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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7 07:55:20

병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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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병영식(, ration)은 군대에서 배급하는 식사를 가리킨다. 대개 일반식을 가리키며, 전투식량(combat ration)은 별도로 인식된다. 대부분 조리 또한 부대 내에서 직접 하며, 이를 전담하는 병 신분의 군인을 조리병이라고 한다.

과거에는 병식(兵食)이라고도 했으나, 한국군의 경우 이라는 용어가 사병(enlisted) 가운데서도 부사관(Non Commissioned Officer, Petty Officer)이 아닌 사람을 가리키는 용법으로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2009년부터 병영식이라는 용어가 국방부 공식 군 용어로 채택되었다. 짬밥이란 속어로도 불린다.

2. 중요성

영화나 드라마 같은 걸 보면 전쟁터의 군인들이 성욕에 굶주려 있는 것처럼 묘사해 놓는 경우가 많다. 규율이 잡히지 않은 군대가 강간을 포함한 대민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 참전 용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성욕보다는 밥 생각이 무엇보다 우선이었고, 배를 든든히 채운 뒤에야 비로소 성욕이 생겼다고 한다. 생각을 해보면 간단하지만, 당연히 생존에 필수적인 욕구가 먼저 충족되어야만 다른 욕구도 생기는 법이다.

전쟁 때 보급이나 먹거리 잘 챙겨 먹은 군대로 유명한 미군에서도 한국전쟁 때 처음 북한 지역으로 진격하면서 보급 문제[1]를 겪은 일이 있는데, 이때 참전용사[2]의 증언에 따르면 하루에 소대원들끼리 통조림 하나를 나눠 먹는 게 다였고. 그렇다 보니 틈만 나면 먹는 거 생각하고, 동료들끼리 집밥 먹은 거 틈만 나면 이야기 하고, 밤에 꿈을 꿔도 먹는 꿈을 꿨다고 한다. 오죽하면 생각도 못한 개고기를 먹고는 평생 기억에 남을 정도로 맛있었다고 회고할 정도.[3]

전장에서 군인들에게 제공되는 식사는 전쟁터에서 몇 안 되는 즐거움을 줄 수 있기도 하다. 목숨 걸고 굴렀더니 아침 점심 저녁으로 별사탕도 안 들어간 건빵을 주면 기분이 좋진 않을 것이다. 역사를 돌이켜 보더라도 장병들을 장기간 굶기거나 맛없는 음식만 먹일 때는 아무리 강력하게 통제하려 해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상관 살해, 항복, 약탈, 탈영, 반란 등 각종 대형사고가 터졌고, 반대로 병사들에게 술과 고기를 줘서 사기를 올렸다는 기록은 복붙한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자주 나온다. 먹는 즐거움은 예로부터 인간의 원초적인 스트레스 해소방식인 것이다.

이렇듯이, 배불리 먹이지 못하면 매일 약 4,000kcal를 소모하는 군인들의 체력을 보충할 수 없고, 맛있는 밥을 먹지 못하면 군인들의 사기가 극도로 저하되고, PTSD 등의 전투피로를 회복할 수 없어 정신적인 건강상태마저 나빠진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소모된 부대는 전투력도 약해질 뿐더러 같은 명령을 받아도 제대로 통제되지 않을 위험이 있다. 북한군에서 군인을 굶겼다가 별의별 막장 사고가 연달아 터지는 것만 봐도 군대에서 식사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다.

3. 병영식의 역사

3.1. 고대(기원전~6세기)

스파르타에선 평민이건 왕이건 다 같이[4] 공동식당에서 보리로 만든 딱딱한 빵에 선지를 넣은 고기잡탕같은 검은 국, 물 탄 포도주와 약간의 치즈와 말린 무화과 정도를 먹었다.
이들 중 '검은 국'은 주로 돼지앞다리살, 뒷다리살 같은 퍽퍽한 고기에 선지를 섞고 식초로 맛을 냈는데,[5] 아테네인이 "이런 건 아테네의 돼지도 먹지 않는다."며 까자, 스파르타인은 "이런 걸 먹으면 아테네의 돼지도 스파르타인과 같은 용사가 될 수 있다."며 정신승리를 했다. 이건 고대부터 짬밥은 맛없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일화이다. 다만 검은선지고깃국은 평시상황에서 병영에 있을 때나 먹인 거고, 전시상황에선 현지에서 사냥을 하든 거기까지 끌고 간 가축을 잡든지 해서 신선한 고기를 먹었다. 이외에도 스파르타 시민은 국가에 빵, 치즈, 무화과, 포도 같은 것을 바칠 의무가 있었는데, 스파르타가 무역을 중시하던 나라가 아니었으므로 이건 당연히 군대를 먹이기 위해 걷은 것이다. 그러니까 언제나 저런 똥국을 먹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식사 및 전투조인 피디티온의 구성원들이 매월 1인당 정해진 양을 납부하는데 미납부시 해당 조원은 시민권을 박탈해버렸다.[6]

로마군은 밀가루로 끓인 폴렌타[7]를 주식으로 먹었는데, 보리의 경우 흔히 말 먹이로 쓰이던 것으로 보리를 식량으로 배급받는건 일종의 처벌이었다. 빵은 하루에 800~1000g 정도로 배급되었는데, 이때 배급된 빵은 단단한 건빵으로, 보존성과 휴대성이 높았다.[8] 이런 건빵을 와인이나 우유에 적셔서 먹었다. 그 밖에 포도호두, 무화과, 올리브 등을 군영 주변에 심었고, 당근, 렌즈콩, 셀러리, , 복숭아 등의 채소나 과일도 먹었다. 대부분 가공해서 보존 기간을 늘릴 수 있는 식재들인데, 실제로 건포도나 건과류, 말린 무화과는 행군 할 때 주로 먹는 전투식량의 역할을 하는 음식이었다. 행군할 때는 불을 사용한 음식을 금지했는데, 이는 적군에게 위치를 들통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여유가 있을 때는 10명 분대 단위로 재료를 모아 단체로 조리하여 먹었다.[9] 수에토니우스하드리아누스 황제가 트라야누스 아래에서 군 생활을 할 때 베이컨 지방, 치즈와 신 포도주(larido, caseo et posca)[10][11]를 먹었다고 적었으며,[12] 황제가 된 후에도 비슷하게 조촐한 식사를 했다고 전해진다.

고기를 먹는 일은 드물었는데, 소고기는 꿈도 못 꿨다.[13] 보통은 닭이나 양, 돼지의 고기를 먹었고, 이것도 생고기가 아닌 소금에 절이거나 말린 종류였다. 소시지 같은 가공육도 당시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기가 없을 때는 양젖/염소젖으로 만든 치즈가 주요 단백질 공급원이었다. 군단병은 대부분 농민 출신이었으므로 치즈를 직접 만드는 방법을 알았다. 치즈를 굳히는 효소는 무화과 줄기에서 추출했다. 이집트콩, 렌즈콩 등의 콩류도 중요한 단백질 공급원이었다.

고기는 잘 먹지 못했지만, 생선류는 그런대로 쉽게 먹을 수 있었다. 원래 지중해 지역을 근거지로 삼는 나라들의 상황이 비슷하기는 하지만, 생선을 주요한 단백질 공급원으로 썼다. 대구나 장어 등을 많이 먹었는데, 생으로 먹기보다는 주로 말리거나 소금에 절여서 보통 구워서 먹었다. 일반 시민들도 마찬가지로 예수의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나오는 생선도 말린 대구였으며, 부활한 뒤 제자들에게 찾아가 자신이 되살아났음을 증명하기 위해 먹은 것도 구운 대구였다.

군단병은 다른 장비와 마찬가지로 배급되는 식량도 공짜로 주는 것이 아니라 받은 월급을 떼서 사비로 구매해야 했다. 군단 차원에서 식량을 조달하는 방법은 주변 신민들로부터 징발하거나, 전투가 끝난 후 약탈하거나, 군단을 따라다니며 물자를 공급하는 상인(Sutlers)에게서 구매하는 것이었다. 징발한 식량은 군단장이 지정한 도로 근처의 위치에 먼저 가져다 놓도록 요구되었고, 징발 후에 지불하는 보상금의 양은 전적으로 군단장의 재량인 복불복이었으며 언제나 시가보다 쌌다. 식량의 징발은 비-로마 신민에게 추가적인 세금 부담처럼 작용하게 되었다.

켈트족이나 게르만족은 로마에 비해 고기를 더 잘 먹었는데, 이들은 목축과 수렵 문화가 남아 있었고, 이탈리아 반도와 달리 숲이 울창해서 사냥감이 많았기 때문이다. 와인을 주로 마신 로마인들과 달리 켈트족은 맥주를 마셨다.[14]

중국의 경우 초한전쟁 당시에 항우밥에 콩을 반이나 섞고 있다고 하니 철군을 결정했다는 기록이 있다. 평시에는 몰라도, 전시에는 쌀밥을 줘서 사기 유지에 노력했다는 증거이다. 삼국시대 촉나라 군대는 순무를 반찬으로 즐겼다. 제갈량은 장기간 주둔할 기미만 보이면 둔전을 해서 무를 심었는데, 그 이유가 첫째로 영양가가 좋고, 둘째로 뿌리와 순을 모두 먹을 수 있으며, 셋째로 저렴하기 때문에 버리고 가더라도 아깝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술의 군대나 오나라에서는 물풀이나 다슬기 같은 것을 강에서 채집해서 반찬으로 먹었다고 한다.

3.2. 중세(7세기~15세기)

당시 군대의 식량 보급방식과 조리방법에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군대의 보급은 약탈과 수송의 중간에 위치해있었다. 전적으로 약탈에 의존하지도 않았고 전적으로 수송에 의존하지도 않았다. 둘은 함께 이루어졌으며 어느 한쪽이 예외적인 상황이 아니라 시대와 장소에 따른 비율의 문제일 뿐 둘 다 행해진다는 것을 감안하고 계획이 세워졌다. 하단의 내용은 군대가 약탈에 의존했다는 통설에 반박하기 위해 수송을 강조하고 있지만 이를 지나치게 일반화하여 약탈을 부정하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안된다. 중세에 수송은 아주 비싸고 제약이 큰 행위였다.

약탈이 일상이라고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있으나 약탈을 주 보급수단으로 삼게 되면 전쟁지속능력이 사라진다.[16] 가장 먼저 약탈의 성공 여부는 불확실하기에 충분한 보급을 취할 수 없다. 비료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동서양을 막론하고 잉여 농산물의 양은 제한되었으며 대부분의 농민은 세금을 바치고나면 한 해를 겨우 넘길만한 양식밖에 남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마을 몇 개를 약탈해봤자 몇천몇만의 군대에 있어서는 하루 식량도 되지 않으며 간혹 큰 도시를 털어 식량을 꽤 얻었다고 하더라도 지속적이지 않기에 약탈만 믿고 보급선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소리다. 약탈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던 바이킹들조차도 식량과 물부터 확보하고 원정을 진행했으며, 식량이 떨어지면 본거지로 돌아가든 주변에 주둔지를 만들고 거점부터 굳혔다.

또한 청야전술에 취약하다. 약탈을 주 보급수단으로 삼으면 주민들이 스스로 기반을 없애버리고 도망치는 경우 속절없이 굶어죽게 된다. 게다가 정복이 목적인 경우 약탈한 땅은 황무지나 다름없는 땅에 적대적인 사람이 살고있는 형태가 돼버려서 장기적으로 보면 손해만 보는 장사다. 물론 여러가지 이유로 많은 약탈이 이루어졌지만 여튼 그 당대에 작성된 기록에서도, 약탈을 장려하는 장수는 그 본국에서도 좋은 평을 듣기 힘들었다.

그래서 대규모 전쟁에서는 대개 군주가 우호 지역을 지나가면서 식량을 사기로 미리 계약을 맺거나 일부 대영주들에게 병력을 대신 군자금과 식량을 지원하도록 했고, 그러한 계약을 명시한 계약서가 왕실 서고 등에서 흔히 발견된다. 물론 여러가지 이유로 보급이 의도치 않게 중단되는 일도 자주 있었지만, 일단 계획대로만 진행된다면 식량 보급의 품질은 당시 기준으로 퍽 풍족한 편이었다. 중세 시대의 군인은 다들 용병이기 때문에 계약에서부터 식량의 질과 양을 깐깐하게 따지는 편이었다. 먹고 살자고 하는 건데 희멀건 꿀꿀이죽을 먹는 삶을 택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런 것은 전황이 최악의 사태로 다다를 때에 한정되며, 그쯤 되면 탈영이나 용병들의 계약 파기가 일상다반사인 상태다.

중세 군대에는 항상 며칠에서 몇주의 식량을 쌓은 짐수레가 잔뜩 따라다녔는데, 15세기 말 독일 기록에는 보병 12,000명을 위해 650대의 짐수레가, 3,000명의 기병을 위해 300대의 짐수레가 따라붙었다고 한다. 독일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국가들 역시 이러한 보급 기록이 많이 남아있다. 600명으로 구성된 주둔부대의 6개월치 식량 보급 기록을 예로 들어보자. 60t의 밀이 들어가서 그중 1/3인 20t을 비스킷으로 굽고 나머지는 갈아서 밀가루로 사용했다. 콩과 완두콩은 42t, 와인은 105갤런짜리 큰통으로 두 통(800리터), 식초는 두 통, 기름 1통, 버터 1통, 소금 1톤, 각종 양념과 향신료 50파운드, 아몬드와 사프롱 같은 주전부리도 몇 파운드 넣어주기로 돼 있고, 황소 100마리(약 10톤~15톤의 고기), 양 160마리(약 8톤의 고기), 가금류는 원하는 만큼, 장어 1,000마리(약 2톤의 고기), 청어 25통. 이 기준과 여러 기록을 통틀어서 볼때, 중세 시대의 군인들의 하루 식단은 빵 혹은 비스킷 1.5kg 가량, 신선한 고기 1파운드 가량에 달걀이나 염장 고기, 치즈와 버터 약간과 채소를 포함해 하루 4천2백~5백 킬로칼로리 가량으로 계산된다. 이는 현대 성인의 평균 식단의 칼로리 2배에 가까운 양이고, 현대 군인에 비해서도 월등히 높다. MRE로 3끼를 먹으면 3600킬로칼로리 가량 된다. 재밌게도, 전투중인 현대 군인들은 하루에 최대 4200킬로칼로리를 소모한다고 하니 의외로 딱 맞아 떨어진다. 당시엔 도보행군이 사실상 유일한 기동수단이라는 점를 오히려 칼로리 섭취가 부족한 걸수도 있다.[17] 물론 이런 보급 계획이 항상 잘 맞아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의외로 중세 군인들이 잘 먹었고 보급에도 상당히 신경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단, 장거리 보급을 할 역량은 없었기 때문에 원정이 길어지는 등의 상황에서는 위의 기록들처럼 제대로 된 음식이 공급된다는 보장이 없었다.

오스만 제국은 보급 분야만큼은 통제력을 최대한 확보하려고 노력했다. 제아무리 날고 기는 예니체리나 카피쿨루 군단이라도 일단 먹여 주지 못한다면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하고, 더 나아가서는 명령 불복종, 반란으로 이어질 수 있으니깐. 병영에 주둔해 있을 때 예니체리나 카피쿨루같은 오스만 장병들은 하루에 약 3,000칼로리 정도의 열량을 섭취할 수 있을 정도의 식사를 했다. 320g의 빵, 160g의 건빵, 160g의 쌀에 192g의 양고기, 80g의 버터로 구성되어 있었다. 17세기에는 5만 명이 넘는 수도의 예니체리를 위해 오스만의 유럽 영토에서 300,000마리의 양떼가 보내졌다고 한다. 그 외에 대추야자와 같은 각종 후식도 보내졌다.

17세기 프랑스의 여행자 Jean de Théveno는 오스만 군대는 절대 굶주림에 시달리지 않으며, 온 땅으로부터 그들의 주둔지로 음식을 가져온다고 평했다. 발칸의 경우 오스만은 이 지역의 수많은 강들을 이용해 원정군에게 비교적 많은 식량을 공급할 수 있었다. 또한 이스탄불부터 해서 오스만 지배 헝가리(오스트리아와 항상 일전을 벌여온...)까지 멘질-하네(menzil-hane)라고 불리는 식량 창고가 있어 군대가 이동할 때마다 이곳에서 보급을 받고, 적진으로 넘어가면 그제서야 같이 가져온 식량을 소비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군대가 한번 움직일 때 대체 얼마 정도의 식량이 필요했을까. Perjes의 연구에 따르면 90,000명의 병력과 40,000필의 말이 30일간 움직일 때 필요한 식량을 공급하려면 낙타 30,000마리가 7,600t의 양을 운송해야 했다. 무라드 4세의 1638년 바그다드 원정 시 하루에 1인당 최소로 필요로 했던 식량이 약 600g의 빵과 600g의 비스킷이었는데, 20,000명의 예니체리와 시파히 군과 말과 운송용 소를 먹이려면 두세 달 간의 원정기간동안 35,000~55,000마리의 낙타가 필요했다고 한다. 물론 빵과 비스킷만 먹인 것이 아니라 고기도 먹였는데, 같은 원정에서 21개월 동안 217,279마리의 양을 먹어치웠다고 한다. 발칸과 같은 지역이라면 흑해나 강을 통해 해상 운송이 가능했지만, 이라크와 같은 동방 지역의 경우는 쌩으로 육로 운송을 해야 했으니 오스만 군이 그 지역에서 특히나 고전을 한 게 무리는 아니었다.#

중세 군대에 요리사가 항상 붙어있거나 단위 병력 수준에서 조리가 이루어진 것 역시 식량이 조리된 상태로 보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귀족 장교들은 그를 따라다니는 당번병 혹은 고용된 민간 요리사가 조리를 했고, 일반 사병들도 밀가루, 고깃점, 물고기, 야채, 과일 등의 원재료를 일정량 보급을 받아 5~10여명 수준의 배식조 단위로 직접 조리해 먹었다. 조리를 전담하는 조리병이 생긴 것은 고작 100년밖에 안됐을 정도로 상당히 최근이다.[18][19][20] 그런데 만약 밥 먹다 말고 갑자기 비상 사태가 나거나, 취사할 여건이 전혀 안 되거나, 급히 부대를 움직여야만 하는 상황이 오면? 밥도 못 먹고 급하게 이동하거나 뜻하지 않게 건너뛰는 상황이 일상이 되어버린다.

다만 위의 글들은 고대 게르만 쌍무적 계약관계→중세 봉건제로 이어진 서양 기준에서 쓴 글이다. 군주가 도시와 계약을 맺거나 영주가 식량을 군주에게 보급하거나 중세 군인들이 대부분 용병이라 계약하면서 음식의 질을 따졌다는 것은 동아시아의 역사와는 잘 맞지 않다.

3.3. 근세(16세기~18세기)


스튜와 해쉬로 된 군인들의 식단 재현 영상.[21]

이들에게 보급된 건빵은 무식하게 딱딱해서 오직 바구미같은 벌레들만이 쉽게 갉아먹을 수 있었는데, 해군 함선같이 동물을 키울 수 있는 공간적 여유가 있을 경우 그 벌레들을 에게 먹여 키워서 나중에 닭을 잡아먹었다는 기록도 있고, 상황이 극단적으로 처절하다면 닭을 거치지 않고 벌레를 그냥 잡아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충식 항목을 보면 단백질 섭취라는 측면에서는 분명히 효율적인 방법이긴 했겠지만, 위생이나 심리적 문제가 있었을 것이다. 일부 인원들은 벌레먹은 건빵이 이리저리 난 구멍 덕에 덜 딱딱해 먹기 쉽다고 좋아하기도 했다.

한편 짐을 줄이고 기동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동물은 끌고 가지만 조리기구는 챙겨가지 않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 경우 짐승을 잡아서 그 생가죽을 솥 삼아서 걸고 그 안에 물과 고기를 집어넣어 삶아 먹었다. 그냥 태우면 잘 타는 소재라도 물이 끓는 동안은 그릇이 타지 않기 때문이고, 가죽은 방염 피복으로 쓰일 만큼 내화성도 있다. 수천년 전 금속기를 사용하지 않은 문명이 가죽 냄비에 달군 을 넣는 방식을 고안한 이래 나름대로 오래 검증된 방식이기는 하나, 이런 식으로 조리하면 생가죽의 누린내까지 음식에 우러나와 버린다. 충분한 조미료가 있다면 어떻게 수습이 되었겠지만, 조미료를 따로 챙겨줄 환경이면 조리기구도 챙겨줬을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군대는 계급에 따라 천자호반, 지자호반, 인자호반이라 불리는 3가지 유형의 밥상을 받도록 규정되었다.[22] 고급군관은 천자호반이라고 하여 밥과 채소, 절인생선, 고기, 두부, 술 3잔을 받았고, 하급군관은 지자호반이라 하여 밥과 채소, 고기, 두부를, 일반 병사들은 인자호반이라 하여 밥과 절인새우/새우젓과 두부를 받았다. 여기서 보면 두부는 항상 들어가 있는데, 명나라군은 조선 측에 말단 병사까지 반찬으로 두부를 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두부는 콩으로 만드는 음식이라 가격도 과히 비싸지 않은 데다, 조선 두부가 맛있다는 것은 조선 초기부터 명나라에 소문이 나 있었기 때문이다. 몸에 좋고 맛도 좋은 두부를 먹는 명나라 군대야 입이 즐거웠겠지만, 그 두부를 만들기 위해 콩을 삶고, 갈고, 짜서 굳히는 백성들의 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실제 때 맞춰 두부를 만들지 못했다고 조선 관리가 명나라 군사들에게 두들겨 맞기도 했다.

조선군의 경우는 단편적으로 정의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조선시대의 군대는 중앙 세수만으론 유지가 어려워 군산복합체마냥 군 자체적으로 경제활동을 해서 유지비용을 충당했기 때문이다. 가령 육군은 둔전이나 광산을 운영하고 수군이면 둔전, 염전, 어업, 유통업, 조선업을 하는 식으로 재정을 확보했는데 훈련도감은 화폐 주조권도 받아서 재정을 충원했다고 한다. 때문에 부대 자금 사정이 좋으면 풍성하게 먹을 수 있었다.

육군의 경우 전시상황에는 보통 보급을 담당하는 부대가 쌀이나 보리등을 운반해 본대에 보급했고 찬거리는 이동 중에 관아나 민가에서 구매하거나 얻어오는 식으로 해결했다. 일례로 병인양요 당시 병사들은 밥 1그릇에 국 1그릇, 김치 및 장류가 기본이었고 형편이 좋으면 여기에 고기와 생선이 추가되었다. 또한 호궤(犒饋)라 하여 어가 호송을 맡은 병사나 임무를 수행하는 병사들을 위로하기 위해 술과 음식을 주는 행사가 간헐적으로 이뤄졌다. 예를 들면 만기요람 재용편에 능에 거동하는 어가를 호송하는 병사들을 호궤할 때 내리는 식품들이 적혀있는데 종사관 및 중군 이하 군졸들은 1인당 술 3사발, 콩 2홉 5작,[23] 소금 1작, 쇠고기 1꿰미 즉 1관(약 3.75kg)이 주어지고, 여기에 하급군관인 장교(將校)는 6인당 대구 1마리, 군병은 1인당 명태 1마리를 추가로 받게 되어있다. 하루에 먹는 쌀의 양은 상당히 많았던 것으로,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한끼에 2홉[24]을 소비할 동안 조선군은 7홉[25]을 먹어치웠다.[26]

수군의 경우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로 대략 알 수 있는데, 고위 지휘관들은 물론이고 병사들까지 술을 자주 먹었다는 기록이 많다. 한 번은 수영 전체가 밤새 1천 동이 넘는 술을 마시기도 했다고.[27] 이순신은 고기를 육해공으로 구분해 놓았는데, 육고기는 소고기, 돼지고기, 사슴고기, 개고기 등을 제주에서 지원 받았다고 하고,[28] 물고기는 전복, 대구, 청어, 숭어, 조기, 고래 등을 먹었다고 한다. 특히 청어잡이에 중시하여 청어를 많이 잡아 식량으로 대는 한편, 이렇게 낚은 잉여 청어를 팔아서 곡식과 무기도 조달했다는 기록도 나온다. 또한 수군영과 가까운 통영 거제 일대의 앞바다에는 미역과 김 같은 해조류가 많이 나서 이를 채집하여 군량으로 댔다.[29] 날짐승은 꿩을 빼면 기록에 없는데, 닭은 따로 군영에서 키우거나 보급 받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30]

이 밖에 난중일기에서 수군이 먹은 것들로 여러 가지 떡, 국수, 약식, 칡, 팥죽, 홍시와 곶감, 참기름, 꿀, 무, 연포, 수박, 동아전, 그리고 귀한 진상품인 귤(!) 등이 나오는데, 주식 외에도 간식류까지 세심하게 신경쓴 것을 볼 수 있다.[31] 현대의 기준으로 생각해도 고기 반찬과 함께 먹는다고 가정하면 해군의 병영식으로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수군은 둔전, 염전, 어업, 유통업, 조선업 등 육군보다 상대적으로 재정확보수단이 다양하였기에 먹거리를 보급할 여력이 충분한데다, 수군이 다들 기피하는 병종이기 때문에 충무공이 현대의 해군처럼 식단에 여러모로 신경을 써서 사기를 진작 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는 배부르게 먹고 살기는 평상시에도 힘들었고 더구나 전쟁통이라 끼니를 걱정하거나 굶어죽는 사람은 더욱 많았던 시절이다.[32] 난중일기를 비롯한 당시 공식 기록들을 찾아보면 수군을 잘 먹이는데도 신경썼지만 둔전을 병행하며 일선에서 싸우는 병사 가족들의 생계까지 동시에 챙기려 노력하고,[33] 병영에 물자를 공급하는 농민들이나 상인들을 보호하는데도 많은 신경을 썼다.[34] 그러다 보니 풍요롭고 다양한 병영식과 식자재 제공은 탈영과 사건사고를 막고 사기를 올려 승리하는데 굉장한 효과를 발휘할 수밖에 없었다. 병영에서 야반도주한다고 해도 굶어 죽기 일보 직전인 상황에서는 부자들도 전쟁통에는 못 먹는 귤까지 챙겨주는 수군에 남는 것이 이득이었고, 자신은 물론이고 가족들까지 굶주리지 않고 밥을 먹을 수 있으니 차라리 군에 소속되어 목숨걸고 싸우는 쪽을 고르게 된 것이다.


일본의 경우에는 전국시대 당시 아시가루들이 농번기 때에는 농사일을 하다가 전쟁이 일어나면 병사로 일하는 구조였다. 그랬기 때문에 대부분 농번기 때는 전투를 쉬는 것이 보통이었으며, 그로 인해 군용 보급식량 역시 그렇게 긴 보존기간을 갖는 편은 아니었다. 보통은 농민=병사 였다보니, 지급되는 쌀과 부식 외에는 각자 알아서 준비해야 했으며 쌀은 1일에 6홉, 소금은 10인에 1홉, 된장은 10인에 2홉이 지급되었다. 당시 기준 1홉은 약 180cc 인데, 6홉은 약 1080cc(약 900g)에 달하는 양으로. 양으로 밥으로 지으면 대략 1.8~2kg에 달해 결코 적은 양은 아니었다.[35] 대개는 하루 세끼를 2홉씩 먹었지만 전투하느라 밥을 지을 시간이 없을 경우 밥은 하루에 한번만 하여 2홉을 바로 먹고, 나머지 4홉은 허리에 동여메고 나중에 먹었는데[36] 보통 현미가 지급되었으며, 정미된 흰쌀도 있긴 했으나 하급 병사들에게는 지급되는 경우는 거의 없고 대개 지휘관급 이상의 무사들에게 지급되었으며, 부식은 거의 없었고 위에서 언급된 소금과 된장만으로 밥을 먹었다. 매실장아찌나 절인야채, 때에 따라서 생선포 등의 보존식품은 각자 집에서 만들어 챙겨와야 했는데, 이 때문에 농민을 병사로 부리던 다른 다이묘와는 달리 상비군 체계로 군을 움직인 노부나가의 경우 한 병영에서 공동생활을 시켰던지라 다른 부식을 챙길 방법이 없었기에 병사들의 피로나 사기에 악영향을 주었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고심했다. 된장은 대개 토란 줄기에 절여서 토란줄기를 잘라 씹어먹거나 물에 넣어 즉석으로 국을 만들어 먹을 때 사용되었으며 필요한 경우 콩과 누룩을 짚단에 넣어 전쟁중 즉석으로 된장을 만들 수 있도록 하는 경우도 있었다. 소금의 경우 대개 작은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국에 넣어 간을 맞추며 먹는 경우도 있었지만 전투중 시간이 없을 땐 그냥 밥과 같이 집어먹는 경우도 많았다. 그리고 최소한으로 짐을 가볍게 만들기 위해 조리도구 등은 생략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때문에 대개 먹을 그릇은 아시가루들의 가사(삿갓 모양의 투구)를 뒤집어 이를 밥그릇으로 활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반찬도 부실한데다가 몸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동물성 단백질도 필요하다보니 병사들이나 무사들은 종종 야산에서 들짐승과 생선을 잡았으며. 당시 일본 사회가 불교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 형태가 변질되고 무엇보다 본인들도 살아야 했기에 의외로 그렇게 얻는 단백질의 양이 많은 편이었다. 또한 수송의 어려움과 보존의 어려움, 그리고 병사의 사기를 위해 적지의 밭과 마을은 약탈대상이 되기 때문에 보통 민심 이반을 우려해 약탈을 금지하는 다른 나라에 비해 도리어 약탈을 막는 쪽이 싸움에 이겨도 경제적, 정치적 데미지를 입게 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적국의 식량을 빼앗아먹는 것은 훌륭한 군사행동으로 취급되었다고 했기에 그것을 임진왜란에서도 적용하려 했다가 조선인들의 반감을 사고, 이순신과 의병들의 활약으로 보급에 차질이 발생했다.

3.4. 근대(19세기~1940년대)

남북전쟁 당시에 북군 육군은 병사들에게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베이컨)와 건빵, 커피를 지급했다. 근데 이걸 어떻게 해 먹는지는 병사 개개인의 역량에 맡겼기 때문에 병사들은 괴상한 식사[37]를 만들어내거나 고참들에게 레시피를 전수받아야 했다. 건빵의 경우, 하드택(Hardtack)이라고도 하며 여유가 있으면 그냥 먹기보다 으깨어서 가루로 만든 다음 소금과 후추 등 조미료를 첨가해 처럼 끓여먹거나 반죽을 해서 오늘 날의 팬케이크처럼 다시 불에 구워 먹었다고 한다. 혹은 베이컨을 굽거나 삶을 때 나오는 기름에 튀겨 먹기도 했다. 북군보다 열악했던 남군 육군은 식량으로 땅콩을 지급했는데, 이걸 삶아먹기도 하고 볶아서 커피 대용으로 차를 끓이는 등 알아서들 먹었다.


1차 대전 때 영국 육군 왕실 근위대 소속 리버풀 연대의 스미스 이병이 경계근무 중 점심식사 시간이 되자 스스로 잡탕 콘비프 스튜를 만드는 영상이다. 현지에서 확보한 신선한 감자와 당근[38]을 썰고 염장된 쇠고기 통조림을 따서 조금씩 넣고[39] 맛을 돋우기 위해 배급받은 비스킷을 부셔서 같이 넣고 물을 살짝 부은 후[40] 참호 모래주머니를 칼로 잘라서 연료로 써서 불을 붙힌 후 재료를 모두 섞은 반합뚜껑에다 숟가락을 이리저리 저어가며 익었다 싶을때 동료와 함께 사온 민간용 HP소스를 넣고 좀 더 섞어준 다음에 남은 20분의 점심시간 동안 먹는다. 1시간 동안의 점심식사 시간에 제때 못 만들면 조리가 다 되었던 말던 입에 일단 전부 쑤셔넣어야 한다는 나레이션의 언급에서 1차 대전 당시 병사들의 열악했던 처우를 볼 수 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더럽고 진창인 참호전 상황에선 이렇게 불을 피우고 음식을 만들어 먹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수준이라, 영상처럼 점심시간에 따뜻하게 조리해 먹을 수 있는 장소에 머무른다는 것만도 특권이자 사치였다. 참호에선 일단 불을 피우고 연기가 나면 그 자리에 포격이나 적병의 화력이 집중되었기 때문에 잔가지로 연기가 나지 않게 불을 피우던가, 그것조차도 어려우면 차가운 깡통이나 날음식을 그대로 먹어야만 했다. 최전방 참호라면 적병의 습격을 경계하는지라 신경이 곤두선 상태로 차가운 음식을 먹어야 했으니 편안히 조리하는 것 따위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1,2차 세계대전 중 각국 군인들이 보급의 여유와 휴식시간이 있을 땐 열량보충을 위한 부식과 함께, 홍차나 커피 등을 마시며 짤막한 티타임을 갖는 일 자체는 흔했으나, 특히 영국의 경우는 아래 영상처럼 정규식 못지 않게 병영식에서 티타임을 중시하고 집착하는 분위기가 강했다.[41]


이번엔 2차 대전을 배경으로 티타임을 다룬다.[42] 포격 소리가 들리는 전투 중인데도 티타임 시간이 되자, 열심히 허겁지겁 수통의 물로 머그컵 한 잔의 홍차를 만들어 마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영국군이 이렇게 실전 상황에서도 티타임에 집착했던 건 과장된 영상이 아니라, 세계대전사에도 많은 기록이 남아있으며 디스커버리 채널 등의 다큐멘터리까지 자주 언급될 정도이다.[43]

루리웹의 한 유저가 1, 2차대전의 병영식을 재현 했다. 많은 사진과 설명으로 따라 만들기 쉽다.

1차대전 영국군 참호요리[44]
1차대전 영국 해군 함상식(씨 파이+플레인 스튜)
1차대전 독일군 슈니첼과 맥주수프
2차대전 미군 덤플링 치킨 스튜
2차대전 미군 엘 란초 스튜
2차대전 미군 미트볼 스파게티[45]
2차대전 미군 고등어 캐서롤
2차대전 미군 + 일본군 카레
2차대전 영국군 카레
2차대전 호주군 카레
2차대전 독일군 굴라시
2차대전 독일군 피셸스타이너 거뮤제아인토프
2차대전 소련군 보르시
2차대전 소련군 까샤 + 쿨레시


(미 육군의 야전 병영식 리인액트.)

미 육군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야전 상황에서 밥차로 병영식을 지었는데, 이 때는 통조림과 동결 건조 재료로 구성된 B-레이션을 정해진 메뉴에 따라 대량 조리하여 배급했다. 식사 시간은 기도비닉을 유지하기 위해 해 뜨기 전 아침과 해진 후의 늦은 저녁에 실시되었고, 점심은 전투식량인 C-레이션과 K-레이션으로 해결했다. 격전지에서는 당연히 밥차가 올 수 없었으므로 전투식량으로 때워야 했다.

4. 국가별 병영식

다른 요소들의 영향도 있긴 하나 결국 군대의 병영식의 수준은 그 나라의 빈부(貧富)가 가장 큰 영향을 끼친다. 선진국 군대들의 병영식은 거의 호화로워 보이는 반면 개발도상국 군대들의 병영식은 거의 개밥으로 보일 지경. 그러나 선진국, 후진국 관계없이 공통적으로 그 나라의 민간인 기준으로는 수준이 낮은 음식이라는 것은 대부분 공통적이며, 천하의 미군 병영식이라도 미군들 입장에서는 짬밥 취급이다.

4.1. 대한민국 국군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한국군 병영식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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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독일 연방군

스테이크에서 완두콩 수프까지
(영상 출처: 독일 연방군 공식 유튜브)
1987년 당시 서독군 병영식의 모습.

독일군의 군급식을 Verpflegungsgeld(페어플레궁스겔트-급양식)라고 부르며, 직업군인(Berufsoldat)과 임기제 군인(Soldat auf Zeit)으로 구성되는 독일군인만큼, 급식비를 지불해야 한다. 다만 급식비를 연방군에서 법[46][47]에 따라 지급해주며, 그 액수는 사회보험금규정(Sozialversicherungsentgeltverordnung)의 일일할당액에 따른다. 단, 특수한 공무중에 공동급식을 실시할 경우엔 병영식을 군대에서 무료로 제공한다.
2022년에 독일군 식비는 일일 9.01 유로이며, 조식 1.87 유로, 중식과 석식이 각각 3.57 유로이다.

4.2.1. 독일 국방군

파일:독일밥차.png
제2차 세계 대전 개전 3일 후인 1939년 9월 4일 촬영된 사진. 메뉴판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Montag d. 4. 9. 1939
(1939년 9월 4일 월요일)
Mittag: Frischgemüsesuppe m. Schwänzlein
(점심: 돼지 꼬리가 들어간 야채 수프)
Abend: Wurst, Butter, Brot
(저녁: 소시지, 버터, 빵)

독일군은 19세기 말부터 Gulaschkanone(굴라쉬 대포)라고 불리는 말이 끌거나 차량 형태로 된 일종의 이동식 밥차를 이용했다. 원칙적으로 탄수화물(주로 빵), 단백질(부어스트, 통조림 혹은 신선한 고기), 지방(버터, 라드, 마가린), 비타민을 위한 채소(감자, 양배추, 당근, 비트), 기호품(커피, 대용 커피, 담배)가 포함된 균형잡힌 구성이었지만 부대 사정에 따라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경우가 많았고, 전쟁 말기로 갈수록 점점 열악해졌다. 이는 자연스럽게 점령지의 현지인들을 약탈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4.3. 러시아군

파일:external/static.munpia.com/8iK8vP4BbUsaWYSw.png 파일:external/02varvara.files.wordpress.com/00-02d-army-mess-hall-leningrad-oblast-03-12.jpg
러시아군 짬밥
표정이 암울하다 못해 비장해 보이기까지 한다
조리병을 죽일듯한 저 눈빛을 보라
파일:external/static.munpia.com/fLkQv8bfFufiLMiq.png 파일:meKsrju.jpg
경제가 막장이던 1990년대는 이랬다.
이등병 데니소비치의 하루
고양이 학대하는 사관생도[48]
파일:external/media.englishrussia.com/armydinner003-27.jpg 파일:external/img5.itiexue.net/14540309.jpg
2013년 모스크바 방면 부대의 식사.
수프 색깔이 굉장히 익숙하다.

러시아군의 식사는 스프를 중심으로 하는 러시아 요리에 기반한다. 주식은 카샤(죽), 흘레브(빵), 시(수프) 위주로 나오며 파스타 종류도 상당히 많이 나오는 편이다.

역사적으로 러시아 제국, 소련, 러시아를 거치며 국가적 위기가 발생할 때마다 병영식에도 큰 영향을 주어 다양한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러시아의 병영식에 수프와 죽처럼 생긴 것이 자주 보이는 이유는 수프에 해당하는 시치(щи)와 죽에 해당하는 카샤(каша)가 러시아가 전통적으로 먹어온 주식이기 때문이다. 러시아 속담으로 "시치와 카샤는 우리의 어머니이다.("Щи да каша — мать наша")"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러시아 사람들에게 있어서 시치와 카샤는 한국인에게 밥과 국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수프와 죽이 자주 보이는 이유로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가 돈이 없어 양을 불리려는 목적으로 수프와 죽을 주로 배식했다고도 알려져 있으나, 그렇지는 않다.

아무튼 푸틴이 대통령에 등극한 이후로는 군비를 늘려 어느정도 먹을수준까지는 만들었지만 지역별로 차이가 있어서 2013년 극동방면 부대들의 급양 상태가 뉴스에 나왔는데 음식 저장고에서는 쥐의 배설물이 널려 있고, 통조림은 녹슬었으며, 구더기와 벌레가 나오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서는 전투식량을 보급받지 못해서 병영식으로 식사를 대신하는 부대가 소개되었는데, 그 병영식 재료가 감자와 당근, 피클, 양파가 끝인 것으로 드러나서 충격을 주었다. 제대로 준비 안된 상태에서 침공하다보니 식단이 부실해진 것이다. 게다가 이들 재료를 생으로 제공하는 탓에[49] 생감자는 싹이 나고 피클은 유리병에 담아 보관했다가 깨져서 바닥에 뒹굴 정도로 정도로 상태가 심각하다. #반대로 우크라이나군은 자원봉사자들이 목숨을 걸고 전선에서 고기가 들어간 가정식을 만들어주는등 이 부분에서도 대조된다.


대표적인 병영식 장비로 고기동 굴절식 궤도 트레일러 DT-30을 야전 취사장비로 운용하는 등 수많은 장비들이 병영식을 위해 운용되고 있다고 선전은 했으나 정작 실전에서 보여준 것은 트럭에 실린 싹이 난 감자와 깨진 유리병에 든 피클,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전투식량이었다.

4.4. 우크라이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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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군 짬밥. 러시아군과 호각을 다툴만 하다.

소련 해체 이전까지는 애초에 소련군과 한 몸이었고, 해체 이후에도 우크라이나의 정치, 경제 사정은 러시아보다 전혀 나을 것이 없었다보니 병영식의 수준은 러시아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4.5. 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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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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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바이벌 훈련 중에 취사 준비를 하는 중이다. 생존 훈련의 일환이다 보니 실제 살아 있는 가축을 가져와서 도축을 했다.[51]


주한미해병대 조리병들이 포항시의 캠프 무적에서 식사를 조리하는 모습으로, 한국 현지에서 납품된 식재료(피망방울토마토 상자)가 보인다.




이라크 전쟁당시 미군의 현지 병영식당 모습.

미군의 경우 일반적인 급식도 있고 뷔페식도 있다. 미군의 예산이 전 세계적으로 1위를 차지하고 있고 식재료의 품질도 경쟁 납품 덕분에 우수하며 타국군 군인의 입장에서논 메뉴도 많고 호화스럽게 보이지만, 매일 먹는 미군에게는 이런 병영식도 짬밥일 뿐이다.

천조국 밈으로 과장된 부분이 있기는 하나 미군이 잘 먹는 것은 사실이다. 카투사들이 호강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러다 카투사하고 살 빼려다가 되려 살이 찌는 현상도 가끔씩 벌어진다. 한국군은 간부식당 조차도 상태가 부실한 경우가 많은데, 한국군이 이라크쿠웨이트에 파병됐을 때 한국군 원사, 상사, 심지어 병장들이 미군 식당에서 풍부한 부식을 건빵주머니에 엄청 챙겨갔다. 물론 미군들이 그러한 모습을 보면 곧바로 제재에 들어가기는 하지만. 카투사의 미군 식당 이야기

기본적인 구성은 평일 점심-저녁, 휴일 저녁의 경우 주찬(Main menu) 또는 간편식(Short order: 치킨, 햄버거 등 패스트푸드)으로 각각 4~5개 정도의 메뉴에서 택일한 다음, 샐러드나 과일, 드링크[52], 기타 사이드는 바에서 갖다 먹는 방식이다.

논산에서 기초훈련 뛰는 카투사 신병의 희망 잭슨 버거가 바로 Short order 메뉴. 평일 아침은 주찬이 오믈렛이나 소시지 등으로 바뀌며, 여기에 토스트나 팬케이크, 그리츠 등이 덧붙는다. 부대 지휘계통의 관심에 따라 현지화도 이루어지는데, 주한미군 식당은 당연히 김치가 들어오고 쌀밥도 있다.

영내 식당(Dining Facility를 줄여 흔히 D-FAC이라 부른다.)은 부대 직영이거나 민간 위탁인 경우로 나뉘는데, 한국에서 Area I(의정부 등 경기 북부)은 주요 대대 소속으로 조리병이 배치되어 주임원사의 관리를 받지만 캠프 잭슨이나 용산에서는 민간 위탁으로 한국 민간인이 식당 일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53] 덧붙여 각 메뉴는 거의 포장 뜯고 핫플레이트에 구우면 끝나는 수준으로 납품되고 있어서 조리병도 딱히 요리를 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오믈렛은 굽는다.

미군의 급식기본수당(Basic Allowance for Subsistence)은 2014년 기준으로 월마다 사병은 357.55달러, 장교는 246.24달러이다. 출처 하루로 치면 사병은 12달러에 가까운데[54] 한국군의 두 배 정도이며 자위대의 1.5배에 가깝다. 기본적으로 E-7 이상의 부사관과 장교는 돈으로 지급이 되기 때문에 D-FAC에서 식사를 할 경우 돈을 내야 한다.

문제점이라면 대침체 이후로 미국의 경제도 많이 어려워져 군비 축소를 시도했었고, 병영식의 질이 조금씩 낮아졌던 안타까운 상태였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캠프 험프리스의 병영식당[55]

주한미군 병영식이 이렇게 화려한 이유는 현지 민간 업체들에게 경쟁납품을 시키기 때문이다. 주한미군에서 군인이 요리에 참여하는 것은 징계 차원에서 감자깎기나 설거지, 식당 청소 등 식사지원을 맡기는 정도가 전부이다. 하지만 본토 내 주둔지의 경우 당연히 조리병들이 조리하며, 조리병들의 근무 여건은 같은 미군 내에서도 악명높은 편이다. 해군, 해안 경비대의 경우 전 수병들이 돌아가며 설거지나 부식 운반 등을 돕는 식사당번 제도가 있어서 무조건 벌받느라 저런 일을 하는 건 아니며, 가벼운 규정 위반자에게 추가 당번일을 내보내는 경우가 가끔 있다. 이는 SOFA 등 현지 주둔 국가와의 협약 때문으로, 미군이 주둔함으로써 사전 합의된 정도의 정해진 양의 일자리를 현지인들에게 제공해야 하기 때문이다.[56] 현지 업체에서 전투 지역에 식품 납품을 꺼리거나 업체 내부에서 파업 등의 문제가 발생할 경우엔 조리병들이 조리한 음식이나 맛없는 전투식량으로 때워야 한다. 실제로 2001년 아프간 현지에서 푸드 업체들이 파업을 하는 바람에 미군들이 아프간군 병영에서 밥을 얻어 먹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굉장히 예외적인 사안으로, 음식으로 인한 식중독 등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되기 전에 전투식량을 트럭으로 옮겨와 전투식량을 먹이면 먹였지, 현지에서 공식적으로 타국군 또는 현지식을 조달하는 경우는 없다.

해군, 해안 경비대의 경우 민간인 조리사의 배치가 불가능한 함정이라는 근무지 특성상 조리 직별은 숫자도 많고 하는 일도 실제 조리 임무이다. 또한 대부분이 직접 밥을 하는 전문 인력이므로 타군보다 전반적으로 취사 실력도 좋은 편이다. 민간에서 조리 분야로 취업할 때, 해군이나 해경, 민간 선박 취사 업무 경험자는 그 경력을 후하게 쳐 줄 정도다. 실제 원양어선이나 컨테이너쉽 같은 장거리 선박의 요리사들은 실력이 뛰어난 경우가 많다. 넓은 대양과 높은 노동강도에서 낙이라고는 먹는 것 밖에 없으니 실력 좋은 요리사를 쓰고 예산 집행에 대한 권한을 크게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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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주둔 미군의 경우 현지의 가공식품이 부식으로 납품되기도 한다. 사진 주한미군 훈련장 식당 뒷편에는 신라면이 쌓여 있다.

미군도 해외파병 미군과 미국본토의 병영식을 비교해보면병 미군과 미국본토의 병영식을 비교해보면 다른군인가 싶을정도로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이쪽도 자기네 병영식에 대해 좋은 소리는 없다. 병영에서 먹는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는 햄버거와 프렌치 프라이를 밖에서 먹고 오기도 하고[57][58], 좋은 고기가 들어와도 업자와 조리병들이 다 태우거나 맛없는 회색 덩어리로 만든다고 푸념을 늘어놓기도 한다. 거기다 대량으로 만들기 편하자고 패스트푸드 형태의 열량이 높은 구이와 튀김류의 식단으로 인해 비만 문제[59]가 지적되고 있다.

더는 이를 두고볼 수 없다고 판단한 미 국방부는 잠수함을 제외한 모든 미군 부대 영내 식당에서 튀김기를 철거하고 에어 프라이어로 교체했다.

이외에 근래에는 드물지만 21세기 초입만 해도 미군부대 식재료나 심지어 잔반을 빼돌려 유통시키는 범죄가 벌어지곤 했다. 2003년 기사 1950년대에는 이런 잔반이나 식재료로 잡탕같은 찌개를 만들어 먹었는데 이것에서 요리로 발전한 예가 바로 부대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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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지에선 이렇게 조촐하게 먹기도 한다. 점심은 MRE로 때우고 아침, 저녁에 Field kitchen 밥이 나오는 식이다. 전쟁터(이라크)에서는 이렇게 먹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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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주 방위군 육군의 배식. 그리고 미국 예비군 짬밥은 충격적인 수준이다.여기도 예외는 아니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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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의 바비큐 파티.
미 해군에서는 적도를 넘거나 행사가 있을 때 위의 사진처럼 바베큐 파티를 벌인다. 미 해군처럼 기지에 입항하기 전에는 세계 여러 대양에서 오랫동안 활동하기에 집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상실감과 반복되는 일상 때문에 군인들의 사기가 떨어지기 쉽다. 때문에 쉽게 사람의 기분을 올려주는 맛있는 음식을 통해 사기를 올린다고 말하기도 하며, 저런 행사들도 주기적으로 한다고 한다. 무엇보다 타국군에 비해서 저런 잔치를 할 수 있는 능력있다.[60] 육군 등 타 군종에서도 이런저런 이유로 매년 한두번씩은 중대나 대대 단위로 바비큐를 한다. 올라가는 고기는 어차피 D-FAC 메뉴에 들어갈 바로 그 고기라는 게 함정이지만, 일선 장병의 입장에서는 같은 고기라 할지라도 한식집에서 자기 손으로 집게로 뒤집어 구워먹는 것과 획일적인 짬밥으로 먹는 수준으로 기분의 차이가 난다.[61]

4.6. 조선인민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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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님 저녁으로는 조금 부족한데 현실은 시궁창

조선인민군/열악한 현실/빈곤함 문서도 참고.

첫번째 사진은 김정은이나 고위급 인사들이 나올 때나 먹는 특식이고, 대다수 부대에서 보통 먹는 식단은 묵은쌀이나 강냉이로 만든 밥이나 잡곡밥[62]에 채소국[63], 반찬이라고 해봐야 짠지나 나물 정도가 나오는 수준이다. 대다수 부대의 식사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한국군에서 1960년대에 먹을 법한 식사를 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

북한의 최전방 군인들이 직접 둔전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걸 한국군에서 관측할 정도로 여유가 없다. 일부 특혜를 받는 정예부대에서는 북한 기준 나름 호화로운 음식을 먹지만 그래봤자 한국군의 1970~80년대 병영식 수준이며 이런 부대는 별로 많지 않다.

사실 고기가 없다는 것이야 그렇다 쳐도 채식조차 제대로 나오지 못할 정도로 배식이 심하게 부실한 이유는 북한군 내부의 부정부패 문제때문이다. 사실 원칙대로라면 북한군의 식단이 심하게 부실할 이유는 없지만[64] 쌀을 장마당에 내다 판 다음에 차액을 상관들이 챙기고 남은 돈으로 값싼 옥수수를 사와서 먹이는 경우가 태반이다 보니 그만큼 군인들이 부실한 식단에 시달리게 된 것이다. 예산 자체가 부실한 것이 원인이지만 내부의 부정부패도 큰 문제인 것이다. 실제로 기강 단속을 할 때마다 식단이 개선되는 일이 벌어지곤 한다.

그리고 군인들은 이런 부실한 식단을 보충하기 위해 자국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약탈, 강도살인 등을 저지르는 악순환이 벌어지고 있으며, 서로 다른 부대들끼리 먹을 것을 놓고 총격전까지 벌이는 등의 막장 상황도 생긴다.

4.7. 영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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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에 공개하는 사진이니 저렇게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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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 그 자체인 병사들이 자신의 SNS에 올린 최근 사진 중 일부.

짬밥이 이렇게 개판인 것은 최근 급양 업무를 민간에 외주하는 과정에서 크게 문제가 생긴 탓이다. 최저가 입찰과 비리가 종합 선물 세트로 들어갔다는 듯. 사진에 적힌 sodexo[65]가 그 급식 업체 이름이다.
1940년 당시 영국 병영식 제조 모습.
빵, 페이스트리, 셰퍼드 파이, 수많은 감자 요리와 삶은 양배추 등으로 구성되었다.

軍 급식에 폭발한 영국군 장병들과 입을 틀어 막으려던 지휘부. 더 가관인 것은 국방부의 대응인데, 간단히 말하면 "사진 올리면 고소할거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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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클랜드 전쟁 당시 섬에 고립된 아르헨티나군이 빵과 물로 연명하고 있을 때, 영국군은 본토에서 아이스크림까지 후식으로 공수해 먹었다. 그러나 참전 장병은 전쟁 중에 지급된 짬밥이 맛없었다며 깠다.

4.8. 일본 자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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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에 똥국이 있다면 열도에는 똥카레가 있다.

법적으로 자위대는 군대가 아니므로 "병영"식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실질적으로는 군대나 다름없으므로 여기에 서술한다.

식사를 식판이 아닌 트레이에 주는 경우가 많다. 해상자위대 같은 경우엔 식판에 주기도 한다. 배를 타고 다녀야 하는데 트레이로 담아주면 식후에 설거지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겉모습만 보면 괜찮아 보이는데, 육상 및 항공자위대의 경우 실제 질은 상당히 떨어지는 편이다. 건더기가 드문 똥색 카레식용유로 만드는 모조치즈, 삶은 계란샐러드 등이 자주 나오며, 후르츠 칵테일도 그냥 상용 통조림을 따서 준다. 그냥 편의점 도시락을 지급해 주는 게 나을 지경이다.

식사비용은 하루에 1인당 850엔인데 이는 재료비만 포함된 수치다. 일본 내에서도 "젊은이들한테 너무 빈곤하게 먹이는 거 아니냐"고 비판 여론이 많다. 한국의 웹에 보면 자위대 식사 사진들이 돌아다니는데, 사실 그 사진들은 체리피킹에 가깝고, 홍보용이나 부대 방문 행사 등에선 잘 주지만 평소엔 부실할 때도 많다. 외부인 방문시에 1인당 390엔을 지불한다고 한다.

항공자위대는 철저하게 자체 급양을 돌리지만, 육상자위대의 경우엔 민간 위탁을 많이 하는 편이다. 이러한 점은 자위대가 사실 군대가 아니라는 점에서 기인한다. 군대의 경우 전시 상황 하에서 취사능력이 중요하지만 이들은 어디까지나 경찰보다 좀 더 센 치안 유지가 목적이기 때문에 야전 취사는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자위대 기지들의 주소가 버젓이 구글 지도에 나와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물론 그렇다고 아예 손을 놓은 수준은 아니다. 정 급하면 기동대처럼 컵라면 사먹으려는 것 아니냐는 농담도 있는데, 실제로 일본 경찰에선 그렇게 한다.[67]

육상자위대의 경우, 민간 위탁 외 직접 조리하는 인원들이 전문적인 취사 교육을 받지 못한 일반 육사(육군 병 상당)들이 돌아가며 몇 개월간 취사를 전담하다보니, 고급 메뉴를 조리하기 힘들다는 점도 식사 질을 떨어뜨리는 데 한몫한다. 비록 이들을 감독하는 육조(육군 부사관 상당)들은 급양 교육을 이수하지만, 직접 요리를 하는 이들이 수준이 낮은 이상 한계가 있다.

품질은 그렇다치고 양에도 문제가 있어서, 2020년대 들어서는 언론에 자위관이 정량보다 많은 음식을 가져갔다가 징계를 받았다는 뉴스가 종종 들려오고는 한다. # #

홍보용 사진에도 빈말로도 양이 풍족하다고는 할 수 없는 조그마한 식사가 눈길을 끈다. #

다만 위 조건과 결합해서 그런지 부대마다 편차가 커서, 보기에 괜찮은 식사도 제법 있다. #

위 부실한 식사는 육자대와 항자대 특히 육자대의 경우고, 해상자위대는 장기간 배를 타고 떠다녀야 하므로 민간위탁 비율이 낮음에도 불구하고 해군 특히 함정 근무자 특성상 타 자위대보다 급양 수준이 매우 높다. 특히 카레는 수시로 함정별 경연 대회를 하고 민간에도 조리법을 공개할 정도로 우수하다. 현재의 일본식 카레라이스일본 제국 해군이 원조라는 역사도 있다. #마이즈루 교육대 카레 해자대는 조리 인원들도 육자대와 달리, 주계 계열에서 선발되어 정식 교육을 받고 근무 내내 취사를 전담하는 이들이 맡으므로 숙련도도 높다. 육상의 경우에는 사세보 보육부대의 다음 사진을 참고. #

영내의 경우 식비가 무료이며, 영외 거주자는 영내식당에서 밥을 먹을 경우 돈을 내야 한다. 다만 급여 내역에 식비가 나오며, 식사할 때 기록해 뒀다가 매달 지급할 때 영내에서 식사한 만큼 공제하는 식이다. 조사 식당과 간부 식당이 따로 있지만 메뉴는 똑같은데, 다른 신분간에 식사하면 낮은 쪽은 높으신 분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부담이 있고, 높은 쪽도 얕보이지 않게 긴장하고 식사해야 하므로 서로 불편하기 때문에 서로 보다 편하게 식사할 수 있도록 하는 편에 가깝다.

4.8.1. 일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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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화 이후 초창기 시절에는 쌀밥만 기본으로 제공되고 반찬이나 부식 구매 비용을 따로 줘서 알아서 먹으라고 했었다. 그러나 학력 수준이 높지 않았던 당시의 장병들[68]은 균형잡힌 식단의 중요성을 알지 못한 채 부식비를 아껴서 집으로 송금하느라 맨 쌀밥만 먹는 일이 허다했고, 결국 각기병 등 각종 영양실조성 질병에 시달리는 문제가 터져나왔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쌀밥 대신 잡곡밥을 배식하려고 해봤으나, 흰 쌀밥이 부의 상징이던 시절에 이는 장병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69][70] 결국 급여에서 부식비를 제외하고 식사에 반찬과 부식을 배식하는 것으로 변화했다. 카레라이스도 이 시기에 나와 해결에 도움이 되어 줬지만 배식 초기엔 무슨 똥(...)같은 걸 먹이냐며 장병들이 기피 했다고 한다. 해군에선 이 문제를 빨리 해결했지만 육군은 육군으로서의 고질적인 자존심모리 오가이의 잘못된 판단으로 비교적 늦어져서 러일전쟁 시절까지 넘쳐나는 각기병 환자로 고생했다.

참고로 일본의 국민요리 취급을 받는 카레라이스가 창설 초기 해군에서 나왔다. 그 외에도 니쿠자가라무네를 태평양 전쟁 이후 유행시키는 등 은근히 근현대 일본 식문화에 끼친 영향이 크다.

육군의 경우에는 후리카케와 현대식 건빵이 영향에 끼쳤다.

알록달록 한 지금의 별사탕러일전쟁 이후에 나왔다고 한다.

중국에서 유래된 음식인 군만두, 샤브샤브도 중일전쟁 이후 들어온 음식이다.

맨쌀밥에 우메보시 하나만 주는 경우가 많아 짬밥의 대명사로 통했다. 그래서 눈의 진군 등 군가에서도 우메보시가 언급된다. 도시락통의 쌀밥 정중앙에 우메보시를 놓아 일장기 모양으로 만든 일명 우메보시 벤토를 애국심의 상징이랍시고 선전하기도 했다.

4.9. 중국 인민해방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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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군도 대부분의 병영식이 뷔페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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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군 시절부터 중국 인민해방군의 높으신 분들은 장병들에게 질 좋은 식사를 강조했다. 안 그러면 민간인에게 민폐를 끼치게 되니까.

그러나 이론상으로만 그런거고 나라가 가난했던 1990년대까지 병영식의 질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그래도 1980년대 이전에는 이것도 꽤 좋은 식사라는 평을 받았다. 일반인들은 식량을 배급표를 받아서 사왔던 시절에 군대 식사 정도만 해도 상대적으로 풍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80~90년대에 일반인들의 식사는 점차 풍성해지는데 군대 식사는 그대로였다가 2000년대 이후로 이른바 급식 혁명이 일어나서 많이 개선된 상태고, 과거 식판에 정량배식으로 담던 것이 접시에 담는 자율배식으로 바뀌었다. 2007년에 중국군의 병은 1일에 11위안을 1일 식비로 썼다. 당시 중국의 돼지고기 1kg이 10위안이었다. 중국에서는 식생활 문제가 상당히 민감하다. 한때 한국에서 중국의 가짜 식품들이 이슈가 되긴 했지만 그런 식품들의 소비가 가장 많은 곳이 바로 중국이기 때문에 오히려 중국은 한국보다 더 민감할 수밖에 없다.[71] 중국 정부는 이런 문제를 일으킨 범죄자들에게 사형을 때려버린다. 중국의 생활 수준이 나아지면서 이 문제에 굉장히 민감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군에도 간부와 사병 간의 식사에 질적인 차이는 존재하고 군구 별로도 차이가 있다. 경제 사정이 나쁜 지방의 군구면 병영식의 질도 떨어진다.

다만 중국군의 비리는 조 단위로 놀 정도로 문제도 심각하고 언론통제가 심한 국가이기도 해서, 중국의 병영식에서 과연 별 문제가 없는지 의심해 볼 여지는 있다.[72]

4.10. 튀르키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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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잘 나온 것.
이건 조리병과 배틀 떠야 할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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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역만리의 식단에서 익숙한 냄새가 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식판에 담긴 건 많은데 표정이 썩었다

튀르키예에서는 맨날 콩과 칠면조만 준다.[73] 그리고 가지로 만든 요리에 대한 악명도 높다. 그래서 튀르퀴예군 병사들도 외출이나 휴가를 나오면 피자를 자주 먹는다고 한다.

튀르키예군은 병영식의 검역이 부실하고 군납비리가 심해서 곧잘 식중독 사건이 터지고 있다. 위에 조리병과 배틀 떠야 할 메뉴의 사진도 식중독으로 75명 감염, 3명 중태라는 기사에서 올려졌던 것.

4.11. 프랑스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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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프히트(홍합-감자튀김), 살라미, 브리치즈가 나오는 식사.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과의 식사 자리. 장소는 서아프리카 말리.

유럽에서 먹는 것에 목숨거는 것은 이탈리아와와 쌍벽을 이루는 국가답게 병영식도, 전투식량의 품질도 높은 편이다.

4.12. 이탈리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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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말리아 국경에 주둔하고 있는 이탈리아 육군 조리병.
NATO 신속대응군 소속의 이탈리아 지원단 조리병이 빵을 구울 준비를 하는 중이다.

유럽에서 프랑스와 쌍벽을 이루는 미식의 나라로 유명한만큼 병영식의 질도 높은 편이다.

2000년대 유행했던 인터넷 밈 이탈리아군의 졸전 기록에서는 이탈리아인들은 전쟁터에서 파스타나 먹으려고 한다거나 적국 포로에게 자국 군대에서 주던 병영식보다 맛있는 식사를 줬다는 식으로 놀리기도 했다. 그러나 잘 먹어놓고 못 싸웠다는 것과는 별개로 군대가 군인들에게 좋은 식사를 제공한다는 것은 놀림거리가 아니라 당연히 해야하는 일이며 아직도 군대는 당연히 춥고 배고픈 곳이어야 한다는 일본식 사고방식이 한국에 많이 남아있기에 놀림감이 된 것이다.

4.13. 인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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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지대 주둔군의 야전식 일요일 아침 식사는 간단하다.
점심은 이렇다.여기도 왜 동질감이 느껴지는가 저건 똥국이 아니라 커리야
인도는 종교에 따라 금지되는 식품들이 있기 때문에 병영식 개선이 난감하다.[74] 다른 것보다도 문민통제를 위해서 민족, 종교를 일부러 섞어서 부대를 편성하기에 식단을 맞춰주기가 대단히 어렵다.

4.14. 알바니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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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 내전 당시 코소보에 주둔 중이던 알바니아군에서 배식 준비를 하는 중이다.[75]

4.15. 필리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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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군 짬밥.[76]

4.16. 노르웨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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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군[77]

4.17. 스웨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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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기갑부대의 야전 취사[78]

4.18.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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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 카불, NATO군의 크리스마스 병영식.

5. 관련 문서



[1] 미국이 보급품을 만들 능력이 없거나 그걸 수송할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한국 지도에 그려진 도로가 미국에서 보던 깔끔한 도로라고 잘못 알고 엉터리 보급계획을 짜는 바람에 수송트럭이 병사들에게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지게와 조선낫으로 무장한 미국군 병사들이 태백산맥을 뚫고 악전고투하며 보급을 전달했을 정도.[2] 제임스 카디널(James Cardinal) 당시 미육군 1기병사단 5기병연대 I중대 소속.[3] 하도 배가 고파서 부대에 있던 한국인(카투사)들에게 달러를 주고 먹을 것 좀 구해오라고 보냈는데, 소나 닭을 가져올 줄 알았던 카투사가 잡종개 한 마리를 끌고 왔다고. 당연히 제임스와 미군들은 이걸 어떻게 먹냐며 식겁했지만, 결국 3주 후에 굶주림에 지쳐 잡아 먹어버렸다.[4] 한번은 왕이 결혼기념일이라 왕비와 오붓하게 식사를 하고 싶어서 신하에게 밥을 궁전으로 배달해 오라 지시한 적이 있었는데, 신하의 반응은 "헛소리 집어치우고 빨리 오십쇼 안 오시면 밥 없습니다" 였다.[5] 돼지는 가축 중에 양과 더불어 누린내가 심한 축에 속한다. 현대에야 향신료와 조미료, 숙성 등으로 누린내를 잡지만 저 당시에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었다. 누린내나는 고기에 비린내나는 선지까지 때려넣고 채소 한점 없이 딸랑 소금과 식초만 썼으니 맛과 향이 어떨지 짐작할 만 하다.[6] 물론 스파르타 시민권자라면 헤일로타이들이 농사지은 수확물을 받을 수 있어 어지간해서 못 낼 일은 없었다.[7] Polenta. 옥수수가 전래된 이후에는 옥수수 가루로 만드는 이탈리아의 아침 식사용 스프를 가리킨다. 아스테릭스에서 등장한다.[8] 당시 로마인들의 취향은 폭신폭신한 빵보다 단단한 빵이 인기가 더 있었다. 부풀려서 만든 빵은 양을 속이는 듯한 이미지가 있었기 때문이라고.[9] 불을 사용할 수 있을 경우 끓인 물에 건빵을 넣어 죽처럼 만들고 거기에 말린 고기나 무화과등을 넣어 만들었다. 조미료가 귀했기 때문에 맛은 없었다.[10] 사실상 식초. 맛은 접어두더라도 건강에는 좋았을 것이다. 실제 大카토는 평소에 시어진 포도주를 물에 타서 마셨고, 매우 피곤할 때만 제대로 된 포도주를 마셨다. 그 덕분인지 카토는 당대에 85세라는 상당히 많은 나이까지 장수했다.[11] 로마 병사들은 이 식초가 된 포도주에 물과 , 허브, 소금을 타서 마셨다. 포스카(Posca)라고 불린 이 음료수는 박테리아에 오염되기 쉬운 맹물을 식초의 아세트산으로 살균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포스카를 지급하지 않고 그냥 물을 마시게 하는 것 자체가 가혹행위 혹은 형벌이었다. 여기에 약간의 소금을 첨가하여 전해질 보충을 하기도 했다. 현대의 기준으로는 스포츠 음료와 정수제의 조상격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갈증을 호소할 때 그를 안쓰럽게 여긴 로마 병사가 해면에 포스카를 적셔 건네준 바 있다.[12] SHA, Hadrian X, 2[13] 로마에서는 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만 소의 도축이 허용되었다.[14] 켈트인들도 포도주를 마시기는 했지만 이들이 주로 살았던 중부유럽 지역이 포도 재배가 어려웠기 때문에 손님에게 대접하는 등 귀한 대접을 받았다.[15] 다만 손자병법에서 취하라는 건 적의 군량이지 민간이 아니다.[16] 손자병법의 예를 드는 경우가 있으나, 손자는 이전 장에서 '명장은 보급로를 길게 늘이지 않는다' 등으로 보급의 중요성을 몇번 강조하고 있다. 손자병법 내부에서 약탈을 권장하는건 남의 것을 뺏어서 내가 쓰면 적에게 수십곱절 손해니까 요긴하게 쓰라는거지, 눈 돌아가서 약탈하란 소리가 아니다.[17] 물론 '전투 중'인 현대 군인들이 4200킬로칼로리를 소모하는 것이고, 중세 병사들은 행군만할때나 주둔만 할때도 저만큼 먹었다.[18] 조리병이 생겨난 것은 1차대전 이후, 정확히는 1차대전 초반 이후이다.(관련글)[19] 또한 개개인, 혹은 몇명 정도의 소규모 그룹이 각자 조리도구를 챙겨야 했는데, 크기와 무게탓에 가지고 다니기 번거로워 조리도구의 종류나 수량, 크기등이 제한되면서 짬밥의 질이나 종류에 큰 한계가 생기기도 했다.[20] 해군은 예외였는데, 불을 피우기 어렵고 한번 보급 받은 것으로 잘 분배해 써야 되는 해군 특성상 예전부터 식량 담당이 따로 있어 식사를 분배하거나 일괄 조리했다. 전통적으로 바다에서 요리 계열 인원 파워가 쎈 이유가 다 있는것.[21] 단, 이건 재료가 풍족한 때나 만들어 먹는 고급이며 물자가 부족한 야전에서는 풍족한 식사를 기대하기 어려웠다.[22] 시장경제가 발달하지 않은 조선에서 명에서 하던 것처럼 은자로 식량을 사려고 하니 살 수가 없어 보급 문제가 발생했고 약탈이 빈번히 발생했다. 이에 따라 명나라 총관이 규정한 것이긴 하나, 이건 약탈에 대비한 배급 기준에 가깝지 실제로 매번 이렇게 지급되었다 보긴 어렵다.[23] 홉보다 더 작은 부피 단위로 10작이 1홉이다.[24] 일본 도량형 기준으로 약 360cc[25] 조선 도량형 기준으로 약 420cc[26] 그래서 일본군이 오래 버티려고 일부러 식사량을 줄인다는 오해도 생기기도 했다.[27] 난중일기를 보면 병사들이 술 마시는 것에 대해서는 너그러운 편이다. 원래 동서고금을 막론하는 군대에 술은 사기유지 차원에서 매우 중요했다. 전투와 훈련으로 인한 심신의 피로를 풀어주기에 술만큼 좋은 게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만 술을 훔치거나 빼돌리는 놈들은 알짤 없이 패대기쳤다.[28] 표범고기도 있는데 약으로 쓴 듯 하고 가죽은 조정으로 보냈다.[29] 임진왜란 때 일본 수군을 지휘한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한산에서 일패도지하여 미역으로 연명한 일이 있었는데, 그가 먹은 미역은 통영 거제 일대 특산물로 이름난 견내량 돌미역이다. 조선 수군은 물론, 왕실에까지 진상할 정도로 질이 좋았다. 이순신 본인도 미역국을 즐겨 먹었고, 공무가 다망할 때에는 그냥 미역을 밥에 섞어 먹었다.[30] 실제 조선시대 기록을 봐도 닭보다는 꿩을 더 많이 먹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조선시대 토종닭은 무진장 질기기 때문이다. 이것을 먹을 만하게 만들려면 조리시간도 4~5시간 가량으로 굉장히 길다. 괜히 꿩 대신 닭이라는 속담이 남아있는 게 아니다.[31] 먼 훗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합중국 해군아이스크림을 비롯한 간식의 확보를 매우 중요시했음을 감안하면, 수세기를 앞서간 선진적인 병영 복지였다고 볼 수 있다.[32] 배식량 부족문제가 없어진 것은 생각보다 얼마 되지 않았다. 보릿고개가 없어진 건 1970년대 들어서이며, 베트남전 당시에도 고기 반찬이 안 나와서 느끼한 C-레이션의 주식을 대용 고기 반찬으로 생각하며 먹어야 했던 상황이었다. 군대의 배식량에 대한 불만은 1990년대까지 계속 나왔다.[33] 난중일기와 다른 기록에 따르면 전쟁 초기 해안 인근 9개 고을에서 조세를 거둬 식량을 해결하려 했으나, 조정과 육군의 반대로 자체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1593년 윤11월 선조에 장계를 올려 둔전 승인을 받아냈을 정도.[34] 병영이 위치한 전라도에서 조정이 걷어가는 쌀과 세금이 과다해 병영을 유지하는 농어민들까지 힘들어지자 조정에 지나친 세금 징수에 반대하는 장계를 올려 세금량을 줄인 기록도 있다.[35] 오늘날 국군의 1일 쌀 섭취량이 규정상 300~400g(조리하기 전의 쌀 무게)인것을 보면 무려 현대인의 약 3배를 섭취한 셈이다.[36] 대개 떡이나 볶아서 과자처럼 만든 현미, 또는 쪄서 말린 밥이 지급되었다[37] 로마에서부터 이어진 전통인데 일단 먹을 수 있는 것을 한 냄비에 넣고 끓이는 것이다. 이렇게하면 건빵은 부드러워지고 말린 음식들도 향미가 살아나기 때문. 로마에서는 건빵과 무화과를 물에 끓여 죽처럼 먹었으며 남북전쟁 시기는 건빵과 절인고기, (만약 있을 시)약간의 야채를 같이 끓여 먹었다. 물론 시대를 초월해도 변하지 않는 것은 변하지 않듯 맛은 끔찍했다고 한다.[38] 영국군도 채소를 배급하긴 했지만, 나레이션의 언급에 따르면 배급 채소는 대개 동결건조되어 비쩍 마른 것이라 맛이 없었다. 그래서 신선한 채소는 돈을 주고 구입하거나, 나레이션에 나오듯이 몰래 서리하거나 텅빈 농장에서 가져오거나 했다.[39] 교대 근무자도 만들어 먹어야 하기에...[40] 나레이션의 언급으로는 물을 너무 많이 부으면 핑크색 요리가 된다고 한다(...).[41] 티타임에 정신이 팔린 보병들의 사망 사례는 그냥 흔한 일이었고, 심지어 티타임 준비하러 물을 끓이려고 밖에 나갔다 사망한 전차병들이 한둘이 아니었다던지, 티타임에 정신이 팔려 격침된 군함의 사례까지도 있을 정도다. 그래서 현대의 챌린저 2 전차 등은 과거 전훈과 사고사례를 반영해 차내에서 저격 등의 위험없이 홍차를 끓여마실 수 있도록 물끓이는 기계까지 장비해 두었다.[42] 재현영상 출처는 영국 Royal Navy and Royal Marines Charity로 영국 군인들을 위해 자선사업을 하는 공식 재단이라 고증이 잘 되어 있다.[43] 심지어 지금까지도 없어지지 않고 남은 영국군의 문화이며 각박하고 위험한 전장서도 잠깐의 이완과 휴식은 효율성에 영향을 크게 미치기 때문에 득이 실보다 커서 없애지 않는 듯 하다.[44] 위에서 소개된 스미스 이병의 짬밥이다. 사용한 반합은 무려 2차대전때 쓰이던 물건이라고 한다.[45] 정확히는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서 허버트 소블이 만들라고 요구한 스파게티를 재현한 것.[46] 군인봉급법-Wehrsoldgesetz[47] https://www.buzer.de/s1.htm?g=wsg&f=1[48] 견장의 'K'는 러시아어로 사관생도를 뜻하는 Кадет의 앞글자이다.[49] 미군은 이미 제2차 세계 대전 당시부터 대형 통조림 형태로 식사를 제공했고, 한국군은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을 당시 미군이 A-레이션 재료를 한국군에 떠넘기려는 의도를 파악하고 "정글 속을 헤치며 다니는 전투병 보고 갈비짝을 등에 지고 싸우라는 거냐!"고 격렬하게 항의하여 C-레이션을 보급받은 사례가 있다. 취사차량이 언제 공격받을 지 모르는 전선에서는 재료를 손질하는 시간조차 아껴야 정상이다.[50] 이 사진은 이탈리아 비첸차의 미합중국 육군 기지추수감사절 때의 모습이다. 추수감사절 등 몇몇 기념일엔 사진처럼 고급 장교들(연대장, 대대장 등)이나 고급 부사관들(주임원사 등)이 정복 차림으로 직접 배식하는 게 미군의 전통이며, 최고 통수권자인 대통령 또한 조지 W. 부시 이래 임기중 한 번 정도는 해외 주둔지나 보훈시설에 가서 배식을 한다.[51] 구 국군방송에서 미군 생도들의 훈련을 소재로 한 다큐가 방영된 적이 있었는데, 각 팀별로 훈련기간 동안 먹을 살아 있는 닭과 오리를 지급해 주곤 훈제로 만들든 말든 알아서 하라고 했는데, 한 팀은 쓰러진 자작나무를 활용한 간이 케이스 를 만들어서 거기에 가두어 놓았다.[52] 우유, 주스, 쿨에이드, 소프트드링크 파운틴 등이 있다. 콜라를 타 가고서는 식탁에서 설탕을 왕창 부어마시는 막나가는 인원도 있다.[53] Area I도 한국인 컨트랙터가 끼어 있지만, 취사와 배식은 전적으로 조리병이 담당한다. 한국인은 설거지와 청소 정도.[54] 중국군의 1일 식비는 11위안이다. 달러로 환산하면 1.7달러가 좀 넘는 수준이다.[55] 카투사들이 많이 보인다.[56] 같은 이유로 부대 환경미화 등도 한국 민간인들이 위탁받아 하는 경우가 있다. 본토 기지에서 그런 잡무는 일부를 빼면 군인들이 직접 한다. 본토에 있는 것보다 심신이 힘든 해외 근무자들의 업무량을 줄여 주는 일종의 공평한 배려이기도 하다.[57] 사실 집밥이나 외식이 더 맛있다고 여기는 건 한국군이나 미군 뿐만 아니라 어느 나라 군인이나 마찬가지다.[58] 사막의 폭풍작전으로 유명한 노먼 슈워츠코프 장군은 병사들이 병영식으로 나오는 햄버거가 맛이 없다고 항의하자, 직접 맛을 보고 병영 내에 빅맥을 입점시키는 특단의 조치를 내린 적도 있었다.[59] 현역 군인의 16%가 비만이며, 퇴역자와 그 가족의 80%가 과체중, 33%가 비만이라는 통계가 나왔다. 그 때문에 현재 고기와 과자류는 통제하고 있지만, 탄산음료나 초콜렛 음료는 여전히 방관하는 실정이다.[60] 미 해군은 6000억짜리 부식 제조함대고속전함 엔진을 장착한 고속 보급함처럼 유지비가 타국 급양함보다 훨씬 많이 들어가는 함선을 따로 배치했을 정도로 수병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먹이는 것을 중시한 집단이었다.[61] 다만 예고도 없이 저녁식사에 Surf & Turf 같은 특식이 나오면 보통은 항해가 급작스럽게 연장되어서 위로 차원으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분위기가 뒤숭숭해지는 경우도 있다.[62] 남한에서 흔히 보는 그런 잡곡밥보다는 옥수수밥에 가까운 음식이라고 한다. 아예 옥수수만 넣고 만든 밥도 있다.[63] 그나마도 채소 건더기도 거의 없는 그냥 짠물 수준이라 소금국이라고도 불린다.[64] 물론 북한 기준이고, 남한 기준으로 치면 고기 반찬이 별로 안 나오기 때문에 부실하다.[65] 어찌보면 재미있는 게 이 업체는 프랑스 업체다.[66] 다큐멘터리에서 영국군 신병이 이렇게 말했다.[67] 여담이지만 컵라면이 본격적으로 인기를 얻은 것도 그 유명한 아사마 산장 사건 당시 컵라면을 취식하던 경찰 측 진압대원들의 모습이 매스컴을 탄 이후라는 설이 있다.[68] 당시 병사들은 가난한 농민들이 태반이었고 승진해 돈을 더 탈려고 노력하는 장병들도 꽤나 많았다고 한다.[69] 주요 반응은 우릴 지금 거지 취급하냐!? , 우리가 이럴려고 군대에 왔나?! 등 이었다고 한다.[70] 그 외에도 서양식 으로 배식 했으나 당시 불교의 영향이 아직까지도 강해서 종교적인 이유로 고기 스튜를 거부 했다고 하며 빵도 일반 장병들 에겐 듣도 보도 못 한 거여서 이질감과 거부감이 들어 출항 할 때 마다 빵을 바다에 버려 빵이 바다에 둥둥 떠다니는 광경을 봤다는 목격담도 존재 했다고 한다.[71] 당연한 게 먹는 거에 장난을 치고, 이러한 먹거리가 자국 내에서 유통되면 자국 안보에 해가 되기 때문이다. 이는 전 세계 어디든 마찬가지다.[72] 중국 전투식량은 맛이 없다고 중국 언론에서도 보도된 바 있는데다, 이를 입수해 시식한 유튜버가 배탈이 났고, 초록색으로 변색된 고기를 보여주며 분개하기도 했다. 이 유튜버는 2차대전 전투식량부터 남북전쟁 시기 건빵까지 먹어본 사람이다.[73] 칠면조 고기는 닭가슴살 만큼이나 퍽퍽하고 맛이 별로다. 더구나 튀르키예군에서는 굽지 않고 삶거나 찌거나 끓이는 모든 요리에 사용하고 있는데, 맛이 나아지지 않는다. 특히 찜요리일 경우 칠면조 고기가 굉장히 질겨진다. 콩은 너무나 많이 줘서 제대하고 나서 콩은 쳐다보지도 않을 정도.[74] 다만 종교에 따라 금지되지 않는 음식 위주로 메뉴를 늘리고 질이 좋은 재료 사용, 숙련된 조리사 고용 등으로 병영식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다.[75] 빵을 저렇게 쌓아 놓고 배식하는 건 2차 대전 때나 볼만한 광경이다.[76] 부들(따갈로그어로 '먹을거리, 음식'.) 파이트(Boodle Fight)라는 일종의 행사 특식 내지는 회식으로 원래 야전에서 도구 없이 빠르게 식사하는 훈련에서 유래했다.[77] 노르웨이군은 기후변화에 의한 식량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소, 돼지를 비롯한 육류 소비를 줄이고 배추, 무를 비롯한 채류 소비를 늘리기로 했다. 육류를 좋아하는 군인들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겠지만.[78] 전차 엔진에서 올라오는 열기를 이용한다고. 실제 스웨덴 뿐만 아니라 타국 기갑부대에서도 엔진의 열기를 조리나 보온에 이용하고 있다. 2차 대전 시절부터 내려온 전통(?)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기록 필름을 찾아보면 독일군 병사들이 전차에서 요리를 하는 장면을 심심치않게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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