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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3 18:17:15

카쿠레키리시탄

잠복 그리스도교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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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이름 한국어 나가사키 지역의 은둔 그리스도교 유적지들
일본어 長崎と天草地方の潜伏キリシタン関連遺産
영어 Hidden Christian Sites in the Nagasaki Region
프랑스어 Sites chrétiens cachés de la région de Nagasaki
국가·위치
[[일본|]][[틀:국기|]][[틀:국기|]]
나가사키현
구마모토현
등재유형 문화유산
지정번호 1495
등재연도 2018년
등재기준 (ⅲ)[1] }}}

1. 개요2. 발생: 일본그리스도교 박해3. 발견4. 기존 가톨릭과 다른 점5. 세계유산6. 창작물7. 같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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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隠れキリシタン

'숨은 크리스천'이라는 뜻으로 일본에도 시대 무렵, 극도의 종교 탄압에 가톨릭 신자들이 음지로 숨어들어, 사제가 한 명도 없는 상태에서 비밀리에 종교생활을 지속한 것을 의미한다. 일본그리스도교 탄압은 에도 막부가 무너지고, 신정부가 들어선 1873년(메이지 6년)에 가서야 사이고 다카모리가 금교령을 폐지하면서 풀렸다.

한국인 일본학자들은 잠복 키리시탄이라고 번역하여 사용한다. 숨독 키리시탄 관련 유적이 있는 나가사키 일대에서도 잠복 키리시탄(潜伏キリシタン)[2]이라고 불렀다는데, 키리시탄 관련 시설이 해당 이름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것을 계기로, 일본의 각종 미디어에서도 '잠복 키리시탄'이란 단어가 언론에 잠시 자주 등장하기도 했다. 일본에서는 1873년 이전의 박해를 받던, 역사 속의 토착 가톨릭 신앙은 한자를 써서 카쿠레키리시탄(隠れキリシタン)으로 표기하며, 1873년 이후에도 가톨릭으로 돌아가지 않고 예전의 신비주의를 유지하는 신앙은 카타카나를 써서 카쿠레키리시탄(カクレキリシタン)으로 다르게 표기한다. 물론 발음은 같다.

한때 모든 카쿠레키리시탄(의 자손)은 가톨릭으로 복귀했고, 가톨릭으로 복귀하는 것을 거부했던 카쿠레키리시탄은 1980년대까지 존재하다가 신자가 모두 죽자 사라졌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1991년 인류학자 크리스탈 웰란이 나가사키현 고토시에 아직 존재함을 확인했다. 고토시가 워낙 외진 섬이라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고, 그 사람들 역시 자신들의 존재를 숨긴 채 신앙을 유지해온 만큼, 다른 오지에서도 남아있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이들은 가톨릭교회에 복귀할 뜻이 없고 자신들의 신앙을 유지하려고 하나, 젊은층이 이탈하면서 미래는 밝지 않다.

2. 발생: 일본그리스도교 박해

일본에 처음 전파된 그리스도교 종파는 가톨릭인데, 센고쿠 시대 무렵 일본무역을 하던 스페인, 포르투갈예수회 선교사들로부터 전래되었다. 센고쿠 시대다이묘들은 서양 세력과의 무역으로 이득을 챙기기 위해 가톨릭 전래를 허가하였고, 오토모 소린이나 타카야마 우콘, 이치죠 카네사다, 고니시 유키나가, 소 요시토시, 구로다 조스이 등 스스로 가톨릭 신자가 된 다이묘도 있었다. 이 때 개종한 사람들을 일본에선 '키리시탄', 개종한 다이묘를 '키리시탄 다이묘'라 불렸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정권을 잡은 후, 히데요시는 각지의 다이묘들이 서양무역으로 이득을 얻어 세력을 키워 자신에게 대항하게 될까 우려하여[3] 그 첨병인 선교사를 겨냥해 바테렌(선교사) 추방령[4]을 내리고 1597년에 나가사키에서 키리시탄을 집단 처형했다. 그리고 일부 광신도들이 신토불교는 우상숭배라는 이유로 신사을 습격해서 신체를 훼손하고 불상을 파괴하는 등 사회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도요토미 가문이 몰락한 뒤 정권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도 막부도 사정은 다르지 않아서, 제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 치세에 금교령(禁敎令)을 내리고, 가톨릭 선교사들을 추방하거나 처형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후 외국과 이 독자적으로 무역하는 것을 막고 쇄국정책을 유지했다. 각 번들에서도 다이묘의 성향에 따라 박해가 일어나기도 했다.

파일:external/www.pine-o.co.jp/rakujo2.jpg
반군의 근거지였던 하라성(原城)을 공격하는 막부군.

일본에서 가톨릭이 결정적인 타격을 받은 계기는 키리시탄들을 중심으로 막부의 지배에 저항하여 대봉기를 일으켰던 시마바라의 난이다. 시마바라의 난을 겪은 뒤 에도 막부는 '키리시탄은 정권을 엎으려는 반란분자'라고 생각했으므로 후미에 같은 일을 벌여 키리시탄을 색출해서 죽이려 하는 등 철저한 박해를 가했다. 이러한 금교령은 에도 막부의 통치기간 내내 유지되었다.

이렇게 박해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키리시탄들은 신앙을 버리지 않았지만, 키리시탄임이 공공연하게 알려지면 생명이 위험했기 때문에 지하로 숨어들어야 했다. 그렇게 장장 250년 동안 숨어서 신앙생활을 했다.

이렇게 본인들은 숨는다고 숨었지만, 실은 에도 막부 역시 카쿠레키리시탄의 존재를 다 파악하고 있었다(…). 법대로 하자면 다 처형해야 하지만, 일본의 천주교도들은 정부에 무력 저항을 한 역사가 있으므로 한두 명이 아니라 수천 명 단위 단체가 발각되어 처형하면 제2의 시마바라의 난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염려 때문에 가톨릭 신자가 아니라 그냥 사상범[5]이라는 빠져나갈 수 있는 이름으로 부르며 눈감아줬다.[6] 1800년대 초반이 되면 카쿠레키리시탄들이 다시 발각되는데, 키리시탄이 아닌 다른 이상한 종교로 간주하여 묵인하거나 배교만 시키고 풀어줬다. 시마바라의 난이 이미 터졌었던 아마쿠사에서 2백 년 만에 1805년에 또 대량으로 신자가 발각되었는데[7] 막부에서는 이들에게 강제로 후미에 및 배교 서약서를 쓰게 하고 사건을 덮어버렸다. 사실 이 키리시탄들이 발각된 이유는 육식 금지령을 어기고 소고기를 먹었다가 들킨 것 때문이다.

하이쿠 시인인 고바야시 잇사의 하이쿠 가운데 君が代や茂りの下の耶蘇仏(천황 치세여, 우거진 수풀 아래 기독교 불상)이라는 시가 전하는데, 잇사가 규슈를 여행하던 중에 가톨릭 성상을 보고 읊었다고 한다.

3. 발견

파일:external/oratio.jp/ooura-720x480.jpg

1858년 개항 조약 이후 외국인에 한해 신앙 활동이 허가되었고, 나가사키에 새로 세워진 오우라 천주당[8]의 베르나르타데 프티장(Bernard-Thadée Petitjean.1829~1884) 주임신부는 일부러 성가를 부르며 다니는 등 선교를 시도했으나 한동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러나 성당에 구경왔던 사람들 가운데 카쿠레키리시탄들이 섞여 있었고, 이들이 성모상을 보게 되면서 그들이 모여 살던 마을에 "프랑스 절에 성모 마리아님이 계시다"는 소문이 퍼졌다.

카쿠레키리시탄들 사이에는 당시로부터 250여 년 전 순교한 바스챤[9]이 예언한 "7대가 지나면 흑선을 타고 파파(교황)가 보낸 콘페소르(고해신부)가 온다. 매주라도 콘삐산(고해성사)을 할 수 있다. 어디서라도 큰소리로 키리시탄의 노래를 부르며 걸을 수 있는 시대가 온다. 길에서 젠쵸(외교인)를 만나면 그가 길을 양보한다."라는 전승이 있었다. 이에 예언이 실현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돌았다.

1865년 4월 12일(元治 2년 음 3월 17일) 금요일, 산파 이사벨라 유리(당시의 가족과 동네 사람 13~15명(모두 카쿠레키리시탄)이 구경을 핑계 삼아 오더니, 기도하고 있던 프티 장 신부에게 "성모님을 공경하십니까?", "결혼은 하셨습니까?", "전례력을 지키십니까?"[10]를 질문하였다. 이에 프티장 신부는 "성모님을 공경하고, 사제는 결혼하지 않으며, 전례력을 지키고 있습니다."라고 답하였다.[11] 키리시탄들은 그제서야 "우리의 마음도 신부님과 같습니다."라고 속삭인 후 "サンタマリアの御像はどこ? (성모 마리아님의 성상은 어디 계시나요?)"라고 물었다. 이에 프티장 신부가 안내해 주자, 그냥 구경 온 척하던 마을 사람 전원이 갑자기 몰려들어 기도를 했다고 한다. 프랑스에서 온 이들이 가톨릭 사제라고 확신하여 감추어 온 신앙을 드러낸 것이다.
파일:오우라 천주당의 '신자의 재발견'.jpg
오우라 천주당에 새겨진 '신자 발견'을 그린 조각

1865년 4월 12일의 이 사건은 교회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12] 일로, '신자 발견'이라고 부른다. 프티장 신부는 이를 당시 요코하마 교구장 주교에게 보고하였다. 일본 외부에서는 이런 신자가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기에, 이들을 발견한 서양 신부들은 이를 기적이라고까지 말했다.

하지만 2년 뒤인 1867년(慶應 3년) 카쿠레키리시탄들의 집단 거주지인 우라카미(浦上) 지역의 신도들이 불교식 장례를 거부함으로써 그 존재가 막부에게 드러났다. 카쿠레키리시탄 대표로 봉행소에 불려간 다카기 센에몬(高木仙右衛門) 등은 분명하게 신앙을 표명했지만 나가사키 봉행은 막부에 보고는 하되 당장은 이들을 마을로 돌려보내기로 한다. 막부의 명령을 받은 밀정이 우라카미의 신도 조직을 조사한 뒤에야 박해가 시작되어 7월 14일(음 6월 13일) 심야 비밀 교회당을 관리가 급습한 것을 시작으로 다카기 등 신도 68명이 일제히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당하는 제4차 우라카미 키리시탄 적발 사건이 벌어진다. [13] 이러한 처사에 당연히 서양 공사들은 항의했다.

도쿠가와 막부를 계승한 메이지 정부 또한 키리시탄 박해를 철폐하지 않아서, 1868년 3월 나가사키에 부임한 사와 노부요시(澤宣嘉)와 이노우에 가오루는 우라카미의 신도들을 불러내 배교를 설득했지만 실패했다. 처음에는 중심 인물들의 처형까지 고려했지만 외국 공사들이 강하게 항의하여 쓰와노(津和野), 하기(萩), 후쿠야마(福山)로 유배보내는 것으로 감형되었다. 그러나 유배지에 도착한 그들은 노골적인 고문만 받지 않았을 뿐 물과 음식도 겨우 죽지 않을 정도로만 넣어주었고, 더운 지역에서는 굴비 엮듯 엮어 좁은 방 안에 밀어넣고 추운 곳에서는 추위에 그대로 노출시키는 식으로 가혹하게 대했기 때문에 유배자 3394명 중 무려 662명이 순교했다.

이 일로 당시 일본과 통상 중이던 서구 열강들이[14] '그리스도교 신자 탄압을 멈추지 않으면 불평등 조약 개정도 없다.' 하며 메이지 신정부를 압박했다. 이때 일본은 외교 채널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교를 박해하지 않는다. 그자들은 그리스도교인이라서 박해받는 게 아니다."라고 하였으나, "그들이 종교를 버린다면 풀어줄 것이다."라고 말해 실질적으로 키리시탄 박해였음을 에둘러 시인했다.

메이지 정부 내 존황양이파 인사 가운데는 종교의 자유를 허용한다고 불평등 조약을 개정해주지 않을 거라며 반발하는 사람도 있었고, 워낙 박해해 온 세월이 길고 집요했다보니 민중들 사이에서도 사교(邪敎) 취급을 받는 바람에 거부감이 적지 않았다. 한편 오랫동안 일본 민중들 사이에 신앙해오던 불교에 대한 강제적인 폐불훼석이나 국가신토를 따르지 않는 각지 신사에 대한 강제 통폐합 정책으로 인한 불교계나 기존 신토계의 반발에 직면했던 메이지 정부가 마침 '공공의 적' 취급을 받던 키리시탄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을 이용해서 그들의 반발을 다른 곳으로 돌려보려는 시도도 있었다.

하지만 서양과 교류하기를 희망하던 메이지 정부에게 있어 종교의 자유를 허하라는 서구 열강의 압력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교 신자 탄압을 멈추지 않으면 불평등 조약 개정 안 해준다고 나오니…[15] 결국 1873년 2월 24일 키리시탄들이 풀려났고, 이후 사이고 다카모리가 금교령을 폐지하고 대일본제국 헌법이 '종교의 자유'를 명시하면서 카쿠레키리시탄은 대부분은 통상적인 형태의 가톨릭으로 원복하였다.

하지만 워낙 오랜 세월이 지난지라 카쿠레키리시탄의 전승이 많이 변해서 "조상님의 종교는 그렇지 않다!"라며 자신이 믿는 종교의 원래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가톨릭으로의 원복을 거부하고 카쿠레키리시탄으로 남는다. 이런 자들을 하나레키리시탄(離れ切支丹, 떨어져 나간 크리스천)이라고 부른다. 다만 하나레키리시탄은 일본 내에서도 거의 천연기념물급이다. 대다수의 카쿠레키리시탄들은 다시 원복했기 때문.

프랑스 성직자들은 카쿠레키리시탄에게 세례를 주어야 하는지를 두고 고민에 빠졌다. 이들은 공동체의 원로가 구전으로 전수받은 세례성사의 라틴어 경문을 낭송하며 세례를 베풀어 왔다. 가톨릭의 교리에 따르면, 세례성사는 받는 이가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받아들일 의지가 있고 다른 이가 물을 이마에 부으며 "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이 사람에게 세례를 줍니다."라고 말하는 '형상'만 충족된다면 무조건 유효한데, 정식 세례를 줄 때 필요한 라틴어 경문이 구전 과정에서 변해버렸으니 도대체 어디까지를 천주교 기준으로 유효한 세례라고 인정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들이 자체적으로 받아은 세례가 교회법적으로 유효하다면, 세례성사는 평생 동안 단 한 번만 받아야 하기에 결코 다시 받아서는 안 된다. 기록이 제대로 남지 않고 박해도 심하던 곳에선 간혹 갓난아기가 세례를 2번 받는 사고가 일어나기도 했으나, 유효한 세례는 평생 한 번만 받는다는 원칙은 예나 지금이나 확고하다. 무턱대고 세례를 다시 하면 재세례파를 긍정하는 꼴이 될 수 있어 중요한 문제였는데, 프랑스 성직자들이 세례 기도문을 확인하여 라틴어 발음이 정말 심각하게 변형된 몇몇 경우를 제외하면, 가급적 카쿠레키리시탄들이 받은 세례를 인정하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4. 기존 가톨릭과 다른 점

이를 문화 연구의 관점에서 보자면 상당히 흥미롭다. '원형 문화'와 '오랜 세월 동안 구전만으로 이어지면서 뒤바뀐 변형 문화'를 눈앞에서 확실하게 비교 대조해 볼 수 있는 보기 드문 사례로서, 원형 문화와 변형 문화가 모두 확고하게 존재한다. 가톨릭은 단일성을 유지한 채로 현재까지 굳건하게 살아 있으며, 원조 가톨릭의 입장에선 카쿠레키리시탄이 변형된 집단이지만 원조와 연락이 끊긴 채로 이어진 카쿠레키리시탄(특히 하나레키리시탄)의 입장에선 원조 가톨릭과 다른 점이 많이 생겼기 때문이다.

막부의 박해 때문에 외국인 성직자들은 순교하거나 배교[16]하며 전멸해 버렸고, 외국 선교사에게 교육받아 일본인 성직자들이 탄생하기도 했지만 일본 가톨릭은 아직 스스로 성직자를 양성해낼 정도로 성숙한 단계는 아니었고 이들 역시 박해 때 마찬가지 과정을 거쳐 싹 몰살당하고 말았다. 시마바라의 난의 지도자인 아마쿠사 시로 도키사다도 (세례를 받기는 했지만) 평신도였다. 게다가 포르투갈과의 무역이 완전히 단절되고, 개신교 국가인 네덜란드와는 선교불허를 조건으로 제한된 무역만을 유지했기 때문에, 카쿠레키리시탄들은 자신들을 지도해줄 성직자를 모셔오기는커녕 가톨릭의 본산인 교황청과도 일절 연락을 할 수 없었다. 일본인 사제수도자들이 있기는 하였으나, 전술했듯 사제와 수도자를 직접 양성하는 데는 무리가 있었다.(스스로 양성해냈더라도, 어차피 교황청과 연락이 닿지 않으면 그들이 정식 사제였다고 보기도 힘들 것이다.) 다행히 초기 일본 가톨릭의 지도자들은 박해 때문에 완전히 성직자가 사라지고 평신도들만으로 버텨야 하는 상황에 대비하여 몇 가지 교육자료를 남기고 신자들을 가르쳤다. 이러한 교육자료들은 향후 카쿠레키리시탄이 250년간 버티는 마지막 신앙적 보루가 되었다.

결국 숨어서 살아남은 신자들은 전례를 집전하고 교리를 가르치고 이끌어줄 성직자가 없는 상태에서[17][18] 자기들끼리 기억하는 몇 안 되는 구전 전승만으로 종교를 유지해야 했다. 사소한 성물도 기리시탄이라는 증거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성경 내용도 온전히 유지하지 못했다. 그들 자신은 크리스천으로 남고자 했지만 아무래도 구전만으로는 한계가 있었고, 250년이 지나는 동안 신자들의 신심과는 별개로 외형상으로는 상당히 다른 독특한 종교가 되어버렸다.
카쿠레키리시탄의 성가.

큰 특징으로는 쵸우가타(翁方)라는 원로격 우두머리의 아래로 비밀 조직을 유지하며 주문 등을 전파하는 밀교적인 특성을 지녔으며, 탄압을 피하기 위해 각종 상징물에 몰래 종교적인 뜻을 담았다. 특히 불교로 많이 위장하였으며, 불상불경으로 위장하여 그리스도교적인 문구를 집어넣거나 마경 같은 것을 만들기도 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The_Virgin_Mary_disguised_as_Kanon_Japan.jpg 파일:일본 26위 성인 기념관의 마리아 관음 돌조각.jpg 파일:일본 26위 성인 기념관의 마리아 관음 도자기.jpg
카쿠레키리시탄의 마리아 관음상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인데 위의 것들은 모두 성모 마리아이다. 맨 앞의 불상을 자세히 보면 가슴에 십자가 무늬가 있는데 이런 성상은 성모상을 불상으로 위장했다고 하여 마리아 관음(マリア観音, 마리아 칸논)이라고 한다. 심지어 '삼존불' 형식 성상이 발견된 적도 있다. 당시 일본에서 원래 모양대로 성모상을 모셨다가는 "나는 키리시탄이오." 하고 자백하는 짓이라 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있는 것들은 일본 26위 성인 기념관에는 있는 마리아 관음인데, 본디 불교에는 송자관음(送子觀音)이라 해서 아이를 안은 관음상이 있기에 자기네 신앙을 숨기기에 더욱 안성맞춤이었다.

사실 이것은 가톨릭의 시각으로 보아도 딱히 잘못된 것은 아니다. 성모상이 현지화되는 것은 전 세계에서 동일하게 나타나는 양상이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당시 광화문에 설치된 제대 옆에도 한복을 입은 성모상이 모셔졌다. 카쿠레키리시탄들이 탄생하기 거의 천 년 전에 아시아에 와서 그리스도교를 전래한 경교(네스토리우스파 그리스도교)에서는 '마리아 관음상'뿐만 아니라 '마리아 관음도'나 '예수 미륵도' 등 불화를 기반으로 한 '성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이들이 외우던 기도문을 오라쇼(라틴어: oratio)라고 하는데, 당시까지 전래되었던 라틴어 기도문을 음차하여 염불처럼 음률을 붙인 형태를 띠고 있다. 당연히 뜻은 제대로 모르고 그냥 소리나는 대로 외웠는데, 예를 들어 성찬례(미사)를 의미하는 'Eucharistia(에우카리스티아)'는 구전되면서 '요카시치'로 바뀌고, 다시 '요카노시치'가 되었다가 '요카시치야'로 바뀌더니 한자 훈차 표기로 八日の七夜[19]가 되어 본래의 의미를 짐작할 수 없게 되었다. 오라쇼는 지방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현재는 일본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성호경을 예로 들면
In nomine Patris, et Filii, et Spiritus Sancti. Amen.
인 노미네 빠뜨리스, 엣 필리이, 엣 스삐리뚜스 상띠, 아멘.
성부성자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いん なうみね ぱあちりす ゑつ ひいりい ゑつ すぴりつす さんち あめん
인 노-미네 파-치리스 엣 히-리- 엣 스피리츠스 산치 아멘.[20]
으로 외우는 식이다.[21]

이들이 가톨릭으로 복귀한 직후인 1873년의 교리지도서 '세례성사'에서는 성호경을 다음과 같이 표기했다.
いん のみね ぱちりす えつ ひりい えつ すぴりとす さんち あめん
인 노미네 파치리스 엣 히리- 엣 스피리토스 산치 아멘.
일본어 음가 표기의 한계를 제외하면 다시 라틴어에 가까워진 것을 볼 수 있다. 라틴어로망스어변해가는 모습과도 유사하다는 점이 흥미롭다.

성경의 내용은 두루뭉술하게 옛날 이야기처럼 구전되었다. 전승도 달라졌는데, 선악의 이분법적인 서양의 세계관과 달리 융합과 용서를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적 세계관에 영향을 받아 아담하와가 낙원에서 내쫓긴 사건이 사라졌고, 이에 따라 가톨릭의 중심 교리인 원죄가 사라져버렸다. 하느님에게 용서를 받은 것으로 되었다고 변개되었다.(참조) 또한 카쿠레키리시탄들은 자신들의 신앙대상을 데우스 사마(님)라고 불렀다. 다만 그리스도교라고 해서 꼭 원죄가 중심 교리인 것은 아니며, 실제 정교회권 중에는 원죄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 경우도 있으므로 원죄 교리가 없다는 것 자체가 아주 특이한 일은 아니다.

소토메, 고토 등 나가사키계 키리시탄의 전승 서적천지시지사(天地始之事)[22]에는 기본적인 성서의 내용도 있지만, 아담의 자녀인 치코로우(ちころう)와 탄호우(たんほう)는 남매인데 결혼하여 자녀를 보았다고 하는 등[23], 일본 전통의 이자나기, 이자나미 설화가 혼합된 모습도 보인다.

카쿠레키리시탄이 문화적 가치가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가장 보수적이며 굳건해보이는 문화인 종교 문화조차도 철저한 탄압 아래에서는 원형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뒤틀리기 마련이고 탄압 하의 일본 가톨릭 역시 원형에서 상당히 벗어나 변형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심을 유지하려는[24] 인간 의지의 경탄스러움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외국에서 전수된 문화가 원류와 접촉이 끊긴 후 어떻게 토착화되는지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사료이기도 하다.

5. 세계유산

2018년, 마을 10곳, 성 터 1곳, 성당 1곳까지 총 12곳의 유적이 나가사키 지역의 은둔 그리스도교 유적지들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되었다. 나가사키시 중심에 있는 오우라 천주당을 제외하면 대부분 낙도나 산 속 등 오지에 위치해있다.

6. 창작물

음지에 숨어 신앙을 수백년 간 유지했다는 것에 감명받은 사람이 많은지 일본산 창작물에서는 많이 언급되고 소재로 쓰이기도 한다. 애초에 이런 설정은 창작물에서도 써먹기 좋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전반적으로 그리스도교에 대한 이해도가 낮고[25], 카쿠레키리시탄 자체가 은폐된 밀교라서 세세한 부분을 파악하기 어려운 탓인지 디테일하게 묘사되는 경우는 생각보다 드물다.

7. 같이보기



[1]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2] 일본식 발음은 '센푸쿠 키리시탄'[3] 오토모 소린은 서양 선교사의 연줄을 통해 서양으로부터 불랑기포를 들여왔고, 1586년 우스키 성(臼杵城) 농성 당시 시마즈 이에히사의 군을 상대로 큰 위력을 발휘했다. 심지어 소린은 불랑기포의 자체제작기술도 보유했던 듯하다. 다만 불랑기포는 일본 내에서 별로 반응이 좋지 않았는데, 오토모 소린 항목 참조.[4] 바테렌(伴天連)은 포르투갈어 파드레(padre)의 고어(古語)로, 가톨릭이 일본에 전래된 당시의 선교사나 신부에 대한 호칭이었다(출처: <동아시아 역사와 일본>)[5]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 이데올로기. 생각이 다른 자.[6]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에도 이노우에 지쿠고노카미가 후미에를 마친 로드리고에게 "아직 고토 열도 쪽에 숨어서 자기들끼리 믿는 키리시탄이 있다고 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잡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그들은 뿌리가 잘린 거나 다름없으니 서서히 말라 죽을 테고, 애초부터 일본과는 맞지 않았던 그리스도교라는 서양의 묘목은 이 늪지와 같은 땅에서 본래의 모습을 잃고 변질되어 버릴 테니까." 하고 이죽거리는 장면이 나온다.[7] 1805년 아마쿠사 키리시탄 적발사건(天草崩れ 아마쿠사 쿠즈레)[8] 당시에는 '후란스데라(仏蘭西寺)', 즉 프랑스 이라고 불렸다. 과거 전국시대~에도시대와 달리 19세기 일본에서의 가톨릭 포교는 동시기 조선에서와 마찬가지로 파리 외방전교회프랑스인 신부들이 주도했기 때문이다. 현재 이 곳은 일본 26위 성인 성당으로 불린다.[9] 세바스티아노라는 세례명을 받은 사람으로, 평신도 지도자였다고 전한다.[10] 이는 처음 가톨릭이 일본에 전해질 때가, 유럽에서 한창 가톨릭과 개신교가 치고 박고 할 시기였기 때문. 그래서 이 3가지는 둘을 구별하는 단서로 카쿠레키리시탄 사이에 구전되었다. 그렇기에 카쿠레키리시탄들은 메이지 시대에 가톨릭과 함께 들어온 개신교에는 가지 않았다.[11] 정확하게 이사벨라 유리는 "지금 저희는 슬픈 시간(사순 시기)을 지키고 있습니다. 당신도 지킵니까?"라고 질문했다.[12] 유럽 밖 지역에서 유럽인들이 그리스도교 공동체나 그 흔적을 찾은 경우는 이게 처음이 아니긴 하다. 십자군이 중동에서 마론파 교회를 찾은 일이나, 명나라에 간 예수회 선교사들이 네스토리우스교가 당나라 시기에 전래되었음을 확인하는 등의 일이 있었다. 다만 전자의 경우 중동도 한 때 그리스도교 국가인 로마 제국의 땅이었고, 후자는 네스토리우스교가 축출된 이단인데다가 이미 명나라 시기에는 신앙이 사실상 소멸했음을 생각하면 일본의 신자 발견이 전례없는 일인 것은 맞다.[13] 浦上崩れ(우라카미 쿠즈레)란 말하자면 우라카미 지역의 카쿠레키리시탄 적발 사건으로, 1차는 1790년, 2차는 1842년, 3차는 1856년에 있었다.[14] 미국 대통령 율리시스 S. 그랜트, 영국 국왕 빅토리아,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9세 등.[15] 이는 서구 열강이 죄다 그리스도교 신자가 인구의 절대다수를 이루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당장 카쿠레키리시탄 발견 이후에 청나라에서 발생한 의화단의 난도 단순히 외세에 저항하는 운동이 아니라 중국 내 그리스도교 신자 대량학살로 이어지자, 열강 국가들 내부의 여론이 대폭발하면서 열강들이 대규모 군대를 파병해 개입하는 것으로 일이 커졌다. 현대에도 이런 양상은 크게 다르지 않아서, ISIL가 자신들의 점령지에서 납치된 현지의 토착 그리스도인들을 학살하고 개종을 강요하자, 이에 미국유럽 각지에서 IS를 응징하자는 여론이 나오면서 직접 중동 지역으로 들어가서 의용군을 결성해 맞서싸우기도 했다. 아무리 정교분리가 잘 된 국가라도 종교단체가 종교에 관해서는 하나로 뭉쳐있는 거대한 세력이라 정치인들이 이들의 말을 마냥 무시하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16] 배교한 성직자 중에선 크리스트발 페레이라(포르투갈)과 주세페 키아라(이탈리아, 당시는 통일 국가는 아니었다)가 있다. 두 사람은 배교 후 일본식 이름을 받고 그리스도교 물품을 검열하는 자리를 받았다. 이들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하여 나온 소설이 바로 <침묵>.[17] 외국인 선교사들의 상황은 본문에 있으며 개항 이전에 배출된 마지막 일본인 사제인 고니시 만쇼1644년 순교하면서 개항 때까지 성직자가 없었다. 1709년 이탈리아 선교사 조반니 바티스타 시도티가 밀입국했지만 카쿠레키리시탄 공동체와 접촉하지 못하고 막부에 잡혀 1714년에 옥사했기에 개항 때까지 성직자가 없는 상황이 계속 이어졌다.[18] 시도티 신부의 심문을 맡았던 막부의 관리 및 학자인 아라이 하쿠세키가 시도티 신부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들은 서양 소식을 기록해 모은 서양기문(西洋奇聞)이라는 책에 있다. 아라이는 시도테 신부의 심문을 마치고 막부에 보고하기를 '그냥 본국으로 돌려 보내는 것이 상책이고, 평생 가둬 두는 것이 중책이고, 처형시키는 것이 하책'이라고 했다. 시도티 신부는 자신이 연금되어 있던 기리시탄 저택의 하인 부부에게 천주교를 전도하다가 투옥되어 끝내 옥사했다. 소설가 다자이 오사무는 당시 시도티 신부의 도일과 체포, 아라이 하쿠세키의 심문 과정부터 끝내 시도티가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내용을 다룬 단편소설 '지구의(地球儀)'를 썼다. 이 소설은 그의 단편집 <만년>에 수록되어 있다.[19] 요카노시치야, 요카=八日, 시치야=七夜[20] 역사적 표기법이기 때문에 なう는 '나우'가 아닌 '노:'로 읽으며, 어중, 어미에 오는 つ는 일반적으로는 '츠'로 읽지만 촉음이 될 수도 있다.[21] 이 외에도 많은 버전이 있다. 이 논문의 16쪽 참고. 논문에서 알 수 있듯이 일본어 특유의 발음으로 라틴어 기도문을 표기하고 외웠던 것 뿐만 아니라 완전 다른 기도문인데 성호경인 경우가 꽤 있다.[22] 키리시탄의 교리와 그 존재 의의, 신앙을 지켜야 할 이유를 적은 책[23] 원래 성경에 언급된 아담의 자녀는 그 유명한 아벨·카인· 뿐이다.[24] 제대로 된 성직자 없이 오랜시간을 보내오면서 형태는 달라졌어도, 사상이 달라지지는 않았기 때문.[25] 일본의 그리스도교 신자 비율은 인구의 1%에도 못 미친다. 일본의 경우 교회 결혼식이 유행하여 신자도 아니면서 교회에서 결혼을 하는데 이때 주례도 분위기를 맞춘다고 외국인 알바를 쓰는 게 유행하는 정도다.[스포일러] 오마쥬한 수준이 아니라 작가의 상상력으로 쓴 후일담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해당 단편의 중심 인물인 백인이 누구인지 생각해보면...[27] 와타나베 켄이 연기했다.[28] 그냥 카쿠레 키리시탄의 후손이 아니라, 생명의 나무 열매를 먹었다는 최초의 인간인 '쥬스헤루'의 후손들이다. 그 때문인지 병이나 사고가 아니면 죽지 않지만, 그들의 수가 불어날 것을 우려한 신에 의해 일정한 때가 되면 지옥으로 떨어지게 된다.[29] 네덜란드 상인들이 나가사키에서 일본의 설명절 맞춰서 지낸 크리스마스 파티다.[30] 네덜란드 등 개신교 국가들은 가톨릭 박해를 비웃는다는 인식이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개신교도들은 박해받은 가톨릭에 동정심을 느끼며, 가톨릭의 식민정책을 보고 배웠고, 훗날 미국과 영국 등 개신교 국가들이 일본 등 아시아 국가들을 무력으로 개항시키게 된다. 예를 들면, 제너럴 셔먼호 사건.[31] 카쿠레키리시탄은 소멸 직전이지만, 산타 무에르테는 멕시코 사회에서 토착화된 종교중 가장 큰 세력이다. 그리고 카쿠레키리시탄은 박해로부터의 도피 과정에서 생겨났지만, 산타 무에르테는 서민 및 빈민층의 좀더 현실적인 구원에 대한 갈구가 토착종교와 혼합되어 확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