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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9 17:55:40

소 요시토시

종의지에서 넘어옴
파일:Sō_Yoshitoshi.jpg
파일:쓰시마 소 가문 문장.svg
<colbgcolor=white,#191919> 소씨 가문의 가몬[1]
소 요시토시 宗義智 (そう よしとし, 종의지)
출생 1568년
사망 1615년 1월 31일 (향년 46~47세)
세례명 다리오(Dario)

1. 개요2. 생애
2.1. 임진왜란 이전2.2. 임진왜란에 참전2.3. 왜란 이후 동-서군의 충돌에 휩싸이다2.4. 국서 위조로 조일 관계를 복원하다
3.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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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센고쿠 시대의 무장이자, 쓰시마 섬다이묘.

기리시탄(기독교) 다이묘로 유명하며, 세례명다리오(Dario). 고니시 유키나가의 딸 고니시 마리아는 그의 아내였다. 즉 고니시 유키나가의 사위. 원래는 종교가 없었으나 장인의 권유로 가톨릭에 입교, 독실한 신자가 되었다.

무엇보다 조선에게 중요한 점은 그가 임진왜란 시기 대마도다이묘라는 점이다. 대마도는 원칙적으로는 다이묘 집안이 일본계인만큼 일본 영토를 지향했으나 실질적으로 당시 반조선 반일본 같은 반반 포지션을 가져가던 지역이라, 대마도 다이묘(당주)는 조선어와 일본어를 모두 쓸 줄 알아야 했고, 당주 후계자로 어릴 때 낙점되면 10대 이전부터 조선어 교육을 받았었고, 늦게 낙점된 사람도 바로 조선어 공부를 필사적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되었었다. 그러니 당연히 소 요시토시도 조선어를 사용할 수 있었다. 훗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당연히 죽여야 할 대상 중에 요시토시만 차별적 특혜를 줘서 살려둔 것[2]도 조선과의 외교를 위한 선택이었다. 당시 조선과 외교를 해보고 조선 왕을 직접 알현해본 다이묘가 대마도의 요시토시 말고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임진왜란, 정유재란으로 파탄나버린 양국 간의 외교관계 회복과 조선과의 평화분위기 조성 계획에 그가 절실하게 필요했기 때문이다.

쓰시마 소씨 20대 당주였으며 한국 측 기록에서는 주로 한자를 그대로 읽어 종의지라는 이름으로 나온다.[3] 임진왜란 발발을 원하지 않았지만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선봉 중 하나였으며 전쟁 도중과 이후에도 조선과 일본을 화해시키기 위해 노력한 다면적인 인물이다.

2. 생애

2.1. 임진왜란 이전

1568년 15대 쓰시마 당주 소 마사모리(宗将盛)의 4남으로 태어난다. 제17대 당주 소 요시시게(宗義調)가 은거하면서 소 마사모리의 장자 소 시게나오(宗茂尚)를 양자로 맞아 가독을 양도하였다. 하지만 소 시게나오는 일찍 죽었고 이를 대신하여 차남 소 요시즈미(宗義純)를 양자로 맞이해 가독을 양도했지만 소 요시즈미마저 일찍 죽어 1579년 음력 1월 4남 소 요시토시를 양자로 맞아 가독을 양도하였다. 이렇게 하여 소 요시토시는 고작 11살에 소 가문의 제20대 당주가 되었다. 이것이 조선에 잘못 전해져 '풍신수길(豊臣秀吉)이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소씨를 내쫓고 종의지를 대마도 태수로 세웠다'고 기록되기도 하였다.[4] 사실 조선왕조실록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해 잘못된 정보가 많이 적혀 있는 편으로, 하시바 히데요시에서 도요토미가 되기 전에 4대 성씨 중 "후지와라"라는 성을 받아 "후지와라노 히데요시"였던 적이 있지만, 조선왕조 실록에는 다른 성씨를 받은 걸로 알았는지 평수길(타이라노 히데요시)[5]이라고 매우 여러번 기록되어 있으며, 그의 원래 주군이 관백(간파쿠)[6]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원래 특별히 종교를 믿는 사람은 아니었으나 장인어른고니시 유키나가가톨릭을 한번 믿어보라고 해서 그 때부터 가톨릭에 심취하게 되었다. 그래서 '다리오'라는 세례명까지 받을 정도로 독실하게 가톨릭을 믿었는데 소 요시토시와 고니시 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고니시 만쇼는 훗날 신부가 되었다.

1587년 음력 5월 정계에서 물러나 있던 양부 소 요시시게가 당주로 복귀했기 때문에 소 요시토시는 당주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는 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규슈 정벌이 있었기 때문인데 소 요시토시는 소 요시시게와 함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신종하였고 대마도의 영지를 인정받았다. 소 요시토시는 자신의 영지가 대마도였기 때문에 일본에서 다이묘의 직함 이외에도 다른 다이묘와는 다르게 조선에서의 관직도 같이 가지고 있었다. 조선 조정이 내려준 소 요시토시의 관직은 예조참의 격이었다고 하는데 현재 직급으로 보자면 차관보 정도로 볼 수 있다. 심지어 1589년 조선을 방문했을 당시에는 창덕궁 인정전에서의 연회 때 선조를 만나 직접 잔을 올리기까지 하였다. #
이 때문에 조선과 사이가 나빠지면 나빠질수록 가장 난처해지는 사람은 다름아닌 소 요시토시였다. 왜냐하면 그의 영지가 조선과 일본의 중간에 끼어있어서 행여 조선이 쳐들어오면 가장 먼저 공격을 당하기 때문이다.선례로 이전 시대의 신라구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 때도 원래 목표인 일본 본토를 공격하기 전에 먼저 대마도부터 털었다. 또한 대마도는 무역의 거의 전부를 조선에 의존하다시피 했다. 예로부터 대마도는 평지가 적고 산이 많아 수확량이 적고 자체 경제는 빈약한 편이라 한반도와의 무역을 통해 경제를 지탱하고 있었다. 특히 당시 대마도민들에게 가장 필요한 식량은 사실상 모두 조선과의 무역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래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키려 하자 목숨걸고 반대했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의지가 너무나 확고해서 어쩔 수 없었고, 소 요시토시 자신도 대마도의 다이묘이기 이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 아래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장인 상태라 다이묘들 사이에서도 발언권이 거의 없는 수준이었다.[7] 이 무렵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조선을 복속시키라"는 명령을 받아 전쟁 이전까지 소 요시시게, 고니시 유키나가, 시마이 소시쓰(島井宗室) 등이 조선과의 교섭에 힘썼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단념 혹은 조선의 입조 둘 중 하나를 관철해내는건 사실상 불가능했고 1588년 소 요시시게 사망 등의 악조건도 있어 교섭은 진척되지 않았으며 소 요시토시는 소 요시시게의 뒤를 이어 소 가문의 당주가 되었다.

1590년 조선에서 일본을 방문한 사절단인 조선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황윤길(黃允吉), 부사(副使) 김성일(金誠一), 서장관(書狀官) 허성(許筬), 수행무관 황진(黃進)을 복속사로 사칭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알현시켰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이 복속한 것이라고 받아들여 조선에 명나라 정복 사업의 선도역을 맡을 것을 명하였다. 하지만 이 조선 사절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생각과 달리 전국 통일에 대한 축하 사절이었고 이는 소 요시토시가 조선에 축하 사절을 보내도록 거짓 요청을 했기 때문에 내방한 사절이었다. 궁지에 몰린 소 요시토시는 명나라 정복의 선도역 명령을 조선에게 전해야 했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 대신 명나라에 조공을 하고 싶은데 "이 없으니 조선이 명나라로 가는 길을 빌려달라"는 거짓 요청을 하였다.[8] 그러나 이것도 실현되지는 않았으며 교섭은 당연히 실패했고 결국 전쟁을 피할 수가 없게 되었다. 더군다나 소 요시토시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장이자 사위라서 출진을 해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게 없었고 장인어른의 지휘를 받아야 했다. 조선 정복 후 거제도를 봉지로 받기로는 했다지만 말이다.

2.2. 임진왜란에 참전

결국 1592년 음력 4월 12일 소 요시토시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장으로서 5,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쓰시마 섬 북단의 오우라(大浦)를 출항해 부산에 상륙하였다. 13일에 총공격을 시작으로, 14일에 동래, 15일에 기장, 좌수영, 16일에 양산, 17일에 밀양, 그 후에 대구, 인동, 선산을 차례차례로 공략하고, 26일에 경상도 순변사 이일(李鎰)을 상주에서 격파하였으며[9], 27일에 경상도를 넘어 충청도로 진군, 탄금대에서 요격 나온 신립(申砬)의 조선군을 괴멸시켜 충주를 공략하였다. 또 경기도로 나아가 음력 5월 1일에 여주 공략 후, 2일에 용진을 거쳐 한성 동대문 앞에 도착한 후, 3일에는 수도 한성에 입성하였다.

그 후, 여러 장수들과 한성회의를 한 후, 음력 5월 11일에 소 요시토시는 한층 더 북쪽을 향해 진격해, 18일에 임진강에서 김명원(金命元)등의 조선군을 격파하였고, 27일에 개성 공략, 황해도서흥, 평산, 황주, 중화를 차례차례로 공략하여 평안도로 나아갔다. 또, 음력 6월 8일에 대동강 근처까지 도달하였으며, 16일에는 평양을 공략하였다.

음력 7월 16일, 명의 요동군 부총병 조승훈(祖承訓)이 조선에 지원군으로 들어와 일본군이 점령한 평양성을 공격했지만 격퇴했다. 이때 소 요시토시는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패주하는 명군을 추격해, 명나라군 장수 사유(史儒), 천총(千総) 장국충(張國忠), 마세륭(馬世隆) 등을 죽였다. 29일, 이원익(李元翼)이 이끄는 조선군이 평양성을 공격하지만, 이도 격퇴하였다.

1593년 음력 1월 7일,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의 명군 약 4만과 김명원의 조선군 1만이 평양을 공격하였다. 명군이 평양성의 성문을 돌파하자 일본군은 북부 구릉지역의 진지로 퇴각하였다. 이에 이여송은 "퇴로를 주겠으니 성을 양도하라"라고 통보하였고, 일본군은 이것을 수락하고 남쪽을 향해 철수를 개시했지만, 조명연합군의 추격도 있어 어려운 퇴각이 되었다. 한성을 목표로 진격하는 명군에 대항해 왜군은 여러 방면의 각 군을 한성에 결집한 후, 명나라군을 크게 무찔렀다. 이 전투가 벽제관 전투였다. 명군에서는 이 패전으로 위축되었고, 왜군도 행주대첩 이후 한성을 탈환하기 위해 한성 주위로 결집하는 대규모의 조선군 군단으로 인한 극도의 압박과 병량 부족 등에 의해 부담감을 느끼게 되어, 강화교섭을 한 후 부산 주변까지 철수했다.

소 요시토시는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명측의 강화 담당자 심유경(沈惟敬)과 평화교섭을 진행했지만, 서로 요구하는 조건이 너무도 달라 난항을 겪었다. 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과 명이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허무맹랑한 조건을 내걸었기 때문이다. 명나라 황녀를 천황후궁으로 삼고 조선 8도 중에서 4도를 내놓으라는 조항은 누가 생각해도 경을 칠 일이다. 심유경만력제에게 사실대로 보고하면 명나라 조정에는 헬게이트가 열릴 것이 뻔했다. 결국 심유경은 궁여지책으로, 만력제에게는 왜왕에 봉한다는 거짓보고를 하게 되었다. 요시토시는 국서의 내용을 쌍방의 형편에 맞게 개찬하는 등 평화교섭 성사를 위해 노력했지만, 명나라 측 강화 담당자인 심유경의 부족한 됨됨이와 이런 기만행위를 동반한 교섭은 아무 성과없이 각국에 혼란만 야기시켰고, 끝내 교섭은 결렬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소 요시토시는 좌군에 속해 참전하였다. 우선 서쪽으로 진격해, 음력 8월 13일 남원성 공략을 개시하였고, 4일째에 성을 함락했다. 다음 전라도의 중심지인 전주를 점령, 전라도를 제압했다. 그 후, 겨울을 앞두고 후퇴해 남해 왜성에 머물렀다. 1598년 음력 8월 18일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조선에 파견된 왜군에게 음력 10월 15일부로 귀국명령이 하달되었다. 소 요시토시는 고니시 유키나가와 창선도에서 만나 함께 귀국할 예정이었지만, 이때 순천왜성에 주둔하고 있던 고니시, 마쓰라, 아리마, 오무라, 고토의 다섯 장수는 이순신(李舜臣)과 진린(陳璘)의 조명연합수군에 퇴각로가 저지되어 순천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이것을 본 소 요시토시는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다치바나 무네시게(立花宗茂), 다치바나 나오츠구(高橋統増), 데라자와 마사시게(寺沢正成) 등과 함께 순천에 갇힌 일본군을 구원하러 출진하였고, 노량해협에서 매복하고 있던 조명수군과 교전하였다. 이 전투가 노량해전이다. 고니시 유키나가 등 5명의 왜장은 이 틈을 이용해 탈출에 성공하였다. 소 요시토시는 장인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부산을 거쳐 일본에 도착하였다. 이로써 7년 동안의 전쟁은 끝이 났다.

2.3. 왜란 이후 동-서군의 충돌에 휩싸이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일본은 도쿠가와 이에야스 파(동군)와 이시다 미츠나리 파(서군)로 갈려 서로 권력투쟁을 했다. 이 와중에도 소 요시토시는 서군 측 인사인 고니시 유키나가사위였던지라 누굴 지지할 그런 입장이 아니었고, 장인어른의 결정에 따라야 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세키가하라 전투가 발발하자 소 요시토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이시다 미츠나리가 어떤 인물인지조차 생각하지도 못하고 그저 장인어른을 따라 서군에 가담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시다 미츠나리의 인망 관리 실패, 모리 데루모토의 불성실한 태도,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와키자카 야스하루 등의 줄배신 등 여러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결국 서군이 패배했다.

패배한 서군의 다른 다이묘들과 마찬가지로 소 요시토시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끌려갔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장인어른이 참수형에 처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소 요시토시 자신은 서군 다이묘임에도 불구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그 어떤 처벌도 받지 않음은 물론 영지 몰수도 없었다. 소 요시토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자신에 대한 처우를 결정함에 있어서 다른 서군의 다이묘들은 참수, 영지 몰수, 사무라이 신분 박탈 등 상당히 가혹한 형벌을 내린 반면 자신에게만은 아무 처벌도 내리지 않아 의아해했다.

2.4. 국서 위조로 조일 관계를 복원하다

물론 이런 처분은 공짜가 아니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보기에 조선과 관계를 회복할 필요성이 있었고, 쓰시마 소씨는 당시 일본에서 가장 조선을 잘 알고 조선어가 가능하며 교섭경험이 있는 전문가 집단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에야스가 처벌을 담보로 소 요시토시에게 요구한 임무가 몇 개 있었는데, 우선 고니시 일가와 관계를 완전히 끊을 것, 그리고 조선에 전쟁을 일으켜 죄송하다는 내용으로 사과를 해서 조선의 용서를 받아내는 것이었다. 당연히 소 요시토시는 이에 응했다. 자신뿐만 아니라 쓰시마 전체의 안위를 위해서라도[10] 조선과의 관계 정상화는 필수였기 때문이다. 소 요시토시는 계속 조선 조정에 잘못했다고 빌었다. 또한 그가 조선 조정에 해명하기를 "현재 일본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다스리고 있는데, 그는 임진왜란을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단 1명의 군대를 보내지 않고 끝까지 버틴 다이묘"[11]라는 점을 강조했다.

조선 측도 일본 측의 정식 사죄, 선릉정릉을 도굴한 범인과 왕릉의 시신을 보낼 것, 포로 송환 등을 요구했는데, 이 중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어떻게 생각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소 요시토시가 보기에는 좀 어려워 보이는 요구도 있었는지 그는 국서를 중간에서 위조하는 꼼수를 쓴다.[12] 한쪽의 국서가 반대편에 도착하면 위조가 발각될 것이 뻔하므로 양쪽 국서 다 여러 번 위조했다. 당연히 국서 위조 사실이 밝혀지면 본인의 목숨은 물론 쓰시마 소씨 정권이 단절될 수도 있는 모험이었지만, 그만큼 쓰시마에게 있어 두 나라의 관계 회복과 교류 재개는 중요했기 때문에 그런 짓을 벌인 것이다.

왕릉 도굴 문제는 쓰시마에서 적당한 잡범들과 이름없는 시체를 대충 보냈는데, 조선 측에서도 조사를 해서 이게 진짜 도굴범과 시신이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이제 와서 항의해봤자 더 얻을 것도 없다는 공감대가 있어서[13] 잡범들을 처형하고 사건을 종결짓는 것으로 대충 끝냈다. 포로 송환은 사명당 유정이 별도로 파견을 가서 실무 협상 후 포로를 되돌려 받기로 했다. 쓰시마의 이 국서 위조는 요시토시가 죽고도 한참 뒤인 1635년 아들 소 요시나리(宗義成) 시대에 소씨 가문의 최측근 가신이었던 야나가와 시게오키가 막부에 고발함에 따라 발각됐는데, 이 국서 위조 사건의 처분을 어떻게 할지 있었던 논쟁을 야나가와 잇켄(柳川一件)이라고 한다. 결국 이제 와서 조선과 재협상을 하고 싶지 않았고 다시 조선하고 문제 벌어져서 좋을 것도 없는데다 가신이 주군을 고발한 것은 엄연히 하극상인데 이걸 용인하기도 곤란하다고 판단한 당시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츠는 하극상의 죄를 물어 야나가와 시게오키를 처벌하고 사건을 덮어 주었다[14]. 에도 막부 측에서는 이미 해결된 문제를 다시 뒤집어 까서 그 문제를 재해결하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아무튼 이런 국서 위조 끝에 1607년이 되어서야 일본은 조선에게 용서를 받았고 다시 외교를 시작했으며 조선 측에서도 1607년부터 다시 일본에 조선 통신사를 보냈다. 이것이 1609년의 기유약조다. 그리고 조선과 일본의 무역도 재개되어 쓰시마 번은 소중한 식량 확보뿐 아니라 인삼, 비단부산 왜관을 통한 교역도 이백여 년간 거의 독점하면서 막대한 이익을 얻는다. 하지만 예전에 비해 규모는 상당히 축소되었고, 부산 초량의 왜관 외의 다른 곳 어디에서도 교역이 금지되었으며, 심지어 초량왜관 바깥을 나가는 것도 금지, 일본 사신이 동래부를 벗어나 한양으로 오는 것도 금지되었다. 일본 사신이 동래부에서 한양까지 오는 길이 그대로 조선 침공 루트가 되었던 경험 때문이다.

한편 장인인 고니시 유키나가가 참수당하자마자 요시토시는 기다렸다는 듯이 유키나가의 딸인 고니시 마리아와 이혼하고, 그녀와 그녀가 낳은 아들[15]을 추방했다. 이것은 도쿠가와 정권에게 조금이라도 잘 보여서 자기 영지에 피해가 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마리아와의 이혼은 더 이상 유키나가의 통제를 받지 않겠다는 뜻이었고, 비정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임진왜란 과정에서 수천 명의 쓰시마 백성들이 조선으로 끌려가 목숨을 잃었으며, 중계무역으로 먹고살던 쓰시마의 상황도 악화되었고 임진왜란으로 조선의 어그로도 끈 상황에서 도쿠가와의 어그로까지 끌면 쓰시마는 피바다가 되었을 게 뻔한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한편 후에 소 가문에 괴변이 일어나자, 이를 쫓겨난 고니시 마리아와 고니시 만쇼 모자의 원혼 탓으로 여겨 신사를 세워 그 넋을 위로하기도 하였다. 가톨릭 신자를 위해서 신사를 세운다니...[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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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간에 이렇게 전쟁과 평화 사이에서 결국 평화를 완수한 요시토시는 47세에 편하게 죽어 역대 대마도주들의 묘원인 쓰시마 섬의 '반쇼인(滿松院)'에 함께 안장되었다.[17] 당시에도 영유아 사망률이 높아서 그렇지 일단 성인이 되었으면 50세는 넘는 게 일반적이라 천수를 누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조일 양국과 동-서군의 이해관계 속에서 다이나믹한 군소 지역 다이묘의 인생치고는 지위와 가문, 그리고 조선 무역 독점권을 보존한 명군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종군한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 신부는 "지극히 신중한 젊은이로, 학식이 있고 훌륭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평가하고 있다. 한국인에겐 찝찝한 사실이고 본인도 어쩔 수 없이 참전한 전쟁이라지만 임진왜란 당시에도 조선군과 명군을 상대로 상당히 많은 승리를 거두는 등 무장으로서의 재능도 상당했다.

소 요시토시의 10대손이 바로 일제강점기 덕혜옹주의 남편이었던 소 다케유키 백작이다.

3. 대중매체에서

고니시 유키나가와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보다 한국사극에서 더욱 부각되는데 엑스트라 정도밖에 안되는 위치에 놓여 있다. 그가 다스린 쓰시마 섬은 예나 지금이나 일본에서는 변방 중의 변방이라 관심도가 낮았다. 그저 고니시만 따라다니면서 그의 수발을 드는 정도가 거의 대부분이다.[18] 사실 한일 양국의 해상 교류가 매우 잦은 영남 지역(특히 부산광역시울산광역시)과 서일본 지역(특히 주고쿠, 규슈, 오키나와, 쓰시마 섬) 자체가 각국의 입장에서는 수도권(서울특별시, 인천광역시, 경기도/도쿄도간토 지역)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변방이다. 당연히 세키가하라 전투를 다루는 작품에서도 존재감이 없는데 소 요시토시는 말그대로 병풍 혹은 쩌리였기 때문이다.

매체에 따라 머리 모양이 제각기 다르다. 한국 사극의 경우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챠센마게이고, 징비록에서는 머리를 민 전형적인 촌마게(정확히는 센고쿠 시대 및 에도 시대 초기 촌마게)이며, 임진왜란 1592에서는 머리를 밀지 않은 순화 촌마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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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1] 원래는 마름모풀 가몬이였으나 임진왜란 전후로 둥글게 품은 벼 또는 요쓰메유이몬을 넣었다.[2] 요시토시의 장인이자 임진왜란에도 참전한 고니시 유키나가는 죽였다.[3] '평의지(平義智)'라고도 하는데, 당시 조선에서는 일본인들의 성을 평으로 부르는 경우가 있다. 이는 당대 일본에서 자신들의 가문을 겐지(源)나 헤이지(平)의 일원으로 칭했기 때문에 쓰이던 방법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평수길(平秀吉), 고니시 유키나가는 평행장(平行長)이라고 하는 식이다. 하지만 올바른 정보는 아닌데, 하시바 히데요시는 당시 관백(간파쿠)을 하는 집안 성이 후지와라였기에 간파쿠가 되기 위해 타이라(=헤이지)가 아니라 후지와라에게 藤原을 성으로 받아서 후지와라노 히데요시(藤原秀吉)였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로 바꾼 것이다. 즉 평수길이 아니라 등원수길(藤原秀吉)이라고 쓰는게 명백히 맞다는 것. 후지와라는 조선이 생기기 전부터 관백을 독점하던 가문이기에 헤이지 측이 관백을 한 적이 없으며, 그렇기에 일본 관백에 대해 제대로 조사만 했다면 몇백년간 달랑 한 가문 뿐이라 틀리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조선에서 쇼쿠호 정권 인물들을 헤이지로 일컫고 있던 것은 당시 한일관계사의 연구 주제인데, 겐지인 아시카가 막부를 엎었으므로 겐지의 라이벌인 헤이지로 취급했다는 설이 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족보상 조상들이 쓰던 성씨가 아래에서부터 윗 세대로 마츠다이라(松平) - 도쿠가와(徳川) - 미나모토(源) 계열로 올라가며 변경되었다. 따라서 오래 전 조상들이 쓰던 원씨성에 따라 원가강(源家康)으로 불렸으며 비단 도쿠가와 가문뿐만이 아니라 쇼군가는 대외 공식 문서에 미나모토를 자칭하였다. 이는 당대 일본에서 꽤나 중요한 것이었는데, 단순히 어느 집안에 속한다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각 가문에 따라 수여받을 수 있는 직책 또한 정해졌기 때문이다. 자세한 것은 쇼군 항목 참조.[4] 일본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15대 당주였던 소 마사모리는 가신들의 모반으로 쫓겨났는데 이 과정에서 가신들은 9대 당주 소 모리쿠니(盛國)의 손자 소 하루야스(晴康)를 환속시켜서 소 마사모리의 양자로 들이고 소 마사모리가 소 하루야스에게 가독을 상속하는 형식으로 소 마사모리를 당주에서 끌어내렸다. 소 하루야스는 소 요시토시의 할아버지(소 마사모리의 아버지) 소 모리히로(盛弘)와는 형제 관계로(소 하루야스가 형) 소 마사모리의 아들인 소 요시토시나 그의 형이었던 소 시게히사, 소 요시즈미 입장에서 보면 소 하루야스는 그들의 큰할아버지(적으로는 할아버지)이고 소 하루야스의 아들인 소 요시시게는 촌수상 그들의 숙부(법적으로는 아버지)뻘 항렬이 된다. 세조단종에게서 왕위를 찬탈했는데 예종이 단종의 아들을 자신의 양자로 들여서 왕위를 물려준 셈.[5] 히데요시는 이대로 간파쿠가 될 수도 있었지만 부족하다고 느꼈는지 아예 덴노에게 새로운 성씨를 만들어 받아 도요토미가 된 것이다. 즉 5대 성을 만든 것. 그러므로 정식으로는 "도요토미노 히데요시"가 맞다. 게다가 도요토미의 대표 심복 중 하나인 고니시 유키나가도 도요토미 성을 훗날 하사받았어서 사실 원칙대로 하면 "도요토미노 유키나가"였다.[6] 조선왕조실록에는 풍신수길이 관백을 주군으로 모시다가 그가 죽자 그 자리를 차지하여 자기가 관백이 된 사람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히데요시가 주군으로 모셨던 오다 노부나가는 명백히 관백이나 쇼군이라는 직책을 모두 받지 못하고, "우다이진"이라는 관직만 받은 상태에서 무슨 자리를 받을지 잠깐 고민하던 시기에 바로 부하의 반란으로 사망했다. 게다가 정황상 반란을 당하지 않고 살아있었다 해도, 먼 훗날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그랬듯이 덴노와 황실에게 관백보다는 쇼군 자리를 요구했을 가능성이 더 높기도 하다.[7] 애초에 소 요시토시 자신이 실제 석고가 1만석도 되지 않아 원칙적으로는 다이묘 자격도 없었지만 조선과의 외교와 무역에 중대한 역할을 하고 있었기에 그나마 다이묘로는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8] 소 요시토시는 이래저래 불쌍한 사람인데 조선과 일본의 중간에 끼어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였다. 복속사를 끌어들여야 하는데 솔직히 말했다가는 조선과 일본의 관계가 파탄난다. 그랬다가 제일 피해를 입는게 소 요시토시 본인과 자기 영지인 대마도라서 이건 말도 못 하겠고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저렇게 주작을 꾸며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알현시킨 것이다.[9] 격파라고 할 게 없었다. 당시 이일은 휘하에 군사가 하나도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할 수 없이 조정에서 장기군관 80명을 내려줬으나 그나마 그 장기군관들 중에 3분의 1이 탈주했다. 50명이 조금 넘을 뿐인 군관들로 병력을 모집하자니 너무나 힘들었고 결국 1,000명도 모으지 못했다. 결국 이일은 싸우지조차 못하고 패했다.[10] 전쟁이 끝나고 조선과의 외교가 끊어지자 쓰시마 섬의 경제가 박살났다. 그렇기 때문에 소 요시토시가 조선과의 외교를 회복하려 한 것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도 있지만 가장 결정적 이유는 당장 자신의 영지인 쓰시마가 쑥대밭이 났기 때문이었다.[11] 당연하지만 이에야스가 평화주의자라서 그런 것은 아니다. 자신의 세력을 보존하기 위해 관동 지역의 안정을 핑계로 병력 차출을 거부했고, 형식적으로 1,000여 명 수준의 소규모 병력을 전진기지인 히젠국 나고야에 보냈을 뿐이었다. 그나마 이 병력도 조선까지는 보내지 않았다. 관동은 조선에서 멀리 떨어진 동쪽이라 대규모로 보내기 힘들다는 핑계도 있었다. 단순 핑계는 아닌게 일본은 길다란 나라라서 서남쪽 가고시마에서 긴키 지방까지 육로 거리로만 조선으로 치면 해남군에서 두만강 거리에 육박한다. 관동의 다이묘들이 병력을 파견하기 힘든 게 당연한 일이었다. 실제로도 다테 정도나 제대로 참여했지 모가미, 난부는 이에야스처럼 나고야에 주둔했고, 우에스기는 개전초기에 히데요시 대리로 3개월간 참전한게 전부[12] 포로 송환이야 막부에 요청하면 쉽지만 일본 측의 사죄나 10년도 지난 선정릉 도굴사건의 범인을 찾는 것은 힘들었다. 일단 에도 막부는 도요토미 정권을 무너뜨리고 세웠기에 임진왜란에 참여하지 않은 에도 막부에게 사과하라고 하면 반발할 것이 뻔했고, 도굴한 범인이 10년이 지났을 뿐만 아니라 사건을 잘 알고 있는 서군 다이묘들도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다 죽어버려서 없어졌을 뿐만 아니라 그 범인을 알고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자세한 것은 선정릉 도굴사건 참고. 뭐든간에 고작 대마도를 다스리는 영주로서는 첫 번째와 두 번째 항목은 자신의 능력을 벗어난 것이기에 애를 먹었다는 것이다. 조선 입장에서 10년이나 지난 사건의 범인을 찾는 게 어렵다는 걸 모르지는 않았을 테니 그냥 "우린 니들하고 국교 재개하기 싫다"는 말을 에둘러 표현한 거라고 봐도 무리가 아니다.[13] 그리고 그때 마침 북방에서 만주족들이 슬슬 흥기하려고 하고 있었다.[14] 다만 소 요시나리의 목숨과 지위는 보전되었지만, 도쿠가와 막부는 이전까지처럼 조선과의 외교는 대마도에서 알아서 하라는 방침 대신 막부의 영향력을 나름대로 행사할 수 있는 조치를 이것저것 취하게 되었다. 또 지위를 보전해 줄 만 한지 아닌지를 시험하기 위해 조선에 통신사를 요청할 것을 명했는데, 요시나리에게는 다행히도 마침 명청교체기였던지라 북쪽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집중하고자 했던 조선으로서는 일본과의 외교 관계를 잘 다져 둘 필요가 있었고 그에 따라 통신사를 보내기로 결정했다. 다만 요시나리로서는 통신사행이 무사히 마무리가 되어야 안심할 수 있는 일이었기에, 이 당시 통신사가 남긴 사행록들을 읽어 보면 통신사 측과 일본 측에 갈등이 일어날 때마다 마음 고생을 심하게 하고 다시 갈등이 생길 수 있을 것 같은 때에도 어떻게든 일을 더 키우지 않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15] 그래서 이 아들은 외가의 성씨를 따라 고니시 만쇼라는 이름을 쓰게 되었고, 그는 훗날 신부가 되었다.[16] 에도시대까지 일본은 가톨릭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없어서, 어떤 사람은 승려이면서도 기리시탄이기도 했고, 가톨릭 신도들을 위해 사찰이나 신사를 건립하기도 했다. 이는 조선도 비슷해서 가톨릭을 불교의 한 종파라고 생각한 사람들도 많았다.[17] 이 반쇼인은 이즈하라 항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으며 한국에서 보기 힘든 거목이 가득하고 조선 국왕이 하사한 물건이 전시되어 있는 등 대마도에서 그나마 역사적인 볼거리라서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가는 곳이다.[18] 임진왜란이 끝난 뒤 도쿠가와 이에야스조선에 사과하는 조일 국교 정상화 과정은 한국 사극이든 일본 사극이든 주목받지 못하는 사건이다.[19] <조선왕조실록>에서도 교활하고 목숨 보전을 위해 아내와 아들을 버린 전형적인 못된 일본인으로 나온다.[20]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가상인물인 이장평(코헤이)역. 2010년 KBS 드라마 <추노>에서는 큰놈이 역.[21] 그러나 사투리가 복잡한 걸로 따지면 일본이 조선보다 절대 덜하지 않다. 참고로, 임진왜란 때 장수들이 점령지 통제를 위해 실제로 조선어 단어집을 지참하고 있었다고 한다.[22] 양부 요시시게는 요시토시에 앞서 히데요시의 닦달을 견디다 건강이 악화되어 사망했다. 요시토시도 '이러다 아버님을 따라갈까 걱정된다.'며 겁이 나 울고 만다.[23] 자신의 속임수가 들통날까봐 회담 내내 식은땀을 비오듯 흘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