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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30 04:37:40

거함거포주의

대함거포주의에서 넘어옴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Naval-race-1909.jpg
미독영불일의 건함 경쟁을 포커에 비유한 Puck지의 풍자화. 잡지 'puck'에서는 이 밖에도 풍자화, 만평을 많이 그렸고, 이외에도 과열된 해군 건함 경쟁을 포커 등에 비유한 만평들을 종종 볼 수 있었다. 전함뿐 아니라 잠수함이나 비행선, 비행기도 보인다.
오른쪽에서 시가를 피우고 있는 엉클 샘(미국)을 기준으로 시계방향부터 철모를 쓴 쪽이 카이저 빌헬름 2세(독일 제국), 총리 헨리 캠벨배너먼(영국)과 대통령 아르망 팔리에르(프랑스 제3공화국), 전함을 들어올리며 베팅을 하는 쪽이 메이지 덴노(일본 제국)다. 링크를 보면 알겠지만 미국만 당시 지도자 대신 의인화 캐릭터로 등장했다. 당시 미 대통령은 시어도어 루즈벨트.

1. 개요2. 배경3. 문제점
3.1. 비용의 급증과 함대결전의 축소3.2. 항공모함의 부각3.3. 핵무기의 등장
4. 일본의 거함거포주의
4.1. 건조계획
4.1.1. 전함4.1.2. 항공모함4.1.3. 일본과 연합군 전함들의 처우4.1.4. 다른 배를 항모로 개장한다면?4.1.5. 호위항공모함
4.2. 운용
4.2.1. 전함 놀아요4.2.2. 굴러라 항공모함4.2.3. 혹사당한 공고급과 중순양함들4.2.4. 점감요격작전의 폐해4.2.5. 비겁한 변명들
5. 전함들의 운명6. 거함거포주의에 관련된 몇가지 에피소드

1. 개요

거함거포주의()는 거포와 중장갑을 갖춘 거대한 전함을 해군력의 중심으로 여기는 사상을 말한다. 일본에서는 후술하는 이유로 시대에 뒤떨어진 사고방식을 가리키는 관용구로도 쓰인다.

원래 일본에 의해 만들어진 대함거포주의(大艦巨砲主義)라는 동일한 뜻을 가진 단어가 먼저 존재하여 일제강점기 시기부터 쓰이고 있었으나 1973년에 나온 신문기사에서 처음 거함거포주의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이후 국립국어원에서 거함거포주의로 표현을 고정[1]하였으므로 한국에서는 거함거포주의로 명칭이 확립되었다.

참고로 중국어로는 일본식 명칭을 그대로 가져와서 대함거포주의라고 부른다. 다만 일본에도 '거함거포주의'라는 말이 쓰이지 않는 것은 아니며, '대함거포주의'와 동일한 말로 쓰이고 있다.

반대되는 개념으로 소형 어뢰정을 다수 만들어서 수로 질을 때워보자는 청년학파의 이론이 있다. 실제로 해보니 거함거포주의보다도 비효율적이었기 때문에 금방 밀려서 사라진다.

2. 배경

거함거포주의란 1906년 영국에서 드레드노트급 전함을 취역시키면서 시작되었다. 그 발단은 러일전쟁 당시 쓰시마 해전을 포함한 여러 해전에서 포격전의 교전 거리가 그전까지 상정되던 것에 비해 크게 멀어진 것에서 기인한다. 쓰시마 해전은 사거리의 중요성을 처음으로 만인에게 각인시켜준 해전이라 세계 해전사에서 꽤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결국 군함의 배수량이 허용하는 한도 안에서 최대화력을 싣는다는 점에서는 범선시대나 드레드노트급 이전이나 이후나 같다. 달라진 점은 범선에서 증기선, 다시 왕복식에서 터빈으로 동력기관이 바뀌면서 함선의 형상과 운용방식이 바뀌었고 철장갑이 일반화된 것, 그리고 함포제작기술과 사격통제방식이 발전함에 따라 교전거리가 증가한 것이고, 그 결과, 사격통제하기 쉽도록 최대한 동일 사양으로 표준화한 가장 강력한 함포를 회전포탑에 넣어 갑판 위에 최대한 많이 올리고, 여유공간과 배수량을 부포에 할당하는 방식이 가능해졌다. 드레드노트는 이런 시대적 요구에 맞추어 출현한 것이다. 마치 항공모함함재기를 운용하기 위해 배가 존재하듯이, 드레드노트급부터는 전함의 주포탑을 효과적으로 운용하기 위해 배가 존재하게 된 셈이다.

본래 전드레드노트급 전함(또는 전노급, 프리(Pre)-드레드노트급 전함)은 실제 화력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강력하지만 연사속도가 느리고 원거리 사격이 잘 안맞는 12인치 이상급의 대형 주포는 2연장 주포탑에 설치해서 함수와 함미 방향에 주포탑 1기씩 장착하는 방법으로 4문가량, 장거리 타격 능력과 속사능력과 적당한 화력을 겸비한 8 ~ 10인치 안팎의 중(中)구경 중간포를 그 두배 가량 탑재하고, 다시 속사가 가능한 6인치 이하의 소구경 부포를 다량 탑재하며 3인치나 그 이하급의 속사포도 추가해서 주포 - 중간포 - 부포 - 속사포의 4종 화포 체계를 이용해 주포 사격 후 재장전까지의 시간차이를 메꾸고, 덤으로 적함에 피해를 입혀서 느려지게 만들어서 다음 주포 사격이 적중하도록 하는 설계이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러일전쟁을 통해 전열 포격전의 교전거리가 증가하고 일제사격이 대두되자 사거리가 뒤떨어지는 중소구경포의 전열에서의 가치가 의문시되었다. 이러한 결과로 각국 해군은 자연스럽게 전함이 보유가능한 화력을 대구경 주포에 집중시키는 "All Big Gun" 개념을 발전시키기 시작했고, 이 가운데 영국해군이 최초로 드레드노트를 건조하자 각국은 경쟁적으로 대구경 포를 대량 장비한 거대 전함 건조에 열을 올리게 된다.

물론 "All Big Gun" 개념 자체는 빠른 속도로 수정되었다. "All Big Gun"을 추구한 드레드노트는 12인치 주포 외의 화력으로는 어뢰정을 저지하기 위한 3인치 함포만을 탑재하였지만 실제로 이 정도의 화력으로는 전함을 잡기 위해 갈수록 대형화되는 어뢰정과 구축함들을 저지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이들을 공격할 수 있는 4~6인치 급의 부포를 다수 탑재하는 2종 화포 체계가 중심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드레드노트 이후의 전함들의 부포는 말 그대로 보조함들을 잡기 위한 물건으로 이전의 구형 전함들처럼 동등한 수준의 주력함을 잡기 위한 용도로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으므로 적 주력함을 잡기 위해 거포를 중시하는 구조 자체는 변화하지 않았다.

실제로 대구경 함포는 파괴력과 사거리가 이전까지의 군함에 비교해 절대적이었기 때문에 당시의 시각에서는 결코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전함은 크기가 커지면 방어능력도 상승하게 되며 더 큰 대포를 장착할 수 있게 된다. 더 거대한 대포는 자연히 더 강력한 공격력과 더 긴 공격거리로 이어진다. 다시 말해 적보다 더 큰 전함을 보유할 경우 아군은 적보다 더 먼 거리에서 더 강력한 위력으로 공격할 수 있게 된다는 말과 같으며, 반대로 적은 아군의 사거리 내에 근접해서 더 강력한 방어력을 가진 상대와 대결하는 위험을 감수하게 된다.

게임 풍으로 말하자면 적보다 거대한 전함은 아래와 같은 특징을 가진다.

요약하자면 적보다 거대한 전함은 함대의 딜러 겸 탱커로서 더 먼 거리에서 더 강한 위력으로 적함을 손쉽게 공략할 수 있는 강력한 거포로 무장(=딜러)하고 어느정도 공격받아도 버티는 중장갑과 맷집(=탱커)을 가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전함은 어떠한 외부적 조건 없이 전함 그 자체로만 비교할 경우 일단 적의 전함보다 크면 거의 필승이나 다를 바 없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물론 어디까지나 당대의 시각으로, 21세기 현재의 기술을 사용한다면 다른 결론이 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기술력 수준이 같다면 최대한 거대한 배가 이상과 같은 이점을 누릴 수 있으므로 여전히 유리하다. 이러한 경향은 현대 무기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30~40톤대였던 주력 전차도 점차 중량이 늘어서 60톤에 육박하고 6천톤 내외였던 주력 구축함들의 경우에는 여러가지 장비가 추가되다보니 1만톤을 넘는다. 항공기도 무인기나 드론을 제외하면 주력기들은 하나같이 이전보다 더 커지고 더 무거워지고 있다.

거대한 군함은 비용이 많이 들어가므로 나름대로 기술적 한계를 넘기 위해 덩치에 비해 장갑을 줄이고 화력과 속력을 강화한 순양전함이라거나 한정된 배수량 안에서 화력과 방어력을 유지하고 속력을 크게 약화시킨 해방함 등의 아이디어도 실험되었지만 동급 미만의 군함들에게만 우세할 뿐 적의 전함과 정면충돌하거나 심지어 동급 군함과 정면대결하더라도 약점을 찔려서 덩치에 비해 큰 힘을 못쓰는 군함이 되기 십상이었다.

결국 전함은 최대한의 배수량에서 최대한의 함포 크기와 그것에 동등한 방어력과 필요충분한 속력과 항속거리를 갖추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라는 결론이 내려진다. 결국 전함의 클래스를 비교할 때는 무엇보다 먼저 함포 구경을 따지는 것으로 시작한다. 전함과 비전함은 비교할 것도 없고, 전함끼리 싸울 때 18인치는 16인치보다 아무튼 강한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 해군 열강들은 함포의 개발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 함포의 구경으로 보면 당시의 3대 해군 강국인 미국, 영국, 일본 모두 다 18인치급 함포까지 개발한 적은 있다. 이들 중 영국과 일본만 실제 장착까지 갔고, 전함에 장착한 것은 일본 뿐이다. 영국은 모니터함퓨리어스에만 달았다. 일본의 야마토급 전함에 장착된 94식 40cm 45구경장 함포는 실제 구경이 18.1인치인 460mm 였고 포탄중량이 1,460kg에 도달했으며 영국의 퓨리어스에 장착된 18인치는 457mm 구경에 포탄중량이 1,506kg에 도달하였다. 미국도 18인치 47구경장 Mark A를 개발했고 초중량탄까지 개발하여 포탄중량이 1,746.3kg에 도달하였다. 여기까지가 개발완료된 함포들이다.

실용화 외에도 실험만 한 함포로는 일본의 48cm 함포가 있다. 그리고 독일에서는 H-44에선 50.8cm(20인치) 함포를 장착하려 했고, 53 cm/52 (21") Gerät 36이라는 함포를 만들었다. 위력은 말할 것도 없고 사거리는 47.5km급. 그러나 포탑도 제조하다가 말았고 위에서 말한 독일의 최종병기급이지만 실제 실현 가능성은 0%인 H-44에서도 고작 50.8cm 포를 달았는데, 53cm 포를 실제 함포로 사용하려했을 가능성은 적다고 알려져있다. 포탄의 길이만 해도 260cm가 넘으며 2톤을 넘기는 포탄을 발사하는 전함이 가져야 할 규모를 생각하면 독일이 장착 자체를 포기한 것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결론적으로 거대전함은 전대의 전열함과 후대의 핵무기와 마찬가지로 전술적인 용도가 크게 제한됨에도 불구하고 강대국이라면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만 했다. 적의 전함을 상대할 방법은 비슷한 크기의 전함을 동원하는 것밖에 없었고 2차대전기 함재기의 발달과 핵무기의 등장 전까지 큰 전략적 가치를 갖는 전력으로 지위를 유지했다.

거대 전함을 연구하기 위한 각종 페이퍼 플랜들도 많이 나온 편인데 실현가능성이 높은 것도 많았지만 말 그대로의 연구목적에 의한 것들도 많았다. 대표적인 것이 독일의 페이퍼 플랜H급 전함 중에서 후기 계획형들이다. 이들의 경우 야마토급 전함을 아득히 뛰어넘으며 H-44의 경우 야마토급의 2배에 육박한다. 다소 공상적인 계획이지만 일본의 경우 페이퍼 플랜으로 100만톤급 전함이 계획되었다. 현대 기술로 만들어진 니미츠급 항공모함이나 제럴드 R. 포드급 항공모함의 배수량이 약 11만톤이고, 2015년 기준 세계에서 가장 큰 선박이 삼성중공업에서 건조 중인 약 60만톤의 LNG 저장 선박이니 여기쯤 가면 말 그대로 페이퍼 플랜이었을 뿐이다.

3. 문제점

위의 장점 단락과 마찬가지로 RTS 게임 풍으로 설명하자면 크게 '생산 시 자원을 많이 잡아먹고 인구수도 많이 차지함', '카운터 유닛의 존재와 메타의 변화', '방어력과 HP따위는 의미없게 만드는 지휘관 스킬의 존재' 정도로 요약 가능하다.

3.1. 비용의 급증과 함대결전의 축소

우선 큰 배를 만드는 것 자체부터 상당한 비용이 들며, 이 외에도 큰 배를 만들려면 도크도 충분히 커야 하고 배에 들어가는 철강생산량도 늘어나야 하는 등 배를 건조하기 위한 부수설비에 들어가는 비용도 같이 증가한다.

게다가 배를 만들어 놓기만 하면 끝이 아닌 게 당연히 배가 크니 승무원도 많이 탑승해야 하고 큰 배를 정박시킬 항구도 크게 만들고 정박지와 수로의 수심도 깊게 파는 준설작업을 해야 배가 입항할 수 있고, 당연히 큰 배를 수리할 도크와 기타 수리시설도 엄청난 규모로 만들어야 한다. 게다가 큰 배면 아무리 애를 써도 연료를 더 많이 잡아먹게 되므로 연료비도 증가하는 등등 그냥 운용만 하는데도 엄청난 비용이 추가로 더 늘어난다.

하지만 항상 예산은 제한되어 있고, 잘 늘어나지도 않는다. 독일과 일본 등 일부 국가는 예산을 아무 생각없이 폭증시켜봤지만 돈을 조달할 수 없으므로 위의 규칙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미국조차도 모든 군함을 필요수량만큼 건조할 수가 없어서 필요한 함종의 군함을 양산하기 위해 기존 계획을 뒤엎는다던지 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결국 더 큰 전함을 건조할수록 건조되는 수량은 줄어들게 된다.

마지막으로 제1차 세계 대전이 종료된 후 과도한 군비경쟁 부담을 경감하기 위해 각국이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1921년)에 조인하면서 수많은 전함들이 퇴역, 처분됨과 동시에 약 15년간 신조 전함 건조에 공백이 생겼다. 게다가 런던 해군 군축조약으로 규제가 더 강화되면서 결국 전함의 존재 목적인 전함 전열에서의 함대함 포격전이라는 상황 자체가 훨씬 드물게 되었다.

게다가 전함이 줄어들면서 전함이 지나치게 귀중한 존재가 되어 전함을 아끼기 위해서 사소한 임무라고 판단되면 전함을 잘 내보내지도 않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특성이 극적으로 표출된 곳은 함대결전사상에 집착한 일본 뿐이며, 다른 나라의 경우에는 일본처럼 극단으로 치닫지 않았다. 영국도 워스파이트 등의 전함을 수많은 전장에 굴렸으며, 미국도 전함 사우스다코타워싱턴 등을 야간에 전투를 벌이는 위험한 임무에 적극적으로 내보냈다.

즉 다른 나라에서는 해안 포격 등의 임무를 위해서 구식 전함을 주로 활용하는 수준에서 신형 전함을 아꼈는데, 일본은 해전에서까지 전함을 숨겨놓을 정도로 극단적으로 전함을 아꼈던 것이다. 비록 1차 대전 당시 독일 등은 현존함대전략으로 전함들이 항구에서 놀게 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전투 자체를 회피해서 함대 자체를 안 내보냈기 때문이지 일본처럼 쉴새없이 해전을 벌이면서도 전함이라는 함종을 아껴서 한 쪽에 꿍쳐놓은 것과는 비교하기 어렵다. 그 결과 과달카날 해전 등에서 일본군은 전체 전력에서는 우위를 점하고도 미군의 사우스다코타(1941년 진수), 워싱턴(1940년 진수) 등의 전함을 상대하지 못하게 되었다.

게다가 이렇게 큰 거함은 오히려 작은 배와 싸울때 불리할 수 밖에 없었다. 레이테 만 해전에서 거대한 주포의 화력은 작은 배들과 싸우는데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포탄이 크니 움직임과 반동에 문제가 생기고, 적이 작으니까 맞추기도 힘든데 닭 잡는데 소잡는 칼을 쓰는 꼴이라 효율도 나쁘다. 그리고 철갑탄이 너무 관통력이 강해서 작은 배를 맞추니까 터지기는 커녕 구멍만 뚫고 날아가는 황당한 상황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현대에는 미사일 등의 현대, 미래 무기의 등장으로 거함거포의 방어력이 상당히 상실된 부분이 있다. 현재야 구축함이 주력이고 장갑도 강력한 편이 아닌지라 미사일이 수평으로 날아들어 공격해도 유효타를 먹일 수 있지만, 전함이라면 이런 공격은 안먹힐 터이다. 그러나 미사일은 매우 높은 명중률로 약점에 핀포인트 공격을 하거나 탑어택 공격도 가능하다. 설령 전함이 약점 부위에도 장갑을 부착하더라도 레이더 같이 외부로 노출될 수밖에 없는 중요부위가 많으며 아예 전함의 함체 자체를 통째로 관통해서 개박살내기 위한 무기체계도 이미 소련에서 미국의 거대 항공모함을 날려버리기 위해 P-700 그라니트같은 거대 대함미사일을 만들어놓은지 오래다. 게다가 앞으로 개발될 가능성이 높은 마하 7의 속도로 관통자를 날리는 레일건 같은 무기까지 등장한다면 물리적인 장갑만을 높이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 아무리 방어력이 높아봐야 미사일이나 어뢰가 안 아프게 들어오는것도 아니고, 덩치가 크니 맞추기도 쉽다.

현대에는 장갑을 개량하는 것 외에도 낮은 탐지성 + 미사일 방호 체계 + 스텔스 + 긴 사정거리 확보 + 고성능 레이더를 도입하여 처음부터 맞을 가능성을 대폭 줄이거나 장갑의 방어력을 무게대비 가능한 한 높이거나 상황에 맞는 적절한 장갑을 부착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이유 중 하나가 언제 맞을 지도 모르는데 무거운 장갑을 상시 부착하고 있으면 연비가 나쁘다. 이런 문제를 겪던 전차, 장갑차도 1980년대 초반부터 블록1, 2, 3, 식으로 탈부착식으로 개발되고 개량되고 있다. 이런 추세는 계속 진행중이라 대부분의 장갑체계가 이렇게 변하고 있다. 성형작약의 위력을 감소시키는 전기장갑이나 슬랫아머, 적외선 스텔스 등이 있다. 개발 중이기는 하지만 메타물질을 이용한 플라즈마 방호벽도 있다

참고로 함대에 사용되는 미사일은 캐니스터에 보관되어 발사되는데, 이 캐니스터는 밀폐보관이라 개봉이 금지이므로 정비도 사실상 필요없는 대신 일회용이다. '(1회용 캐니스터+미사일) X 최소 8개~최대 48개를 구비해서 한 번 사용하고 버리는 것'과 '값비싼 대형 포탄 + 주기적인 정비비용 + 대구경 포신(수명 짧긴 하지만 몇 번이고 쓸 수 있다.)을 사용하는 것' 중 어느 쪽의 가격이 더 나가는가에 대해서는 현대에는 현대기술을 이용한 거포를 개발, 생산, 사용하고 있지는 않으니 논쟁의 의미가 있지는 않으므로 생략한다. 게다가 저렴해도 효과적이지 못해 도태된 무기도 있고, 비싸지만 효과적이라 현재까지도 잘 개량해서 쓰이고 있는 무기도 있으며, 설령 거포가 아직도 쓰이고 있다 하더라도, 과거 기술을 사용한 것과 현대 기술을 사용한 것은 성능뿐만 아니라 축적된 기술로 인해 가격도 상당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현대에 큰 배가 더 불리한 것은 아니다. 배가 클수록 많은 장비를 사용할 수 있어서, 적을 먼저 탐지하거나 미사일을 요격하는데 있어서 작은 배에 비해 유리한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전함이나 순양함이라는 이름은 사라졌지만 구축함들이 덩치를 늘려가면서 과거의 경순양함급은 충분히 넘어갔으며 이제는 중순양함을 넘어 순양전함급 덩치로까지 발전하고 있다.

3.2. 항공모함의 부각

전함의 주포의 사정거리가 수십 km에 달하다 보니, 상대방의 정확한 위치 좌표 없이는 명중시키기 어려운 문제가 발생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정찰용 함재기를 운용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수십 km 떨어져 움직이는 목표를 명중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냥 차라리 함재기에 폭탄을 싣고, 이걸로 공격하는게 더 낫지 않겠냐는 의견이 나왔고,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이 바로 항공모함이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과 함께 항공모함이 전함을 대신하게 된다. 항공모함의 위력을 알린 건 영국 해군의 타란토 공습이 최초이며, 이를 집중적으로 연구한 일본 해군은 진주만 공습으로 항공모함 함재기 세력의 위력을 확실하게 증명했다. 이후 태평양 전쟁에서 항공모함이 전장의 주역으로 발돋움하게 되면서 전함의 효용성은 상당히 떨어졌다. 항공모함은 함재기를 발진시켜 전함의 주포보다도 먼 거리에서 공격이 가능하고, 함재기의 능력도 초기에는 전함을 단독으로 상대하기에 곤란한 점이 있었으나, 속도가 빨라지고 장갑이 두꺼워지는것과 동시에 무장 탑재량도 늘어나서 단체로 공격하면 거대전함도 파괴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 거대 전함의 가성비가 크게 감소했다는 점이다. 각국 전함 함대의 숫자가 감소하고 주력이 순양함 이하 중소형함으로 옮겨감에 따라 전함 전열에 의한 함대결전 자체가 줄어들어 전함을 활용할 기회가 줄어든 동시에 전함의 숫자도 덩달아 감소하면서 전함 단함이 가지는 상징성도 증가하여 위험한 임무에 쉽게 투입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어드미럴급 순양전함후드가 비스마르크에게 격침당했을 때 고작 낡은 순양전함 1척 상실한 것에 비해 영국이 엄청나게 열받아서 단지 복수전을 위해 동원가능한 함대 전체를 총동원하는 등 엄청난 과잉반응을 보인 것을 생각해 본다면 충분히 이해 가능한 대목이다. 그리고 항공모함은 함재기를 이용한 정찰 등의 다양한 임무에 투입될 수 있는데 비해 거대전함은 그 용도가 오직 "함대함 전투"에만 특화되어 있다는 문제점이 있다.

물론 태평양 전쟁중 새로운 용도가 발견되기도 했다. 바로 지상포격으로 가장 싸고 많이 퍼부을 수 있는 함대지 공격수단이었다. 위력 또한 철근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제대로 된 벙커도 주포의 직격탄을 맞으면 안전을 보장하지 못할 수준이라 미 해병대들은 만약 '잽스 전함이 이쪽으로 접근중' 이라는 무선을 받으면 짬밥을 무한대로 먹은 병사도 닥치고 참호로 들어가 문을 닫고 철모를 쓴채 머리를 감싸면서 공포에 떨어야 했다. 물론 미군도 상륙전 당시 전함의 거포로 화력 지원을 가해서 상당한 효과를 보았다. 일례로 펠렐리우 전투 당시 미 전함 14인치 철갑탄이 직경 2m에 달하는 일본군 벙커 철문 입구를 '버터 녹이듯이 자르고 들어갔다'라고 표현할 정도다. 이래서 미국 해군이 아이오와급 전함을 1980년대까지 유지한 이유도 상륙작전 때 화끈한 화력지원을 맛을 본 해병대의 요구 때문이었다. 당시 태평양 섬에 상륙할 때 전쟁 초반에는 14인치까지의 전함 포격이 먹혔지만 전쟁 후반에 일본군이 작정하고 지형지물까지 이용해서 건설한 강화구조물에게는 16인치쯤 돼야 강화구조물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당연히 항공기 공습은 정확성은 상당히 대단했겠지만 위력은 별 의미가 없는 수준. 또한 대형 전함에는 다량의 대공포들을 탑재할 수 있는 것을 이용해서 항공모함이나 수송함대를 공중 폭격으로부터 지키는 역할 또한 맡았다.

그래봐야 이미 거대전함의 시대는 막을 내리고 있었으며, 용도 특성상 일단 있는 전함을 쓰기에는 좋지만 그 목적만 보고 새로운 전함을 건조할 이유는 못 되었고 결국 전함은 항공모함에 자리를 내 줄 수밖에 없었다. 이미 2차대전부터 항공모함은 전함이 할 수 있는 건 대부분 어느 정도는 할 수 있었으며 항공모함이 하기 어려운 포격전의 경우에는 점점 위상이 떨어져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태평양 전쟁 말기에 가면 전함과 항공모함의 위치가 얼마나 뒤바뀌었는지 잘 보여주는 배가 한 척 있는데, 미 장성들이 제일 증오하고 가장 위험하다고 여겼던 함선은 일본 연합함대의 기함 나가토도, 세계 최대의 전함 야마토도 아닌 항공모함 즈이카쿠였다. 특히 윌리엄 홀시 항목을 보면 홀시 제독은 이 즈이카쿠를 진짜 죽이고 싶어 했다. 레이테 만 해전에서 일본군의 낚시란 걸 보면서도, 상관이 속지 말라고 말리는데도 죽이러 갔을 정도이며 반대로 일본군 해군이 가장 없애고 싶어했던 것은 태평양 전쟁의 주역인 엔터프라이즈(항공모함)였다. 결과는 모두가 알고 있는 것처럼 즈이카쿠는 레이테 만 해전에서 침몰하고, 엔터프라이즈는 2차대전 종전까지 생존한 후 스크랩 당했으나 이후 세대에 계속해서 이름을 계승중이다.

거함거포주의에서 거포는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했지만. 항공모함이 더 크고 좋은 신형 제트기를 더 많이 넣고 굴리기 위해 커진 덕에, 거함주의는 아직 항공모함이 잇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3.3. 핵무기의 등장

하지만 2차대전까지만 해도 아직 항공기가 전함에 대해 완전한 우세를 점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고작 전함 1척을 격침시키기 위해 함재기를 수십대 이상 동시에 동원하는 것은 기본이었는데다가 신형전함일 경우에는 수백대 넘게까지 동원되었다. 이렇게 대규모의 항공전력을 동원해서 전함을 신나게 때려도 함선 자체는 일단 살아서 귀환하는 경우도 많았다. 심지어 어뢰를 몇 발 맞고도 귀환한 경우도 있다. 게다가 대공포등의 대공사격능력이 향상된 전함의 경우 역으로 함재기를 다수 격추하거나 쫒아내는 것은 물론이고 함대의 대공화력까지 책임지기도 했다.

2차대전 이후로 전함의 건조가 완전히 포기된 것은 핵무기의 등장이 가장 큰 요인이다. 두 차례의 비키니섬 핵실험(크로스로즈Crossroads 작전)을 통해 핵무기는 전함궤멸에 그다지 효율적이지 않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러나 시대적으로는 핵 만능주의가 도래하며, 폭격기 투발형 핵폭탄이나 탄도탄 핵탄두는 물론 핵배낭, 핵포탄 등 각종 실험형 핵무기들이 양산되고 이로 인해 육군의 전차들도 핵전쟁 하에서의 생존성에 신경쓰게 되어, 결국 중전차 개념이 사장되고 MBT로 모든 전차가 통일되는 경향을 보인다. 마찬가지로 해전에서도 해상전함에 대한 핵무기개발이 이어지게 되었으며, 전함이 아무리 강해봤자 핵탄두를 탑재한 대함미사일이나 항공폭탄을 여러 발 견딜 정도로 단단하게 만들 순 없으므로 전함 한 척을 건조하는 가격 및 시간을 고려해 본다면 핵무기에 비해서 가격대비 성능이 떨어지며, 이로 인해 거함거포는 사장되고 대함미사일을 갖춘 순양함이나 구축함이 함대의 주력으로 발돋움한다.

4. 일본의 거함거포주의

4.1. 건조계획

4.1.1. 전함

진시황아방궁을 만들었고, 일본해군은 전함 야마토를 만들어 후세에 웃음거리를 남겼다. - 제1항공함대 항공참모 겐다 미노루, 1942년 4월 28일 야마토 함상 제 1단계 작전연구회
대포가 없어지면 자신들은 실업자가 될 수밖에 없다. 아마도 그랬을 겁니다. 병술사상을 바꾼다는 것은 단지 병기의 구성을 바꾸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대함거포주의에 입각해 세워진 조직을 바꾼다는 의미가 되니까요, 인정에 약하고 풍파를 싫어하는 일본인의 성격으로는 어려운 일입니다. - 겐다 미노루, '해군항공대, 발진'
이미 전함은 유용한 병종이 아니다, 지금 중시되는 것은 단지 종래의 관성. 우상숭배적 신앙이 되어가고 있다. - 1942년 5월 11일, 제2함대 포술참모 후지타 세이지

쓰시마 해전의 승리, 그리고 유틀란트 해전으로 거함거포주의와 함대결전사상은 사실상 상식으로 굳어졌으며 전함은 전략무기로서 자리를 굳히게 된다.

한편 일본에서는 쓰시마 해전의 승리, 그리고 미래의 주적으로 대두된 영국 및 미국과의 국력차, 러일전쟁에서 대두된 대로 강대국과 총력전 내지는 소모전을 벌일 국력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현실적 문제 앞에서 오로지 한타 싸움에서의 승리에 의한 단기결전으로 마무리짓는다는 전략을 구성하게 된다. 일본 제국 해군이 해체되는 그 순간까지 집착했던 개함우월주의, 거함거포주의, 함대결전사상, 점감요격작전은 바로 이런 사정에 기인한다.

드레드노트급의 도입 이래, 노하우 부족과 경제력 부족이 겹쳤던 후소급 전함이세급 전함만 예외일 뿐 이외 공고급 순양전함, 나가토급 전함, 야마토급 전함은 등장 당시 세계 최대 대구경 함포를 갖추고 있었다. 물론 거함거포주의의 시대 거포를 추구하는 것은 어떤 의미로는 정석적이고 영국 역시 13.5인치의 오라이언급 전함, 15인치의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 또한 등장 당시 최대 구경이었다. 영국이 대구경포를 올리기 그만둔건 1차대전 이후 경제가 기울었기 때문에 더 이상 건함경쟁을 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국은 군축조약을 주도하여 건함 경쟁을 억제하고 상대방(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일본)의 대구경화에 대응할 수 있는 수준으로만 구경을 올린다. 이후 건조된 신형 전함들은 정치적, 경제적 이유로 14인치 주포를 사용한 킹 조지 5세급 전함등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거함거포주의와는 거리가 있다. 반면 미국은 거포의 탑재보다는 기존 주포의 다연장화에 더 신경을 쓴 경우. 포탄이 좀 더 묵직한 초중량탄을 사용하기는 한데 이건 대낙각탄을 노리고 만든거다. 그러나 세계 공동 1위 해군국이 주포 구경 확대를 보류하는 상황에서 일본 제국만이 유일하게 41cm와 46cm 함포의 세계 최초 도입은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려는 격이었다. 88함대 계획도 취소되며 이들 신형 거포를 갖춘 전함은 각 2척씩밖에 건조되지 못했다.

이렇듯 위로는 전함부터 아래로는 구축함까지 하나같이 거함거포주의에 기반한 함대결전을 목표로 건조되었다. 심지어 거함거포와는 거리가 좀 멀어지는 함종인 구축함도 전부 고속성능과 뇌격능력을 중시한 이른바 함대형 구축함으로 건조된 것도 모자라서 구경은 5인치지만 장포신을 사용하는 등 거함거포주의의 영향을 제대로 받았다. 그래서 당시의 일본해군은 세계 3위의 규모를 자랑했지만, 실제로는 모든 전략전술, 편제, 무기체계, 훈련이 오로지 결전 전력 구성에만 집중되면서 해상호위, 대잠전, 군수지원은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개전 당시 일본해군에 호위함이라고는 시무슈급 4척이 전부였으니 말 다한 셈이다.

그리고 이렇게 함대결전에만 특화된 불균형한 해상전력은 태평양전쟁 내내 일본의 발목을 잡게 된다. 과달카날 전역, 필리핀 해 해전, 레이테 만 해전 등 굵직한 해전에서 연합함대가 보인 졸렬한 모습의 원인 중 하나는 남방작전으로 상당한 양의 석유를 확보하고도 세계 3위라는 해군력을 필요할 때 필요한 위치에 전개시킬 수 없었다라는 부족한 군수지원능력도 한몫한다. 어차피 그 이전 미드웨이 해전 때는 그런 문제가 없었음에도 전함을 주력, 항공모함을 보조로 여긴 포진 탓에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을 입은 것을 보면 그것만도 아니지만.

그러나 그렇게 기형적인 집중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경제력은 미국과의 한타 싸움이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함대전력이라는 소위 '88함대 계획' 및 '대미 7할론'에 맞추어서 갖추기에도 턱없이 부족했고, 결국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에 의해 방어력 부족으로 함대결전에는 투입이 어려운 공고급 순양전함 4척[2]을 포함한 10척의 주력함 보유를 인정받게 되지만 공고급이나 후소급, 이세급은 이미 성능 부족이 드러난 상태로 그렇다고 신조 전함을 건조할 돈도 없는 일본은 이들 전함군에 대해 1930년대 대대적인 근대화개장을 시전, 내부적으로는 어느 정도 만족스러운 전함전력의 구성에 성공한다.

이들 전함군은 장갑 강화, 보일러 및 주기관(나가토급 제외)까지 전면교체하는 대개장 후 10년도 지나지 않은 상태로 미영에 상당수 남아 있었던 동세대 전함군보다 빠른 속도를 내서 속력만큼은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보다도 조금(0.5노트) 빨랐으나 결전병기였다는 입장 탓에 활약상은 천지차이다.

그러나 설계와 건조기술 자체가 후진적인 후소급과 이세급은 충분하게 문제를 개선할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형적인 화력의 포기를 거부하면서 14인치 2연장 주포탑 6기 탑재를 고집하는 바람에 대규모 개장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으며 나가토급은 쓰시마 해전의 전훈까지 무시해가며 속도를 떨어뜨려서 고속전함으로서의 가치를 잃어버린다. 공고급도 이 와중에 대개장 후 속도가 26노트로 떨어지지만 방어력도 떨어지는 함이 속도까지 느려지니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라는 문제가 대두되고 결국 다시 대개장후 겨우 30노트를 확보한후 야간 수뢰전 부대의 주역으로 변경되면서 전함 결전 전력에서 제외되며 활약할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돈과 시간과 기술을 쏟아부었음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고집으로 인해 충분한 성능을 내지 못하는 후소급과 이세급의 느린 속도에 맞추기 위해서 그나마 쓸만했던 고속전함 나가토급의 속도를 일부러 개장공사를 덜 하는 식으로 늦춰가며 이들의 속도에 맞춘 것과, 개전 후 5번 주포탑 폭발사고를 일으킨 이세급 2번함 휴가를 포함한 4척을 어중간한 항공전함으로 개장을 검토하고 이세급 2척에 대해서는 실제 실행한 행각을 보면 이들 구식 개장전함군을 결전전력이라는 명목하에 2차대전기까지도 호텔로만 써먹은 건 잘못이 아니라는 변명은 설득력을 잃어버린다. 이런 짓을 하느니 프리츠 X의 폭격을 받고 3번 주포탑을 사용할 수 없게 된 HMS 워스파이트노르망디 상륙 작전 등에서 포격지원을 했던 것처럼 휴가를 파손부위만 땜빵해놓고 화력지원등의 임무에 그대로 투입하는게 더 경제적이다.

결국 결전전력으로 써먹지도 못할 후소와 야마시로 2척은 1함대가 해대될 때까지 주력함대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이세와 휴가 역시 항공전함 개장으로 자리를 비운 기간만 제외하면 역시 1함대가 해대될 때까지 결전 전력으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후소급와 이세급을 포기하고 공고급 + 개장 나가토급 + 야마토급으로 2차대전기에는 훨씬 유용했을 고속전함 전력을 구성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일본 밀덕계조차 #1 #2 가난한 일본 입장에서 후소급, 이세급 4척을 버릴 수 없었다라고 지적한다. 하지만 후소급과 이세급에서 중앙부 주포탑을 모조리 제거하고 내부 배치를 제대로 하면서 기관부만 증설해도 공고급 수준의 고속전함 전력으로 환골탈태가 당시 일본이 들인 돈과 시간과 기술력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했다는 점에서 당시 일본이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이 맞다.

어차피 워싱턴 조약은 각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기에 성립될 수 있었다, 설령 조약이 없었더라도 당시 일본 경제력으로 88함대 계획으로 대표되는 신조전함군 건설은 불가능했으며 1930년대 기존 전함의 대개장 직전 조약상 권한이 보장되는 공고 대함 계획조차도 결국 취소되었고, 기존 전함군의 개장으로 버틸 수밖에 없었던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군 내부의 대함거포주의자는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으며 결국 런던 해군 군축조약을 탈퇴, 개함우월 - 대함거포 - 함대결전의 결정체, 야마토급 전함이 탄생한다.

당시 일본의 공업력으로는 주포신 공급도 안 되는 주제에 야마토급 8척의 건조만도 꿈같은 일이었지만 그조차도 만족 못해 슈퍼 야마토급 전함인 A-150 전함이 1942년 건조계획에 채택되나 미드웨이 해전 이후 중단되고 그 함의 주포인 51cm 2연장 주포탑도 시제품 제작중에 개전 이후 작업이 중단되었다.

같은 거함거포 미기공 전함인 몬태나급 전함과 비교하자면 A-150은 미드웨이 이후 시급히 항모전력을 재건해야하는 사정으로 취소된 반면 (그러니까 돈과 시간 문제) 몬타나급은 돈문제가 아니라 조선소가 부족해 우선순위에서 밀려 탈락했다는 차이점이 있다. 또한 몬타나급은 시험적 성격의 신형 주포를 쓰는게 아닌 아이오와급 전함의 주포탑을 기존 3기에서 4기 장착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는 차이가 있다.

일본은 제2차 런던 해군 군축조약에 만들어질 때 자기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에 반발해서 기존 조약까지 모두 탈퇴했기 때문에 이론상으론 조약에 얽매이지 않고 제한없이 군함을 만들 수 있었는데, 일본은 다른 나라처럼 국력이나 대외관계, 내부 상황 등을 감안해서 적당한 수준으로 타협하여 이미 있거나 만든 경력이 있는 함포를 사용하는 전함 다수를 건조하는 게 아니라 갖가지 기술을 죄다 쏟아넣어 만든 신예 대구경 주포를 사용하는 전함을 건조하는 선택을 한 것도 개함우월주의 - 대함거포주의 - 함대결전사상에 집착한 좋은 증거. 영국과 미국도 18인치 주포를 시험해본 적 있으나, 비싸고, 주포신의 마모가 격렬하고, 낙각이 좋지 않은이 포를 쓰는 것을 보류하다 군축조약 이후 폐기했다. 그러나 미국은 이후 2차 대전이 발발하면서 조약의 제한이 모두 사라지자 다시 18인치 주포(18"/47 Mark A)를 연구하였으며 1942년에는 시험사격이 가능할 정도로 개발이 진행되었으며 이 주포에 사용할 초중량탄(Super Heavy Shell)인 1,746.3kg나 되는 포탄도 개발되었다. 18인치 47구경장 Mark A 참조. 물론 해군의 관심이 항공기 쪽으로 돌아가면서 이 주포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었고 종전 직전까지도 계획은 유지되었으나 시제품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취소되었다.

4.1.2. 항공모함

전간기는 문자 그대로 거함거포주의의 시대였지만 상술한 이유 탓에 타국 이상으로 일본은 결전주의에 매달린다. 역량은 전함에 집중되었으며 항공모함은 아카기류조의 건조과정에서 보이는 대로 제대로 된 방향설정조차 없이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인다. 순양전함 출신 개조항모라는 동일한 배경을 지닌 아카기와 미국의 렉싱턴급의 개장 과정을 비교하면 일본이 이 시기 항공모함에 대한 기술적 및 개념적 측면에서 선진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2차대전 '신전함'들의 발주에서 취역까지

페이퍼 플랜 말고 일단 기공이라도 해본 신전함들의 건조시기를 보면 일본이 전함에서 손을 뗀 것도 크게 늦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전혀 그렇지가 않은데, 타란토 공습의 벤치마킹 결과 태평양 전선에서는 가장 먼저 진주만 공습으로 항공모함의 가치를 입증한 것은 일본 해군 자신들임에도 항모체제로의 전환은 오히려 주적인 미국이나 영국보다 뒤처지는 부분마저 엿보인다.

일본 제국의 건함 계획인 마루 계획을 보면 조약 탈퇴 후의 첫번째 계획인 마루 3계획부터 마루 5계획까지 건조계획을 잡은 항공모함은 쇼카쿠급 항공모함 2척, 다이호급 항공모함 1척, 운류급 항공모함 1척에 불과하며 마루 5계획에서는 그나마 카이다이호로 불리는 G14급 항공모함을 3척 건조하기로 했다가 1척으로 줄이고 이미 구형화된 히류급 항공모함 2척을 추가하는 식의 개악을 하기도 했다. 마루 5계획에서 야마토급 전함 개량형 1척과 A-150 전함 2척이 건조계획으로 추가된 것을 보면 전함에 더 신경쓴 계획인 것이 한눈에 드러난다.

공식적으로 기존의 대함거포주의에 기반한 주력함 건조계획 마루 5계획이 항공모함 전력 건설을 우선하는 카이(改) 마루 5계획으로 변경된 것은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으로 주력 항모 4척을 한꺼번에 상실한 이후였다. 해당 계획에서도 대형항공모함인 카이다이호 중 G14 계획이 완전취소된 것을 보면 그냥 아무런 생각이 없는게 딱 보인다.

설상가상으로 계획 변경에 따른 실행도 망했다. 야마토급 3번함 시나노는 건조 중단으로 인해 반 방치상태로 있었는데 원래대로라면 바로 해체작업에 들어가서 도크를 사용가능하도록 만들어야 하지만 상황이 좋아지면 다시 전함을 건조할 생각으로 조금씩 건조작업을 진행하면서 거대한 도크를 잡아먹고 있던 상태였다. 그래서 해당 도크에서 운류급 항공모함 2척을 건조하려고 가보니까 공정률 40% 상태라 도크를 빨리 쓰기 위해 폭파해체하면 도크가 무너지는 등의 이유로 인해 억지로 항모로 개장되지만 원래 계획에 없던 터라 재설계 기간까지 추가되는 바람에 결국 최종 완성되지도 못한 채 마지막 공정을 위해 다른 항구로 이동중 잠수함에 격침당한다,

이부키급 중순양함을 개조하는 이부키급 항공모함 역시 미완성으로 끝났다. 이것도 어처구니 없는 이유가 적용되었는데 카이(改) 마루 5계획이 발표될 때 바로 개조항모로 설계 및 개조되었다면 완성이라도 되었겠지만 상황 좋아지면 다시 중순양함으로 만들려는 암묵적인 작업진행 탓에 중순양함으로 계속 건조가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부키급에 달아줄 어뢰발사관이 변경되자 그거에 맞춰서 개량공사까지 하다가 더 이상 어쩔 수가 없게 되니 그제서야 개조항모로 만들면서 쓸데없는 공사 한거 다 뜯어내고 다시 개장공사에 들어가면서 시간과 돈과 자재를 낭비했기 때문에 벌어진 대참사였다.

그나마 완성은 된 전시건조함인 운류급 항공모함도 이미 전쟁전의 건조 계획인 마루 급계획에서 건조를 결정한지 오래라서 완성이 가능했으며 역시 일본 해군의 운명을 결정지은 함대결전 필리핀 해 해전에는 참전하지 못한다. 이리하여 수상기 모함에서 개장된 치토세급이 함대형 항모에 준하는 속도에 정규 함재기를 적은 숫자나마 운용할 수 있었던 전시개장항모로 완성되었지만 별다른 전과는 없다.

쇼호급은 개(改) 마루 5계획 이전부터 계획되었고, 히요급은 덩치가 커서 정규항모처럼 굴릴 수 있었지만 느린 속도라는 문제를 안고 있었다. 기타 상선개조항모는 거의 대부분 실패작이었다 보니 함재기의 이착함도 곤란할 정도였다. 그래도 쇼호급 경항모 즈이호, 히요급 2번함 준요는 쇼카쿠급과 함께 일본 항모전단의 중요한 전력으로서 활약했다.

그러나 미국은 진주만 공습 이후 1개월만에 인디펜던스급 경항공모함에식스급 항공모함의 발주에 들어갔다. 그리고 수송선단의 호위를 담당할 목적으로 화물선, 유조선 등을 개장하면서 만들기 시작한 호위항공모함아예 찍어내기 시작한다. 수적 열세가 너무 심하니 쇼카쿠, 즈이카쿠, 준요, 즈이호가 아무리 열심히 뛰어도 어쩔 수가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항공모함 현황[출처1]
함형영국미국일본
정규항모
기보유 5 7 6
건조중 6 4 4
전시건조 0 17 3
소계 11 28 13
경항모
기보유 3 0 3
건조중 1 3 4
전시건조 9 6 0
소계 13 9 7
호위항모
기보유 0 1 1
건조중 3 1 3
전시건조 41 74 0
소계 44 76 4
총계 68 113 24
주력함[4] 보유수 20 27 12
항공모함 / 주력함 3.4 4.185 2
비고
기보유 - 영국은 1939년, 미국과 일본은 1941년까지의 보유 항모
건조중 - 기보유 기준연도에 건조 중이었으며, 전쟁중 완공
전시건조 - 전쟁 중 건조를 시작하여 전쟁중 완공

그리고 이런 설명에서 항상 빠지는 것이 미국과 영국의 항공모함 건조다. 영국도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일러스트리어스급 항공모함을 건조하고 호위항공모함을 확보하려고 노력했으며, 미국은 에식스급 항공모함을 32척을 계획해서 24척을 건조했고, 호위항공모함까지 합치면 100여척을 넘어간다. 한마디로 말해서 미국과 영국은 항공모함 우선이었으며 전함은 필요한 양만큼만 뽑은 것이다.

미국의 경우 몬태나급 전함에 얽힌 비화를 보면 더 두드러진다. 당초 미 해군은 몬태나급 전함을 4척만 건조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의회에서 5척으로 한 척 더 승인을 내준다. 물론 이건 '기왕 만들 거면 확실하게 만들고 더 만들어 달라고 징징대지 말라'는 의미긴 하다. 그런데 더 골때리는 건 에식스급 항공모함을 우선시하느라 몬태나급의 우선순위가 밀렸고, 결국 모조리 취소되었다. 미국이 항모의 중요성에 눈을 떴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영국은 라이온급 전함 중 기공에 들어간 2척을 1942년 중에 폐기시키고 페이퍼 플랜으로만 남긴다.(계획자체는 이후에 부활하지만 1945년에 예산이 거의 잘려나가고 1949년에는 최종적으로 취소.) 기관부는 격침된 후드의 대체함으로 준비되던 뱅가드에 이식, 뱅가드는 주포탑과 기관부 등 주요부품을 거의 재고로 조달했음에도 항공모함을 우선하느라 전후에야 완공된다. 영국 역시 우선순위를 이해하고 있던 것. 또한 항공모함의 손실이 증가하자 단기간에 항공모함을 확충할 목적으로 1942년 설계 경량 함대 항공모함을 건조하기 시작한다. 상당수가 종전 직전에 나와서 문제기는 하지만...

항공모함과 전함의 비율을 따지면 일본이 압도적으로 전함비율이 높다. 그런 것을 망각하고 전함의 숫자만 언급하면 당연히 국력이 높은 미국과 영국의 전함숫자가 더 많아보이는 소위 통계의 오류가 발생한다.

항공모함에 태울 함재기와 조종사, 정비원 등의 요소도 중요한 것인데, 일본군은 영 좋지 않은 신형 함재기들 때문에 제로센이 끝까지 날아다닌다거나 똥군기를 도입해서 일부러 조종사 수련숫자를 크게 줄인다거나 병 계급의 조종사가 있다거나 조금만 훈련 받으면 조종사가 될 인재를 모아서 만든 정비원을 적중에 버리고 도망친다거나 미드웨이 해전의 패배를 가리려고 살아남은 사람들을 연금했다가 일부러 옥쇄하라고 남방군도에 파견보내는 등의 실책을 연이어 저질러서 인력관리가 절망적이었음을 보여준 바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남방쪽에 증원이 필요했다는 이야기도 있기는 하다. 증원 겸 입막음 겸 그리고 항공병과가 아니라도 일본군 특유의 똥군기야 뭐... 이 쯤 가면 항공모함에 대한 천대가 바닥을 뚫고 내려갈 지경이라고 보면 된다. 참고로 연합함대의 장교도 포술 관련 능력을 우선시했으며 항공병과는 성적 안되거나 밀려난 사람들의 집합처로 시작했다.

영국은 국력의 한계로 미국만큼의 성과는 내지 못했지만 1942년 설계 경량 함대 항공모함 계획으로 9척의 함대형경항모를 전시에 건조한 것을 포함 함대항공모함 총합 20척으로 17척 보유한 일본에 뒤쳐지지 않았다.

영국의 대표적인 정규항공모함인 일러스트리어스급은 최초의 장갑항공모함으로 유명하며 1번함 일러스트리어스는 고작 36기로 함재기 탑재가 유독 적었으나, 2번함부터는 문제를 개선해서 50대정도는 탑재 가능하게 되는 등 약점을 수정했다. 일러스트리어스급의 개량형인 임플래커블급 항공모함은 2차대전 시기 항모중 우수한쪽에 속한다. 다 합쳐서 6척인 정규항공모함이지만 진짜 영국의 능력을 보여준 것은 경항공모함이다. 유니콘급은 전쟁 전 설계라 33대라는 적은 수를 탑재하지만, 영국함 설계의 진수를 보여준 1942년 설계 경량 함대 항공모함은 다들 50대 수준의 탑재가 가능한 설계가 아주 잘된 경항모들이다. 개조 호위항모도 상당수 확보되었으며 이들은 대잠, 상륙작전 지원 등에 폭넓게 활용될 수 있었다. 보유한 호위항모 수 자체는 엄청나서 기존 함선의 개조이고 대부분은 미국에게 공여받아서라도 다수를 확보하려고 했다. 비록 주력함으로 써먹기는 무리가 있지만 호위항공모함은 U보트에 대한 보급선 보호작전시 고속, 광역수색의 장점을 가지는 항공기를 운용하기 위해서 개발된, 항공지원의 정수 중 하나다. 그리고 영국 해군은 전간기때부터 통상로를 보호하는 역할을 중시해서 순양함 전력도 이러한 역할에 알맞게 갖추어졌으며 심지어 필요하다면 워싱턴 조약으로 숫자가 줄어든 전함조차 거리낌없이 배치 투입했다. 또한 1942년 설계 경량 함대 항공모함도 기본적으로 통상로 보호등의 임무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물론 상륙작전 항공 지원등에도 폭넓게 사용되었다. 다만 장갑과 속도의 한계로 함대주력으로서 사용하긴 어려웠고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역할을 주로 맡는다는 한계가 있기는 했다.

마지막으로 미국은 전쟁에 직면하자 과거의 건함계획을 파토내고 항공모함을 막 찍어내는 것으로 대응했으므로 이 점에서도 일본은 뒤쳐진다. 그리고 미국은 1940년의 2대양 해군법에서도 최종적으로 18척의 항공모함을 건조할 계획이었지만 전함은 아이오와급 2척 + 몬타나급 5척으로 7척에 그친다. 전쟁 이전에도 이미 항공모함이 중요한 전력임을 파악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에 비해 일본의 경우에는 항공모함이 중요한 전력이라는 자체는 인식해서 경항모라도 찍어내려고 시도하기는 했지만 건함계획을 보면 어디까지나 보조함으로서 항공모함을 중시한것이지 전함이 해전의 중심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난 결과라고 보기는 어렵다.

단순한 공업능력과 숫자만이 아니라 아카기, 카가, 류조의 시행착오 및 전시에 들어선 이후에도 쓸데없는 항공전함이나 항공순양함을 만드는 삽질을 하기도 했다. 그나마도 돈이 없다는 이유로 이세급은 어정쩡한 배로 완성되었고, 모가미, 오요도 같은 항공순양함은 제대로 쓰지도 못했으니 대실패. 토네급 2척은.... 그런 쓰레기들은 논하지 말자. 이딴 짓을 할 바엔 차라리 경항모라도 빠르게 만드는게 상식적인 판단인걸 고려하면 매우 멍청한 짓이었다. 항공모함에 무엇이 필요한지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 실상이다.

명목상으로나마 항모 중시로 시프트한 개(改)마루5계획에 대해서도 전사총서는 계획과 방침뿐으로 방책이나 실천은 철저하지 못했으며 국력 및 공업력상 항공과 전함의 양립은 무리였으며 함정 정비 억제는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지적한다.[출처2] 항공전 중심의 패러다임으로 늦게나마 선회한 것이 아니라 미드웨이에서 박살난 보조전력 항모전력을 시급히 복원하기 위한 움직임에 불과한 소 뒷걸음치다 쥐잡은 격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일본군이 미드웨이에서 대패하지만 않았다면 슈퍼 야마토급의 용골이 올라가는걸 실제로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4.1.3. 일본과 연합군 전함들의 처우

영국의 리벤지급 전함은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속력이 느리다 뿐이지 화력과 방어력에 있어서는 QE급과 동급이므로 1선급 전력이라 개장을 고려했었다. 그러나 영국의 경제 자체도 엉망이었고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을 개장하는데 비용이 예상보다 많이 들어가서 워스파이트의 개장 비용이 £2,363,000인데 건조비용이 £2,524,148가 들어갔다. 시기상의 차이가 있다고는 하지만 개장비용이 건조비용이랑 비슷한 수준으로 올라가는 데다가 리벤지급은 그보다 더 비쌀것으로 예상되어 차라리 계획되었던 라이온급 전함으로 대체하기로 결정하지만 전쟁이 발발하면서 계획이 엎어지고 만다. 그나마 어드미럴급이야 대체할 전력이 없어서 어떻게든 살려놨지만 리벤지급은 전함 대체할 계획까지 잡혀있던 물건이라... 결국 영국은 이 중요전력을 2선급으로 돌려버렸다.

그리고 미국은 표준형 전함군에 응당 필요한 필요최저한의 개장밖에 하지 않았다. 정작 그 엄청난 비용을 퍼부은 일본 개장전함군이 약간의 개장만 받은 미국 표준형 전함에게 확실한 우세를 접하기는 커녕 접근하다가 두들겨맞고 전투력을 상실하지나 않으면 다행인 수준이었다는 게 함정이다. 미국 표준전함들의 신형 주포는 거의 모든 교전거리에서 후소, 야마시로를 뚫어버릴 수 있는 반면에 후소, 이세는 중요한 주포를 그대로 두었기 때문이다. 일본 개장전함군이 표준형 전함군에 가지는 우위는 속도와 갑판장갑 정도가 고작이다. 부실한 장갑으로는 영국의 15인치 전함군의 상대가 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더군다나 영국 전함들은 주포는 교체하지 못했어도 신형탄을 도입하여 위력 자체는 좀 약한 16인치급으로 끌어올렸다. 쓰시마 해전의 사례를 따라 속도와 컨트롤, 진형으로 승부를 내려 한 것이지만 사실 쓰시마 해전도 러시아 전함의 방어력이 과적과 텀블홈 선체 탓에 문제를 안고 있었던 것이 중요한 요인이기에 일본이 상정한 거함거포 함대결전이 벌어졌더라도 일본 전함이 미국 전함에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을 가능성은 적다. 41cm 주포를 갖춘 나가토급은 후소, 이세급보다는 상황이 좀 낫지만 역시 콜로라도급에 확실한 우위를 점하지는 못한다.진형으로 승부볼거면 거포는 왜 올린거냐?

반면 일본의 동세대 전함군은 1930년대의 대개장을 거쳐 여전히 주력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공고급 순양전함이나 리나운급 순양전함 네임쉽 리나운처럼 고속성능을 가진 순양전함은 2차대전기 항공전의 시대에는 두터운 장갑과 상대적으로 느린 속도를 갖춘 정규전함보다 운용에 따라서는 더 유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사실상 결함품으로 간주되는데다 기술적으로는 리벤지급이나 네바다급 전함보다도 후진적인 후소급과 그 마이너 체인지인 이세급에까지 대개장을 가한 것이다. 타 열강보다 국력이 떨어지는 일본 입장에서는 구식전함의 개장 자체는 필요한 일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엄청난 돈과 시간을 들여 전력 정비를 이미 마쳐놓은 상태에서 굳이 런던 조약을 탈퇴하고 야마토급을 새로 건조한다는 선택은 상술한 대로 일본 밀덕계에서조차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야마토급이 일본이 상정한 스펙을 완전히 발휘한다고 해도 2척 가지고 KGV급 5척, 노스캐롤라이나급 2척 + 사우스다코타급 4척 + (아이오와급 4척)을 당해낸다는 것은 무리고, 영미의 신전함군을 상대로 신전함보다도 느린 후소, 이세급을 일본이 상정한 함대결전에 투입한다는 것은 무리다.

또한 군축조약 파기 후부터의 전함 대 항공모함을 대상으로 잡는 건 부적절한 감이 있다. 단순한 숫자만으로는 운용 의도를 파악할 수 없다. 킹 조지 5세급 전함야마토급 전함의 2척보다 많은 5척이라는 숫자를 갖출 수 있었던 것을 영국이 일본보다 거함거포주의를 중시해서라고 해석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킹 조지 5세급 전함은 제2차 런던 해군 군축조약에 맞추어서 주포 구경이 14인치로 오히려 줄어들고 기준배수량도 3만5천롱톤인지라 거함거포주의와고는 거리가 먼 데 반해 조약 탈퇴후 무조약상태로 만들어서 18.1인치 주포 9문에 만재배수량 72,800톤인 야마토급 전함이 오히려 거함거포주의의 진수를 보여주며 이런 점에서 오히려 야마토급의 숫자가 줄어든 것을 개함우월주의와 거함거포주의의 결과라고 해석할 수 있다. 전함을 구축함이나 순양함보다 많이 보유하는 해군은 존재하지 않지만 그런 국가가 전부 청년학파식 소함주의 독트린을 채택했다고 간주할 수 없듯, 단순히 탈조약 후 일본의 전함보다 항모 건조 숫자가 더 많았다는 것만으로는 일본이 거함거포주의를 이미 포기했다고 해석할 수는 없다. 운용 단락에서 후술하겠지만 전쟁 돌입 후 미국이 항공모함을 주력으로 올리고 전함은 지상화력지원 등 보조임무, 신형 고속전함조차 항모전단의 호위로 돌릴 때 일본은 항모를 전함의 보조로 여겼고 그런 편제가 1944년 2월까지 계속된다. 영국의 경우 전함 또한 주력으로 활약했지만 이건 영국 해군이 항공모함의 숫자가 여유가 없었고 태평양과는 달리 독일과 이탈리아는 항공모함이 없었기에 지상발진 항공기의 작전 범위를 벗어나면 수상함간의 전투양상으로 흘러가기 때문인것도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하더라도 영국 함대는 종종 적 지상발진 항공기의 작전권 안으로 들어가야 했기에 항공모함 또한 중시했다.

굳이 함대항공모함과의 비를 따질거면 전체 슈퍼 드레드노트급 전함 대(對) 함대항공모함으로 따져야 하는데, 이러면 미국 19:33(1:1.94)/ 일본 12:17(1:1.44) /영국 17:20(1:1.17)으로 영국에게 근소한 차이로 앞서기는 하지만 미국에게는 압도적으로 뒤쳐진다. 그리고 앞에서도 언급했듯 호위항모까지 추가하면 영국에게도 압도적으로 밀린다.

일본 위키백과 대함거포주의 문서는 아예 이 부분에 대해 대놓고 주작을 서슴지 않는다. 일본의 개전시 기존 항공모함 10척, 개전시 건조중/개장중/계획 결정함이 12척, 전시 최종 취역수 22척인데 미국이 각 7, 3, 10척이다. 당장 자기네 에식스급 항공모함 문서만 확인해 봐도 전시 취역 17척이고 그 중 12척이 개전 후 기공했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일본의 항공모함 숫자도 오류가 있는 데 10척중 4척이 경항모이며 호쇼는 정규 함재기 운용 불가능, 다이요는 실질 항공기 수송함으로만 쓰였으므로 실제로는 8척만이 실전운용이 가능하며 함대항공모함을 따지면 고작 6척이다. 그러므로 대함거포주의 문서에서조차 다른 나라가 항모를 적게 생산했다고 주작해야 할 만큼 항모 숫자가 중요한 문제였다는 걸 일본 위키백과 편집자(들)도 안다는 뜻이기도 하다.

4.1.4. 다른 배를 항모로 개장한다면?

일본의 항공모함 건조도 자세하게 뜯어보면 문제점이 많은 것이, 정규항공모함에 빠른 속도가 중요하므로 대체제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2선급 전력으로 함대결전에서 제외된 공고급 순양전함을 항공모함으로 개조하면 되지, 굳이 더 느린 이세급 전함을 자재와 비용 문제까지 언급하면서 항공전함으로 개수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 이세급을 완전히 항모로 개장했다면 속도는 다소간 오를 수도 있었다. 함재기를 탑재하게 되긴 하겠지만 전함에서 손꼽히게 무게를 많이 차지하는 주포탑과 바벳을 들어내기 때문이다. 엔진 부문에서는 더 나을 것도 없는 카가도 항공모함으로 개장되자 28노트 정도는 냈다.

다만 공고급이 주력이 아니었다는 말은 어폐가 있다. 물론 자기들끼리 분류하기로 공고급이 결전용 주력함이 아니었던 것은 맞다. 하지만 그 잘난 결전용 전함들은 연료가 부족하다든지 항속이 느리다는 이유로 다방면으로 쓰이지 못했다. 공고급이 항모로 개조한다고 빠져버리면 이세급이나 후소급이 전면에 나서야 하는데 이들은 순양함 및 구축함이나 항모들과 발을 맞추기에는 너무 느렸다. 이들보다 약간이나마 더 빨랐던 나가토급 무츠도 항속 때문에 뒤쳐졌던 역사가 있고 미국이 괜히 아이오와급 전함에 30노트를 넘는 항속 성능을 요구한 것이 아니다. 결국 결전용 주력 전함전대가 높으신 분들의 호텔이 되어있는 사이 일본 해군은 좋든 싫든 공고급을 주력으로 굴리고 있었던 것이다.

공고급은 빠른 항속으로 다른 일본군의 결전용 전함이 가치를 잃어버리는 와중에도 수훈함으로 활약했고, 이미 완성된 순양전함을 항모로 개조하는 것은 매우 어려울 뿐더러 처음부터 항모로 건조한 항모보다 함재기의 운용 면에서 열세에 놓이게 된다. 렉싱턴급 항공모함도 걸작으로 평가받기는 하나 순양전함으로서 더 완성에 가까웠던 1번함 렉싱턴의 진수는 순양전함으로서의 모습을 아직 제대로 갖추지 못했던 2번함 새러토가보다 늦었다. 카가도 마찬가지로 토사보다 건조 진척이 느렸기에 토사를 포기하고 카가를 항공모함으로 돌렸다. 그만큼 순양전함이나 전함을 항모로 개조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완성되지 않은 렉싱턴급이나 카가도 이런데 이미 완성된 공고급이야 말할 필요도 없다. 그리고 그 렉싱턴급의 함재기 운용 효율은 본격적으로 항모로 건조된 요크타운급 항공모함에 비해 열세였다.

사실 전함 내지 순양전함들을 항모로 돌린 사례들을 보면 대부분 해군 군축조약의 영향이 매우 크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군축조약으로 인해 전함 건조가 제한되자 건함되던 전함과 순양전함들을 항모로 바꾼 것이다. 렉싱턴급 항공모함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의 결과로 순양전함에서 항공모함으로 선회했고, 카가 또한 같은 조약으로 인해 전함에서 항모로 바뀌었다. 이렇듯 전함 등의 주력함을 항모로 개장한 것에는 성능이나 효율성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고려가 반영되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처음부터 함재기 운용을 전제로 함체를 설계하고 구획을 나눈 정규 항공모함과는 달리 개장 항공모함은 구획 등을 수정하기가 쉽지 않다. 그것을 다 뜯어고치다 보면 결국 새로 건조하는 것만큼 오래 걸리거나 그 이상으로 시간이 필요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종합해서 말하자면 괜히 항모로 개조한답시고 1선의 전함을 빼다가 개조하는 것보다 항모를 새로 만드는 편이 더 효율적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군에게는 이세급이나 시나노 외에 바로 그런 생각으로 만들어진 신규 전시건조 항공모함 운류급도 있었지만 뒤늦은 완성과 결전지향으로 준비된 항공전력의 무분별한 소모로 실전 참가 기회를 얻지 못한다.

중순양함의 고속성능에 1만톤 가까운 배수량으로 이부키급 및 즈이호급이나 인디펜던스급처럼 경항모 개장도 충분히 가능한, 그리고 미드웨이에서 대파되어 겨우 살아돌아온 모가미급 중순양함 1번함 모가미를 뜬금없는 항공순양함으로 개장한 것은 덤이다. 일본 제국이 군축조약을 준수하던 시절에 전쟁에는 당장 쓸모없어보이는 호화여객선인 히요와 준요를 정부 지원하에 설계시부터 항모로 개장할 것을 전제로 하고 설계후에 건조한 후에 전운이 감돌자 신속하게 개장해서 항공모함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일본 제국이 예전만큼 수준의 머리도 안돌아갔다는게 딱 느껴진다.

그리고 항공전함은 전함의 일종으로 치지 항공모함으로 치지 않는다. 정규항공모함이 가라앉았는데 그 공백을 항공전함으로 메꾼다는 발상도 웃기는 일인데다가 그렇게 개수된 항공전함들이 오히려 기존의 항공모함보다 기술적으로나 능력적으로나 퇴보까지 했으니 결국 안 하느니만 못 했다. 굳이 따진다면 영국이 비슷한 생각을 하고 킹 조지 5세급 전함을 항공전함으로 개장하는걸 검토하기는 했다. 하지만 영국이 내린 결론은 매우 상식적으로 그럴바에야 전함과 항공모함을 따로 만드는게 더 좋다는 것이었고 그 계획은 없던 일이 된다.

그리고 중순양함은 일본군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전력이었다. 전함이 결전병력이라며 아껴지고 있으니 중순양함이 대신 구를 수밖에 없어서다. 항공모함으로 개장할 만큼 일본군에 중순양함이 넉넉하지도 않았다. 전쟁 중에 일본군이 새로 건조한 중순양함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공급이 딸리는데, 항모 호위를 맡은 데다 전함 역할까지 대신하고 있는 중순양함들을 항공모함으로 개장하면 안 그래도 모자란 중순양함이 더 줄어든다. 시대에 뒤쳐진 일본군 경순양함의 처참한 성능과 수량까지 감안하면, 중순양함은 절대로 일선에서 뺄 수 없었다. 이렇게 모자란 수량의 중순양함을 항공순양함으로 개장하는 걸 보면 이쯤 가면 항공모함을 안만들고 싶어하는 정도로 보일 지경이다.

게다가 일본의 경우 애초 계획에 따른 항공모함 건조 외에 전시에 완성된 것은 정규항공모함 3척 뿐이다. 즉 가장 항공모함에 관심없던 것은 일본이다. 참고로 잡배들을 개조하다가 전쟁 끝날때까지 완성못한 것은 위 표에 반영되어 있지 않다. 같은 논리로 미국과 영국의 항공모함중 전쟁중에 완공되지 못한 것은 후에 완공된 것이라도 반영하지 않고 넘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의 표처럼 전쟁중에 완공된 것만 따져도 영국과 미국의 항공모함은 엄청난 숫자를 자랑한다.

4.1.5. 호위항공모함

호위항공모함이라도 좋았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일본군의 항공모함은 기술력 부족으로 캐터펄트를 설치하지 못했으므로 함재기는 항공모함 갑판을 자력으로 활주해서 비행해야 한다. 단, 대전기에는 국가를 불문하고 함재기의 이함은 자력으로 이함하는게 기본이었다. 심지어 어지간한 육상기보다 무거운 헬캣이나 콜세어도 자력으로 충분히 이함이 가능했다. 캐터펄트를 이용한 이함이 필수가 된건 함재기가 제트기로 바뀐 이후이다.

그러나 이게 문제가 되는 이유는 일본군의 항모 대부분이 느리기 때문이다. 너무 느려서 함재기에 충분한 양력을 보태줄 수가 없었다. 이러면 자력이함으로 비행기가 뜰 수가 없으니 항공모함으로 써먹을 수가 없다! 캐터펄트의 부재가 치명타가 될 수밖에 없다.

물론 히요급처럼 덩치가 크면 어떻게든 함재기를 띄울 수 있지만, 히요급은 일본에서 정규항모로 간주했던 소류나 히류보다 더 컸다. 미군도 정규항모로 분류할 정도였으니 일본의 꼬꼬마 항모들과 비교할 수가 없었다. 일본에서는 개조항모로 분류되긴 했지만, 악천후 시에도 정규항모라는 쇼카쿠보다 훨씬 덜 흔들릴 정도로 컸다. 쇼카쿠가 너무 흔들린 거잖아

덕분에 느려터진 일본의 소형 항공모함들은 제로센 같은 주력 함재기를 탑재하지 못하고 96식 함전, 97식 함공, 96식 함폭 같은 구닥다리를 써야 했다. 96식 함폭이 뭐냐 하면, D3A 99식 함폭 이전의 구형기이자, 다이요의 함재기이기도 했던 복엽기이다. 심지어 Ki-76 3식 지휘연락기같은 소형 STOL기를 사용하기도 했다. 이렇게 될 경우 1선에서의 격전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일본군도 이런 호위항공모함은 항공기 수송이나 선단 호위로 돌렸는데, 이렇게 된 함선 숫자가 무려 5척이다. 엄청난 돈을 들여서 개조공사를 해놓고도 선체결함등의 문제로 인해 실전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못한 류호같은 경항공모함도 있다.

이러니 실제로 전장에서 사용가능한 항공모함의 숫자가 크게 줄어들고, 그나마 몇 척 안되는 정규항공모함이 주력을 차지하기 때문에 미드웨이 해전처럼 주력항공모함 4척을 잃어버리는 등의 사태가 나면 전력회복이 불가능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미드웨이 이후 일본군의 정규항모가 류조, 쇼카쿠, 즈이카쿠 3척이었고 느려도 덩치가 큰 히요급 항공모함 준요까지 합하면 4척이다. 쇼카쿠급 항공모함이 기존의 아카키와 카가보다도 운용 효율이 열세이고 히요급 항공모함보다 바다에서 더 많이 흔들리는 등의 난조가 있었고 히요급 1번함 히요는 언제나 고장났으니 빼야 한다는 것까지 감안하면 실제적인 전력 숫자는 잘 해봐야 3척 수준이다.

아무튼 일본군은 마땅히 이 4척을 소중히 다뤄야 했다. 정규항모는 엄청난 자산이니까. 그런데 일본군이 동부 솔로몬 해전에서 류조를 미끼로 던져서 침몰시키는 바람에 정규항모가 3척으로 줄었다. 이게 대체 뭐하자는 플레이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사실 일본에는 호위항공모함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일본의 항모분류는 정규항모와 개조항모, 둘 뿐이었다. 호위항공모함이 얼마나 유용한지 생각해보면 이는 일본의 명백한 실책이다. 다만 일본은 호위함이라는 개념 자체가 미약했으니 이건 패러다임의 문제라기 보다는 일본군의 고질적인 문제라고 볼 수 있기는 하다. 일단 호위구축함이라는 개념 자체도 미약했고 영국이 순양함들 통상로 보호등의 임무를 염두에 두고 건조한 반면 일본은 함대결전사상에 집착해서 구축함조차도 딱 그 용도에만 맞게 만들었다. 이후 구축함 본래의 역할에 맞는 구축함을 만들기는 하지만 시기도 좀 늦었고 성능도 그냥 그런 물건이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미국은 정규항공모함의 숫자도 많고 정규항공모함, 경항공모함은 물론 호위항공모함까지 유압식 캐터펄트를 설치했기 때문에 보그급 호위항공모함카사블랑카급 호위항공모함이 모두 F4F 와일드캣같은 주력 함재기를 탑재 및 운용가능했다. 그래서 호위항공모함인 주제에 레이테 만 해전같이 급박하게 적의 주력함대와 격전을 벌이게 되더라도 어느 정도의 대응이 가능하였다.

4.2. 운용

해군항공은 기본적으로 전전의 상정과 바뀌지 않은 채 대미전에서 운용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 활약이 화려하다고 해도 함대결전에 기여한다는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해군 자체가 상정하지 않은 항공 대치전에 대한 대응능력은 없었다. 이 때문에, 전술한 제 2차 세계대전에서 나타난 항공전에 적응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 일본 방위성 전사연구연보 15호 '태평양전쟁에 있어서 항공운용의 실상, 운용이론과 실제 운용의 차이' #
진보가 없는 자는 절대 승리할 수 없다. - 전 야마토 승조원 요시다 미츠루, '전함 야마토의 최후'
미국과 일본의 전함 운용법을 비교해 보면 일본의 문제가 더욱 크게 부각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국 해군 소속 함선들 중 소위 '수훈함'이라고 불리며 활약했던 배들의 면면을 보자. 그 유명한 엔터프라이즈의 숙적이라고 불렸던 즈이카쿠쇼카쿠, 솔로몬의 늑대 아오바와 아오바의 자매함 키누가사, 태평양을 누볐던 공고급 순양전함, 엔터프라이즈에게 죽빵을 날리고도 끈질기게 살아남은 개조항모 준요 등등. 쇼카쿠급을 제외하면 2차대전 당시 일본군 내부에서 2선급 정도로 평가받던 '버리는 카드'들이었다. 공고급 순양전함은 후소급이랑 묶여서 일본 해군 전함 라인의 말석을 차지하던 전함들이었고, 준요는 번듯한 항공모함도 아니고 아예 여객선 출신이었고, 아오바와 키누가사가 속한 아오바급은 그냥 구식 순양함의 전형이었다.

'소중한 거함'들이 군항에 처박혀있는 동안 거함들의 빵셔틀 취급받던 버리는 카드들이 전공을 세우는 불합리하고 역설적인 상황이 당시 일본 해군의 높으신 분들에게는 그다지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공고급 순양전함들이 야간전 탱킹하다가 차례로 침몰해가고, 아오바가 천조국 함선들에게 얻어터져가며 임무를 수행하고, 준요가 엔터프라이즈를 중파시키는 동안 야마토 같은 결전병기가 한 일이라곤 선원들에게 맛있는 밥을 제공해준 것뿐이다. 하다못해 나가토급 전함은 불침함 유키카제와 더불어 해군의 마스코트 역할로서 당대의 일본 국민들에게 인기라도 높았지, 야마토급 전함은 철저히 숨겨져 있어서 일본 사람들도 그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 바로 밑의 문단에서 서술할 그놈의 함대결전사상이 거함을 묶어놓은 셈이다.

4.2.1. 전함 놀아요

일본에서는 거함거포주의에 기초한 함대결전사상에 빠진 나머지 언젠가 거함거포의 전함들 사이에 결정적인 함대결전이 벌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일본이 이러한 함대결전사상에 빠진 이유는 객관적으로 볼때 불리했던 러일전쟁에서 함대결전에서의 승리로 전쟁의 승패를 결정지은 경험 때문이다.

그 결과, 일본 전함들은 항공모함과 중순양함, 구축함들이 혈투를 벌일 때에도 놀기만 했다. 전쟁이 미군의 승리로 결정될 때까지 아무것도 안 하고 군수물자만 퍼먹었던 것이다.

이 꼴이 난 이유는 동부 솔로몬 해전에서 나가토급 전함 무츠가 너무 느려터져서 순양함들을 따라가지 못하고 낙오했기 때문이다. 전투상황에서 일본의 항공모함과 순양함, 구축함들은 30노트로 내달리는데, 무츠는 25노트밖에 못 내니 낙오될 수밖에. 결국 구축함 3척이 무츠를 기지로 데려다줘야 했고, 이후 일본 전함들은 과달카날 전역에 오지도 못했다. 사실 25노트로는 항공모함의 호위는 고사하고, 라바울에서 과달카날까지 당일치기로 갔다 오기도 힘들다. 공고급 순양전함이 핸더슨 비행장에 야간포격을 가하고, 중순양함들은 야간포격은 물론이고 수상기를 동원해서 야간공습까지 감행한 걸 생각하면 군함이 왜 30노트를 내야 했는지 알 수 있다.

이 지경이 된 것은 일본군이 1930년대에 자국의 전함군들을 근대화 개장하면서 27노트급 순양전함이던 공고급을 30노트로 향상시킨 것을 제외한 나머지 전함들의 최고속력을 25노트로 한정지었기 때문이다. 원래 나가토급은 26.7노트라는 고속을 내던 전함인데 수중방어력 강화 등의 방어력 향상공사를 하면서 배수량은 늘렸으면서도 기관부의 개수는 중유전소보일러로만 교체하는 것으로 만족하면서 25노트로 줄였다. 느린 배들과 순항속도를 맞추려고 그랬단다. 이게 한심한 게 함대 구성을 유지하려면 단지 빠른 배가 느리게 순항하면 되고, 작전 자체를 느린 속도에 감안해 짜주면 되는 것이었다. 즉 함선의 속도 한계로 인한 문제는 치명적인 문제는 아니며, 오히려 빠른 함선을 다른 함선의 속도에 맞춘답시고 일부러 느리게 개조하는 것이 일본의 확실한 실책이었을 입증하는 소재가 되어버린다.

건조계획 부분에서 언급한 대로 이건 쓰시마 해전의 전훈조차 무시한 처사다. 해군의 휴일 기간까지 일본 전함은 기술의 한계도 있어 방어력은 떨어질지언정 동세대의 타국 전함보다 빨랐다. 포격전에서 유리한 위치를 먼저 선점해 화력을 집중시키겠다는 것인데, 나가토급은 개장된 구식전함의 속도에 맞춘답시고 속도를 줄였고 야마토급은 같은 시기 열강의 신전함 중에서 가장 느린 속도를 자랑한다. 쓰시마 해전에서 승리의 계기가 된 전술기동력은 물론 2차 대전기 절실하게 필요했던 전략적 기동력인 필요한 때 필요한 위치로 즉시 달려갈 수 있는 능력까지 잃어버리게 된 셈.

또 한가지 문제는 연료 문제였다. 전함은 장대한 크기 덕분에 당연히 엄청난 연료를 소모하게 되는데, 동남아시아의 유전과 정유시설을 손에 넣고도 정작 해군용으로 배정된 유전과 정유시설들은 연합군이 철수하기 전에 파괴시켜 놓은 상태라서 실질적으로 일본해군은 1942년 후반기부터 유류부족에 시달려야 했다. 즉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에서 알 수 있듯이 일본군은 육군과 해군이 서로 반목하면서 각각 독립국처럼 운용되던 정치적인 문제가 원인이었는데, 일본군은 육군과 해군이 각각 따로따로 유전을 분배받은 후 각자가 직접 정유해서 사용했으며 당연하다는 듯이 유전과 정유 시설 및 유조선은 전혀 공유하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유전 분배만 문제였다면 서로 변통해서 융통성있게 사용해야 하는데 실제로는 해군 유조선 빌리기 싫어서 육군 수송선에 원유를 드럼통에 탑재해서 운송하는 비효율성 넘치는 짓을 하고 그걸 해군이 모른 척 하거나 해군 유조선이 운송할 연료가 없고 현장에서는 연료공급이 다급해지니까 급하게 육군 소속의 유정에 멋대로 가서 눈물로 호소해서 육군 관계자가 연료를 나누어주니까 육군 상층부에서 대노해서 해당 육군 관계자가 처벌을 받는 등의 개막장 운용까지 해버렸다. 사실상 일본 제국 육군과 일본 제국 해군이 서로 적국이었다.

이런 문제가 나온 이유는 일본군이 보급에 개념이 없어서였다. 오죽하면 일본군, 일본군/문제점, 일본군/무기체계 문서에서 하나같이 지적하는 게 일본군의 보급 문제다. 거함거포주의를 실현하려면 전함들을 써먹어야 하고, 그러려면 보급부터 빵빵하게 해줘야 한다는 기본적인 상식도 없었던 것이다. 포탄도 연료도 예비부품도 없으니 전함들을 출동시킬 방법도 없다. 전방보급기지라는 트럭 제도에 연료탱크도 제대로 세우지 않은 시점에서 이미 막장이다. 전함들의 업무가 전투가 아닌 주유소인 시점에서 답이 없다. 만약 군 체제가 유기적으로 돌아가는 상황이었으면 연료 부족으로 거대 전함을 놀리는 상황은 오지 않았을 것이다. 더불어 이탈리아군이라는 반례도 존재하는데, 에르빈 롬멜북아프리카 전역에 대한 긴급보급을 요청했을 때 해군용 연료가 이미 바닥난 상태에 가까웠음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에서는 고작 수송선 4척을 호위하기 위해 리토리오급 전함을 포함한 총 10만톤에 육박하는 전투함대를 파견했었다.

마지막으로, 후소급이나 이세급 등 성능, 특히 방어력에 문제가 있는 구식 전함을 투입하기 어려웠다는 변명도 있다. 그러나 이들은 1930년대의 대개장을 거쳐 25노트, 후소급조차 24노트를 내는 준 고속전함이었고 영미는 이들보다 훨씬 느린 동세대 구식 전함을 화력지원이나 수송선단 호위 등의 임무로 잘 써먹었다. 속도가 빨라 필요한 위치에 신속하게 투입될 수 있는 리나운급 순양전함 HMS 리나운은 노르웨이 전역에서 수송선단을 노리는 샤른호르스트급 전함 2척의 공격에 맞서서 그나이제우를 전투 불능 상태에 빠르려서 쫒아내는 활약을 보여주기까지 했다. 물론 리나운도 경미한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속도가 느린 리벤지급이나 넬슨급의 호위임무는 이런 화려한 전과는 없지만 통상파괴작전에 대해서는 훌륭한 억지력이 될 수 있었다. 실제로 독일군 수상함들은 넬슨급 전함이 호위하는 수송선단에 아예 접근도 안 했다. 후소급이나 이세급이 느려서 과달카날에 갈 수 없다면, 다른 임무라도 맡겨야 하지 않는가? 최소한 놀면서 군수품만 먹어치우는 것보단 나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과달카날 전투에서 해전은 꾸준히 이어지고 있었고, 당시에 내보내던 전력만으로는 더이상 상대가 되지 않는 점이 분명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자국내의 사소한 문제를 들먹이며 끝끝내 신형 전함들을 내보내지 않은 것은 타국과 전면전을 치르는 국가가 하기에는 매우 비정상적인 생각이었다. 전함에 맞설 수 있는 게 전함 뿐이라는 게 상식인 세상에서, 미군 신형 고속전함들이 돌진해오는데 구닥다리인 공고급 순양전함과 전함보다는 덩치도 작은 중순양함들이 그걸 막는 건 무리였다.

물론 미드웨이 이후 제3함대를 항공주병으로 개편하긴 하지만, 이는 제1함대와 제2함대는 전함주병인 상태 그대로 두고 제3함대로 제공권을 획득한다는, 전함주병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개편이다.[출처2] 제3함대를 제1함대의 보조적인 위치로 보았으므로 주력함대가 결전 전력이라는 명목으로 무위도식하는 동안 결과론적으론 실질적인 주력이기는 했으나 사령부가 제3함대를 주력으로 보았다는건 무리인 주장이다. 또한 전사총서의 평론으로 보아 이 시기에 항공주병으로 선회했다는 주장도 허구임을 알 수 있다.

결국 공식적으로 일본군 해군에서 전함이 주력의 자리에서 내려온 것은 1944년 2월 들어서야 제1함대가 해체되고 오자와 지사부로의 제1기동함대가 상설화되는 것으로 확인된다. 원래 나구모 주이치가 진주만~미드웨이까지 지휘한 제1항공함대는 상설조직이 아니라 항공전대 별로 각 함대에 배속되어 있다가 필요할 때만 조직되는 임시태스크포스 같은 형태로, 구축함 등 여타 보조함을 그때 그때마다 타 함대에서 빌려와야 했다. 진주만 공습부터 전쟁 내내 항공모함을 주력으로 싸우면서도 정작 그 주력군은 임시편제였던 것이다. 그리고 전세가 명백하게 기울어진 전쟁 막바지에야 현실을 인정하고 정식편제로 돌린다. 하지만 이렇게 만들어진 주력함대는 필리핀 해 해전으로 괴멸된다.

그리고 그 이후 시점인 레이테 만 해전 때조차 전함주병주의는 완전히 불식되지 못해 동귀어진을 각오한 결전에서 항모전력에 종지부가 찍히는 동안 전함부대는 함대 보존이라는 명목하에 터덜터덜 빈 손으로 돌아온다. 하단 지휘관 평가 대담의 쿠리타 타케오 편 참조. 레이테 만 해전이 사실상 일본군의 마지막 대규모 해전임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한심한 결말이었다. 싸움이 끝났는데 전함을 보존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결국 야마토는 "우린 이렇게 열심히 싸웠는데도 지고 말았습니다"라는 변명을 하기 위해 오키나와로 자살돌격을 감행한 끝에 개죽음을 당했고, 나가토는 미군의 전리품이 되어 핵실험으로 처분되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진주만 공습으로 항공모함의 위력을 증명한 장본인이 바로 일본이었다. 일본의 생각대로 함대결전사상을 추구하더라도 그걸 꼭 거함거포주의에 맞추어서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한 셈이다. 실제 전쟁에서 항공모함이 얼마나 중요했는지까지 따지게 된다면 거함거포주의가 일본 희대의 실책 중 하나로 인식되는 것이 당연하다.

더 심하게 나가면 주력이 피터지게 싸우는 사이 결전 전력이라는 전함이 무위도식하고 있었던 이유는 순전히 높으신 분들의 보신주의라는 해석마저 있다. [출처3] #1 #2 전함이 쓸모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전장에 나가지 않기 위해, 그리고 미드웨이의 대패 이후 상층부의 눈총에서 도망치기 위해 거함거포주의와 함대결전사상, 점감요격작전을 내세우면서 결전 전력이라는 명목으로 안전한 중간지점에 틀어박혔던 것. 전선에 나가지 않고 휘하 함대지휘관들의 자율성을 보장한 체스터 니미츠와 비교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랬다면 부대시설이 충분치 않은 트럭 정박지에 연합함대 기함 야마토를 배치할 이유가 없다.

4.2.2. 굴러라 항공모함

쇼카쿠급은 일본 항모세력의 중핵으로 전투력에서 당대 영국과 미국의 항공모함을 압도했다...(중략)...1940년에 배치된 미쓰비시(三菱) A6M ‘영식함상전투기(零式艦上戰鬪機, 제로)’는 당시 영국과 미국의 함재 전투기를 성능 면에서 압도했으며, 태평양 전쟁 초반 일본 해군항공력 우위의 중심이었다
- 전간기(戰間期) 영국, 미국, 일본의 항공모함 발전에 관한 비교분석. 박성용. 2011

일견 일본해군이 선진적인 항공전력 패러다임을 성공적으로 받아들인 것처럼 보이는 위 서술의 실상은 서전기의 기습효과 및 연합군이 태평양전선에 배치했던 기종이 2선급(F2A 버팔로)이었다는 점에 힘입은 것에 불과하다. 잘 쳐줘야 1선에서 슬슬 물러나는 단계의 전투기 상대로 우위를 점한 걸 자랑한 것이다. 미드웨이 해전 이후 미 해군, 육군이 모두 1선급 작전기를 투입하며 성능차이가 역전되고 개전시의 베테랑 탑승원의 소모와 맞물려 급속하게 소모율이 증가[출처4]했다는 지적을 간과한 독자연구에 불과하다. 당장 와일드캣과 제로센의 교환비만 1942년 5월부터 11월까지 111:129였다.[출처5]

또한 세계최초의 탈조약형 항공모함으로서 해당 논문이 높이 평가하는 쇼카쿠급은 동시기의 에식스급보다 비행갑판 면적이 좁은데다 함교 위치문제로 운용 편의성이 구형 아카기, 카가보다 뒤떨어져 아카기를 대체하는 제1항공함대 기함으로 삼으려던 계획도 취소, 항해 안정성도 아카기나 소류보다 떨어졌다. 악천후시의 요동이 아카기의 3배, 소류의 1.5~2배였다는 기록이 있다.

해당 논문은 영국 함재기의 발전 정체도 지적했으며 분명 비합리적인 시스템과 영국 공군과의 갈등으로 자체적인 함재기 개발에 지장을 받은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영국은 수입산 함재기를 도입하였기에 일본의 A6M이 도입된 시기와 영국에 그루먼 마틀렛이 도입된 시기는 1940년 7월로 동일하다. 이렇게 도입된 마틀렛이 함재기로 운용되는데는 시간이 좀 더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마틀렛의 첫 격추는 804 NAS에 의해서 1940년 12월 25일에 지상기지에서 발진한 기체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해당 링크에서 Loch Skail라고 적힌 장소는 Loch of Skaill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Orkney 섬의 지명이다. 이는 804 NAS가 Orkney 섬의 비행장에서 출격했다는 위키피디아의 설명과 잘 맞아떨어진다. 반면에 HMS 아크로열은 1941년 11월에 격침될때까지 마틀렛을 운용하지 않았다. 아크로열이 일러스트리어스급이 배치되기 전까지는 가장 신형 항공모함이고 마틀렛으로 풀머를 대체하려고 생각했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다소 의아한 부분이다.

그래도 일단 1941년까지는 호커 시 허리케인과 그루먼 마틀렛 같은 단엽단좌 전투기들과 복좌기인 페어리 풀머가 공존하는 형태였다. 극히 소수의 복엽기인 글로스터 글래디에이터(9월 기준으로 5기.)가 공존하고 있었지만 중요한것은 필요하다면 공군기를 개수한 물건과 수입 함재기까지 도입할 정도로 영국이 고성능 함재기를 도입하는데 적극적이었다는 사실이다. 좀 뒤의 이야기지만 F4U 콜세어를 처음으로 함상기로 운용한것도 영국 해군이었다. 그리고 복엽기로 따진다면 같은 시기 일본에서 41년 9월 준공된 최신형 상선개조항모 다이요는 함재기로 복엽기 D1A2 96식 함상폭격기를 운용했다.

아무튼, 항공모함의 성능이 뒤떨어진다고 해도 항공을 중시한다면 어떻게든 싸울 수는 있다. 항공모함의 핵심은 우수한 함재기와, 그걸 제대로 다루는 조종사 및 정비병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항공전력의 운용을 보면 항공을 중시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후진성이 드러난다. 육군이 중일전쟁을 치르며 항공대와 기지의 연계를 느슨하게 해 항공대가 기지를 옮겨다니며 작전할 수 있게 만든 일명 '공지분리제도'를 1937년에 전격 도입한 반면 해군에는 그런 개념조차 없어 미드웨이 해전에서 배는 멀쩡했던 즈이카쿠를 놀려두는 계기가 되었고, 해군이 비슷한 제도를 도입한 것은 1944년 3월, 실제 조직 개편은 마리아나의 패배 이후인 1944년 7월이었다.[출처4]

일본 육군은 중일전쟁을 치르며 비교적 이른 시기에 전투기 중점 체제를 확립했으며, 1943년 8월까지 벌어진 남태평양 방면의 항공 소모전을 겪은 후 육군은 전투기를 2.5배 가까이 늘리며 전투기:폭격기 비율을 3.5:1로 맞추었다. 그러나 해군은 중일전쟁은 물론 태평양 전쟁에서조차 치열한 항공 소모전을 치르면서도 전훈을 반영하지 않아 전투기 중점 체제로 전환한 것은 1945년 들어서였다. # # #번역 상기 연보 해당 부분의 작성자인 유라 후지오(당시 2좌, 간부학교 전사교관실)의 항공자위대 OB 홈페이지 기고문, 상기 연보의 요약본에 가까운 내용이다. 그때는 이미 항공모함에 실을 항공전력이 바닥난 지 오래였다.

해군의 항공주병론이라고 해봤자 함대결전의 보조전력으로서 폭격기무적론 수준에서 노는 후진적인 수준이었던 것이 실상. 확실한 제공권 확보가 뒷받침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공격 일변도 사상에 의한 공격기/폭격기 중시는 폭격기무적론의 한계를 상대적으로 빨리 실감하고 전투기 위주로 전력을 재정비한 육군보다도 후진적이었으며 성능은 부족하고 방어력도 부족한 폭격기성능은 부족하고 방어력도 부족한 전투기로 호위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고쳐지지 않았고 신형 전투기의 개발 및 양산조차 연합군은 고사하고 같은 일본 육군에게조차 뒤처진다. 육군이 Ki-61 히엔을 의욕적으로 도입하고 약 3,000여기를 생산, Ki-84 하야테를 1944년에 양산하기 시작해서 신뢰성은 문제가 많았지만 3,500여기를 생산한 반면 해군은 2,000마력급 고성능 전투기를 다 합쳐도 1,900기 남짓이며 그나마도 그중 1천기가 초기불량도 고치지 못하고 양산명령이 떨어진 N1K-J 시덴, 그나마 전투기와 요격기로 그럭저럭 성공적이었던 개량형 시덴 카이와 J2M 라이덴은 각각 4~500여기 남짓이 고작, 제로센의 후계기로 기대를 모았던 A7M 렛푸는 시대착오적인 ROC와 맞물리며 양산조차 되지 못한다. 반면 단순 계산으로도 같은 엔진을 쓰는 라이덴을 두 대 만들 수 있는 종이비행기 G4M 1식육공은 2,200여기나 생산되었다.

이로 인해서 연합군과의 항공전력의 격차는 더 벌어지게 되고 이는 항공요원의 피해를 증가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결국 이런 저질 항공기로 능력 이상의 무리한 공세를 펼친 결과 서전기의 우세를 뒷받침했던 숙련 항공탑승원의 괴멸을 불러왔다. 미드웨이 해전에서는 항공모함이 너무 갑작스럽게 당하는 바람에 싸울 기회가 있었던 히류를 제외한 3척의 파일럿 손실은 크지 않다. 본격적으로 숙련 파일럿이 갈려나가기 시작한 것은 그 이후 남태평양의 항공 소모전을 벌이며, 물론 이 와중에도 전함전력은 무위도식하고 있었다. 과달카날 전역 산타크루즈 해전을 기점으로 개전시의 숙련 탑승원은 사실상 소진되었고, 1943년 4월의 이(い)호 작전에서는 재건 중이던 3함대의 항모 항공대를 기지항공대로 투입해 소진시키는 악수까지 둔다. 해상 항법 및 항모 이착함을 익혀야 하기 때문에 항모 항공대는 기지항공대보다 육성에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단기결전만을 고려해 전력을 정비한 결과 장기 육성능력이 떨어지는 일본군 입장에서는 치명적이었다.

적이었던 니미츠의 평가가 압권으로, '1급 항모 탑승원의 큰 손실은 일본 항모부대의 전력을 이제까지 이상으로 크게 저하시켰다'라고...(니미츠의 태평양전쟁사 일본어판 162p) 당연히 오자와의 3함대는 이 방침에 반발했지만, 소위 항공주병론자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오자와를 직접 만나 양해라고 쓰고 강요라고 읽는다를 받아낸다.[출처6] 1943년 10~11월의 로(ろ)호 작전에서도 같은 일이 반복되고, 결국 1944년 2월 들어서야 체제를 정비할 수 있었던 항공전력의 숙련도 및 재건에도 엄청난 악영향을 끼쳐 그 결과가 칠면조 사냥. 그나마 배는 멀쩡하게 완성된 운류급 3척도 사실상 무용지물, 1944년 후반기부터 항공공격은 거의 대부분이 카미카제로 이루어졌다.

4.2.3. 혹사당한 공고급과 중순양함들

전함들이 놀고 있다고 해서 전쟁은 멈추지 않으므로, 그 자리를 메운 것은 함대결전에서 필요없다고 제외된 공고급 순양전함과 중순양함들이었다. 주간전은 항공모함이 전담한다고 해도 그를 호위할 배는 공고급 순양전함과 중순양함이니 바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야간전은 중순양함들이 핵심이었다. 일본군 경순양함들의 성능과 수량이 밑바닥이니 중순양함들의 부담은 더더욱 가중되었다.

우선 과달카날에서의 대규모 소모전의 시작인 사보섬 해전에서는 아오바를 비롯한 제 8함대 소속 중순양함들이 미 항모전단이 주둔하고 있는 과달카날로 쳐들어가서 제해권을 빼앗는, 이해하기 어려운 승리를 따냈다. 이걸 본 일본 항모전단과 전함들도 과달카날의 제해권을 지키기 위해 몰려왔는데.... 동부 솔로몬 해전에서 일본의 자랑인 전함 무츠가 너무 느려터져서 순양함들을 따라가지 못하고 낙오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결국 무츠는 구축함 3척의 호위하에 퇴각했고, 그 후로 자랑스런 전함들은 전장에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그 결과 과달카날에서의 대규모 소모전에서 제 8함대의 중순양함들은 갈려나가고, 함대결전인 과달카날 해전에는 공고급 순양전함인 히에이와 키리시마 같은 2선급 전함들, 8함대의 생존 중순양함들, 다른 데서 긁어온 중순양함들, 경순양함과 구축함으로 편성된 수뢰전대 등이 싸움의 주역이 되었다. 항모전단은 소모전에서 모든 항공전력을 소진해서 후퇴했지만, 미국도 1942년 9월, 10월에 잇달아 항모 2척(와스프와 호넷)을 손실한 데다 태평양에서 유일한 항공전력인 엔터프라이즈마저 피해를 받는 상황이었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진주만으로 돌아가서 수리를 받아야 했겠지만 과달카날을 뺏기느냐 마느냐 하는 상황에서 그런 거 없다.

오히려 궁지에 몰린 미군은 사우스다코타급 전함인 사우스다코타와 노스캐롤라이나급 전함인 워싱턴 같은 신형 고속전함들을 긁어모아서 과달카날로 돌격시켰다. 일본도 여기에 맞서 야마토급 전함이나 나가토급 전함 등의 제대로 된 전함을 파견했다면 수적 우위로 승기를 잡을 수 있었겠지만.... 안 왔다. 결국 일본군은 공고급 같은 2선급 전함과 중순양함으로 미군 전함에 맞서다가 비참하게 발렸고, 엔터프라이즈가 제 8함대와 수송선단을 갈아버리면서 궤멸했다. 함대결전이 벌어지는 데도 일본 전함들은 끝내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미국이 이때 신형 전함을 다 긁어모은 건 가용할 수 있는 전함 전력이 신형함밖에 없어서 그랬다는 아이러니도 작용한다. 태평양 함대 소속이었던 다른 전함들은 대부분 진주만에서 피해를 받아서 사용하기가 힘들었다. 전함 워싱턴의 경우에는 배치 초기에 대서양방면이었다가 1942년 8월에 태평양방면으로 소속이 바뀌었고 사우스다코타는 배치받자마자 진주만을 거쳐 과달카날로 내달렸다. 이 외에도 콜로라도급 전함 네임쉽 콜로라도는 퓨젯사운드에서 오버홀을 받느라 공습을 피해갔고 2번함 메릴랜드도 폭격을 얻어맞긴 했지만 치명적인 피해를 받지는 않았지만.... 콜로라도급은 너무 느려터져서 다른 배들을 따라갈 수가 없었으니 논외. 아무튼 미군 입장에서는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으니 총력전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미국이 총력전을 벌이고 일본군 중순양함들이 피터지게 싸우는데, 지원이랍시고 2선급 전함이나 내보낸 일본의 실책이 이걸로 가려지지는 않는다.

일본군이 모든 전함을 놀린 건 아니다. 공고급 순양전함은 무지하게 굴렸다. 야간 기지포격부터 수송선단 호위와 함대호위까지 다양하게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공고급이 결전전력에서 제외되어 실질적으로 전함취급받지 않게되어 그런 것 뿐이다. 다른 전함들은 대전 중후반에도 항구 배치 전환하는 함들 호위하는것 몇 번 빼고는 정말 한 게 없다. 속도 때문에 야간기지포격을 할 수 없다면, 그리고 제공권 때문에 공세적으로 나갈 수 없다면 공고급으로 한 것처럼 수송선단이라도 호위했어야 했다. 물론 호위항모로 하는 것에 비교할 수는 없지만 수상함억지책으로는 훌륭하며 태평양전선 초기의 영미가 그랬듯 신형 전함과 정규항모를 써서라도 보급에 만전을 기해야 했다. 쓰레기 수준이었던 일본호위항모의 성능을 감안하면 더더욱!

애초에 제공권이 없는 것도 상술한 대로 사전에 항공전력을 축차소모시킨 탓이 더 크다. 미드웨이 해전이나 과달카날 전역 당시 미군의 가용전력으로는 연합함대가 집결해 항공엄호를 받으며 진격해올 경우 대적이 불가능했다. 과달카날에서야 보급능력이 없었다지만 미드웨이에서는 엄청난 숫자의 전투함을 한꺼번에(분산되긴 했지만)투입 가능했고, 과달카날에서도 필요하다면 응당 그렇게 했어야 했다. 그러나 전함들이 항공모함의 수백 km 뒤에 있는 시점에서, 변명할 방법은 하나도 없다.

결과는 참혹했다. 과달카날에서 공고급 순양전함 히에이와 기리시마가 격침되었고, 과달카날의 야간전을 전담하던 제 8함대 소속 중순양함 후루타카, 카코, 키누가사가 침몰했다. 제 8함대의 기함 초카이 중파, 아오바 대파, 마야 중파까지. 엄청난 피해가 아닐 수 없었다. 이 정도면 창피해서라도 전함들이 일을 해야 하는데, 과달카날 이후에도 일본군은 전함을 뒤로 돌리고 공고급과 중순양함들만 마구 굴렸다. 일본 전함들이 싸운다고 나선 건 필리핀 해 해전이 되어서였지만 별 활약은 없었다.

결국 일본 본토와 동남아시아의 연결이 끊어지고 나라가 망하기 직전에서야 일본 전함들은 대거 출격했지만, 레이테 만 해전에서 굴욕적인 패배를 당했다. 구리다 함대의 주력이자 최강의 전함이신 야마토와 나가토는 미군 구축함 USS 히어만에게 쫓겨서 도망갔고, 하루나는 아무 것도 못했고, 공고는 미군 구축함들을 격침시키는 등 활약했지만 중순양함 초카이를 팀킬했다. 중순양함들은 미군에 맞서 싸우다가 대부분 침몰하거나 대파되었다. 구리다 함대에게 길을 열어주려고 미끼가 된 오자와 함대의 항모들도 격침당했다. 아오바가 기함을 맡은 16전대는 레이테 섬 돌입에 성공했지만, 구리다 함대의 비겁한 전함들은 16전대만 놔두고 도망갔다. 16전대는 미군에게 괴멸되었지만, 불침함 아오바는 기적적으로 살아서 탈출했다.

결국 레이테 만 해전이 끝난 후 살아서 일본에 돌아온 건 공고급 순양전함 하루나와 아오바급 중순양함 아오바, 그리고 공식적으로는 경순양함이라고 사기를 친 토네급 중순양함 토네밖에 없었다. 무능한 야마토와 나가토도 살아서 돌아왔지만, 그들에게 남은 것은 불명예 뿐이었다. 아오바가 세 번이나 대파되면서도 자기 임무를 완수하는 동안, (공고급 빼고) 전함들은 아무 것도 안 했으니까. 아오바 외의 중순양함들도 전쟁 내내 부지런히 뛰었음을 감안하면 변명의 여지는 더 없어진다. 그나마 못 싸운 건 팀킬로 유명한 모가미급 중순양함들, 그리고 일본 패배의 원흉이자 졸전과 전쟁범죄, 책임회피로 악명높은 토네급 중순양함 정도다.

억지로라도 변명을 해보자면 일본 전함들도 레이테 만 해전에서 싸우기는 했다. 구식인 후소급은 니시무라 함대의 주력으로서 최후까지 돌격하다가 침몰했고, 이세급은 오자와 함대 소속으로서 미끼 작전에 참가한 데다 생존함들을 보호하기라도 했다. 공고급은 전쟁 내내 부지런히 뛰었으니까 논외다. 그러나 무사시는 자기 주포로 자기 대공포좌를 날려버리는 굉장한 모습을 보이며 침몰했고, 야마토와 나가토는 줄행랑친 게 전부다.

결국 전함들은 구레 군항 공습에서 굴욕을 겪게 된다. 전함 이세와 하루나는 부포와 대공포를 몰수당했기에 대공용으로는 무익한 3식탄을 쏘는 것 밖에 못했고, 그나마 대공포가 있는 카츠라기와 키타카미도 별 도움이 안 되었다. 결국 대공포대로 기능하는 아오바만이 혼자서 미군에 맞서 싸워야 했다. 문자 그대로 최종 보스가 된 것이다. 전함도 항공모함도 아닌 중순양함이! 이것만으로도 굴욕인데, 착저된 이세와 하루나는 대파착저한 데다 미 해군의 공습으로 불타는 아오바를 향해 미 육군항공대가 몰려가는 꼴을 봐야 했다. 착저한 전함은 침몰이고 착저한데다 불타는 중순양함은 최종 보스라는 치욕적인 현실 앞에서, 전함들이 할 수 있는 건 아오바가 최후까지 싸우다가 선체가 절단되고, 선 채로 죽음을 맞는 것을 지켜보는 것 뿐이었다. 이러고도 일본은 하루나가 미 육군항공대의 폭격기를 격추시켰다고 주장함으로써, 마지막까지 추한 꼴을 보였다.

마지막으로, 아오바가 최종 보스가 된 건 거함거포주의에 엿을 먹이는 행위였다. 이세, 하루나, 아오바 중에서 아오바가 가장 작았기 때문이다. 전쟁터에서 중요한 건 배의 크기가 아니라, 그 배가 얼마나 일을 잘하느냐는 것임을 보여준 셈이다.

4.2.4. 점감요격작전의 폐해

일본군 전함 전력 운용에서 드러난,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실책의 근거가 될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항모 항공전력 및 야습뇌격에 특화된 순양함-함대형 구축함으로 이루어진 수뢰전대함대결전의 전초전으로서 소모시켜도 좋다고 여긴 점감요격작전. 거함거포주의가 득세하던 30년대에도 항공기술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었고 이는 일본도 인지하고 있었지만[12] 사실상 일본 근해에서의 방위전 이외의 상황을 아예 상정하지 않은 점감요격작전을 신주단지처럼 붙들고 있었다.

점감요격작전은 원래 적 주력함대를 본토 근해까지 끌어들여 요격하는 방위전략이므로 설령 항모전력을 적 침공함대 점감을 위해 소모시켰더라도 그만큼의 항공력이 소모된 적 함대를 상대로 본토 항공대의 원호를 받으며 결전을 시도할 수 있지만, 2차대전에서 일본이 실제 벌인 침략전쟁에서 실제 일본 해군이 저지른 것처럼 점감요격작전식으로 항모전력을 먼저 던져버리면 전함을 투입해야 할 때 항공엄호를 제공할 수 없게 되는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전함을 상대하려면 비슷한 크기의 전함을 동원하는 방법밖에 없었던 거함거포주의의 전성기에도 전함을 운용하려면 구축함 등의 호위전력은 반드시 필요했다. 호위전력이 없을 경우 소형함의 어뢰공격을 효과적으로 막기 어렵기 때문,

타국이 구축함 전력을 호위, 대공, 대잠 위주로 갖추는 동안 함대결전 상정해 적 함대에 돌격해 뇌격을 하는 데 최적화된 구축함 전력을 갖춘 일본조차도 최소 1개 수뢰전대 정도는 전함의 호위를 맡았고 심지어 야마토를 내다버리다시피한 키쿠스이 특공 때도 2수뢰전대가 동행했는데 정작 그 키쿠스이 특공을 포함해 대전기간 내내 주력함에 항공엄호를 제공할 생각이 아예 없어보이는 것이 일본 해군의 모습. 사실은 항공모함 준요가 야마토와 동행하려고 했지만 기관부 수리가 끝나지 않았기에 동반자살을 면했다.

항공전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고 전함주병에서 항공주병으로 전환한 것이 맞다면 오자와 지사부로가 전함을 항모의 보조로 돌린 것처럼 연합함대/1함대 사령부가 전함전력을 쥐고 있을 필요가 없고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2수뢰전대가 돌격대를 맡는 동안 1수뢰전대가 전함의 호위를 맡은 것과 마찬가지로 최소 1개 항공전대 정도는 주력함대 상공직엄 역할로 남겨 필요할 때 전함을 투입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상술한 방위성 전사연구연보 15호는 함대결전을 위해 준비된 항공전력은 그런 역할을 하지 못하고 미 기동부대에 점감요격을 당하듯 각개격파당했다고 지적하며, 대전기 일해군 최고의 포술 권위자로 꼽히는 마유즈미 하루오[13] 같은 대표적 거함거포주의자조차 전전의 상정대로 함대결전을 시도해야 했다고 저서에서 언급한다. 높으신 분들의 보신주의는 거함거포주의에조차 악영향만 남긴 셈. 결국 그런 상황이 되면 전함 전력은 투입할 수조차 없으니 아예 전진배치시킬 필요도 없었던 셈이다.

4.2.5. 비겁한 변명들

NHK가 2001년 다큐멘터리로 다룰 만큼# 일본 해군의 거함거포주의는 이미 일본 내부에서도 통설로 굳어져 있으며 해당 다큐는 진주만의 성공 이후로도 거함거포주의를 버리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일본 내에서도 변명이 없는 것은 아니라 '대함거포주의'라는 환상 문제는 거함거포주의나 함대결전사상, 점감요격작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의 문제로 상정대로만 일을 진행시키려는 자세와 미국에게 싸움을 건 것 자체[출처7]부정확한 근거에 기반하는 이데올로기적 비판에 불과[출처8] 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변명조차 이미 허구성이 지적된 영국, 미국과의 비율 차이[16]및 속도나 연료 수준에 머물 뿐이고, 항모 중시는 계획뿐이고 실천은 미흡했다는 전사총서의 지적, 항공전력 운용 자체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유라 후지오의 지적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설명을 내놓지 못한다. 상기한 모리 마사오 준교수의 논문은 야마토가 미국이 전함을 투입한 전장에 투입될 수 없었던 이유는 연합함대 사령부로 쓰이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전함 6척 장갑순양함 6척이 연합함대의 전 전력이던 러일전쟁 시기 연합함대 사령장관은 선두에 서는 순수한 전술지휘관이었지만, 해군의 규모가 커지면서 관료제화가 진행되고 군령부총장과 GF사령장관의 임무가 중복된 것이 문제일지언정 그것은 거함거포주의와는 상관없다는 주장인데 그럼 왜 실전엔 나가지도 않는 컨트롤 타워[17]인 연합함대 사령부가 1941년 12월 막 준공된 최신예 전함 야마토를 자신들의 기함으로 삼았는가? 야마토는 호텔로 쓰기 위해 만들어진 전함인가? 굳이 찾아본다면 과달카날 전역에서 미 해군의 전함이 배치되었다는 정보를 들은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전함으로 공세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반대가 많자 자기가 직접 야마토를 타고가서 포격하겠다고 노발대발했다는 일화는 있다. 그러나 실제로 투입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이 인간이 입으로만 떠드는 경우가 워낙 많다보니 정말로 전함으로 밀어붙일 생각이었는지는 의문.

실전에 나가지 않고 컨트롤 타워 역할만 한 사례는 주적이었던 미 태평양 함대와 그 수장 니미츠도 비슷했지만, 물론 실전에 나서지 않는 태평양 함대 사령부가 최신예 전함이나 항모를 실전부대에 돌리지 않고 자신들의 호텔로 써먹지는 않았다. 아카기를 기함으로 삼은 일 1항공함대 사령장관 나구모 주이치, 다이호와 즈이카쿠를 기함으로 삼은 일 1기동함대 사령장관 오자와 지사부로, 미주리를 기함으로 삼은 미 3함대 사령관 윌리엄 홀시 등의 위치는 후방의 컨트롤 타워가 아닌 그 밑의 일선 함대 현장지휘관이었고, 이들과 거의 동격인 미 5함대 사령관 레이몬드 스프루언스제독은 중순양함 인디애나폴리스를 기함으로 사용했었다.

실전에 나가지 않는 컨트롤 타워라면 설령 이동 사령부가 필요하다고 해도 카토리급 연습순양함같은 물건이면 충분하고, 주력 전함전대 제1함대 사령장관을 GF사령장관이 겸임하고 최신예 전함을 준공 직후 기함으로 삼은 연합함대의 편제는 점감요격작전에 기반한 거함거포 함대결전이 벌어질 경우 이를 진두지휘하기 위한 체제로밖에 볼 수 없으며 이런 체제는 1944년 2월까지 계속되었다.

거기다 덤으로 미일의 국력차를 그나마 이해하고는 있었고 함대결전사상과 점감요격작전의 한계 역시 주장했다는 지미파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미드웨이 이전까지는 계속 본토에 남아 있다가 미드웨이의 대패로 입지가 위험해지자 트럭 정박지로 연합함대를 이동시킨다. 하다못해 1년 전까지 연합함대 기함이었던 나가토로 다시 기함을 옮기고 공방성능과 속도가 우위인 야마토를 실전에 투입할 수도 있었는데도 전함전력은 그저 보존, 후소급과 이세급은 어중간한 항공전함 개장.

일본 해군이 거함거포주의와 함대결전사상 및 점감요격작전, 덤으로 상층부의 보신주의에 젖어 있지 않았다면 그런 이유가 과연 통용될 수 있었을까? 공고급을 필요한 임무에 투입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일본 해군에서? 상기 논문은 개전 전 연합함대 사령부와 제1함대 사령부를 분리하는 것을 항공파 오자와 지사부로가 반대했다는 사례를 들고 있지만 정작 그 오자와는 개전 후 1기동함대 사령장관 때 전함 야마토, 무사시, 나가토를 항모의 탱커로 세웠다. 1944년 2월 1함대 해대, 1기동함대 창설 전까지 전함을 결전 이외의 임무로 돌린 사례가 과연 존재하는가? 부유식 연료탱크랑 호텔로만 쓸 것이라면 그렇게 많은 돈과 시간과 자재를 들어가면서 만들 필요가 없다.

다만 이것이 미드웨이 해전에서 항공모함들과 귀중한 정비원들을 날려버렸기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다. 그 당시 일본 제국 또한 항공모함을 쉽사리 건조해 손실을 메꿀만한 여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미드웨이에서 일본이 상실한 항모와 인력은 1,2 항공전대였는데 대부분이 오랜기간 훈련하고 연습해온 숙련자들이었다. 해군이든 공군이든 한번 대량으로 잃으면 쉽게 메꿀수 있는 전력이 아니다. 특히 거함거포주의에 기반하여 만들어진 전함들은 건조에만 몇년이 걸리는 수준이고 그를 운용하는 승무원들도 마찬가지이다. 조종사들과 관련 기술자들도 다를 바 없다. 보통 일본군의 초기 주력 항공모함들이 전함이나 순양전함으로 만들어지던 배들을 개수한 것들이라는 사실을 참고해 보자.

그러나 미드웨이에서 항공모함들이 박살난 이유 중 하나는 일본 전함들이 놀았기 때문이다. 연약한 항공모함은 전열 선두에 서 있고, 단단한 전함들은 수백 km는 떨어진 후방에 있었다. 미군은 박살난 요크타운을 응급수리만 한 후 미드웨이에 보낼 정도로 처절하게 노력했는데, 일본 전함들은 다들 뒤에서 항모전단이 박살나는 걸 구경이나 했다. 그런 전함들을 어떻게 변호해 줄 수 있겠는가.

도고 헤이하치로의 승리 이래 연합함대지휘관 선두라는 전통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타사파롱가 해전 당시 지휘관 다나카 라이조는 미국에서는 평가가 높은 반면 대승리를 거두고도 수송작전에 실패한 것과 기함을 선두가 아닌 중앙에 두었다는 이유로 비난받았다. 하단의 지휘관 평가 고위사관 대담에서도 용감하지 못하다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런 자들이 전함은 항모의 수 백 km 뒤에 세워뒀다.

그러나 지휘부 괴멸로 인한 혼란을 문제삼아 선두에 설 필요까지는 없다 해도 실전부대의 톱이라는 연합함대 사령장관이 실전에 아예 참여하지 않아 일본군 특유의 관료제에서 기인하는 지휘계통의 난맥으로 사령부의 의도가 일선부대에 제대로 전달되지 못해 작전이 실패하는 문제가 계속 된다. 전함보다 전략적 가치가 높은 항공모함과 항만 시설을 파괴해야 한다는 의도가 현장 지휘관인 나구모에게 전해지지 못한 진주만 공습부터, 수송로 방어를 위한 미 육군 수송선단 공격이 최우선사항이었다는 연합함대 사령부의 의도를 함대결전이라는 고정관념에 틀어박힌 쿠리타 타케오 이하 2함대 1유격부대에 납득시키지 못하고 애매하게 '전투함 격파 우선'을 허락한 레이테 만 해전까지 계속 이어졌고, 이런 문제의 시작이 주력함대에는 소모전을 강요한 채 자신은 쓸모도 없다는 전함에 틀어박혀 후방에서 노닥거리기만 한 소위 항공주병론자 야마모토 이소로쿠라는 것. 참고: 역사와 인물 쇼와 56년 5월호 '태평양전쟁 중 일본해군 지휘관을 평가한다' # #번역

그리고 높으신 분들이 몸을 사리는 와중에 써먹을 곳도 없을 전함군을 트럭 정박지 등지로 전진배치하는 바람에 안 그래도 부족한 연료와 물자는 문자 그대로 시궁창에 버려진다.#1#2 링크한 블로그는 야마모토 이소로쿠 이하 연합함대 사령부가 항공모함의 상실을 두려워했다고 보고 있지만, 실상은 그 이상으로 엉망이라 '아부라가 나인다!' 발언의 무대인 1942년 12월경이면 과달카날 전역 소모전은 이미 결판이 난 시기로 점감요격작전에 가까운 축차투입의 결과 역으로 일본군이 점감요격을 당하는 꼴이 되어 류조 격침, 쇼카쿠 대파, 즈이호 중파, 히요 기관수리, 즈이카쿠와 준요 함재기 고갈로 항모전력은 진작 그로기 상태에 빠진 뒤 기지항공대와 수뢰전대를 축차투입하는 마당이었다. 야간전을 맡은 제 8함대의 중순양함들은 기함 초카이 중파, 아오바 대파, 후루타카/카코/키누가사 침몰로 전멸에 가깝게 박살났다. 이런 데도 높으신 분들은 자신들이 직접 끌고 나가야 하는 전함을 투입할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결과론적으로 보면#3 더 가관인데, 항공전력을 축차소모한 후 제공권을 상실한 해역에 전함을 투입하는 것이야 당연히 불가능하지만 당시 트럭 정박지의 저유능력과 연합함대가 동원 가능한 유조선 숫자로는 항공엄호를 받는 전함을 진격시켜 함포사격을 하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그나마 전력을 계속 굴리면서 계속해서 자기보다 약한 적을 제거하는 식의 공격적인 함대결전사상이라면 일본군 전함이 호텔로 불리지는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단기 함대결전만을 상정해 극한까지 추구한 거함거포와 그 댓가로 남게 된 부족한 군수지원능력은 전쟁 기간 내내 일본 해군의 발목을 잡았다.

사실은 그런 걸 따지기 전에 일본 전함들은 무지하게 약했다. 구축함한테 쫓겨 달아난 야마토와 나가토, 너무 느려터져서 함대에서 낙오된 무츠, 자기 주포로 자기 대공포좌를 박살낸 무사시를 보면 함대결전이 진짜로 벌어졌다 한들 제대로 싸울 것 같지도 않다.

5. 전함들의 운명

파일:attachment/야마토급 전함/Yamato_explosion_00001.jpg
지상 최대의 전함 야마토의 침몰. 거함거포주의를 완전하게 끝장내버린 상징적인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117대의 항공기에게 폭격뇌격을 받았으며, 그 중 좌현 선수에 어뢰를 맞아 침수가 된 게 침몰의 핵심적인 원인이였다.]
왼쪽의 배는 아키즈키급 구축함 후유츠키 함.

정작 전함들은 전쟁에서는 별로 한 일이 없고 서로를 견제하는 것이 주된 역할이었다. 해전은 란체스터 법칙이 잘 통하는지라 조금이라도 전력이 약한 쪽이 큰 피해를 보기 십상이기에, 어떻게든 상대방을 분산시키고 아군을 집중하여 타격하려 하지만 서로 생각하는 게 똑같으니 눈치만 보면서 대치를 지속하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전함들을 모조리 끌어모아 대해전이 벌어지는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고, 보통은 서로를 견제하기 위한 작전에서 우연히 만나 난타전을 벌이거나 어쩌다 고립된 전함을 상대방이 놓치지 않고 우르르 몰려가 두들겨팬 경우가 흔하다.

그 예시로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최대의 해전이었던 유틀란트 해전에서도 동원된 함선 숫자에 비해 실제 피해는 별로 없었다. 독일 해군이 유틀란트에 나선 것부터가 영국의 순양전함 전대를 유인해 격파하는 것이 목적이었고, 영국은 암호해독을 통해 이 계획을 알아내고 독일 주력함대를 역으로 격파하려 시도하였기에 영국 주력함대의 출현을 뒤늦게 알아차린 대양함대가 전투를 회피하고 필사적으로 도망친 것이 결말이다. 상세한 내용은 항목참조.

영국의 리벤지급 전함들의 경우 도저히 주력함대에 써먹을 상태가 아니었지만 수송선단 호위용도 등으로 쏠쏠히 써먹었다. 그리고 신형전함들도 아낌없이 투입해서 킹 조지 5세급 전함 듀크 오브 요크는 수송선단 호위임무 와중에 수송선단을 습격하려던 독일 해적선 전함 샤른호르스트를 노스 케이프 해전에서 격침시키는 활약을 하기도 했다.

독일이 건조한 비스마르크급 전함 비스마르크는 2차대전이 개전하기 이전까지 최강의 전함으로서 많은 관심을 모았고, 첫 실전에서 영국 해군의 아이콘이었던 어드미럴급 순양전함 HMS 후드를 한방에 격침시키는 화려한 데뷔전을 치른다. 단 이것은 비스마르크로서는 엄청난 럭키 샷이었고 후드로서는 엄청나게 운이 없었던 것이다. 하필 후드의 주포탄 탄약고까지 뚫고 들어가 폭발하는 바람에 후드의 주포탄들까지 유폭되어 두동강 난것. 이런 내부 유폭이 아니라면 전함의 주포탄 한방으로 전함을 격침시킬순 없다. 그러나 교전중에 발생한 피탄에 의한 타격 + 영국 항모의 공격에 의해 기동성이 저하되었고, 결국 더 우세한 영국 전함분대와 조우하여 격침당했다. 유럽전장은 전투가 주로 일어난 북해, 지중해 해역이 좁았고 교전국들도 상대적으로 항모 세력이 약했기 때문에 전함 대 전함 전투가 거의 일어나지 않은 태평양에 비해 전함의 활약이 좀 더 두드러진다. 독일의 전함 네임쉽인 비스마르크, 샤른호르스트들은 전부다 전함간의 포격전을 통해서 그 생을 마감했다.

일본이 사랑했던 야마토급 전함은 8척이 계획되었으나 전함으로 2척, 항공모함으로 1척만이 만들어졌다. 건조중에 취소된 물건으로는 4번함도 있었다. 이름은 111호이고, 1940년 11월 7일에 기공을 했다. 하지만 계속되는 전투에서 전함을 손실하고, 결정적으로 미드웨이 해전으로 정규항모 4척(아카기, 소류, 카가, 히류)을 시원하게 말아먹어서 110호(시나노)와 마찬가지로 항공모함으로 개조가 결정되었다. 하지만 시나노의 개조비용이 예상외로 높아지자 항모의 개조를 포기하고 해체 하자는 의견도 나올 정도였다.

무사히 건조된 야마토급 3척도 암울하기는 마찬가지. 2번함 무사시는 1944년 10월 24일 레이테 만 해전에서 미해군 항공기들에게 두들겨 맞고 침몰, 3번함 시나노는 결국 항공모함으로 개장하였으나 건선거에 폭탄이 떨어지는 등의 이유로 인해 모항을 옮기기 위해 마감을 남기고 처녀항해에 나섰다가 1944년 11월 28일 미군 잠수함의 뇌격을 받아 잠수함에 의해 격침된 가장 큰 전투용 함선이라는 기록을 남기는 수모를 겪으며 격침, 1번함 야마토는 오키나와 전투를 위한 고정포대용으로 편도 연료만 싣고 오키나와를 향해 특공작전을 벌여 항해하다가 이마저도 못 해보고 1945년 4월 7일 약 250대의 항공기들에게 다굴을 맞고 반으로 쪼개졌다. 이런 꼴이 될 때까지 이들이 격침시킨 적함은 한 척도 없었다. 1944년 가을의 레이테 만 해전에서 야마토가 이끄는 일본 전함 함대가 미국 호위항모 함대를 공격하여 미국 호위항모 갬비어 베이가 격침된 일은 있는데, 워낙 여러 전함들이 포격을 했기 때문에 어떤 함의 포탄이 갬비어 베이를 격침시켰는지는 미지수. 일본에서는 예전에는 야마토의 포탄이라고 하여 야마토의 격침 전과로 넣었지만, 최근에는 구식 전함 공고의 포탄이었다는 설이 더 유력하다. 전투에 직접 참가해서 대포를 쏜 횟수 자체도 별로 많지 않은 것도 문제인 데다, 이 해전에서 야마토가 미군 구축함 USS 히어만에게 패배하고 도망치는 바람에 작전을 몽땅 말아먹었다. 체급 차이를 보면 절대로 일어나선 안 되는 굴욕적인 패주였다.

의외로 가장 마지막까지 전함을 사용한 국가는 미국. 1990년대까지 16인치(406mm) 주포를 실은 전함을 취역과 퇴역을 반복시키면서 현역 해군함정으로 운용했다. 미국이 해외 전쟁을 많이 하고, 전쟁 시작과 함께 적국의 첫 목표에 포격부터 퍼붓는 교리상 해상포격지원용으로 잘 써먹었고, 엑조세 쇼크이후부터는 바로 2차 대전 막바지에 건조한 아이오와급 전함에 토마호크 순항미사일 발사기를 달아서 '장거리 해상타격무기의 플랫폼' 개념으로 사용하는 등의 활용법을 보였으나 수천명의 숙련된 승무원이 필요하다는 것처럼 막대한 운영비에 비해 그다지 효용성이 없어서 현재는 모두 영구 퇴역했다. 2번함인 뉴 저지는 현재 해상박물관이 되어 있고, 3번함인 미주리는 일본의 항복문서 조인식이 열렸으며 역시 박물관 용도로 쓰이는 중이다. 4번함 위스콘신은 2009년 박물관함으로 쓰이기 위해 노포크시에 기증된 상태이다. 마지막으로 1번함인 아이오와가 박물관함으로 쓰기 위해 2011년 미해군에서 LA PACIFIC BATTLESHIP CENTER에 기증되면서 모든 전함은 완전히 퇴역했다. 참고로 박물관이나 공원으로 쓰이는 중인 전함은 아이오와급 말고도 노스 캐롤라이나급의 노스 캐롤라이나, 뉴욕급 텍사스, 사우스 다코타급 3번함 매사추세츠와 4번함 앨라배마가 있다. 사족으로 영화 언더 시즈에 나온 전함은 아이오와급 전함 미주리가 아닌 사우스다코타급 앨라배마. 물론 영화상에는 미주리라고 나온다. 영화 촬영 당시에는 미주리가 아직 현역이었다.

해병대에서는 아이오와의 16인치 주포가 발휘하는 맹렬한 포격 능력이 상륙작전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전함의 퇴출을 매우 아쉬워했다는 소문이 있다. 실제로 아이오와급이 현대화 개장을 거쳐 해군에 복귀하는데 가장 큰 힘을 실어주었던 게 미 해병대라고.

가까운 미래에 레일건전열화학포가 함포로 상용화되면 항공기와 미사일을 능가하는 사정거리와 지속화력, 격추 불가능성, 바이탈 파트 축소 등의 장점으로 인해 거함거포주의가 다시 도래할 수도 있다는 설도 있다. 이에 대해선 해당 항목들 참고.

2017년 9월 26일, 1953년 취역해 지금까지 현역이었던 페루의 알미란테 그라우급 순양함이 퇴역하면서 거함거포주의는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해당 순양함은 보포스 152mm 53구경장 2연장 함포 4문을 무장한 함선이었다.

6. 거함거포주의에 관련된 몇가지 에피소드

당대 최강을 자랑했던 영국해군은 단연 드레드노트급 전함 건조에 있어서도 선구자였으나, 역설적이게도 드레드노트급 전함의 등장으로 최강의 자리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드레드노트 이전의 전함들로 군비경쟁을 하기에는 영국이 워낙에 많이 보유하고 있어 어렵지만 드레드노트급 신형전함들이라면 영국도 몇척없으니 경쟁이 가능했고, 실제로 독일제국이 '해군법'을 제정하여 급격한 해군 군비확장에 나서면서 영국과 치킨런 건함경쟁이 벌어졌다. 이러한 건함경쟁으로 인해 영국 재정은 엄청난 타격을 받았고 이는 대영제국의 붕괴 이유 중 한가지가 되었다.

거함거포주의의 황혼기이자 끝이었던 2차대전 당시 전함이 정규항공모함을 포격으로 침몰시킨 기록이 있다. 샤른호르스트 참고.

일본은 야마토와 같은 전함을 더 선호했다. 일본의 해군사관학교만 봐도 비행관련으로 가는 장교는 연공서열이나 사관학교성적등의 이유로 인해 전함의 포술과 같은 1급전투보직으로 갈 수 없었기 때문에 전투보직으로 가기 위해 다른 길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고 차선책으로 비행관련을 택한 경우가 많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거함거포주의를 쇠퇴시킨 것은 일본군 본인이었다. 태평양 전쟁 초반의 말레이 해전에서 일본군은 전함이 아닌 항공 전력만을 동원해 영국 해군을 박살냈다. 이는 영국 해군 역사상 최악의 대참패였으며 해전의 주도권을 항공기가 쥐기 시작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이 전투에서의 교훈을 제대로 얻지 못한 채 스스로가 사형 선고를 내린 이 구식 전술에 의존하다 처참히 털리고 말았다.


[1] 시점 미상.[2] 2번함 히에이는 원래 정리대상이었지만 1차 런던 조약의 결과 연습함으로 살아남고 이후 다시 실전사양으로 개장되어 참전한다.[출처1] 군함의 역사, James L. George, p320[4] 전함 + 순양전함 + 항공전함[출처2] 戦史叢書95海軍航空概史269-270頁[출처2] 戦史叢書95海軍航空概史269-270頁[출처3] 御田俊一『帝国海軍はなぜ敗れたか』[출처4] 일본 방위성 전사연구연보 15호[출처5] Edward Young, "F4F Wildcat vs A6M Zero-sen: Pacific Theater 1942[출처4] 일본 방위성 전사연구연보 15호[출처6] 『戦史叢書39 大本営海軍部・連合艦隊4 第三段作戦前期』 118p[12] 훗날 제로센으로 완성되는 '쇼와 11년도 항공기종 성능표준' 및 '12시 함상전투기 계획요구서'에서는 항모 함재기에 의한 함대 방공을 명시하고 있다.[13] 아키츠시마 함장을 역임했으며, 중순양함 토네의 함장을 맡았을 때는 일본 최후의 인도양 통상파괴전을 말아먹더니 베허호 사건을 일으켜 민간인들을 대량 학살했고, 사마르 해전에서는 미군 구축함 USS 히어만에게 패배하는 추태를 보였으며, 전후 베허호 사건으로 재판을 받았지만 놀라운 입놀림으로 책임을 회피, 4년만 복역하고 석방되어 잘 먹고 잘 살았다.[출처7] 澄川浩「日本海軍と大艦巨砲主義」,『朋友』26巻4号, 2000年[출처8] 森雅雄「イデオロギーとしての「大艦巨砲主義批判」」,『城西国際大学紀要』第21巻 第3号 国際人文学部,2012年[16] 상술한 NHK의 다큐멘터리도 카사블랑카급 50척을 포함시킨다.[17] 상술한 대로 컨트롤 타워 역할도 제대로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