을 쳤던 직예군을 후방에서 포위공격했다. 이 용담 전투에서 국부군은 3만에 달하는 직예군 포로들을 잡는 대승을 거두며 수도를 지켜냈고, 일익을 담당한 김홍일은 이 공으로 화주영예장장을 수여받았다.

이후 장제스가 복귀하고 2차 북벌이 시작되자, 김홍일은 국민혁명군 참모총장이 된 스승 허잉친을 따라 총사령부로 전속, 군계처 통계과장으로 배치되어 무기를 통일하고 보급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그리고 북벌군과 산동성을 침공한 일본군 간에 제남 사건이 벌어지자 보급장교로써 현장으로 파견되었고, 군사회의에도 참석하여 장제스 앞에서 보급 문제를 논의했다. 그는 소련 고문단이 남기고 간 40문의 62.5mm 산포의 탄약이 매우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린 뒤, 제3집단군사령관이자 염계군벌의 거두였던 옌시산의 허락을 받아 그의 휘하에 있는 타이위안 병공창에서 탄약을 재생하였다. 집단군사령관씩이나 되는 사람이 자기 공장의 생산 능력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어서 놀랐다고 한다.

3.2. 북벌 이후

북벌이 끝난 후에는 상하이로 돌아와 오송요새사령부 참모장, 19로군 정보국장등을 역임했다. 1931년에는 국민정부의 지원으로 일본 유학을 준비하여, 일본군의 포병 병과학교인 육군야전포병학교 입학 시험을 치르고 합격했다. 하지만 출발 이틀을 앞두고 만주사변이 일어나 중일관계가 경색되자 유학 계획은 백지화되었다.

이후에는 국민혁명군 상하이 강남기기제조총국 주임으로 있으면서 무기 생산을 감독했다. 이 일은 생각보다 간단한 일이 아니었는데, 당시 국민혁명군은 표준 무기가 없이 다양한 국가의 무기를 혼용했기에, 부대별로 쓰는 소총의 종류와 구경 등이 상이했다. 그래서 제대로 된 보급을 위해서는 이를 상세히 파악해 생산하고 조달해야만 했다. 거기다 수많은 종류의 무기를 생산하므로 공정이 난잡해지는 것도 문제. 또한 각 부대들이 실제 필요한 양보다 더 많은 양의 보급을 요구했기에, 실제 소모량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도 일이었다. 이때 복잡하고도 중요한 군수참모 업무를 수행했던 경험은, 김홍일이 단순한 야전사령관이 아닌 전략가로서의 안목을 갖추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3.3. 사쿠라다몬 의거훙커우 공원 의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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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와 김홍일. 왼쪽의 인물은 이봉창의 폭탄을 제작해준 중국인 왕바이슈다.
국군의 병기를 관리하는 책임 장교였던 나의 상식에 의하면, 아무래도 그 거리가 100m 이상이나 떨어져 있는 표적물을 보통 수류탄을 던져 가지고 실수 없이 명중시키기란 참으로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여러 가지로 생각을 거듭한 끝에, "약간 구식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 보통 수류탄 대신에 마미(蔴尾) 수류탄을 구해서 이 동지한테 주는 것이 좋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 마미 수류탄은 보통 수류탄에 비해서 폭발력이 약하다는 것이 좀 단점이긴 하지만, 그 대신 중량이 가벼워서 멀리까지 던질 수 있는 데다가 불발탄이 없고, 또한 휴대하기가 간편한 이점이 있었다. 하지만 제 아무리 휴대하기가 간편하다 하더라도, 어떻게 이 수류탄을 도쿄까지 안전하게 운반할 수 있겠느냐는 문제로 당시 김구 선생과 나는 보통 고심한 것이 아니었다.
김홍일,『대륙의 분노 - 노병의 회상기』, 문조사, 1972, 273쪽

바로 이 시기 그는 상해 임시정부의 김구와 접촉하여 이봉창, 윤봉길의 거사에 필요한 폭탄을 제작하여 지원하였다.[34][35][36][37] 자서전인 『대륙의 분노』에 따르면, 사쿠라다몬 의거훙커우 공원 의거가 끝난 후 일본에서 왕웅이라는 중국 군인을 색출하기 위해서 노력했는데, 그때는 이미 다른 이름으로 바꾸어서 목숨을 구했다고 한다. 김홍일은 중국인들 사이에서는 자신의 호 일서(逸曙)를 쓴 왕이슈(왕일서, 王逸曙)란 이름으로 주로 통용되었기 때문이다. 분노한 일본군의 추격이 심해지자 난징으로 돌아간 그는 난징 교외의 공병학교 부관처장이 되었다.

3.4. 국방건설기 군수설계위원 재직

1933년에는 제2로군 총지휘부 상교참모에 임명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전까지 그는 중국 최고의 군사기관인 군사위원회의 군정부 군수설계위원으로 재직하며 국민혁명군 전체의 군수품을 관리하고 있었다. 군사위원회는 중원대전 이후 수립되어 중국 군벌군들을 국민당의 군대인 국민혁명군 휘하로 통합하는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 설치된 최고회의였다. 1931년 군벌 내전이 얼추 마무리되자 장제스는 다음 단계인 일본 제국과의 일전을 위해 전력을 재정비하면서 그동안 분열되어 있었던 군사, 정치, 경제 영역을 하나로 통합하고자 했는데, 군사위원회는 그 중에서도 군사 부문을 관할하기 위해 설치된 것이었다. 그리고 주중 독일 군사고문단의 도움을 받아 라이선스 생산한 독일제 무기로 장비를 통일하고 현대적인 군 시스템을 구축했다. 경제적으로는 산업이 정책적으로 육성되었고, 1935년부터는 일본과 가까운 동쪽 해안지대에 집중되어 있던 공장들이 우한이나 쓰촨 등의 내륙 후방으로 재배치되었다. 이로써 장강을 따라 중국 내륙 깊은 지역까지 철도와 도로가 깔리고 공장이 설립되었다. 또한 미국 및 영국의 도움을 받아 법폐개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여 전국의 화폐를 통일하였다. 이렇듯 '난징 10년' 기간 동안 국민정부의 국력은 점차 하나로 통합되면서 일본과의 총력전을 시도해 볼 수 있게 되었다.

바로 이 당시 군수설계위원으로 재직하던 김홍일은 단순히 무기 생산뿐만 아니라, 대후방 지역인 쓰촨성에 지하 공장지대를 건설하고 동해안 지대의 공장을 후방으로 이전하는 일도 감독했다. 그리고 루거우차오 사건으로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7년 7월에는 군수설계위원 자격으로 장시성 루산에 위치한 중국판 '총력전 연구소'인 서기훈련단에서 전시의 종합적인 국가 운용에 관한 교육을 받았다. 서기훈련단은 장제스가 사단장 이상급 장교들과 각계 인사들을 모아 국민당의 삼민주의 정신을 교육함으로써 통합을 꾀하고, 또 앞으로 있을 항일전에 대비하여 중국의 인재들이 각자 자신들의 전문 분야에 개혁 방안을 총체적으로 연구하고자 세운 싱크탱크였다. 2주간의 짧은 과정이었지만 이를 통해 김홍일은 현대적인 총력전의 준비 과정을 접할 수 있었고, 동료 장교들 및 관료들과 함께 전시의 보급 및 경리 문제에 대한 방안을 의논했다. 군수참모로 활동한 경험과 서기훈련단, 그리고 후에 중국 육군대학에서 받은 고급 교육은 그가 후에 귀국하여 국방개론을 저술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4. 중일전쟁

루거우차오 사건으로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중국군은 서기훈련단에 있던 장교들을 차례대로 귀대시켰다. 그리고 곧 화북뿐만 아니라 강남에도 일본군이 쳐들어와 제2차 상하이 사변이 벌어졌고, 김홍일을 비롯한 군수설계위원들은 상하이에 위치한 각종 설비들을 후방으로 이전시켰다.

상하이에서의 항전은 치열했지만 일본군이 항저우를 통해 후방을 치면서 결국 중국이 패배하고 말았다. 이어 수도인 난징마저 함락되자, 중화민국은 중심지인 우한으로 후퇴하여 장기 항전을 준비했다. 우한은 장강 중류의 교통의 요지였고, 양무운동 이래, 그리고 북벌이 끝난 이래 장제스가 대일 항전을 위해 야심차게 건설한 후방의 산업 중심지이기도 했다.

이때 김홍일은 천청의 명령으로 특별훈련반의 교관이 되어, 일본유학생들을 중심으로 하여 선전과 포로 심문 방식 등을 교육했다. 교육생은 약 300명이었는데 그 중에는 김원봉 휘하의 의열단을 주축으로 한 한국인 대원들이 100명이었다. 중국인 학생들은 곧 전방 지역 사단과 유격대로 파견되었지만, 중화민국 정부는 한국인 생도들은 지금 소모되면 후일 한국의 독립을 위해 싸울 수 없다며 후방에서 포로를 심문하도록 했다. 그리고 이들은 곧 중화민국의 지원을 받아 조선의용대를 결성한다. 이들 중 여럿이 후에 중국공산당에 가담하여 조선의용군으로 떨어져나갔다가, 1950년에 북한군의 주축으로서 남한을 침략하게 되니[38], 결국 따지고 보면 6.25전쟁에서 김홍일은 자신의 제자들과도 싸운 셈이었다. 전쟁 발발 1년째 후방 근무만 하는 데 진절머리가 났던 김홍일은 자신이 키운 조선의용대 대원들을 이끌어 유격전을 벌이고 싶었지만, 상부에서 받아들여 주지 않았다.

그러던 중 1938년 말에 일본군이 우한으로 진격해올 즈음 난징 전투에 참전했다가 후퇴했던 국민혁명군 제102사단이 한커우로 오자, 그는 상부에 청원하여 해당 사단의 참모장으로 부임하여 전방에서 일본과 맞설 기회를 얻었다. 102사단은 구이저우성의 검계군벌을 주축으로 결성된 부대로, 당시 사단장 바이휘장을 비롯한 휘하 연대장 두 명이 김홍일과 귀주 강무당 동기였던데다 김홍일 본인이 창설한 부대이기도 했다. 32년 윤봉길훙커우 공원 의거 성공 이후 국민정부는 김홍일을 일본의 추적을 피해 도피시키며 서남수청공서에 소속시켜 귀주로 보냈었는데, 그는 여기서 귀주군을 중앙으로 귀속시켜 102사단과 103사단으로 창설하는 것을 감독했었다.

4.1. 우한 전역

그리고 1938년, 일본군은 기어이 장강을 거슬러 올라와 우한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은 중국의 교통과 산업 중심지였던 우한을 점령해 중화민국을 항복시키고자 국가총동원령을 내려 40만의 병력을 끌어모으는 등 총력을 다했다. 이 때문에 중국은 곧 우한을 내주고 충칭으로 천도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완패했던 것은 아니었다. 쉐웨 장군의 중국군 9전구 10만 병력은 우한 남동쪽 장시성의 더안현에서 응전하여 일본군을 분쇄했다. 이때 김홍일의 102사단도 9전구 소속 제4군단의 휘하에서 이 전투에 참가하였다. 만가령(완자링) 전투로 불리는 이 전투는 중일전쟁 기간 김 장군이 일선지휘관으로서 임한 첫 전투로, 사단 참모장의 위치에서 2개 연대 6개 대대를 배속받아 직접 지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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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가령 전투 상황도. 중앙에 철도가 지나는 지점에 일본 106사단이 중국군 방어선에 포위당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루산 동편에는 101사단이 중국군 방어선을 밀어내고 있으며, 일본 17사단의 스즈키 지대가 포위망 뒤로 크게 우회해 중국군 후방을 치고 있다.

전투 상황을 설명하자면, 우한으로 진격하던 일본 중지나방면군 중에서도 오카무라 야스지 중장[39]의 11군은 휘하에 있는 106사단과 101사단, 그리고 27사단을 보내 주장에서 남쪽의 난창으로 향하는 철도 요충지를 공격하고자 했다. 그러자 이를 간파한 중국군 9전구는 16개 사단을 동원해 남진하는 일본군 106사단을 물샐 틈 없이 포위하고 두들겨댔다.

당시 김홍일의 102사단은 만가령에서 일본 106사단과 정면으로 격돌했다. 한동안은 대치 상태가 이어졌는데, 루산의 험준한 지형과 중국군의 완강한 방어를 뚫고 들어오느라 지쳤던 일본 106사단이 진격을 멈추었기 때문이다. 한편 김홍일의 102사단 또한 포병과 전차의 부재로 인해 압박 수단이 많지 않았다. 게다가 4군단 사령부에서 인근의 59사단과 90사단의 손실이 크다는 이유로 102사단에서 2개 연대를 빼가는 바람에 102사단 휘하에는 본부 빼고 1개 연대밖에 남지 않아, 뭘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부당한 명령이었지만 사단장 바이휘장은 명령불복종 혐의로 목이 달아날까 두려워 상부에 항의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직접 4군단 사령부에 찾아간 김홍일은 군단장 앞에서 한판 뒤집어놓아 뺏긴 연대들의 지휘권을 되찾아온 다음, 사단사령부로 돌아와 전투지휘부를 구성하곤 되찾은 연대들이 있는 곳으로 이동하여 가까스로 준비를 완료했다. 그의 부대는 10월 8일부로 전선에 자리를 잡았다. 10월 2일부터 중국군 사단들이 일본 106사단을 포위하며 본격적인 전투가 막 시작되던 참이었다.

포위당한 일본 106사단의 상황은 좋지 않았는데, 그동안 입은 전력 손실이 컸던데다 루산 지역의 험한 지형과 중국군의 포위로 인해 손실분을 보충받기가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비행기에서 떨어뜨리는 항공 보급을 받았지만, 이마저도 태반의 보급품이 중국군 쪽으로 떨어져 중국군 병사들에게 기쁨을 주곤(...) 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의 독일 6군 꼴이 난 셈. 이로 인해 일본군의 위태로운 상황을 간파한 중국군은 공세로 나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중국군도 루산 산악지대에서 공세를 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중국 102사단과 일본 106사단의 직선 거리는 1.5km에 불과했지만, 중간에 험준한 능선과 계곡들 여럿이 늘어서 있어 실 거리는 5km에 달했다. 거기다 일본군이 아무리 약화되었어도 중화기 숫자는 중국에 비해 더 많았던데다, 우세한 항공력도 동원할 수 있었다. 때문에 알보병이 병력의 대부분이던 중국군은 고개만 내밀면 일본 항공대에 폭격당하는 낮에 정면충돌을 하는 대신 야습을 가했지만, 그때마다 일본군이 험한 능선에 잘 구축한 기관총 진지의 사격에 격퇴당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전술한 사정으로 전투지역에 조금 늦게 도착했던 김홍일은 인근 중국군 사단들이 며칠 동안 무의미한 야습과 후퇴를 반복하는 꼴을 지켜보곤 전법을 바꿀 필요성을 느꼈다. 그는 이 전투의 중점이 기관총좌를 제압하는 것이라고 판단했지만, 전투가 벌어지는 주요 시간대가 밤이어서 그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김홍일은 우선 통상적인 야습인 것처럼 보병들을 한번 돌격시켜 일본군 기관총 진지의 사격을 유도했고, 총구화염을 보고 적 진지의 정확한 위치들을 파악해 기록했다. 그리고 다음 날인 10월 9일 낮, 관측장비로 그 진지의 위치를 자세히 계산하곤 휘하 연대들의 81mm 박격포 16문을 싸그리 끌어모았다.

당시 102사단에는 보병부대와 분리된 사단 직속 포병부대가 부재한 대신,[40] 사단 휘하의 각 보병연대마다 박격포가 8문씩 예속되어 있었다. 이는 개별 연대의 화력은 보장해주지만, 상위제대인 사단 수준에서는 화력이 분산되며 집중적인 포병 운용이 불가능함을 뜻했다. 때문에 그는 자신이 지휘중인 두 개 연대가 가진 박격포를 한데 모아 일괄 통제하여 일반지원용으로 써먹고자 한 것. 그리고 10월 9일 밤이 되자, 그는 박격포 16문의 일제포격을 주요 기관총 진지에 집중적으로 가해 진지를 파괴함과 동시에, 대기시키던 보병부대들을 해당 지점으로 돌격시켜 일본군의 방어선을 단숨에 뚫었다. 일본 106사단은 참패를 당했으며, 황급히 퇴각하느라 수많은 장비와 1천필에 달하는 군마를 중국군에게 넘겨주다시피 했고, 기밀문서도 파기하지 못했다. 이로써 중국군 9전구는 노획한 문서를 바탕으로 앞으로의 전투를 유리하게 끌고 갈 수 있었다. 덤으로, 이 전투가 끝난 10월 10일은 중화민국의 국경절인 쌍십절이었기에 중국 국내의 기쁨은 더했다. 장제스가 직접 102사단 사령부에 전화를 걸어 승전을 축하했을 정도였다.

그러자 일본군은 101사단을 포위망 동쪽의 루산과 포양호 사이를 통해 투입하였고, 쇼와 천황에게 허가받아 중포로 독가스까지 갈겨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대의 중국군은 루산 일대의 좁고 험준한 지형을 바탕으로 완강히 버텼다. 일본군은 포위망 서쪽 후방으로 방면군 직속부대인 17사단을 보내고 소이탄을 이용한 공중 폭격까지 동원하고 나서야 가까스로 포위망을 돌파해 퇴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101사단과 106사단은 오랜 포위로 인해 와해되기 직전이 될 정도였다. 여기에 중국군은 퇴각하는 일본군의 후미를 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전투 종료 시점에서 일본군의 사상자는 도합 3만에 달했다. 이 전투로 인해 우한으로 진격하는 일본군의 공세는 상당히 둔화되었고, 중화민국은 정부 부처와 민간인들이 충칭으로 질서정연하게 퇴각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을 벌 수 있었다. 102사단과 김홍일은 일본군의 공습이 심해지자 10월 12일부로 남쪽 난창으로 후퇴했다.

하지만 이듬해 3월, 일본군은 김홍일에게 박살이 난 106사단을 포함해 5개 사단과 해군 강방함대를 동원해 난창을 점령했다. 이 때부터 국민혁명군은 일본군을 포위섬멸하기보다는 소모시키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102사단이 소속된 9전구에는 47개 사단이 있었지만 장비와 화력, 보급에 있어 일본군이 유리하기에 중국군으로써는 아군의 전력을 보전하면서 적의 전력을 약화시켜야 한다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국민혁명군 군령부에서는 9전구에 전력을 다해 거점을 확보하는 대신, 선두부대가 2분의 1의 손실이 날 때까지 버티다 이 직후로는 결전을 회피하라고 지시했다.

4월, 난창 탈환작전이 실시되자 김홍일과 102사단 또한 참전했고, 선두의 26사단이 난창 시내까지 돌입했다가 반박살이 나는 등 손실이 커지자 작전이 종료되어 복귀했다. 이 작전은 난창뿐만 아닌 4월 총공세라 불리는 전방위적 공세의 일환이었기에, 일본군은 전력이 상당히 약화되어 9월까지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1939년 5월에는 그간 세운 전공에 힘입어 국민혁명군 육군 소장으로 진급하였다.[41]

4.2. 샹가오 전투와 2차 창사 전투

이후 김홍일은 나탁영(러줘잉, 羅卓英) 상장의 제19집단군(야전군 급) [42] [43] 참모처 처장으로 부임하였으며, 1941년 샹가오 회전(상고회전, 上高會戰)에 참전했다. 이 전투는 국민혁명군 제9전구 소속 11개 사단(실 전투병력 약 7만명)이 일본군 제11군 소속 2개 사단, 1개 혼성여단(실 전투병력 약 2만명)의 공격을 격퇴한 전투이다. 일본군 사상자(약 5~6천명)에 비해 국민혁명군의 사상자(약 2만명)가 훨씬 많기는 했으나, 일본군은 제19집단군을 섬멸한다는 목표 달성에 실패하였다.

1939년 말 국민정부의 대대적인 반격작전을 경험한 일본 제국은 전쟁이 쉽게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절감했다. 이후 일본은 병력을 감축시키려던 결정을 뒤집고 충칭 대공습과 같은 전략 폭격 횟수를 증가시켰고, 주요 전투지역이었던 장강 중류에서 여러 차례 반격을 가했다. 하지만 일본의 경제와 보급능력 부족, 중국군의 격렬한 저항, 그리고 일본의 침략 야욕을 경계한 유럽과 미국의 중국 지원으로 인해 이 공격들은 그리 성공적이지 않았다. 1940년 일본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44]를 공격해 중국이 군수물자를 수입하는 하노이 루트를 끊었음[45]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상황과 공방전이 이어졌다. 김홍일이 종군했던 샹가오 전투와 2차 창사 전투도 마찬가지였다. 이 두 전투는 1941년에 벌어졌던 대전투들로, 모두 국부군이 승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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샹가오 전투 상황도. 붉은 선과 화살표가 중국군의 진격로와 방어선이며, 푸른 화살표가 일본군이다. 일본 34사단이 포위망에 갇히는 모습, 일본 33사단의 진격이 막히는 것, 그리고 중국 49군이 도강하여 일본 20여단을 우회격파하고 포위망 안으로 밀어붙이는 모습이 보인다.

1941년 3월 15일, 난창을 수비하던 일본군 11군은 그동안 지속적인 압박을 가해오던 중국군 19집단군을 분쇄하고자 제20독립혼성여단과 제3비행단을 증원하여 난창에 주둔하던 33, 34사단과 함께 중국군 19집단군이 위치한 샹가오로 진격시켰다. 중앙 주공을 맡은 것은 34사단이었고, 33사단은 우익을, 20여단은 좌익을 맡았다. 이에 맞서 중국군 러줘잉 상장은 지연포위전으로 대응했다. 세 겹의 방어선을 설정하여 샹가오 코앞인 3 방어선까지 적을 소모시키며 끌어들인 후, 좌익으로 일본군 우익을 격퇴하고 우익으로는 일본군 좌익을 우회포위하여 섬멸, 그리고 남은 일본 중앙부대를 포위격멸한다는 계획이었다. 이때 김홍일은 와병 중이던 19사단장을 대신하여 19사단을 직접 지휘했다. 그의 사단은 중국군 좌익 1, 2 방어선에서 지연전을 맡은 70군에 배속되어 있었다.

러줘잉의 작전은 완벽히 실행되었다. 중앙의 일본 34사단이 샹가오 코앞까지 도달하는 동안 일본 33사단은 중국 70군과 72군의 견제를 받았다. 일본 20여단은 일부 부대가 34사단과 합류해 진격했지만 나머지 분견대가 중국 우익의 49군에게 우회포위당해 박살났고, 49군은 곧바로 20여단의 잔여부대를 추격하며 후방을 후려쳤다. 그리고 중국 70, 72군은 33사단 견제 역할을 74군과 교대한 후 남하하여 3방어선을 돌파하려던 34사단의 측면을 찔렀다. 이로써 일본군은 사면에서 포위당하고 말았다. 중국군 좌익에게 격퇴당했던 일본군 33사단이 다시 돌아와 포위당한 아군을 구원하려 했지만, 74군의 견제로 실패했다. 일본군 병력들은 다시 4~5일 동안 포위망 속에서 중국군의 공격을 두들겨맞다가 4월 1일이 되어서야 전차를 앞세워 간신히 탈출했다.[46] 명실상부한 중국의 대승이었고, 러줘잉의 작전은 이후 보고서로 정리되어 전 국부군의 교범으로 보급되었다.

이후 1941년 9월 2차 창사 전투가 벌어지자 김홍일은 다시금 19집단군 소속으로 참전했다.

4.3. 중일전쟁에서 겪은 지연전 경험의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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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대륙타통작전이 벌어질 당시 형세. 붉은 부분이 일본군 점령지이고, 붉은 선은 대륙타통작전 당시 일본군의 진격로다. 그리고 검은 선은 철도이고 푸른 원 안의 백색 별은 중미연합공군 기지들이다. 장강 중류 우한을 중심으로 주머니처럼 생긴 일본군 중지나방면군 점령지가 중화민국 세력권 안쪽으로 불쑥 튀어나온 모습이 보인다. 김홍일이 있는 국민혁명군 9전구는 이 돌출부의 바로 남쪽인 장시성 지역에 위치했다. 이 형세는 일본과 중국의 전쟁 역량 부족으로 인해 1940년경 교착된 이래로 대륙타통작전이 벌어지는 1944년까지 거의 변화하지 않았다.

이러한 지연전 경험은 후에 6.25 전쟁에서 김홍일이 성공적인 지연작전을 펼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위 지도에서 볼 수 있듯 중일전쟁 당시 그의 19집단군이 속한 9전구와 국민혁명군 1, 3, 5전구는 장강 중류의 우한을 중심으로 하는 일본 중지나방면군의 11군을 포위하는 형세로 배치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이 지역을 중심으로 일진일퇴의 격전이 벌어졌다. 장강 중류에서의 중일의 이런 공방전은 몇 년째 이어졌고, 김홍일이 종군한 샹가오 회전을 비롯해 난창 전투, 창사 전투, 1939년 동계공세작전 등의 유명하고 거대한 전투들이 이 9전구 지역에서 벌어졌다. 하지만 일본은 보급 능력 부재로 인해 중국군 점령 지역으로 진격하다가도 보급선이 길어져 후퇴해야만 했다. 그러면 중국군은 완강히 방어하면서도 전력을 최대한 보존하며 전선을 뒤로 물리다, 일본군이 퇴각하기 시작하면 반격하여 후방을 들이치는 방식으로 점령지를 수복했다. 9전구 사령관 쉐웨 (설악) 장군은 이런 지연전과 구대전술을 구사하는 데 있어 특출난 재능을 발휘하는 명장이었고, 오랜 기간 동안 일본군의 진격을 효과적으로 저지했다. 김홍일도 9전구 휘하에서 직접 작전을 지휘하며 관련 노하우를 습득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훗날 북한군을 상대로 이 경험을 그대로 써먹는다.

4.4. 1941년 이후

1941년에는 군사위원회 위원장인 장제스에게 직접 청년군 창설안을 기획하여 보고하였다.

이후 중국 국민혁명군 최고위 군사교육기관인 육군대학 특별반(2년 과정)에 입교하였다. 회고록에 따르면 육군대학에 있으면서 당시 미군 고문단, 구미 시찰단 등으로 부터 교육을 받으며 선진 군사학을 익히고 연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육군대학은 전사연구에 중점을 둔 교육을 제공했고, 발행하는 학술지에는 해외의 수많은 신식 전술에 관한 논문들이 번역되어 실렸다. 총력전에 대해서는 독일 국가방위군 장교였던 쿠르트 헤세(Kurt Hesse)의 이론, 그리고 일본 제국에서 발행한 소책자인 "국방의 본의와 그 강화의 제창"에 입각하여 자립적인 국방경제를 건설하는 것이 중시되었다. 자서전에 따르면, 김홍일은 이때 받았던 교육 중 북아프리카 전역이나 스탈린그라드 전투, 모스크바 공방전에 참여했던 연합군 및 소련군 장성들이 찾아와 시행했던 방문교육이 가장 도움이 되었다고 회고했다.

특별반 졸업 후인 1944년 1월에는 제2병단[47] 참모처 처장 (사령관 나탁영) 에 보임되었으며 44년 10월에 장개석(장제스) 군사위원회 위원장의 지시로 나탁영 상장과 함께 국민혁명군의 신편 지식청년군 창설을 주도하였다. 청년군이 창설되자 2병단 사령부는 지식청년군 사령부로 개편되었으며 김 장군은 참모처장으로 부임하였다.[48] 이와 더불어 최용덕 장군과 함께 중국 국민정부의 광복군에 대한 9개 준승 폐지를 위해 노력하였다.[49] 당시 광복군에는 중국군 상교(대령) 고문관이 파견되어 있었다.

5. 한국광복군 참모장 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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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4월 30일

데이비드 D. 바렛트 대령
참모장, 중국전구사령부, 昆明.


친애하는 바렛트 대령.

일전에 우연히 본인은 초우(Chow) 소령을 만나서 귀하가 현재 중국 전투사령부 참모장이 되었다는 사실을 듣고 매우 기뻤습니다. 친애하는 소령, 축하합니다. 본인은 작년에 노(Lo) 장군과 함께 桂林에서 重慶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중국 교육청년단의 조직을 책임지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본인은 최근에 이 일을 그만두고 한국광복군 참모장이라는 새로운 직책을 맡게 되어 오는 5월 1일에 있을 취임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말하자면 본인은 스스로의 길을 갈 것입니다.

믿을만한 통계를 바탕으로 본인은 남서 태평양과 중국 지역에 주둔해있는 일본군의 20%가 한국인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본인이 할 일의 목적은, 말하자면, 일본인들의 손아귀에서 한국인 군인들을 벗어나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일본군과 싸우도록 조직하고, 우리의 독립 해방과 자유를 위해 싸우도록 하는 것입니다.

본인은 본인 앞에 놓인 길이 순탄한 길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연합국들로부터 이전 보다 더 많은 협조와 호의가 필요할 것입니다.

최근에 미국은 한국 문제에 관하여 깊은 관심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귀하의 전략첩보국 본부는 여러 곳에서 우리 광복군 행정장교와 대화를 나누었고, 지원도 약속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본인은 깊은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본인은 귀하께서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사실, 즉 한국인들이 통일된 조직 혹은 지휘체제를 갖추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 주기를 원합니다. 비록 의심할 바 없이 좋은 의도에서 시작된 것이라 하더라도, 귀하의 관심 방향에 있어서의 아주 사소한 차이가 우리 가운데서는 쉽게 서로의 틈을 크게 갈라놓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귀하가 귀국의 관계 당국에게 이러한 취지를 알려 주기를 본인은 원합니다. 귀하는 군사적인 문제에 관하여 重慶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소속되어 있는 한국광복군에 지원을 제공해야 합니다만, 정치적인 문제에 관하여는 重慶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관계를 맺고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실제로 우리의 힘은 보잘 것 없습니다. 더구나 만일 우리의 힘이 더 분열된다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게 될 것입니다. 본인은 지금 드리고 있는 탄원이 대단히 시의적절한 것으로 믿고 있으며, 귀하가 그것에 기꺼이 유의하여 주시기를 희망합니다.

최씨와 이씨 두 분에 관련해서 그들은 귀 당국과 협의하기 위해 重慶을 떠났습니다만,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광복군으로부터 그렇게 하도록 승인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책임 있는 사람들이고, 그들의 말은 신임할 만합니다.

만약 미국이 한국 문제에 관하여 어떤 명확한 사항을 결정하는 일이 생기게 되면, 귀국의 관계 당국이 그것을 행동으로 옮겨지기 전에 우리 임시정부 혹은 광복군과 먼저 의논해 주기를 제언합니다. 그렇게 해야 우리가 서로 보조를 맞추어서 일본을 응징하는 문제를 처리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본인은 일본을 가장 싫어하는 한국인들이 일본을 파멸시키는 이 전쟁에 참여할 수 없게 된다면, 그것은 이제까지 일어난 일 중에서 가장 유감스러운 일이 될 것이며, 이러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조처하는 것이 연합군 동아시아 전구 사령관의 의무라고 강조하여 말하고 싶습니다.

본인이 편지에서 표현한 것에 대해 귀하가 어떤 의견을 갖고 있다면 대단히 고맙게 여길 것입니다. 시간이 나면 본인에게 몇 줄 써 보내주십시오. 귀하가 하는 모든 일이 두루 형통하기를 희망하며,

경구
왕일서

5월 1일부터 본인은 한국 이름인 김홍일을 사용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소는 重慶 사서함 95호입니다.}}}

광복군 참모장에 부임할 즈음 김홍일이 미군 데이비드 D. 바렛 대령에게 광복군과 임시정부의 지위 강화를 요청하며 보낸 서신[50]
이후 1945년 5월 김구 주석의 요청으로 한국광복군 사령부 한인 참모장에 취임하였다. 계급은 참장으로 오늘날 소장에 해당한다. 백범일지에 등장하는 광복군 한인참모장 왕일서(王逸曙)가 바로 김홍일이었다.

6. 8.15 광복건군기

6.1. 국부군 복귀, 한교사무처장직 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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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한교사무처장 부임 이후 시찰 나온 장제스 주석과 찍은 사진.

일제가 패망한 후인 1945년 11월 국민혁명군에 다시 복귀하여 중국 동북에 있는 두위밍(두율명, 杜聿明)[51] 장군의 동북보안사령부 고급 참모 겸 한교사무처장으로 부임하였다. 한교는 당시 중국에서 만주 내에 있는 조선인들을 지칭하던 말이다. 이 당시 김홍일이 맡은 일을 설명하자면 당시 만주의 한국인-중국인 간 민족 갈등 양상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당시 만주에는 후에 조선족으로 불리게 될 수많은 조선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이들 중 다수는 일제가 불법적으로 건설한 괴뢰국인 만주국 시절에 일본의 지원을 받아 진출한 이들이었다. 물론 구한말부터 만주로 올라가 터를 잡은 이들도 많았고, 1920년대까지는 민족주의 독립운동이나 사회주의 운동에 투신하며 일제에 저항한 이들도 많았다. 하지만 곧 무정부 상태였던 만주의 상황을 이용해 월경한 일본군이 간도에서 학살을 자행하자, 다수의 독립운동 단체들은 러시아로 향했다. 앞서 서술했던, 젊은 시절의 김홍일이 러시아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때가 바로 이 때의 이야기이다. 당장 그가 이끌었던 군비단부터가 간도 출신이다.

이렇듯 만주에서의 항일운동은 시간이 갈수록 힘들어졌다. 후에 만주의 정권을 잡은 장쭤린봉천군벌은 친일적 행보를 보이며 조선인들의 독립운동을 점차 탄압했고, 일본군이 만주에 본격적으로 쳐들어온 1931년 이후로는 압도적인 일본 관동군간도특설대로 대표되는 특무대의 잔혹한 진압으로 인해 만주의 항일 세력은 거의 축출되었다. 이후의 항일 거점은 중국 관내로 이동했다. 강남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그리고 화북의 조선의용대가 그 예.

1932년, 새로이 만주의 지배자가 된 일본 제국은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우고 개발을 명목으로 본토와 조선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새로 불러왔다. 그리고 만주의 조선인들을 일본인보다는 낮지만 중국인보다는 높은 2등 시민으로 대우하며 은근히 갈등을 조장해 한중 양 국민이 연대할 수 없도록 조치했다. 만주국으로 이주한 조선인 다수는 항일만 하지 않으면 민족 간 갈등에서 일본의 보호를 받았고, 일본 제국의 지배에 편승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이 때문에 3등 국민 취급받던 만주 중국인들은 조선인들을 일본의 앞잡이라며 증오했다.

시간이 지나 태평양 전쟁 말기인 1945년 8월이 되어 미국이 원자폭탄을 떨어뜨리고, 소련이 만주 전략 공세 작전을 발동해 만주국을 지배하던 일본 관동군을 순식간에 분쇄하자 일본은 곧 항복했다. 그러자 증오감을 터뜨린 만주의 중국인들은 소련군이 휩쓸고 지나간 대혼란 속에 수많은 일본인들과 조선인들을 보복 학살했다. 이에 대응해 일부 조선인들도 자경단을 조직해 반격했지만 숫적으로 밀렸고, 민족 갈등은 최악의 형태로 폭발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를 제지해야 할 말리노프스키 원수의 소련군은 치안 유지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승전국이 되어 만주로 들어온 중화민국 국민정부는 이런 중국인들의 무분별한 보복 학살을 제지하고 치안을 정상화했지만, 그들 또한 만주의 조선인 중 다수가 일제의 앞잡이로 들어왔기에 한반도로 돌아가야 한다는 시각은 공유했다. 하지만 무작정 추방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항일 동지인 대한민국 임시정부와의 관계도 고려해야 했기에, 국민당은 이들 조선인들의 부역 혐의를 법에 따라 조사하여 죄의 경중을 따지고 무고한 이들은 국민정부의 이름으로 보호하겠다는 정책을 추진했다. 그래서 한국인인 김홍일 소장을 동북으로 보내 조선인 문제의 일선 책임자로 임명한 것.[52]

이 과정에서 약간의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 김홍일(당시 왕일서/왕이슈)이 너무 열성적으로 조선인들의 여건 및 처우 개선과 한국으로 돌아가는 기차표를 구해주는 일을 하자 두위밍 장군이 전체회의에서 "왕 장군은 무슨 조선인들의 대표요? 왜 그렇게 열성적으로 조선인들을 돕는단 말이오?"라는 질문을 했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참모들이 웃으면서 "조선인들의 대표지요"라고 말을 했고, 그가 사실 조선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두위밍 장군은 한교사무처장이라는 직책을 신설하여 그가 조선인들을 지원하는데 총력을 다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고 한다.

한편 1946년 통위부장을 맡게 된 유동열 장군이 박시창을 보내어 "앞으로 우리 국군의 기초가 될 터전을 마련하여야 하니 도와달라"며 귀국을 요청했다. 그러나 누군가 미군 정보부에 공산주의자라는 무고를 하는 바람에 귀국은 무산되었다.[53]

이후 중국 육군 중장으로 진급하였으며 남경의 국방부 정치부 전문위원으로 부임하였다.

6.2. 귀국

1948년 8월 28일 신익희, 유동열, 이범석, 최용덕, 송호성 등 동지들의 마중을 받으며 귀국하였다.

1948년 12월 10일 이승만 대통령의 특별 지시로 귀국과 함께 대한민국 육군 준장 계급 수여식에서 대표로 선서문을 낭독하고 12329의 군번을 부여받으면서 임관한다. 이로써 그는 대한민국 국군 역사상 최초의 장군 임관자로 기록되었다. [54] 이때 당시 육군 총사령관 송호성, 초대 총참모장 이응준, 채병덕, 해군의 손원일이 준장으로 진급한다.

이후 육군사관학교 7대 교장(1949.1.15.~1950.6.10.), 육군 참모학교장(1950.6.10~)을 맡아 후진 양성에 매진했다. 육군사관학교 교장 시절인 1949년 3월에는 소장으로 진급했는데, 역시 한국군 역사상 제1호이다. 이번에도 이응준, 채병덕, 손원일 등이 김홍일의 뒤를 이어 소장으로 진급했다.

6.3. 국방개론 저술

육군사관학교 교장으로 재임 중이던 1949년에는 <국방개론> 이라는 저서를 통해 대한민국 국군이 지향해야 할 국방력 발전 방향을 제시했다.[55] 자칫 공백으로 남아있을 뻔 했던 건군 초기 및 6.25 이전의 군사연구분야에서, 국군 내부에 이러한 식견을 가지고 연구를 하는 인물이 있었다는 점에 많은 의의가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는 건군의 사상사적 지향을 제시한 것으로 그 의의를 부여하기도 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관련 논문

상비군의 유효상한 비율을 인구대비 8/1000(즉, 0.8%) 수준으로 설정하고, 이를 기준으로 1949년 인구 3,000만 대비 상비군 24만이 적정하다고 제시하였다.[56]

구체적으로 육군은 공세적 작전을 취해 적을 국내로 들이지 않고 전장을 국외로 정해야 한다고 했으며 이에 따라 1개 사단은 전차, 모터사이클, 기관총, 각종 화포 등 중급장비로 갖춘 12000명으로 하고 최소 15개의 상비사단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이 중에서 만주와 시베리아의 대평원작전에서 장갑사단 3개 및 차량화사단 3개, 국경 산악지대작전에 산악사단 2개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또한 육군과 함께 입체전을 위해 폭격기를 위시한 공군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해당 저서가 나온 1949년에 공군이 독립하면서 어느 정도 반영되었다. 다만 해군력 건설은 공군 등과의 합동작전을 통해 적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한, 소형함정 중심의 연안해군 정도가 적합하다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건군 당시의 열악했던 경제력을 고려할 때, 상대적으로 건설 비용이 많이 요구되는 해군력은 우선순위에서 밀릴 수 밖에 없었음을 반영한 것이었다.[57] 대양해군 팬들이 실망합니다

이러한 내용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점은 김 장군이 독일의 기계화 전격전 교리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는 점으로 이는 국민혁명군 시절 육군대학에서 수학한 내용이 바탕이 된 것 같다.[58]

또 다른 하나는 김 장군의 가상적 인식이라 할 수 있는데 1949년 집필 당시에는 주적을 북한이 아닌 중국이나 소련으로 설정하고 북한은 종속 변수로 보았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향후 전쟁의 가능성도 조심스레 지적을 하면서 강국간의 냉전은 더욱 심화하여 제3차 세계대전이 장차 폭발될 상으로 파악했으며 소련이 북한 인민정부를 배양하여 일전을 결심하고 있다고 언급하였다.

다만 남한의 군사력은 진공할 역량을 갖추지 못했고 미국의 원조가 미약하다고 지적하며 국가간의 관계에서 외교로 국방을 건설한다는 연합 국방은 믿을 길이 못된다고 판단하였다.

즉 김 장군은 장차 한국이 당면할 전쟁은 북한 방면에서 소련에 의해 촉발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며 이에 대해 한국이 기계화 부대를 가동하여 만주와 시베리아까지 나아가 요격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59]

또한 한국은 현대 군대에 가장 필요한 석유가 없고 해외 식민지를 가지지 못하였을 뿐더러 장차에도 가질 희망이 박약하다고 지적하는 냉정한 현실 판단도 포함되었다.[60]

7. 6.25 전쟁

7.1. 한강 방어선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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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방어선 전투 지도. 천지일보 기사에서 발췌. 한국문화안보연구원 장순휘 박사 제공.
이름 출신경력 직책 주장
채병덕 파일:일본 제국 육군기.svg일본 육군 총참모장 결전
신성모 파일:영국 해군기.svg영국 해군 국방장관 결전
김홍일 파일:대만 육군기.svg국민혁명군 육군사관학교 교장 지연전
유동열 파일:한국광복군 휘장.png한국광복군 전 통위부장 결전
지청천 파일:한국광복군 휘장.png한국광복군 국회의원 지연전
이범석 파일:한국광복군 휘장.png한국광복군 국무총리 지연전
김석원 파일:일본 제국 육군기.svg일본 육군 1보병사단장 지연전
이종찬 파일:일본 제국 육군기.svg일본 육군 수도경비사령관 결전

6.25 전쟁이 발발하자 곧바로 열린 군 원로회의에 참석하여 의견을 개진하였다. 공식전사에 의하면 군 원로들과 함께 한강 방어를 제안했으나 당시 육군총참모장 겸 국방부참모총장이었던 채병덕이 거부하여 한강 방어선 구축이 늦어졌다고 전해진다. 구체적으로 김홍일 장군의 회고에서는 전 병력을 모아서 결전을 할 것인지, 아니면 지연전을 할 것인지 결정하고 병력을 운영해야 한다는 의견을 개진했으나 전략연구를 해본 인사가 없어서 자신의 주장이 공허했다고 적혀있다. 당시 회의에 참석한 인원은 신성모, 채병덕, 김홍일, 유동열, 지청천, 이범석, 김석원이고 광주 5사단장 이응준 장군은 상경 중이라 불참하였는데 김홍일, 김석원, 지청천, 이범석 등 경험많은 숙장들은 한강 방어선 구축을 주장한데 반해 정작 국방부장관 신성모, 참모총장 채병덕은 그 결정을 미뤘다. 채병덕은 회의장을 나서면서 "늙은이가 자꾸 한강 이남으로 후퇴하자고 우긴다" 라고 하며 화를 내면서 매번 지기만 한 장개석 군 장군이 무슨 장군이냐며 비아냥대기까지 했다. 그러나 채병덕은 일본군 병기장교 출신으로 김홍일과 달리 실전 경험이 전무했다. 같은 일본군 출신으로 포병 소좌출신인 군번1번 이형근 장군조차 채병덕을 무시했을 정도.

김석원 역시 그의 회고록에서 말하기를 그 어느때보다 김홍일 장군이 열을 올리며 한강선 결전을 주장했고 이에 대해 이범석, 지청천, 김석원이 적극 동조했으나 국방장관총참모장이 구체적인 대답을 않고 희망섞인 기대만 하고 있어 유야무야 끝났다고 표현하고 있다. 김계원 역시 회고록에서 채병덕이 김홍일을 '후퇴만 하던 중국군 경력가지고 무슨...'이라고 비하했다는 비슷한 내용의 증언을 하고 있다. 정작 자신은 패전국 일본제국군의 전투경험 없는 병기장교였을 뿐이었다.[61][62] 아이러니한 건 매번 지기만 한 중국군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지연전의 노하우가 우리나라를 살린 것이다.[63]

그 다음날 김홍일은 6월 27일 채병덕의 요청으로 1사단 작전지도를 맡게 된다. 이 요청에 따라 파주로 달려가보니 당시 백선엽이 지휘하던 1사단이 예상외로 선전하고 있었고, 1사단을 작전지도하기보다는 의정부 지역을 방어하기 위한 습격작전을 구상하게 된다. 그러나 얼마 뒤 적 전차가 창경원에 침입하였다는 전보를 듣게 된다. 이에 그는 곧바로 백선엽에게 공격작전을 취소하고 도강 후 후퇴하여 한강 동안에서 방어에 대비하되 수색과 행주에 공병대를 파견하여 선척을 집합하고 치중부대를 먼저 도하시킨 다음 부근 민가를 몇 집 헐어 그 재목으로 보병이 통과할 부교를 가설하는 것을 지도했다. 하지만 백선엽은 육본의 명령이 사수였기에 어쩔 수 없다는 답을 한다. 이에 김홍일 장군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그때 정말 답답했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64] 아무튼 백선엽이 말을 듣지 않고, 자신은 직속 상관이 아니었기에 명령이 아니라 조언이라는 한계를 느낀 김홍일은 채병덕에게 찾아가 철수를 건의했지만, 철수 그거 뭐임? 이러는 채병덕 앞에서 말이 먹히지가 않았다.[65]

전황은 심각해졌고, 채병덕은 계속해서 수도사수!! 북진통일!! 나가자!! 이러고 있었으니... 결국 6개 사단[66]이 철수하기 이전에 한강철교와 한강 인도교가 폭파당했다. 결국 북한군의 공세에 버티지 못하여 대부분의 병력이 흩어지게 되었다. 1사단마저 사단장인 백선엽이 부대원들에게 "개별적으로 후퇴해서 한강 이남에서 다시 살아 만나자"고 이야기했을 정도였다.

이 때 김홍일이 구원 투수로 등장, 시흥지구전투사령부 사령관으로 보직한다. 말이 사령부지 휘하 병력은 커녕 참모조차 없던 1인 사령부였으나 병력을 수습하여 3개 사단으로 구축해 낸다.[67] 공식전사에서는 채병덕이 김홍일 장군을 시흥사사령관으로 임명했다고 적었으나 최근 연구결과에서는 김홍일 장군이 이응준 장군과 함께 피로에 쩔어있던 채병덕에게 찾아가 설득해서 시흥사 자리를 쟁취한 것으로 보고 있다.[68]

김홍일 장군은 기적같은 능력을 보여주는데 퇴각하는 병력을 수습한 것이다. 당시 증언에 따르면 지휘관들은 자신들의 약장을 떼어내고 한강변에 달려가 병사들과 싸우면서 뗏목을 타고 한강으로 남하하려고 했다고 적혀있다. 즉 당시 남하된 국군의 모습은 제대따윈 전혀없는 패잔병의 상태였다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 병력을 수습하고 어느정도 부대의 형태를 갖추게 한 그의 업적은 대단한 것이다.[69] 그 행보를 보면 인력이 어느정도 보이면 곧바로 부대편제를 하고 소대장이나 지휘관이 없으면 선임병을 소대장으로 임명하는 등의 조치를 통해 어느정도 제대를 구축했다.[70] [71]

이후 국군의 전투력은 급격히 상승한다! 단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 블라디미르 라주바예프의 전쟁보고서의 내용이다. 초기만 해도 부실한 부대로 적혀있던 한국군에 대한 언급이 갑자기 6일만에 견실한 전투부대로 이야기가 바뀐다. 라주바예프는 보고서에는 한국군의 초기대응이 부실하고, 주로 소화기와 대인화기 중심이므로 전차대대의 공습을 받으면 급격히 무너졌다 등의 평가를 했다. 그러나 김홍일 장군이 부임한 이후 라주바예프 보고서에는 한국군 포병이 포대 단위의 경우 매우 효과적이고 견실한 사격 통제, 사격의 정확도 등이 보여졌다고 서술되어 있다.

이렇게 긁어모은 병력으로 한강지역에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또한 더글러스 맥아더와 직접 만나서 한강선 방어계획을 제대로 설명하였고 현재 부족한 탄약과 무기의 공급, 그리고 미 공군에 의한 한강철교의 파괴를 요구했다. 그러면서 약 1-2주 정도를 버틸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72] 그리고 지연전을 펼쳐 미군이 도착하기 전까지 한강 방어선 전투에서 7일이나 버티는 기적을 보여주었다. 이것이 기적인 이유는 병력 수습, 물자 보급, 부대배치를 단기간 내에 이루어냈기 때문이다. 당시 도하한 병력들은 소화기를 소지한 케이스가 적었고, 심지어 소지했다고 하더라도 도하과정에서 침수상태로 전투불능인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당시 김홍일이 맥아더에게 요청했던 것이 소화기와 중화기의 공급과 미 공군의 한강철교 폭파 및 한강 이북의 지속적인 폭격요청이다.

이후 수도사단, 1사단, 2사단을 효과적으로 지휘하여 미군과 협조하여 진천-음성-청주 축선에서 성공적인 지연전을 수행하였다. 또한 낙동강 방어작전에서 안강-기계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등 제1군단장으로서 반격작전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7.2. 김홍일의 방어 성공과 전략적 가치

6.25 초반 김홍일의 주도로 실행된 병력의 수습, 지연작전의 기획은 오늘날 국방부, 육군 등에서 그를 구국의 영웅으로 높이 평가하는 업적이다.

당시 전군이 총 8개 사단이었는데 그 중에 3개 사단 및 육본직할 1개연대 [73]가 초전에 분파되었다, 그나마 1사단이 다른 2개 사단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제대를 유지한 편이다.[74] 다행히 김종오 대령이 이끄는 중부의 6사단, 그리고 이성가 대령이 이끄는 동부의 8사단은 적을 격퇴하면서 후퇴 중이었다. 그러나 나머지 3개 사단은 전방 축차투입으로 인해 전 병력이 뿔뿔이 흩어진 상태였다. 이렇게 무너진 병력을 수습하고 다시 이를 전투능력을 갖출 수 있을 정도로 조직화했다. 만약 이렇게 조직화하지 않았더라면 이후의 지연작전이나 낙동강 전선을 유지할 병력 자체가 없어서 무너졌을 것이다.[75]

거기에 단순히 병력을 모은 것만이 아니라 병력을 적절하게 배치하였다. 대표적인 예가 1사단과 17연대로, 17연대가 시흥사에 도착하자 병력이 부족함에도 후방으로 후퇴시켜 수습할 시간을 마련하였다. 1사단의 경우도 백선엽의 군과 나에 서술되어 있듯이 백선엽은 한강 도하 이후 병력을 찾을 수 없어서 소문을 듣고 시흥사에 가보니 1사단 병력이 남아있어 재회할 수 있었다고 서술되어 있었다.

심지어 시흥사를 직접 구성했다. 당시 김홍일 장군의 시흥사는 그냥 1인 사령부였다. 기껏해야 김홍일 장군과 당번병, 그리고 부관 정도였다. 김홍일 장군의 이전 직책이 비전투부대인 학교장이었으니 휘하 병력이 있을리가 만무하다. 거기에 한국군의 철수장면은 그야말로 오합지졸이라 장교들은 약장을 떼어 누가 장교인지 병사인지를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들을 수습하여 순수 지휘부를 구성했다. 그래서 철수하던 유재흥을 붙잡아 참모장을 시키고, 퇴각 중이던 무슨 장교를 찾아 부관을 시키고, 소대장이 부족하면 하사를 소대장으로 임명하는 식으로 진행한 것이다.

그렇기에 국방부전사편찬연구소는 김홍일 장군에 대해서 "탁월한 지휘능력"을 격찬하고 있다. 한마디로 개전 당시 채병덕의 전략적 과오로 인한 군사적 위기를 대부분 수습하는 성과를 보여주었다.[76] 이후 시흥지구전투사령부1군단이 된다. 김 장군은 당연히 초대 1군단장에 임명되었고 이후 국군의 지연작전을 기획한다. 이때 임명장의 내용을 보면 국군 내에서 유일하게 사단급 제대운영 경험이 있는 김홍일 장군을 임명한다고 되어있다고 한다.

이후 오랜 경험에서 나온 지연작전으로[77] 북한군을 적절히 저지시키고, 김석원과 같은 예편된 사람을 곧바로 기용하여 수도사단으로 임명하는 등, 적절하게 인재를 배치하였다. 이 분이 있었기에 낙동강 전선이라는 것이라도 만들어질 수 있었고, 그 결과 인천 상륙 작전도 가능했다는 것이다.

6.25에서 미군, 6사단의 업적도 대단하지만 6사단이 만들어준 기회를 활용하여 미군의 지원이 가능하게 만든 것은 김홍일 장군의 능력이었다. 특히 지연작전의 개념이 없던 국군에게 지연작전의 개념을 만들고 시행했다. 만약 김홍일의 공헌이 없었다면 서울함락 이후의 방어와 백선엽의 다부동 전투를 비롯한 낙동강 일대에서의 방어전, 그리고 인천상륙작전 등의 반격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비록 이후의 반격, 북진에 가려졌지만, 그 기반을 이룩해낸 김홍일의 업적은 '구국의 영웅'이라는 찬사를 받기에 결코 지나치지 않다.

6.25 초반 김홍일의 지연 방어를 다룬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학술지의 논문


위의 영상에서는 현역 소장이던 김홍일의 모습이 3군데 등장한다:

7.3. 육군 종합학교장, 그리고 퇴역

그러나 1950년 9월 1일 부로 1군단장에서 육군종합학교장으로 전보된다. 그 이유는 미군의 한 고문관과의 갈등이다. 이에 대해서 김홍일 장군도 스스로 미군과 갈등이 심했다고 회고하고 있다. 예를 들어서 8사단장인 이성가 장군이 철수하던 중에 북한군의 공세가 심해 먼저 보급기차를 후방으로 보내고 병력을 퇴각시키자 미 고문관이 달려와 왜 보급품을 병사들에게 배급하지 않았냐, 이거 횡령 아니냐 하는 식의 발언을 해서 전황과 국군의 현황을 천천히 설명했지만 이해하지 못하고 횡령이다는 말만 반복하자 뚜드려 패주고 싶었다라고 서술되어 있다.[78][79]

이는 이승만의 부인 프란체스카의 회고록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김홍일 장군과 김석원 장군이 미군 지휘부의 명령을 곧이 곧대로 듣지 않자 미군에서 이승만에게 와서 설득해 달라는 요청을 받아 이승만이 김홍일을 찾아가 설득한 일화가 있다. 결국 인천상륙작전 직전 김홍일 장군은 1군단장에서 육군종합학교장으로 밀려난다. 한국군에서 군단급 제대를 운용해 본 유일한 경험자이며 중일전쟁에서 일본군을 격퇴한 경험이 있는 베테랑 야전 지휘관이 갑자기 한직으로 밀려난 이 사건에 대해 전쟁초기 수도사단을 지휘했던 일본군 출신 김석원 준장은 자서전 《노병의 한》에서 '아연실색했다'고 표현했다.[80]

해임의 근거로는 이른바 안동철수작전에서 입은 병력손실에 대한 책임이 지적되었다. 그러나 실상은 철수를 반대하던 1군단 지휘부와 무조건적인 철수를 강권했던 미 고문단의 견해 차이가 주라는 것이 정설이다. 결국 미 고문단의 잘못된 판단에 따른 병력손실에 대한 책임을 철수를 반대했던 김 장군이 지게 된 셈이다.

김홍일, 김석원 두 노장의 특징은 미군 고문관의 판단에 잘 따르지 않는데다 미군으로의 작전지휘권 이양을 극도로 싫어했다. 때문에 미군의 반격작전을 진행하는데 두 사람이 큰 걸림돌이 될 것이라 예상되었다. 결국 두 노장은 동시 퇴장했다. 특히 밑의 부하들에 대한 영향력은 대단했는데, 프란체스카의 회고록에 의하면 이승만도 이 두 노장의 파워를 잘 알고 있었기에 물러나게 하면 후폭풍이 크겠지만 미국에서 원하는 일이라 진행했다고 적혀있다.

이에 반해 당시 3군 총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정일권의 회고에 따르면 김홍일, 김석원 두 사람에 대한 극찬과 함께 당시 지연전으로 심신이 쇠약해진 김홍일 장군과 김석원 장군에 대한 걱정으로 본인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상신하여 각각 육군종합학교장, 육군 지휘검열단장으로 발령을 내었다고 되어 있다.

8. 제7대 외무부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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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외무장관 시절)

결국 더 이상 야전 경험을 살릴 수 없었던 김홍일은 1951년 육군 중장[81] 으로 예편하였고, 중국통 경력을 살려 전후 중화민국 대사가 되었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1961년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자 군정 기간 동안 외무부장관으로 재임했다.[82]

9. 정계 활동

1960년 5월 정계 진출을 위해 주중대사를 사직한 뒤 제5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특별시 참의원에 출마했으나 29명 중 8위로 낙선했다.

외무부장관 사직 후 1963년 3월 변영태정민회 창당을 계획했으나 발전 가능성이 없다 판단해 4월 말에 탈당했다. 정민회 창당 이전에는 김동하가 신당 창당을 제안했으나 자중하라는 조언만 남겼다. 이후 김동하는 반혁명사건으로 구속되었다.

10월에는 한국독립당을 재창당하고 대표 최고위원에 선출되었다.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 전국구 1번으로 출마했으나 128,162표만 얻고 참패했다. 1964년 한독당 탈당 후 조국수호국민협의회를 조직했고, 1965년 9월 김재춘, 박병권, 박원빈 등과 한일회담 반대 시위에 대한 군인의 진압이 부당하다는 "국군 장병에 대한 호소문"을 작성, 발표하다가 명예훼손 혐의로 구속되었다. 그해 재보궐 선거에서 김재춘, 박병권 등과 옥중 출마를 고려했으나 무산되었다.

그 재보궐 선거에서 한독당에서는 한명의 의원이 당선되었는데 바로 김두한이다. 김두한은 당선 직후 한국독립당 내란 음모 사건이니 국회 오물 투척 사건이니 하는 사건에 연루되어 결국 의원직을 사퇴해야 했고, 군소정당으로 연명하다 한독당 자체가 신민당에 흡수된다.

1965년 말 부터 야당 통합 과정에 참여해 신민당에 창당에 관여하였고 7대, 8대 대한민국 국회의원을 지냈다. 신민당의 당수를 지냈고 제7대 대통령 선거 경선 진행을 맡았으며 진산 파동을 수습하고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44%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이후 신민당 총재 유진산의 노선에 반발해 1973년 양일동 등과 신민당을 탈당하고 민주통일당(약칭 통일당)을 창당하여 활동하였다. 제9대 국회의원 선거 종로구·중구 선거구에 출마했는데 3위로 낙선하였다. 2위인 정일형과는 5,000 표, 약 3퍼센트 차이였는데 야당이 신민당과 민주통일당으로 분열된 여파였다. 1977년 박시창이 병환을 이유로 사임하자 광복회 회장으로 활동했다.

10. 사망

1980년 8월 8일 오후 5시 47분 효창동 자택에서 향년 81세로 타계했다. 장례를 정부 측에서는 사회장으로 거행하기로 결정했으나, 평소 검소했던 김홍일 장군의 생전 모습을 받든 유족들의 요청으로 인해 8월 12일 오후 1시에 가족장으로 진행됐다.

그럼에도 최규하 대통령 대리로 온 최광수 대통령비서실장, 당시 실권자였던 전두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 존 위컴 한미연합군사령관 등 1500여 명의 조문객들이 빈소를 찾았다. 이어 8월 12일 오후 2시에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엄수된 영결식에도 정일권, 태완선, 이응준, 백선엽 등의 정계와 군 원로, 현직 군 장성 및 각계 인사 3백여 명이 참석했다.

시신은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묘비명은 '광복회 회장 김홍일 장군'이다.


[1] 김수로계가 아닌 김렴계 김해 김씨로, 김알지의 후손이다. 조선 후기 김렴계는 김수로계와의 혼동을 방지하기 위해 김녕 김씨로 본관을 바꿨다. 북한의 김렴계 김해 김씨는 대부분 본관을 김녕으로 바꾸지 않고 그대로 김해를 본으로 썼는데, 김홍일의 집안이 그런 예이다.[2] 자서전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이 당시 러시아 군인들은 그릇뿐만 아니라 요강까지 징발해다 음식을 담아 먹어(...) 일부 마을 사람들이 야만인이라고 멸시했다고 한다. 음식이나 집을 징발해서 민폐를 끼친 건 기본이다. 당장 김홍일의 집부터가 러시아군 사령부로 쓰였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 이들은 어린 아이들이 곁에서 자신들을 대상으로 석전을 던지면 화를 내는 대신 곁에서 구경하거나 알사탕을 주는 등 관대한 면도 있어 아이들과 친했다. 특히 러시아 기병대는 아이들이 던진 돌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멀리 날아가는 모습이 신기했던지, 말을 타고 쫒아가서 돌을 도로 주워 이리저리 살펴보곤 했다고. 반면 일본 군인들은 러시아군보다도 온갖 것들을 철저하게 약탈하고 인부들을 무보수로 부려대어 민심이 영 안 좋았다. 거기다 석전을 하는 아이들에게 태형을 때리고 부모까지 잡아다 갈궈댔다고. 다만 의외로 러시아군과 일본군 모두 부녀자들은 건드리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일본군은 속전속결로 치고 올라가야 하는 상황이라 수습 못 할 일을 벌이면 곤란했고, 러시아는 대한제국에 민폐를 끼쳤다가 대한제국이 적극적으로 일본 편을 들어버리면 만주의 지배권을 빼앗기기 딱 좋은 상황이라 최소한의 군기는 엄정하게 지키려 했기 때문이다. 일본군이 본격적으로 민심의 눈치를 보지 않게 된 건 경쟁자 러시아가 정리되고 한반도를 독점 장악한 을사조약 이후부터다.[3] 물론 아버지의 예측대로 미래에 중국은 세계의 주요 강대국으로 부활하긴 하지만, 김홍일 장군의 활동 기간보다 좀 더 미래의 일이었다.[4] 언더우드가 세운, 현재의 경신고등학교로 이어지는 그 학교가 아니라 1907년에 선교사 김익두가 세운 학교다. 김익두는 평생을 신천 지역에서 개신교 선교와 독립운동에 노력한 인물이다. 변절하지도 않았던데다 신천 지역에서 미치는 영향이 큰 인물이었기에 일본에게 여러 번 탄압당하기도 했다. 평생 150개가 넘는 개신교회를 세웠을 정도다. 하지만 결국 6.25전쟁에서 신천·재령군 봉기가 일어나자 신천교회에 들이닥친 북한군에게 참살당하고 말았다.[5] 중화민국 초기의 지방군 사령관들을 지칭한다. 이들은 보통 현대 한국의 도지사에 해당하는 성장 또한 겸했기에, 지방 군권과 행정권을 쥐고 왕처럼 군림했다. 과거 당나라 시대의 절도사들처럼 말이다. 많은 수의 독군들이 군벌로 성장했다. 비록 독군이란 직위 자체는 1928년 북벌이 끝난 후 사라졌지만 군벌들은 국민혁명군의 부대 사령관들로 둔갑하였고, 자신들의 부대와 사병들을 중앙군 편제에 편입시키는 방법으로 그대로 보유했다.[6] 흥아사는 아시아의 여러 소수민족들이 식민제국들에 저항하기 위해 연합한 국제 비밀결사였다.[7] 당시 신규식은 1차 호법운동 시절부터 알고 지냈던 운남 군벌 탕지야오의 도움을 받아 많은 한국 독립운동가 청년들을 운남 강무당에 입학시켰다. 이때 입학한 대표적인 인물들이 바로 대한민국 국방부장관 이범석 대장, 육군사관학교장 이준식 중장. 이들은 후에 광복군과 한국군의 주축들로 성장한다. 이외에도 운남 강무당은 당대 동아시아 다양한 세력들의 기라성 같은 장성들을 길러냈는데, 중국 국민혁명군 참모총장 주페이더 일급상장, 북한 국방장관 최용건 차수, 그리고 중국 인민혁명군의 주더 원수와 국방장관 예젠잉 원수도 이곳 출신이다. 더 나아가면 베트남 전쟁 때 베트남군 국방장관 보응우옌잡 대장도 동문. 4개국의 국방장관을 배출한 셈이다.[8] 이때 이자인 참모장이 총상을 입어 광동으로 후송되었다.[9] 당시 1달치 고급 식사비가 도합 3원이었으니 꽤나 큰 돈인 셈이다.[10] 류셴스가 타인에게는 한국인이라고 하지 말고 봉천 사람이라고 말하라고 조언해 주었다고 한다.[11] 훗날 중화민국 총통 장개석(장제스)의 오른팔이자 행정원장(국무총리)이 되는 인물. 당시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돌아와 구이저우 강무당에서 교장을 맡고 있었다.[12] 귀주 강무당의 학제는 6개월의 입오생 훈련을 제외하면 1년 과정이었다.[13] 다만 중간에 3.1 운동이 벌어지자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학업을 때려치려 했었다. 이를 위해 그는 광동에 있는 신규식과 운남강무당에 있는 이범석에게 연락을 취했는데, 신규식은 독립은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니 일희일비하지 말고 학업에 정진하라고 답장했다. 거기다 운남 강무당 교장(직접적인 언급은 없으나 당계요(탕지야오)로 보인다.)이 이범석 대신 답장하여 한국인 학생들은 독립군에 참여시키기 위해 조기졸업시켰다고 알려오자, 그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남은 수업을 들었다. 이때의 소란으로 전교생이 그가 사실은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이는 그 전까지는 교장 허잉친과 담당 교육중대장, 그리고 동기이기도 했던 허잉친의 동생밖에 몰랐던 사실이라고.[14] 중국을 자치권을 가진 들의 연합체로 개편하자는 운동.[15]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은 체코와 슬로바키아인들의 독립군으로, 1차 세계대전 당시 오스트리아군 소속으로 참전했다가 러시아군에 포로로 잡힌 체코인들이 결성한 부대다. 이들은 체코를 지배 중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싸우기 위해 군단을 결성했다. 하지만 러시아 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볼셰비키가 독일과 협상해 멋대로 러시아를 1차 대전에서 탈퇴시켜 동부전선이 종전되자 위치가 붕 뜨게 된다. 이후 블라디보스토크를 통해 프랑스로 가 서부전선에 참여하려 했지만, 시베리아 횡단철도로 이동하던 도중 볼셰비키와의 상호 불신으로 인해 반란을 일으키고 백군 편으로 내전에 개입한다. 후에 귀국하여 신생 체코슬로바키아군의 모태가 되었지만,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체코슬로바키아가 공산화되자 반동이라는 이유로 40년간 매장당했다. 하지만 다시 민주화된 지금의 체코와 슬로바키아는 이들을 조국해방을 위해 노력한 영웅들로 기리고 있다.[16] 이들은 백군 계열이었지만 한국독립운동과도 어느 정도 연관이 있어, 백군 콜차크 정부의 갑질이 심해지자 한창걸 선생의 부대와 함께 백군과 일본군에 맞서 봉기를 일으키거나 귀국 도중 여운형 같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인사들과 만나기도 했고,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에게는 무기를 매각해주었다. 봉오동 전투청산리 전투에서 사용된 무기의 원래 주인이 바로 이들이다. 다만 적극적인 지지는 아니었다. 자세한 정보는 항목 참조.[17] 연해주 개척자들 중 우크라이나인들이 많았기에 발생한 일이다. 애초에 나선정벌 시절 조선군과 맞붙었던 러시아군도 우크라이나 코사크들이 주축이었을 정도였으니, 조선과 젤레나 우크라이나의 만남이 그리 뜬금없는 것은 아니었다.[18] 안중근 의사에게 무기를 구해준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도 이때 죽었다.[19] 노백린은 김홍일에게 만약 중간에 이런 부대들이나 한인 집단을 만나면 자유시로 인솔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이때는 이미 많은 수의 독립군 부대들이 일본의 토벌에 밀려 러시아로 넘어간 상태였지만 그래도 아직 남아 있는 부대들이 있었기 때문.[20] 신흥무관학교 출신.[21] 이외에도 전투 경험이 있는 독립군 출신들이 약 50명 가량 있었다.[22]연변 조선족 자치주 룽징시와 안투현에 걸쳐 있다. 청나라 말인 1880년대부터 채굴되었는데, 은과 동이 많이 나는 광산으로 유명하다. 현재도 활발히 채굴 중이다.[23] 현 러시아 달네레첸스크(Дальнере́ченск) 시[24] 백군과 일본군은 스파스크, 적군은 하바로프스크에 주둔했다. 이만은 그 중간 지역이다.[25] 헤이그 밀사로 유명한 이준 열사의 아들. 망국 이후 저장성 군관학교 포병과를 졸업하고 이동휘의 영향을 받아 만주로 향했으며, 대한국민회의 중책으로써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계된 항일무장투쟁에 나섰다. 국민회 소속 사관학교 교장으로 활동하고 봉오동 전투청산리 전투에도 참전하였으며, 이후 러시아로 가 대한의용군을 수립했다가 자유시 참변 당시 체포되어 압송되던 도중 탈출했다. 군비단 병력이 포함되어 대한의용군이 재편되자 사령관직과 사관학교 교장직을 겸하며 원동해방전쟁에서 활약했다. 그러나 후술할 이유로 러시아를 떠나 중국으로 가서 국민혁명군에 참여하고 김홍일이 국부군에 들어올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때까지는 김홍일과 같이 싸운 동지였지만, 장제스가 4.12 상하이 쿠데타로 국민당 좌파와 공산주의자를 숙청하며 국공합작이 결렬되자 국민당을 떠났다. 후에는 일본에게 잡히고 나서 한동안 연금당했다가 탈출했다. 1930년대 내내 행방이 묘연했지만 광복이 되자 38선 이남 한반도로 돌아왔고, 중도주의성향인 신진당의 부당수로써 단독정부 수립 반대 운동을 하다가 김구가 암살되는 등의 사건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끼자 월북했다. 그리고 북한 정부 초대 내각에서 도시경영성을 비롯한 각 부처의 장관을 지내며 김홍일과는 완전히 반대편에 섰다가 1954년에 사망했다. 외증손자 조근송씨가 조사한 중국측 기록에 의하면 김일성에게 숙청되어 사형되었다고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사후인 1990년에 민족통일상을 받았으며, 현재는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어 있다.[26] 당시 잔존 백군 세력의 수장. 콜차크의 임시정부 붕괴 후 그리고리 세묘노프의 지휘를 받았지만, 세묘노프도 패배하자 잔존 세력을 규합, 블라디보스토크를 최종 거점 삼아 일본의 지원을 받으며 적군과 대치했다.[27] 소총만 여덟 자루였다고 한다.[28] 후에 장제스의 국민혁명군에 고문관으로 파견되어 국민당의 북벌에 일조했으며, 소련 초대 5원수로 진급하였다. 하지만 1938년 하산 호 전투에서 사상자를 많이 냈다는 이유로 스탈린에게 숙청당한다.[29] 참고로 박일리야는 니항부대의 사령관으로써 자유시 참변니콜라예프스크 사건 모두에 연관되어 있는 인물이다. 항목 참조.[30] 그는 나중에 러시아를 떠나기 전 송별식장에서 박일리야를 만나자 이에 대해 쏘아붙혔는데, 박일리야도 자신의 잘못에 대해 할 말이 없는지라 미안하다며 사죄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래도 분이 안 풀린 김홍일은 그의 멱살을 잡았다가 상관을 공격한다고 생각한 그의 경호원에게 총을 맞을 뻔했다. 다행히도 옆에 있던 동료가 재빠르게 그 경호원의 총신을 쳐내어, 불상사가 발생하진 않았다.[31] 출처 2013.윤상원.러시아혁명기 원동해방전쟁과 한인부대의 활약, 2014.윤상원.1920년대 전반기 김홍일의 항일무장 투쟁[32] 당시 국부군 포병대를 훈련시키고 황푸군관학교의 정치부를 설립하고 있었다. 이때 이용이 김홍일과 재회하기까지의 행적에 대해서는 기록이 엇갈린다. 일단 한국어 위키백과에서는 그가 소련에서 군사학을 수학한 후 바실리 블류헤르의 군사고문단 소속으로 중국에 왔다고 서술했지만, 출처가 없다. 반면 외증손자인 조근송 씨가 일본측 기록을 조사해서 조선일보인터뷰한 내용에 따르면 내전 종식 당시 소련이 한인부대를 해산할 때 반발하며 1923년경에 만주로 내려왔다고. 그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계된 항일 사관학교를 세워 학생들을 가르치다 중국으로 갔다고 한다. 이용의 옆에서 같이 싸웠던 김홍일과 최계립 또한 각자의 자서전에서 그가 의용군에 모이세이가 들어온 이후 10명의 사람들을 이끌고 비밀리에 중국으로 향했다고 증언하고 있어, 일단 이용이 내전이 끝나고도 소련에 남지 않았던 것은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상해파로써 자유시 참변까지 겪었던 그가 소련에 남았다는 것 자체가 설득력이 부족하다.[33] 자서전 대륙의 분노 기준 - 334 페이지[34] 백범일지에 등장하는 왕웅이란 양반이 바로 김홍일이다. 왕웅(王雄)은 김홍일이 중국에서 사용한 이름 중 하나였다.[35] 윤봉길 의사가 사용한 폭탄의 수준은 당시 임시정부에서 만들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화약을 구한다고 해도 그 정도 화력을 지닌 폭탄을 그렇게 소형으로 제작하는 것은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지금도 그런 수준의 화력을 가진 사제폭탄을 만들려면 보통 실력으로 안 된다. 백범일지에서는 중국인이 도와주었다고 하는데 임정의 재정 수준으로 그런 수준의 기술자를 매수하거나 폭탄을 구매할 수 있었을 리 만무하다.[36]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김구의 임시정부에서 독자적으로 기획된 것이 아니라, 기획 단계부터 중국측과의 긴밀한 협의를 통해 진행되었다. 중국측에서는 상해경비사령부의 뤄웨이슝(나위웅, 羅為雄)이 주도적으로 기획하고, 김홍일이 폭탄을 공급하며, 김구윤봉길 등 실행책을 모집하는 등의 역할 분담이 이뤄졌다고 주장하고 있다.[37] 윤 의사의 의거로 상하이 파견군사령관 육군 대장 시라카와 요시노리가 사망한다. 참고로 백선엽이 가장 존경했다고 스스로 밝혔으며 '시라카와 요시노리'와 똑같은 이름으로 창씨개명한다. 그리고 주중 일본공사 시게미쓰 마모루는 오른쪽 다리를 잃는다. 훗날 일본의 패망 이후 USS미주리함에서 지팡이를 짚고 절뚝이며 항복 문서에 서명한 인물이다. 이외 상하이 총영사 무라이 쿠라마츠는 중상을 입었고, 제9사단장 우에다 켄키치는 왼쪽 다리를 잃고, 해군 노무라 기치사부로 제독은 오른쪽 눈을 잃었다.[38] 물론 조선의용대원들 중 북한으로 가지 않은 이들도 일부 있었다. 빨치산 토벌전에서 공을 세운 차일혁 총경이나 중국에서 작가가 된 김학철 등.[39] 후에 대장으로 진급, 북지나방면군 사령관으로 부임하여 유격대 토벌을 명목으로 대대적인 파괴와 학살 행위를 자행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신멸작전이다. 거기다 그는 일본군 위안부를 처음으로 고안한 인물 중 하나다. 핵심 전쟁범죄자이기에 원래대로라면 잡혀서 목이 달아나야 했지만, 종전 직후 국공내전이 터지면서 일본군 점령지에 대한 국민당과 공산당의 점령 레이스가 펼쳐지자, 국민당에 협력한 대가로 전범 재판을 피할 수 있었다. 이후 공산군이 국민당군을 분쇄하며 남쪽으로 쇄도하자 리쭝런이 그를 중공에 넘겨버리려 했는데, 그 직전에 타이밍 좋게 일본으로 돌아가서 살아남았다.[40] 이는 산업화와 현대화가 이루어지기 전 일본의 침략을 맞아야 했던 중국군의 고질적인 문제였다. 곡사포뿐만 아니라 102사단에는 대전차포 또한 부재했기에, 김홍일의 자서전에는 일본 전차부대와 조우하면 방어선 내로 후퇴해야 했다는 언급도 있다.[41] 국민정부의 공보에 따르면 1933년과 1937년 중교, 1940년 상교 진급명령이 되어 있다. 1944년 지식청년군 조직도에는 소장 참모처장으로 되어 있다. 회고록과 비교하면 중교 진급시기는 7~11년, 상교는 13년 차이가 나는 셈. 회고록에 워낙 정확한 일자를 기록하고 있는 까닭에 당사자의 기록을 우선 존중하면서도 국민정부의 공보와 다른 점에 대해서는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다만 당시 미군의 경우도 정식계급과 참전을 위해 징집된 AUS 의 임시계급이 상호 달랐던 점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2차대전 미군장성의 계급은 임시계급임.) 등을 고려했을 때 미군 군사고문단의 지원을 받던 2차대전 후반기의 국민혁명군의 경우도 비슷하리라 추측해볼 수 있다. 또한 전시 임시계급일 가능성과 더불어 전술급 제대 단위의 전시 진급명령 후 기록변경일 가능성 등이 있다. 당시 국민혁명군은 전구 단위로 관리가 되고 있었기 때문.[42] 나탁영 장군과는 북벌 당시 동로군에 있던 시절부터 알던 사이다. 동로군 중교인사참모 재직 시 나탁영은 동로군 포병대장이었다.[43] 19집단군은 제9전구 소속으로 휘하에 4개 군단 12개 사단을 지휘했다[44] 프랑스가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를 통합한 식민지.[45] 국민정부는 1938년 최대 항구인 광저우를 잃은 이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 광시성 사이에 '하노이 루트'를 놓고 무기를 수입했다. 하지만 1939년 나치 독일폴란드 침공으로 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무기 수입이 막히게 되었는데, 1940년에 프랑스 침공, 대서양 전투, 영국 본토 항공전이 잇달아 벌어지면서 동남아시아 지역의 패권을 잡고 있던 프랑스와 네덜란드가 몰락해버리고, 홀로 남은 영국은 아시아에 신경 쓸 수가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프랑스가 몰락하자 일본은 비시 프랑스 정부를 압박해 베트남에 군대를 진주시키며 하노이 루트를 차단했다. 독일 공군과 유보트에게 시달리던 영국도 일본에게 말레이시아 침공의 빌미를 줄까봐 윈난성영국령 버마을 연결하는 버마 루트를 끊었다. 이로써 중국은 무기 수입이 뚝 끊겨버렸다. 다만 얼마 후 영국은 버마 루트를 다시 열고 미국과 함께 차관을 제공해주었다.[46] 이 회전 도중에 일본군 제34사단은 공격 방침을 놓고 사단장 오가 시게루(大賀茂) 중장과 참모장 사쿠라이 도쿠타로(桜井徳太郎) 대좌가 설전을 벌이다 사쿠라이 대좌가 할복을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죽지는 않고 이후 소장으로 진급했다.[47] 2병단은 운남 곤명에서 미식으로 무장하여 신규로 창설된 병단이었다[48] 중화민국 35년 (1944) 5월에 발행된 청년군예비간부통번록에 따르면 당시 청년군편련총감부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 중장총감 나탁영을 필두로 중장부감 4인, 중장참모장 1인, 고참실 중장주임 1인, 기요실 중장주임1인, 그리고 참모처 소장처장 왕일서(김홍일), 참모처 소장부처장3인, 군무처 소장처장 1인 로 구성되어 있었다.[49] 최용덕 장군과 김홍일 장군은 중국군 장군 신분으로 광복군에 참여하였다.[50] 바렛 대령은 미국 당국이 조지프 스틸웰의 제안에 따라 중국 공산당에 파견했던 '딕시 사절단'의 대표였다.[51] 국민당군의 졸장으로 알려져 있으나, 국공내전에서 린뱌오를 상대로 승리를 거둘 정도로 능력이 있던 사람이다. 이 사람이 2차 국공내전 막판에 제대로 못 싸운건 장제스가 지나치게 간섭했기 때문이다. 결국 국공내전 막판에 공산군의 포로가 되었고, 1950년대 말에 석방되어 마오쩌둥의 공산정권 하에서 정치협상회의 위원 등을 역임하면서 무난하게 여생을 보내다가 1981년 타계했다.[52] 관내의 조선인들과 달리 만주의 조선인들은 위와 같은 이유로 자신들을 송환하려는 국민당 정권을 좋아하지 않았고, 대신 차별을 내세우지 않는 중국공산당에 대거 지지를 보냈다. 반면 만주의 중국인들은 공산당에 그다지 호의를 보이지 않았는데, 중일전쟁 내내 공산당은 옌안에 웅거하며 항일 활동을 거의 하지도 않았고, 중화민국 정부의 공식적인 정당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공산당은 차별 철폐를 내세운 것은 좋았지만, 친일 부역자들까지 가볍게 죄를 사해주고 포용해버리는 정책으로 불만을 사기도 했다. 하지만 내전을 앞두고 전체적인 세력이 국민당에 비해 열세했던 공산당은 차별을 없앤다는 공산주의적 명분을 내세워 국민당 정권에서 소외된 이런 친일파, 소수민족, 부랑자 등의 지지까지 가리지 않고 받아들여 세력을 불렸다. 이들이 소외된 이유가 정당하든 정당하지 않던 상관 않고 말이다. 이로써 지지기반도 없고 통치 명분도 없던 중공은 만주 조선인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기회로 이용해 만주로 쳐들어온 국민당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잠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리고 몇 년 뒤에는 세계대전 종전 후 혼란상을 잠재우지 못한 중국 국민당에 대한 민심이 악화된 것을 틈타 세력을 급격히 불리고, 공세종말점에 달한 국민당군의 핵심 전력을 섬멸했다. 이로 인해 국민당은 대륙에서 축출되었다.[53] 강재 신숙 선생의 자서전 나의 일생의 166-170 페이지에 해당 내용 등이 기술되어 있다 한다 - 대륙의 분노 436페이지[54] 박경석의 소설 "오성장군 김홍일"에서는 준장 임관과 동시에 국군조직법이 통과되면 육군총참모장으로 부임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으나 정치적인 이유로 좌절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만약 김홍일 장군이 초대 총참모장이 되었다면 해군 손원일 제독, 공군 최용덕 장군과 함께 육군의 정통성 확립에 보다 좋았을 것이다. 공군의 경우 김정렬 초대총참모장은 일본군 출신이나 공군 창설 7인의 좌장으로 초대 국방차관을 역임하며 공군을 육군에서 독립시키고 2대 총참모장으로 부임한 최용덕 장군의 후광이 쎈 까닭에 일본군 관련 비판에서 자유로운 편이다.[55] 해당 저서는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디지털 도서 형태로 열람할 수 있다. 총 98쪽 분량이며, 4개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56] 일반적으로 상비군의 규모는 해당 국가의 인구 대비 0.5~1% 이하 수준으로 책정된다. 다시 말해 인구 대비 1%가 넘는 규모의 상비군 건설은 현재 전쟁을 치르고 있거나, 그에 준하는 수준의 안보 위협이 존재하는 등의 특수한 경우에 해당한다.[57] 당장 그가 몸 담았던 중화민국 역시 나름대로 독자적인 구축함을 건조하는 등 해군력 증강을 꾀하려 했으나 막대한 비용과 시간을 문제로 군함 수입 계획을 보면 어뢰정이나 2호 유보트 같이 연안 방어에 사용될 정도였다. 6.25를 앞두고 도입한 주력 전투함 백두산함이 미 해군의 퇴역함을 개조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58] 국민혁명군의 주요 교수내용은 독일의 총력전과 전격전이었다.[59] 과거 모 블로그에서 김 장군의 국방개론을 망상으로 치부한 글이 있었는데 단편적인 내용에 의한 판단으로 그가 판단한 배경은 위에 상술한 바와 같다.[60] 1949년 당시만 해도 제3세계의 독립 열풍이 일어나기 전이다.[61] 군번 1번인 이형근이 선배인 채병덕을 무시한 이유중의 하나라고 알려져 있다.[62] 여담으로 채병덕은 식사후에는 늘 낮잠을 잤다고 한다. 그래서 낮잠 타임에 결재서류를 가져가면 읽어보지도 않고 결재를 해줬다고 한다. 이 덕분에 해병대 창설이 결정됐다는 야사도 있다. 읽어보지도 않고 해병대 창설을 결재한 덕분에 채병덕은 해병대가 생긴 이후에야 해병대 창설을 알고 화를 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고.[63] 중국 국부군은 일본군에 화력에 열세였던 관계(당장 중일전쟁 당시 국부군 개편사 중 손에 꼽히는 독일식 8개 사단조차도 사단 직할 화력이라고 해 봤자 75mm급 산포나 야포 1개 대대(12~16문)과 독일제 37mm 대전차포 4문 정도 보유했는데, 당시 일본군 1개 사단도 아닌 1개 연대에 배속되는 기본 중장비가 37mm 속사포 4문과 75mm 산포 4문이었던 것을 감안해보면 심하게 비교된다)로 수세적인 전략을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 김홍일 장군은 2병단 참모, 19사단장 대리, 집단군 참모처장 등을 역임하면서 우세한 적과 교전하는 경험을 쌓았고 특히 동부해안에서 서부 내륙으로 후퇴하는 과정에 있어서 지연전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았을 것이다.[64] 김홍일 장군의 회고록에 의하면 "사단장 이상의 대부대 지휘관은 독단적인 진행이 필요하거늘 이를 이해치 못하니 가탄할 일이다"라고 명시하였다. 또한 백선엽의 자서전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27일에 민기식 대령과 함께 김홍일 준장이 방문해 철수의견에 동의했지만 육본의 명령이 사수라 이를 지킬 수 밖에 없었다고 적혀있다. 즉 이것은 백선엽 장군의 지휘경험이 소부대에 한정되어 있어서 대부대급의 지휘개념이 부족했기에 발생한 것이라 보인다.[65] 이때 전화기까지 직접 손에 들려주며 간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백선엽 장군의 자서전 《군과 나》).[66] 수도사단, 2사단, 3사단, 5사단, 7사단, 1사단.[67] 당장 1사단만 하더라도 개별적으로 후퇴한 병력을 시흥지구전투사령부에서 재수습을 하여 부대 편제를 유지한 채 이천-용인지구에서 전투를 벌이고 이후 지연작전을 벌이며 낙동강까지 철수해 대구 다부동 전투에서 승리하여 낙동강 전선을 지켰다.[68] 6.25 전쟁 초기 김홍일의 활동과 예편, 이동원, 군사(99)[69] 이때 인근 마을의 인력을 동원해 밥을 지어 먹이고 미군 참전이라는 플래카드를 만들어 군을 수습했다고 한다.[70] 이에 대해 좀 더 늦더라도 병력을 기존제대별로 수습하는 것이 좋았을 것이라는 의견이 있으나, 이는 비판점을 강박적으로 써야하는 행태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당시 상황에서 한강변에 병력투입이 조금이라도 지연되었다면 북한군의 도강을 7일간 저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병력이 투입되고 하루 뒤 곧바로 북한군이 도하하려고 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제대유지를 위해 투입이 조금이라도 늦어졌을 경우 국군의 지연작전은 현실화되기 어려웠을 것이다.[71] 김홍일 장군은 부관에거 보라복(당시 모직재질의 근무복)을 말끔하게 다림질해 오라 지시를 했다고 한다. 최고 지휘관이 정돈된 복장으로 지휘를 하는 모습을 보여야 우왕좌왕하는 병사들에게 믿음을 줄 수 있기 때문이라 했다고 한다.[72] 당시 채병덕이 맥아더를 만난 자리에서 조선남한장정 200만명을 동원하여 반격하겠다고 이야기한 것과 비교되는 대목이다. 이를 들은 맥아더는 곧바로 채병덕의 경질을 요구했으나 이승만의 채병덕 사랑은 정말 끔찍했다.[73] 수도사단, 2사단, 5사단, 7사단, 3사단22연대[74] 물론 이것도 사령부 따로, 중대 따로의 도하였기에 사실상 와해상태였다. 연대와 통신이 유지되는 중대가 절반도 안됐다. 그러나 당시 다른 사단들은 최소 소대단위도 제대가 유지되지 않아 완전와해 상태였으나, 1사단은 그나마 중대단위로 제대가 유지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제대가 유지되었기에 김홍일 장군이 따로 1사단 병력을 수습할 수 있었다. 그래서 혼성명칭이 안 붙은 사단이었다.[75] 백선엽도 이 부분에서 김홍일 장군의 업적을 칭송했다.[76] 채병덕이 저지른 실책은 너무나 심각한 타격을 주었고, 이후 미군이 개입하고서야 확실하게 해결될 수 있었다.[77] 채병덕이 말한 그 도망다닌 장개석 군 경험이다. 이 경험이 컸다고 볼 수 있는데 당시 국군과 북한군의 전력차와 중국군과 일본군의 전력차는 유사했다. 일본군과 북한군은 전차와 공군을 소유했으나 중국군과 국군은 그러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열세인 상황에서 북한군을 어떻게 저지하는지를 알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78] 저건 대담회에서 김홍일 장군의 발언이다.[79] 아마 이는 영어를 못해 미 고문관을 설득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어는 모국어 수준이었고, 러시아어는 간단한 소통이 가능했다고 한다. 청년기에 러시아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을, 이후에는 중국에서 국민혁명군에 소속되어 소장을 달았으니 그럴 만도 하다.[80] 김석원 역시 미군과의 마찰 때문에 지휘권을 내려놓게 된다. 미군이 자신들의 말을 잘 따르는 젊은 지휘관(특히 고문관 두고 일하는데 익숙한 만주군 출신)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백선엽 1사단장이 이 당시 30대였다.[81] 당시 육군에서 최고 계급이었다. 육군참모총장 겸 3군총사령관 정일권 중장과 육군종합학교장 김홍일 중장.[82] 김홍일은 군사정변의 주역인 8기생들의 육사 재학 시절 육군사관학교장이었으며, 후보생들의 엄청난 존경을 받았다. 이 점은 역시 8기생 출신이었던 이재전 장군 회고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러한 인연으로 8기생들이 김 장군을 외무 장관으로 위촉했다는 것이 정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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