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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1 10:46:16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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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
파일:external/i2.media.daumcdn.net/20140320145510628.jpg
<colbgcolor=#bc002d> 발생일 1987년 3월 22일
발생 위치 부산직할시 북구 주례동 산18[1]
유형 납치, 강제 수용소, 강제노동
원인 원장 박인근 개인의 금전적 이득(지원금 절취 및 포탈)
인명피해 <colbgcolor=#bc002d><colcolor=#fff> 사망 531명 이상[2]
실종 불명
부상 불명
구조 알 수 없음

1. 개요2. 실체3. 사법처리4. 사건 이후
4.1. 형제복지원 피해자 한종선 2012년 국회 앞 1인 시위4.2. 형제복지원 피해자 최승우 국회의사당역 고공농성
5. 형제복지원 사건 언론 보도6. 박인근의 변명7. 21세기에도 건재했던 범죄자8. 검찰의 비상상고9. 대한민국 법원의 국가 손해배상 책임 인정10. 여담11. 관련 자료
11.1. 형제복지원 홍보 영화 - 종점 손님들11.2. 형제복지원 사건 진실규명 및 해결방안 모색을 위한 토론회(2013년)11.3. 인권운동사랑방 《인권오름》11.4. 한겨레 - 형제복지원 대하 3부작(2014년)11.5. SBS 그것이 알고싶다 932회11.6. AP통신 - 전두환 정권의 형제복지원 사건 은폐 폭로11.7. JTBC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 184회11.8. MBC 탐사기획 스트레이트 74회11.9. 부산일보 《살아남은 형제들(2020)》11.10. tvN 알아두면 쓸데있는 범죄 잡학사전 1회11.11.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1회11.12. MBC PD수첩 1348회11.13. 기타
12. 관련 문서13. 외부 링크1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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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external/hr-oreum.net/post.jpg
피해자 한종선이 당시를 증언하며 그린 그림에 80년대 걸개그림으로 잘 알려진 전승일 작가가 채색하고 신문기사와 합성한 이미지#
1975년부터 1987년까지 당시 전국 최대 규모의 부랑인 수용시설이었던 부산 형제복지원에서 부산시, 더 나아가 정권에 의해 일어난 인권유린, 국가 폭력, 학살 사건.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악의 학살 사건 중 하나로 꼽히며 1987년 말까지 수용자 학대가 자행되었다. 특히 1980년대에는 전두환 정권의 묵인, 방조 혹은 협력 하에 1986 서울 아시안 게임1988 서울 올림픽 개최를 전후로 장애인, 부랑자 단속이 극심했다.[3]

12년간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피해자 수는 최소 513명(박인근의 주장)으로 알려졌지만 시체는 암매장 또는 근처 의과대학에 해부용으로 돈을 받고 팔았기 때문에 정확히 몇 명이 죽었는지 확인이 불가능하다. 2022년 8월 진실화해위원회 조사 결과에 따라 공식 사망자만 657명으로 늘었다.

수천 명의 원생들 중 70%가 일반인이었으며 형제복지원 직원들에 의해 납치, 구금되었다. 당시 납치에 부산시청과 부산 경찰이 적극 협조하였기 때문에 원생들은 탈출해도 공권력에 의해 다시 잡혀들어갔다. 게다가 2022년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전두환도 뒷배를 든든히 책임졌으므로 피해자들은 한 번 붙잡힌 이상 외부의 도움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원장 및 관리자급 직원 4명이 체포되어 특수감금죄 등의 혐의로 기소됐으나 윗선의 지시로 살인죄로는 기소되지 않았으며 반정부 시위로 번질 것을 두려워한 전두환의 지시로 2년만에 석방되었고 원장은 2011년 사임을 전후하여 치매를 앓다가 2016년 사망했다.

인류사에 있는 무수히 많은 학살들 중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정말 특이한 방식의 학살인데 절대다수의 학살은 정부나 군대에서 주도하는 일이 많지만 이 사건은 정부에서 일한 적도 없는 일개 민간인이 정부의 지원을 바탕으로 사실상의 살인공장을 만들어 수백 명의 자국민을 학살한 것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내부에서 같은 한민족이 한민족, 그 중에서도 특정 계층을 감금하고 인권을 유린했다는 점은 사실상 북한정치범수용소소련굴라크 등의 강제수용소와 결이 같아 일각에서는 한국판 아우슈비츠 라고 불린다. 허울 좋은 명분을 내세우며 반인륜 범죄를 저질렀다는 점에서는 짐바브웨의 '국립 청소년 서비스 캠프'[4]와도 비슷하다.

2. 실체

파일:external/pressian.wcms.newscloud.or.kr/20130626134129.jpg
1. 서로 서로 도우고 사랑하자.
2. 열심히 배우고 연구하자.
3. 정직하고 충실한 일꾼이 되자.
- 형제복지원의 원훈

형제복지원은 육군 부사관이던 박인근이 1962년에 장인으로부터 인수한 감만동 형제육아원(1960년 개원)을 모태로 한 개신교계 부랑인/부랑아 보호시설로[5], 인수 후 용당동으로 이전했다. 1965년에 사회복지법인화하고 부산시로부터 아동복지시설 인가를 받았다. 1971년에는 기존 목적이던 유아보호시설에서 부랑아 보호시설로 변경했고 박정희 정부가 대대적인 부랑아 단속을 위해 발표한 1975년 내무부훈령 제410호에 근거하여 부산시 부산진구 주례동 산18번지[6]의 토지를 사서 이듬해에 준공했다. 1979년에 형제원에서 '형제복지원'으로 명칭을 바꿨으며 1983년부터 부랑아/부랑인 직업보도 업무를 개시했고 이듬해에는 정신요양원을 열었다. 기관지로는 월간 <새마음>이 있었다.

1975년 이후 12년 동안 국고 횡령, 아동 강제 노동 등의 천인공노할 범죄 행위를 자행해 오다가 1987년 3월 22일에 시설 직원들의 구타로 원생 1명이 숨지고 35명이 집단 탈출하면서 그 실체가 세상에 알려졌다. 부랑아 선도를 명목으로 길거리나 역에서 노숙자, 행려병자들, 고아들은 물론 통금 이후에 돌아다니는 사람부터 심지어는 그냥 길 잃은 어린아이까지 무차별적으로 끌고 가서 불법적으로 감금 및 강제 노역을 시켰다.[7] 원생들을 중대나 소대별로 나누어 관리하고 원장-부원장-총무-중대장-소대장-조장-조원 순으로 수직적으로 통제하는 군대식 구조를 지녔다. 시설 측은 탈출을 막기 위해 경비원 13명과 경비견 13마리를 풀어 24시간 감시했으며 축사 주위에 철조망 및 초소 2개도 설치했다.

시설 측은 미성년자 유인 약취, 납치, 폭행을 동반한 납치 등 갖은 방법으로 사람들을 모은 후 저항할 수 없게 하기 위해 다시 폭행을 가했다. 이 과정에서 저항을 꺾을 수 없으면 살해, 유기하였고 순종적으로 만들어 길들이고 자신의 명령=옳다를 증명하기 위해 세뇌시켜 일을 시키는 도중에도 갖가지 이유를 만들어 매일 구타를 가했다. 잡혀온 피해자가 10세 이하의 아동이라도 예외는 없었다. 1984년 개금국민학교가 시설 내에 분교(통칭 개금분교)를 차리기는 했으나 일부 아동들만 뽑혀 통학했으며 정상적인 교과 과정은커녕 시설과 박인근 원장을 찬양하는 교육만 받은 데다 주의가 산만하면 교사와 총무계장이 가차없이 폭행을 가했다. 같은 시기에 야간중학교가 차려지긴 했으나 1985년경에 폐교됐고 개금분교와는 달리 미인가 교육기관이라 원생 명단이 없다.

젊거나 나이 어린 여성, 그리고 일부 남성[8]에게는 구타 이외에도 성폭행이 더해졌으며 거의 모든 피해자들에게는 제대로 된 식사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복지원 내부에 식료품 공장도 있었으나 대부분 외부로 판매되었고 모두의 국가보조금과 작업 수당까지 원장에게 뺏겨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으며 신민당 실태조사단 1차 보고서에 따르면 일반 수용자들의 수당은 1일 3~5백원, 장애인들은 2백원, 요양원 입원자는 3일에 버스 토큰 1개씩이었다.

외부에 선전하기 위해 몇몇 적금통장이 만들어졌지만 복지원에서 나가려면 도망치거나 시체가 되는 방법밖에 없다시피했으니 피해자들이 그 돈을 받는 일은 없었으며 설령 탈출을 시도하려고 해도 경비원들에게 잡혀 두들겨맞았다.

정신요양원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는데 원칙적으로 의사 2명의 진단과 경찰 입회 하에 입원해야 했으나 이들 중 70%가 변칙 입원된 일반인들이었다. 복지원에서도 악명높은 부랑인을 실장 또는 소대장으로 뽑아 통제하고 입원자 가족들에게 월 10~15만원을 받으면서도 치료라곤 1일 3~4회씩 신경안정제만 놔줘서 중독 상태에 놓인 피해자가 흔했다.(참고)

피해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라곤 몸을 뉘일 허술한 공동 숙소와 빈곤한 식사뿐이었는데 당연히 숙소 건설과 식사 준비 역시 모두 피해자들이 스스로 해야 했다. 당연하게도 질병 치료는 엄두도 낼 수 없었으며 지속되는 구타와 고된 작업으로 수많은 피해자들이 사망하였다.

이런 일이 무려 12년 동안 지속되면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원생의 수만 513명에 이른 것으로 알려졌다.[9] 여기다 일부 원생들의 시신은 인근 의과대학에 해부실습용으로 3백~5백만원에 팔려나갔다. 수천명의 원생 중 약 70%가 억울한 케이스였다. 가족이 있고 멀쩡한 직장이 있는 건강한 성인 남성이 밤늦게 퇴근하는 길에 잡혀가서 4일만에 '폐렴 및 합병증'으로 몸에는 수많은 타박상을 남긴 채 사망해서 나오는 식이었다.

가장 주목할 점은 이 사건이 한 개인의 부도덕 문제에 한정지을 것이 아니라 부산시 공직 사회가 공조했다는 것이다. 소위 소대장이라고 불리는 감독관 중 대장격인 왕소대장이라고 불렸던 이의 증언에 의하면 부산시, 부산시 사회복지과, 부산경찰 모두의 합작품이었다. 시설 관리를 전문지식이 없는 북구청 주사보 1명이 맡았으며 ​암묵적으로 돈을 주고 받으면서 폭력, 비리에 방조하였고 납치도 적극적으로 밀어주었다. 원생들의 증언에 따르면 자신들이 원래 사는 곳을 알려주어도 "찾아 줄 테니 경찰차에 타라"고 하고 복지원으로 데려다 주었다고 한다. 후에 수사가 이루어지자 당시 김주호 당시 부산직할시장은 담당 검사에게 청탁 전화를 하고 보사부장관에게 원장이 바로 석방되도록 건의하는가 하면 문민정부 시절에 법제처장을 지낸 송종의 부산지검 차장검사는 수사 철수를 지시하는 등[10] 부산시 공직사회가 전체적으로 공모한 문제였다.

여기에 더해 당시 부산시 의료 관계자들도 부검서류를 날조하거나 사망 원인을 고의로 날조하는 등 학살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으며 병리과 의사[11]가 아닌 산부인과 의사가 부검을 맡는 등 의료행정도 개판이었다. 내무부훈령상 관할 지서/파출소장이 1주에 1회 순찰토록 했음에도 이행되지 않았다.

그야말로 현실에 나타난 지옥도로, 피해자들이 같은 부산시민인데도 사회의 그 누구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애초에 수감자들을 같은 사람으로 봤는지도 모르겠지만...

파일:external/www.sisamagazine.co.kr/3033_1229_3014.jpg

박인근은 직업군인 출신으로, 1948년 국방경비대에 입대하여 4.19 혁명 당시 육군모부대 특무상사로 근무했다고 한다.[12] 1960년 부산 감만동에 형제육아원[13]을 설립/운영하면서 매년 20억 원에 달하는 국고를 지원받아[14][15] 횡령, 착복하여 고급 아파트나 콘도, 골프 회원권을 샀고 경남 울주군 청량면 삼정리에 있는 자신의 야산 27만여m²에 있는 개인 토지에 목장과 운전 교습소를 세운다며 원생들을 축사에 감금시키고 하루 10시간씩 강제 중노동을 시켰다. 이쯤 되면 나치 독일, 일본 제국과 다를 바 없는 짓을 대한민국에서 자국민을 상대로 저지른 셈이다. 이를 바탕으로 1981년 국민포장 석류장, 1984년 국민훈장 동백장 등 온갖 수훈을 받고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상임위원까지 역임했으며 1982년에는 MBC에서 이 시설을 다룬 2시간짜리 대형드라마 <탄생(극본 심영식, 연출 이병훈)>이 방영된 바 있다.

3. 사법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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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당시 부산지방검찰청 울산지청의 김용원[16] 주임검사가 포수와 함께 사냥을 나갔다가 현장을 발견하고 이를 사진으로 찍은 뒤 압수수색 영장을 받아 복지원의 참상과 비리를 목격했다.

1987년 1월 17일에 원장 박인근을 비롯해 총무 김돈영, 사무장 주영운, 목장파견대장 성태은, 목장파견대 소대장 임채흠 등 5명이 각각 횡령, 특수감금죄와 외화관리법[17], 초지법[18], 건축법위반[19] 혐의로 울산남부경찰서에[20] 구속되었다. 구속 당시에도 박인근은 복지원 운영에 관여하는 한편 경찰관의 집이나 여관에서 수갑을 푼 채 목욕을 하거나 송 모 경사의 도움으로 병원에 가는 등 4월 10일부터 5월 16일까지 32회나 외출이 허락됐다. 이 사실이 언론에 알려지자 송 경사는 해직됐다. 전국부랑인시설연합회도 1987년 2월에 구속 상태인 박인근을 회장으로 뽑았지만 여론의 반발로 이를 철회했다.

정작 전두환 정부에서는 이 사건을 빨리 덮어 버리고 싶어했는데 일단 전두환 본인이 강제수용 지시를 했던 터라 세부 사항을 알았건 몰랐건 명백히 책임 소재가 있는 문제였기 때문이다.관련 기사 이 사건이 일어난 1987년 3월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서 6월 항쟁으로 이어지는 격동의 시기였고 시민단체의 활동이 싹트려고 했던 만큼 이러한 사건이 계속 일어날수록 반정부 성향이 강하게 드러나게 될 것이 자명하고 정권에 득이 될 것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외압을 넣어 검찰은 박인근에 대해 고작 징역 15년과 벌금 6억 8,178만원을, 김돈영 등 공범들에게는 각각 3~7년밖에 구형하지 못하였고 이조차 줄어들어 1987년 6월 23일 부산지방법원 울산지원은 1심에서 박인근에게 징역 10년과 벌금 6억 8,178만원을 선고하는 데 그쳤으며[21](87고합33) 11월 대구고등법원 항소심 재판에서 주간감금행위를 무죄로 보고 징역 4년을 선고했다가(87노1048) 1988년 3월 8일 1차 상고심에서 파기환송됐다.(87도2671)

동년 7월 7일 대구고법은 1차 파기환송심에서 박인근에게 징역 3년을 선고했으나(88노144) 2차 상고심은 이를 번복했고(88도1580) 1989년 3월 15일 대구고법 2차 파기환송심에서는 벌금 없이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하고(88노593) 7월 11일 대법원은 3차 상고심에서 김용원 검사 측의 상고를 기각했다(89도698).[22] 이에 따라 박인근은 출소하였고 6억여 원의 벌금도 재판을 거치면서 결국 없어졌다. 심지어 폭행, 살인, 시신유기, 시신암거래 등은 기소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

형제복지원은 세월이 흘러 흔적도 없이 철거되어 현장에서 증거수집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전두환은 박인근에 대해 "박 원장은 훌륭한 사람이오. 박 원장 같은 사람 덕분에 거리에 거지도 없고 좋지 않소"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사, #, # 전두환이 형제복지원의 박원장이 구속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에 대해 한 말이다. 이 평가 한 마디에서 형제복지원 사건의 뒷배를 책임진 권력이 드러난다. 형제복지원이 세워진 배경부터가 4공의 절정기인 1975년에 발효된 "내무부 훈령 410호"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노태우를 제외한 군사정권 전반에 배경이 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AP통신의 폭로로 전두환 정권이 형제복지원 사건을 조직적으로 은폐하려고 한 사실이 드러나 의미가 없어졌다. 전두환은 1995년 구속사형까지 선고받았다가 1997년 대법원에서 무기징역 선고 후 12월 특사 때 석방되었다.

31년 뒤인 2018년 11월 20일 문무일 검찰총장이 이 사건과 관련한 비상상고를 대법원에 요청하였다.# 다만 과거 판결을 바로잡는다고 해도 이미 내려진 무죄 효력은 뒤집지 못한다. 비상상고 제도가 재심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4. 사건 이후

부랑인 수용시설의 인권 침해 문제가 언론과 시민단체의 화두로 등장하자 내무부는 1987년 2월 16일 훈령 410호를 폐지하고 부랑인과 관련된 업무를 보건사회부에 맡기도록 했다. 부랑인 시설 운영 개선을 위해 입·퇴소절차 개선, 수용보호의 전문성 확보 및 직업보도 강화 등 복지서비스 제고 및 시설운영의 내실화에 관한 부랑인 선도시설 운영규정(1987.4.6)을 제정(보건사회부 훈령 제523호)하였다.

이에 따라 부산직할시는 박인근 대표 등 기존 이사진들을 공식적으로 몰아내고 그 자리에 관선 이사들을 파견하도록 한 뒤 기존 수용자들을 타 시설로 전원 조치토록 하는 한편 1988년경 재단명을 '재육원'으로 고쳤지만 실질적으로 해결된 게 별로 없었고 시설은 사실상 폐허 상태였다. 1991년에 박인근이 그 재단을 되찾고 일부 건물을 고쳐 '실로암의 집'이란 중증 장애인 요양시설을 세웠다. 1995년에 상당수 부지를 대왕건설에 팔고 2001년에는 실로암의 집을 기장군의 새 건물로 이전시켰다.

이에 따라 이 곳에는 주례 한일유앤아이아파트, 반도보라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기사 덕분에 형제복지원은 제대로 된 징벌은커녕 오히려 부지 매각을 통해서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단지 공사 중 약 40~50여구의 유골이 쏟아졌지만 죄다 무연고 처리 후 납골시설들에 안치시키고 말았다. 400여구의 시신은 찾지도 못한 상태다. 시신이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자리는 이미 들어선 아파트 단지 때문에라도 시신을 찾기 매우 힘들다.

부산직할시공원묘지관리소(현 영락공원 사업단) 매장처리부에 기재된 무연고 시신 현황 자료에 따르면 형제복지원의 참상이 사회문제화되고 이사장이 구속돼 관선체제로 전환된 1987년 이후에도 2년간이나 30여 명의 사망자가 추가로 발생했으며 이들은 모두 무연고 시신으로 처리된 것으로 드러났다. 기사

한편 사건이 알려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장소인 형제복지원 울주 수용시설 건물 2동은 2014년 <연합뉴스> 보도 기준 다 쓰러져간 채로 남아 있었으며 노역이 진행됐던 나머지 주변 지역은 그 사이 아파트 1,800여 가구와 초등학교가 자리잡았다.# 이 땅도 2016년 느헤미야 법인 청산 후 법원 공매 과정에서 13차례의 유찰 끝에 개인 4명에게 팔렸다가 2017년 울산 모 농협이 사옥 부지 확보를 위해 85억원에 사들였다. 이 과정의 뒷얘기가 2021년 <부산일보> 단독보도를 통해 알려졌고 울산적폐청산시민연대 측이 해당 지역농협을 울산북부경찰서에 고발했으며 그 해 10월 국정감사에서도 거론되었으나 경찰은 불송치 결정을 내렸으며 2022년 1월 울산지방검찰청도 검토 결과 재수사 요청을 하지 않는다고 경찰에 통보했다.#

이 사건의 피해자 중 상당수는 아직도 이 사건의 후유증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야기인즉슨 사건 이후 일부 원생들은 피해보상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해방 이후 재사회화도 엉망으로 진행되는 바람에 가족 단위로 끌려온 피해자는 풀려난 뒤 같이 풀려난 후 행방을 알 수 없었던 아버지와 작은 누나를 정신병원에서야 찾을 수 있었다고 한종선 대표는 회술했으며 몇몇 피해자는 범죄의 덫에 빠져 전과자가 되기도 했다.

4.1. 형제복지원 피해자 한종선 2012년 국회 앞 1인 시위

형제복지원은 1987년에 실체가 폭로된 후 한동안 잊혀지다가 2012년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한종선이 국회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인권단체를 비롯해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사건이었지만 2012년에 형제복지원 생존자인 한종선과 언론학자 전규찬 교수가 글과 그림으로 기록, 증언하고 인권운동가 박래군[23]과 공동저술하여 "살아남은 아이"라는 책이 출간되면서 1987년 이후 다시 세상에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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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37세로 성장한 한종선이 국회 앞에서 형제복지원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1인 시위를 하고 있는 모습.[(국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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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종선, 전규찬, 박래군 공저 <살아남은 아이>[25] 강제수용되었을 당시(1984년)의 9살의 나이의 한종선[26]
한때 나는 개였고 소였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 전 나 역시 아니 우리 가족 역시 당신들과 같은 가정이 있었던 일반 사람이었다. 사람에서 짐승처럼 되긴 쉽다. 그렇지만 짐승에서 사람으로 온전히 돌아간다는 것 그것은 말로는 쉽지만 사실은 너무나 힘이 든다. 죽을 정도로 말이다. 나는 지금 힘들지만 짐승에서 사람으로 돌아가려 한다.
-한종선,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4.2. 형제복지원 피해자 최승우 국회의사당역 고공농성

1982년 당시 중학생이었던 최승우는 4년 8개월간 형제복지원에 강제수용되었고 진상규명을 위해 2019년 11월 5일부터 24일간 단식투쟁을 하다가 실신해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기사

2020년 5월 29일에 20대 국회가 종료되면서 과거사법이 불투명해지자 최 씨는 5월 5일에 무기한 단식을 선언하고 국회의원 회관 지붕에 올라가 고공농성을 벌였다. 사흘째 되던 날 미래통합당 김무성 의원의 중재로 중단되었으며 김 의원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일부개정법률안'(과거사법)을 통과하겠다고 약속하였다.

2020년 5월 20일 열린 본회의에서 일제강점기 이후부터 권위주의 정권 시대까지 발생한 인권침해 사건의 진상을 규명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담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개정안이 통과되어 이 사건을 진상규명할 길이 열렸다. 최 씨는 이 소식을 듣고 김무성 의원에게 감사의 인사로 큰절을 하였으며 행정안전위 간사로 과거사법을 논의했던 더불어민주당 홍익표 의원에게 형님이라고 부르며 끌어안았다고 한다.

형제복지원 피해자, 김무성에 큰절, 홍익표에 "형님"
[속보]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 규명 길 열렸다

5. 형제복지원 사건 언론 보도

2013년 3월 6일 뉴스타파M 1회에서 이 사건의 피해자인 한종선 및 그 가족을 인터뷰하였는데 한종선은 9살이었던 1984년에 누나랑 거리에서 강제 납치되어 입소했고 2년 후 아버지까지 강제 입소되어 재회했다고 한다. 본인을 포함하여 아버지, 누나까지 일가족이 모두 형제복지원의 피해자인 이 가족의 증언을 통해 이 사건을 다루었다. 당시의 처참한 경험을 언론 기사에서도 일부 소개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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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1월 3일 MBC 시사매거진 2580 165회에서도 다루었으며 SBS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2014년 3월 22일(#932)에 '홀로코스트, 그리고 27년 - 형제복지원의 진실'이란 부제로 방영하면서 비슷한 시기에 벌어진 2014년 신안 염전 노예 사건과 더불어 조명받았다.[27] SBS 그것이 알고싶다 2015년 3월 21일(#977)에 1년 후의 상황을 취재한 방영분이 방송되었다.#

6. 박인근의 변명

박인근은 이 사건에 대해 "양심적으로 시설운영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을 했는데도 이를 시기하는 사람들 때문에 뜻밖의 변을 당했다"는 주장을 펼쳤고 자신도 시대적인 상황으로 인해 국가에 동조할 수밖에 없었던 피해자였다는 행세를 한 것도 모자라 김용원에 대해 자신을 형제복지원을 통해 불쌍한 원생들을 노예처럼 강제 노역시키는 것처럼 묘사했다며 명예훼손으로 고소하였다.
반성은 없고 당시의 부를 그리워하는
'형제복지원을 운영 하면서 가족 전체가 부랑인들과 시설에서 함께 고생하며 살아 왔는데 모략과 중상, 시기와 질투로 의욕상실이라는 위기를 맞기도…"
"전적으로 경찰의 허락과 도움을 받아 입소, 퇴소 절차를 밟았음에도 불구하고 불법운영 등 모략과 중상을 받아 왔기에..."
2004년, 박인근이 한국기독신문과 교회복음신문에 인터뷰한 내용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유 없이 감금당했고 폭력과 성폭력에 노출되었으며 강제노역과 비인간적인 대우로 26년이 지난 지금에도 정신적인 고통에 시달리고 있으며 삶의 버거움에 비틀거리고 있다. 그 때의 사건은 자신을 부정하는 기제로 작동했고 일상은 가난과 불안을 오가며 심각한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인근은 지금까지도 자신의 죄를 인정하기는 커녕 오히려 거짓으로 왜곡하며 공공의 재산을 사적으로 이용하는데 급급하고 있다. 형제복지원 폐쇄 사건을 일부 언론 및 검사의 중상과 모략으로 치부하고 있고 사비를 털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헌신과 봉사, 사랑으로 수용자들을 보살폈다고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외화, 엔화가 금고에서 쏟아질 정도로 가득했고, 33개의 필지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여러 개의 콘도회원권, 골프회원권이 발견되었지만 모든 사실들을 부정하며 지금까지도 똑같은 방식으로 사회복지법인을 운영 중이다.
그래서 박인근은 지금도 형제복지원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보기만 해도 섬뜩한 83년도 완공된 형제복지원 수용소 사진을 〈실로암의 집〉 1층 거실에, 수용자들을 착취해 강제노역을 시켰던 사진을 2층 거실에 버젓이 걸어 놓은 걸 보면 반성은커녕 폭력으로 획득한 권력과 부를 그리워하는 듯하다.
인권오름

7. 21세기에도 건재했던 범죄자

26년, 형제복지원 <3> 87년 형제복지원, 아직도 건재하다 - 인권오름
부산시와 형제 재단의 수상한 동거 - 월간조선
형제복지원 박인근 일가 부활한다 - 시사저널
박인근 일가 복지 재벌로 떵떵거리고 산다 - 시사저널

출소한 박인근은 개신교 집사가 되었다가 재육원(구 형제복지원)을 되찾고 이름을 바꿔 가면서 사업을 확장했는데 1991년에는 중증장애요양원 '실로암의 집'을 차리며 재단명을 '욥의마을'로 변경했고 2002년에는 형제복지지원재단, 2014년에는 느헤미야 등으로 법인명을 세탁했다. 재단측은 2001년에 '실로암의 집'을 기장군으로 옮기기 위해 주례동 부지를 팔고 2002년에는 사하구 장림동의 대형 레포츠센터, 2004년에는 괘법동 해수온천 건물을 각각 인수하여[28] 사업부별로 나눠 가면서 운영해 왔으며 사회복지법인대표자협의체의 회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셋째 아들 박천광은 "실로암의 집"[29]을 운영했다. 그의 독단적인 운영에 반발하는 이사들은 1명도 없었으며 특히 1990년부터 6번 이사를 지낸 이모씨는 2014년 <한겨레>와의 전화통화에서 "자신은 서울에만 살며 1년에 몇번 정도만 부산으로 내려간다"고도 밝혔다.

부산광역시로부터 지속적인 지원마저 받으면서 재산과 재단을 불리고 끊임없이 위세를 이어 온 이들을 언론에선 일명 "복지 재벌" 이라고 일컬었다. 박씨 일가는 4·5공 군사정권에서 시작된 공권력이나 교계와의 유착이 매우 끈끈하여 허가 없이 실로암의 집 내부에 무허가 종교기관을 세워서 운영해 왔고 관련 공무원들을 강사로 초청하였다. 이에 공무원들은 부산시의 특별감사를 받았으나 경징계에 그쳤으며 이마저도 취소되었다고 한다.# 박인근 대표는 2001년 주례동 토지 매각 당시 대금 중 20억원을 부산저축은행에 입금하면서 김양 부회장과 인연을 맺었고 부산저축은행 등으로부터 끊임없이 거액을 빌렸는데 특히 2005년부터 4년간 재단이 그 저축은행으로부터 118억원을 불법대출한 사실이 국정감사에서 드러났다.

게다가 한국에만 재산이 있는 것도 아니다. SBS 그것이 알고싶다 2015년 3월 21일자와 <한겨레> '형제복지원' 3-4회 등에 따르면 1995년 6월 22일 호주의 대형 골프장을 운영하는 비상장법인 잡스타운 사를 인수하더니 부인 임씨와 딸, 사위에게 차례로 대표를 맡기고 거기에서 스탭으로 고용했던 소수의 인원[30]조차 형제복지원 원생 부리듯 부린 것이 당시 스탭이었다가 쪽방촌에서 살던 어느 노인의 증언으로 밝혀졌으며 처가 및 사위는 현지 한인교회에서 목사로 신분을 세탁하고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골프장 자체가 어찌 보면 한국에서의 일부 자산세탁 목적도 겸하고 있었던 듯하다.

2011년 부산저축은행 사태가 터지자 형제복지원 문제가 다시 수면에 떠올랐고 2012년 9월 18일에는 부산시가 재단 감사결과를 발표했는데 그 사실이 10월 24일 KBS2 <추적 60분>에도 보도됐다.

2014년 4월에 이런 사실이 드러나자 동년 5월 박천광은 시 보조금 횡령죄로 징역 3년을 선고받았으나 박인근은 뇌출혈로 쓰러진 상태라 3년 구형만 받았을 뿐 재판이 실시되지 않았다. 검찰은 재단과 유착한 공무원들을 기소할 방침이라고 전했고 경남·부산 지역에서 복지 재벌로 이름을 떨친 박인근 일당의 이같은 복지 사업의 운용자금은 2014년 5월 시사저널이 조사한 결과 99%가 국고지원금이었던 것으로 드러났으며 시는 "실로암의 집"을 법인 청산하려고 한다고 했지만 수십억대 금액을 지속적으로 차입할 수 있도록 허가해 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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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암의 집"의 모습 잠금장치가 있는 방의 모습
2013년 현재 형제복지지원재단
그렇다면 2013년 현재 형제복지지원재단이 운영하는 유일한 시설, 〈실로암의 집〉 모습은 어떠할까. 대부분의 거주인들이 70~80년대 수용시설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똑같은 스포츠형의 머리모양에 고무줄이 들어간 츄리닝을 입고 있었다. 또 장애가 경한 사람들만 식당에서 밥을 먹을 뿐, 장애가 심한 사람들은 냉면 그릇 같은 커다란 그릇에 밥과 반찬을 모두 넣은 채 각자의 방안에서 혼자 벽을 보고 식사하고 있었다. 자해를 한다는 이유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침대에 끈을 묶어 허리를 결박한 사람도 있었고 하루 종일 창밖만 바라보는 사람도 있었다. 채광이 되지 않는 방안에서는 울부짖는 소리가 간간히 들렸고, 마당을 나와 걷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4층 건물에 1층만 거주인들의 숙소로 사용되고 있었고 2층 프로그램실, 교실(순회교육), 의무실은 모두 잠겨 있었다. 3층은 교회로, 공적인 시설에 무단으로 들어와 있어 부산시에 의해 고발조치 됐다. 공공시설물에 종교시설이 들어와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4층은 뭘 하는 곳인지 모른다고 한다. 그곳에서 십몇 년을 산 거주인도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고 한다. 그 안에서조차 자유롭지 못한.....그곳의 주인들이었다. 그런데 이동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은 어디어디를 맘대로 못가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지금은 아니라고 하지만 1층 법인 사무실 한 쪽 벽면에는 6-7대의 CCTV 화면 모니터가 박혀 있었다. 섬뜩했다. 옛날 형제복지원을 운영, 유지했던 방식과 똑같이 거주인들을 감시와 관리의 대상으로 취급했다는 방증이니까.
그런데 문제는 이뿐만 아니었다. 식단 또한 딱 3가지 반찬에 먹을 것이 없었고, 어묵 반찬은 상했는지 구토가 날 지경이었다. 부실한 식단 때문인지 거주인들 대부분은 비쩍 말라 있었고, 그들의 일상은 그저 무기력하게 초점 없는 쾡한 눈으로 허공을 맴도는 것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문을 열어놓고 있었지만 모든 거주인들의 방문에는 밖에 잠금장치가 걸려 있었고 침대 외에 개인 소지품이라고 볼 수 있는 물건은 단 하나도 눈에 띄지 않았다. 지적, 자폐성 장애가 아닌 지체, 뇌병변장애가 있는 거주인 두 사람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의사를 표현했다. “'나가서 살고 싶다!”'고.
뉴스타파에서 박인근을 취재하려고 할 때 항변한 박인근의 아들 박천광이 운영한 "실로암의 집"도 2013년 '인권오름'에서 조사한 결과 그다지 사정은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 사이 박인근 본인은 2011년 4월 7일에 재단 대표이사 자리를 3남 박천광에게 넘기고 병환으로 인해 자택과 요양병원을 오가면서 칩거했다가 2016년 6월 27일에 전라남도의 모 요양병원에서 사망했다.

2014년에 박인근 일가는 재단을 서종범 밀성학원 이사장에게 팔았고 부산시에서 뒤늦게 법인 청산을 시도했다. 이에 재단 측이 법인처분 취소소송을 제기했으나 2016년에 법원은 청산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이미 빼돌릴 것은 다 빼돌리고 빈껍데기만 남은 상황이라 청산을 한다고 해도 국고 환수는커녕 적자 청산이 될 상황이라고 하며 기존 실로암의 집 이용자들은 타 시설로 보내졌다. #

박인근 사후에도 막내딸은 사위와 함께 정신요양원을 운영하고 형제복지원 시절 총무였던 차남은 술집을 운영하는 등 사실상 건재한 모습을 보였다. 2019년 2월 7일 JTBC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에서 해당 사건을 소개하는 과정에서 육아원 시절 인권유린 행위까지 폭로되었다. 취재진들은 박인근 전 원장의 차남을 만났으나 그는 아버지에 대해 모른다며 당시의 일을 싹 다 부정했다.

8. 검찰의 비상상고

2018년 11월 20일 검찰은 비상상고(非常上告) 결정을 내렸다. 비상상고란 판결에 중대한 법령위반이 있는 경우 검찰총장이 대법원에 그 법령위반을 이유로 판결의 변경을 구하는 것이다. 일사부재리 원칙상 박인근에 대한 무죄판결을 유죄판결로 바꿀 수는 없지만 판결의 이유에서 박인근의 죄상과 이에 면죄부를 발급한 법원의 잘못을 선언할 수 있기 때문에 대법원의 이름으로 역사의 심판을 내릴 수는 있는 것이다. 형제복지원 특별법이 통과된다면 국가나 박인근의 유족에 대한 손해배상소송의 근거가 될 수 있다. #

그러나 2021년 3월 11일에 대법원은 비상상고를 기각하면서 무죄 판결을 유지했다. 재판부 측은 박인근이 내무부 훈령에 근거해 수용소를 운영했다는 점으로 보아 형법 20조에 의거 특수감금죄를 인정하지 않았으나 피해자들이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당했다는 점으로 보아 국가 차원의 책임을 인정했다.(2018오22019오1, 법률신문 기사)

9. 대한민국 법원의 국가 손해배상 책임 인정


재판부는 청구액의 70%인 145억8000만 원을 대한민국은 피해자들에게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첫 국가배상 책임을 인정한 판결이다.(기사#1, 기사#2)

이에 법무부(장관 한동훈)는 항소를 제기했다.

항소심이 진행중에 있다.

이와 별도로 진행중인 재판도 있다.

1년당 약 8000만 원을 기준으로 재판부는 대한민국이 피해자들에게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두 번째로 국가배상 책임을 인정한 판결이다.(법률신문 기사)

서울뿐 아니라 부산에서도 이와 별도로 진행중인 재판이 있다.

2024년 2월 7일, 부산에서도 국가와 지자체가 배상해야 한다고 법원이 판결했다.법률신문 기사

10. 여담

11. 관련 자료

본 항목보다 훨씬 자세한 내용을 알고자 한다면 첨부 링크 참고 요망.

11.1. 형제복지원 홍보 영화 - 종점 손님들


1981년에 국립영화제작소가 제작했다. 보면 알겠지만 거의 주체사상 선전 영화와 그닥 다르지 않은 수준이다(…).

11.2. 형제복지원 사건 진실규명 및 해결방안 모색을 위한 토론회(2013년)


이 사건에 대한 기억·내용 및 관련 범죄자들이 건재한 현황, 사건과 국가책임, 역사·국제적 유사 사례까지 망라되어 있다.

11.3. 인권운동사랑방 《인권오름》

11.4. 한겨레 - 형제복지원 대하 3부작(2014년)

11.5. SBS 그것이 알고싶다 932회


2014년 3월 22일 방영분.

11.6. AP통신 - 전두환 정권의 형제복지원 사건 은폐 폭로

11.7. JTBC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 184회

2019년 2월 7일 방송분.

11.8. MBC 탐사기획 스트레이트 74회


2019년 12월 9일 방송분.

11.9. 부산일보 《살아남은 형제들(2020)》

11.10. tvN 알아두면 쓸데있는 범죄 잡학사전 1회


2021년 7월 4일 방영분.

11.11.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1회

2021년 10월 21일 방영분.

11.12. MBC PD수첩 1348회

전반부 다시보기 후반부 다시보기
2022년 10월 4일 방영분.

11.13. 기타

12. 관련 문서

13. 외부 링크

14. 둘러보기

대한민국의 국가폭력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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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해방기
(1941~1982)선감학원A C / (1946)대구 10.1 사건R M / (1947~1954)제주 4.3 사건R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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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여수·순천 10.19 사건R M / (1949)문경 양민 학살사건M / (1950)국군의 형무소 재소자 학살M / (1950)대전형무소 학살 사건M / (1950)보도연맹 학살 사건M / (1950)경산 코발트광산 학살 사건M / (1950)고양 금정굴 학살 사건M / (1950)서울 홍제리 집단총살 사건M / (1950~1951)국민방위군 사건D / (1951)거창 양민 학살사건M / (1951~1977)한국정부의 위안부(양공주) / (1958)진보당 사건F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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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대한청소년개척단(일명 서산개척단) A C / (1964)인민혁명당 사건F / (1968)국민교육헌장E / (1969)교련E / (1969)김영삼 질산 테러 사건P / (1971)실미도 사건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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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긴급조치 / (1973)동림호 사건F T / (1973)김대중 납치 사건A P / (1974)민청학련 사건F 인혁당 재건위 사건F / (1974~1997)장항 수심원 사건A C / (1975)금지곡 및 대마초 파동 H / (1975~1987)부산 형제복지원 사건A C / (1979)김영삼 총재 의원직 제명 파동P / (1979)YH 사건L R / (1979)YWCA 위장결혼식 사건P T / (1980)사북사건L R / (1980)5.18 민주화운동/학살R M S / (1980)언론통폐합S / (1980)삼청교육대A C / (1980)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F P / (1980)10.27 법난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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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 시대에 걸친 경우 시작 시점이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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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재 부산광역시 사상구 주례동 주례한일유앤아이아파트, 주례센텀아파트, 주양초등학교, 반도보라아파트, LG신주례2단지아파트 일대[2] 원장 박인근의 주장. 2022년 8월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 결과 657명 이상으로 밝혀졌다. 실제로 이보다 더 많은 것으로 추산된다.[3] 자세한 내용은 1988 서울 올림픽 문서 참고.[4] 이름과는 달리 실제로는 로버트 무가베 대통령의 친위대로 쓰기 위한 소년병 양성소였다.[5] 그래서인지 시설 안에는 '새마음교회'란 종교시설이 있었다.[6] 현재 부산광역시 사상구 주례동 백양대로 372[7] 노역자들 중 정치범도 포함되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일 뿐 일부 노역자들이 할당량 채우기에 혈안이 된 관계자들에게 잡혀간 점, 피해보상이 제대로 안 되었다는 점은 삼청교육대와 유사하다.[8] 남녀동이 분리되어 있었기 때문에 여성 성폭력 피해자는 절대다수가 직원에 의한 것이다. 남성 피해자는 직원과 기존 수감인원이 모두 포함된다.[9] 이것도 박인근의 주장이므로 신빙성이 떨어진다. 실제로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10] "미친 놈, 지금이 어느 땐데 그런 수사를 하느냐" - 브레이크 없는 벤츠 (1993, 예하)[11] 병리과 의사가 법의학자가 된다.[12] 경향신문 1991년 3월 12일자.[13] 1971년부터는 형제원, 1979년에는 형제복지원으로 각각 변경했다.[14] 운영자금 명목으로 1985년에는 18억 원, 이듬해에는 21억 원을 국가 및 부산시에서 지원받았다 - 브레이크 없는 벤츠 (1993, 예하)[15] 80년대를 기준으로 놓으면 2023년 환율로 연간 80억 원 가량을 지원받은 셈이다.[16] 부산항 법률사무소 대표 변호사.[17] 원장실의 대형금고를 산소 용접기를 동원하여 열어 보니 각종 예금증서들과 달러화, 엔화 등이 쏟아져나왔다.[18] 초지였는데 정식으로 초지훼손허가가 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19] 동물들을 위한 축사를 수용자들의 숙소로 용도변경[20] 당시 울산에는 구치소가 없었다.[21] 당시 박인근의 변호는 전 대법관 전상석과 이재환이 맡았으며 무엇보다 이 시기는 6월 항쟁이 절정에 달하는 과정에 있던 시기랑 맞물려 있다. 자연스럽게 관심을 덜 가질 수밖에 없었다.[22] 상고심 당시 대법관 중에는 훗날 박근혜 정부의 초대 총리 후보로 거론됐던 김용준이 있었으며 주범 박인근에게 2년 6개월의 형을 확정한 부분에 대해서는 김용원 변호사는 엉터리 전제 하에서 내려진 판결이라고 자신의 저서에서 비판했다.[23] 민주화 운동가 박래전 열사의 형.[(국제신문)] #[25] (2012, 문주출판사/2013, 이리(도서출판 리젬)[26] 위에 사진에서 봤듯이 강제수용되었을 때 머그샷처럼 찍은 것이며 얼굴 밑의 번호는 '수용된 연도(1984년)-수용된 달(10월)-수용된 사람의 번호'(3618번째)를 뜻한다.[27] 두 사건의 공통점은 장애인, 노숙자 등을 납치해 강제 노역을 시켰다는 것과 지역 사회와의 봐주기식 유착이 있었다는 것이다.[28] 단 그 중 'ㅂ'스포츠센터는 2011년에 건물 소유권이 넘어가서 형제복지지원재단 측과 더 이상 관련이 없다는 얘기가 있다.[29] 기장군 정관면 곰내재 부근에 있으며 약 400m 앞에 형제복지지원재단 정류장이 있다. 하지만 이 정류장을 지나는 버스는 73번뿐인데 이 노선은 배차간격이 60~75분이다. 더 자주 오는 다른 노선을 이용하려고 해도 곰내터널입구까지 2.4km를 걸어야 하기에 탈출을 감행하려고 하더라도 탈출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으며 2016년 재단 청산으로 문을 닫아 폐건물이 됐다. 심지어 2002년 8월에는 이곳에서 호우로 인한 산사태가 발생하여 원생 4명이 매몰되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는데 이때 박인근"내가 책임질 문제냐고, 내가 죽였냐!!!"라고 고함을 질렀다. 참고로 위키백과에도 해당 사건을 다룬 문서가 있다.[30] 한국인이었는데 그것도 교민이 아니라 한국에서 데려온 직원이었다. 현지인이나 교민을 팼다가는 당연히 문제가 생기므로 영어를 못 해 현지인에게 도움을 청하기 힘든 순수 한국인들만 데려와 부려먹었다. 이 방식은 2018년에도 어떤 작자가 벤치마킹했음이 밝혀졌다.[31] 500명을 수용했는데 1984년부터 1987년까지 단 3년 동안 121명이 죽어나간 곳이었다. 물론 수용되었다는 부랑자들은 절대다수가 억울하게 검거, 납치된 일반인들이었다.[32] 그것도 국민의 정부 극초기까지![33] 공식적으로는 이름을 바꾼 뒤 2003년경 금이성마을을 포함한 몇 개의 시설을 묶어 별도의 사회복지법인으로 독립시켰지만 독립한 사회복지 법인의 이사장이 노재중의 후처이며 금이성마을 직원들도 양지마을 사건 당시의 그 직원들이라고 한다.[34] 베르두스코는 부유층 집안의 딸로써 1947년 이 시설을 설립했다고 하며 실체가 밝혀지기 전까지 '마마 로자(Mama Rosa)'로 불려 왔다.[35] 그녀는 기업, NGO, 멕시코 정부로부터 백만 달러의 기부금을 받아 왔으며 늦어도 1985년부터 그녀에 실체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었다고 하지만 모두 불기소 처분되었다. 심지어 그녀가 체포되자 25명의 작가, 정치인, 지식인으로 구성된 그룹이 그녀가 누명을 썼다는 내용의 공개 서한을 발표하는 등 뭐가 수상한 냄새가 나는 모습을 보였다.[36] 베르두스코는 아이들에 대한 성적 학대를 인지하면서도 묵인한 것은 애교였고 어린이들에 대한 성적 학대를 지시한 것을 넘어 본인도 소녀(?!)에 대한 성적 학대에 가담했다고 한다.[37] 본인은 의도적으로 시설을 열악하게 만든 것은 아니고 나이가 들면서 시설 관리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다고 주장했지만 첫 기소될 당시 베르두스코의 나이는 늙지는 않은 나이인 51세였다.[출처] SBS 자료, 연합뉴스 BBC 기사 1 BBC 기사 2 멕시코 언론 기사 1 멕시코 언론 기사 2 멕시코 언론 기사 3[39] 3년간 사망자가 무려 76명이다.[40] 당시 오카다 갱생관의 관장이 워낙 교묘하게 은폐공작을 벌여서 지역 사회에서는 '모범 시설'로 칭송이 자자했으나 마이니치신문 기자 오오모리 미노루와 코니시 켄키치가 목숨을 걸고 갱생관에 잠입 취재한 내용이 보도되면서 진상이 밝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