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슬림의 이집트 정복 전쟁 아랍어: الفتح الإسلامي لمصر 영어: Muslim conquest of Egypt | ||
시기 | 639년 ~ 646년 | |
장소 | 이집트 | |
원인 | 이슬람 제국의 확장 정책 | |
교전 세력 | 동로마 제국 | 이슬람 제국 |
지휘관 | 이라클리오스☠ 테오도로스 도멘티아노스 아레티온 요안네스† 콘스탄스 2세 마누일 | 우마르☠ 우스만 아므르 이븐 알 아스 알 샤흐미 주바이르 이븐 알 셰르 알 와움 미크다드 이븐 아므르 알 바흐라니 우바이다 이븐 알 사미트 카리야 이븐 후다파 부스르 이븐 아비 아르타트 알 아미리 |
결과 | 이슬람 제국의 이집트 정복. | |
영향 | 이슬람 제국의 팽창 가속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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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639~646년, 이슬람으로 개종한 아랍인들이 교세 확대를 위해 동로마 제국령 이집트를 침공하면서 벌어진 전쟁.
2. 배경
기원전 30년 안토니우스-옥타비아누스 내전에서 승리한 옥타비아누스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무너뜨리고 이집트를 속주로 삼은 이래, 이집트는 막대한 곡물을 생산해 로마 제국의 국가 운영에 큰 보탬이 되었다. 그러나 테오도시우스 1세 사후 로마 제국이 분할된 이래 동로마 제국의 관할이 된 후, 이집트의 정세는 갈수록 불온해졌다. 신민들은 과도한 세금을 뜯어가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부에 반감을 품었고, 칼케돈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된 단성론이 이집트 내에 횡행하면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정교회와의 종파 대립이 갈수록 심해졌다.618년, 사산 왕조의 장군 샤흐르바라즈가 이집트로 진격하여 이집트 총독 니키타스의 격렬한 저항을 격퇴하고 알렉산드리아를 공략하고 621년에 나일 강을 따라 남하하여 이집트를 대부분 장악했다. 그러나 622년 이라클리오스가 사산 왕조의 본거지인 메소포타미아로 직공하면서 사산 왕조는 혼란에 휩싸였고, 자연히 이집트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 628년 로마-페르시아 전쟁이 끝나면서 이집트는 도로 동로마 제국의 영역이 되었지만, 자신들을 제대로 지켜주지 못한 제국에 대한 이집트인들의 반감이 컸다.
631년 가을,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로 부임한 키루스는 이라클리오스의 지시를 받들어 단의론을 이집트 신자들에게 포교했다. 단의론은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인간으로서의 본성과 신으로서의 본성 두 개가 다 있지만 단일한 의지를 가진다는 이론으로, 예수에게 신성과 인성이 모두 있다는 것은 칼케돈 공의회의 교리와 같지만 단일한 의지를 지닌다는 것은 단성론과 같았다. 이렇듯 두 종파의 교리를 수용함으로써 양자의 화해를 이끌어내려 했다. 그러나 단성론 신봉자들은 단의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키루스는 그들을 잡아들여 고문을 가하는 등 단의론 수용을 강요했지만 끝내 관철시키지 못했다.
이렇듯 이집트의 혼란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던 638년, 이슬람 제국은 예루살렘 공략에 성공하면서 시리아 정복을 거의 완료했다. 그러나 639년 여름 팔레스타인에 전염병이 발생하면서 숱한 장성과 장병들이 목숨을 잃었다. 급기야 다마스쿠스 총독을 맡고 있던 야지드 이븐 아비 수피안이 사망하자, 칼리파 우마르는 야지드의 동생인 무아위야 이븐 아비 수피안을 신임 총독으로 임명했다. 이에 지난날 시리아 정복 전쟁에서 활약했고 내심 자신이 총독이 되기를 기대했던 아므르 이븐 알 아스 알 샤흐미는 불만을 품었다. 그는 시리아에서 총독을 하지 못하게 된 이상 부유하기로 유명한 이집트를 공략하고 그곳의 총독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639년 12월, 아므르는 4,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비밀리에 팔레스타인을 떠나 이집트로 향했다. 이집트 국경 인근에 이르렀을 때, 우마르가 급파한 사절이 찾아와 칼리파의 서신을 전했다. 그러나 아므르는 우마르가 자신을 막으려 한다고 예측하고 병사들에게 진군 속도를 높이라고 명령하고 사절에게는 병사들이 밤에 행군을 멈췄을 때 서신을 개봉하겠다고 밝혔다. 아랍군은 이집트 국경을 넘어 알 아리시 계곡에 자리를 잡았고, 아므르는 그제야 서신을 읽었다. 그의 예상대로, 그 서신에는 당장 팔레스타인으로 복귀하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아므르는 부하들을 모아놓고 "이미 이집트로 진입한 이상 원정을 계속하자"고 결의한 뒤 우마르에게 자신의 뜻을 전했다. 우마르는 아므르가 허락없이 이집트를 침공한 것에 분개했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이집트도 공략하기로 하고 원군을 보내기로 했다. 이리하여 무슬림의 이집트 정복 전쟁의 막이 올랐다.
3. 전개
아므르는 이집트 국경을 넘은 뒤 첫번째 요새인 리노코루라(Rhinocorura) 요새로 진군해 639년 12월 12일 별다른 저항 없이 입성했다. 뒤이어 펠루시움 요새로 진군해 1~2개월 동안 공성전을 벌인 끝에 역시 함락시켰다. 그동안 이집트 수비대는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부에 반감을 품고 있던 단성론 신자들이 무슬림군을 열렬히 환영했으며, 인근 사막에 살던 베두인들은 대거 무슬림군에 가담했다. 아므르는 이에 고무되어 펠루시움에서 나일 삼각주의 동쪽 가장자리를 따라 와디 투밀라트의 언덕이 많은 지역을 진군하며 벨베리스 시에 접근했다.이윽고 벨베리스 성벽 아래에 도착한 무슬림군은 아레티온이 이끄는 수비대의 야간 기습을 성공적으로 격퇴했다. 이후 한달 간 포위 공격한 끝에 640년 2월 말이나 3월 초에 벨베이스 공략에 성공하고 1,000명의 수비대를 죽이고 3,000명을 포로로 잡았다. 그 후 지금의 카이로 인근에 있는 바빌론 요새로 진군해 640년 5월에 포위했다. 하지만 이곳 만큼은 만만치 않았다. 요새는 18m 높이에 2m 두께에 달하는 성벽으로 둘러싸였으며, 수많은 탑과 보루, 4,000명의 잘 훈련된 병사들이 있었다. 여기에 도시 밖에는 해자가 파여 있었고, 해자와 성벽 사이의 지역에는 상당 규모의 병력이 배치되었다. 아므르는 이곳을 2달간 공격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아므르는 바빌론 요새 공략을 미루기로 하고, 파이윰 시를 습격하기 위해 파견대를 보냈다. 로마인들은 이를 예상하고 도시로 통하는 도로를 봉쇄하고 인근 마을인 라훈에 수비대를 강화했다. 무슬림군은 파이윰 시의 방비가 강력한 것을 보고 공략을 포기하고 서부 사막으로 향하면서 가능한 한 모든 소와 양을 약탈했다. 뒤이어 옥시린쿠스로 진격해 그곳을 공략하고 모든 주민을 학살했다. 이때 요안네스라는 인물이 50명의 기병을 이끌고 그들을 막으려 했지만 무슬림군의 역공을 받고 몰살당했고, 그의 유해는 나일강에 던져졌다. 나일강 삼각주 서부 지역에서 군대를 모으고 있던 테오도로스는 요안네스의 시신을 건져낸 뒤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냈다.
그 후 아므르는 헬리오폴리스에서 주바이르 이븐 알 셰르 알 와움이 이끄는 증원군과 합세했다. 바빌론에 집결한 군대가 이들을 분쇄하기 위해 출진하자, 아므르는 군대를 3개의 분대로 나눠서 적의 정면과 양 측면을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해 혼란을 일으킨 뒤 포위 섬멸했다. 패잔병들은 바빌론 요새로 도망쳤고, 바빌론 요새의 나일강 항구는 무슬림군에게 접수되었다. 당시 파이윰 시를 지키고 있던 도멘티아노스는 패배 소식을 듣고 밤에 도시를 떠나 니키오스로 도주했다. 이후 확보한 함대를 통해 나일강을 차단함으로써 나일강 삼각주와 이집트 남부 지역 간의 연락망을 끊은 무슬림군은 뒤이어 파이윰 시를 점령하고 아트리브와 메누프 요새를 공략한 뒤 640년 9월 바빌론 요새를 재차 포위했다.
무슬림들은 각 도시와 마을을 점령하면서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고 재물을 약탈했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삼각주 주민들은 공포에 사로잡혀 알렉산드리아로 도주했고, 많은 원주민들은 무슬림에게 감히 맞설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자발적으로 복종했다. 테오도로스는 다른 사령관과 함께 알렉산드리아로 가면서 도멘티아노스에게 니키우스 요새 수비를 맡기고, 나일강 보호는 세베니트 시의 수비대 지휘관에게 맡겼다. 한편, 알렉산드리아 대주교 키루스는 무슬림 진영을 찾아가 칼리파에게 1,000 디나르, 아므르에게 100 디나르, 전사당 2 디나르를 바칠 테니 이집트에서 떠나달라고 요청했다. 아므르는 더 많은 공물을 바치거나 이슬람교로 개종하라고 요구했고, 키루스는 이를 수락했다.
그러나 키루스가 이 합의를 이라클리오스 황제에게 알리자, 이라클리오스는 그가 무슬림과 내통한다고 의심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소환한 뒤 공개 재판을 열었다. 키루스는 자신이 이집트를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주장하면서, 아랍인에게 공물을 바친다고 해도 제국에 바치는 세금 역시 낼 거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라클리오스는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를 이교도라고 비난하며 가혹한 고문을 가한 뒤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감옥으로 보냈다. 결국 공물이 지급되지 않자, 아므르는 평화 협약이 무효화되었다고 선언하고 바빌론 공방전을 재개했다.
641년 2월 11일 이라클리오스가 사망했다. 뒤이어 황위에 오른 콘스탄티노스 3세는 현 상황에서 전쟁을 이어가는 건 어리석다고 판단하고 키루스를 수도로 복귀시켜서 가혹한 고문과 옥고로 악화된 건강을 회복하게 한 뒤 이집트로 보내서 무슬림군과 평화 협약을 재차 논의하게 했다. 이와 동시에, 군대를 이집트로 파견해 바빌론 요새를 구하게 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바빌론 수비대는 구원군이 좀처럼 오지 않고 굶주림이 심해지면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641년 4월 9일 자신들이 알렉산드리아로 안전하게 귀환하는 조건하에 바빌론 요새를 넘겼다. 이리하여 이집트 남부 지역 대부분이 무슬림군의 손아귀에 넘어갔다.
바빌론 요새 공략 후, 아므르는 니키오스 요새를 향해 북상했다. 무슬림군이 니키오스 인근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접하자, 도멘티아노스는 파이윰 시에서도 그랬듯이 병사들을 내팽개친 채 알렉산드리아로 도망쳤다. 지휘관이 달아났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 수비대도 니키오스를 떠나 알렉산드리아로 향했지만, 무슬림군이 이들을 추격해 몰살시켰다. 641년 5월 13일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니키오스에 진입한 무슬림군은 주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무슬림군은 뒤이어 안티노폴리스로 진군해 역시 별다른 저항없이 입성하여 약탈을 자행했다.
이집트 방면 수비대 총사령관 테오도로스는 니키오스 요새가 별다른 저항 없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알렉산드리아에서 세베니트 시로 이동해 무슬림군을 저지하려 했지만 세베니트 시가 입성을 거부하면서 실패했다. 그 사이,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한 도멘티아노스가 임시로 수비대 지휘관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또다른 지휘관 메나스와 심각한 갈등을 벌였다. 도멘티아노스는 알렉산드리아의 모든 청색당 지지자들을 규합했고, 메나스는 이에 대항하여 녹색당 지지자들을 규합했다. 여기에 필라이스가 이끄는 단성론 지지자들이 대규모 폭동을 일으켰다. 이에 알렉산드리아로 귀환한 테오도로스가 도멘티아노스를 해임하고 메나스를 새 지휘관으로 삼았지만, 혼란을 가라앉히기엔 역부족이었다.
얼마 후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한 무슬림군은 도시를 포위했다. 하지만 알렉산드리아의 방어시설이 강력했던 터라 공략이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공방전이 6개월간 이어지자, 우마르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아므르 대신 우바이다 이븐 알 사미트를 공성전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이후 무슬림군은 맹공을 퍼부은 끝에 성벽을 무너뜨리고 도시 안으로 진입해 수천 명의 적병을 죽였다. 남은 병사들과 주민들은 내성으로 도주했고, 일부 부유한 상인과 많은 병사들이 항구에 정박해 있던 배를 타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도주했다.
한편, 키루스는 641년 5월 콘스탄티노스 3세 사후 아들 이라클로나스를 황위에 올리면서 실권을 잡은 마르티나 황태후에 의해 무슬림군과 평화 협약을 맺을 권한을 부여받고 641년 9월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했다. 마르티나 정권은 641년 9월 28일 발렌티노스 아르샤쿠니의 정변으로 무너지고 콘스탄스 2세가 단독 황제로 군림했지만, 그는 이 사실을 모른 채 바빌론 요새로 가서 아므르와 협상했다. 그 결과 641년 11월 8일에 양자는 다음과 같은 합의를 맺었다.
1. 무슬림군은 알렉산드리아에 입성하되 지즈야를 받는 대가로 수비대와 주민들을 해치지 않는다.
2. 양자는 642년 9월 28일까지 모든 적대 행위를 중단한다.
3. 알렉산드리아의 로마군은 11개월 이내에 그들의 재산과 보물을 챙기고 도시를 떠날 수 있다.
4. 새로운 로마군이 알렉산드리아에 입성할 수 없다.
5. 육로로 가고자 하는 모든 로마군은 통행료를 지불해야 한다.
6. 150명의 전사와 50명의 원주민이 아랍인들에게 인질로 넘겨져야 한다.
7. 로마군은 아랍인에 대한 모든 공세를 중단하고, 알압인은 교회를 파괴하지 않고 기독교인의 일에 간섭하지 않는다.
8. 알렉산드리아의 유디인은 거주권을 인정받는다.
2. 양자는 642년 9월 28일까지 모든 적대 행위를 중단한다.
3. 알렉산드리아의 로마군은 11개월 이내에 그들의 재산과 보물을 챙기고 도시를 떠날 수 있다.
4. 새로운 로마군이 알렉산드리아에 입성할 수 없다.
5. 육로로 가고자 하는 모든 로마군은 통행료를 지불해야 한다.
6. 150명의 전사와 50명의 원주민이 아랍인들에게 인질로 넘겨져야 한다.
7. 로마군은 아랍인에 대한 모든 공세를 중단하고, 알압인은 교회를 파괴하지 않고 기독교인의 일에 간섭하지 않는다.
8. 알렉산드리아의 유디인은 거주권을 인정받는다.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온 키루스는 테오도로스와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에게 평화가 성립되었다고 알렸다. 그러나 무슬림군이 지즈야를 받으러 내성에 접근하자,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은 저항하기로 결의하고 키루스를 쳐 죽이려 들었다. 하지만 수비대는 더 이상 저항할 의지가 없었고, 테오도로스는 키루스가 체결한 합의를 이행하기로 했다. 결국 주민들은 알렉산드리아를 무슬림군에 넘기고 지즈야를 헌납했다. 아므르는 우마르에게 "별장 4,000채와 목욕탕 4,000 채, 인지즈야를 내는 유대인 40,000명, 왕의 위엄을 갖춘 유흥 업소 400곳을 확보했다"고 보고했다. 그 후 테오도로스와 모든 군대는 알렉산드리아를 버리고 키프로스 섬으로 피신했다. 키루스는 이집트에 남아 이집트 기독교도들의 수장 노릇을 하면서 단성론 신봉자들을 박해하는 정책을 이어갔다. 그러다 642년 3월 21일 이질에 걸려 사망했고, 베드로가 새 알렉산드리아 대주교로 취임했다.
13세기의 여러 아랍어 사료에서는 우마르가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기술되었다. 13세기 콥트 정교회 주교였던 그레고리도 641년 우마르가 아므르에게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을 아래의 이유로 불사르라고 명령했다고 밝혔다.
"이 책들이 쿠란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전한다면 쓸모 없다. 다른 말을 한다면 해롭다. 따라서 두 경우 모두 불태워야 한다."
하지만 후대 학자들은 이 일이 실제로 일어났는지에 대해 회의적이다. 사건이 일어났다는 641년에서 6세기가 경과한 뒤에야 이에 대한 기록이 등장한 건 의심되며, 이슬람 당국이 신자들에게 타 종교를 단호히 거부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일부 학자들은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은 이미 이전부터 쇠락하고 있었고 무슬림군이 알렉산드리아에 입성했을 때는 이미 존재하지 않았을 거라고 추정한다.
642년 여름, 아므르는 사촌인 우크바 이븐 나피에게 이집트 남쪽의 인근 국가인 누비아를 침공하게 했다. 그러나 탁월한 궁술을 갖춘 누비아인들의 무자비한 화살 세례로 인해 250명의 무슬림 전사들이 전사했고, 누비아 기병대의 속도가 너무 빨라서 무슬림 기병대가 따라잡는 데 애를 먹었다. 결국 우크바는 적의 치고 빠지는 전술에 애를 먹은 끝에 아므르의 허락을 받고 누비아에서 철수했다.
644년 11월 3일, 칼리파 우마르가 모스크에서 예배 드리던 중 페르시아계 기독교도 노예 피루즈에게 암살당하고 우스만이 새 칼리파로 등극했다. 우스만은 아므르를 메디나로 소환했고, 이집트는 압둘라 이븐 사드가 이끄는 수천 병사들에 의해 통제되었다. 콘스탄스 2세는 이 때를 틈타 이집트를 탈환하기로 마음먹고, 645년 300척에 달하는 대규모 함대를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집결시킨 뒤 마누일 장군의 지휘하에 알렉산드리아로 파견했다. 그는 1,000명의 수비대만 있던 알렉산드리아를 빠르게 공략했다. 그러나 로마군은 공세를 이어가는 대신 알렉산드리아에 그대로 머물면서 주변 일대를 황폐화시키고 주민들을 가혹하게 착취하는 행태를 일삼았고, 이로 인해 주민들은 그들을 무슬림의 지배로부터 해방하러 온 자들이 아닌 침략자로 여겼다.
우스만은 로마군이 알렉산드리아를 공략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아므르를 즉시 이집트로 보냈다. 아므르는 니키오스 요새에서 병력을 소집했지만 알렉산드리아로 직공하는 대신 마누일이 알렉산드리아 요새를 떠나 자신에게 접근하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마누일이 알렉산드리아에서 출발하여 니키오스 요새로 접근하자, 그는 즉시 요격했다. 646년 5월 니키오스 요새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무슬림군이 대승을 거뒀고, 마누일은 잔여 병력을 수습한 뒤 알렉산드리아로 도주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은 마누일에게 협조하기를 단호히 거부했고, 결국 마누일은 무슬림군이 알렉산드리아에 무혈 입성하기 직전에 함대에 몸을 싣고 알렉산드리아에서 도주했다. 아므르는 알렉산드리아가 또다시 항전할 가능성을 배제하고자 모든 성벽과 요새를 허물었다. 이리하여 이집트는 로마의 품에서 영원히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