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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다 노부나가의 초상화.[1] | |||
<colbgcolor=#BD0029><colcolor=#DCA600> 출생 | 1534년 6월 23일 | ||
오와리국 아이치군 쇼바타성 (현 아이치현 이나자와시) | |||
사망 | 1582년 6월 21일 (향년 47세) | ||
야마시로국 가도노군 교토 혼노지 (현 교토부 교토시 나카교구) | |||
재임기간 | 제4대 오다 단조노추 당주 | ||
1552년 3월 27일 ~ 1575년 11월 28일 | |||
우대신 | |||
1577년 11월 20일 ~ 1578년 4월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BD0029><colcolor=#DCA600> 본명 |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 |
아명 | 깃보시(吉法師) | ||
통칭 | 사부로(三郎) | ||
신체 | 170cm | ||
종교 | 무종교(무신론)[2] | ||
가문 | 오다 가문 | ||
부모 | 아버지 오다 노부히데 어머니 도타고젠 | ||
형제자매 | 형 오다 노부히로 동생 오다 노부유키 동생 오다 나가마스 동생 오이치노카타 외 9명 | ||
배우자 | 정실 노히메 측실 이코마 키츠노 외 10명 | ||
자녀 | 장남 오다 노부타다 차남 오다 노부카츠 삼남 오다 노부타카 외 8남 9녀 | }}}}}}}}} |
[clearfix]
1. 개요
일본 센고쿠 시대의 다이묘(大名), 오와리 오다 단주노초 가문의 당주, 우대신 겸 우근위대장, 그리고 천하인(天下人). 무로마치 막부를 종결시키고 센고쿠 시대의 양상을 완전히 변화시켰기에 이 인물을 빼고 센고쿠 시대의 역사를 논하는 것이 힘들 정도로 중요한 인물이다. 일본이 중세에서 근세로 넘어가는 한복판에 서 있었던 사람이며, 당대에 많은 파격을 불러왔지만, 일본 통일을 눈 앞에 두었을 때 혼노지의 변으로 인해 비극적으로 죽은 점 등으로 인해 후대의 작가들에게 매우 사랑받고 있으며 대중적인 인지도와 인기가 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주군이기도 했다.90년대 이전[3]에 청년기를 보낸 한국인들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풍신수길,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덕천가강인 걸 대다수가 알고 있는데 비해, 오다 노부나가가 직전신장인 건 거의 다 모른다. 아무래도 조선왕조실록에 안 나온 영향이 큰 듯. 그나마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라는 게임이 신장의 야망이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진 정도이다.[4]
2. 가문 배경
[ruby(織, ruby=お)][ruby(田, ruby=だ)][ruby(氏, ruby=し)] 오다씨 | |
<colbgcolor=#ffd700> 오다 가문의 가몬 | |
오다 외꽃 織田瓜 | |
본성 | 간무 헤이시(桓武平氏) 스케모리류(資盛流)(자칭) 후지와라 북가(藤原北家) 토시히토류(利仁流)? 인베씨(忌部氏)? |
가조 | 타이라노 치카자네(平親真) |
종별 | 무가(武家) 화족(華族)(자작) |
출신지 | 에치젠국 오다 장원 (越前国織田庄) |
근거지 | 오와리국 키요스 성 미노국 기후 성 오미국 아즈치 성 |
지류 분가 | 츠다씨(津田氏) |
2.1. 선조
가족 관계 | 이름 | 생년 | 몰년 |
6대조 | 오다 히사나가 (織田久長) | 불명 | 불명 |
5대조 | 오다 토시사다 (織田敏定) | 1452년 | 1495년 |
고조부 | 오다 토시노부 (織田敏信) | 1466년 | 1517년 |
증조부 | 오다 요시노부 (織田良信) | 불명 | 불명 |
조부 | 오다 노부사다 (織田信定) | 불명 | 1538년 |
아버지 | 오다 노부히데 (織田信秀) | 1511년 | 1551년 4월 8일 |
2.2. 가족과의 관계
- 부모
관계 | 이름 | 생년 | 몰년 |
아버지 | 오다 노부히데 (織田信秀) | 1511년 | 1551년 4월 8일 |
어머니 | 도타고젠[5] (土田御前) | 1511년 | 1594년 |
- 부인 및 측실
부인 | 이름 | 생년 | 몰년 | 자녀 |
정실 | 노히메 (濃姫) | 1535년 | 불명 | 없음 |
측실 | 이코마 키츠노 (生駒吉乃) | 1528년 | 1566년 5월 31일 | 오다 노부타다(1557 ~ 1582) 오다 노부카츠(1558 ~ 1630) 도쿠히메(1559 ~ 1636) |
- 자녀
자녀 | 이름 | 생년월일 | 사망일 | 비고 |
서장자 | 오다 노부마사(織田信正) (무라이 시게카츠, 村井重勝) | 1554년 6월 4일 | 1647년 12월 21일 | [8] |
장남 | 오다 노부타다(織田信忠) | 1557년 | 1582년 6월 21일 | [9] |
차남 | 오다 노부카츠(織田信雄) | 1558년 | 1630년 6월 10일 | [10] |
3남 | 오다 노부타카(織田信孝) (간베 노부타카, 神戸信孝) | 1558년 4월 22일 | 1583년 | [11] |
4남 | 오다 히데카츠(織田秀勝) (하시바 히데카츠, 羽柴秀勝) | 1568년 | 1586년 1월 29일 | 하시바 집안에 양자로 보내짐 |
5남 | 오다 카츠나가(織田勝長) | 1569년 | 1582년 6월 21일 | 혼노지의 변에서 전사 |
6남 | 오다 노부히데(織田信秀)[12] | 불명 | 불명 | |
7남 | 오다 노부요시(織田信吉) | 1573년 | 1615년 5월 15일 | |
8남 | 오다 노부사다(織田信貞) | 1574년 | 1624년 7월 21일 | |
9남 | 오다 노부타카(織田信高)[13] | 1576년 | 1603년 1월 23일 | |
10남 | 오다 노부요시(織田信好) | 불명 | 1609년 8월 13일 | |
11남 | 오다 나가츠구(織田長次) | 불명 | 1600년 10월 21일 | |
장녀 | 도쿠히메(徳姫) | 1559년 11월 11일 | 1636년 2월 16일 | 마츠다이라 노부야스의 정실 |
차녀 | 소우오인(相応院) | 1561년 | 1641년 6월 17일 | 가모 우지사토의 정실 |
3녀 | 히데코(秀子) | 불명 | 1632년 5월 30일 | 츠츠이 사다츠구의 정실 |
4녀 | 에이히메(永姫) | 1574년 | 1623년 3월 24일 | 마에다 토시나가의 정실 |
5녀 | 호우온인(報恩院) | 1574년 | 1653년 9월 6일 | 니와 나가시게의 정실 |
6녀 | 오후리(於振) | 불명 | 1643년 5월 26일 | 미즈노 타다타네와 결혼 사지 카즈나리와 재혼 |
7녀 | 겐코인(源光院) | 불명 | 1600년 11월 13일 | 마데노코지 아츠후사의 계실 |
8녀 | 산노마루도노(三の丸殿) | 불명 | 1603년 3월 17일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측실 니죠 아키자네의 계실 |
9녀 | 게츠묘인(月明院) | 불명 | 1608년 9월 15일 | 도쿠다이지 사네히사의 정실 |
- 형제자매[14]
- 형 오다 노부히로(? ~ 1574)
통칭 사부로고로. 오다 노부나가의 형이지만 서자인데다, 어머니의 신분까지 낮아 아버지 노부히데 사후 가독 다툼에 끼지는 못했다. 제3차 안죠성 전투에서 이마가와군에 패해 포로가 되었다. 일시 사이토 요시타츠와 손잡고 동생인 노부나가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 당한 후, 동생의 부하가 되었다. 이세 나가지마 전투에서 전사한다. - 남동생 오다 노부유키
통칭 간주로. 형인 노부나가와는 아버지 노부히데 사후 가독 자리를 두고 다투었다. 예절에 밝아서 가신들에게 신망을 얻었지만 능력 면에서는 형에게 미치지 못해서 밀려났고 이후 제거당했다. - 남동생 오다 노부카네(1548[15] ~ 1614)
통칭 산쥬로. 형 노부나가가 혼노지의 변으로 인해 사망하자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히데요리를 섬긴다. 세키가하라 전투에 서군으로 참전했으나,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용서받았다. 오사카 겨울의 진 때, 오사카 성 안에서 급사한다. - 남동생 오다 나가마스
- 여동생 오이치
정략결혼을 위해 아자이 나가마사와 결혼했다. 이후 아자이 가(家)가 아시카가 쇼군 가(家)와 손을 잡으면서 오다 가(家)와 결별하는 바람에 오다 가로 돌아왔다. 이후 오다 가의 가신인 시바타 카츠이에와 재혼했지만 시바타가 하시바 히데요시와 다투다 사망할 때 같이 자살했다. 그녀의 딸이 바로 히데요시의 후처인 요도도노이다.
3. 생애
자세한 내용은 오다 노부나가/생애 문서 참고하십시오.4. 평가
일본사의 흐름을 바꿔놓았으며 현대 일본인들이 매우 존경하는 인물 중 1명이자[16] 사실상 센고쿠 시대 이야기의 주인공으로서 많은 매체에 등장하다 보니 세계적으로 인지도와 인기가 상당히 높다.그가 센고쿠 시대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건 오다 노부나가가 그 시대의 가장 전형적인 센고쿠 다이묘였기 때문이다. 아버지 노부히데는 오다 가문을 통일했지만 방계였기 때문에 집안에 적을 많이 만들어둔 상태로 죽었고 가독 계승 당시 노부나가는 인망이 없었다. 그런 불리한 조건에서 오다라는 약소 세력을 전국 통일 목전에까지 이끌어낸 대단한 성과를 이루어냈다. 이렇게 지방의 한 소규모 다이묘에서, 전국의 다른 좋은 땅 물려받은[17] 타고난 다이묘들을 다 제치고 천하인의 자리에까지 오른 인물이다보니 그 능력은 대단히 비범하게 평가된다.
주변이 말 그대로 적으로 둘러싸인 오와리에서[18], 심지어 원래 오와리를 통치하던 가문의 직계나 하다못해 방계도 아닌, 하극상을 일으키고 땅을 빼앗은 신하 가문의 방계였던 만큼 애초에 오다 가문 자체가 입지가 썩 좋은 편이 아니었기에 내부적으로도 그리 통일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객관적으로 야전 지휘관으로서의 능력은 당대 최고로 보기엔 어려웠다. 노부나가 본인이 오케하자마 전투등에서 직접 최전선에 서서 적들을 참살하기도 했고, 오다 군은 뛰어난 진지 구축 능력을 앞세워 상당한 방어 능력을 보이긴 했지만, 오다 본인의 지휘관으로서의 역량은 현대 역사학자들에 들어선 다케다 신겐이나 우에스기 겐신 등 당대 최고의 지휘관과 비교하면 확실히 끗발이 아래라고 평가받고 있고, 노부나가 공기 및 갑양군감같은 역사적 사료에서도 본인이 직접 친정했음에도 (주로 다케다 군에게) 패퇴한 적이 다수 있다는 기록도 있다. 심지어 오다 군의 병졸 수준 자체가 평균적으로 다케다나 호죠, 도쿠가와 가의 병졸에 비해 훨씬 약하다는 기술들도 많다.
그와는 별개로 그의 전략안은 기본적으로 신중하고 피해를 최소화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이는 다케다 가문을 상대하는 것에서 두드러지는데, 다케다 신겐 생전 무적이라 불리던 신겐의 기병대를 상대함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솔직히 받아들이고 신겐 생전엔 성급히 맞서싸우지 않고 외교적 방책만으로 버티고자 했고, 버티고 버티다가 맹자인 신겐이 죽고 다케다 카츠요리가 뒤를 계승하자마자 나가시노 전투를 일으키고 대승을 거두었다. 이 시점에서 사실상 다케다 가문보다 우위에 섰음에도 일부러 다케다 가문을 방치했고, 실제로 이후 다케다 가문은 경제적, 외교적 실책을 연달아 저질러 사실상 자멸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나가시노 전투 종전 후 7년만에 다케다를 완벽히 공략할 수 있는 완벽한 판도를 짜내는데 성공했다.[19][20]
노부나가의 진정한 장점은 전술보다는 전략, 야전보다는 정치력에 있다.[21]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외국과의 무역, 라쿠이치라쿠자(樂市樂座)[22], 다른 다이묘들에겐 쓸모없다 여겨졌으나 총포를 독점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카이를 독점한것, 쇼군을 이용한 외교전 등 그의 다채로운 전략은 괄목할 만하다. 이러한 전략이 비록 노부나가만의 고유한 것은 아니지만[23], 하나의 세력을 이끄는 총 책임자로서의 능력은 확실히 뛰어났다. 오다 군이 꽤 큰 손실을 입고 패전한 적은 가끔 있지만, 항상 적보다 많은 병사를 이끌 수 있었다는 것은 전략적/정치적인 능력이 전술적인 실패를 언제나 메꿀 수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노부나가가 가독을 상속받았을 당시의 상황은 아버지 노부히데의 실패와 본인의 행실로 인해 가문 내의 분열에 더해 외부의 적들이 오와리를 노리고 있는 등 최악에 가까웠기 때문에 이런 불리한 상황에 묻히는 감도 있지만, 엄밀히 따져보면 오다 가문의 입지나 지정학적인 위치 등은 상당히 유리한 편이었다. 오와리의 발전한 상업은 아버지 노부히데 대에 이루어진 성과를 물려받은 부분도 부정할 수 없고[24] 미노를 점령한 뒤 노부나가는 노비 평야로 알려진 미노와 오와리의 매우 비옥한 평지를 모두 손에 넣을 수 있었으며[25], 오와리와 미노는 위치상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기나이와 교토, 그리고 상업의 중심지인 사카이로 뻗어나가기에 좋았기 때문이다. 이런 유리한 조건들이 노부나가의 능력을 깎아먹는 것은 아니지만 천하통일의 기반을 마련하는 중요한 재산이 되었음은 분명하다.
노부나가의 용인술은 매우 파격적인 편이다. 잔혹하고 용서가 없다는 이미지와는 달리,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배신자를 용서한 적도 많다. 다만 근무에 태만하고 별로 쓸모가 없는 인물이라 생각되면 아무리 중신이라고 해도 가차없이 내쳐버렸다. 굉장히 실리적인 행동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어떻게 보면 부하들 입장에선 언제 내쳐질지 몰라 불안하기도 했을 것이다. 전국시대의 많은 다이묘 가문은 고평가되는 다이묘들조차도 대부분 겉은 급성장하면서 내실은 그에 걸맞은 체제를 미처 다지지 못한 경우가 많았고, 덩치는 전국구급이지만 지방 다이묘의 가신단 수준의 약한 단결력을 가져서 뒤늦게 내분이나 가신단의 이탈, 반란 등의 사태로 인해 발목을 잡히는 사례가 많았는데, 노부나가처럼 가신을 수하의 독립된 영주로 취급하지 않고 단순히 노부나가라는 군주의 신하처럼 다루는 중앙집권적인 가신단을 구축한 사례는 거의 없었기에 매우 특이한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루이스 프로이스는 노부나가의 행동이나 정책을 두고 유럽의 절대군주처럼 행동했다고 특기했고, 이것은 분명 다른 다이묘들과 차별화되는 부분이다. 노부나가의 이러한 선구적인 용인술은 어쩔 수 없이 봉건영주들의 권한을 축소하는 것일 수밖에 없었고, 실제로 아라키 무라시게, 마츠나가 히사히데 등의 반란처럼 많은 도전에 직면했음은 물론, 결국에 가서는 아케치 미츠히데가 혼노지의 변을 일으킨 원인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일본 역사를 다루는 Samurai Archive의 팟캐스트에선 이런 노부나가를 두고 매니저와 중간 관리자에겐 최악의 보스, 그 밑의 평사원이나 알바들에겐 더없이 좋은 보스 타입이라고 얘기했다.
또한 노부나가는 매우 근면한 편이었다. 그 자신이 워낙 건강한 체질[26]이어서 가능했겠지만, 가신들 중에서도 노부나가의 근면함에 따라올 수 있는 것은 하시바 히데요시[27]와 아케치 미츠히데[28] 정도였다. 어느 정도 근면했느냐 하면, 타 가문에 보내는 의례품들을 스스로 일일이 검사했을 정도. 노부나가의 지위를 생각하면 이는 근면한 정도가 아니라 깐깐한 수준이었다.
거기에 더해 노부나가는 자신의 근면함을 기준으로 하여, 부하가 조금이라도 태만하다 싶으면 곧장 벌을 내렸다. 더욱이 짬밥이 있는 노신이라고 해서 봐주는 법이 없었기에[29], 도요토미 히데요시 같은 근면한 자들은 오히려 출세할 기회가 많아 좋았겠지만, 그렇지 않은 대부분[30]의 사람들은 노부나가를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다. 현대의 한 연구에서 오히려 현대인보다 노동시간이 길지 않았다고 할 정도이던 당시에 이런 일중독자가 다이묘였으니 이 점도 반감을 살 하나의 요소였는지 모른다. 게다가 그 벌은 당시 기준으로나 오늘날의 기준으로나 절대로 가벼운 편이 아니었다. 이는 아직 봉건주의 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일본의 다이묘나 사무라이들에게 상당히 이질적이었고, 당시 기준으로 '잔혹하다'라는 평을 듣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오늘날은 더이상 봉건사회가 아니므로 비유하기 어렵지만, 굳이 예를 들자면, 가맹 점주를 최근 실적이 안나온다면서 직영점 점주처럼 내쫒는 프랜차이즈 사장 + 뭔가 수틀리면 사정설명도 없이 즉석에서 해당 직원에게 모욕을 주고 내쫒아버리는 스티브 잡스의 이미지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종합해서, 뛰어난 전략 능력과 결코 태만을 용서치 않는 근면함 등이 노부나가의 장점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에는 노부나가의 이러한 장점이 기업 경영자의 마인드에 적합하다는 주장도 있다. 물론 21세기의 기업 경영을 전국시대 전쟁과 완전히 동일시할 수는 없지만, 일본에도 "노부나가의 경영 비결!" 같은 책들은 굉장히 흔하고, 마케팅의 일환이긴 하지만 삼성전자 사장이 임원들에게 <대망>을 읽으라고 권했다고 할 정도로 혁신이 중요한 현대에 이 혁신적이었던 남자의 조직 경영법은 주목받고 있다. 특히 일본의 비효율적인 거대 조직이나 복지부동의 관료 조직을 비판할 때 오래된 전통이라도 비효율적이라면 가차없이 개혁하던 노부나가의 이야기는 빠지지 않는다. 조직 몸집 줄이기가 중요한 불황이라서 후다이(譜代)[31]도 서슴지 않고 정리해고를 했던 남자의 경영법이 주목받는지도 모른다. 다만 일본어 위키백과에서는 혁신자라는 이미지에 대해서도 재검토가 이루어지는 추세라고 서술되어 있다.
5. 여담
- 1584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주문으로 카노 에이토쿠가 그린 오다 노부나가의 초상화가 존재한다. 이 초상화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오다 노부나가의 장례식을 치른 다이도쿠지에 소장하고 있다. 2009년 교토 국립 박물관은 초상화의 중수작업 도중 초상화 뒷면에서 크게 수정된 흔적을 발견한다. 녹색과 갈색의 화려한 코소데는 갈색의 수수한 코소데로 바뀌었고, 큰칼과 작은칼 2자루를 패용했는데, 작은칼 1자루로 바뀌었고, 부채의 크기도 줄어들었고, 표정도 미간에 주름을 넣어 음침하게 바뀌었다. 이렇게 오다 노부나가의 초상화가 바뀐 이유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그의 위엄을 깎아버리기 위해 이렇게 그리도록 카노 에이토쿠에게 명령을 내렸다고 추정된다. 또한 카노는 초상화에 추모하는 내용을 적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지만, 히데요시가 거부해 이 그림에는 화찬이 없다.
- 잘 안 쓰이던 조총에 눈독을 들인 첫 다이묘처럼 언급되고 3단 철포설이 널리 퍼져 있는데 노부나가 이전부터 이미 조총은 전장의 주력 무기 중 하나였다. 그러나 노부나가는 엄청난 경제력, 지역적 유리함, 쇼군을 이용한 정치적 술수로 사카이 지방을 지배하여 화약을 독점하는 것을 바탕으로 수천 정에 이르는 철포 부대를 운용했기에 여타 다이묘들과 비교가 되지 않는 압도적 화력을 구사할 수 있었다. 3단 철포설은 오제 호안이 쓴 <신장기>[32]에 철포를 교대로 쏘게 했다는 문장이 나온 이후에 널리 받아들여졌다. 이를 메이지 시대 <일본전사>를 편찬할 때 그대로 수록하였으며 이후 영화나 소설 등을 통해 통설처럼 굳어진 것이다. 노부나가의 부하였던 오타 규이치가 쓴 <신장공기>[33]에는 3단 철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으며 중국과 조선의 기록을 보아도 연속 사격술은 통상적인 전법으로서 활용되었던 것은 분명하나 그것이 노부나가 시기부터 사용된 전법이었는지는 자세한 검증이 필요할 것이다. 또한 노부나가가 3단 철포술을 사용했다고 해도 그것으로 노부나가의 창의력을 평가할 필요는 없다는 해석도 있다. 철포 이전의 투사 무기인 활, 쇠뇌, 투석구 역시 발사 후 다음 발사를 준비하는 간격이 있었고 이 간격을 극복하기 위해 인원을 교대해서 연속 사격하는 방법이 존재한지 오래였다. 노부나가가 아니더라도 철포의 교대 사격이란 전술은 누구나 떠올릴 수 있는 보편적인 방법이라는 것. 혹은 무역을 통해 접촉한 유럽인들에게 따로 교대 사격 전술을 전수받았다는 주장도 있다.
- 잔혹무도하고 옛 세력을 용서하지 않는다는 민간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자신의 명목상 주인 가문이였던 시바 가문을 멸족시키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바 요시카네를 시바 가문의 당주로 후원해주고 양육해준 것은 물론 오다 가문에서 그가 떠난 뒤에도 그의 딸을 자신의 동생 오다 노부카네와 혼인시켜 오다 일족으로 삼는 행동을 했을 지경이다. 호리 신(堀新) 씨는 '하극상이란 개념을 회피하기 위한 행위'라고 평할 정도. 이를 보면 노부나가 또한 그저 인간의 궤를 벗어난 파천황적 존재가 아닌 당대의 정치적 요소를 하나하나 따져가며 열도를 지배한 위정자임을 증명하는 대표적인 사적이라 할 수 있다.
-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옹립한 노부나가가 1달만에 간사이에 영향력을 뻗치는 데 성공했기에 당시 노부나가는 누구보다 강한 힘을 가진 것은 물론이고 기나이(간사이)의 세력들은 참된 인물이 없는 허수아비들이라며 깎아내리는 악평 일변도를 달렸었다. 하지만 연구가 진행됨에 따라 각 세력들의 당시 형편이 어느 정도 밝혀졌기에 노부나가의 진격을 오롯이 노부나가의 공으로 평가하기보단 각 세력들의 정치 상황과 그것을 이용하여 포위망을 구성해 단번에 들이닥친 노부나가의 수완을 중심으로 논하는 일이 많아졌다. 예컨대 미요시 가문을 노부나가의 세력과 연대한 마츠나가 히사히데나 미요시 요시츠구 또한 기나이를 여전히 전전하는 상태였고 모리 가문의 영지에 군사를 냈지만 확실한 우세를 가져가지 못한채 그들을 물리친 호소카와 미치다타나 무라카미 타케요시 등이 노부나가 세력과 확고한 관계를 맺고 있으니 전선이 무너지기도 하여 본국 시코쿠로 철퇴했다는 식.
- 본래 노부나가는 미요시 나가하루나 소고 마사야스 등의 제거를 우선 목표로 하여 쵸소카베 모토치카를 시작으로하는 시코쿠 국분 계획을 가지고 있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수많은 변경이 가해지게 되었고 결국 아와와 사누키는 미요시 야스나가와 오다 노부타카 부자가 영유하는 계획으로 변경되었다. 구세력인 미요시 가문의 중신에 자신의 아들이라는 평소 생각되는 노부나가의 이미지와 비교해 고리타분해보이는 정책이지만 노부나가는 이미 자신의 친족들을 간사이 주변에 배치해나가는 상황이었다. 특히 5남 오다 히데카츠는 주고쿠와 세토내해를 전전하는 하시바 히데요시에게 양자로 붙여주었고 유모의 아들이었던 이케다 츠네오키를 셋츠 아마가사키 성, 오다 노부즈미를 셋츠 오사카 성, 오다 노부하루를 이즈미 키시와다 성에 배치하는 등 간사이의 통치에 있어선 혈연주의라고 불릴 수 있을 정도의 정책을 펼쳤다.[34] 반면 노부나가가 모토치카와 단교한 시점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확답이 나오지 못하는 상황인데 시코쿠에 관련된 인물들에게 남아있는 사료들이 적은 편인데다 텐쇼 연간에 쓰여진 1차 사료들 중에 연호가 기입되지 않은 것이 상당하기 때문이다.[35] 노부나가가 모토치카와의 단교를 결정하게 된 요인 또한 명확하지 않은데 종래 명확한 원인으로써 취급되던 요인은 오다 가신 내부의 항쟁이었다. 자신의 가신이 모토치카와 혈연 관계에 있으며 모토치카와의 교섭에 이름을 많이 비추는 아케치 미츠히데와 야스나가에게 자신의 조카를 양자로 주어 새롭게 모토치카의 교섭원으로 발탁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서로의 우위를 놓고 다투어 노부나가가 히데요시의 손을 들어주었다는 것이 주요 골자다. 이 2명은 가까운 시일 야마자키 전투 등을 통해 극단적인 대립 상태에 있었다는 것이 확인 가능하므로 보편적인 시각으로써 일반인들에게도 퍼지게 되었다. 반면 아마노 타다유키 박사는 노부나가에게 적대하고 있던 미요시 가문에게도 한 자리를 내어 반 노부나가 세력에 의해 모토치카의 아와의 통치가 안정되지 않는 것을 확인한 노부나가가 야스나가를 새롭게 시코쿠 동부로 파견하여 하시바-우키타-미요시 야스나가-쵸소카베로 구성된 모리-미요시 마사야스-코노 포위망을 구성했지만 야스나가 또한 시코쿠를 안정시키지 못한데다 갑자기 간섭을 받은 모토치카는 히데요시에게 노부나가의 진의를 대놓고 물어볼 정도로 노부나가를 의심하기 시작했기에 양자의 관계가 파탄에 이르렀다고도 평하고 있다. 이로써 노부나가가 구상했던 시코쿠 통치 계획은 전부 실패했다는 평가는 덤.[36] 노부나가가 모토치카를 왜 중히 생각했는지 또한 명확히 밝혀진 것이 없기 때문에 타다유키 박사는 모토치카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 노부나가의 시코쿠 정책이라는 것에 회의감을 표하며 오로지 모토치카만을 대우해주었단 것도 사실이 아니었다 주장한다.[37]
- 오다 정권과 덴노의 관계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여러 연구가 진행되었고 그만큼 많은 논쟁이 있어왔다. 노부나가와 덴노의 관계에 대한 학설은 크게 보면 2가지로 나뉜다고 할 수 있는데 노부나가 존왕설과 덴노 권위 압도설이다. 노부나가가 덴노를 옹립하고 그 권위를 상승시켰다는 것에 주목하여 노부나가를 전국시대의 혼란한 사회 속에 약화된 덴노의 권위를 되살린 존왕지사로 평가하는 덴노 존왕설은 전통적인 노부나가의 덴노 대우에 대한 학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연구들에서는 기존의 막부 세력들을 덴노 반대파 또는 덴노에 대한 억압을 행한 자들로 규정하고 노부나가와 그 후계자인 히데요시를 덴노를 존중한 존왕파로 규정하였다. 이러한 해석은 메이지 유신 이후 존왕을 하지 않았다고 평가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에도 막부에 대한 폄하 작업이 진행되며 등장해 발전되었다. 한편 덴노 권위 압도설의 경우 오다 정권의 덴노 및 조정과의 단절성 또는 압도성을 강조하였고 그를 통하여 오다 정권의 근대적 색채를 강조하였다. 대표적으로 아사오 나오히로와 같은 학자들은 노부나가에 의한 무가신격화를 주장하며 노부나가는 덴노의 권위를 초월하는 종교적 권위를 구축해 지상의 절대자로서 군림하려 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설에 따르면 노부나가는 존왕설의 주장과 같은 존왕주의자가 아닌 덴노의 권위를 극히 위태롭게 만든 찬탈 시도자였다. 최근 진행된 연구들에서는 위와 같은 기본 구도에 더해 새로운 논의 주제가 추가되어 더욱 복잡한 논의가 전개되었다. 그 새로운 논의 주제는 전국시대의 덴노 권위, 덴노와 조정의 능동성 문제였다. 전국시대에 덴노가 완전히 무력한 존재였는가, 덴노의 권위는 정말로 전국시대에 상실된 것이었는가에 대한 새로운 논의는 노부나가를 중심으로 하여 그가 덴노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했는가를 중점적으로 연구하던 기존의 연구와는 다른 새로운 방면의 연구가 이루어지게 하였다. 전국시대의 덴노에 대한 기존의 학설과 가장 이질적인 학설은 덴노 권위 부상설이라고 할 수 있다. 와키타 하루코, 이마타니 아키라 등의 학자들은 전국시대에 덴노와 조정의 권위가 약화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다이묘의 영지 지배 정당성을 부여해 주는 전통적인 권위로서 작용하며 증대되었다는 덴노 권위 부상설을 주장하였다. 이들은 쇼군과 막부가 유명무실해진 상황 속에서 이러한 설에 따른다면 노부나가는 전국시대 동안 증대된 덴노의 권위를 존중하였고 심지어는 덴노의 권위에 제압당하기도 하였다. 아키라의 경우 이러한 시각에 따라 오기마치 덴노를 노부나가의 권위에 대한 도전을 제압한 노련하며 탁월한 정치가라고 평가하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론 역시 존재하는데 가장 핵심적인 반론은 "그렇게 덴노가 전국시대에 권위있는 존재였으면 어째서 덴노 스스로 천하통일을 하지 못한 것인가?"이다. 이러한 반론에 의거하여 학자 이케 스스무는 노부나가의 상락 이전 경제적으로 몰락한 조정이 노부나가에게 의존하였던 상황에 집중하였다. 그는 상락 이후 노부나가가 덴노를 지원하면서 그에게 기대한 것은 전통적인 신의 아이로서의 전통, 종교적 업무 또는 개원이나 관위 서임과 같은 것뿐이며 그러한 업무를 덴노에게 행하게 하여 덴노와 조정의 권위를 이용하였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호리 신은 공무결합왕권을 제시하며 전근대 무가 정권과 조정의 적대성은 허구적인 것이라고 주장하였으며 그 연장으로서 노부나가와 덴노의 상호 의존, 상호 결합성을 강조하였다. 이 설에 따르면 오다 정권과 덴노 조정의 관계는 한쪽이 한쪽을 압도하는 적대적 관계가 아닌 상호 이익을 위한 상호 결합이었다. 덴노 가의 빈약한 상황, 권위가 필요하였던 노부나가의 상황 모두를 살펴보면 양자의 사이는 적대가 될 수 없었다는 것이 핵심적인 주장이다. 현재는 아키라의 덴노 권위 부상, 노부나가의 권위 압도설이 위축되고 공무결합왕권과 같은 양자 협조설이 학계에서 우위를 얻어가고 있다."그는 중간 정도 키에 가냘픈 체구였으며, 수염은 적고 목소리는 카랑카랑하였다. 전투를 매우 좋아하여 군사 훈련에 힘썼으며, 명예심이 충만하였고 정의감이 투철하였다. 모욕을 당하면 반드시 응징하였으나 경우에 따라서는 인정미와 자비심을 보이기도 하였다. 잠자는 시간이 짧아 아침 일찍 일어났으며 식탐은 없었다. 결심한 바를 전혀 드러내지 않았으며 전술을 쓸 때는 매우 노련하였다. 성질이 매우 급하여 격앙된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지만 평소에는 그렇지 않았다. 가신의 충언을 따르지 않고 거의 무시하였으며 가신들은 그를 매우 두려워하였다. 술을 마시지 않았고 식사를 절제하였으며 사람을 다루는 데 매우 솔직하였고 자신의 견해를 주장할 때는 오만하였다. 일본의 모든 왕후(王侯)[38]를 경멸하였으며 마치 부하를 대하듯이 그들을 내려 보며 말을 하였다. 또한 사람들은 절대 군주를 대하듯이 그에게 복종하였다. 그는 전운이 자신에게 불리할 때도 태연하였으며 인내심이 강하였다. 그는 이해력이 좋았으며 명석한 판단력을 가졌다. 신과 불에 대한 일체의 예배, 숭경, 모든 이교도적 점복과 미신적 관습을 경멸하였다. 당초에는 법화종에 속한 것 같은 태도를 보였지만 높은 관위를 받은 후에는 오만한 태도로 모든 불상을 멸시하였다. 하지만 약간은 선종의 견해를 쫓아 영혼의 불멸, 내세의 상벌 등은 없다고 여겼다. 자신의 저택에 있을 때는 매우 청결하였으며 모든 지시에 양심적이었다. 이야기할 때에 꾸물대거나 길게 전제를 다는 것을 싫어하였고 매우 비천한 자들과도 격의 없이 이야기하였다. 그가 각별히 좋아한 것은 유명한 차 도구, 좋은 말, 도검, 매 사냥이었고, 신분이 높건 낮건 상관없이 자기 앞에서 나체로 씨름(스모)을 하게 하는 것을 매우 즐겼다. 누구든 무기를 휴대하고 그와 대면할 수는 없었다. 다소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곤란한 일에 착수할 때는 매우 대담무쌍하여 사람들은 그의 말에 모두 복종하였다."[39]
- 예수회 선교사로 <일본사(日本史)>를 저술해 당시 다이묘들의 기록을 남긴 루이스 프로이스가 남긴 기록이 있는데 상당히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성격이 급하고 거만하다고는 하나 후대에 알려진 잔혹하다는 이미지들은 창작된 것이 일부 섞여있기도 하다. 불교 세력에 대한 탄압이 당시 사회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불교도들을 자극해서 잔혹한 노부나가의 이미지가 유포되었고 후일의 에도 시대 군담 등에서 적극적으로 그 설을 채용하여 노부나가의 캐릭터가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불교도에 대한 잔혹 행위가 그의 이미지에 많은 영향을 주었는데 이는 의견이 갈린다. 불교도들에 대한 과격 진압은 고평가되는 목소리가 있을만큼 정교분리를 강력히 정착시킨 순기능이 컸고 순수히 종교인이나 학자[40]로서 활동하지 않고 정치나 군사에 개입하고 각지에서 반란을 선동하는 교토의 불교도들이 해악을 끼친다는 점은 당사자인 승려들 일부를 포함해 당시부터 인정받고 있었으며 교토의 불교도들은 1천년 가까이 강력한 정치 세력으로 군림하며 적폐화되어 있었다.[41][42][43] 단, 불교도 잇코 잇키 세력에 대해서는 자비없는 대학살을 행했는데 항복을 받아주지 않거나 항복을 받아줄 것처럼 꼬드겨내어 일제 사격을 가해 절망에 빠진 신도들이 자살 돌격을 하는 끔찍한 광경이 곳곳에서 연출되었고 평신도들을 포함한 군중을 그들이 농성하던 장소 안에 가두어 불을 지르는 식으로 몇 만 명을 한꺼번에 살상했다. 흔히 문화적인 임팩트로 인해 에이잔 방화 사건이 훨씬 큰 학살 사건처럼 여겨지지만 실제 학살의 규모는 잇키 신도들이 훨씬 컸는데 노부나가는 잇키에 참여한 자들을 일체의 대화나 용서가 불가능한 벌레처럼 간주해 말살했다. 프로이스는 그를 두고 "이상할 정도로 외경을 받고 있었다. 유럽의 절대 군주처럼 행동했다. 자신의 명예에 대한 모욕은 절대 용서하지 않았다"라고 언급했다.
- 오다 노부나가의 종교 정책에 대해 흔히 사람들이 갖는 생각은 "전통 종교 권위를 부정하고 파괴하려고 한 무신론자"이다. 히에이잔 엔랴쿠지에 대한 가열찬 공격, 이시야마 혼간지와의 장기간에 걸친 전쟁이 이러한 생각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 노부나가의 종교 정책이 어땠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설들이 존재한다. 노부나가의 무가 신격화론을 제기한 아사오 나오히로는 노부나가와 조정 관계에 대한 이론과 유사한 이론을 종교 정책에서 전개하였다. 즉, 노부나가는 전통의 종교 권위를 적대하고 그를 능가하는 무가의 권위를 구축해 무사도의 권위를 종교와 같은 위치로 상승시키려고 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 예로 언급된 것은 단연 엔랴쿠지 방화, 이세 나가시마 공격, 이시야마 전쟁이며 노부나가가 사쿠마 노부모리를 숙청할 당시 내린 질책문에서 혼간지측의 신불과 노부나가의 무편을 반대되는 것으로 대비되는 것을 들며 "무사의 길과 종교의 길은 다르다"고 언급한 것을 들기도 하였다. 나오히로의 이러한 견해는 이후 노부나가의 혁신가적 면모를 강조하는 학자들에 의하여 발전되었다. 이 설을 따른다면 노부나가는 왕법과 불법 모두를 부정하고 그것을 제거하려는 '근세로의 혁신가'라는 것이 되지만 현재는 이에 대하여 많은 반론이 제기되고 있다.
- 노부나가가 대륙[44]을 침공하는 것을 바랐는가에 대하여 프로이스는 긍정하는 서술을 하고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 당시 표현한 것과 같은 대륙 공격과 분봉을 계획하였다는 서술을 그의 <일본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기록을 어떻게 해석할지를 두고 일본 사학계에서는 의견이 엇갈리는데 일반적으로는 프로이스의 기록을 뒷받침할 근거가 부족하다는 것을 지적하며 노부나가의 대륙 침략 계획은 없었다는 의견이 우세하며 그의 대륙에 대한 태도는 교류 확대에 집중되어 있었다는 설이 우세하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프로이스의 기록을 긍정하며 노부나가의 대륙 침략 계획이 존재하였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가장 대표적이며 극단적인 예인 호리 신 박사의 경우 프로이스가 기록한 노부나가의 분할안은 꾸며냈다고 보기 힘들다고 주장하며 노부나가에게 대륙을 침략할 의사가 있었다고 주장하였으며 그것에서 더욱 나아가 노부나가가 추구한 최종 목표는 화이 변화를 이루는 것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어찌됐건 노부나가의 사상이 히데요시의 대륙 침공 야욕에 영향을 준 것은 분명해 보인다.
- 서양의 와패니즈들 사이에서는 오다 노부나가가 죽지 않았더라면 사무라이들을 이끌고 조선과 명나라를 단숨에 무찔러 동아시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됐을거라며 아쉬워 하는 의견이 나오기도 한다. 허나 맛이 가고 있다고는 하나 명나라가 청나라에게도 밀릴지언정 망하지 않았다는걸 감안하면 망상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노부나가의 시대에 명나라는 만력제가 몇십 년을 파업해도 버젓이 운영될 정도로 체제가 멀쩡했지만 알렉산더 시대에 이미 페르시아는 환관의 발호로 황제들이 연달아 암살당하는 등 거의 망해가는 상태였다. 애시당초 임진왜란이 실패한 이유는 근본적으로 일본의 행정력 자체가 조선을 칠 정도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는데 이는 오다 노부나가 역시 마찬가지였고 무엇보다 노부나가는 히데요시보다도 명과 조선을 칠 필요성 자체가 적었기도 하다.[45][46] 그리고 오다 노부나가가 조선을 침공했다고 해도 이순신이 사라질 가능성도 없고...[47]
- 적대적인 다이묘와 일향종 세력의 잇키, 부하들에게는 가혹했지만 영지인 오와리와 미노에는 선정을 베풀었다. 오케하자마 전투에서도 노부나가가 승리할 수 있는 원동력은 영민의 지지가 있어서였다. 연이어 발생한 전란으로 황폐해진 교토의 상공업자들도 엄정한 노부나가의 통치를 반겼다고 한다. 오다 군의 아시가루(足軽)가 길을 가고 있는 여성을 희롱하는 것을 본 노부나가가 교토의 치안을 해치는 행위로 보아 스스로의 손으로 즉결 처형한 삽화도 있다. 혼노지의 변 이후 아케치 미츠히데를 따르는 호족층이 적었던 점도 이를 반영한다. 혼노지의 변 이후 미츠히데가 자신을 무왕, 노부나가를 주왕에 비교하자 노부나가의 통치를 환영하던 교토에서는 이를 어린아이들까지 비웃었다고 전해진다.
- 규제없이 자유롭게 상행위를 할 수 있는 시장인 라쿠이치라쿠자(樂市樂座)는 노부나가가 가장 먼저 행한 정책이라는 통념이 있지만 실제는 오미 남부의 센고쿠 다이묘 롯카쿠 사다요리(六角定頼)가 행한 정책이었다. 롯카쿠와 이마가와가 라쿠이치령을 시행하기는 했지만 롯카쿠의 라쿠이치령은 호나이 상인과 에다무라 상인이 전매제를 두고 대립한 것을 해결하기 위해 시행한 정책이고 이마가와의 라쿠이치령은 치안의 부재로 인한 상인에 대한 금품 갈취를 방지하기 위한 정책이었다. 오다, 롯카쿠, 이마가와 셋다 라쿠이치가 들어가기는 하지만 라쿠이치는 이러한 정책 전반을 일컫는 말로 각각의 라쿠이치가 전부 다른 정책이었다. 반면 오다 가문의 라쿠이치령은 시장을 자유롭게 한다는 의도가 있었기에 라쿠이치라쿠자는 오다 노부나가가 최초가 맞다. 또한 노부나가는 라쿠이치라쿠자를 대규모로 시행하여 비와 호 등을 중심으로 한 유통에 따른 상업 발전에 눈을 돌리고 당시 전란으로 전시 호황을 누리고 있던 자유 무역항인 사카이를 점령하여 이익을 독점하는 등 한 발 앞선 내정을 펼쳤다.[48]
- 공공 사업에서도 손을 뻗쳐 길을 정비해 1리(4km)마다 나무를 심어 표석으로 삼았는데 이는 자군의 행군 속도를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주변의 관문도 폐지하여 주변과의 왕래를 쉽게 해 상업을 활성화하였으나 타 지역에서는 적군의 진군 속도를 고려해 그 같은 일은 하지 않았다.
- 키는 약 170cm 되는 당대 일본 기준 장신[49]이었다고 하며, 500m 밖에서도 목소리가 들릴 정도로 쩌렁쩌렁했다고 한다. 스스로를 제육천마왕이라고 자칭하거나 불교 꼴통들을 탄압하는 등 세상 평판따위는 신경 안 쓸 것 같은데도 교토 귀족들의 일기에 따르면 의외로 평판을 중시하고 늘 스스로가 올바른 싸움에 임한다는 것에 부심을 가졌다고 한다. 천하포무(天下布武)를 풀어서 훈독으로 읽으면 "하늘아래 무를 펼친다"(天の下、武を布く)로 읽힌다. 무력을 통해 천하를 취한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지만, 근년에 들어서는 무가정권으로 천하를 다스린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경우도 많다. 상기의 서술대로 노부나가는 미노를 공략한 후에 거처를 이노구치로 옮긴 후, 이노구치의 지명을 기후로 개명하였고, 이 무렵에 천하포무라는 직인을 사용하였다.
- 처음엔 후지와라의 우지를 자칭하다 타이라 우지로 갈아탔다. 이는 겐페이교체 사상[50]에 따라 행한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51]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처음에는 타이라우지를 사용했다 후지와라 씨족의 종가인 고노에의 양자가 되어 후지와라씨를 사용했고, 나중에는 덴노에게서 도요토미우지를 하사받아 도요토미씨가 되었다. 후지와라씨는 중앙귀족 아니냐는 말이 있지만 헤이안 시대와 헤이케모노가타리 시대에는 엄연히 도우지(藤氏)라고 하는 무가 후지와라씨들이 있었다.[52]
- 상경 이후 조정 등의 귀족계급에 재정적 지원을 하는 등 교토 귀족 공가들과도 친교가 깊었다. 특히 고노에 사키히사(近衛前久)와는 애당초 적대 관계였지만, 취미 등이 같아 잘 어울렸다고 한다. 외척을 경계하여 측실을 조금밖에 두지 않았으나 많은 아이를 가졌다고 한다. 또 당대 상류층들이 으레 그렇듯 와카슈도에 손을 대기도 했다.
- 서양 문물 수용에 적극적이라서 교토에서 열린 관병식 때 벨벳으로 된 외투에 서양 모자를 쓰고 참가하거나 말년에 전장에 나갈 때 서양식 갑옷을 입기도 했다. 예수회에서 받은 지구의, 시계, 지도 등을 잘 이해했다고 하며, 사상적으로도 개방적인 면이 있어서 예수회 선교사에게 지동설과 둥근 지구의 모양에 대한 설명을 들었을 때는 "과연 그 이론이 타당하다"라고 흥미를 보였다. 로마 교황 그레고리오 13세에게 아즈치 성을 그린 병풍도를 선물했고 오다 노부나가가 죽은 후인 1585년에 도착했지만, 현재 이 병풍도는 분실되었다.
- 카네가사키 퇴각을 통해 위기에서 벗어나 아네가와 전투[53]로 매제인 아자이를 괴멸시킬 수 있었던 것은, 동생인 오이치가 콩주머니의 양 끝을 묶어 아자이가의 배신으로 앞뒤로 포위 당했음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물론 후대의 창작으로 추정된다.[54]
- 마츠나가 히사히데 등용이나 셋츠 국분, 미요시 야스나가를 위시로 한 시코쿠 국분계획에서 볼 수 있듯, 노부나가는 무조건 구태하고도 미련한 세력을 때려 부수고, 오로지 미래를 향해 나아갈 혁신적인 계획을 세우지 않았었다. 해당 지방의 유력 일족을 파악해, 조그마한 영향력과 명분만을 가지는 구태 세력일지라도 봉토를 수여해 자신의 세력으로 이용하는 방식 또한 많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상술한 동세토내해를 둘러싼 양부 - 양자 관계가 좋은 예시.[55]
- 아자이, 아사쿠라 등을 정벌하고 나서 아자이 히사마사, 아자이 나가마사, 아사쿠라 요시카게 3명의 해골에 금박을 입혀 바라보며 연회를 즐겼다고 한다. 해골을 가지고 술잔을 만들었다는 부분은 창작이지만, 시체를 훼손하여 금박을 입히고 구경거리로 삼은 부분은 신장공기 7권에 수록되어 있는 내용이다. 해당 기록에 따르면 노부나가는 덴쇼 2년(1574년) 정월, 연회에서 해당 3명의 수급에 금박을 입혀 안주로 삼았고 이를 매우 즐거워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노부나가의 잔혹성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일화로 꼽히며 창작물에서도 그렇게 묘사되곤 하지만, 미야모토 요시미와 같은 일부 학자들은 전국시대에 전사자의 수급에 명복을 기리는 목적으로 백분 등의 화장품을 칠하는 풍습이 있었다는걸 근거로 해당 일화도 노부나가가 해당 적장들에게 경의를 표하며 명복을 기리고 새로운 출발을 기원하는 의미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56] 실제 노부나가가 여러 잔혹행위들을 저질렀을 때는[57] 오다군에 종군한 오타 규이치가 이를 여러 가지 표현으로 끔찍하다고 묘사했지만, 이 연회에서는 '다같이 흥이 나 즐겼다', '(세 해골은)고금에 없는 진귀한 여흥이었다'라고만 쓰고 있기에 당사자들은 이를 잔혹행위로 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 아케치 미츠히데의 어머니가 하타노 하루미치의 가솔과 교환으로 인질로 잡혀 있는 상황에서 적장의 가솔을 몰살해 버렸고, 결과적으로 미츠히데의 어머니를 끔찍하게 죽게 만들어 격노한 미츠히데가 모반을 꾸미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1702년 편찬된 "오다군키"에 있다. 이는 탄바의 민담으로 전해지다 글로 적혀졌다고 하나, 진위 여부는 불분명하다.[58]
- 노부나가가 공의(公儀)로서 일본 열도에 군림하게 된 시점은 1579년이다. 확인되는 문서중에서 1579년 이후에야 그를 공의로서 표현하고 있기 때문.[59] 그러나 노부나가는 자신의 권력, 정권을 일컫는 데 공의보다 천하라는 용어를 더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60]
- 그는 바둑과 코와카마이(幸若舞)[61]를 좋아하고 사루가쿠(猿楽)를 싫어했다. 씨름(스모(相撲))를 매우 좋아해서, 아즈치 성 등에서 대규모 스모 대회를 자주 열었다. 또, 스모 대회는 신분과 관계없이 노부나가의 측근과 서민들이 섞여 스모를 했다고 한다. 바둑에서 사용되는 명인(名人)이란 말을 처음 사용했다고 한다. 고와카마이의 아츠모리 중 인간세상 오십년 하천에 비한다면 덧없는 꿈과 같구나, 한 번 태어나 죽지 않을 자 그 누구인가, 죽지 않을 자 그 누구인가(人間五十年 下天のうちをくらぶれば 夢幻の如くなり ひとたび生を享け 滅せぬもののあるべきか)라는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 걸 좋아했고 그 밖에도 수영, 매사냥, 말타기, 활쏘기 등 신체와 무예를 닦았다.
- 사망하기 전날 삼패로 바둑이 무승부가 되는 경기를 관전하였다. 이에 따라 삼패를 바둑계에서 불길하게 여기고 있다.[62] 그런데 실은 이 대국의 기보가 남아있다. 해당 기보 그리고 승부가 무승부인 건 맞지만, 기보상으로 보았을 때 삼패가 나올 만한 곳이 없다. 때문에 이런 야사가 흔히 그렇듯 후대에 창작된 이야기로 보는 게 일반적이다.
- 미요시 가문을 제압한 뒤, 쓰보우치(坪内)라는 이름을 가진 미요시 가문의 요리사를 포로로 잡았다. 이때, 노부나가는 쓰보우치에게 “요리를 잘하면, 죄를 사하고 요리사로 고용하겠다.”라고 약속했다. 그리고, 쓰보우치가 만든 요리를 노부나가가 먹었지만, “음식이 싱겁다.”라며 쓰보우치를 처형하려 하였다. 그러나, 쓰보우치는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애원하였다. 그렇게 내놓은 2번째 요리의 맛을 본 노부나가는 “매우 맛있다.”라며 수긍하고, 고용하였다. 그 후, 쓰보우치는 “애초에 2번째 요리를 내왔으면 좋았잖아.”라는 물음에 “처음 요리는 교토의 고급 요리였고, 나중 것은 맛이 강한 시골 요리였을 뿐이다. 결국 노부나가님도 시골 사람이란 말이겠지요.”라고 대답하였다.
교토 화법 쩐다.[63] 후일 이 이야기를 들은 노부나가는 “나의 요리사로 고용된 이상은 나의 취향에 맞는 요리를 할 수 있도록 먼저 노력하는 것이 가신 된 자의 본분이다. 그것을 게을리했다는 것은 단순히 무능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 오다 노부나가의 호위를 맡았던 야스케라는
사무라이가하인이 있었는데, 모잠비크 출신이라 추정되는 흑인이었다.일본 최초로 흑인 무사를 거느렸던 것.일본에 노예로 팔려왔다가 노부나가를 섬기게 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 도검 수집 매니아였다. 헤시키리 하세베, 소우자 사몬지, 쇼쿠다이키리 미츠타다 같은 검들이 오다 노부나가가 소장했던 도검. 또한 다기 콜렉터.
- 철저하게 여자만을 밝히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다르게, 남색을 좋아해서 미동을 할 때는 주로 미형의 남자 시종들을 데리고 다녔으며 옷을 입을때나 목욕을 할 때도 항상 곁에서 시중을 들게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실제로 관계까지 나눴는지는(...) 불명.
- 1578년 9월 30일 츠다 소규의 정에서 열린 다회가 노부나가의 대표적인 대규모 다회로 꼽히는데, 노부나가와 쿠게 고노에 사키히사가 같은 자리에 앉았으며, 사쿠마 노부모리, 타키가와 카즈마스, 호소카와 노부요시, 오다 노부즈미, 츠츠이 준케이, 호리 히데마사, 미요시 야스나가, 와카에 산닌슈 등이 모였던 참으로 쟁쟁한 모임이었다고 한다.
- 교과서 등 대부분의 일반 서적에서는 전국시대 후기의 흐름은 오다 노부나가의 세력 확장을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으며, 교과서에서는 타네가시마 철포 전래 등 매우 중요한 사건을 빼놓고서는 거의 킨키 지방을 중심으로 한 노부나가-히데요시 연표수준이다. 전국시대의 끝은 노부나가를 빼고는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전국시대를 끝맺은 노부나가와 히데요시의 치세를 따로 빼어 아즈치-모모야마[64] 시대 혹은 쇼쿠호[65] 시대로 부르기도 한다. 전국시대의 끝을 1615년 오사카 성 함락으로 보지 않을 경우는 보통 1573년의 무로마치 막부 멸망부터 1603년의 도쿠가와 이에야스 쇼군 취임까지를 쇼쿠호 시대로 떼어서 취급한다.
- 노부나가를 다룬 창작물에서 항상 나타나는 노부나가의 말버릇 비슷한 표현이 있는데, 바로 '데아루카(であるか)'. '그러한가', '그러냐?' 라는 의미다. 원래 이 당시의 표현으로는 '소-데아루카(そうであるか)'가 맞는 표현이지만[66] 소-(そう)를 빼고 자기 마음대로 줄인 표현이다. 이 표현은 신장공기에서 노부나가가 사이토 도산과 처음으로 대면할 때 사이토 가의 가신이 노부나가에게 '저분이 도산 공이십니다'라고 소개하자 노부나가가 '그런가(であるか)'라고 말했다고 오타 규이치가 기록해둔 것이 원 출처. 어떻게 보면 별거 아닌 기록이지만 이런 어법파괴(?)적인 표현도 가신들에게는 특이한 것으로 받아들여진 모양이다. 전국무쌍이나 노부나가의 야망에서도 이 말버릇을 사용한다. 다만 일본어 차원에서는 있을 법한 표현이긴 한데, 현대 일본어에서도 '그러면 이만'에서 주어와 뒷부분을 생략한 じゃあ 또는 では라는 말을 사용한다.
- 2018년 현재도 오다 노부나가의 후손이 생존해있으며 무려 18번째 당주로 지내고 있다고 한다. 이름은 오다 노부타카. 오다 노부나가의 후손들 중 일부는 메이지 유신 이후 화족에 편입되어서 자작 작위를 받는다.[67]
- 오다 노부나가의 17대손임을 자칭하는 스케이트 선수 오다 노부나리는 음주운전에 적발되어 망신살을 샀다. 음주운전을 적발한 경관의 성도 하필이면 "아케치"라서 두고두고 놀림거리가 되고 있다고...[68]
- 조선왕조실록에는 오다 노부나가가 생존 중에 활약한 기록이 거의 없다. 조선에선 임진왜란이 벌어지기 전까진 일본 정세에 크게 관심이 없었기 때문. 임진왜란 이전은 오우치씨 같이 한국과 거리가 가까운 서일본 지방 다이묘 관련 기록 위주로 남아있다. 혼노지의 변 이후 히데요시가 집권했을 때, 노부나가의 후계자라는 의미로 전임 관백(関白)이라는 호칭으로만 나온다. 본명에 대한 기록도 없다.[69] 따라서 전국 3영걸중 유일하게 본명이 조선왕조실록에 없는 인물. 조선왕조실록 고유명사 검색 서비스에서도 노부나가만 안 나온다.
- 위 그림은 일본 야마가타현의 사찰(三宝寺)에 보관된 오다 노부나가의 초상이라고 하는데, 사찰에서 설명하는대로 실제 오다 노부나가를 보고 그렸다고 보기는 어렵다. 당대 예수회 선교사였던 Giovanni NIcolao의 작품이라 설명하지만, 그는 오다가 죽은 다음인 1583년에 일본으로 보내진 화가라서, 설령 그가 초상화를 그린 장본인이 맞더라도 오다 노부나가를 직접 보고 그렸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또한 이것이 16세기 유럽 회화나, Giovanni NIcolao의 작품이라고 알려진 그림들과는 기술적인 면이나 화풍에서 이질적이기 때문에 그가 그렸다고 보기도 어렵고, 비슷한 시기에 그려진 작품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일본이 유럽식 회화를 본격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근대나 그 이후에 그려졌을 가능성이 높다.
- 다케다 신겐은 노부나가의 영토인 오와리에서 온 고승을 데려다 노부나가의 문화, 사냥 취미에 대한 정보를 아주 세세하게 물었으며, 그가 조직적으로 종자들을 거느리고 사냥하는 습관을 듣고는 "그가 잘 싸우는 것도 당연한 노릇이다"라면서 매우 고평가했다.
- 한 매 조련의 달인이 명품 매를 두 마리 얻고 노부나가에게 찾아와 그 중 한 마리를 진상하겠으니 골라 보라고 했다. 노부나가는 "뜻은 고마우나 노부나가의 천하가 될 때까지 매는 일단 맡겨 두마."라고 대답했고, 그는 교토에 올라가서 이 이야기를 퍼뜨리고 다녔다. 교토 사람들은 촌것이 건방지다며 비웃었지만 10년도 걸리지 않아 노부나가는 교토를 장악했다.
- 외교관계에서는 저자세로 나가거나 겸손한 자세로 성의를 보인 적도 많다. 다케다 신겐의 환심을 사기 위해 공물을 보냈는데, 신겐이 공물을 넣은 상자를 잘라 보더니 상자가 여러 차례 칠하고 말린 것을 장기간 반복한 고급 칠기로 된 것을 알고 오다의 성의가 진짜임을 알고 감탄했다는 일화가 있다. 이외에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 멸망직전에 몰린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원군 요청을 받았지만 오다 포위망으로 인해 자신도 위기에 빠진 나머지 가용 병력이 없어 얼마 보내지 못한 적이 있는데, 이를 미안하게 생각한 나머지 후일 신겐 사망 후 다케다군과 도쿠가와가 전쟁을 벌이자 원군과 함께 건장한 무사 둘이서 달려들어도 들어올리기 힘들 정도로 대량의 황금자루를 사죄의 표시로 보내 도쿠가와를 기겁하게 만들었다.
- 교토에 있을 때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노부나가에게 전사한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아들인 이마가와 우지자네가 노부나가를 뜬금없이 방문한 적이 있다. 노부나가는 지 아버지의 원수를 찾아온 이 머저리가 축국[70]의 달인이라는 소문을 듣고 자기 앞에서 축국을 시켜 그것을 구경했다.
- 2019년에는 일본인 12,000명이 뽑은 가장 좋아하는 역사적인 인물 순위에서 1위를 기록했다.[71]
- 상술했듯 일본을 좋아하거나 일본사에 관심있는 외국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꽤 높은 편이다. 일각에서는 오다 노부나가를 "일본의 카이사르(Japanese Julius Caesar)"로 여기거나 둘을 비교하기도 한다. ##2
- 신분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성격이었다. 서민들과 함께 춤을 추거나 노동요를 부를 때에는 모습을 서민들 앞에 드러냈다. 오봉 때에는 마을 주민을 즐겁게 해주었고 마츠리를 즐겼다. 이는 전통적인걸 좋아하지 않는 노부나가의 성격 때문이기도 하고 서민들과 친하고 격려도 잘해준 덕분에 당시 전쟁에 징집된 농민군들이 적극적으로 훈련에 임하고 잘 싸우게 된 계기가 되었고 이 때문에 노부나가는 늘 소수의 병력으로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 치하 영토의 행정에도 매우 과격하지만 그 나름대로 공정한 특유의 락스타 같은 방식으로 즉석에서 개입할 때가 잦았다. 대체로 지위가 낮은 자에게는 매우 자비롭고 지위가 높은 자에게는 매우 가혹했던 것이 특징이어서 의외의 자비를 베푼 일도 많다.
- 변덕이 죽 끓듯 하며 즉흥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성질 덕에 목숨을 건진 일도 있다. 삿사 나리마사의 성인 히라 성 근방의 한 연못을 비 오던 날에 홀로 지나가던 마타자에몬이라는 무사가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형상을 한 마물 구렁이를 보고 겁에 질려 도망쳐서 사람들에게 자기가 본 것을 얘기하고 다녔다. 이 소문을 듣고 흥미가 동한 노부나가는 직접 마타자에몬을 불러서 경위를 조사한 뒤 주변의 백성들과 부하들을 동원해 연못으로 쳐들어갔다. 새벽부터 물을 퍼내다가 물이 어느 정도 이하로 줄지 않자 아예 자신이 직접 입에 와키자시를 문 채 물 속으로 들어가서 직접 구렁이를 찾아보고는 "구렁이 같은 건 없다!"라고 공언했을 뿐더러 확실히 하기 위해 수영에 능한 부하 2명에게도 확인을 명했다. 그런데 노부나가에게 기겁할 만한 일이 일어났다. 당시에는 삿사의 가신들이 모반할 거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고 이 때문에 삿사 나리마사조차 병을 핑계로 등성(출근)을 못 하고 있었다. 그런 터에 마물 퇴치를 마친 노부나가가 갑작스럽게 "히라 성이 멋지다지?" 하면서 시찰하러 가겠다고 소리쳤다. 이 소식을 들은 히라 성의 무사 중 하나가 노부나가가 소문을 믿고 자기들에게 할복을 명하러 오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하고 겁에 질린 나머지 진짜로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하필이면 노부나가가 갑작스럽게 스케줄을 또다시 바꿔 히라 성에 들르지 않은 채 기요스 성으로 돌아가버려서 암살 계획은 흐지부지되었다.[72]
- 노부나가의 행렬이 교토로 가는 도중 비에 젖어 달달 떠는 장애인 거지를 봤는데 그를 행차길에 종종 봤기에 궁금해진 노부나가가 신변을 알아보니 선조가 토키와 고젠을 살해했다는 미신으로 인해 집안 대대로 근처 마을에서 따돌림을 당해 그런 신세로 사는 자였다. 같은 길로 돌아오던 중 이 거지가 생각난 노부나가는 거지를 불쌍하게 생각하고 현지의 촌장에게 후한 비용을 지급하며 "거지가 거처할 만한 집을 지어 앞으로는 살 수 있게끔 안에 들여 주게. 그리고 나라고 생각하고 계절마다 거지를 보살피고 먹고 살 식량을 챙겨준다면 이 노부나가에게 이만큼 기쁜 일이 없겠소."라며 매우 자상한 어조로 부탁했다. 거지 본인은 물론 이를 듣는 주변 사람들은 전부 목이 메어 울지 않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 오다 가문의 일족인 '오다 노부후사'라는 무장의 부하 중에는 진베에라는 자가 근처 마을을 다스리는 이케다 츠네오키[73]의 부하 중에는 사스케라는 자가 있었다. 진베에와 사스케는 잘 아는 사이였지만 나쁜 마음을 먹은 사스케가 어느 밤 진베에의 집에 강도질을 하러 들어가서 격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다행히 아녀자인 진베에의 아내가 격투에 뛰어들어 용감하게 사스케의 칼집을 뺏어 들고 사스케를 두들겨 패 쫓아냈고 진베에 부부는 이 칼집을 증거로 제출해 그를 강도로 고발했다. 피고인인 사스케는 당연히 "그런 칼집 따위는 난 모른다. 신에게 맹세해도 좋다"라고 버텼기 때문에 소송은 불에 달군 쇠 방망이를 잡고 일정 시간 버티는 시련재판의 일종인 히키쇼[74]로 이뤄지게 되었다. 사스케는 뜨거움을 견디지 못해 쇠를 떨구고 유죄 처분을 받게 되었는데 제 부하가 사형당할 각이 나오자 여기에 유력 무장인 이케다가 부당하게 개입해서 정상적인 형 집행을 방해하고 사스케를 보호하려 들었다. 문제는 여기에 사냥 중이던 노부나가가 지나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노부나가는 재판정의 살벌한 분위기를 보고 궁금해 달려와서 자초지종을 듣더니 격노해 "다시 쇠를 달궈라. 내가 쇠를 쥐고 히키쇼를 하겠다. 내가 이기면 저 놈은 유죄인거다."라는 엄청난 선언을 했다. 쉽게 말해 영주 스스로 결투 재판의 챔피언이 될 것을 자청한 셈이다. 노부나가는 훌륭하게 불에 달군 철봉을 꽉 쥐고 세 걸음을 걸어 재판을 끝내고 침착하게 쇳덩이를 내려놓은 뒤 "똑똑히 봤느냐 이것들아!"라고 소리치며 사스케를 즉시 처형했다.
- 노부나가가 성을 비우고 성지의 하나인 비와 호의 치쿠부시마에 참배하러 간 일이 있었는데 왕복 30리 길이어서 시녀들은 노부나가가 아마 당일은 목적지 근처의 나가하마 성[75]에 묵을 것이라고 믿고 너도나도 제 자리를 비우거나 아예 성을 나가 근처의 절인 쿠와미노데라에 참배하러 가기도 했다. 문제는 노부나가가 사람들이 그 기력에 혀를 내두를 만큼 빠르게 예정을 끝내고 바람 같이 돌아와 버렸다는 것. 돌아온 노부나가는 시녀들이 무단으로 자리를 비운 것에 격노해서 일부를 묶어 놓고 쿠와미노데라에 사자를 보내서 거기 있는 시녀들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장로는 시녀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대신 사죄했는데 노부나가는 장로까지 같은 죄를 물어 처형했다고 한다.[76]
- 자신의 부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처 네네가 남편이 너무 바람을 많이 피운다며 자신에게 하소연을 하자 친절하게 답서를 보내줬다는 기록이 있다. 네네와 마에다 토시이에의 아내 마츠에게 보낸 편지에 봉토 운운하는 내용을 남기는 등 부하의 아내에게는 친절한 면이 있었다. 네네가 아이가 안 태어난다고 네네를 박대하는걸 알고 하시바를 불러서 질책하기도 했다.
- 아즈치 성을 신축하고 나서는 무사들이 모인 죠카마치[79]를 만들고 휘하 무사들과 식솔들을 이주시켰는데 오와리의 무사 주택에 머물러 있던 몇몇 무사 가족 중 한 가구가 화재를 일으키는 사건이 벌어지자 아직도 가솔을 다 옮기지 않은 부하들이 있다는데 격노해 오와리 쪽의 무사 주택들을 싹 불질러버리고 당사자들에게는 이주를 조건으로 처벌을 면제해준 뒤 신축된 주택을 하사했다. 과격한 처사 같지만 사실 목조 주택 문제 때문에 화재와 관련된 범죄가 극형으로 다스려지던 당시의 사회상에서 실화와 명령 불복종이라는 2가지 죄에 대한 극형을 면제해준 것이어서 노부나가의 행정적인 과감함과 동시에 하급 부하에 대한 아낌없는 관대함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 종교적인 문제나 미신에 대처하는 자세는 일관적이었다. 사회 문제를 일으키면 박살냈고 행정적으로는 관대했다. 하루는 정토종의 장로가 칸토 지방에서 와 아즈치에서 설법을 하는데 법화종을 믿는 승려 하나와 덴스케라는 평신도가 일어나 괜한 시비를 걸었고 논쟁이 점차 여러 사찰의 승려가 아즈치의 죠카마치에 몰려들어 다투는 일대 교리 논쟁이자 종교 분쟁으로 발전했다. 노부나가는 이 소동에 대한 보고를 듣고 중재를 위해 장로들만을 모아 일종의 교리 공개 토론인 '종론'을 개최했는데 결과적으로 법화종 장로가 질문 하나를 마저 답하지 못하고 침묵하며 논쟁에 패배하는 결말이 났다. 그 앞에서 정토종의 장로가 약올리듯 부채를 펴고 춤을 추었고 법화종의 장로는 마구 두들겨 맞은 뒤에 신도들은 개미새끼 흩어지듯이 도주해버렸다. 노부나가는 이 꼬락서니를 보고서로 제출받고 당일치기로 장소를 다른 사찰로 옮겨 쌍방을 소환해 패자는 위로하고 승자는 칭찬하며 심판을 선 장로에게는 후한 감사의 상품을 주었다. 그러고서는 법화종의 승려와 함께 키배를 일으킨 평신도 덴스케 쪽도 불러내어 "당당한 무사 신분의 인간이라도 이런 고명한 승려들의 교리 논쟁에는 함부로 나대면 안될 터인데 넌 소금장수 주제에 건방지게 뭘 믿고 말싸움을 걸며 까불어서 이런 소란을 피웠느냐? 괘씸하기 짝이 없다!"라고 하며 단박에 그를 베어 죽였다.
- '무헨'이라는 순례승이 잠시 아즈치 근처의 한 사찰에 머물러 있었는데 이 자는 신통력을 가졌다며 소문이 나서 사람들이 예물을 가지고 몰려들어 소동이 벌어졌다. 이 소문을 들은 노부나가가 무헨을 데려오게 시켜 그를 자세히 뜯어보더니 "자네는 어디서 왔는가?"라고 물었다. 무헨은 "무헨(無辺, 아무 곳도 아님)입니다"라고 선승인 양 폼잡으며 대답했는데 노부나가는 다시 "당(중국)인인가? 천축(인도)인인가?"라고 물었지만 비슷한 대답만 돌아왔다. 그러자 노부나가는 갑자기 분통을 터뜨리며 "네 놈의 태생이 삼국[80] 이외라니 요망하기 짝이 없구나.
조선사람인가 보지이 자는 요괴로 보이는데 한번 불에 처넣어 봐야겠으니 불을 피워라!"라고 소리쳤다. 겁을 집어먹은 무헨이 "데와 출신입니다"라고 실토하자 노부나가는 더더욱 격노해 "그냥 사기꾼 땡중 놈이잖느냐. 욕심이 없다는 것도 구라 같구나. 그 잘난 신통력을 보여주기나 해라!"라고 요구했고 사이비 땡중이던 무헨이 초능력을 보여줄 수 있을 리도 없었다. 노부나가는 "진짜 신통력이 있는 사람은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남들과 다른 법인데 너는 산골 촌놈보다 초라하게 생겼잖느냐. 그런 주제에 아녀자들 돈이나 뜯다니 괘씸하다. 개쪽이나 당해봐라!"라면서 무참하게 그의 머리를 박박 깎은 뒤 발가벗겨 조리돌림하고 영지 밖으로 쫓아냈다. 그런데 쫓아낸 후의 조사로 무헨이 아녀자를 세뇌해 겁탈하고 다닌 것까지 드러나자 더 빡친 노부나가는 군사를 보내 집요하게 무헨을 추격해 잡아다가 꾸짖고 처형했다. 시바 료타로의 소설에도 나오는 유명한 이야기인데 창작이 아니라 신장공기에 기록되어 있는[81] 실화이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난 노부나가가 무헨이 묵었던 절의 주지에게까지 "왜 그런 요망한 것을 재웠냐"며 책임을 물으려 하자 주지가 "절이 황폐해 비가 샐 지경이어서 시주를 받고 싶었습니다."라고 고백했고 이에 노부나가는 주지를 불쌍하게 여겨 수리비를 지급했다.
6. 참고 서적
: 戦国三好氏と篠原長房 - 若松和三郎(2013年 10月 1日, 戎光祥出版)[83]: 阿波三好氏 - 天野忠幸(2012年 10月 10日, 岩田書院)[84]
: 四国と戦国世界 - 四国中世史研究会 · 戦国史研究会(2013年 5月, 岩田書院)[85]
: 戦国史研究 第66号 - 戦国史研究会(2013年 8月 25日, 吉川弘文館 & 戦国史研究会)[86]
7. 창작물
자세한 내용은 오다 노부나가/기타 창작물 문서 참고하십시오.[1] 가장 유명한 노부나가의 초상이다. 원본은 아이치현 도요타시 조코지(長興寺)에 소장되어 있다. (三好一族と織田信長 p.11) 초상화가 제작된 시기는 노부나가의 1주기인 덴쇼 11년 6월 2일(조선 선조 16년, 1583년)이며 제작자는 카노 소슈(狩野宗秀, 1551 ~ 1601)이다.#[2] 루이스 프로이스, 《일본사》[3] 이때는 중국인과 일본인들을 한국식 독음으로 문자 표기하는 게 매우 흔했고, 한글이 아닌 한자로 인쇄하던 한국 신문에도 그냥 역사 이야기 보도에는 풍신수길, 덕천가강, 이등박문 등을 한자로 써서 기사를 쓰기 일쑤였다. 한국에서 원어명을 존중하는 문화는 90년대 중후반이나 되어서야 생기기 시작하여 21세기에 자리잡혔고 지금의 표기 경향 또한 한 • 중 수교 수년 후부터 정책적으로 중국어와 일본어 이름을 한글로 그대로 쓰는 원칙이 생겨 21세기가 되어서야 자리잡혔다.[4] 정식 발매판의 경우 신장은 한자로 쓰고 그 밑에 한글로 노부나가라고 별도로 표기하여 발매하였다.[5] 아들 노부나가(1534 ~ 1582), 노부유키(1536 ~ 1557), 히데타카(? ~ 1555), 노부카네(1548 ~ 1614), 딸 오이치(1547 ~ 1583), 오이누(? ~ 1582)의 생모다.[6] 어찌나 아꼈는지 3년 연속으로 아이를 낳았을 정도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셋째이자 장녀인 도쿠히메를 낳고 산후병으로 요절하였다.[7] 마침 둘이 장남과 차남이기도 했다.[8] 계도찬요에 기록된 노부나가의 장남. 일반적으로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교토 겐쇼지의 기록에 따르면 오다 가신 무라이 사다카츠의 양자가 되었다고 한다.[9] 아명은 키묘마루. 노부나가의 후계자였으나 혼노지의 변으로 노부나가와 함께 죽었다. 유능한 편이라 만약 살아남아 오다 가문을 이어갔다면 쉽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10] 아명은 자센마루. 키타바타케 가에 양자로 보내졌으나 노부나가 사후 돌아왔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연합했지만 임의로 하시바 히데요시와 강화하면서 산통을 깨버렸고, 아버지의 역작이었던 아즈치 성을 태워버린 전적도 있어서 호부견자로 유명하다.[11] 아명은 산시치마로. 간베 가문에 양자로 보내졌다. 혼노지의 변 이후 시바타 카츠이에 등과 손잡고 하시바에 맞섰으나 힘이 미치지 못해 사망하였다.[12] 조부와 이름이 같다.[13] 셋째형과 이름은 같으나 한자가 다르다.[14] 수많은 형제들이 있지만 주요 인물만 기재했다.[15] 1543년 8월 17일생이라는 설도 있다.[16] 한국의 이순신, 세종대왕의 위상과 비슷한 케이스라 생각하면 편하다.[17] 사실 정확히 말하면 노부나가가 물려받은 오와리 지역도 땅이 좁을 뿐이지, 농사짓기 알맞은 기름진 땅이라 '석고' 즉 쌀 산출량이 좋은 편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넓이만 좁았을 뿐 산출량으로만 보자면 후호조씨가 다스리던 간토같은 극히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선 상당히 좋은 편이다. 대신 전란의 시기에 땅이 좁다는 태생적인 한계는 산출량 외에도 여러모로 악영향을 끼쳤고 지리적/정치적 입지상 주변에 적도 많았다는게 문제.[18] 수도에 가깝고 주변이 평지라 사람을 모으기 쉽고 전력만 된다면 당장 수도로 달려갈 수도 있는 위치지만, 반대로 말하면 적이 쳐들어오기도 쉬운 입지이기도 했다.[19] 상술했듯 다케다는 전략적 실책으로 사실상 고립되었고 다케다를 지원해줄만한 세력이라곤 호죠나 우에스기밖에 없었는데, 우에스기는 비슷하게 내분으로 바빴으며 호죠는 아예 오다와 결탁하기로 마음먹었다. 결국 7년간의 기다림으로 오다는 병력 손실만 막은게 아니라 외교적으로나 국방적으로나 타 세력이 오다의 다케다 흡수를 방해하지 못할 판을 깐 셈.[20] 또, 굳이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손을 잡은 이유를 알 수 있는데 바로 다케다 가문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사실상 다케다에 대한 방패로 도쿠가와를 내세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론 그렇다고 도쿠가와를 이용해먹기만 한 것은 아니며 도쿠가와가 다케다에게 공격당할 때는 나름 원군을 보내줬다. 다만 노부나가 포위망으로 인해 오다 또한 불안한 상황일 때도 있어서 항상 그렇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도쿠가와와의 동맹은 서로에게 많은 이득이 되었고 오다 노부나가가 사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21] 사실 성공한 왕자(王者)들의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다. 오다 노부나가 외에도 유방과 항우, 테무진과 자무카, 주원장과 진우량 등의 관계가 대표적.[22] 기존 상인들이 형성한 동업자 조합인 이치자(市座)에 주어진 특혜를 폐지하고 각종 규제를 철폐하여 상인들이 자유롭게 경쟁을 할 수 있도록 한 시장이다.[23] 당장 노부나가의 장인인 사이토 도산도 이러한 전략을 구사했다.[24] 사실 탄탄한 경제력의 기반은 조부 노부사다 때 부터 시작되었다. 시나노, 미노 오와리, 이세 등 4국을 관통하는 기소강과 인접한데다 츠시마 신사 아래 번성한 몬젠마치를 가진 이세만에 위치한 항구인 츠시마를 장악하고 거점을 아예 그곳에 옮겨 발전을 꾀한 이가 노부사다이며, 그 아들인 노부히데 역시 아츠다 신사를 낀 항구 아츠다를 지배하며 상업을 장려했다. 이러한 까닭에 홍수로 무너진 궁궐의 수리비로 무려 4천관(약 6억엔)에 달하는 비용을 헌상할 수 있었다. 라이벌이던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500관, 사이토 도산은 한 푼도 내지 못했던 것에 비하면 실로 엄청난 격차.[25] 전국시대 지도를 보면 오다 가의 땅은 상당히 작아 보이지만 상술했다시피 매우 비옥한 땅이었기 때문에 고쿠다카로 치면 매우 알찬 땅이었다.[26] 사냥과 말달리기를 통해 늘 체력을 단련했다.[27] 이쪽은 한 손에는 야망, 한 손에는 근면성실로 패권자까지 올라간 일본 역사상 최고의 독종이기에 급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하시바에 대한 당대 소문 중에는 하시바가 거의 노비급 신입 말단 부하였을때, 현대의 화장실과는 차원이 다르게 불결하던 당대의 변소를 하도 열심히 청소하고 깨끗이 만들어서, 귀가한 노부나가가 변소를 보고 놀랐다는 이야기도 있었을 정도였다. 히익 변소가 이렇게 깨끗하다니! 그때부터 성실성을 눈여겨 보고 아주 조금씩 승진시켰는데, 승진을 하건 안하건 근면성실한 태도가 변하지 않길래 크게 신용하며 심복으로 키웠다는 것.[28] 단 이 쪽은 다른 다이묘 밑에 꽤 오래 있다가 온 사람이다.[29] 대표적인 예가 사쿠마 노부모리[30] 노부나가의 근면함을 따라올 자는 드물었다.[31] 대대로 주군을 모시며 그 가문의 정치에도 관여해 온 측근 가신을 가리키는 말이다.[32] 에도 초기에 나온 군담소설.[33] 그의 일생을 다룬 사료 중 가장 신뢰성있는 것으로 꼽히는 책으로 한때 한일 양국 인터넷 회선을 달구던 노부나가 잔혹설의 근거와 노부나가 잔혹설에 반박할 근거가 모두 들어있는 신기한 책이다. 히라이 카즈사(平井上総) 박사는 신장공기를 1차 사료 쪽이 아닌 군키모노나 계도, 예수회 서간이나 실록 등의 편찬 사료 쪽으로 분류하고 있다.[34] 노부나가의 일족들이 배치된 곳은 전부 세토내해를 끼는 지역인데 세토내해에 많은 해안선이 걸쳐진 시코쿠 동부마저 3남 노부타카를 위시로 배치했으니 노부나가는 중세에 상당한 경제력을 가지는 세토내해를 중심으로 한 친족 중심의 지배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시코쿠의 아와와 사누키는 칸레이였던 호소카와 가문의 중요 거점이었으며 특히 아와는 미요시 가문 시대에 걸쳐 목재와 쪽(藍)으로 폭발적인 경제력을 확보했기에 이런 해운을 이용한 경제성을 보고 펼친 정치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사실상 야스나가의 복귀를 명분으로 동세토내해를 차지하는 실리를 챙기려 했던 것으로 봐도 될 듯. 후에 히데요시가 아타기 진고로를 미요시 진고로로 부르거나 야스나가에게 양자를 맡기며 오사카에 군림한 것을 보면 노부나가가 동세토내해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었는지 간단히 알 수 있다.[35] 노부나가 주인장-야스나가 부장 또한 노부나가의 시코쿠 정책을 알아보는 것에 큰 영향을 주는 사료임에도 연호가 기입되어 있지 않기에 사료의 연도 비정과 오다-쵸소카베 관계를 알아가는데에 있어 큰 문제가 되고 있다. 특히 주인장 - 부장의 발급 시점은 오다 - 쵸소카베 관계에 있어서의 터닝포인트 취급을 받는 일이 많아 1578년, 1579년, 1580년, 1581년 등으로 많은 논의와 비정을 거치며 연구가 진행되었다.[36] 나카히라 케이스케 씨는 노부나가가 쵸소카베 가문을 대적하는 시기가 1581년의 말년까지 밀려난다는 것, 아와와 사누키에 모토치카에 의한 직접 지배가 보이지 않는 것을 근거로 노부나가의 시코쿠 정책은 쵸소카베 가문에서 미요시 가문으로 바뀐 것이 아니라 반 노부나가 세력이었던 마사야스가 노부나가에게 복속됨에 따라 적대 세력이 없어지고 쵸소카베 가문과 맞닿는 사태가 발생했기에 국분의 필요성이 생겨나 양자가 갈등하게 된 것이라 평가하고 있다.[37] 모토치카가 이요 남부의 우와군(宇和郡)을 침공하자 사이온지 가문이 이를 노부나가에게 전달했고 이를 받은 노부나가의 부교슈(奉行衆)가 사자(上使)를 파견한 것이 대표적인 예.[38] 다이묘를 말함.[39] 박수철 편역,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어떤 인물인가"에서 발췌. 해당 서적은 프로이스 일본사의 편역본이다.[40] 당시 승려에게 요구되는 중요한 역할 중 하나로 승려는 사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지식인 계층이었으므로 불도를 닦는 것과 학문에 전념하는 것의 비중은 비슷했다. 이 점은 서양의 성직자도 비슷하다.[41] "그 소행(엔랴쿠지 방화/학살)이 비록 잔인하다고는 하나, 기나긴 에이잔 승려들의 해악을 뿌리뽑았기에 천하에 공을 세운 일이라 할 것이다."(아라이 하쿠세키, 에도 시대의 유학자)[42] "당이나 승방이나 전부 엉망인 꼬락서니였다. 아아, 한탄스럽다. 에이잔의 승려들은 완전히 엉망이고 학문을 닦는 것을 게을리하여 행실도 어지럽고 불법도 난잡해졌다. 산의 전 사찰이 전멸한 것도 당연한 과보라 할 수 있겠다. 여타 대부분 사찰이 전부 그런 식이었다. 진실로 가련하구나." (타몬인 일기, 승려 시점의 기록이다.)[43] <신장공기>에는 대학살로 고명한 승려와 학자들이 몰살당하는 와중에 사찰에서 온갖 미소년과 미녀들이 쏟아져나와 "악한 승려들은 죽어 마땅하지만 우리는 살려달라"며 빌었다는 기술이 있다.[44] 중국 본토[45] 히데요시는 평민 출신이라 가신들도 부족했고 또, 노부나가의 결실을 가로챈 면이 있는 데다가 이에야스한테도 패하고 타협한 적이 있어서 자기 위엄을 높일 필요가 있었지만 노부나가는 원래 다이묘 출신이고 고다이 역시 충실했으며 관동 역시 본인이 직접 개발할 수도 있었을 테니 위험 부담이 높은 대륙 침공을 할 이유는 적다.[46]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힘을 꺾어놓기 위해 전봉이라는 형태로(즉, 도쿠가와의 기존 영지를 뺏고 새로운 영지를 수여하는 형태로) 관동에 보냈지만 오다 노부나가는 굳이 그럴 일도 없고 동맹인 도쿠가와의 힘을 꺾을 필요도 없었다.[47] 설령 노부나가가 조선을 침공했어도 조선 수군을 꺾지 못하고 명나라의 원군이 도착해 공세종말점에 이른 시점에서 일찌감치 마음을 접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랬다면 히데요시와 다르게 적당선에서 협상하여 정유재란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48] 유통에 따른 상업 정책은 에도 시대 후기에 와서 중시되기 시작한 것으로 그 전까지는 연공(쌀)이 중시되었다.[49] 당시 일본인 평균 신장은 155cm였다. 현대 일본인 기준으로 치환하면 약 186cm에 달한다.[50] 겐지와 헤이케가 번갈아가면서 정권을 잡는 것이 무가의 형세라는 사상. 센고쿠 시대 전에 일본을 지배한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가인 아시카가 가문이 겐지였다.[51] 박수철, 오다 도요토미 정권의 사사 지배와 천황[52] 대표적으로 우에스기씨가 후지와라 북가 카슈지계열이다.[53] 1570년 6월 28일 아네가와(姉川)에서 노부나가군이 양동작전으로 아자이, 아사쿠라 연합군을 괴멸시킨 전투[54] 아니메 빙과 20화의 대하 드라마가 바로 이 이야기를 방영한 것이었고, 이를 밖에서 잠긴 창고에 갇혀있다는 힌트로 써먹는다.[55] 阿波三好氏 p.239[56] 宮本義己, 2010, 『誰も知らなかった江』, p. 61-62.[57] 엔랴쿠지 학살 및 방화사건이 대표적이다.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비는 사람들을 참살하는 묘사나, '눈뜨고 보기 힘들었다' 등의 구절이 있다.[58] 구태훈 교수, "오다 노부나가"[59] 四国と戦国世界 p.148[60] 오다 도요토미 정권의 사사 지배와 천황[61] 아츠모리 항목에서 볼 수 있는 일본 고전 무용 음악. 실제로 노부나가는 아츠모리를 좋아해 즐겨 불렀다는 일화가 있다.[62] 만화 히카루의 바둑의 번외편에 이 야사가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63] 오다 노부나가는 교토의 감각에서는 지방인 오와리 출신이며, 땀을 많이 흘리고 운동량이 많은 전장에서 영양분으로 삼기 위해 짠 간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 무사 계급 출신이었다. 반면 교토의 공가(公家)식 요리는 현재도 심심한 간에 은은한 귀족적 풍미가 특징이다.[64] 각각 노부나가와 히데요시의 거성 이름. 문화·예술사를 설명할 때 이 단어가 많이 등장한다.[65] 오다와 도요토미의 앞글자를 떼어 음독한 것.[66]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의 철자법인 역사적 가나 표기법으로는 さうであるか로 쓴다. 오늘날의 일본어 표현으로는 '소-카(そうか)'[67] 출처 일본어 위키피디아 #. 문서에 따르면 작위를 받은 오다씨는 4명인데, 2명은 노부나가의 동생 오다 나가마스의 후손이고, 나머지 2명은 노부나가의 차남 노부카츠(信雄)의 후손들인데, 메이지유신 당시 오다 노부토시(織田信敏, 노부카츠의 4남 노부요시(信良)의 후손)는 텐도(天童)번, 오다 노부치카(織田信親, 노부카츠의 5남 타카나가(高長)의 후손)는 카이바라(柏原)번의 다이묘였던 이유로 자작을 받은 것.[68] 경관의 이름이 진짜 아케치인지는 확인된 사실이 아니라 루머에 불과하다. 또한 노부나리가 노부나가의 후손이라는 이야기는 정확한 구체적 증거가 아닌 노부나리의 증조부가 자칭한 것이 시초라서 정말로 그가 노부나가의 후손인지는 미스테리. 참고로 앞서 나온 직계 후손 노부타카는 이를 우회적으로 부정하고 있다. #[69] 사후에도 노부나가의 후손은 실록에 딱 2명 등장한다. 숙종시절에 사신으로 온 하타모토 오다 노부카도(織田信門, 노부카츠의 5남 타카나가의 외손자다)와, 구한말에 고종에게 훈장을 받은 화족 오다 노부치카(織田信親, 앞에서 언급했지만 타카나가계) 자작.[70] 제기차기와 비슷한 원리로 공을 높이 차올리며 그 횟수를 겨루어 노는 경기. 당시 교토 귀족들의 소양이었다.[71] 1위 오다 노부나가(1,059표), 2위 사카모토 료마(1,047표), 3위 스기하라 지우네(603표), 4위 쇼토쿠 태자(582표), 5위 사나다 노부시게(561표), 6위 다테 마사무네(508표), 7위 우에스기 겐신(458표), 8위 도쿠가와 이에야스(440표), 9위 히지카타 토시조(426표), 10위 구로다 요시타카(380표).[72] 신장공기 1권 '뱀을 물리친 일' 조.[73] 유명 무장으로 노부나가의 젖형제이기도 하다. 후일 하시바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맞붙은 코마키-나가쿠테 전투에서 하시바군으로 참전해 전사한다.[74] '키쇼'란 맹세 의식이다. 예를 들어 '키쇼몬'의 경우 맹세장을 의미한다.[75] 당시 히데요시의 거성이다.[76] 신장공기 14권 텐쇼 9년 4월 10일조 기사.[77] 키노시타 도키치로(木下藤吉郞).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용하던 이름으로 히데요시는 키노시타 도키치로 -> 하시바 히데요시 -> 도요토미 히데요시 순으로 이름을 바꿨다.[78] 원문에는 목적어가 빠져있다. 殿라는 2인칭을 사용했다는 의견이 있는데, 현대어역에서 추가된 내용으로 보인다. 참고로 殿는 특정 지위 이상의 상대에게 사용하며, 보통은 남성이지만 여성에게도 사용할 때가 있다. 다른 번역에서는 そなた라는 2인칭을 사용했다.[79] 城下町. 다이묘의 성 근처에 조성된 상업 도시 구역. 전국 시대부터 본격적으로 조성되었다.[80] 일본, 중국, 인도를 의미한다.[81] 신장공기 13권 텐쇼 8년 3월 20일 기사.[82] 참고로 2년 전인 1915년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정1위로 추존받았다.[83] 내용 자체는 1989년에 와카마츠 씨가 출판한 『篠原長房』에 수정과 가필을 더한 서적이다. - 戦国三好氏と篠原長房 p.凡例/新版の刊行にあたって[84] 아마노 박사가 중심이 되어 70 ~ 10년대의 논고들을 묶은 서적이다.[85] 참조한 것은 아마노 박사 논고.[86] 참조한 것은 나카히라 씨 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