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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29기 중에서 유일하게 개그콘서트에 출연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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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595959><colcolor=#fff> 주병진 朱炳進|Joo Byung Jin | |
출생 | 1958년[2] 4월 19일 ([age(1958-04-19)]세)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3][4]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본관 | 신안 주씨 |
신체 | 175cm, 77kg, O형 |
병역 | 불명[5] |
직업 | 코미디언, MC, 기업인 |
가족 | 어머니 서국선(1934~2013)[6] 누나 주선숙[7] 남동생 주병학(1962년생)[8][9] 반려견 대, 중, †소[10][11] |
학력 | 서울덕수국민학교 (졸업) 양정중학교 (졸업) 광운전자공업고등학교 (졸업) 인천체육전문대학 (체육과 / 전문학사)[12]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연극학 · 경영학 / 학사)[13] |
종교 | 무종교 |
데뷔 | 1977년 TBC 전속 개그맨 |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코미디언, MC, 사업가.2. 생애 및 활동 내역
2.1. 연예계 데뷔 및 전성기
DJ 이종환이 부업으로 운영하던 카페 '셸부르'의 사회자를 거쳐 1977년, TBC 전속 코미디언으로 연예계 생활을 시작했다.원래 어릴 때의 꿈은 가수여서 1978년에 친누나와 해변가요제를 나가기도 했고, 이후 쉘부르의 가수를 뽑는 콘테스트에도 출전했는데, 쉘부르에서 노래 가사를 까먹는 바람에 그냥 내려오기는 뻘쭘해서 시간을 때우려고 생각나는 대로 웃기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심사를 하던 이종환이 그의 웃기는 말을 듣고서는 사회자의 자질인 순발력이 있다고 평가해서 DJ로 특채했다고.[14] 이후 방송국 PD들과 인맥이 많던 이종환의 추천으로 TBC로 진출하여 신인치고도 상당한 활약을 펼치며 어린 나이에 인기 개그맨이 되었다.
1980년 동양방송이 갑작스런 언론통폐합으로 KBS에 통합된 뒤 짧은 기간동안 일시적 생활고를 겪었지만[15] KBS 2TV에 금방 섭외되어 인기 개그맨의 자리를 유지했다. 특히, 당시 서세원이 MC를 맡던 MBC '영11'에 밀려 시망 위기에 몰린 '젊음의 행진'에 투입되어 시청률을 역전시키며 인기 개그맨으로 급부상했다.[16]
이후 1983년까지 KBS 최고 인기 개그맨으로 잘 활동했으나, 1983년 가을, 경찰에 의해 1982년부터 홍예리와 김수희[17] 등의 여자 연예인들과 대마초를 했다는 혐의로 불구속 입건되면서 KBS에 출연할 수 없게 되었다. 이후 조사 결과, 상습적 흡연으로 오해를 받던 초기 내사 정보에 비해 실제 최종 결과의 경우 대마초 흡연 빈도가 훨씬 적었고 상습적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검찰에 의해 기소유예 처분되어 풀려났다. 입건 당시 KBS에서 얼마의 출연 정지 처분이 내려졌는지는 보도되지 않았지만, 검찰의 처분 이후 방송을 쉬어야 하는 처지[18]인건 변함없던 주병진은, 어차피 방송을 쉴 마음이 없었고 MBC라는 다른 방송국에서 러브콜도 왔기에 옮기게 되었다.
1984년에 주병진은 MBC로 이적하였고, MBC의 여러 프로그램[19]에서 활약하며 인기를 끌었다. 당시 주병진은 청춘행진곡, 일요일밤의 대행진 등 MBC에서 하는 모든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그야말로 주역이었고 그가 없으면 프로그램 진행이 안 될 정도였다. MBC에서는 코미디 프로그램을 운영할 때 주병진을 중심으로 김병조, 이용식, 이주일 등을 내세워서 운영했다. 무명이었던 후배 이경규와 김정렬은 주병진 옆에 끼워서 출연시키다시피 했을 정도였다.
이후 주병진은 1988년부터 방영된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메인 MC를 맡아 노사연, 김흥국, 이경규 등 막강 패널을 키워내며, MBC 예능의 대표 흥행 보증수표로 떠오르며 최전성기를 맞이한다. 일밤 오프닝에서 주병진은 양손을 살짝 들고 '여러분의 시선을 모아, 모아, 모아서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20]라고 말한 뒤 프로그램을 시작했고 이 대사는 당대 유행어가 되었다.
주병진은 당시의 주류였던 일본식 슬랩스틱 코미디 노선을 탈피해서 영미식 스탠드업 코미디를 대한민국형으로 적절히 바꾼 신사형 개그로 성공한 케이스. 그래서 별명도 개그계의 신사였다.
다만 일요일 일요일 밤에 당시의 테이블 위에서 토크하는 방식은 프리토크 형식이었지만 실제로는 잘 짜여진 콩트나 마찬가지였다.[21] 주병진의 강점은 미리 준비한 것을 뛰어난 연기력으로 준비하지 않은 듯 애드립치는 능력이다. 능청도 엄청나서 반대의 분위기로 바람을 잡다가 반전성 있는 애드립을 터뜨리는데 대단한 재능을 가졌었고, 이 과정에 필요한 연기력도 아주 일품이었다. 이때 그가 보여주는 입담과 애드립은 지금 봐도 세련되고 개그감이 살아있어, 현시점에서는 다소 유치하거나 지루한 동시대의 개그 프로나 토크쇼와는 달리 세련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렇다고 주병진이 토크에만 능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대표 코너 중 하나인 배워봅시다는 다양한 것을 해보면서 몸개그와 상황극이 복합된 코너로 노사연을 스타덤에 올린 코너이기도 했다.[22] 사실 KBS 시절의 주병진은 엄연히 꽁트 연기를 잘하는 걸로 인기를 얻었던 개그맨이었다.
노사연이 일밤에 고정 게스트로 출연한 것은 주병진, 노사연 모두와 친구인 이문세와 이성미, 신형원이 노사연을 주병진에게 추천했기 때문이었다.[23] 그들의 말에 동의한 주병진이 노사연에게 일밤 출연을 제의하자 노사연은 가수로서의 이미지가 손상된다며 출연을 거부했지만 주병진의 적극적 설득과 나머지 친구들의 부추김에 결국 출연을 결정했다고 한다. 처음에 노사연이 반대한 이유는 이미 그보다 전에 개그 프로그램에서 섭외를 받아 단기 고정으로 최병서와 1달간 개그 연기를 잠시 했다가, 그 다음주 가요 프로그램에서 어린이 방청객이 자신에게 "저 코미디언 아줌마 노래 되게 잘한다"라고 말해서 마음의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유명한 김흥국의 유행어 "아, 응애에요~"도 일밤에서 게스트로 김흥국과 같이 방송했을 때[24] 주병진이 직접 만든 유행어다. 당시 결혼한 김흥국이 태어난지 얼마 안 된 아들 이야기를 하자, 주병진이 "김흥국 씨 아드님은 태어날 때부터 다른 아기들처럼 울지 않고 '아 응애에요'라고 하면서 김흥국 씨 말투로 울었을 것 같다"라고 말한 것이 시작이다.
주병진과 이경규 콤비는 주로 주병진이 일방적으로 이경규를 골탕 먹이고 억누르는 개그를 선보였는데, 개그 스타일이 영미식 스탠드 코메디의 형태를 띠던 주병진이 이경규의 재능을 인정하여 이경규의 코미디 스타일(콩트가 가미된 일본식 만담)에 맞춰주면서 함께 방송에 출연하였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이 포지션은 이경규가 일밤 전 이문세의 별밤 진행 방송에서 먼저 가지던 포지션이었고, 이문세의 추천으로 주병진이 이경규를 서브 포지션으로 쓰면서 기믹을 이어간 것이다. 단지 일밤의 파급력이 커서 후세에 90년대 초반의 이경규만 알려졌을 뿐, 이경규는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받쳐주는 개그맨[25] 기믹을 길게 가져 갔었다. 주병진의 하차 후 최수종[26]과 일밤을 함께 하며 기믹을 바꾼 것이다.
이경규가 일요일 일요일 밤에에 출연할 수 있던 것은 주병진의 친구 이문세의 도움이 컸다고 한다. 군복무 이후 꽁트에서 조,단역[27]으로 출연하던 이경규의 개그 실력을 좋게 평가한 이문세[28]가 자신이 진행하던 유명 라디오 프로그램 별이 빛나는 밤에의 주말 공개방송에 이경규를 섭외했고 이것이 청취자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자 이문세가 친구인 주병진에게 이경규를 보조 MC로 쓰라고 강력 추천하여 일밤 이전부터 주병진이 진행을 맡은 MBC 프로그램에 보조진행자로 출연하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주병진이 은퇴함으로서 병풍이나 쩌리... 소리를 들었던 이경규가 메인으로 성장했으니, 전화위복인 셈.[29]
당시 이경규가 특히 무서워한 연예인 선배들이 2명이었는데, 1명은 동국대학교 시절 선배 강석우, 그리고 다른 1명은 바로 코미디언 선배[30]이자 자신을 보조 MC로 데리고 있던 메인 MC 주병진이었다고 한다.
사실 이미 일밤 메인이 되면서부터 주병진은 PD들보다 더 결정권이 높은 포지션이었다. 주병진 본인이 여러 차례 말했듯이 몇 달마다 새 코너를 만들 때 기획 아이디어를 본인이 내고 제목과 틀까지 다 짜서, PD들에게 주고 디테일을 채우라고 요구하기도 하였다. 몰래카메라 코너의 기본 틀과 제목도 주병진이 직접 만든 것이었다고 한다.
2.2. 연예계 은퇴
그러던 1991년, 주병진은 돌연 연예계 은퇴를 선언한다. 그가 연예계 은퇴 선언을 한 지 1달 만에 SBS가 개국하면서 MBC 코미디언들의 대부분을 데리고 가 버리는 사건이 벌어지게 되는데,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담당 PD가 주병진이 당시 진행하던 라디오쇼[31]에 찾아가서 은퇴 시기를 늦춰 달라며 무릎 꿇고 통사정했다는 이야기까지 나돌았다. 희극인들은 악극단 내지 미8군 쇼 출신의 못 배우고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고[32] 방송국 PD들은 학벌 좋은 고학력자가 많던 시절이라 PD들이 희극인들을 엄청 낮춰서 보던 시절임을 감안하면, 당시 주병진의 인기가 정말 대단했음을 말해준다.못생겨서 죄송합니다의 이주일, 영구야 영구야의 심형래 등과 달리 점잖은 모습으로 웃음을 주는 주병진의 MC형 진행 방식은 주병진 은퇴 후 정재환으로 이어진다. MBC가 주병진의 공백을 최소화하기 위해 밀어 준 정재환은 주병진의 신사답고 지적인 이미지는 제대로 계승했다. 그러나 주병진이 워낙 순발력과 상황 판단 능력이 개쩔었던지라 그 정도까지의 무시무시한 순발력은 없었던 정재환은 주병진의 개그 센스만큼은 따라가지 못했다. 주병진은 정재환처럼 친절하고 깔끔한 진행으로만 끝나는 사람이 아니었고, 부드럽게 흘러가던 극 중간에 마치 양념을 뿌리듯이 갑작스러운 반전 웃음 요소를 계산해서 출연진이나 제작진에게 요구하거나 본인이 멘트로 조용하던 맥을 바꿔 능란하게 웃음을 터뜨릴 수 있는 천재적인 사람이었다. 즉 신사같지만 코믹한 독설가이기도 하고, 차갑게 말하다가도 따뜻한 모습도 보여주는 다면적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인지도를 얻은 뒤부터 연예계 인생 내내 신사 이미지, 망가지는 극에서도 기껏해야 점잖은 바보 정도를 크게 못 벗어나던 정재환과는 재능 차이가 많이 난다.
특히, 정재환은 콩트보다 진행을 재치있게 하는 스타일이었으나 SBS 개국과 함께 이적한 후에는 자신의 마지막 콩트 코미디 출연작인 대한민국 황대장을 포함하여 MBC 시절 잘 하지 않았던 콩트 코미디에만 집중 투입되었다. 그 결과 최양락 이봉원 등의 KBS 출신, 신동엽 홍록기 김경식 등 자사에서 키운 신인급에게 밀려 용도 폐기됐고, '대한민국 황대장' 이후 MC로 전업했다.[33]
주병진은 1993년 SBS에서 방영한 주병진 쇼라는 토크쇼의 진행자를 맡아 잠시 방송계에 복귀했으며 1995년부터 1996년까지 MBC의 토크쇼인 주병진 나이트 쇼의 진행을 맡았으며 1998년부터 1999년까지 SBS의 시사프로그램인 주병진 데이트라인 진행을 맡기도 하였으며 1999년말에는 MBC 10대가수가요제 진행을 이소라와 함께 맡기도 하였다.
2.3. 속옷 사업
은퇴 이후 주병진은 내의 회사[34] ‘좋은 사람들’을 설립하며 사업가로 변신한다. 이때 내의 브랜드를 제임스 딘이라는 이름으로 발매했다. 주병진은 자신이 경영하던 카페 이름도 제임스 딘으로 지었을 정도로 평소 제임스 딘를 동경했다고.본인의 책에 따르면, 자기가 카페를 열 당시에 정부에서 외래어로 된 상호는 등록을 안 해준다는 이야기를 듣고 구청에 '쟤 임씨든?'(…)이라는 이름으로 서류를 냈다고 한다.[35] 사실 이는 주병진이 살짝 잘못 알았던 것으로, 실제 문제는 상표법 제7조 1항 2호 등 등록 거부 규정의 해석에 있었다. 당시 특허청에서는 실존 인물의 이름을 관련 없는 사람이 그대로 상표로 사용하는 것이 이에 위배되는 행동이라고 판단한 것. 법정 공방은 대법원까지 가서 결국 주병진의 승리로 끝이 났고, 인명 상표등록 판례(96후2173)로 남게 되었다. 나중에 제임스 딘의 이름을 썼다고 미국의 유족으로부터 소송을 당하기도 하였으나 주병진 측이 승소하였다. 이는 국내에 드문 퍼블리시티권 판례로 남아 있다. 분쟁 과정에서 반쯤 보험 목적으로 만든 브랜드인 보디가드 역시 성공적인 속옷 브랜드가 되었다. 사실 주병진이 잘못 알았던 항목은 외래어로 된 상호가 아니라 "외국어 글자로 표기하는 상호"가 인정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일산의 폐기물 수거업체 겸 운수회사인 '가온누리M'은[36] "가온누리엠"으로, MBC는 '문화방송주식회사", SBS는 "(주)에스비에스", JTBC는 "제이티비씨"로 등기해야 한다는 식이다.
자금이 넉넉치 않은 중소기업으로 출발했기에 개그맨 출신다운 재미있는 마케팅으로 회사를 키웠다. 매일 손톱만한 광고를 신문에 짱박아서 마치 월리를 찾아라와 비슷한 유행을 만드는가 하면 지하철 내부 광고에 주병진식 개그가 실린 광고를 부착, 코믹 컨셉 카피의 광고로도 입소문을 탔다. 당시 주병진이 기획한 지하철 내부 광고는 해당 광고를 보느라 광고 앞 자리가 붐빌 정도였다. 다음에는 어떤 기발한 카피를 내세워 광고가 나올까 기다릴 정도. 요즘이라면 다들 각자의 스마트폰을 보느라 눈이 바쁘겠지만 디지털 기기가 없던 당시에는 주병진이 기획한 광고 속 카피들이 지루한 출퇴근 시간 지하철 속 승객들의 활력소가 되었다. 이를 통해 '좋은 사람들'은 내의 시장의 강자로 성장했다.
좋은 사람들의 마케팅 중 가장 화제를 불러모은 것은 주병진 본인의 누드광고 사건이다. 정장을 입은 모습으로 신문광고에 출연, 1995년 2월 21일에 옷을 벗겠다고 공언하였다. 21일자 신문에는 약속대로 겉옷을 벗고 속옷 차림의 모습으로 광고에 출연하였는데, 한술 더 떠 24일에는 속옷까지 모두 벗겠다고 공언하였다. 지금보다는 보수적인 시대였던 만큼 파장이 엄청났다. 좋은 사람들 사무실은 항의 전화로 업무가 마비될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예정된 24일이 되자 약속대로 올누드 차림의 신문광고가 나왔는데 그것은 바로 돌사진이었다.(당시 전면광고 보기) 28일자 경향신문에 따르면 일부 소비자들은 우롱당한 느낌이 든다며 항의 전화를 걸기도 했지만 대부분 참신한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광고였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보수적인 사회분위기 속에서 주병진이 속옷 차림의 광고가 나온 후 더 이상 벗을 옷이 하나(?)밖에 남지 않자 알 수 없는 단체들에서 주병진에게 협박 전화나 편지를 많이 보냈다고 한다. 회사에 전화가 와서 주병진이 받으면 "당신 요새 이상한(?) 거 하던데 위에서 지켜보고 있어. 조심하시오."라는 식의 말만 하고 끊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정부기관 측에서 경계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 광고는 베네통의 광고를 표절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현재까지도 성공적인 티저 광고 사례로 꼽히고 있다. 이후 황금어장 2011년 7월 13일자 방송에서 이 사진은 본인의 사진이 아니라 부하 직원의 돌사진이라고 밝혔다. 이유는 본인의 누드 돌사진이 없어서라고..[37] 물론 당시 사람들은 그게 주병진의 돌사진인 줄 알았다고 한다. [38]
사실 주병진이 기획한 이 광고는, 1994년 프랑스 어느 선거에서 모 정당이 사용한 홍보 기법을 발빠르게 도입한 것으로, 미모의 여성 모델이 날짜를 정해놓고 한 번에 옷을 하나씩 벗어서 화제를 모았던 정치 홍보 이벤트였다. 설마 설마 했는데 정해진 날짜에 내보낸 광고에서 해당 여성 모델이 가슴(!)을 시원하게 보여줘서 관심을 모았었다. 이후 다음 날짜에 전신 누드를 공약, 세계적인 관심을 끌어놓곤 여성모델의 '뒷모습' 전라만 보여줘서 반전을 가져왔던 것인데 노출에 관대한 유럽이라 가능했던 이 독특한 광고를 주병진이 한국식으로 재치있게 변용해서 내보냈던 것.
참고로 베네통식 뒷모습 누드 광고를 선보였던 것은 고 최동원씨가 현역 은퇴 후 '안티구아'란 이름의 스포츠 의류 브랜드를 국내에 런칭하면서 기획했던 광고다. 흑인 남성과 백인 여성 그리고 황인 아이가 마치 한 가족처럼 서 있는 뒷모습을 지면광고로 내보내서 이목을 끌었었다. 하지만 이 광고는 누드 광고는 물론이고 흑인 남성의 성적 매력을 금기시하던 국내 정서에 맞지 않았던 데다가 '안티구아'란 브랜드 자체가 국내에선 듣보잡이라서 반짝 화제에 그치고 말았다. 그래서 '베네통의 파격적인 광고를 흉내낸 국내 광고가 있었다더라' 정도의 기억만 남기고 '안티구아'란 제품은 사라졌다. 훗날, 이 아이디어를 최동원이 주도했다는 사실도 뒤늦게 알려졌었다.
아무튼 주병진의 기발한 아이디어로 무장한 광고에 힘입어 비록 후발주자였지만 활로를 개척했고, 당시 내의 업계의 양대 강자였던 쌍방울과 태창이 부도가 난 것에 대한 반사이익과 '패션 내의'라는 컨셉으로 소비자들에게 어필한다. 그 결과 지금은 코스닥에서도 알아주는 저평가 우량주 회사로 성장했다. 사업 초기에 유통망 확보가 너무 어려워서 업계에 발붙이기 힘들 정도로 텃세가 심했었는데, 직원들이 도매상들을 찾아가서 "여러분들의 한 달 수입은 사장님이 업소에서 한탕 뛰면 버는 돈입니다. 그러니까 재고 걱정하지 말고 꼭 사주세요."라고 말해서 거래처를 뚫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어렸을 때부터, 꿈이 사업가로서의 성공이라고 말해온 그였기에 연예계 복귀는 하지 않을 것이라는 주변의 관측이 많았다. 물론 MBC 코미디 프로 위기론이 나올 때마다 복귀설이 있었지만 본인이 거부했다.
창업자로서 좋은 사람들의 경영자이자 최대주주였던 주병진은 2008년 자신의 지분과 경영권을 매각하고 속옷 사업에서 완전히 손을 털었다. # 다만 사장과 경영권만 바뀐 것이지 회사는 여전히 잘 굴러간다. 2013년에는 유명 유아복 브랜드였던 베비라를 인수하기도 했다.
영화 인류멸망보고서에서 90분 토론에 출연해 여성 국회의원에게 막말을 하다가 '요즘 란제리 사업이 잘 안되시나 보네요?'라며 디스당했다. 배우는 주병진 닮은 꼴로 유명한 윤제문.
2.4. 2011년 연예계 복귀
2011년 7월 6일[39] 황금어장 무릎팍도사에 게스트로 출연했다. 10년 만에 방송에 출연하는 것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기대를 했고, 올밴의 방송 분량을 책임지며 녹슬지 않은 입담을 보여주었다.MBC는 그를 모시기 위해 물밑 접촉을 했는데 이 과정에서 공석을 만들기 위해 FM4U 두시의 데이트의 윤도현에게 DJ자리에 관한 아무런 사전 교감없이 일방적으로 시간대 변경을 통보해 버렸다. 무례한 조치에 반발한 윤도현은 9월 27일 DJ를 그만둔다고 선언하였고, 그러고 나서 MBC가 주병진더러 그 자리에 앉으라고 하니 부담을 느끼면서 당연히 고사한 다음, 9월 29일 잠적했다. 연예 기사와 뉴스 댓글란에서는 후배를 밀어내는 모양새를 연출한 MBC에 비판이 집중되었다.#
속옷 사업에서 손을 뗀 이후 무릎팍도사 후속이나 1박 2일 후속으로 들어간다는 루머들도 꾸준히 있었으나 모두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 2011년 12월 1일부터 매주 목요일 밤 11시에 자신의 이름을 건 주병진 토크 콘서트로 연예계 복귀가 확정되었다.
하지만 결국 토크 콘서트는 '주병진만 모시면 된다'는 일념으로 급히 기획되다보니, 프로그램 컨셉조차 잡지 못했다. 매회 컨셉이 바뀌게 되고, 게스트 섭외조차 제대로 되지 않아서 MC인 주병진 개인의 인맥을 총동원하는 수준이었다.
사실 이는 2010~12년 김재철 사장 집권 하의 MBC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었고 시청률 부진으로 조기 종영. 프로그램 컨셉이 안 잡혔고, 주병진이 최신 방송 트렌드에 적응하지 못하는 중이라고는 하지만, SBS 런닝맨의 성공 사례처럼 당장 실적에 연연하지 말고 한 번 느긋이 믿어줬으면 하는 시청자들의 아쉬움을 샀다. 결국 이후 주병진은 다시 모든 방송을 접게 되었고, 본인의 이미지에 오히려 악영향만 미쳤다.
그리고 그 이후 2014년에 tvN의 근대가요사 방자전으로 다시 컴백했다.
또한 SNL의 호스트로도 출연. 신동엽과 꽃뱀 드립까지 치는 등 크게 활약하며 호평을 받았다.
2015년 KBS 제2라디오의 개편으로 오전 9시 5분부터 오전 11시까지 방송하는 "매일 그대와"의 진행을 성악가 김동규로부터 이어받아 진행했다. 2016년 1월 17일을 마지막으로 유열에게 넘기고 하차.
2015년 12월부터 이듬해 11월까지는 채널A의 개밥 주는 남자에 웰시 코기 대, 중, 소와 함께 출연했다. 웰시 코기 종의 특성상 털빠짐 때문에 돌겠다고... 하지만 세 마리 덕분에 2000년대 이후의 출생자들에게 있어서도 본인의 인지도도 조금씩 올라가고 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일지도...
2018년 1월에는 미운 우리 새끼에 등장했다. 박수홍과 같은 아파트에 살아서 박수홍 및 지인들인 지상렬, 김수용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나왔다.[40] 개밥 주는 남자에서의 모습과 별 차이가 없었다. 큰 펜트하우스에서 부유하게 생활하는 모습과 냉장고에 제대로 된 반찬이 없어서 박수홍이 집에서 반찬을 가져다 주는 쓸쓸한 솔로의 모습이 겹쳐서 나왔다. 주병진 본인도 '이런 집의 모습은 껍데기 뿐'이라고 자조하고 박수홍에게 빨리 결혼하라고 조언했다. 결국 박수홍은 오랜 시간 후 결혼에 성공했지만, 주병진은 여전히 미혼인 상태다.
2020년대 이후에는 라디오스타에 오랜만에 노사연과 나왔다.
2024년 박소현과 함께 이젠 사랑할 수 있을까에 출연했다.
3. 사건 사고
주병진은 연예인 생활 동안 1983년 연예계를 뒤흔들었던 대마초 사건[41], 2001년 필리핀 원정도박 사건[42], 2009년 음주운전을 하다 경찰의 단속에 걸리고 큰 수치가 나오자 채혈을 요구[43]한 사건 등의 혐의로 여러 차례 입건[44]되었다. 게다가 주병진은 방송 진행 중 시청자들에게 상당히 무례한 태도[45]를 보인 적이 여러 번 있었기 때문에 전성기 시절에도 상당수의 안티를 보유하고 있었다. 심지어 희극인임에도 불구하고 안 망가지려고 한다는 어처구니 없는 이유[46]로 주병진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 많은 사건들 중에서도 주병진이 가장 타격을 받은 것은 2000년에 일어난 성추문 사건이다. 주병진이 강남 모 호텔에서 꽃뱀 강민지를 떼어내려고 1억이 든 돈가방을 줬다가 성폭행 누명을 쓰고서 2년 간 재판을 받은 끝에 공소기각 판결을 받은 사연은 지금도 네이버에서 주병진을 검색하면 연관 검색어로 뜰 정도다. 이후 내용은 주병진 강간 누명 사건 참조.
2021년 7월, 서울의 한 사우나 탈의실에서 40대 남성을 폭행한 혐의로 경찰에 입건되었다. 29일, 경찰은 주병진의 폭행 사건 수사를 마치고 검찰에 송치하였다.
주병진은 서울 마포구의 호텔 한 사우나에서 피해자 A씨와 대화를 나누던 중 언성을 높여 목 부위를 잡는 등 폭행 혐의를 받았다.
주병진은 경찰 조사에서 폭행 혐의를 부인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하지만 경찰은 목격자 등의 진술을 토대로 혐의가 인정된다고 판단하였다.
4. 출연
4.1. TV
<rowcolor=#fff> 기간 | 방송 채널 | 방송명 | 비고 |
1978년 | 제1회 TBC 해변가요제 | 데뷔 | |
1980년 | 달려라 청춘 | ||
1981년 ~ 1984년 | 젊음의 행진 | ||
1982년 | 젊은이의 토요일 | ||
1982년 ~ 1983년 | 즐거운 토요일 | ||
1983년 ~ 1984년 | 유머 1번지 | ||
1986년 ~ 1988년 | 청춘만만세 | [47] | |
1987년 ~ 1988년 | 뽀뽀뽀 | [48] | |
1988년 | 일요일밤의 대행진 | ||
1988년 ~ 1991년 | 일요일 일요일 밤에 | ||
1989년 | 아침을 달린다 | ||
1995년 ~ 1996년 | 주병진 나이트 쇼 | ||
2011년 ~ 2012년 | 주병진 토크 콘서트 | ||
1993년 | 주병진 쇼 | [49] | |
1998년 | 주병진 데이트라인 | ||
2014년 | 근대가요사 방자전 | ||
2021년 | 라디오스타 | ||
2024년 | 이젠 사랑할수 있을까? |
5. 기타
- 어린 시절, 찢어지게 가난한 데다가 부친까지 일찍 여의는 등 영 좋지 않은 가정사로 인해 주병진의 모친은 우울증에 걸렸는데, 주병진은 그런 어머니를 달래기 위해 어머니를 웃기는 버릇이 생겼고, 이 습관이 코미디언으로 데뷔할 수 있는 기틀을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 과거엔 평범했던 이름이 요즘엔 인터넷 비속어 중 하나로 사용되는 바람에 몇몇 사이트에서는 주병♡으로 필터링되기도 한다. 참고로 90년대 만화 짬보람보에서는 주병신이란 이름으로 나왔다. 이 만화에서 변진섭이 변변섭으로 나오기도 했지만 주병진은... 어차피 당시 다른 작품들도 그런게 많았다. 동시대 펭킹 라이킹이라는 만화는 손지창을 발지창으로 만들었다.
- 복면가왕 75차 경연에서 남대문 열렸다! 인사 잘~하는 수문장이라는 가명으로 참여했다.
- 2018년 근황이 밝혀졌는데, 큰 집에서 살고 있다. 2008년 좋은 사람들 지분을 270억원에 매각한 만큼 엄청난 갑부다.
- 2018년에 '오! 캐롤'이라는 뮤지컬에 주연으로 출연을 했었다. 그는 시작 전부터 '내 목표는 실력 없는 뮤지컬 배우다. 실력은 없지만 뮤지컬 배우로 인정받는 수준까지 올라가는 게 목표다.' 등의 발언으로 뮤지컬의 중요 요소 중 하나인 넘버 소화도 못 하면서 뮤지컬 주연을 맡는다는 비판을 받았고, 게다가 첫 공연에서도 7세 관람가 힐링 뮤지컬에서 관객 외모 평가에, 성적 발언을 서슴지 않아서 논란을 일으켰다. # 물론 이러한 섹드립들은 대본에 전혀 없는, 그가 만들어낸 애드리브다.
- 후배 코미디언 최양락은 주병진이 주인공이던 KBS 젊음의 대행진이라는 프로그램의 개그 코너에서 단역을 하다가 평소 무서운 선배였던 주병진에게 많이 혼났었다. 그중 가장 유명한 사건은 족발뼈로 맞은 사건이다. 1981년 12월 31일에 장충체육관에서 <젊음의 행진> 연말 특집인 <젊음의 대축제>를 찍은 후 뒷풀이로 장충동 족발집에서 개그맨들끼리 모여 망년회 회식 자리를 가졌다. 이때 주병진이 야자타임 놀이를 제안했고, 후배 개그맨들이 이에 응했다. 그런데 문제는 최양락이 도를 넘어서서 야자타임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주병진에게 반말과 욕설을 가했다는 것. 야자타임을 처음 시작할 때도 쌓인 게 많은 최양락이 주병진에게 "니가 개그계의 신사는 무슨 얼어죽을 놈의 신사야 임마? 너는 신사도 아니야 임마"라고 주병진에게 시비를 걸었다고 한다. 이후 최양락이 더 깐족거리자 주병진이 "야 양락아, 이제 그만해라"라고 말했는데, 최양락이 "그~만하긴 뭘 그만해 임마~잇"이라고 했다고 한다. 이후 주병진이 여러 번 그만하자고 그랬는데, 최양락은 "왜 자꾸 그만하래 임마? 병진이 너 나빠."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결국 참다참다 화가 폭발한 주병진이 술상에 놓여진 족발을 들고 최양락의 얼굴에 인정사정 없이 던져버렸다. 최양락은 주병진에게 족발로 얼굴을 얻어맞고 아파서 울었다고 한다. 최양락이 족발에 맞아 서러워 우는 줄 안 선배들인 임하룡과 전유성은 '양락이도 체면이 있고 자존심이 있지 연예인인데 족발로 때려서야 되느냐'며 최양락과 주병진 사이를 말리며 사태를 진정시켰으나[50] 당시 최양락이 울었던 진짜 이유는 서러워서가 아니라 '정말 아파서' 울었다고 한다. 족발을 먹다 보면 마지막에 살은 다 발라낸 거대한 족발뼈가 나온다. 여기에 맞았으니... 병원에 입원 안 한 게 용하다. 이후 최양락은 개그맨을 그만두겠다며 경상도의 절에 들어가 삭발을 하고 한 달간 수행생활까지 했다고 한다. PD와 선배들이 찾아가 설득해서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고. 웃긴 건 훗날 이 이야기를 방송에서 직접 한 사람이 최양락 본인이라는 것.
- 위 일화 때문에 주병진과 최양락의 사이가 무척 안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정작 최양락과 주병진은 사이가 나쁘지 않다. 오히려 최양락 본인이 자신도 이제는 환갑이 넘은 어엿한 개그계의 거물로 올라섰음에도 불구하고 방송에서 노골적으로 "주병진 선배님은 어렸던 내게 개그로 큰 영향을 주셨고 지금도 존경하는 선배님"이라는 말을 했을 정도로 주병진을 존경한다. 오히려 추후 오래 원한이 남았을 만큼 최양락과 사이가 나빴던 개그맨은 같은 KBS에서 활동했던 개그맨 김형곤이다. 1985년에 김형곤이 동료 개그맨들과 함께 최양락의 집에 찾아가 최양락을 집단 폭행해서 최양락이 정식으로 검찰고소를 했기 때문.
- 후배들을 폭행해서 2번이나 경찰에 구속된 전력이 있는 김형곤도 주병진의 KBS 시절이자 본인의 신인 시절에는 주병진에게 갈굼 당하는 뚱땡이 역할이나 쩌리 역할을 꽤 많이 했었다. 학교에서 학생 김형곤이 선생님한테 아무 드립이라도 뭘 좀 해보려하면 반장 주병진이 "앉아"라고 하고 바로 끝나는 역할이 대표적이다. 역할을 일부러 그런 걸로 줬다면 연습 과정도 안 봐도 뻔하니 김형곤도 고작 2살 형인 주병진에게 갈굼당하고 살았던 것이다. 사실 이경규나 김흥국은 30살이 넘어서도 주병진 눈치나 봤는데, 20대 초반 어릴 때면 성질 거친 김형곤도 당연히 주병진 눈도 못 쳐다봤을 것이다.[51] 즉, 주병진 세대 중 가장 강한 개그맨도 주병진 앞에서는 쩌리였다.
- 환갑에 진갑까지 넘은 현재까지도 미혼[52]이다. 과거에 겪은 평지풍파가 크게 영향을 미친 듯. 하지만 미우새에 출연했을 당시 혼자 사는 후배들인 지상렬과 박수홍 앞에서 털어놓은 바에 의하면 '난 어린 시절 좋은 집에서 사는 것이 유일한 꿈이었고 나이 들어서 그 꿈을 이룬 줄 알았으나 껍데기에 불과했다. 좋은 집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함께 할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라며 '내가 전 재산을 털어서라도 너희들 나이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하면 난 그렇게 할 것이다. 너희들 나이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사는 아름다운 집을 가질 것이다.' 라는 소망을 드러냈다.[53]
근데 그 '너희들'이라는 후배들은 당시 거진 지천명이었다.
- 2011년 스노우 스푼이라는 요거트 아이스크림 전문 브랜드를 창업했다. 홍대 앞에 있는 스노우 스푼의 사장이 바로 주병진이다. 가게는 매우 깨끗한 편이었으나 현재는 외부에 비해 내부는 낡은 느낌과 청소가 제대로 안 되어있는 모습이 잦다... 아이스크림 및 토핑을 자유롭게 골라 먹는 방식. 북미나 일본 쪽에선 이미 유명했던 방식이었다. 가끔 밤에 가면 혼자 창가에 앉아서 유유히 커피를 마시고 있는 주병진을 직접 볼 수 있었다. 근데 좀 비싼 면이 없지 않다. 1g당 25원씩 받는데, 의외로 가장 작은 컵에 가득 담으면 5,000원은 훌쩍 넘어 버렸다. 2023년 현재는 문을 닫았다.
- 마포구 성산동에 음식점 더평양을 오픈해 사업에 복귀했다. 평양냉면 전문점인데, # 대부분의 평양냉면 애호가들은 가격까지 감안해서 서울권 최악의 평양냉면 업소 중 하나로 평가한다. 결국 폐업했다. 현재는 건물을 허물고 오피스텔을 짓고 있는 걸로 봐서는 땅이 팔렸을 가능성이 높다.
- 국민의힘 소속 이준석이 신임 당대표가 된 지난 2012년 1월 주병진 토크 콘서트에서 이준석 당시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이 출연했을 당시에 주병진이 "이준석 당신은 마치 3선, 4선한 국회의원처럼 두루뭉술하게 넘기려고 한다. 얼렁뚱땅 넘어가지 마라. 그런 건 어디서 배운 건가?" 라고 일침을 가하는 모습이 재발굴되기도 했다. # 그래서, 이준석은 뜨끔했는지 주병진에게 "앞으로 정치를 하려는 거 아니냐?" 라면서 말을 돌렸고 "비례대표로 공천을 받아도 절대로 출마하지 않겠다" 라는 대국민 선언을 하기도 했다. 사실 현재 주병진의 나이가 70이 가까워지는데 정말로 정치를 하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면[54] 이준석이 코흘리개 꼬꼬마였던 시절에 먼저 했을 것이고 "나이도 들었고 재산도 수십억대인데 뭐가 아쉬워서 머리가 아픈 정치를 해야 될까?"를 잘 생각해보면 그냥 생각이 짧았다.
[1] 1984년부터 1990년까지 MBC 연기대상에서 코미디 부문을 따로 시상하였고, 1991년부터 1994년까지 MBC 방송대상 코미디 부문, 1995년부터 2000년까지 MBC 코미디대상, 2001년부터 MBC 방송연예대상으로 바뀌었다.[2] 프로필상 1959년생이지만, 임백천과 초등학교 동창, 강남길과 중학교 동창, 홍서범과 초, 중학교 동창으로서 1958년 개띠 모임에 참여하고 있다. 이문세와도 이미 70년대 후반부터 50년이 다 되어가는 오래된 친구이며, 이문세의 친구인 설운도와도 친구이다. 임백천 홍서범과는 노년이 다 되어서도 방송을 같이 하면서 친구인걸 말한 적이 있고, 그보다 훨씬 과거였던 90년대 일밤에서도 같이 출연하여 꽁트 연기도 하며 토크한 적이 있다. 아마도 실제로는 1958년생이며, 1959년생이라는 것은 프로필상 혹은 호적상 출생년도인 듯하다. 당시에는 호적이 1년 미뤄지는 일이 많았다.[3] 現 서울특별시 중구[4] 1975년 서울특별시 자치구 경계 조정 당시 서대문구의 상당 면적이 종로구, 중구, 마포구 등으로 잘려나갔다.[5] 연도는 모르겠으나 현역병으로 논산에 입대를 하긴 했다. 하지만 같이 입대한 동기의 전언에 의하면 훈련소 침상에 기대어 계속 담배만 펴 댔다고 한다. 그렇게 며칠간 담배를 피다가 폐결핵 판정을 받고 의병 제대를 하였다 한다.[6] 2013년 지병으로 타계하면서 언론보도가 되어 모친의 정보가 공식적으로 알려졌다.[7] 친누나도 젊을 때는 연예계에 뜻이 있어서 동생 주병진과 1978년 TBC 해변가요제에 듀엣으로 출전해서 장려상을 수상했다. 당시 같이 참가해서 은상으로 데뷔했던 배철수는 주병진의 누님께서 굉장한 미인이었다고 기억한다고 방송에서 말했고, 주병진은 대회 기간에 누나에게 집적거리려던 남자들을 막거나 쫓아냈다고 한다. 막상 누님은 이후에 어떤 계기로 연예인의 꿈을 버린 건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동생이 70년대 말에 유명해질 동안 연예계 활동도 안 했고, 이후 혼인을 20대 중반쯤에 일찍 하셨다고 한다. 당시에 전체 사회에서 특별히 빠른 건 아니었지만, 주병진은 연예계에 뜻이 있었던 누님이었기에 그리 일찍 하실 줄 몰랐다고 한다. 대신 80년대 중반까지는 주병진의 언론인터뷰에서 누님에 대한 질문이 가끔은 나왔었다. 하지만 같이 가요제를 나간 것과 혼인하셨다는 정보 외에는 딱히 밝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누님과 동생 모두 젊을 때 혼인했지만, 조카에 대해서도 공개한 것이 없다.[8] 젊을 때 친동생에 대해서는 어릴 때 같이 찍은 사진 정도만 공개했고 그때 같이 놀았다는 이야기 정도만 해서 한창 스타개그맨이던 시절에는 밝혀진 것이 없었지만, 훗날 주병진의 속옷 사업 때문에 밝혀졌다. 알고보니 동생 주병학이 사업 초기부터 형을 도우며 중요한 역할을 하던 회사 간부였고, 사업 시작한 지 10년이 넘게 지나 회사가 성공한 상태가 되자, 사장이 되어서 언론에 나타난 것. 사실 회사 자체는 알려진 90년대 설립이 아니고, 형 주병진이 개그맨 활동을 한창 할 때인 1989년에 설립되어 동생이 주도적 역할을 많이 했었다고 한다. 이후 2~3년이 지나면서 주병진도 방송을 대부분 그만두고 동생과 함께 사업에 몰두하여 성공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간부였던 동생의 정보는 드러나지 않았는데, 세월이 더 흘러 2001년에 아예 공식적으로 본사 사장 자리를 맡자 드디어 신상정보가 드러난 것이다. 사실 주병진이 돈 모아서 한 첫 사업이 속옷이었던 이유도, 동생이 20대 때 속옷 장사를 해본 적이 있어서 속옷사업이 돌아가는 걸 체험해봐서 경험과 지식이 조금은 쌓였기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물론 시장에서 작은 속옷 가게 자영업을 해본 정도였겠지만 도움이 안 되었을 리 없다.[9] 과거 칠갑산이라는 노래로 히트를 친 가수 주병선이 이름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일요일 일요일 밤에에서 페이크 다큐 형태로 주병진이 어릴 때 잃어버린 친동생 주병선을 만난다는 설정의 드라마 타이즈를 찍은 적이 있는데, 거기서 주병진이 남동생이 있냐는 기자의 질문에 "네, 저는 누님과 남동생이 있죠."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후 갑자기 주병선이 형이라 부르며 나와서 끌어안자, 주병진이 "어? 얘 아닌데?"라면서 당황하였다. 물론 다 상황극. 이후 스튜디오에서 주병진이 주병선에게 생각보다 연기 잘하시더라라며 웃는 분위기로 토크쇼를 하도록 이어가서 끝났다.[10] 셋 다 웰시코기다.[11] 소는 어렸을 때부터 지병을 앓다가 심부전증으로 사망했다.[12] 고등학교 때 수영부를 했었고, 아마추어 수영선수였기도 했을 만큼 운동을 잘했던 개그맨이다. 신인 시절 그가 학창 시절 주먹도 썼다는 소문도 있었다.[13] 99년 2학년으로 편입.[14] 비슷한 시기에 이종환이 비슷하게 발탁해서 사회와 노래를 다 시켰던게 이문세이다. 그래서 주병진과 이문세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몇달 안된 시점부터 알고 지냈고 행사 사회 경쟁도 하다가 친구가 되었다.[15] 몇 달 정도에 불과했지만, 원래 가난한 편이던 가정이라 그 데미지가 상당했다고 한다. 한번은 생활비가 떨어져서 KBS로 일자리를 구하러 가기 위해 모친에게 버스비를 청했으나 모친이 버스비 줄 돈도 없다고 말했다고. 결국 주병진은 3시간을 그냥 도보로 걸어서 KBS로 갔다고 한다. 돌아올 때도 그냥 그렇게 걸어서 밤 늦게 왔다고.[16] 1981년 12월 31일에 장충 체육관에서 연말 특집 젊음의 대축제를 찍었고 이때 주병진이 최양락을 족발뼈로 때린 사건이 터진다.[17] 남행열차의 그 가수가 맞다. 근데 이쪽은 대마초를 전혀 안한 무혐의였다. 잘못된 소문으로 수사를 한 경찰과 검찰의 잘못으로 누명을 쓴 것. 자주는 아니어도 실제로 대마초를 흡연한 적은 있다고 시인한 주병진과는 입장이 달랐다. 나중에 무죄가 나왔다.[18] 김수희처럼 누명을 쓴 완전 무죄라면 방송 정지 처분을 무효로 하고 복귀하는데 문제가 없겠지만, 주병진은 지인의 권유로 몇차례 대마초 흡연을 해봤다는걸 인정했기에 처벌을 안 받아도 복귀가 안되는 입장이었다.[19] 1980년대 후반에는 무려 뽀뽀뽀에서도 튼튼이 아저씨라는 이름으로 잠시 고정 출연을 했었다. 역할은 튼튼이 아저씨로 어린이용 체조를 가르치는 역할. 주병진은 자신이 어린이들을 좋아해서 이 프로그램할 때도 좋았다고 한다. 하지만 동시대에 활동한 뽀식이 아저씨 이용식이나 배추 아저씨 김병조만큼 오래하지는 않았다.[20] 이 '모아'라는 유행어가 어찌나 대단했던지 명인제약이 약 이름을 일부러 "모아겐"이라고 지어서 주병진을 광고 모델로 쓴 적도 있다. 주병진의 신뢰감을 주는 신사 이미지를 잘 활용했던 유명한 광고다.[21] 스탠드업 특성상 즉흥적인 코미디라고는 할 수 없다.[22] 이 컨셉의 후속작이 이경규의 대단한 도전. 길게 보면 무한도전에도 영향을 준 코너다.[23] 주병진과 노사연이 60대에 같이 방송에 나와서 직접 한 말로, 주병진, 이문세, 노사연, 신형원, 이성미 등은 70년대 후반 신인 때부터 사적으로 절친했다고 한다. 그들을 이어준 연은 이종환이었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병진은 본인처럼 쉘부르 사회도 해봤던 이문세와는 행사 MC 경쟁을 하다가 라이벌에서 친구로 친해졌다고 한다. 신형원도 이종환에게 발탁되어 쉘부르에서 노래를 한 적이 있다. 이성미도 이종환과의 친분이 있었고 훗날 이종환이 진행하던 라디오에 한번 나온 적도 있는데, 노사연쪽은 이종환과의 관계가 딱히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노사연은 주병진과 해변가요제에서 친분이 생긴 쪽이다. 당시 임백천과 배철수 등과 함께 친분이 생겼는데, 주병진은 해변가요제 참가자일뿐만 아니라 임백천과 학창시절에 알고 지냈던 동창이었다. 친해지고 나서 다같이 잘 나가기 시작하면서, 그들끼리만 장기간 사적인 모임을 하며 각자의 프로그램에 대해서도 서로 모니터해주고 토론한 적이 많았다고 한다.[24] 중년부터는 방송계의 시한폭탄으로, 웃음도 터뜨리고, 방송사고도 터뜨리던 김흥국이지만, 당시는 주병진 앞에서 주병진에게 그대로 리드를 당하는 연예인이었다. 이는 이경규 또한 마찬가지. 이경규와 김흥국은 서로 인지도가 올라가던 1990년대초 과거부터 중년기까지 20여 년간 만나면 서로 끝없이 갈구고 들이대는 포지션이지만, 주병진에게는 둘다 꼼짝도 못했다. 참고로 겉으로만 보면 주병진이 김흥국의 동생일 것 같지만, 실제로는 김흥국이 주병진을 형이라 부른다. 주병진은 빠른 1959년생이지만 1958년생 포지션을 놓지 않았고, 주병진의 절친 이문세도 설운도와 친구를 하고 김흥국을 동생으로 대한다.[25] 서세원이 진시황 패러디를 하던 코너에서도 이경규가 받쳐주는 역할이었다. 유재석이 과거 무도에서 하던 가짜 중국말 "다찡 유찡" 하는 그 노래가 바로 이 코너다.[26] 주병진과 이문세는 선배지만 최수종은 이경규보다 후배였고, 최수종 역시 신사 이미지는 있었지만 주병진처럼 까칠한 신사 기믹이 아닌 부드러운 훈남 신사 이미지라 부드러운 설정을 가져가고, 이경규가 방송 중 능청스레 쏘는 기믹이 되었다. 그리고 최수종은 생긴 게 주인공처럼 생겨서 이경규가 능청스레 쏘는 게 엄청 자연스럽게 흘러갔다.[27] 이경규는 군복무 이후 1년 정도 MBC 서세원 라인에 있었고, 서세원이 주연이던 코너들에서 조단역을 많이 했었다.[28] 이경규는 이문세도 어느 정도 무서워 했다고 한다. 이문세는 당대 무서운 연예인 원톱이던 주병진보다만 안 무서웠던 것 뿐이지, 애절한 발라드 가수라는 이미지와 달리 가수 중에서 화나면 가장 무서운 선배로 유명했기 때문.[29] 당시 둘의 메인 프로그램이었던 일밤에서 주병진이 사업에 집중하기 위해 떠나자 이경규가 전면에 나서게 되었는데, 앞 사람의 후광에 가려서 묻혔던 사람이 결국 전임자의 그림자에서 못 벗어나는 경우가 많은 것을 본다면 이경규 자신도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30] 주병진은 녹화하러 가는 길에 희극인실을 몇 초만에 휙 지나가도, 떠들던 개그맨들이 갑자기 10분 이상 조용해졌을 정도로 무서운 선배의 끝판왕이었다. 그나마 그냥 지나가지 않고 "조용히 해라"라고 대놓고 말하고 가면 주병진의 녹화가 끝날 때까지 혹시나 주병진에게 걸릴까봐 몇 시간이 조용했다고 한다. 후술될 최양락 족발 사건(당시 KBS) 이후 MBC로 갔는데, 이미 소문이 다 났을 테니 당연히 MBC 시절부터는 상식적으로 잘 깐족거리는 성격인 사람들조차 떨지 않았을 리가 없다. 잘못 까불면 족발뼈로도 때린다는데 겁이 안 날 리가.[31] 주병진 노사연의 100분쇼. MBC 라디오에서 오후 4:10~6:00까지 방송했다. 지금은 라디오 시대 프로그램의 전신.[32] 그래도 이건 60년대까지에서 길게 봐도 70년대까지의 이야기고 80년대부터는 TV 방송이 자리잡은 상황이라 미8군 출신으로 연예인이 되는 일은 없었다. 진짜 순수 미8군 출신으로 출발해서 대스타로 올라온 레전드들은 50년대 중반 연주가 신중현으로 시작해서, 50년대 후반 가수 현미, 패티김부터 60년대 조영남을 거쳐 60년대말 70년대초 조용필, 마지막 라인으로 인순이[55]에서 끝나는 가수라인이었다. 70년대 후반부터는 미군공연 출신 연예인이 사실상 없어졌다.[33] '대한민국 황대장'은 정재환의 처음이자 마지막 슬랩스틱 코미디 출연작이 되기도 했다. 그래도 무려 훗날 최고의 한류스타가 될 장동건을 바보 연기로 특별출연시킬 정도로 한 건 하긴 했다.[34] 무슨 사업을 할까 이것저것 찾아봤는데 당시에 언더웨어 회사가 국내에 세 곳만 있어서 "한두 장만 팔아도 업계 4위 아닌가"하는 생각에 뛰어들었다나.. 사실 이건 드립 정도이고, 친동생인 주병학이 군대에 갔다와서 작게 속옷 장사를 해본 적이 있어서 어느 정도 속옷에 대한 개념이 있었기 때문에, 친형인 주병진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아 추천한 걸 주병진이 받아들인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사업 초기 3년 정도는 사장 주병진보다 친동생이 실무를 훨씬 더 많이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병진은 그 기간동안 방송이나 밤무대 행사를 20대 때만큼 많이 했었다. 물론 그 돈으로 매출이 없거나 적던 초기, 직원들 월급을 주기 위함이었다.[35] 옆집 ‘알카포네’는 ‘알고가보네’…[36] 광역급행버스 M7731 노선(한정면허)을 운영한다.[37] 주병진은 1960년대 어린 시절 그 시대 서민들 중에서도 빈곤층 집안 출신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래서 못 찍었을 지도 모른다. 또한 아마추어 수영선수였기도 했을 만큼 운동을 잘했던 개그맨이던 청년 시절 전설적인 공포의 군기반장 선배였던 일화와 달리, 의외로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시절에는 가난함에 위축되었는지 싸움도 못 하고 마음도 여려 괴롭힘도 당했었다고 한다. 본인 증언으로는 어릴 때 학교가 끝나고 괴롭히던 애들로부터 도망쳐 달동네 허름한 집에 와서 혼자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있으면, 괴롭히던 애들이 창문으로 와서 "야 주병진, 너 이불 속에 있는 거 다 보여. 당장 나와"라고 놀리며 말했다고 한다. 청소년기에 변한 듯. 일단 개그맨 시절에는 후배들이 눈도 한번 못 쳐다볼 정도로 무서운 선배였고, 그 깐족거리기 좋아하던 최양락이 술자리에서 족발로 쳐맞은 것도 엄연히 평소에는 주병진에게 눌려 한번도 깐족거리지 못하다가, 술을 마신 김에 마지막 객기로 덤비다가 맞은 것이었다. 물론 족발로까지 때린 일이 났으니, 더 무섭게 소문이 나서 다른 후배들은 주병진에게 더 벌벌 떨게 되었다고 한다.[38] 당연히 이제 와서야 그 사정을 알게 된 강호동이 "본인이 벗겠다고 해 놓고 그러면 본인이 아닌 거잖아요"라고 따졌더니, 주병진의 반응은 "지금 와서 따지면 뭐 어떡하겠다는 거야?"(...)[39] 2회분으로 13일까지 방영했다.[40] 이들 중 김수용은 주병진과 초등학교 동창인 임백천의 고등학교 후배이다. 김수용과 KBS 대학개그제 공채 동기였던 박수홍은 임백천이 원년멤버로 활동한 KBS 2TV 쇼 파워 비디오의 또다른 원년멤버였던 김미화 후임 MC(김경식) 물망에 한때 거론됐었다. 박수홍 외에도 박수홍, 김수용과 KBS 대학개그제 공채 동기인 남희석, 김용만 등이 한때 김미화 후임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41] 연예인 여러 명이 수사대상에 포함되어 조사를 받았는데, 의외로 김수희처럼 한번도 안 했는데 누명을 쓴 연예인들도 있었지만 주병진은 한 적이 있어서 시인했다. 다만 생각보다 기간 대비 흡연한 횟수가 적어서 상습적이지 않은 흡연으로 판단되어 기소유예로 풀려났다.[42] 이 사건이 문제인건 이때가 한창 성폭행 누명으로 1심 유죄의 누명을 쓴 직후였다는 것이다. 당시 변호사의 설득으로 1심 중에 꽃뱀에게 합의금을 주는 바람에 1심이 집행유예는 나와서 풀려난 것이다. 이에 대한 억울함의 분노였는지 몰라도 직후 5개월간 한 달에 한 번꼴로 필리핀을 갔다오곤 했다는게 밝혀졌다. 다만 도박 재판의 결과와 성폭행 무죄가 나온 것과는 무관한데, 3심까지 성폭행 무죄가 나온 뒤 그와 별개로 몇년전 도박한게 잡혔다.[43] 검사를 거부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임한 것인데 공격적 태도였다는게 문제가 되었다. 입으로 부는 기계로 불었는데 높은 수치가 나오자, 믿을 수 없다며 채혈을 요구한 사건이었다. 밤 늦은 시각이라 근처 종합병원 응급실에 경찰과 동행한 뒤 채혈검사를 받았다. 주병진은 "나는 정종 3잔밖에 안 먹었고 시간도 어느 정도 지나서 운전했다. 음주운전 기준선까지는 나오더라도 이렇게 높게 면허 취소까지 나올 정도가 아니다. 부는 기계를 못 믿겠다."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하지만 채혈 결과도 입으로 부는 기계와 비슷하게 나왔고 오히려 채혈 쪽이 약간 더 높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래서 면허 취소가 되었다. 이후 벌금 여부나, 언제 어떻게 다시 면허를 취득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걸로 구속이 된 적은 없다.[44] 이중 진짜 구속된 사건은 원정 도박 1번이다. 이후 보석으로 풀려났고, 1심 벌금 1천만원으로 끝났다. 정확히는 구속이 1번 더 있지만, 그게 누명을 썼던 성폭행 무고로 인한 구속이라 잘못된 구속이었고 이건 오히려 법원이 주병진에게 배상금을 주었다.[45] 1989년 시상식에서 거의 대부분 정장을 하고 얌전히 앉아있는 가운데 주병진 혼자 캐주얼 차림으로 다리를 꼬고 거만한 자세로 앉아있는 모습을 방송사 카메라가 클로즈업 해서 보여주었다. 그리고 시상식 소감을 말할 때도 '고맙습니다, 상 잘 받겠습니다.'라는 식으로 건방지고 성의없는 소감을 말하고는 인사도 안 하고 들어간 일이 있었다. # 당시 주병진이 방송사와 무슨 트러블이 있어서 시상식을 망치려고 일부러 그랬다는 소문도 있었는데 자세한 내막은 알려진 것이 없다.[46] 이건 좀 과한게, 심형래처럼 바보 역할만 안한거지 두들겨 맞거나 당하는 역할은 20대까지 했었다. 그리고 김형곤도 의외로 20대 때 바보 역할은 거의 안했었다.[47] MBC 첫 출연작[48] 체조 코너를 담당하는 '튼튼이 아저씨'로 출연.[49] 첫 단독 토크쇼[50] 이걸 보면 당시 개그맨들의 선후배 관계나 최양락의 개인적인 잘못을 감안하더라도 심한 일이기는 했던 모양이다.[51] 참고로 이경규와 김형곤은 동국대학교 동기이자 친구 사이였다.[52] 막상 남매들은 모두 혼인을 했다. 친누님은 그리 일찍 하지 않을 줄 알았다는 주병진의 생각보다 빠르게 20대에 혼인을 하였다고 하며(1984년 언론 인터뷰에서 이미 누님께서 혼인을 했다고 언급했다), 동생은 정확한 시점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친동생이 주병진의 회사 사장이 되었을 때 기사에서 "주병진은 이미 예전부터 결혼한 형제자매들이 분가한 상황이라 모친과 상당기간 단둘이서만 살고 있다"는 내용이 나왔으므로 빠르면 20대고 늦어도 최소 30대 안에는 무조건 했다. 물론 형제자매들의 혼인 정보는 80 ~ 90년대가 끝이므로 이후의 수십 년간 이혼이나 사별이나 재혼 여부는 알 수 없다.[53] 자신이 뇌졸중 증세로 병원에 실려갔을 당시의 일화를 덧붙이면서 아플 때 곁에 아무도 없다는 것이 크게 다가온다는 첨언을 남긴 것은 덤.[54] 정치를 하면 과거 기록이 언론에 의해 조사되는데, 성폭행 누명처럼 아무 잘못없는 것만 대중에게 기억되던 상황에서, 대마초(1980년대 초반)나 원정도박(2001년), 음주운전(2009년)처럼 진짜로 잘못했던 기록들이 되짚어지면 좋을게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