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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 120,000명 | 불명 | ||||
피해 | 사망: 30,000명 부상: 10,000명 | 사망: 1,000,000명 포로: 1,000,000명 | ||||
결과 | 로마 공화정의 갈리아 정복 카이사르의 정치적인 입지 상승 |
1. 개요2. 전조
2.1. 카이사르의 갈리아 총독 임명
3. 갈리아 전쟁 1년째4. 갈리아 전쟁 2년째5. 갈리아 전쟁 3년째6. 갈리아 전쟁 4년째7. 갈리아 전쟁 5년째8. 갈리아 전쟁 6년째9. 갈리아 전쟁 7년째9.1. 전 갈리아인들의 반로마 봉기 시작9.2. 베르킨게토릭스의 등장9.3. 카이사르의 귀환9.4. 카이사르의 진격9.5. 초토화 작전9.6. 카이사르의 위기 탈출: 아바리쿰 공방전9.7. 카이사르의 위기: 게르고비아 공방전9.8. 하이두이족의 반란9.9. 베르킨게토릭스의 큰 실수: 빈게네 전투9.10. 베르킨케토릭스의 몰락: 알레시아 전투9.11. 그 후
10. 갈리아 전쟁 8년째10.1. 갈리아인들의 불온한 움직임: 비투리게스족과 카르누테스족 진압10.2. 벨로바키족과의 대결10.3. 갈리아 전역에서의 싸움10.4. 갈리아 평정10.5. 원로원과의 긴장 고조
11. 주요 전투[clearfix]
카이사르가 얼마나 훌륭한 장군이었는지는 여러 가지 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먼저 그가 싸운 곳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험악한 곳이었고, 그가 정복한 지역도 매우 광대했다. 또한 그는 잔인하고 야만스러운 민족들을 너그럽게 다스렸고 포로들에게도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부하들에게도 누구보다 따뜻한 장군이었다. 그는 갈리아 지방에서 크고 작은 전쟁들을 치르면서 10년 동안 무려 800개의 도시를 점령했으며 300개의 나라를 무찔렀다. 그래서 300만 명의 적과 싸워 100만 명을 죽이고 100만 명을 포로로 잡았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카이사르> 中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카이사르> 中
1. 개요
기원전 58년부터 51년까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이끄는 로마 공화국의 원정군과 갈리아 부족 연합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이다.
이 전쟁에서 카이사르가 승리함으로써, 로마는 에 대한 치욕을 설욕함과 동시에 켈트족이 로마를 대규모로 침략할 위험성이 근절되었다.
카이사르는 자신이 수행한 전쟁을 《갈리아 전기》라는 이름의 책으로 기록해 남겨놓았다.
2. 전조
당시 갈리아는 내부에서 수많은 부족들이 서로 패권을 다투던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특히 하이두이족(또는 아이두이족)과 세콰니족이 가장 강력했는데 세콰니족은 당시 명성이 높았던 게르만족과 연합했다. 이에 호응한 게르만의 일파인 수에비족의 지도자 아리오비스투스는 라인강을 건너와 수차례에 걸쳐 갈리아 연합군을 격파했고, 그 결과 세콰니족은 갈리아의 패권을 주장하게 되었다.(마게토브리가 전투) 그래서 아리오비스투스는 세콰니족의 공물에 만족하지 않고, 그들의 영토에 눌러앉아 3분의 1에 해당하는 영토를 요구했다. 그러자 세콰니족조차 게르만족을 끌어들인걸 깊이 후회하게 되었다.한편, 끊임없이 게르만족의 침략에 시달리던 헬베티족[3]이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들의 영토는 알프스산맥과 론 강, 그리고 로마 속주와 레만누스 호수로 둘러싸였기 때문에 영토를 확장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이때 헬베티족의 가장 강력한 귀족이었던 오르게토릭스는 갈리아 내로 이주해 새로 정착하자는 제안을 했고 헬베티인들의 호응을 받았다.
오르게토릭스는 헬베티족의 지휘를 위임받고 외교를 통해 주변 부족의 협조를 얻어내고자 했다. 놀랍게도 갈리아를 양분해서 서로 대립했던 하이두이족과 세콰니족 양쪽 모두에게 접근한 오르게토릭스는 하이두이족에서 가장 인망이 높았던 둠노릭스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 인척관계를 맺었고, 세콰니족의 유명한 실력자의 아들인 카스티쿠스에게 접근하여 협조의 약속을 받아냈다.
이들의 야합은 세 명 모두 매우 유명한 정치가임과 동시에 기득권에 도전하는 입장이라는 점에서 수도 로마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제1차 삼두정치를 연상시키는 야합이었다. 헬베티족의 오르게토릭스는 최강의 귀족이었으나 권력을 손에 넣지는 못했고, 하이두이족의 둠노릭스는 자신의 형이 가지고 있는 부족장의 권위에 도전하는 입장이었으며, 세콰니족의 카스티쿠스는 자신의 아버지가 족장에서 물러난 뒤 호시탐탐 부족장의 지위를 노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들은 야합함으로써 각각 서로의 도움으로 부족장의 지위에 오른 뒤 갈리아 전역을 3분하여 통치하자는 약속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야합은 곧바로 들통이 났고, 헬베티족의 오르게토릭스가 가장 먼저 실각하게 되었다. 오르게토릭스는 그의 돈을 사용하여 재판의 배심원들을 자기 사람으로 채워 죄를 면했는데[4] 이에 격분한 헬베티족이 무력을 사용해 오르게토릭스를 응징하기 위해 병력을 편성하자 오르게토릭스는 자결했다.
오르게토릭스가 자결했음에도 불구하고, 헬베티인들은 그가 처음 제안한 갈리아 침략에 대해서는 호평했으므로 갈리아로의 이주 계획을 계속 추진했다. 이들이 침략 준비를 마쳤을 땐 12개 도시와 400개의 마을이 모두 불태워졌고, 300,000명이 넘는 대규모의 전력을 갖춘 헬베티족은 3개월치 식량을 휴대하며 갈리아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2.1. 카이사르의 갈리아 총독 임명
갈리아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 때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갈리아 총독직을 열망하고 있었다. 그가 왜 하필 갈리아 총독을 원했던 것인가는 그가 저 위에 나온 갈리아의 정세를 사전에 파악하고 있었고, 따라서 전쟁의 가능성을 내다보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기》에는 그가 갈리아로 부임하자마자 우연히 저 헬베티족의 침략을 맞닥뜨린 것처럼 서술하고 있으나 그가 갈리아 총독으로 부임하는 과정과 헬베티족에 맞서는 전력을 편성하는 과정을 보면 그가 헬베티족의 움직임을 사전에 알았고, 집정관 시절에 준비에 들어갔었던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먼저 카이사르가 임명된 갈리아 총독은 단순한 총독직이 아니었다. 당시 로마의 통치하에 있는 갈리아 속주는 갈리아 키살피나와 갈리아 트란살피나로 나뉘어 통치되고 있었다. 따라서 속주가 2개이므로 2명의 총독이 가서 통치하는 것이 옳았으나 카이사르는 이 2개의 속주에다가 일리리아 속주[5]까지 3개의 속주를 한꺼번에 다스리는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또한 그는 5년이라는 상당히 긴 임기를 부여받았고 4개 군단의 지휘권인 임페리움, 그리고 부사령관 선출권과 식민지 건설의 권한까지 부여받았다. 이러한 기존의 총독직을 능가하는 권한을 카이사르가 가진 것은 그가 다른 총독들과는 전혀 다른, 즉 갈리아 전쟁을 치르기 위한 역할을 애초부터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라고 보인다. 뿐만 아니라 그는 헬베티족과 만나면서 보름 사이에 속주에서 1개 군단을 뽑아냈고, 그들과 협상하면서 추가로 2개 군단을 뽑아 보충했다고 《갈리아 전기》에 기록해 두었는데 3개 군단이 새로 모집되고 합류하는 과정이 단 보름 만에 이루어지는 것은 지나치게 빠른 속도였다. 따라서 이는 카이사르가 이미 병력을 준비해두었고, 전투가 벌어지자 이들을 소집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본다면 카이사르는 갈리아 총독으로 부임되기 이전부터 갈리아에서 전쟁을 벌일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카이사르는 갈리아 총독직을 원하고 있었고, 삼두정치의 일원인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의 협조를 얻어낸 카이사르는 원로원이 정한 기존의 산림과 가도의 직책을 갈리아 총독직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이것이 민회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통과되자 집정관 임기가 만료된 카이사르는 기원전 58년에 지체없이 갈리아 속주로 출발했다.
당시 헬베티족은 자신의 영토를 모두 불사르고, 갈리아를 향해 침략하는 중이었고, 따라서 카이사르는 속주에 주둔 중인 1개 군단과 함께 론 강을 사이에 두고, 헬베티족과 조우했다.
3. 갈리아 전쟁 1년째
3.1. 헬베티족과의 대치
카이사르는 론 강에 도착하자마자 다리를 파괴하여 헬베티족의 도강을 방해했다. 헬베티족은 갈리아 침공이 목적이었고, 당시 최강대국이었던 로마를 적으로 돌릴 의사가 없었다. 카이사르 휘하의 병력은 적었으나 헬베티족은 로마군을 공격하지 않고 카이사르에게 사절을 보내 로마 속주의 통과를 요청했다. 하지만 적의 무리를 자국의 영토안에 들이는 것은 아무리 헬베티족이 우호적으로 나온다 해도 들어줄 수 없는 요청이었다.[6] 카이사르는 시간을 벌기 위해 보름 동안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그리고 그동안 강변을 따라 19마일에 걸친 16피트의 보루와 참호를 파고 성채를 곳곳에 둔 뒤 수비대를 배치하는 등의 진지 공사를 단행했다. 이러는 동안 카이사르가 속주에서 추가로 뽑은 보조병이 합류했고 이로써 카이사르는 헬베티족과 맞설 만한 전력을 갖추게 되었다.헬베티족이 약속한 시간에 찾아왔지만 카이사르는 명백히 거부했고 로마 속주를 침입한다면 전쟁일 뿐이라며 엄포를 놓았다.
그 뒤 헬베티족은 뗏목으로 강을 건너는 움직임을 몇 번 보이다가 로마군의 방비가 철저함을 보고 도강을 포기했다.
3.2. 헬베티족의 이동
로마 속주를 통해 갈리아 내부로 들어가는 것을 포기한 헬베티족은 과거 그들에게 호의적이었던 하이두이족의 둠노릭스에게 연락했다. 둠노릭스의 중재로 세콰니족의 영토를 통과하는 것을 허락받은 헬베티족은 세콰니족의 영토를 통과하기 시작했는데 이들은 곧 폭도로 변해 주변 영지를 마구 약탈하기 시작했다. 세콰니족의 영토를 유린한 헬베티족은 그대로 세콰니족의 영토를 신속히 가로질러 하이두이족의 영토로 진입하려고 했다.첩보를 통해 전황을 신속히 보고받고 있었던 카이사르는 이 사태에 대해 대단히 우려했다. 그는 헬베티족이 하이두이족을 침공한 뒤 그대로 갈리아 중부로 진입해 산토니족의 영토를 침략해 점령한다면 로마 속주가 그대로 헬베티족의 위협에 노출될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사전에 저지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이 직접 이탈리아로 돌아가 2개 군단을 새로 편성하고 숙영 중인 다른 갈리아 속주의 3개 군단을 합류시켜 5개 군단을 이끌고 오기로 했다. 그는 이탈리아로 가서 즉시 5개 군단과 함께 전장으로 돌아왔다.[7] 5개 군단이 기존의 보조병을 비롯한 1개 군단과 합류하자 6개 군단을 거느리게 된 카이사르는 이 병력을 이끌고 갈리아에 개입할 시기만을 가늠하고 있었다.
3.3. 헬베티족과 로마군의 싸움
헬베티족은 드디어 하이두이족의 영토로 진입했다. 세콰니족의 영토가 약탈당하는 것을 지켜본 하이두이족은 근처에 많은 수의 군단병을 거느리고 대기하고 있었던 카이사르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이는 카이사르가 기다리던 소식이었고, 즉시 행동을 결의한 카이사르는 군을 이끌고 신속하게 기동했다.당시 헬베티족은 아라르 강을 건너는 중이었다.[8] 이를 포착한 카이사르는 밤이 되길 기다렸다가 새벽 1시경 3개 군단을 이끌고 야습하여 마저 강을 건너지 못하고 4분의 1 정도 남아있었던 헬베티족을 격파했다.(아라르 강 전투)
이로써 카이사르의 개입을 알게 된 헬베티족은 다음날 사절을 보내 카이사르에게 강화를 제의했다. 카이사르는 강화의 조건으로 하이두이족과 세콰니족에게 보상을 하고 볼모를 제공할 것을 요구했으나 이것이 굴욕적이라고 판단한 헬베티족은 카이사르의 강화 조건을 거부했다.
그 뒤 헬베티족은 다시 하이두이족의 영토를 지나갔고 카이사르군은 이를 후미에서 쫓아갔다. 카이사르는 갈리아 동맹군으로부터 기병 4,000명을 제공받았다.
그런데 이 기병이 헬베티족의 기병 500기와의 교전 중 몇개 부대가 퇴각하여 패배한 사건이 있었고, 하이두이족의 군량 보급이 자주 끊기는 일이 있게 되자 카이사르는 격분하여 부족장을 소집해 질책했는데 이때 부족장들로부터 헬베티족에게 우호적인 둠노릭스가 손을 쓴 것을 알게 되었다.
둠노릭스는 기병 지휘관으로 카이사르 휘하에 있었기 때문에 카이사르가 그를 처형하는 게 가능했지만 하이두이족의 수장이었던 디비키아쿠스가 하이두이의 친 둠노릭스 일파들에게 공격당할 것을 우려해 눈물로 호소하자 둠노릭스를 용서하기로 했다.
그 뒤 헬베티족에 대한 추격을 계속했는데 또다시 군량이 떨어지는 일이 발생하자 하이두이족의 도시로 군대의 방향을 돌렸다. 이를 로마군이 겁을 먹고 도망가는 것으로 오판한 헬베티족은 갑자기 전력을 다해 로마군에게 공격을 감행했다.
이를 본 카이사르는 기병을 모두 내보내 헬베티족의 공격을 견디는 한편 신속하게 병력을 언덕위로 배치하여 맞섰다. 로마군의 정예 4개 군단이 3열로 포진했고 신병은 언덕 꼭대기에서 짐을 지키도록 했다. 배치가 끝나자 기병은 철수했다.
헬베티족은 기병을 쫓아 돌진했고 곧 흩어진 기병의 배후에 포진한 로마군 보병과 접전을 하기 시작했다. 로마군 보병은 헬베티족에게 필룸을 던져 방패를 소모하게 한 뒤 일제히 돌진했다. 로마군의 공세에 헬베티족은 용감하게 싸웠지만 1마일 정도 뒤로 밀리게 되었고, 이를 본 헬베티족 후방의 병력 일부가 우회해서 로마군의 우익을 협공했다. 이 움직임을 본 로마군 3열은 전열에서 빠져나와 헬베티족의 기동에 응전했다.[9]
이 싸움은 정오부터 밤이 되도록 계속되었고, 헬베티족은 일부는 패주하고 일부는 저항하면서 점점 그들의 진영까지 밀리게 되었다. 하지만 마침내 진영을 빼앗기게 된 헬베티족은 군수물자를 상실하게 된다.(비브라테 전투)
이로써 카이사르에게 저항할 수가 없게 된 헬베티족의 생존자들은 다음날 사신을 보내 카이사르에게 항복했고, 카이사르는 볼모를 받은 뒤 헬베티족에게 그들의 근거지로 돌아가라고 명령했다. 카이사르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헬베티족은 360,000명 중 110,000명만 살아남았다고 했다.
3.4. 수에비족과의 전쟁
헬베티족의 전사로서의 명성은 상당히 높았고, 50년 전 로마군을 패배시키고 집정관을 전사시킬 정도로 만만찮은 모습을 보였던 바 있었다. 게다가 헬베티족이 유린한 영토는 갈리아의 패권을 다투던 세콰니족과 하이두이족의 영토들이었다. 이러한 헬베티족을 한 번의 싸움으로 크게 무찌른 카이사르와 그의 군대의 명성은 매우 높아졌다.갈리아의 족장들은 카이사르와 그의 군대로 하여금 갈리아를 침공하고 있었던 게르만족을 상대하려고 했다. 전 부족장이 몰래 카이사르와 만났고 하이두이족의 족장인 디비키아쿠스[10]는 그들을 대표하여 게르만족에게 고통받는 갈리아인들의 상황을 설명하고, 카이사르에게 이를 도와달라고 했다.
이는 카이사르에게 있어서 좋은 제안이었는데 이러한 분쟁에 개입하여 적의 세력을 내쫓고 그 지역의 새로운 패권자가 되는 것은 전형적인 로마인들의 세력 확장 방법이었으므로[11] 카이사르가 갈리아의 패권을 주장할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즉시 대응키로 하고 게르만족의 일파인 수에비족의 지도자 아리오비스투스에게 사절을 보내 더 이상 게르만족을 불러들이지 말 것, 갈리아의 볼모를 모두 돌려보낼 것, 그리고 갈리아족을 상대로 더 이상 전쟁을 시도하지 말 것이라는 세 가지를 요구했다.
이는 아리오비스투스에겐 날벼락같은 제안이었고, 따라서 그는
"승자와 강자가 패배자와 약자를 마음대로 다루는 것은 인류 역사의 오랜 법칙이고, 당신네 로마인들도 여태까지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느냐? 그래서 승자이자 강자인 나도 패배자이자 약자인 갈리아인들을 그렇게 다루겠다는데 당신들이 무슨 권리로 막겠다는 것이냐? 만약 당신들이 불만이 있다면 얼마든지 덤벼라. 14년 동안 지붕 아래에서 잠을 잔 적이 없는 게르만족의 용맹을 보여주겠다."
라면서 황당하다는 어조의 답신을 했다.[12] 그러자 카이사르는 즉시 군대를 이동하여 라인 강 근처를 향해 이동했고 아리오비스투스 역시 수에비족을 이끌고 이동했다. 그동안 로마군은 게르만족의 용맹과 커다란 체구에 대한 묘사를 전해듣고 겁에 질리기도 했다.[13] 하지만 카이사르는 동요하는 이들에게 교묘한 화법으로 그들을 단합케 한 뒤, 아리오비스투스의 수에비군에 접근해 그와 직접 만나 회담을 가졌다.아리오비스투스는 카이사르한테 그의 입장을 잘 설명했지만 도중에 카이사르 휘하의 기병에게 수에비족 기병이 돌을 던지는 일이 있자 카이사르는 이것을 핑계삼아 돌아왔다. 그 뒤 이들은 서로 대치하여 전투할 시기를 가늠했다.
카이사르는 전투를 원했지만 아리오비스투스는 달이 바뀔 때까지 기다려야한다는 점쟁이의 말을 듣고 전투를 미루었다. 그러자 카이사르는 대담하게도 수에비족의 진영에 바짝 다가가 진을 차린 뒤 아침마다 진에서 나와 수에비족의 코앞에다가 병력을 포진시키는 일을 벌였다. 5일에 걸쳐서 그 꼴을 지켜본 아리오비스투스는 마침내 군대를 내보내어 로마군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양군은 격렬한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아리오비스투스의 공격은 거셌고 양군의 거리가 가까웠으므로 로마군은 필룸을 던질 기회도 없이 바로 백병전에 돌입했다. 백병전이 벌어지자 무장의 질적 수준이 높았던 로마군의 전투력이 돋보이기 시작했다.[14]
로마군과 수에비족의 전투는 치열했는데 로마군은 수에비인들의 밀집대형에 뛰어들어 그들의 방패를 낚아챈 뒤 찌르는 방식으로 싸웠다.[15] 수에비족의 좌익은 이 공세를 견디지 못했으나 그들의 우익은 로마군의 우익을 거세게 공격했고 이를 간파한 기병대장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16]는 3열에 포진한 로마군을 쪼개 우익에 합류하도록 했다. 이로써 로마군의 우익은 형세를 회복했고 좌익이 무너진 수에비족은 전투가 더 이상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여 전원이 패주하기 시작했다. 수에비족의 수장인 아리오비스투스도 가족을 모두 버린채 라인 강에 이르러 배를 타고 강 건너로 달아났으며, 이로써 카이사르는 수에비족을 완전히 패배시켰다.(보주 전투)
3.5. 전후
카이사르는 자신의 군단을 모두 세콰니족의 영토내에 주둔시킨 뒤 부관인 라비에누스에게 맡기고 북이탈리아로 돌아갔다. 그동안 수도 로마에서는 제1차 삼두정치의 영향이 그대로 남아 삼두정파의 정치가들이 두 집정관의 직위를 꿰차고 있었으며 그 와중에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가 카틸리나의 반란 진압때 재판없이 로마 시민을 처형한 문제로 재산이 몰수된 후, 국외로 추방당하는 사건이 있었다.이때 갈리아에서는 카이사르가 게르만족을 패주시킨 이후로도 병력을 철수시키지 않은채, 그대로 갈리아족의 영토에 남겨둔 것의 의도에 대해 미심쩍어하는 세력이 있었다. 이들은 로마가 게르만족이 했던 것처럼 갈리아족의 지배자가 되고자 한다고 의심했으며[17] 친 로마파 정치가들의 입지가 강화되는 것을 아니꼽게 본 이들도 많았다. 이들은 벨가이인[18]들의 도움을 받아 로마군과 전쟁을 벌일 음모를 꾸몄고, 이러한 소식을 전해들은 카이사르는 이들과의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4. 갈리아 전쟁 2년째
갈리아 전쟁 2년째. 2년의 시간이 흘렀다.4.1. 벨가이인들의 저항 움직임
기원전 57년 카이사르는 겨울 동안 2개 군단을 추가로 편성하고, 초여름에 속주의 6개 군단에게 합류케 한 뒤 갈리아의 곡식이 익을 무렵, 이탈리아를 떠나 그들과 합류했다.[19]카이사르는 벨가이인들의 동태를 살폈고, 이들이 군대를 구성하고 있다는 정보를 확인하자 전군을 이끌고 벨가이의 영토를 항해 진군했다. 카이사르군은 15일 만에 벨가이인의 영토에 진입했고 카이사르군의 갑작스러운 침공을 받은 레미족은 카이사르에게 항복한 후 협조를 약속했다.
카이사르는 레미족에게 벨가이인들에 대한 정보를 물었고 기왕 카이사르에게 붙기로 결심한 레미족은 성의껏 상세한 정보를 알려주었다. 이들로부터 각 부족의 구성과 위치, 그리고 편성한 병력수를 알게 된 카이사르는 벨가이인들의 맹주 역할을 하는 부족이 벨로바키족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카이사르는 하이두이 족장인 디비키아쿠스를 불러냈고, 그에게 하이두이족의 병력을 이끌어 벨로바키족의 영토를 짓밟으라는 요청을 했다. 그 뒤 레미족의 볼모를 대거 얻어내어 그들이 로마군을 배신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때 벨가이인들의 연합군은 레미족이 카이사르 쪽으로 붙었다는 사실을 알고, 레미족의 영토를 향해 진격했다. 이들은 레미족의 도시를 포위 공격했고, 이에 다급해진 레미족이 카이사르에게 구원을 요청하자 그는 즉시 크레타 섬의 궁병과 발레아레스 제도의 투석병을 보내주어 도시를 지키도록 했다. 벨가이인들은 군대를 철수한 뒤 카이사르의 본진으로 접근했다. 카이사르는 우선 기병전을 통해 벨가이 연합군의 실력을 헤아린 뒤 전투를 결심했다.
4.2. 벨가이 연합군과의 전투
카이사르는 언덕을 배후에 두고 포진했다. 로마군은 상대적으로 소수였고, 따라서 그는 진영 뒤 양 측면에 참호를 파두었다. 벨가이인들과 로마군 사이에는 작은 늪지가 있었는데 양군은 이것을 건너 공격을 감행하기 꺼렸으므로 서로 지켜보기만 했고, 늪이 없는 곳에서 기병끼리의 교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기병전에서는 로마군이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벨가이인들이 섣불리 늪을 건너지 못하리라 판단한 카이사르는 자신의 병력을 진영으로 물렸다.이런 상황에서 벨가이인들은 병력을 쪼개 우회하여 로마군 진영의 배후로 돌아갔다. 이들은 후방을 치든가, 레미족의 영토를 유린하든가 둘 중 하나의 의도를 갖고 있었는데 이것을 지켜본 카이사르는 이들이 강을 건널 때 즉시 기동력이 뛰어난 기병과 경보병을 보내 급습했다. 이 싸움에서 벨가이인들은 큰 피해를 입었다.
벨가이인들은 그날 밤 회의를 소집하여 방어가 완벽한 위치에 포진한 로마군을 공격하는 것이 여의치 않은 데다가 군량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으므로 자신의 영토로 이동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하이두이족이 앞서 카이사르의 요청대로 벨로바키족의 영토를 공격하려고 했으므로 이들은 이곳에 오래 머물면서 싸울 의지가 없어졌다. 따라서 벨가이인들은 진을 거두고 퇴각하기로 했으며, 밤 12시에 이를 감행했다.
그런데 이들의 퇴각은 모든 부족원들이 동시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상당히 혼란스럽게 이루어졌다. 카이사르는 이들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으므로 잠시 지켜보다가 벨가이인들이 진을 거두고 출발한 지 어느 정도 지난 동틀 무렵에 기병을 보내 배후를 급습했다. 기병이 출발하자 곧이어 티투스 라비에누스가 이끄는 3개 군단이 출발했다.
기병이 후방을 치자 벨가이인들은 뒤돌아 서서 응전했다. 하지만 전방 부대는 로마군이 급습했다는 소식에 공포에 휩싸여 달아나기 시작했고, 그러자 로마군에 응전하던 후방 부대 역시 전의를 상실했다. 카이사르의 기병과 뒤이어 합류한 보병은 이들을 해가 질 때까지 추격했고, 달아나는 벨가이인들을 살해했다.(악소나 전투)
4.3. 네르비족과의 싸움
승리의 여세를 몰아 주변 부족의 영토를 침공한 카이사르는 근방에 있는 수에시오네스족의 항복을 받은 뒤 벨가이인의 맹주인 벨로바키족의 영토로 진입했다. 전황이 안 좋게 되자 벨로바키족의 내부에서 전쟁을 주동했던 정치가들은 브리타니아 섬으로 망명했고, 벨로바키족은 카이사르에게 항복했다.벨가이인들의 맹주였던 벨로바키족이 항복했지만 이것에 강력하게 반발한 네르비족은 그들의 부족만으로 로마군에게 항전하고자 하는 의지를 품었다. 이들은 과거의 스파르타처럼 포도주 및 사치품을 모두 수입 금지한 채 성인 남자들은 금욕적인 생활을 유지하며 오로지 군사 훈련으로만 세월을 보내는 이들이었다. 이들은 이렇게 단련한 군대를 바탕으로 10개 부족을 지배하에 두고 있었다.[20]
카이사르는 네르비족을 격파함으로써 로마의 패권에 불만을 품은 세력을 일소할 생각으로 군단을 이끌고 네르비족의 영토를 향해 진군했다. 네르비족은 첩보와 지형 면의 상대적인 우위를 활용하여 행군 중인 카이사르의 군대를 급습할 작전을 세웠다.
이들이 매복하기로 한 장소는 언덕 밑의 약간 트인 평지 끝자락에 위치한 숲 속이었다. 로마군이 이 평지에 진입하여 모습을 드러내자 네르비족은 숲에서 뛰쳐나와 로마군을 향해 돌진했다. 이를 사비스 전투라고 부른다.
이 싸움에서 네르비족을 격파한 카이사르는 그들의 항복을 받아내고, 네르비족을 지원했던 아투아투키족을 공격하기 위해 행군했다. 그들은 본디 농성하기로 했으나 로마군이 거대한 공성병기를 만들어 움직이자 겁에 질려 로마군에게 항복했고, 카이사르는 이것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날 밤 아투아투키족은 인근에서 야영 중인 로마군을 야습했다. 하지만 로마군의 반격으로 4,000명의 희생자를 낸 끝에 성내로 퇴각했다. 아투아투키족은 다음날 아침 성을 함락한 로마군에 의해 주민 53,000명이 노예로 팔려버렸다. 이는 신의를 저버린 자들에 대한 징벌적인 성격을 띄고 있었다.(아투아투키 공방전)
4.4. 그 후
이로써 벨가이인들을 복속시키는 데 성공했다고 판단한 카이사르는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21]를 보내 갈리아의 대서양 연안 부족들을 항복시키도록 했는데, 벨가이인들이 패퇴했다는 소식을 들은 갈리아족은 순순히 로마에 항복했다.이로써 카이사르는 갈리아가 완전히 평정되었다고 생각했고 이는 원로원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원로원은 무려 15일 동안의 감사제를 지냈는데 이는 폼페이우스가 동방 원정을 마무리 짓고 개최한 12일 동안의 감사제를 능가하는 규모였다.
당시 로마에서는 호민관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의 폭주가 심해졌는데 그는 로마 시민에 대한 곡물 무상 배급을 실시했고, 폭력단을 조직해 원로원과 유력 정치가를 협박했으며 정치적으로 반대하는 집회에 돌격하여 훼방을 놓는 등[22] 난동을 벌였다. 이에 대응하여 원로원 측도 호민관 밀로를 움직여 같은 폭력단을 조직해 대응하게 했다. 그 결과 로마 시내에선 양대 폭력단의 패싸움이 비일비재했고 클로디우스와 밀로는 서로 고소를 남발했다.
원로원 의원들 중 옵티마테스파는 클로디우스의 전횡으로 그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자 슬쩍 클로디우스에 의해 추방당한 키케로를 불러들이려고 했다. 폼페이우스는 키케로의 복귀를 지지함으로써 정계를 주도하는 모습을 보였고 키케로의 귀국은 쉽게 가결되었다.
그 뒤 원로원 의원들은 키케로 문제에 협조한 폼페이우스에게 감사의 뜻과 동시에 그에게 곡물 배급을 담당하는 임무를 수여했는데 이는 지중해의 해군을 거느리는 권한을 갖게 한 것이었다. 또한 폼페이우스에게 접근해 카이사르와 떼어놓으려는 속셈이었다.
5. 갈리아 전쟁 3년째
5.1. 알프스 부족과의 전쟁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벨가이인들을 평정한 뒤 북이탈리아로 귀국하면서 군단장 갈바에게 12군단을 주어 알프스 산맥과 프랑스 국경 사이의 부족을 평정할 것을 명령했다. 이는 카이사르가 알프스 산맥의 통행로를 욕심낸 것으로, 기존의 상인들은 이 지역을 지날 때마다 높은 통행료를 지불해야 했다. 카이사르는 이곳을 자신의 지배하에 넣어 로마인들에게 안전한 통행을 보장함과 동시에 통행세를 새로운 수입원으로 삼고자 한 것이었다.[23]갈바는 로마군의 명성을 바탕으로 별다른 저항없이 이 지역 부족들을 복종시켰다. 하지만 로마군이 겨울 숙영에 들어가자 갈리아인들은 행동을 개시하여 30,000명에 달하는 군대를 조직해 로마군을 공격했다. 갈바에겐 1개 군단만이 있었으므로 갈리아의 대군을 상대로 고전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6시간에 걸쳐 버티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로마군의 숙영지가 함락 직전에 이르자 갈바는 군단병 전원과 함께 숙영지에서 나와 적진에 돌격을 감행했다. 로마군의 돌격은 성공을 거둬 갈리아족은 막대한 피해를 입고 후퇴했다. 간신히 갈리아족을 물리친 갈바는 즉시 숙영지를 불태우고 속주로 철수했다. 따라서 카이사르의 의도대로 알프스 지역을 로마의 통치하에 넣는 시도는 일단 좌절되었다.(옥토두루스 전투)
5.2. 대양 연안 부족과의 전쟁
그해 봄, 여름 내내 갈리아는 조용했고 전례없던 대규모의 감사제를 열었던 원로원과 시민의(Senatus Populusque Romanus 즉, SPQR) 생각대로 갈리아는 평정된 듯 보였다. 하지만 그해 겨울에 접어들자 갑자기 일이 터졌다.대서양 지역에는 푸블리우스 크라수스가 7군단과 함께[24] 머물고 있었는데 크라수스는 겨울 숙영을 위한 식량 확보를 위해 장교들을 주변 부족에 파견했다. 그런데 부족들은 이 장교들을 억류한 뒤 카이사르가 복종의 대가로 거둔 볼모들과 맞교환하자고 요구했다. 이 사건을 전해들은 카이사르는 루카 회담을 치르는 중이었기 때문에 즉각적인 대응이 불가능했다. 때문에 그는 우선 자신의 장교들에게 해군 편성을 지시하며 사태를 지켜봤다. 전함은 갈리아 땅에서 대서양으로 흐르는 루아르 강에서 건조되었고, 이 함대로 대서양 연안의 부족들과 해전을 치를 생각이었다.
마침내 겨울이 되어 루카 회담을 마무리지은 카이사르는 군대로 돌아가 휘하의 7개 군단을 모두 이끌고 대서양 연안의 지역을 향해 행군했다. 갈리아로 진입한 카이사르는 라비에누스에게 기병을 주어 전해에 평정한 벨가이인들의 영토로 보냈고, 크라수스에겐 12개 대대(1군단 = 10개 대대)를 주어 갈리아 서남쪽으로 보냈다.[25] 그 뒤 사비누스에겐 3개 군단을 이끌고 노르망디 지역으로 가서 그 지역의 부족들을 복속시키도록 했고[26] 브루투스에게는 로마군 함대의 지휘권을 주어 대서양 연안의 반란 주동 민족인 베네티족을 공격하도록 했다.[27] 그리고 카이사르는 나머지 병력을 이끌고 베네티족의 영토로 침입했다.
베네티족은 카이사르군이 이르는 곳마다 철수한 뒤 섬으로 이주하여 지구전으로 나가기로 했다. 따라서 카이사르는 제해권을 장악할 필요가 있었다. 브루투스가 해군을 이끌고 도착하자 각각 200척이 넘는 함대를 이끌고 전투를 개시했다. 이 싸움에서 갈리아(켈트)인들의 배가 더 크고 높이가 높아 로마군이 밀리자, 브루투스는 갈고리를 던져 적의 돛을 찢어버려 기동력을 무력화시켰는데 이는 노를 젓는 방식의 항해를 하지 않는 갈리아인 함대의 약점을 찌른 것이었다. 지중해식 전선의 경우, 돛을 찢는다해도 노가 있었으므로 기동력이 무력화되지 않았으나 갈리아인들의 배에는 노가 없었다. 따라서 베네티족 함대의 기동력은 무력화되었고 이 배에 로마군의 배가 에워싸 하나하나 점령해 나가는 방식으로 갈리아의 해군을 격파했다. 해전은 아침 10시부터 해질 때까지 계속되었고 베네티족은 항복했다.(모르비앙 해전)
켈트족 배의 모습. 클링커 조선법을 사용하여 보다 선체가 튼튼하고, 배 자체도 컸지만 이동수단이 돛뿐이란 것이 타격이 컸다.
카이사르는 항복했다가 반기를 든 죄를 물어 베네티족의 장로 전원을 처형하고, 모든 이들을 노예로 팔아버렸다. 그 뒤 사비누스와 크라수스에게서 승전보가 전해졌다. 사비누스는 적을 상대로 허약함을 가장한 뒤 방심한 적을 급습하여 승리했고, 크라수스는 회전을 벌여 적을 격파한 뒤 농성하는 적을 추격해 다시 격파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그 뒤 카이사르는 모리니족과 메나피족을 토벌하러 나섰는데 이들은 지금의 플랑드르 지역에 사는 부족이었다. 로마군이 이르자 이들은 숲으로 숨어버렸고, 카이사르는 벌채를 하면서 진격했으나 그럴 때마다 이들은 깊숙히 숨어버렸기 때문에 결국 중단하고 퇴각했다.
겨울이 찾아오자 카이사르는 병력을 사방에 보내 숙영을 하게 하고 자신은 이탈리아로 되돌아왔다.
5.3. 그 후
당시 로마에서는 제1차 삼두정치의 결속력이 점점 약해졌는데 그 이유는 크라수스에겐 정치력이 없는 데다가 폼페이우스가 그다지 권력에 흥미를 보이지 않아 그 틈을 탄 옵티마테스 일파가 정치적인 영향력을 확대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를 자신의 관할 속주에 있던 루카에 초대해 회담을 열어 그들 사이의 결속력을 다지고 그들이 각각 원하는 것을 손에 넣기로 합의했다.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다음해에 집정관에 출마하기로 했고, 그 다음해에는 각각 히스파니아와 시리아의 총독이 되기로 했다. 그리고 카이사르는 그의 임기를 5년 더 연장하기로 하고, 각 10개 군단을 거느릴 수 있는 권한을 갖기로 했다. 이때 원로원의 총수 600명 중 200명이 루카 시에 왔다고 한다.(루카 회담)6. 갈리아 전쟁 4년째
6.1. 게르만족의 침입
갈리아는 평온해진 듯 보였고 카이사르에게 모두 복종하고 있는 듯 했다. 이때 라인 강 동쪽의 게르만족 중 우시페테스족과 텐크테리족이 강을 건너 갈리아를 침공하려고 했다. 이들은 메나피족을 격파하고 강을 건너는 데 성공했다.카이사르는 이들이 라인 강을 건넜다는 소식을 듣자 바로 이탈리아를 떠나 갈리아에 복귀했다. 게르만족을 무력으로 저지하기로 결심한 그는 갈리아인들에게 기병을 제공받은 뒤 게르만족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게르만족은 카이사르의 신속한 기동에 바로 사절을 보냈고 강화를 요청했다. 카이사르는 라인 강 밖으로 나가라는 요구를 했으나 게르만족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대답했다. 카이사르는 게르만족이 로마군을 만나기 전 타지역에 약탈을 보낸 기병대의 귀환을 위한 시간을 벌려는 수작이라 의심했다.
따라서 카이사르는 즉각적인 전투를 원했는데 그렇다 해도 명분없이 공격할 수는 없었고, 따라서 카이사르는 자신의 기병 부대를 적과 상당히 가까운 곳에서 기동하게 했다. 이에 게르만족의 몇몇 부대가 로마군을 공격하여 전사자가 발생하자 카이사르는 전투를 결심했다.
다음날 이 사건에 대해 게르만족이 사절을 보내 사과의 뜻을 전하려 하자 카이사르는 이들을 구금한 뒤 게르만족의 진영을 급습했다. 이것은 완벽한 기습이었고, 참패한 게르만족은 뿔뿔히 흩어졌다.
카이사르의 이러한 석연찮은 사절 구금과 기습에 대해 원로원 내에서도 상당한 논란이 생겼다. 제1차 삼두정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옵티마테스의 일원이었던 소 카토는 카이사르를 규탄한 뒤 그를 게르만인들에게 넘겨야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폼페이우스는 74명의 기병의 죽음으로 인해 교섭은 끝났으며, 따라서 카이사르의 행동은 정당하다고 반박했다. 그리고 결국엔 폼페이우스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어 카이사르의 행동에 대해 죄를 묻지 않기로 결론이 났다.
6.2. 제1차 게르만족 원정: 라인 강 도하
카이사르는 라인 강을 건너 게르만족의 영토에 침입하고자 했는데 이것은 로마의 어느 군사령관도 시도하지 않은 것으로 그의 군사적 업적이 상당히 돋보이게 하는 효과를 가져다 줄 것이었다.카이사르는 게르만족에게 자신이 격파한 우시페테스족과 텐크테리족의 일부가 라인 강을 건너 다른 게르만족의 신세를 지는 것을 핑계삼아 그들을 로마측에게 인도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대해 게르만족은 기가 막히다는 반응을 보였는데, 이는 카이사르가 끊임없이 게르만인들에게 라인 강을 건너 갈리아족에게 간섭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입장을 보였으면서 이젠 라인 강 너머에 있는 그들의 내정 문제에 관여하는 모순된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에비족[28]에게 억눌려 살던 우비족은 이를 좋은 기회라고 보고, 카이사르에게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카이사르는 이것을 핑계삼아 라인 강을 건너기로 했다.
카이사르는 다리를 놓았고 10일 만에 모든 군단과 함께 라인 강을 건넜다. 이때 수에비족은 로마군과 싸우는 대신 그들의 재산과 인구를 숲속 깊은 곳으로 이주시키고 로마군을 숲속으로 끌어들여 싸우기로 했다. 카이사르는 이들을 추격하는 대신 우비족에게 협조를 약속받고, 갈리아로 되돌아왔다.
6.3. 제1차 브리타니아 원정
게르만족의 영토 침입이 군사적인 전과로 이어지지 않자 카이사르는 지금의 영국인 브리타니아 침략을 구상했다. 카이사르가 브리타니아 원정을 하고자 한 이유는 브리타니아가 그동안 로마인들에게 완전히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땅이라는 점에서 라인 강 도하를 능가하는 선전효과가 있으리라 판단한 듯하다.그는 지금의 도버 해협이 가장 건너기에 적합한 지형임을 파악하고 이 해협의 해안가에 있는 모리니족의 영토를 거점으로 삼았다. 그 뒤 화물선을 모아 일단 2개 군단과 함께 출항했다. 도착한 날은 기원전 55년 8월 26일이었다.[29]
브리타니아의 민족들은 병력을 모아 로마군의 함대가 보이는 해안가를 따라 이동하며 상륙을 저지하고자 했다. 적당한 해안을 발견한 카이사르는 소수의 병력을 보내 브리타니아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였고 그 뒤 본대를 작은 배에 나눠 태운 뒤 잇따라 상륙시키자 브리타니아군은 마침내 패배하여 달아났다. 상륙이 성공한 뒤 카이사르는 그들에게 볼모를 요구했고 약속을 받아냈다.
목적을 달성했다고 판단한 카이사르는 갈리아로 되돌아가기로 하고 배를 항구에 정박시켰다. 그런데 조수의 차이를 정확하게 계산하지 못해 늘어난 바닷물로 인해 많은 배가 난파되었다. 궁지에 몰린 로마군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배를 수리했지만 이 소식을 알아낸 브리타니아군이 로마군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가장 먼저 곡물 조달을 위해 나갔던 7군단이 공격을 받았고 카이사르는 직접 이들에게 합류하여 적을 격파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군을 이끌고 나타난 브리타니아군이 카이사르의 본영을 공격했고, 로마군은 또다시 이를 격파했다.
두 번의 승리로 브리타니아와 강화를 맺은 카이사르는 수리가 완료된 배와 함께 갈리아로 귀환했다.(카이사르의 1차 브리타니아 원정)
6.4. 그 후
브리타니아에서 돌아온 카이사르는 모리니족의 반란에 직면했다. 그들은 로마군의 일부가 상륙하자 공격했고 카이사르는 기병 전부를 보내 이들을 구원했다. 그 뒤 라비에누스에게 전 군단을 주어 모리니족을 토벌케 하여 항복을 받아내고, 사비누스와 코타를 보내 모리니족 북쪽에 살고 있었던 메나피족을 토벌하게 했다. 그 뒤 전 부대를 벨가이인의 영토에 남기고 북이탈리아로 돌아왔다.카이사르는 직접 정복에 나설 목적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갈리아 전쟁 도중 위험하기 짝이 없는 라인 강 너머 게르마니아로의 진군과 도버 해협 너머의 브리타니아 원정을 감행했다. 이는 게르마니아 및 브리타니아와 정치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던 배후지인 갈리아의 안정을 위한 선택이었으나, 무엇보다도 로마인들에 대한 정치적인 선전으로서 큰 가치가 있었다. 폼페이우스의 폰토스나 시리아 정복은 물론 군사적인 위업이었으나 로마인들이 잘 아는 기존의 지중해 문명 세계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에 비해 당대 로마인들에게 끝을 알 수 없는 검은 숲과 미지의 야만인들의 땅인 게르마니아, 풍문으로나 존재를 알던 세상 끝의 오지인 브리타니아에 로마군이 발을 들여놓은 일은 지금으로 치면 달 착륙 수준의 문화 충격이자 대사건이었다.
이때 수도 로마의 집정관은 카이사르의 동맹자들인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였다. 브리타니아 원정 소식을 전해들은 원로원은, 원정 자체의 실익이 크지 않았음에도 전례없는 20일 동안의 감사제를 결의했다. 이는 폼페이우스의 동방 정복을 기념하는 12일 동안의 전례를 훨씬 뛰어넘는 것으로 당시 로마 사회에 준 충격의 크기를 말해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두 군사행동은 카이사르가 그의 권한 밖의 일을 한 것으로, 원로원파(옵티마테스)들 중에는 이것을 좋게 생각하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거기에 더해 이는 기존 로마의 1인자로 공인되던 폼페이우스의 입지를 카이사르가 크게 위협하게 된 사건으로 인식되었고, 이후 양측의 결별과 대립에 영향을 주었다.
또한 그 해의 집정관이었던 크라수스는 겨울이 되자 파르티아 원정을 위한 병력을 편성하기 시작했다. 그의 차남인 젊은 크라수스는 카이사르가 보낸 2,000명의 최정예 갈리아 기병과 함께 귀국하여 아버지인 크라수스에게 합류했다.
7. 갈리아 전쟁 5년째
7.1. 제2차 브리타니아 원정
여름이 되자 이탈리아를 떠나 갈리아로 돌아온 카이사르는 제2차 브리타니아 원정을 계획했다. 이것은 카이사르가 전해의 브리타니아 침공 성과가 불충분하다고 느꼈고 브리타니아에서 두 부족을 제외하고는 볼모를 보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카이사르는 이번엔 기병으로 참여하고 있었던 갈리아의 귀족들도 모두 데려가기로 했다. 귀족들 중 특히 신분이 높은 이들은 기병 지휘관의 직책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카이사르의 결정에 대해 저 위의 갈리아 전쟁 1년째에 등장한 바 있었던 둠노릭스가 강하게 반발했다.
둠노릭스가 소속된 하이두이족은 바로 갈리아에 카이사르를 불러들인 부족으로 카이사르가 갈리아의 패권을 차지하자 그들은 갈리아 전체의 맹주로서의 입지를 가지게 되었다. 실상은 카이사르가 하이두이족을 얼굴마담으로 내세우고 사실상 로마의 패권하에 갈리아를 편입시킨 것이었지만 카이사르의 내정 간섭은 별로 없었고 부족들의 자율을 배려하는 편이었으므로, 과거 세콰니족을 내세우고 갈리아 전체의 패권을 가졌던 게르만인(수에비족)보다는 반발이 적었다. 따라서 하이두이 부족 내에서 카이사르를 불러들인 족장 디비키아쿠스의 정치적인 입지는 튼튼했다.
이렇게 되자 친형인 디비키아쿠스가 가지고 있는 족장직에 도전하는 둠노릭스는 불만이 많았고, 또한 카이사르의 꾸준한 정치적 공작은[30] 둠노릭스로 하여금 세력을 키우기 어렵게 만들었다. 그는 카이사르에 의해 브리타니아로 동행하게 되자 마침내 분통을 터뜨리고 카이사르에게 반항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기어이 그를 동행시키고자 했고 그를 엄중하게 감시했는데 마침내 둠노릭스가 승선의 혼란을 틈타 탈영하자 카이사르는 곧바로 대부분의 기병을 보내 그를 추격하여 죽였다.
그 뒤 카이사르는 5개 군단과 기병 부대 대부분을 800척의 배에 승선시키고 도버 해협을 건너는 대규모 원정을 감행했다.[31]
1년 전처럼 브리타니아인들은 군대를 이끌고 로마군의 상륙을 저지하려고 했으나 이번에는 그 규모가 너무 크자 겁을 먹고 군대를 내보내지 않았으며, 이에 브리타니아군의 방해없이 상륙한 카이사르는 10개 대대[32]와 300명의 기병을 남겨 배를 지키게 한 뒤 전군을 이끌고 적이 모인 곳으로 이동했다.
브리타니아인들은 카이사르군과 정면으로 싸우기보다는 빼곡히 있던 숲의 지형을 활용해 게릴라전으로 버티기로 결심했다. 이들은 카이사르군의 진격로 곳곳에 요새를 구축해 그의 진로를 방해한 뒤 로마군이 행군 중일 때 공격하거나 숙영지를 건설할 때, 혹은 군량을 확보하거나 말을 먹이기 위해 초원에 기병을 풀어놓았을 때 공격하는 식으로 틈틈히 맞섰다. 로마군은 싸울 때마다 격퇴했으나 브리타니아인들은 가벼운 무장을 한 이점을 활용하여 전체 부대가 반응할 때 재빨리 숲속으로 퇴각했다.
그렇다고 기병으로 추격하기도 마땅치 않았는데 브리타니아인들은 기병에겐 전차를 내보내 상대케했고 기병이 조금이라도 군단병에게서 멀어지면 일제히 전차에서 내린 보병들로 기병들을 공격했기 때문이었다. 이때문에 기병 역시 군단병에게서 멀리 떨어질 수 없었고 따라서 브리타니아인들은 추격의 걱정없이 공격했다. 또한 충분한 수의 예비대를 후방에 두어 이러한 게릴라전에 지친 브리타니아인들과 재빨리 교대하는 식으로 체력의 저하를 막았다.
그러자 카이사르는 이 작전을 지휘한 브리타니아군의 총사령관 카시벨라우누스[33]의 영토를 침입했다. 카시벨라우누스는 강 건너에 부대를 집결시켜 로마군의 도하를 저지하려고 시도했으나 로마군이 용감하게 강을 건너 선봉부대를 패주시키자 즉시 군을 물리고 자신의 영토 내의 가축과 사람 및 재산을 모두 숲속 깊은 곳으로 이주시켰다. 그리고 로마군이 식량 확보를 위해 조금만 흩어지면 즉시 공격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이러한 카시벨라우누스의 게릴라 전술과 청야전술의 활용으로 교착상태에 빠지게 된 카이사르는 카시벨라우누스에게 왕이 살해된 바 있었던 브리타니아의 가장 유력한 부족인 토리노반테스족과 강화를 맺고[34] 그들에게서 정보를 캐내 카시벨라우누스가 가축과 사람을 모아놓은 장소를 파악한 뒤 급습했다. 이 급습은 성공을 거두어 카시벨라우누스의 부족은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카시벨라우누스는 카이사르가 자신의 진영을 급습했다는 소식을 듣자 카이사르의 본군을 공격하는 대신, 다수의 병력을 동원하여 해안가에서 배를 지키고 있었던 10개 대대의 로마군을 공격하기로 했다. 그러나 로마군의 수비는 매우 튼튼했고 휘하의 병력이 간단히 격퇴당하자 카시벨라우누스는 마침내 카이사르에게 사절을 보내 강화를 요청했다. 카이사르 역시 브리타니아를 정복하는 것은 그의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브리타니아를 떠나 갈리아로 귀환했다.(카이사르의 2차 브리타니아 원정)
7.2. 14군단의 전멸: 암비오릭스의 반란
겨울에 접어들자 카이사르는 자신의 부대들을 사방에 쪼개 숙영지를 건설하도록 했다. 그는 사비누스, 퀸투스 툴리우스 키케로[35], 마르쿠스 크라수스[36], 라비에누스, 파비우스, 로스키우스에게 군단을 쪼개주어 각지에 배치했다. 각 군단장들은 1개 군단씩 맡았지만 마르쿠스 크라수스는 예외적으로 3개 군단을 이끌었고 사비누스와 코타에게 14군단 전체와 다른 군단의 5개 대대를 맡겼다(1.5군단). 카이사르는 후방에 남아 군단의 배치가 완료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이때 사비누스가 배치된 지역은 벨가이인의 영토에서도 가장 최북단으로 라인 강 바로 옆에 붙어 게르만족과 바로 마주보는 상당히 위험한 지역이었다. 카이사르는 이 점을 고려하여 전투 경험이 풍부하고 여러 차례에 걸쳐 뛰어난 전공을 세운 사비누스를 지휘관으로 삼은 것이었다. 사비누스는 갈리아 전쟁 3년째에 3개 군단을 지휘하여 노르망디 지역을 복속시켰으며, 4년째엔 휘하 부대를 이끌고 벨가이 지역의 최북단에 있었던 메나피족을 복속시킨 바 있었다. 카이사르가 단독으로 부대를 지휘하도록 맡긴 것은 푸블리우스 크라수스와 사비누스 정도였으나 푸블리우스가 없는 상황에서는 사비누스가 가장 신임할 수 있는 지휘관으로 보였다. 하지만 이것은 실수였다.
사비누스가 머물던 지역에 있었던 갈리아 부족은 카르누테스족이었는데 카이사르의 후원을 받고 있고 부족장의 지위에 있었던 타스게티우스가 공공장소에서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37] 카이사르는 병력을 파견해 이 암살 사건의 주모자를 체포하려 했고, 이때문에 이탈리아로 귀국하는 것이 잠시 지체되었다.
이때 앞서 언급되었던 트레베리족의 반 로마파인 인두티오마루스가 사절을 보내 사비누스의 군단이 머물고 있었던 에브로네스족의 족장인 암비오릭스를 선동하여 로마인을 공격하도록 했다. 이들은 숙영지 건설을 위해 벌채하고 있었던 로마군을 공격하여 죽인 뒤 대대적으로 사비누스의 진영으로 밀고 들어갔다. 하지만 로마군은 대응에 나서 갈리아인들을 격퇴했다.
이러자 암비오릭스는 사비누스에게 사절을 보내 대화를 요청했다. 로마 측에서 보낸 사절에게 암비오릭스는 로마군을 공격한 것이 자신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부족민들이 벌인 사건이고, 갈리아인 전체가 이미 공모키로 결정한 것에 따른 것일 뿐이며, 또한 게르만족의 대부대가 이미 라인 강을 건너 2일 뒤면 숙영지를 대대적으로 공격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자신은 친 로마파이므로 갈리아족 전체의 의사를 따르기보다는 로마 측에게 이것을 귀뜸하고자 하는 것이니 게르만족이 이르기 전에 이 지역에서 철수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면서 그는 로마군이 갈리아족의 영토를 이동할 때의 안전을 약속했다.
이 소식에 로마군은 꽤 당황했는데 그 이유는 사비누스의 숙영지는 라비에누스나 키케로의 로마군과 달리 매우 외딴 곳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비누스는 전군 철수를 주장했지만 부장인 코타를 비롯한 백인대장들은 이미 무장하고 공격까지 감행한 적의 조언을 듣고 행동하는 것은 상식밖의 일이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심야까지 이어진 토론에서 마침내 군단장인 사비누스의 의견이 우세하게 되자 결국 게르만족의 공격이 임박했다고 여긴 로마군은 다음날 아침에 곧바로 철군을 감행했다. 그들은 밤새도록 짐을 싸느라 한숨도 못잤고 사비누스는 암비오릭스의 약속을 믿었으므로 전투 대형을 갖추며 퇴각하지도 않았다. 14군단은 매우 긴 행렬을 이루었다.
아니나다를까 암비오릭스는 이 행렬을 급습했다. 기습에 당황한 사비누스는 부대를 누비면서 지시를 내리긴 했으나 그도 구체적으로 무엇을 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적의 급습을 예상한 코타는 부대에게 짐을 버리고 원진을 짜라는 지시를 내렸지만 이것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그의 《갈리아 전기》에서 실수라고 지적했다. 그 이유는 짐을 버리면 부대원들의 사기가 저하되고, 적의 기세는 올라갈 뿐 아니라 원진의 경우, 적이 공격하지 않으면 싸울 수 없기 때문이었다. 카이사르의 지적대로 갈리아인들은 로마인을 공격하지 않은 채 원진을 에워쌌다. 그 뒤 돌격을 감행한 뒤 퇴각하여 로마군의 원진이 흐트러지면 그곳에 투창과 돌멩이를 던졌다. 이 상태는 하루종일 지속되었고 로마군의 수는 점점 줄어들었다. 로마군의 전투력은 갈리아족을 앞섰고 1.5개 군단은 결코 적은 수가 아니었으나 이러한 갈리아족의 대응에 의해 로마군은 싸울 기회없이 점점 그 숫자가 줄어들게 되었다.
마침내 이를 견디다 못한 사비누스는 암비오릭스에게 통역을 보내 목숨을 구걸했다. 암비오릭스는 사비누스에게 회담하러 오라고 말한 뒤 사비누스가 오자 일부러 장광설을 늘어놓은 후 기습하여 그와 휘하 장교들을 살해했다. 사비누스와의 동행을 단호히 거절한 코타는 그대로 남아 로마군을 지휘했지만 사비누스를 죽인 뒤 사기가 오른 갈리아족의 돌격에 맞서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코타가 죽자 로마인들은 그들이 버리고 떠난 원래의 숙영지로 되돌아가기로 결심하고 갈리아인들을 공격하여 이들을 뚫고 돌아가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밤이 되어 갈리아인들의 공격이 중단되자 절망에 빠진 로마인들은 그날 밤 모두 자결하는 선택을 했다.
살아남은 이들은 매우 극소수였는데 이들은 무장을 벗어던지고 소동 중을 틈타 숲속으로 들어가 길도 없는 곳에서 나무와 숲을 헤치면서 간신히 가까운 라비에누스의 숙영지에 이르렀다. 이로써 9,000명에 달하는 로마 중보병이 전멸했는데 이것은 카이사르가 벌인 갈리아 전쟁 및 내전을 통틀어 가장 큰 타격이었다.
7.3. 네르비족의 키케로 진영 급습
사비누스와 코타의 14군단이 전멸되자 암비오릭스는 바로 기병과 함께 아투아투키족의 영지로 가 그들은 선동한 뒤 다음날 네르비족의 영토로 가 그들을 선동했다. 그는 이 기세를 놓치면 안 된다고 했고, 갈리아인들의 호응을 받았다. 네르비족은 카이사르와 갈리아 전쟁 2년째에 사비스 전투를 치른 전투민족으로 이들은 그들 휘하의 10개 부족을 모두 동원하여 로마군을 공격하여 복수하기로 했다. 이들은 영토 내에 숙영하기로 되어 있었던 퀸투스 툴리우스 키케로[38]의 군단을 공격하기로 했다.사비누스의 14군단이 괴멸된 데다가 살아남은 군단병들은 가까운 라비에누스의 진영으로 향했기 때문에 퀸투스 키케로는 14군단의 전멸을 모르고 있었다. 따라서 키케로의 로마군은 숙영지 건설을 위한 벌채를 하다가 근처로 다가온 네르비족의 습격을 받았다. 네르비족은 상당수의 기병을 이끌고 군단병을 휩쓸었으며, 군단병들은 사력을 다해 보루 안으로 들어가 이들에 맞섰다. 네르비족은 사기가 매우 올랐으므로 거센 공격을 감행했지만 로마군은 그날을 가까스로 버텨냈다.
밤이 되어 공격이 중단되자 키케로의 로마군은 밤 동안 120개에 달하는 망루를 짓고 울타리를 보강했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마자 네르비족은 엄청난 기세로 키케로의 숙영지를 공격했고 로마군은 부상자들까지 가세해 한편으로는 적과 싸우고 한편으로는 수리해가면서 버텨냈다. 그날도 버텨낸 로마군은 다시 밤을 새우면서 망루와 성채 방어용 창을 배치하고 벽에 나뭇가지로 장애물을 삼는 등의 공사를 진행했다.
군단장인 키케로는 병에 걸렸는데 이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계속 잠을 자지 않고 로마군을 지휘하고 있었다. 때문에 그의 건강이 악화될 것을 우려한 병사들의 권유에 그는 전투가 벌어지지 않는 시간 동안 휴식을 취했다.
로마군의 저항이 상당히 완강하자 네르비족은 회담을 청하면서 사비누스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전했는데 즉, 전 갈리아가 봉기했고, 게르만족이 대군을 이끌며 당도했고, 카이사르의 다른 군단도 습격받았음을 전하며 철수를 권한 것이었다. 그러면서 사비누스군의 괴멸을 통보하여 키케로는 비로소 14군단의 전멸을 알게 되었다.
키케로는 이에 대해 무장한 적의 권고를 따르는 것은 로마인의 전통이 아니며 카이사르에게 사절을 보내 그의 지시를 묻겠다고 대답했다.
따라서 다시 숙영지를 공격하기로 결정한 네르비족은 로마인들에게서 배운 바대로 보루와 참호를 둘러싼 뒤 공성병기까지 만들었다. 그 뒤 5일간에 걸쳐서 끊임없이 공격을 감행했고 로마군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저항했다.
이렇듯 네르비족의 격렬한 공세를 간신히 견뎠으나 로마군은 소수였으므로 점점 부상병들의 수가 많아졌다. 키케로는 카이사르에게 전령을 보내는 것을 시도했으나 네르비족이 워낙 철통같이 자신의 숙영지를 포위하고 있었으므로 전령을 내보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키케로 진영에 머물던 네르비족 출신의 친 로마파 정치가가 그의 노예를 적군으로 위장시켜 편지를 가지고 나가게 하면서 카이사르는 그날 오후 5시경에 이르러서야 키케로의 군단이 네르비족으로부터 공격을 받는다는 급보를 받게 되었다. 그는 곧바로 출발했고 3개 군단을 이끄는 마르쿠스 크라수스와 파비우스, 라비에누스에게 전령을 보내 가는 길목에서 대기하다가 자기에게 합류하라는 명령을 전했다.
그날 아침 9시경 크라수스의 3개 군단과 합류한 카이사르는 크라수스에게 1개 군단을 주어 돌려보내고, 30km를 행군한 뒤 파비우스의 군단과 합류했다. 그리고 라비에누스는 상당수의 갈리아인들이 접근하여 숙영지에서 움직이기 어렵다는 연락을 보냈기 때문에 카이사르는 휘하의 2개 군단만을 이끌고 키케로의 숙영지로 이동했다.
카이사르는 키케로 군단의 사기를 붇돋우기 위해 갈리아 기병 한 명을 보내 행군 중이라는 서신을 전하도록 했다. 그 병사는 숙영지에 접근하는 데는 성공하여 카이사르가 직접 쓴 편지를 창에 묶어 숙영지에 던졌고, 망루에 꽂혔다. 이 편지에서 카이사르는 자신이 도착했다는 징표로 건물을 태워 연기를 피우겠다고 전했다. 3일째[39]에 이 편지를 발견한 키케로와 로마군 병사들은 기쁨의 환성을 질렀다.
카이사르가 약속한 대로 모닥불을 피우자 네르비족도 로마군의 구원군이 당도한 것을 알았다. 이들은 포위를 푼 뒤 카이사르의 2개 군단을 공격하고자 했다. 네르비족에게는 갈리아의 추가 병력이 합류하기로 되어 있었고 아직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카이사르는 전투를 서둘렀다. 카이사르에 의하면 그의 휘하엔 7,000명의 병력이 있었고, 네르비족은 60,000명의 병력이었다고 한다.[40] 따라서 카이사르는 네르비족을 유인하기 위해 일부러 소규모의 병력인 것으로 위장하여 진영을 작게 짓고, 그 뒤 네르비족의 기병과 싸워 거짓으로 퇴각하게 했다. 그후 겁을 먹고 혼란에 빠진 것처럼 일부러 보루와 문을 봉쇄하고 혼란스럽게 작업을 하도록 했다.
이 계략에 완전히 속아 넘어간 네르비족은 전 병력을 이끌고 카이사르의 진영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카이사르는 진영의 문을 위장하여 풀로 덮었을 뿐인데 이들은 이 문이 굳게 닫친 것으로 생각하고 진영에 바짝 접근했다.
카이사르는 이 틈을 타 모든 병력으로 하여금 진영 밖으로 뛰쳐나가 적군을 항해 돌격하도록 했다. 이 기습은 허를 찔렀으므로 네르비족은 급격히 무너졌다. 카이사르는 하루 종일 적군을 추격했고 따라서 네르비족의 병력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네르비족을 대파한 카이사르는 키케로의 진영에 진입하여 키케로를 비롯한 군인들을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병사들 중 부상을 입지 않은 자는 10명 중 1명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이때 카이사르는 정신없이 전투를 치르느라 병사들과 재회할 때 면도를 못해 수염이 얼굴을 덮고, 씻지 못해 머리도 얼굴도 옷도 매우 꼬질꼬질했다고 한다. 전쟁터에서도 항상 면도를 하고 깔끔을 떨며 멋부리기를 좋아했던 카이사르였던지라 키케로의 군단병들은 넝마주이 꼬라지로 정신없이 나타난 카이사르의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고 충성을 다짐했다고 한다.
네르비족이 참패한 소문은 갈리아족 전체에게 퍼졌고, 그들과 합류하기로 했던 이들은 모두 군대를 이끌고 회군했다.
7.4. 갈리아인들의 봉기 확대
카이사르가 네르비족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긴 했으나 로마군도 자신들과 같이 패배할 수도 있는 군대라는 것을 알게 된 갈리아인들은 계속해서 전쟁을 계획했다. 이들은 사절을 주고 받으며 정보를 교환했고, 부족장끼리 모여 회의를 거듭했다.이러한 심상치않은 움직임은 카이사르에게 계속 보고되었으며, 이에 카이사르는 북이탈리아로 귀국하지 않고 아예 갈리아에서 겨울을 보내기로 했다. 이것은 카이사르가 최초로 갈리아에서 군대와 함께 겨울을 보내게 된 것이었다. 그는 군단장 파비우스를 원래 숙영지에 돌려보내고 자신은 키케로의 군단을 포함한 3개 군단과 함께 카이사르가 애초에 머물고 있었던 후방에서 지내기로 했다.
그동안 사비누스의 14군단을 전멸시킨 당사자인 에브로네스족의 암비오릭스는 그대로 그의 영지에 있었고, 다른 주모자인 트레베리족의 인투티오마루스는 다음해 봄에 있을 카이사르의 대대적인 반격에 대비하기 위해 라인 강 너머의 게르만족을 설득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게르만족 중 강력한 부족인 수에비족이 당한 참패에, 라인 강을 건너 갈리아로 진입했다가 일망타진당한 텐크테리족의 전례가 있어 이들은 갈리아에 들어가 로마군과 싸우는 것을 꺼렸다. 결국 다시 트레베리족의 영토로 돌아간 인투티오마루스는 계속 병력을 모았고, 로마의 지배를 벗어나고자 하는 민족 정신에 불타는 이들이 집결하자 자신감을 얻어 라비에누스의 숙영지를 급습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그뒤 인투티오마루스는 숙영지를 포위한 뒤 계속 주변을 돌면서 싸움을 걸었다. 하지만 라비에누스는 카이사르가 했던 것처럼 병력이 겁먹은 것으로 위장하면서 인투티오마루스의 도발에 응하지 않았다. 인투티오마루스는 자신감을 갖고 대담하게 로마군의 숙영지 진영을 돌았는데 마침내 그가 방심하고 있음을 파악한 라비에누스는 기습적으로 기병을 출격시켜 인투티오마루스를 살해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자 구심점을 잃은 트레베리족은 와해되었고 그 해의 갈리아는 평온하게 되었다.
7.5. 그 후
그 해에 로마에서는 크라수스가 원정 준비를 마치고 파르티아를 향해 출병했다. 또한 폼페이우스의 아내이자 카이사르의 외동딸인 율리아가 산욕열로 죽었고, 출산한 아이도 며칠 뒤 사망했다.[41] 원로원에서는 카이사르가 속주를 통치하지 않고 멀리 국경 밖에 머물게 되자 이 상황을 호기로 보고 폼페이우스에게 접근했다. 게다가 그 해의 집정관 선거에서는 원로원파가 집정관 두 자리를 모두 차지했고, 이런 상황들로 말미암아 수도 로마의 정국은 서서히 원로원파에게 주도권이 기울기 시작했다.8. 갈리아 전쟁 6년째
8.1. 카이사르의 전쟁 준비
갈리아에 머물며 그대로 겨울에 병사들과 함께 숙영하던 카이사르는 1개 군단과 5개 대대의 전멸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국력은 강력하다는 것[42]을 보여주기 위해 3개 군단을 이탈리아에서 불러들이기로 결정했다. 3개 군단 중 하나의 군단은 폼페이우스에게 빌리기로 했는데 이것은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의 우정을 원로원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이들은 각각 14군단, 15군단, 그리고 폼페이우스에게서 빌린 군단은 1군단으로 불렸으나 나중에 6군단으로 개칭되었다. 14군단의 경우 사비누스와 함께 전멸당한 군단의 이름을 이어받은 것으로, 여기다가 사비누스 휘하에서 같이 전멸당한 5개 대대를 새로 뽑아 보충했다. 따라서 카이사르는 그 해에 3.5군단을 증강했으며 총 10개 군단을 거느리게 되었다.이렇게 병력의 수를 늘린 뒤 카이사르는 갈리아 내부의 정보를 계속 수집했는데 이때 라인 강 연안에 있었던 모든 갈리아인들이 카이사르와 대항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들은 게르만족을 불러들여 로마군에게 대항하려고 했고 따라서 이들 사이에 사절이 끊임없이 오가고 있었다.
8.2. 반란 부족의 토벌
봄이 되자마자 카이사르는 즉시 4개 군단을 동원하여 키케로의 군단을 공격한 바 있었던 네르비족의 영토로 진격했다. 예상보다 빠른 로마군의 공세에 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네르비족은 격파되었고 약탈당한 뒤, 전리품은 분배되었다. 네르비족에게서 볼모를 받은 카이사르는 군단기지로 돌아가 갈리아 회의를 소집했다.전해에 반로마 반란의 주모자였던 트레베리족, 에브로네스족을 비롯한 세노네스족, 카르누테스족은 회의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때문에 카이사르는 소집된 부족장들과 함께 지금의 파리로 이동한 뒤 족장들에게 일장연설을 한 후 군단을 동원하여 세노네스족을 향해 진격했다. 이 진격에 대해 세노네스의 부족장 아코는 항복하기로 했다. 카이사르는 그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부족들에게서 기병을 소집한 뒤 전해의 사비누스 군단을 전멸시킨 바 있었던 두 부족인 트레베리족과 암비오릭스의 에브로네스족을 향해 진격했다.
카이사르는 병력을 양분하여 2개 군단을 트레베리족의 영토에 있었던 라비에누스의 군단에게 보내고, 자신은 5개 군단과 함께 에브로네스족과 동맹을 맺고 있었던 메나피족을 향해 나아갔다. 메나피족은 또다시 숲 속으로 이주하려 했으나 카이사르는 이들이 이주를 완료하기 전에 당도했고 따라서 상당수의 물자를 약탈했다. 메나피족은 카이사르와 강화를 맺었다.
트레베리족은 대군을 모은 뒤 라비에누스를 공격하려 했는데 카이사르의 2개 군단이 근처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후퇴하려고 했다. 하지만 라비에누스가 계속 겁먹은 것처럼 위장하자 이들은 마음을 바꿔 카이사르의 증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라비에누스의 1개 군단을 공격하기로 했다. 하지만 라비에누스는 트레베리족의 공격을 격퇴했다.
뒤이어 메나피족 문제를 매듭지은 카이사르는 본대와 함께 라비에누스가 있는 트레베리족의 영토에 진입하여 그의 군단을 휘하에 거둔 뒤 트레베리족의 부족장으로 친 로마파 정치가를 임명했다. 그리고선 계속 갈리아인과 연락하던 게르만족에게 본때를 보여주기 위해 또다시 라인 강을 건너기로 결정했다.
8.3. 제2차 게르만족 원정
카이사르는 자신이 이전에 건넌 곳의 약간 위쪽에 다리를 놓아 도강을 시작했다. 우비족은 사절을 보내 반란에 관여한 것은 수에비족이라 했고 카이사르는 이것을 사실이라고 판단했다. 수에비족은 카이사르에 대해 이전에 썼던 전략을 다시 썼는데, 즉 숲속 깊은 곳에 들어가 로마군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었다.카이사르는 그들을 쫓아 숲속 깊은 곳에 가는 것을 보급 문제로 꺼렸으므로 전해와 마찬가지로 군대를 물려 퇴각했다. 그는 성과가 없어 보이는 것을 우려했던지 《갈리아 전기》에 갈리아인과 게르만인의 풍습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다.
8.4. 에브로네스족의 토벌
에브로네스족은 바로 사비누스의 14군단을 전멸시킨 암비오릭스의 부족으로 카이사르는 이들을 토벌하고자 했다. 에브로네스족은 작은 부족이었으므로 로마군과 싸울 엄두를 내지 못한 채 계속 숲속을 전전하며 피해다녔다.에브로네스족은 이때 그들의 재산을 깊은 숲속 사방에 분산시켰는데 카이사르는 이것을 약탈하기 위해 로마군이 뿔뿔히 흩어질 경우 기습당할 것을 우려했다. 때문에 그는 주변의 갈리아 부족들에게 사절을 보내 숲에 흩어져 있는 에브로네스족의 재산들을 마음껏 약탈해서 소유하라고 부추겼다. 이것은 로마군이 아닌 갈리아인들에게 숲속 깊은 곳을 공격하는 위험을 감수케 하고자 하는 의도였다.
카이사르의 제안은 약탈품에 욕심이 많은 갈리아인들에게도 좋은 제안이었기 때문에 상당한 호응을 받아 주변의 많은 부족들이 각기 군대를 이끌고 에브로네스족의 재산을 약탈하러 그 영토로 진입했다. 이 소문은 갈리아 전역에 퍼졌는데 엉뚱하게도 라인 강 너머의 게르만족까지도 이러한 약탈에 욕심을 냈다. 국경 근처의 게르만족 일파 중 하나인 수감브리족은 기병 2,000기를 모아 라인 강을 건너 에브로네스족의 영토로 들어가 눈에 띄는 족족 에브로네스족을 공격하고 약탈했다. 이들은 숲에 익숙한 게르만족답게 늪과 숲을 간단하게 가로지르며 약탈했다. 그러다가 이들은 한 갈리아인 포로로부터 카이사르군이 보급품을 한 군데에 모아놓았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그곳은 바로 사비누스와 코타의 14군단이 숙영했던 곳으로 카이사르는 이 장소를 수리한 다음 군단장 키케로에게 맡겼다.[43] 수감브리족은 이곳을 습격하여 로마인들의 군수품을 약탈하기로 마음먹었다.
키케로는 이곳을 굳게 지키다가 7일 동안 아무 일도 없자 병력을 밖으로 내보내 곡물을 징발하도록 했다. 이때는 로마의 9개 군단과 사방에서 약탈하러 온 갈리아족으로 인해 에브로네스족의 영토가 쑥대밭이 되고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아무 일도 없으리라 생각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때 느닷없이 나타난 수감브리족의 기병이 문이 활짝 열린 키케로의 진영내로 돌진하면서 신병으로 구성된 14군단은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카이사르가 호기를 부린 덕분에 14군단이라는 이름과 과거 사비누스 휘하의 14군단이 전멸당한 장소라는 불길함을 안고 있었던 병사들은 공포에 떨었다. 이때 병에 걸려 진영내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던 전 수석 백인대장 바쿨루스가 5일 동안 먹지도 못한 몸에도 불구하고, 병기를 갖추어 진문 앞으로 달려가자 병사들은 용기를 내서 맞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른 병사들도 그들의 위치로 돌아가 수감브리족과 싸울 채비를 했다.
그 뒤 곡물을 징발하러 떠난 기병이 되돌아오고 로마군이 보루를 지키는 모습을 본 수감브리족은 자신들이 약탈해놓은 물품과 함께 라인 강을 건너 그들의 영토로 되돌아갔다. 수감브리족이 떠난 뒤에도 예상치 못한 공격을 받은 데다가 카이사르의 본대로부터 소식이 끊긴 14군단은 공포에 떨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카이사르가 본대와 함께 귀환하자 암비오릭스는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8.5. 그 후
징벌적인 군사원정을 마친 카이사르는 부족회의를 열어 이전 부족회의에 불참한 뒤 항복한 세노네스족의 부족장 아코를 처형했다. 이때 카이사르의 의견에 따라 아코를 로마의 전통적인 방식으로 처형했는데 이는 채찍질을 한 다음 목을 베는 것이었다.이 일은 모든 부족장들의 눈앞에서 행해졌는데 이것은 카이사르가 상당한 월권 행위를 한 것으로 비추어졌다. 이제껏 카이사르는 형식적으로나마 로마는 우방국이며 로마의 비호하에 갈리아인들의 자치를 보장한다는 식의 태도를 보였는데 이번의 경우, 로마에게 협력하지 않은 죄를 물어 한 부족의 통치자를 상당히 잔인한 형태로 처형한 것이었다. 이것은 노골적으로 로마에 협력하는 것이 선택이 아닌 의무라는 것을 보여준 것이었고, 이것을 지켜본 부족장들에겐 이것이 로마가 노골적으로 본색을 드러낸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카이사르가 그동안의 태도를 버리고 노골적으로 강압적인 모습을 보인 것은 그의 갈리아 총독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데다가 옵티마테스 일파에게 주도권이 넘어가는 상황이었기에 서둘러 갈리아인에게 본심을 보이고 반발하는 이들을 군사적으로 진압하려는 의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다음해에 갈리아인들은 대대적인 봉기를 일으키게 되어 카이사르의 의도대로 되었지만 베르킨게토릭스라는 걸출한 인물의 존재를 예측하지 못하면서 카이사르는 하마터면 갈리아 전쟁을 실패할 뻔한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렇게 일을 마무리 지은 카이사르는 자신의 부대를 갈리아 각지에 배치한 뒤 북이탈리아로 떠났다.
이때 파르티아에서 급보가 전해졌는데 크라수스가 카르헤 전투에서 전사하고, 로마군이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는 소식이었다. 그리고 로마 본국에서 민중파(포풀라레스)를 이끌던 클로디우스가 밀로의 무리와 패싸움을 하다가 패배하여 살해당했는데 이를 보고 분노한 민중들이 클로디우스의 시체를 원로원 회의장에 올려놓고 통째로 불태우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렇게 사회가 혼란에 빠지자 원로원은 평민들에게 여전히 인기가 많았던 폼페이우스를 독재관에 선출하여 수습하고자 했다. 이것을 소 카토가 약간 비틀어 독재관이 아닌 단독 집정관으로 임명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고[44] 이를 폼페이우스가 받아들여 혼란스러운 로마 사회를 수습하게 되었다.
9. 갈리아 전쟁 7년째
9.1. 전 갈리아인들의 반로마 봉기 시작
로마에 협력하지 않았다는 석연찮은 죄목으로 세노네스족의 지도자 아코가 잔인하게 처형당하는 것을 목격한 갈리아의 부족장들은 카이사르에 대한 반감이 크게 생겼다. 이들은 로마에 대해 군사적으로 대항하기로 결심하고 모여서 회의를 했다. 갈리아의 부족장들이 카이사르 몰래 모인 이 회의에서 이들은 카이사르가 북이탈리아에 갔으므로 그가 갈리아에 진입해 부대를 지휘하는 것을 막으면, 그들에게도 승산이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이때 노르망디 지역을 지배하던 카르누테스족은 카이사르 몰래 서로 볼모를 교환하는 것은 어려우니 그들이 총대를 매고 그들 영토에 있었던 로마 시민들을 모두 습격해 죽임으로써 로마에 대항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겠다고 전했다. 이 결심에 대해 회의에 참석한 부족장들 모두 찬사를 보내며 그 부족을 배신하지 않겠다고 서약했다. 그 뒤 카르누테스족이 정말로 로마 시민들을 습격해 모두 학살하자 이 소문은 갈리아 전역에 퍼지게 되었다.
9.2. 베르킨게토릭스의 등장
갈리아인들 중 갈리아 남부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던 아르베르니족이 있었다. 이 부족의 최고 귀족 출신으로 베르킨게토릭스라는 청년이 있었는데 그는 부족장의 지위를 놓고 암투를 벌인 아버지가 살해당한 후 족장직을 차지한 숙부에 의해 추방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 뒤 그의 숙부가 친 로마적 행보를 보였는데 갈리아 전역에서 반 로마 정서가 커지자 베르킨게토릭스는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거느리고 아르베르니족을 공격하여, 숙부를 추방하고 족장직을 차지했다.아르베르니족을 거느리게 된 베르킨게토릭스는 주변에 있던 갈리아 부족들에게 사절을 보내 이전에 족장끼리 모여 반 로마 서약을 한 것을 준수하라고 했고, 이것은 모든 이들의 호응을 받았다. 이들은 베르킨게토릭스를 갈리아의 총사령관으로 추대했다. 그는 각 부족에게서 볼모를 받아내고 병력과 무기의 공출을 요구했다. 또한 규율을 엄격히 세워 어긴 자들을 처형함으로써 지휘체계를 단단히 굳혔다.
이때 카이사르의 주요 우방 부족이었던 하이두이족에게 베르킨게토릭스의 공격을 받은 비투리게스족의 구원요청이 왔다. 하이두이족은 그곳에 머물고 있었던 로마 측 장교와 상의한 뒤 병력을 급파했으나 곧바로 철수시켰다. 하이두이족은 비투리게스족이 함정을 팠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으나 카이사르는 이 말의 신빙성을 의심했다. 하지만 비투리게스족은 곧바로 베르킨게토릭스에게 붙었다.
9.3. 카이사르의 귀환
북이탈리아에서 이 소식을 들은 카이사르는 갈리아족이 길목을 차단하여 갈리아에 있는 군단 기지로 쉽게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파악했다. 하지만 베르킨게토릭스의 움직임이 기회를 주었는데 그가 카이사르를 묶어놓기 위한 의도로 대군을 이끌고 나르보를 향해 이동한 것이었다. 카이사르는 나르보로 이동한 뒤 방어체계를 구축하고 기병과 함께 아르베르니족의 영토로 향했다.아르베르니족과 나르보 사이에는 산맥이 하나 있었는데 카이사르는 허를 찌르기 위해 6피트에 이르는 눈을 뚫은 뒤 산맥을 가로질러 아르베르니족의 영토에 도달했다. 예기치 못한 로마군의 출현에 아르베르니족은 당황했고 이들은 베르킨게토릭스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자신의 부족을 무시할 수 없었던 그는 병력을 이끌고 구원하기 위해 이동했다.
카이사르는 데키무스 브루투스에게 기병을 맡긴 뒤 소수의 병력만 데리고 비엔나에서 게르만 기병을 인계받았다. 그 뒤 하이두이족의 영토를 가로질러 링고네스족의 영토에 머물고 있었던 2개 군단의 숙영지에 도착했고, 동시에 트레베리족의 영토에 머물던 2개 군단에게 6개 군단이 머물고 있었던 아게딘쿰(상스)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내린 뒤 자신 역시 휘하의 2개 군단을 이끌고 아게딘쿰으로 이동했다. 베르킨게토릭스가 대응하기 전에 이 집결은 완료되었고, 카이사르는 10개 군단을 거느리게 되었다.
9.4. 카이사르의 진격
10개 로마 군단이 아게딘쿰에 있는 군단 숙영지에 집결했다는 소식을 들은 베르킨게토릭스는 병력을 이끌고 북상했다. 그는 카이사르의 주요 우방 부족인 하이두이족에 종속되어 있었던 보이족의 도시 고르고비나를 포위했다.(고르고비나 공방전) 이때는 아직 늦겨울이었으나 곡식 조달에 어려움을 겪었던 카이사르는 보이족이 무너질 경우, 주변 갈리아 부족들이 로마가 우방국을 보호하지 못한다는 판단을 내릴 것이라고 생각해 구원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2개 군단을 숙영지에 남기고 8개 군단을 이끌며 남하했다.카이사르는 군량 조달을 위해 근처에 있었던 케나붐을 공략하기로 했다. 그는 우선 벨라우노두눔을 점령하고 나서 군대를 이끌고 서둘러 케나붐에 도착했다. 카이사르군의 진격이 예상보다 빨랐으므로 케나붐의 주민들은 서둘러 강을 건너 달아났다. 카이사르는 즉시 병력으로 하여금 도시에 진입하게한 뒤 이 도시를 약탈하고 불질렀다. 그뒤 남하하여 노비오두눔을 향했다.
노비오두눔은 베르킨게토릭스가 포위한 고르고비나의 바로 근처에 있었던 도시였다. 노비오두눔의 주민들은 로마에 항복했지만 베르킨게토릭스의 군대가 당도하자 배신하고 다시 갈리아측에 붙었다. 로마와 노비오두눔 양 군대는 우선 소수의 기병전을 벌였는데 게르만 기병 400기의 활약으로 로마측의 승리로 끝이 났다. 노비오두눔 주민들은 반란 주모자를 모두 붙잡아 로마측에 넘기고 다시 항복했다.(노비오두눔 전투)
9.5. 초토화 작전
겨울철이라 군량 조달이 원활하지 않았던 로마군은 계속 도시를 점령하고 곡식을 얻는 식으로 진격했다. 3개에 걸친 도시가 연달아 함락당하자(벨라우노두눔 → 케나붐 → 노비오두눔) 베르킨게토릭스는 로마군을 상대로 도시를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그는 이럴 바엔 도시를 완전히 불사르고 전 주민을 이주시키는 방식으로써 로마군의 현지 조달을 차단하기로 했다.이 결정은 족장들의 동의를 얻었고, 하루 만에 로마군 주위의 20여 개 도시가 비워지고 불태워졌다.[45] 카이사르는 그가 머무는 곳에서도 각지가 불타오르는 것을 볼 수 있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이 지역에 아바리쿰[46]이라는 도시가 있었는데 이 도시는 갈리아에서 아름답기로 이름난 곳이었다. 아바리쿰의 소유자인 비투리게스족은 아바리쿰을 불태우는 것만은 말아줄 것을 요청하며 이 도시를 방어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베르킨게토릭스는 처음에는 이에 반대했으나 비투리게스족의 간절히 애원했기 때문에 결국 아바리쿰을 방어하는 것을 승낙했다.
이렇게 구체적인 전략을 세운 뒤 베르킨게토릭스는 휘하의 대군으로 로마군을 추격하면서 전투를 피하고, 로마군이 식량을 조달하기 위해 흩어질 때만 공격했다. 이 전법은 효과를 보아 로마군은 군량을 조달하기도, 또한 전투를 할 수도 없는 곤란한 상황에 빠졌다.
이에 따라 카이사르는 주변 도시 중 유일하게 온전히 남아있는 아바리쿰을 점령하여 군량을 조달하기로 결정했다. 카이사르는 8개 군단을 거느리고 있었으므로 3개 도시에서 조달한 군량은 금방 바닥을 드러냈다. 인근의 하이두이족에게 군량 보급을 요청했으나 이미 갈리아 전체가 카이사르로부터 등을 돌렸음을 파악한 하이두이족은 카이사르에게 협조적이지 않았다. 이때문에 로마군이 아바리쿰을 포위했을 때는 곡기없이 가축을 잡으면서 버텨나가야했다.
9.6. 카이사르의 위기 탈출: 아바리쿰 공방전
아바리쿰은 비투리게스족이 로마 군단을 상대로 방어를 자신할 정도로 지형적으로 유리했다. 강과 늪이 도시의 사방을 둘러싸고 있었으며, 접근로는 한 군데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로마군은 8개 군단에 달했고, 또한 이 도시를 점령해 식량을 조달하지 않으면 안되는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따라서 로마군 역시 사력을 다해 공격을 퍼부었다.포위 공격 도중 베르킨게토릭스가 군대를 이동한다는 첩보를 받은 카이사르는 서둘러 전쟁을 끝낼 목적으로 그를 기습하러 밤에 떠났다. 하지만 베르킨게토릭스 역시 첩보를 통해 카이사르의 이동을 파악했고, 로마군이 도착했을땐 유리한 고지에 이미 병력을 배치한 상황이었다. 카이사르는 공격이 여의치 않자 철수했다.
카이사르군이 물러난 뒤 잠시 갈리아족 진영에서는 베르킨게토릭스의 무모한 군대 이동에 대해 비판하는 의견이 있었다. 이에 베르킨케토릭스는 로마인 포로를 불러들였고, 그들이 식량이 떨어져 곤경에 처한 것을 증언하게 하여 위기를 모면했다.
그 뒤 로마군은 공성병기로 아바리쿰을 공격하는 한편 높은 둑을 쌓아갔다. 비투리게스족은 이것을 방해하기 위해 로마군의 망루를 계속 공격했으나 로마군도 끝까지 버텼다. 공사가 막바지에 이르자 비투리게스족은 밤에 성문에서 모두 출격하여 로마군과 전투를 벌였고 동틀 때까지 싸웠지만 로마군의 포위를 뚫을 수도, 그리고 이들의 공사를 훼방놓을 수도 없었다. 비투리게스군과 로마군은 끊임없이 지친 병사를 교대해가면서 격렬하게 싸웠지만 전투가 거듭될수록 무장과 훈련이 잘 된 로마군이 우세했다.
이 전투에서 격퇴당한 비투리게스족은 절망에 빠졌고, 마침내 성 외각에 주둔한 베르킨게토릭스가 성내로 사절을 보내 성을 버린 후 자신에게 합류하라고 권고했다. 성이 점령되면 로마인들의 살육과 약탈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므로 공포에 질린 비투리게스족 남자들은 자신들을 따라갈 수 없는 여자와 아이를 뒤에 남기고 밤에 한 덩어리로 뭉쳐 로마군 진영을 뚫기로 했다. 그러나 이들의 계획을 알게 된 여자들은 남편들에게 나가지 말라고 애원했고 남자들이 듣지 않자 여자들이 일제히 소리를 질러 로마군에게 이들이 탈출할 것임을 알렸다. 그러자 비투리게스족 남자들은 성밖으로의 탈출을 단념했다.
다음날 마침내 둑이 완성되자 이 둑을 타고 성 위로 일제히 돌진한 로마군에 의해 성벽이 점령되었고 아바리쿰은 순식간에 함락되었다. 로마군은 굶어가면서 공성전을 벌였으므로 울분에 차있는 상태였고, 카이사르는 이들에게 약탈과 살육을 허가했다. 이로써 도시에 있었던 40,000명에 달하는 비투리게스족 남자들과 그들의 처자식이 모두 학살당했다. 이 혈전에서 생존한 아바리쿰 거주민들은 고작 800명에 지나지 않았다.(아바리쿰 공방전)
9.7. 카이사르의 위기: 게르고비아 공방전
아바리쿰의 점령은 이것을 예견한 베르킨게토릭스의 입지를 단단히 굳혀주었고, 카이사르는 필요한 군량을 얻어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이때 하이두이족은 부족장 선출문제로 내분을 겪고 있었는데 카이사르는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를 부족장으로 선출하기 위해 하이두이족이 있는 곳으로 이동하여 콘빅톨리타비스를 족장으로 뽑게 했다. 그 뒤 하이두이족에게 그들이 가진 기병 전원과 보병 10,000명을 보조병으로 요청했다.
이렇게 배치한 뒤 카이사르는 병력을 양분해 4개 군단을 라비에누스에게 주어 루테티아(파리)를 공략하게 하고, 자신은 6개 군단을 지휘하여 베르킨게토릭스의 부족인 아르베르니족의 수도 게르고비아를 공략하고자 했다. 즉 카이사르에겐 8개 군단이 휘하에 있었고, 2개 군단은 아벤디쿰(상스)에 머물고 있었는데 라비에누스에게 2개 군단을 내주어 아벤디쿰에 머무는 군단병과 합류하게한 뒤 북상하여 루테티아를 공격하게 한 것이었다. 이렇게 병력을 쪼갠 것은 카이사르의 큰 실수였는데 게르고비아는 베르킨게토릭스의 본군이 있는 곳으로 거센 저항이 있을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카이사르는 저번보다 더 적은 병력으로 공략에 나선 것이었다.
카이사르가 남하하자 베르킨게토릭스는 강의 다리를 파괴하고 로마군의 도하를 막고자 했다. 이것에 대응하여 카이사르는 본군이 있는 것으로 위장한 뒤 2개 군단을 기동하여 다리를 건넜다. 이 소식을 들은 베르킨게토릭스는 병력을 철수시켰다.
그 뒤 카이사르는 게르고비아에 도착했는데 하이두이족의 족장 콘빅톨리타비스가 음모를 꾸민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콘빅톨리타비스는 카이사르에게 보낸 보병 10,000명과 다수의 기병을 리타비쿠스에게 이끌게 한 뒤 적당한 기회를 보아 병사들을 선동하도록 했다. 이 지시대로 리타비쿠스는 병사들을 선동하여 그들과 동행한 로마인들을 습격해 죽였다. 이 첩보를 들은 카이사르는 즉시 4개 군단과 함께 하이두이족 병사들에게 접근해 이들의 항복을 받았고 리타비쿠스는 달아났다. 이때 베르킨게토릭스는 어떻게 카이사르가 떠난 것을 알았는지 2개 군단이 남은 로마군의 진영을 본군 전원을 동원하여 공격했고 하마터면 함락당할 뻔했다. 카이사르는 재빨리 진영으로 복귀했다.
카이사르가 이러는 동안 리타비쿠스의 첫 번째 전령이 보낸 소식을 믿은 하이두이족은 그들의 영토내에 있었던 로마인들을 대거 습격하여 죽이고 재산을 빼앗았다. 하지만 뒤이어 도착한 전령에 의해 카이사르가 진압했다는 소식을 들은 하이두이족은 다시 태도를 바꿔 관련자를 처벌한 뒤 카이사르에게 해명을 하는 사자를 보냈다.
이렇게 하이두이족이 계속 변덕스럽게 태도를 바꾸자 그들의 협조를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한 카이사르는 병력을 철수할 것을 계획했다. 하지만 그냥 퇴각할 경우 갈리아 부족들에게 자신이 베르킨게토릭스를 당할 수 없어서 퇴각한 것으로 보일 것을 우려한 카이사르는 강력한 공격으로 큰 타격을 준 뒤 퇴각하기로 결정했다. 그 뒤 카이사르는 갈리아군이 집중적으로 수비하는 진영에 공격할 것처럼 소란을 피워 수비를 굳히게 한 뒤 갈리아군의 수비가 느슨한 곳에 주력을 보내 급습했다.
공격나팔이 불리자 로마군은 단숨에 갈리아군의 3개 진영을 점령한 뒤 게르고비아의 성벽 바로 앞까지 진격했다. 이 급습에 아르베르니족은 완전히 당황했고 이에 목적을 달성했다고 판단한 카이사르는 퇴각나팔을 불었다. 하지만 퇴각나팔을 듣지 못하고 기세를 탄 로마군은 그 자리에 남아 성벽에까지 오르려고 했다. 갈리아군은 황급히 주력군을 로마군이 있는 곳으로 보내기 시작했고 점점 갈리아인들의 수가 늘어나자 적진 깊숙히 있던 곳까지 당도한 로마군은 포위되어 10군단의 도움으로 약간의 수가 탈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로마군은 46명의 백인대장이 죽고, 700명의 병사가 목숨을 잃는 패배를 당했다.[47]
카이사르는 휘하 병사들을 꾸짖고, 격려한 뒤 즉시 게르고비아에서 철수하는 한편 하이두이족이 배반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들의 영토로 이동했다.(게르고비아 공방전)
9.8. 하이두이족의 반란
게르고비아의 패배로 전 갈리아가 카이사르에게서 등을 돌리게 되었다. 이것은 갈리아 전쟁 첫해에 카이사르를 불러들인 뒤 갈리아의우선 카이사르 밑에 종군하던 두 명의 갈리아 귀족이 카이사르에게 하이두이족의 모반이 있을까 두렵다며 떠나길 요청했다. 카이사르는 이들이 그의 밑에서 벗어나려는 핑계임을 알았지만 이들을 돌려보내기 전에 나눈 대화에서 자신이 하이두이족에게 그동안 베푼 것이 크지 않았냐고 약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은 소용없었고 이 두 명은 하이두이족에게 돌아가자마자 카이사르에게 적대적이었던 부족장과 영합하여 로마인들을 죽인 뒤 그들이 맡고 있었던 부족들의 볼모를 손에 넣고, 카이사르에게서 지키기 어려운 도시들을 모두 불살라버렸다.
이렇게 되자 고립된 카이사르는 역시 적진의 한복판에서 고립된 라비에누스의 4개 군단을 구원하고자 강행군을 하여 론 강에 도착했다. 그 뒤 인근에서 가축을 약탈하여 식량을 보충한 뒤 갈리아 중부로 이동했다.
라비에누스는 4개 군단으로 루테티아(파리)를 공격하기 위해 북상했다가 카이사르의 게르고비아 공방전 패배 소식을 듣고 철수하기로 했다. 그는 밤중에 대담하게도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부대를 기동시킨 뒤, 적이 이 소리를 듣고 병력을 분산시킬 때 적의 진영 하나를 전군으로 공격하여 격파한 후 무사히 철수했다. 그 뒤 라비에누스는 남하하여 그를 향해 오고 있었던 카이사르와 합류했다.(루테티아 전투)
한편, 하이두이족은 카이사르가 붙잡아 두고 있었던 볼모를 빌미삼아 갈리아 부족들에게 자신들을 맹주로 삼을 것을 요구하며 베르킨게토릭스에게도 자신들에게 오라고 했다. 베르킨게토릭스가 모든 부족장과 함께 하이두이족에게로 오자 하이두이족은 총지휘권을 요구했지만 부족장 회의에서 나온 표결에 의해 만장일치로 베르킨게토릭스가 승리했다. 이에 하이두이족은 어쩔 수 없이 베르킨게토릭스를 따르기로 했다. 이로써 레미족 단 한 부족을 제외한 갈리아인 전체가 카이사르를 적대하게 되었다.
9.9. 베르킨게토릭스의 큰 실수: 빈게네 전투
자신에게 등을 돌린 갈리아로부터 주무기인 기병을 모집할 수 없게 되자 카이사르는 게르만족을 대상으로 용병을 모집했고, 속주민들로부터 모집한 22개 대대로 하여금 속주를 방어하게 한 후 세콰니족의 영토를 향해 갔다. 이렇게 한 이유는 세콰니족의 영토가 로마 속주와 인접했으므로 이곳을 점령한 뒤 속주의 지원을 받으며 다시 갈리아를 공격할 생각이었던 것이다.이때 베르킨게토릭스는 각 부족에게 병력을 공출할 것을 요구했고 따라서 상당한 수의 대군을 거느리게 되었다. 이 병력에 자신감을 얻었는지 그는 이때 갑자기 그 동안의 초토화 작전을 버리고 카이사르의 로마군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자신의 부관들에게 말하길 로마군이 군수품을 수송하는 지금이 바로 공격하기 적합한 때이며 로마군은 군수품을 지키기 위해 뿔뿔히 흩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카이사르의 로마군은 이미 7년 간의 무수한 전투로 싸움에 상당히 익숙해졌으므로 급작스러운 상황에서도 대처능력이 뛰어났고, 카이사르가 또한 우수한 장군이었으므로 이러한 돌발적인 공격에도 잘 대응할 수 있었다. 게다가 카이사르의 병력은 로마 군단병만 10개 군단에 달했는데 그들이 모두 장기간의 전투로 단련된 군인들이었음을 감안한다면 베르킨게토릭스가 전투를 건 것은 상당히 무모한 결정이었다. 카이사르가 훗날 폼페이우스를 격파했을 때 그는 같은 군단병들을 단 8개 군단만 동원했고 이것도 그나마 정원을 크게 밑도는 22,000여명에 지나지 않았다. 베르킨게토릭스가 맞닥뜨린 로마군은 10개 군단에 정원수도 그다지 차이가 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폼페이우스가 상대한 카이사르군의 2배에 가까운 전력을 상대로 전투를 건 셈이었다.
베르킨게토릭스는 기병 특유의 빠른 기동력으로 포위작전을 감행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었기에 이러한 전술로 나온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로마군의 경우 조직적이면서도 유동적인 분대의 기동이 가능했으므로 포위 상황에서도 재빠른 원진을 쳐서 대응하는 것이 가능했다.
또한 당시 카이사르가 처한 상황은, 이전 6년에 걸친 갈리아 지역을 모두 포기하고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는 최악의 상황이었으므로 상당히 절박한 때였다. 그가 가진 볼모는 하이두이족의 배신으로 모두 잃은 상황이었으며, 휘하에 넣은 부족들도 레미족 등 일부를 제외하면 모두 배신한 상황이었다. 카이사르가 속주의 지원을 받으면서 갈리아로 다시 진격한들 베르킨게토릭스가 기존에 했던 대로 회전을 피하면서 보급을 차단하는 방식으로 나가면 카이사르가 남은 임기인 1년 반 동안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다지 많지 않았을 것이다. 카이사르도 이것을 알고 있었으며 따라서 그는 당시 자결까지 생각했다고 한다.[48]
그런데 베르킨게토릭스는 친히 자신의 대군을 이끌고 카이사르 군단의 정면으로 꼬라박은 것이었다. 이것은 카이사르에게는 엄청난 횡재였고, 베르킨게토릭스에겐 돌이킬 수 없는 큰 실수였던 것이다. 물론 베르킨게토릭스는 갈리아 사람들의 요청을 무시할 수 없었고, 나름 승산도 보여서 싸웠을 수도 있다.
뒤이어 벌어진 전투에서 베르킨게토릭스는 군대를 세 부분으로 나눠 로마군에게 돌격했다. 로마군도 즉시 세 부분으로 나누어 대응했다. 계속된 전투에서 로마군의 우익이 갈리아군의 좌익을 격파하고, 오른쪽 언덕을 점거한 뒤 베르킨게토릭스가 있는 보병을 향해 돌격했다. 이에 베르킨게토릭스가 달아나자 갈리아군 전원이 등을 돌려 달아났고 로마군은 이들을 추격하여 마음껏 살육했다.(빈게네 전투)
베르킨게토릭스는 황급히 달아나면서 눈에 띈 근처의 알레시아 안으로 들어간 뒤 성문을 굳게 닫았다. 카이사르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으며, 그는 모든 군단병을 동원하여 알레시아를 겹겹히 에워쌌다.
9.10. 베르킨케토릭스의 몰락: 알레시아 전투
알레시아는 대군을 수용할 준비가 되지 않았고, 베르킨게토릭스가 벌인 청야전술 때문에 오히려 베르킨게토릭스 자신이 군량 부족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를 구원하기 위해 갈리아 민족은 대군을 이끌고 알레시아에 당도하여 베르킨게토릭스와 함께 앞뒤로 세 차례에 걸쳐 로마군을 공격했으나 카이사르의 로마군은 이들의 공격을 격전끝에 격퇴했고 군량이 바닥나 버틸 수 없게 된 베르킨게토릭스는 끝내 항복하게 되었다.9.11. 그 후
갈리아 민족을 규합하여 대항한 베르킨게토릭스마저 로마군의 포로가 되자 갈리아인들은 더이상 로마에 대항할 의지가 완전히 꺾이게 되었다. 이들은 카이사르에게 사절을 보내 항복했고 이를 받아들은 카이사르는 그들이 로마인들을 습격해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죄를 묻지 않았다. 이는 그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아직 1년의 임기가 남은 카이사르는 자신의 군단병들과 함께 숙영하며 전후 처리를 하기로 했다.카이사르는 갈리아 전체의 봉기를 제압한 상황에서 사실상 갈리아 제패가 끝났다고 판단했으며 더이상 《갈리아 전기》를 서술하지 않았다. 이런 시각은 원로원도 마찬가지여서 이들은 20일 동안의 감사제를 지내기로 결정했다.
카이사르의 군사적인 업적은 로마 시민들 사이에서 매우 유명해졌다. 카이사르는 그가 지휘한 전쟁 상황을 상세히 적은 《갈리아 전기》를 출간하면서 이러한 유명세에 기름을 부었다. 여기에 위기를 느낀 원로원파와 카이사르의 군사적인 명성이 자신을 능가하게 된 것을 불편하게 여긴 폼페이우스는 서로 협력하게 되었다.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가 '젋은 크라수스'라는 애칭으로 부른 바 있었던 푸블리우스 크라수스의 미망인이자 원로원 의원 메텔루스 스키피오의 딸이었던 코르넬리아 메텔라와 재혼함으로써 원로원파와 인척관계를 맺었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원로원파는 폼페이우스의 히스파니아와 북아프리카 총독 임기를 5년 더 연장시켰고 그의 10개 군단 지휘권도 그대로 인정했다. 이렇게 폼페이우스가 군사력을 갖게된 것은 카이사르가 1년 뒤에 군단 지휘권을 내려놓게 되는 상황에서 상당히 위협적인 일이었다.
그 뒤 이들은 카이사르에게 불리한 법안을 제출했는데 이것은 집정관에 입후보하려면 총독직과 군단 지휘권을 내려놓고 민간인의 신분으로 입후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민간인 신분이 되면 군사력도 사라진 데다가 고발당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이것은 명백히 카이사르를 노린 법안이었다. 당시 폼페이우스가 단독 집정관이었으므로 이 법안은 쉽게 통과되었다. 카이사르는 일단 이것에 대응하지 않았다.
10. 갈리아 전쟁 8년째
10.1. 갈리아인들의 불온한 움직임: 비투리게스족과 카르누테스족 진압
베르킨게토릭스를 격파하는 데 성공한 카이사르는 사실상 갈리아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는 전 부대를 각지에 숙영케 한 뒤 갈리아 북부에 군대와 함께 남으면서 전후 처리를 하기로 했다.군대가 숙영에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갈리아족의 하나인 비투리게스족이 모반을 꾀한다는 소문을 들은 카이사르는 즉시 군대를 이끌고 그들을 토벌하기로 했다. 비투리게스족은 갈리아 남서쪽에 위치한 부족으로 과거 아바리쿰 공방전때 로마군에게 참패를 당했던 적이 있었다. 카이사르는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신속히 기병과 함께 갈리아 북부를 떠나 중부로 이동한 뒤 그곳에서 숙영중인 13군단과 인근의 11군단을 이끌고 남하하여 그들의 영토에 이르렀다. 비투리게스족은 재빨리 카이사르에게 항복했다.
그후 비투리게스족이 노르망디 지역의 카르누테스족에게 공격당한 것을 카이사르에게 호소하자 그는 근처의 14군단과 6군단을 소환한 뒤 그들과 함께 북상하여 카르누테스족의 영토로 침입했다. 이들은 모두 뿔뿔히 흩어져 주변 부족들에게로 달아났다.
10.2. 벨로바키족과의 대결
당시 벨가이인들의 맹주였던 벨로바키족은 카이사르와 동맹 부족인 레미족에 대한 침략을 계획하고 있었다. 레미족은 사절을 보내 카이사르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이를 들은 카이사르는 3개 군단을 차출하는 한편 라비에누스에게 2개 군단을 이끌고 오라고 지시했다. 그 뒤 라비에누스와 합류한 카이사르는 벨로바키족의 영토로 진입했다.이때 벨로바키족은 5개 부족과 동맹을 맺은 뒤 영토를 비우고 전원이 한 곳에 집결했다. 이들은 늪으로 둘러싸인 언덕위에 진을 친 뒤 카이사르군의 병력이 적으면 싸우고, 많으면 그 자리를 지키면서 버틸 계획이었다.
이 계획을 포로에게서 들은 카이사르는 이를 이용하기 위해 적은 수의 군단을 가진 것으로 위장하기로 했다. 그에겐 5개 군단이 휘하에 있었는데 3개 군단밖에 없는 것처럼 위장하여 대열을 짠 뒤 벨로바키족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렇게 카이사르는 병력이 적은 것으로 위장했으나 벨로바키족은 로마군을 공격하지 않았다. 카이사르는 전투를 원했으나 적이 낚이지 않았으므로 그 자리에 진을 친 뒤 흉벽과 참호를 파 방어를 갖추었다. 그 뒤 양측은 계속 소규모의 교전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카이사르는 전투를 원했으므로 벨로바키족이 자신감을 갖게 하기 위해 일부러 갈리아인 보조병을 내보내 패배케 하여 벨로바키족의 사기를 높여주었다. 하지만 이렇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벨로바키족은 총공세를 하지 않은 채 그들이 유리한 고지를 지킬 뿐이었다.
카이사르는 이에 대해 전략을 바꿔 병력을 늘린 후, 벨로바키족을 정면으로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따라서 그는 숙영 중인 3개 군단에게 자신과 합류하라고 명령했다. 즉 기존의 5개 군단과 합쳐 총 8개 군단으로 총공격을 감행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명령을 전한 뒤 소규모 교전을 되풀이했다. 그 와중에 벨로바키족은 카이사르 쪽에 붙은 레미족의 족장을 전사시키는 등의 큰 전과를 거두기도 했다.
마침내 카이사르가 추가로 요청한 3개 군단이 근처에 이르자 벨로바키족은 로마군에게 포위당한 뒤 군량이 떨어지는 것을 우려하여 우선 비전투원 대부분을 진영 밖으로 내보냈다.
카이사르는 이들을 추격하기 위해 병력을 재배치했는데 벨로바키족의 대열 근처에 있는 약간 높은 지역에 병사들을 내보낸 뒤 진영을 구축한 것이었다. 벨로바키족은 자신들의 비전투원이 공격받을 위험에 노출되자 그들의 진영을 이동하고자 했다. 그들은 짚과 잡목을 쌓아둔뒤 불을 질러 로마군의 시야를 완전히 차단한 후 병력을 이동하기 시작했다.
카이사르는 추격을 하고자 했으나 그들이 시야를 가려놓은 아이디어가 적중해 추격을 할 수가 없었다. 벨로바키족은 10마일 떨어진 곳에 진영을 새로 구축한 뒤 복병을 배치해 로마군이 식량을 조달할 때마다 급습했다. 카이사르는 이것을 며칠간 견디다가 마침내 벨로바키족 복병의 위치를 파악하고 일부러 그 지역에 기병과 경무장 보병, 그 뒤에는 군단병을 보내 자신이 직접 지휘했다.
로마군이 매복 지점에 이르자 벨로바키족의 족장이 직접 이끄는 정예군이 로마군을 급습했다. 기병이 이들과 싸우다가 어느 시간이 지나자 일제히 퇴각했고, 기병의 뒤를 따르던 경무장 보병이 벨로바키족을 맞이했다. 양군은 기나긴 전투를 벌였고, 점점 로마군 경보병이 우세하게 되었는데 마침내 최고 정예인 로마군 군단병이 근처에 이르자 전의를 상실한 벨로바키족은 일제히 도망가기 시작했다. 로마군은 이들을 맹추격하여 다수를 죽이고 벨로바키족의 족장까지 전사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벨로바키 족장의 이름은 코레우스라는 자로 반로마 연합을 주도하던 자였는데 그가 죽자 구심점을 잃은 벨로바키족은 사절을 보내 카이사르에게 항복했다. 카이사르는 볼모만 받는 조건으로 이들의 항복을 받아들였다.
10.3. 갈리아 전역에서의 싸움
최후의 대규모 저항이나 다름없었던 벨로바키족과 그 연합 부족을 격파한 카이사르는 병력을 쪼개 각지에 파견했다. 이들 중 군대가 집중된 곳은 갈리아 남부에 살고 있었던 안데스족으로 이들은 로마와 동맹을 맺은 픽토네스족을 공격했다. 파비우스는 카이사르에게서 받은 4개 군단으로 이들과 대치했다. 안데스족은 로마군의 전력이 강력한 것을 보고 퇴각을 시도했으나 이 첩보를 받은 파비우스가 기병과 보병을 모두 내보내 추격을 했다. 첫날엔 기병이 큰 전과를 거두었고, 다음날 밤엔 기병이 보병의 지원없이 깊숙히 안데스족을 추격했다가 기병을 섬멸하고자 한 안데스족의 대규모 공격을 받아 위태로워졌지만 군단병이 적시에 도착하여 이들을 격파했다.한편 갈리아 남부 해안가에 있었던 로마 속주에 갈리아족의 일부인 카두키족이 침공을 개시하자 2개 군단을 이끌고 있었던 카니니우스가 이들을 추격했다.
카니니우스가 접근한 것을 안 카두키족은 절벽 꼭대기에 위치한 도시 옥셀로두눔에서 농성하기로 결정했다. 로마군이 포위를 시작하자 카두키족은 알레시아 전투때처럼 포위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도시 밖에다가 진을 친 뒤 그곳에서 군량을 반입하고자 했다. 군단장 카니니우스는 첩보를 통해 그들의 움직임을 파악한 뒤 군량 수송대를 급습해 격파했고, 곧바로 군대를 모두 내보내 카두키족의 진지를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대승한 로마군은 즉시 도시 전체에 대한 포위에 들어갔다.
당시 카이사르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49]에게 15개 대대(1.5군단)를 맡기고, 벨가이인의 지역에 남겨둔 뒤 자신은 베르킨게토릭스 반란의 도화선이 되었던 부족인 카르누테스족[50]을 방문하여 부족장이었던 구투아테르를 체포한 뒤 부하 병사들에게 넘겼다. 병사들은 그를 고문한 후 처형했다.
그 뒤 카이사르는 가이우스 카니니우스 레빌루스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카니니우스가 포위를 한 옥셀로두눔의 경우, 비교적 작은 규모의 군사행동이었으므로 카이사르가 직접 지휘하기 위해 방문하자 모든 이들이 놀랐다. 카이사르는 옥셀로두눔 내로 흐르는 수원을 끊음으로써 카두키족이 물의 공급을 받지 못하도록 했다.
카이사르가 강을 모두 차단하자 카두키족은 이것을 방해하기 위해 성밖으로 나와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로마군은 이들을 간단히 무찌른 뒤 수원을 차단하는 데 성공했고, 카두키족은 어쩔 수 없이 항복했다. 카이사르는 이들에게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 항복한 카두키족 남자들의 양손을 자르는 엄벌을 내렸다.(옥셀로두눔 공방전)
10.4. 갈리아 평정
그 뒤 라비에누스가 트레베리족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했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앞서 벨로바키족 반란의 주모자 중 한 명이었던 콤미우스가 기병전에서 패배하여 항복하자 갈리아 전역은 완전히 평정되었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병력을 갈리아 전역에 골고루 배치했고 그 군대와 함께 겨울을 나기로 했다. 카이사르의 총독 임기는 다음해 봄 3월에 완료가 되었기 때문에 이 겨울이 갈리아에서 보내는 카이사르의 마지막 겨울이 될 것이었다. 카이사르는 겨울 동안 벨가이인의 땅에 머물면서 갈리아 제부족의 수장들을 초대해 그들을 위로하며 충성을 확인하는 등 로마의 입지를 다지는 데 주력했다.10.5. 원로원과의 긴장 고조
겨울이 끝난 뒤 카이사르는 자신의 휘하에서 군사경험을 쌓은 바 있었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호민관에 입후보시켜 당선시켰다. 그 뒤 임기 종료 후 집정관 출마를 생각한 카이사르는 선거운동을 하기 위해 루비콘 강 이북의 이탈리아 도시를 방문했다.카이사르가 이탈리아에 도착한 것은 갈리아 총독으로 부임한 뒤 처음있는 일로 로마인들은 갈리아 제패라는 놀라운 업적을 이룩한 카이사르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환영했다. 그가 가는 모든 도로와 문은 아름답게 장식되었고 그가 가는 곳곳마다 로마 시민은 아이들과 함께 그를 환영했다. 그가 도착한 도시마다 제물을 바치며 신에게 감사하는 의식을 거행했고, 그의 거처마다 호화로운 잔치를 벌였다.
카이사르는 이렇게 화려한 순회를 한 뒤 자신의 군대를 갈리아의 트레베리족 영토[51]에 집결시킨 후 그곳으로 돌아가 전군을 사열했다. 그 뒤 자신의 부관 라비에누스[52]를 이탈리아에 파견하여 계속 선거운동을 하도록 했다. 이때 폼페이우스 측에서 라비에누스에게 접근했고 라비에누스는 뜻밖에도 폼페이우스에게로 넘어갔다. 라비에누스가 폼페이우스의 클리엔테스였으므로 넘어간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파트로누스 - 클리엔테스 관계는 정치적인 이익을 공유하는 관계였으므로 라비에누스가 절대적으로 따라야 했던 관계는 아니었다. 가령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경우 자신의 파트로누스였던 메텔루스[53]를 맹비난하면서 집정관에 당선된 바 있었다. 라비에누스가 폼페이우스에게 넘어간 것은 이러한 관계에 얽매였기보단 그의 정치적인 입장이 원로원파와 같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가령 그의 나이는 당시 50대 중반으로 체제 고수라는 원로원파의 입장을 지지하기에 적합한 나이었다.
카이사르는 호민관들 중 당시 로마에서 유망한 젊은 정치가로 손꼽혔던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의 빚을 모두 탕감해주어 그를 매수하고 원로원파에게 맞서게 했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총독 신분과 군사력을 유지한 상태에서 집정관에 출마하길 원했고, 이를 쿠리오를 통해 원로원에 관철시키고자 했다.
원로원은 카이사르가 베르킨게토릭스를 격파한 겨울, 집정관이었던 폼페이우스와 협력하여 새로운 법안을 제출한 바 있었다.
1. 총독이 루비콘 강을 군대와 함께 넘을 경우, 반역으로 규정한다.
2. 부재중 입후보는 금지되며, 공직에 출마할 경우 반드시 로마 시내로 들어와 후보 등록을 해야 한다.
위의 법안은 집정관 출마를 노린 카이사르를 노린 것이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2. 부재중 입후보는 금지되며, 공직에 출마할 경우 반드시 로마 시내로 들어와 후보 등록을 해야 한다.
1. 카이사르가 집정관에 출마하기 위해선 총독직을 내려놓아야 했다. 그 이유는 총독은 로마 시내로 들어올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2. 민간인의 신분으로 집정관 출마를 한 뒤 집정관 투표까지는 기간이 있었는데 그동안 카이사르가 원로원측으로부터 고발당할 경우, 정치 생명이 끝나게 될 것이 분명했다.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쟁에서 군단을 마음대로 편성하고, 속주에서 군단을 모집했으며, 총독의 관할 밖의 지역인 게르마니아와 브리타니아 지역을 원로원의 허락없이 공격하는 등 월권 행동을 한 바 있었다.
3. 카이사르가 군대 없이 루비콘 강을 건너는 순간 군단 지휘권을 내려놓게 되어 있었는데, 당시 이탈리아 반도 내에 원로원이 파르티아 원정 명목으로 편성해 놓은 군대가 사실상 폼페이우스의 지휘하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 군단에 대해 카이사르는 염려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카이사르는 원로원에게 부재 중 출마를 허락해 줄 것을 요청했고 이것을 원로원이 강경하게 거부하자 호민관을 통해 민회에서 법안을 가결하고자 했다.
그러나 원로원은 폼페이우스가 동원한 옛 퇴역병들을 민회에 출석시켜 훼방을 놓는 한편 크라수스의 복수를 명목으로 파르티아 원정을 하겠다고 공표한 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에게 군단병을 1개 군단씩 차출하겠다고 선포했다. 이때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에게서 빌린 군단을 내놓겠다고 답했고, 카이사르는 2개 군단을 울며 겨자먹기로 원로원에게 내놓았다. 이 2개 군단은 집정관에게 인도된 뒤 로마 근교에 머물고 있었다.
따라서 카이사르는 충성스러운 13군단과 함께 남하한 뒤 원로원 측에게 최종적으로 서신을 보냈다. 이 서신에서 카이사르는 자신이 갈리아 제패로 로마에 엄청난 영광을 안겨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은 부당함을 언급한 뒤, 원로원이 원한다면 자신이 군대를 해산하겠노라고 선포했다. 단 이렇게 되려면 폼페이우스의 군단도 같이 해산해야 하며, 두 사람이 군대를 해산함으로써 로마는 내전의 위협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그 뒤 원로원에게 군대 없는 총독의 신분으로 입후보하여, 자신의 신분의 안전함이 보장된 상태에서 집정관에 출마한다면 이는 모두에게 바람직한 결과가 될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카이사르에게 있어 파멸을 피할 수 있는 상태에서의 최대한의 양보였다. 그러나 원로원은 이를 거부했고 결국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넘어가면서 로마는 격렬한 내전으로 치닫게 되었다.
참고항목: 카이사르의 내전
11. 주요 전투
- 마게토브리가 전투(기원전 63년)
- 아라르 전투(기원전 58년)
- 비브라테 전투(기원전 58년)
- 보주 전투(기원전 58년)
- 악소나 전투(기원전 57년)
- 사비스 전투(기원전 57년)
- 아투아투키 공방전(기원전 57년)
- 옥토두루스 전투(기원전 57년/56년 겨울)
- 모르비앙 해전(기원전 56년)
- 카이사르의 1차 브리타니아 원정(기원전 55년)
- 카이사르의 2차 브리타니아 원정(기원전 54년)
- 암비오릭스의 난(기원전 54년 ~ 기원전 53년)
- 아바리쿰 공방전(기원전 52년)
- 게르고비아 공방전(기원전 52년)
- 루테티아 전투(기원전 52년)
- 빈게네 전투(기원전 52년)
- 알레시아 전투(기원전 52년)
- 옥셀로두눔 공방전(기원전 51년)
[A]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의 아들[A]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의 아들[3] 현대 스위스의 국호인 '헬베티아 연방'의 유래이다.[4] 당시 재판은 사람들이 광장에 모여 투표하는 방식이었다. 이들 모두가 배심원이었는데 오르게토릭스는 자신의 사람을 광장에 소집한 것이었다.[5] 발칸반도 서부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구 유고슬라비아에 해당하는 지역이라고 보면 된다.[6] 이건 카이사르의 전쟁 의지와는 상관없다. 타국군이란 기본적으로 규율 잡힌 무장강도라고 생각하는 게 편하며, 동맹국 군대나 심지어 자국군도 자국의 민간인을 약탈한 기록이 역사에 차고 넘친다. 하물며 국가도 아닌 부족이, 이주하겠다고 어중이떠중이 부족민까지 전부 모아다 이동하는 상황이라면 이건 규율도 안 잡힌 무장강도떼라고 간주해야 한다. 실제로 하술하겠지만, 헬베티는 세콰니족의 영토를 조용히 지나가기로 약속해놓고서는 약탈을 저질렀다.[7] 이렇게 신속한 2개 군단의 편성은 카이사르가 집정관 시절에 이미 모병을 시작했다고도 볼 수 있다. 단, 집정관이 원로원의 허락없이 군단을 편성하는 것은 불법이었기 때문에 카이사르는 그의 《갈리아 전기》에서 새로 모집했다라고 꾸준히 서술했다.[8] 그들은 20일이 지나도록 건너는 것을 마무리짓지 못했다[9] 갑자기 카이사르가 추격을 중지하고 방향을 튼 것은 헬베티족의 공격을 유도했을 가능성도 있다. 따라서 헬베티족의 공격을 받자마자 즉시 포진과 짐수레의 배치가 신속히 이루어 진 것이었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하더라도 로마군의 기동과 신속성, 유연성은 경이로운 수준이었다. 이 전투는 전형적인 로마군의 장점이 나타나는 것이었는데 기병과 보병의 연계, 신속하고 재빠른 병력의 포진, 필룸으로 적의 방패를 무력화시키는 것, 그리고 적의 급작스러운 우익 측면 협공 때 보이는 신속한 재배치의 움직임들이 그러하다.[10] 그는 위에 언급한 둠노릭스의 형이었다.[11] 당장 제1차 포에니 전쟁을 통해 시칠리아 섬의 패권을 획득할 당시, 로마의 명분은 시칠리아 내 동맹국인 메시나의 구원 요청이었다.[12] 요점은 카이사르와 아리오비스투스 둘 다 외지인이므로 카이사르가 그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권한은 없다는 것이다. 또한 아리오비스투스는 로마에 적대적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원로원으로부터 "로마인의 친구"라는 칭호를 받았을 정도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카이사르로서는 당장 그를 칠 명분이 없었다.[13] 이 부분에서 《로마인 이야기》만 읽은 한국인 독자들이 잘 이해가 안 간다는 반응을 보였는데, 이는 《로마인 이야기》가 과거 로마군과 게르만족이 싸운 킴브리 전쟁에서 로마군이 무려 80,000명의 전사자를 냈던 아라우시오 전투같이 게르만족한테 참패했던 전투들을 전부 삭제하는 한편, 로마군이 게르만족을 무찌른 전투들은 아주 생생하게 묘사하는 식으로 교묘한 역사왜곡을 저질렀기 때문이다.[14] 로마군은 무장의 질은 당대에 손꼽힐 정도였다. 그들은 투구로 머리와 목과 턱을 감쌌고, 어깨와 배 등도 갑주로 감싸고 있었다. 또한 방패에도 돈을 아끼지 않고 커다랗게 만들어 쓰고 있었다. 비록 게르만족이 용맹하다하나 이렇듯 무장의 질의 차이가 큰 상황에서 백병전이 벌어지면 밀릴 수 밖에 없었다.[15] 로마군의 장점 중 하나는 이렇게 과감한 돌격을 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앞서 헬베티족과의 싸움에서도 필룸을 던진 이후 로마군이 적의 진영에 뛰쳐들어갔고 이러한 모습을 게르만족과의 싸움에서도 보여주었다. 이러한 과감한 움직임이 가능했던 것은 각 부대에 그들을 통솔하는 백인대장들이 선두에서 이끌었고, 이때문에 병사들이 접전에 대한 공포를 줄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소대장들의 존재는 당시 2,000년 전의 고대 시대 병과에선 이례적인 것이었다. 백인대장들은 전투 경험이 매우 풍부하고 용맹한 전투기술을 가진 자들로 이들은 기회를 포착하면 자신의 소대를 이끌고 적진에 선두로 뛰어드는 것을 꺼리지 않는 자들이었다. 선두에서 병사들을 이끄는 이들의 존재로 인해 로마군의 병졸들 역시 자살행위나 다름없어 보이는 적진에 대한 돌진을 과감하게 감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16] 제1차 삼두정치의 일원인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의 차남이었다.[17] 훗날 카이사르의 움직임을 봤을 때 이들의 의심은 사실이었다.[18] 벨기에인들의 조상[19] 카이사르가 총독직을 수행했던 갈리아 키살피나는 이름은 갈리아이나 현재의 북이탈리아에 해당한다. 갈리아족은 실제로 지금의 프랑스, 북이탈리아를 지배하던 민족이었고 때문에 북이탈리아 지역도 갈리아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번역에 따라 갈리아 키살피나를 가까운 갈리아, 갈리아 트란살피나를 먼 갈리아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갈리아 키살피나는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이탈리아 본토로 편입되었다.[20] 이는 《갈리아 전기》 5권 38에 이들이 재등장할 때 언급된다.[21] 로마 최고의 부자이자 제1차 삼두정치의 일원이었던 크라수스의 차남이었다.[22] 이는 히틀러의 돌격대(SA)를 연상시킨다. 당시 로마 공화국의 수도 내에는 무장집단을 두는 것이 불법이었으므로, 경찰 같은 조직이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클로디우스 휘하 폭력단의 전횡을 제지하기 어려웠다.[23] 이 갈바의 풀네임은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로 훗날 네로 황제 사후 잠시 황제 자리에 올랐던 갈바의 증조부였다. 카이사르의 부관 출신이었지만 카이사르가 자신을 콘술로 추천해주지 않았다고 해서 카이사르를 배신하고, 내전기때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의 편에 가담했다. 그래서 나중에 페디우스 법에 따라 사형을 언도받았다.[24] 위의 12군단, 7군단 모두 네르비족과의 사비스 전투에서 좌익을 담당해 막대한 피해를 입은 군단들이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이 군단을 곧바로 전투지에 투입하는 여유를 보였다.[25] 크라수스는 제1차 삼두정의 일원인 크라수스의 차남이었다. 당시 그는 젊은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군사적인 능력이 있었는지 카이사르는 크라수스에게 라비에누스에 이어 서열 3위나 다름없는 직위를 부여했다. 첫해의 헬베티족과의 전투에서 크라수스는 기병대장(Master of Calvary)을 맡았는데 이는 매우 고위직으로 군단 전체에서 두 번째 내지 세 번째에 해당하는 직책이었다. 가령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킴브리족 및 테우토니족과 회전을 벌였을 때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바로 기병대장 직책을 맡았었다. 이 크라수스는 그의 아버지가 파르티아 원정을 수행했을 때도 기병대장직을 맡아 종군했는데 카르헤 전투에서 허무하게 전사했다. 그의 목은 창에 꽂힌 채 로마군에게 전시되었고, 젊고 상당히 유망했던 아들의 죽음을 목격한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심한 충격을 받아 전의를 완전히 상실한 채 부상병도 내버리고 퇴각하여 로마군은 전멸당하는 참패를 당하게 되었다.[26] 사비누스는 카이사르에게 상당히 잘 보였는지 계속 중대한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는 부관으로의 직책으로는 라비에누스와 맞먹었다. 그러나 사비누스는 나중에 겨울 숙영지에서 적의 협박에 넘어가 자신의 군단을 모두 전멸시키고 본인도 전사하는 중대한 판단 착오를 일으켰다.[27] 이 브루투스가 바로 저 데키무스 브루투스로 마르쿠스 브루투스와 함께 카이사르의 암살을 주도하는 인물이 된다.[28] 이들은 카이사르가 갈리아 전쟁 첫해에 격파한 그 민족이었다.[29] 훗날 윈스턴 처칠은 이 날을 언급하며 대영제국의 역사가 시작된 날이라고 평가했다.[30] 카이사르는 자율을 보장하는 입장을 보였으나 반 로마파가 유력부족의 수장이 되는 것에 대해서는 참견하는 일이 많았다. 예를 들어 트레베리족의 경우, 인두티오마루스와 킨게토릭스가 대립하고 있었는데 반 로마파의 인두티오마루스에 대하여, 카이사르는 다른 부족장들에게 친 로마파인 킨게토릭스를 지지하라고 노골적으로 부탁했으며, 인두티오마루스의 측근들을 대거 볼모로 지명하여 인도받았다. 이러한 태도는 하이두이족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하이두이족의 반 로마파의 수장인 둠노릭스에 대해 카이사르는 그를 언제나 기병으로 소환하여 자신의 근처에 두었다. 이로써 둠노릭스는 정치에 참여하기 어려웠고, 또한 그의 의도와 정반대로 카이사르가 로마의 패권을 다지는 일을 군사적으로 돕는 일을 하게 되었다.[31] 이토록 배의 숫자가 많은 이유는 강을 건너는 데 상인들의 배와 갈리아인들의 어선들을 모두 동원했기 때문이었다. 규모가 큰 해전의 경우 2~300척의 배가 동원되었는데 이러한 배들은 트리레메, 이후엔 콰드리레메라 불리는 전함들로 카이사르가 동원한 배와는 달리 엄청나게 크고 비싼 전함들이었으므로 카이사르가 동원한 배의 숫자와 단순히 비교할 수 없다.[32] 10개 대대면 1개 군단에 해당된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1개 군단을 남기기보다는 각 부대에서 차출한 대대로 1개 군단에 해당되는 숫자를 구성해 남겨 이러한 표현을 쓴 것이다.[33] 카투벨라우니족 출신으로 추정된다.[34] 카시벨라우누스는 카이사르에 맞서 그야말로 게릴라전의 교과서라고 불릴 정도의 뛰어난 전술가적인 면모를 보였다. 토리노반테스족의 경우, 브리타니아의 강력한 부족이었으나 왕이 살해될 정도로 참패했던 것을 보면 카시벨라우누스는 이미 브리타니아 내에서 적수가 없었던 명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35]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의 동생.[36] 제1차 삼두정의 일원인 크라수스의 장남이었다. 이전에 기병대장으로 맹활약한 푸블리우스 크라수스는 아버지가 이끄는 파르티아 원정에 참여하는 중이었다.[37] 벨가이인들은 카이사르에게 매우 적대적인 부족인 데다가 로마에 적대적이었던 게르만족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었다. 타스게티우스의 경우, 카이사르가 즉위한 지 3년째에 살해당했다고 언급되었는데 시기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면 카이사르가 벨가이족을 격파한 뒤 바로 족장으로 임명된 친 로마파 귀족으로 보인다. 그가 공공장소에서 살해당할 정도이면 친로마파 세력에 대해 벨가이인들 사이에서 상당히 부정적인 여론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38] 아이러니하게도 카이사르의 정적이었던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의 친동생이었다.[39] 공격당한 지 11일이 경과했다. 하도 네르비족과 혈전을 치르느라 양군 다 3일 동안이나 이 편지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40] 카이사르는 2개 군단을 동원했는데 따라서 7,000명은 지나치게 적은 숫자이다. 아마도 카이사르는 로마 정규군인 군단병의 숫자만 언급한 것이거나 군단 정원이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41] 여담으로 카이사르는 전쟁 기간동안 딸뿐만 아니라 전쟁 5년차였을 때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장례를 치르지 못했다.[42] 로마군의 병사 한 명 한명의 무장 수준은 갈리아 귀족들의 무장 수준에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높았다. 실제 갈리아 고위 전사의 무장은 체인메일과 방패, 철제 투구 정도였는데 이는 로리카 하마타 등으로 무장한 로마 군단병의 무장과 거의 비슷한 것이었다. 게다가 국비로 이들을 훈련시키고 꽤 높은 수준의 월급을 지급해주며 여러 병기를 제공했으므로 1개 군단의 가격은 상당히 비싼 편이었다. 이때문에 로마는 전성기때조차 10개 군단이 넘는 병력을 한 전투에 동원하는 일이 없었다.내전기에 양쪽 합쳐서 10개 군단을 넘은 적은 많았다[43] 아이러니하게도 카이사르가 이곳에 수비하라고 배치한 군단은 에브로네스족에게 전멸당한 14군단의 이름을 물려받은 새로운 14군단이었다. 즉 카이사르는 이전에 14군단이 전멸당한 장소를 수리한 다음, 새로 뽑은 군단병에게 14군단이라는 이름을 붙여 군수품과 함께 주둔하게 한 것이었다. 보통은 이것을 불길하게 여겼을 법도 하지만 카이사르는 일종의 호기를 부린 것 같다.[44] 하지만 이건 로마법에 의하면 불법행위였다. 독재관은 문제가 생겼을 때만 임명하고, 문제가 해결되면 해임되며 최대 임기도 집정관보다 짧았다.[45] 이를 본다면 갈리아인들이 얼마나 독립을 염원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46] 현재의 셰르주 부르쥬[47] 700명은 축소된 것이고, 현대의 역사가들은 수천 명 단위의 큰 손실이 발생했을 것이라 보고 있다. 그 근거는 바로 백인대장 전사자 수 인데 46명의 백인대장이 죽었다는 것은 46개의 백인대가 지휘관을 잃을 정도로 학살당했다는 것이다. 카이사르의 주장대로 700여명이 전사했다면 손실율이 20%도 되지 않는데 백인대장이 전사할 정도의 전투에서 손실이 그 정도에 그쳤다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만약 통상적인 전멸의 기준인 30%를 잡고 계산하면 1200명이 넘는 전사자가 발생한 꼴이된다.[48] 크라수스가 카르헤 전투에서 참패하고 전사하면서 제1차 삼두정치가 와해되고, 폼페이우스는 결정적으로 원로원파에 넘어간 상황이었다.[49] 이때 안토니우스는 재무관으로서 갈리아 전쟁 막바지인 8년째에 등장했다. 카이사르는 그를 유망하다고 판단했으며 따라서 그에게 군단병을 꽤 자주 이끌도록 했다. 그리고 갈리아 전쟁 이후에는 로마로 귀국하여 호민관에 당선되었다.[50] 이들은 베르킨게토릭스의 대규모 반란때 로마인들을 최초로 습격함으로써 다른 부족들에게 본보기를 보인 바 있었다.[51] 이곳은 라인 강 서쪽 지역이었다.[52] 라비에누스는 카이사르 밑에서 갈리아 전쟁의 사실상의 2인자의 역할을 수행했던 유능한 인물이었다. 카이사르는 젊은 장교들 위주로 군사활동을 맡겼으나 라비에누스만은 예외적으로 카이사르와 동갑인 인물로 호민관을 역임한 바 있었던 노련한 인물이었다. 그는 정치에 입문한 이후 쭉 폼페이우스의 후원을 받았던 인물이었는데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가 제1차 삼두정치를 했던 해의 호민관으로서 폼페이우스의 의사를 반영하는 정책을 평민집회에 입안할 때 카이사르와 만나게 되었고, 그때 친분을 갖게 되었다. 그 친분으로 갈리아 전쟁에 참여하게 된 것이었다.[53] 메텔루스 피우스의 아버지. 유구르타 전쟁 당시의 집정관으로 마리우스의 상관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