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 라틴어: Lucius Aemilius Paullus Macedonicus | |
생몰년도 | 기원전 229년 ~ 기원전 160년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조부)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아버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아이밀리아누스(형제) 아이밀리아 테르티아(누이)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매부) 파피리아(아내)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아이밀리아누스(장남)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차남)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두 아들 아이밀리아 프리마(장녀) 아이밀리아 테르티아(차녀) |
참전 |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감찰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82년 집정관 |
전임 |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퀸투스 파비우스 라베오 |
동기 | 그나이우스 바이비우스 탐필루스 |
후임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케테구스 마르쿠스 바이비우스 탐필루스 |
임기 | 기원전 168년 집정관 |
전임 | 퀸투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 |
동기 |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
후임 | 퀸투스 아일리우스 파이투스 마르쿠스 유니우스 펜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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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집정관, 감찰관.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에서 활약했다.2. 생애
고대 로마 2대 국왕 누마 폼필리우스까지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오래된 귀족 집안인 아이밀리우스 가문의 일원이다. 조부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는 기원전 255년 집정관을 역임했으며, 제1차 포에니 전쟁 때 해상에서 카르타고 해군과 맞서 싸웠다. 아버지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는 기원전 219년 집정관을 맡아 마르쿠스 리비우스 살리나토르와 함께 로마의 영토를 약탈한 파로스의 데메트리오스를 정벌하는 원정을 감행해 데메트리오스가 마케도니아 왕국의 필리포스 5세에게 도망치게 하고 일리리아 전역을 정복했다. 그러나 기원전 216년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바로와 함께 집정관을 맡아 한니발 바르카의 카르타고군과 맞붙었다가 칸나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누이로 아이밀리아 테르티아가 있었는데,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아내가 되었다. 형제로는 리비우스 드루수스 가문에 입양을 간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아이밀리아누스가 있다. 그는 마케도니쿠스보다 어렸던 소년이었기 때문에 혈연상 친척이며 전사한 아버지의 동료 집정관인 마르쿠스 리비우스 살리나토르에게 입양을 갔다. 그는 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의 조부로, 마케도니쿠스의 아들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와 기원전 147년 집정관을 함께 지낸 가이우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의 아버지이기도 하다.정확한 생년월일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에 따르면 기원전 168년 집정관을 맡았을 때의 그의 연세가 기원전 55년 말 집정관을 맡은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와 동갑이었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그는 60세였을 것이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는 그가 두번째 집정관이 된 기원전 168년에 70대였다고 기술했고, 플루타르코스는 두번째 집정관 선거에 출마했을 때 60에 가까워졌다고 한다. 학자들은 이를 토대로 그의 나이가 기원전 229년이었을 것이라 추정한다. 따라서 그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보다 약 8살 어렸고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와 동년배였다.
아버지가 칸나이 전투에서 사망했을 때 12~13세였던 그는 제2차 포에니 전쟁 때 트리부누스 밀리툼에 3번 선출되었다고 전해지나 별다른 활약상은 전해지지 않았다. 일부 학자들은 기원전 195년에 재무관에 선출되었을 것이라 추정하나 이 역시 분명하지 않다. 플루타르코스는 그가 법정에서 연설하지 않았으며 평민들의 호감을 얻고자 노력하지 않았다고 밝히면서, 로마 귀족으로서 일반적인 행보를 취하려 하지 않았다고 평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기원전 194년 남부 이탈리아에 있는 크로토네로 가서 로마 식민도시를 건설하는 사업을 진두지휘했다. 기원전 193년 또는 192년에 친척인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와 함께 조영관을 맡았는데, 많은 가축 상인이 공공 토지 임대를 남용한다며 비난하고 그들에게서 회수한 자금을 토대로 금박을 입힌 방패를 구입해 유피테르 신전을 장식했다. 가축 상인들에 대한 강경책은 많은 귀족들이 손해를 보게 만들었고, 이로 인해 그의 정치 경력은 그다지 순탄하지 않았다.
기원전 191년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와 함께 법무관에 선출되어 히스파니아 속주에 파견되어 루시타니아 전쟁에 투입되었다. 그러나 리우콘 전투에서 루시타니아인에게 패배해 6천 명을 잃었다. 이 소식이 로마에 전해졌을 당시,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글라블리오가 안티오코스 3세를 물리치고 아이톨리아 동맹이 로마에 복종하게 만든 것에 기뻐한 로마 시민들이 축제를 벌이고 있었다. 그들은 별 것 아니라고 여긴 루시타니아인들이 아군을 격파했다는 것에 몹시 불쾌해했고, 아이밀리우스는 무능한 장군으로 낙인찍혔다. 하지만 그는 기원전 190년 병력을 재정비하고 반격을 개시해 루시타니아인들을 물리쳤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250개 촌락 및 도시가 그에게 복종했다고 한다. 그러나 루시타니아인들은 이후에도 오랫동안 로마에 대적했다.
기원전 189년 로마로 귀환한 그는 집정관 퀸투스 미누키우스 루푸스, 루키우스 푸리우스 펄푸레우스, 전직 집정관 퀸투스 미누키우스 테르무스 등 10명의 사절단에 포함되어 소아시아로 파견되었다. 이들은 갈라티아인들과 평화 협약을 맺은 뒤 셀레우코스 제국의 국왕 안티오코스 3세와 아파메아에서 접견했다. 기원전 188년 여름, 안티오코스 3세는 소아시아에서 군대를 철수하고 대다수 함대를 파괴하고 모든 전쟁 코끼리를 로마에 넘기고 12년 동안 12,000달란트의 배상금을 지불하겠다는 내용의 협약에 서명했다. 그 후 사절단은 총독 그나이우스 만리우스 불소와 함께 소아시아 일대의 새로운 경계를 설정했다. 지난날 로마가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는 데 일조했던 페르가몬 왕국은 리카오니아 전체, 프리기아, 무시아, 리디아, 이오니아, 시필루스, 카리아 지방, 마이안드로스 강 유역을 받았고, 해상에서 셀레우코스 해군을 효과적으로 견제했던 로도스는 카리아와 리키아 일대를 수여받았다.
기원전 188년 가을 다른 사절 및 불소의 군대와 함께 귀국길에 오른 그는 헬레스폰트를 건너 트라키아를 통과하던 중 불소가 갈라티아와의 전쟁에서 막대한 전리품을 챙겼다는 소문에 혹한 트라키아 부족들의 습격을 받았다. 그 과정에서 퀸투스 미누키우스 테르무스가 전사하는 등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기원전 187년 로마에 도착한 불소가 개선식을 거행하는 것을 허락해달라고 요청하자, 아이밀리우스를 포함한 사절단은 그가 원로원의 허락 없이 갈라티아와 전쟁을 벌였다며 오히려 처벌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원로원은 개선식을 허락했고, 뒤이어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가 안티오코스 3세에게 뇌물을 받아먹은 혐의로 고발당하면서 세간의 관심이 그쪽으로 쏠렸기 때문에 불소에 대한 그의 고발은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한 채 묻혀버렸다.
이후 알려지지 않은 시기에 집정관 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그는 기원전 185년에 두번째로 집정관 선거에 출마했다. 당시 선거에는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퀸투스 파비우스 라베오,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등 3명의 귀족이 출마했고, 3명의 평민 후보도 출마했다. 이 7명의 지원자 중 오직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만이 처음으로 집정관 선거에 출마했다. 하나같이 쟁쟁한 후보인데다 아이밀리우스 본인이 대중의 인기를 별로 얻지 못했기에 당선 가능성은 지극히 희박했다. 하지만 스키피오 가문과 아이밀리우스 가문의 맹렬한 지원과 다른 후보들끼리 표를 나눠먹는 상황 덕분에, 그는 기원전 182년 집정관에 당선되었다. 동료 집정관은 평민 출신의 그나이우스 바이비우스 탐필루스였다.
아이밀리우스는 바이비우스와 함께 리구리아로 파견되어 성공적인 군사 원정을 펼쳤고, 원로원은 승리 소식을 접하고 하룻 동안 감사제를 드리기로 했다. 2,000명의 리구리아인들이 그들을 피해 갈리아 키살피나 총독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에게 귀순하려 했지만, 원로원은 이들을 집정관에게 넘기도록 명령했다. 아이밀리우스와 바이비우스는 이듬해에도 전직 집정관 자격으로 작전을 이어가 리구리아 부족 전체를 복종시키는 데 성공하고, 기원전 181년 말 로마로 귀환한 뒤 개선식을 거행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는 이후에 집정관에 재출마했지만 낙선한 뒤 정계에서 물러나 아들 교육에 전념했다고 한다. 기원전 171년 대 카토,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가이우스 술피키우스 갈루스와 함께 히스파니아 속주에서 로마 총독들이 속주민들을 가혹하게 수탈한다는 소문의 진위를 조사했다. 이들은 소문이 진실임을 확인하고 먼 히스파니아 총독 마르쿠스 마티에누스를 고발했지만, 마르쿠스는 재판에 회부되는 대신 망명을 택했다.
한편, 로마 공화국은 기원전 172년에 마케도니아 국왕 페르세우스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했지만 수년간 연전연패했고, 에페이로스 연맹과 아카이아 동맹, 그리고 일리리아 국왕 겐티오스는 이에 고무되어 페르세우스와 연합해 로마에 대항했다. 이렇듯 전쟁이 지지부진하자, 로마인들은 군사적 역량이 뛰어나고 매사에 신중한 인물을 집정관으로 세우기로 했다. 그는 기원전 168년 집정관에 당선된 뒤 마케도니아를 임무 수행지로 배정받았다. 이후 델포이에 상륙한 뒤 남부 마케도니아로 진격하여 피에리아의 디온 근처에 진지를 세우고 주변의 로마군을 모조리 끌어들여 보병 24,500명과 기병 4,500명 가량을 확보했다.
페르세우스는 이에 맞서 올림푸스 산 인근의 접근이 거의 불가능한 고지에 틀어박혀 로마군의 진로를 막았다. 이후 로마의 정찰병들이 페레비아를 통과하는 우회로가 하나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하지만 그곳은 매우 좁고 험난해서 자칫 적의 급습을 받는다면 전멸을 면치 못할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다들 그 길로 가기를 꺼렸는데, 트리부누스 밀리툼 직책을 맡고 있던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코르쿨룸이 처음으로 분견대를 이끌고 그 길로 가겠다고 자원했다. 파울루스의 허가를 받은 그는 파울루스의 아들인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아이밀리아누스와 함께 5천 또는 8천 명의 군대를 이끌고 그 길로 향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페르세우스는 밀로에게 12,000명의 병력을 보내 로마군보다 먼저 길목을 장악하게 했다. 이에 스키피오는 강행 돌파하기로 작정했고, 양군은 산봉우리에서 격전을 치렀다. 그러던 중 로마군에 고용된 트라키아 용병대가 적의 대열을 돌파하는 데 성공하자, 밀로의 군대는 전의를 상실하고 패퇴했다. 이후 그의 분견대가 평야로 내려오자, 페르세우스는 마케도니아 평원으로 후퇴했다. 이에 파울루스는 페르세우스를 추격했고, 양군은 기원전 168년 6월 2일 피드나 전투에서 격돌했다.[1]
피드나 전투 당시 마케도니아군은 보병 40,000명과 기병 4,000명으로 로마군에 비해 수적으로 우세했다. 하지만 페르세우스는 로마군이 자신들을 먼저 공격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고, 아이밀리우스 역시 기다리는 편을 택했다. 그렇게 한동안 대치하고 있을 때, 탈주한 로마 병사 한 명이 노새에게 물을 먹이러 강가로 갔다가 노새가 도망쳤다. 이에 그 병사와 동료들이 노새를 도로 데려가려 했는데, 마케도니아인들이 이 노새를 빼앗으려 달려들었다. 양측 병사들은 노새를 놓고 격돌하면서 동료들에게 원군을 요청했고, 점점 더 많은 병사가 강가로 달려들었다.
그 광경을 지켜본 마케도니아 중보병들이 팔랑크스 대형을 형성한 뒤 강가로 진군하자, 병사들은 아이밀리우스에게 당장 동료들을 구하러 가자고 강력하게 요청했다. 아이밀리우스는 평지에서 팔랑크스와 정면 대결하면 승산이 부족하다고 여겼기에 섣불리 움직이려 하지 않았지만, 병사들의 요구가 갈수록 극렬해져 반란이 일어날 조짐이 감돌자 어쩔 수 없이 전군에 전투 대열을 갖추고 적을 향해 진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리하여 양군은 강변의 평원에서 격돌했다. 로마군은 마케도니아 장병들이 내지른 사리사를 손으로 낚아채려 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에 로마군 장병들이 감히 돌진하려 하지 않자, 기수 한 명이 군기를 적진에 던졌다. 이에 눈이 뒤집힌 로마군 병사들은 앞다퉈 군기를 회수하러 달려들었다. 그러나 전열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채 돌격했기 때문에 얼마 안가 강력한 전투력을 발휘하는 마케도니아 팔랑크스에 밀렸고, 결국 언덕 위를 향해 후퇴했다. 적군이 후퇴하자 기세가 오른 마케도니아군 병사들은 언덕을 향해 진격했다. 그 과정에서 팔랑크스 대형이 흐트러졌고,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는 이때를 틈타 군단병에게 그 틈을 파고들라고 명령했다.
로마군이 틈새를 파고들자 마케도니아 보병 대열이 허물어졌고, 마케도니아 병사들은 곧 패주했다. 여기에 상대적으로 우수한 마케도니아 기병들은 전투 내내 별다른 지시를 받지 않아서 먼 후방에 멀뚱히 서 있다가 아군이 패주하는 모습을 보고 달아났다. 이 전투에서 마케도니아인 20,000명이 전사하고 11,000명이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 반면 로마군의 피해는 수백 명에 불과했다.
페르세우스는 기병대를 가까스로 수습한 뒤 펠라에 도착하여 병사를 모으려 했지만, 마케도니아 도시들이 하나둘씩 로마군에 투항하는 바람에 실패했다. 그는 다시 암피폴리스에 가서 파울루스에게 사절을 보내 평화 협정을 맺자고 제의했으나 실패했다. 설상가상으로, 암피폴리스 주민들은 그를 위해 싸우고 싶지 않으니 당장 떠나라고 요구했다. 그는 몇몇 추종자들과 500명의 크레타 용병대와 함께 사모트라케 섬으로 피신했다. 로마 함대가 곧 이 섬을 봉쇄하자, 그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기원전 168년 7월 아들 알렉산드로스와 함께 항복했다.
페르세우스는 아이밀리우스에게 개선식에 자신을 동행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했지만, "그렇다면 자결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라는 답변만 받았다. 그는 차마 목숨을 끊지 못하고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 후 아이밀리우스는 그리스를 돌며 에우보이아, 아테네, 코린토스, 아르고스, 스파르타 등 여러 폴리스의 권력을 친 로마 인사들이 장악하게 했다. 이때 그는 올림피아 신전을 방문해 피디아스가 세운 제우스 동상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기원전 167년 10명의 사절들을 맞이한 그는 그들과 함께 전후 마케도니아 관리 계획을 수립한 뒤 암피폴리스에서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마케도니아는 4개의 귀족 공화국(메리다)으로 분할되며, 자체 군대를 보유할 수 없고, 세금의 절반을 로마에 내놓아야 하며, 각 국가의 주민들은 다른 국가에 재산을 소유할 수 없었다.
그 후 아이밀리우스는 마케도니아와 가담해 로마에 저항한 에페이로스로 쳐들어가 약탈을 자행해 70개의 정착지를 파괴하고 15만 명에 달하는 에페이로스인을 노예로 삼았다. 기원전 167년 이탈리아에 돌아온 그는 로마에 귀환한 뒤 개선식을 신청했다. 그러나 마케도니아와 에페이로스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얻은 막대한 전리품 상당수를 재무부에 넘기고 병사들에겐 얼마 안 되는 몫만 나눠줬기에, 병사들은 그에게 악감정을 품고 그가 개선식을 거행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아이밀리우스 이전에 페르세우스를 상대했고 이후 원정군의 부관을 맡았던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는 이런 병사들을 회유해 그야말로 개선식을 거행할 자격이 있다고 주장하게 했다. 그러나 마르쿠스 세르빌리우스 풀렉스 게미누스 등 상당한 영향력을 갖춘 원로원 의원들이 아이밀리우스를 지지한 덕분에, 아이밀리우스는 개선식을 거행할 자격을 인정받고 사흘간 개선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167년 9월에 거행된 개선식은 로마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규모가 크고 화려했다고 전해진다. 그가 가져온 전리품은 실로 막대해, 일반 병사에게 100 데나리온, 백부장에게 200 데나리온, 기병에게 300데나리온씩 분배하고도 3,000만 데나리온이 남았다고 한다. 여기에 로마 정부는 매년 60만 데나리온을 마케도니아의 4개 공화국으로부터 제공받았다. 원로원은 국고가 무척 풍요로워져서 로마인들에게 직접세를 걷지 않아도 된다고 판단하고 직접세 폐지를 공표했다. 그 후 로마는 120년간 직접세를 걷지 않았다. 한편 페르세우스 왕과 그의 가족들은 전리품 취급받으며 군중의 눈요기거리가 되었다. 페르세우스는 이후 알바 푸젠스의 감옥에 갇혀 지내다가 2년 후인 기원전 166년 사망했다. 그렇지만 아들 알렉산드로스는 로마에 적응하여 도자기를 구워 팔다가 라틴어를 배운 뒤 공증인이 되어 잘 살았다고 한다.
기원전 164년, 아이밀리우스는 감찰관에 당선되어 인구조사를 벌였다. 이때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당시 로마 시엔 33만 7452명의 시민이 거주했다고 한다. 이후 프린켑스 칭호를 수여받고 평온한 말년을 보내던 그는 기원전 160년에 사망했다. 그의 아들들이 조직한 장례식에서 로마의 희극 작가 푸블리우스 테렌티우스 아페르의 <안드리아>와 <헤키라>가 공연되었다고 전해진다.
3. 가족
마케도니쿠스는 기원전 231년 집정관을 역임한 가이우스 파피리우스 마소의 딸 파피리아와 결혼해 두 아들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아이밀리아누스,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 장녀 아이밀리아 프리마를 낳았다. 첫번째로 집정관에 선출된 기원전 182년에 모종의 이유로 파피리아와 이혼하고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여인과 결혼하여 성명이 알려지지 않은 두 아들과 딸 아이밀리아 테르티아를 얻었다.그는 자신의 재산이 많지 않고, 네 아들 모두를 명예로운 경력 아래에서, 제대로 꿈을 펼칠 수 없다는 판단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첫째아들과 둘째아들을 다른 귀족 가문에 입양시키기로 했다. 따라서 첫번째 결혼에서 얻은 두 아들은 오래된 파트리키 계급의 대표격인 파비우스 가문과 코르넬리우스 가문에 각각 입양됐다. 이에 따라 장남 퀸투스는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의 손자인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에게 입양되어,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아이밀리아누스가 됐다. 그는 아버지의 꿈과 입양 전 파비우스 가문에서의 약속 그대로 기원전 145년 집정관에 올랐다. 퀸투스의 동생인 둘째 푸블리우스는 고모가 시집을 가면서 인연을 맺은 그 유명한 코르넬리우스 씨족 가문 중 최고 명문인 스키피오 가문에 입양됐다. 그는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아프리카누스의 장남)에게 입양됐고, 이름을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로 바꿨다.
이렇게 두 아들을 로마의 최고 귀족 가문으로 손꼽히는 파비우스 가문, 스키피오 가문으로 입양보낸 뒤, 마케도니쿠스는 남은 두 아들에게 자신의 가문을 잇게 했다. 하지만 그의 계산과 달리, 후처와의 사이에서 얻은 두 아들은 기원전 167년경 10대의 나이에 요절했다. 이후 그는 입양을 하지 않고, 그의 가문인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가문은 공식적으로 단절됐다. 이는 다른 귀족 가문에게서 아이를 입양하는 것은 천문학적인 지참금이 필요했고, 그가 입양으로 떠난 두 아들과 사이가 돈독하면서도 이들과의 신의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다만, 마케도니쿠스의 친동생으로 일찍이 외가 친척 마르쿠스 리비우스 살리나토르의 양자로 입양간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아이밀리아누스의 손자 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가 본인의 장남을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가문에 입양보내면서, 마메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리비아누스 이래 가문의 코그노멘인 파울루스는 레피두스 가문 남성들에게 그 이름이 계속 전해졌다.
다만, 그는 유언장에서 자신의 많지 않은 재산은 남은 두 아들에게 균등하게 나누도록 했다. 이때 그의 두 아들은 우애가 돈독한 만큼, 재산을 물려받음에도 서로에게 양보했고, 형보다 부유했던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형 파비우스 막시무스 아이밀리아누스에게 아버지 재산이 훨씬 많이 가도록 했다.
한편 장녀 아이밀리아 프리마는 대 카토의 장남인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 리키니아누스와 결혼했고, 차녀 아이밀리아 테르티아는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 때 아이밀리우스의 부관으로서 활약한 퀸투스 아일리우스 투베로와 결혼했다.
[1]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에 따르면, 전투 직전에 월식이 발생해 양측 병사들을 놀라게 했지만, 아이밀리우스의 지시를 받은 트리부누스 밀리툼 가이우스 술피키우스 갈루스가 병사들에게 월식이 자연 현상일 뿐 불길한 징조가 절대로 아니라고 설명해 안심시켰다고 한다. 리비우스 등 다른 기록에 따르면, 갈루스는 월식을 예측하고 군대에 미리 알려줬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