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투로 토스카니니 주요 수상 및 경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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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9246><colcolor=#fff>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Arturo Toscanini | |
출생 | 1867년 3월 25일 |
이탈리아 왕국 에밀리아로마냐 | |
사망 | 1957년 1월 16일 (향년 89세) |
미국 뉴욕 주 뉴욕 시 | |
직업 | 지휘자, 작곡가, 첼리스트 |
장르 | 클래식 |
활동 | 1886년 ~ 1954년 (68년) |
학력 | 파르마 왕립 음악원 |
주 경력 | 라 스칼라 음악감독 (1898~1903, 1906~08, 1921~29) 뉴욕 필하모닉 음악감독 (1928~36) |
배우자 | 칼라 드 마티니 (1897년 결혼 ~ 1951년, 사별)[A] |
자녀 | 1남 3녀[A] |
사위 |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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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탈리아 출신의 지휘자로 악보 중심의 객관적이고 엄격한 해석을 보여주어 19세기와 20세기 초기의 가장 두드러진 지휘자 중 하나로 꼽히며, 후배들인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과 함께 역사상 최고의 지휘자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인물이다.토스카니니는 그의 지휘 역량으로 유명하며, 특히 베토벤, 베르디, 푸치니 등의 작곡가들의 작품을 연주한 것으로 유명하다.
격정적인 감정을 요구하는 토스카니니 옹 |
NBC 교향악단과 연주한 오토리노 레스피기의 로마의 소나무. 1952년 3월 22일 카네기 홀 실황. 4곡 '아피아 가도의 소나무'의 광폭하기까지 한 코다가 인상적이다. |
2. 생애
2.1. 지휘자 데뷔 전
1867년 3월 25일에 파르마의 가난한 재단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클라우디오 토스카니니는 젊은 시절, 주세페 가리발디 장군의 붉은 셔츠 군단에서 활동하였던 열혈한 민족주의자였는데 이 같은 화끈한 성미의 행동주의와 적극성은 아들 토스카니니도 그대로 닮은 것이었다. 어렸을 적의 토스카니니는 몸이 허약해서 항상 특별한 식이요법을 받는 등 건강에 많은 위협을 받았으나 곧 건강을 되찾고 음악에 재능을 보여 파르마 국립 음악원의 초청을 받게 된다. 그러나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부모님은 토스카니니의 음악원 입학을 꺼렸으나 토스카니니의 재능을 아깝게 여긴 음악원장 다치가 토스카니니를 장학생으로 받아들임으로서 1876년부터 비로소 토스카니니는 전문적인 음악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된다.[3]첼로와 작곡, 지휘를 배웠는데 매우 성적이 뛰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유달리 엄격한 음악원의 생활규칙 탓에 고집이 세고 완고한 성격의 토스카니니는 학교 측과 자주 충돌을 빚는다. 당시 음악원의 생활은 지금의 사관학교 이상으로 학생들을 엄격하게 관리했다고 한다.
이 때의 유명한 일화로는 선생에게 대든 것에 대한 벌로 독방에 갇혀 첼로연습을 하던 토스카니니가 화장실이 가고 싶다고 했으나 (단단히 앙심을 품은) 선생이 허락하지 않아 결국 첼로를 변기대용으로 썼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또 졸업을 앞두고 교사 징계 위원회에 기소되어 교칙을 위반한 친구의 이름을 고자질하라는 학교 측의 타협을 그 자리에서 거부하여[4] 졸업이 취소될 뻔한 적도 있었는데 다행히 토스카니니의 재능을 눈여겨 보던 음악원 원장과 담당 교수가 여러 모로 힘을 써서 간신히 졸업할 수 있었던 일도 있다. 어쨌든 1885년에 토스카니니는 9년간의 수업을 마치고 첼로, 작곡, 피아노에서 최고점을 얻으며 수석 졸업했다.
본디 토스카니니는 첼리스트로 데뷔하였다. 학생 시절부터 그는 고향 파르마 오페라 극장의 객원 첼리스트로 활동하기도 하였고 졸업 후에는 세계 최고의 오페라 극장인 밀라노 스칼라 극장에서 첼리스트로 활동하였으며, 지휘자 데뷔 극초기에도 주세페 베르디의 명작 오페라 오텔로(훗날 토스카니니는 지휘자로서 이 오페라의 권위적인 해석자가 된다)의 초연에 제2첼로주자로 참가하는 등 첼리스트로서도 상당한 명성을 얻었다.
2.2. 이른 나이에 지휘계의 거물이 되다
1886년 6월 30일, 토스카니니는 로시 오페라단 오케스트라의 첼리스트로서 브라질에서 주세페 베르디의 아이다 공연에 참가하였는데 지휘자가 오케스트라와 리허설에서 말싸움을 벌이고 관객들에게 엄청난 야유를 받는 등 연주가 잘 되지 않자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공연 도중에 갑작스레 퇴장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당황한 연주단원들은 아이다의 악보를 다 외우고 있는 유일한 인물인 토스카니니를 대리지휘자로 떠밀었는데 얼떨결에 대타 지휘를 맡은 토스카니니는 악보를 보지 않는 암보로 아이다를 지휘하여 실패했던 공연을 순식간에 성공리에 이끌어내며 지휘 경력을 시작한다.토스카니니가 아이다의 악보를 전부 외우고 있을 수 있던 것은 토스카니니가 선천적으로 시력이 아주 안 좋아 보면대의 악보를 보고 연주할 수 없을 정도여서 연주 전에 미리 악보를 외워두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후술하겠지만, 기억력도 매우 좋아 아무리 복잡한 악보도 두 세번 훑어보면 완벽하게 외워버릴 정도였다고 한다.
이후 이탈리아로 귀국한 토스카니니는 동년 11월 4일 토리노에서 알프레도 카탈라니[5][6]의 오페라 '에드메아'를 지휘하며 프로 지휘자로 데뷔하게 된다.
1892년 5월 21일에는 루제로 레온카발로의 팔리아치, 1896년 2월 1일에는 자코모 푸치니의 라 보엠이라는 두 인기작을 연달아 초연했고 라 보엠 초연 약 2개월 후인 1896년 3월 20일에는 토리노에서 오케스트라 지휘자로서도 데뷔한다.
1898년에는 31세라는 젊은 나이로 라 스칼라 극장의 음악감독에 임명되었지만, 청중과 운영위원회와의 불화 때문에 5년 만에 사임하고 1906년에 복귀했지만, 또 2년 만에 사임했다. 이후 토스카니니는 미국으로 가서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으로 가서 구스타프 말러와 함께 수석 지휘자가 되고, 1910년 12월 10일에는 푸치니의 신작인 서부의 아가씨도 초연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지만 1915년에 메트로폴리탄에서 나가고, 1917년에는 제1차 세계 대전이라는 시대 속에서 포탄이 쏟아지던 전장에 밴드를 이끌고 위문 연주를 갔고, 이 용감한 행적 덕분에 훈장까지 받았다.
2.3. 1920~1930년대 - 음악적 전성기
1920년에는 1917년 이후 운영이 중지되었던 스칼라좌 관현악단을 재편성했고 3번째로 총 감독으로 재직하게 되었으며, 첫 음반 제작을 했다. 1926년 4월 25일에는 푸치니의 유작인 투란도트를 초연했고, 1927년에는 빌렘 멩엘베르흐[7]와 함께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공동 상임지휘자가 되었다. 그리고 1930년에는 비독일계 지휘자 최초로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 지휘하기도 했다.이 무렵 토스카니니는 이탈리아의 국가 파시스트당과도 대립하였는데,[8] 당시 공연 전에 필수적으로 강요되던 파시스트 당가인 조비네차 연주를 거부하였다. 심지어는 무솔리니가 참석한 공연에서도 연주하지 않아 무솔리니가 화를 내며 돌아간 적도 있으며, 그 뒤 공연을 하기 위해 극장에 가던 그를 파시스트 당원들이 둘러싸고 조비네차를 연주하라고 협박했다. 토스카니니의 대답은 그답게 "싫어."였고 파시스트 당원들에게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미국으로 망명했다.
참고로 당대 음악인들은 이 시기가 토스카니니의 음악적 최전성기였다고 평가하는데, 그 당시의 토스카니니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완벽한 연주를 보여주었다고 평가받았다.
2.4. 미국에서의 새 출발과 마지막
1937년 12월 25일, 70세의 노장은 망명지에서 NBC 방송국 소속의 NBC 교향악단이라는 새로운 방송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가 되어 17년간 지휘 생활의 전성기 겸 후반기를 시작하게 된다.[9] 1946년에는 무솔리니가 실각한 고국에 오랜만에 돌아와 5월 11일에 폭격으로 파괴된 라 스칼라 극장에서 개관 기념 콘서트를 지휘했다. 1948년 3월 20일 오후 6시 30분에는 바그너의 작품들만으로 구성된 텔레비전 실황 중계 연주회를 지휘하기도 했고,[10][11] 1952년에는 라 스칼라 극장과 영국의 신생악단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함께 유럽에서 마지막 지휘 활동을 했다.참고로 NBC 교향악단 시절에는 연주홀로 쓰던 NBC 8H 스튜디오는 원래 라디오 방송용으로 설계된 곳이었고, 음악회용 스튜디오로 만든 곳이 아니었기 때문에 잔향이 매우 적어 음향이 매우 건조했다고 한다.[12] 특히 NBC 교향악단의 초기 녹음에서의 음향은 매우 심각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 때문에 1940년을 기점으로 NBC 교향악단의 대부분의 음반 제작은 8H 스튜디오가 아닌 카네기 홀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결국 8H 스튜디오는 1950년에 TV 스튜디오로 전환되고 이후 NBC 교향악단의 연주회는 카네기 홀 위주로 이루어진다. 정작 토스카니니 본인은 청중이 오케스트라의 소리를 더욱 명확하게 들을 수 있다고 이 스튜디오를 선호했다고는 하지만.[13]
1954년 4월 4일, 카네기 홀에서 바그너 음악 연주회를 평소처럼 악보 없이 지휘하던 토스카니니는 탄호이저 서곡을 연주하다가 일시적으로 실신하며 갑자기 지휘를 멈추고 30초 동안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사태가 일어났다. 순간적으로 브람스 교향곡 1번이 땜빵으로 나갔다고 하며, 다행히 정신을 차려서 나머지 연주는 성공적으로 마쳤으나 그는 박수를 뒤로 하고 비틀거리며 사라졌고 공식 무대에서 다시는 지휘봉을 잡지 않았다.[14] 연주회 직후 공개된 은퇴 성명에는 '마지못해 지휘봉을 내려놓고 오케스트라와 작별해야 할 슬픈 시간이 왔다'고 적혀 있었다.[15] 이후 토스카니니는 동년 6월에 가면무도회와 아이다[16]의 녹음 과정에서 불만족스럽다고 생각한 부분들을 다시 녹음했고, 이를 끝으로 토스카니니는 지휘봉에서 완전히 손을 놓게 된다.
토스카니니는 1951년에 54년간 동고동락했던 아내 카롤라를 잃은 상태였고, 이후 토스카니니는 뉴욕의 집에서 아들 발터와 함께 발매 가능한 녹음을 선정하고 편집하는 작업을 했다고 한다. 말년의 토스카니니는 텔레비전으로 권투와 레슬링, 후술할 성격과는 전혀 안 어울릴 것 같은 코미디 프로그램을 즐기며 유유자적하게 살다가 1957년 새해 첫날에 뇌혈전의 발작을 일으켰고, 1월 16일에 끝내 깨어나지 못했다. 그의 시신은 고국으로 옮겨져 밀라노의 가족 묘지에 매장되었다.
그가 은퇴한 후 심포니 오브 디 에어(Symphony of the Air)로 개칭한 NBC 교향악단은 1954년 10월 27일에 카네기 홀에서 연 첫 연주회에서 토스카니니를 추모하기 위해 지휘자 없이 악장만의 수신호로 모든 프로그램을 연주했다는 감동적인 일화를 남겼고, 이후 DG나 RCA 레코드 등에서 수많은 녹음을 남겼다. 1955년 중반에는 아시아 순회 공연을 열어 일본뿐만 아니라, 동년 5월 25일 당시 전쟁의 상흔이 여전했던 대한민국에도 내한하는 등[17] 활발한 활동을 하다가 1963년에 해체되었다.
3. 지휘 성향
베토벤, 교향곡 3번 (rec. 1949) | 멘델스존, 교향곡 4번 (rec. 1954) |
바그너, 지크프리트의 죽음과 장송행진곡 (rec. 1952) | 베르디, 운명희 힘 서곡 (rec. 1945) |
토스카니니의 음악을 들으면 뭔가 낯익게 느껴진다고 한다. 그만큼 후대에 지배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하는데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1960년대 카라얀은 토스카라얀이라고 비꼬아지기도 했다.[18]
토스카니니의 연주는 강인한 리듬과 굵은 골격을 바탕으로 장대한 스케일의 음악이 당당히 울려펴지게 하는 마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는 오케스트라로 하여금 최고의 기량을 발휘하도록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었고, 함께 연주하였던 단원들은 그의 열정에 자기도 모르게 빨려들어 도취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다만 신성불가침의 영역처럼 여겨지던 과거와는 달리, 최근에는 토스카니니에 대해 보다 객관적이고 비판적으로 보자는 의견도 많아지고 있다. 대표적으로 후술할 '악보에 충실한 지휘자'라는 의견이 그렇다.
토스카니니는 악보대로 연주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이는 오해의 소지가 많은 부분이다. 토스카니니가 오페라에서 악보에서 크게 벗어나 노래를 부르는 성악가들에게 지속적으로 악보대로 부를 것을 요구했다고는 한다.[19] 그러나 토스카니니가 악보에 수정을 가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은 사람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그는 당대의 다른 지휘자들과 같이 베토벤이나 다른 고전주의 작곡가들의 악보에 가필을 해서 연주했던 지휘자다. 다만 토스카니니는 템포면에서 템포 루바토를 거의 구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점에서 당대의 다른 지휘자들에 비해서는 더 악보에 충실하게 지휘하는 것으로 느껴진다.[20] 하지만 악보의 가필 문제에 있어서 그는 역사상 가장 많은 가필을 한 지휘자에 속한다. 거의 리-오케스트레이션 수준의 가필을 한 것으로 알려진 구스타프 말러와 비교해봐도 뒤지지 않는다. 베토벤 교향곡 제9번을 말러가 4관 편성으로 개작한 악보로 연주한 음반과 토스카니니의 음반을 비교해 보면 자웅을 가리기 힘들 정도다. 곳곳에 수시로 호른을 가필한 것은 물론이고 바이올린의 옥타브를 높이는 등의 조정한 곳도 여러 곳 있다. 현악기나 목관악기의 멜로디 라인을 살짝 바꾼 곳도 있다. 팀파니의 가필도 눈에 띈다. 호른이나 트럼펫은 내추럴 악기의 한계 때문에 가필하는 것이 어느정도 용인되지만 이와 관련없는 다른 악기들도 개의치 않고 뜯어고쳐 연주하고 있다.
안톤 브루크너와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들은 거의 지휘하지 않았다.[21] 다만 토스카니니의 활약 당시에 말러는 작곡가로서보다는 지휘자로 더 유명했으며,[22] 브루크너는 독일어권에서만 유명했단 것은 감안해야 한다. 의외로 조지 거슈윈의 작품[23]도 연주한 적이 있는데, 당대 사람들에게는 '재즈답지' 않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토스카니니는 흔히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와 라이벌로 인식되지만[24] 실제로는 토스카니니가 19살 연상으로 훨씬 윗 세대의 인물이며, 오히려 당시엔 그리스 출신의 디미트리 미트로풀로스[25]가 푸르트벵글러의 라이벌로 여겨졌다.
3.1. 토스카니니에 대한 세간의 평들
사람들은 이번 공연에서 처음으로 지휘대로 올라간 게 아니라 20년 동안 그렇게 해왔다고 생각할 걸세. 그는 진짜 귀재야. 그의 이력은 보증된 것이네.
알프레도 카탈라니, 1886년 11월 4일에 자신의 오페라 '에드메아'를 토스카니니가 지휘한 공연을 들은 뒤의 평[26]
알프레도 카탈라니, 1886년 11월 4일에 자신의 오페라 '에드메아'를 토스카니니가 지휘한 공연을 들은 뒤의 평[26]
여러분, 나는 방금 마악 밀라노에서 왔는데, 그곳에서 토스카니니란 사람이 지휘하는 '지크프리트'의 연주를 들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여태까지 들어본 오페라 중에서 가장 위대한 연주였습니다. 이 이름을 기억해두십시오. 앞으로 이 이름을 자주 듣게 될 것입니다.
아르투르 니키슈, 1921년에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와 리허설하던 중
아르투르 니키슈, 1921년에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와 리허설하던 중
바인가르트너와 슈트라우스, 브루노 발터, 푸르트벵글러, 그리고 오토 클렘페러와 더불어 연주를 한 뒤에 오케스트라가 토스카니니와 함께 연주한 체험은 이 모든 음악가와의 경험의 클라이맥스를 이루는 것임을 실감했다. 그는 여타 지휘자들을 능가하는 최고의 예술가였을 뿐만 아니라, 우리들 자신까지 초월하게 되어 최고의 높이까지 올려주었기 때문이다.
후고 부르크하우저[27], 1966년에 1930년대의 명지휘자들을 회상하며
후고 부르크하우저[27], 1966년에 1930년대의 명지휘자들을 회상하며
4. 일화들
1. 그는 리허설 때 단원들의 연주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지휘봉을 꺾거나 악보를 찢는 등 과격한 성격으로 유명했다. 지휘봉이 쉽게 부러지지 않으면 손수건이나 윗옷을 찢기도 했다. 틀린 음이나 어설픈 음을 발견하면 '노! 노!'라고 불같이 호령을 하여 그의 목소리는 늘 쉬어 있었다 한다. 단원들은 그런 그를 '토스카노노'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한다. <Art of Conducting : Great Conductors of the Past>의 토스카니니 파트를 보면 지휘하다 말고 불같이 성을 내는 그의 육성 녹음을 들을 수 있다. 현존하는 동영상들을 보면 연주가 틀릴 경우 눈에서 레이저를 발사해 단원을 쏴죽일 듯하다는 평도 있다.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죽음과 변용'의 리허설 녹음. |
2.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인 지노 프란체스카티도 한때 토스카니니가 지휘하는 오케스트라에서 일한 적이 있었으나 얼마 뒤 사임하였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 토스카니니의 음악에 대한 확고한 주관과 열정이 마력처럼 자신을 사로잡아 계속 머물러 있다가는 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3. 파티장에서 젊은 사람들을 모아놓고는 60대 후반의 사람들을 가리키면서 "저 늙은이들이 다 가고 나면 우리끼리 신나게 놀아보자." 라고 했다는데 이때 토스카니니의 나이가 80대 초반이었다고 한다.
4. 툭하면 지휘봉을 부러뜨리고 던지고 할 정도로 심하게 다혈질 적이라서 재수없을 때는 단원의 눈에 맞아 부상을 입히기도 했다. 한번은 그의 지시를 거부하던 단원의 바이올린 활을 강하게 내리쳐 부러진 활이 단원에게 맞기도 하여, 이에 분개한 단원과 몸싸움이 일어날뻔 하기도 했다.
5.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부드러운 성격은 본인의 증언에 의하면 토스카니니 때문에 형성되었다. 아바도는 젊은 시절에 토스카니니가 지휘하는 리허설에 참여한 적이 있는데, 토스카니니가 단원들을 괴롭히다시피 다루는 모습을 직접 보고 질색하며, 자신은 단원을 정중하게 대하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6. 연주 중 화가 나면 시계나 집기를 던지는 일이 있었으므로 토스카니니의 한 팬은 그에게 연습 때 차는 시계와 연주 때 차는 금시계를 함께 선물하면서 연습용과 연주용이라는 표시를 했다 한다. 실제로 단원들이 그의 75세 생일 때 금시계를 선물했는데 토스카니니도 그걸 알아서 가짜 도금 시계를 리허설 중에 차고 다니다가 홧김에 던져 깬 적이 있었다. 단원들은 자기가 사준 시계를 마에스트로가 깨부수자 당황해 정신을 차리고 연습을 완벽히 해냈는데, 토스카니니는 진짜, 가짜도 구분하지 못하는 놈들이라며 욕을 했다고 한다.
이와 비슷한 일화로 자신도 본인의 성격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아끼는 금장 시계의 복제품 시계를 가지고 연습에 임한 적이 있었다. 역시 연습 중에 성질을 이기지 못한 그는 시계를 내던졌고 당연히 박살났다. 겁에 질린 연주단원들은 이후 실수 없이 연습을 끝냈는데, 마치고 나오면서 그는 읊조렸다. "진짜 시계인지 가짜 시계인지도 못 알아보는 놈들에게 잘 하기를 바라는 내가 멍청이지!"
7. 하루는 집에서 라디오 음악[28]을 듣고 있다가 연주에 화가 난 나머지 "당장 저 지휘자를 끌어내라고 연락해야겠어!"라고 날뛰는 것을 가족들이 애써 뜯어말렸다. 이유는 연주 시작 전에 "지휘자는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라는 언급이 있었기 때문.
8. 본인이 생각할 때 그날 공연이 시원찮았으면 실의에 차서 힘없이 집으로 들어갔는데, 만약 가족들이 식사 준비를 하고 있으면 "이런 공연을 하고 밥을 먹을 수 있다니!" 라고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가족들까지 굶고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고 한다.
9. 리하르트 바그너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적극적으로 이탈리아에 소개한 사람이다. 바그너의 경우는 그 아들인 지크프리트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 지휘를 맡기도 하였다. 잘츠부르그에서도 지휘를 했었는데, 이것이 파토난 이유는 아돌프 히틀러 때문. 독재를 혐오했던 그는 지크프리트 사후 바이로이트가 히틀러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자 지휘를 거부하였다.
10.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곡중 일부를 작곡가 본인의 허락을 받고 이탈리아에서 공연하게 되었는데, 공연 시기와 거의 같은 때 근처에서 슈트라우스 본인이 바로 그 곡을 공연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믿고 있다 뒤통수를 맞은셈. 토스카니니는 그날 새벽 기차를 타고 슈트라우스를 찾아가 다음과 같이 외쳤다고 한다. "슈트라우스! 난 작곡가로서의 당신에게는 (경의의 표시로)기꺼이 모자를 벗습니다. 하지만 남자로서의 당신에게는 모자를 열개라도 쓰겠소!"
11. 당대에 유명한 소프라노였던 제랄딘 파러와의 입씨름도 유명하다. 파러가 "전 스타(별)라구요." 라고 하자 토스카니니는 "하지만 태양 앞에선 모든 별들이 빛을 잃는답니다." 라고 응수한 것. 토스카니니는 당시 유명 오페라 스타들이 자의적 해석으로 곡에 변형을 가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고 지휘자의 통제에 따를 것을 요구하였다. 그 때문에 파러와 입씨름을 벌인것. 그런데 정작 그 뒤에 둘 사이에 염문이 있었다.
12. 토스카니니의 베토벤 교향곡 9번이 라디오 중계가 된 적이 있었다. 이 방송을 듣던 한 가정의 카나리아들이 합창 부분에 맞춰 일제히 지저귄 일이 신문 기사로 나왔다. 토스카니니는 NBC방송국의 교향악단 결성 제의 당시 이를 별로 탐탁지 않게 생각하였다. 단원들의 대우 문제 때문이었다고 하나 정확한 내막은 아직까지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 설득을 위해 찾아간 지인 초트치노프가 이 신문 기사를 보여주자 마음이 바뀌어 승낙하였다고 한다. (물론 토스카니니의 기분이 아주 좋은 날 술이 몇 잔 들어가고 나서..)
13. 토스카니니는 자코모 푸치니와 친한 사이이기도 했는데, 그 만큼 서로 싸우는 일도 잦았다. 하루는 둘이 엄청 싸워서 아예 말도 걸지 않았고, 편지조차 주고 받지 않았는데 크리스마스가 되었을 즈음에 푸치니가 자신의 친구들에게 빵을 보내다가 그만 토스카니니한테도 그 빵이 보내졌다고 한다. 토스카니니는 그것이 푸치니가 보낸 줄도 모르고 그 빵을 먹어 버렸다. 이에 푸치니는 토스카니니에게 "크리스마스 빵, 잘못 알고 보내버렸음."이라는 전보를 보냈고, 토스카니니는 "크리스마스 빵, 잘못 알고 먹어버렸음."라는 내용으로 답변을 보냈다고 한다. 이후로도 둘은 서로 티격대격 거리면서 좋은 친구가 되었다고 한다. 훗날 푸치니가 남긴 미완성 유작 <투란도트>는 푸치니의 후배인 알파노가 푸치니의 노트를 참고하여 완성시키는데 토스카니니는 초연에서 완성본의 연주를 거부하고 푸치니가 작곡한 마지막 부분인 <류의 죽음>까지만 공연하였다. 그리고 청중들을 향해 "이 오페라는 여기서 끝납니다. 원작자가 사망하여 뒷부분을 완성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고 퇴장해 버렸다.
14. 토스카니니가 젊었을 적에 토스카니니에게 안하무인격으로 대한 노인 지휘자가 있었는데, 베르제 음악제가 열릴 때 노인 지휘자가 그 음악제의 지휘자가 될 줄 알았으나, 토스카니니가 지휘자가 되자 울분을 토하였다. 당황한 그 음악제의 관계자가 마지못해 음악제 끝부분의 가극 지휘를 맡아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노인 지휘자는 그 대가로 "대신 내 지휘료가 토스카니니보다 1리라는 더 많아야 한다."는 조건을 내었다. 음악제가 무사히 끝나고 노인 지휘자가 받은 돈은 1리라였는데, 그 이유가 토스카니니가 음악제에서 무료로 지휘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15. 1949년 12월 12일에 오토리노 레스피기의 교향시인 로마의 축제를 녹음할 당시에는 곡에 내재된 역동성을 빠짐없이 포착하기 위해 사운드 엔지니어들에게 집요한 요구를 하였고, 이에 사운드 엔지니어들은 이 연주를 녹음할 때 '당시 녹음 장비의 모든 한계를 활용했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당시 연주의 녹음은 오늘날 기준으로도 음질이 상당히 좋고, 특히 제4곡의 연주는 상상을 초월하는 명연이라 할 수 있게 되었다.
16. 그의 손으로 이탈리아에서 초연된 작품은 드뷔시의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차이코프스키의 '에프게니 오네긴', 바그너의 '지크프리트'와 '신들의 황혼'이 있다. 그리고 전술한 것처럼 레온카발로의 '팔리아치'와 푸치니의 '라 보엠', '투란도트'는 토스카니니에 의해 세계 초연되었다.
17. 그는 자신이 84세에 타계한 어머니보다 일찍 죽을 거라고 믿다가, 자신이 84세를 넘기자 자신이 베르디와 정확히 같은 나이[29]에 죽을 거라고 믿었다고 한다. 그러나 토스카니니의 예상은 이번에도 빗나갔고, 결국 토스카니니는 만 89세에 사망했다.
4.1. 전설적인 암보력
토스카니니는 초인적인 암보력으로 특히 유명했다. 물론 악보를 외워서 지휘하는 지휘자는 이전, 이후에도 있긴 했지만 토스카니니의 사례가 부각되는 이유는 단순히 악보를 외우는 정도가 아니라 각 악기의 파트를 따로따로 외워서 옮겨 적을 수 있을 정도였기 때문이다.[30] 그의 경이로운 암보력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일화들이 전해진다.1. 일생동안 총 600여곡의 레퍼토리[31]를 모두 암보로 지휘했다.
2. 1956년 크리스마스 무렵에 토스카니니를 방문한 이탈리아의 젊은 피아니스트 마리오 델리 폰티의 말에 따르면 프레스코발디 제자의 작품의 특정 곡에 대해 물어보자 토스카니니가 그 작품의 판본 수와 어느 마디에 오류가 있는지 말했는데, 확인해 보니 토스카니니의 말이 맞았다고 한다.[32]
3. 1942년에 차이코프스키의 오페라 '욜란타'를 지휘한 적이 있는데, 무려 57년만에 연주하게 된 이 곡을 토스카니니는 서곡을 제외하고는 완벽하게 기억해내 지휘했다고 한다.
4. 에르만노 볼프-페라리[33]는 작곡자인 자신도 못 외우는 오페라 '호기심 많은 여인들'을 토스카니니가 외우고 있다며 경탄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5. 기타
Hymn of the Nations(왼쪽이 1부고, 오른쪽이 2부다.) |
-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파시즘을 피해 고향인 이탈리아를 떠나 미국으로 건너간 토스카니니는 이탈리아에서의 연합군의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NBC 교향악단, 웨스트민스터 합창단과 함께 "Hymn of the Nations"라는 연주회를 기획하였다. 이 Hymn of the Nations라는 곡은 주세페 베르디가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의 국가를 혼합해 작곡했던 Inno Delle Nazioni라는 곡인데, 토스카니니는 추가로 미국의 The Star-Spangled Banner와 소련의 인터내셔널가를 추가했다. 이후 냉전 시기에 이 인터내셔널가 부분은 검열되어 삭제되었다가 이후에 다시 발굴되었다.[34] 영상에서 나오는 테너는 얀 피어스.
- 지휘자로 산 기간이 라이벌 지휘자였던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산 기간과 겹친다. 토스카니니가 지휘자로 데뷔한 1886년에 푸르트벵글러가 태어났고, 토스카니니가 지휘 무대에서 은퇴한 1954년에 푸르트벵글러가 죽었기 때문.
- 지휘자로서만 알려진 토스카니니지만, 사실 토스카니니는 파르마 국립 음악원에서 작곡을 전공했지만,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들은 뒤 전문 작곡가가 되는 것을 포기하고 첼로 전공으로 바꿨다고 한다. 그러나 토스카니니는 작곡을 멈추지 않아 지휘자 데뷔 극초창기에는 가곡 몇 곡과 피아노를 위한 자장가를 출판하기도 했다.[35] 그러나 토스카니니는 자신의 작품의 완성도에 항상 만족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작곡을 아예 포기하게 되었고[36], 오늘날에 작곡가 토스카니니는 완전히 잊혀졌다.[37] 이는 오늘날에는 '지휘도 하던 작곡가'로 인식되는 선배와[38] 21세기 들어서 마니아층들 사이에서 작곡가로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는 중인 후배와는 다른 점.
[A] "Arturo Toscanini", nndb.com[A] [3] 이는 라이벌로 여겨지는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와는 무척 대조되는 점이다. 푸르트벵글러는 집안이 매우 유복하여 사비를 들여 가정교육을 받을 정도였다. 이전까지 토스카니니가 받은 정규교육은 동네교회에서 주선하는 학교와 더불어 아버지와 함께 오페라 극장의 공연을 보러 가는 정도였다. 물론 당시 이탈리아에서 오페라 극장은 지금 한국의 영화관과 비슷한 오락거리였다.[4] 대화 도중에 문을 박차고 나갔다고 한다.[5] Alfredo Catalani, 1854~1893, 이탈리아의 오페라 작곡가. 자코모 푸치니가 가장 두려운 적수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재능이 뛰어났다고 하나, 지금은 죽기 1년 전인 1892년에 작곡한 마지막 오페라 '라 왈리'로만 기억된다. 이 오페라는 소프라노 아리아 '나 멀리 떠나리(Ebben? Ne andro lontana)'가 특히 유명하다.[6] 토스카니니는 생전에 카탈라니의 요절을 안타까워했으며, 딸과 아들의 이름(왈리, 월터)를 라 왈리의 주요 인물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한다.[7] Willem Mengelberg, 1871~1951, 네덜란드의 명지휘자. 1895년부터 50년간 로열 콘서트헤보 오케스트라(당시에는 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 오케스트라)의 상임으로 재직하며 콘서트헤보 오케스트라를 오늘날과 같은 1류 오케스트라로 끌어올렸지만, 말년에 나치 협력 의혹 때문에 2차 대전 종전 후 고국에서 추방당하고는 망명지인 스위스에서 쓸쓸하게 사망했다.[8] 토스카니니가 당시 파시스트 정권의 수장인 베니토 무솔리니를 어느 정도로 싫어했냐면, "내가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무솔리니를 죽였을 것이다"라는 말까지 남겼을 정도였다. 참고로 당대에는 많은 이탈리아 국민들이 '파시스트당에 대한 불미스런 소식은 아랫사람들이 일부러 사실을 알리지 않거나 거짓 보고를 했을 뿐이지 무솔리니는 나무랄 데 없는 지도자다'라고 철석같이 믿었을 정도로(...) 무솔리니에 대한 인기가 매우 높았던 시절이었는데, 토스카니니는 그런 시절에 전술한 극언을 남길 정도로 무솔리니를 뼛속 깊이 증오했다.[9] 그것도 모자라 90세부터 10년동안 녹음할 계획도 짰다고 전해진다. 정작 만 나이 기준으로는 90세도 못 채우고 죽었지만.[10] 토스카니니는 이후 1952년 3월 22일에 있던 연주까지(문서 최상단의 연주가 바로 토스카니니의 마지막 텔레비전 중계 실황이다.) 9개의 텔레비전 실황 중계 영상을 추가로 남겼다.[11] 사실 같은 날 오후 5시부터 유진 오먼디(Eugene Ormandy, 1899~1985, 헝가리 출신인 미국의 명지휘자)가 지휘하는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가 텔레비전 중계 연주회를 먼저 연주했기 때문에, 미국 최초 텔레비전 실황 중계를 연주한 지휘자는 토스카니니가 아니라 오먼디가 되었다.[12] 다만 1942년에 있었던 일부 리모델링 덕분에 잔향이 조금 더 추가되었다고 한다.[13] 참고로 일본어 위키피디아발 정보에 따르면, 통상의 홀에서 방송되었을 경우 잔향 때문에 소리가 탁해지는 경향이 있는 것과 달리, 8H 스튜디오의 음향은 당대 라디오로 방송하면 '원만한' 사운드로 변환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8H 스튜디오를 고집했던 것일 수도 있다.[14] 참고로 토스카니니는 이미 이 연주회를 열기 10일 전인 3월 25일에 슬슬 은퇴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그리고 이때 토스카니니의 연세가 87세였기 때문에 이 일이 일어나지 않았어도 이 시기쯤 해서 토스카니니는 자연스럽게 은퇴했을 것이다. 물론 이 사고가 은퇴를 하게 되는 결정타이긴 했지만.[15] 이 날 연주회는 통째로 녹음되어서 유튜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16] 1949년 3월 26일과 4월 2일에 있었던 텔레비전 중계 실황 녹음이 원본이었다.[17] 당시 공연에는 이승만 대통령 내외를 포함한 약 13,000명의 청중들이 관람했다.[18] 실제로 카라얀은 젊은 시절에 토스카니니의 리허설을 몰래 듣기 위해 리허설장 오르간 뒤에 숨어서 그의 리허설 장면을 보았는데 카라얀이 말년에 한 인터뷰에서 "토스카니니가 한번은 단원들이 말을 듣지 않아 문으로 나가려고 했는데 2개의 문이 다 잠겨 있어서 수치심에 얼굴을 가리던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라고 회고한 적이 있다.[19] 그러나 사실 다카포 양식의 아리아에서는 악보에서 변화를 주어 부르는 것이 상식이기 때문에 이 말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엔 곤란한 부분이다.[20] 다만 꼭 그런 것도 아닌 것이, 볼레로의 경우에는 원작자가 요구한 템포를 대놓고 무시한 경우도 있으니 케바케인 것으로 보인다.[21] 정확히는 브루크너는 교향곡 4번과 교향곡 7번만, 지휘했고 말러는 단 한 곡도 지휘하지 않았다.[22] 참고로 토스카니니는 지휘자 말러는 호평한 것과 달리 작곡가 말러는 하찮다고 평가했다.[23] 랩소디 인 블루, 피아노 협주곡 F장조, 파리의 미국인. 세 곡 다 녹음이 남아 있다.[24] 실제로 푸르트벵글러는 라이벌이라고 생각했다.[25] 그도 푸르트벵글러보다 10세 연하다.(...)[26] 전술한 것처럼 당시 공연이 토스카니니의 프로 지휘자 데뷔 공연이었다.[27] Hugo Burghauser, 1896~1982,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바순 주자로 유명했고 1933~1938년에 이 오케스트라의 의장을 지내기도 했다. 여담으로 부르크하우저는 정확성을 중시하는 토스카니니를 숭배했고 감성을 중시하는 푸르트벵글러를 대놓고 싫어했다.[28] 그 곡이 베토벤의 교향곡 7번이었다고 한다.[29] 87세 3개월 17일. 정확한 날짜는 1954년 7월 12일.[30] 이게 가능한 이유는 암기력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악보를 자기가 만족할 때까지 지독할 정도로 반복해서 연구했기 때문.[31] 정확히는 118편의 오페라와 480편의 콘서트용 작품들을 레퍼토리로 삼았다.[32] 참고로 그 당시 토스카니니의 나이는 89살이었고, 그로부터 3주 뒤에 토스카니니는 사망하게 된다.[33] Ermanno Wolf-Ferrari, 1876~1948, 이탈리아의 작곡가[34] 위 파트 2 영상의 7분 46초부터 인터내셔널가가 나오는데, 검열되었던 부분을 편집해서 넣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35] 현존하는 것으로 알려진 토스카니니가 작곡한 음악은 총 26곡이며, 그 중 태반이 가곡이라고 한다.[36] 아마 마지막 첼로 공개 연주회를 열던 1890년 무렵에 작곡을 그만뒀을 것으로 추정된다.[37] 심지어 영어 위키백과에는 토스카니니가 작곡을 한 적이 있다는 언급조차 없다.[38] 사실 말러는 지휘 녹음을 남긴 적이 없기에 후대의 평가에 있어서 다소 불리한 감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