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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한이탈주민의 구체적인 탈북 과정과 관련 사례에 대해 서술하는 문서이다. 2023년까지 대한민국으로 입국한 누적 북한이탈주민의 수는 34,078명이고 탈북했지만 중국에 숨어있는 탈북민은 10만~25만 명으로 추산되며, 알려지지 않은 실패한 탈북까지 합하면 지금까지 시도된 탈북 횟수는 훨씬 더 많다. 이 문서는 언론이나 방송 등에서 공개된 정보를 기반으로 서술된 것이며, 수십 만건에 달하는 모든 탈북 과정과 경험을 대표하지 않는다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그럼에도 확실한 사실은 아래와 같은 이유로 인해 북한을 탈출하는 난이도는 세계에서 가장 어렵다는 것이다.2. 탈북이 어려운 이유
2.1. 사방이 막힌 지리적 환경
험준한 산악지형으로 한정된 통행로 큰 강 두 개가 국경을 차단 | ||
수심은 낮지만 큰 조수간만으로 조류가 빠름 | 수심이 깊고 풍랑이 심함 | |
세계 최대의 지뢰 매설지대 남북 양측 수십 만 병력 밀집 |
한반도는 3면이 바다이고 북부는 험한 산악지형으로 이뤄져있어 지리적으로 수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외부 세력이 침략하기 힘든 천혜의 요새였다. 하지만 반대로 밖으로 빠져나가기도 힘든 감옥과 같은 환경이다. 3면이 육상 국경이었던 데다 허가를 받고 서독으로 넘어가는 방법도 존재했던 동독이나, 삼면이 모두 바다는 아니었던 베트남보다 북한 체제의 쇄국정책이 자연적으로 훨씬 철두철미하게 되었다.
2.2. 북한 붕괴를 원치 않는 중국과 러시아
중국과 러시아는 대한민국과 국경을 맞닿는 정세의 불안정을 원하지 않아서 북한을 비호하고 있으므로 탈북민을 단속하여 북송시켜버리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로 탈북해도 북송되지 않는다면 당장 북중국경을 지키는 북한 국경경비대부터 탈북해서 유지되지 않을 것이며, 북한 내륙으로 소문이 퍼져 탈북민이 늘어나고 부릴 노예가 없어진 김씨 일가와 북한 체제는 쉽게 붕괴했을 것이다.중국은 북한 붕괴로 인해 대규모 난민 사태가 촉발하여 동북 3성의 질서가 어지럽혀지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 따라서 현재 중국은 북한이탈주민을 '난민'으로 인정하지 않고 경제적 이유로 탈북한 '불법 입국자'라 정의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중국에 숨어있는 탈북민을 모두 체포해서 북송시키고 있으며 탈북 방지와 북한 체제 유지에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탈북민을 북한으로 돌려보냈을 때 박해를 받을 것이라 여길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고, 이 때문에 당사자들이 돌아가기를 원치 않으며, 이들을 받아주겠다는 제3국(한국)이 분명히 있는 상태인데도 북송을 고집하고 있다.
러시아의 경우, 북한과 맞닿아있는 극동지역은 애초에 탈북을 시도하기에는 지리적으로 불리한 지역이어서 러시아를 통한 탈북 시도는 비교적 많지 않다. 러시아 정부도 변두리 지역인 극동에서 일어나는 탈북에는 크게 관심을 쓰지는 않고 있으며 모스크바 주재 유엔난민기구(UNHCR)가 존재하고 있어 이 사무소를 통해 정식으로 난민 지위를 인정받아 절차를 거치고 안전하게 대한민국으로 입국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러전으로 인해 북러관계가 밀접해짐에 따라 북한의 요청에 의해 러시아 내 탈북민들이 북송되고 있으며, 2023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탈북하려던 북한 무역대표부의 모자가 러시아 당국에 의해 체포되어 북송되는 경우도 생겼다.
2.3. 고도화된 정보 통제와 상호감시
어려서부터 수령들에 대해 알아야 하였고 신격화된 수령에 대한 역사와 찬가를 부르며 자라났다. 우리는 이기는 것만 보아왔다. 6.25의 전쟁은 미국의 부추김을 받아 남조선 괴뢰들이 일으킨 침략전쟁이며 그 전쟁에서도 조선은 세계강대국이라고 하는 침략자 미제와 허울만 있는 유엔을 도용하여 참전한 제국주의 반동들을 이겼으며 모든 면에서 조선은 무조건 이긴다. 지는 것은 절대로 볼 수가 없었으며 있을 수도 없었다. 그리고 세계의 어느 곳에서나 조선은 정의의 편이라고 하였다. 이로써 우리는 내가 사는 나라가 가장 정의로운 나라라고 믿고 있으며 자존감 또한 하늘을 찔렀다.
어떤 물건을 평가하려면 그와 유사한 물건이 있어야 올바른 결론을 내릴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하나의 물건만 보고는 결론을 내릴 수 없으며 그것이 제일인가 하는 그릇된 판단을 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올바른 판단을 할 수가 없었다. 철저히 통제되고 격패된 사회 속에서 과연 우리가 무엇을 놓고 평가할 수 있단 말인가?
- 구대명, 《거품 2》, 2-3쪽
자세한 내용은 북한/인권 문서어떤 물건을 평가하려면 그와 유사한 물건이 있어야 올바른 결론을 내릴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하나의 물건만 보고는 결론을 내릴 수 없으며 그것이 제일인가 하는 그릇된 판단을 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올바른 판단을 할 수가 없었다. 철저히 통제되고 격패된 사회 속에서 과연 우리가 무엇을 놓고 평가할 수 있단 말인가?
- 구대명, 《거품 2》, 2-3쪽
의 정보 통제 부분을
참고하십시오.아무리 탈북이 어렵더라도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듯이 기회를 잘 탐지하면 탈출할 방법은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북한 주민은 어릴 적부터 세상에 부럼없어라 같은 노래를 배우며 자신들의 나라가 지상락원이라고 세뇌 교육을 받는다. 또한 조선로동당은 주기적으로 북한 주민들에게 선전활동을 펼쳐 외부세계에 대해 나쁜 인식을 심어줌으로써 자기가 살고 있는 북한이 힘들지만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그나마 나은 생활을 하는 것이라고 가스라이팅한다. 실제로 조선중앙텔레비죤의 국제소식 보도에는 항상 나쁘고 암울한 해외 뉴스만 짜집기해 보도한다. 탈북민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북한 인민들은 정말로 전세계 사람들이 자신들과 비슷한 삶을 산다고 생각한다. 교육 수준이 높고 북한에서 부유하게 살던 엘리트 탈북민들도 살면서 어렴풋이 모순을 느끼기만 할뿐, 북한 체제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며 해외에 나와 자유로운 생활과 인터넷을 접하기 시작해서야 진실을 알게 된다. 북한이 망하기 전까지 인터넷을 절대 허용하지 않을 이유이기도 하다. 북한 정권의 입장에서 북한 주민들의 탈북을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예 처음부터 탈북이라는 선택지를 떠올릴 수 없게 하는 것이다.
북한에도 한국 드라마가 유행하며 북한 주민들도 북한 체제가 잘못됐다는 것을 안다고 증언하는 북한이탈주민이 많다. 북한 주민에게 한국 드라마는 재미있고 한국이 잘 산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게 해주지만 자신들이 살고 있는 북한 체제의 모순과 김씨 일가의 진실을 알려주지는 못한다. 한국 드라마는 재밌게 보면서도 당과 국가에 대한 기존의 충성심은 흔들리지 않는 이중적인 인식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탈북민들의 주장은 '생존자 편향의 오류'일 수 있는데, 탈북민 둘중 1명은 함경북도 출신이고 이 지역은 중국과 인접해 무역과 밀수로 외부 문물을 접하기가 쉬운 곳이어서 북한 주민 전체를 대표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탈북민 자체가 북한 주민 2,500만 명 중 누적 3만 명밖에 안될 정도로 희귀한 케이스이고, 탈북을 실행할 정도면 이미 북한에 있을 때부터 드라마를 즐겨보고 북한 체제에 반감을 품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륙쪽 깊숙히 박혀있는 산골 농촌에 사는 북한 인구의 상당수는 한국 드라마는 커녕 '한국'이 남조선인 것도 모를 정도이며 조선로동당의 선전과 강연을 그대로 믿고 있는 상황이다. 외부 정보가 극단적으로 차단된 환경에서 북한 주민들은 이게 사실인지 아닌지 판단할 능력이 없다. 소달구지가 돌아다니고 전기도 안 들어오는 농촌에서 유일한 정보 소스는 당의 선전 뿐이니 믿지 않을 수가 없다.
자세한 내용은 북한/인권 문서
의 조직적 감시 부분을
참고하십시오.북한 보위부 출신 탈북민 이철은의 증언에 따르면, 보위원 한 명이 주민 700~1,200명을 관할하고 있으며 휘하에 30~40명의 정보원을 둔다고 한다. 즉, 북한 주민 30명 중 한 명은 보위부 스파이라는 뜻이고 군대, 직장, 학교 가릴 것 없이 개인이 속해있는 모든 집단, 조직에는 동료들의 정황을 상시 보고하는 보위부 정보원이 존재한다. '주민 감시의 1선'이라고 불리는 인민반장 또한 20~40 세대로 이루어진 인민반에서 발생하는 모든 것에 대해 담당 안전원에게 보고해야 한다. 인민반장은 각 세대의 경제상황, 방문하는 친척이나 손님, 심지어 숟가락 갯수까지 알 정도로 각 가정에 대해 상세히 파악하고 있다.
이러한 극악의 감시 환경 속에서 자신의 탈북 계획을 타인에게 함부로 말할 수 없기 때문에 도움을 받거나 탈북에 필요한 정보를 찾기도 쉽지 않다. 모두가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받는 상황에서 평범하게 생활하는 척하면서 혼자서 혹은 정말 믿을 만한 극소수의 가족과 몰래 소통하여 극비리에 탈북을 준비해야 한다. 만약 가족 중에 탈북한 사람이 있다면 그 감시는 몇배 더 심해진다. 탈북을 계획대로 완벽히 실행해도 인민반장과 이웃들이 하루도 안되어 알아챌 것이기 때문에 추적이 시작될 때까지 시간도 많이 벌지 못한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북한은 전력사정으로 인해 CCTV가 희귀하고 전산시스템이 구축되어 있지 않아 실시간으로 추적이 불가능하고, 사람이 사람을 감시하는 시스템이니 허점이 많아 일단 한번 멀리 떠나면 어디로 갔는지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2.4. 가혹한 처벌과 연좌제
관련 문서: 로동교화소생계형 탈북이 많았던 2000년대까지는 도강을 하다 적발되거나 중국에서 북송당해도 사정을 참작하여 풀려나거나 로동단련대에서 가벼운 형만 받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점차 한국행을 위한 탈북이 많아지면서 처벌 수위가 강해졌다. 함경도 지역에서 탈북이 많다보니 함경북도에 위치한 평범한 로동교화소였던 전거리교화소가 한국의 가족과 통화하던 주민과 그를 주선하던 브로커, 북송된 탈북민이 대거 수용되면서 수감생활이 가혹해졌고 그로 인한 악명이 자자해졌다. 그래서 형기가 있는 노동교화형이라도 반쯤 사형선고나 다름없는데 전거리교화소 출신 탈북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수감자 넷 중 하나는 옥사하기 때문이다. 탈북 브로커나 북송된 탈북민 중 한국행 시도를 했거나 기독교와의 접촉 사실이 명확한 사람은 정치범으로 간주되어 정치범수용소행이 확정이다. 코로나19 이후로 처벌이 가혹해져 중국에서 살다가 북송된 탈북자들에게도 최소 5년, 대부분 7~10년의 로동교화형에 처해지고 있다.# 로동교화소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이 정도의 형기는 사실상 사형과 다름없다.
자세한 내용은 북한/인권 문서
의 연좌제 부분을
참고하십시오.한 사람이 탈북하면 북한에 남아있는 나머지 가족들은 '월남자 가족'이라는 가장 최하층 출신성분으로 강등되며, 이 이력은 대물림되어 대대손손 사회적인 불이익을 받고 살아야 한다. 연좌제가 적용되더라도 탈북민이 수만~수십 만 명이니 가족들이 직접적인 처벌을 받지는 않지만 대학 입학이나 입당은 평생 꿈도 꾸지 못하며 군대도 갈 수 없다.[1] 인민반장과 보위지도원, 안전원이 불시에 집을 방문해 확인하며, 이웃에게까지 항상 감시를 받으며 살아가야 한다. 탈북한 가족과 연락할 수 있다는 이유로 북중국경에서 멀리 떨어진 내륙 산골로 추방되기도 한다.
해외에 나와있는 북한인들이 상대적으로 탈북하기 쉬움에도 탈북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북한에서 해외로 나오려면 기본적으로 기혼자이고 가족이 있어야 한다. 외교관의 경우, 자식 한 명은 반드시 평양에 두고 나와야 하는데 인질로 삼아 탈북을 시도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태영호가 김정은의 변덕으로 두 아들 모두 영국으로 데리고 나올 수 있었는데, 아내인 오혜선이 다시는 없을 기회라고 설득하여 자식을 모두 데리고 탈북한 경우이다. 해외로 파견된 북한 사람들은 출신 성분이 좋고 충성심이 높은 평양 출신이 대부분인데 이들이 탈북할 경우, 평양에 남아있는 가족들은 모든 재산과 기반을 몰수당하고 오지로 추방이 확정적이다. 평생을 평양에서 도시 인프라를 누려온 가족들은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산골오지에서 남은 평생을 살아야 한다.
3. 탈북 경로
3.1. 북한 내륙 이동과 도강
주민의 이동을 통제하는 보위부의 '10호 초소' |
의 거주이전·이동의 자유 침해 부분을
참고하십시오.관련 문서: 려행증
북한 주민들은 탈북은 커녕 다른 지방으로 이동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 평양 시민의 경우 평양시민증만 있으면 북한 내륙을 마음대로 이동할 수 있지만 북중국경 지역은 예외에 해당한다. 내륙 지역 주민들은 북중국경 지역으로 이동하는 것부터 힘들다. 려행증을 받지 못하면 길목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검문 초소를 통과할 수 없다. 그렇다고 려행증을 발급 받으면 자신의 행선지가 노출되니 탈북하려고 길을 떠날 때에는 려행증이 오히려 독이 될 수가 있다.
내륙 지역 주민들의 입장에서 자신이 태어나서 평생 살아온 고장을 떠나 처음 가보는 북중국경 지역에서 목숨을 걸고 강을 넘어 탈북할 마음을 먹기가 쉽지 않다.[2] 보위부 스파이의 존재로 인해 탈북에 대한 정보를 물어볼 수도, 공유할 수도 없다. 애초에 황해도, 강원도 같은 북한 내륙 지역은 북중국경에서 주로 활동하는 브로커들이 찾아가기도 힘든 지방이어서 탈북에 관한 정보를 접하기가 쉽지 않다. 통일부 북한이탈주민 재북 출신지역별 현황에 따르면, 황해도와 강원도 출신 탈북민은 전체 탈북민 중 1~2%에 지나지 않는다. 내륙 지역일수록 탈북은 엄두도 못내 시도 자체가 없다는 의미이다.
코로나19 이전 압록강변 | 경비가 심하지 않았던 2000년대 초중반의 두만강 밀수 |
, 대북송금
함경도와 양강도는 중국을 통해 외부 문물을 접하기가 쉽고 두만강을 통한 밀수가 일상화되어 있으며 무산군, 혜산시, 회령시, 온성군 같은 지역은 바로 옆에 두만강을 끼고 있어 탈북하지 않은 집을 찾기 어려울 정도라고 한다. 탈북이 일어난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내륙 지방과 비교해 함경도, 양강도 주민들은 보고 들은게 많으니 '탈북'이라는 행위에 거부감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이탈주민들의 약 75%가 북중국경을 접한 함경북도와 양강도 지역 출신이다. 함경도 출신 탈북민이 많으니 북한에 남아있는 가족들을 위한 대북송금도 활발하고, 이를 중개하는 브로커업도 성행한다. 중국 휴대전화를 사용해 대북송금을 중개하는 브로커들은 밀수와도 관련이 있고 그 밀수 루트를 통해 도강도 일어난다. 밀수와 관련이 없는 사람도 수소문하면 브로커 찾기 어렵지 않으며 같은 도내이기 때문에 여러가지 이유로 국경지역까지 가기도 쉽다. 평안북도와 자강도는 압록강 하류를 끼고 있으나 압록강 하류는 강폭이 넓어 맨 몸으로 도강이 불가능하고 자강도는 산맥에 둘러싸여 있는 군수공업지대이기 때문에 통행이 훨씬 엄격해 이 지역 출신 탈북민의 비율도 3%에 지나지 않는다.#
도강은 강폭이 좁고 유량이 적은 압록강 상류와 두만강에서 주로 일어나는데 밀수가 이뤄지는 루트로 가면 천(川)에 가까울 정도로 수심이 낮고 비용도 저렴하나 국경경비대도 당연히 이 사실을 알기에 감시초소가 집중되어 있어 위험하다. 무작정 도강을 시도하면 경계 근무를 서던 국경경비대의 총에 맞을 수 있으니 브로커는 도강 예정 시간에 근무를 서는 국경경비대를 매수해[3] 도강을 하는게 가장 안전하게 넘는 방법이다. 국경경비대가 많이 없어 경계가 허술한 곳을 넘어야 하기 때문에 탈북민의 도강 경험담을 보면 거의 머리만 내놓고 강을 건넜다는 증언이 많다. 중간에 일이 잘못될 경우를 대비해 해당 지역 보위부를 매수하기도 한다.[4] 브로커는 북한에만 있는게 아니라 중국측에도 브로커가 대기하고 있어 탈북자들이 강을 넘으면 이들을 인계한다. 브로커들은 보위부의 도청을 우려해 미리 정한 암호를 사용해 통화한다. 만약 북송된 탈북민이 보위부의 심문을 받고 브로커의 정보를 불면 브로커도 살기 위해 도강해서 탈북해야 한다.
도강을 해도 끝난게 아니라 중국쪽에도 높은 둑과 철조망이 쳐져 있어 이걸 넘는 것도 문제다. 중국쪽은 CCTV도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국경쪽 도로에는 중국 공안의 검문소[5]도 있기 때문에 활보하고 다니면 중국 국경경비대에 체포된다. 최대한 빨리 북중국경에서 멀어져야 하기 때문에 산으로 들어가 중국 내륙쪽 마을을 찾거나 중국측 브로커 있다면 브로커가 준비한 차량을 타고 은신처로 이동한다.
3.1.1. 코로나19 봉쇄 이후
▲ 2019년 3월 회령 인근 국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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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봉쇄 전후 함경북도 회령시의 국경. 감시초소가 추가로 설치되고 완충지대가 새로 생겨난 것을 볼 수 있다.[출처] |
이렇게 된 이후 도강은 거의 불가능해진 상태이고, 2020년대에 한국으로 입국하는 탈북민들은 코로나 사태 발생 전 중국으로 넘어갔거나 해외로 파견되어 해외에 체류해있던 북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알려진 바로는 2023년에는 오직 2명만이 국경경비대와 직접 거래해 한국 돈으로 따지면 2천만 원을 주고 중국으로 넘어와 한국에 입국할 수 있었다고 한다.
3.2. 중국
'공화국 역사상 초유의 일'... 죄수와 간수의 동반 탈북 사건 BBC News 코리아 (2020년 2월 21일) |
- 브로커의 도움을 받는 유형
북한이탈주민들은 탈북 과정에서 외부의 조력을 받을 수 있는지의 여부에 따라 탈북 난이도가 달라진다. 먼저 탈북한 가족이 돈을 벌어 믿을 만한 브로커를 고용하거나 북한인권단체, 기독교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강을 넘자마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브로커의 차량을 타고 은신처로 이동한다. 이후 은신처에서 며칠간 함께 중국 내륙을 통과할 인원이 모일 때까지 기다린다.[7] 중국 내에서 탈북민을 이끄는 브로커는 한 명만 있는게 아니라 여러명이 각자의 구간을 맡아서 탈북민 그룹을 넘겨받아 이동시킨다. 공안에게 체포될 때를 대비해 브로커끼리도 접점을 두지 않아 한 장소에 탈북민들은 대기시키면 다음 브로커가 와서 데려가는 식이다. 브로커 총책은 탈북민 출신이거나 기독교 선교사들인데 직접 활동하지는 않고 한국에서 전화를 통해 모든 것을 조율한다. 이들은 중국 정부와 북한 보위부에도 알려져 있어 요주의 인물로 감시하고 있기 때문에 체포되거나 납치될 위험이 있어 함부로 중국에 입국하지도 못한다.[8] 중국 내 여러 검문소를 피하면서 중국 대륙을 최대한 빨리 횡단하면 태국 이민국수용소까지 빠르면 최소 2주 내에 도착할 수 있다. 이렇게 중국에서 오래 머물지 않고 탈북에 성공한 사람들을 '직행'이라 부른다.
- 중국에서 매매혼 당하는 유형
현재 중국 내 숨어있는 대다수 탈북민이 이 경우에 해당한다. 브로커가 중국에 돈을 많이 주는 일자리가 있다고 북한 여성을 속인 후 인신매매로 중국에 넘기거나 아무 계획없이 무작정 도강했는데 인신매매당한 경우이다.[9] 중국의 극심한 성비 불균형 현상으로 한족 시골 노총각들이 북한 여성을 아내로 사오려고 하기 때문이다. 탈북민은 중국에서 불법체류자이기 때문에 신분을 보장받을 수가 없어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불가능하고 모든 것을 중국 남편에게 의존해야 한다. 그래서 결혼 뒤에도 이웃의 신고나 중국 공안의 검문에 잡히면 언제든지 북송될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때문에 이들의 결혼생활은 불안의 연속이며, 중국인 남편의 가정폭력에 시달려도 도망치거나 피해 호소를 할 수 없다. 반면에 자신을 사간 중국 남편이 괜찮은 인품[10]을 가졌고, 어찌되었든 중국 시골의 생활수준이 북한보다는 훨씬 낫다는 현실에 수긍하게 되면 중국에서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리며 살아간다. 중국 공안에서도 아이가 있는 북한 여성까지 북송시켜서 아이가 어머니와 생이별하는 경우가 발생하고 중국 가족이 반발하자 이를 의식했는지 2010년대 후반부터는 아이를 낳고 정착하여 사는 북한 여성은 신상만 파악하고 한국행을 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면 북송시키지 않는다고 한다. 이들은 중국 시골에 살면서[11] 처음에는 정보가 없어 한국행은 생각하지도 못하다가 중국어를 익히고 스마트폰[12]으로 외부 세상과 접하게 되면서 한국의 실상을 알게 되고 중국 내 다른 탈북 여성들과 틱톡과 콰이쇼우, 위챗 단톡방[13][14] 등으로 연락을 하면서 브로커와 선이 닿아 한국 입국을 시도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케이스의 탈북 여성들은 한국 국적을 받고 정착했어도 중국에 있는 남편, 자식과 주기적으로 연락을 하거나 한국으로 데려오기도 한다. 탈북민 70~80%가 여성인 이유가 결혼을 통해 중국에 정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이라도 중범죄를 저지르거나 한국행 시도 중 체포 시에는 자식이 있고 아무리 오래 살았더라도 가차없이 북송된다. 잡히는 위치가 랴오닝성, 지린성, 헤이룽장성 등 동북 3성 지역이라면 변명이라도 할 수 있지만 남부지방이라면 그대로 끝이다. 또한 매매혼 말고도 유흥업소 등에 팔려 가서 감금 상태로 혹사당하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 감금당한 채 온갖 고생을 다 겪다가 선교사, 인권단체 등의 도움을 받아 대한민국으로 탈출한다.
- 신분증을 사서 중국에 정착한 유형
위 유형과는 다르게 중국으로 넘어갔지만 인신매매 당하지 않고 인연을 잘 만났거나 중국어를 할 줄 알거나 중국에 친척이 있어 도움을 받아 취직해 정착하는 극소수의 경우이다. 처음에는 한국으로 갈 생각 없이 중국에서 생활하다가 한국에 대한 정보를 접하고 한국행을 결정한다. 이들은 중국어를 할 줄 알기에 브로커에 속아 인신매매를 당하지도 않고 친척의 도움을 받아 돈을 벌어 호적을 사서 중국인으로 살아간다. 조선족인 척 중국 현지 한국회사에 취직해 한국인들과 일하기도 한다. 이들은 중국에서 잘 적응했지만 아무래도 불안정한 신분 때문에 더 나은 삶을 찾아 한국으로 가는 경우이다. 여유가 있기에 브로커를 고용하거나 중국인이 무비자로 갈 수 있는 제주도로 들어오는 방법을 쓴다.
중국 동북 3성에는 탈북민으로 위장한 보위부 스파이도 활동하고 있다. 북송된 탈북민이 보위부에게 포섭되어 각종 훈련을 받고 중국에서 활동하면서 중국 내 탈북민들을 신고하는 것이다. 연변 일대에는 한국으로 보내주겠다며 돈만 챙기고 공안에 신고해서 북송시키는 브로커로 위장한 보위부 스파이인 '강은아'라는 여자가 탈북 브로커들 사이에서 악명이 자자하다. 한국 국적을 가진 탈북민 출신 브로커들도 중국에서 활동하다가 보위부의 함정에 걸려들어 북한으로 납치되는 경우도 있다.
기독교, 그 중에서 개신교 선교사가 탈북을 이끄는 경우, 브로커 비용을 받지 않는 대신 2~3개월간 성경 공부를 시킨다. 심지어 1년 넘게 숙소에서 외부와 단절된 채 성경 공부를 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1990년대~2000년대 초반에는 중국에서 탈북민을 공부시켜 다시 북한으로 보내 선교한다는 황당한 계획을 준비하는 선교사도 있었다. 과거에는 중국의 아지트에서 탈북민들을 모아놓고 공부를 시켰으나, 이들이 공안의 표적이 되어 단체 북송되는 경우가 빈번해져서 이제는 교육 장소를 동남아로 옮겼다. 북송된 탈북민은 보위부 조사 과정에서 기독교와 접촉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100% 정치범수용소행이다. 왜 성경 공부로 시간을 끌어서 잡히게 만드냐는 비판도 있지만 선교사의 입장에서 북한 사역을 한다는 명목으로 종교계로부터 기부금을 지원받아 탈북비용을 충당하기 때문에 일정 성과가 있어야 하며, 수천만 원을 들여 탈북민을 구출했는데 한국으로 온 뒤 모른 채하는 사례가 많았다고 한다. 어느 선교회가 성경 공부를 시키기 위해 탈북민과 계약서를 작성하는 경우도 있어 보도가 된 적도 있다. 어찌됐든 기독교 선교사들은 중국 내 탈북민 구출에 큰 축임은 부정할 수 없으며, 숨어사는 탈북민의 입장에서도 한국으로 보내준다는데 기독교던 뭐던 가릴 처지가 아니다. 중국 내 감시가 심해지면서 탈북 비용이 크게 증가해 예산상 구출할 수 있는 건 몇명 뿐인데, 연락해서 도움을 요청하는 탈북민만 수백 명이라고 한다.
2020년 코로나19 봉쇄 이후, 그 이전부터 삼엄해진 국경 감시 때문에 중국 루트가 거의 막혀간다는 복수의 소식이 들려오고 있다. 국경의 감시가 전자 장비까지 동원될 정도로 고도화되고, 북한도 탈북을 좌시하지 않으며,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을 차단하고자 중국 정부의 이동 통제가 심해졌다는 것이다.###
2022년 중국의 코로나 거리두기 정책이 극심해졌을 때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서 출연진들이 더욱 탈북이 어려워진 이유를 설명했는데, 과거부터 중국 대륙을 장거리로 이동하기 위해 버스와 기차 같은 대중교통을 이용해 왔으나, 지금은 변두리 기차역에서조차 안면인식으로 신원을 확인하고 현금 없이 위챗으로 결제를 해야 하기에 개인정보 및 백신패스 관련 정책들이 큰 난관이 된다고 한다. 탈북자들은 모두 신원 미상으로 표기되므로, 한 성에서 또다른 성으로 이동[15]을 하거나 교통수단을 이용하기도 상당히 어려워지게 된 것. 그렇기 때문에 중국 내륙 이동을 검문소를 피해 차량으로 하게 되면서 탈북 비용이 증가했다.
중국에서의 탈북 과정은 워낙 다양한 사례가 존재해 모든 사람의 삶이 다르듯 한 마디로 정의하기가 쉽지 않다. 도강한 후 중국을 구경할 새도 없이 브로커가 이끄는 대로 일주일 동안 버스와 기차만 타면서 곧바로 중국 대륙을 횡단하는 경우가 있는가하면 몇번에 걸친 북송과 수년간의 지옥같은 교화소 생활을 겪고도 다시 탈북 후 한국에 입국하는 사례도 있다. 탈북민마다 탈북 과정 중 겪었던 조선족에 대한 인식도 다른데, 한송이처럼 탈북 여성을 인신매매로 팔아먹는다는 부정적인 의견을 표하는 사람도 있는 반면 탈북 과정 중 조선족 브로커의 도움을 받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중국어를 모르는 탈북민이 조선족의 도움이 없었으면 탈북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다른 탈북민의 반론도 존재한다. 한 마디로 중국에서의 탈북 과정은 케바케이다.
3.2.1. 대한민국 직행
▲ 2002년 김한미 일가족 일본 총영사관 진입 사건[16] |
주중 스페인 대사관 진입 25명 집단 탈북 사건 |
2000년대 초반에는 중국에 들어온 탈북민이 주중 대한민국 대사관에 현지 경비를 뚫고 들어가 대사관에서 신변보장을 받는 방법을 썼었다. 이 때문에 대한민국 대사관 주변에 공안의 경비가 강화되자, 2002년 3월에 베이징에 있는 스페인대사관에 탈북민 25명이 진입에 성공하면서 제3국 대사관과 외국인 국제학교로 집단 돌진하는 방법이 유행했다. 이러한 탈북 시도가 국제적인 이슈가 되자 중국 공안에서 모든 대사관 정문의 경비를 강화하면서 막무가내로 뚫고 들어가는 건 불가능해졌다. 2002년 중국 선양 주재 일본 총영사관은 아예 공안이 대사관 안으로 들어와 진입에 성공한 북한이탈주민을 체포하는 것을 방기하다 국제적으로 욕을 바가지로 먹은 바가 있다.
비행기와 배를 이용한 대한민국 직행은 중국 대륙과 동남아를 건너야 하는 다른 길에 비하면 거리가 짧고 고생하지 않지만, 출입국심사나 보안 검사 중에 걸리면 도망칠 길도 없이 바로 체포되어 북송이기 때문에 매우 위험성이 큰 루트다. 이 경우 탈북민의 한국행 의도가 명백하므로 관리소행이 확실하다. 그래서 이 방법을 선택한 탈북민들은 배와 비행기가 출발할 때까지 안심할 수 없다.[17][18][19]그마저도 이 방법은 중국이 전산화가 되기 전인 2000년대까지의 이야기이고 전자여권으로 교체가 완료된 2010년대부터는 아예 불가능해진 방법이다.
브로커를 통해 위조 여권을 구하거나 사망 신고를 하지 않은 사망자의 호적을 사서 위명여권을 발급받은 뒤, 중국인이 무비자로 입국 가능한 제주도에 중국인 관광객으로 입국해 제주국제공항 출입국사무소나 제주지방경찰청 등지에서 자수하는 방법도 있다. 제일 비싸지만 안전한 방법이다.
브로커가 여객항이나 공항의 출입국심사관을 매수한 뒤, 안전하게 출입국심사를 통과하고 밀입국하는 방법도 있다. 이게 가능한 이유는 탈북민은 다른 밀입국 시도자와 비교하면 뒤탈이 없기 때문이다. 중국인을 위조여권으로 통과시키면 인천공항에서 다 걸리고 중국으로 송환되면서 도장을 찍어준 출입국 관리 직원도 엄벌을 받을 확률이 높은데 탈북민은 위조여권으로 밀입국해도 한국 정부에서 문제 제기를 하지도 않고 사용된 위조여권은 회수되어 탈북민이 중국으로 다시 올 일도 없기 때문에 안전하게 큰 돈을 벌 수 있는 완전범죄가 될 수 있다.
- 관련 사례
- 조창호 - 국군포로로 43년간 억류되어 있다가 조선족 상인을 통해 편지로 한국의 가족에게 생존을 알렸으며, 중국으로 넘어와 배를 타고 1994년 10월 23일 새벽 대한민국 수산청 어업지도선에 의해 구출되어 탈북하였다.
- 장무환 - 국군포로의 신분으로 1998년 두만강을 통해 도강했으나 한국으로 갈 방법을 찾지 못해 중국에서 체류하던 중 정체불명의 검은 정장의 남성이 남서울호텔에서 장무환의 명의로 된 여권을 장무환의 조카에게 건넸고 이를 이용해 인천항으로 입국할 수 있었다.
- 주성하 - 1998년부터 여러 차례 탈북을 했지만 계속 북송되어 감옥만 6곳을 체험했다고 한다. 브로커에게 1만 달러를 주기로 하고 위조 여권을 받아 2002년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대한민국에 입국하였다.
- 2002년 주중 스페인 대사관 집단 진입사건 - 2002년 3월 14일, 25명의 탈북민이 주중 스페인 대사관으로 돌진하여 진입한 사건이다. 이 탈북민들은 단체관광객으로 위장하며 걸어가다가 순식간에 스페인 대사관으로 뛰어들어갔는데, 미리 대기하고 있던 CNN, AP통신 기자들이 찍은 영상이 외신을 통해 공개되어 전 세계 이목이 집중되었다. 이 소식이 중국 내에 숨어있던 탈북민들에게 퍼지자 한동안 베이징에 위치한 대사관과 국제학교 등의 담벼락을 넘어 탈북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 정명운 - 2006년 먼저 탈북한 딸 정유나를 찾아서 데려오기 위해 중국으로 넘어갔다가 공안에게 체포되었으나 탈출하고 연길에서 다롄까지 37일 동안 1,000km를 행군하여 브로커를 만나 단둥에서 배를 타고 인천항으로 입국했다.
- 박충권 - 두만강을 넘은 지 3일 만에 브로커로부터 한국 여권을 받았는데, 위조도 하지 않은 어떤 한국 여성의 여권이었지만 브로커가 출입국심사관을 매수했는지 얼굴을 확인하지도 않고 통과시켜줬다고 한다. 이후 단둥에서 배를 타고 인천항을 통해 2009년 한국으로 입국했다.
- 천국의 국경을 넘다 2 (2011) - 중국 현지에서 어선을 빌린 뒤 서해상에서 한국 선박과 접선하여 탈북하는 과정을 촬영한 다큐멘터리이다.# 갈렙선교회의 김성은 목사가 최초로 시도하여 성공한 방법이다. 하지만 이후 이 방법을 사용한 다른 사례가 없는 걸 보면 불가능해진 듯 하다.
3.3. 제3국
3.3.1. 몽골 경유
태국 루트와는 다르게 여기는 길을 인도하는 브로커도 없고 탈북민들은 내려두고 알아서 사막을 넘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게 탈북민들은 몽골로 넘어가기만 하면 끝이지만 브로커들은 다시 중국쪽으로 밀입국해야 하기 때문에 체포되면 몇년의 징역형을 살아야 하는 위험을 감당할 수 없다. 철조망을 여러 개 넘고 사막을 횡단해 몽골 국경수비대에 체포되면 탈북 성공이지만 광활한 사막에서 무사히 발견되는 것 자체가 생존의 문제다. 이때는 순찰로로 쓰이는 차도를 찾는 게 핵심이라고 한다. 순찰로만 찾으면 언젠가 국경을 순찰하는 차량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사히 주몽골 한국대사관으로 넘겨진 북한이탈주민들은 대한민국 정부의 보호 하에 울란바토르에서 한국행 비행기에 탑승한다. 사막을 건너야 하는 몽골 루트의 위험성은 영화 크로싱과 경계에서 묘사된다.
- 관련 사례
3.3.2. 태국 경유
▲ 메콩강 일대 |
2019년 혜산시에서 탈북한 5인 가족이 중국과 동남아를 거쳐 한국으로 오는 과정 (비욘드 유토피아) |
북한이탈주민 평균 70%가 태국 루트를 통해 대한민국으로 입국한다. 중국 대륙을 횡단하여 윈난성 쿤밍(곤명)에 도착하면 이제 라오스, 베트남, 미얀마로 밀입국한 뒤 차를 타고 내륙쪽으로 더 깊숙히 들어가다가 내려서 직접 밀림을 헤쳐서 메콩강으로 가야 한다. 태국, 라오스, 미얀마, 베트남 사이에 있는 이 내륙 국경 밀림지역을 현지 브로커를 따라 10시간이 넘는 산행을 해야 하는데 산 몇개를 넘는 고생을 각오해야 한다. 동남아쪽 브로커들은 주로 현지 범죄조직 소속으로 이 일대는 마약으로 악명이 높은 골든 트라이앵글 지역이다. 즉, 탈북민 밀입국에 마약 밀수용 루트를 쓰고 있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그나마 말이 통하는 브로커와 동행했지만 동남아에서는 범죄자일지도 모르는 브로커와 밀림지대를 통과해야 한다. 메콩강은 10분 정도 배를 타고 건너면 성공이다. 이때는 브로커 없이 탈북민들만 쪽배를 타고 건너게 되는데, 지도를 보면 태국으로 가기 위해선 어느 국가를 경유하던 메콩강을 건너야 한다. 또한 브로커 입장에선 태국 국경을 같이 밀입국하다 걸리면 벌금형이나 감옥살이를 해야 하므로 태국 땅에 안 들어가는 게 당연하다. 이 강을 건너는 탈북민들은 오래전부터 메콩강을 일명 '악어강'이라 불렀는데 사실 악어가 서식하진 않는다. 이러한 별칭의 유래는 브로커가 강을 건너는 탈북민들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서 지어냈다는 설이 유력하다. 실제로 2018년에 메콩강을 건너다가 배가 침몰해 탈북민이 익사한 사례가 있다.
메콩강을 건너 태국 땅에 도착하면 마침내 자유를 찾은 것이다. 친미 국가인 태국은 인근 공산권 국가와는 달리 탈북민을 추방하지 않고 난민 자격을 인정해 대한민국을 포함한 원하는 나라로 이동하는 것을 허용하기 때문에 탈북자들은 태국까지만 도착하면 매우 기뻐하며 안도의 한숨을 쉰다고 한다. 아무나 보이는 곳에 들어가서 경찰을 불러달라고 하면 현지인들은 이 상황에 매우 익숙해서 태국 경찰을 부르고 북한이탈주민들은 경찰서로 이송된다. 이후 태국 법원에서 불법입국죄로 벌금을 부과하면서 제3국 추방 명령을 내리는데, 벌금을 내면 바로 방콕 이민국수용소로 이송되지만 벌금 낼 돈이 없는 사람들은 현지 감옥에서 진짜 범죄자들과 함께 한두달 옥살이를 한 뒤 이민국수용소로 보내진다.
기독교 선교사를 통해 동남아로 들어오는 경우, 메콩강을 건넜더라도 이민국수용소로 가지 않고 기독교 선교사가 운영하는 단체 숙소에서 2~3개월 정도 성경 공부를 한다. 과거 중국에서 하던 성경 공부를 비교적 안전한 동남아쪽으로 옮겨온 것이다. 이 기간 동안 선교사들은 외부 개입없이 탈북민들에게 집중적으로 기독교를 선교한다. 탈북민들을 바로 이민국수용소로 보내면 최소 3개월 동안 연락이 끊기게 되는데 그동안 자신을 구해준 기독교 선교사에 대한 고마움도 차차 식어버리고 정착 교육을 마치고 한국 사회로 나오면 적응하느라 바쁜데 종교활동보다 흥미있는 것도 훨씬 많아서 탈북민을 다시 교회로 끌어들이기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방콕 이민국수용소에는 탈북민 전용 방이 있는데 그곳에는 먼저 들어온 탈북민들이 대기하고 있으며 한국에 대한 여러 소문과 정보가 공유된다. 중국에서 오랫동안 산 탈북민들은 그동안 들은 정보가 있어 한국에 익숙하지만 북한에서 바로 넘어온 탈북민들은 한국에 대해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일부 탈북민들은 한국행을 희망하지 않고 미국으로 가는 경우도 있다.[20] 이곳에선 매점을 이용할 수도 있고 비교적 자유롭게 전화도 할 수 있어서 탈북이 성공했음을 알릴 수 있다. 안남미로 된 밥과 갖가지 향신료가 들어간 음식 때문에 입맛에 맞지 않아 고생한다고 한다. 그래서 선교단체와 주 태국 대한민국 대사관에서 탈북민들의 여러 편의를 봐주며 일주일에 2번 특식으로 한국 음식 도시락을 준비해 제공한다고 한다. 대기하는 인원에 따라 한달 안팎[21]으로 수용소 생활을 한 뒤, 한국대사관에서 임시 여권 발급 절차가 끝나면 방콕에서 비행기를 타고 대한민국으로 입국한다.
- 관련 사례
- 대부분의 탈북 사례
- 비욘드 유토피아 (2023) - 갈렙선교회가 5명의 일가족을 탈북시키는 전체 과정을 볼 수 있다. 아들을 탈북시키다 보위부의 함정에 걸려 도강 단계에서 실패하는 사례도 그대로 나온다.
- 메콩강에 악어가 산다 (2017) - 북한이탈주민 출신 유튜버 박유성이 동료들과 함께 자신이 지나왔던 탈북 여정을 다시 체험해보는 다큐멘터리이다.
- 윤설미
- 정유나
- 김련희 - 친척 방문 제도를 통해 합법적으로 중국으로 나와 치료를 받다가 "한국에서 돈을 벌 수 있고 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브로커의 말을 듣고 자발적으로 태국 루트를 통해 한국으로 왔으나, 막상 한국에 와보니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자 다시 평양으로 돌아가겠다고 지속적으로 자신의 북송을 요구하고 있다.
3.3.3. 기타 동남아 국가
북한과 친한 공산권 국가인 라오스, 베트남이나 독재 국가로서 친중파가 많은 캄보디아, 미얀마는 탈북자를 단속하는 국가여서 그 고생을 하고 거의 다 도착했는데 이 지역에서 체포되어 북송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이들 국가로 밀입국해서 한국 대사관에 들어가도 수개월~1년 동안 대기해야 할 수도 있기 때문에 안전하고 빠르게 한국으로 갈 수 있는 태국을 최종 목적지로 한다.라오스는 한국 정부가 직접 나서자 갈등하다가 북송을 취소한 적이 있는데, 중국보다야 대화의 여지가 더 있다지만 손놓고 있으면 라오스에서도 북송된다. 2013년 라오스 탈북 청소년 북송사건이 있었는데, 주라오스 대한민국 대사관은 탈북자들의 신병이 억류되어 있던 18일 동안 단 한 차례도 영사면담을 하지 않았다. 결국 청소년 9명은 북송되었다. 한편 북송된 청소년들은 북한의 선전에 이용되고 있다. 그래도 2020년 이후로도 라오스 주재 한국대사관에 진입하는데 성공하면 대사관에서 3개월 정도 대기 후 한국으로 입국할 수 있다.
베트남의 경우, 베트남 경제에 한국이 큰 부분을 차지하니 예전보다 한국에 훨씬 우호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2004년 베트남은 체류 중이던 468명을 한국 정부가 베트남과 직접 교섭하여 이틀에 걸쳐 2차례 전세기편에 태워서 한국에 대거 입국을 성사시킨 적이 있다.[22]
말레이시아의 경우, 북한과 아예 단교 상태이며 싱가포르 역시 대한민국과 우호적 관계이므로 이 두 나라는 거의 완전히 안전하지만 어차피 가는 길에 태국이 있기에 비행기를 이용하는 것이 아닌 이상 사용되지 않는다.
3.4. 해외 주재 중 탈북
- 유럽
탈북하기 가장 쉬운 경우에 속한다. 해당 국가 주재 대한민국 대사관을 찾은 뒤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북한은 유럽 모든 나라에 대사관을 두고 있지 않으며 대사관이 있는 국가의 안전대표(보위원) 한 명이 여러 유럽국가를 관할한다. 따라서 기숙사 생활을 하는 유럽 북한 유학생들은 보고를 위해 휴대전화도 가지고 있으며 감시에서도 자유롭다. 주재국 정부당국이 주의깊게 들여다보고 있으므로 중국이나 동남아에서처럼 납치나 북송 같은 양아치짓을 시도할 수도 없다. 그리고 만약 이런짓을 한다 해도 여기는 EU에서 항의가 들어오기 때문에 쉽사리 행동하지 못한다. 북한대사관은 인원이 한자리 수 정도밖에 되지 않으므로 외교관들은 그냥 기회를 봐서 대사관을 빠져나오면 되며 주재국 정부에 도움을 요청하면 탈북을 도와줄 수 있다. 사실상 평양에 남아있는 가족들이 유일한 족쇄이다.
- 중동 / 아프리카
보통 해외 파견 노동자, 외교관들로 한국대사관으로 들어와 탈북한다. 탈북 외교관 1호인 고영환 박사는 콩고에서 유럽을 거쳐 40일만에 한국으로 들어왔다.# 탈북작가 림일은 1997년 쿠웨이트에 해외 노동자로 파견되었다가, 현지 한국 대사관을 통해 귀순했다. 중동/아프리카는 유럽 국가만큼 탈북이 쉽지는 않지만 이곳 역시 보위부의 감시가 허술하고 한번 도망치면 그 넓은 나라에서 한정된 인원으로 추적할 수도 없기 때문에 계획을 잘 세우면 상대적으로 수월하다. 다만, 붙잡히면 몽둥이로 사지를 부러뜨리고 깁스를 해서 움직이지 못하게 한 뒤, 도움을 청하지 못하게 안정제를 투여해서 재우고 환자로 위장해서 중국까지 끌고 가 북송한다고 한다. - 북한식당
북한식당에서 일하는 종업원들은 식당 건물에서 단체생활을 하고 식당 밖으로 나가지 못하기 때문에 탈북이 힘들다. 식당 자체에 담벽과 철조망이 쳐져있고 식당 지배인과 보위원이 상주하고 있어 항상 감시당한다. 외출도 특별한 때에만 가능하며 조를 이루어서 해야 한다. 식당에서 몰래 나오더라도 외부 세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10대 후반~20대 초반의 북한 여성이 여권도 없이 동남아와 중국을 혼자 빠져나오기도 어렵다. 외부 조력자가 없으면 탈출이 어려운 경우이다.
외교관, 해외주재원, 북한식당 종업원, 파견노동자, 유학생 등은 본인의 결심만 있다면 탈북하기 가장 쉬운 루트에 속한다.[23] 중국, 러시아를 통해 다른 나라로 밀입국하는 형식의 탈북과는 물리적 난이도가 다르다. 대신 외교관이 아닌 이상 가족들은 북한에 남아있고 홀로 탈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비교적 고위층에다가 한국행이 명확하기 때문에 한국 언론에도 보도되어 평양에 남아있는 가족들은 오지로 추방되고 감시가 심해 북중국경으로 탈북한 일반 북한 주민들과는 달리 연락조차 힘들다. 주성하 기자가 겪어본 사례에 따르면 종종 해외 북한유학생들로부터 탈북을 도와달라는 연락을 받는데, 주성하 기자는 그때마다 한국에 와서 살아보니 가족보다 더 소중한 가치는 없으니 가족들도 같이 데리고 오거나 한달 동안 생각해보고 그래도 탈북하고 싶다면 도와준다고 대답해준다. 그러면 절반은 탈북을 포기한다고 한다.
김정은 집권 이후로 해외 파견 중 탈북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특히 대북제재가 시작되면서, 본국으로 송금해야 할 충성자금을 마련하지 못한 외교관들이 처벌의 두려움을 견디다 못해 탈북을 결심한다. 또한 잘못을 저지르거나 연좌제로 송환을 앞두고 탈북하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예로 장성택 처형 사건으로 인해 해외에 나와있던 장성택의 측근들이 줄줄이 송환되자 위기를 감지하고 탈북한 사람이 많다.
- 관련 사례
- 외교관/주재원/유학생
- 외무성 출신 북한이탈주민
- 최은희·신상옥 납치사건
- 오길남 사건
- 전철우 - 동독으로 유학을 갔다가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자 친구 장영철과 함께 망명했다.
- 이창수 - 1991년 7월 바르셀로나 세계 유도선수권대회 참가를 위해 해외로 나올 수 있었고 북한으로 돌아가는 국제 열차가 서베를린을 경유할 때 열차에서 뛰어내려 가까스로 탈북하였다.
- 최세웅 - 국영 무역회사 영국지사장이던 1995년, 평양 송환 통보를 받고 무용수 출신 아내 신영희, 두 자녀와 함께 탈북했다.
- 황장엽 망명 사건 - 1997년 황장엽과 수행원 김덕홍이 중국에서 베이징 한국영사관을 거쳐 한국으로 망명했다.
- 김태산 - 체코에서 북한 무역회사 사장으로 활동하다가 2002년 탈북했다. 탈북을 마음먹고 체코에서 독일을 경유해서 남한으로 오는 비행기표를 예약하고 가족들과 함께 체코에서 출국 심사를 했다. 그런데 심사를 맡은 직원은 전혀 의심하지 않고 출국 허가를 내줬고, 아무런 방해 없이 그대로 남한으로 올 수 있었다.[24]
- 김금혁 - 2012년 중국 유학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정보원의 도움으로 중국에서 비행편으로 한국으로 망명했다.
- 리정호 - 39호실 고위관리로 장성택이 처형되고 측근들이 체포되기 시작하자 가족을 데리고 2014년 10월 한국으로 망명하였다.
- 김정국 - 2015년 김책공업종합대학 출신 건축 유학생으로 프랑스 파리에서 공부하다가 한국대사관을 통해 탈북했다.
- 이정호(리정렬)[25] - 2016년 홍콩 국제수학올림피아드에 참여한 후 홍콩과학기술대 기숙사를 빠져나와 택시를 타고 주홍콩 대한민국 총영사관으로 탈북했다. 이후 서울과학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수리과학부에 진학했다.# (주성하 기자와의 인터뷰)
- 김명철 - 39호실 유럽자금총책으로 이탈리아에서 김정은의 비자금을 관리하고 있었다. 2014년 9월 동생 김경철이 장성택과 엮여 처형되자 2016년 4월 김정은의 비자금 4000억 원을 챙겨 이탈리아로 망명했다.
- 노희창 - 대외건설지도국 당비서로 해외에서 파견 중 장성택과 엮여 숙청당할 위기를 맞아 2014년 독일을 거쳐 대한민국으로 귀순했다.
- 2022년 유럽 지역에서 대학을 다니던 평양 출신 유학생 20대 여성 3명이 함께 탈북했다.
- 북한식당/해외 파견 노동자
- 류경식당 종업원 집단탈북 사건
- 2016년 중국 산시성 소재 북한 식당에서 종업원 3명이 라오스-태국을 거쳐 한국으로 입국했다.
- 우즈베키스탄 북한식당 종업원 집단 탈북 사건
- 한수애
- 나민희 - 몰타에 해외노동자로 파견되어 중국인 사업가가 운영하는 봉제공장에서 일하던 중, 2015년 동료 두 명과 여객선을 타고 유럽으로 건너간 뒤 독일 주재 한국영사관을 통해 탈북하였다.
- 류희진 - 나민희와 같이 탈북한 두명 중 한명이다.
- 김서아 - 한수애와 같은 캄보디아 북한식당에서 일하던 후배로 2018년 북한식당을 탈출하여 2020년 대한민국에 입국했다. 이후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 종종 출연하며, 유튜브 채널인 김서아tv를 운영하고 있다.
- 최명천 - 오만에 평양건설총회사 소속의 통역사로 파견된 뒤 스마트폰과 유튜브를 통해 북한의 실상을 알게 되었고 2018년 7월 7일 차를 타고 숙소를 빠져나와 주 오만 한국대사관으로 들어가 한국으로 입국했다.
3.4.1. 러시아-중앙아시아
▲ 러시아에 파견된 북한 노동자들의 모습 |
러시아에서 스마트폰과 인터넷을 처음 접하게 되는 북한 노동자 |
의 해외에서의 노동 착취 부분을
참고하십시오.관련 문서: 충성의 외화벌이
두만강을 넘어 러시아로 직접 탈출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북한과 러시아가 국경을 맞댄 곳은 라선시 하나뿐인데, 이곳은 경제특구 지역으로 북한 내에서도 접근이 곤란한데다 라선시 일대가 두만강 하류인지라 강폭이 워낙 크기 때문에 도강이 어렵다.
북한 사람들은 러시아에 외교관, 무역일꾼, 건설노동자, 벌목공으로 파견되었다. 90년대부터 시베리아에 벌목공으로 나간 사람들은 엄청나게 고된 벌목장을 이탈하여 불법체류자로 살아가는 사람이 많았다. 십여년 이상 러시아에서 살아 한국말을 잊어버린 채 한국으로 입국한 사례도 있었다. 이들이 그나마 북송되지 않고 불법체류자로 머물 수 있었던 이유는 러시아는 탈북자를 체포할 강력한 이유가 없었고 중국과 달리 인구가 희박한 극동지역에서 그에 필요한 행정력도 없기 때문이다.
사실 아주 오래 전부터 있었던 탈북 루트였다. 다만 난이도가 어마어마하게 어려워 시도되지 않았을 뿐. 아래의 사례 부분에도 나와있지만, 1993년 러시아-카자흐스탄 루트로 탈북한 최초의 사례가 있다.
또 2010년 중앙아시아에 탈북자가 존재한다는 뉴스가 나온 것도 보았을 때, 소수지만 러시아를 통해 중앙아시아로 이동하여 탈북을 시도하는 경우도 확실히 존재한다.
2022년 기준 러시아에 파견된 북한노동자의 수는 수천~1만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건설노동자들은 노동력이 부족한 극동지역에서 러시아 건설회사로부터 하청을 받아 건설작업을 한다. 하루 2~3시간만 자고 일하는 경우가 허다하며 러시아 원청회사에서 지불한 급여의 10% 정도만 자신의 몫으로 지급된다. 5년간 일해도 손에 쥐는 건 2,000달러가 전부다. 현역 군인들이 러시아 노동자로 파견되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 군복무를 하는 군인 신분이기에 민간인처럼 월급을 주지 않아도 공짜 노동력으로 부려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정도 경험이 쌓인 건설노동자들은 '청부'일을 하기 시작하는데 건설수주를 받아 집단적으로 건설 노동을 하지 않고 따로 사회에서 수익성 높은 건설이나 인테리어 일감을 구해 정해진 액수를 바치면서 자유롭게 일하는 것이다. 이때부터 북한 노동자들은 감시의 눈을 피해 스마트폰을 구입[26]하여 사용하기 시작한다.
러시아 파견노동자들은 스마트폰으로 인터넷과 유튜브와 뉴스를 접하게 되면서 북한의 실상과 자신이 노예처럼 일해왔다는 것을 깨닫고 탈북을 결심한다. 스마트폰은 브로커와 직접적으로 연락하고 인터넷으로 정보를 검색할 수 있기 때문에 탈북에 중요한 수단이다. 러시아에서 탈북한 해외노동자가 말하는 구체적인 방법은 다음과 같다. 1. 스마트폰은 한국어 언어 옵션이 있는 걸로 구한다. 2. 인터넷에서 모스크바 주재 유엔난민기구를 검색하여 연락처를 찾는다. 3. 유엔난민기구에 연락을 하면 북한 담당 변호사가 받을테니 러시아어나 번역기를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유엔난민기구와 연락할 때 러시아 경찰이 도청을 하므로 주의해야 한다.[27] 접선장소를 정할 때도 수시로 위치를 바꾸도록 한다. 4. 러시아어를 못한다면 주변 한인식당이나 상점을 찾아 도움을 요청한다. 5. 한국 영사관과 대사관 전화번호를 검색해서 알아낸 후 도움을 요청한다. 한국 영사관도 중국과 마찬가지로 직접적인 도움은 주지 못하지만 유엔과의 연결을 도와줄 수 있다. 유엔에 망명 신청을 하더라도 자신이 북한 사람임을 증명할 수 있는 서류를 제출해야 한다. 신분을 증명할 서류가 없어 난민 신청을 거부당해 어느곳도 가지 못하고 그대로 러시아에서 노숙하다 객사한 사례가 있다.
러시아에 나와있는 선교사들과 구출활동가들도 이들의 유엔난민기구를 통한 망명 신청을 돕는다. 러시아 북한노동자들에게 제일 가까운 한국 외교공관은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대한민국 총영사관이다. 하지만 북한도 바보는 아니므로 그만큼 더욱 경계를 철저히 하는 것은 당연지사다. 2023년에 탈북한 러시아 북한노동자의 증언에 따르면 블라디보스토크 한국 영사관은 북한측에서 상시 도청 중이기 때문에 탈북을 희망해 전화를 걸었던 여러 북한노동자들이 적발되었으며 절대 이곳과 전화를 하면서 구체적인 본인의 신상을 밝히면 안된다고 한다.
유엔난민기구를 통해 망명이 접수되어도 여러 행정절차가 있기 때문에 바로 러시아를 떠나는 것이 아니다. 유엔난민사무소에서 숙소를 마련해주고 생활비까지 지급해주는데도 탈북민 입장에서는 러시아에 머무르는게 가시방석과 같다. 당연히 북한 당국도 이를 가만히 놔둘리가 없다. 러시아 경찰에 체포 협조 공문을 보내고 러시아 마피아 조직에게 현상금까지 걸면서 탈북민을 잡으려고 한다. 러시아가 중국보다 탈북이 쉽긴 하지만 극동지역은 지역정부와 경찰이 북한 대사관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탈북민을 불법적으로 납치한 뒤 북한 당국에 넘기는 경우가 지속되고 있어서 계획없이 무작정 탈북하면 안된다고 한다. 납치된 탈북민은 블라디보스토크 북한 영사관 지하에 감금되어 한꺼번에 북송된다.# 무사히 망명 허가를 받으면 러시아에서 바로 오지는 못하고 제3국으로 이동한 다음 대한민국으로 오게 된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로는 한러관계가 나빠짐과 동시에 러시아와 북한과 더욱 가까워지고 있는 상황이므로, 탈북민들이 러시아에서 탈출을 시도하면 북송당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기존에는 공산권출신 국가 치고는 의외로 범죄 혐의 또는 북한의 송환 요청이 없는 한 탈북자 강제북송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았다곤 하나, 2016년 러시아도 북한과 탈북자 강제송환에 대한 협약을 체결했고 이미 우크라이나전 발생 전에도 탈북자를 북송한 전적이 있었다.# 또한 러시아 정부측에서 유엔난민기구 사무소에서 일하는 러시아인 직원과 북한 노동자들을 돕는 인권활동가들에게 법적 처벌을 하는 등 전방위적인 압박을 가하면서 유엔난민기구를 통한 망명 신청도 어려워졌다.
2024년부터 북한 당국이 러시아 북한노동자들의 스마트폰 사용이 일탈과 탈북의 주요 원인인 것을 알았는지 암묵적으로 눈감아주던 휴대폰을 몰수하기 시작했다. 또한 2020년 이후 행방불명자로 처리했던 해외노동자들의 한국 입국 여부를 파악해 북한에 남아있는 가족들을 연좌제로 처벌하고 있다.
- 관련 사례
- 1993년, 벌목장 노동자로 일하던 김승철 씨(현재 북한개혁방송 대표)는 러시아에서 기차를 타고 카자흐스탄까지 가서 탈북을 했다.
- 2016년 8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북한 무역대표부에서도 한 외교관이 탈북했다.#
- 2023년 1월 25일, 러시아에서 일하던 북한 노동자 9명이 유엔난민기구의 도움으로 대한민국에 입국했다는 소식이 보도됐다. 대북 소식통은 "이들이 현재 하나원에서 교육을 받고 있다"고 밝혔으며,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터지면서 동요가 일어 한국에 들어오려고 했던 것"이라고 덧붙였다.
3.5. 군사분계선(휴전선) 전면돌파
▲ 강원도 고성 인근 동부전선의 야간 모습[28] |
▲ GP 주변에 설치된 귀순자 유도함 |
▲ DMZ의 구조 |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를 뚫고 한국으로 귀순하는 경우이다. 가장 빠른 시간 내에 도보로 탈북이 가능한 경로이지만, 3만 명의 북한이탈주민 중 휴전선을 이용한 사람은 극소수이다. 군사분계선은 극도로 위험하고 일반 주민들에게는 접근 자체가 쉽지 않은 경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휴전선으로 탈북하는 사람들은 북한군 민경부대 출신이 대부분이다. 이들은 휴전선 인근에서 복무하면서 비무장지대의 지형 조건과 북한군과 한국군의 경계상황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휴전선 주변은 역사상 육군 밀집도가 가장 높은 지역이다. 조선인민군 육군의 70% 가량이 250km밖에 안 되는 원산시 이남 및 휴전선 근처에 전진배치되어 있다. 최고 2,200V 전압의 전기 철조망 또한 탈북을 방해한다. 전기가 흐르지 않는 시간대를 파악해 건너거나 쇠막대기를 이용해 전기를 땅으로 흘려보낸 뒤 철조망 밑으로 구덩이를 파고 통과해야 한다. 폭이 수십m 이상은 될 지뢰지대도 난관이다. 가장 위험한 요소로 1953년 정전 이후 비무장지대의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지형상의 변화 등의 이유로 지뢰가 어디로 쓸려내려갔는지 한국측도 북한측도 아무도 모른다. 한반도의 휴전선은 전 세계에서 지뢰 밀집도가 높은 지역 중 하나다.
북한군의 감시를 피해 비무장지대에 들어서면 한국군측에도 민경부대가 기다리고 있다. 보통 북한군이 내려오면 열상감시장비에 포착되는데 군사분계선 남쪽으로 내려올 때부터 추적, 감시하면서 귀순 유도 작전을 진행해 신병을 확보한다. GP나 GOP 쪽에 탈북자들을 안내하기 위해 푯말과 전화기를 두긴 하는데, 애초에 넘어오는 탈북자들은 그런게 있는 줄도 모르기 때문에 철책으로 가까이 다가와서 귀순한다. 귀순한 북한 군인들은 처음 마주한 한국 군인들의 체격을 보고 놀란다고 한다. 또한 절차상 총이 겨눠진 채로 몸수색을 당하고 포박해 끌고가기 때문에 거부감을 느낀다고 한다.
예전에는 휴전선으로 귀순한 탈북자에게 바로 식사를 줬다고 하는데, 강냉이밥과 염장무만 먹다가 갑자기 기름진 음식을 먹으면 탈이 날 수도 있어 최근에는 일선 부대에서는 물 이외에는 제공하지 않고, 국가정보원에 인계하고 건강검진 후에 식사를 제공한다. 한편 2000년대 중반 중부전선을 통해 발생한 귀순 사례에 따르면 그냥 교대근무자들이 먹는 밥을 퍼다 줬다는 얘기도 있다. 근무 병력들이 먹기 싫은 밥을 대충 퍼먹고 잔반처리하는 것을 본 탈북병사의 한마디가 "인민이 용서치 않을 겁네다"였다고 한다. 군인이 소총이나 수류탄 등의 무기를 소지한 채로 탈북하는 경우에는 해당 무기의 유형과 가치를 고려해 보로금을 지급받을 수 있다.[29]
3.5.1. 관련 사례
2000년대까지는 공개되지 않은 군사분계선 귀순이 많았으므로 모든 사례를 기재한 것이 아님. |
- 1953년
- 7월 31일, 북한군 대위 안창식이 휴전 이후 최초로 귀순했다. '월남 귀순 용사'라고 불렸다. 2002년 지병으로 사망했다.
- 1979년
- 7월 27일, 북한군 민경대대 부소대장(상사)으로 복무 중이던 안찬일이 철책선을 넘어 귀순했다.# 이후 안찬일은 건국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아 탈북민 출신 '1호 박사'가 되었고, 여러 북한 관련 방송에 출연하고 있다.
- 1983년
- 5월 7일, 북한군 13사단 민경대대 참모장 신중철 대위가 동부전선 강원도 양구군에서 군사분계선을 넘어 귀순했다. 이는 북한 육군 장교가 최초로 귀순한 사례이다. 신중철은 강건종합군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중위로 임관한 뒤, 김일성군사종합대학을 연이어 졸업한 엘리트 장교였으며 김평일과 같이 공부한 동기이기도 했다. 신중철은 귀순 후, 북한군의 전술체계와 한국군에게 유용한 정보를 여럿 제공하였고 보로금으로 1억 원을 받았다. 이후 국군정보사령부에서 적전술연구단 연구위원으로 근무하다가 95년 대령으로 예편했다. 그러나 2000년 6월, 은행에서 대출을 받고 부인이 몰던 차까지 처분한 뒤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여자와 함께 중국으로 출국하여 현재까지도 행방불명 상태이다.
- 1995년
- 2002년
- 2월 19일, 오후 11시 18분경 북한군 민경대대 대남방송국 방송조장으로 근무하던 상급병사 주성일이 AK 소총을 휴대하고 도라산역 인근에서 귀순했다. 탁은혁이라는 후임 병사와 같이 탈북을 시도했지만 중간에 전기철조망을 넘다가 감전되어 즉사했다고 한다. 이후 주성일은 2014년 박사 학위를 받고 탈북민 최연소 박사와 전임교수가 되었다. 주성일은 가명이었거나 개명했는지 주승현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다.
- 2008년
- 2010년
- 2012년
- 8월 17일, 경기도 연천군 사미천변에서 19세 북한군 1명이 귀순하였다. 귀순 사유는 북한군 내 만연한 똥군기 때문이었다. 이 탈북민은 유튜브 채널 북시탈tv를 운영하는 정하늘로, 본인이 직접 당시 탈북 과정에 대한 영상을 찍기도 했다. 2018년 11월 11일 방송된 이제 만나러 갑니다 360회에 당시 일화가 소개되었고 귀순을 유도한 초병은 29박 30일 포상휴가를 나갔다고 했다. 제25보병사단은 이 사건을 '사미천 완전작전'으로 명명하고 재현 훈련도 하고 있다. 이후 정하늘은 영화 탈주 제작에 참여하였으며, 영화배우와 감독의 길을 걷고 있다.
- 10월 2일, 북한군 노크 귀순 사건 - 동부전선 쪽에서 불침번이 자고 있던 초소 문을 두드리고 귀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CCTV로 발견하고 신병을 확보했다는 보고가 거짓인 것으로 드러났다. 여담으로 제22보병사단은 이 사건으로 부대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
- 10월 6일, 오후 12시 10분경, 서부전선쪽 북한 초소에서 근무하던 하전사 1명이 소대장과 분대장 2명을 사살하고 경의선 남북관리구역을 통해 귀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 2015년
- 6월 15일, 함경남도 함흥시에서부터 19세 병사 1명이 200km를 걸어와 휴전선 GP에 귀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북한판 포레스트 검프
- 2016년
- 9월 29일, 오전 10시경 강원도 화천군에서 1명이 휴전선을 넘어 귀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리고 이 귀순자는 유튜브 채널 북시탈tv의 김강유다.
- 2017년
- 6월 13일, 2017년 GP 경계 실패 논란 - 저녁 7시 55분경 귀순자가 발생했다.
- 6월 23일, 밤 9시 30분쯤 중부전선에서 북한 군인 1명이 귀순했다.
- 11월 13일, 2017년 판문점 귀순 북한군 총격 사건 - 하전사 오청성이 차를 타고 돌진해 판문점을 넘어 귀순했다. 그 과정에서 총을 여러번 맞아 목숨이 위태로웠으나, 치료를 받고 다행히 살아났다. 유엔군사령부에서 해당 사건의 CCTV 영상을 공개하여 전 세계에서 화제가 되었다.
- 12월 21일, 오전 8시 4분경, 19세 초급병사 노철민이 부대에 배치된 지 3개월 만에 총을 휴대한 채로 귀순했다. 탈북 이유는 누명을 쓰고 상관에게 심하게 폭행을 당한 것이 주요한 계기라고 밝혔다. 당시 GP에서 귀순 작전에 참가했던 병사의 경험담[30]
- 2018년
- 12월 1일, 오전 7시 56분경, 바로 전날 막 남북 양측에서 비무장지대의 GP(감시초소)를 철거한 강원도 동부전선 쪽으로 북한군 1명이 총격 없이 무사히 귀순했다.
- 2019년
- 2020년
- 11월 4일, 북한이탈주민 철책 훼손 귀순 사건 - 강원도 고성군 전방에서 신원미상의 북한 남성이 최전방 철책을 넘어 귀순했다. 이 남성은 2년 뒤인 2022년 다시 월북했다. 귀순 탈북자 2022년 월북 사건 문서 참고.
- 2024년
3.6. 북방한계선(NLL) 해상 탈북
▲ 삼척항 목선 귀순 사건 |
바다출입증을 받아도 난관은 남아있는데 형제나 친척 등 가족이 한 배에 탈 수 없고 특히 여성은 무조건 배에 태울 수 없게 하여 가족 단위의 탈북을 막고 있다. 어선 자체도 소형 목선으로 만들고 빠른 속도를 내지 못하도록 경운기에나 쓰는 엔진만 달 수 있도록 하여 원양 항해를 제한한다. 또한 북한에서는 개인이 배를 소유할 수 없으므로 수산사업소나 군부대 부업선 명의로 배를 등록해놓고 일정 수입을 바친다는 계약을 한 뒤 실질적인 선주 역할을 하는 수밖에 없다. 모든 배는 수산기지 소속 부두에 정박되어 있으며 이곳의 경비초소가 출입하는 인원을 검사하고 배의 모든 입출항이 파악된다. 즉, 해상 탈북을 위해 배를 출발시키려면 수산사업소 경비가 지키는 항구로 몰래 숨어들어가서 배를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조건에서 어부도 아닌 가족들을 데려가서 몰래 배에 태운다는 건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배를 타고 탈북한 북한이탈주민들의 경험담을 들어보면 이들의 공통점은 해안 입출입을 통제하는 군인, 경비원들과 친해져서 경계심을 흩뜨려 놓았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자주 호의를 베풀어 장기간에 걸쳐 친해지는 것이 핵심이라고 한다.
상술한 것처럼 배를 타고 항해하는 것보다 가족들을 배에 태워 출항시키는 과정이 훨씬 어렵다. 고기잡이와 상관없는 노인과 아이를 어선에 태웠다는 건 탈북 의도가 명백하기 때문이다. 일단 배를 띄워서 바다 한가운데까지만 가면 절반은 성공한 것이다. 북한 경비정들은 해상 순찰을 나가도 연료가 없어 정해진 곳에서 닻을 내려 정박한 뒤 시동을 끄고 한가하게 시간만 보내고 돌아오므로, 선박의 엔진을 껐기에 전기를 퍼먹는 레이더가 작동하지 않아 갑판 견시의 눈에 띄지 않는 작은 목선은 들키지 않고 내려올 수 있다. 그렇게 NLL 이남으로 넘어와 대한민국 해군이나 해경 함선과 만나면 탈북 성공이다. 출항하는데 성공했다고 해도 모두가 성공하는 건 아니다. 황해남도에서 탈북에 실패한 사람들이 처형되는 것을 목격했다던 탈북민의 증언도 있고, 연평도 군복무 당시 NLL로 남하하던 어선을 북한군 고속정이 나포해서 끌고가는 정황을 관측했다는 목격담도 존재한다.
배를 타지 않고 바다를 헤엄쳐서 온 탈북민은 인천광역시 옹진군의 서해5도, 강화군, 경기도 김포시의 대한민국 영토가 직접적으로 시야에 들어오는 황해남도 주민인 경우가 대부분이다.[32] 일단 서해 바다쪽은 수심이 얕아 썰물 때를 노려 바다에 뛰어들면 황해남도 연안군쪽에서 인천광역시 강화군의 교동도로 헤엄쳐 탈북에 성공한 사례가 여럿 존재한다. 언뜻보면 바로 대한민국 영토가 보이고 거리가 짧아 상대적으로 수월해보이지만 막상 바다로 뛰어들면 조수간만의 차가 커 조류가 강한 서해에서 수영해서 오는게 쉬운게 아니라고 한다. 썰물 때를 놓치면 조류를 극복하지 못하고 북한 쪽으로 다시 되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2023년에는 NLL을 수영해서 넘어오려다 강화도 해안에서 익사한 채 발견된 북한 남성도 있었다. # 동해쪽은 수심이 깊고 중간에 경유할 섬도 없어서 수영으로 탈북하는 건 불가능하고 성공한 사례도 없다.
3.6.1. 관련 사례
- 1955년
- 5월 17일, 북한 주민 유기방이 가족 8명을 데리고 강화도에서 귀순했다. 선박을 이용해 가족 단위로 탈북한 최초의 사례.
- 1987년
- 1월 15일, 새벽 1시 북한 주민 김만철이 일가족 11명을 데리고 청진을 떠나 탈북, 일본과 대만을 거쳐 2월 8일 대한민국으로 귀순했다.
- 1996년
- 7월 11일, 개성시에 거주하던 북한 주민 최승찬이 고무튜브를 착용하고 예성강을 따라 헤엄쳐 귀순했다. 최승찬은 농협중앙회에서 일하다가 2004년 1월 퇴직한 후, 북한에 있는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 전 재산을 정리하고 5만 달러를 가지고 중국에서 두만강을 넘어 월북했다. 이후 최승찬은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처벌받지 않고 개성에서 가족과 재회했다고 알려졌다.
- 1997년
- 1월 22일, 북한 주민 두 가족 8명이 서해상에서 표류 중 귀순했다.
- 5월 13일, 북한 주민 두 가족 14명이 목선으로 서해상에서 귀순하였다.
- 9월 11일, 북한 주민 차성주가 강화군 교동면 봉소리 해안초소로 귀순했다. 배천군 예성강 하구에서 출발해 7시간 동안 헤엄쳐서 탈북했다. 이후 한국에 살고 있던 삼촌 3명, 고모 5명과 상봉했다.
- 1999년
- 9월 14일, 오후 5시 강화군 서도면 말도리에서 북한군 동일섭(당시 25세)이 2시간 동안 헤엄쳐 귀순했다. 이후 2000년 국정원에서 정착교육을 마치고 나온 동일섭은 KBS 2TV 예능 프로그램인 <한국이 보인다>의 한 코너인 '북한청년 동일섭'에 출연하게 되었는데 동일섭 본인이 한국 사회에 정착하는 과정을 다룬 프로그램이었다. 해당 코너는 4개월 동안 방영되었는데 20년 이상 지난 현재는 남아있는 영상을 찾을 수 없고 당시 기사 몇개만 남아있다. 동일섭이 한국 정착 생활을 겪으며 실수하는 장면에서 방청객의 웃음소리를 함께 내보내는 등 방영 당시 탈북민을 희화화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 2002년
- 7월 31일, 북한 주민 1명이 서해 우도지역에서 전마선을 타고 귀순했다.
- 8월 19일, 세 가족으로 이루어진 북한 주민 21명이 어선을 타고 귀순했다. 이들은 20톤급 목선을 타고 평안북도 신의주 홍건도 포구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 2003년
- 2004년
- 10월 19일, 북한 주민 남녀 2명이 어선을 타고 연평도 근해에서 귀순했다.
- 2005년
- 2006년
- 2007년
- 3월 20일, 탈북하여 중국, 러시아 등지를 거친 북한 주민 1명이 러시아 선박에 타고 울릉도 인근에서 조업 중이던 한국 어선에 옮겨타 귀순했다.
- 4월 28일, 북한 주민 4명이 전마선을 타고 연평도 인근 해상에서 귀순했다.
- 6월 2일, 북한 일가족 4명이 목선을 타고 청진항을 떠나 일본 아오모리현에 도착했고, 16일 한국으로 입국하였다.
- 2008년
- 2009년
- 2010년
- 5월 8일, 북한 주민 1명이 스티로폼과 나무로 만든 뗏목을 타고 백령도 앞 해상에서 귀순했다.
- 6월 1일, 북한 주민 1명이 전마선을 타고 서해 백령도 앞 해안에서 귀순했다.
- 6월 24일, 북한 주민 1명이 전마선을 타고 백령도 두무진 앞바다에서 귀순했다.
- 9월 20일, 북한 주민 4명이 울릉도 주변서 표류 중 구조되었다. 3명은 귀순했고 1명은 북한으로 귀환했다.
- 2011년
- 2월 5일, 북한 주민 31명이 어선을 타고 연평도쪽으로 남하했고 그중 4명이 귀순하고 27명은 북한으로 귀환했다. 북한 측에서는 이에 반발하여 귀순 주민 4명의 송환을 촉구하며 이들의 일가족과 인터뷰한 영상을 공개했다.
- 6월 11일, 황해남도 청단군 영산리[33]에서 출발한 형제와 그 일가족 9명이 서해 우도 해상에서 귀순했다. 형제 중 한 명이 현재 '김영철 콤프레샤'라는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고 있다. 본인이 증언한 탈북스토리에 따르면 직접 목선 두 척을 깎아 9명이 나눠타고 노를 저어 왔다고 한다.#[34][35] 이후 2016년 탈북한 보위부 출신 이철은의 증언에 따르면, 해당 사건은 보위부 내부에서 교육용 영상으로도 만들어졌다고 한다.
- 9월 13일, 일본 이시카와현 노도반도 앞바다에서 9명을 태우고 표류하던 어선이 발견되었다. 이들은 한국행을 희망하여 인도되었다.
- 10월 30일, 북한 주민 21명이 목선을 타고 평안북도 선천에서 출발해 서해 대청도 서쪽 해역으로 남하해 귀순했다. 특이하게도 '이리'라는 이름의 개도 주인을 따라 배에 올라타 의도치 않게 같이 탈북하게 되었고 '탈북 1호견'이 되었다. 해당 개는 하나원에서 맡았다가 주인이 데려갔지만 교육되지 않은 개를 집 안에서 키우기 쉽지 않아 다른 곳으로 맡겨졌다고 한다.
- 10월 30일, 바로 위의 북한 주민 21명이 발견된 거의 같은 시간에 북한 남성 1명도 뗏목을 타고 연평도 해상에서 귀순했다.
- 2012년
- 9월 9일, 4일 새벽 한강에 몸을 던져 교동도 해안으로 흘러내려온 28세 북한 주민이 검거되었다. 당시 태풍의 여파로 파손 및 돌덩어리로 임시보수된 철책을 넘어 밭 작물을 파먹으며 숨어있었다고 한다.
- 2013년
- 8월 23일, 40대 남성이 북한에서 교동도까지 헤엄쳐 민가의 문을 두드리고 귀순했다. 교동도 동남쪽이 주민 어업지대인 탓에 철책과 초소가 없었다고 한다. 해당 집주인과의 인터뷰
- 2014년
- 5월 31일, 청진시에서 출항한 어선이 울릉군 관음도 인근에서 해경에 구조되었다. 어민 3명 중 2명은 귀순 의사를 표명했다. 귀환을 선택한 주민은 6월 3일 판문점을 통해 귀환했다.
- 7월 3일, 북한 주민 1명 전마선을 타고 백령도 해안에서 해병대 초병에게 발견되어 귀순했다.
- 8월 14일, 부자지간인 50대 남성과 20대 남성이 교동도로 헤엄쳐 귀순했다. 아버지와 아들은 평양 출신인데 금광을 개발하러 왔다는 명분으로 1년 동안 황해남도 배천군에 머물면서 탈북을 준비했다고 한다. 자전거 타이어를 튜브 삼아 썰물 때 예성강 중류로 들어가 교동도까지 약 26km를 떠내려오는 방법으로 탈북했다. 6년 가량이 지난 2020년, 유튜브 채널 북시탈tv에서 아들인 한설송이 탈북 과정을 직접 털어놓았다.
- 2015년
- 7월 4일, 동해에서 구조된 북한 어선 선원 5명 중 3명이 귀순했다. 북한으로의 귀환을 선택한 2명은 판문점을 통해 송환되었다.
- 9월, 북한 주민 1명 강화군 교동도 앞바다로 남하해 귀순했다.
- 2016년
- 7월 16일, 일본 야마구치현 나가토시에서 20대 남성이 발견되었는데, 목선을 타고 청진시에서 출항하여 15일 밤 일본 근해로 뛰어든 후 헤엄쳐 해안에 도착했다고 한다. 이후 9월 한국으로 이송되었다.#
- 8월 7일, 북한 주민 3명이 어선을 타고 평안북도에서 출발해 서해 공해상을 지나 평택 해경에 발견되어 귀순했다.
- 9월 18일, 황해남도 청단군 보위부 2과(정보과) 상위였던 이철은이 친구와 함께 8시간 동안 헤엄쳐 말도 인근에서 귀순했다. 이철은은 북한 관련 방송에 자주 출연하며 이철은NK TV라는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고 있다. 탈북 당시 이들의 움직임을 해변가에서부터 열상감시장비로 감시하고 있었던 해병대원과 서해상에서 경비정에 태울 때 탑승해있었던 해군 부사관과 만나기도 했다.
- 2017년
- 6월 3일, 함경남도 신포항을 출발했다가 동해상에서 표류 중 구조된 북한 선원 4명 중 50대 남성과 20대 아들이 귀순했다.
- 6월 18일, 북한 주민 1명이 김포북단 한강하구 지역에서 귀순했다. 이 탈북민은 3년 뒤, 다시 강화도를 통해 월북했다. 북한이탈주민 강화도 경유 월북 사건 문서 참조.
- 7월 1일, 북한 주민 5명이 소형 선박을 타고 강원도 강릉 동해상에서 귀순했다. 이들은 모두 평양 출신으로 원산에서 어선을 구해 탈북했다.
- 8월 11일, 오전 1시경 20대 남성 김향록이 개성시를 출발해 서해 교동도로 헤엄쳐와 귀순했다. 이제 만나러 갑니다 434회에 출연해 탈북 스토리를 공개했다.
- 12월 20일, 북한 주민 2명이 어선으로 동해상에서 귀순했다.
- 2019년
- 6월 15일, 삼척항 목선 귀순 사건
- 11월 2일, 2019년 탈북 선원 강제 북송 사건
- 2021년
- 2월 16일, 2021년 동해 민통선 무단침입 사건
- 2023년
- 5월 6일, 2023년 5월 북한 일가족 NLL 귀순 사건 - 김일혁, 김이혁 형제가 아내와 부모, 장모, 아이들을 데리고 일가족 총 9명이 목선을 타고 서해 NLL을 넘어 귀순했다.
- 10월 23일, 2023년 속초 목선 귀순 사건 - 조개잡이 배 선주인 20대 초반 여성이 어머니, 이모를 설득해 목선을 타고 동해 NLL을 넘어 귀순했다.
- 2024년
3.7. 전투기
▲ 수원비행장에 착륙하여 귀순한 이웅평(좌)과 이철수(우) |
- 관련 사례
- 이건순 중위 (1950년 4월 28일, IL-10) - 6.25 전쟁을 앞두고 함경남도 연포비행장을 기습적으로 탈출하여 김해비행장으로 귀순했다. 1993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 노금석 상위 (1953년 9월 21일, MiG-15) - 휴전 협정을 맺은지 두 달도 안됐지만, 남한에 남아있는 어머니와 만나기 위해 당시 소련의 최신 전투기인 MiG-15를 몰고 귀순했다. 그 보상으로 미국 정부로부터 10만 달러[39]의 보상금과 미국 시민권을 받았다. 이후 1954년 어머니와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갔고 연구원과 교수로 지내다가 2022년 91세로 사망했다.
- 이운용 상위, 이인석 소위 (1955년 6월 21일, Yak-18) - 독특하게 2인용 훈련기를 2명이서 타고 귀순한 사례로 연락 임무를 받고 황해도 해주 앞 바다에서 임무 도중 남한에 일가친척이 있어서 귀순할 생각이 있던 이운용 상위가 기수를 남쪽으로 돌리고 권총으로 이인석 소위를 같이 귀순하라고 협박했는데, 알고 보니 이인석 소위도 일가친척들이 남쪽에 있어 귀순할 생각이 있는 걸 알아내고 우선 서로 권총을 겨눈 건에 대해 사과(…)한 뒤 인천 상공을 지나 대한민국 공군의 유도를 받아 서울 여의도공항에 착륙하여 귀순했다.#1#2
- 정낙현 소위 (1960년 8월 3일, MiG-15) - 원산 상공에서 비행훈련을 하던 중 기수를 남으로 돌려 강원 대포리 비행장에 착륙, 대한민국으로 귀순했다.#
- 박순국 소좌 (1970년 12월 3일, MiG-15) - 원산기지 소속 조종사로 기지로 복귀 중 자신의 비행 실력에 자만하여 산소마스크를 하지 않다가 산소결핍증으로 방향 감각을 상실해 포항까지 내려왔다. 다시 북한으로 귀환하던 중 연료가 떨어졌는데 강원도 고성군 거진해안 모래사장을 원산의 모래사장으로 착각했고 그곳에 불시착하게 된다. 이제 만나러 갑니다 676회 방송분에 따르면, 한국 정부에서는 박순국이 자발적으로 귀순했다고 발표하였으나 당시 CIA 요원 '마이클 리'가 박순국을 취조하여 진상이 밝혀졌다. 그래도 후에 전향해서 한국 공군에 특별임관하여 중령까지 복무했다. 1976년 암으로 사망했다.
- 이웅평 대위 (1983년 2월 25일, MiG-19) - 전투기 귀순하면 가장 유명한 사례로 당시 경계경보가 울려서 국민들이 혼란에 빠진 적이 있다. 지금까지의 전투기 귀순은 MiG-15가 대부분이었는데 이웅평은 처음으로 MiG-19를 가져왔기 때문에 보로금으로 당시 은마아파트 80채를 살 수 있는 거금인 15억 6000만 원을 받았다. 이는 2023년 기준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약 61억 7300만 원이다.
- 이철수 대위 (1996년 5월 23일, MiG-19) - 이철수는 8살 아이가 공개총살을 당한 사건을 비판했는데 믿었던 친구가 이를 밀고하였고, 70명 앞에서 공개적으로 사상투쟁을 당했다. 이후 몇년간 집단으로 따돌림을 당하고 불이익과 감시를 받는 등 치욕스런 경험을 했다. 이철수는 또 다른 사상투쟁이 예정되어 있음을 알게 되자 훈련 중 전투기의 기수를 돌려 수원비행장으로 귀순했다.
4. 대한민국 입국
대부분의 북한이탈주민들은 태국 루트를 거쳐오기 때문에 태국 이민수용소를 거쳐 대한민국으로 입국하게 되는데, 이때 난생 처음 비행기를 타게 된다. 재미있는 점은 탈북민들이 북한에 있을 때 TV에서 보던 비행기는 주기장에서 계단을 통해 탑승하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공항에서 탑승교를 통해 비행기로 들어가다보니 이륙할 때까지 여기가 비행기 내부인 줄 몰랐다는 경험담이 상당히 많다. 이륙한 비행기가 새벽 시간대에 대한민국 상공에 진입하는 경우, 탈북민들은 창 밖에서 발전된 도심의 빛나는 야경을 보면서 깊은 감명을 받는다고 한다.북한이탈주민들은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하면 미리 대기하고 있던 국가정보원 직원의 인솔을 받는다. 불시에 개별 입국해도 인천국제공항에 별도로 국정원 사무실이 있는지 출입국 관리 직원에게 말하면 바로 국정원 직원이 나온다고 한다. 중국에서 바로 넘어온 '직통생'들은 대리석으로 화려하게 지어진 현대적 시설을 인천국제공항에서 처음 경험하게 된다. 탈북민들은 일반 여행객처럼 정문으로 나가지는 않고 따로 마련된 통로를 통해 대기해둔 버스에 탑승한다.
인천국제공항에서 버스로 이동하는 중 인천대교 위를 지나가는데 바다 한가운데를 수많은 차량과 함께 달리는 광경을 보며 발전된 한국의 개발상을 직접 보게 되고 한국 영화와 드라마 속의 도로에 붐비는 수백 수천 대의 차량 행렬과 밤새도록 불이 밝혀진 도심, 행인들의 가지각색의 옷차림이 촬영용으로 준비된 세트장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다고 한다. 이후 단체로 인천 적십자병원으로 이동해 건강검진을 받는다. 이때 인생 첫 건강검진을 받는 사람도 많고 피검사를 위해 채혈을 많이 하다보니 거부감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 북한에서 한국은 사람의 피를 뽑아 팔아먹는다는 교육을 받아서 더 그런 점도 있다.[40] 건강검진에서 이상이 없으면 북한이탈주민보호센터에 입소하게 되고, 이후엔 하나원으로 이동해서 남한 사회 정착을 위한 지원을 받는다.
고위급 탈북민의 경우에는 북한이탈주민보호센터로 가지 않고, 국정원이 소유한 안전가옥에서 조사와 보호를 진행한다.
자세한 내용은 북한이탈주민보호센터 문서 참고하십시오.
5. 여담
- 탈북민 관련 기사에서 간혹 상세하게 탈북 루트등을 알려주면 '기자가 아니라 스파이', 김씨왕조에게 탈북 경로를 발설하는 거냐?' 라는 빈축을 사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탈북 루트는 이미 중국과 북한이 파악하고 있다. 다만 수천km에 달하는 중국 내륙과 밀림을 언제, 어느 지점에, 몇명이 탈출할 지 전부 감시할 수는 없기 때문에 탈북이 가능한 것이고 브로커만 알고 있는 루트는 공개되지 않는다.
- 영화 《그물》의 내용과 마찬가지로 북한 해군의 장교 한 사람이 배고파서 고기를 잡으러 어선을 타고 먼 바다로 나갔다가 풍랑에 휩쓸려서 대한민국 해군에 구조된 경우가 있는데, 이 장교는 탈북할 의사가 없었기에 비무장지대를 통해 북한으로 돌아갔다. 조선인민군/열악한 현실/빈곤함 문서에도 나와있는 사례이다. 문서를 들어가 보면 알겠지만, 이쪽도 심히 비참하다.
- '탈북'은 아니지만 가끔 사망한 북한군이나 북한 주민들의 시신이 바다나 강을 통해 한국으로 떠내려 오기도 하는데, 이 경우 남한에서 혐의점을 조사한 뒤에 북한 측에 시신을 인계했다. 혐의점을 조사하는 이유는, 간혹 간첩이 침투하다가 사고로 죽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수영으로 내려오다가 익사한 간첩의 시신이 떠내려와서 발견된 사례들이 있다. 만약 북측이 시신 인수 의사를 밝히지 않는 경우에는 무연고자로 처리해 화장하여 납골당에 안치하고, 추후 유골 인계를 요구할 경우에 대비해 유품을 보관한다.#
6. 탈북을 지원하는 단체 및 조직
- 외교공관/대한민국의 재외 외교공관 목록
- 대한민국 외교부 재외공관정보
- 유엔난민기구
- 링크(LiNK, Liberty in North Korea)
- 북한인권시민연합(NKHR)
- 나우(NAUH)
- 갈렙선교회
[1] 북한에서 군복무 경력은 당원이 되기 위한 필수 자격이어서 군대를 다녀오지 않으면 간부가 될 수 없다.[2] 한국에 입국한 탈북민들은 북중국경 압록강, 두만강만 넘으면 탈북에 성공한 줄 알았다고 한다. 중국-태국을 거치는 대장정을 거쳐야 한다는 걸 북한에서 알았으면 탈북은 시도도 안 했을 것이라고 증언한다.[3] 코로나19 이전 기준 한 명을 넘기는데 한화로 천만 원이었다고 한다.[4] 그렇다고 해서 도강이 안전하지는 않다.[5] 북중국경을 여행하는 여행유튜버의 영상을 보면 항상 중국 국경경비대가 검문하는 것을 볼 수 있다.[출처] 휴먼라이츠워치[7] 단체로 움직여야 비용을 아낄 수 있기 때문이다.[8] 혹은 이미 중국에서 옥살이를 해서 입국이 불가능한 경우이다.[9] 혹은 북한에서 살기 힘들어 자기를 중국에 팔아달라고 요청하는 경우도 있다.[10] 인신매매로 팔린건데 무슨 괜찮은 인품이냐 하겠지만 전근대적 남존여비 사회에서 살아온 북한 여성의 가치관으로 볼 때 그렇다는 얘기다.[11] 대부분 동북 3성 지역에 산다.[12] 인터넷이란 개념을 모르는 탈북민들은 단순 검색만 하면 알 수 있는 정보도 방법을 몰라 몇년 간 허송세월하는 경우도 있다.[13] 중국 내 탈북민부터 한국 입국에 성공한 탈북민까지 들어와 있어 헤어진 가족들을 찾거나 브로커 정보를 공유한다고 한다.[14] 당연하지만 중국 공안도 이 단톡방을 감청한다.[15] 동북 3성 지역에서 중국 중부나 동부, 서부, 남부 등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때에 해당된다.[16] 일가족은 체포되었지만 중국, 일본, 미국, 한국 간 외교전 끝에 한국에 입국에 성공했다.[17] 대한항공 등의 한국 국적기를 탄 순간부터 대한민국 항공법이 적용되기 때문에 한국 국적기에 타기만 해도 탈북은 성공한 것이다. 설령 타 국적기를 탄다해도 현실적으로 고작 탈북자 한 명 잡겠다고 이미 이륙한 비행기를 다시 회항시켜서 체포하는건 사실상 불가능하다.[18] 한국 국적기를 탄다고 해서 100% 안심할 수는 없다. 한국 국적기에 타서 한국으로 이륙 준비를 하는데 갑자기 중국 공안 등이 항공기 내로 들어와 잡아갈 수 있으며, 한국으로 가던 도중에 항공기가 문제를 일으켜 중국이나 러시아 공항 등에 비상 착륙을 하거나 기상 문제 등으로 인해 결항될 수도 있다. 다음 한국행 항공기를 기다리는 사이에 중국 공안이나 보위원 등이 나타나 잡힐 수도 있으니 한국 공항에 무사히 도착하기 전 까지 방심은 금물이다. 또한, 탈북민을 잡으려고 한국행 한국 국적기 탑승구 앞에 중국 공안이나 러시아 경찰 등이 있는 최악의 상황이 생길 수도 있다.[19] 특히, 중국이나 러시아 등 친북 국가의 항공기를 탈 경우 위험해질 수 있는데 승무원이 항공기 티켓을 확인 하다가 탈북민인 줄 알고 탑승을 거부하고 해당 공항 경찰에 인계할 수 있으니 친북 국가의 항공기를 타는건 절대로 안된다.[20] 이 경우 1년 이상 수용소에서 기다려야 하고 미국에서 탈북민은 수많은 난민 중 하나라서 한국만큼 다양한 정착 지원도 해주지 않는다.[21] 2000년대까지만 해도 수 개월을 대기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한국 정부가 태국 정부와 직접 소통하면서 기간이 짧아졌다.[22] 이때 이제 만나러 갑니다 출연진 중 한 명인 유현주가 탈북했다. 입국일이 7월 27일이었는데, 같이 온 사람들과 함께 "탈북의 7.27~"이라고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고 한다.[23] 물론 여기서 중국은 해당하지 않는다.[24] 당연하지만 민주주의 국가인 체코에서는 탈북을 막을 이유가 없고 심사관은 탈북을 시도한다는 사실조차 몰랐을 확률이 높다.[25] 탈북 후 이정호로 개명[26] 보통 같이 일하던 타국 노동자들에게 대리구매를 부탁하거나 그들의 중고폰을 구매한다.[27] 유엔 변호사들도 이걸 알아서 전화번호를 수시로 바꾼다고 한다.[28] 최전방 북한 군인들은 야간 근무를 서면서 이 광경을 10년간 보게 된다.[29] 후술할 정하늘의 경우, AK 소총 2정과 수류탄을 합해 1,500만원을 받았다고 한다.[30] 귀순을 유도한 분대장은 30박 31일 휴가를 받았다고 한다.[31] 파출소[32] 경기도 파주시 또한 범주에 포함되어 있긴하나, 한강하구 중립수역에 속하는 파주시 루트로 현재까지 탈북이 공개된 사례는 없다. 파주시의 오두산통일전망대와 접한 임진강은 간조 시간 중에 강폭이 650~700m 간격으로 좁혀지기에 짙은 안개로 인해 가시거리가 매우 짧은 극단적인 기상상황으로는 이론상 탈북이 가능하긴 하다. 아무래도 임진강을 접한 구역인데다 짧은 거리인 만큼 경비가 엄청 삼엄하기에 파주시로 통한 탈북 사례는 위에 서술된 MDL 탈북을 제외하고는 아예 나오지 않고 있는 듯하다. 드물게는 개성, 개풍 일대 주민이 예성강을 통해 바다로 헤엄쳐 나와 탈북한 사례도 알려져 있으나 예성강 하구 쪽은 경비가 삼엄해 사례가 적은 것으로 보인다.[33] 이북 5도 행정구역 기준 황해도 벽성군 청룡면 영양리, 맹해리, 학산리, 용매리에 해당한다.[34] 출생지는 탈북 장소인 벽성군이 아닌 연백군이고 탈북 당시 살던 곳은 해주시 해청동(이북 5도 가준 황해도 해주시 해운동)으로 알려졌다.[35] 부친은 장연군 출신이고 6.25 때 두 큰아버지와 고모는 월남했지만 부친은 인민군에 징집되는 바람에 월남하지 못하고 북에 남으면서 이산가족이 되었는데, 두 큰아버지는 탈북 전에 먼저 세상을 떠났지만 고모와 사촌형제들은 살아 있었고 국정원의 도움으로 이들과 상봉할 수 있었다고 한다.[36] 상이군인[37] 단순한 물질적 가치 말고도, 국방정책이나 작전, 전술, 실태 등에 대한 증언 등 군사적 가치를 포함한다.[38] 군함·전투폭격기: 5억원 이하, 월남귀순용사특별보상법시행령 8조 3항: 전투폭력기(=전투기/공격기) = (24K)황금 20,200그램-황금 144,200그램 또는 이에 상당한 금액. 최대 금액인 144,200그램은 2022년 12월 말 기준 108억원이 넘는다.[39] 2024년 기준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118만 달러에 해당한다.[40] 북한 주민들은 헌혈이라는 개념이 희박하고 피를 잃으면 건강에 나쁘다는 인식이 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