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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5 20:16:28

제2차 여요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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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고려 의장기 문양.svg 고려의 대외 전쟁·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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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
2.1. 고려 성종의 줄타기 외교2.2. 고려 목종의 이어진 축성2.3. 강조의 정변과 여진의 원한2.4. 전쟁 준비와 마지막 외교
3. 전개
3.1. 흥화진을 지킨 양규3.2. 통주에서 무너진 강조3.3. 서경에 도착한 탁사정과 지채문3.4. 곽주에 떨어진 별똥별3.5. 창화현에 포위된 현종3.6. 개경을 불태워버린 거란 성종3.7. 류종과 김응인의 음모3.8. 공주, 전주, 나주 세 절도사의 맞이3.9. 양규와 김숙흥에게 큰 피해를 입은 성종3.10. 폐허로 귀환한 현종
4. 결과
4.1. 거란의 전후처리4.2. 고려의 전후처리4.3. 너무나 짧은 평화, 다가오는 전란
5. 대중매체6. 관련 문서

1. 개요

제2차 여요전쟁(第二次 麗遼戰爭, Second Goryeo-Khitan Wars)은 요나라고려를 침공한 세 차례의 대규모 침공인 여요전쟁 중 두 번째 전쟁으로 1010년에 일어났다.

2. 배경

2.1. 고려 성종의 줄타기 외교

2.2. 고려 목종의 이어진 축성

2.3. 강조의 정변과 여진의 원한

2.4. 전쟁 준비와 마지막 외교

3. 전개

파일:강동6주_지도v3.png
강동 6주 일대 지도[12]

3.1. 흥화진을 지킨 양규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흥화진 전투(1010년)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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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3.2. 통주에서 무너진 강조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통주 전투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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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서경에 도착한 탁사정과 지채문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서경 전투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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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곽주에 떨어진 별똥별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곽주 전투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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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창화현에 포위된 현종

파일:현종의 피난길.png
고려 현종의 피난길

3.6. 개경을 불태워버린 거란 성종

3.7. 류종과 김응인의 음모

3.8. 공주, 전주, 나주 세 절도사의 맞이

3.9. 양규와 김숙흥에게 큰 피해를 입은 성종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애전 전투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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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0. 폐허로 귀환한 현종

4. 결과

4.1. 거란의 전후처리

4.2. 고려의 전후처리

평화의 끝(1011년 8월) 전까지의 상훈/추증/징벌 [ 펼치기 · 접기 ]
1011년 8월, 제2차 여요전쟁이 끝난 지 5개월도 되지 않아 동여진 해적이 고려 동해안을 쑥대밭으로 만들며 평화가 끝났다. 이 무렵 고려 현종은 강조의 일파 숙청 등을 명분으로 동북면에 새로운 인재들을 대거 발탁하기도 한다. 따라서 1011년 7월까지의 상훈만 제2차 여요전쟁과 관련한 것으로 보아 기재한다.
  • 상훈
    • 1월(몽진중), 채충순을 비서감으로, 박섬을 사재경으로, 주저를 예부시랑 중추원직학사로, 한창필을 합문통사사인으로 임명했다.[136]
    • 2월(몽진중), 지채문에게 토지 30결을 하사하며 교서로 "호종하던 신료들 모두 도망가 흩어지지 않은 자가 없었는데, 오직 지채문만이 바람과 서리를 무릅쓴 채 산을 넘고 강을 건너며 말고삐를 잡는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고 끝까지 소나무와 대나무 같은 절개를 지켰다. 특출한 공로를 생각하면 어찌 남다른 은전(恩典)을 아끼겠는가" 하였다. 《고려사절요》
    • 2월(몽진중), 김계부를 병부시랑으로, 이단(李端)을 이부원외랑으로 임명했다.
    • 3월, 유진을 내사시랑평장사로, 조지린과 최사위를 참지정사로 임명했다.
    • 4월, 황보유의와 최창(崔昌)을 시어사로, 유소(柳韶)를 전중시어사로, 김종현과 박종검을 감찰어사로 임명했다.
    • 4월, 이정(李靖)을 상서좌승(尙書左丞)으로, 최보성(崔輔成)을 상서우승(尙書右丞)으로 임명했다.
    • 5월, 유방을 병부상서 겸 상장군으로, 최현민(崔賢敏)을 공부상서로, 김심언(金審言)을 예부상서로, 최충(崔冲)을 우습유로 임명했다.
    • 6월, 강감찬을 한림학사 승지로 임명했다.
    • 6월, 이정(李靖)을 전중감으로, 손몽주(孫夢周)를 상서좌승으로 임명했다.
    • 7월, 최사위를 서북면행영도통사로, 장연우채충순을 중추사로 임명했다.
  • 추증
    • 2월(몽진중), 양규를 공부상서로, 김숙흥을 장군으로 추증했다.
    • 4월, 중승 노정(盧頲)을 예빈경으로 추증했다.
    • 4월, 대장군 채온겸(蔡溫謙)과 신영한, 낭장 원태(元泰), 별장 최원(崔元), 습유 승리인(乘里仁), 태사승 유인택(柳仁澤)의 집에 쌀과 베를 차등 있게 하사했다.
    • 4월, 양규의 처에게 죽을때까지 해마다 100석 곡식을 지급하기로 하고, 아들 양대춘은 교서랑으로 제수했다. 《고려사절요》
    • 7월, 법언을 수좌로 추증했다.
    • 8월, 김숙흥의 모친에게 죽을때까지 해마다 50석 곡식을 지급하기로 한다. 《고려사절요》
  • 징벌
    • 2월(몽진중), 현종이 적에게 항복한 유언경(劉彦卿)의 처자를 유배했다.
    • 3월, 현종이 탁사정을 어사중승에 임명했다.
    • 4월, 현종이 탁사정을 우간의대부로 임명했다.
    • 5월, 현종이 박승(朴昇)을 전중시어사로 임명했다.
    • 8월, 현종이 몽진 중 황제를 겁박한 조용겸·유승건(柳僧虔)·이재(李載)·최즙(崔檝)·최성의(崔成義)·임탁(林卓) 등을 유배했다.
    • 8월, 현종이 강조의 일파로 몰아 탁사정·박승(朴昇)·최창(崔昌)·위종정(魏從政)·강은(康隱)을 유배했다.

4.3. 너무나 짧은 평화, 다가오는 전란

5. 대중매체

2017년 9월 28일, <토크멘터리 전쟁사>의 요약

6. 관련 문서



[1] 율리우스력 3월 2일[2] 율리우스력 6월 20일[3] 율리우스력 8월 13일[4] 율리우스력 9월 11일[5] 동경유수 야율호도근(耶律胡都堇)은 거란 성종의 동생으로 한식 이름은 융유(隆祐)였다. 본 기사로부터 얼마 안 있어 1012년에 사망했다. '유수'는 '머무르며 지킨다'(留守)는 뜻을 가진 지방장관의 명칭으로 고대 중국에서 유래했으며, 고려와 조선에서도 유수가 담당하던 유수부(留守府)가 존재했다. 그것과는 별개로 요나라(거란)에는 유목민족의 전통에 따라 황제가 수도에 상시 머무르지 않고 관료 및 황족들과 함께 계절에 따라 각 지역을 순행하는 '날발'(捺鉢)이라는 제도를 갖고 있었다.[6] 율리우스력 11월 9일[7] 현종의 명령은 요식행위였고, 사실상 실권자인 강조 스스로 결정했다. 강조는 출전하기 싫어도 출전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쿠데타 직후라서 아직 권력 기반이 불안정해 300,000명에 달하는 대규모의 병력을 총지휘할 사람도 없었다. 게다가 거란의 침공 명분도 강조의 정변이었으므로 이 명분을 지워내기 위해서라도 강조 본인이 직접 출전해야만 했다. 강조의 장렬한 최후를 보면 강조 본인 스스로 무거운 책임감을 가지고 출전했을 가능성이 높다.[8] 역사학자 임용한 박사는 《전쟁과 역사2》 / (113p)에서 고려군 병력이 중앙 및 지방의 상비군과 각 성의 지역민으로 구성된 주현군까지 합쳐 400,000명을 상회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반대로 300,000명조차 과장된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9] 북한의 행정 구역 개편으로 선천군에서 동림군이 떨어져 나왔다.[10] 율리우스력 11월 16일[11] 부아산은 보통 북한산으로 비정된다. 태조의 재궁은 1016년에야 현릉으로 다시 되돌렸고, 제3차 여요전쟁 때도 이곳으로 대피됐다.[12] 제2차 여요전쟁에서 거란군은 남하할 때 해안길을 따랐다. 북상할 때는 내륙길을 이용하려 했으나 귀주 일대 산길에서 큰 피해를 입자, 내륙길을 믿지 못 하고 해안길로 다시 우회해서 북상했다.[13] 율리우스력 12월 24일[14] 실질적으로 군세를 주도하고 지휘하는 도통(都統)에는 대송 전쟁에서 탁월한 지휘력을 선보였던 소배압을 임명했다.[15] 율리우스력 12월 25일[16] 세 지명의 위치가 미정이다. 내륙길의 지명이라면 거란군의 본대는 해안길로, 거란군의 별동대는 내륙길로 남하한 것이었고 고려가 두 길 모두 틀어막으려고 했으나 모두 패배한 것일 수 있다. 압록강 일대의 지명이라면 여전히 도하과정인 거란군의 후미를 다각도에서 요격하여 흥화진을 도우려던 것일 수 있다.[17] 율리우스력 1010년 12월 26일 ~ 12월 31일[18] 기록을 긍정하는 측은 고려 침공의 중간 보급기지 겸 흥화진의 고려군을 묶어둘 견제군으로 둔 예비군으로 본다. 기록을 부정하는 측은 북송과의 전쟁에도 200,000명이 넘은 적이 없으므로 애초에 남진한 200,000명만이 실제 병력일 것으로 본다. 뭣보다 통주에서 고려군 300,000명이 회전을 준비하고 있었으니 200,000명이나 되는 대규모의 예비군을 남겨둘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성종이 남하한 이후 양규가 게릴라전을 수행한 것도, 만약 진짜로 거란군 200,000명이 남겨져 있었다면 그렇게 공세적으로 나올 수 있었을지 의문을 표한다.[19] 율리우스력 1월 1일[20] 다르게 보자면 27만이나 되는 고려군이 살아져 흩어졌다. 이들은 뿔뿔이 흩어졌으나 주변 성으로 향한 군사도 많았다. 따라서 거란군은 이 수십만의 고려군이 다시 기세와 조직력을 찾는다면 후방이 언제든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21] 율리우스력 1월 12일[22] 율리우스력 1월 14일[23] 박섬은 도중에 현종의 몽진 행렬에 합류해 전주절도사 조용겸의 포위에 대항하는 등 공을 세워 면책되었다.[24] 거란군 침략 직후 현종의 명령으로 화주(지금의 함경남도 영흥군)에 주둔하여 동북면을 수비하고 있었다.[25] 통주에서 개경까지 1~2일, 개경에서 동북면까지 1~2일, 동북면의 주력군이 서경성까지 2~4일은 걸릴걸 생각하면 매우 아슬아슬한 도착이었다. 제때 도착하지 못했다면 제2의 수도였던 서경성은 거란군의 것이 되었을 예정이었다.[26] 율리우스력 1월 15일[27] 중흥사가 서경 외성의 안쪽에 있었다면 나중에 지채문이 서경성에 들어가려 했을 때 성문이 닫혀있던 것이 지채문을 막으려던 것이 아니라 단순히 경계 태세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서경 외성은 서경성 남쪽 구획이었고, 거란군이 이미 외성에 들어왔다면 지채문이 여유롭게 사람을 불러 성문을 열고 들어간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이틀 후에 온 한기의 기병도 북문으로 왔고, 서경 주변의 상황을 잘 몰랐던 것을 볼 때 아직 거란군은 서경 북쪽에서 진군 중이었던 것 같다. 따라서 중흥사는 아주 가깝긴 해도 서경성 바깥의 절로 보인다.[28] 율리우스력 1월 16일[29] 《요사》의 날짜가 《고려사》와 크게 다르고 오차도 심하다. 《요사》에는 통주 전투가 음력 11월 11일이고, 고려가 보낸 친조 사신이 도착한 것은 음력 11월 16일이며, 대도수의 항복은 음력 11월 17일로 통주 전투로부터 6일 뒤의 일이다. 그런데 《고려사》에는 통주 전투에서의 패배가 음력 11월 24일이며, 대도수의 항복은 음력 12월 13일로 통주 전투로부터 18일 뒤의 일이다. 물론 《요사》의 발해타실이 《고려사》의 대도수가 아닐 가능성은 감안해야 한다. 한편 《요사》는 특정 날짜에 기록된 기사가 정확히 어느 시점까지 아우르고 있는지 분명하지 않다. 그래서 《요사》로는 날짜를 비교하거나 특정하기가 어렵다. 일단 《고려사절요》는 이 사건을 음력 12월 10일 기사에 배치했다.[30] 율리우스력 1월 17일[31] 《요사》에 기록된 탁사정한테 죽었다는 사신 한희손(韓喜孫)이 한기와 같은 일행이었거나 동일인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32] 율리우스력 1월 18일[33] 율리우스력 1월 19일[34] 이후 지채문 휘하 군대의 기록이 없어지고 12월 27일에 개경에 도착한다. 따라서 지채문 군대는 4일 가량 포위되어 고립되어 있다가 12월 17일 거란의 성종이 서경 포위를 풀고 이동할 때 겨우 개경으로 갈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35] 탁사정은 개경으로도 서북면으로도 가지 않았고, 나중에 거란군이 서경 포위를 풀었을 때 동쪽으로 이동한 것으로 보아 동북면 방면으로 갔을 가능성이 있다.[36] 《요사》에 따르면 예부낭중(禮部郞中) 발해타실(渤海陀失)이 항복했다고 짤막하게 써놨다. 대씨를 발해 출신으로, '도수'를 거란어로 음차해 '타실'로 적었을 가능성이 높다.[37] 《요사》에는 서경을 5일 동안 포위했다고 한다. 《고려사》에는 거란군이 음력 12월 17일에 포위를 풀고 동쪽으로 이동했다고 했으므로 그 날을 5일차라고 본다면 이날이 1일차가 된다.[38] 율리우스력 1월 21일[39] 이때 두각을 나타낸 강민첨은 훗날 제3차 여요전쟁에서 강감찬 다음 가는 자리에 이르렀고, 조원 역시 시랑 관직으로 제3차 여요전쟁에서 요격전으로 거란군 10,000명 이상을 잡는 전공을 세웠다.[40] 율리우스력 1월 22일[41] 만약 이 유성이 곽주성에 떨어졌다면 성벽이 무너지며 길이 열렸을 가능성이 있다. 이 경우 공성측 병력이 수성측 병력의 1/3에 불과함에도 불가사의하게 공성에 성공한 점, 양규가 탈환한 곽주성을 요새화하지 않고 내부 주민들을 전부 대피시킨 점, 이후의 여요전쟁에 곽주성이 주요 전장으로 등장하지 않는 점 등이 이해될 수 있다. 다만 실제로 별동별이 성벽을 무너뜨렸을 경우 보다 더 자세한 서술이 있어야 함이 자연스러운데, 딱히 그러한 서술 또한 없는 것으로 보아 별똥별과 곽주성과의 상관관계가 없다고 보는 편이 더 합리적인 해석일 것이다. 다만 고려사는 400여년 뒤 조선왕조에서 무려 60여년간에 걸쳐 완성된 저서로 그때 존재한 저서와 사람들의 기억에 의존하였으므로 실제 곽주성을 어떻게 이리 쉽게 탈환했는지, 별똥별이 성벽을 무너트렸는지 등의 상세한 기술이 불가능하여 그러한 서술이 없을 수도 있다.[42] 율리우스력 1월 23일[43] 곽주성의 탈환은 전황의 전환점이었다. 후방 거점이 모두 고려군의 것이 된 시점에서 서경도 함락 못 시킨 상황이었다. 보급을 위해선 본국으로의 철수 또는 개경으로 직도해 약탈하는 것 두 선택지만이 남았다. 거란의 성종은 400km나 고립되는 위험한 승부수를 건 것이었다. 다만 양규가 곽주성의 병사를 전멸시켰다는 기록을 감안하면 곽주성을 믿고 서경을 떠났다가 고려군의 곽주성 탈환 소식을 뒤늦게 알게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44] 서경에서 병력을 보전하여 도망친 탁사정의 군대를 추적하다가 지연되었을 가능성도 조금이나마 있다. 탁사정의 군대가 원래 동북면 군대라는 점을 생각하면 거란군이 서경 포위를 풀고 동쪽으로 향했다는 기록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끼워 맞출 수 있다.[45] 율리우스력 1월 25일[46] 율리우스력 2월 2일[47] 율리우스력 2월 3일[48] 다만 뒤에 언급된 이원과 최창이 지채문과 같이 서경 전투에 참전했던 이들이란 점을 고려하면 서경 상황에 대한 보고 자체는 이미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49] 李元, 통주 전투 뒤 완항령에서 전열을 수습한 장수.[50] 崔昌, 친 강조파, 강조에게 '이미 목종이 죽었다'는 잘못된 정보를 전달해 정변의 결심을 굳히게 했다.[51] 몽진 결정은 도박이었다. 모든 신하들이 괜히 반대한 것이 아니다. 당시의 몽진은 남쪽 지방의 호족들에게 푸대접을 넘어 신변의 위협까지 받아야 하는 걸 각오해야 하는 결정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 고려가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완성시켰던 조선과는 달리 아직 지방 호족들의 세력이 막강했었기 때문이었다.[52] 이는 나중에 똑같이 몽진하던 조선 선조와 크게 대조된다. 선조의 경우 도중에 백성들이 여기를 지키긴 할 거냐고 항의를 하는 일이 벌어졌지만 선조가 나서서 지킬 거라고 말을 하자 모두 순순히 돌아갔고, 그나마 평양에서 백성들이 폭발해 왕의 행렬에 있는 사람들을 구타하긴 했지만 이 역시 주동자 몇 명을 잡아죽이자 해결되었다.[53] 임용한 박사는 <토크멘터리 전쟁사> 67부에서 "임진왜란 때 선조가 피난갈 때만 봐도 (조선과 고려) 백성들의 이데올로기가 달라요. 왕에 대한 개념 말이에요. 선조가 피난갔을 땐 주위의 백성들과 관리들이 왕에게 인사를 했어요. (중략) 근데 고려는 중세 유럽과 비교하면 봉건제와 같아요. 왕이 궁 밖을 나가는 순간, 나를 미워하는 모두의 라이벌 속으로 뛰어 드는 거에요."라고 비유했다.[54] 출발 시점에 한해선 훗날 조선의 선조의 피난 행렬(호성공신 86명)과 규모가 비슷하다. 다만 선조의 경우, 피난 과정에 도움을 준 호성원종공신만 2,475명에 달한 것과 대조적으로, 고려의 현종은 출발 다음날부터 살해 위협을 받았다.[55] 항전을 주장해 온 강감찬의 기록이 현종의 몽진 시기에는 사라진다. 도망갔던 신하들이 모두 처벌되었는데 강감찬은 처벌받은 기록이 없다는 걸 감안하면 임무를 띄고 파견을 나갔을 가능성이 높다.[56] 율리우스력 2월 4일[57] 《여지도서》에 따르면 단조역은 적성현 서쪽에서 7리 쯤이다. 오늘날 장남교~두지나루터에서 행렬이 도하한 것이다.[58] 자국의 군인(무졸)과 공무원(역인)이 함께 최고 통수권자에게 강도질을 하려 한 것이다! 다만 적성현은 목종(고려)강조의 정변 중 시해된 곳이기도 하므로, 현종에게 지역감정이 나쁜 것일 수도 있다.[59] 이 일대를 삼국시대에는 매성/마흘/창화/내소 등으로 불렀으며, 고려 태조 때 견주로 묶어 불렀고, 고려 성종 때 양주목이라 묶어 불렀다. '양주'는 경기북부와 서울특별시 강북~광진까지를 일컫는 일종의 '경기북도'였다. 양주시/역사 참고. 그 중 창화현은 현 "서울특별시 도봉구"다. 디지털도봉문화대전 더 구체적으론 도봉구에서 먼저 번화했던 현 방학역 서쪽 일대다.[60] 이런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고려 시절의 아전은 조선의 하급 공무원인 아전과 다르게 지방 호족으로 사실상 지방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던 지배계층이었으며 중세 유럽으로 치면 중앙의 왕실과 사이가 좋지 않은 지방 영주에 해당했기 때문이다. 흔히 아는 아전 = 이방 개념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61] 이는 아전의 거짓말이었지만, 상당히 설득력이 있었다. 하공진은 강조의 정변 때 강조 편을 들었다. 게다가 현종이 이번 전쟁의 발발 원인이라며 유배도 보냈다가, 개경이 위태로워지고야 현종이 유배를 해제하고 동북면의 군사를 데려오라고 했기 때문에, 충분히 원한을 품고 군사를 데려와 변란을 일으킬 수 있었다.[62] 아전이 강조의 정변 과정에 대해서 해박했음을 알 수 있다. 두 사람은 강조의 정변때 대량원군 왕순을 신혈사에서 데려와 현종으로 세운 문관과 무관의 대표적인 인물들이었다. 즉 '채충순과 김응인을 내놔라'라는 말은 '넌 그 둘이 보여주듯 강조가 만들어준 왕이야', '너 왕 만든 놈들부터 좀 맞자' 등의 조롱으로 해석할 수 있다.[63] 이쪽이 경의선이 놓인 곳일만큼 남쪽으로 가는 최단거리 길은 맞으나, 현종 일행도 같은 기상악화 문제 때문에 오전에 상류의 적성면에서 임진강을 건넌 것으로 추정된다.[64] 율리우스력 2월 5일[65] 음력 1010년은 12월이 30일까지이다. 일어난 일이 많지만 모두 하루에 일어난 일이다.[66] 당연히 거란을 피해 남쪽으로 도망칠 것으로 적도들이 생각하기 쉬우니, 방학역에서 도봉산역 방향으로 오히려 도보 1시간어치를 북상한 것이다.[67] 《고려사절요》, 디지털도봉문화대전 이날 오전이 한국사의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만약 현종 일행의 창화현 탈출이 늦어졌더라면 이날 저녁 창화현에 들어온 거란군 선봉대에게 포착되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웅진성의 귀족인 예식진의 배신으로 당나라군에게 넘겨진 백제 의자왕의 사례처럼 아전이 현종을 거란군에게 넘겨 고려 자체가 멸망할 수도 있었다. 광해군과 소현세자를 다른 곳에 보내기라도 했었던 조선의 선조인조와는 달리 이 시점의 현종에게는 태자도 없었으며 현종과 두 왕후가 마지막 용손이었다. 이날로 고려 왕실이 없어지며 발해처럼 멸망할 수 있었다.[68] 즉 이날 오후 역시 한국사의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거란군은 몰랐지만 거란 선봉과 현종 일행의 거리는 반나절도 되지 않았던 것이다.[69] 율리우스력 2월 6일[70] 《요사》 성종 본기, 《요사》 열전 - 소배압, 《요사》 열전 - 야율분노[71] 전쟁이 다 끝나고 음력 1011년 7월에 논공행상하며,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 했으므로 공적에서 삭제했다. 《고려사》[72] 이 때 대량의 고서적, 특히 사서(史書)들이 불타 없어졌다. 《고려실록》도 소실되어서 이후 이를 복구하라는 현종의 명령으로 만들어진 것이 《7대 실록》이었다. 《7대 실록》의 완성은 다음 대인 제9대 덕종 때 이루어졌다.[73] 《고려사절요》, 하공진이 거란군의 선봉대를 돌려보내 여유가 생겼고, 강화 교섭의 결과를 지켜보려 한 것으로 추정된다.[74] 율리우스력 2월 8일[75] 《고려사》, 《고려사절요》[76] 낭장-별장급 사절단 일부만 돌아온 것일 수 있다. 또는 사절단이 전부 억류되었고 정해진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77] 거란 성종이 원래 남진할 계획이었으나 하공진에게 설득되어 군대를 돌린 것일 수 있다. 또는 하공진의 기만에 격분하여 충동적으로 남진을 했으나 고려 남쪽 지리를 잘 모른다는 현실적 한계를 체감하고 군대를 되돌린 것일 수 있다. 《요사》 성종 본기[78] 2월 27일(음력 1월 17일)에 거란군이 귀주 앞 협곡에 이르렀다. 개경에서 강동6주까지 15~20일은 걸리므로, 이 사건 직후에 거란군 선발대가 바로 북상했을 것으로 보인다.[79] 율리우스력 2월 9일[80] 율리우스력 2월 10일[81] 율리우스력 2월 11일[82] 임용한 박사는 류종-김응인이 지채문의 동북면 군사를 되돌려 보내고, 지난밤 안장을 나눠준 양성의 아전들과 군사들로 황제의 측근이 되려 한 음모라고 보았다. 하지만 지채문이 이를 눈치채고 반대했고, 지채문의 동북면 군사들을 이길 수는 없는 류종-김응인이 그 날로 도주한 것으로 보았다. #[83] 훗날 류종(柳宗)은 제3차 여요전쟁도 다 끝나고 1021년에 병부시랑으로 사신을 다녀온 기록이 있어 돌아왔음을 알 수 있다.[84] 율리우스력 2월 12일[85] 이 인연으로 현종은 나중에 몽진이 끝나고 개경으로 돌아가면서 김은부의 맏딸(원성왕후)을, 추후에 또 다른 딸 2명을 후비로 맞아들였다.[86] GPS와 내비게이션이 없는 시기라 이해해야 하겠지만 논산과 구미(선산읍)는 21세기인 지금도 자가용으로 2시간이 넘게 걸린다. 원정왕후는 소생이 없다. 따라서 아마 이 먼 길을 가는 외로운 고생길에 유산했을 가능성이 높다.[87] 9품16관계 중 막내 벼슬이었다. 현대에 비유하자면 소위7급 공무원으로 대통령이 특채 임명한 것이다.[88] 율리우스력 2월 13일[89] 절도사가 관복이 아니라 야복 즉 편안한 평상복으로 찾아온 것이다. 이는 노골적으로 무례한 의도가 있는 것이기에, 만날 것도 없이 일단 피하고 의도를 묻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90] 황제가 임명한 절도사(지자체장), 전운사(세금을 거두는 관리), 순검사(징병을 거두는 관리), 전중소감(물품을 거두는 관리)가 모두 몰려와 황제를 인질잡아 꼭두각시로 만들어, 본인들이 강조(고려)처럼 권신(협천자 영제후)이 되려 한 것이다![91] 전주 측 네 명의 관리 중 유승건이 종4품으로 가장 낮아서 만만하다. 전주 관리들이 황제의 호종행렬의 무력제압이 실패하자, 전쟁 뒤 삼족이 멸해질 것이 두려워 행렬을 극진히 대하는 방향으로 태세전환하려, 순순히 차례로 맨몸으로 알현하러 들어가 용서를 빌려 한 것으로 해석된다.[92] 즉 반란의 수괴들인 조용겸과 이재를 역으로 지채문이 인질로 잡아 전주를 완전히 탈출할 때까지 안전을 보장받은 것이다.[93] 이후 전쟁이 끝나자 현종 행렬은 다시 전주를 찾아 1주일 가량 머물긴 한다. 하지만 이후 8월에 전주절도사 조용겸은 유배된다.[94] 율리우스력 2월 17일[95] 율리우스력 2월 18일[96] 정읍시에서 장성군으로 넘어가는 '갈재' 고갯길은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97] 해당 절은 원효대사가 지으며 미륵원(彌勒院)이라 이름 붙였으나, 현종 황제가 방문하며 신황사(神皇寺)로 고쳐 불렀다. 이후 조선 성종 무렵엔 신왕사로 불렸으며, 조선 정조 무렵엔 심향사(尋香寺)가 되었다. # 현종이 네 마리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절을 오갔기에 그 길을 사마교(駟馬橋)라 불렀으며, 이후 사매기라 불리게 되었다. #[98] 율리우스력 2월 21일[99] 파발 거리를 생각하면 2월 22일(음력 1월 11일)에 거란군이 개경을 떠날 때 보냈을 것으로 추정된다.[100] 갔던 사신단 중 낭장, 별장만 돌아오다보니 이들이 처음엔 거란군인가 오해를 사기도 했다. 이들이 하공진의 장계와 거란 측의 문서 둘을 받아 왔는데, 행렬 중 거란 문자를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어 해당 문서는 읽지 못한 일화가 있다.[101] 율리우스력 2월 16일[102] 개경에서 강동6주까지 15~20일은 걸린다. 따라서 2월 27일(음력 1월 17일)에 귀주 앞에 간 거란군은 2월 14일(음력 1월 3일) 개경에 하공진 사절단이 도착한 직후에 출발한 '선발대'고, 3월 11일(음력 1월 28일)에 애전에서 양규의 고려군을 만난 거란 성종의 '본대'는 이 날 출발한 것일 수 있다.[103] 또는 본대 자체가 2월 14일(음력 1월 3일)에 모두 개경을 떠났고, 이 날 2월 22일(음력 1월 11일)엔 현종 추격대를 기다리던 마지막 거란군이 떠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104] 율리우스력 2월 8일 ~ 21일[105] 귀주성 방면은 내륙길이다. 통주 전투에서 와해된 27만의 대군이 양규에 의해 얼마나 재건되었는지 알 수 없으며, 곽주성 탈환과 통주성 보완 등 해안길이 고려에 의해 얼마나 요새화되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제3차 여요전쟁에서 직도전략을 폈던 소배압의 경우도 비슷하게 영주(안북부)를 고려 본대가 지키고 있었기에 후퇴시 내륙길을 선택했다.[106] 율리우스력 2월 22일[107] 《요사》가 일컫는 준곡령이 "귀주 동남쪽"을 의미한다면 태천군에서 구성시(귀주)로 가는 좁은 협곡에서 요격을 당했음을 의미한다. "귀주 서남쪽"을 의미한다면 안의진과 귀주성 사이 내륙길 골짜기에 거란군이 갇히게 되어 산을 빠져나오느라 피해가 커졌음을 의미한다.[108] 율리우스력 2월 23일[109] 율리우스력 2월 24일[110] 이수/석령/여리참 등은 동여도에 따르면 선천군과 천마군 사이, 내륙길과 해안길 사이의 산길 지명들이다. 좁은 산길들로 거란군이 여럿으로 분산되어 이동하면서, 양규-김숙흥에게 각개격파로 유격당한 것으로 추정된다.[111] 율리우스력 2월 27일[112] 율리우스력 3월 5일[113] 앞서 다른 날에도 요격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114] 평안북도 선천군이 본가인 정선 전씨는 애전(쑥밭)을 오늘날의 선천군 태산면 길성동 평원 일대로 추정한다. 반면 동여도에 따르면 애전도 선천군과 천마군 사이의 지명 중 하나다. 임용한 박사는 '화살이 떨어지도록' 싸웠다는 점에서, 평원보다 경사지에서 싸웠을 것으로 추정했다.[115] 거란 성종이 다수의 포로들로 '유인'한 것이고, 고려군은 이를 알았든/몰랐든 포로들이 안전히 떠나기까지 죽음을 각오하고 싸웠을 것이 추정된다.[116] 임용한 박사는 고려군의 화살이 다 떨어진 뒤, 거란군 보병이 고려군을 백병전을 하며 포위한 뒤, 거란군 궁병이 10-15m에서 직사로 쏘며 다가갔을 것으로 추정했다.[117] 율리우스력 3월 6일[118] 율리우스력 2월 26일[119] 율리우스력 2월 29일[120] 율리우스력 3월 1일[121] 율리우스력 3월 3일[122] 현종이 음력 1월 29일부터 논공행상을 시작한 것을 보아, 이 쯤부터 거란군이 압록강을 넘어 모두 떠나 전쟁이 끝났음을 알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123] 율리우스력 3월 10일[124] 율리우스력 3월 11일[125] 율리우스력 3월 20일[126] 율리우스력 3월 20일 ~ 3월 22일[127] 율리우스력 3월 22일[128] 청주 용두사(龍頭寺)에서 시행했다. 용두사는 이후 몽골에게 파괴되어 철당간만 남았다. 오늘날 충청북도청 앞. #[129] 율리우스력 3월 23일[130] 율리우스력 3월 30일[131] 출처: 《속자치통감장편》 74권 북송 진종 대중상부 1010년 음력 11월.[132] 고려 귀주와 다른 거란 귀주. 오늘날에도 가이저우시.[133] 여진족을 유목민족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이들은 수렵채집과 농경 위주의 생활을 영위했다.[134] 이들은 이후 양수척(=화척), 진척, 재인 등에 속하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양인이지만 호적에 등재되지 못하고 차별받은 이들은 이후 몽골군이 침입할 때 길잡이 노릇을 하는 등 몽골군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게 된다.[135] 이들의 지도자격인 대씨 중에서 대도수, 대집성 등 고려의 관리로 임명받은 자들이 상당수 있었다.[136] 이 중 박섬의 임명에 신하들이 반발했다. 박섬은 영주를 버렸으나 몽진을 따른 점이 반영되었다. 《고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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