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군복
하위 문서: 군복/한국군/육군
#!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
1. 역사
1.1. 전근대
철과 가죽 또는 나무 등 여러가지 종류의 재료들로 만든 보호복이었다. 이때는 군복이라기 보다는 각 부대별 내지는 지역별로 상황에 따라서 갑옷을 입고 있었으며, 나중에는 갑옷을 입어도 죽는 건 같아서(무기가 너무 발전해버려서) 면제배갑과 흔이 아는 구군복을 입었다. 보통 고려시대부터 무관들은 철릭을 입었다. 그래서 권위를 위해 장수들의 경우 여전히 갑옷을 입었다. 다만 총알도 막게 하기 위해서 갑옷의 무게가 매우 무거워졌고 그런 만큼 비싸져 많이 보급되지는 못했다. 사극에 지겹게 나오는 포졸복은 사실 평시에 입던 근무복이라고 보면 된다. 그리고 조선 후기 중앙군을 제외한 군영은 오방전복과 전립을 착용했고, 중군 훈련도감은 호의와 전건을 착용했다.본격적인 근대식 군복의 등장은 1881년에 창설된 별기군으로부터 시작된다. 임오군란 이후 별기군이 해체되고 청나라의 영향 하에 설립된 친군영은 청군 군복[1]을 잠시 착용했으나 1882년부터는 별기군의 것과 비슷한 독자적 군복을 채택했으며 1884년 갑신의제개혁 이후 전군에 보급되었다.
군모의 경우 기존의 둥근 전립이 아닌 양반들이 쓰던 흑립에 가까운 형태로 변모했다. 붉은 세로 띠에는 소속 부대를, 가로 띠에는 계급이나 성명을 기재했다. 장교의 경우 깃털 장식을 달았다. 상의는 마고자 형태의 검은 상의[2]였으며 장교들의 경우 위 사진처럼 소매의 붉은 줄의 2개였다.[3] 위 사진의 저고리 하단의 푸른 부분은 상의와는 별개로 방호력 강화를 위해 입는 내갑의다. 바지는 청색이였으나 흰 바지를 착용한 모습도 종종 보인다. 장성급 장교나 지방군 병사 일부는 구군복과 포졸복 등의 구형 군복을 계속 착용했다.
2024년에 일러스트레이터 최민준(필명 금수) 작가가 일러스트로 보는 조선의 무비-군사복식편이라는 책을 통해 조선시대 군복들을 총정리하였다.
1.2. 근대
1.2.1. 대한제국군
대한제국 육군 장교단
대한제국 육군 졸급 병사 복식 재현 사진. 구한말엔 군복제가 상당히 급격하게 바뀌었는데 1907년 군대 해산 직전에 착용하던 군복이다.[5]
대한제국군의 훈장(위) 군모(왼쪽)과 견장(오른쪽). 견장에는 참위(소위) 계급장이 달려있다.
대한제국 보병 부위(지금의 중위) 예복과 상복용 견장[6] |
대한제국 보병 정위(지금의 대위) 예복 |
대한제국 기병 정위 예복 |
계급장은 어깨 견장과 소매의 ㅅ자형 수장 계급장을 함께 사용한 점이 독특한 점이다.
대한제국 포병 참령(지금의 소령) 예복 |
대한제국 육군 참장(지금의 소장) 예복 |
대한제국 육군 부장(지금의 중장) 예복 |
황제 정복, 황제 상복, 태황제 예복(왼쪽부터) |
<colbgcolor=#29176e> 대원수 정복[7] | <colbgcolor=#29176e> 대원수 정복을 입은 고종(왼쪽)과 원수 정복을 입은 순종(오른쪽) |
대원수 상복 | 대원수 상복을 입은 고종 |
한국군의 전투복 역사는 길게 보자면 대한제국 시절의 별기군 제복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개항 초 일본이 그러했듯 서양식 제복을 흉내낸 것으로 1895년(고종 32년) 4월 9일 칙령에 의해 최초 육군 훈련대의 보령과 장교들만 착용하였으나, 같은 해 9월 5일에는 칙령 165호로 육군 모두에게 착용하도록 하였다. 그뒤 1897년 육군복장규칙에 의해 제정되어 이어 5월 22일에는 칙령 제24호로 이를 세분화하여 대례장, 군장, 예장, 정장, 상장의 5종으로 전반적인 정비를 이루었다. 이때부터 대한제국 문관의 관복은 금실로 무궁화무늬와 오얏꽃무늬를 새긴 프록 코트로 정해졌고 무관의 관복은 대한제국 군복으로 정해지게 된다.
허나 1907년 8월 일제의 강압으로 군대가 해산되면서 제대로 된 정규 군복의 역사는 잠시 끊겼고, 이들 중 일부가 일본의 강제해산에 저항하여 탈영하거나 의병활동에 참가했기 때문에 초기 의병들 옷 중에는 이 옷도 있었다. 공교롭게도 두달 후인 10월 1일 그대로 친위대로 남아있는 군인들 한정으로 칙령 제26호 육군복장제식으로 최종 개정되었다.
여담으로 이 대한제국 군복은 한국인들의 기억 속엔 별 관심도 없는 군복이지만, 이때의 군복이 진짜 멋있었다면서 그리워하는 의견도 꽤 존재한다. 사실 알록달록해서 너무 눈에 띄는 현 사관생도 예복이나 민간에서 소위 군바리라 놀림받는 현 국군 병사들의 전투복과는 달리 대한제국 군복의 디자인의 차분한 검은색 바탕에 강렬한 붉은색 디자인과 화려한 금색 단추와 실이 자아내는 형언할 수 없는 간지폭풍은 개천 이래 역대 한국군 역사상 최고 디자인의 군복이라 할 만하다. 이러한 높은 평가 덕분인지 이후 대한민국 육군의 신형 군사경찰 행사복이 대한제국군 헌병 제복에서 모티브를 따온 디자인을 채용하게 되었기도 하다.
군복의 모델은 일본군 군복을 기초로 하고 있으나 일본 군복 또한 프로이센 왕국군 군복을 기초하고 있었고, 이후 러시아 제국과 프랑스 군복의 영향을 받았다. 다만 군복은 대한제국 정부가 자체적으로 국내에서 생산된 것이 아닌 해외에서 위탁형식으로 생산해 수입하거나 아니면 부대내에서 직접 생산하게 되어있었고 그나마 1900년 4월 17일 육군 참장이었던 백정기가 올린 12조의 상소문중 국산물산 장려와 재정낭비를 막기 위해 국내에서 생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1901년 이용익이 육군피복제조소를 설립해 국내생산이 시작되었다. 또한 1903년 1월 18일 군부대신이었던 신산선의 건의로 장관, 영관, 위관의 복장중 상장은 국산 직물을 이용해 만들기 시작했다.
계급장은 견장에 태극과 별의 색깔, 개수 등을 구분하여 사용하였다. 여기 참고 그 외에도 위의 대한제국 육군참장 군복처럼 소매에 ㅅ자 형상 줄의 갯수로 표시하는 수장 계급장, 모자 장식선, 칼라장, 바지 측선으로도 구분이 되었다. 줄의 갯수는 1줄(참위)~11줄(대원수).
병과별 색상은 붉은 색은 보병, 노란색은 포병, 초록색은 기병, 흰색은 헌병, 자주색은 공병, 옥색은 의무병이였다.
병과색은 시기마다 다른 곳에 적용되었는데, 1895년에는 바지의 옆선만 병과별 색상이 적용되었으나, 1897년 부턴 모자의 아랫부분과 정수리의 이화문, 자켓의 옷깃과 소매와 여밈부, 바지의 옆선에 병과별 색상이 적용되었고, 1900년 이후로 모자는 모두 보병의 배색을 쓰기로 통일 되었다가, 1900, 1902년에 헌병, 기병 병과가 다홍색/홍색 상의와 모자를 도입하고 1901년 군악 병과가 홍색 하의와 모자를 도입하면서 해당 병과만 별도 배색의 모자가 지정된다.
가령 1905년을 기준으로 헌병은 흰색 장식의 다홍색 모자에 흰색 장식의 다홍색 재킷과 흰색 장식의 검은색 바지를 착용하나, 같은 시기의 포병은 보병의 홍색 장식의 검은색 모자에 황색 장식의 검은색 재킷과 황색 장식의 검은색 바지를 착용했다.
허리에 두르는 장식띠[8]는 병과와 무관하게 홍색이었다.
2018년에는 풀 세트가 보존되어 있었던 대한제국군 진위대 장교 군복이 후손에 의해 기증되었다. 황희의 후손으로서 위관급 장교로 근무했던 황석(1849∼1938)이 착용했었던 군복으로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으며, 설립이 검토되고 있는 대한제국 무관학교 기념관에 보존될 예정이라고 한다.
06식 기병 정위 상복 |
러일전쟁 이후에는 일본군의 영향을 강하게 받으면서 전투복에 해당하는 상복(常服)이 일본군 군복처럼 황갈색으로 변경되며, 소매를 제외한 모든 부분에서 병과별 색상이 생략된다.
황갈색 상복을 입고 있는 조동윤 부장[9] |
대한제국 경무청 경찰 제복에 대한 블로그, 역시 우용곡 작가 작품이다.
#
2022년에는 초초혼 작가가 대한제국 군복 자료를 집대성한 자료집 '그림으로 보는 대한제국의 군복'을 개인출판 하였으며, 2024년에 도서출판 길찾기에서 개정판이 출판되었다.
1.2.2. 일제강점기
일제강점기에 항일 무장 투쟁 독립운동가들이 입었던 군복.1.2.2.1. 의병
위 사진에서 오른쪽에서 4번째에 있는, 검은 동코트를 입고 검은 정모를 쓴 의병이 눈에 띈다. 저건 사실 대한제국 군복으로, 상술했듯 군대해산으로 전부 강제로 옷을 벗게 된 군인들이 크게 반발하면서 의병들의 항일 운동에 참여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 대한제국 군복은 의병의 제식 군복은 아니었다. 본인들이 갖고 있는 전투에 유리한 옷 중 가장 좋은 옷이기 때문에 입은 것. 의병은 제식 복장이 없었고 위 사진처럼 그저 전투하기 편리한 제각각인 옷을 알아서 마련해서 입었다. 심지어 무기도 토종 화기인 화승총부터 대한제국군의 신무기인 게베어 1871까지 제각각이었다.
그러나 결국 의병들도 13도 창의군의 서울 진공 작전 실패로 남한대토벌이라는 역습을 맞고 사실상 해체. 뿔뿔이 흩어진 의병들은 만주로 건너가 이제 그냥 의병이 아닌 독립군이 되어 이번엔 통일된 제식 복장과 무기로 일본군에 대한 복수의 칼을 갈게 된다.
1.2.2.2. 독립군
독립군 결사대 장교 군복[10]
독립군 결사대 사병 군복
독립군 결사대 사병 견장
독립군 결사대 완장. 보통의 완장과는 달리 팔에 끼우는 방식이 아니라 박음질 해서 붙이는 방식이다.
의병의 정신을 계승한 독립군 부대들은 만주지역에 분포하였는데, 경술국치로 인하여 일본으로부터 나라를 잃음으로써 정부 차원의 지원이 있는 정상적인 생산라인이나 지휘체계를 갖추지 못한 실정이었다. 이로 인해 기존 의병을 비롯한 독립군 부대들의 무기나 복장은 각양각색이었지만, 군복이 갖는 위엄과 소속감, 나아가 충정과 결의를 다지기 위한 도구로써 군복을 제작하고 착용하였다.
독립군의 군복은 완벽히 보존된 것은 현재로써는 없다. 독립기념관 5관에 전시된 독립군 군복, 그러니까 바로 위의 사진으로 기재된 군복은 실물이 아니라 고등경찰기록 제34101 호의 글과 35383호의 글, 삽화를 기반으로 제작한 것이다.[11]
1920년대 초반까지 잔존했던 독립군은 조선식 옷을 개조하거나, 중국[12]군경, 군벌의 군복을 모방하거나, 소련군 군복을 착용했다는 기록[13]이 있고, 일본군 군복 역시 상당수 모방했을 것으로 보인다.
중국 군벌 군복과 소련군의 군복을 착용한 이유는 만주지방에서 구하기 쉬운 군복이었고, 일본군복을 착용한 이유는 피아식별을 어렵게 해서 교란한 뒤 섬멸하기 위해서 착용하였다. 본래 독립군의 전투교리는 열세한 전력차이로 인하여 전면전을 되도록 피하는 대신 지형지물을 이용한 게릴라 전술을 적극 활용하였는데, 이러한 전투교리와 더불어 적군과 비슷한 군복을 입고 피아식별이 어렵게 한 후 교란 및 섬멸하기 위해 일본군복과 비슷하게 만들어 졌다.[14]
다만, 사진 상의 독립군 군복은 일본군 군복의 형식이라기 보다는, '일본군 군복을 모방한 중국 군벌의 군복'[15]에 더 가까운 형상이다.[16]
위 사진의 군복을 착용한 독립군이 활동하던 시기는 1920년대이고, 동시대 일본의 군복인 45식 군복[17]과 매우 흡사한데, 이는 당시 중국 군벌들 상당수가 45식의 형태를 모방해 사용하였고, 이가 독립군 세력에도 유입되었기 때문이다. 쑥색(또는 짙은 초록) 바탕의 군복, 어깨에(긴 쪽이 어깨 앞뒤로 가도록) 부착하는 붉은색 견장,[18] 스탠딩 카라 형식의 옷깃, 카라 가운데 부분의 붉은 카라장[19] 이 있는 등, 45식 군복과 매우 유사하게 생긴 것이 특징이다. 다만, 왼쪽 팔 부분에는 대한제국의 국화인 오얏꽃(李花)과 별이 그려진 5각형 형태의 표식을 완장 형태로 부착하였다.
국사 교과서에서 봤을 법한, '청산리 전투 직후 촬영된 독립군'으로 알려진 사진.
맨 앞에 앉아있는 인물은 김좌진 장군으로 알려져 있다.[20]
맨 앞 김좌진 장군 군복의 카라장과 견장의 형태를 확인할 수 있는데, 사진이 희미한 흑백이어서 견장의 도안은 알기 힘들고 부착된 모습만 대강 파악할 수 있지만, 김좌진 장군 뒤에 정렬한 군인들 중 앞줄 오른쪽 두번째와 세번째 군인이 입고 있는 군복에서 스탠드 카라 형식의 목깃은 명확하게 확인된다.
우용곡 작가가 그린 북로군정서군의 군복 모습.[21]
북로군정서의 흰색 군복을 착용한 김종진(金宗鎭)
위 자료의 특징들로 미루어 보아, 이 당시 독립군들은 일본군의 45식 군복을 모방한 중국 군벌의 군복을 들여오거나 복제 생산 하고, 독립군 고유의 표식과 계급체계를 적용하여 착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군모의 형태로는 인민모 또는 뉴스보이 캡의 형태 내지는 크라운형 정모 종류의 모자를 썼고[22], 가운데에 초록색 바탕의 저시인성 태극기를 부착한 것으로 보인다.
이 당시에는 독립군 부대들이 산발적으로 활동을 하였으므로 앞서 말한 이유를 제외하면 딱히 독립군 나름대로의 군복을 확립할 이유가 없었고, 독립군의 규모는 일본군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매우 적은 규모인데다가, 주 활동 무대도 국내가 아닌 만주지방이었기 때문에 산업적 인프라가 높지 않아 대부분 적은 수의 미싱기와 포목을 이용하여 가내생산식으로 제작 및 보관[23]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형식의 군복은 자유시 참변 이후 독립군의 존재가 사실상 미미해질 때 까지 유지되어 소규모로 생산된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야인시대에서 김두한의 꿈속에 회상되는 김좌진 장군이 이 옷을 입고 있다.
1.2.2.3. 광복군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전례식 당시의 사진 |
1943년 한국광복군 성립 3주년 기념식 후의 촬영사진. |
한국광복군 사병용 전투복[26] | |
한국광복군 장교용 전투복 | 한국광복군의 동계 피복 |
임시정부군의 동코트. 전반적으로 폴로코트와 흡사하다. |
독립군 이후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의 경우 엄연히 복제 규정이 존재했다. 기본적으로 중산복을 바탕으로 하는 중국 국민당군의 복제와 흡사한 방식을 따르고 있었으며, 모표나 몇가지 부분[27] 을 빼면 대부분 국민당군 군복과 별 차이가 없었다. 국민당국 군복은 손문이 만든 중산복(인민복)과 별 차이가 없는 흡사한 형태였으며[28], 인민복은 중국 공산당군의 제복의 모태가 되었다. 그리고 일본제국이 전시체제로 돌입한 뒤 국민들에게 보급된 국민복은 가쿠란을 비롯한, 당시에 흔히 볼 수 있던 제복을 모태로 만들어졌는데, 이 제복들은 손문이 만든 중산복의 모태가 된다. 이로인해 광복군 군복과 국민당군 군복과 인민군 군복과 일제강점기 국민복은 디테일한 부분을 제외하고는 상당히 비슷해보이는 결과를 낳는다. 광복군 군복 고증자료
모자로는 정모와, 국민혁명군의 전투모에서 영향을 받은 오스트리아식 야전모가 존재하는 것으로 보이며, 정모는 비전투시에 착용하였고, 오스트리아식 야전모는 대부분의 상황(평시 또는 전시)에서 착용한 것으로 보인다.
장구류에 관해서는, 비전투시에는 단화, 또는 구두를 신은 것으로 보이며, 전투시에는 각반을 착용한 후 단화를 신거나, 부츠를 신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탄약, 권총집을 거치 및 휴대하기 위해 샘 브라운 벨트를 착용한 대원들의 사진 자료가 많이 보인다.
장교용 계급장 | 사병용 계급장 |
계급장의 경우 사병은 '八' 모양의 기둥형 계급장을 왼쪽 상박 팔뚝에 부착하였다. 부사관용은 병사용과 달리 계급장 밑에 작은 별이 들어가 구분되었다. 장교는 좌우 대칭 등변사다리꼴에 윗면이 곡선 모양으로 되어 있는 탈부착식 견장형 계급장[30]을 어깨에 부착하였다. 이 견장형 계급장이 조선인민군 계급장과 같지 않나 생각할 수도 있지만 직사각형 형태의 조선인민군 계급장과는 달리 광복군의 장교용 계급장은 말 그대로 사다리꼴이다. 또한 계급체계의 기원도 다르다. 광복군의 견장은 임시정부 설립 당시 제정된 대한육군임시군제의 계급체계를 따와 표시를 한 것이지만, 인민군 견장은 소련의 것을 바탕으로 만든 견장이다. 계급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한국광복군 항목을 참조.
국민혁명군 육군의 전투복은 해외 사이트에서 생각보다 싼 가격으로 판매중이므로, 고증에 맞고 싸게 재현할 길이 있는 분야이다. 가격은 좀 높지만, 인면전구공작대가 착용한 영국 육군의 정글 그린색 열대 전투복도 구할 수 있다.
1.3. 현대
1.3.1. 국방경비대 시절
해방 후 국방경비대 초창기 시절에는 재고가 많이 남은 옛 일본군복을 입었다. 즉 일제강점기부터 복식이 정해져있지 않던 의병을 제외한 한민족의 대부분의 군사조직(독립군 포함.)은 모두 일본군과 거의 비슷한 군복을 착용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다만 이땐 정모에 있던 일본 육군 마크를 대한민국 육군 마크로 바꾸는 등 일본군 부착물을 대부분 한국군 부착물로 바꿔버리는 등 차별화를 꾀했다. 한편 이를 알 리가 없는 한 일뽕이 일본군 전투복 입고 국방경비대 군복이라 우기는 병크가 일어나고 마니...왼쪽은 국방경비대 사병용, 오른쪽은 참모용이다. 또 한국전쟁 개전 이전까지는 사병들도 정복을 지급 받았었다. #
이후 점차 미국의 지원을 받으며 미군복과 일본군복이 섞인 양상이 나오게 되는데, 하의에는 기존 일본군 피복을 활용한 당꼬바지(승마바지)와 부츠(사병들은 권각반+단화)를[31], 상의로는 미군에게 공여받은 아이크 자켓을 착용하는 식.
물론 춘추•동계시엔 미군식으로 셔츠에 넥타이를 매는 형식을 사용했다. 겉에 입는 아이크 자켓은 전투•근무복과 정복의 역할을 모두 했는데, 사실 이는 미군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또한 허리엔 일본식 소총병용 장구류를 착용하고 있는데, 즉 이게 전투복장 상태인 것이다. 반면에 근무복이나 정복으로 쓰일 땐 일본군 장교용 샘브라운 벨트를 찼다.
겨울엔 미군식 멜튼재질 오버코트를 입었다.
1.3.2. 대한민국 국군
1.3.2.1. 창군이후~6.25전쟁
남군용 동정복 | 여군용 동정복 |
하정복을 착용하고 있는 백선엽 장군 | 백선엽 장군 동정복 |
그러나 이러한 미군복의 수량은 그렇게 넉넉한 편이 아니였다. 미국이 원조해 준 전투복은 전체 소요의 30% 밖에 충당하지 못했다. 나머지 소요를 충족한 것은 "광목 작업복"이라고 불리는 국산 전투복이였다. 디자인은 M43 전투복 혹은 울 근무복을 기반으로 제작되었다. 광목 작업복이라는 이름처럼 광목 원단으로 제작하였는데, 문제는 이 광목이 군복용으로 쓰기엔 너무 얇았다는 것. 당연히 격렬한 전투를 치르다보면 군복이 찢어지기 일수였고 염색도 저질이라 몇번 세탁하면 물이 다 빠져서 하얗게 변해벼렀다고 한다. 여러모로 문제가 많았지만 6.25 이후 국내에서 제대로 된 전투복 원단을 생산할 때까지 계속 생산된 피복이다.
KLO같은 정보부대는 무장친위대의 오크리프 위장패턴 전투복을 입었다고 한다. 제일 오른쪽에 서있는 대원을 보면 왼쪽 팔뚝에 붙은 나치 독수리 휘장까지 제거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는 게 보인다.[37]
파카로는 M1941이 가장 널리 쓰였다. 상술한 울코트가 너무 무겁고 불편해서 나온 물건으로 면으로 만들어 비교적 가벼워서 큰 인기를 얻었다. 스키파카보다는 트렌치코트나 야전상의에 가깝게 생긴 디자인이다. 가장 널리 쓰였으며 역시 색상과 무늬만 바꿔 현역으로 뛰고 계신 피복 되시겠다. 장진호 전투 때 미 해병대가 이걸 입고 찍힌 사진이 유명하다.
M1941보단 나중에 나온 물건으로 M1951이라는 스키파카도 있는데 춤추는 대수사선에서 아오시마 슌사쿠가 입고 나와서 유명해졌으며, 일명 아오시마 코트란 이름으로 꾸준히 사랑받고 있는 아이템. 안감을 여러 가지로 바꿀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당시 현역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지만 정전 이후 생산이 되지 않는 아이템이다.
앞서 말했듯 중공군 방한복이나 소련군의 영향을 받은 북한군 방한복과 너무 유사한 디자인이라 피아식별에 애로가 있었다.[39] 예를 들어 이 사진은 중공군 포로를 수색하는 터키군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사진 속 병사들은 사실 누비방한복을 입은 국군 병사들으로 중공군으로 오인되어 잡힌 것이다. 그래서 종전 이후 빠르게 자취를 감추게 된다.
1.3.2.2. 휴전 이후~베트남 전쟁
휴전 이후에 쓰인 전투복은 그 이전까지 쓰이던 HBT를 1973년까지 계속 사용하게 된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M1951 필드캡에서 리지웨이캡으로 바뀐 것이 큰 특징이다. 상세한 것은 전투모 문서 참고.
이때의 정복 색상도 흑갈색에서 벗어나지 않은 듯하다. 다만, 이건 의외로 흑색의 동예복일 가능성도 있다.
육군특수전사령부의 전신인 제1공수특전단의 경우 초창기인 1958년~1960년까지는 일반 카키색 전투복을 입었다가, 1961년~1963년 동안에는 덕헌터 패턴(58패턴 덕헌터)의 위장 커버올(이천 특수전사령부 역사관에서는 '원피스형 특전복' 이라는 이름으로 분류)을 민무늬 작업복과 함께 입었다.
해병대는 작업복이라고 하는 민무늬 전투복을 착용하였다.
해병대 완전무장 구보사진은 22대대 사진이다.
일반 민무늬 전투복이랑 다른점은 원단이 회색톤이 도는 쑥색이며 손목을 조절할 수가 있고 단추가 숨김식이라는 점이다. 사진에서 보다시피 육군 등등에서는 리프철모피를 사용했지만 해병대는 덕헌터, 큰무늬 철모피를 사용해서 다른점을 볼수가 있다.
이 민무늬 작업복은 해병대가 60년대 부터 90년대 구형 3군통합복을 입기 전까지 계속 착용했다.
1.3.2.3. 베트남 전쟁 및 이후
베트남 전쟁이 터지고 대한민국 국군이 월남에 파병을 하게 되었는데 이때 HBT가 너무 덥다는 의견이 지적되면서 더운 인도차이나 기후에 맞춘 정글복이 나오게 된다. 월남전을 배경으로 한 작품에 나오는 특유의 후줄근한 전투복이 이것.
이때 육군 파병부대는 상술한 정글복을 입었지만 월남에 파병한 해병대 청룡부대는 한국형 덕헌터 패턴의 전투복을 입었다.[40]
특전사는 1961년~1963년까지는 민무늬 전투복 위에 덕헌터 패턴(58패턴 덕헌터) 위장 커버올을 겹쳐 입었고, 베트남 파병때에는 덕헌터(58패턴)[41], ERDL, 타이거스트라이프 등 현지에서 사제로 조달한 다양한 전투복을 착용한 것으로 보인다. 1964년 이후에는 덕헌터 패턴의 조약돌 무늬를 일그러뜨린 일명 '충정복' 을 입었는데 64년부터 71년까지는 4포켓 상의였다가 72년부터 2포켓으로 바뀌었다. 이 패턴의 전투복은 이라크, 에티오피아 등 중동, 아프리카 국가에도 수출되었으며, 그래서 서구권 밀덕들에게는 'noodle pattern camo'로 알려져있다. 특징으로는 바지 밑단 양옆에 지퍼가 달려있어서 고무링을 할필요가 없었는데, 실제 착용예를 보면 대부분 고무링을 차고 있다. 이러한 디자인은 초창기 공수특전단에서 착용하던 원피스 위장복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충정복은 5.18 민주화운동 당시에 특전사가 착용하고 온갖 말 못할 범죄와 패악질을 저지른 역사 때문에 매우 안 좋은 쪽으로 유명하다.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이천의 특전사 사령부 역사관에서도 충정복(1972년~1981년 형)을 충정복이라 부르지 않고 개구리색상 특전복 이라는 이상한 이름으로 얼버무려 부르고 있는 걸 알 수 있는데, 이쯤되면 사실상 특전사에서도 충정복은 이름을 말하면 안 되는 복장으로 흑역사 취급받은 것이다.[42][43]
여담으로 당시 특전사에서 군생활을 했던 이들의 증언에 의하면, 5.18 이후에도 충정복은 물량이 많이 남아 있었던 나머지 충정복은 공수교육생 훈련용 혹은 생존 훈련장 훈련용 등 대민 접촉이 없는 훈련 때에 입는 훈련복(즉 CS복) 용도로 사용하는 식으로 소모되었고, 대민 접촉이 많은 부대의 부대원들이나 훈련·외출·외박 나가는 부대원들은 이미지 때문에 착용을 자제하라는 명령이 내려왔었다고 한다.
특전사 외에도 1970년대~1980년대 기갑병과 역시 충정복을 지급받았는데, 전차 승무원을 위한 충정복 패턴 야전점퍼, 충정복 패턴 원피스형 승무원복 등을 지급 받았다. 또한 1979년 8월의 민방위 훈련을 담은 대한뉴스 제1253 호-수도권 민방위 훈련 동영상에서는 수도경비사령부 기갑병과 BGM-71 TOW 운용병들이 일반형 충정복을 입은 모습도 확인할 수 있다.
충정복은 무릎덮댐, 엉덩이덮댐, 팔꿈치덮댐 등 실용적이었다.(특이점으로 발목부근 지퍼가 있다.) 이후에는 무릎덮댐 등이 생략이 되었다.
70년대 중반~후반동안 잠시 해병대와 UDT 등 해군쪽 부대에서 착용한 레오파드 위장복이다.
당시에 조선의 관모인 사모에서 영감을 얻은 반깡통모도 처음 나왔다.
차지철이 경호실장이 되어 위세를 부리면서 대통령경호실 및 배속된 군 병력들에게 독자적인 정복을 지급하였다. 기본 디자인은 육군 장교 정복과 같지만 부착물을 다르게 하고 샘 브라운 벨트를 찼는데 샘 브라운 벨트 때문에 나치 친위대를 모방했다는 소문이 났을 정도.[44]
또한 수도경비사령부(현 수도방위사령부) 병력에게는 수도 서울과 대통령을 지킨다는 자부심을 주고 거북선을 만드신 충무공 정신을 본받아 국가에 충성을 다하라는 의미로 거북 등껍질 무늬가 새겨진 유신복을 지급하였다. 이 패턴은 시가지를 무대로 전투를 벌이는 수경사의 특성에 맞춰서 제작되었는데, 이런 패턴은 위장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것이 아니라 눈에 혼란을 주기 위함인 듯 하다. 일각에서는 적의 시야에 혼란을 주어서, 부대의 인원수를 파악할 수 없게 하기위해서라고도 한다. 유신복은 오로지 수경사에만 지급되었고, 그 이외의 국군의 그 어떤 부대에도 지급되지 않았다.
1973년 베트남전이 끝나갈 때쯤 국군은 새로운 전투복을 내놓았는데, 이때 처음으로 전투복에 견장대가 생기게 된다. 일반 병력에게는 충정복 등 위장복을 쓰지 않고 민무늬 전투복을 계속 지급한 것은 1970년대까지 유럽이나 미국도 그랬듯이 위장복은 특수부대의 상징이라는 이미지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사실 위장무늬 전투복이 마냥 민무늬 전투복의 상위호환인 것만은 아니다. 물론 전쟁할 때는 위장무늬가 확실히 월등하지만, 군인이 전쟁만 하는 기계가 아니란 걸 명심하자. 군인들도 사람이고, 휴가나 외박, 혹은 행사 땐 분명 전투복 말고 정복같은 옷이 필요하다. 이때 민무늬 전투복이 빛을 발휘하는데, 민무늬 전투복의 디자인은 당시 육군의 근무복 디자인과 거의 차이가 없었고, 무엇보다 요란한 위장무늬가 없어서 단정한 느낌이 드는 게 사실이었다. 즉 이때엔 그냥 전투복을 잘 다려 입으면 그걸 병사용 정복으로 쓸 수 있었다. 물론 결국 일반 병력도 위장무늬를 채택하면서 이건 옛말이 되지만...
그 때문인지 민무늬 시절의 한국군은 근무복을 지급받는 육군 병들이 겨울철 야상을 걸칠 수 있도록 규정했었다. 본래 항공점퍼 형식의 겉옷은 간부에게만 지급하던 물건이기에 근무복으 입는 육군 병들은 야상으로 동계피복을 겸하게 했던 것이다. 그 당시에는 그런대로 봐줄만 했었겠지만 문제는 얼룩무늬 전투복이 보급되면서 시작되었다. 보급품이 바뀌는데 규정은 그대로라 00년대 즈음에 이르러서는 근무복을 입는 육군 병들이 동절기에 얼룩무늬 야상을 근무복 위에 입고 근무 혹은 휴가외출을 나가는 참사가 벌어지기 시작한 것. 평소 병 복지나 대우에 관심 없던 높으신 분들 보기에도 정말 아니다 싶었는지 가급적 간부 동잠바를 구해다 입게 하거나 정 안되면 겨울철 한정으로 다른 야전부대처럼 전투복을 입고 나가도록 지시했다. 결국 현재에 이르러서는 근무복을 착용코 근무하는 육군 병들도 항공점퍼를 보급 받을 수 있게 규정을 변경했다. 현 대한민국의 드레스코드 상으로는 전투복도 그냥 경조사용 예복으로 쓸 수 있긴 하지만, 다들 단정하게 입고 있는데 혼자 요란한 무늬의 전투복을 입고 있는 탓에 위화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45]
그리고 과거 위장무늬의 대세였던 덕헌터나 우드랜드의 경우, 수풀 속에 은폐했을 경우 민무늬보다 월등한 위장력을 보였음에도 그 특유의 화려한 디자인 때문에 탁 트인 개활지에선 오히려 민무늬보다 더 눈에 띄는 문제가 있었다.[46] 물론 당시에도 일반 병력들의 위장과 은폐를 중시하긴 했지만, 항상 숨어서 움직이는 특수부대보단 아무래도 개활지에서 횡대 대형으로 움직이거나 돌격할 일이 많은 일반 병력은 그 나라의 자연환경에 따라 오히려 민무늬가 효율적일 수 있다. 당장 이스라엘군과 오스트리아군은 특수부대에 위장무늬를 지급하고 일반 야전부대에는 민무늬를 지급하는 나라의 대표격이며 탁 트인 초원이 많은 곳에서 활동하는 러시아군도 민무늬나 다름 없어 보이는 디지털 플로라 전투복을 사용 중이다.
이 당시의 계급장은 노란색이었고, 이는 우드랜드 패턴 전투복으로 바뀐 뒤에도 이어져서 1996년까지 이어진다. 자세한 건 후술.
다만 이 당시 병역의무를 마치면 지금의 전역복 비슷하게 '예비군전투복'이라는 명칭의 위장복을 딱 한 벌 지급했다. 사진은 이 당시 예비군들의 모습. 현역에 비해 모든 장비가 뒤떨어지는 당시 예비군이지만 전투복만은 현역보다 더 나았던 셈이다. 하지만 아래에 나오는 '김일성 만세' 사건 때문에 1990년도에 폐지되고 현역때 전투복을 전역복으로 주는 것으로 바뀌게 된다.
1.3.2.4. 제5공화국 시절
전투모의 경우 전투모가 반깡통모에서 야구모자로 바뀌었다는 점 외엔 큰 차이가 없다.특수부대의 위장복은 미군의 영향을 받아 교체되었다.
해군 정보부대에서 사용한 타이거 스트라이프 패턴 위장복이다. 해군 정보부대는 밑에 DPM 유사패턴 외 해병대 벽돌무늬 위장복, 특전사의 충정복, UDT의 해마복등등을 착용하기도 했다.
80년대 당시 정보부대에서 사용한 위장복이다. 사용한 붓으로 그은듯한 DPM위장패턴과 비슷한 디자인이다. 특이하게 영국위장패턴 스타일에다가 위장패턴 종류만 조금씩 다른게 3~4가지가 있다.
파일:독사복항공잠바.jpg
특전사의 경우는 1980년대 초반에 충정복을 폐지하고, 미군 우드랜드의 영향을 받은 '독사복'을 도입하여 3군 통합 위장복 도입 때까지 사용하였다. 참고로 이 독사복 위장패턴은 3군 통합 위장복에 비해 많이 진하고 어둡다. 무릎 덮댐, 엉덩이 덮댐등등이 생략이 되었다.
UDT의 경우는 미군 ERDL 위장복 패턴을 변형한 '해마복'을 사용하였다. 위장패턴의 느낌이 약간 흐릿하다. 특전사의 독사복이 정식 인가된 위장복인 것과 달리 해마복은 착용이 묵인된 부대피복이었다. 특이하게 전투복 스타일이 정글 퍼티그 스타일이다.
전투복 디자인은 허벅지 부근에 담배주머니가 있는것도 있고 건빵주머니가 없는것도있고 담배주머니가 없는등등 전투복 디자인이 은근 다양했다. 이 전투복은 1994년 우드랜드 위장으로 바뀐 뒤에도 꽤 오래 살아남아 있다가 2000년대 들어 서서히 사라졌고, 2010년대에 디지털 위장으로 바뀌면서 해병대만의 위장무늬 전투복이 생기자 없어졌다. 2000년에 이에 대해 비판한 딴지일보의 기사가 있다. 여담으로 1980년대까지는 UDT/SEAL 및 UDU에서도 이 옷을 위장복으로 채택했었다.
대통령경호실 배속 병력은 미군 전투복처럼 상의를 내어입고 상의 아랫부분과 바지 옆에 주머니가 추가된 '엘리트복'이라는 전투복이 지급되었다. 엘리트복은 디자인만 바뀐 채로 21세기에도 지급되고 있다.
1.3.2.5. 1990년~2011년
마침내 대한민국 국군은 1980년대부터 꾸준한 연구를 거듭해 온 결과, 1990년 마침내 한국형 우드랜드 패턴 통합위장무늬 전투복을 개발해내는 데에 성공한다.[47] 군 내외에서는 일명 '개구리 군복' 혹은 "얼룩무늬 전투복"이라는 별명으로도 많이 불려지는 군복이며 2010년대부터 구형 통합 전투복(얼룩무늬 전투복) 대신에 디지털 무늬 전투복이 보급되어 2011년부터 2014년 8월 이전까지 구형 통합 전투복과 혼용 기간이 있었고 이후 2014년 8월부터 현역의 경우 구형 통합 전투복의 사용이 전면 금지되어 2014년 8월 이후 현역이 착용할 경우 단속 대상이 되었다. 단 유격 훈련 등의 목적으로 착용하는 구형 통합 전투복 기반의 CS복은 예외이고 구형 통합 전투복을 받은 2012년 이전 시기의 예비군 역시 예외이다.
이 전투복 도입 때부터 정식 명칭이 "전투복"으로 정해진다. 그 이전에는 "작업복"으로 불렸다.
위에서 4번째 사진처럼 초기형은 많이 어둡고 갈색은 거의 고동색이였고 초록색은 어두운 녹색이였다. 후기형은 많이 익숙한 밝은 국방색, 갈색으로 색깔이 개편, 또한 단추, 재질이 개량되었다.
초기형의 경우 상술한 민무늬 전투복 시대와 마찬가지로 계급장이 노란색이었으나, 1996년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터지고서 노란색 계급장이 시인성이 높다는 문제점이 제기되어 후기형에선 검은색 계급장으로 바뀌었다.
기타 사항으론 특전복, 기습복[48], 해군 특전복 등은 위장무늬는 똑같지만 주머니 모양, 담배주머니 추가되는 등 디자인은 부대마다 차별화되어있었다.
공군 CCT, SART등등에서는 작전복으로 더 진한 패턴의 독사복을 위장복으로 사용했다.
상의는 5포켓이고 하의는 특전복과 비슷하지만 특이점으로 허벅지 부근에 작은 칼주머니가 있다. 이 피복은 최소 2000년대 후반까지 존재한것으로 보인다.
90년대 각 정보부대들이 정보사로 통합된 시기에 입던 군복. 우드랜드가 파란색, 회색 등으로 배열되어 도시형 위장무늬처럼 생겨먹어서 어반 우드랜드라고 부르기도 한다.
2007년 특전사에 디지털 픽셀 군복이 보급되었다. 미 해병대의 MARPAT 위장무늬를 참조한 형태에 녹색과 흑색이 강조된 무늬를 지니고 있다.
정보사의 어반 디지털 전투복. 특전사가 2007년에 디지털 특전복을 보급했고 위 사진이 2008년이다. 국군이 얼룩무늬에서 디지털 무늬로 개발하던 때이니, 특전사보다 조금 빠르거나 비슷한 시기에 보급한 것으로 추정된다.
91년~03년까지 파병부대가 착용한 사막6색 "초코칩" 전투복이다. 초창기에는 미군처럼 4포켓+무릎덮댐등등 미군 전투복과 비슷하고 무늬가 약간 어두웠고 자갈돌무늬가 적었다.
상록수부대부터 국군 전투복처럼 2포켓으로 변경되고 다산, 이라크파병 초창기당시 위장무늬가 밝아지고 무늬가 많아졌지만 얼마지나지않아 사막4색으로 변경되었다.
02년초반~08후반까지 자이툰 부대 이라크 파병부대가 착용한 사막4색 전투복이다. 보다시피 한국군 통합4색을 사막4색으로 변경한것이다. 해외의 군인들이 카페오레 데저트라고 했다고 한다. 이 전투복은 후에 일부 유격대에서 CS복으로 사용되었다.
08년 후반까지 착용한뒤 사막4색을 픽셀화한 사막픽셀로 변경되었다.
1.3.2.6. 2011년~현재
지난 2007년, 육군 특전사에 국군 최초로 디지털 픽셀 전투복(특전복) 도입 이후, 2011년부터 육해공 통합 전투복을 보급하면서 국군의 전투복이 모두 디지털 패턴으로 바뀌게 된다.[49]2009년부터 JSA 경비대대, 육군과학화전투훈련단 등 일부 부대에서 시범적으로 특전사의 특전복을 도입하였고 2010년부터 일부 부대 인원만 디지털 무늬 전투복을 시범 착용하였다.
디지털 패턴으로 바뀐 이유는 한반도 지형과 색상 분포 변화에 따른 위장 성능의 한계 발생과 야간투시장비의 발달 등으로 기존 얼룩무늬 전투복의 근적외선 반사율 범위의 효과가 떨어지면서 개발됐다.
육군만 군모가 베레모로 바뀌었지만 2020년부터는 차양형 전투모도 추가 보급한다. 다만 해공군과는 달리 제식 군모는 아니다.
육해공 구형 얼룩무늬 통합 전투복을 마지막으로 입었다 할 수 있는 세대(2010~2011년, 일부 2012~2013년 군번)[50]들은 이미 민방위에 진입한 상황이라 이제 예비군에 가도 볼 수 없을 것이며, 길에서 구형 전투복을 입은 사람을 마주치는 일은 매우 드물 것이다.
디지털 군복 보급 초기에는 육군훈련소를 포함한 여러 부대에서 기초군사훈련, 유격 훈련 등의 각종 훈련용으로 사용할 목적으로 반납된 구형 통합 전투복을 CS복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부대마다 달라서 재활용으로 디지털 무늬 전투복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디지털 무늬 전투복 보급이 완벽하게 보급된 지금은 CS복도 구형 통합 전투복을 쓰는 신교대/훈련소는 없다. 시간이 너무나 흐르면서 상태가 안좋아졌기 때문이다.
해병대는 육해공 통합 전투복 대신, 물결무늬 전투복이라는 별개의 디지털 무늬 전투복을 입는다.
2014년부터 해군 특수전전단은 독자적인 특전복을 입는다.
2015년에 왼쪽 가슴 부분에 소속군 패치[51]와 오른쪽 팔에 태극기 패치[52]가 생겼다.
2018년부터 해군 해난구조전대도 다른 전투복을 입는다.
2021년부터 해군 함정 근무자들은 함상 전투복을 입는다.[53]
2. 분류
2.1. 군복
군인복제령에 의하면 군복이란 다음과 같은 것들을 말한다.- 군모: 예모, 정모, 전투모, 특수모
- 제복
- 군화: 단화, 전투화, 특수화
- 계급장: 정장, 약장, 군모장, 견장, 수장
- 표지장: 모표, 휘장, 정근장, 완장, 상장, 명찰, 견식, 금장, 장성급 장교 표지 및 특수복에 다는 표지
- 예식도
- 특수군복
군인의 복장의 구분과 차림새는 원칙적으로 다음과 같다.
예장 | 정장 | 전투장 |
예모 | 정모 | 전투모 또는 특수모 |
예복(만찬 또는 연회에 참석하는 경우에는 만찬복을 착용한다) | 정복 | 전투복 또는 특수복 |
외투(겨울철로 한정한다) | ||
와이셔츠 및 넥타이 | ||
단화 | 전투화 또는 특수화 | |
배낭 및 개인장구 | ||
계급장 및 표지장 | ||
훈장·포장 및 기장 | ||
예식도(필요한 경우에 한한다) |
2.1.1. 현용 군복
2.2. 군복이 아닌 것
2.2.1. 활동복
자세한 내용은 활동복 문서 참고하십시오.2.2.2. 군용속옷
전적으로 남군의 것이므로 여군용은 남군용과 차이가 있다. 속옷하의는 과거 브레이브맨이라 불렸다. # 현재는 딱히 브랜드라고 할만한 건 없어 그냥 일반적으로 보급 팬티라고 지칭하지만, 속옷에 각 군별 영어 이니셜인 ROKA, ROKAF 등이 써있기에 직관적으로 로카 팬티, 로카프 팬티 등으로 부르는 경우도 있다.육군의 경우 디지털 무늬 면티, 삼각팬티, ROKA 티셔츠, 드로즈 팬티, 사각 면팬티가 지급되고 있다. 공군은 2010년도 후반 기준 면티 면팬티 이외에도 기능성 디지털 티셔츠(속칭 디티)와 기능성 드로즈팬티(속칭 로카프팬티)도 4착씩 지급해준다.
육군 보급 드로즈 | 공군 보급 드로즈 |
2.2.3. 기타 집단
2.2.3.1. 사관생도
육/해/공군사관학교 생도 근무복 |
육사 근무복은 녹색 하의에 검은색 상의로, 이 사진에서 생도들 대부분이 근무복 위에 점퍼나 스웨터를 입고 있는데 유독 한 생도만 동근무복만 입고 있어 튀어보이는 것이다. 스웨터를 입은 생도들의 근무복 옷깃을 잘 보면 그 생도와 마찬가지로 상의가 검은색임을 알 수 있다.
3사 생도의 경우 장교용 근무복과 동일한 근무복을 입는다. 2010년대 후반부터는 육사 생도들도 장교용 근무복을 그대로 입고 있다.
육군사관학교 예복 |
해군사관학교 예복[55] |
공군사관학교 예복 |
육군3사관학교 예복 |
국군간호사관학교 예복 |
육군사관학교를 비롯한 사관학교에는 제복이 존재한다.위에 것들 보다는 근대적 느낌이 풍기는데 대한제국 군복을 기반으로 제작되었기 때문. 육해공사나 국간사의 경우는 4년, 육군3사관학교의 경우는 2년 동안 입게 되지만 일반적인 제복과 예복이 같이 지급된다. 보통 학과출장 때는 일반적인 제복을 입지만 각종 행사나 중간고사, 기말고사를 치를 경우 예복을 입은 상태에서 행사에 참여한다.
그런데 육군사관학교, 육군3사관학교, 공군사관학교 정복은 구조가 특이하다.
- 상의가 단추가 아닌 지퍼식으로 되어 있다.[56] 그런데 진짜 특이한 이유가 뭐냐 하면 지퍼의 방향. 아래에서 위로 채우는 일반적인 지퍼상의와는 정반대로 위에서 아래로 채우는 구조로 지퍼가 달려있다. 이유인 즉 생도제복을 츄리닝 상의처럼 지퍼를 반만 채워서 입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또한 지퍼를 옷 하단에서 결합할 때 필연적으로 고개를 숙이게 되는데, 사관생도가 고개를 함부로 숙이면 안된다 하여 지퍼를 옷 상단에서 결합하도록 했다고 한다. 가입교 훈련 때 적어도 두 번은 듣는다.
- 바지에 앞주머니가 없다. 이유인 즉 입수보행을 막기 위해서이다.
철저하게 장교의 기본품위를 지키는 것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옷이기 때문에 구조가 다른 일반적인 옷과 다르다.
반면에 해군사관생도의 평상 제복은 해당 군 장교 정복·근무복과 구조가 같고 부착물만 다르다. 예복은 3군 모두 구조가 동일하다.
생도 각자의 사이즈에 정확히 맞춰 제작했기 때문에 소위 임관 후에는 집에 가져가고 반납받지 않는다.[57]
2.2.3.2. 학군사관후보생
몇몇 잘못 알고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학군단의 제복은 단복이라고 한다.육군 학군사관후보생 단복
해군/해병대 학군사관후보생 단복
공군 학군사관후보생 단복.[58]
육군과 공군 학군사관후보생의 제복은 모자와[59] 와이셔츠의 색깔만 다를 뿐(육군 흰색, 공군 파란색) 구조나 디자인이 동일하고 해군과 해병대 학군사관후보생의 제복은 해군/해병대 장교의 정복, 약복을 그대로 카피했다.
이 단복은 졸업 후 임관할 때 반납하는 품목이 아니다.
2.2.3.3. 사회복무요원
사회복무요원은 기초군사훈련 3주 후 이등병 계급을 달고 사회로 배출되기 때문에, 훈련소 퇴소 시 새 전투복 1벌을 지급해 준다. 경우에 따라서는 훈련 1~2주차에 바로 지급하고, 이것을 CS복과 달리 A급으로 구분해서 휴일용으로 입게 하기도 한다. 이유로는 종교행사 때 현역과 마주치게 되는데, 꿀리지 말라기 위해서라는 소문이 있는데, 반대로 정작 현역 훈련병들은 CS복을 입고 오기 때문에 명찰 오바로크까지 되어 있는 사회복무요원 훈련병들 A급에 기가 죽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걸 입고 예비군훈련을 받으면 된다. 물론 훈련소를 수료한 사회복무요원이 예비군훈련을 받게 되는 것은 최소 1년 8개월 후이니 그 때 받은 그 군복이 맞지 않거나 어디에 짱박아 놨는지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개구리 예비군 마크도 나눠주는데 오바로크 치지 않는 경우도 있다.군복을 입고 전역하는 전역자와는 달리 훈련소 수료자는 군복을 입고 집으로 가지 않는다. 보통 3주 전에 입고 온 사복을 그대로 입고 가기 때문이다. 사실 훈련소 퇴소일 자정까지는 법적 신분 상 군인이기 때문에 입고 가도 상관은 없다. 단, 육군훈련소의 경우 부대 내 사병이 퇴소식 당일 계급장과 사단 마크 떼고 수료자들과 섞여 나갈 위험성이 있다는 이유로 무조건 퇴소자들에게는 사복을 입게 한다. 게다가 군사경찰대가 우글거리는 터미널 같은 곳에서 개구리도 없고, 사단 오바로크도 없고 계급장도 없는 군복을 입고 다니는 짓은 매우 귀찮은 사단을 유발할 수도 있다. 실제로 한 교관도 "너 군사경찰한테 잡혀서 훈련소로 다시 오고 싶으면 한번 전투복입고 집 가봐" 라고 이야기 하기도 했다. 육군훈련소 외에도 일부 지역방위사단의 경우 군복을 입은 채 수료식을 진행한 후 즉시 퇴소하는 경우가 있다. 12년도 11월 입대자들은 수료식 후 생활관에 복귀해서 30여 분을 기다려서야 개인 소지품을 넣어둔 가방을 받아 퇴소한 바 있다.
좀 특이한 예로 산림청 근무요원은 2017년 근무복 통일 전까지는 전용 리자드 패턴 전투복을 근무복으로 입고 다녔다.#[60] 국가정보원 근무 요원은 시티어반 패턴 전투복을 근무복으로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알려져 있다"인 이유는 기밀유지를 요하는 근무지 특성상 언제부터 도입했으며 그 이후에 교체를 했는지 안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 2020년 기준으로 국정원에는 사회복무요원이 더 이상 배정되지 않는다.
2.2.3.3.1. 사회복무요원 제복
자세한 내용은 사회복무요원/유용한 정보 문서 참고하십시오.2.3. 군장
- 군장/대한민국 육군 참조
3. 기타
3.1. 앞가리개의 정체
전세계 군대의 전투복 중에서 현재까지 한국군만이 거의 유일하다시피 채용하고 있는 의복 장식이다. 한국 군대에서는 춘추동에 전투복을 착용 시 앞가리개를 꼭 채워야 한다. 그리고 여름[61]인 6월 1일부터 9월 15일까지는 더위를 이유로 앞가리개를 풀어야 한다.[62] 따라서 용도만 놓고 보면 마치 보온용이라 생각하기 쉽겠지만 국방부의 설명에 따르면 위장 시 가슴 피부 노출을 막는 장치라고 한다.하지만 국방부 의도와는 다르게, 일부 부대에서는 지휘관이나 부대방침에 따라서 전시 전사자의 한에 넋을 기리는 용도로 사용하는 것으로[63], 앞가리개 단추를 채우는 것을 금지하는곳도 있다.
이러한 앞가리개의 본래 정체는 2차대전 당시 미군의 '가스 플랩(Gas flap)'이었다. 목부터 셔츠 하단까지 이어진 가스 플랩은 화학가스가 전투복 목과 단추 틈으로 침투하여 피부가 오염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도입되었지만, 1960년대 중반 OG-107 전투복의 세 번째 개량형부터는 제거되었다. 이는 화학신경 가스의 발전으로 인해, 더이상 전투복 수준의 방어복으론 가스를 방어하기 힘들어졌기 때문이다[64]
그러나 한국전을 거치며 공여된 미군 전투복의 가스 플랩을 국군은 목을 가려주는 용도로 이해하였고, 그 결과 타셔츠 없을 때 쓰기좋은 앞가리개가 장착되었다.[65][66]
3.2. 사실 아무 때나 입을 수 없다.
군복 및 군용장구의 단속에 관한 법률에 따라, 전역 후 예비군훈련 등을 제외하고는 전투복을 포함한 각종 군복이나 군장구류 등을 착용할 수 없고, 이를 위반하면 처벌을 받으나, 사실상 지켜지지 않는 규정이다. 민간인은 그다지 관심이 없으니 크게 이슈가 될 일이 없고 예비군 때문에 무작정 바깥에 군복 입고 다니는 사람을 잡기도 애매하다. 물론 군에서 작정하고 잡겠다고 하면 예비군의 경우 소집 통지서 및 예비군 훈련만 확인하면 바로 걸러낼 수 있으니 못하는건 아니고 굳이 단속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안 하는 것으로 보인다.다만 2020년 들어 일부 군사 컨텐츠 유튜버가 디지털 전투복을 입고 촬영한 영상이 고발이 들어가 기소유예를 받는 경우가 생겼다. 직접 단속은 하지 않더라도 제3자의 고발이 들어오면 일단 수사해야 하는 게 원칙이고 또 군복을 마음대로 입었을 경우에는 거의 확실히 유죄에 해당하므로 기소유예를 피할 길은 거의 없으니 주의하자.
2023년 할로윈 때는 코스튬 목적으로 전투복을 입고 활보하다가 질서 유지 차원에서 투입된 경찰관들에게 적발돼 입건되는 일들이 벌어졌다.
정확히는 법제상에 현용 한국군 및 동맹군인 미군 등의 전투복을 포함한 군복과, 이와 비슷하게 생긴 유사군복 및 유사군장구류를 이유없이 입고 다니면 안 된다고 되어있다. 관련된 범죄 사건이나 국군인 척 하고 안심시킨 뒤 사기 등의 범죄를 저지른다거나 북한 무장간첩 등과 구분하려고 1973년에 제정된 법이다. 때문에 '현용' 한국군용 혹은 미군용 등이 아닌 전투복[67]이나 더 이상 현용으로 쓰이지 않는 구형 전투복[68], 하의나 상의 정도를 밀리터리 룩으로 입는 것에는 이 법이 적용되지 않는다. 서바이벌 게임, 에어소프트 게임, 코스프레 행사 등은 미리 신고하고 할 경우 '행사용'으로 간주되어 역시 적용되지 않는다. 다만 행사 전이나 끝나고 나서는 옷을 평상복으로 갈아입으면 된다.[69]
전투화는 2021년을 기점으로 조금 애매해졌는데, 일부 차이점이 있는 사제 전투화의 중고 판매를 적발하여 기소유예 처리한 사례를 헌법재판소가 기소유예 처분을 취소하라는 판결을 내렸기 때문이다. 군인복제령에 나와 있는 전투화 관련 규정이 너무 포괄적이라는 것이 그 이유다. 판례가 생겼기 때문에 관련 규정이 수정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3.3. 내게 맞는 군복 사이즈 찾기 - 군용 피복류 표기법
과거엔 전투복과 같은 군용 피복류 사이즈를 1호, 2호, 3호 식으로 1호부터 10호까지 분류하여 숫자가 클수록 작은 사이즈로 분류하였다. 그러나 2000년대 중반부터 '피복류 국방규격'을 전면 개정하여 과거 1호, 2호식의 분류가 아니라 '90M160' 과 같이 새로운 분류로 규격을 전면 개정했다. 개정된 [국방규격]에는 피트(fit)성 분류에 따라 피복류의 표기를 다르게 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고피트성으로 분류된 전투복류와, 중피트성으로 분류된 야전상의만 서술한다.3.3.1. 전투복, 훈련복류 (고피트성)
고피트성인 전투복류는 상의는 '가슴둘레-사이즈-신장(키)'로 분류한다. 남군용 전투복중에 가장 작은 사이즈인 '90M160'의 경우 '가슴둘레 90cm - 중간사이즈 - 키 160대'라는 표식이다. 이전에는 '가슴둘레-성별[70]-신장(키)'였다.전투복 하의의 경우 '허리둘레-사이즈-신장(키)'로 분류한다. 남군용 전투복중에 가장 작은 사이즈인 '70M165'의 경우 '허리둘레 70cm (28인치) - 중간사이즈 - 키 165대'라는 표식인 셈이다. 이전에는 '허리둘레-성별[71]-신장(키)'였다.
남군 상·하의 공통으로 가운데 들어가는 사이즈는 S, M, L 3종류인데 상의는 팔길이에 따라, 하의는 다리길이(밑위와 인심)에 따라 구분되며 S와 M, M과 L의 차이는 신장 한 치수 정도 차이이다. 예를 들어 하의의 경우 80-L-173과 80-M-178은 전체 길이(신장)는 178이 더 크지만 부위별로 보면 80-L-173이 밑위만 좀 더 짧고 다리길이는 둘이 거의 같다. 평균적인 성인 남성 체형이면 M이 대부분이겠지만 본인이 평균 키에 비해 다리가 길거나 짧은 경우 S, L을 선택할 수도 있다.
3.3.2. 야전상의, 우의, 점퍼류 (중피트성)
중피트성인 야전상의류의 경우 '성별-가슴둘레-키구간'으로 분류한다. 키구간은 '소, 중, 대, 특' 4개 분류로 나뉘며, 남군용 야전상의 중 가장 작은 사이즈인 'M90소'는 '남성용 - 가슴둘레 90cm - 작은키'라는 표식이다.3.3.3. 특수 사이즈 표기
여군용이나 특제 사이즈의 경우 성별표기가 다른데, 여군용은 '85W155'처럼 'W'이 붙는다. 예를 들어 전투복 상의의 경우 '85W155'는 '가슴둘레 85cm - 여군용 - 키 155cm'이고 라벨에 한글로 '여군용'이라는 표식이 추가로 붙는다. 덧붙여 85W155사이즈는 전투복 상의중에 가장 작은 사이즈이며, 야전상의의 경우 'W85소'가 가장 작은 사이즈이다.가슴둘레 110대부터는 특제사이즈인 'S'라는 표기가 붙는데, 현 규격상 가장 큰 전투복 상의는 '125S180'이며 야전상의는 'S125특'이다.
2013년 국방부가 전투복 치수 규격을 다시 개정할 계획이라고 언론에서 밝혔다. 그러나 기본적인 표식방법은 크게 바뀌지 않을 듯. 당분간은 이 규격이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3.4. 예비군복에 '김일성 만세'가?
흑역사가 있는데, 1987년 '김일성 만세' 무늬 사건이 벌어져 1990년 초에 완전 퇴출되는 사건이 있었다. 찾아낸 게 대단할 정도로 어처구니 없는 일화. 아무 의미가 없는 무늬에서 의미를 찾는 파레이돌리아의 예시인데, 지금이라면 어떻게 저게 '김일성 만세'냐며 코웃음치며 끝날 일이지만, 당시 사회 분위기와 사람들의 의식을 보여주는 일화다. 심지어 '붉다'라는 말 자체도 함부로 말하거나 노래 가사에 넣으면 '공산당 찬양'이라면서 금지곡이 되고 잡혀가던 시대다.
과거 고등학교 교련 수업용 훈련복 위장무늬는 글자를 가지고 도안된 경우가 많았다. 해당 제작사 이름이나, 해당 학교, 고등학생을 뜻하는 한자 高 등등.
3.5. 하복?
원래 전투복엔 하복이 존재하지 않았다. 당연히 하/동 구분 없이 여름엔 긴 팔을 걷어올려 입고 다니고들 했었는데… 원래 천이 얇고, 뒤집어 안감을 자세히 보면 바둑판 무늬가 새겨진 간부용 전투복이 2004년 7월 입대자들부터 1벌씩 지급되기 시작했다. 2007년 4월부터는 두벌씩 지급. 그간 은근히 두꺼운 '동복'으로 여름을 나야 했던 것과 비교하면 비약적인 개선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러한 불편함은 디지털무늬 신형전투복을 처음으로 지급받던 2010년대 초반 군번도 똑같이 이어져(...) 디지털무늬 하복없이 “사계절용”으로만 전투복을 지급받았다.일단 하복의 경우 동복과 비교해서 굉장히 가벼운 이유로 아무래도 교육&훈련용으로 선호받지만, 두께가 얇은 만큼 내구력이 부실하여 자주 꿰메입는 일이 발생한다고. 게다가 예상치 못한 문제로 전투복 한벌(보통 동복)을 A급으로 빼놓게 되니 겨울에 전투복을 빨 경우 하복을 입고 근무를 나가야 하는 지옥같은 경험을 하게 된다. 덕분에 전투복 빨래를 함부로 할 수 없는 불편함이 생겼다.
3.6. 윗도리 좀 꺼내 입으면 안 되나요?
신형전투복이 지급되는 지금이야 전투복 상의를 내어 입게 되어있지만 개구리 군복 시절에는 육군 규정상 유격 훈련 중을 제외하면 전투복 상의를 하의 속에 넣어서 입어야 했다. 물론 병장, 고위 부사관, 그리고 예비군은 상의를 꺼내입길 즐겨했다. 이 경우 짬을 먹은만큼 좀 규정에 버팅기고 싶은 심리도 있겠지만.실제로는 상의를 바지 밖으로 내어 입는 것이 기능상으로도 우수하다. 상의를 넣어 입고 군장 착용시 허리띠 위에 바로 탄띠를 두르게 되는데, 여기다 완전군장 배낭까지 메게 되면 허리에 가해지는 피로와 압박이 상당하다. 상의를 내어 입게 되면 허리띠와 탄띠 사이에 한겹 완충재를 대는 셈이니 그런 기능성 면에선 더 낫다. 실제로 미군 연구결과에 의하면 허리에 가해지는 하중을 10~20% 사이 수준으로 줄여주고 기온이 높아지는 것을 막아주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그 외에도 각개전투 등의 구르고 뛰는 훈련 시 상의를 내어입는 편이 바지 속으로 흙 등의 이물질 유입을 막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1971~1973년 사이엔 기능성 문제로 상의를 내어 입는것이 정식 허가되기도 했었지만. 결국 다리가 짧아 보이고 불량해 보인다는 높으신 분들의 어이없는 논리로 1973년에 폐지되어 무려 40년이 지나고서야 다시 내어 입게 되었다.
미군 장군들도 금색 버클에 검정 유광가죽으로 만든 장군용 벨트가 있다. 사실 한국군 장군벨트가 미군 장군벨트를 본떠 만든 것이다. 야전 훈련 시에는 일반 탄띠를 차지만 부대 행사 시에는 ACU 전투복 위에 장군용 벨트를 차며, 이 벨트는 상의를 빼입어도 상의 위에 차기 때문에 한국군 장군들이 벨트를 드러내기 위해 상의를 넣어입는다는 군대 속설은 틀린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전시상황을 가정한 훈련에서 번쩍번쩍한 표적을 달고 나오는것은 절대 현명한 행동이 아니다.
국방일보 기사에 의하면 기능상의 이유로, 그간 여러 번 상의를 꺼내입게 해달라는 청원이 상부로 제출되었지만, 여전히 '단정치 못하다'는 이유로 묵살당했다고. 그러나 2006년 특전사에 지급된 신형 특전복이 처음부터 상의를 내어입는 형식으로 만들어지는 등, 드디어 차세대 전투복부터 내어입기 방식으로 채택되었다.
그렇다고 상의를 넣어입는 것이 꼭 케케묵은 구식은 아닌 것이, 타국 군의 경우 러시아군은 2018년 현재 평시 영내근무 때는 전투복 상의를 바지 안에 넣어입고 훈련이나 전투 등 군장 착용시에만 상의를 바지 밖으로 꺼내게 한다. 영국군도 20세기 말까지는 전투복 상의를 바지 안으로 넣어서 입었던 것이 확인되고 있다. 대신 영국군은 탄띠가 바지 허리띠를 겸한다. 미군도 1980년대 BDU가 제식 채용되기까지는 전투복 상의를 바지 안으로 입고 다녔고. 전투복 상의를 바지 밖으로 내어서 입는 것은 베트남 전쟁에 파병된 병력에게만 한정적으로 지급된 '정글 퍼티그' 전투복에만 허용되었었다. 그도 그런 것이 그 더운 곳에서 상의를 바지에 넣어입으라는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는지. 1971~1973년까지 전투복 상의를 바지 밖으로 내입도록 한 한국군 복장규정도 미군의 정글 퍼티그를 베트남에서 보고 유래된 것이다.
참고로 전세계에서 가장 효율적이라는 이스라엘군은 복장 규정이 없다. 군복만 걸치고 있으면 어떻게 입든 아무도 상관 안한다. 대부분 넣어 입기는 한다. 이스라엘군이 군복을 바지에 넣어 입는 것은 영국군의 영향이라는 설이 있다.
2013년부로 예비군도 현역과 마찬가지로 상의를 빼고 입을 수 있도록 허용되었다.[73] 훈련의 효율성과 신형 전투복을 입는 현역과의 형평성을 위한 것이라고. 그런데 이에 대한 반응 중 '이젠 상의를 넣어 입어야겠군'이 있다
개구리 군복 마지막 세대조차 예비군이 끝난 지금에 와서는 완전히 옛날 얘기가 되었다.
모두가 간과하는 이유가 하나 더 있는데, 내어 입는 전투복 상의들이 4포켓이 아니고 위에만 2포켓인 이유는 실제로는 평소에도 아래 포켓을 잘 사용하지 않는 점과 보통은 바지 포켓에 손을 집어넣는게 더 편하다. 주머니가 달린 전투조끼를 착용하기 때문이지만 유사시 걸리적거리는거 없이 하의에 바로 집어 넣기 편하기 때문이다.
3.7. 적외선 위장
적외선 위장의 원리란, 가시광선 영역에서 단색 전투복보다 위장패턴이 들어간 전투복이 시각 분산효과로 위장이 더 잘 되는 원리와 동일하다,[74][75] 적외선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로, 일반 염료로 염색한 원단은 위장패턴 존재여부와 상관없이 하나의 단색으로 보여지며 주변 환경에 어울리지 못하여 돋보이게 된다. 이를 해결하고자 위장패턴을 구성하는 각 색상을 특수염료로 나염해 적외선 반사값을 달리하는 것이다. 이 같은 개념은 냉전 당시 미소 양측의 야간투시경이 점점 발전을 거듭하게 되자 감시수단에 대한 대응으로 발전하여 미군 BDU의 우드랜드 패턴에도 적용하게 되었고, 각 선진국들도 동일한 개념을 채용하게 된다.적외선 위장 염료에는 내구연한이 있는데, 빨래하면서 물이 빠지면 옷에 염색되어 있던 염료가 감소되면서 위장효과가 저감되기 때문이다.
구형 전투복을 처음 받게 되면 통칭 '짬내'라 불리는 냄새가 났는데 이는 주로 폴리에스터 계열 합성섬유에 의한 냄새로 추정되며, 적외선 위장 염료와의 관계는 아직 알려진 바 없다.
소설 데프콘에서 적외선 위장 코팅이 언급된 이후로 밀덕들 사이에서는 '적외선 위장 = 코팅'이라는 공식이 성립해 있으나 그 출처나 원리는 불분명하다. 그렇게 비실전적이라며 욕 먹는 다림질과도 별 연관이 없다.
3.8. 다림질
구형 전투복을 입던 시절에는 다림질해서 줄을 잡고 맞후임병들에게도 다림질을 해주는 관습이 있었다. 때문에 신병이 전입하면 전투복과 약복을 다리느라 다리미가 남아나지 않아 약복만 다려입고 나가면 되는 선임병들이 맞후임을 받은 병들에게 빨리 하라고 갈구곤 했다.장교들은 오히려 줄잡기를 하지 않았으며 만약 줄잡기를 하면 '병사 같은 놈'이라는 욕을 먹었다.[76]
신형 전투복의 경우 다림질을 금하고 있으며, 전투복 안에 포함된 사이즈 및 세탁법 표기란에 '다림질 금지'라고 표기가 되어 있다. 심할 경우 군기교육대에 보내는 경우도 있었다. 지금이야 약복 다림질은 해도 전투복은 다림질을 하는 사람이 없지만.
한때 다리미질이 적외선 위장 코팅을 벗겨버린다며 비실전적인 행위라고 욕을 먹었는데, 이는 상기한 대로 소설 데프콘의 영향이다. 하지만 소설은 소설일 뿐이고 다리미질은 적외선 위장과는 별 연관이 없다. 최신 전투복 경향에 의하면 기본적인 방습/투습 기능은 물론, 사용군의 환경과 목적에 따라 방수/방충/방염/방오 기능 등을 다양하게 적용하기 위해 각종 기능성 원단을 사용하거나 특수약품처리를 하게 되는데, 이런 원단에 다리미를 갖다대면 성능저하가 일어나니 당연히 다림질을 금지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고어텍스 원단에 다리미 갖다대는 멍청한 짓 하지 말라는 것과 같다. 신형전투복에는 기본적인 방습/투습 기능이 적용되었으니 다림질을 금지했지만 구형전투복은 위장패턴을 적외선 위장염료로 염색한 것을 제외하면 그런 기능 같은 거 전혀 없었다.
사실 이 다림질도 쌍팔년도 미군의 영향이다. 대략 베트남전 당시의 미군들을 보면 전투 중이 아닌 후방부대의 경우 각 잡아놓은 모습들이 보이는데, 특히 영화 사관과 신사 같은 걸 보면 해군 수병복 칼라에 국군마냥 다섯 줄(...) 잡아놓은 것도 보인다.
미군의 경우 지금도 예복은 칼같이 다림질이 되어 있고, 군대 외에도 민간 경찰관들도 근무복, 특히 밝은 색인 하근무복 상의도 양쪽 주머니 단추를 수직으로 다리는 두 선과, 등판도 어깨선 수평선, 여기서 내려오는 세 선이 칼같이 내려오는데 이는 단추 달기, 옷 다림질 등 섬세한 작업을 잘 못하는 그쪽 사람들, 특히 남자들의 특성 상 우리같이 옷감 색이 누렇게 뜰 때까지 직접 다리미로 반복해서 문지르는 것이 아니라 세탁소에서 큰 스팀 다리미로 한 번에 누른 것이다. 이게 오히려 변색될 걱정도 없으며 잡힌 줄도 더 빳빳하고 단정해 보인다.
4. 관련 문서
대한민국 국군의 제식 군모 | |||||
군 | 육군 | 해군 | 공군 | 해병대 | |
간부용 | 병용 | ||||
정모 | |||||
육군 정모 | 해군 정모 a | 공군 정모 | 해병대 정모 | ||
근무모 | |||||
베레모 | 근무모A형 | 근무모B형 b | 개리슨모 | 개리슨모 | |
전투모 | |||||
국군 통합 전투모 c | 팔각모 | ||||
a 사진의 정모는 장교용으로, 부사관용은 장교 정모와 전체적인 형상은 동일하나 다른 모표를 쓴다. 장교용이 교차된 앵카를 배경으로 한 거북선 위로 무궁화가 있는 모표를 쓰며, 부사관용은 앵카 하나를 배경으로 하는 은색 무궁화가 그려진 모표를 쓴다. 근무모에 부착하는 모표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 게다가 부사관용 정모는 육해공군 공통으로 금색 월계수 잎이 없다. | |||||
b 표 구획이 나눠져있어 근무모 B형은 마치 병만 쓰는 모자로 오인할 수 있으나, 참모총장부터 이등병까지 같은 형상의 모자를 쓴다. 또 정식명칭은 "근무모 B형"이지만 실무장병들 사이에선 "흑색모" 혹은 "체육모"로 불리며 함정근무 등의 경우를 제외하면[1] 간부의 경우 근무복 착용 시 개리슨모를 착용하고, 병의 경우엔 빵모를 착용한다. | |||||
c 2020년 7월까지 육군은 야구모자 형상의 전투모를 쓰지 않고 활동모와 부니햇(일명 정글모)을 사용하였으나, 7월 6일부로 해공군과 같이 국군 통합 전투모를 재도입하고 베레모는 근무모 용도로 변경하였다. | |||||
[1] 그나마도 육상에 나갈 때는 100%, 현문당직 등 함 외부에 노출되는 당직의 경우 혹서기 시 함장재량으로 흑색모나 함모를 착용하게 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얄짤없이 개리슨모 또는 빵모 착용이다. |
[1] 다만 군모의 경우 기존 별기군의 것을 그대로 사용했다.[2] 별기군 시절엔 녹색.[3] 일반 병사들은 1개.[4] 단, 사진에서도 보듯이 바지의 경우 전통적인 흰색 한복바지를 혼착하기도 한 모양이다.[5] 군모를 보면 별이 아니라 황실의 상징인 오얏꽃이 있다.[6] 예복엔 해당 단락 상단에 나온 예식 견장을 착용하도록 되어있다.[7] 사진에서는 예복이라 되어있지만 정복이다.[8] 김병화 군복의 사례처럼 간혹 대수(Sash)로 오인되어 잘못 복원되는 사례도 있다.[9] 출처 딱 봐도 알겠지만 당시 일본군복과 매우 유사하다. 차이점이라면 견장이 없고 수장이 달려있다는 것.[10] 사진상의 군복은 천안 독립기념관 제5 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는 군복이다. 출처는 독립기념관 블로그.[11] 글과 대략적인 삽화를 통하여 재현된 복각품이다 보니 견장의 크기가 실제 부착되었던 견장의 크기보다 훨씬 더 크게 묘사되었다. 실제 견장의 크기는 아래의 사진 참조.[12] 이당시 중국은 중화민국이었고, 중국 각지에서 각종 군벌들이 활개치던 상황이었다.[13] 홍범도 장군이 부대원들과 찍은 사진 중, 적백내전기 붉은군대의 튜닉을 입고, 부됸노프카를 쓴 부대원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14] 실제로 봉오동 전투나 청산리 전투에서 대한독립군, 북로군정서군과 교전한 적들이 피해를 입은 이유가 교란으로 인한 일본군 부대끼리의 오인사격이라는 점에 있어서, 효과는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15] 특히 카라장의 형태가 중화민국 북양정부 군벌의 군복 카라장과 동일함.[16] 군복의 세로형 견장과 카라장의 모습을 보고 일본군을 연상할 수 있으나, 이러한 형식은 당시 군벌 대다수가 일본군의 군복 양식을 모방해서 사용하고 있었고, 사진상의 카라장은 일본군의 오목한 오각형이 아닌, 중국 군벌의 튀어나온 오각형 카라장과 동일하다. 당시의 기록들에도 중국에서 군복을 구입해 착용하였다는 기록이 많아 이쪽으로 생각하는 편이 타당하다. 이 문장에서 "'일본군 군복'이 아닌, '일본 군복을 모방한 중국 군복'"부분을 보고 '그게 그거지 않느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카라장의 형상이 다르다는 점이 '일본 군복을 바로 모방한 것'이 아니고, '일본 군복을 모방한 중국 군벌 군복을 보급 및 2차적으로 복제생산한 것'이란 사실을 더욱 명확히 한다.[17] 메이지 45년인 1912년에 제작되어 2차대전기까지 사용된 일본군복이다. 영화 암살 이나, 덕혜옹주에 나오는 그 군복과 비슷하게 생겼다고 보면 된다. 45식 군복의 모습들.[18] 다만 특이하게 일본군식의 탈착형이 아니라 박음질 해서 고정시킨 것으로 보이는 견장이다. 견장의 외양에서도 차이점이 있는데, 일본군이나 중국 군벌의 견장과는 달리 독립군 장교 견장의 경우 견장 가운데에 태극문양과 같은 독립군 고유의 특징이 들어가 있는 등 차별화가 된 점을 알 수 있다.[19] 아마 일본군의 보병 병과인 붉은색을 따와 카피한 것으로 보인다. 독립군은 사실상 거의 대부분이 보병이었으니... 다만, 앞서 서술하였듯이 일본군의 경우는 카라장이 안쪽으로 패인 5각형 형식으로 되어있지만, 독립군의 카라장은 볼록한 5각형인데, 이것은 당시 중국 군벌들이 사용한 형식과 동일한 모양이다.[20] 다만 맨 앞에 앉아있는 인물은 김좌진 장군의 모습이 아닌 최운산 장군의 모습이라는 주장이 있다.[21] 이미지 출처[22] 원래 크라운 형식의 정모이지만, 형태가 바로 잡아지지 않는 후줄근한 모습이어서 '사실상' 뉴스보이 캡 또는 인민모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23] 주로 민가나 동굴에 보관하였음.[24] 여군들은 개리슨 모를 착용한 것을 볼 수 있다.[25] 권총집이 달려있고 권총 무게로 벨트가 쳐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권총집 부위에서 권총집 반대편 어깨를 두르는 사선의 띠가 달린 벨트이다. 이 벨트가 만들어지게 된 일화가 하나 있는데, 1857년 영국령 인도에서 발생한 세포이 항쟁 기간 동안의 전투 도중, 부상으로 왼팔이 절단된 영국군 장교 샘 브라운 경이 군도를 들고 다닐 수 없게 되자, 벨트에 군도를 고정시킨 채로 패용하여 남아 있는 오른손으로 군도를 바로 뽑아 사용할 수 있도록 고안하여 만든 것이 시초이다. 즉, 고안 당시에는 권총이 아닌 군도를 패용한 벨트가 쳐지지 않게 하는 목적으로 제작되었다는 것. 한편, 한국에서는 영화, 드라마, 사진 등의 매체에서 이 벨트가 일제 강점기의 일본 순사와 일본군 장교, 6.25 전쟁 당시의 북한군 장교들과 소련군 장교들, 2차대전의 나치 장교들이 착용하는 모습으로(그리고 타 군이 사용하는 모습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이 보여지기 때문에, 국내에서는 왠지 '사악한 군대'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으나, 사실은 독일군, 미군, 영국군, 일본군 등 2차대전기 추축군과 연합군, 냉전시기 공산권과 자유진영 가리지 않고 여러 군대에서 폭넓게 사용된 장구류이다. 대한민국에서도 제4공화국 시대 대통령경호실에 배속된 군 장교들에게는 샘 브라운 벨트가 지급되었다.[26] 왼쪽이 남성 병사, 오른쪽이 여성 병사용이다.[27] 청천백일기 모표가 태극무늬로 바뀌고, 카라에 부착하는 금속제 계급장이 견장 형태의 계급장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병과장을 카라에 부착하는 형식으로 바뀌었다.[28] 옷의 외형 자체는 차이가 없고 계급장이나 병과 표식 등의 군용 부착물을 추가적으로 붙이느냐 안 붙이느냐의 차이가 있었다.[29] 1945년 이전에는 중국 국민혁명군의 계급을 사용하였다.[30] 대부분의 국가에 적용되는 전투복-견장 일체형 옷과는 달리, 광복군 견장은 소련군, 또는 인민군과 비슷하게 견장과 옷이 분리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31] 사실 미군도 기병 등 일부 병과에선 사용한 스타일이지만, 일자바지+각반(물론 일본식 권각반과는 형태가 다른 미국식)이 가장 보편적이었다.[32] 무장친위대 위장복의 경우는 정규군 보다는 KLO측에 주로 지급되었다. 문서 참조[33] 6.25 전쟁당시의 국군 군장에 대해 더 자세하게 알고싶으면 기타자료들을 참고[34] 허리까지만 오는 짧은 자켓[35] 카키색에서 국방색(올리브 그린)으로.[36] 전투복 하의의 경우 간소화를 하여 양 옆면의 주머니가 옆트임식 주머니가 따로 없고 건빵주머니 형태로 약간 높게 달린 큰 주머니들만 두 개가 있었다. 카키색 장교 하정복에 구두를 신고 후퇴하던 백선엽 장군이 철모와 전투복으로 갈아입고 찍은 사진을 보면 그 형태를 쉽게 알 수 있다.[37] 참고로 위 사진에서 KLO 부대원이 입고있는 독일 군복은 무장친위대 dot44 군복이다.[38] 출처[39] 게다가 군복 부족에 시달리던 중공군이 이 누비방한복을 노획하는 경우도 있어서 더더욱 그랬다.[40] 일부 해병들의 경우 무더운 날씨 때문에 덕헌터 정글복 상의의 소매를 모두 때어내어 나시같이 만들고, 바지도 무릎 부근에서 잘라 반바지로 만들어 입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육군도 비슷했다. 영화 알 포인트에서 M60기관총 사수인 이재필 상병(정경호 분)이 대검으로 본인 전투복 상의의 소매를 뜯어내자 장영수 병장(오태경 분)이 왜 멀쩡한 소매를 뜯어내냐고 하자 이재필 상병이 실제 전투는 해 본 적이 있냐고 핀잔을 주는 부분이 그것이다.[41] 1961년~1963년에 입은 원피스형 커버올이 아니라, 일반적인 셔츠와 바지로 구성된 전투복 형태.[42] 광주에 위치한 5.18 자유공원의 자유관에는 아예 이 충정복이 전시품으로 전시되어 있으며(다만 진품이 아니라 모조품인지 위장패턴은 오리지널 충정복의 그것이 아니다.), 정기적으로 광주에서 열리는 5.18 전야제의 재현 행사에서도 소품으로 충정복 위장 커버 헬멧과 충정복이 그대로 등장하기도 한다.(2006년 전야제 2010년 전야제) 다만 이것은 엄밀히 말하면 고증오류로, 5.18 당시 특전사의 정확한 복장은 일반 보병용 한국형 리프패턴 철모(충정훈련용 방석망을 붙인) + 충정복 조합이다. 영화 택시운전사에서 이 복장을 (방독면을 제외하면) 거의 정확하게 고증했다. 다만 사령부 마크는 당시 달지 않았다. [43] 기록에 따르면 5월21일 광주에서 물러날때까지는 충정복을 착용하였으나, 마지막 5월 27일의 도청진압작전에 참여한 특전사는 일반 보병 복장(송정비행장에서 작전 대기중 모 부대에서 보유하던 cs복과 월남전 방탄조끼 등을 싣어와 구제옷 창고 모양으로 부어놓고 사이즈에 맞는 걸 대충 골라 입었다고 함. 급하게 임시로 지급받은 복장이라 부대 마크나 표식 등이 없음. 방탄조끼가 없거나 표식이 있는 전투복, 야전상의을 착용한 부대는 보병부대)으로 위장하고 작전에 참여했고, 실제로 당시에 찍힌 컬러 영상기록들(출처 : KBS의 5.18 다큐멘터리 '80년 5월 푸른눈의 목격자, 힌츠페터')로도 확인할 수 있다.[44] 샘브라운 벨트가 나치, 일제, 북한 등 악당의 상징으로 유명한 것과는 별개로 딱 봐도 멋있고 실용적인 면도 있기 때문에 실제로는 전 세계 각지의 군대에서 널리 쓰였다. 애초에 첫 발상지도 이러한 이미지와는 별 관련 없는 영국이기도 하고.[45] 미군은 이 문제점을 일찍이 인식해서, 아주 옛날인 1950년대부터 직업군인이 아닌 징집병들에게도 정복을 지급하며 외출 휴가시 입도록 적극 장려했다. 번쩍번쩍하게 입고 나가야 선전효과와 함께 청년들을 낚아 군대에 대한 환상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니까. 이걸 우습게 볼 수가 없는게, 실제로도 미 해군과 해병대는 정복으로 대표되는 대양선원에 대한 로망이나 마린 블루 드레스에 대한 막연한 공명심을 가지고 지원했다는 청년들이 꽤 많다. 특히 미 해병대의 경우 타군이면 30줄을 바라보는 자원자가 상당함에도 홀로 20대 자원자가 넘쳐날 정도다. 근대의 유럽도 모병관, 징집관들이 마을을 돌며 선전할 때에도 그 효과를 보기 위해 일부러 더 좋은 재질과 장식이 달린 군복을 입게 했었다. 나치 독일이 일부러 화려한 전투복을 채용한 것처럼, 10년도 이전 징병제 시절의 독일 연방군이 꼴랑 9개월 있다 집에 가는 징집병들에게도 굳이 정복을 지급해줬던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46] 이 탓에 가까이에서 보면 얼룩덜룩하지만 거리가 멀어지면 색이 뭉게지게 만들어지는 효과를 노리고 픽셀무늬가 개발 되었고, 21세기 특수부대의 상징과도 같은 멀티캠조차도 멀리서 보면 민무늬로 보일 정도로 무늬 별 색감 차이를 희미하게 만들었다.[47] 기본적인 우드랜드 형태의 군복보급은 1980년대 중반서부터 최전방에서 시범적으로 보급되기 시작되었다.[48] 해병대 특수수색대[49] 다만 공군의 특수임무부대인 CCT, SART도 특전사의 특전복을 입었으나, 2015년부터는 멀티캠 전투복을 입는 중이다.[50] 2012년 ~ 2013년 일부 군번의 경우 기존의 전역 직전의 선임들이 남겨놓은 구형 통합 전투복을 받아 입기도 했었다.[51] 예를 들어 육군이면 '대한민국 육군 ROKA'라고 적혀있다.[52] 평상 시에는 원색, 훈련과 전시에는 위장색을 부착한다.[53] 해군의 기본 전투복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육지 근무자는 기존에 입었던 통합 전투복이다.[54] 대한민국 해병대 포함.[55] 2014년 기준으로 바지의 옆줄이 빨간색으로 변경되었다.[56] 공군 여생도 정복은 단추식이다. 그러나 그것만 다를 뿐 다른 특징들은 타 생도 복장과 공유한다.[57] 때문에 가끔 해외 밀리터리 관련 중고장터에 생도 예복이 돌아다니는 경우가 있다. 물론 이것도 군복이므로 중고로 판매하면 위법인데다가, 장교의 명예가 걸린 옷이기에 전역하더라도 팔려는 사람은 거의 없다. 보통 사망이나 이민 등의 사유로 인하여 헌옷수거함 같은 곳에 버려진 것이 해외로 팔린 뒤에 떠돌아다니는 경우가 대다수다.[58] 2013년 한국교통대학교 학군단 창설 때의 사진으로 지금은 모자가 개리슨모로 바뀌었고 육군 학군단처럼 왼팔 어깨 쪽에 학군단 부대마크가 부착된다.[59] 현재는 개리슨모를 쓰고 있다. 베레모가 전멸한 것으로 보아 완전히 교체된 것으로 보인다.[60] 국내생산품인 이 전투복은 원래 원단이 로디지아군 수출용으로 만들어진 것인데, 내전 이후 로디지아가 짐바브웨로 바뀌면서 수출이 중단되자 처치곤란이 된 남은 재고 원단을 사회복무용으로 도입한 것이다.[61] 최근 하복에는 앞가리개가 없다.[62] 여군은 계절에 관계없이 항상 채워야한다.[63] 전시 사망할 경우 위로 하는 마음으로 앞가리개 단추를 채워주는 행위[64] 미군은 2차대전때 이미 티셔츠를 입었으며 안에 아무것도 안입고 다니는 일도 많았다.[65] 옛날 50~60년대의 육군 장교, 부사관들의 사진을 보면 앞가리개 대신 머플러를 하고 있는 모습들도 있다. 특히 특전사의 경우 낙하산 천 비슷한 것으로 된 얼룩무늬 머플러를 한 모습들을 찾아볼 수 있다.[66]
앞가리개 대신 머플러를 하고 있는 장성급 장교의 모습. 해당 인물은 6군단 부군단장 시절의 박정희.[67] 예를 들어 독일연방군에서 사용중인 플레크타른 패턴의 전투복의 경우 현용이긴 하나 한국군, 미군의 전투복이 아니며 디자인도 혼동의 여지가 없을 만큼 명백히 다르기 때문에 법에 저촉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2000년대 초중반에 밀리터리 룩으로 유행하기도 했다.[68] 신형 디지털 전투복 보급이 완료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현용이 아니게 된 구형 우드랜드 전투복이나, 그보다 더 오래 된 민무늬 전투복은 입고 다녀도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69] 사실 이런 이유로 한국군 현용 군복은 은근히 기피되는 편이다. 일일이 신고하기 불편하기 때문이고, 무조건 입으면 불법이라는 잘못된 시각이 많기 때문에 일일이 해명하기도 귀찮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통 한국군 군복은 더 이상 현용으로 사용되지 않는 군복 및 장구류로 과거를 재현하는 일이 많다.[70] 남군은 M, 여군은 W[71] 남군은 M, 여군은 W[72] 하복의 경우 기존 전투복보다 얇은것은 물론이고 좌우 팔에 달려있던 주머니가 삭제되어 기본적으로 소매를 접어올리기 편한 형태로 되어있다.[73] 이때는 아직 현역조차 개구리 군복이 남아있었으니 예비군은 당연히 전원 개구리였다.[74]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arm&no=842958[75]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arm&no=560259[76] 현역 장교 또는 예비역 장교 아버지들은 병인 아들이 칼줄 잡는다고 심지어 바둑판 위에 전투복을 펴 놓고 자와 연필로 줄까지 그어가며 다리미로 탄내가 날 때까지 문지르는 것을 국민들의 피같은 세금으로 받은 멀쩡한 전투복을 망가뜨린다고 영창감이라고 하며 끔찍이도 싫어했다. 장교들이 보기엔 그저 사병들의 똥폼 잡는 짓거리일 뿐이다. 그럴 시간에 병기 손질이나 더 하라는 것. 군복무를 마친 후 노가다 작업복으로 입으면 얼마 못가 다림선이 주욱 찢어지는 것을 보고 왜 장교들이 귀에 못이 박히게 전투복에 다림질을 하지 말라고 한 이유을 깨닫게 된다. 결국 동원훈련을 가려면 예비군 전용 군장점을 수소문해서 찾은 다음 안쪽에 진짜 "예비군 전투복" 택이 붙은 전투복(싸제가 아닌 진짜 국방부 정품이다.)을 사서 입고 예비군 훈련에 나가야 한다.
[14] 실제로 봉오동 전투나 청산리 전투에서 대한독립군, 북로군정서군과 교전한 적들이 피해를 입은 이유가 교란으로 인한 일본군 부대끼리의 오인사격이라는 점에 있어서, 효과는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15] 특히 카라장의 형태가 중화민국 북양정부 군벌의 군복 카라장과 동일함.[16] 군복의 세로형 견장과 카라장의 모습을 보고 일본군을 연상할 수 있으나, 이러한 형식은 당시 군벌 대다수가 일본군의 군복 양식을 모방해서 사용하고 있었고, 사진상의 카라장은 일본군의 오목한 오각형이 아닌, 중국 군벌의 튀어나온 오각형 카라장과 동일하다. 당시의 기록들에도 중국에서 군복을 구입해 착용하였다는 기록이 많아 이쪽으로 생각하는 편이 타당하다. 이 문장에서 "'일본군 군복'이 아닌, '일본 군복을 모방한 중국 군복'"부분을 보고 '그게 그거지 않느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카라장의 형상이 다르다는 점이 '일본 군복을 바로 모방한 것'이 아니고, '일본 군복을 모방한 중국 군벌 군복을 보급 및 2차적으로 복제생산한 것'이란 사실을 더욱 명확히 한다.[17] 메이지 45년인 1912년에 제작되어 2차대전기까지 사용된 일본군복이다. 영화 암살 이나, 덕혜옹주에 나오는 그 군복과 비슷하게 생겼다고 보면 된다. 45식 군복의 모습들.[18] 다만 특이하게 일본군식의 탈착형이 아니라 박음질 해서 고정시킨 것으로 보이는 견장이다. 견장의 외양에서도 차이점이 있는데, 일본군이나 중국 군벌의 견장과는 달리 독립군 장교 견장의 경우 견장 가운데에 태극문양과 같은 독립군 고유의 특징이 들어가 있는 등 차별화가 된 점을 알 수 있다.[19] 아마 일본군의 보병 병과인 붉은색을 따와 카피한 것으로 보인다. 독립군은 사실상 거의 대부분이 보병이었으니... 다만, 앞서 서술하였듯이 일본군의 경우는 카라장이 안쪽으로 패인 5각형 형식으로 되어있지만, 독립군의 카라장은 볼록한 5각형인데, 이것은 당시 중국 군벌들이 사용한 형식과 동일한 모양이다.[20] 다만 맨 앞에 앉아있는 인물은 김좌진 장군의 모습이 아닌 최운산 장군의 모습이라는 주장이 있다.[21] 이미지 출처[22] 원래 크라운 형식의 정모이지만, 형태가 바로 잡아지지 않는 후줄근한 모습이어서 '사실상' 뉴스보이 캡 또는 인민모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23] 주로 민가나 동굴에 보관하였음.[24] 여군들은 개리슨 모를 착용한 것을 볼 수 있다.[25] 권총집이 달려있고 권총 무게로 벨트가 쳐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권총집 부위에서 권총집 반대편 어깨를 두르는 사선의 띠가 달린 벨트이다. 이 벨트가 만들어지게 된 일화가 하나 있는데, 1857년 영국령 인도에서 발생한 세포이 항쟁 기간 동안의 전투 도중, 부상으로 왼팔이 절단된 영국군 장교 샘 브라운 경이 군도를 들고 다닐 수 없게 되자, 벨트에 군도를 고정시킨 채로 패용하여 남아 있는 오른손으로 군도를 바로 뽑아 사용할 수 있도록 고안하여 만든 것이 시초이다. 즉, 고안 당시에는 권총이 아닌 군도를 패용한 벨트가 쳐지지 않게 하는 목적으로 제작되었다는 것. 한편, 한국에서는 영화, 드라마, 사진 등의 매체에서 이 벨트가 일제 강점기의 일본 순사와 일본군 장교, 6.25 전쟁 당시의 북한군 장교들과 소련군 장교들, 2차대전의 나치 장교들이 착용하는 모습으로(그리고 타 군이 사용하는 모습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이 보여지기 때문에, 국내에서는 왠지 '사악한 군대'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으나, 사실은 독일군, 미군, 영국군, 일본군 등 2차대전기 추축군과 연합군, 냉전시기 공산권과 자유진영 가리지 않고 여러 군대에서 폭넓게 사용된 장구류이다. 대한민국에서도 제4공화국 시대 대통령경호실에 배속된 군 장교들에게는 샘 브라운 벨트가 지급되었다.[26] 왼쪽이 남성 병사, 오른쪽이 여성 병사용이다.[27] 청천백일기 모표가 태극무늬로 바뀌고, 카라에 부착하는 금속제 계급장이 견장 형태의 계급장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병과장을 카라에 부착하는 형식으로 바뀌었다.[28] 옷의 외형 자체는 차이가 없고 계급장이나 병과 표식 등의 군용 부착물을 추가적으로 붙이느냐 안 붙이느냐의 차이가 있었다.[29] 1945년 이전에는 중국 국민혁명군의 계급을 사용하였다.[30] 대부분의 국가에 적용되는 전투복-견장 일체형 옷과는 달리, 광복군 견장은 소련군, 또는 인민군과 비슷하게 견장과 옷이 분리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31] 사실 미군도 기병 등 일부 병과에선 사용한 스타일이지만, 일자바지+각반(물론 일본식 권각반과는 형태가 다른 미국식)이 가장 보편적이었다.[32] 무장친위대 위장복의 경우는 정규군 보다는 KLO측에 주로 지급되었다. 문서 참조[33] 6.25 전쟁당시의 국군 군장에 대해 더 자세하게 알고싶으면 기타자료들을 참고[34] 허리까지만 오는 짧은 자켓[35] 카키색에서 국방색(올리브 그린)으로.[36] 전투복 하의의 경우 간소화를 하여 양 옆면의 주머니가 옆트임식 주머니가 따로 없고 건빵주머니 형태로 약간 높게 달린 큰 주머니들만 두 개가 있었다. 카키색 장교 하정복에 구두를 신고 후퇴하던 백선엽 장군이 철모와 전투복으로 갈아입고 찍은 사진을 보면 그 형태를 쉽게 알 수 있다.[37] 참고로 위 사진에서 KLO 부대원이 입고있는 독일 군복은 무장친위대 dot44 군복이다.[38] 출처[39] 게다가 군복 부족에 시달리던 중공군이 이 누비방한복을 노획하는 경우도 있어서 더더욱 그랬다.[40] 일부 해병들의 경우 무더운 날씨 때문에 덕헌터 정글복 상의의 소매를 모두 때어내어 나시같이 만들고, 바지도 무릎 부근에서 잘라 반바지로 만들어 입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육군도 비슷했다. 영화 알 포인트에서 M60기관총 사수인 이재필 상병(정경호 분)이 대검으로 본인 전투복 상의의 소매를 뜯어내자 장영수 병장(오태경 분)이 왜 멀쩡한 소매를 뜯어내냐고 하자 이재필 상병이 실제 전투는 해 본 적이 있냐고 핀잔을 주는 부분이 그것이다.[41] 1961년~1963년에 입은 원피스형 커버올이 아니라, 일반적인 셔츠와 바지로 구성된 전투복 형태.[42] 광주에 위치한 5.18 자유공원의 자유관에는 아예 이 충정복이 전시품으로 전시되어 있으며(다만 진품이 아니라 모조품인지 위장패턴은 오리지널 충정복의 그것이 아니다.), 정기적으로 광주에서 열리는 5.18 전야제의 재현 행사에서도 소품으로 충정복 위장 커버 헬멧과 충정복이 그대로 등장하기도 한다.(2006년 전야제 2010년 전야제) 다만 이것은 엄밀히 말하면 고증오류로, 5.18 당시 특전사의 정확한 복장은 일반 보병용 한국형 리프패턴 철모(충정훈련용 방석망을 붙인) + 충정복 조합이다. 영화 택시운전사에서 이 복장을 (방독면을 제외하면) 거의 정확하게 고증했다. 다만 사령부 마크는 당시 달지 않았다. [43] 기록에 따르면 5월21일 광주에서 물러날때까지는 충정복을 착용하였으나, 마지막 5월 27일의 도청진압작전에 참여한 특전사는 일반 보병 복장(송정비행장에서 작전 대기중 모 부대에서 보유하던 cs복과 월남전 방탄조끼 등을 싣어와 구제옷 창고 모양으로 부어놓고 사이즈에 맞는 걸 대충 골라 입었다고 함. 급하게 임시로 지급받은 복장이라 부대 마크나 표식 등이 없음. 방탄조끼가 없거나 표식이 있는 전투복, 야전상의을 착용한 부대는 보병부대)으로 위장하고 작전에 참여했고, 실제로 당시에 찍힌 컬러 영상기록들(출처 : KBS의 5.18 다큐멘터리 '80년 5월 푸른눈의 목격자, 힌츠페터')로도 확인할 수 있다.[44] 샘브라운 벨트가 나치, 일제, 북한 등 악당의 상징으로 유명한 것과는 별개로 딱 봐도 멋있고 실용적인 면도 있기 때문에 실제로는 전 세계 각지의 군대에서 널리 쓰였다. 애초에 첫 발상지도 이러한 이미지와는 별 관련 없는 영국이기도 하고.[45] 미군은 이 문제점을 일찍이 인식해서, 아주 옛날인 1950년대부터 직업군인이 아닌 징집병들에게도 정복을 지급하며 외출 휴가시 입도록 적극 장려했다. 번쩍번쩍하게 입고 나가야 선전효과와 함께 청년들을 낚아 군대에 대한 환상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니까. 이걸 우습게 볼 수가 없는게, 실제로도 미 해군과 해병대는 정복으로 대표되는 대양선원에 대한 로망이나 마린 블루 드레스에 대한 막연한 공명심을 가지고 지원했다는 청년들이 꽤 많다. 특히 미 해병대의 경우 타군이면 30줄을 바라보는 자원자가 상당함에도 홀로 20대 자원자가 넘쳐날 정도다. 근대의 유럽도 모병관, 징집관들이 마을을 돌며 선전할 때에도 그 효과를 보기 위해 일부러 더 좋은 재질과 장식이 달린 군복을 입게 했었다. 나치 독일이 일부러 화려한 전투복을 채용한 것처럼, 10년도 이전 징병제 시절의 독일 연방군이 꼴랑 9개월 있다 집에 가는 징집병들에게도 굳이 정복을 지급해줬던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46] 이 탓에 가까이에서 보면 얼룩덜룩하지만 거리가 멀어지면 색이 뭉게지게 만들어지는 효과를 노리고 픽셀무늬가 개발 되었고, 21세기 특수부대의 상징과도 같은 멀티캠조차도 멀리서 보면 민무늬로 보일 정도로 무늬 별 색감 차이를 희미하게 만들었다.[47] 기본적인 우드랜드 형태의 군복보급은 1980년대 중반서부터 최전방에서 시범적으로 보급되기 시작되었다.[48] 해병대 특수수색대[49] 다만 공군의 특수임무부대인 CCT, SART도 특전사의 특전복을 입었으나, 2015년부터는 멀티캠 전투복을 입는 중이다.[50] 2012년 ~ 2013년 일부 군번의 경우 기존의 전역 직전의 선임들이 남겨놓은 구형 통합 전투복을 받아 입기도 했었다.[51] 예를 들어 육군이면 '대한민국 육군 ROKA'라고 적혀있다.[52] 평상 시에는 원색, 훈련과 전시에는 위장색을 부착한다.[53] 해군의 기본 전투복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육지 근무자는 기존에 입었던 통합 전투복이다.[54] 대한민국 해병대 포함.[55] 2014년 기준으로 바지의 옆줄이 빨간색으로 변경되었다.[56] 공군 여생도 정복은 단추식이다. 그러나 그것만 다를 뿐 다른 특징들은 타 생도 복장과 공유한다.[57] 때문에 가끔 해외 밀리터리 관련 중고장터에 생도 예복이 돌아다니는 경우가 있다. 물론 이것도 군복이므로 중고로 판매하면 위법인데다가, 장교의 명예가 걸린 옷이기에 전역하더라도 팔려는 사람은 거의 없다. 보통 사망이나 이민 등의 사유로 인하여 헌옷수거함 같은 곳에 버려진 것이 해외로 팔린 뒤에 떠돌아다니는 경우가 대다수다.[58] 2013년 한국교통대학교 학군단 창설 때의 사진으로 지금은 모자가 개리슨모로 바뀌었고 육군 학군단처럼 왼팔 어깨 쪽에 학군단 부대마크가 부착된다.[59] 현재는 개리슨모를 쓰고 있다. 베레모가 전멸한 것으로 보아 완전히 교체된 것으로 보인다.[60] 국내생산품인 이 전투복은 원래 원단이 로디지아군 수출용으로 만들어진 것인데, 내전 이후 로디지아가 짐바브웨로 바뀌면서 수출이 중단되자 처치곤란이 된 남은 재고 원단을 사회복무용으로 도입한 것이다.[61] 최근 하복에는 앞가리개가 없다.[62] 여군은 계절에 관계없이 항상 채워야한다.[63] 전시 사망할 경우 위로 하는 마음으로 앞가리개 단추를 채워주는 행위[64] 미군은 2차대전때 이미 티셔츠를 입었으며 안에 아무것도 안입고 다니는 일도 많았다.[65] 옛날 50~60년대의 육군 장교, 부사관들의 사진을 보면 앞가리개 대신 머플러를 하고 있는 모습들도 있다. 특히 특전사의 경우 낙하산 천 비슷한 것으로 된 얼룩무늬 머플러를 한 모습들을 찾아볼 수 있다.[66]
앞가리개 대신 머플러를 하고 있는 장성급 장교의 모습. 해당 인물은 6군단 부군단장 시절의 박정희.[67] 예를 들어 독일연방군에서 사용중인 플레크타른 패턴의 전투복의 경우 현용이긴 하나 한국군, 미군의 전투복이 아니며 디자인도 혼동의 여지가 없을 만큼 명백히 다르기 때문에 법에 저촉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2000년대 초중반에 밀리터리 룩으로 유행하기도 했다.[68] 신형 디지털 전투복 보급이 완료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현용이 아니게 된 구형 우드랜드 전투복이나, 그보다 더 오래 된 민무늬 전투복은 입고 다녀도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69] 사실 이런 이유로 한국군 현용 군복은 은근히 기피되는 편이다. 일일이 신고하기 불편하기 때문이고, 무조건 입으면 불법이라는 잘못된 시각이 많기 때문에 일일이 해명하기도 귀찮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통 한국군 군복은 더 이상 현용으로 사용되지 않는 군복 및 장구류로 과거를 재현하는 일이 많다.[70] 남군은 M, 여군은 W[71] 남군은 M, 여군은 W[72] 하복의 경우 기존 전투복보다 얇은것은 물론이고 좌우 팔에 달려있던 주머니가 삭제되어 기본적으로 소매를 접어올리기 편한 형태로 되어있다.[73] 이때는 아직 현역조차 개구리 군복이 남아있었으니 예비군은 당연히 전원 개구리였다.[74]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arm&no=842958[75]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arm&no=560259[76] 현역 장교 또는 예비역 장교 아버지들은 병인 아들이 칼줄 잡는다고 심지어 바둑판 위에 전투복을 펴 놓고 자와 연필로 줄까지 그어가며 다리미로 탄내가 날 때까지 문지르는 것을 국민들의 피같은 세금으로 받은 멀쩡한 전투복을 망가뜨린다고 영창감이라고 하며 끔찍이도 싫어했다. 장교들이 보기엔 그저 사병들의 똥폼 잡는 짓거리일 뿐이다. 그럴 시간에 병기 손질이나 더 하라는 것. 군복무를 마친 후 노가다 작업복으로 입으면 얼마 못가 다림선이 주욱 찢어지는 것을 보고 왜 장교들이 귀에 못이 박히게 전투복에 다림질을 하지 말라고 한 이유을 깨닫게 된다. 결국 동원훈련을 가려면 예비군 전용 군장점을 수소문해서 찾은 다음 안쪽에 진짜 "예비군 전투복" 택이 붙은 전투복(싸제가 아닌 진짜 국방부 정품이다.)을 사서 입고 예비군 훈련에 나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