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해방병단과 조선해안경비대
정인귀 제독[1]의 증언 |
조국 광복에 즈음하여 이 나라 해양과 국토를 지킬 뜻있는 동지들을 구함
광복 직후 서울 거리에 내걸린 해사대 모집 벽보
초대 해군참모총장(당시는 총참모장)을 역임하는 독립운동가 손원일(해군의 아버지)의 해방병단(海防兵團, Marine Defense Group)이 대한민국 해군의 모태이다. 1945년 11월 11일에 창설된 해방병단은 해산된 적이 없으며,[2] 따라서 해군은 국군 중 가장 먼저 창설되었다.[3]광복 직후 서울 거리에 내걸린 해사대 모집 벽보
손원일은 1945년 8월 21일 광복과 더불어 새롭게 창설될 해군에 뜻을 가진 협력자 정긍모·민병증·김영철·한갑수와 해사대(海事隊)를 결성, 80여 명의 대원을 모집하였다. 하지만 모든 경비를 손원일을 포함한 간부들이 부담했고 손원일은 자금 확보를 위해 9월 1일 여운형이 이끄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가입하여 해사과(海事課)를 설치했지만 여운형이 건준을 탈퇴하고, 건준이 극좌화됨에 따라 9월 30일에 손원일 역시 건준을 탈퇴한다.
같은 날 손원일은 자금 확보를 위해 일제강점기 때 조선해사보국단(朝鮮海事報國團)의 선원계장을 지낸 석은태를 만나 의논 끝에 두 조직을 합치기로 하여 위원장을 손원일, 부위원장을 석은태로 하여 조선해사협회(朝鮮海事協會, Marine Affairs Association)를 조직했다. 자금은 석은태가 지원하고, 사무소도 회현동의 해사보국단의 사무소로 옮겼다. 이후 11월 11일에 미군정청과 협의하여 장차 해군으로 전환할 것을 약속받고 오전 11시 서울 종로구 관훈동에 위치한 구 표훈전에서, 단장에 손원일, 일선행정에 민병증, 항해교육에 김영철, 기관교육에 정긍모·한갑수, 군사훈련에 변택주·김정주, 경리에 석은태 등 총 70명이 해방병단을 창설했다.[4] 결단식 직후 열차로 진해로 이동하여 11월 12일 진해에 도착하였으며 11월 14일에 진해군항 항무청 건물(구 통제부 항무과)에 입주하여 태극기를 게양하고 첫 집무를 게시하였다. 이듬해 1월 14일 해방병단은 국방사령부에 편입되었고, 1월 15일에 해방병단 총사령부를 창설했다.
1946년 1월 17일에는 해군사관학교의 전신인 '해군병학교'[5] 창설하여 생도들을 직접 교육시켰으며, 2월 15일에는 하사관 및 병 교육도 실시하였다. 2월 1일에는 해군에 있어 필수전력인 함정을 관리할 조함창(現 정비창)을 상급부대와의 협상끝에 창설한다. 조함창은 2월 27일 23명으로 업무를 개시하고, 6월 15일 T-3호정을 최초로 수리완료했다.
1946년 2월부터 손원일 총사령관은 국방사령부와 주요 항구도시에 기지를 창설하는 문제를 협상하였고, 2월 1일에 장교계급을 부여하고[6] 6월 1일에 하사관·병의 계급을 제정하였다. 가장 먼저 설치된 교육부대인 신병교육대는 2월 15일 창설되었으며, 250명의 신병들을 3개과(갑판과·기관과·통신과)로 나누어 3개월의 교육 뒤에 실무에 배치시켰고, 2월 21일에는 진해해군병원과 3월 11일에는 헌병대, 군악대, 갑판분대, 기관분대, 기술분대 위생학교의 전신인 위생분대를 발족시킨다.
1947년 9월 1일 교육체제를 개편하여 하사관 각 교육대를 7개 학교(항해·기관·공작·통신·주계·위생·표지학교)로 개편하였다. 그리고 예산이 편성되기 시작한 4월부터 주요 항구도시에 기지를 차례차례 창설하였다. 이때 창설된 기지로는 인천기지(1946.04.15. 백진환 정위), 김포파견대(1946.08.16.), 목포기지(1946.08.18. 왕홍경 부위), 묵호기지(1946.08.22. 정긍모 부위), 부산기지(1946.09.24. 박잔동 중위), 진해특설기지사령부(1946.10.01. 김성삼 부위), 군산기지(1947.01.06. 이상열 대위), 포항기지(1947.02.08. 한갑수 중위), 주문진파견대(1947.03.26.), 제주수영(1947.06.21.), 여수수영(1947.07.01.)이 있다. 1947년 3월 28일에는 각 기지 사령관들이 모여 최초의 기지사령관 회의가 열리기도 했다.
해방병단은 1946년 6월 7일부터 진해근해를 중심으로 해상경비를 개시했으며, 1946년 6월 15일에는 미군청정이 군정법령 제86호를 공포하고, 그에 따라 해방병단은 조선해안경비대(Korean Coast Guard)[7]로 이름을 변경하였고, 손원일은 '총사령관' 직책을 받아 본격적인 해군 창설을 위해 조직을 정비해 나갔다. 하지만 보유한 전투함정이라고는 일본이 패전 후 완성하지 못하고 버리고 간 배를 1946년에 조함창에서 개조하여 완성시킨 287톤급 경비정 'PG-313 충무공정'이 유일했다. 그래서 1946년 9월 15일 미 군정청으로부터 387톤급 상륙정(LCI) 2척(서울정·진주정)을 부산에서 인수했고, 그 뒤 상륙정 총 5척을 인수, 일본제 소해정]JMS) 11척, 미국제 소해정(YMS) 18척. YO-1을 인수하였고, 1947년 8월 17일에는 한국 해군 최초 편대훈련을 사고 없이 성공시켰고 8월 30일에는 38선 이남의 해안경비임무를 미 해군으로부터 인수하였다.
1947년 10월 15일 부산에 4척으로 구성된 제1특무정대를 창설, 12월 19일에 여수에 5척으로 구성된 제2특무정대를 창설했다. 1948년 6월 29일, 해군사관학교 이외의 장교 인력을 확충하기 위해 해군사관후보생(OCS) 특별교육대(약칭 특교대)를 설치했으며, 조선해안경비대는 대한민국 정부가 정식으로 수립되면서 1948년 9월 5일 한국 해군으로 발족하였다.
1.1. 창설기의 해군 인적 구성
일본 해군이 조선인의 입대를 1943년까지 받지 않았고,[8] 받아도 해군의 핵심인 항해병과가 아니라 지상에서 근무하는 해군 육상경비대 및 각종 육상근무자, 그리고 태평양전쟁 패전 직전에 가서는 일회성 소모품인 가미카제 특공대원으로 활용할 해군 항공대에서만 일부 받아들였다.[9] 따라서 식민지 종주국이었음에도 조선인으로서 옛 일본 해군 출신의 "해상근무" 경력자는 거의 없었다. 그 때문에 민간 상선에서 근무하던 상선사관들이 해군 지휘부의 주축이 되었다.1대 해군참모총장인 손원일 제독부터 차례로 해군참모총장을 지낸 박옥규[10], 정긍모, 이용운, 이성호 제독이 전원 상선사관 출신이었고 [11] 6대인 이맹기 제독부터는 해군사관학교 출신들이 일찌감치 해군 수뇌부를 차지한 바람에[12] 해군 참모총장 중엔 일본 해군 출신이 없었다. 상술했듯이 일본 해군이 조선인을 해군의 핵심인 항해병과로 받아들이지 않은 탓에 한국인 중엔 일본해군 항해병과 경력자가 거의 없었기 때문. 초창기 대한민국 해군에 있었던 일본 해군 출신자들은 일본 해군에서 근무할때 해군의 주축인 항해병과가 아니라 해군에선 주변적인 존재였던 육상근무자들 뿐이었기 때문에, 한국 해군 수뇌부는 일본군 출신이 아닌 민간 상선사관 출신들이 장악하게 된다.
일본군/만주군의 육군 출신자들은 물론이고 일본해군에서 복무했더라도 해군 육상경비대 등 육상근무자들은 항해와 함정에 대해서 문외한인 비전문가들이었기 때문에 해군의 핵심 수뇌부가 되기는 어려웠고, 배와 항해에 대해 잘 아는 민간 상선사관 출신들이 주도권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초창기 해군에 있던 일본해군의 육상경비대 등 육상근무 경력자들과 일본군/만주군의 육군 출신들은 여순사건 이후 육상작전 능력을 가진 상륙전 병력의 필요성을 절감한 손원일 제독이 죄다 1949년에 대한민국 해병대의 창설멤버로 보내버렸다. 해병대는 형식상 해군 소속이지만 실질적으론 해상이 아닌 '육상'에서 싸우는 지상군이기 때문에, 초기 해군에 있던 일본해군 육상경비대 등 육상근무 경력자나 육군출신 간부 등 바다보다 '육지'에 익숙한 인원들을 해병대 창설멤버로 보낸 것이다. 그래서 해군 초창기에 해군에 있던 일본군과 만주군 경력자들은 이후 해병대의 주축이 된다. 초대 해병대사령관 신현준, 2대 사령관 김석범, 3대 사령관 김대식 등이 모두 만주군 육군 출신인 것이 이런 이유에서였다.[13] 이렇게 초창기 해군에 있던 일본군 및 만주군 출신들 상당수가 해병대로 가버리자, 대한민국 해군은 그 주축이 상선사관들로 채워져 타군과는 다르게 일본군 출신이 주축이 되었다는 역사를 남기지 않았다.
육군의 경우 역대 육군참모총장 1대부터 18대가 일본군 출신이다. 한국 공군의 경우 공군참모총장은 1대 김정렬, 5대 김창규 등이 일본군 출신이며 초대 육군 항공사령관 및 2대 총참모장을 한국 공군의 아버지로 추앙받던 중국 국부군 공군 상교 (육군 중장대우) / 광복군 참장 출신의 최용덕 장군이 6대 참모총장은 김구 주석의 차남 김신 장군(중국 공군 출신)이 역임했다.
다만 해군의 최고 지휘부에는 일본군 경력자가 없었다지만, 하급장교 및 하사관들 중에는 해병대로 가지 않고 해군에 남은 일본군 출신들도 남아 있었고, 그 외의 사람들도 36년간 일제 식민지하에 있었던 만큼 일본군의 흔적이 타군보다 오히려 강하게 남아 있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당시 일본은 군국주의 사회였고 학교 교육 체제 역시 그에 입각하여 돌아갔다. 또한 상선사관의 경우는 군인이 아니라서 전투에 관련된 공부만 안 할 뿐이지 실제 교육환경이나 생활은 군인에 준할 정도로 엄격하게 진행되었다.[14] 그 결과 아무리 수뇌부가 일본군 소속이 아니었다지만 결국 조직 구성이나 운용은 자기들이 배운 그대로 일본군의 그것을 따라갈 수 밖에 없었던 것.
대표적으로 해군/해병에서만 쓰이던 병조(兵曹),[15] 오장(伍長)[16]은 일본군의 계급구조를 그대로 사용한 것이었다. 1962년 군 계급체계 일원화 조치가 있기 전까지, 해군/해병에서는 육군, 공군과 달리 일본군식 계급이 여전히 사용되었다.[17]뿐만 아니라 건군 초기, 각 지역의 해군부대의 경우 '경비부'의 명칭도 일본 해군의 기지 등급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 [18] 또한 일본 해군에서 사용하던 용어도 그대로 답습하는 등[19] 사실상 일본군의 색이 전혀 없다고 볼 수는 없다.
1.2. 1948년 몽금포 작전
어렵게 해군을 창설 했지만 이후 순탄치만은 않았다. 1948년 5월 10일 남한의 총선거를 전후로 5월 7일, 소해정 JMS-311 통천정이 납북되고, 5월 15일에는 YMS-517 고원정이 납북되는 사건이 있었다. 1949년 5월 11일에는 YMS-508 강화정의 부장이 정장과 정대사령(편대장)을 상관 살해를 한 뒤 월북했고, 1949년 5월에는 고성정의 승조원 일부가 함상반란을 일으킨 뒤 월북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충무공정을 비롯한 함정 9척이 납북될 뻔한 사건이 일어나는 등, 좋지 않은 사건이 연달아 일어났다. 거기다 같은 해 8월 10일, 인천경비부에서 관리하고 있던 주한미군 군사고문단 로버트 장군의 요트가 사라지는 사건이 벌어졌다. 로버트 장군은 이승만 대한민국 대통령에게 항의했고, 대통령은 손원일 총사령관에게 책임을 물었다.[20] 해군본부 정보참모 함명수 소령이 손 사령관에게 응징작전을 제안했고 서해 첩보부대장 이태영 소령[21]의 정보활동으로 그 보트가 황해도 몽금포항에 계류되었다는 정보가 입수되어 응징작전 계획이 입안되었다. 이에 해군은 요트를 찾기 위한 특공대를 조직하여 기함인 PG-313 충무공정과 JMS-301 대전정, 302 통영정[22], 307 단천정[23], 309 대동강정, YMS-503 광주정 6척의 편대의 엄호로 함명수 소령 등 정보부대 특공대원 20여 명을 몽금포에 침투시켜 해당 보트를 탈환하되, 불가능하다면 파괴하는 작전을 시행하였다.관함식이 열린 8월 16일 새벽 2시경, 배 5척이 인천경비부 제1정대사령 이용운 중령의 지휘 아래 인천항을 떠나 8월 17일 몽금포 근해에 도착하였고, 새벽 06시경 포격전이 일어났다. 북한군 120여 명 사살, 인민군 군관을 포함한 북한 승조원 5명을 생포하고 경비정 4척을 격침시키고 35톤급 18호 경비정 1척을 나포해 귀환했다.[24] 하지만 주한 미국 대사 존 무초(John J. Muccio)가 이 사건을 일러 남한 해군이 38선을 넘어간 것은 불법이므로 특공대 책임자 처벌할 것을 한국 정부에 강력히 요구했다. 결국 한국 정부는 무초 대사를 통해 미국 정부에 사과하고, 특공대 편대 지휘관을 여수기지사령관으로 좌천시키는 조치를 취하는 사건도 있었다. 몽금포 작전으로 좋은 전공을 세웠으나 한국 정부는 김일성의 정치적 악용을 우려하여 몽금포작전에 대해 대외적으로 함구시켰고[25], 2015년 9월 15일에 인천 월미도에 전승비를 제막하여 공정식 당시 302정 정장 등 무공자에게 훈장을 수여 및 추서를 하였다.
2.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해군 창설
1950년 당시 대한민국 해군의 수상함 전력 |
1948년 10월 20일 여순사건 때는 해군에서 임시정대(PG-313 충무공정·505·510·516·302·304·305·구룡정)을 편성하여 해안 봉쇄 및 함포사격을 수행했다. 이때의 경험에서 상륙작전의 중요성을 인식한 손원일 제독의 의견으로, 1949년 4월 15일에 진해 덕산비행장에서 장교 26명, 하사관 54명, 수병 300명, 총 380명의 인원으로 해병대인 대한민국 해병대가 창설되었다. 창설 당시 편제는 사령관에 신현준 중령, 참모장에 김성은 중령, 본부에 15명, 경리대에 15명, 근무중대에 70명, 정보대에 10명, 소총중대에 270명이 편성되었다. 5월 5일에 대통령령 제88호로 해병대령이 공포되었고, 1949년 8월 1일 해병 2기 440명을 해군으로부터 인수하고 장교와 하사관 등이 전보되어 해병대는 2개 대대규모로 확충되었다.
1949년에도 부대를 더 창설·개편하였고, 4월 15일 해병대와 인천 옥연동에 제2해군병원[26]을 창설하였고, 6월 1일 진해기지를 진해통제부로 개편하였고, 같은날 묵호·인천·목포경비부를 창설했다. 12월 14일 인천에 제1정대, 포항에 제2정대, 목포에 제3정대, 진해에 훈련정대를 창설하있으며, 1950년 4월 15일에 부산·포항경비부를 창설하였다.
소형 소해정과 경비정뿐인 해군에서 제대로 된 전투함이 필요하다는 요구가 계속되었지만, 당시 상황으로는 독자적인 군함 건조는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미국에 전투함 지원을 요청했지만 미국의 대답은 부정적이었다. 결국 손 제독은 함정건조 모금운동을 전개하여 재원을 마련하는 방안을 생각해내었다. 1949년 6월 1일 손 제독 자신을 위원장으로 하여 '함정건조각출위원회'를 구성하고 해군 장병들을 대상으로 모금운동을 진행하였다. 장교는 월급의 10%, 병조장은 7%, 하사관과 수병은 5%씩 모았고, 손원일의 부인인 홍은혜 여사를 중심으로 조직된 '해군부인회'가 바자회를 운영하여 그 수익금을 기금에 보태었다. 나중에는 일반 국민들에게까지 모금운동이 확산되어 4개월 만에 만5천 달러를 마련했다. 여기에 이승만 대통령의 지원금 4만 5천 달러가 합쳐졌고, 그 돈으로 함정구매를 위해 미국에 간 손 제독은 장면 주미대사의 도움으로 10월 17일, 대한민국 최초의 전투함인 PC-701 백두산함을 비롯하여 PC-702 금강산함, PC-703 삼각산함, PC-704 지리산함을 구입하였다.
3. 한국전쟁 시기
1950년 6월 25일 새벽, 한국 전쟁 개전일에 해상경비작전을 수행하던 YMS-509 가평정이 옥계 전투를 치렀다. 동해 옥계해상에서 북한 괴뢰군의 무장수송선 3척과 조우, 50여 분간의 포격전끝에 상륙정 1척을 격침시키고, 발동선 1척을 나포, 1척을 후퇴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이는 삼군을 통틀어 한국군 최초의 승전이기도 하다. 이어 26일 새벽, PC-701 백두산함은 대한해협 근해에서 부산으로 상륙하려던 북한의 무장수송선을 격침한 대한해협 해전을 치렀다. 무장수송선에는 북한군 600여 명과 탄약, 식량 등이 실려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비록 600명이라는 북한군 병력은 수가 많은 것은 아니지만, 후방이라 아군 병력이 적던 부산에 상륙해 항만 시설을 파괴하고 UN군의 병력과 물자 하역을 방해하는 일을 하기에는 충분한 숫자였다.이 외에 전쟁 발발 직후 국방부 제3국장(관리담당) 김일환 대령과 정규섭 해군소령의 주도로, 구용섭 한국은행 총재, 최순주 재무장관과 협의하여 한국은행 지하에 보관되어있는 금괴 1.5톤, 은괴 2.5톤을 해군이 인계받아 충무공정[28]을 통해 부산으로 이송하기도 했다. 그러나 6월 29일에는 해군의 JMS-305 두만강정이 동해 묵호 근해 미 해군 작전구역에서 에서 미 해군 경순양함 USS Juneau(CL-119)함의 오인 사격으로 격침당하는 사건도 있었다. 이 사건으로 승조원 8명이 전사하고 4명이 부상당했다.
8월 17일 저녁 PC-703 삼각산함[29]을 기함으로 함정 총 7척과 해병대의 김성은 부대가 통영 장평리에 최초로 단독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통영을 수복하였다.
인천 상륙 작전 사전의 정보수집을 위해, PC-702 금강산함을 기함으로 PC-701·704함, 513·301·307·309·313정의 승조장병들로 구성된 임시특공대가 아군의 함포지원 아래 상륙하여 8월 18일에 덕적도를, 20일에 영흥도를 수복하고 미 극동군 G-2소속 유진 클라크 대위팀과 함께 월미도·인천 등 상륙지점의 해안정보와 경인지구 정보를 수집하여 전달함으로써 인천상륙작전을 준비했다. 이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시 제7합동기동부대에 국군은 함정 15척, 해병대 3개 대대와 육군 제17연대가 참가하여 작전을 성공시켰다. 손원일 제독은 인천상륙작전의 국군 최고 지휘관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수도 서울을 탈환했다.'는 포고문을 남겼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고 북상하는 지상군에 대한 보급·수송·해안경비를 강화하기 위해 10월 9일 장전에, 18일에 원산에, 11월 4일 진남포에 각각 해군전진기지를 설치하고 부상병 치료를 위하여 11월 20일에 원산해군병원[30]을 설치하였다.
북한은 기뢰를 부설하여 연합해군의 해상작전을 위협했고, 10월 18일에는 516 공주정이 원산 여도 근해에서 소해작전중 기뢰로 인해 침몰했다. 해군은 이에 10월 25일 제1소해정대를 창설하여 본격적인 소해작전을 수행하였다.
전쟁발발 당시 해군의 편제는 해군본부 예하에 진해통제부, 인천경비부, 목포경비부, 묵호경비부, 부산기지, 군산기지, 포항기지, 인천의 제1정대, 포항의 제2정대, 목포의 제3정대, 진해의 훈련정대, 해군사관학교, 인천해군병원, 해병대로 조직되어 있었다. 함정들은 4개 정대에 예속되어 제1정대는 서해, 제2정대는 동해, 제3정대는 남해, 훈련정대는 여수시-진해구간 해역을 담당하고 있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오전 9시 해군본부 작명갑 제48호로 전 해군부대에 전투준비 명령을 내리고, 해군본부 내에 '해군지휘부'를 설치하는 등 조직을 전시체제로 전환했다. 6월 27일 해군지휘부는 '전투사령부'로 변경되었고, 7월 1일 해군본부와 전투사령부를 통합하여 '해군작전본부'로 개편되었다. 한국 해군은 7월 10일부터 UN 해군 예하 구성원으로 편성되었고, 해군작전본부는 9월 5일 해군본부로 확대개편되었다.
해상봉쇄작전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해본작명갑 제91호에 따라 8월 16일 훈련정대 해체와 동시에 제1정대를 모체로 하여 제1함대를[31] 창설하고, 12월 9일에는 동해의 제2정대를, 1951년 1월 5일에는 남해의 제3정대를 제1함대에 통합시켰다. 1952년 8월 1일 진해에 함대사령부를 설치하고, 예하에 동해전대, 서해전대, 남해전대, 호송전대, 수송전대, 소해전대, PT편대, 함정교육단을 조직했다. 정전협정 당시 한국 해군의 조직은 해군본부 예하에 제1함대, 진해통제부, 경비부, 진해공창, 시설창, 해군병원, 해군사관학교, 교육훈련부대로 편성되어 있었다. 병력(해병대 제외)은 14,862명, 개전 당시 1,166명의 병력을 보유한 해병대는 정전협정 당시에는 사령부본부, 제1전투단, 도서부대, 해병막사, 교육단, 보급중대로 조직되어 있었고, 병력은 27,500명이었다.
조함창은 1951년 8월 25일 수상정찰기 해취호와 PG-315 제2충무공정 명명식을 거행하였으며, 1952년 5월 7일 대통령령 제637호에 따라 조함창을 공창으로 개칭하고 장비 및 시설을 현대화하였다.
미국의 상호방위원조법에 의한 정상군원을 받아왔던 한국 해군은 개전과 함께 미군의 직접군원 방식에 따라 전쟁 기간중 PF(Patrol Frigate, 초계호위함) 등 함청 30척을 무상으로 지원받았다. 따라서 전쟁발발 당시 '내해방어 해군력' 수준이었단 한국 해군은 정전 당시 '근해방어 해군력' 수준으로 발전되었다. 이는 2,300톤급 PF함이 5척(PF-61·62[32]·63·65·66)이나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4. 정전과 남북한 대치에 따른 해군 발전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고 우리 해군은 독자적인 영해방위와 북한의 해군력에 대응할 수 있는 해군력 건설에 목표를 두고 조직과 전력을 정비해 나갔다. 이에 9월 10일 제1함대를 모체로 '한국함대'를 창설하고 그 예하에 제1호송전대·제3경비전대·제5경비전대·제1소해전대·제7보급전대·함정교육단을 창설했으며, 11월 9일 통제부 군수부와 재무관실을 통합하여 보급창을 창설했다. 1955년 3월 1일에는 한국함대를 개편하여 호송 및 경비작전을 위한 제1전단, 상륙작전을 위한 제2전단, 소해작전 및 기뢰부설작전을 위한 제31전대, 해상군수지원을 위한 제51전대, 함대의 훈련 태세 유지를 위한 함대훈련단을 조직했다. 7월 1일에 해군대학을, 8월 16일 인천공창[33]을 창설하였고, 1956년 3월 21일 종합학교[34]와 신병훈련소[35]를 통합하여 교육단을, 7월 1일 진해 해군병원과 군의학교[36]를 통합하여 의무단[37]을 창설했다. 1952년 11월 1일 서울 답십리동에 창설된 제5병원은 1954년 12월 30일 서울해군병원[38]으로 개칭되었다.독자적인 영해방위체제가 정비되자 해군참모총장은 1954년 9월 1일 남해 경비 및 봉쇄작전지휘권, 1955년 1월 1일 동해 경비 및 봉쇄작전지휘권을 미 해군의 제95기동함대사령부로부터 인수했다. 이듬해 4월 1일부터는 한국함대사령관이 동·서·남해 경비 및 봉쇄작전에 대한 책임을 맡게 되었다.
조직 정비와 함께 해군은 1954년부터 해군력증강 5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함정 세력을 확보해 나갔다. 1954년 11월 13일 공창에 3,000톤급 건선거를 준공하여 최초로 PF급의 함정수리가 가능하게 되었다. 1956년 2월 2일 호위구축함(DE) DE-71 경기함·DE-72 강원함에 이어 1959년 10월 15일 고속수송함(APD) 경남함, 1963년 5월 16일 구축함(DD) DD-91 충무함을 미국으로부터 도입했다. 구축함의 도입으로, 우리 해군력의 수준은 '근해방어 해군력'에서 '인접국전력투사 해군력'으로 한층 더 높아졌다.
1955년부터 도입한 함정들은 1955년 1월 29일 제정된 미국의 함정대여법에 따라 미국으로부터 대여 형식으로 양도받은 것이다. 정전 이후부터 1963년 말까지 미국으로부터 도입된 함정은 모두 54척, 총 함정척수는 67척, 해군 병력 정원은 16,000명이었다.
1954년 해사9기 생도들이 PF-65 낙동함을 통해 최초로 순항훈련을 시작했으며, 14개국을 순항하였다. 이 순항훈련은 매년 해사생도를 대상으로 시행되고 있다.
1955년 4월 15일 부산 중앙동에 위치한 해군본부를 서울 회현동 청사로, 1960년 9월 1일 서울 대방동 청사로 이전했고, 대한민국 해병대사령부는 1955년 3월 26일 부산 용두동에서 서울 후암동의 임시 건물로 이전한 후 이듬해 6월 30일 후암동 신축청사로 이전했다.
해병대는 전쟁중 1952년 10월 1일 창설된 해병 제1전투단을 모체로 1954년 2월 1일 해병 제1여단으로, 1955년 1월 15일에는 해병 제1사단으로 승격·창설했다. 조직이 정비되자 3월 14일 미 해병대 제1사단으로부터 작전지휘권을 환수하여 독자적인 작전임무를 게시했다. 1959년 3월 16일에는 해병 제1임시여단을 창설했다. 1963년 말 기준 해병대 병력 전원은 25,100명이었다. 해군본부는 5차(1953.09.10., 1957.01.01., 1961.01.01., 1961.12.01., 1963.01.01.)의 조직개편을 통해 1964년 11월 1일 3개 참모부, 4개부, 9개감실, 해병보좌관실로 개편하였다. 해병대사령부는 2차(1955.06.01., 1959.03.01.)의 조직개편을 통해 1963년 12월 30일 5개국, 14개감실로 개편하였다.
1964년 베트남 전쟁 파병 당시 해군의 함정 수는 67척이었다. 파월이 종료된 99척으로 증가했는데, 이러한 이유는 1970년에 MSB, LCU, PB, FB, SB 등 소형함정 24척이 함대세력(Fleet List)에 편입되었기 때문이다. 베트남 파병기에 도입된 함정들도 대부분 미국으로부터 인수한 것인데, 5인치 포가 장착된 DD(구축함) 6척, APD 5척이 도입된 것이 큰 전력증강이었다. 1971년부터 박정희 대한민국 대통령의 추진으로 우리 해군의 국산함정개발이 시작되었는데, 가장 먼저 국내 기술진에 의해 고속정 PK 두 척(학생호-1·2호, 후에 PK-151·152) 대한조선공사에 의해 건조되어 각각 1972년 12월 28일, 11월 30일에 해군에 인도되었다. 학생호는 전국 8백만 학생과 20만 교직자들의 애국방위성금으로 건조된 최초의 국산 고속정이다. 이어 PBK-10정(후에 PKM-271)과 PBK-11정(후에 PKM-272)이 해군공창에서 건조되어 각각 1973년 12월 20일, 1974년 4월 30일에 해군에 인도되었다. PK, PKM에 이어 PGM(유도탄고속함)이 국내에서 건조되었는데, 처음 세척(PGM-351·352·353)은 1971~1975년간 미국으로 부터 인수되었고, PGM-355함부터는 코리아타코마조선공업에서 건조되어 1975년 9월 27일 해군에 인도되었다. 최초의 호위함인 FF-951 울산함은 현대중공업에서, 최초의 초계함인 PCC-751 동해함은 대한조선공사에서 건조되어 각각 1980년 12월 30일, 1983년 11월 10일 해군에 인도되었다. 최초의 잠수정 SSM-051(돌고래급)은 코리아타코마조선공업에서, 기뢰탐색함 MHC-561 강경함이 강남조선공업에서 건조되어 각각 1984년 12월 29일, 1986년 12월 19일 해군에 인도되었다. 그리고 고속상륙정 LSF-611(LSF-1)이 코리아타코마조선공업에서 건조되어 1989년 해군에 인도되었다. 1980년대 초부터는 한국형 구축함 KDX에 대한 기초연구가 시작되었다.
1965년 6월 2일에는 서해에서 한국의 어선 '미생'호가 북한 해군 PBL-571함에 의해 납북되다가, 기동단대 사령관 안교승 대령의 탈환명령을 받은 PC-708 금정산함(함장 엄영보 소령)이 NLL을 넘어가 납북되던 미생호를 옹진반도에서 700m 떨어진 곳에서 탈환한 뒤, PBL-571함, PBS-473·474함의 추격을 뿌리치고 남한 해역에서 대기하던 APD-81 경남함, DE-72 강원함의 호위를 받아 어선과 어부들을 구출한 사건이 있었다.
1967년 1월 14일 DE-73 충남함이 남해 가덕도 근해에서 여수-부산간 왕래하는 여객선 한일호와 충돌하는 사고가 있었다. 이 사고로 한일호는 침몰, 승객 133명중 96명이 사망했다. 5일 후 1월 19일에는 동해에서 어로보호작전 중이던 PCE-56 당포함이 북한 해안포의 기습공격을 받아 대응했으나 침몰하여 79명의 사상자를 낸 사건이 있었으며, 1970년 6월 5일에는 연평도 근해에서 어로보호작전 중이던 해군방송선 I-2함이 납북되는 사건도 있었다.
1973년 10월 10일 기준 해군병력 정원은 19,466명, 해병대병력은 21,105명이었다.
이후 해군은 전력 증강과 독자적 작전수행체제를 위해 부대 전반을 정비해 나갔다. 1973년 5월 1일 함대항공대를 창설하였고, 작전기지를 경비부 체제에서 해역사령부 체제로의 정비로서 1973년 7월 1일에 묵호경비부를 제1해역사령부로, 부산경비부를 제2해역사령부로, 인천경비부를 제5해역사령부로 개편하고, 1974년 1월 28일에 목포경비부를 제3해역사령부로, 제주경비부를 제6해역사령부로 개편했다. 1975년 2월 1일에 해군제2사관학교를 설치했지만, 설치 8년 7개월만에 1983년 8월 31일 제7기생 졸업을 끝으로 해체되었다. 1976년 1월 15일, 공군의 제59해상초계기비행대대가 해체되어 운영하던 S-2 초계기와 조종사·승무원·정비사들이 해군으로 이전되었고, 1977년 함대항공대는 함대항공단으로 승격하였다. 1983년 9월 1일 설치된 교육단은 이를 모체로 하여 1987년 7월 1일 교육사령부를 창설했다.
1986년 2월 1일에는 한국함대를 작전사령부로 승격시키고, 제1해역사를 제1함대사령부로, 제5해역사를 제2함대사령부로, 제2·3·6해역사를 통합하여 제3함대사령부로 개편했다. 같은 날 제5성분전단을 창설하고, 함대항공단을 제6항공전단으로, 진해통제부를 제7기지전단[39]으로, 함정교육단을 제8전비전단으로 개편하고, 정비창·인쇄창 등 4개 창을 총괄하는 군수사령부를 창설했다. 1973년 10월 10일 정부는 국가자립경제 도모와 효율적 군 운용을 명분으로 대한민국 해병대사령부를 해체시키고, 예하 해병부대들을 해체하거나 해군에 통합시켰다. 1977년 1월 1일 제6해병여단이 창설되었고, 1981년 4월 16일 제2해병사단 창설에 이어 1987년 11월 1일에 해병대사령부가 재창설되었다.
5. 90년대 이후 대양해군을 향한 노력
해군은 1990년 환태평양 훈련에 처음 참가하였으며, 1992년 10월 14일 이때까지 축척한 기술을 토대로 209급 잠수함 장보고함을 독일로부터 인수하고, 이후 국내 기술진에 의해 이천함 등 후속함 8척을 건조했다. 2007년 12월 26일 214급 잠수함 손원일함에 이어 후속함 정지함과 안중근함을 국내에서 건조하여 인수했다. 1995년 4월 25일에는 해상초계기 P-3C를 미국으로부터 도입했고, 1998년 KDX-I급 광개토대왕함, 2003년 KDX-II급 충무공이순신함, 2007년 LPX급 독도함, 2008년 KDX-III급 세종대왕함 등 입체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함정을 건조·인수했다. 이외에도 군수지원함·기뢰부설함·상륙함·잠수함구조함·소해함·정보함·고속함 등을 국내에서 건조하여 인수했다.1992년에는 해사47기 생도들이 9월 14일부터 1993년 1월 21일까지 충남함과 마산함에 편승하여 세계일주 순항훈련을 실시했다. 1998년 10월 12일에는 제1회 대한민국 국제관함식을 거행했고, 2008년 10월 5일에 제2회 국제관함식을 거행했다.
아울러 해군은 1993년 6월 17일 해군본부를 서울시 대방동에서 계룡대로, 다음해 4월 6일에는 해병대사령부를 서울 신길동에서 경기도 화성시로 이전했다. 1995년 12월 1일에 교육사령부를 진해시 경화동에서 여좌동 구 육군대학으로, 해군대학을 진해시 충무동에서 대전시 자운대로 이전했다. 그리고 1999년 11월 13일에 제2함대사령부를 인천광역시에서 평택시로, 2007년 11월 15일에 제3함대사령부를 부산광역시에서 전라남도 목포시로, 12월 1일에 작전사령부를 진해에서 부산으로 이전했다.
1995년 3월 2일 전투발전단을, 10월 1일 제9잠수함전단과 해양전술정보단을, 1999년 7월 1일 인천해역방어사령부를, 2000년 1월 1일 진해기지사령부와 특수전여단을 창설했다.
6. 2000년대, 대양해군으로의 발돋음
2000년대에는 다목적 대형수송함(LPH)인 독도함과 한국에서 건조한 첫 이지스 구축함(DDG)인 세종대왕함을 취역시켰고, 서해교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윤영하급 유도탄고속함(PKG)과 인천급 호위함(FFG-I)의 건조를 시작했다.2010년대에는 대잠능력과 대공능력이 향상된 대구급 호위함(FFG-II) 건조 및 북한의 탄도미사일 탐지, 추적, 요격을 위해 탄도미사일방어(BMD) 체계를 갖춘 KDX-III Batch-II 3척의 건조가 추진됐다.[40] 잠수함 전력 역시 투자가 계속돼 해군은 214급을 바탕으로 한 손원일급 잠수함(SS-II) 9척을 취역시켰으며, 이를 바탕으로 적어도 하드웨어에서는 소류급에 필적한다는 3,000톤급 중형 잠수함인 도산안창호급[41]의 건조가 시작됐다.
2011년 1월 15일에는 소말리아 해역 호송전대가 한국군 최초의 해외 인질구출작전인 아덴만 여명 작전에 성공하였다.
2015년 들어 군수비리, 군납비리 등의 문제로 홍역을 앓고 있다. 해군 장교단은 인원이 적고 폐쇄적인 것으로 유명하며 기술군의 특성 상 장비 구입이 중요하다. 이런 해군의 특수성이 결합되어 군수 비리 문제가 불거지고 있다. 공군도 기술군이란 점에선 비슷하지만 해군은 조함단 등을 만들어 자신들이 배를 만드는 과정에 더 주도적으로 참여한다는 점이 좀 다르다.[42] 더욱이 해군은 앞서 인원이 적고 폐쇄적이라는 이야기처럼 끈끈한 선후배 관계로 얽혀 있으며 이를 지적하는 기사도 나왔다. 하지만 군납비리가 해군만의 문제도 아니고 사람이 많으면서 출신도 비교적 다양한 육군이 비리가 없냐면 그건 또 아니기에 갖다 붙이기라는 해군 출신들의 반발에도 일리는 있다.[43]
2020년대에는 1990년대부터 지속된 해군력에 대한 투자가 가시화된다. 시대에 뒤쳐진 참수리급 고속정(PKM)과 포항급·울산급이 일선에서 물러나고 윤영하급과 PKMR, 인천급과 대구급 호위함, FFX Batch-III로 해역함대가 재편된다. 특히 해군의 허리를 구성하는 호위함 전력의 강화가 두드러진다. 자함방공조차 어려웠던 포항급 및 울산급이 퇴역하고, FFX Batch-III가 취역해 함대방공까지 가능한 전투함이 주축을 이루게 되면, 해역함대는 북한 뿐 아니라 주변국들과의 해상 분쟁에서도 유의미한 전력이 되는 것이다.[44]
그 외에 해군의 첫 전용 훈련함(ATH) 등이 취역했고, 원양 작전 및 대형함 지원을 위한 소양급 군수지원함(AOE-II)의 후속함과 잠수함의 대형화에 맞춰 차기 잠수함구조함(ASR-II)도 도입될 예정이다. 잠수함 전력 역시, 잠수함 발사 탄도유도탄(SLBM)을 탑재하는 3,000톤급 이상의 잠수함들이 배치되면 더 은밀하고 공세적인 작전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된다.
항공 전력은 P-3 초계기를 추가 도입 및 개량했고 P-8 대잠 초계기 도입도 추진되고 있다. 또 해상작전헬기 1차 사업을 통해 AW159 와일드캣을 전력화했고, 2차 사업으로 MH-60R 도입이 이뤄지면 대잠전력도 향상될 예정이다.[45]
해군의 질적 성장은 의심의 여지 없이 명백히 긍정적인 일이지만 예산의 부족과 혁신적이지 못한 함정 설계[46]는 개선될 부분이며, 항공 전력 및 소해 전력과 해양조사·정보함 등이 주변국에 비해 크게 부족한 문제도 있다. 한편, 폐쇄된 해군 장교단 특성상 지속되는 방산비리는 해군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물론 군사대비태세 유지에도 커다란 장애가 되고 있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저출산으로 인한 병력자원 부족이다. 인력부족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하지 못하면 해군이 전력을 갖춘다고 쳐도 태울 사람이 없어 함선을 돌리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47] 실제로 2035년이면 병사 수를 30만명으로 유지시키려고 해도 현역 판정률만 101%가 된다.[48]
7. 관련 서적
7.1. 해군 발간 역사서
8. 관련 문서
[1] 예비역 해군제독(소장), 前 방위산업진흥협회 진흥본부장[2] 명칭 변경이 있었을뿐 해체는 없었다. 그러므로 '해방병단 = 대한민국 해군'이다.[3] 육군은 1946년 1월 15일, 해병대는 1949년 4월 15일, 공군은 1949년 10월 1일에 창설되었다.[4] 일반 민간해사단체가 미 군정과의 합의로 준군사조직이 된 것이다.[5] 해군병/학교가 아니라 해군/병학(兵學)/교로 일본제국해군의 사관학교가 일본 해군병학교였으니 일본의 영향이라고 볼수 있다. 참고로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의 결과로 육군과 해군의 용어가 달랐다.[6] 이때 최고 계급은 손원일 단장이 참령(소령)계급을 받았다. 그 다음은 초대 인천기지사령관 백진환 정위(대위)[7] 참고로 현재 해양경찰은 Korea Coast Guard[8] 일본으로서는 식민지 조선인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해상에서 근무하는 함정근무의 특성상, 선상 반란이라도 일어나면 답이 없는 것이 그 원인이라고 볼 수 있겠다.[9] 김재규가 바로 일본 해군 항공대 출신이다. 가미카제 특공대 훈련 중 해방을 맞이했고 일본제국 패망 이후에야 일본군 소위로 임관했다.[10] 물론, 임관 기수 자체는 특교대 5차이긴 하다. (출처: 장학근, 방수일, "해양개척의 선구자 박옥규", 해군본부 해군역사기록관리단, 2017.)[11] 손원일 제독의 경우 순수 상선사관으로 보기에는 약간 미묘하다. 국부군 해군 유학생이기 때문이다.[12] 이성호 제독이 일부 남아있던 비해사 출신의 제독들을 자신이 해사 1기를 밈으로써 다 전역시켜버린 영향도 있어 해사가 헤게모니를 잡기가 유리한 구조이기도 했다.[13] 초대 신현준 사령관의 경우, 일제시절에 육군 출신이었음에도 해방 후에 해군으로 들어왔고 해병대 창설시엔 중령 계급으로 해군 통제부의 참모장이었다. 다른 육군 출신 해병대 간부들도 마찬가지 케이스들.[14] 이는 현대의 상선사관들도 마찬가지이다. 한국 해사고나 해양대생들 생활은 사관학교와 비슷하고 일반 고등학교/대학교와는 확연히 다르다.[15] 1등병조부터 3등병조까지 구분되어, 각각 상사~하사 계급이었다.[16] 본래 일본군에선 하사였으나 해군/해병에서는 병장에 준하는 계급이었다.[17] 오장의 경우 일원화 조치 이후에도 해군, 해병대에서는 병 계급 최선임자 혹은 (분리수거, 청소, 추라이, 쇼핑 구분없이)작업의 최선임자를 지칭하는 관용어로 쓰인다. ex.일병 오장, "네가 오장잡고 추라이 나가라"[18] 일본 해군은 진수부-경비부-요항부의 3등급으로 기지를 구분했다.[19] 대표적으로 '순검'이라는 용어는 타군의 '점호'의 뜻으로 해군에서만 사용하는 용어인데, 이 또한 일본 해군에서만 육군과 분리해서 사용하던 용어였다.[20] 불과 3개월 전 육군 2개 대대가 대대장과 함께 월북한 사건으로 인해 민감한 시기였다.[21] 해사1기, 1951년 12월 16일 원산항에서 전사, 당시 PC-704함장[22] 정장 공정식 소령[23] 정장 백운기 소령[24] 하지만 찾으러 간 요트는 그곳에 없었고 평양으로 옮겨진 뒤였다.[25] 실제로 이후 북한은 이 사건을 들며 '남한이 먼저 북침하여 한국 전쟁을 발발시켰다.'는 역사왜곡을 하기도 했다.[26] 동년 5월 15일 인천해군병원으로 개칭. 한국전쟁 발발시 목포로 이전한 뒤 1950년 7월 27일 목포에서 해체[(] (다시 본 ‘6·25 첫 승전’ 대한해협 해전[28] 정장 이종철 소령[29] 함장 이성호 중령[30] 12월 10일 제주도로 철수하여 제3해군병원으로 개칭, 1954년 12월 23일 인천으로 이전한 뒤 인천경비부 의무실을 개편하여 인천해군병원으로 개칭, 1964년 11월 1일 포항으로 이전한 뒤 포항해군병원으로 개칭. 1971년 1월 11일 국군포항통합병원에 통합.[31] 현재의 제1함대와는 다른 부대다. 자세한 내용은 이하의 내용 참조.[32] 1952년 5월 21일 울릉도 근해에서 미 해군 AO-3와의 충돌사고로 퇴역[33] 1960년 12월 3일 해체[34] 1950년 11월 9일 창설[35] 1952년 8월 15일 창설[36] 1952년 4월 12일 창설[37] 의무통합부대 설치 및 통합병원령(대통령령 제3932호)에 따라 1971년 1월 11일 국군진해통합병원에 통합[38] 1971년 1월 11일 국군수도통합병원 분원에 통합[39] 현재 제7전단과는 다른 부대다.[40] 2022년 5월 현재 한창 1번함이 건조 중이며 2022년 경과 전에 진수, 2년 동안 시험평가를 거치고 2024년 11월 경 해군에 인도할 예정이다.[41] KSS-III Batch-II 부터는 4000톤급으로 배수량이 확대되었다.[42] 방위사업청이 세워지면서 조함단은 해체되고 전투발전단으로 바뀌었다. 물론 방위사업청에 여전히 해군 조함 병과 장교들이 들어간다.[43] 똥별은 육해공을 가리지 않고 포진해 있기 때문에 발사 안 되는 개인화기, 불타는 전투복과 전투화, 어군탐지기 구조함 등이 나오는 것이다.[44] 해역함대가 어느 정도 제 역할을 하게 되면 해군의 주력인 7기동전단의 부담을 덜어줄 수 있게 된다. 7기동전단 또한 레이더와 전투체계의 성능이 떨어지는 충무공이순신급(레이더 체계의 개량은 아직 확정되지 않은 상태)을 전면 개량 예정이고, 이지스함 3척을 추가로 운용하며, 추가로 KDDX 사업을 통해 신형 구축함들이 건조되면서 18척 규모의 전투력으로 대폭 확대되어 더욱 유연하고 위력적인 해군력 운용이 가능해진다. 군이 3~4개의 기동전단을 요구해온 만큼 18척 체계가 갖춰지면 1개 기동전단을 넘어 3개 기동전단으로 구성된 기동함대로 확대개편될 가능성 또한 점쳐지는 중이다.[45] 다만 대잠전력은 대잠전 특유의 어려움과 자금 및 여러 여건상 여전히 부족하다. KDX-III Batch-II와 KDDX에 신형 멀티스테틱 소나를 장착하는 사업과 기존 함정의 개량사업에서도 멀티스테틱 소나로의 업그레이드가 추진되고 있는데 최종적으로는 상당수의 수중 음탐장비를 멀티스테틱으로 하여 대잠 네트워크망을 구축할 예정이다.[46] 다만 보수적인 건함사상을 가지는 것은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전차나 항공기와는 달리 해군은 군함을 건조할 때 비용이 타군의 장비들에 비해 몇십 배는 많은 금액이 들어가기 때문에 테스트 목적으로 몇 척씩 뽑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번 뽑아내더라도 확실하게, 검증된 것을 고르려는 보수적인 건함사상을 가지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다만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뒤처진 것을 선택하는 행위는 지양해야 할 것이다.[47] 통계청에 따르면 2020년 기준 남아 출생아 수는 14만이 안 된다. 따라서 2020년 남아들이 병역검사를 받는 20살이 되는 해인 2039년이 되면 남자들을 한 명도 남김없이 현역으로 입대시킨다고 쳐도 입대 인원이 1년에 14만도 안 된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것도 저 인원들이 한 명도 남김없이 모두 군복무에 적합할 때의 희망적인 이야기일 뿐이라서 현실은 14만은 커녕 12만 남짓이 최대이다. 따라서 2040년대가 되면 부적격인 인력들을 제외하면 매년 징병대상이 수만 명대까지 내려갈 수도 있다.[48] 한 술 더 떠서 20년 뒤면 병력이 33만명으로 감소한다고 한다. 물론 기사에 나오듯이 군복무를 도로 늘릴 수도 있겠지만 남성들의 반발도 심할 것이고, 그런 식으로 계속 남성의 군복무를 도로 늘리면 남성들의 사회 진출이 늦어지고, 결국 결혼을 더 늦게 하거나 할 사람도 안 하게 되어서 군대 갈 남아가 계속해서 더 줄어드는 악순환만 발생한다. 물론 정치권에서는 이런 악순환을 뻔히 알고도 여성들의 표를 의식해 여성을 징병하지 않겠다고 버티고 있는 실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