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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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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1년 개벽에서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설문한 10개 부문별 위인의 선정자 및 차점자 명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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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 이이 이순신 최치원 솔거
- 을파소 을지문덕 박지원 담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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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제우 서경덕 문익점 최충 유길준
원효 정약용 흘간(屹干) - -
※ 응답수 100명 미만의 차점자는 공개하지 않음.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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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 천도교 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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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조
초대 2대 3대 4대
최제우 최시형 손병희 박인호
교령
초대 2대 3대 4대
이종린 정광조 이종린 공탁
5대 6-10대 11-15대 16대
공진항 신용구 최덕신 김명진
17대 17-19대 20-21대 22대
이우영 이영복 고정훈 정운채
23-24대 25-26대 27대 28대
오익제 김재중 김광욱 김철
29대 30대 31대 32대
이철기 한광도 김동환 임운길
33대 34대 35대 36대
박남수 이정희 송범두 박상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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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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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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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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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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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정 당시 기관명은 문화부(1990~1993) → 문화체육부(1993~1998) → 문화관광부(1998~2005)였다.
이달의 문화인물(1990-1997) }}}}}}}}}
초대 동학 교조
최제우
崔濟愚
파일:bandicam 2017-06-24 12-35-26-196.jpg
천도교 교단 요청본[1]
파일:수운최제우_이당김은호.jpg
시천교 교단 요청본[2]
<colbgcolor=#d60026><colcolor=#fff> 초명 최제선(崔濟宣)
아명 최복술(崔福述, 崔卜述)
성묵(性默)·도언(道彦)
수운(水雲)·수운재(水雲齋)
본관 경주 최씨[3]
출생 1824년(순조 24) 12월 18일[4]
경상도 경주부 현곡면 가정리
(現 경상북도 경주시 현곡면 가정리[5] 315번지)[6]
사망 1864년(고종 1) 4월 15일[7] (향년 39세)
경상도 대구도호부 서상면 계산동 관덕당
(現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2가)
묘소 경상북도 경주시 현곡면 가정리 산75번지 수운최제우태묘
종교 동학
비고 동학교조(敎祖)
부모 부친 - 최옥(崔鋈, 1762 ~ 1840)
모친 - 곡산 한씨(谷山 韓氏, 1785 ~ 1833) - 한문언(韓文彦)의 딸
부인 밀양 박씨
자녀 장남 최세정(崔世貞, 1847~1872)
차남 최세청(崔世淸, 1855~1875)
장녀 최?(崔?, 1856~졸년미상)
차녀 최완(崔婉, 1857~1927)
3녀 최?(崔?, 생몰년미상)
4녀 최?(崔?, 1865~졸년미상)
양녀 주씨(朱氏, 1844~졸년미상)

1. 개요2. 생애3. 여담4.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조선종교 사상가이자 동학(천도교)의 창시자 겸 제1대 교주[8]로 호는 '수운(水雲)'이며 '경주 최부자집'의 비조인 최진립의 7대손이다.[9]

2. 생애

양력이라 명시하지 않은 월일은 모두 음력입니다.
최제우는 순조 24년(1824) 10월 28일(양력 12월 18일) 경상도 경주부 현곡면 가정리(現 경상북도 경주시 현곡면 가정리 315번지)에서 유학자였던 아버지 근암(近庵) 최옥(崔鋈, 1762-1840)과 셋째 부인인 어머니 곡산 한씨(谷山 韓氏, 1785-1833)[10] 사이의 1남 1녀 중 서자로 태어났다. 아버지 최옥은 일찍이 정실부인 연일 정씨(1758-97)[11]과 둘째 부인 달성 서씨(1773-1811)[12] 등과 혼인하여 두 딸을 두었으나, 아들을 낳지 못하여 결국 첫째 남동생 최규(崔珪, 1770-1841)의 장남 최제환(崔濟寏, 1789-1851)을 입양하였는데, 최제우는 그 후 후실 곡산 한씨를 들여 낳은 자식이다. 그의 아명은 최복술(崔福述, 崔卜述)이고 초명은 최제선(崔濟宣)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재가한 몸이었으므로 최제우는 태생적으로 문과에 응시할 수 없었으나, 부친 최옥[13]은 "모름지기 8살 때까지 공부를 시켜보면 싹수를 알 수 있다."하며 최제우에게 유학 교육을 시켰다. 그러나 곧 가세가 기울더니 순조 33년(1833, 10세) 어머니를 여의고 헌종 6년(1840, 17세)에는 아버지를 여의어 홀몸이 되었다. 이후 최제우는 헌종 8년(1842, 19세) 경상도 울산도호부(現 울산광역시) 출신의 월성 박씨(月城 朴氏, 1826 ~ ?. 11. 9) 여인과 결혼하며 먹여 살릴 식구까지 생겼지만[14], 일정한 생계방편이 없어 몰락한 양반으로 지낼 수밖에 없었다. 농사도 배우지 않았고, 다만 한때 무과를 준비하기도 했으나 얼마 못 가 무인의 길을 접고 10년 동안 전국 각지를 유랑하며 장사꾼으로 일한 듯하다.[15]

이때 최제우는 조선이 망해간다는 암담한 현실을 선각한 듯하다. 청나라대영제국과의 아편 전쟁을 전해 듣고서 청나라가 대영제국에게 패배당했으니 우리나라는 순망치한의 상태라고 생각했으며 서학을 표방한 서양 세력들은 무슨 일이든 다 할 만큼 능통하기는 하지만 침략하려는 마음가짐을 지녔으니 서학도 올바른 정신세계는 아니라고 여겼다. 이 문제를 두고 높으신 분들과 이야기해보려 하였으나 양반들은 장사꾼 행색인 최제우에게 판에 박힌 말들(공자 왈 맹자 왈)을 하며 현실조차 파악하지 못하였다. 이런 경험들을 하면서 최제우는 "요순지치도 공맹지덕도 부족언(堯舜之治도, 孔孟之德도, 不足焉)"[16]이라며 말 그대로 새로운 가르침과 새로운 문화가 필요한 "다시 개벽"의 시대가 와야 한다는 생각을 굳힌 듯하다.

결국 장삿일을 끝내고 철종 5년(1854, 31세) 가지고 있던 전답을 팔아 경상도 울산도호부 상부면 길촌동(現 울산광역시 중구 유곡동 길촌마을 636번지)[17]로 이주해 지내면서 철물점을 경영했지만 사업에 실패했다. 이 때문에 빚쟁이들에게 쫓겨 다시 고향 경주부 현곡면 마룡골(現 경주시 현곡면 가정리 마룡골마을 산68-1번지)[18]로 들어가 천도를 얻으려는 수행을 계속하였다.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대략 이 즈음 이름을 '제선(濟宣)'에서 '제우(濟愚)'로 바꾸었는데, '제우'란 '어리석은 이를 구제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으니 그의 생각을 짐작해볼 수 있다.

그러던 중 철종 11년(1860, 37세) 4월 5일(양력 5월 25일), 신내림과 흡사한 현상을 경험하면서 스스로를 '상제'라고 부르는 존재와 대면하여 주문(呪文)과 병을 고치는 영적(靈的) 부적 문양을 받았다. <동경대전>에서 전하는 최제우의 체험은 다음과 같다.
[ruby(不意四月, ruby=불의사월)] [ruby(心寒身戰, ruby=심한신전)] [ruby(疾不得執症, ruby=질부득집증)] [ruby(言不得難狀之際, ruby=언부득난상지제)]
뜻밖에도 4월에 마음이 선뜩해지고 몸이 떨려서 무슨 병인지 알아낼 수도 없고 말로 형상하기도 어려울 즈음에


[ruby(有何仙語, ruby=유하선어)] [ruby(忽入耳中, ruby=홀입이중)] [ruby(驚起探問則, ruby=경기탐문즉)]
어떤 신선의 말씀이 있어 문득 귀에 들리므로 놀라 캐어 물은즉


[ruby(曰勿懼勿恐, ruby=왈물구물공)]
말씀하시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무서워하지 말라.


[ruby(世人, ruby=세인)] [ruby(謂我上帝, ruby=위아상제)] [ruby(汝不知上帝耶, ruby=여부지상제야)]
세상 사람이 나를 상제(하느님)라 이르거늘 너는 상제를 알지 못하느냐?"


[ruby(問其所然, ruby=문기소연)]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시기를


[ruby(曰余亦無功故, ruby=왈여역무공고)] [ruby(生汝世間, ruby=생여세간)] [ruby(敎人此法, ruby=교인차법)] [ruby(勿疑勿疑, ruby=물의물의)]
나 또한 공이 없으므로[19] 너를 세상에 내어 사람에게 이 법을 가르치게 하니 의심하지 말고 의심하지 말라.


[ruby(曰然則, ruby=왈연즉)] [ruby(西道以敎人乎, ruby=서도이교인호)]
그러면 서도(서양의 도[道]: 그리스도교)로써 사람을 가르치리이까?


[ruby(曰不然, ruby=왈불연)] [ruby(吾有靈符, ruby=오유영부)] [ruby(其名仙藥, ruby=기명선약)] [ruby(其形太極, ruby=기형태극)] [ruby(又形弓弓, ruby=우형궁궁)]
대답하시기를 "그렇지 않노라. 나에게 영부가 있으니 그 이름은 선약이요 그 형상은 태극이요 또 형상은 궁궁이니


[ruby(受我此符, ruby=수아차부)] [ruby(濟人疾病, ruby=제인질별)] [ruby(受我呪文, ruby=수아주문)] [ruby(敎人爲我則, ruby=교인위아즉)]
나의 영부를 받아 사람을 질병에서 건지고 나의 주문을 받아 사람을 가르쳐서 나를 위하게 하면


[ruby(汝亦長生, ruby=여역장생)] [ruby(布德天下矣, ruby=포덕천하의)]
너도 또한 장생하여 덕을 천하에 펴리라."
동경대전東經大全 - 포덕문布德文
최제우는 자신의 신내림이 은 아닌가 하면서 1년을 다시 수행하고서 그때 얻은 가르침의 의미를 진정으로 깨닫고 철종 12년(1861, 38세) 6월부터 비로소 본격적으로 동학의 주문과 가르침을 사람들에게 포교하기 시작하였다. 동학을 믿는 사람들의 숫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나자 영남 유림들 사이에서는 혹세무민의 사교라고 하여 동학을 배척하는 움직임이 생겼다. 이 때문에 철종 13년(1862, 39세) 9월 경주부 관아에서 최제우를 처음 체포하였으나 제자들이 탄원한 덕에 석방되었다. 이후 동학 활동을 지속하였다가 철종 14년(1863, 40세) 12월에 이름만 바꾼 서학이라는 혐의와 '혹세무민'한다는 혐의를 받아 다시금 체포되었다.

조정에서 파견된 선전관 정운구(鄭雲龜)가 올린 장계에 따르면 '경주에 가까워올수록 주문(삼칠주三七呪)[20] 소리가 마을마다 채우고 있었다.'고 하므로 당시 동학의 파급력이 강했음을 알 수 있다. 최제우가 철종 12년(1861) 6월부터 사람들에게 자기 가르침을 펴기 시작하였으므로, 동학의 창시자로서 대외활동을 한 기간은 고작해야 2년 반에 불과하다. 이 정도만으로도 조정이 동학을 위험하게 여길 만큼 사람들이 호응한 것이다.[21]

최제우 동학에서 가장 눈에 띄는 모습은 삼칠주(21자 주문)를 가르치고 그것을 외워 일종의 신내림 체험을 시켰다는 것이다. 일단 신내림 체험에 성공한 사람은 동학에 무섭게 빠져들었다고 한다. 종교사에서 이런 신내림 체험이 유행할 때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사회에 부조리가 만연하여 억눌린 계층이 많아야 한다는 것이다. 평화롭고 불만이 적절한 선에서 관리되는 사회에서는 이처럼 신내림 체험을 유도하는 종교가 대중적인 호응을 받지 못한다. 조선 말기 혼란스럽고 부패한 시대상에서 최제우의 삼칠주 주문의 내용대로 하늘의 지극한 기를 받는 체험을 했다고 생각한 동학의 신자들은, 이제 세상을 바꿀 수도 있다는 열정에 휩싸였다.

최제우는 체포된 채로 압송되어 경기도 과천현까지 왔다가 철종이 갑작스럽게 죽어 조정이 혼란해진 탓에 다시 경상도 대구도호부에 있던 경상감영으로 이감되었다. 해가 바뀌어 고종 1년(1864) 3월 10일(양력 4월 15일) 경상감영 관덕정 뜰에서 사형이 집행되어 41세 나이로 제자들과 함께 순교(殉敎)하였다.

최제우의 살아남은 유일한 직제자 해월 최시형은 동학의 2대 교주로 추대되었다. 천도교에서는 최제우가 살아생전에 이미 도통을 전해주었다고 설명하지만, 실제로는 살아남은 유일한 직제자라 추대되었다고 봄이 적절하다.[22] 최시형은 스승 최제우의 가르침을 최대한 조선 조정이 용인하기 쉽게 성리학스러운 윤리도덕에 부합하게 해석하고, 주문 수행으로 신내림 체험을 유도하는 일을 그만두었으며, 동경대전 · 용담유사를 목판인쇄하여 퍼트렸다.

그러나 동학의 모든 신자들이 최시형을 최제우의 뒤를 이은 2대 교주로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신내림 체험을 폐지하는 등 행보에 반대하던 신자들은 최시형 동학에 반발하여 별개의 동학계 종교단체를 형성하였고, 수십 년 뒤에는 많은 이들이 강증산 계열의 종교단체에 합류하였다. 강증산 또한 "내 가르침이야말로 참 동학"이라고 할 정도로 동학을 많이 의식하였고, 주문수행과 신내림 체험을 강조하였다. 강증산의 직제자이기도 했던 보천교 교주 차경석 또한 원래는 동학 계통의 종교인이었다가 강증산을 만난 뒤 제자가 되었다. 강증산이 죽은 1909년 이후로 증산계 종교단체들은 이처럼 동학계 종교들의 파이를 많이 나누어 가져갔다.

최시형 동학, 그리고 손병희 천도교는 다른 동학계 종교단체와 증산계열 종교에 맞서 자신들이야말로 최제우의 직계임을 매우 강조하며 정통성을 주장했다.

1864년 최제우 사망 후 동학에 대한 탄압은 1905년까지 계속되었다. 동학(천도교) 제3대 교조 의암 손병희는 1905년 12월 1일 신문에 "동학이 천도교이며 교당을 짓고 종교 활동을 하겠다"고 연일 광고를 게재하였지만, 멸망이 코 앞으로 닥친 당시 정부(대한제국, 을사조약으로 외교권 상실)는 이를 탄압할 힘과 명분이 없었다.

3. 여담

4. 대중매체에서


[1] 한국 최초 서양화가로 알려진 춘곡(春谷) 고희동 화백이 1893년 동경일일신문(東京日日新聞)1893.4.18 기사 그림을 바탕으로 그린 것을 김일준화백이 수정한 수정본이다. 당시 천도교 교단에서 요청했던 그림 원본은 전해지지 않는다.[2] 순종의 어진을 그린 구한말 최후의 어진 화사였던 이당(以堂) 김은호 화백이 1909년에 그린 작품이다. 동학의 교파 중 하나인 시천교에서 요청한 작품이고, 최제우의 수양딸인 주씨(朱氏)의 증언을 토대로 그려내 작품이다. 사상적으로 한국사의 근세와 근현대를 가르는 한 인물의 얼굴을 전근대미술의 마지막 화가와 근대미술의 시발점인 화가가 동시에 그려냈다는 점은 흥미로운 사실이다.[3] 사성공파(司成公派)-현곡2파(見谷二派, 서파西派) 14세 제(濟) 항렬.[4] 음력 10월 28일.[5] 경주 최씨 집성촌이다.[6] 이 지번은 1970년 6월 22일 재단법인 천도교유지재단으로 소유권이 이전되었고, 2014년 이 지번에 최제우생가가 복원되었다.[7] 음력 3월 10일.[8] 제대로 활동해보기 전에 일찍 요절한 탓에 종교를 창시했다는 점에서 교조(敎祖)라는 표현이 더 많이 쓰인다.[9] 족보상으로는 최진립의 맏형 최진흥(崔震興, 1554 ~ 1626)의 7대손인데, 6대조 최동길(崔東吉, 1601. 2. 26 ~ 1656. 6. 28)은 본래 최진립의 넷째 아들로 후사가 없던 큰아버지 최진흥의 양자로 입적되었다.#[10] 한문언(韓文彦)의 딸이다.[11] 정일추(鄭一錘)의 딸이다.[12] 서달증(徐達曾)의 딸이다.[13] 최옥은 퇴계 이황 학파의 정통 계승자로 당대 영남 선비들 사이에서는 모르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서자와 같은 재가녀와 낳은 자식에게도 공부를 시킨것을 보면 어쩌면 퇴계학파의 정통 계승자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게 이황은 자기 족보에 적서구별을 못하게 한 사람이다.[14] 헌종 2년(1836, 13세)에 결혼하여 꼬마 신랑 노릇을 하였다는 기록도 있으나 헌종 8년(1842, 19세)에 결혼하였다는 것이 정설이다.[15] 오지영의 <동학사>에는 최제우가 "시정에서 장사도 해보았고 한량들 틈에 끼어 활도 쏘아 보았고 호협자와 함께 말도 달려 보았고 일찍부터 유도, 불도, 선도와 <야소실>에 이르기까지 제자백가서를 낱낱이 섭렵해보았다."라고 적었다.[16] 요순의 통치, 공자맹자의 가르침도 이 난국을 타파하기에는 부족하다.[17] 이 지번에는 현재 수운최제우유허지가 남아 있는데, 1998년 1월 30일 울산광역시 중구 소유가 되었다가 2000년 1월 19일부터 울산광역시 소유가 되었다.[18] 이 지번에 현재 천도교에서 성지로 손꼽히는 용담정이 남아 있는데, 1975년 5월 21일부로 재단법인 천도교유지재단의 소유가 되었다.[19] 서학의 신 관념과는 다른 면모를 보여주는 대목. 또 다른 문헌에는 노이무공(노력을 하나 이룬 것이 없는)이라고도 기록하였다.[20] 지기금지원위대강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至氣今至願爲大降 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 현 천도교단은 이 주문을 흔히 "21자 주문"이라고 부르는데, '삼칠주'란 단어와 뜻이 같다.[21] 한편으로 그만큼 기존체제에 불만을 가진 사람이 많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기사 최제우가 살던 시대는 삼정의 문란이 한참 활개를 쳤기에 미륵신앙, 정감록, 천주교, 기타 반체제 사상 등이 사회에 만연하였고 역모사건 또한 있었으니, 불만을 품은 계층이 많음은 오히려 너무나 자연스럽다.[22] 같은 경주 최씨지만 최시형은 완전히 몰락하여 머슴살이로 생계를 꾸리던 사람이었고, 최제우와 다른 직제자들이 잡혀들어가기 전까지는 그리 눈에 띄지 않았다.[23] 순도비 자체는 중구 덕산동 관내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