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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秦) 초대 황제 시황제 | 始皇帝 | |||
<colbgcolor=#000> 출생 | 기원전 259년 2월 18일[1] | ||
조 한단 (現 허베이성 한단시) | |||
사망 | 기원전 210년 9월 10일[2] (향년 49세) | ||
진 사구 (現 허베이성 싱타이시 광종현) | |||
능묘 | 여산릉(驪山陵) | ||
재위 | 진 6대 국왕 | ||
기원전 247년 7월 6일[3] ~ 기원전 221년[4] | |||
진 초대 황제 | |||
기원전 221년 ~ 기원전 210년 9월 10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0> 성 | 영(嬴) | |
씨 | 조(趙)[5] | ||
휘 | 정(政/正)[6][7] | ||
부모 | 부황 태상황 모후 조희 | ||
신장 | 190cm 미만[8] | ||
제호 | 始皇帝 시황제 | Shi Huang Di | }}}}}}}}} |
《사기》에 실린 <시황제 본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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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秦)나라의 제31대 국군이자 제6대 왕이며 중화라는 인식을 처음 남긴 진(秦) 제국과 중화제국(中華帝國)의 첫 번째 황제(皇帝)로 중국을 최초로 통일했으며, 황제라는 명칭을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사용한 인물이다. 시황제는 첫 번째 황제라는 뜻으로 자칭한 것이며, 진나라의 첫 황제라는 진시황제, 또는 이를 줄여서 진시황이라 하기도 한다.고대 중국의 6국[9]을 병탄하여 550여 년에 걸친 춘추전국시대를 끝내고, 진나라부터 청나라까지 약 2,000년에 걸쳐 이어진 황제 중심 중앙집권제를 처음으로 통일왕조에 실현한[10] 인물이었다.
기나긴 춘추전국시대를 끝내고 중국을 통일한 대업을 이룬 인물이라는 점에서 굵직한 역사적 의의를 갖는 인물이지만, 통일 이후 지나치게 급진적이고 억압적인 통일 정책을 펼쳐 결과적으로 제국의 급속한 멸망을 초래한 군주라는 점에서 폭군 또는 철권통치의 대명사로 여겨지기도 하는 등 복합적인 면모를 보인 인물이다.
2. 생애
자세한 내용은 시황제/생애 문서 참고하십시오.3. 평가
자세한 내용은 시황제/평가 문서 참고하십시오.4. 분서갱유
자세한 내용은 분서갱유 문서 참고하십시오.사상책을 불싸르고 유학자를 묻어버린 이 사건 덕분에, 전근대의 유학자들에게는 가히 만세의 적 취급을 당했다.[11]
5. 여담
- 사마천의 《사기》에서 울료는 시황제의 용모를 가리켜 "코가 높고, 눈은 길게 찢어졌으며[12] 가슴은 매처럼 생기고, 목소리는 들개 같으며 은혜를 베풀 줄 모르는 사람으로 폭압적 정치를 하는 극악무도한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 덤으로 "겉으로는 겸손한 척하나 속으로는 인덕이 부족하고 음험해 승냥이나 이리 같은 자"라고 혹평했다.[13]
- 시황제가 수은을 장기복용해서 심신의 건강을 해쳤다고 주장하는 학자가 있다. 수은은 장기 복용 시 신장과 뇌에 문제를 일으키며, 소량 섭취 시 피부 속의 흑색 색소과립을 포함한 세포를 죽여 일시적으로 희뽀얘지며 피부가 회춘한 듯이 팽팽해지는 효능이 있다. 다만 진시황릉에 천하를 꾸밀 때 바다를 나타내기 위해 수은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실제로 현재 진시황릉 주변의 토양 수은 농도가 다른 곳보다 월등하게 높아서 실제로 다량의 수은이 묻혔을 것으로 보고 있다.[14] 하지만, 진시황이 수은을 먹었다는 확증은 없으므로 이는 추측에 불과하다. 진시황이 불노장생을 위해 도사인 한동(韩佟)이 추출한 원수(元水)를 먹었다고 사서에는 기록되어 있는데, 이 원수를 수은이라고 보는 학자도 있지만, 정확히 무엇인지는 제대로 알 수가 없으니, 진시황릉이 이후 완전히 발굴되어 그의 시신을 부검하기 전까지는 정확한 사인을 알 수가 없다. 이렇게 진시황이 수은을 먹어 요절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진시황의 붕어 당시 나이인 50세는 당대 평균 수명(40세)을 넘는 것이며 약 2000년 후인 조선시대 왕들의 수명(평균 46세)을 볼 때도, 딱히 요절한 것은 아니다. 바로 다음 왕조인 한나라 황제 29명의 수명 (평균 33세) 및 아버지 장양왕(34세)와 비교해도 진시황은 장수한 편에 속한다.
- 일중독 환자였다. 그는 매일 120근(약 60kg)의 서류를 정확히 무게를 재서 검토하고 결재했다고 한다. 당시는 물론 문서는 죽간으로 작성되었기 때문에 문서 자체의 무게가 좀 나가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독서량은 하루에 10만자가 넘었다. 이런 진시황의 고사으로부터 만기친람(萬機親覽), 일일만기(一日萬機), 형석량서(衡石量書)라는 고사성어가 나왔다. 또한 중앙집권제를 확립하기 위해 통일후에는 암살 음모를 무릅스고 계속 수레를 타고 전국을 순행하였으며, 5번이나 천하를 돌았다고 하며, 순행하는 수레 안에서도 계속 지방에서 올라오는 서류들을 검토하고 결재했다고 한다. 당연히 이런 과로는 중년의 나이로는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고, 결국 천하를 유람하는 도중 객사하는 원인이 되었다.
- 10년 만에 전국의 여섯 국가를 멸망시키고, 가혹한 통치를 한 탓에 과거 6국 백성들의 증오를 한 몸에 받았고 수많은 암살 시도가 있었다. 대표적으로 연나라 형가의 암살 미수와 형가의 친구 고점리, 훗날 한나라 개국 공신이 되는 젊은 시절의 장량 등이 있다. 이연걸 주연의 2002년 영화 <영웅 : 천하의 시작>도 보면 이 암살 시도를 모티브로 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중국 역사를 통틀어서도 시황제는 유난히 암살 위협을 많이 받은 황제였고 이 때문에 불로불사에 더 집착했다는 주장도 있다.
- 시호와 묘호가 없는 황제로 나름 유명하다. 흔히 불리는 시황제는 시호가 아니라 첫 번째 황제라는 의미일 뿐이다. 시황제가 '황제'라는 칭호를 만들면서 시호를 폐지했다. (죽은) 황제에게 시호를 올리는 건 (그 다음 군주가 된) 아들이 아버지에 대해 논하고, 신하가 (죽은) 군주에 대해 논하여 적당한 글자를 정하는 것이기 때문에(시법), 철권 독재자인 시황제의 눈에는 매우 건방진 관행으로 보였다. 그래서 아예 시호를 없애버리고 황제의 대수만 표기하게 했다. 호해가 이세황제(二世皇帝)라고 불리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15]
- 시황제의 시호가 없는 탓에, 선진·양한[16](先秦兩漢) 시대 탁월한 군사적 업적을 이룬 시황제와 한무제를 함께 일컬을 때 특이하게도 진황한무(秦皇漢武)라고 표현한다.[17] 어차피 진나라의 2세 황제 호해는 황제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수준의 치세를 보냈고, 재위 기간도 짧아 따로 언급할 일이 적고 그 다음 군주인 자영 역시 한 달 조금 넘게 재위한 데다 아예 황제 칭호를 포기하고 왕을 칭했다.[18] 따라서 시황제가 사실상 진나라의 유일한 황제라고 볼 수도 있으므로 진황(秦皇)이 딱히 틀린 표현은 아니다. 물론 진황한무(秦皇漢武) 대신 진시한무(秦始漢武)라고 쓴 예도 옛 문헌을 검색해 보면 발견되긴 하지만 진황한무(秦皇漢武)가 더 일반적으로 쓰인다.
- 이상하게도 시황제의 황후나 후궁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그렇지만 황후를 두지 않았다면 그것도 당시로서는 특이한 일이었을텐데 그런 기록도 없다. 《사기집해》에는 이사가 17형을 폐하고 호해를 세웠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유명한 부소와 호해 이외에도 아들이 많았던 것이니 당연히 황후와 상당수의 후궁을 거느렸을 것이다. 다만 《사기》 <진시황 본기>의 진시황릉에 대한 내용 중 이런 서술이 있다.이세 황제가 말하기를 "선제의 후궁들 중, 자식이 없는 자를 내쫓는 것은 옳지 않다." 명령을 내려 (그들을) 모두 죽게 하니, 죽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二世曰 "先帝後宮非有子者, 出焉不宜." 皆令從死, 死者甚眾)
여기서 선제는 당연히 시황제를 가리킨다. 그러나 진시황릉이나 그 인근에서도 황후나 후궁의 묘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가능성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아직 발굴되지 않은 부분에 후궁의 시신이 매장되었을 가능성, 또 하나는 저 기록에 신빙성이 없다는 것이다.
- 시황제는 절대권력 확립에 집착해 모든 사무를 직접 처리했는데 하루에 처리한 공문이 죽간으로 120근 가량이었다고 한다. 여불위의 섭정과 노애의 쿠데타까지 겪은 경험 탓으로 추정된다. 결국 시황제 시절에는 사실 이후 진나라를 멸망시킨 큰 반란들이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볼 때 백성들이 큰 불만은 있었을지언정 통치 시스템는 돌아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후 암군인 호해가 집권하면서 반란이 걷잡을 수 없게 확대되어 진나라는 멸망하고 만다.
- 여불위를 제외하면 공신 숙청이 없는 편인데 이는 당연한 것이 시황제는 진나라 왕실의 적통으로 처음부터 신하들과 군신관계로 맺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신숙청이 심했던 유방이나 주원장의 경우는 거병할 때, 신하들과 군신관계라기보다는 일정한 동업자 관계였고 본인의 기업에 신하들이 일정지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후대까지 이어질 왕권 확립을 위해서는 공신 숙청이 필수적이었다 이렇게 처음부터 왕이었고 전국시대를 통일했다는 업적이 있으니 반기를 들 신하들도 존재하지 않았다.
- 마오쩌둥은 진시황을 높이 평가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는 자랑스럽게 "우리는 단언컨대 진시황보다 강력하다."고 했으며, 1973년 7월 왕훙원과 장춘차오에게 "나 또한 진시황이다."라고 교시했다. 린뱌오의 몰락 이후 마오쩌둥은 린뱌오가 자신이 진시황이란 이유로 비판했다고 그를 부관참시하면서 린뱌오는 장제스처럼 공자를 존경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나는 진시황에 찬성하고, 공자에 반대한다."라고 결론을 내렸고 린뱌오 사망 이후 저우언라이의 권위가 상승한 것에 매우 불만이었던 문혁 극좌파는 신이 나서 저우언라이를 공격하기 위해 비림비공운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저우언라이에 대한 4인방의 패악질은 오히려 중국 전역에 방광암으로 투병하고 있는 저우언라이의 상황을 알리게 되었으며 4인방과 마오쩌둥에 대한 민심은 악화되고, 저우언라이의 인기가 올라가는 역효과로 이어졌다.
- 현대 한국에서는 시진핑을 비꼬는 말로도 쓰인다. 주석 집권 후 지배력을 강화하고 연임 제한을 폐지하면서 자신을 마오쩌둥과 동급 또는 그 이상으로 헌법에 명시하는 바람에 시씨 성의 황제 또는 "진짜 시진핑 황제가 되었다."는 뜻. 이 표현은 연합뉴스에서도 쓰인 바 있다.[19]
- 정약용은 재물이나 땅 문서를 믿는 게 부질없는 짓이라고 할 때 진시황 이야기를 했다.
- 유능한 정복군주이면서 말년에 암군이 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로 인해 국가와 정권이 사후 빠르게 무너지고 말았다는 점에서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와도 비슷한 측면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역시 전국시대의 혼란상을 정리하고 일본을 통일한 점은 높이 평가받지만, 이후에 무리한 대규모 전쟁을 일으켰다 패하고 결과적으로 성공적인 후계자를 육성하는데 실패함으로써, 도요토미 가문은 히데요시가 죽은 이후 멸문의 길로 접어든다.
- 중국 허베이성 친황다오 시의 유래가 되었다. 진시황이 전국을 순시하던 중 이곳을 들렸었는데 이게 진황도(秦皇島)라는 이름으로 굳어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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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력으로는 1월이다. 당시 진나라에서 썼던 《전욱력》(顓頊曆)을 기준으로 이 달은 그레고리력 1월 27일부터 2월 24일까지 총 29일간이었다. 《사기》 권6 <진시황 본기> (장양왕은) 시황을 진 소왕 48년 정월에 한단에서 낳았다. 生始皇以秦昭王四十八年正月, 生於邯鄲.[2] 《사기》의 원문은 "七月丙寅, 始皇崩於沙丘平臺."라 하여 음력 7월 병인일에 죽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 해 7월에는 병인일이 없었고 6월, 8월, 9월에 있었다. 9월 10일이라는 날짜는 병인일을 7월이 아닌 8월의 것으로 본 다음 그것을 양력으로 변환한 것이다. 중문 위키백과에서는 《홍범오행전》의 "六月乙丑"을 근거로 사망일을 7월 11일로 기록했다.[3] 음력 5월 26일 병오. 이 날에 장양왕이 죽었다.[4] 《사기》 권6 <진시황 본기> "(재위) 26년, (중략) 왕이 말하기를 "태 자는 떼고 황 자를 취하고, 상고의 제라는 이름을 가져다 '황제'라 부르고, 나머지는 논의와 같이 하라." 했다. 제를 내려 "좋다."라 명했다. 二十六年, … 王曰 "去泰, 著皇, 采上古帝位號, 號曰皇帝. 他如議." 制曰, "可."[5] 《사기》에 진나라의 선조가 영(嬴)성 조(趙)씨라고 기록되어 있다. 성씨와 이름을 합친 시황제의 본명은 '영정'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사실 전국시대에 성을 쓰는 건 여자였고, 남자는 씨를 썼다. 예를 들어 초나라 왕가는 미성 웅씨여서 초나라의 역대 국왕들은 웅려, 웅장 등 씨를 썼지만 초나라 출신인 진나라의 선태후는 후궁 시절 미팔자('팔자'는 후궁의 직위)로 불렸다. 후세로 내려가며 성과 씨의 구분이 불분명해져 전한시대 쯤엔 구분이 없어졌고, 이에 후세 사가들이 '영정'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시황제는 영성 조씨이기 때문에 원래는 '영정'이 아니라 조정이 맞는 호칭이다.[6] 《사기집해》는 서광의 주석을 인용해 시황제의 이름이 “정"(正)으로 된 판본이 있다고 하면서, 성충의 주석에 따라 정월(正月, 음력 1월)에 태어나 '정'으로 지었다고 해석했다. 고대에는 '정'(正)과 '정'(政)이 하나의 글자로 혼용되었다. 일례로 '정'(正)과 '정'(政)의 동자(同字)적, 다의어적 성격을 이용한 것으로 보이는 공자의 유명한 말이 있는데 《논어》 <안연편>에 나온다. 대부 계씨(계손씨) 집안의 제7대 영주였던 계강자가 "정치란 무엇이냐?"고 묻자 “정(政)은 곧 정(正)이다.”(政者, 正也), 즉 “정치(政)란 바르게 하는 것(正)이다.”라고 말한 것. 시황제를 연구하는 학자들 중 소수들은 원래 이름이 '정'(政)이고 '정'(政)의 앞 글자를 따서 아명을 '정'(正)이라고 이야기하는 학자들도 있다.[7] 상술했듯 진시황의 이름은 政인지 正인지 논란이 있다. 일설로만 전해지는 이름이지만, 진짜로 시황제를 '조정'(趙正)이라고 부르는 죽간 《조정서》가 발굴되면서 신빙성이 높아졌다.[8] 《태평어람》의 기록에 따르면 키가 8척 6촌(198cm)에 허리 둘레가 7위(120cm)라고 기록했다. 그러나 연나라의 특사가 시황제를 암살하려 했을 때, 시황제가 제때 칼을 뽑지 못해 매우 당황했다는 기록이 있다. 1974년에 진나라 유물 중 1m에 가까운 청동검이 발견되면서 학자들은 실험을 통해 키가 190cm 이상인 사람만이 등 뒤에서 1미터 높이의 청동검을 뽑을 수 있다고 결론을 내어 시황제의 실제 키는 190cm 미만이라고 한다.출처 물론 진시황의 키는 고대에는 말할 것도 없고 현대에 와서도 엄청난 장신이다.[9] 연, 조, 위, 제, 한, 초.[10] 그러나 진나라가 단명함에 따라 이 정책은 후대의 한나라에 의해 계승되어 완성되었다.[11] 다만 이 시대의 책들이 전해 내려오지 않는 이유는 시황제의 분서갱유보다 항우의 역할이 더 컸다는 말도 있다.[12] 진나라가 서융에서 시작된 나라인만큼, 화하족에 동화된 티베트계 견융족이라는 의견도 있다.[13] 다만 시황제를 비판하는 척 하면서 실제로는 당시 자신에게 궁형을 내린 한무제를 비판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14] 출처 : 《사기》 <진시황 본기>.[15] 그러나 진나라가 멸망한 후 전한 시대에 시호를 부활시켰다. 뿐만 아니라 상나라의 멸망 이후 쓰이지 않았던 묘호까지 부활시켰다. 황제라는 칭호는 이미 유용성이 입증됐다고 봐서 그대로 사용했다. 사실 진나라를 극단적으로 증오하고, 통일 제국에서 다시 전국시대로 회귀하려고 했던 복고주의자 항우도 초의제를 세우는 등 황제 칭호를 버리지는 않았다.[16] 중국의 전한과 후한 두 한나라를 통틀어 이르는 말.[17] 《사기》의 저자인 사마천이 당대의 황제인 한무제를 까기 위해 의도적으로 진시황에 한무제를 덧씌운 정황이 있는 것도 이러한 표현의 원인이 된다. 실제로 《사기》의 진시황의 폭정 묘사는 한무제가 일으킨 대규모 토목 공사와 비슷하다.[18] 다만 후대인들이 영자영을 3세 황제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긴 하다.[19] 하지만 시황제의 시는 비로소 시(始, 중국식 발음은 권설음이 들어간 스<shǐ>)자인 반면 시진핑의 시(Xí)는 익힐 습(번체 習/간체 习)자의 중국 발음이다.[20] 당연하지만 이런 베트남 극우들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당시 중국 남부 지역은 현대 베트남인의 선조 격인 오스트로아시아어족 계통 민족만 살았던 게 아니라, 묘족이 속한 몽몐어족 계통 민족들과 오스트로네시아어족 계통의 민족들, 그리고 태국인과 라오인, 좡족의 조상 민족인 크라다이어족 계통의 민족들이 마구 뒤섞여서 살았다. 그래서 백번 양보해서 베트남 환빠들 말대로 중국 남부 전체가 베트남계 왕조의 치하에 있었다고 쳐도, 실상은 중앙집권화가 전혀 안 되어서 수많은 민족과 부족들이 각자 다른 나라인양 따로국밥으로 노는 상황이었을 것이다.[21] 실제로 모토치카는 서장을 작성할 때 미나모토, 타이라 같이 자신의 성씨를 쓰는 곳에 하타(秦)라고 기입했다.(그러나 하타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진시황의 후손이라는건 허구일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는 헤이안 시대 하타 요시토시(秦能俊)라는 인물이 그 선대가 하사받은 시나노의 땅에서 세력을 뻗치고 있었는데 1156년 호겐의 난(保元の乱) 때 패배한 세력에 소속해있었기 때문에 토사로 도망쳐 왔다고 한다.(다른 학설로 "1221년의 죠큐의 난(承久の乱) 이후로 도망쳐왔다."는 이야기도 존재한다.) 그렇게 토사로 도망쳐온 요시토시는 토사에는 얼마 존재하지 않는 평야 지역이자 중심 지역이나 다름 없는 나가오카 군에 정착하게 되었고 자신의 성을 '소카베'(宗我部)로 바꿔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안가 옆동네 카미 군(香美郡)에도 자신들의 성을 '소카베'라고 쓰는 일족이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되었고 이들은 서로를 구분하기 위해 나가오카에 거주하는 소카베 일족을 쵸소카베(長宗我部), 카미에 거주하는 소카베 일족을 코소카베(香宗我部)라 부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