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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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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실제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후대 인물 허균이 창작한 의적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논란이 있지만 간접적인 언급으로 소설 홍길동전에서 대중화된 의적 이미지를 노래 가사로 사용했으므로 저자 허균을 생각하고 언급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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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김홍도 표준영정.jpg 김홍도 표준영정[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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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745년 (영조 21년)
경기도 안산군
(현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성포동) [3]
사망 1806년~1818년 추정(향년 61~72세)[4]
본관 김해 김씨
사능(士能)
단원(檀園)[5], 서호(西湖), 취화사(醉畵士, 醉畵史), 고면거사(高眠居士), 첩취옹(輒醉翁), 단구(丹邱)
부모 부친 - 김석무(金錫武, 1711년 ~ 1780년)
모친 - 인동 장씨 장필주(張弼周)의 딸
자녀 장남 - 김양기[6](金良驥, 1763년 ~ 1833년)
종교 불교, 유교 (성리학)
직업 시인, 화가, 정치인[7]

1. 개요2. 생애3. 작품4. 논쟁
4.1. 도슈사이 샤라쿠4.2. 그림에서 보이는 오류들
5. 대중매체에서6. 기타7.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KBS 한국사전 - 조선의 르네상스를 그리다, 단원 김홍도
조선 후기의 화가.

2. 생애

1745년 아버지 김석무(金錫武, 1711년 ~ 1780년)와 어머니 인동 장씨 사이의 무녀독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하급 무관에 대대로 출사하던 무반 가문으로, 5대조 김득남(金得男, 1603년 ~ 1632년)은 수문장(守門將)을, 고조부 김중현(金重鉉)은 별제(別提), 증조부 김진창(金震昌, 1662년 ~ 1722년)은 만호(萬戶)를 역임했다. 그러나 조부 김수성(金壽星, 1686년 ~ 1750년) 대부터는 관직에 진출하지 못했으며, 김홍도가 태어나던 시기에는 신분이 중인으로 떨어진 상황이었다.

이후 강세황의 천거로 도화서 화원이 되었다. 1771년에는 왕세손초상화를, 1773년에는 영조의 어진 제작에 참여했기에 이 시기 즈음의 김홍도가 도화서에서 갖는 입지는 가장 높은 수준에 이르렀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후 1781년 왕의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인 어진화사로 임명되어 정조의 초상화를 그렸다. 1789년에는 스승인 김응환과 함께 일본지도를 그려오라는 밀명을 받고 떠났는데 김응환이 병으로 죽자 혼자 쓰시마 섬으로 건너가 일본 지도를 그려 가지고 돌아왔다. 당시 지도는 국가기밀이었기에 그 정도 임무를 맡을 정도로 정조가 믿고 아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790년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침사[8]로 지정한 수원 화산[9] 용주사대웅전에 화승들의 불화 작업을 감독했다. <삼세여래후불탱화>[10]라는 그림은 걸작으로 손꼽히는데 과감하게 서양 화법을 도입한 작품이기도 했다. 이러한 공들로 1795년 연풍 현감으로 임명되었지만 곧 사임했다. 1796년 다시 왕명으로 용주사의 <부모은중경>의 삽화를 그렸고 1797년 국가에서 발간한 <오륜행실도>의 삽화를 그렸다.

언제 사망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1980년대만 해도 상당수 학습 관련 책이나 위인전에서는 김홍도가 1760년생이라고 표기할 정도로 생몰연도에 대하여 주장이 서로 다르다. 그나마 요즘은 1745년생으로 거의 일치화되고 있다. 또한 1990년대 삼성전자에서 나눠주던 한국화 관련 달력에 나온 김홍도의 그림 설명에서는 1745년에 태어나 1818년에 사망했다는 표기를 한 바 있다. 기록으로는 1805년에 병이 위중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지만 이때 죽었는지 어땠는지는 알 길이 없다. 대체적으로 1810년 전후로 사망했을 것이라 추측할 뿐이다. 4학년 미술책에는 1745~1801이라고 나타내기도 한다.

그는 영조, 정조 시대에 활동하며 조선의 화풍에 지대한 변화를 일으켰다. 청나라를 통해 익힌 것으로 보이는 서양 화법을 과감하게 도입해서 색채의 농담과 명암으로 원근감을 드러낸 훈염기법을 도입했다.

또한 이전 화가들이 그리지 않았던 민중들의 삶을 그려낸 풍속화들을 많이 남겼는데 김홍도의 풍속화는 한국인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대표적으로 <서당>, <씨름> 등이 있는데 농사짓는 사람, 빨래하는 아낙 등을 그렸다. 이는 당대로서는 상당히 놀라운 전환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학자들은 김홍도의 풍속화가 정조의 개혁 정치와 관련이 깊을 것이라 보기도 한다. 2013년 김홍도의 작품집으로 알려진 단원풍속도첩(檀園風俗圖帖)은 사실 '김홍도의 작품이 아니라'는 주장이 학계에 나와서 논란이 깊어지고 있다. 만약 주장이 사실이라면 교과서부터 해서 모든 것을 갈아엎을만한 폭탄이 떨어진 셈이다.[11]

신윤복과 마찬가지로 춘화도 꽤 많이 그린 편인데 운우도첩의 경우는 조선 시대 대표적인 춘화도첩으로 꼽힌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도 후대의 작품이라고 하는 설이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지는 등 춘화를 그리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다.

신윤복과 함께 풍속화가로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는 수박 겉 핥기 식인 평가이다. 이것은 중고등학교 미술, 국사 시간에 스쳐지나가듯 배우기 때문이다. 신윤복은 정말로 풍속화만 남겼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기타 작품은 전무한 반면에 김홍도가 그렸다고 알려진 작품은 엄청나게 많다. 작품이 현재까지 전해져 온다는 것은 당대부터 엄청난 네임밸류를 쌓아왔다는 증거다.[12] 김홍도는 한반도 전통 화단의 정수라고 평가받는데 국가적인 프로젝트를 비롯하여 탱화[13], 산수화[14], 인물화[15], 영모화[16] 할 것 없이 모든 장르에서 완벽한 화풍을 보여주며 정물화인 책가도 또한 잘그렸다고 전해지지만 아직까지 실물이 발견된바는 없다. 조선 시대에는 시서화라 하여 시, 서예, 그림 3가지를 모두 취미로 삼거나 단련하는 문인들이 많았기 때문에 한 장르에 통달하기란 매우 어려웠다. 또한 장르 하나에 국한된 '문인 화가'들이 많았던 반면 김홍도는 '직업 화가'로서 그림에만 충실했으며 재능이 더해져 장르에 국한받지 않고 다재다능하게 소화한 조선 시대 통틀어서 유일무이한 화가다.

3. 작품

4. 논쟁

4.1. 도슈사이 샤라쿠

그의 일생에 대해 알려진 부분보단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많은 탓에 여러가지 이야기나 루머들이 돌곤 한다. 한국에서는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게 김홍도가 바로 1794년 5월 일본에 갑자기 나타나서 10개월 동안 200여 점의 그림만 남기고 홀연히 사라진 천재 우키요에 화가 도슈사이 샤라쿠였다는 이영희 작가[17]의 주장이다.

이영희 작가는 자신의 주장에 대한 근거로 김홍도가 일본 쓰시마섬에 지도를 그리러 간 시기와 샤라쿠가 나타난 시기가 겹치고, 화풍이 유사하며 김홍도와 샤라쿠 둘 다 발가락이 6개였으며, 때문에 그들이 그린 그림 중 발가락이 6개인 그림이 있다는 점 등을 들었다.

그러나 실제로 김홍도가 지도를 그리기 위해 일본 쓰시마섬에 간 것은 1789년이고, 1791년 12월 22일부터 1795년 1월 7일까지 지금의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에 있었던 연풍현 현감으로 재직했었다. 특히 조선왕조실록의 <정조 실록>에는 1795년 1월 7일 호서 위유사 홍대협이 연풍 현감 김홍도가 고을을 잘 다스리지 못했으니 죄를 줘야 된다고 청하는 기록이 나온다. 샤라쿠는 1794년 5월에 나타나 10개월간 활동한 화가이기에 샤라쿠의 활동 시기에 김홍도가 조선에 있었다는 국가 공식 기록이 남은 셈이다.[18]

덧붙여서 일본에서 진짜 샤라쿠라는 주장이 있는 사람은 수십명에 이른다.[19] 다만, 일본에서 샤라쿠의 정체에 대한 주장을 정리할 때는 김홍도도 그중 한 명으로 인정하는 모양인데, 이는 김홍도가 샤라쿠 라고 주장하는 이영희 작가가 관련 내용을 일본에서 책으로 출판[20]한 영향이 크다.

덧붙여서 에도 시대에는 기리시탄 탄압을 목적으로 시행된 이웃과 외지인에 대한 감시 정책이 존재했었다. 당시 일본에서 외국인이 바람처럼 나타나 여러가지 일을 벌이고 바람처럼 사라지는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4.2. 그림에서 보이는 오류들

파일:김홍도씨름실수.jpg

김홍도의 그림에서 보이는 특징 중 하나로, 손발의 위치가 어긋나 있거나, 신체적으로 부자연스러운 모습이 보이는 경우가 있다.

김홍도의 대표적인 그림인 "씨름"에선 바닥에 앉아있는 인물의 손이 좌우가 바뀌어 있는 걸 볼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김홍도가 선천적인 장애[21]를 갖고 있어서 그런 것이라는 의견이 있는가 하면, 일종의 틀린그림 찾기 놀이의 형태라거나, 혹은 자신의 그림을 따라 그리는 자들과 구분하기 위한 용도로 일부러 그렇게 그렸을 것이라는 등의 주장이 있다. 물론 그릴 때 헷갈리기 쉬운 손의 방향에 대해 무관심했을 가능성도 결코 적지 않다.[22]

5. 대중매체에서

6. 기타

7. 관련 문서



[1] 망건상투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머리를 잡아주는 역할이기 때문에 고증이 잘못됐다.[2] 이 선비가 김홍도인지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현재까지는 아니라는 것이 정설. 그 밖에도 1958년 리판찬이란 작가가 그린 북한 측 표준 영정이 하나 더 있다.[3] 출처[4] 1805년 이후 행적이 불분명하며, 전기문 등에서도 1805년에서 몇 년 뒤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5]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의 이름은 여기서 따온 것이다.[6] 김양기도 화가로 여러 작품을 남겼다. 아버지 김홍도의 영향을 받은 화풍을 보여줬으나, 재능은 아버지를 따라가지 못했다는 평이 많다.[7] 그는 벼슬을 얻었으나 곧 다시 사임하고 화가로 돌아갔기에 정치인이라고 하기는 애매한 부분이 있다.[8] 왕릉 근처에 세운 절.[9]경기도 화성시 화산동.[10] #[11] 단원 풍속도의 대중적 지명도 때문에 이런 표현을 하기는 하지만 김홍도는 다양한 장르에서 대단히 많은 작품을 남겼고 풍속도첩에 수록된 25점의 풍속도는 김홍도 전체 작품 세계의 일부에 불과하기 때문에 논란의 결과가 어떻든 화가로서 김홍도의 위상이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기는 하다.[12] 현대에 재평가된 작가가 아닌 이상 수많은 작품들이 소장되어 전해져 온다는 것은 전통적으로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13] 삼세여래체탱 (三世如來體幀), 용주사[14] 금강사군첩 (金剛四郡帖) 一[15] 강세황 초상[16] 송하맹호도 (松下猛虎圖)[17] 언론에서는 이영희를 한일 고대 사학자 혹은 한일 사학자 등으로 소개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영희는 역사학자가 아니라 이화여대 영문과 출신 작가기자다.[18] 조선왕조실록 뿐 아니라 일성록에도 김홍도가 연풍 현감으로 재직하다가 파직당하고 의금부로 압송될 뻔하다가 사면받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19] 심지어 샤라쿠의 정체는 네덜란드 사람이라는 설까지 있다.[20] 책 제목은 '또 하나의 샤라쿠'.[21] 거스트만 증후군. 손가락 실인증이라 하여, 선천적으로 손발을 인지하는데에 장애를 가진다.[22] 현시대의 프로 일러스트레이터도 복잡한 자세를 정신없이 그리다 보면 헷갈리는 것이 손발의 방향이다. 다리를 꼰 채로 앉아 있다던가 복잡한 구도가 섞인 손동작 같은 경우.[23] 물론 취향과 평가의 차이는 존재하며, 네임밸류라고 보면 된다.[24] 인왕산도와 북궐조무도를 그린 인물로, 고사관수도를 그린 조선 초기의 강희안과는 다른 인물이다.[25] 풍속화에 여자가 나오면 신윤복으로 구분하기도 하나, 김홍도의 단원풍속화첩, 행려풍속도첩, 사계풍속도병 등에도 여인이 등장하는 그림이 여럿 있기 때문에 부적절한 방법이다.[26] 분구 당시 국회의원 선거구 을구에 해당되었던 곳이다.[27] 당대 실학자인 성호 이익과도 관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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