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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09 22:05:01

낙검자 수용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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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탄생3. 상세4. 명칭5. 미디어6. 관련 소송7. 관련 문서

1. 개요

박정희 정부 시절에 미국 달러 획득 사업의 일환으로 시작된 주한미군을 상대하던 기지촌 사업에 종사하는 윤락 여성들을 대상으로 성병 검사/치료를 병행하던 보건 기구다. 공식 명칭은 성병 관리소다.

1960년대에 미군 및 성매매 여성들 사이에서 매독, 임질 등의 성병이 크게 유행하였고 미군은 성병 관리를 한국 정부에 요구했다. 성병 확산에 대처하기 위해 국가 주도로 의사를 배치해 국가예산으로 무료 검사 및 진료를 실시했다. 겉으로는 성병에 대한 복지정책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군사문화가 늘 그렇듯 강압적인 치료와 감금이 이루어졌다.[1]

비슷하게 미국의 장티푸스 메리처럼, 전염병을 사유로 정부기관이 사람을 무단 수용해도 되냐며 고발한 경우가 있다.

태평양 전쟁 패전 후 일본 정부가 운영한 '특수위안시설협회'와 발상이 매우 유사하다. #
매춘과 관련 있다고 다 같은 게 아니다. 특수위안시설협회는 일본 정부가 주도해서 매춘을 주선하고 (포주짓) 여성에게 주기로 계약한 돈까지 떼먹어 1945-46년사이 일본 GNP 6%어치나 벌어들인 사건이다. 낙검자 수용소와 비슷한 해외 사례를 찾으려면, 미국의 계획(American Plan)의 일환인 1910~1970년대 미국에서, 정부와 무관한 매춘부들 사이 횡행하는 성병이 미군에게도 옮을까봐 매춘부 혹은 성병이 "있을 거 같거나" 혹은 기타 이유로 여성을 체포해서 검진하고 수용한 것과 비슷하다. 은어로 미국에서 "Patriotutes" [2] 매춘애국자라고 불렀다. 피해자가 매춘부 수용소를 "강제수용소"라고 비난하기까지 했다. America’s Forgotten Mass Imprisonment of Women Believed to Be Sexually Immoral (미국에서 잊혀진 성적으로 문란하다고 여긴 여성 대거 수감한 역사) 매춘부판 삼청교육대 같은 거다.[3] 사실 이것도 유럽에서 먼저 시행되던 사회 위생 제도를 참고해서 미국에 적용한 거다. 자세한 건 항목 참조.
파일:American Social Hygiene Association STI women promiscuous concentration camp.webp
유럽에서 시행되던 제도를 참고해서 미국에서 적용한 "사회 위생" 열풍 당시 제작된 공익안내 포스터. 매춘부가 미군 장병에게 "가장 나쁜 방식으로 당신을 보고 싶어하는 여성 둘이 있는데"라고 해골의 형상을 한 매독(Syphilis) 과 임질(Gonorrhea)를 소개시켜주고 있다.

2. 탄생

1965년 3월부터 5월까지 3개월 동안 파주, 포천, 고양, 의정부, 양주에서, 1968년 12월에는 평택에서 성병관리소가 설치되었다. 당시 생산된 문서들을 살펴보면, 미군이 한국 정부에 성병관리소 설치를 요구했음을 알 수 있다.

1963년 제1군단은 성병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하기 위해 휘하 2개 사단 인근의 기지촌, 곧 제7보병사단 주변 동두천과 제1기갑사단 주변 용주골과 대추포에 관한 연구를 수행했다.[4] 연구 결과, '위안부' 치료에 더욱 중점을 두어야 하며, 이를 위해 '위안부' 밀집 지역에 시범 진료소를 설치하고 해당 지역의 모든 '위안부'를 등록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5]

제1군단은 이 보고서를 미8군 의무부와 정보작전팀에 보내어 검토를 요청했다. 미8군 관계자들은 모두 보고서의 제안이 유익하다고 평가하면서도 우려를 표명했다. 의무부 관계자는 “우리 군인이 자신을 돌보는 데 실패하는 현실을 은폐하기 위해 한국 정부에 협조와 자원 지출을 요구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지” 확신하기 어렵다고 논평했다. 이어서 그는 미군이 한국 정부에게 그러한 조치를 강제할 수단이 없기 때문에 “그리 좋은 협상 위치가 아니”라고 지적했다.[6] 정보작전팀 관계자 역시 “한국 정부에 성병 통제를 개선하라고 강제할 수단이 없으므로 우리의 협상 지위가 약하다. 또한 그들에게 성병은 경미한 사안이다”라고 평가했다.[7]

그러나 이들의 우려와 달리, 이듬해 보건사회부가 생산한 또 다른 문서 「경기도 동두천 지역의 성병 통제 프로그램(제안)」은 한국 정부가 미군의 요구를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였음을 보여준다. 보건사회부는 미군이 특정한 바로 그 지역인 동두천에 격리치료시설을 건립하기로 계획했기 때문이다.[8]

결국 성병관리소가 1965년에 설치된 이유는 바로 1963년에 제1군단이 관련 연구를 수행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성병관리소는 미군이 구상했고, 한국 정부가 실행했다. 성병관리소는 설립 직후부터 곧바로 운영되었다. 1965년 약 2만4천 명이었던 총 수용 인원은 1968년에는 약 5만4천 명으로 2배 이상 증가했다.[9] 바야흐로 대량 수용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10]

3. 상세

1960년대 초 윤락 여성들 사이에 성병 감염이 급속도로 확산되자 당시 정부에서 전액 국가예산으로 지원해서 매춘에 종사하는 윤락 여성을 대상으로 매독, 임질 등 성병에 대한 검사 및 치료를 담당하였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강압적인 입소와 비윤리적인 운영이 자행되었다는 것이다. 윤락 여성들은 일주일에 2번 정기적으로 검진을 받아야 했으며 확인 도장이 찍힌 보건증을 소유하고 있지 않으면 경찰공무원에 의해 강제로 입소되어야 했다. 입소 경험자들은 무자비하고 급작스럽게 연행한다고 하여 이를 토벌이라고 일컬었다. 그 악명이 어찌나 대단했던지 버스에서 뛰어내리기도 했다고 한다.

파주의 경우 7500여명의 검진 대상자들이 있었으며 과도한 인원을 자주 검진하다 보니 속옷을 입지 않고 실시할 정도로 열악하였다. 검점에서 떨어진 사람들은 낙검자로 분류되어 입소 대상자가 되고 한 번 입소되면 3박 4일간 있어야 했다. 안에서는 다시 검사를 받는데 만약 재검에 떨어지면 다시 3박 4일간 지내야 했다. 심각한 경우 몇 달을 지내기도 했다. 치료가 완료되면 다시 업소로 되돌려졌다. 또 일명 컨택이라고 하여 미군이 '성병을 전염시켰다고 지명'한 여성은 성병에 걸리지 않았더라도 강제 입소는 물론 치료도 진행하였다. 입소자들에게는 페니실린을 주사하였는데 통증이 심함은 물론 과민성 쇼크로 사망하는 경우도 발생하였기 때문에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외부적으론 페니실린에 의한 쇼크사가 발생했다는 것을 부인했지만 당시 성병 관리소를 관할하던 보건사회부가 법무부와 검찰에게 의료인에 대한 면책 협조를 요청한 공문이 발견되면서 사실로 밝혀졌다. 다만 당시로서는 페니실린이 가장 효과적인 치료제로 여겨지고 있었다.

검진 결과는 미군 의무과에 전달되었다. 60~70년대에 한미친선회의 주 의제로 성병 관리가 논의되기도 했다. 협의 문서 중에는 미군 기지 주변 성병 보균자를 치료 및 격리를 강화하도록 요청하는 내용이 적혀 있기도 했다. 이에 대해 정부는 적극 협조한다고 약속하며 대외적으론 국민의 건강을 위하여 치료를 무상 제공한다고 선전했지만 성매매를 통해 많은 외화를 벌어들일 수 있는 것이 성병 관리소를 적극적으로 운영한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로 인해 많은 비용과 비윤리적인 실태에서 지속적으로 운영한 것이다. 1970년 미국이 주한미군을 감축하자 성병 관리를 더 강화하였다. 1977년엔 대통령이 직접 관리할 정도로 중요한 사안이었다. '기지촌정화운동'이란 기지촌 환경 개선 활동을 펼쳤으며 '기지촌 정화 위원회'를 청와대 직속 기구로 설치하면서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1972년에는 4억원 정도의 보건 예산 중 2억원 가량이 투입되기도 했다. 이는 모든 검사와 치료를 무료로 실시했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윤락 여성들을 상대로 애국 교육[11]을 하여 지속적으로 성매매를 할 수 있도록 관리도 했다. 미군이 훈련을 나갈 경우 훈련지로 원정 매춘에 나서기도 했는데 이들은 담요 부대라고 불렸으며 정부는 근처에 임시 보건소를 세워 성병을 관리했다. 미군은 성병 관리에 상당히 관심이 높았으며 성병 검사 기술이나 약, 치료 기술을 제공하기도 했다.

일부 성병관리소는 과도하게 오랫동안 '위안부'를 수용하기도 했다. 1974년에 주한 미군 예방의학 국장이었던 제임스 해서웨이 소령이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경북 왜관의 캠프 캐롤 인근 성병관리소는 임질에 감염된 여성들을 평균 1주일 동안 수용했다. 군의관은 “치료 측면에서는 이 기간이 과도할 수 있으나 다른 심리적 장점들이 있다”고 언급했다. 이러한 '심리적 이점'은 명시되지 않았지만, 아마도 '위안부'가 더 이상 오랫동안 수용되지 않도록 예방하기 위해 감염에 대해 더욱 유의할 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보건사회부의 김 박사와 세계보건기구의 앤털 박사 역시 페니실린으로 임질을 치료하기에 1주일이 과도하다는 점을 인정했으나 기간을 단축하려고 노력하지는 않았다[12]. 이처럼 미군은 성병관리소의 치료 기간까지 결정할 권한까지 있었다.[13]

성병 관리는 운영 과정이 문제가 많긴 했지만 효과가 없던 것은 아니고 실시한 이후 성병 감염자가 1년 만에 11%가 감소하는 성과를 내긴 했다. 미군관계소위원회 회의록에 따르면 미군은 이러한 결과에 만족하고 한국 정부에 감사를 표했다는 기록이 있다.

유일하게 건물이 남은 곳은 소요산 인근, 낙검자 수용소는 총 5군데로서 동두천, 파주 등 모두 경기도에 위치하고 있다.

4. 명칭

5. 미디어

6. 관련 소송

미군 기지촌 성매매 여성들이 2014년 6월 25일 국가를 상대로 1인당 500만 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를 제기하였는데# 1심에서 2017년 1월 20일 원고들 중 낙검자 수용소에 강제수용되었던 57명의 청구를 일부 인용하였다. 법원의 판단은 당시 정부가 성병 감염 진단을 받은 여성 등을 낙검자 수용소에 강제수용해 치료하고 완치 판정을 받을 때까지 나갈 수 없게 한 것은 법적 근거가 없어 위법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법원은 국가가 기지촌을 조성·운영했다는 원고들의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2022년에 국가에 배상 책임이 있다는 판결을 내렸다. |# #

7. 관련 문서



[1] 국가기록원에서 기록을 제공한 1977년"기지촌 정화대책" 표지에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 사인이 되어 있다[2] Patriot 애국자 + Prostitute 매춘부[3] 사실 이건 더한 게 경찰이 어떤 여성과 성관계를 요구하다가 거절당하면 보복 차원으로 수용소에 보내버리는 경우도 상당수 있었다.[4] 1 Corps (Group), 1963. 4. 25[5] 미군의 성병 발병률이 여전히 높은 상황에서, 미군 당국은 더 이상 성병 통제를 한국 정부에 일임해서는 안 된다는 문제의식을 느껴 이러한 연구를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6] EUSA MD, 1963. 5. 2[7] EUSA IO, 1963. 5. 3[8] Ministry of Health and Social Affairs, 1964[9] 경기도, 1971: 252[10] 출처: 박정미. (2019). 건강한 병사(와 ‘위안부’) 만들기 — 주한미군 성병 통제의 역사, 1950-1977년. 사회와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4, 285-287.[11] 윤락 여성들에게 달러를 벌어들이는 애국자라고 주입시키는 내용이라고 한다.[12] Hathaway, 1974. 2. 14[13] 박정미. (2019). 건강한 병사(와 ‘위안부’) 만들기 — 주한미군 성병 통제의 역사, 1950-1977년. 사회와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24, 291.[아카이브] [15] 해리포터와 비밀의 방을 패러디한 제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