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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동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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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동설로는 밤하늘에서 보이는 천체의 이동을 설명하기 위해 복잡한 궤도를 상정해야 했다.
1. 개요2. 역사
2.1. 대두와 발전2.2. 지동설의 등장과 천동설 폐기2.3. 상대성 이론의 관점
3. 기독교 교리와의 관계에 대한 오해4. 여담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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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천동설() 또는 지구 중심설(, geocentrism)이란 움직이지 않는 지구우주의 중심에 있으며 그 주변을 태양 및 행성이 돈다는 설이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주장을 비롯하여 세계 각지의 문명에서 흔히 나타날 정도로 인류 천문학의 주류이던 학설이었으나, 근대 자연 과학의 발전(케플러의 법칙, 뉴턴의 운동 법칙 등)으로 지동설이 발전하면서 폐기되었다.

현대 물리학 관점에서 보면 천동설은 지표면을 기준으로 둔 비관성 좌표계에서 천체 운동을 기술했다 볼 수 있다.

2. 역사

2.1. 대두와 발전

근대적인 천문학이 연구되기 전까지는 천동설이 더 설득력 있는 이론으로 받아들여졌다. '자신이 두 발을 땅에 붙이고 있는' 지구가 움직인다는 것이나, 누구나 하늘만 보면 뜨고 지는 것을 알 수 있는 태양이 '사실은 고정되어 있다'[1]는 것을 고대인의 평균적인 상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으며, 겉보기 운동의 직관성에 따라 관측자가 운동의 중심을 자신으로 두는 것은 당연한 접근이었다.[2] 심지어 지동설이 정립된 오늘날에도 '일출'과 '일몰',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 같은 말이 쓰이고 중, 고등학교 수준의 천문학 수업에서는 별과 관련한 교육 때 태양계를 중심에 놓고 별자리들이 움직이는 모델을 사용한다. 모두 겉보기 운동에 따른 직관성의 예로 들 수 있다.[3]

플라톤에 의해 동심원 모델이 등장하였고 에우독소스가 플라톤의 모델을 상당 부분 개량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동심원 모델이 확립되었다. 2세기경의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는 천동설을 집대성하여 '알마게스트'를 저술하였다. 그는 이심원 모델과 주전원(, epicycle) 모델, 동시심 모델을 이용하여 동심원 모델이 갖고 있는 오류들을 수정하였다. 즉, 궤도의 중심 자체가 지구 주위를 감싼 가상의 원(deferent)을 따라 공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위성의 궤도에서 행성만 쏙 빼놓은 셈. 이러한 방법은 비록 여러 개의 주전원을 사용하는 등 복잡하긴 하지만 겉보기 운동을 매우 수학적으로 정교하게 설명할 수 있었다.[4] 예를 들면 프톨레마이오스식 주전원 이론을 적용한 아래의 동영상처럼 말이다.



당시 천동설은 금성화성 등의 불규칙한 위치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서 복잡한 궤도를 그려냈어야 했으나, 결과적으로는 당시까지 관측된 천체들의 움직임을 설명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민중과 학계 모두에서 널리 받아들여졌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프톨레마이오스는 천동설을 주장한 대표적인 학자였지만, 우주 구조에 대한 두 가지 관점은 양극단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이유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우주의 구조에 대한 철학적 의문에 집중했던 반면, 프톨레마이오스는 우주의 구조를 수학적 모델을 통해 설명하려는 것에 집중하였기 때문이다.

중세에 이르러서는 고대인들의 경우처럼 직관성만으로 천동설이 지지받은 것이 아니었다. 이 시기가 되면 정교한 주전원 궤도 모델을 그릴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천문 관측 자료가 축적되어 있었다. 이미 지동설에 대한 이론도 아리스타르코스에 의해 제기된 바 있고,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지동설을 검토할 가치가 있는 가설로 간주했다. 그러나 당시까지의 관측 자료를 바탕으로 한 천문학에서는 천동설로도 천체의 움직임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었기 때문에 천동설이 여전히 지배적이었던 것이다.

천동설이 받아들여진 배경에는 현대와는 다른 중세의 자연 철학 관념도 이유가 되었다. 중세의 과학 이론은 그 자체로 완전무결한 아름다움이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원소설부터 시작하여 우주가 단순히 빈 공간이 아닌 무언가로 가득 차 있다는 에테르 가설, 불의 원소가 과학적으로 존재할 것이라는 플로지스톤 가설, 만물을 변환시킬 수 있다는 현자의 돌 등 전지전능한 이 창조한 우주에 예외와 불완전성이란 받아들이기 힘든 개념이었다. 이 때문에 지동설 자체는 천동설이 주류였던 당시에도 일리 있는 가설 정도로는 대접을 받았으나, 그 궤도가 이 아닌 타원이라는 사실은 16세기 요하네스 케플러가 증명하기 전까지 천동설도 지동설도 주위를 도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완벽한 원운동을 한다고 믿었다. 이러한 '과학의 무결성'에 대한 믿음은 중세 이후에 사라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가 만든 지동설 모형도 그러한 영향을 받아 행성 궤도를 원형으로 전제하는 오류가 존재했으며, 심지어 무결성에 대한 믿음은 현대까지 이어져 양자역학이 학계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는 주요인이 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역작 《알마게스트》는 9세기에 이븐 후나인 등의 학자들에 의해 수차례 번역되었다. 이슬람교 문화권에서는 점성술을 '신의 뜻을 알 수 있는 유용한 도구'라고 생각해서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한 천문학을 크게 발전시켰다. 프톨레마이오스가 제안한 궤도와 이슬람 학자들이 관찰한 값에 차이가 있자, 대안이 될 수 있는 여러 모델에 대한 가설도 이슬람권에서 이미 제기되었다. 그리고 중세 성기 동안에는 이러한 자료들이 라틴어로 번역되어 유럽 중세 사회에 널리 받아들여졌다. 후대의 코페르니쿠스 역시 지동설 주장에 이슬람권의 자료를 참고한 것으로 여겨진다.

2.2. 지동설의 등장과 천동설 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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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톨레마이오스 모델로 설명한 금성의 궤도.

천동설에 대비되는 지동설은 기원전 2세기 아리스타르코스를 비롯한 몇몇 학자들에 의해 주장되었고 헬레니즘 시대에는 주요 가설 중 하나로 취급되었으나(대표적 사례가 아르키메데스) 프톨레마이오스의 주전원 개념이 널리퍼지면서 한동안 사장되어 있다가, 코페르니쿠스갈릴레오 갈릴레이 등의 천문학자들이 등장하면서 본격적으로 궤도에 오르게 된다. 또한 초신성혜성의 존재를 발견함으로써 기존까지 있던 '완벽한 천상계'라는 개념에 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했으며, 금성의 위상 변화 등 기존 천동설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로 뒷받침되었다.

그러나 이때에도 지동설이 채택되는 일은 없었다. 초기 지동설 모델은 천동설보다도 더 번잡했기 때문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에서는 주전원을 27개 썼지만 코페르니쿠스는 46개를 썼다. 주요한 원인은 코페르니쿠스가 원운동이 아닌 다른 궤도를 생각하지 못한 탓이었다. 지동설 역시 초창기에는 관념적인 모형 만들기를 중시하였으며, 천체의 운동은 '당연히' 완벽한 원이겠거니 생각했기 때문에 빚어진 한계였다.

둘째는 역학의 문제였다. 당시에는 물체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을 세상 모든 물체가 우주의 중심으로 가라앉으려 하는 성질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중력 개념에 익숙한 현대인들 입장에선 어색해 보이겠지만, 아이작 뉴턴만유인력 이론이 지동설보다 더 나중에 나왔다는 것을 생각해 보자. 또한 관성의 개념도 없었던 당시 시대상, 흙이 뭉쳐져 만들어진 지구가 움직이는데 부서지지 않는 것도 설명 불가능했다. 거기에 더해 지구가 움직이는데 그 누구도 그 움직임에 의한 영향을 받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5]과도 모순이었다.

그래도 지동설에는 프톨레마이오스식 천동설로는 설명하지 못하는 새로운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으나, 천동설을 유지하면서도 그런 천체 현상을 설명 못 하는 게 아니었다. 티코 브라헤가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을 개선해 자기식 천동설을 내놓았는데, 이 천동설은 '달만 빼고 모든 행성이 태양 주변을 돈다, 하지만 달과 태양은 지구 주위를 돈다'는 이론이었다. 그리고 이건 코페르니쿠스식 지동설보다 정확했다. 브라헤가 지동설을 검토해 보긴 했으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 당시까지는 가장 정확한 관측 데이터에 따르면 '지구가 움직여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생기는 여러 가지 의문점들을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연주시차의 값이 0이면 천동설이 옳은 것이고, 0보다 크면 지동설이 옳은 것이다. 그런데 브라헤가 잰 연주 시차는 0이었고, 따라서 천동설은 유지되었다. 실제로는 연주 시차는 0보다 크지만 그 값이 너무 작아서 당시 기술로는 이 작은 값을 관측해 내지 못하고, 그냥 0으로 나왔던 것이다.

다만 여기까지 왔으면 '왜 다른 행성은 태양 주위를 도는데 지구만 태양이 지구를 도는가'라는 질문과 '상대성 원리에 비춰 태양이 가만있고 지구만 움직이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는 의문이 생기기에 지동설로 이행하기 위한 밑바탕이 갖춰졌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케플러도 티코 브라헤의 태양 중심 우주관과 타원 가설이 없었다면 케플러 법칙과 지동설을 증명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후 지동설이 본격적으로 역전한 것은 요하네스 케플러의 시대였다. 케플러는 행성들의 원운동이 보여주는 완전한 세계관에 이상을 갖고 티코 브라헤의 아래로 들어가 학문을 배웠다. 그런데 이후에 티코 브라헤의 비협조로 얻지 못하던 관측 자료를 들어 연구하다 보니 예측되었던 것과 8분[6]의 각 차이가 있었고, 여기에 케플러는 매우 좌절했다. 그러나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연구에 나선 끝에 1618년에 케플러의 법칙을 정립했다. 케플러의 법칙은 지동설을 기초로 행성의 타원 운동(이는 기존의 '완전한 원운동'의 관념을 뒤엎는 혁신이었다.)을 분석하여 내놓은 3개의 가설이었다.

하지만 천동설이 완전히 폐기되게 한 결정적인 계기는 아이작 뉴턴역학 덕분이었다. 상기했듯 지동설을 받아들이면 당대인들이 관찰해서 알아낸 역학과 많은 모순이 발생했기 때문에 많은 거부감을 샀다. 당대의 역학 중 임페투스 가설 이라는 유력한 가설이 있었다. 임페투스 가설로 행성들이 왜 원운동을 하는지에 설명할 수 있지만 타원형 궤도는 설명할 수 없었다.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의 모델이 행성들의 궤도를 '당연히 아름답고 완벽한 도형인 원이겠거니' 하고 넘어간 원인에는 임페투스 가설의 영향도 한몫했다. 요하네스 케플러 역시 역학에서는 별다른 말을 안 했고 그냥 '수학적으로 아름다우니까'라는 매우 관념적인 주장만 반복했다. 때문에 케플러의 모델은 매우 정교하고 정확하게 천체의 운동을 설명하는 가설로 간주되었으나 아직 '법칙'으로까지 여겨지진 못했다.

아이작 뉴턴 항목에서도 자세히 설명하지만, 뉴턴의 역학을 통해 '지상의 역학'은 물론 (당시 관측 가능한) '모든 우주의 역학'이 동일함을 설명할 수 있게 되어서 천동설이 드디어 폐기된다. 이 공로로 뉴턴은 당대부터 이미 세상의 칭송을 받았다. 인간이 결국 온 세상의 법칙을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을 얻었다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광행차가 1674년 로버트 후크에 의해 처음 관측되고 1729년 제임스 브래들리가 해석하며 천동설에 관 뚜껑을 덮었고 1838년 프레드리히 베셀이 연주시차를 확인하면서 관 뚜껑에 못을 박아버렸다.

유리 가가린 등 우주인들이 지구 밖으로 나가본 것으로 지동설을 관측할 수는 없다. 유리 가가린이 직접 가본 우주인 지구 궤도에서는 지상에 있는 인간이 관측하는 것과 별 차이 없는 천구를 그릴 수 있을 뿐이다. 지구의 자전을 관찰하려면 까지 가야 한다. 태양과 지구의 각도가 유지되면서 지구가 자전하는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다. 다만 우주인이 지구의 구형 모습을 직접 관찰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며 관측을 근거로 지구 평면설을 반박할 수 있다는 말은 맞다. 이는 천동설과 지구 평면설이 과거의 천문 이론으로 패키지로 묶여서 알려진 탓이 크다.

2.3. 상대성 이론의 관점

천동설을 배척하고 지동설을 확립했을 때 갈릴레오나 뉴튼은 그것이 끝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이 고약한 아인슈타인이 나온 것입니다. 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절대적으로 무엇이 정지해 있고 무엇이 움직인다는 기준이란 없으며,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고 해야 이론적 모델이 더 간단해질 뿐이지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고 해도 절대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장하석, 《장하석의 과학, 철학을 만나다》중에서-[출처]

일반 상대성 이론의 관점에 따르면 천동설이 꼭 틀린 것은 아니라고 한다. 일반 상대성 이론적으로는 무엇이 관성 운동을 하고 가속되는지가 가속도 중력장과 동등성 개념이 있어서 운동학적으로 절대적인 개념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지동설 모델이 사용되는 이유는 그래야만 천체 운동을 설명하는 이론적 모델이 더 단순하고 간단해지기 때문이다.[출처]

3. 기독교 교리와의 관계에 대한 오해

교회는 ‘우리가 해석한 성경에 반하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과학적인 이유가 강력하더라도 없어져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과학적 추론으로 지지되는 진리(truth)는 배제되지 않았다. 성경 구절의 해석이 과학적 추론과 명백히 배치되는 경우 그 해석을 수정하려 했다. 평평한 지구를 제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성경 구절들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교리는 마땅히 구형의 지구를 받아들였다. 반면에 교회는 누군가가 몇몇 애매한 추측들을 내놓았었기 때문에 변화하려 하지 않은 것이다. 교회는 증거(proof)를 원했다. 과학적인 문제에서의 과학적인 증거 말이다. (당시 교회가 원했던) 증거는 현대의 과학 기관들에서와 다르게 행동한 것이 아니다. 여러 나라들의 대학들, 학교들 및 연구 기관들은 새로운 아이디어들을 커리큘럼에 포함시키기 전에 보통 오랜 기간을 기다린다. 하지만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에 대해서는 그때까지 확실한 증거가 없었다. 그래서 교회는 갈릴레오에게 그것을 ‘가설로서’(as a hypothesis) 가르칠 것을 권고했고, ‘진리로서’(as a truth) 가르치는 것을 금했던 것이다.
-파울 파이어아벤트, 『방법에 반하여』(Against Method)
갈릴레이가 내세운 주된 근거는 조수가 발생하려면 지구가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갈릴레이가 지구의 운동은 옳게 본 반면에 조수 발생의 원인을 잘못 짚은 것은 두고두고 오점으로 남았다. 교회로서는 어느 체계가 옳든 직접적인 상관은 없었다. 천동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주의 둘 다 기독교 교리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 로런스 M. 프린시프(Lawrence M. Principe), 『과학 혁명』

결론부터 말하자면, 기독교 교리와 천동설은 아무 관계가 없다. 애초에 당시 어느 종교 논의를 봐도 천동설을 교리의 차원으로 간주하는 서술은 없다. 각자의 신학자들은 천동설, 지동설을 개인 의사에 따라 지지하기도 하고 반박하기도 했으나 말 그대로 개인의 호오일 뿐이었다. 신학자 개개인의 해석이 전부 교리라면 예수는 부활 직후 구의 형상을 했다는 주장[9]도 교리일 것이고, 원죄가 정액으로 전달된다는 주장[10]도 교리일 것이며, 포크를 쓰는 것은 신성 모독이라는 주장[11]도 교리일 것이며, 기독교인들 간에 원거리 무기를 쓰는 것이 죄라는 주장[12]도 교리일 것이다. 후술하지만, 일부 신학자들은 천동설을 백안시하기도 했으며 천동설과 관련된 주장으로 인해 화형된 학자도 있다.

중세 말~르네상스 시기의 자연 철학, 신학은 현대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과학과 종교의 관계로 정리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비록 자연 철학이 자연 과학의 조상으로 간주되긴 하나, 당시의 자연 철학은 말 그대로 철학을 바탕으로 자연을 보는 관점이었기 때문에, 현대의 과학과 전혀 다르게 관념론적, 목적론적 성격이 짙었고 세계를 기계적으로 파악해서 분석하지도 않았다. 상기했듯 천동설도 그랬고, 지동설 역시 그런 한계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심지어 갈릴레이 당시에는 과학이라는 단어조차 존재하지 않았으나[13], 갈릴레이 사건을 과학과 종교의 대립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후대 사람들은 임의적으로 자연 철학이라는 단어를 과학이라 번역해서 맥락을 호도하고 있다.

또한 종교의 성격 역시 당시에는 세속적 권력 기관이기도 했고, 단순한 종교 단체를 넘어서 교육, 복지, 학문 등등을 모조리 담당하는 '공공 기관'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현대의 교회와 같은 선상에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즉, 당시 종교계가 학계를 포함하고 사회를 대표하고 있었기에 '기존 사회의 대표자'로서 가톨릭교회 측이 지지한 기존 학설과 막 일어난 신생 학설 간의 대결이었던 것이, 후대의 중세와 종교 까기에 골몰한 계몽주의 시대 학자들에 의해 과학 vs 종교의 대표적인 사건으로 연출된 것이다. 그 결과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천동설은 원래부터 틀려먹은 학설이었고 다 종교 탓'이라는 식으로 생각한다. 그 덕분에 당대에 실제로 갈릴레오와 치열하게 대립했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에게는 면죄부가 주어졌다.

일단 천동설 혹은 지동설이 가톨릭교회에서 '교리' 차원의 주장으로 받아들여질 성격의 것이었는지 살펴보자. 교회는 당대에 이미 성경이 자연 과학을 정확히 설명하고 있는 책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일례로 중세 초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자인 아우구스티노부터가 '첫 장부터 빛이 먼저 생기고 그다음에 태양이 생겼다는 얼토당토않은 소리가 쓰여 있다'고 했다[14]. 이런 전통은 갑자기 나온 것도 아니고 1~3세기부터 그리스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이 논쟁하면서부터 이어진 것이다. 일례로 레위기에서는 메뚜기의 다리를 4개라고 서술해 놓기도 했다.[15] 그래서 가톨릭교회는 성경의 글귀를 있는 그대로 해석해서 세계를 설명하려는 것은 아주 초기부터 관두고, 무언가 상징적인 해석으로 보며 그런 논쟁을 피했다. 지동설에 대해서도 같은 입장을 취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단적으로, 지동설을 당대에 발굴한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부터가 본직은 성직자이다. 천문학은 학위가 있거나 정식 교육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 또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주변에 알려졌을 때 그의 주변인들은 출판을 권유했다. 지동설이 책으로 저술되는 데에는 꽤나 지체가 있긴 했지만 교회에게 탄압받을까 두려워해서 늦추었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를 발간했을 때에는 교황의 비서가 그 책을 교황에게 소개하기도 했으며 쇤베르크 추기경이 지동설을 자세히 가르쳐달라고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레고리력을 만들 때 코페르니쿠스의 모델을 이용해 역법을 계산하는 등, 그의 이론은 유용한 것으로 취급되었다. 즉 가톨릭교회는 그의 우주관이 기독교 교리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히거나 위협적인 것이 아니며, 오히려 실무적으로 유용한 것이라고 보았다.

둘째로, 자연 철학 사조도 살펴보면, 천동설과 지동설의 대립은 당대 자연 철학의 대표인 아리스토텔레스주의-당대 기하학과 수학을 대표한 신플라톤주의의 대립이라는 성격이 두드러진다. 당시 자연 철학과 기하학은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 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천문학을 '천상의 법칙을 연구하는 학문'이라며 고귀한 학문으로 간주했다. 반면 기하학은 지상의 운동 법칙만을 다루는 학문으로 천한 것으로 여겼다. 지동설은 신플라톤주의에서 발전한 수학-기하학 방법론을 이용해서 우주의 운동 법칙을 설명하려고 한 것인데, 자연 철학자들에게는 이것이 영역 침범으로 간주되었다. 갈릴레이를 싫어한 많은 자연 철학 교수들은 갈릴레이를 수학 교수가 빽으로 자연 철학 학위 따서 설치고 다닌다고 비난했다.

또한 갈릴레이가 '신플라톤주의에 의한 우주 설명'의 일환으로서 목성의 위성을 관찰한 것도, 그의 적대자인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에게 보여주자 그런 거 관찰 안 된다며 갈릴레이의 이론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기도 했다. 또, 위에서 보듯이 천동설의 최종 형태를 만든 사람은 천문학자 티코 브라헤다. 지동설이 당시 혁명적인 이론으로서 과학계의 주류였고 종교가 조직적으로 과학을 탄압하는 상황이었다면, 수많은 과학자들이 갈릴레이에게 동조하고 교회는 그들을 전부 탄압하는 사건이 벌어졌을 텐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갈릴레이의 적대자들은 순전히 종교인들이 아닌 당대의 과학자들도 다수 존재했다. 즉 당시에 지동설과 천동설의 대립은 통설에서 생각하듯 과학과 종교의 대립으로서 설명될 일이 아니라 아직 과학으로 변화하지 못한 두 철학의 싸움이기도 했던 것이다. 수학적 방법론에 의지하는 근대 과학은 이 천동설-지동설 논란 과정을 통해서 생겨난다.

코페르니쿠스만 해도 정밀한 새 천문 관측 자료를 통해서 새 이론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철학적 사유, 즉 '신은 아름다운 도형인 원형으로 우주를 창조했을 것'이라는 추론을 통해서 지동설을 주장했다. 그의 저서를 보면 태양을 하느님에 비유하고, 지구를 인간에 비유해서 '하느님에게서 오는 은총에 의지해야 하는 인간'으로 지동설을 비유했다. 당장에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의 모델에서는 행성들의 궤도가 원형이어서 관측값과 약간 오류가 있었는데, 이것은 '원은 아름답고 완벽한 도형'이라는 신플라톤주의적 관념에서 도출한 결과였다. 케플러는 코페르니쿠스 모델을 수정해서 타원 궤도의 모델을 만들었으나, 갈릴레이는 케플러의 지적을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이 역시 신플라톤주의의 관념을 고집했기 때문인 듯하다.

셋째로, 당시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기반한 천문학과 점성술은 분리가 전혀 안 되었다. 현대인의 입장에서는 당시의 천문학을 그냥 점성술로 부르거나 같은 것으로 간주해도 무방하다. 요하네스 케플러조차도 이름을 날린 계기는 점성술의 예언이 몇 번 맞아떨어진 덕분이었다. 천체들의 움직임이 인간 개인이나 인간 사회의 길흉화복과 관련이 있다는 믿음을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신실한 가톨릭 신학자들 중 일부가 이 때문에 천문학-점성술을 비방하기도 했다. 고대에는 행성을 곧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신과 동일시했고, 점성술에는 그 흔적이 짙게 남았다.

중세에 부활한 천문학-점성술은 행성과 고대의 신을 동일시하는 경향은 지워졌으나 결정론적인 관념이 문제가 되었다. 가톨릭 신학에서는 인간에게 자유 의지가 존재한다고 믿는데, 별의 움직임에 의해 인간의 운명이 결정된다면 인간의 자유 의지가 없다는 의미로 바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특히 당시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주로 이슬람에서 발전하여 유입된 것이었는데, 이슬람교는 가톨릭과는 정반대로 신의 절대성과 전지전능을 강조하기 때문에 천문학-점성술의 결정론적인, 즉 인간에게는 자유 의지가 없고 신의 의지로 모든 것이 결정된다는 견해를 문제 삼지 않았다. 이로 인해 유럽으로 수입된 천문학-점성술은 결정론적 사유가 매우 짙게 깔려 있었다. 물론 서구나 이슬람이나 천체의 움직임이 신의 뜻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전혀 없었다. 어쨌건, 유럽에 유입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천문학은 가톨릭교회와는 '천체의 움직임은 물리적 사건에는 영향을 미치나, 인간의 영혼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결론으로 서로 타협을 봤다.

이 불안정한 타협과 갈등들은 가톨릭교회와 신플라톤주의의 야합으로 국면이 바뀌었다. 가톨릭 성직자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한 것이다. 별의 움직임이 인간의 길흉화복에 영향을 미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비해서, 별의 움직임은 신이 설계한 기계 장치라는 철학적 사유가 담긴 지동설은 가톨릭 일부 신학자들 입장에서 매우 매력적이었던 것이다. 갈릴레이의 지동설도 갈릴레이가 논쟁을 지나치게 키우기 전까지는 오히려 가톨릭교회에게 지지를 받았다. 갈릴레이는 지동설 관련으로 재판을 이미 두 번이나 받았으나 두 번 다 무혐의로 풀려났다. 다만 이 과정에서 벨라르미노 추기경은 갈릴레이에게 "타당한 논증 없이는 더는 지동설이 유일한 진리임을 주장하지 말아라." 하고 권고했다. 그는 "지동설이 '참된 논증'을 통해 입증된다면, 성경에 근거하여 지동설이 틀렸다고 단정해서는 안 되며 성경을 신중히 재해석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하고 주장하여 기존 성직자들과 뜻을 같이했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따른 천동설을 주장한 학자 중에는 결정론적인 해석을 하는 바람에 화형된 학자(체코 다스콜리[Cecco d'Ascoli], 1327년 사망)가 존재하는 것에 비하면, 갈릴레이에 대한 교회의 이런 대응은 유한 수준이라 할 수 있다.

가톨릭교회는 갈릴레오의 요청으로 지동설을 가설의 차원에서 논의하는 것을 허가했다. 코페르니쿠스의 저서도 4년 뒤인 1620년 금서에서 해제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천동설이건 지동설이건 교회 입장에서는 교리 차원에서 왈가왈부할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사실 교회는 천동설을 교리로 여기지 않았으나, 지동설 역시 교리로 여기지 않았다. 일부 신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를 이교도라며 비난했음에도 불구하고, 종교인들 중에서도 당시의 '최첨단 선진 학문'인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수용한 사람은 충분히 많았다. 일부 신학자들이 천동설을 포함한 천문학-점성술을 비난한 이유는 그것에서 이어지는 결정론적 사유 때문이지, 교회에게 있어서 땅이 움직이느냐, 하늘이 움직이느냐는 본질적인 논쟁거리가 아니었다. 말하자면 그저 달력을 더 정교하게 만들 수 있는 도구적인 부분이었던 것이다. 이 원칙이 천동설에게 그랬듯이 지동설에도 적용되었던 것뿐이다. 땅이 움직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가톨릭 교리가 아닌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였다.

그런 논쟁 속에서 갈릴레이의 친구인 마페오 바르베리니 추기경이 1623년 우르바노 8세 교황으로 즉위하자 갈릴레이는 그에게 천동설과 지동설을 균형 있게 다루라는 조건 하에 '지동설을 가설 차원에서 논의하는 책을 발간해도 된다'는 허가를 받았고, 그리하여 <두 우주 체계에 대한 대화>를 1630년에 출간하게 된다. 그 책은 3명의 등장인물이 4일간 대화를 나누는 내용으로 구성되었으며, 갈릴레이는 특히 밀물과 썰물을 지구 공전에 대한 증거라고 생각해서[16] 가장 중요하게 다뤘다. 그러나 교회 검열로 조석 현상에 관한 내용은 빠졌다. 해당 부분에 교황을 모욕했다고 간주되는 서술이 들어 있었기 때문[17]이다. 하지만 "두 이론 중 어느 것이 맞는지는 신만이 아신다." 하고 서문을 쓰고 책의 전체적인 내용은 지동설을 지지했다. 천동설을 주장하는 이들을 '심플리치오(직역하면 '단순이', 의역하면 '바보')라는 이름을 붙이고서 그들을 조롱조로 대했으며, 심지어 바보로 묘사된 심플리치오가 교황을 모델로 했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이 사실에 교황과 신학자들은 격분했고 천동설 지지자와 교회를 모욕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책이 성경 내용에 저촉된다는 혐의, 그리고 1616년 교황과 했던 서약을 지키지 않았다는 혐의로 갈릴레이는 종교 재판에 다시 회부되어 자신의 모든 주장을 철회하고 다시는 관련된 논쟁을 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고서야 풀려난다. 사실 종교에 의한 탄압이란 프레임 때문에 갈릴레이에 대한 종교 재판을 무시무시한 위협 같은 것으로 상상하게 되지만, 재판 과정에서 갈릴레이는 위협이나 심문은커녕 토스카나 대공의 저택에서 하인까지 대동하며 잘 대접받았고, 고문과 화형으로 끔살당하는 것이 빈번했던 당대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다시는 관련 주장 안 하겠습니다'라는 선언 한마디로 땡 치고 풀려난 것은 매우 유한 판결이었다. 시대적 맥락을 생각하면 교황청의 갈릴레이 재판은 논란을 몰고 다니는 학자를 보호하기 위해 형식적으로 혼내는 모습을 보여주는 쇼에 가까운 정도였다. 이때 갈릴레이가 재판정을 나오며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는 말을 남겼다는 전설이 생겨났으나, 해당 발언은 후대에 갈릴레이를 종교에 맞선 과학의 순교자로 묘사하는 과정에서 후대에 덧붙인 말로, 실제 발언이 아니다. 상세는 해당 항목 참조.

결국 갈릴레이의 재판은 종교-과학의 논쟁보다는 논쟁을 즐긴 학자가 반대파를 지나치게 모욕하고 다니는 등 처신을 잘못하다가 벌어진 일의 성격이 짙다. 특히 별에 의해 인간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주장을 한 천동설자는 화형된 사건, 반대로 천체의 운동과 지상의 사건이 무관하다고 주장한 갈릴레이는 살아남은 것을 비교하면 교회가 무엇에 더 관심이 있었는지 명확하게 보여준다. 갈릴레이 사건이 종교-과학의 논쟁이라는 프레임이 씌워진 것은 그 반대파 학자 중 하나가 하필 교회의 높으신 분이었다는 점 하나 때문인 것이다. 상기했듯 당시에는 교회가 '기존 사회 전체' 그 자체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애초부터 교리의 문제가 아니었던 셈이다. 사실 더 단순하게도, 갈릴레이의 지동설을 따른 당대의 다른 이탈리아 과학자들, 그리고 갈릴레이의 제자들 역시 딱히 지동설과 관련한 무언가로 재판을 받거나 탄압을 받은 적이 없다. 갈릴레이 재판 이후 갈릴레이가 공식적으로 지동설을 부인했음에도, 갈릴레이의 주변 종교인들 중 상당수는 여전히 지동설을 지지했다.

이를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천동설-지동설의 대립을 종교와 과학의 대립으로 결론을 내리는 것은 시대적 맥락을 파악하지 못한 오류를 범한다. 현대에도 과학자로서 정체성과 종교 신자로서 정체성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고, 믿음과는 별개로 학문에서는 학자로서 발언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 갈릴레이 재판도 비슷한 사례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신플라톤주의 간 대립이었는데 그 배경이 시대적 상황상 종교 재판정이었던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진화론과의 관계도 이와 비슷하다. 1950년대에 교황 비오 12세는 진화론과 기독교 교리 사이에는 대립이 없다는 점을 분명하게 밝혔다. 실제로 유신론적 진화론도 과학적인 내용이 아닐 뿐 '유신론적 진화론' 안에서 그 자체로 모순이 발생하지는 않는다. 물론 가톨릭뿐이긴 하지만 가톨릭이 선포한 내용이 다른 교파에도 상당히 큰 영향을 준다는 것을 감안하면 분명히 기독교 전체에도 작지 않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4. 여담

5. 관련 문서


[1] 물론 사실은 태양도 은하의 중심부를 축으로 공전하고 있으나, 적어도 태양계 모델에서는 고정되어 있는 셈이다.[2] 이러한 겉보기 운동과 과학적 실체의 불일치는 이후 상대성 이론에서도 반복된다.[3] 다만 옛날에는 우주의 중심은 당연히 지구라고 여겼다면, 지금은 관측 가능한 우주를 기준으로 지구가 우주 중심에 놓이기 때문에 편의를 위해 사용하는 것의 차이이다.[4] 수학적으로는 복잡한 궤도를 푸리에 해석을 통해서 분석한 것과 정확히 동일하다. 각 주전원은 푸리에 급수의 항 하나에 해당된다. 단지 프톨레마이오스 시기에는 아직 무한급수와 허수, 자연로그의 밑의 개념(즉, [math(e^{in\pi x}= \cos\left(n\pi x\right) + i \sin\left(n\pi x\right))])이 없었으므로 사람의 손으로는 정확한 궤도를 계산하는 것이 불가능했을 뿐이다.[5] 이것은 실제로 코리올리 효과로 나타난다. 당시의 관측 기술로는 관찰하기 힘든 현상이었던 것이다.[6] 원을 360도라고 할 때 그 도(degree)의 또 60분의 1이 '1분'이다. 8분을 도로 환산하면 고작 0.133도. 당시 브라헤의 관측은 정밀하기로 유명했다.[출처] 장하석,《장하석의 과학, 철학을 만나다》, 이비에스미디어(주), 2019(20쇄), p.147[출처] [9] 고대 로마의 신학자 오리게네스의 주장.[10] 서로마 제국의 신학자 아우구스티노의 주장.[11] 베네치아의 페트루스 다미아니(Petrus Damiani) 주교.[12] 교황 인노첸시오 2세의 주장.[13] 18세기에 들어서야 자연 철학(natural philosophy)이라는 단어가 자연 과학(natural science)이라는 명칭으로 대체되기 시작했다.[14] 태양에서 나오기 때문에, 태양이 빛보다 나중에 나왔다는 건 말이 안된다는 논리다. 헌데, 아우구스티노는 알지 못했겠지만, 현대 주류 과학의 관점에서는 오히려 창세기의 기술이 실제에 좀더 근접한 편이다(...). 빅뱅으로 인해 빛을 포함한 여러 입자들이 먼저 생겨났고, 태양은 한참만에 성간 가스들이 뭉쳐져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15] 유대교 랍비의 해설에 따르면, 고대 이스라엘인들이 메뚜기의 뛰어오르기 위한 긴 뒷다리를 날개라고 생각해서 나머지 작은 다리 4개만 다리로 센 것이라고 한다.[16] 현대에는 조석 현상이 달의 인력으로 일어난다고 밝혀졌다. 하지만 당시 유럽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체계에서는 점성술적 관념 때문에 모종의 연관이 있다고 여겼다. 반면 갈릴레이의 지동설 체계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적 관념을 부인하느라 '먼 거리에서 별에 의해 가해지는 신비한 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겼기에 밀물 썰물은 달과 무관하다고 판단하고 지구의 공전과 관련지었다. 결과적으로는 천동설 측이 이 부분은 맞은 셈인데, 더 중요한 것은 당시의 천동설-지동설 논쟁이 별의 움직임이 지상에 영향을 미치느냐, 아니느냐로 싸운 관념론적 성격을 보여준다는 점이다.[17] 교황이 지동설을 반박했을 때 발언한 말과 똑같은 문장을 심플리치오가 한다.[18] 종교 개혁의 기수였다는 점에서 언뜻 이해가 안될 수 있겠으나, 사실 마르틴 루터는 생각 이상으로 보수적인 인물이었다. 애초에 종교 개혁을 일으킨 95개조 반박문을 기고한 것부터가 본래는 단순히 면죄부와 관련해서 교황청 측과 신학적으로 키배하려는 게 목적이었다. 그래서 종교 개혁 운동에서 촉발되어서 신성 로마 제국 각지에서 교회귀족들을 상대로 민란이 일어나자, 봉기한 농민들을 폭도라면서 비난하는 등으로 철저하게 친기득권 성향을 띄었다. 되려 예수쟁이 이미지가 있는 장 칼뱅이 자연과학에 우호적이었고 사회적으로도 매우 진보적인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