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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언어별 표기 | |
한국어 | 첩, 시앗 |
영어 | Concubine |
한자 | 妾 |
소실(小室), 측실(側室), '작은집'으로도 불리는데 동아시아에서 황제나 왕의 첩인 경우는 대체로 후궁이라고 칭한다. 본부인의 입장에서 남편의 첩은 순우리말인 시앗이라 부른다. 이런 오래된 표현이 잘 남아있는 속담 중에는 '시앗 싸움에 요강장수'나 "시앗을 보면 길가의 돌부처도 돌아앉는다" 같은 표현이 있다. 정실 소생의 자식 입장에서는 '서모(庶母)' 혹은 작은어머니라고 부른다. 반대로 측실 소생의 자식은 본부인을 적모 혹은 큰어머니, 그렇게 부르는 것을 허락받지 못하면 그냥 '마님'으로 불렀다.
정식 부인과 달리 첩은 '혼인한다'기보다는 '들인다', '데려온다'는 확연히 급이 낮은 표현을 쓰고, 첩을 들이는 것을 '축첩'(蓄妾)이라 하며, 처와 첩을 합쳐서 처첩이라고 부른다.[1]
2. 설명
본래 첩은 신분사회에서 계급간의 계승권 구분을 위해 존재한다. 첩 소실의 자식은 적자에 비해 한 단계 낮은 대우를 받는다. 이를테면- 첩이 낳은 자식은 본처 자식보다 낮은 신분으로 분류해서 가문을 상속받지 못한다. 대개 첩은 여자의 신분이 낮은 경우이다.[2] 조선은 왕의 후궁을 제외하면 평민 이하의 신분이 대부분이었고, 옆나라 일본은 귀족 출신 여성들도 많았다.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도 못했던 홍길동이 이런 얼자인 경우다[3]. 다만 허준은 여러매체와 달리 실존인물은 서자로서 어머니 역시 양인이였고 따라서 신분도 천민이 아니다.
- (신분사회가 아니더라도) 정략결혼 등의 이유가 있을 때 처의 신분에 따른 우대 방법의 하나다. 가령 남편이 신분이 낮은 여성을 사랑하게 되어 결혼하고 싶은데, 정략결혼한 본처가 무시할 수 없는 정치적 입지를 가지고 있다면 이혼이 힘들어지니 사랑하는 여자에게는 첩의 지위를 주어 격차를 명확히 해두는 것. 조선 정조의 경우 후궁 의빈 성씨와의 로맨스가 유명하지만 어디까지나 정실은 효의왕후였다.[4][5]
시대와 국가에 따라서 첩의 자식의 대우는 상당한 격차를 보인다. 이를테면 중국에서는 한국보다 적서차별이 상당히 느슨했다.[6] 또한 고려시대에는 서자의 차별이 훨씬 더 적었지만, 왕실에 한정해서는 오히려 그 대접이 조선보다 못한 부분도 있어서, 첩의 자녀들은 아들은 소군, 딸은 택주라 하여 정식 왕족으로 대우받을 수 없었다. 일정 나이가 되면 소군은 무조건 출가해서 승려가 되어야했고, 택주는 시집을 가는 즉시 출궁해야했다[7]. 조선과는 달리 고려는 공식적으로 후궁의 개념이 없어서 왕의 첩들은 아무런 법적 지위도 받을 수 없었고, 적서차별도 여기서 기인했다. 반면, 공식적으로 후궁의 지위를 인정해준 조선에서는 오히려 왕실 한정으로 적서차별이 거의 없었다. 적자(대군)이 있을 경우에 한해서 서자가 왕위 계승에서 후순위로 밀리긴 했으나, 고려와는 다르게 서자도 공식적인 작위를 받을 수 있었고 왕위 계승권도 인정되어 명실상부하게 왕족으로 대우받았기에, 사도세자나 영친왕의 경우처럼 대놓고 서자 출신인 세자도 여럿 나왔을 정도다. 그래서 조선의 후궁들은 공식적으로는 첩이지만, 실제로는 중전의 지위가 공석이거나 아들을 낳지 못해 유명무실한 상태라면, 후궁들 중에서 출신 성분이 좋거나 왕의 총애를 받은 사람이 실질적으로 중전에 준하는 대접을 받았으며[8], 때문에 중전의 경우처럼 명문가의 여식들이 간택된 경우도 수두룩하다[9][10].
자녀가 없는 적모가 서자를 친자식처럼 돌봐주기도 했다. 선조의 정실 왕후였던 의인왕후가 임해군, 광해군 두 형제를 그렇게 대했다. 삼국지에서 정부인-조앙이 그러하였고[11], 영조의 정실 왕후인 정성왕후도 서자인 사도세자를 친자식처럼 대했다. 그리고 이런 경우라면, 정실 부인과 첩 간의 사이가 친밀하게 되기도 했는데, 왕실의 사례가 아니라면 피치못할 사정으로 첩을 들였기에 그런 일이 벌어졌다. 퇴계 이황의 정실인 권씨 부인은 어린 시절에 집안이 멸문지화를 당한 충격으로 쓰러지면서 지적장애인이 되었는데, 그래서 그녀가 집안일을 도맡아할 수가 없어서[12] 실질적인 안주인 역할을 맡길 첩을 들였다. 이런 경우는 집안 내부에서 적서차별이 명목상으로든 실질적으로든 엄금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으며, 따라서 족보에 적서 여부를 표기하지 않거나 서자녀를 정실 소생으로 둔갑하는 등으로 적서차별이 일어날 싹을 미연에 잘라버리기도 했다. 당연히 서자녀의 생물학적 어머니인 첩들도 실질적으로 정실 대접을 받았다. 그리고 남자 쪽에서 정실보다도 총애하는 첩이 있으면, 아예 진짜 정실의 지위를 꿰차기도 했는데, 첩인데도 당대 최고의 세도가였던 윤원형의 애첩이라는 이유로 비왕족 여성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작위인 정경부인에 봉해졌던 정난정이 그 예다.
3. 정부, 일부다처제와의 차이
정부(情婦)나 일부다처제의 두 번째 이하 부인과 혼동되기도 하는데 첩과는 차이점이 많다.첩이 정부(情婦, mistress)와 구별되는 점은, 정부는 단지 내연 관계의 여자로서 정조를 지킬 의무에서 비교적 자유로우며, 정부가 낳은 소생은 법적으로 사생아가 되지만, 첩은 불평등한 혼인관계이긴 하나 공식적인 제도로 존재했고, 첩의 소생은 서자일지언정 남자의 자식으로 인정받는다는 것이다. 또한 비교적 정조 의무에서 자유로운 정부와 달리, 첩이 외간 남자와 자면 법적으로 문제가 되어 간통으로 취급받았다.[13][14]
정부는 공식적인 관계가 아닌 아무 법적 보호장치도 없는 관계이지만, 첩은 남녀 합의하에 정실이 누리는 몇 가지 권리를 포기하는 것을 인지한 채로 정식으로 혼례를 치르고 가족의 일원이 된 케이스다.
첩이 일반적인 일부다처제의 둘째 이하 부인과 구별되는 점은, 일부다처제, 특히 이슬람의 일부다처제에서 여러 부인은 법적, 관습적으로 동등한 존재이며 남편으로부터 동등한 대우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법적, 관습적으로 첩은 정실부인보다 신분이 낮으며, 남편에게 정실부인과 동등한 권리를 요구할 수 없고 가정 내 대소사에 평등한 자격으로 참여할 수 없을 뿐더러, 첩의 소생은 서자로서 정실부인의 소생에 비해 차별을 받는다. 즉, 정식 혼인관계이기는 하되, 처(妻)와는 달리 한 단계 낮은 대우를 받도록 지정된 혼인관계인 것이다.
그래서 여러 명의 부인들이 동등한 다처제 사회보다는 다첩제 사회에서 평균적으로 부인의 수가 많다. 부인의 수가 늘더라도 해줘야 할 의무도 적기에 남성의 부담이 덜어지기 때문이다. 반면 일부 이슬람 국가 등 모든 부인과 자녀들에게 동등한 권리를 보장하고 있는 다처제 국가에서는 부인의 수에 비례해서 재산 분배나 양육 등 부담이 커지게 되므로 상류층 남성들이라도 부인의 수는 1명 아니면 2명이 대부분이고 3명 이상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15]
4. 한국
한국은 전통적으로 일부일처다첩제였다[16]. 고려시대까지만 하더라도 다처다첩이 가능했다.[17] 물론 첩까지 부양해야 할 남편의 경제사정이 충분하더라도 남편의 가치관에 따라 두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가령 흥덕왕은 첩을 얼마든지 둘 수 있는 왕이었지만 한 여자만을 바라봐 첩을 두지 않았다.고려시대의 왕은 여러 명의 왕비를 두었다. 대표적으로 고려 태조 왕건은 정실부인이 6명이었고, 첩에 해당하는 후궁은 26명으로 자그마치 29명의 여성과 혼인했고 이후의 왕들도 왕족 여인들을 여럿 취하며 왕비를 두 명 이상 두었다.[18] 그러나 왕실의 예법이 이렇다고 해서 일반 평민은 물론 귀족들도 일반적으로 아내를 둘 이상 두는 건 흔한 일은 아니었다.
원 간섭기 이후 유목민의 풍속이 들어오며 다처 풍습도 같이 들어오게 되었고, 고려 말기에 들어서면 관리들이 고향에는 향처를, 개경에는 경처를 두며 두집살림을 하는 풍속이 일반적이었다. 조선의 초대 왕 이성계부터가 이렇게 했다. 신의왕후는 향처, 신덕왕후는 경처. 다만 신의왕후는 조선 개국 전에 죽어서 개국 당시에는 신덕왕후만 남아있었다. 자기네 국조가 불법으로 두집살림을 했다는 것을 말하기가 껄끄럽다보니 조선 왕조에서는 신덕왕후를 경처가 아니라 신의왕후 사후 태조가 재혼한 후처로 간주했다.[19] 그러나 유교 윤리를 중요시하는 조선시대에 들어오자 이런 관행은 용납되지 않았고, 일부일처를 강제하게 된다. 또 다른 이유로는 조선은 고려 말에 유력가문들이 중첩혼인으로 동맹 맺는 것을 매우 꺼렸기 때문이다.
조선 태종대에 들어와 일부일처제가 확립된다. 태종 이전의 이성계는 후궁이 아닌 정실부인이 2명이었다. 태종 이후 왕도 처, 즉 왕비는 의무적으로 1명만 둘 수 있게 되었고, 나머지는 전부 후궁이 되었다.
조선시대의 경우 첩을 두는 이유는 다양했다.
1. 처가 병들거나 집안일을 돌보기 힘들 때 이를 대신시키기 위해. 일례로 퇴계 이황은 첫 아내와 사별하고 집안일을 돌볼 사람이 없어 첩을 들였다. 이후 두 번째 결혼을 했는데, 그의 후처는 정신에 이상이 있어 안주인으로서 행동할 수 없었으므로 첩실이 계속해서 집안 살림을 보살폈다. 이황은 집안을 잘 돌본 첩에게 감사하는 의미에서 그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서자를 정식으로 호적에 올렸고, 이후로도 집안에서 적서를 차별하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이후로 퇴계 가문의 족보에는 적서를 구별해 기록하지 않았다.
2. 관직 사정상 본가에서 떨어져 지낼 때 그곳에서 살기 용이하게 하기 위해. 이에 대해 남겨진 조선의 기록 중에선 세를 놓고 사는데 집주인의 갑질이 심해지자 그냥 첩을 둘까 하는 이야기도 있다. 보통 양첩의 경우가 이렇다. 애초에 계집종을 첩으로 두는 게 아닌 이상 대체로 첩과 본처는 다른 집에서 살았다. 특히 사대부가 부인들이 시앗을 들여야 할 때 자주 썼던 방식이다.
3. 두말할 필요 없이 여색이 목적. 후궁처럼 왕실에서 첩을 둘 때는 이를 미화하기 위해 '자손의 번성함'을 이유로 하기도 했다. 이 경우는 신하들도 어물렁 넘어가기도 했는데, 신하들도 해릉양왕, 연산군 급이 아니라면 딱히 간섭하지 않았다.[20]
이리하여 많은 사대부들이 공식적으로 본처와 여러 명의 첩을 거느렸다. 이순신도 정실부인 상주 방씨 외에 첩이 2명(해주 오씨, 부안댁) 있었다.
한국의 축첩제도는 1915년에 조선총독부가 총독부 통첩 24호를 통해 첩의 호적 입적을 금지함으로써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례를 빼면 일본은 조선의 축첩 관습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었고, 조선의 유력자들은 여전히 첩을 두었다. 식민지 통치가 시작될 때의 일본은 공식적으로 첩 제도를 폐지했지만 축첩 관습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아 화족이나 유력 정치인, 재력가들은 첩을 두었다. 첩을 둔다는 것 자체가 어느 정도의 지위와 재산이 있어야 가능했던 일이기 때문에, 조선이나 대만 유력자들이 축첩한다고 이를 배척하면 식민지 체제의 잠재적 협력자를 잃는 것에 불과하므로 신경쓰지 않았다. 축첩했다고 해서 처벌하는 일은 없었고 불륜을 했다 해도 유부녀와 바람이 나지 않는 이상 이혼 사유로도 인정되지 않았는데, 당시 여성들이 간통을 하면 되려 처벌을 받는 것은 여전했다. 일제강점기에 태동한 근대 여성운동의 주요 요구 사항 중 하나가 축첩제의 실질적 폐지였다.
해방 이후 축첩제 폐지 요구는 다시 드세졌고, 이에 따라 1948년 제정된 대한민국 헌법 제20조[21]를 통해 축첩제를 재차 부정하였다. 이는 구호에만 그치지 않았다. 1949년 10월 공무원법 개정안을 통해 축첩한자는 공무원이 되지 못하게 되었고[22] 수많은 여성인권단체들이 축첩제를 반대했다. 1949년 12월 이승만 대통령은 '축첩폐습을 일조하자'는 담화문을 발표해 축첩을 비판했다.# 그리고 일제시대 당시에는 유부녀에게만 적용되었던 간통죄를 1953년부터 유부남에게도 적용하는, 이른바 '간통쌍벌죄'를 제정하여 축첩을 단속하였다.
그러나 한국 전쟁을 겪으며 남자들이 많이 죽어나가 성비불균형이 나타났고, 또 원래 관습이란 것이 법이 바뀌었다고 쉽게 없어지는 것도 아니었으며 무엇보다도 전쟁 직후라 경제상황이 개판이었기 때문에 돈이나 권세 좀 있는 남자들이 첩을 여러명 두는 것은 여전했었다. 이후로 규제가 강화되자 1960년대부터는 일부러 첩을 들인 다음 전처에게 이혼을 요구한 뒤 첩에 해당되는 사람과 재혼하는 일이 흔했는데, 이혼 소송 시 유책배우자는 이혼을 요구할 권한이 없도록 한 유책주의를 채택한 이유가 바로 이 축출이혼을 막기 위해서였다. 여성들의 사회활동이 극도로 제한된 1960년대에 축출 이혼당한 본처들은 생계가 막막해지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런 편법으로 인해, 전 배우자와 사별했거나 이혼한 후 재혼한 경우, 재혼 상대가 첩으로 오해를 받는 경우가 있었다. 또한 공식적으로 축첩 관습이 사라지면서 후처가 첩 비슷하게 포지셔닝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경우는 전처가 아들을 낳고 후처가 딸을 낳은 경우인데, 남아 선호 사상으로 인해 전처의 입지가 커지기 때문이었다.
축첩은 1960년대와 1970년대 들어 국가의 제재로 인해 급격히 쇠퇴하였다. 4.19 혁명 이후 사람들의 인권의식이 높아진 상황에서 여성단체들이 대대적인 축첩반대 운동을 전개하자, 제2공화국의 장면 내각은 이를 받아들여 1961년부터 첩을 둔 고위공직자들을 퇴출시켰다. "아내 밟는 자, 나라 밟는다"… 서울 종로 거리서 축첩 반대 시위 이 조치는 5.16 군사정변으로 성립된 국가재건최고회의와 박정희 정부에서도 이어졌다. 군사정권은 민심을 얻기 위해 '구악타파'라는 구호를 내걸고 축첩 행위를 적극 징계했으며 그 대상을 중하위직 공무원들에게까지 확대하였다. 이것이 실효를 거두면서 1960년대 이후로는 축첩이 범죄라는 인식이 지배적인 것이 되면서 비로소 사라졌다. 또한 경제가 성장하면서 굳이 부잣집이나 권세있는 집에 첩으로 들어가야할 정도로 찢어지게 가난한 가정도 줄어나가면서 이때를 기점으로 점차 첩을 여러명씩 두면서 몇집 살림하는 관행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물론 그렇다고 기존의 첩들이 다 사라진것은 아닌지라, 다수의 한국 드라마와 한국 영화에서의 설정들로 영향이 남았다.
축첩 관습과 1960년대 축첩 단속은 21세기에도 인사혁신처의 공무원 징계 사유에 '축첩'이 있는 것으로 그 유산을 남기고 있다. 관련 링크 21세기까지도 공무원 징계 사유 중 상당히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저 축첩인데, 오늘날에는 진짜 축첩을 하는 사람이 드물기 때문에 대부분은 혼외의 내연녀를 둔 공무원을 축첩으로 징계하는 것이다. 굳이 축첩이라는 케케묵은 표현이 징계 사유로 올라가는 건, 해당 징계 사유가 1970년대에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1972년 대법원 판례에 처음으로 축첩이 공무원 해임 사유가 된다는 내용이 나온다.
대한민국에서 첩 계약은 대한민국 헌법 제36조 1항에 위배되고[23], 민법 제103조 선량한 풍속에 위배되는 계약으로 간주되어 본처의 동의를 받든, 안 받든 무조건 무효이다. 실질적으로야 어떻든 법적으로 첩이라는 존재는 현대 대한민국에선 있을 수 없다는 것. 재벌과 같은 이들은 암암리에 첩을 들이지만 이 '첩'들은 공식적 지위가 없으므로 첩보다는 정부에 가깝다. 불륜이기에 정식으로 결혼한 총수 부인의 입장에서는 매우 언짢은 일이지만, 구세대 사람들이 그랬듯이 단념하거나, 혹은 배우자 우선 상속분 유산을 남편의 사망 후 챙길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참고 사는 경우도 있다.
이런 식의 정부 혹은 첩의 대표적인 예로 롯데그룹 신격호 회장의 정부인 서미경이 있다. 첩보단 정부에 가깝기 때문에 공식적으론 정조의 의무가 없고, 정조의 의무가 있는 첩처럼 독점하기 위해선 상상을 초월하는 돈이 필요하다. 돈의 양은 남자의 재산에 좌우되는데, 그냥 돈 좀 있는 사람의 경우 적당히 오피스텔 방과 외제차를 주고 명품 둘러주는 정도면 충분하지만, 신격호 정도 되는 재벌이라면 기업 계열사 하나를 줄 각오가 필요하다. 실제로 서미경은 신동빈 한국 롯데 회장과 신동주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 간의 권력 다툼이 비화되면서 수면 위로 대두되기도 했으며, 롯데홀딩스 지분을 신격호의 친자식보다 더 많이 가지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도 시대가 바뀌어 재벌그룹 2세, 3세들끼리는 위자료를 받고 갈라지기도 하는 것 같다. 재벌 1세 회장들은 어떻게 보면 당당하게 불륜을 저지르고 자손을 두었지만, 적어도 그 후손들은 딴 여자가 생기면 기존 배우자와 헤어지기 위해서 이혼 절차라도 밟으니 본인들의 인식도, 사회의 인식도 변하고는 있다는 것. 어쨌거나 여론은 나쁘다. 첩의 존재는 상속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생물학적으로 친자녀인 것이 증명된다면, 법이 정한 한도 내에서 자기 몫을 받아갈 수 있다. 정주영의 혼외자식들이 많이 그랬다.
옛날에 첩 생활을 하던 노인들이 21세기 초인 지금도 생존해 있는 경우가 꽤 있다. 물론 이들 입장에서도 첩 노릇을 했다는 게 자랑거리는 아닌지라 어디 가서 대놓고 말하지는 않기 때문에 알기 어렵지만, 한 마을에서 수십 년을 사는 시골에서는 누가 본처이고 누가 첩이었는지 주변에서 다들 아는 경우가 많다. 이런 분들 중에는 남편과 사별하고 그 남편의 정처와 같이 의지하며 사는 경우도 왕왕 있다. 현대의 시선으로 보면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아무래도 과거에 살던 사람들이라 관념이 다르기도 하고 어쨌든 같은 여자로서 힘든 시대를 같이 살다 보니 비록 시앗이긴 해도 정이 붙어서 서로 같은 노인으로서 의지하며 산다고 한다. 보통 남자가 여자보다 평균수명이 짧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남편이 아내보다 먼저 죽을 가능성이 높을 테니 나름 맞을 수 있는 말이다. 자식들도 다 독립한 마당에 어쨌거나 홀로 덩그러니 남겨진 것보다는 누구 하나라도 있는 게 그나마 좀 나을 테니 말이다.
그 외에도 가끔 옛날 제적등본이나 족보를 떼보면 자신들은 누구누구가 할머니나 증조모로 알고 있음에도 서류에는 다르게 등재된 경우가 많은데, 보통 첩의 자식을 처의 자식으로 올린 경우다. 그게 아니라면 호적상 성함과 실생활에서 쓴 성함이 다른 경우, 의외로 이런 경우도 많다, 출생신고 시 출생증명서 제출이 필수인 현재는 불가능한 일이다. 누구 소생이든간에 자식들 입장에서는 결코 기분 좋은 일이 아니며, 재산 분란의 씨앗이 되기도 한다. 이런 사람들은 호적상으로는 혼인한 적도 없고 자식도 없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기초생활수급자나 차상위계층 등으로 지정되어 혜택을 받는 경우가 많다. 그중에는 재산이 있고 자식의 부양을 받으면서도 편법으로 돈을 타내는 부정수급자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상당하다. 첩으로 들어갔다고 해서 남편의 집안이 부유했던 경우는 오히려 그다지 많지 않기 때문이다.[24] 게다가 호적에 친자식이 올라가 있지 않다는 것은, 복지혜택에서 오히려 큰 장애가 되는 경우가 더 많다. 분명히 친어머니지만 서류상으로는 남남이므로 장례비 보조를 받을 수도 없고, 의료비 지원에서도 실제 부양인인 친자식이 있지만 그 관계가 서류상 입증이 안 되어 자식이 지원을 받기도 어렵다.
첩이 바로 본처의 자매인 경우도 일부 있었다. 청나라 광서제의 사례이긴하나 후궁인 진비와 근비가 자매지간이었고 그 외에도 역사상 자매나 고모 - 조카가 한 남자에게 시집가는 경우는 있었다. 이런 경우는 자매가 한 남자에게 반해서 갔다는 사례도 잘 찾아보면 있겠지만, 보통은 '잉첩'이라 해서 보험 삼아 데려가는 경우였다. 왕족이나 귀족 등 사회 지도층의 결혼은 가문끼리, 국가끼리의 결속력을 다지는 중요한 외교적 장치였고 그 결실로서 자식을 얻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이었으므로, 언니가 자식을 낳지 못하거나 출산 중 죽는 등의 사태가 생겼을 때 같은 집안에 시집 간 동생이 결속력을 유지하는 보험이 되었다. 혹은 자매 중 한 명이 자식을 남기고 죽었을 때, 아이를 생판 남에게 맡기는 것보다 이모에게 맡기는 것이 생존률이나 정서적 안정에 유리할 것이다. 그런 비극이 발생하지 않더라도, 언니가 혼자 시집 가서 낳을 자식보다 자매가 함께 시집 가서 낳을 자식의 수가 당연히 더 많고 그 점은 외교적으로 발언권을 확보하는 데 유리하게 작용하는 부분이다.
제적등본에서 첩의 자녀가 정처의 자녀로 등록되어 있을 경우 정정이 가능하다. 굳이 할 필요는 없으나 첩에 해당되는 사람이 죽으면 호적상 자식이 없으니 재산은 그 사람의 조카나 형제에게 넘어가므로 첩의 자식 중 한 명이 친자확인 후 법원에 찾아가 친생자관계존부확인의 소를 거쳐 모와친생자관계부존재확인 판결 확정 후 제적등본을 정정하여 바꿀 수 있다. 그렇게 한다면 제적등본상 아버지는 같게 나오지만 어머니는 다르게 나온다. 첩은 처보다 신분이 낮으므로 죽어서 선산에 묻히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5. 중국
중국의 경우는 신분에 따라서 처첩을 둘 수 있는 숫자가 달랐다. 천자나 제후가 되면 일부다처다첩이 가능했다. 예를 들면 기황후는 제2황후, 즉 둘째 부인이지만 정처에 해당된다. 첩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첩이었다가 처가 된 케이슨데, 후궁으로 봉해지고[25] 제2황후로 진봉된 후 정궁황후인 제1황후가 되었다. 고위 관료인 경대부는 일부일처다첩, 하급귀족인 사(士, 선비가 아닌 신사층이라는 일종의 계급)는 일부일처에 2첩 정도, 그 이하는 일부일처였다.예를 들어서 중국을 배경으로 한 소설 구운몽에서 주인공 양소유는 2처 6첩을 둔다. 이소화, 정경패 공주 2명이 서로 평등한 정처고, 나머지 기생, 양민, 비녀(婢女) 등 신분 낮은 듣보잡 여자들을 첩으로 두어 차별하는 것이다. 이는 양소유가 제후급 위치라는 것을 의미한다. "영웅은 삼처사첩을 마다하지 않는다" 운운하는데, 여기서 영웅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가 아니라 제후를 의미하는 것이다.
중국의 축첩행위는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공식적으로 금지되었다. 그러나 현대 중국에서 '얼나이'(二奶)라고 한다. 얼(二)은 2, 나이(奶)는 여성의 가슴을 뜻하며 합하면 두번째 가슴. 보통 금전관계를 매개로 한 관계를 의미하며, 숙소와 월급을 지불하는 계약관계이다. 마음에 들어서 근속기간(?)이 길어지면 관계가 끝났을 때 거액의 퇴직금까지 받는 경우가 있는데, 슈가대디를 몇년 상대해 주고 퇴직금으로 가게를 차리는 것이 얼나이계에선 나름 로망이다.
혹은 샤오싼(小三)이라는 것도 있는데, 이건 그야말로 감정적인 교류의 불륜이다. 서로 사심을 갖고 만나는 것이기 때문에 금전 보조는 없거나 생활비 정도로 이루어진다. 애까지 낳고 두집살림을 하는 경우도 많아서, 얼나이는 알고도 모른척 하는 부인들도, 샤오싼이 걸리면 바로 난리가 난다.[26]이런 부유층 및 관리들의 축첩 행위가 심각하다고 한다. 물론 축첩행위가 인정되지 않으므로 법적 해석을 따르면 여러 명의 정부를 두는 식인데, 쉬치야오라는 장쑤성 건설청장을 지냈던 자가 첩만 146명을 거느렸다고 하니...#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다.
당연히 사회적인 인식이 좋을리가 없고, 들키면 공무원직에서 짤리기는 하지만 징계를 피하기 위해 일부러 첩의 집을 미국이나 캐나다, 호주 같은 해외에 두고 불륜을 하는 경우가 흔하고, 얼나이로 들어가면 거금을 받거나 고위직과 연줄이 생기기 때문에 의외로 얼나이가 되려는 수요가 있다. 때문에 중국에서는 축첩 행위가 일종의 권력자의 상징처럼 여겨진다고 한다. 2010년대 시진핑이 관료들의 기강을 단속하면서 줄어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할사람은 하는 모양이다. 이 첩들은 (당연히) 씀씀이가 아주 커서 베이징이나 상하이 등 대도시의 사치품 소비의 주역이고, 밴쿠버 등의 도시에는 외국 거주 첩들의 거리가 조성될 수준이다.
사실 중국의 축첩 문화는 전통 문화를 몽땅 없애야 할 악으로 보고 파괴하려 했던 문화대혁명을 겪고도 결코 없어지지 않았을 만큼, 그 유래가 매우 깊다.
6. 서양
자세한 내용은 로얄 미스트리스 문서 참고하십시오.서양에서는 기독교의 영향으로 동아시아보다 엄격한 일부일처제가 자리잡았다. 다만 공식적으로 첩을 두는 제도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지, 서양 남자들이 모두 아내에게만 충실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첩은 본처에 비해 한 단계 낮은 대우를 받도록 규정된 또 다른 혼인관계이지만, 서양에서는 중복으로 혼인관계를 맺었다고 한들 정식 혼인관계로 인정받지는 못했다. 따라서 서양에서 남성들이 정식 배우자 이외의 다른 여성과 유사 혼인관계를 맺었어도 그것은 단지 비공식적인 관계일 뿐이다. 보통 이렇게 맺어진 내연녀는 정부(情婦)라고 한다.
그래도 동아시아의 첩에 비견될 수 있는 '공식 정부'는 있었다. 유럽 왕실에서는 이런 왕의 공식 정부를 로얄 미스트리스(Royal mistress)라고 부르며 프랑스어로는 메트레상티트르(maîtresse-en-titre), 일본어로는 공첩(公妾), 총희(寵姫)로 번역된다. 첩은 공식적인 제도 내의 존재이기에, 첩실과 서자는 어느 정도의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있었으나, 유럽의 정부들은 로얄 미스트리스든 아니든 근본적으로는 내연녀에 불과했기에 법적 보호를 보장받을 권리도 없었다. 다만 후궁과 달리 정조관념은 더 자유로운 입장이었는데, 이는 후궁은 왕과의 혼인관계에 있지만 정부는 어떠한 법적 제약에도 매여 있지 않은 그냥 '애인'이기에 그러했다.
당연히 왕족으로 대우받지 못하고, 정부가 낳은 자식도 서자가 아니라 사생아였고, 총애를 잃으면 그대로 궁을 떠나 원래의 삶으로 돌아갔다. 물론 왕이 총애한다면 사생아에게 작위와 영지를 내려주기도 하고, 귀족 가문 중에는 이런 왕의 사생아가 가문의 시조인 경우도 꽤 있다. 총애를 잃었다고 해도 길바닥으로 내쳐지는 경우는 흔치 않고 대체로 사생아들도 좋은 교육을 받으면서 나름 상류층으로 살았다.
유럽 궁정에서는 유부녀를 로얄 미스트리스로 두는 경우가 많았다. 로얄 미스트리스가 왕의 사생아를 낳았을 때, 출생신고 목적으로 그 사생아를 정부의 본래 남편의 호적으로 넣는 용도였다. 물론 모든 사람들은 왕의 자식인 것을 알았다. 이런 경우 정부의 남편은 막대한 금전이나 높은 작위 등으로 보상을 받았다. 이런 보상에 만족하여 아내가 왕의 정부가 되는 것에 불만이 없거나, 오히려 기꺼이 아내를 바친 남자도 많았다. 오히려 유부녀 정부라 할지라도 실제 남편과는 접점이 없고 단지 눈가리고 아웅을 위해 법률상으로만 결혼한 케이스가 굉장히 많았다. 물론 그런 관행이 있었다는 거지 왕의 정부는 유부녀만 가능하다고 정해진 법이 있었던 건 아니라, 미혼 여성을 정부로 둔 왕도 있었다.[27]
20세기 초반까지의 유럽 귀족들이 나오는 매체나 역사에서 '애인', '정부', '첩' 등은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유명한 로얄 미스트리스로는 루이 15세의 정부인 퐁파두르 부인이나 뒤바리 부인이 있다.
동아시아권에서는 로얄 미스트리스를 후궁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28] 그러나 첩은 정실보다 낮고 차별을 받을지언정 염연히 법적으로 인정을 받는 아내였지만, 정부는 단순한 내연 관계라는 점에서 첩과 정부는 절대로 동일시될 수 없다.
단, 서양이더라도 기독교권이 아닌 경우(9세기 이전의 북유럽 문화권등)에는 축첩제가 성행하기도 했다. 10세기 아일랜드와 같이 기독교와 켈트 문화가 혼재되어 있는 경우에도 첩이 종종 등장하기도 하였다.
7. 남첩
남자 첩은 남첩(男妾)이라고 한다. 첩(妾)이라는 한자가 여성을 전제하고 만들어진 글자이기 때문에[29] 남자 첩일 경우 첩 앞에 男(사내 남)을 꼭 붙여줘야 한다. 옛날엔 남성 중심 사회였기 때문에 남첩은 비공식적이었다. 여자가 남첩을 두는 경우는 희귀했다. 당시 사회 관념상 여성이 대놓고 남첩을 두는 것은 불가능했다. 드물게 있는 사례는 권력이 매우 강한 여성인 경우다. 황제로 즉위한 측천무후, 폭군 남동생의 비호를 받은 산음공주 등의 사례로, 본인이 사회 통념을 거슬러도 될 만큼 힘이 있거나 혹은 통념에 반하는 행위를 하더라도 무마시켜 줄만한 뒷배경이 있었으니 남첩을 둘 수 있었던 이들이다. 남자가 동성애자라 남첩을 두는 경우도 있었다. 고위 인물의 남첩은 남총이라고 한다.8. 기타
첩에 관한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신분이 높고 경제적으로 능력이 있는 남자가 첩을 들이지 않으면 지역사회에서 남자의 부인에게 "드세다", "투기가 심하다" 등 나쁜 평가를 내렸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조선의 양반집의 경우 본부인이 나서서 일부러 첩을 들이는 놀라운 경우도 있었다. 조선 왕실에서 왕비가 첩인 후궁을 들이라고 국왕에게 먼저 조언한 사례도 있다. 프랑스의 루이 16세가 여색에 관심이 없자 귀족이며 백성이며 할 것 없이 마리 앙투아네트의 탓을 하면서 대외적인 프랑스의 위엄을 깎아내린다고 신랄하게 험담했다.[30]일부일처다첩제에 익숙한 한국의 시각에서는 둘째 이하 부인들을 곧바로 첩으로 간주해버리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상당한 결례이므로 주의가 필요하다. 그리고 부유층이 아닌 다음에야 생활비가 쪼들려서라도 2명 이상과 혼인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31] 또한 이슬람 사회에서 다처제를 인정하는 중요한 이유는 이혼을 매우 부정적으로 본다.[32] 부인이 배우자로서 만족스럽지 않거나 자식을 낳지 못 하더라도 그 부인을 내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대신 쿠란에는 이러이러한 사정이 있으면 이혼할 수 있다고 적혀있기는 하다.
흔한 오해와 달리 이슬람 국가에서도 2번째 아내가 아닌 본처보다 낮은 첩을 들이는 것은 인정되지 않는다. 과거 이슬람권에서는 여자 노예라는 이름으로 하렘에 사실상의 첩들을 들였지만, 이것도 이슬람권 전체에 보편화된 풍습은 아니고, 오직 튀르크 문화권에서만 발견되는 풍습이다. 그것도 왕이나 대영주 정도나 되어야 할 수 있던 일이고, 애초에 하렘 제도의 시작은 성적 쾌락이 아니라 공평한 경쟁(?)을 통한 유능한 자식의 계승을 목적으로 한 것이다. 현대 대부분의 순니파 이슬람 국가에서 인정하는 것은 최대 4명까지의 평등한 정처이다.
유념할 것은, 이슬람교에서 일부다처제는 '허용'되는 것이지, 결코 '권장'되는 것은 아니다. 무함마드 시대부터 일부다처를 하려는 경우 여러가지 전제 조건을 걸어서 까다롭게 만들어놓았으며, 현대에도 일부다처제를 법적으로 허용하는 걸프 지역 같은 곳들에서도 결혼한 남성들의 90% 이상은 한 명의 부인만 두고 살고 있다. 이슬람권 국가들 중에도 서양식 가족 제도와 법 제도를 다소 받아들여서 일부일처제를 법으로 정해놓은 나라들이 생각보다 많다.
최근에는 이슬람 사회들도 인식의 변화로 두 번째 아내를 들이는 경우보다는 이혼과 재혼이 늘어나고 있으며, 특히 젊은 나이일 수록 다수의 부인을 거느리는 남성의 비율이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다.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면 일부일처가 완전히 확립될지도 모르는 상황. 물론 대다수 가정에서는 일부일처를 지키고 있다. 이렇게 일부다처가 점차 줄어드는 이유는 쿠란에 모든 아내들을 동등하게 대하지 않으면 결혼을 취소할 수 있다는 규정이 있기 때문으로, 동등하게 대하다 = 모든 아내 및 처가들에 경제적 부담을 똑같이 들여야 한다 = 경제력이 탄탄해야 한다로 직결되기 때문에 아무리 일부다처가 허용이 되는 아랍권에서도 경제가 그럭저럭인 남자는 아내를 여럿 두기가 매우 어렵다.[33] 천하의 만수르조차 아내는 소박(?)하게 두 명밖에 안 둔다. 심지어 아내가 둘이나 되는 것도 정략결혼이라는 말이 있다.
캐빨물 계열의 웹소설에 인터넷 밈으로 '측실'이 사용된다. 가장 선호하는 캐릭터를 정실이라 하고 그보다는 못하다고 생각하는 캐릭터를 측실이라 지칭하는 식이다.
폴리아모리와는 충돌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스타크래프트 오리지널 캠페인에서 케리건과 제라툴이 처음 대면해서 서로 비아냥대는 장면에서 제라툴이 케리건을 "저그의 첩"(Concubine of the Zerg)이라고 부른다. 상세한 것은 스타크래프트/대화집/에피소드 2 참조.
[1] 속칭 '세컨드'라고도 부르지만, 사실 영어로 second wife는 어디까지나 이혼이나 사별 후 두 번째로 맞이한 정식 아내로서, 말 그대로 '후처(後妻)'를 뜻하기에 첩과는 다르다. 그러나 현재는 사회통념적으로 애인이나 부인 이외의 외도 상대를 이르는 외래어로 받아들여지고 있다.[2] 평민 신분인 첩이 낳은 자식을 '서자', 노비 신분인 첩이 낳은 자식을 '얼자'라고 하며 이 둘을 뭉뚱그려 서얼이라고 한다.[3] 다만, 사람들에게 널리 각인된 홍길동전에서의 이미지가 아닌, 실존인물 홍길동은 자신의 아버지와 형에게 잘만 호부호형했다. 그리고 이래뵈도 엄연히 정치 명문가의 자제였던 만큼, 얼자다 뿐이지 실질적으로 지체높은 신분으로 대접받았는데, 이걸 악용해서 대놓고 정치깡패 노릇을 하면서 온갖 분탕질을 쳐댄 희대의 양아치였다.[4] 덧붙여 아무리 대외적으로 정실을 존중해준다고 해도 현실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은 만큼 정실과 첩 사이에 감정의 골이 생기는 경우가 많았는데, 의빈 성씨는 항상 효의왕후에게 깍듯했고 효의왕후도 그런 의빈을 많이 배려해주어 둘의 남편인 정조도 신기해했다고 한다.[5] 다만 이런 것도 본처의 신분이 남편보다 낮거나 최소한 동등할 때 얘기지 남편보다 신분이 높으면 첩을 들이는 것 자체가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조선시대 공주의 남편인 부마 같은 경우는 축첩은 물론이고 재혼까지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하지 말라는 건 꼭 하는 인간이 어디에나 있는만큼, 효정옹주의 남편 조의정은 간도 크게 첩을 두었다가 들키는 바람에 첩은 매를 맞아 죽고 조의정은 옹주의 아버지 중종, 오라비들인 인종과 명종의 눈 밖에도 나게 된다. 그나마 부마가 아내를 사별한 뒤에 정실부인이 아닌 첩을 두는 것은 적당히 눈감아줬다고 하는데, 영혜옹주의 남편이었던 박영효가 이런 사례. 고작 12살에 결혼한 지 겨우 몇 달 만에 영혜옹주가 죽는 바람에 평생 첩만 둘 수밖에 없었고, 이 때문에 자식들도 모두 서자로 호적에 올랐다.[6] 중국사에서는 의외로 정실을 통해 얻은 적자보다 유능한 첩의 서자가 있다면, 나름대로 챙겨주면서 유산을 나눠주는게 흔했다. 당장에 중국사의 황실만 하더라도 수많은 부인들 속에서 자신이 총애하는 첩의 자식을 차기 황제로 삼았다는 기록은 많은 편이다.[7] 물론 공식적으로 제대로 된 왕족 대우를 받는 적녀(공주)들도 결혼하면 출궁하는 것은 매한가지였으므로, 실질적으로 눈에 띄게 적서차별의 대상이 된 쪽은 아들인 소군이었다. 남자라서 받을 수 있었던 왕자로서의 작위도 못받고, 왕위 계승권까지 박탈당했기 때문이다.[8] 전자의 경우는 영조의 후궁인 후자의 경우는 고종의 후궁인 순헌황귀비 엄씨나 정조의 후궁인 의빈 성씨가 대표적이다.[9] 중종의 후궁으로 남양 홍씨 가문 출신인 희빈 홍씨나, 연산군의 후궁으로 여흥 민씨 가문 출신인 숙의 민씨가 그 예다. 특히 숙의 민씨의 출신 가문은 조선의 개국공신들 중 한 명인 민제의 후손이자, 이방원의 정비인 원경왕후를 배출하기도 한 조선 최고의 명문가다.[10] 참고로 중국도 당나라나 청나라의 경우는 조선과 비슷하게 명문 귀족 출신의 후궁들이 많았다.[11] 그래서 조조의 삽질로 인해 일어난 장수의 반란으로 인해 조앙이 사망하자, 분노한 정부인이 남편에게 '아비로서의 자격도 없는 자'라며 욕을 퍼붓고는, 조조의 만류도 뿌리치고 이혼하여 초야에 묻혀 잠적해버린 일도 있었다.[12] 집안일은 고사하고, 제삿상에 오른 과일을 음복할 시간도 아닌데 멋대로 집어먹어서 남편 이황이 주변에 사정을 설명하고 아내에게 과일을 깎아준 일이 있었을 정도로, 기본적인 사리 판단도 불가능한 사람이었다.[13] 예를 들어, 조선시대에 자기 첩이 바람피우는 현장을 덮쳐서 첩을 죽였다면, 남편은 무죄 방면될 확률이 높았다. 목격한 당일에 살해한 경우에 한해서이고, 그 날이 지나서 죽인 경우는 살인죄가 적용됐다. 조선 정조는 증거도 없이 단지 의심만으로 첩과 (첩의 불륜 상대라고 의심받은) 남자를 죽인 사람도 무죄 판결하기도 했다. 하지만 첩이 아닌 정부를 죽인 경우는 짤없이 살인죄로 처벌받았다.[14] 남편이 처와 첩 모두와 동침한 걸 보고 정조가 깨졌다고 오해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남편이 처와 첩 이외의 사람과 동침한 경우가 되어야 정조를 지키지 못했다고 손가락질을 받을 수 있었다. 이는 여자도 똑같이 적용되며, 마찬가지로 혼례를 치른 대상 이외와 관계를 하면 정조를 지키지 못한 거다. 애초에 정조의 의미 자체가 '일부일처제'와 전혀 관계 없는 용어이며 '혼내정사'를 지칭한다. 그리고 첩이 되는 건 그걸 상정하고 혼례를 올린 거고.[15] 예를 들어 두 처의 살림집을 동등한 수준으로 구해줘야 하고, 두 집을 동등하게 방문해야 한다. 생활비는 물론이고 선물 같은 것도 두 처에게 동등하게 해줘야 한다. 예를들어 한 명이 선물로 반지를 요구하고 다른 한 명이 코트를 요구하면, 분란을 막기 위해 반지와 코트를 두 개씩 사서 둘 다 선물하는 식.[16] 참고로 이걸 예로 들면서 한국 사회는 일부다처제인 적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는데, 다첩제 자체가 다처제의 특수한 사례이므로 말이 안되는 이야기다. 일반적인 다처제에서 부인들 간의 지위에 공식적으로 차등이 존재하면 그게 다첩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말선초 시기에는 유력자 계층들 한정으로, 고향에 둔 본처인 향처 이외에 수도에서 다른 유력자의 딸을 후처로 맞는 식의 제대로 된 일부다처제가 엄연히 있었다. 이성계가 본처인 한씨(이방원의 친어머니) 이외에 경처인 신덕왕후 강씨를 둔 것이 그 예다.[17] 예를 들어 신라 진흥왕이 이미 부인이 있었지만 백제와 정략결혼해 소비 부여씨를 두 번째 정실부인으로 삼았던 것이 있다.[18] 고려 현종의 경우 자매 셋을 왕비로도 얻을 정도. 이것은 외할아버지가 강제로 결혼을 시킨 것으로써 다소 정상적인 결혼은 아니었다.[19] 여기에는 정치적인 역학관계도 작용했다. 신의왕후라는 칭호도 사실 정종 때 받은 것이고 태조 때는 절비로 퉁쳤다. 태조가 왕이었을 땐 신덕왕후가 왕후다보니 되여 신의왕후 쪽이 첩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정도전과 이방석 등 신덕왕후 계열이 제1차 왕자의 난에서 숙청되면서 신덕왕후의 취급이 매우 박해졌다.[20] 반대할 명분이 애매한 것이 유교사회에서 대가 끊기는 것은 더할나위 없는 불효였고 과거에는 영아사망률이 높았던지라 자식을 여럿 낳아서 대가 끊어질 확률을 낮추곤 했다. 더군다나 왕실에서 대가 끊어지면 다음 왕으로 누구를 세워야 할지 논쟁이 일게 되니 기왕이면 기존 왕의 왕통을 순조롭게 이어나가는 쪽이 신하들 입장에서도 골치 덜 썩이는 길이고 그러자면 기존 왕통의 구성원이 많아도 곤란하지만 너무 적어도 곤란하다.[21] 혼인은 남녀동권을 기본으로 하며 혼인의 순결과 가족의 건강은 국가의 특별한 보호를 받는다.[22] 개정안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한번의 부결이 나오자 당시 유일한 여성 국회의원이었던 임영신이 크게 반발했다. 임영신에 동조하여 99명의 의원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건의를 올렸다.#[23] 혼인과 가족생활은 개인의 존엄과 양성의 평등을 기초로 성립되고 유지되어야 하며, 국가는 이를 보장한다.[24] 첩을 두고 두집 살림을 하려면 돈이 좀 많이 들어간다. 이런 짓 하는 사람들 치고 알뜰살뜰 재산 모으기는 고사하고 '호방함' 코스프레로 오만데 쓸데없이 돈 뿌리고 다니거나 아예 도박에 빠져 가산 탕진이나 안하면 다행인 경우가 부지기수다. 그럼에도 첩으로 들어가는 여성들도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매춘이라도 뛰어들지 않는 한 입에 풀칠할 길이 없으니 어쩔 도리 없이 택하는 경우가 많다.[25] 무슨 품계였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당시 원나라는 후 - 비 - 빈 - 재인(혜종 때만 사용)으로 비빈의 위계를 나눴는데, 비, 빈, 재인 중 하나였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26] 한국어로는 둘 다 보통 내연녀로 번역해서 둘의 차이가 명확하지 않은데, 보통 중국 황색 언론 가십에서 본처가 불륜녀를 찾아가 참교육했다 같은 기사가 나오면 십중팔구 샤오싼을 지칭하는 것이다. 한국으로 치면 남편이 룸살롱 들락거리는 것은 참고 사는 아주머니들도 동호회 등에서 불륜녀가 생기면 용서치 않는 것과 어느 정도 일맥상통한다.[27] 예: 헨리 8세[28] 일본은 로얄 미스트리스는 공첩(公妾), 총희(寵姬)로 번역하되 후궁을 포함한 첩은 측실(側室)로 표기, 정부 같은 내연 관계의 인간은 애인(愛人)으로 번역한다. 그러나 일본도 은하영웅전설 및 양산형 유럽풍 궁정물에서는 정부의 자식을 사생아가 아닌 서자로 표기하거나 서자와 동일시하는 묘사가 많아 고증이 전부 지켜지진 않았음을 알 수 있다.[29] 해당 글자의 부수부터 女(계집 녀)이다.[30] 보통 나라 사정이 안좋으면 전제왕조 국가에서 왕을 직접 욕하진 못하니 왕의 애인이 총기를 흐린다니 어쩌니 하면서 간접적으로 욕을 했는데, 루이 16세는 애처가라 애인이 없었고, 하필 본부인인 마리 앙투아네트도 프랑스의 오랜 적국인 오스트리아 출신이라 평민들이 물고뜯는 대상으로 삼기 좋았다.[31] 그도 그럴 게, 일부다처제 문서에 들어가면 알겠지만 이슬람식 일부다처제는 이래저래 남성에게 피곤하다. 거기다가 어떻게 큰 마음 먹고 부인을 또 들이려고 해도 기존 부인들의 전원 찬성이 필요해서, 남성이 마음 먹는 대로 쉽게 부인을 마음껏 둘 수 있는 게 아니다.[32] 다만 이혼 절차는 매우 간편하기 그지없어서 남편이 이혼하겠어! 라고 세 번 외치면 자동적으로 이혼이 성립된다. 원래 쿠란에서 이혼숙려제를 장려했지만, 샤리아가 제정되는 과정에서 이혼 절차가 매우 간편화된 것으로 현재 파키스탄을 비롯한 몇몇 국가에서 이런 식으로 이혼이 처리된다.[33] 심지어 정부에서는 이 점을 노리고 아내가 많은 가정에는 세금을 더 많이 때린다. 아내가 여럿일 정도로 경제력이 강하다면 당연히 부자이기에 세금을 더 낼 의무가 있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