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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2 16:13:28

구호기사단

병원기사단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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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요한의 예루살렘로도스
몰타의 주권 군사 병원 기사단

Sovrano Militare Ordine Ospedaliero di San
Giovanni di Gerusalemme di Rodi e di Mal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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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발[1] 문장
Difesa della fede e servizio ai poveri[이]
Tuitio fidei et obsequium pauperum[라]
신앙의 수호와 가난한 이들에 대한 원조
위치 이탈리아 로마
수도 말타 궁전
국가 Ave Crux Alba
정치 체제 기사단
단장 존 T. 던랩
언어 이탈리아어
라틴어
군대 구호기사단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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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설명3. 역사
3.1. 창설과 십자군 전쟁3.2. 이슬람 세력과의 대결
3.2.1. 로도스 기사단3.2.2. 몰타 기사단
3.3. 멸망3.4. 재건과 현대의 기사단
4. 외교5. 직책/계급 체계6. 역대 기사단장7. 군사8. 몰타 십자가(Maltese Cross)9. 세인트 존 앰뷸런스(Saint John Ambulance, St.JA)10. 대중 매체


[clearfix]

1. 개요

유럽 십자군 전쟁 시기에 결성된 가톨릭기사수도회. 정식 명칭은 '성 요한예루살렘로도스몰타의 주권 군사 병원 기사단(이탈리아어: Sovrano Militare Ordine Ospedaliero di San Giovanni di Gerusalemme di Rodi e di Malta, 영어: Sovereign Military Hospitaller Order of Saint John of Jerusalem of Rhodes and of Malta)'이다.

대개 줄여서 '구호기사단(Knights Hospitaller)'이라 부르며, 함께 십자군 국가들을 방위하던 성전 기사단원은 'Templar'라고 불렸지만 구호기사단원은 'Hospitaller'라고 불렸다. 하지만 구호기사단이란 이름 외에도 성 요한 기사단, 로도스 기사단, 몰타 기사단, 병원 기사단 등 정식 명칭의 일부를 따온 여러 약칭이 있다. 이탈리아를 비롯한 서양 쪽에서는 흔히 몰타 기사단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한국의 옛날 책 중에는 약칭인 'Hospitaller'를 '애호사(愛護士)'라고 옮긴 사례도 있으며, 지금도 몇몇 사전에 실려 있다. #

단순한 가톨릭 단체처럼 보이지만 국가에 준하는 대우를 받고 있다. UN 가입 자격을 갖고 있으며, 별도의 우표, 그리고 여권[4]을 발행한다.

2. 설명

파일:구호기사단원 깃발.svg
기사단원들을 상징하는 깃발

현재까지도 존속하고 있으며, 단체명과 각종 직책명은 과거 기사단 시절의 것을 그대로 유지하는 중이지만, 과거와는 달리 이제는 군사 단체가 아닌 구호봉사를 목적으로 하는 사실상의 NGO로 탈바꿈하였다. 그들이 기사가 되기 이전의 업무인 의료 봉사를 하는 단체로 회귀한 것이다. 오늘날에는 이름에 걸맞게 순수하게 구호 활동을 하는 단체이지만, 과거 17세기에는 서인도 제도에서 식민지를 경영하는 식민제국이 되는 등 다사다난한 세월을 보내기도 했다.

현재는 영토가 없어서 국제법주권국으로 취급받기 어려운 상황이지만, 세속 영토가 있었던 과거엔 엄연히 국제법상 주권 실체(sovereign entity)로 대우를 받았다. 하지만 영토가 없는 현재도 구호기사단을 주권 실체로 인정해줘서 외교 관계를 수립한 나라들도 엄연히 존재한다. 정식 명칭에 괜히 '주권'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게 아니다.[5]

한때 몰타를 지배했던 세력이라 몰타 정부가 영토의 일부를 떼어 주려고도 했었다고 한다. 만약 성사됐으면 '교황청+바티칸' 모델 비슷하게 되어 다수의 국가들이 구호기사단을 국가로 인정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성사는 되지 않았다. 대신 기사단의 몰타 내 활동을 보장해주기 위해 옛날에 몰타에 있을 때 쓰던 성의 상부를 외국의 대사관과 유사한 치외법권 지역으로 인정해주고 있다. 그곳은 몰타 법을 따르지만 기사단원들에게 몇 가지 특권이 제공된다.

현재 본부는 이탈리아 안에 2군데 있는데, 이탈리아는 구호기사단의 주권을 실제로 인정하는 나라라서 구호기사단의 본부도 치외법권 지역으로 인정해준다.

이 두 장소 중 하나인 Villa del Priorato di Malta는 로마를 여행하는 사람들이 찾는 곳이기도 한데, 구호기사단이 방문 목적은 아니고 대문의 열쇠구멍이 유명하다. 열쇠구멍을 들여다보면 구멍을 프레임 삼아 구호기사단의 뜰 너머로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이 아름답게 보인다. 이를 보기 위한 관광객들로 대문 앞에는 언제나 꽤 긴 줄이 있다.

기본적으로 기사수도회를 전신으로 한 가톨릭 관련 단체이나 영국, 네덜란드, 독일, 스웨덴 등에는 개신교도들을 위한 '요한 기사단'이 별도로 존재한다.

3. 역사

3.1. 창설과 십자군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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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c1.staticflickr.com/6272234623_7b7879e216_z.jpg
600년 예루살렘에 설립된 순례자들을 위한 병원이 시초로서, 본래 구호 활동을 담당하던 곳이다. 1차 십자군 전쟁 때 십자군들로 포위된 예루살렘에서 자의에 의한 것인지 타의에 의한 것인지 의료 봉사를 계속 했다. 이들의 이러한 기원은 그들이 유연하게 살아남는 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성전 기사단은 보호할 성전과 전투가 없으면 존재 가치를 잃기 때문에[6] 실제로 사라져서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만, 병원 기사단은 전투가 없어져도 의료 봉사를 하면 되었으므로 유지될 수 있었다.

이후 1113년 십자군 전쟁이 발발하면서, 교황명으로 기사단으로 조직되었다. 처음에는 예루살렘 방어와 같은 소극적 전투 활동에 국한되던 활동 영역이 이후 순례자들의 경호 등으로 확대되기 시작했고, 계속적인 조직 확대를 통해 거대한 군사 조직이 되었다. 검은색 겉옷에 그려진 흰 십자가를 상징으로 삼으며,[7] 십자군 전쟁 기간 동안 전쟁의 주력으로서 이슬람 군대와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창설 초기에는 신앙심만으로 참여하는 귀족들이 많았으나 후대로 갈수록 물려받을 재산이 없는[8] 차남, 삼남 같은 갈 곳 없는 귀족 자제들이 주요 인재 풀이었다.

십자군 전쟁 당시 난공불락의 요새로 꼽힌 크라크 데 슈발리에를 사수한 전력이 유명하다. 당시 이슬람 세력을 이끈 누르 앗 딘살라흐 앗 딘도 이 성을 공략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물러난 적이 있다. 당시 한 무슬림 작가는 이 성을 두고 '무슬림의 목에 걸린 가시'로 평할 정도.

1271년에야 이 성이 함락당하는데 이때 상황이 참 드라마틱하다. 당시 크라크 데 슈발리에를 지키던 구호기사단의 병력은 수백 명 정도였으나, 그 몇십 배에 달하는 맘루크 왕조의 군대를 성공적으로 방어해냈다. 그러자 맘루크군을 이끌던 바이바르스 1세는 교묘한 방법을 이용했다. 트리폴리 백작 보에몽 1세의 편지를 위조해서 "더 이상 승산이 없다. 항복하라."라는 내용이 적힌 편지를 비둘기로 성 안에 보낸 것. 여기에 속은 기사단은 성을 내주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바이바르스는 항복한 기사단원들을 살려줬다는 것.

다른 해석으로, 기사단의 무사 철수를 전제로 한 협상의 결과로 성을 내주고 철수했다는 주장도 있다. 수백 년간 난공불락이던 요새가 이런 얄팍한 속임수로 한순간에 무너졌다고 납득하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바이바르스의 크라크 데 슈발리에 포위 공격은 성채 주변의 12개 요새(성채 방어를 위한 전초 기지)를 먼저 함락시켜 성채를 고립시킨 후 진행한 것이고, 크라크 데 슈발리에는 시리아 지역의 마지막 십자군 거점이었다. 즉 시리아 일대의 십자군 세력은 다 패배하여 밀려났고 크라크 데 슈발리에 이외에는 다른 거점이 없었으니, 저항해봤자 시리아의 마지막 십자군 거점을 지켜낸다는 상징적 의미 말고는 얻는 게 없다고 기사단 수뇌부가 판단했다는 것. 전략적 관점에서 보면 십자군 세력의 핵심 전력 중 하나이던 구호기사단이 무의미한 방어전에 묶여 있는 것보다는 레반트 해안 지역에서 아직 명맥을 이어가던 다른 십자군 국가들을 방어하는 데 합류하는 쪽이 낫다고 판단했더라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즉, 세력을 보존한 상태로 다른 십자군 세력에 합류하기 위해 무사 철수를 조건으로 크라크 데 슈발리에를 포기하고 물러나거나, 얄팍한 속임수에 속아 넘어가는 척하고 물러나는 것이 합리적인 판단일 수 있는 상황이었다.

3.2. 이슬람 세력과의 대결

파일:1711983_1415305__DSC6519.jpg
로도스 시절에 지어진 장엄한 성채

3.2.1. 로도스 기사단

1291년 아크레가 함락되면서 예루살렘 왕국이 성지의 영토를 모두 상실하고 키프로스로 밀려났으며, 이때 구호기사단도 성지의 거점을 모두 상실하자 당시까지 동로마 제국의 영토였던 로도스섬을 침공해 거점으로 삼았다. 이후 근처 몇몇 섬 및 아나톨리아 본토의 일부 거점을 확보하고 이슬람 세력과 전쟁을 계속했다.

십자군 전쟁이 종료된 후 교황청프랑스 왕의 손에 의해 철저하게 해체당한 성전 기사단과 달리 구호기사단은 최전선에서 이슬람에 맞서는 성채로서 큰 역할을 하고 있었던 탓에, 성전 기사단의 재산 상당량이 구호기사단에 흡수되어 유럽 각지에 지부를 두고 그 세력을 크게 확장할 수 있었다. 다만 티무르가 바예지트 1세를 공격할 때 마찬가지로 거점 요새인 스미르나를 공격당한다.

이후 15세기 오스만 제국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고 세력을 떨치자 이에 반발하여 1세기가량 오스만 제국 선박에 대한 무차별 해적질을 벌였다. 당시에는 '이교도에게 가한 죄악은 죄가 아니라고' 인식했기 때문에 기사단이 해적질을 해도 통념상 문제가 없었다.[9] 주로 무슬림들을 납치해 서유럽에 노예로 파는 인신매매를 했는데, 한번은 투르크족 귀족 소녀 2명이 이들한테 납치되어 프랑스로 팔려가 그곳에서 강제로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프랑스인 귀족들과 억지로 결혼을 하는 일도 있었다. 그 밖에도 오스만 술탄 공주의 유모가 이들한테 납치당해 분노한 공주가 아버지인 술탄에게 구호기사단을 응징해달라고 애걸하여 로도스섬 공방전이 벌어졌다는 소문도 있었다.[10] 이 무렵 기사단의 해군 전력은 단 7척이었지만, 로도스섬의 위치가 에게해지중해 중간에 걸쳐 있어 시리아나 이집트 해안 지대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가는 길목에 해당하는 요충지였기 때문에 오스만으로서는 기사단의 해적질이 적잖은 골칫거리였다.

한편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때 3중 성벽이 신무기 대포에 의해 무너지는 것을 보고 대대적 개수 및 중축을 거듭하여 대포 공격도 버틸 수 있는 난공불락의 요새를 구축했다. 그래서 메흐메트 2세 치세 말기인 1480년 당시 오스만이 시도한 공략은 실패했다. 이때 오스만 제국군은 전장에서 바로 길이 5.5미터에 60~75cm 구경을 지닌 거대한 사석포 16문을 제조할 만큼 엄청난 물량을 쏟아부었으나, 끝내 구호기사단의 단단한 방어를 뚫지 못하였다. 강력한 오스만 군대에 맞서 싸워 요새를 지켜내 승리한 기사단의 명성은 유럽 전체에 알려졌고, 오스만 군대에 연전연패를 거듭하며 절망에 빠져 있던 본토 유럽인들은 로도스 기사단의 승리를 열광적으로 축하했다. 그래서 기사단장도 로마 교황에게 추기경 작위까지 받을 만큼, 크나큰 영예를 누렸다. 그러나 1522년,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젊은 술탄 쉴레이만 1세가 직접 2차 공략을 시도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략한 메흐메트도 못했던 로도스 원정에 쉴레이만은 간단한 해법을 내놓았다. 바로 인해전술이었다. 이때 오스만 제국은 병력 10만, 함선 300여 척의 대군을 동원하였는데, 당시 기사단 측 기록에 따르면 온 로도스의 땅이 오스만의 붉은 깃발로 뒤덮였을 정도로 많았다고 한다. 반면 수비하던 기사단 병력은 기사단원 7백 명에 로도스 주민 7천여 명이었다.

기사단은 신성 로마 제국, 에스파냐, 영국, 프랑스 등 같은 기독교 국가들에 지원을 요청하였지만 이들은 끝끝내 그들을 도와주지 않았다. 에스파냐와 포르투갈대서양 항로 개척에 전념했고, 영국과 프랑스는 왕권 강화에 몰두하던 중이었다. 그나마 희망이었던 베네치아는 오스만과의 아슬아슬한 줄타기 외교로 휴전하던 중이었던 터라 도와주지 않았다. 결국 기사단 측은 1년치 식량과 무기 등을 비축한 요새에서 6개월에 걸친 기나긴 수성전을 벌였다.

이 당시 로도스 기사단은 상당히 뛰어난 기사들이었다. 거의 일당백 수준의 실력자들이었고, 각종 무기에 능했다. 심지어 총도 상당히 잘 다뤘다. 오스만군의 사상자는 무려 1.5만~4.5만 명이 되었지만, 쉴레이만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계속 밀어붙였다. 만약 이때 오스만 군대의 총사령관이 술탄 쉴레이만이 아니었다면, 군대를 철수시켜야 했을 정도로 피해가 굉장히 컸다. 그러나 술탄 쉴레이만의 로도스섬을 함락시키겠다는 의지가 워낙 확고해서 추운 날씨와 전염병의 창궐에 막대한 사상자 속출에도 불구하고 계속 밀어붙였다.

외성이 무너져 내성으로 후퇴해 버티던 기사단에게 쉴레이만은 모든 무기와 군기를 가진 채로 섬을 나가게 해주겠으며 기사단과 함께 섬을 떠날 주민들의 안전도 보장한다는 제안을 하였다. 지금 제안을 안 받아들이면 나중에 성이 함락되었을 때 기사단은 전부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는 전제 조건을 달긴 했지만. 사실 이때 쉴레이만도 더 격렬하게 싸우기는 힘들었으리라는 게 정설이다. 이 전투에서 정예병인 예니체리를 포함해 병력을 많이 잃었기 때문이다. 물론 기사단도 공성전 과정에서 큰 손실을 입으며 내성까지 몰렸고 기사단을 지원할 구원군도 없는 고립무원의 상황이라 계속 전투를 벌이면 분명 쉴레이만이 이겼겠지만 그 과정에서 또 얼마나 피해를 입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으니 적당한 선에서 협상하여 섬에서 내보내는 게 쉴레이만 입장에서도 나은 선택이었다.

섬이 삶의 터전인 로도스 주민들조차 죽을 각오로 싸울 여유가 없었으므로 항복하느냐 마느냐를 두고 격한 찬반 논쟁을 벌였다. 소수 기사들이 결사 항전을 주장하였지만, 전쟁으로 쑥대밭이 된 주민들의 압박에 밀려 기사단장 필리프 빌리에 드 릴라당은 쉴레이만의 제안을 받아들이며 성문을 열었다.

1523년 1월 1일, 살아남은 기사단원과 민간인 수천 명은 마지막 행진을 벌이며 쉴레이만이 제공한 배 50척을 타고 명예롭게 베네치아령 크레타섬으로 떠났다.[11]

3.2.2. 몰타 기사단

몰타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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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한동안 시칠리아에서 더부살이를 하던 기사단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카를 5세의 배려로 1530년 몰타섬을 할양받아 이곳을 거점으로 또다시 오스만 제국과 전쟁에 들어갔다. 카를 5세는 기사단에 형식적인 조공으로 1년에 한 번씩 몰타산 1마리를 바치라고 요구했다.[12] 원래 기사단은 당시 그리스도교도의 영역이었던 북아프리카트리폴리를 요구하였으나 신성 로마 제국에서 번번이 거부하였는데, 기사단이 생각했던 최적의 활동지 트리폴리는 1551년 오스만 제국에게 점령당했다. 기사단 입장에서는 천만다행인 일이었다.[13]

몰타는 이전 거점인 로도스에 비해서 여러모로 열악했다. 거점의 크기를 보면 로도스는 약 1400 km2으로 제주도의 3/4쯤 되고, 몰타는 약 300 km2으로 서울의 절반쯤 된다. 대부분이 바위로 이루어져 있어서 토양 또한 척박하여 자급자족이 힘들었다.

다만 바위가 많은 환경은 수비 면에선 엄청 긍정적인 요소가 되었다. 주변에 보급 기지가 될 만한 섬 하나 없고, 절벽으로 둘러싸여 상륙 지점도 마땅치 않은 데다, 땅이 워낙 좁아서 투입할 수 있는 병력이 한정될 수밖에 없었으므로 공격자가 숫적 우위를 유지하기 힘들었다. 게다가 몰타는 로도스와 맞먹을 정도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당시 오스만의 세력이 바르바리 해적들 덕분에 서지중해까지 넓어지긴 했지만, 이곳은 유럽 국가들의 앞마당이기도 했기 때문에 동지중해 같은 우위를 누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오스만 측 배들은 최대한 안전하게 가려면 몰타와 튀니지 사이의 해협을 지나가야 했는데, 시칠리아와 북아프리카 중간에 자리잡은 몰타섬은 해협의 통제권을 장악하기 좋은 위치였던 것이다. 따라서 기사단은 다시 이곳을 거점으로 하여 오스만을 상대로 엄청난 해적질을 해 오스만 제국이 이들을 경계했다. 이때 기사단의 해적질이 오스만을 비롯한 이슬람 세력들의 큰 골칫거리였는지, 몰타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뱀 소굴'이라는 말이 오스만 제국에서 나돌았다고 한다.

동으로는 바그다드, 북으로는 베오그라드, 남으로는 아덴까지 점령한 정복왕 쉴레이만 1세는 로도스 때와는 달리 본토와 거리가 너무 멀고 치세 말기였던지라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1564년 오스만 황실 선박이 구호기사단에 나포되어 기사단 항구에 전시되는 사태가 벌어지자, 술탄은 이를 치욕으로 여겼다. 한편 레콩키스타에서 승리한 스페인이 눈길을 북아프리카로 돌리자, 스페인과 오스만의 대결은 불가피해졌고, 스페인이 북아프리카에서 이슬람 해적을 몰아내고 거점을 마련하면, 해적들이 오스만에 지원을 요청하여 탈환하는 양상이 펼쳐졌다.

이 과정에서 하이르 앗 딘, 투르구트, 울루츠 알리 레이스와 같은 해적들이 권력을 얻고 부상하였으며, 결국 1560년 제르바섬 해전에서 이들이 그리스도교 연합군을 전멸시키고 제해권을 확보하자, 여세를 몰아 1565년 3월 몰타섬을 공략하기 위해 각지에서 끌어모은 4만 대군을 파병했다. 기사단 역시 외부에 나가 있던 기사들을 소집하고 무기와 식량을 비축하며 9천가량의 병력으로 다가올 전쟁을 준비했다. 이는 기사단장이었던 '장 파리소 드 라 발레트'의 공이 컸다. 로도스 공방전에도 참전한 적이 있는 발레트는 로도스 공방전 당시에는 혈기 넘치는 젊은 기사단원으로 결사항전을 주장했으나 기사단이 입은 심각한 손실과 전쟁으로 쑥대밭이 되어버린 로도스 주민들의 항의에 기사단장 필리프 빌리에 드 릴라당이 항복을 결정하면서 분을 삼켜야 했다. 그때의 치욕을 다시는 겪지 않으려는 듯 요새를 여럿 세우고 전력을 확보하는 것에 광적으로 집착했다. 정보 수집에도 심혈을 기울여서 코스탄티니예의 황궁에도 그의 첩자들이 있을 정도였다. 수천 km 떨어진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원정군이 출범하자마자 기사단이 바로 준비 태세를 갖출 수 있었던 이유도 이런 첩보 덕분이었다.

몰타 원정군 총사령관 랄라 무스타파 파샤가 이끄는 오스만 원정군은 5월에 몰타에 상륙하였다. 랄라 무스타파 파샤는 로도스 때처럼 명예로운 항복을 제시하였지만 초강경파 발레트는 이 섬이 예니체리들의 시체로 가득차게 되면 주겠다고 망언을 했고 이 말을 전해 들은 무스타파는 기사단을 전부 죽여버리고 발레트는 산 채로 코스탄티니예로 끌고 가겠다며 노발대발했다.[14]

기사단은 결사 항전의 의지로 맞섰기 때문에 오스만군은 엄청난 피해를 입어야 했다. 특히 몰타섬 주민들은 조상 대대로 바르바리 해적들에게 시달려 왔던 터라 이슬람에 대한 증오가 하늘을 찔러서 기사단에 자발적으로 협조했고 기사단 군대의 중추를 담당했다. 게다가 전투에서 전사하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전대사를 수여하겠다는 교황청의 교서가 내려오자 더 적극적으로 싸웠다.

기사단의 방어에는 약점이 있었는데, 몰타섬의 지형이 험준하다 보니, 기사단은 큰 요새를 건설하지 못해 군대를 작은 요새들에 분산 수용해야 했다는 점이다. 몰타섬의 주요한 거점은 다음과 같았다. 섬 남동쪽에는 폭풍을 피하기 좋은 만이 조성되어 있었고, 이 만 안쪽에는 손가락 모양의 작은 반도들이 튀어나와 천혜의 항구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 중 빌구 반도에는 기사단의 항구와 기사단 본부 생 안젤로 요새가 있었고, 이에 인접한 생 리아 반도에는 민간 항구와 생 미카엘 요새, 그리고 만 전체의 입구를 감제하는 스케베라스 산 끄트머리에는 생 엘모 요새가 위치했다. 이와는 멀리 떨어진 섬 중심부에는 주민들의 중심지이기도 한 므디나가 성벽으로 보호받고 있었다. 발레트는 빌구와 생 리아, 그리고 생 엘모에 주요 부대들을 배치했고, 므디나는 소수의 기병대와 민병대에게 방어를 위임해야 했다.

하지만 오스만군 역시 걱정거리가 있었으니, 몰타섬이 당시 스페인 영토였던 시칠리아섬과 가까워서 스페인군이 해상 봉쇄를 뚫고 구원병을 보내면 승리를 장담하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오스만 본토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물자를 아프리카에서 수송해와야 했으며, 이는 상당한 골칫거리였다. 따라서 동원된 함대는 스페인 해군의 움직임 감시, 수송 지원 등으로 바빠 육군의 작전을 제대로 지원해주기 힘들었고, 이 과정에서 해군이 제대로 된 지원을 안 해준다고 생각하는 육군과 압도적인 전력으로도 제대로 된 항구 하나 확보를 못 한다고 생각하는 해군 사이에 심각한 분열이 발생했다.

어쨌든 오스만군은 우선 항구가 필요했고, 따라서 만을 통제하에 두기 위해 생 엘모 요새를 공략했다. 산자락 끝의 작은 요새에 불과했던 생 엘모 요새는 순식간에 요새 외곽을 빼앗기고 사실상 시한부 상태에 빠졌다. 이에 절망에 빠진 요새의 수비병들이 항명을 하는 사태가 벌어졌으나, 오스만군이 해안 봉쇄를 게을리하는 바람에 기사단 본부에서는 자원병을 선발한 후, 야간에 해상을 통해 요새에 증원했고, 요새 내부에 술집과 도박장을 차려 사기를 증진시켰다. 마침 경험이 적은 무스타파 파샤(육군 지휘관)와 피알리 파샤(해군 지휘관)을 감독하기 위해 쉴레이만이 파견한, 전설적인 해적이자 지중해 총독인 드라구트가 도착했는데, 그는 이 상황을 단번에 파악하고 오스만군의 대포를 재배치하고 생 엘모 요새와 바다를 통한 보급선에 포격을 실시했다. 결국 이는 생 엘모 요새에는 치명타였고, 오스만군이 요새를 점령하는데 성공했으나 한 달에 걸쳐 싸우며 사상자 6천여 명을 내었다. 무스타파 파샤는 "알라여, 이렇게 작은 요새에 이런 큰 희생을 치렀는데, 더 큰 요새에는 앞으로 얼마나 더 큰 희생을 치러야 합니까?"라며 절망하기도 했다. 더 큰 손실은 이 과정에서 오스만 대포가 폭발하여 투르구트가 전사한 것. 물론 기사단 역시 피해가 만만치 않아 천여 명에 가까운 사상자를 냈으며, 사상자에 분노한 오스만 육군들은 기사단의 항복을 받아주지 않고 포로를 학살했기 때문에 생 엘모 요새에서 살아남은 병력은 운 좋게 오스만 해군에 항복하거나 바닷가 동굴에 숨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격전 끝에 만을 확보한 오스만군은 이제 빌구를 육지와 바다 양쪽에서 공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한 달여간 대규모의 포격 및 총격을 퍼부었고, 성벽 밑에 갱도를 파내려가 이를 폭파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기사단은 이러한 시도를 막아냈지만, 병력의 손실과 피로, 그리고 성벽 손상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으며, 사기가 떨어진 기사단 측 병력 중 오스만에 투항한 병사로부터 방어선의 정보를 습득한 오스만군은 8월 초에 총 공격을 가해 성벽의 일부를 돌파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이때, 므디나에 주둔했던 기사단 소속 기병대가 오스만 후방에 위치한 본진을 습격하여 약탈하고 불을 지르는 사태가 벌어졌고, 이 연기를 스페인의 증원군이 도착한 것으로 오인한 오스만군이 병력을 퇴각시키면서, 기사단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넘기게 되었다. 이후, 실상을 알게 된 오스만은 므디나를 공격하려 했으나, 므디나 주민들이 민간인과 여자, 심지어 아이까지 병사로 위장시켜 성벽에 세워놓은 것에 속아 공격을 포기하고 병력을 철수시키면서 므디나 역시 위기에서 벗어났다.

시간이 흘러 가을로 접어들자 오스만군은 겨울에 대비해야 했고 본토의 쉴레이만도 증원을 명령했다. 오스만군은 애초에 공성 기간을 길어봤자 4주 정도로 여겼는데, 막상 섬에 와보니 공성은 길어지고 먹을 것은 없었다. 교두보 격인 튀니지는 이들을 지원하는 데 한계가 있었고, 오스만 해군은 스페인의 증원군을 막기 위해 넓은 바다를 감시해야 하는 등, 보급에만 몰두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중에 이르러선 보급 부족으로 사기가 바닥을 쳤다. 기사단은 포위 직전 가축들을 성 안으로 들이거나 아예 다 죽여버렸고, 곡식도 수확할 수 있는 건 죄다 거둬가고 나머진 모조리 태워버렸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풍족했기 때문에 이를 이용하여 성 요한의 축일에 대놓고 즐겁게 먹고 마시는 모습을 보여주며 심리전을 펼치기도 했다. 오스만군 역시 자신들의 병력 일부를 야간에 몰래 배로 실어 보낸 후, 아침에 다시 입항시키고는 "증원군이 왔다"라며 거창하게 환영식을 벌이는 등 나름대로 속임수를 펼쳤다.

결과적으로 8월 말에서 9월 초가 될 무렵에는 양측 모두 기진맥진하였으나, 원군이 오지 않는 한 빌구 함락은 시간 문제로 보였다. 사실 기사단은 저번과 같이 서유럽 가톨릭 국가들에게 원군을 요청했었다. 이번엔 지리적으로 상당히 가까운 거리였으나, 제르바 해전의 상처가 덜 아문 터라 이번에도 대부분의 국가들은 이 요청을 무시했다. 하지만 공성이 꽤 길어지면서 기사단의 앞마당이던 스페인 왕 펠리페 2세의 신하이자 시칠리아의 부왕 가르시아가 8천 병력을 보내왔다.

사실 가르시아는 공방전 직전 반드시 구원을 오겠다는 증표로 자신의 아들을 몰타에 남겨두었고, 실제로 구원군을 보내기 위해 애썼지만, 제르바에서 함대를 잃은 펠리페가 더 이상 배를 잃어서는 안 된다는 엄명을 내렸기 때문에 수송선단을 동원하지 못해 지연되는 상황이었다. 결국 구원군을 보내었을 때에는 이미 몰타에 남긴 아들이 전사한 후였다.

어쨌든 9월 6일 증원군이 함대를 타고 시칠리아를 출발했고, 오스만군은 이미 사흘 전에 이 함대를 발견하고 철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오스만군이, 나포되어 치욕의 상징이 된 오스만 황실 선박을 침몰시키려 집중 포격을 가하고, 기사단이 이를 어떻게든 수리해서 띄워놓는 웃지 못할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마침내 9월 7일 증원군이 몰타섬에 도착했고, 오스만군이 섬을 포기하고 후퇴하려 배에 올라탈 찰나에 뜻밖의 사건이 벌어졌다. 증원군 중 레콩키스타 시절 강제로 가톨릭으로 개종당한 병사 하나가 오스만 막사로 탈영해서는 '증원군은 기강도 보급도 형편없어 병사들의 사기도 바닥을 친다'라는 사실을 오스만 지휘부에 알린 것이다.

이대로 돌아가 쉴레이만의 분노를 받아낼 자신이 없었던 오스만 지휘부는 도박을 걸어보기로 하고, 배에 올라탔던 병력들을 다시 하선시켜 증원군과 결전을 시도했다. 그러나 탈영병의 정보는 일부만 사실이었다. 증원군은 몰타섬에 도착한 후, 현지에서 소들을 징발해 잡아먹고 있었던 것이다. 즉 이제 막 섬에 도착해서 거하게 식사를 한 증원군은 석 달 넘게 고생한 오스만군보다 체력도 사기도 높았다. 증원군의 기강이 형편없다는 사실만은 변함이 없었지만, 대열을 형성하고 대기하라는 지휘관의 명령 따윈 거부하고 돌격해버린 증원군을 오스만군이 버텨내지 못하면서 이는 오히려 오스만군에 불리하게 작용했다. 결국 오스만군은 3만 5천이 전사하는 전멸에 가까운 손실을 입고 해안까지 도망가서 배에 올랐다. 이 전투를 마지막으로 3개월, 3주, 그리고 3일에 걸친 공방전은 기사단의 승리로 끝을 맺었다.

쉴레이만 대제는 패전 사실을 듣고 처음에는 노발대발했으나 어느 정도 정상 참작을 해주었고, "내년에는 내가 직접 가겠다"라며 이 바위섬에 강하게 집착했다. 하지만 이듬해, 헝가리 전역에서 무리한 출병과 합병증이 겹쳐 결국 사망하였고 몰타섬 정복은 오스만에 영원한 미완의 과제로 남았다.

섬이 초토화되고 병력의 절반을 잃을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지만, 오스만의 포위를 물리친 기사단과 단장 장 드 라 발레트는 서방 그리스도교 국가들에서 영웅으로 칭송받았다. 한편 이 공방전에서 라 발레트는 분산된 소규모 요새에서 방어하면 위험할 수 있음을 절감하고는 오스만에게 점령당했던 생 엘모 요새가 위치한 스케베라스산을 통째로 요새화하기로 했다. 그는 이 시공식 때 첫 돌을 스스로 들어 옮기기도 했다. 시공식 3년 뒤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는데, 사후 완성된 이 새로운 중심지는 그를 기리는 의미로 발레타로 명명되었고, 오늘날 몰타 공화국의 수도가 되었다.

이후 1571년 레판토 해전을 계기로 오스만의 위협이 완전히 사라지면서 구호기사단의 해적 행위도 더욱 극성을 부렸고, 몰타섬은 그리스도교도 노예를 해방하고, 반대로 아랍과 아프리카 노예를 유럽에 공급하는 시장으로서 번성하였다. 문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베네치아나폴리 등 같은 가톨릭 국가 선박들한테까지 해적질을 하면서 사실상 해적 국가로 변질되었고 그리스도교 국가들에게도 몰타 해적단이라는 멸칭으로 불리면서 고립되었다.[15]

3.3. 멸망

18세기 후반 들어 종교개혁으로 대륙 지부들은 모두 해체되었으나 일종의 독립 국가로 변한 몰타 지부는 여전히 건재한 상태였다. 그러나 1798년 나폴레옹이집트 원정의 일환으로 몰타섬을 침공해 점령했고, 그리스도 신자들과 싸우지 않는다는 원칙에 따라 구호기사단은 항복하면서 기사단 국가는 멸망했다.

어떤 기록에 의하면, 나폴레옹이 자신의 함대를 이끌고 이집트로 가는 길이라서 잠깐 쉬었다 가겠다고 속여서 아무 저항 없이 프랑스 군대가 상륙하게 놔둔 후 뒤를 당해서 정복당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다른 기록에 의하면 기사단의 중심인 프랑스 출신 기사들이 나폴레옹을 환영하면서 받아들였고, 그랜드 마스터는 이를 저지할 수가 없어서 정복당했다고도 한다. 다만 기사단에 참여할 정도라면 신앙심은 둘째치고 혈통이 100% 귀족이란 이야긴데, 그런 이들이 혁명 세력인 나폴레옹을 환영했다는 건 어딘가 아귀가 맞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귀족 출신 중에서도 혁명에 열광한 인물들이 없었던 것이 아니었고, 기사단이라는 곳이 상속에서 밀린 작은 아들들이 보내지던 곳이었으며, 무엇보다 당시 기사단의 존재 이유였던 튀르크와의 전쟁이 흐지부지된 상태였다는 점은 고려해야 한다. 즉 몰타에서의 일상에 만족할 수 없었던 일부 기사들에게는 이집트 원정이 모험, 혹은 한몫 잡을 수 있는 기회로 보였을 것이다.

영문 위키백과에 따르면, 물과 식량을 보급받고 싶다는 나폴레옹의 요청을 받은 기사단장이 "보급은 해주겠지만, 한 번에 2척만 입항할 수 있다."라고 회답하자 나폴레옹이 "그럼 보급이 너무 늦어지고, 그러다가 영국 해군에 붙잡힐 수 있다."라고 반발하여 병력을 상륙시켜 기사단을 공격했고, 몰타섬 서부를 격전 끝에 점령한 뒤 기사단 본대에 항복을 요구해서 관철했다고 적었다. 전투가 아예 없었던 건 아니라는 듯. 다만 프랑스군의 사상자는 수 명 수준으로 적었으며, 기사단 쪽의 사상자 역시 대부분이 포로였던 것으로 보아 격전이라고 부르기엔 민망한 수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한두 시간 정도 저항하다 포기하고 요새 안으로 후퇴한 기사단이, 다음날 24시간 휴전 협정을 맺은 후, 협상과 내부 토론 끝에 프랑스의 돈을 받고, 대신 요새를 비롯한 기사단의 모든 영토를 프랑스에 넘겨주고 철수하면서 전투가 종료되었다. 한편 2년 후 영국이 몰타섬을 프랑스로부터 빼앗았을 때, 기사단장이 영국에게 몰타의 기사단 본부를 반환해달라 요청했으나 거절당했고,[16] 이후로도 기사단이 몰타 내의 영토를 회복하는 일은 없었다.

3.4. 재건과 현대의 기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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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베네딕토 16세의 방문. 현대의 기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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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호기사단의 로브.

당시 기사단장이었던 페르디난트 폰 홈페슈는 그를 따르고자 한 단원과 함께 신성 로마 제국트리에스테로 떠났다. 하지만, 1801년에 페르디난트는 살해되고 만다. 이에 당시 교황이었던 비오 7세가 기사단의 보호자가 되겠다고 자청하고, 조반니 바티스타 토마시를 새로운 단장으로 임명해 시칠리아카타니아에 기사단의 임시 지부를 마련해 주었다.

시간이 흘러 카타니아 외에도 메시나, 페라라에도 임시 지부를 마련한 기사단은 마침내 1834년 로마에 정식 기사단 지부를 만드는 것을 허가받았다. 이 시기부터 구호기사단은 군사적인 면은 거의 탈피하여 본분인 구호 활동에 노력하는 일종의 NGO로 거듭났다. 로마에 콘도티 거리에 있는 구호소에서는 우표를 판매한다.[17]

한편 영국 지부는 1888년 빅토리아 여왕의 공인을 받아 '예루살렘의 성 요한 기사단'으로 재건되어 영연방과 미국에서 활동하였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영국 적십자와 함께 활동하기도 했다. 그래서 영국에서 오는 구호품들은 영국 적십자사와 성 요한 기사단 명의로 오곤 했다.[18] 1963년 몰타 기사단의 인정을 받고 정식으로 구호기사단에 편입되었다. 한때 개신교에 장악되었던 독일 지부도 역시 동일한 명칭으로 재건, 스웨덴, 네덜란드, 헝가리로 조직을 확장했으며, 영국 지부와 연대해 활동하고 있다.

구호기사단 홈페이지에는 "더 이상 검으로 싸우는 전쟁은 없으나, 평화로운 도구들을 사용해 질병ㆍ가난ㆍ사회적 단절ㆍ편견과 싸워 나가는 것은 믿음을 지키고 전파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요하다."라는 문구가 있다.[19] 과거에는 귀족이 아니면 가입 자격을 주지 않았으나, 이제는 귀족이 아니라도 가입할 수 있다고 한다.[20]

2008년, 79대 기사단장 매튜 페스팅(영국인, 59세)이 취임했다.

한국에도 회원 1명이 지부 설립을 준비 중이라는 기사가 2013년에 나왔다. 지원자는 양창수(베네딕토) 대법관, 나경원(아셀라) 전 국회의원, 지진희(요한) 배우 등이 있다. 봉사와 기도로 2년여 수련 기간을 마치면 기사 작위와 함께 정회원 자격을 받는다. 2015년 마침내 오더 오브 몰타 코리아(Order of Malta-Korea)라는 이름으로 창립해, 박용만 회장이 대표로 선출되었다. 박용만 대표는 2018년 몰타 기사단의 한국 대표 자격으로 성 베드로 대성당의 미사에 참례한 바 있다. #

이제 군사적 성격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근대 이후에도 여전히 활동하며 존속하는 기사단이라는 점이 잡배들의 허영심을 자극했기 때문인지, 구호기사단의 이름을 도용한 많은 사이비 기사단들이 존재한다. 이를 정리한 책도 있으며, 배포는 구호기사단이 한다. 이 책에서 정리한 사이비 기사단 수는 무려 16개. 움베르토 에코는 이런 사이비 기사단 중 하나의 초청장을 받은 것을 계기로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에서 이들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기도 하였다.

2017년 1월 페스팅 구호기사단장이 태국에서 에이즈 예방을 위해 콘돔을 나누어 주던 알브레히트 폰 뵈젤라거 부단장을 해임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부단장이 바티칸에 억울함을 호소했다. 교황청에서 이 해임을 부당하게 여겨 갈등을 빚다가 페스팅 기사단장이 물러나게 되었다.[21] 주권국가인 구호기사단에 교황청이 이례적으로 개입한 사례이다.

2018년 이탈리아 출신 자코모 달라 토레 델 템피오 디 산귀네토가 제80대 단장으로 선출되었으나, 2020년 4월 29일 사망하였다.

이후 2023년 평민 출신인 존 티모시 던랩(캐나다인)이 제81대 단장으로 선출되었다. 이 최초의 비귀족 출신 기사단장의 선출은 2022년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명령한 법률 개정으로 귀족만이 기사단장을 할 수 있다는 규정을 폐지한 덕분이었다.

4. 외교

파일:SMOM foreign relations (2).png
구호기사단과 외교 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초록색), 외교 관계를 맺지 않고 국가로만 인정한 나라(연두색).
영어 위키백과의 관련 문서
외교 사절, 자국 등록 선박, 자체 자동차 번호판 등이 있고, 우편 협정을 유지하는 몇몇 나라에서만 통용되는 우표도 발행하며 UN의 영구 가입 자격도 갖추었다.[22] 별도의 여권[23]이 발행되며, 이탈리아[24]몰타 공화국[25]을 비롯해서 UN 회원국의 과반수인 112개국이 몰타 기사단을 완전한 국가로 인정한다. 오히려 중화민국(대만)이나 코소보를 인정한 나라 숫자보다 더 많다. 기독교권 국가뿐만 아니라 아프가니스탄요르단이집트 같은 이슬람권, 태국캄보디아 같은 불교권 국가들도 몰타 기사단을 국가로 인정한다. 그래서 로마에 있는 몰타 기사단장 관저는 '세계에서 가장 작은 국가'로 불리기도 한다.

몰타 기사단장 관저에 대사관을 입주시킬 수는 없으므로, 주 교황청 대사관처럼 로마에 주 구호기사단 대사관이 있다. 당연히 구호기사단도 일부 국가에 대사관을 두었다.

5. 직책/계급 체계

상술된 대로, 구호기사단의 직책과 계급 체계는 중세부터 쭉 이어져 내려온다. 근본적으로 다른 기사단들과 달리 다국적 기사들이 모였기에 기사단의 체계 자체가 출신 국가를 나눈다. 단 현재 기재되는 직책과 계급 체계는 중세를 기준으로 한 것이다.

6. 역대 기사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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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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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몰타 십자가(Maltese Cross)

파일:구호기사단원 문장.svg
꼭짓점 8개가 있는 이 십자가 도안은 몰타 기사단의 상징이면서 몰타의 상징이기도 하다. 4면은 용기, 정의, 절제, 인내를 의미하고 8개 꼭짓점은 아라곤, 카스티야, 오베르뉴, 바이에른, 포르투갈, 잉글랜드, 이탈리아, 프로방스 등 기사단을 구성하는 8개 출신 지역을 의미한다. 기사단의 의무 역시 8줄로 되어서 각 꼭짓점마다 이 의무를 대입하는 해석도 있다.
진실하게 살고(Live in truth)
신앙심을 갖고(Have faith)
죄를 뉘우치고(Repent of sins)
사람들을 겸손하게 대하고(Give proof of humility)
정의를 사랑하고(Love justice)
자비를 베풀고(Be merciful)
진심으로 온 마음을 다하며(Be sincere)
박해를 인내한다(Endure persecution)
단, 위 여덟 꼭짓점의 의미는 나중에 붙인 것이고, 이 십자가는 원래 이탈리아의 상업 도시 아말피의 문장이다. 아말피의 상인들이 구호기사단을 창립하면서 도시의 문장을 그대로 사용한 것.

현재의 독립국 몰타는 국기가 따로 있으므로 공식적으로는 몰타 십자가를 쓰지 않지만, 여전히 기사단 관련 유적지에서 흔히 볼 수 있으며 관광 상품에도 다양하게 변형해서 집어넣어 팔고 있다. 참고로 이 십자가 도안은 독일 제국의 훈장인 푸르 르 메리트(Pour Le Merite) 훈장에도 채용되었다.

스위스시계 회사 바쉐론 콘스탄틴이 이 문장을 사용하고 있다.

9. 세인트 존 앰뷸런스(Saint John Ambulance, St.JA)

구호기사단은 영국을 포함한 영연방권에서는 구급차로도 유명하다. 다른 나라처럼 소방서에서 직접 구급차를 운영하지 않고 구호기사단에서 제공하는 구급차를 운영하기 때문이다. 요금이 부과되는 지에 대한 여부는 나라에 따라 다르다.

10. 대중 매체

예루살렘 왕국 시절에는 성전 기사단라이벌 격이었으며, 오히려 성전 기사단보다 더 강력하게 오스만 제국과 장기간 대결하며 기사단 국가를 유지했고, 심지어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기사다운 엄청난 전투력을 보여줬음에도 불구하고, 안 망하고 2024년 현재까지 남아 있다 보니 신비스러움과 음모스러움이 부족해서 그런지 창작물에서 등장하는 빈도는 성전 기사단에 비해서 많이 밀린다. 음모론 분야에서도 성전 기사단은 이야기가 많지만 구호기사단은 거의 이야기가 없다. 초창기부터 오로지 무력 집단으로서 개설된 성전 기사단과는 달리 구호기사단은 말 그대로 구호소에서 시작해 기부받은 재산을 지키기 위해 구성된 만큼 폭력성도 비교적 덜했다. 그러다 보니 악역에 그다지 적합한 집단도 아니고 지금까지 남아 있는 집단으로서 사료가 되는 기록도 많아 음모론이 개입할 여지도 그만큼 적다. 그래서 등장하더라도 선역으로 나오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성전 기사단보단 나은 역할로 나올 때가 많다. 오늘날 기사단의 군대인 구호기사단군도 직접 전투가 목적인 아닌 일종의 평화 유지군 역할을 하는 부대이기에 역시 대중 매체의 소재로서 관심받지 못하고 있다.

[1] 덴마크 국기와 비슷하지만 치우치지 않았다. 또 색감이 보통 빨간색보다 조금 더 밝은 스칼렛 계열의 색상이다.[이] 이탈리아어.[라] 라틴어.[4] 보통 여권도 아니고 전자여권이다. 여권은 전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특정인의 국적을 나타내는 유일한 수단이므로 여권을 따로 발행한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5] 비슷한 케이스로 교황청이 있다. 이탈리아 통일 과정에서 교황령을 상실한 뒤 한동안 영토가 없어서 이탈리아 왕국에 더부살이하는 서러운 세월을 지냈는데, 그 기간 동안 일부 국가들은 교황청이 영토가 없어도 주권 실체로 대우하였다. 현재는 라테라노 조약을 통해 바티칸 시국이 만들어져 교황청이 영토까지 있는 국가나 마찬가지가 되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국가들이 교황청(바티칸 시국 자격이 아니다)과 직접 수교를 맺고 있다. 자세한 점은 바티칸 문서 참고.[6] 애초에 이름부터가 '성전' 기사단이다. 성전이 없다면 당연히 존재할 이유도 없다.[7] 반대로 흰색 겉옷에 검은 십자가를 상징으로 하는 것은 튜튼 기사단이다.[8] 중세 초기에는 게르만족의 전통에 따른 분할 상속제가 기본이었으나, 중세 후기로 가면서 서서히 장자 상속제가 정착했다. 이때부터 장남 아래 자식들은 빌어먹든 굶어 죽든 알아서 살아야 했다. 이들은 보통 기사, 사제가 되었고, 집에서는 재산을 물려주지는 않아도 기사나 사제가 되는 데 필요한 지원 정도는 해 주었다.[9] 이는 이슬람 쪽도 마찬가지여서 무분별한 약탈이 자행되기도 했다.[10] 출처: 바다의 제국들[11] 세계사에서 이런 후퇴는 그리 드물지 않다. 이런 게 가능했던 이유는 협상을 제안한 군주(혹은 사령관)가 자신의 명예를 지킨다는 명분도 있지만, 만약 약속을 어긴다면 이후의 전쟁에서 다른 적들이 어차피 항복해 봤자 죽을 것이라 생각해 점령군이 이용할 수 있는 모든 물자를 정리해 버리고 결사 항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12] 사실 그냥 공짜로 준 거나 다름없는 1달러 계약이었지만, 기사단은 엄선하여 훈련시킨 매를 매년 마드리드 왕궁으로 보냈다. 이 조공은 섬에 들어온 1530년부터 프랑스군에 쫓겨난 1798년까지 약 200년 넘는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지켜졌다. 대실 해밋추리 소설 몰타의 매에 나오는 매 조각상은 이 이야기를 모티브로 삼았다.[13] 일부러 트리폴리에 안 들어갔다는 견해도 있다. 기사단은 당시 유럽 귀족의 자제만 입단을 허용하는 까다로운 규칙 때문에 전투원이 아무리 많아도 1천 명을 넘기지 못할 정도로 인원이 모자랐다. 이런 상황에서는 육상전에 강한 튀르크군이 공격하면 순식간에 밀려버렸을 것이다.[14] 이런 오스만에 대한 관점은 레판토 해전 때도 그대로였다. 심지어는 그리스도교 연합군 총사령관의 지시를 항복으로 잘못 판단하여 명령에 불복종하는 경우도 있었고 싸우다가 승산이 없다 싶으면 그냥 오스만군과 같이 자폭하기도 했다.[15] 당시 바르바리 해적에는 이슬람교로 개종한 백인들도 많았기 때문에 멀쩡한 그리스도교 국가 상선들을 나포해서 노예로 팔아먹었다.[16] 상술했듯 가톨릭 선박도 해적질하며 몰타 해적단이라 불릴 정도로 고립되었던 것이 큰 이유일 것이다. 영국 입장에서도 해적들에게 굳이 본거지를 주고 싶지 않았던 것.[17] 가치 있는 것들은 5유로 이상이며, 이탈리아어를 하는 것이 좋다.[18] 나치 독일에도 엄연히 적십자가 있었으며, 나치 정부의 선전 도구로 쓰이기도 했고 적십자 문양에 하켄크로이츠를 박았다. 연합군 사상자를 수습해주는 등 그 역할을 제대로 했다. 이들마저 없었으면 2차 세계대전 전몰 장병의 시신 수습은 더욱 어려웠을 것이다.[19] 단 완전 무장 해제는 아니다. '군사' 문단 참고.[20] 그러나 2022년 법률 개정 이전까지는 비귀족출신은 기사단장으로 선출될 수가 없었다.[21] 몰타기사단, 콘돔 사용으로 교황청과 갈등 봉합, 교황청의 승리[22] 다만 유엔 총회 옵서버 자격이고, 그마저도 바티칸 시국과 같은 비가맹국 대우도 아니다, 지위는 국제적십자사국제올림픽위원회와 같은 옵서버 '단체'이다.[23] 일반 여권하고 비슷하다. 한국에서는 몰타 기사단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으므로 여권 인식이 불가하다.[24] 현재 몰타 기사단 본부가 위치한 나라.[25] 몰타 기사단의 옛 본진이었던 나라.[26]프랑스의 남동부 지역.[27] 북방 십자군의 주력이던 튜튼 기사단그룬발트 전투 패배로 몰락하고 있고, 리투아니아의 개종으로 명분도 사라진 상황이며, 소설에서도 선포된 십자군은 원래 목표인 세르비아 구원에는 실패했다.[28] 아라곤과의 전쟁으로 악감정이 생겼을 기사단 내부의 아라곤 출신자들을 무시할 순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3차 오스만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도 아라곤은 베네치아와 협력해 제국을 지속적으로 견제하고 있었다.[29] 심지어 한동안은 식민지 경영까지도 했다. 번역[30] 원래 역사에서는 그리스도 신자는 공격하지 않는다는 신념을 가지고 이슬람 선박과 해안만 해적질했지만 게임 내에서는 그리스도교 이슬람 가리지 않고 신나게 털다가 패치로 국교 지역은 못 털게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