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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권/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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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학벌주의3. 폭력 시위4. 권위주의 문화와 폭력성5. 반미·반서방 성향6. 반일·친중 성향7. 편협함8. 비뚤어진 역사관9. 무책임함10. 종북주의주사파11. 북한 인공기 사용 논란12. 성범죄13. 우익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역사 왜곡14. YS에 대한 시각15. 내 편이 아니면 모두 적16. 뉴라이트에 대한 비판17. 관련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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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운동권에 대한 비판을 담은 문서.

운동권이 80년대에 군사독재를 타도하는데 공헌했고 민주화 세력에 힘을 보탠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만, 사회구성체 논쟁에서 볼 수 있듯 운동권은 오늘날의 자유민주주의를 부르주아 독재라고 불렀으며, 이들이 목표로 삼던 사회는 또 다른 독재국가인 북한중국소련이었을 뿐이다.

시간이 흐르니 이를 포함하여 운동권의 여러 문제점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민주화가 이루어진 한국에서는 예전만큼 대중의 큰 호응을 받지 못한다는 게 문제다. 강경하면 폭력과 배타성으로 욕먹고, 온건하면 존재감이 잘 드러나질 않기 때문이다.

이 현상은 정치·사회상의 변화에 따라 사고방식이 여전히 그 시절에 정지해있는 상태인 기존의 운동권과 같은 세력은 필요가 없어져 자연스럽게 도태된 것에 가깝다.

2. 학벌주의

운동권의 주축은 SKY를 필두로 한 명문대 재학생, 혹은 그 출신들이 독점하였다. 운동권 세력판도가 NL, PD 계파로 분류되기 이전에 이미 출신 대학에 따라 서열이 갈려지는 셈이었는데, 명문대 출신과 3류대 출신이 똑같이 운동권 활동을 벌일 경우 3류대 운동권은 "네 앞가림이나 잘하라"는 비웃음을 사고, 해당 학교 학생들의 호응도 이끌어내기 어려워서 적극적으로 운동권에 개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심한 경우에는 명문대가 주축이 된 운동권 조직이 3류대 학생회에 개입해 학내분규를 조장 혹은 학생회 자금만 유용해 버리고 발을 빼는 일도 있었다.

무엇보다 학벌과 인맥 덕분에 명문대 출신들은 사회에서 한 자리씩 하는 선배들의 도움을 받기 쉬웠다. 그게 안 되더라도 고시를 보거나 어렵지 않게 취업할 수 있었고, 정 안 되겠으면 학벌을 내세워 학원 강사라도 하는 등 어떻게든 먹고 살 길과 능력이 있었지만[1], 3류대가 운동권 전력을 가질 경우 앞날이 심하게 암담했다. 운동권 활동한다고 성적도 좋지 못할 경우 구직에 직접적으로 지장이 가다보니, 평판도 나빠지고 낙인이 제대로 찍혀서, 따로 먹고 살 만한 능력이 없는 이상 정말 미래가 답답해지는 것.[2][3] 물론 대학만 나와도 취직이 가능했다던 고도성장기 시절에는 어찌어찌 취직에 성공한 경우도 있었지만, 점점 학벌인플레가 심해지면서 다 옛날 이야기가 되었다. 그나마 3류대+운동권으로 이후 성공한 경우라고 해봤자 식당을 열어서 크게 성공시켰다던지 등 아예 학력이랑 무관한 길에 본인의 재능이 애초부터 있었던 경우로 한정되는 중.

노무현 정부 시절, 민주노동당 중앙당에서 일하던 어느 지방대 출신 당직자가 겪은 일화가 하나 있다. 어느 날 중앙당에 그 당직자의 모교 학생위원회 당원들이 방문했던 적이 있었는데, 이 당직자는 조직이나 학생회, 노조 출신의 상근자와는 다르게 대학 졸업 후 직장인 생활을 하다가 중앙당에서 상근한 사람이어서 민주노동당 내부의 운동권 악습을 아주 정확하게 잘 알고 있었기에, 자기 학교 후배들이 중앙당에 방문했을 때 후배들이 기대했던 '운동을 어떻게 하면 잘 할 것인가' 대신 후배들의 앞날을 위해 그야말로 쓴 소리를 했다고 한다.

"내가 당 선배 이전에 사회에서 만나기 힘든 학교 선배로서 너희들에게 충고 하나 해주마. 서울대 연고대 출신들은 운동 하다가 생계가 곤란해지면 학교 간판과 인맥으로 하다못해 무슨 재단 같은데 간부로 낙하산으로 갈 수도 있고, 진짜로 할 게 없으면 학원에서 스타 강사로 먹고 살 수도 있다. 그런데 너희들은? 너희들이 학원 강사 할 수 있어? 아니면 든든한 선배들이 너희들을 밀어주고 끌어주겠냐? 정신 차려라! 너희들은 지금 SKY 등 명문대 운동권들 좋은 일만 시켜주면서 그들에게 이용만 당하는 거다!"

이 말을 들은 그 학교 학생위원회 당원들은 "중앙당에 계신 우리 학교 출신 고참 선배님이 당 활동에 대한 고견을 들려주실 줄 알았는데 이 무슨 후배들 김 빼놓는 말씀만 하시다뇨. 선배님, 크게 실망했습니다!"라며 발끈했다고 한다. 지금쯤 그 학생들은 그 선배의 말을 곱씹으면서 후회하고 있지는 않을까? 그런 말을 들었다는 걸 기억이나 하면 다행일 것이다.

대학조차 나오지 못한 운동가들은, 위장취업했다 전향하거나 위장취업을 포기하는 등의 이유로 다시 학교로 돌아가는 학생 운동권들을 보며 '돌아갈 집이 있다는 말이 저런 것이었구나'라며 더 좌절감을 느끼기도 했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애초 386은 학생만 조명했지 노동자들은 들러리일 뿐이었다는 것.(참고영상)[4]

여담으로 이런 운동권 출신들의 학벌 차별을 줄곧 당한 인사 중엔 고졸 출신 노무현 전 대통령도 있었다. 유시민 전 장관의 경우 "일부 엘리트주의에 사로잡힌 운동권들에게 일침을 가하고 싶었다"며 서울대 출신인 자신이 고졸인 노무현을 공개지지한 이유를 밝히기도 했다. 영상.

이런 경향은 그 뒤에도 여전했다. 2006년 인천 5.3 운동 20주년을 맞이해서 다양한 기념행사들이 열렸는데, 이곳에 초대된 사람들은 하나같이 명문대 학생운동권들, 당시 지역공장에 위장취업했던 학생운동가들(일명 학출) 일색이었고, 당시 시위대의 대다수를 차지하던 평범한 노동자들은 아무도 없었다. 노동자들이 가두정치투쟁에 나섰던 최초의 투쟁이라고 추켜세우면서 노동자는 빼버리는 코메디를 연출한 것이다.관련기사

경기동부연합의 모태가 되는 운동권 조직 용성총련(용인 성남지구 총학생회연합) 역시 이러한 운동권 내부의 학벌주의로 인해 삐뚤어져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성향이 되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용성총련에 대하여 경기동부 출신들이 유난히 돈에 집착하는 이유 [5])

3. 폭력 시위

과거의 시위대 하면 흔히 꽃병과 파이(화염병과 쇠파이프), 그리고 바리케이트와 짱돌로 대표되는 폭력시위를 연상하는 경우가 많았다. 1982년 부미방 사건과 1989년 5.3 동의대 사태, 1997년 유지웅 상경 사망사건 등처럼 시위 도중 진압경찰이나 선량한 민간인이 죽거나 다치는 경우도 있었고, 90년대 들어서는 폭력시위로 많은 비판을 받았다. 이게 극단적으로 폭발된 게 1996년 연대 한총련 사건이였다. 이때를 계기로 내부적으로 "필요 이상의 폭력시위는 자제하자"는 비판이 돌았고, 2000년대를 기점으로 학생운동권의 전투력은 급격하게 감소했다.[6]

2000년대 중반 이후론 무기가 등장할 정도의 충돌은 대부분 노동조합 대오와 전경들 사이에 벌어졌다. 오히려 학생대오가 과거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전투력이 하락해, 집회 때 전경 밀고 들어오는데 도망가서 시위대에게 위험한 상황을 만든다는 비판이 나올 지경이라나.[7] 이런 식의 퇴각은 최악의 전술이다. 이럴 경우 뒤에 있는 대오랑 엉켜 우르르 넘어져 부상자가 나오기 일쑤다. 지도부나 경험이 많은 참가자는 상황이 안 좋아지면 알아서 도망가지만, 뒤에 있던 일반 참가자는 영문도 모르고 두들겨 맞는다.

4. 권위주의 문화와 폭력성

일단 들어가기 전에 오해하지 말아야할 점은, 권위주의와 민주주의는 서로 반의어가 아니다. 권위주의의 반의어는 자유(지상)주의[8]이다. 오히려 권위주의의 형태로 민주주의가 돌아가는 권위민주주의라는 정치체제가 있을 정도.

내부적으로 지나치게 엄격한 생활계율[9]을 적용해 내외로 비판을 받은 적도 있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박노자 교수 등이 과거 운동권의 문화를 비판한 적도 있다. 특히 NL 계열의 경우 주체사상의 수령론 및 품성론 영향으로 인해 이러한 권위주의 문화가 매우 심했다.[10]

80년대에는 선후배 간의 체벌도 꽤 많았다고 하며, 몇몇 학교들은 2010년대 중반까지도 현재진행형이다. 가령 새내기에게 똥군기 잡는다고 한 학번 위의 학생들을 집합시켜서 기합을 준다거나 등이다. 80년대에 대학문화 자체가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권위적이고 억압적이었다. 특히 NL 진영의 구호인 "미제와 청와대 독재 아래 신음하는 우리의 딸들..." 운운이 있다. 이와같은 굳이 꼭 '여성'을 성적 표현에 대입한 것 때문에 NL운동권들과 여학생회는 자주 대립했다.[11]

이런 문제는 200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학생단체에서 여대, 여학생의 비중이 늘면서 어느 정도 해소되긴 했다. 하지만 아직도 좌파 운동에선 이런 성차별적인 윗대가리들이 꽤 남아 있어 진보마초란 말이 나오기도 했다. 물론 20세기 당시에도 권위주의적인 학생운동에 대한 비판이 운동권 일각에서도 제기되어 꾸준히 담론화되었다.

즉, 권위주의 독재정권을 타도하고 민주주의를 회복하자는 이들이 도리어 권위주의 노선을 들여오는 이중성을 보인 것이다. 2000년대 중반 이후로 문제가 되는 수직적 구조는 많이 개선되어, 타 학생 동아리에 비해 두드러질 만큼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다. 또한 권위주의에 대한 비판이 사실상 권위 자체에 대한 거부로 변질되어 오히려 이상한 물을 들여 놓았다는 비판 역시 존재한다. 가령 집회 때 줄 맞추어 앉게 한다고 파시즘이라고 하는 경우가 있다.[12]

이러한 성향이 나타난 원인에는 운동권이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만 있었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제대로된 이해가 없었던 것에 있다고 할 수 있다.[13] 전형적 자유민주주의자였던 김영삼-김대중[14]을 지나 운동권이 장악한 한국 정치가 지속적으로 권위민주주의로 흐르는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운동권은 이 모든 비윤리적이고 폭력적이고 압제적인 수단을, 자신들의 목적은 혁명이라는 고귀한 것이므로 어떤 짓을 해도 용서받는다고 생각하는 매우 이기적인 논리로 정당화한다. 따라서 범죄조직과의 유착 의혹이나 음주운전 그리고 공무원 사칭 등의 범법행위도 무조건적으로 옹호하는 등 윤리의식이 그야말로 처참한 수준이며[15], 심한 경우에는 이것이 국개론선민사상과 겹쳐서 2020년 차명진 세월호 유가족 망언 파동의 시작을 알린 NL 언론사와 경기동부연합 관련자 김인성 교수처럼 "감히 일반인 주제에 우리들처럼 깨어 있는 운동권이 숟가락 얹을 수 있게 순순히 하라는 대로 안 하고 말대꾸를 한다" 는 치졸한 이유자원봉사자와의 성관계 루머 같은 비열하고 저급한 루머를 퍼트려 자식을 잃은 부모들의 명예를 난도질하는 쓰레기같은 짓 도 서슴치 않을 정도.

이렇게 꽉 막힌 운동권의 위계질서와 무조건적인 수단의 정당화는 폭력적 성향과 맞물려 무고한 생명을 앗아가는 끔찍한 사태를 빚기도 했는데, 이렇게 90년대에 정점을 찍은 운동권의 폭력적 성향은 이종권 치사 사건이석 치사 사건을 초래하였다.

5. 반미·반서방 성향

이 땅을 무단으로 점령하는 미군들은 한반도에서 물러가라!
- 80년대 운동권 시위 구호
이들은 명분상 제국주의나 비뚤어진 부르주아 문화 조장을 내걸기도 했으며, 일부 과격 단체들은 "영어를 사용하지 말아라"[16], "프로야구를 보지 말아라"[17] 등의 터무니 없는 계율도 있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지나가는 사람이 미군 같다며 구타하기까지 하는 등(...) 운동권의 반미 성향은 광신에 가까웠다.

물론 운동권이 처음부터 반미 성향인 것은 아니었다. 70년대 후반까진 오히려 친미 성향이였는데 당시 도덕주의를 앞세운 미국의 지미 카터 행정부가 박정희 정권의 유신체제를 비판하면서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지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80년대 고유가 등으로 지미 카터 정권의 지지율이 크게 하락하면서 근 반세기 미국 민주당 최초로 연임이 좌절될 사태 앞에 놓였고 5.18 민주화운동이 발생할 때 개입을 꺼렸으며 결정적으로 계엄군의 학살을 사실상 용인했던 것으로 드러나면서 당시 운동권들에게 큰 충격과 분노감을 안겼다."미국이 5.18 무력진압 용인했다"..미 국무부 비밀문건 첫 확인 33년 전 오늘 리포트9 - "미국을 믿었는데..."

이들은 미국에 우호적인 사람들을 보면 느닷없이 친일 얘기를 꺼내 친일파로 몰아가는 편이다. 실제로 미국과 일본은 냉전 시기부터 동맹관계이며, 1965년 한일협상에 개입한 나라가 미국인데다 군사독재 시절엔 미국처럼 권위주의 정권을 뒤에서 봐준 나라이기도 해서 그런 것인데, 박세길의 <다시보는 한국현대사> 등지에서도 그런 견해가 나온다.

하지만 그런 뒷사정이 있다 해도 사실상 미국에 우호적이더라도 친일이 아닌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은 현실인데도 말이다. 이거 때문에 유럽연합영국도 까이는 경우가 많다. 정작 친일파의 본산지인 일본 제국태평양 전쟁에서 짓밟아버리고 전쟁 막바지에는 수도를 불태워버리고 원자폭탄을 2발이나 투하해 일본 제국의 반미 전체주의 독재 정권을 분쇄시키고 일본인들을 독재에서 해방시킨게 미국인데도 친미랑 친일을 억지로 엮어버린다.[18] 심지어 이들은 일본 제국과 똑같은 반미 전체주의 독재 국가인 중국과 북한의 행동에 대해서는 옹호하는 내로남불적인 입장을 보인다.

정파나 학교에 따라 다른지라 특정 노래나 책[19]을 못보게 하는 계율이 존재하는 곳도 있었다. 실제로 과거 신입생들은 멋 모르고 불렀다가 선배들한테 괜히 혼났다는 일화가 전해져오기도 하는데, 80년대 후반에는 과 학생회실에서 통기타를 치면서 존 레논의 'Imagine'을 불렀다는 이유로 선배한테 혼나는 경우도 있었으며[20], 서울대 96학번이 신입생일 무렵엔 마이클 잭슨의 춤을 장기자랑 때 췄다가 "다 좋은데 양키 노래라 좀 싫다"는 말을 들은 일도 있었다고 하며, 국산 대중가요조차 '상업성 조장'이라며 아예 금지됐다.[21][22] 물론 2000년대 들어서는 이런 극단적인 계율들은 많이 사라졌다. 하지만 대학마다 선-후배로 이어지며 이런 구태스런 운동권 동아리가 남아 있어, 아직도 여기저기에 '미제타도' 벽보를 붙인다거나 마이크 들고 반미를 외치기도 한다.

이들은 북한의 대남 도발에는 입을 꾹 다물거나 옹호하면서도, 미군의 범죄나 사건에 대해서는 매우 적대적으로 대응한다. 미군 여중생 압사 사고가 대표적인데, 유가족들의 자제까지 묵살하는 행태를 보인 바 있다. 이뿐만 아니라 패트리어트 미사일이나 사드 배치, 용산 기지 이전 등의 문제에도 언제나 주한 미군 철수를 종용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들의 미국에 대한 반감은 나이를 먹은 후에도 변함이 없다. 과거 운동권 출신 정치인들은 미국에 대해서 대체로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

이들이 말하는 민주주의도 서방의 자유민주주의가 아닌, 중국 공산당의 인민민주주의민주집중제이다. 운동권이 학창 시절 학습했던 민주주의론에는 자유민주주의, 표현의 자유, 법의 지배, 삼권분립, 견제와 균형 등은 운동권 커리큘럼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2004년 열린우리당 신기남 의장은 7월 23일 향후 당 운영계획과 관련, “당을 `민주집중제’로 운영해 `108 번뇌’라는 말이 다시는 나오지 않게 하겠다”고 기자들에게 말했다# 2016년에는 더불어 민주당의 이목희[23] 정책위의장이 당 기본원칙으로 민주집중제를 주장한 바 있다.# 진중권은 과거 운동권의 민주집중제가 현재 민주당을 장악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또한 구 동구권과 쿠바[24]나 남미의 좌경 정권 등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다. 전통적인 북한 우방이자 단독 수교국인 쿠바에 대해서 동경심을 갖는 경우가 많다.

또한 전통적인 반미 국가인 이란을 은근히 지지하는 입장을 보이기도 한다. 이란은 1979년 팔레비 왕조 시절까지는 친미 성향이었지만 그 해에 일어난 아야톨라 호메이니의 이슬람 혁명 이후 반미 국가로 전향하면서 운동권에서 이란의 반미 노선을 지지하기도 하였다. 2022년 히잡 사건으로 인해서 이란 내에서 반정부 시위 등이 일어나고 이에 동참하는 국민들을 크레인에 목을 매달아서 공개 처형하거나 가혹한 인권 탄압을 하며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고있는데도 이들 운동권들 사이에서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자신들이 적대했던 과거 군사정권 시절을 아득히 뛰어넘는 행위를 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운동권이 반미 성향 때문에 세계 의학 핵심 연구 기관으로서의 FDA의 역할은 무시하고 전문성에 의문을 표하며 코로나 백신 안전성에 의문을 표했다는 비판이 있었으나, 문재인 정부가 화이자와 모더나를 수입한 뒤로는 오히려 운동권 출신 민주당 정치인들에게 운동권은 친중이라 백신 부작용을 무시한다는 비난이 날아들고 있으며 백신 부작용 의혹 기사들이 나오고 있다.

6. 반일·친중 성향

한국 내 진보 성향 인사들은 한국 내에서 반일감정을 부추기며 선동을 하고 있는데 그 뒤에는 중국북한 등의 공산 세력들이 지원을 해주는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야말로 우리나라(일본)와 우리 국민(일본 국민)들에게 있어서는 경계대상이 아닐 수 없는 위험한 존재들이라 볼 수 있다. 실제 한국 내 진보 성향 인사 대부분이 친중, 친북 성향이 다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이야말로 일본 방위에 있어서 위험한 존재들이다.
- 산케이신문
다소 일본에 대해서 용인적인 성향인 김대중 정부를 제외한 노무현, 문재인 두 진보 성향 정권에서 이들 한국 내 운동권 좌경 인사들은 국가직에 출세를 하면서 반일 선동에 적극적으로 앞장서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요미우리신문
당시 운동권에게 있어서 반일감정은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 함운경[25]

여기에 대다수가 일본을 남북통일에 있어서 걸림돌이자 방해꾼으로 인식하거나 미국의 앞잡이에 사악한 제국주의 국가이라는 인식도 짙다. 일본을 과거사를 반성하지 않고 남북간 이간질과 평화통일 방해를 조장하는 방해 세력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남북분단도 일본의 책임이라고 주장하고 있다.[26] 특히 2019년 남북미 정상이 판문점에서 최초의 만남을 가졌을 당시 공교롭게도 그 때 일본 정부가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 조치 및 경제 보복을 취하였던 점까지 더해져서 이들 일부에서 남북평화에 경제 제재로 찬물을 끼얹고 방해를 한 악랄한 존재라는 인식을 통해서 반일정서가 짙어지기도 했으며 이들 역시 2019년 일본 상품 불매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또한 반일, 혐일 성향이 짙어서 일본 극우들의 경계 대상이자 증오 대상이며 적으로 인식되는 대상이기도 하다. 한국 내에서도 전두환과 같은 철권 독재자를 권좌에서 몰아내고 사회운동, 노동운동 등을 통해서 세력을 증강하고 반일을 외치며 위협을 하는 만큼 일본 극우들 사이에서도 이들 한국 운동권 인사들을 경계하고 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심지어 이들이 반일, 혐일 정서를 퍼뜨리는 주범이자 한일 국교단절을 외치며 한국 사회에 일본군의 과거사 들추기, 과거사 만행 제기 등을 통해서 반일감정을 부추기고 나가서는 일본 정부를 위협하고 전복하며 일본 국민들을 위협하고 공격할 수 있는 위험 분자이자 악랄한 암적 종자로 여기고 있다. 또한 자신들의 극우 사상에도 위협이 되기도 하여서 두려움과 경계를 하는 경우가 있다.

실제로 한국의 운동권 인사 대부분이 미국 못지않게 일본에 대해서 적대감과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다. 특히 과거 일제강점기 지배는 물론 학도병 징집, 위안부 문제, 일제 과거사 부정과 일본 극우세력의 증강을 보고 반일감정 및 혐일 성향을 가진 이들이 많으며 자신들이 싫어하는 미국의 동맹국 중 하나로서 여기는 점에서 사회운동, 노동운동, 집회시위 등을 통해서 반일감정과 과거사 문제해결 등을 요구하고 있다. 여기에 일본 자민당 우익 정치인들의 과거사와 한국에 대한 비하와 망언을 일삼으면서 이를 계기로 반일감정이 이들 사이에서 극도로 올랐으며 사회적으로도 단결하여 일본의 악행을 국제사회에도 널리 알리도록 해야한다고 주장한다. 2019년 아베 신조 정권의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 조치를 하게되고 한국 내에서 일본 상품 불매운동이 일어나자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하였다.

이들의 대일관은 다음과 같다.
일본은 우리나라와 우리 민족의 적이자 남북분단의 원흉이자 남북통일과 평화를 방해하는 적
과거사 반성을 하지않고 지금도 전쟁을 정당화하고 호시탐탐 한반도를 노리는 사악한 제국주의 국가
미국 앞잡이 노릇을 하며 남북통일과 평화정책에 방해공작을 펼치는 적

1985년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농성 사건을 주도하였던 삼민투 위원장 출신이자 현재 전북 군산에서 횟집을 운영하는 전 운동권 출신인 함운경도 반일감정은 당시 운동권 세력들의 강력한 무기였다고 증언하였다관련 기사.

진보진영 일각의 사고방식은 리영희가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10억인의 나라 중국 백서> 등을 쓸 때에서 크게 발전하지 못했다는 것이 지적받는다. 리영희가 저작 할 때는 시대적 한계도 있었고, 리영희 본인도 그 점을 훗날 인정하기도 했으나[27] 리영희는 이미 세상을 떠난 데다, 책의 업데이트가 안 되다 보니, 그 책을 읽은 독자들도 거기서 업데이트가 안 된다는 것이다. 때문에 적잖은 진보 매체나 정당에서 친중적인 논조를 보이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2000년 이후 여러 사건들을 계기로 반중 감정이 드세진 사람들에게 반발을 사고 있다.

중국공산당은 과거 박정희 정권은 야당이라도 있었지만 중국 공산당의 독재는 야당도 없는 1당 독재 체제다.[28] 중국은 일대일로로 파키스탄을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게 만들었다. 중국과 파키스탄의 사이는 미국과 파이브 아이즈의 사이와 비슷하다고 봐도 될 정도로 친한데, 이런 나라까지 등쳐먹어서 구제금융을 신청하게 만드는 나라가 다른 나라를 어떻게 대할지는 안 봐도 비디오다. 또한 중국은 티베트 독립 시위를 탄압하고 위구르인들을 수용소에 넣고 고문하는데 이것은 3.1 운동을 폭력적으로 탄압한 일제나 홀로코스트 등의 나치의 인권 침해와 다른 게 없는 행위이다. 경제시스템도 사실상 자본주의로 바뀐 지 오래됐고, 또 자주 타령도 민족주의가 기반 되어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보수가 주장할 문제지, 탈민족주의를 내세워야 할 진보 진영과는 어울리지가 않는 주제다.[29] 즉 오히려 반미, 반서방을 기반으로 하는 좌파진영이 좌익 민족주의 성향이 비교적 더 강한 경향이 크다. 그래서 미국, 영국, 일본 및 서방 세계에 대해서는 민족주의 성향이 강하나 중국 등 공산권 국가에 대해서는 그 이야기가 적용되지 않는 듯하다. [30]

하지만 신세대 운동권 중에서는 국제연대와 인권운동을 중시하며 홍콩을 비롯한 중화권 민주화 운동을 적극 지지하는 분파도 있다. 정의당에서는 청년조직인 모멘텀이나 청년의원인 류호정이 홍콩 민주화 운동에 공식적으로 지지를 표했다. 이런 분파에서는 민주당을 비롯한 옛 민주화 세력의 현재에 대해서 비판적인 평가를 하기도 한다.

7. 편협함

자칭 진보좌파라고 하지만 앞서 언급된 대로 일부는 조선시대나 군사정권 수준으로 보수적인 면이 있다.[31] 전향이나 사상전환을 용납하지 않는 옹졸하고 편협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이들이 대다수. 그 때문에 "남들은 21세기를 사는데 운동권만 70~80년대에 머물러 있다"는 비판이 나오는 것.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 관련자 문부식도 저서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에서 비슷한 비판을 했다.

무엇보다 이 집단은 용서나 이해, 옹호라는 단어는 머릿속에 아예 없는 치졸과 편협의 끝판왕들이다. 한번 자기네와 등지면 끝까지 적대적인 마인드를 취한다. 윤석양 씨만 해도 단지 입대 후 프락치를 강요당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황인오 역시 '중부지역당 사건'으로 검거당시 안기부에서 진술했다는 이유로 여전히 배신자 운운하는 것들이 있다는 사실이 이를 반증한다. 운동권 사람들은 자신의 심기나 자존심을 건드리는 사람이 내부에 있다면 '프락치 몰이'를 하기도 한다. 이런 독선적이고 편협한 사고방식을 인터넷 선전선동에 이용하면서 이에 물드는 네티즌들이 많다.[32] 그리고 모든 면을 정치적으로 해석하려 든다. 인터넷 커뮤니티 같은 곳에서 정치가 주제가 아닌 곳에서도 정치 이야기를 꺼내고 이에 반대하는 유저들을 반대파로 낙인 찍는 정치 떡밥을 뿌려 사람들에게 많은 반감을 사고 있다. 특히 자신들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을 특정 성별, 세대, 지역 등으로 비하하면서 자신들이 지지하는 정치인이 까임을 당하면 홍위병 마냥 비판하는 사람을 감옥에 보내야 된다고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입으로는 민주주의를 떠들지만 실제 하는 행동은 민주주의와 거리가 아주 멀다. 이들의 이러한 편협성은 친북, 친중 성향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난다.

문화나 서브컬처 탄압은 보수세력만 한다는 주장[33]도 있지만 운동권 및 그들이 주축이 된 진보세력도 신세대 문화에 대해서 꽉 막힌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마초, 권위주의 성향 그대로 운동권 경험이 있는 어른들이 자식들을 굉장히 보수적으로 키우거나, 자식들이 여가문화를 즐기는 것에 대해 배타적인 모습을 보이는 일은 정말 흔하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서 진행되었던 인터넷 검열 기조가 문재인 정부에서도 그대로 이어지자 실망하는 여론이 생기기도 했다.

흔히 보수정당이 신세대 문화에 부정적인 스탠스가 있으니 진보정당은 안 그럴 것이라 생각하고, 실제로 그들도 그렇게 주장하나, 현실은 선거를 위한 네거티브 공세일 뿐인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진보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주로 모이는 사이트에서 동성애자나 외국인 노동자, 다문화를 대할 때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는 걸 보면 극우와 그다지 다를 게 없다. 한국의 NL(정파) 운동권들은 민족주의 성향이 많고, 이를 기반으로 친북적인 모습을 보이는 좌파민족주의로 분류되기 때문에 인종, 문화적인 면에 있어서는 북한에 우호적이란 것만 제외하면 극우랑 다를게 없는 모습을 보여준다.

대한민국 운동권이 이렇게 LGBT에 대해 진보 맞나 싶을 정도로 편협하기 짝이 없는 모습을 보이는 데에도 다 이유가 있는데, 이들은 황당하게도 "미국에서 성소수자에 관한 담론이 많이 나오며 그만큼 미국 미디어에서도 많이 다룬다 = 따라서 성소수자는 미국 제국주의자 놈들 문화이니 배척해야 한다" 라는 무식하기 짝이 없는 논리[34]를 가지고 있으며[35], 심지어 양성애트랜스젠더 역시 맹목적인 반미에 눈이 먼 나머지 양성애자들과 트랜스젠더들을 두고 "자본주의자들의 소비주의패턴의 일종" 혹은 "유대인 의료 카르텔의 음모"[36] 라고 진지하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 #2)

민주노동당 정책위원장 후보인 이용대만 해도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듯 당당하게 동성애를 두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타나는 하나의 파행적인 현상" [37] 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과연 진짜 진보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의 꽉 막힌 망언으로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으며 (동성애가 자본주의의 파행적 현상?), 이태원 압사 사고 때에도 마찬가지로 중년 운동권들이 위와 같은 이유로 "놀러다니다 죽는건 자본주의자들의 향락 때문" "이태원은 동성애자가 많다. 이거 친미다" "친미 정부때문에 정신이 해이해진 청년들이 죽은것" 이라는 정신나간 소리들을 했다는 목격증언도 있을 정도. #

8. 비뚤어진 역사관

반미 성향을 가진 자들은 대한민국미제의 식민지로 인식한다. 또한 제1공화국미국을 등에 업은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주도했기 때문에, 한국전쟁도 북한이 아닌 친일파와 미국이 만든 전쟁이라고 주장한다.[38] 하지만 터무니 없는 소리일 뿐이다. 이승만의 극단적 반일성향이나 정책, 대한민국 초대 내각 인사들만 봐도 가볍게 반박할 수 있으나 오로지 운동권만이 인정하지 못할 뿐이다. 오히려 이범석 등 극단적 민족주의자들이 반공성향을 띄는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에 일부 NL계열 운동권 출신 중에는 종북이 아니라면서도 남북간의 문제에 대해서 북한을 두둔하는 이들이 많은데, 북한이 친일파를 청산하고 미제 문화에 오염된 한국과 달리 전통적인 언어나 문화를 계승하고 있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운동권 일각에선 북한이 더 민족적인 정통성이 있는 국가로 보고 있는 것. 그러나 이들의 믿음과 달리 실제론 북한 정권에 수많은 친일파들이 참여했다. 남북한 초대 내각 비교 그리고 설령 역사적 정통성을 가지더라도 온국민을 굶기는 실패국가는 정통성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점과 북한이 그들이 그토록 혐오하는 일본 제국과 똑같은 반미 전체주의 독재 국가라는 것을 애써 외면한다. 운동권 일부가 이런 성향을 갖게 된 것은 청암 송건호 등의 <해방 전후사의 인식>이나 박세길의 <다시쓰는 한국현대사>가 도화선이다. 이런 시각은 민족주의적으로 봐도 한민족의 발전에 먹칠만 하는 셈이다.

물론 한국이 정부 수립 초기에 친일 청산에 실패했고 미군정과 1공의 인사에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많았던 것은 사실이고 확실히 문제가 있으나, 이는 북한과 중국을 옹호할 근거는 되지 못한다.

또 이들 중에선 박정희 정권의 이순신 성역화에 반발해 원균을 옹호하는 뻘짓을 저질렀으며, 굴곡진 근현대사에 혐오감을 갖고 환빠적인 역사관을 주장하는 이들도 많다. 이들에게 있어 기존의 강단사학자들은 친일 식민사관을 가진 반동에 불과하다.

또한, 운동권은 투쟁만을 보는 역사관을 가지고 있어, 단순히 싸워서 당장 무언가를 쟁취하지 못했다면 실패했단 인식을 가지고있다.[39] 그래서 이런 '실패한' 운동에서 싸웠단 것만을 중요시 여기고 있고 소소한 진전이나 장기적인 영향력에 대해선 실패로 인식할 뿐 어떠한 참조도 하지 않기때문에, 이들은 단발적인 승리만을 치중하는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40] 현대에 들어서 이들에게 가장 어울리는 단어는 단연 사이다패스일 것이며, 실제로 이들의 정치적 방향성도 이에 일치한다.

조선시대에 대해서는 민중 사관의 영향을 받아 민중들의 역할을 강조하지만 지배층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왜곡하기도 한다.[41]

9. 무책임함

연세대 사태에서 보듯이, 지휘부가 학생들을 버리고 튀었다. 이런 무책임한 모습은 이전에 있었던 시위에서도 종종 일어났는데, 아무것도 모르고 불려나온 후배들을 실컷 고기방패로 써먹고 내다 버렸다. 거기다 시위나 운동권 회합을 한다고 통보도 없이 특정 대학이나 장소에 우르르 몰려가 난장판을 만들어 놓고 수습도 안해 놓는다. 거기다 시위 도구나 현수막 만든다고 화학공학과미대생들 부려먹는 건 덤이고, 학과 강의 중에 대뜸 밀고 들어와서 멋대로 중지시키고, 선동을 일삼거나 순진한 애들을 운동권으로 꼬드긴다.

이렇게 실컷 부려먹고 어지럽혀 놓고 윗대가리들은 정치한답시고 나가 버리고, 내부에서 밥그릇 싸움하다 패배한 일부 상층부와 투쟁이란 단어밖에 모르는 골통들은 방치되었다가 뉴라이트로 전향하거나, 김기종 같은 적색 테러분자로 흑화했다.

그렇게 데모하던 운동권 인사들이 주축이 된 노무현 정부의 시위 진압은 역설적으로 아주 강경했다. 이 시기 구속당한 노동자 수가 김영삼 정부의 2배였으며 2005년 여의도 농민집회에선 경찰의 강제해산 과정에서 과잉진압으로 농민 2명이 방패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 허준영 경찰청장이 경질당하고 노무현 대통령이 대국민 사과를 하기까지 하였다. 이듬해 2006년 평택 대추리에서는 토지보상이 완료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행정대집행을 실행하면서 경찰력에 군병력까지 투입하였고 이에 반발한 시위대 및 남아 있던 주민들과 충돌을 빚었다. 군병력 투입 전 작전수립 과정에서 총기를 휴대할 계획이 있었던 것으로 드러나면서 많은 논란이 일기도 했다. 행정대집행이 벌어진 5월은 5.18 민주화운동 기념일이 있는 달임을 생각하면 실제 작전에 반영되진 않았다고 하더라도 크게 비판받지 않을수 없다. 대추리 사태가 소강상태에 들어선 그해 여름, 포스코에서 시위 중 노동자 1명이 진압 과정에서 사망하는 일이 또다시 발생하였고 이로 인해 시위가 과격하게 변하자 전년도에 부산 APEC에서 처음 등장했던 무현산성이 다시 세워지기도 했다.

10. 종북주의주사파

독재정권 치하에서 누명을 썼다는 인식도 있고 실제 누명을 쓴 사람도 많긴 했지만, 주사파 문제가 아예 없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의 공안사건 사안들이 대부분, 실제로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진짜 간첩을 잡을 능력이 없어서 아무 해도 없었던 무고한 시민만 아무나 잡아다 억지로 간첩으로 만들어 족치는 아무 쓸모없는 양아치 같은 짓거리만 하느라, 정작 진짜 간첩이 그만큼 유유히 활개치도록 방조한 독재정권 하의 공안경찰/정보부/공안검사 같은 무쓸모 세금 도둑놈들[42]그런 쓸모 없고 무능한 고문 및 조작 원툴 뿐인 세금 도둑놈들[43]에게 훈장과 금일봉까지 줘 가며 오히려 활개치도록 비호한 당시 독재정권의 공안조작 등으로 그 시절 공안기관에 대한 신뢰성이 전반적으로 의심받고 이미지가 희석되어서 그렇지, 주사파는 분명히 실재했다. 기본적으로 운동권이 사회주의 성향이 대부분이다 보니[44], 북한의 실체를 깨닫지 못하고[45] 그저 사회주의 국가라고 생각한데서 오는 호의적인 착각도 이런 주사파들을 양산하는 데 한몫 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이런 흐름 속에 탄생한 주사파들은 한국 운동권의 이미지에 적잖은 타격을 주었다.

여담으로 사실 해방 이후에는 오히려 사회주의가 인기가 많았다. 심지어 당시 지식인들은 정치 체제는 자유주의 내지는 시민민주주의로 가야 하지만, 경제 체제는 사회주의식 계획경제로 가는게 옳다고 보는 경우도 많았다.[46][47] 그러나 신탁통치 오보사건과 수년 뒤 벌어진 민족의 비극 한국 전쟁 이후 남한은 완전히 반공으로 돌아선다. 이 시기 이후 한국의 공산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은 지하에서 긴 세월을 보내게 된다.

이 부분은 사구체 논쟁 항목을 보면 알 수 있지만, 60~70년대에 종북주의자들이 없던 것은 아니다. 조총련과의 커넥션이 있던[48] 일부 소수의 그룹과 한국 전쟁 후 지하에 숨어있던 김일성주의자들은[49] 어떻게든 당국의 눈을 피해 조직을 만들거나 민주화 운동으로 위장한 그룹을 만들어 다른 민주화 운동 단체와 연합을 하거나 꼽사리를 껴서 움직였다. 그만큼 김일성주의(이하 주체사상)은 금기였고 반공법과 국가보안법의 칼날을 피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조직을 만들었다가 연대한 다른 그룹까지 간첩 혐의로 줄줄이 딸려가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가 통일혁명당 사건이 있고, 유신 체제가 끝날 때까지 북한 노선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거의 활동을 못하고 천천히 늙어갔다. 아니, 북한 노선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와 관련된 사람들은 하나도 활동을 못 했다고 보는 게 맞는다. 유신 시대에 적발된 "최대규모의 맑스주의자 그룹"인 김정강 그룹 사건[50]의 리더 김정강도 1960년대부터 10년 넘는 세월을 그냥 공장 숙련공으로 잠입만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80년대가 되고 나서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참상이 지식인과 학생 사회를 강타한다. 그 이전까지는 미국을 이상적인 민주주의 국가로 바라보는 지식인들도 많았고, 운동권 중에는 순수 민족주의자들이나 반공주의자들도 많았다. 그러나 분단과 학살의 배후에 미국이 있었다는 이상한 시각[51]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면서, 즉 미국이 통수를 쳤다는 배신감이 생기면서 그전까지는 없었던 "양키 고 홈"이라는 구호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52]

1986년 김영환이 팜플렛 <강철서신> 배포 후 자생적 주체사상파가 생겨나기 시작한다.[53] 이들은 남북통일민족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학생사회와 운동권 사이에서 세력을 불려나갔다. 특히 이들은 같은 사회주의 계열 내에서 노동문제와 사회 구조문제에 포커스를 맞춘 PD와 다르게, 좌익 민족주의적 가치를 내세웠기 때문에 대중적 반향을 얻을 수 있었다.[54]

물론 이들은 민주화가 되기 전까지 공개적으로는 어디까지나 민주주의와 민족, 애국을 내세웠다. 애초 이것도 탈민족주의가 모토인 진보가 내세울 가치는 아닌 것 같지만 넘어가자 그래서 80년대에는 "한참 운동권 선배들을 따라다니며 데모하다 보니, 어느새 나도 NL이 되어 있더라"는 사례가 꽤 많이 있었다. 이들이 본격적으로 반공개적으로 주체사상을 논하기 시작한 것은 89년 이후부터다.[55] 그리고 주체사상을 논하기 시작하면서 이들은 점점 일반 대중과 멀어져갔다.

요약하자면, 1986년까지 주체사상파는 전면에 등장하지 않았다. 당시 6월 항쟁이라는 시민혁명을 견인한 것은 분명 운동권들이지만, 여기에는 시민사회 및 종교단체, 재야 정치권, NL과 CA와 PD까지 다양한 정파들이 섞여 연대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당시 학생운동권보다 훨씬 강력한 공개 대중조직이었던 신한민주당 당원들과 지지자들 및 이들의 일부가 결성한 민주화추진협의회의 힘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56]

하지만 민주화가 이루어지자 마치 민주화를 자신들의 공산주의 사상 실현의 시대로 보며 폐쇄적인 환경에서 자기들만의 우물안 개구리식 아전인수격 인식을 하던 주사파 그룹들은 공개적으로 대중 앞에 나서기 시작했고, 이는 결국 타 정파들로부터의 고립을 자초하는 결과를 낳았다. 일반 시민들이 이들을 인간쓰레기로 간주한 것은 두말 할 나위도 없었고.

11. 북한 인공기 사용 논란

[출처] 대학에 인공기가 휘날리는 미쳐돌아가던 시절|작성자 무수천

이들은 친북 찬양도 모자라서 대한민국 대학가에서 인공기를 대놓고 휘날리는 논란과 망발을 저지르기도 하였다. 인공기대한민국 영내에서는 김씨 일족의 공산정권이 사용하는 불법 집단의 국기로 규정되어서 남한 국민이 이를 사용할 경우 국가보안법 적용을 받아 처벌을 받도록 되어있다.

실제로 이들은 행사 때 대놓고 인공기를 휘날리며 북한 찬양을 대놓고 하였고 심지어는 김일성을 숭상하고 찬양하는 반역행위를 저지르기도 했다.

이들은 그와는 반대로 미국의 성조기와 일본의 일장기를 불태우거나 찢어버리는 모습도 보였는데 이를 통해서 이들의 반미, 반일 행위가 당대에 극에 달하였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12. 성범죄

서울의 모 대학 출신의 95학번 K씨는 1990년대 중반 농활 중 강간 사건이 발생한 적도 있었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공식적인 문제 제기 없이 피해자 학생만 귀가했다. 당시만 해도 성폭력 사건의 심각성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경우가 많았으며 현장활동을 간 지역과의 연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거나, 일이 불거졌을 때 현장활동 전체에 그 파장이 미칠 것을 우려하는 운동권 문화 때문이었다.#
"진보 진영의 오래된 습관 성희롱 고발한다"
잇단 '성추문' 지자체장들 왜? "견제없는 권력"·"운동권 속성"
최영미 시인 "내 시집 속 '돼지'는 2005년 당시 문화예술계 권력자"
운동사회 성폭력, 그 식상함과 새로움의 사이에서
운동권 세력이 낳은 ‘권력형 나르시시즘’의 단상

운동권과 여성 성범죄에 대한 사례는 상당히 많은 편이다. 특히 80년대 사회운동을 하던 이들이 국회나 정당 등의 정치 활동을 하면서 미투 문제와 성추행에 대한 사고는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김정희 바른인권여성연합 공동대표는 “주사파들은 과거 운동권 때부터 혼숙을 하며 일종의 성(性)공유제를 해왔다”라는 주장을 하며 “이들이 어릴 적부터 익숙하던 그 생활(혼숙 동거)이 내부 모순과 부작용, 사회적 비판에 부딪혀 터지는 게 미투 사건이다”고 주장했다.

김정희는 68혁명, 히피운동 등의 영향을 받은 우리나라 운동권에서는 남성 운동가들에 대한 여성의 성상납을 심지어 ‘혁명을 위한 봉사’, ‘혁명을 위한 성의 무기화’ 등으로 포장했다고 주장한다.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 주도의 대규모 폭력시위인 1996년 연세대사태로 운동권 세력이 위축되기 시작한 1990년대 중반까지 최소 수십 년 동안 이러한 문화에 길들여졌던 운동권 세력들은 지도층이 돼서도 성착취 습관을 버리지 못해 미투사건 등이 끊이지 않는다는 게 김정희 공동대표의 주장이다. #

과거 운동권은 무성화 계획(無性化計劃)이라 하여 여성성을 부정하고 남성화시켜 훌륭한 혁명 전사로 키우려는 시도를 했다.[57] 이 과정에서 여성의 소극적이고 수치심을 없앤다는 명목하에 권력형 성범죄가 자행되었다라는 주장이다.[58] 이들은 의식화 교육을 통해 반감금 집단 혼숙을 실시했고[59] 이 과정에서 성폭력 등이 만연했으며 이를 거부하면 혁명 의식이 부족하다며 강요했다라는 것이다. 실제로 시위 중 구속 수감된 여학생들이 임신하여 석방되거나 낙태했다는 기사나 자료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운동권 출신들이 미투에 걸리거나 앞에선 위선자가 따로 없는 언행을 일삼다가 뒤에서 더러운 짓을 하고다닌게 들통나는 것에 대해 운동권의 추악한 실체를 아는 사람들은 "운동권 시절부터 성범죄가 몸에 습관으로 밴 결과"라는 입장들 및 "운동권들의 과거 행적 생각하면 놀랍지도 않다"는 입장들이 많고, 심지어는 운동권 출신이 성범죄자로 지목되었을때 그 당사자를 아는 사람들은 "저 인간 언젠가 저렇게 될줄 알았다"는 반응들이 나오곤 한다. 특히나 시대가 변해서 과거처럼 성범죄를 조용히 묻어가기가 불가능한 시대가 되었음에도 성범죄가 이미 몸에 습관으로 배어버린지 오래라 결국 사고를 친 셈이다.

운동권들이 워낙 이게 심했다보니 심지어는 운동권 출신이 아니더라도 운동권들과 같은 세대인 사람들이 성범죄자로 지목될 경우 "역시 그 세대"라는 반응들도 나오곤 한다. 정확히는 운동권에 해당하거나 운동권과 같은 세대들 자체가 성범죄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편인 세대지만 운동권은 위선적인 행보를 보이면서 추악한 짓들을 저질렀기에 더더욱 비판을 크게 받는 것이다.

뉴라이트들중 과거 운동권이었거나 좌파였다가 보수로 전향한 경우들 중에는 나이가 들면서 보수화 된 경우도 많지만 운동권들의 이런 추악한 실체를 접하면서 보수로 전향한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서울대 재학시절 운동권으로 활동하며 동지애를 미끼로한 성범죄로 '제명' 처분을 받은게 드러나 이틀만에 물러난 이 모 정책보좌관사례에서 알 수 있듯, 전향한 운동권이 과연 모두 성범죄로부터 자유로운지는 알 수 없다.

13. 우익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역사 왜곡

이중 가장 유명한 예시는 이승만김구다. 이승만김구는 둘 다 독립운동가반공주의인 우익 독립운동가들이었다. 조선 독립 후에 우익 내에서 견해가 달라서 대립하였지만 메인 스탠스는 우익 독립운동가로 동일했다. 이승만김구, 김규식 등의 수많은 우익 독립운동가들은 해방 이후에도 일본과 공산주의를 혐오하고 배척했던 뼛속까지 우익을 넘어선 골수 우파 독립운동가들이다. 이는 역사를 잘 배운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다 잘 아는 사실들이다.

하지만 운동권은 이승만의 친일파 등용 행적을 과장하며 극성 친일파라고 왜곡하며, 이승만의 독립운동과 반일 행적을 우파 진영의 프로파간다로 매도하거나 이승만 개인의 배를 불리기 위해 한 독립운동을 빙자한 부패라는 왜곡을 지속적으로 한다.

반면 김구는 이승만의 안티테제로 삼고, 해방 후 남북통일정부 수립 노선을 고집한 점 하나만을 들어 자신들과 같은 좌파라고 주장하는 역사 왜곡을 자주 한다. 당연하지만 김구가 좌파를 심하게 탄압하는 백색테러를 벌인 골수 우파 인사였다는 사실은 무시한다. 특히 김구는 우익진영에서 정치적입지를 사실상 상실한 1947년 12월 이전 까지 이승만의 선 정부수립 후 통일을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김구와 이승만의 대립기간은 1년 남짓이며 독립, 건국운동 대부분 기간 막역한 돌지였다. 그럼에도 운동권이 김구를 이승만의 안티테제로 세우는 것은 김구급의 거물 독립운동가를 자신들 진영의 뿌리로 설정해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행위에 가깝다.

운동권에서 여운형·김원봉 등의 좌익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연구와 알림을 활발히 하며 통상적으로 알려진 잘못된 사실들을 바로잡는 것과는 정반대로 우익 독립운동가들은 친일파나 변절자로 매도하는 내로남불에 가까운 모순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혹은 독립운동기간은 물론 해방 정국 하에서도 이념적으로 대립하였던 인사를 그저 이승만의 안티테제로 활용하고자 이념을 초월한 동지였다는 식으로 왜곡을 서슴지 않고 있다.

이는 현대 한국의 우파 진영의 뿌리가 이승만이라는 점에서 이승만 = 우익 = 친일파 라는 운동권의 논리에 따른 것이다. 김구 역시 우익이지만 이승만과 말년에 대립했다는 점에서 진영논리상 좌파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14. YS에 대한 시각

김영삼박정희 정부 시절 반독재 운동을 같이 해왔던 정신적인 스승이자 인사라며 김대중과 함께 독재에 맞서싸울 수 있는 어른으로 존경을 받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 당시 YS와 DJ의 갈등이 불거지고 두 사람이 각자 야당 후보로 출마하여서 그 해 대선에서 노태우가 당선되어 민주세력의 집권은 좌절되었고, 1990년 노태우의 민주정의당,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김종필신민주공화당3당 합당이 이루어지면서 그 때를 계기로 운동권 인사들 사이에서 김영삼에 대한 적개심이 생기게 되었다. 반독재와 민주화 운동으로 공로를 세웠던 어른이 하루 아침에 배신자가 되었다니 우리의 기대를 저버린 역적, 권력욕에 눈이 먼 노인네라는 비하가 들끓었으며 그가 14대 대통령이 되면서 이들 운동권 사이에서 집회와 시위를 벌여왔다. 결국 일부 운동권 인사들은 김영삼을 배신자, 변절자라고 주장하며 그의 라이벌이었던 DJ 김대중에게 희망과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김대중마저도 14대 대선 때 김영삼에게 패배하면서 정계은퇴를 함에 따라 잠시동안 운동권 사이에서도 멀어진 듯 보였으나 그가 다시 정계복귀를 선언하고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면서 운동권 인사들 사이에서 DJ에 대한 지지가 높아졌으며 1997년 대선 때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2000년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면서 이들 사이에서 남북통일과 평화에 대한 지지가 오른 반면 김영삼에 대해서는 변절자, 역적,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히게 되었다. 실제 김영삼이 2000년 고려대학교 강연을 왔던 중에 일부 당시 고대생들로부터 봉변을 당할 뻔 적도 있었으며 한 학생이 김영삼을 개새끼, 민주주의를 배신한 변절자라는 욕설을 퍼붓자 김영삼계인 민주산악회 사람들이 달려와 제지를 하기도 했다[60]

동아일보 월간 신동아 83년생이 말하는 87년 체제의 종말, 노정태

위에서 서술된 내용은 좌파 진영 운동권에 해당되며, 반대로 보수로 유입된 운동권 출신 정치인들은 YS를 굉장히 높게 평가한다.

15. 내 편이 아니면 모두 적

운동권 인사들의 가장 큰 문제점이 내 편이 아니면 모두 적으로 인식하였던 성향이 짙다. 본래 시대적으로 과격한 성향을 가졌던데다가 심지어 자신의 친구는 물론 가족들 중에서도 자신들의 활동에 방해가 되거나 이를 따르지 않거나 보수파에 밀착하였다는 사례를 들으면 즉시 돌변하여 적 또는 배신자로 낙인하였다. 또 전두환과 민정당의 개, 독재의 개, 매국노, 민족반역자라는 말도 서슴치 않고 한다. 또한 그들 대부분은 이들 배신자나 반대파에 대한 관용도 유화책도 보이지 않으며 오직 강경책으로 대하고 자기 편이 아니면 모두 적으로 부를 정도로 과격한 성향을 그대로 보였다.

세월이 지난 지금도 일부 인사들이 성향을 전환하여 보수인사가 되었을 때도 예외는 없었다. 한때는 함께 전투하고 투쟁하였던 동지였지만 이들도 배신자로 낙인시킬 정도로 심각하다.

또한 전두환에게 패배하면 나라가 멸망하고 국민들은 고통을 받을 것이다, 우리가 전두환의 독재에 이기지 못하면 투쟁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과격적인 인식도 있어서 오직 승리와 전진만이 있을 뿐이다라는 인식이 있어서 절대로 가족이나 친구, 동료라고 해도 배신을 때리면 바로 적으로 인식하게 된다.

16. 뉴라이트에 대한 비판

뉴라이트 문서에 서술되어 있다.

17. 관련 어록

운동권에 대한 비판은 임지현 외 10인[61]이 2000년에 출판한 <우리 안의 파시즘>에서부터 본격적으로 터져나오기 시작한다.

특히 현재는 운동권 세대의 자녀들이 부모에 대한 반발심으로 신흥 우파로 나아가며 온라인 상에서 비판이 대두되고 있다. 에펨코리아 등 20대가 많은 커뮤니티에서는 이러한 운동권 세대의 문제점 때문에, 운동권 세대가 민주주의의 발전에 기여한 바는 크지만 이러한 업적들까지 본인들이 민주주의를 모르면서 어떻게 민주주의를 발전시켰는가 라는 식으로 젊은 세대에게 비판을 당하는 것을 넘어 혐오의 대상이 되어버려 젊은 세대와 운동권 세대의 갈등의 골이 끝없이 커지는 문제점을 야기하고 있다.
과연 그들의 투쟁은 대한민국 정부의 민주화를 위한 투쟁이었나? 그게 아니거든요 본질은...
권영신 (전 CA 소속)
지금 권력을 쥐고 있는 386운동권들은 조선시대 사대부들과 똑같은 사고를 갖고 있어요. 저는 이들이 조선시대의 망령들이라고 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도덕적으로 옳다, 정의롭다, 그러니까 자신들이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이런저런 특권을 누려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가 리스크와 싸우면서 문제를 해결할 역량을 갖고 있다’는 사람들이 정치를 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옳다, 우리가 과거에 정의를 위해 투쟁했다’고 하는 당위만 가지고서 도덕을 얘기합니다. 자기들의 정치권력, 기득권을 정당화하고, 그 기득권을 쭉 가져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그게 바로 ‘조선적’인 사고방식입니다. 그러면서 기업과 상인, 과학기술자, 의사 같은 전문가 집단을 공격하고 있죠. 자기들은 사대부, 위 집단들은 상민이나 중인으로 생각하는 거죠. 가장 큰 문제는 자기들이 아직도 젊은이인 줄 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철들지 않았다는 걸 너무 공개적으로, 또 자랑스럽게 이야기해요. 젊은 사람들이 봤을 때는 그 사람들은 ‘꼰대’들입니다. 그런데 꼰대가 되기 전에 한 번은 철이 들어야 하거든요. 어르신들 말씀대로 어렸을 때는 아이다운 모습이 있어야 하는 거고,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단계마다 해야 할 일과 모습이 있는 겁니다. 나이 먹어서 꼰대가 되는 건 할 수 없지요. 하지만 철도 안 든 꼰대는 곤란합니다.
임건순 (동양철학자)#
가장 대화가 힘든 상대는 운동권 학생이나 노동자 대표들입니다. (중략) 상당수는 자기 주장만이 옳고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사람은 타락했고 반동이라는 식으로 단정하곤 하여 참 어이가 없었던 경우가 많습니다. (중략) 민주주의는 대화의 정치입니다. 민주주의를 위해서 독재와 싸운다는 사람들이 남에게 말할 권리를 주지 않고, 내 주장만 한다는 것은 하나의 비극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중략) 자기 말만 하고 반대파의 말은 일체 봉쇄하는 독재 정권과 투쟁하며 지내오는 동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독재자를 닮아 가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면 참 마음이 씁쓸해집니다.
김대중 (제15대 대통령)# <김대중 자서전>[62]
자신만이 절대적 정의를 독점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일부 좌파들의 도덕적 폭력은 극우의 매카시즘적 폭력과 결을 같이한다. 상대방에게 이러저러한 딱지를 붙임으로써 자신의 헤게모니를 확보하려는 권력 지향적 글쓰기가 여전히 지배적이며, 좌파들의 논쟁 또한 권력 지향적 문화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 안의 파시즘>
“정권의 박해야 예상했지만 민청학련 사건이 터지면서 요상한 일이 벌어졌다. 김지하 시인이 좌우 양편에서 박해를 받은 것이다. 고대 사회에서 산 인간을 제물로 바치듯 좌파 일각에서 김 시인을 박정희 정권이 죽이도록 유도해 ‘민족의 제물’로 바치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좌파의 색채는 여럿이다. 순수한 사람도 많지만 야심가도, 종북주의자도, 간첩도 있다. 돌아보면 민주화 과정에 악(惡)도 기여한 바가 있다. 온갖 세력이 합쳐야 민주화가 가능했다. 민주화했다고 떠드는 사람들이 때론 은밀하게, 때론 공개적으로 남편 속을 들쑤시고 마음에 상처를 줬다. 석방된 이후 20년 동안 12차례나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젊은이들의 분신자살이 이어진 1991년에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는 글을 발표한 뒤에 무슨 사회적 발언만 하면 못 잡아먹어 조직적으로 난리를 쳤다. 그 배신감과 원통함이 오죽했겠나."

“민주화운동에 헌신했으나 병들고, 빛도 못 보고 간 사람 참 많다. 그런 이들을 존중해야 하는데 야심가들이 나서 세상을 오도하고 시끄럽게 만든다. 언제나 혁명 뒤에는 시커먼 야심가들이 있었다. 순수한 사람들이 죽거나 숙청당하면 그 열매를 다른 사람들이 따먹는 식이다."
김지하의 아내이자 박경리(소설가)의 딸인 김영주 토지문화재단 이사장의 발언.#


[1] 운동권 시절 사상학습 과정에서 배운 논파력으로, 대학입시에서 논술이 강조될 때 논술강사로 많이 갔다고도 한다. 스타 강사들 중에서도 운동권 출신이 제법 많다.[2] 이 경우 전향 가능성이 매우 높은데다가, 전향한 이후 운동권에 대한 적대감도 높아진다. 운동권을 극렬하게 비난하는 건 기본이고, 운동권을 타도할 일이 생기면 앞장서서 참여하는 등, 운동권에 엄청나게 잔인하게 대응한다. 욕 먹는 거야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지만, 자신을 이 모양 이 꼴로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대상을 때려잡는 쾌감과 복수심 충족이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한다. 출세를 포기하면서까지 맞서 싸웠더니, 믿었던 사람들에게 이중으로 버림받는 현실 속에서 제대로 빡친 셈.[3] 2010년대 들어서 386운동권 출신들이 '또다른 기득권 세력으로 타락했다', '부패했다'는 비판을 받자 지방대 운동권 출신들이 우리들에겐 타락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면서 울분을 토하는 기사가 한겨레21에 실리기도 했다. 뉴라이트로 넘어간 지방대 출신들을 이런 관점에서 생계형 전향이었다고 분석하는 경우도 있다. 현장에서 투쟁에 헌신하느라 변변한 학력도, 뚜렷한 사회경력도 만들지 못했는데, 정작 지도부 역할만 하던 명문대 엘리트들은 지들끼리만 어울리고 자신들은 내팽개쳤다는 것이다.[4] 386의 8이 80년대 학번이라는 데에서 알 수 있듯이 386은 당시의 대학생, 넓게 잡아도 대학 중퇴자에 한정된 용어라는 비판이 존재한다.[5] 해당 글은 더불어민주당의 당원게시판에서 2019년 5월경부터 '무운' 이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한 당원이 작성한 글들로, 경기동부연합의 세태에 분노하는 글이나 그 외의 다른 글 내용으로 미루어 보면 옛 용성총련 관계자가 일종의 내부고발 목적으로 작성한 것으로 추정된다.[6] 그러나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2000년대에도 대학가에서 학생들의 폭력시위는 종종 있어왔다.##[7] 특유의 전투력으로 전경 여럿 전역시킨 대규모 노동조합은 안 그럴 것 같지만, 의외로 이런 경향이 있다. 대규모 시위 참여시 앞에 노동조합이나 학생들이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는 생각은 버리는 게 좋다.[8] 한국에서 말하는 권위주의의 반대 의미로써 자유주의는 영어로 authoritarianism에 반대되는 libertarianism을 의미하는데 이는 liberalism과는 다른 개념이다.[9] 국풍81이 열리던 때는 군복무 중이던 학생들이 강제로 공연을 했는데, 그 행동도 변절자라고 취급해 학생사회에서 제명시켰던 흑역사가 존재한다.[10] 특히 지잡대라고 불리는 대학의 운동권은 똥군기가 군대를 뺨치는 경향이 적지 않았다.[11] 이와 별개로 민주화 이후 일부 남성의 비뚤어진 권위적 측면을 대표하는 일화로,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 사이 대학가에서 여학생이 담배 피운다고 남학생이 싸대기 날린 사건이 유명하다. 이때도 정치적 민주화는 이루었지만 정작 그 민주운동의 핵심보루였던 대학가의 권위주의(혹은 남녀차별)는 청산하지 못했다는 비판사설이 있기도 했다.[12] 집회 때 줄 맞추어 앉는 것은 통행에도 좋고, 여러 명이 앉기에도 좋다.[13] 오히려 운동권 특유의 친북주의·친중주의와 결합해 퇴행적인 인민민주주의가 이식되는 경향까지 보였으며, 이것은 두고두고 종북·친중이라는 주홍글씨가 되어 민주당계 정당을 공격하는 수단이 되고 있다.[14] 김영삼과 김대중은 운동권과 연계했을 뿐이지 엄연한 기성 정치인들이다. 다만 김대중은 운동권 세력들을 국회에 포진시켜 놓았다.[15] 한국영화 복수는 나의 것에서도 이러한 비윤리적인 대한민국 운동권의 심리를 엿볼수 있는데, 유괴의 공범으로 참여한 자칭 혁명가 차영미(배두나 분)는 죄도 없는 중소기업 사장인 주인공의 딸을 유괴할 계획을 꾸미면서 "세상에는 착한 유괴와 나쁜 유괴가 있어" 라는 궤변으로 유괴를 합리화하고 이를 실행했다가 결국 주인공의 딸은 운 나쁘게 죽고 이에 복수귀가 된 주인공에게 응징당한다. 그리고 영미가 소속된 '혁명적 무정부주의자 동맹' 이라는 운동권 극좌파들은 자기들 일원인 영미가 먼저 주인공의 딸을 납치해 죽게 만든 범죄를 저질렀다는 팩트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서 아무튼 주인공이 감히 자신들의 동지를 죽였다는 이유만으로, 마치 영미의 아동 유괴와 과실치사 따위는 혁명을 위해서였으므로 죄가 안된다는 듯 뻔뻔하게 적반하장으로 결말부에 주인공을 찔러 죽이는 그야말로 인간 쓰레기들의 모습을 보여준다.[16] 다만 대한민국의 운동권 말고도 이러한 주장이 나오긴 하는데 에스페란토 운동에 참여한 인물 중에도 영어, 프랑스어제국주의 국가들의 언어를 쓰는 것에 반대하는 이들도 많았다.[17] 프로야구가 만들어진 이유는 국민들이 정치에서 눈을 돌리게 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라는 주장에 근거한다. 웃긴 것은 K리그를 비롯한 다른 스포츠 리그도 전두환 시절에 3S 정책의 일환으로 만들어졌는데, 아예 프로스포츠 전체를 보지 말라고 하는 것이라면 모를까 이들은 유독 야구만 몰아붙인다. K리그도 마찬가지로 전두환 시절에 탄생하지 않았느냐 라고 물으면 동문서답만 돌아온다.[18] 운동권이 묘사하는 일본의 모습은 2차 대전 당시의 식민통치를 앞세워 침략을 일삼는 군국주의 당시의 일본인데 막상 그러한 일본제국의 회귀를 주장하는 일본 극우세력들은 반미성향이 강하다.[19] 높은 확률로 미국 음악 또는 책.[20] 아이러니하게도 존 레논의 "Imagine"은 아나키즘 사상을 표현한 대표곡으로 반전시위 때 자주 불렸던 애창곡이다.[21] 1996년 연세대 한총련 사태 때 경찰도 그 심리를 이용하기 위해 가스차 확성기로 국산 인기가요를 틀어 심리전을 폈다.[22] 정작 마이클 잭슨이 전체적으로 미국 사회에서 가해자 위치에 있기보다 줄곧 피해자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운동권은 애먼 흑인 뮤지션을 준범죄자 취급하는 병크를 터뜨릴 만큼 대국적인 시야가 좁았다는 것을 인증한 것이기도 하다. 정말 자유민주주의를 생각했다면 마이클 잭슨을 이해하고 지지했어야 하는 것이 정상이다.[23] SBS를 탄압해야 한다고 했던 인간이다.[24] 6.25 전쟁 당시 UN 창설 멤버이자 정회원국 자격으로 대한지원에 동참하여 대한민국에 물자를 지원하였다. 그러나 휴전 6년 후인 1959년에 쿠바 내에 카스트로의 공산 혁명이 일어나고 공산 정권이 들어서고 이듬해인 1960년에 북한과 단독 수교하고 밀착관계를 맺었으나, 최근 들어서 쿠바는 남한과도 수교를 하기 시작하면서 북한과 쿠바는 서로 분위기가 냉랭해지고, 그 여파로 리일규 참사가 탈북을 했다.[25] 1985년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농성 사건을 주도한 삼민투 위원장 출신이자 현재 전북 군산에서 횟집을 운영하는 전직 정치인[26] 일제강점기가 없었다면 분단도 없었을 것이기에 일본이 한반도 분단에 책임이 있다고 본다.[27] 대표적으로 문화대혁명 부분이 있다.[28] 구색야당이 2개 있긴 하나 그게 그거다. 1980~1985년 극초반의 전두환 정권도 이와 비슷했다.[29] 하지만 한국에선 대체적으로 좌파진영에서 좌익 민족주의 성향을 띠는 경우가 더 많으며 오히려 우파가 자유 서방세계와 연대, 유엔군 및 미군 주둔 등에 대해 우호적이다.[30] 실제로 대부분의 식민지배를 받은 국가들의 좌파 세력권이 이런 성향을 띄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지배국이었거나 식민제국이었던 나라들의 경우는 우파들이 철저히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경우가 많고 좌파가 그 반대 포지션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옆나라 일본만 해도 자민당을 위시한 우익들은 자국 국수주의적인 내셔널리즘이 강하지만 공산당이나 입헌민주당같은 중도~진보를 오가는 정당들은 그 색이 옅거나 온건하다. 괜히 중남미층을 중심으로 종속이론같은 주장이 나온게 과언은 아니다.[31] 당연한 말이지만 운동권별로 다르긴 하다. 여성운동(페미니즘)도 운동권이고, 성소수자 운동도 운동권이니. 이주노동자 운동도 운동권. 물론 한국의 여성운동은 안티포르노 페미니즘이 주류이니 보수적인 것이 맞다.[32] 인터넷 토론 중에 안 그런 데가 별로 없다. 운동권이 인터넷 영향을 받은 건지, 인터넷이 운동권 영향을 받은 건지.[33] 다만 군사정권에서의 만화 탄압 운동이나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서의 문화계 블랙리스트 등 운동권 반대편에서 문화적 규제나 보수주의가 더 역사도 길고 심한 측면도 있다. 문제는 그런 측면에서 운동권도 자유롭지 못한 행적을 보이고 있다는 것.[34] 그냥 북한에서 동성애자를 탄압하고 있어서 북한을 따라가기 위해 그러는 것일 수도 있다. 북한 이외에도 쿠바에서도 성소수자를 탄압한 전력이 있다.[35] 반대 진영인 보수에서도 문화적 마르크스주의 음모론을 주장하며 성소수자의 배후에 공산주의자나 북한이 배후에 있다는 극과 극이 통하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36] 이들의 주요 사상이 반미를 표방하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레 미국의 사회를 뒤에서 좌지우지하고 있다고 알려진 유대인에 대한 적개심까지 받아들이고 있는 것. 때문에 같은 이유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도 블라디미르 푸틴러시아 연방군의 만행을 반미라는 이유로 맹목적으로 옹호하면서 "지금 우크라 국민들은 유대인 대통령의 선동에 속고있는거고 전세계인들도 미국과 유대인이 장악한 세계언론에 속고 있는거다" 같은 정신이 아득해질 것만 같은 괴논리를 펼치곤 한다. (#)[37] 참고로 소련, 중국, 동유럽 등 공산권에서도 정확히 저 논리로 동성애를 탄압했다.[38] 일본의 피해자 행세를 주장하는 일본인들 또한 2차대전의 원인을 미국으로 주장하는 등 이들과 비슷한 주장을 하기도 한다.[39] 이런 인식으로 인해, 3.1운동5.18 민주화운동도 이들의 기준에선 실패로 여기고 있다. 3.1운동으로 일본에게 이겨서 독립을 쟁취하지 못했고 5.18 역시 전두환에게 이기지 못해서라나. 특히 NL 세력들에게 있어서 5.18의 경우에는 민주주의 가치관이 담긴 고등교육을 받은 일반 민중들 - 즉 시민들이 주축이 되었고, "북괴는 오판말라" 플래카드의 예에서도 알 수 있듯 북한이나 특정 강성 좌파의 색 또한 거의 없으며 여기에 더해 특정 정치이념에 매몰된 정치세력, 혹은 국외 세력의 개입 없이 고립된 도시에서 일반 민중들이 자발적으로 저항권을 발동한 사건이라는 의의 때문에, NL 자신들이 숟가락 얹을 여지가 없다는 이유로 앞에서는 안 그런 척 하지만 뒤에서는 은근슬쩍 5.18을 폄하하거나, 5.18과 무관한 극좌 이데올로기들을 은근슬쩍 광주의 5.18 기념 행사에 끼얹어 숟가락을 얹는 치졸한 행태(#)를 보이며 5.18의 이름을 더럽히는 졸렬한 소인배 같은 모습을 보인다.[40] 그래서 NL이 집단을 장악하는 방향도 이와 유사한데, 민주적인 절차나 방향성을 무시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집단을 장악한 뒤 집단의 용도가 다하면 이름값을 쓸 수 없으니 내다버리는 방법을 사용한다. 이런 작전이 지속되면 민주적인 건전성도 해치고 절대로 화해할 수 없는 적대집단을 만들 수 있단 장기적인 시야 따윈 내다버린 전형적인 단기승리에 집착하는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41]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같은 서적에도 그런 모습들이 드러난다.[42] 냉정하게 말하자면 이런 조직은 정말로 방첩면에서는 하등 쓸모가 없다. 자국 내 여당 및 기득권의 정권 유지에만 혈안이 되어 있고 자국민을 감시하는 짓만 잘하기 때문에 실제로 외국 정보기관과 경쟁이나 암투가 벌어지면 황당할 정도로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게 예를 들어 누군가의 집에 있는 서류 1장을 빼돌려야 할 때 정상적인 정보기관은 몰래 침입해 도둑질을 할지, 수리공으로 위장해 당당하게 침입해 도둑질을 할지, 집에 출입하는 누군가를 포섭해 사진 찍어오게 할지, 해당인물을 포섭해 직접 가져오게 만들지, 약점을 잡아 협박할지, 그냥 가만히 내버려두면서 감시만 하다가 그 서류를 가지고 나오는 순간을 노려 강탈할지 등 다양한 옵션을 고민한다. 하지만 대한민국 군사독재정권 하의 중앙정보부(국가안전기획부)나 공안경찰 혹은 공안검사들 같은 막장 독재국가의 방첩기관은 그냥 한밤중에 영장 없이 문 부수고 들어가서 집주인을 두들겨 패고 서류를 들고 나오면 되기 때문에 별다른 공작 역량을 필요로 하지 않고 공작 역량을 키워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렇게 첩보 기술의 연구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니 채증 역량 역시 발전하지 않는다. 고위직에 똑똑한 사람이 가는 게 아니라 충성심 강한 사람들이 가득차며 집단사고 문제까지 일으키는 건 덤. 그러다 보면 이미 선진 정보기관의 간첩을 막아낼 능력이 없어진다.[43] 실제로 이근안은 그렇게 만만한 시민이나 대학생들은 자신에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으니까 아무렇지도 않게 고문으로 간첩 누명을 뒤집어 씌워댔던 주제에, 정작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 당시에 화성경찰서에서 근무했을 땐 이춘재를 잡기는 커녕 이춘재가 범인이라는 것조차 파악 못했던, 그냥 전형적인 강약약강 양아치 그 자체였다.[44] 실제 당시 운동권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말하기도 했다. 참고영상[45] 왜 깨닫지 못했냐면, 68운동을 생각하면 된다. 당시 유럽 대학생들이 중국이 선전하는 것들만 접하고 모택동을 위대한 혁명가로 착각했듯 당시 운동권들도 북한에 대한 정보 통제 때문에 어둠의 경로로 들어오는 북한 찬양 또는 선전 정보들만 접하다 보니 이를 바로잡을 방법들이 전무했다.[46] 제헌국회에는 이익균점권이, 제헌헌법에는 통제경제조항이 명시되어 있었고, 친일파 중의 친일파 윤치호도 해방 직후에 "경제는 사회주의식 개발이 적합할 것"이라고 일기에 쓴 바가 있을 정도. 심지어 당시 헌법을 만들어서 미군정에게 갖다줬더니 "너무 사회주의적이다"라고 뺀찌를 먹은 일도 있었다고 한다.[47] 이런 풍조는 군사정권 시대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경제개발 5개년이니 어쩌니 하는 것들 자체가 죄다 국가 주도의 사회주의식 계획개발 정책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빨갱이를 때려잡던 시대에 빨갱이식 경제정책을 한 셈.[48] 여담으로 60~70년대 민청학련 사건을 비롯한 공안 사건들 중에는 조총련일본공산당을 대충 뭉뚱그려서 "일본에서 한국으로 마수를 뻗치는 공산무리"로 조직도를 꾸며내는 경우가 많았는데,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일본공산당은 북한과 별로 사이가 좋지 않다. 오히려 일본사회당이 북한과 사이가 좋았다.[49] 주체사상이라는 말이 나오게 된 시기는 아무리 빨리 잡아도 1950년대 중반이다. 그 전까지 김일성 노선을 따르는 사람들은 그냥 김일성주의자라고 불렸다. 티토를 따르는 사람들을 티토주의라고 불렀고 트로츠키를 따르는 사람들을 트로츠키주의자라고 불렀던 것과 같은 논리.[50] 그래봤자 20명도 안 되었다고 한다[51] 물론 이런 민족주의적 편향성에 입각한, 한국전쟁 및 분단의 원인이 미국이라는 주장은 1990년대에 완전히 논파당했다. 소련이 망하고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남침을 하자고 강하게 설득했다는 문건이 러시아 측으로부터 공개되어 한국전쟁의 원인은 김일성의 삐뚤어진 야욕과 이를 허가한 스탈린 때문이라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2021년 현재에도 분단의 원인을 미국으로 지목하는 운동권 출신과 전교조 세력이 상당히 많다.[52] 근데 이건 사실 미국으로서도 어쩔 수 없었던 것이, 한국에서 5.18 운동이 터졌을 때 저 멀리 중동에서는 전운이 돌고 있었고, 4개월 뒤에는 8년간 치러진 이란-이라크 전쟁이 터지게 된다. 그러다보니 미국 입장에서는 정당성 운운하며 군부정권 갈아치운다고 한국에 혼란을 키우고 내부분열을 시키는 것보다는 이미 정권을 잡은 전두환을 대충 인정해주고 넘어가는 것이 한국의 정치적 안정성 입장에서 유리하다고 보았다. 게다가 당시 미국은 한창 대선 시기로 지미 카터 정부의 재임이 걸려있는 중대한 상황이어서 한국의 정치적 상황을 세세히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즉, 이 당시 미국은 내부에서는 국내 대선이, 외부에서는 아예 전쟁이 터져버리는 등 한국보다 더 신경 써야 할 중대한 일들이 너무 많았다.[53] 사실 한국에서는 종북주의자와 주사파를 뭉뚱그려 한데 묶어 이야기하는데, 70년대까지 북한과 직간접적(또는 조총련과의) 연계가 있던 집단과 80년대의 자생적 주사파와는 세대도 다르고 지향하는 바도 달랐다.[54] 여담으로 신해철의 자서전에 따르면, NL들은 어중이떠중이들이 모여서 데모하다가 최루탄만 터지면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도망가기 바빴는데, CA(PD의 전신)는 좀 더 조직화된 강인한 투사들이었기 때문에 최루가스를 헤치고 짱돌과 화염병을 던지는 전투력이 있었다고 한다. 신해철은 그쪽이 더 괜찮아보여서 CA 그룹을 따라다녔다고 한다.[55] 이 시기에 NL에 대항하여 "현실과 과학"이라는 무크지를 만들어서 PD그룹의 이론적 원천이 되고, 주체사상을 공개적으로 비판한 사회주의 그룹이 바로 서울 사회과학 연구소다. 이들 중에는 지금도 유명한 조국, 진중권, 이진경 등이 있었다.[56] 이들은 기성 정당의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만큼, 운동권과는 거리가 멀었고 자주 반목했다. 1986년 4월 29일, 김대중 당시 민추협 공동의장은 "소수 학생들의 과격한 주장은 지지할 수 없다"고 선언했고, 이는 결국 5.3 인천사태를 낳는다. 해당 항목 참조.[57] 이로 인해 여학생들이 남자 선배에게 형이라 부른다.[58] 평등을 이유로 성희롱은 물론 여학생에게 남학생 앞에서 소변을 보게 하거나 등. 당시 운동권 남학생 사이에선 못 먹으면 호구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성윤리가 심각하게 결여된 집단이었다.[59] 주로 농활을 인적 드물고 교통편도 없는 시골로 간 다음 2주 내외로 사상교육을 진행했다.[60] 조선일보사 월간조선 2000년 9월호(추정) 김영삼 고려대 강연 방문 기사 중에서[61] 권혁범(대전대 정치학과 교수), 김기중(변호사), 박노자(교수), 김은실(이대대학원 여성학과 교수), 권인숙(명지대 여성학 교수), 유명기(경북대 고고인류학과 교수), 김근(서강대 중국문화학과 교수), 김진호(제3시대 그리스도연구소 상임대표), 전진삼(월간 '건축인 포아' 편집인), 문부식(당대비평 편집위원).[62] 결국 김대중 정권은 운동권을 탄압했고, 이로 인해 운동권은 대외적으론 김대중을 존경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론 자신들에게 한 자리는 커녕 밥도 주지 않았단 이유로 김대중의 정치나 사상을 존경하지 않는다. 이들이 결국 NL. 그것도 이석기와 같은 방향성을 탄 이유도 결국 운동을 해서 밥벌이가 안되는 것과 자신들에게 한 자리를 내주지 않았단 점도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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