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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 워홀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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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앤디 워홀 Andy Warhol | |
본명 | 앤드루 워홀라 주니어[1] Andrew Warhola Jr. |
출생 | 1928년 8월 6일 |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 | |
사망 | 1987년 2월 22일[2] (향년 58세) |
미국 뉴욕주 뉴욕시 맨해튼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예술가, 영화 프로듀서 |
신장 | 180cm |
학력 | 카네기 멜런 대학교 (상업미술학 / 학사) |
종교 | 가톨릭 (동방 가톨릭 | 세례명: 안드레아)[3]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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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An artist is somebody who produces things that people don't need to have.
예술가는 사람들이 가질 필요가 없는 물건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미국의 화가, 영화 프로듀서로 팝 아트의 거장. 예술가는 배고픈 직업이라는 사회의 인식과 달리 현대미술에서 소비문화, 대중문화, 광고, 세련된 소비재 등을 소재로 하는 작품을 통해 예술적으로, 대중적으로, 상업적으로 성공한 예술가이다.예술가는 사람들이 가질 필요가 없는 물건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2. 생애
펜실베이니아 주 피츠버그에서 체코슬로바키아 출신[4] 루신인 이민자 부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루신인 출신으로서 독실한 루테니아 그리스 가톨릭 신자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매주 피츠버그의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비잔틴 그리스 가톨릭 성당#에서 토요일 전야 미사와 일요일 미사[5]를 포함하여 매주 세번씩 미사를 어머니와 함께 드리면서 동방 가톨릭 이콘에 매료되었다.# 이 때의 추억은 그의 종교 신앙관 뿐만 아니라 그의 예술에도 평생에 걸쳐 영향을 주게 된다. 카네기 멜런 대학교 상업미술학과에 진학해 1949년에 졸업했다. 그리고 1952년에는 신문 광고 미술부문의 아트 디렉터스 클럽상을 수상했다. 이후 상업 디자이너로 일하다가 전업 예술가로 전직했다. 유명한 자신만의 작업실인 '팩토리'를 만들어 지인들을 불러모아 사교장처럼 만들고 각종 기행을 벌이기도 했다.1960년, 그는 미술의 세계로 발을 옮겨서 배트맨, 딕 트레이시, 슈퍼맨 등의 만화들을 모티브로 작품을 제작했지만, 로이 릭턴스타인의 팝 일러스트레이션을 접한 뒤에 여기서 손을 뗀다. 1961년, 33세의 그는 캠벨 수프의 캔이나 달러 지폐를 모티브로 해 팝 아트를 탄생시켰다.
전성기를 1962년에서 1965년으로 보는데, 이때 워홀이 집중한 세 여성 유명인사가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 마릴린 먼로, 엘리자베스 테일러다. 이 셋은 전세계적으로 선망의 대상이었지만 개인사에 극도로 불우한 순간들이 있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에게 관심을 갖고 소재로 삼게 된 최초의 계기도 테일러가 1960년 인기 최절정의 순간에 갑자기 혼수상태에 빠져 입원해있는 동안 몇 차례나 의료진으로부터 사망선고를 받았기 때문이다. 마릴린 먼로의 경우엔 아예 먼로의 죽음 자체가 창작의 동기가 돼 관련 작품을 대량생산했다. 그가 가장 관심 있었던 남성 유명인사는 말런 브랜도, 제임스 딘, 엘비스 프레슬리였다.
앤디 워홀은 실크 스크린(silk screen)을 작업에 사용했다. 워홀이 신발 산업에서 일할 때 잉크를 종이에 묻혀서 인쇄하는 블라티드 라인(blotted line)이라는 초보적인 수준의 인쇄 기술을 개발했다.[6]
각종 일과 사정에 쫓겨 사생활, 대인관계에서는 힘들어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벌인 일만 보면 겉보기에는 상당히 난잡한 바람둥이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여러모로 내성적인 성격이었던 것 같다. 어렸을 때부터 내성적인 성격이었다고. 지하실에서 어머니가 사준 필름 사진기와 인화기로 사진을 찍어서 인화하는 것이 취미였다고.
여담으로 워홀은 장미셸 바스키아의 후원자이기도 했는데 초반에는 서로 사이가 좋았으나 바스키아가 너무나 유명해져 버린 자신을 감당하지 못해 공동 전시 실패를 계기로 워홀과의 연락을 끊었었다. 그러나 1987년 워홀의 사망소식을 듣고 1년뒤 바스키아도 헤로인 중독으로 워홀의 뒤를 따랐다.
2.1. 저격 사건
여배우 앤디 워홀을 쏘다
1968년 6월 3일, 그는 전남성 말살단(S.C.U.M. /Society for Cutting Up Men) 소속의 여성주의자 밸러리 솔라나스라는 여성에게 권총으로 피격을 받는다. 이 솔라나스란 인물은 망상에 사로잡혀 지로디아스와 워홀이 자신을 몰아내려 결탁한다고 생각하고 그를 저격했다. 이 총격으로 인해 워홀은 흉부를 열고 심장 마사지를 해야 할 정도의 중상을 입었고, 평생 의료용 보호대를 차고 살아야하는 장애를 겪게 되었다. 이는 이후 그의 삶과 작품 활동에 큰 그늘을 드리우게 된다.수술 직후 앤디 워홀의 모습을 당시 앨리스 닐이 작품으로 남겼다.
워홀을 쏜 뒤로 정신이상자로서 3년 동안 교도소에서 지낸 그녀는 1971년 석방 이후에도 워홀을 죽인다고 말하여 정신병원에 갇혔다. 이렇게 여러 번 입원과 퇴원을 되풀이하던 끝에 사회로부터 무시당했다. 페미니스트 예술가 울트라 바이올렛은 늘그막 그녀를 만났는데 집도 없이 자서전과 여러 책을 낸 수익금으로 여전히 여러 호텔을 오고가며 어렵게 살고 있었다고 한다. 1987년 워홀이 죽고나서 그녀와 만난 바이올렛의 회고에 의하면 솔라니스는 여전히 워홀을 죽여야 한다는 말을 하는 통에 바이올렛이 워홀은 이미 병으로 죽었다는 말을 하자 못 믿어했다. 바이올렛도 솔라니스에 대하여 망상증이 심하여 남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그녀를 평가했다. 결국 1988년 한 호텔에서 돌보는 이 없이 갑자기 폐렴으로 죽는다. 죽기 얼마 전까지도 그녀는 여전히 워홀을 어찌 죽일까 소리만 했다고 한다.
이후 밸러리 솔라나스를 남성우월주의의 희생자이자, 이에 저항한 영웅으로 그리는 작품들이 다수 발간되었다. 이 중 일부는 솔라나스 본인이 쓴 것이다. 대표적으로 영화 '나는 앤디 워홀을 쏘았다'[7]가 있다.
2.2. 사망
1987년 2월 21일, 뉴욕의 코넬 의료센터에서 담낭에 염증이 생겨 수술을 받은 다음 날 상태 악화로 58세라는 나이에 심장마비로 눈을 감았다. 수술을 받은지 얼마 안 되어 간호사와 농담을 하거나 동료와 전화 통화를 하는 등, 금방 호전되는가 싶다가 갑작스레 사망하였다. 그의 장례식은 그의 가족 교회였던 St. John Chrysotom Byzantine Catholic Church가 아닌 앤디 워홀이 선종할 무렵 그의 형이 참여하고 있던 Holy Ghost Byzantine Catholic Church#에서 행해졌다.사망 이후 워홀의 침실이 공개된 적이 있는데, 그의 기행과 명성에 걸맞지 않게 검소했다고 한다.
본래 그는 예술은 대중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생각으로 작품을 대량 생산해서 저렴하게 팔았다. 허나 정작 그가 죽고 나서 그의 작품이 세계에서 제일 비싼 예술품이 되었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2.3. 영화, 음악
그가 제작에 참여한 영화도 있는데, 하나같이 실험적이어서 대중적이지 않다. 먹는 장면, 자는 장면[8], 펠라치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9]의 모습 등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한 장면을 '수 십 시간 동안' 찍고 그대로 틀기도 했다고.[10] 후대의 평론가들은 이를 두고 편집에 의해 흥미로운 부분만 발췌되는 영화나 방송의 실태에 반대한 것이라는 의견이 있다. 참고로 이 영상은 맥컬리 컬킨이 패러디했다.#**** 이라는 제목(또다른 제목은 별 네개(Four Stars), 24시간 영화)의 영화를 1967년에 만들었는데 총 러닝타임은 18시간 20분.
포르노그라피 산업과도 관계가 깊다. 그가 1969년 제작한 블루 무비(Fuck)는 미국 '포르노 황금시대'[11]의 출발점으로 평가받는다. 이는 극장 개봉을 염두에 둔 영화에서 노골적으로 성행위를 묘사한 최초의 사례 중 하나이며, 포르노가 진지한 비평의 대상으로 다루어지도록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영상은 인터넷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으나, 소재가 소재인만큼 공적인 장소에서 함부로 열람하진 말 것을 권한다.
1974년에 앤디 워홀의 프랑켄슈타인(원제는 Flesh For Frankenstein)을 제작했는데 3D로 제작됐다. 토니노 게라[12] 등이 각본을 썼고, 카를로 폰티 등이 제작을 맡기도 했다.
BAD라는 제목의 범죄물 영화를 1977년에 제작 총지휘를 맡기도 했는데, 한 여자가 전화를 받는데 귀찮게 했다고 아기를 고층빌딩에서 던지는[13] 충격적인 장면이 나오는 괴작 아닌 괴작이다.
1974년 <Blood For Dracula>가 '앤디 워홀의 드라큘라'로 개봉되었다. 디자인이나 미술쪽으로 참가했다고. 처녀의 피만 먹고사는 드라큘라가 어느 한량과 정력 대결을 벌인다는 내용이다. 황당하게도 비토리오 데 시카가 배우로 나온다.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앤소니 버제스 원작의 문제 소설 시계태엽 오렌지를 스탠리 큐브릭보다 먼저 영화화했다. 제목은 비닐.
1982년 영화 투씨에서 본인 역으로 카메오 출연한 적도 있다.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명작이자 음악사의 명반 중 하나로 일컬어지는 The Velvet Underground & Nico의 프로듀서이기도 하며 해당 앨범의 특이한 자켓을 디자인하기도 했다.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리더였던 루 리드는 워홀을 매우 높게 평가했고,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다른 멤버인 존 케일과 1990년 재결합하여 앤디 워홀 헌정 앨범인 Songs for Drella를 내기도 했다.
영화 팩토리 걸 (Factory Girl, 2006) 에서 배우 가이 피어스가 앤디 워홀의 역을 맡았다.
배우 자레드 레토가 앤디 워홀 역으로 그의 전기 영화에 출연한다고 한다.
3. 평가
점 하나만 찍어도 예술로 인정받는 상당히 매니악한 현대미술을 비꼬기 위해 일부 사람들이 '앤디 워홀이 하면 천재라는거냐'라며 비꼬곤 하는데, 선구자라는 점에서 천재 맞다. 특히 워홀의 작품은 이렇게 해석해도 맞는 것 같고, 저렇게 해석해도 맞는 것 같은 면이 있어서 굉장히 다양한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현대미술에서는 이렇게 작품 하나가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이를 해석해낼 수 있는 걸 더 가치있는 것으로 치기 때문에 워홀이 인기가 있는 것이다.3.1. 의외의 진지함
일반인들은 팝아트를 그냥 당대 사회에서 유행하는 것들을 추려다 작품으로 만들면 되는 것 정도로 취급하지만, 의외로 워홀의 팝아트는 더 심층적인 의미가 있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실제로 워홀이 한 작품 중에는 <13명의 수배자들(thirteen most wanted men)>같이 당대의 흉악범죄자들을 벽화로 만들거나, 언론에 보도된 인종범죄 사진을 <마릴린 먼로>에서 그랬던 것처럼 여러번 병치해서 프린트 하기도 했다. 이런걸 보면 단순히 가벼운 흥미거리로 당대 사회 유행을 취급한 건 아닌 모양이다. 일부 평론가들은 비슷한 프린트들을 반복하는 워홀의 수법이 기술발전으로 이미지가 대량 복제되면서 정작 개별 사건이나 인물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게 된 현대사회를 풍자한 것이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특히 독일에서는 의외로 이렇게 워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런데 확실하진 않다. 워홀 자체가 자기 작품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말하지 않았기 때문. 기자가 '이 작품은 어떤 의미인가요?' 하고 물으면, 되레 역으로 기자에게 '당신은 이 작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라고 묻고, 기자가 자신은 이렇게 생각한다고 말하면, 그것도 일리가 있군요 하고 끝내는 식이라고.[14] 말투 자체도 뭔가 나른해서 정작 워홀이 정확히 뭘 의도하고 저런 짓을 한건지는 아무도 모른다. 근데 또 그 모호한 스탠스가 사람들의 논쟁과 관심을 끌어들여 예술적으로 성공한 것이기도 하다. 은근히 워홀은 그런 면에서 이미지 관리를 잘한 편이다.
4. 여담
- 요나스 메카스의 작업물 중에 앤디 워홀을 찍거나 다룬 것이 여럿 있을 정도로 서로 밀접한 교류가 있었다고 한다.
- 체코슬로바키아 출신 루신인 가정에서 태어나 매우 독실한 동방 가톨릭 교회 신자였다. 유년 시절 피츠버그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비잔틴 그리스 가톨릭 성당을 다녔으며 뉴욕에서 본격적으로 예술가 생활을 할 때에는 맨하탄의 라틴 전례의 St. Vincent Ferrer Roman Catholic Church에 참석했다. 라틴 전례의 성당에 다니면서도 성호는 반대로 긋는 등 동방 전례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최후의 만찬 등 일부 종교적인 예술 작품들도 남겼다.
- 반문화적 이미지와는 달리 거의 매일 성당에 갔고 조카가 신학교에 진학하자 매우 기뻐했다. 미사에 거의 매일 참석했지만 성체를 모시거나 고해성사는 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불명이다. 하지만 출처에도 나와있듯이 본인의 동성애적 기질 때문에 스스로 성사에 참여하지 안(못) 했을 가능성이 높다.
- 신앙 생활의 연장선에서 매년 가톨릭 교회에서 진행하는 노숙자 home shelter 자원 봉사활동을 했다.
- 저장강박증이 있었다고 한다.
- 실제로 남긴 다른 명언들은 이러하다
"돈벌이는 예술이고, 노동도 예술이며, 돈 되는 비즈니스는 그 중 최고의 예술이다."
"영감을 얻으려고 열댓명의 사람을 만나러 다녔다. 마지막에 만난 여성이 내게 물었다."당신이 가장 사랑하는게 뭔가요?" 그때부터 나는 돈을 그리기 시작했다."
- 워터게이트 사건의 G. 고든 리디(George Gordon Battle Liddy) 등 유명인사들에게 파이를 투척해 파이맨(The Pie Man)이란 별명으로 유명한 애론 케이(Aron Kay)에게 당한 적이 있다.
- WWF에 나온 적이 있다. 백스테이지에서 캡틴 루 알바노와 신디 로퍼가 언쟁하다가 민 진 오클랜드가 갑자기 왼쪽 끝에 어색하게 서 있는 앤디 워홀을 인터뷰했다. 앤디 워홀은 프로레슬링 열혈 팬이었다.
- 앤디 워홀이 크레딧을 받은 작품들 목록 IMDb 기준
4.1. 유명한 가짜 명언
"일단 유명해져라. 그러면 당신이 똥을 싸더라도 사람들은 박수를 칠 것이다."
- 이 문장은 앤디 워홀이 했던 말로 매우 널리 알려져 있는데, 앤디 워홀은 이 말을 한 적이 없다. 사실 이런 가짜 명언은 인터넷상에서 매우 흔한 편인데, 앤디 워홀이 저런 말을 한 것으로 유명해진 것은 앤디 워홀이 현대미술 하면 떠오르는 거장이라는 이미지가 "점 하나 찍고 입으로 돈을 번다"는 등의 현대미술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결부되어 와전된 이야기로 보인다.
이 가짜 명언에 대한 기출변형으로 "일단 똥을 싸라. 그러면 당신은 유명해져서 사람들이 박수를 칠 것이다."라는 더욱 그럴듯한(...) 말도 있다. 그런데 실제로 똥을 싸고 박수를 받은 유명한 예술가가 존재한다! 그게 바로 예술가의 똥을 만든 피에로 만초니다. 이 문장과 가장 유사한 (워홀 본인이 아니라 그를 찍은 사진사가) 실제로 했던 명언은 다음과 같다."미래에는 누구든지 15분 정도는 유명해질 수 있을 것이다." (In the future, everyone will be world-famous for 15 minutes.)
- 워낙 널리 알려져 있는 친숙한 문장이고, 똥이라는 자극적인 단어가 들어가 있어 개그 소재로도 오래도록 생명력을 유지하는 문장이다. 심지어는 우스갯소리로 구절 단어 순서를 바꾼 문장도 널리 알려져 있다.
일단 똥을 싸라, 그러면 유명해질 것이다 라던지
5. 관련 문서
[1] 슬로바키아계 미국인이었던 아버지의 이름이 안드레이 바르홀라(Andrej Varchola)였으나, 미국으로 이민 오면서 영어식인 Andrew Warhola로 바꾸었다. # #[2] 1996년작 '나는 앤디 워홀을 쏘았다'에서는 사고 후유증으로 1978년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있지만 틀린 말이다.[3] 부모의 영향으로 비잔틴 예법의 동방 가톨릭의 일원인 루테니아 그리스 가톨릭 교회 신자였으며 뉴욕으로 이사 후 라틴 전례의 가톨릭 교회를 다녔다.[4] 당시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5] 엄밀하게는 성찬예배이다. 대다수의 동방 가톨릭 교회에서는 미사라는 표현보다는 성찬 예배(divine liturgy)라는 표현을 선호한다.[6] 한국 웹에서는 "브로테드 라인"이라는 국적 불명의 용어가 돌아다니는데 일본 웹에서 blotted line을 가타카나로 ブロッテド・ライン(Burottedo rain)으로 표기했고, 원 표기를 참고하지 않은 채 이를 우리식 영어 표기법으로 지레짐작한 표기가 한국어 위키백과와 나무위키에 그대로 실리게 되었다. 이것이 블로그와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에 퍼진 것. 현재는 위키백과와 나무위키에서 해당 내용을 삭제하였다.[7] 참고로 이 영화의 음악 담당은 앤디 워홀이 후원한 록 밴드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멤버 존 케일이다.[8] 원래 브리지트 바르도가 출연하기를 원했는데, 대신 그의 애인 존 조르노를 찍었다. 그것도 나체로. 1964년 1월 17일에 첫 상영을 했는데 9명이 관람하고 2명은 1시간 정도가 됐을 때 나갔다. 이 영화를 상영했을 당시에는 무성영화라서 계속 록 음악을 틀었다고 한다. 이 영화에 평론가들은 관심을 나타냈고, 처음에는 500명에 달하던 관객 수가 상영 도중 한 사람이 일어나서 무대로 올라가 큰 소리로 "일어나라!"고 소리치며 사람들을 선동하자 약 200명 가랑의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극장 측에 돈을 물러달라고 소동을 피우기도 했다. 그러나 인내를 가지고 영화를 끝까지 관람한 엉덩이가 무거운 사람들도 약 50명 정도 있었다.[9] 상영시간이 총 8시간 5분 짜리다. 대략 새벽 3시에 찍었다고 한다.[10] 여담으로 유명 고전게임 리뷰어 AVGN이 사막 버스 리뷰를 할때 이 영화를 언급한적이 있다. '앤디 워홀이 죽음에서 살아나기라도 한겁니까?!' 라는 대사는 덤. 저 사막 버스는 8시간 동안 운전만 해야 하는 게임이다.[11] 이 '포르노 황금시대'의 부상과 몰락을 그린 영화가 바로 폴 토마스 앤더슨의 부기 나이트이다. 영화의 주인공 '더크 디글러'의 모델이 된 실존인물 존 C. 홈스(쟈니 와드)는 실제로 이 시기 포르노 배우로 활동했던 인물이다.[12]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페데리코 펠리니, 안드레이 타르콥스키 감독의 작품 등등 다수의 각본을 썼다. 2012년 3월 21일에 항년 92세로 타계했다.[13] 그것도 잠깐이지만 피와 시체를 보여준다.[14] 포스트모더니즘 작가들의 흔한 스탠스이기도 하다. 작품과 작가를 분리해내는 과정에서 작품자체가 자신을 정의하도록 하는 것이 포스트 모더니즘의 가치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