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마 겐지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 역대 등번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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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PB 일본 시리즈 우승반지 | |||||||||||||||||||||||||||||||||||||||||||||||||||||||||||||||||||||||||||||||||||||||||||||||||||||||||||||||||||||||||||||||||||||||||||||||||||||||||||
1999 | 2003 |
2004 아테네 올림픽 {{{#bd5c24 동메달}}} |
2004 |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c7bc69 우승반지}}} |
2009 |
{{{#!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bordercolor=#3fb1e5> | 퍼시픽 리그 역대 MVP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rowcolor=#fff> 1950 | 1951 | 1952 | 1953 | 1954 |
벳토 카오루 마이니치 / 외야수 | 야마모토 카즈토 난카이 / 내야수 | 유키 스스무 난카이 / 투수 | 오카모토 이사미 난카이 / 내야수 | 오오시타 히로시 니시테츠 / 외야수 | |
<rowcolor=#fff> 1955 | 1956 | 1957 | 1958 | 1959 | |
이이다 토쿠지 난카이 / 외야수 | 나카니시 후토시 니시테츠 / 내야수 | 이나오 카즈히사 니시테츠 / 투수 | 스기우라 타다시 난카이 / 외야수 | ||
<rowcolor=#fff> 1960 | 1961 | 1962 | 1963 | 1964 | |
야마우치 카즈히로 마이니치 / 투수 | 노무라 카츠야 난카이 / 포수 | 장훈 토에이 / 외야수 | 노무라 카츠야 난카이 / 포수 | 조 스탠카 난카이 / 투수 | |
<rowcolor=#fff> 1965 | 1966 | 1967 | 1968 | 1969 | |
노무라 카츠야 난카이 / 포수 | 아다치 미츠히로 한큐 / 투수 | 요네다 테츠야 한큐 / 투수 | 나가이케 아츠시 한큐 / 외야수 | ||
<rowcolor=#fff> 1970 | 1971 | 1972 | 1973 | 1974 | |
키타루 마사아키 롯데 / 투수 | 나가이케 아츠시 한큐 / 외야수 | 후쿠모토 유타카 한큐 / 외야수 | 노무라 카츠야 난카이 / 포수 | 카네다 토메히로 롯데 / 외야수 | |
<rowcolor=#fff> 1975 | 1976 | 1977 | 1978 | 1979 | |
카토 히데지 한큐 / 내야수 | 야마다 히사시 한큐 / 투수 | 찰리 매뉴얼 킨테츠 / 외야수 | |||
<rowcolor=#fff> 1980 | 1981 | 1982 | 1983 | 1984 | |
키다 이사무 닛폰햄 / 투수 | 에나츠 유타카 닛폰햄 / 투수 | 오치아이 히로미츠 롯데 / 내야수 | 히가시오 오사무 세이부 / 투수 | 부머 웰즈 한큐 / 내야수 | |
<rowcolor=#fff> 1985 | 1986 | 1987 | 1988 | 1989 | |
오치아이 히로미츠 롯데 / 내야수 | 이시게 히로미치 세이부 / 내야수 | 히가시오 오사무 세이부 / 투수 | 카도타 히로미츠 난카이 / 외야수 | 랄프 브라이언트 킨테츠 / 외야수 | |
<rowcolor=#fff> 1990 | 1991 | 1992 | 1993 | 1994 | |
노모 히데오 킨테츠 / 투수 | 궈타이위안 세이부 / 투수 | 이시이 타케히로 세이부 / 투수 | 쿠도 키미야스 세이부 / 투수 | 이치로 오릭스 / 외야수 | |
<rowcolor=#fff> 1995 | 1996 | 1997 | 1998 | 1999 | |
이치로 오릭스 / 외야수 | 니시구치 후미야 세이부 / 투수 | 마츠이 카즈오 세이부 / 내야수 | 쿠도 키미야스 다이에 / 투수 | ||
<rowcolor=#fff> 2000 | 2001 | 2002 | 2003 | 2004 | |
마츠나카 노부히코 다이에 / 외야수 | 터피 로즈 킨테츠 / 외야수 | 알렉스 카브레라 세이부 / 내야수 | 조지마 켄지 다이에 / 포수 | 마츠나카 노부히코 다이에 / 외야수 | |
<rowcolor=#fff> 2005 | 2006 | 2007 | 2008 | 2009 | |
스기우치 토시야 소프트뱅크 / 투수 |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닛폰햄 / 내야수 | 다르빗슈 유 닛폰햄 / 투수 | 이와쿠마 히사시 라쿠텐 / 투수 | 다르빗슈 유 소프닛폰햄 / 투수 | |
<rowcolor=#fff> 2010 | 2011 | 2012 | 2013 | 2014 | |
와다 츠요시 소프트뱅크 / 투수 | 우치카와 세이이치 소프트뱅크 / 외야수 | 요시카와 미츠오 닛폰햄 / 투수 | 다나카 마사히로 라쿠텐 / 투수 | 카네코 치히로 오릭스 / 투수 | |
<rowcolor=#fff> 2015 | 2016 | 2017 | 2018 | 2019 | |
야나기타 유키 소프트뱅크 / 외야수 | 오타니 쇼헤이 닛폰햄 / 투수, 외야수 | 데니스 사파테 소프트뱅크 / 투수 | 야마카와 호타카 세이부 / 내야수 | 모리 토모야 세이부 / 포수 | |
<rowcolor=#fff> 2020 | 2021 | 2022 | 2023 | 2024 | |
야나기타 유키 소프트뱅크 / 외야수 | 야마모토 요시노부 오릭스 / 투수 | 콘도 켄스케 소프트뱅크 / 외야수 | }}}}}}}}} |
1999~2001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포수 부문 베스트 나인 | ||||
이토 쓰토무 (세이부 라이온즈) | → | 조지마 겐지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 → | 이토 쓰토무 (세이부 라이온즈) |
2003~2005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포수 부문 베스트 나인 | ||||
이토 쓰토무 (세이부 라이온즈) | → | 조지마 겐지 (후쿠오카 다이에-소프트뱅크 호크스) | → | 사토자키 토모야 (치바 롯데 마린즈) |
1999~2005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포수 부문 골든글러브 | ||||
이토 쓰토무 (세이부 라이온즈) | → | 조지마 겐지 (후쿠오카 다이에-소프트뱅크 호크스) | → | 사토자키 토모야 (치바 롯데 마린즈) |
보유 기록(NPB) | |
1이닝 최다 홈런 | 2홈런[1] |
한시즌 최다 안타(포수) | 182안타 |
단일 일본시리즈 최다 홈런 | 4홈런 |
후쿠오카 다이에-소프트뱅크 호크스 등번호 2번 | ||||
오노 히로시 (1991~1994) | → | 조지마 겐지 (1995~2005) | → | 이마미야 겐타 (2010~2018) |
시애틀 매리너스 등번호 2번 | ||||
미구엘 오헤다 (2005) | → | 조지마 겐지 (2006~2009) | → | 잭 윌슨 (2010~2011) |
한신 타이거스 등번호 2번 | ||||
시바타 코헤이 (2008) | → | 조지마 겐지 (2010~2012) | → | 호조 후미야 (2013~2020) |
조지마 겐지 城島健司 | Kenji Johjima | |
출생 | 1976년 6월 8일 ([age(1976-06-08)]세) |
나가사키현 사세보시 |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벳푸대학 부속 고교 (오이타)[2] |
신체 | 182cm, 89kg, A형 |
투타 | 우투우타 |
포지션 | 포수, 1루수 |
프로입단 | 1994년 드래프트 1라운드 (다이에) |
소속팀 | 후쿠오카 다이에-소프트뱅크 호크스 (1995~2005) 시애틀 매리너스 (2006~2009) 한신 타이거스 (2010~2012) |
국가대표 |
|
응원가 | [호크스시절][한신시절] |
[clearfix]
1. 개요
일본프로야구의 포수. 아시아 출신 포수 최초로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 진출하여 활동하기도 했다.2. 데뷔하기까지
벳푸대학 부속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이미 초대형 타자로 이름을 날리며 프로 구단들의 주목을 받았다.고등학교를 졸업할 시기가 다가오자 고향과 가까운 센트럴리그 구단인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러브콜을 받았지만, 이전부터 동경해온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나중에 입단하기 위해 드래프트 전면 거부를 선언하고 추천으로 코마자와대학에 입학할 예정이었으나 갑자기 마음을 바꿔 네모토 리쿠오 GM과 차기 감독으로 내정된 오 사다하루가 있는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에 드래프트 1순위로 지명받아 입단한다.
이에 거물 신입생을 놓쳐버린 코마자와대학이 격노하여 앞으로 절대 호크스로는 선수를 보내지 않겠다는 절교 선언까지 하자, 호크스 구단 측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조지마의 입단 취소까지 고려했지만 당시 호크스의 감독이었던 오 사다하루가 직접 중재에 나서면서 이 사건은 극적인 화해로 마무리되었고 조지마도 무사히 입단식을 치를 수 있었다.[5]
워낙 사태의 파장이 컸던 탓에 이후 프로야구 진출 거부 의사를 표명한 선수는 드래프트에서 지명할 수 없다는 규정이 만들어졌다.
3. 선수 경력
3.1.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시절
우여곡절 끝에 호크스에 입단하게 되었지만, 데뷔 당시엔 코치들이나 포수 출신 OB들에게 "태어나서 이렇게까지 엉망인 놈은 처음 본다.", "이 녀석을 포수 자리에 앉혔다간 큰일난다." 같은 엄청난 혹평을 들었다.
그나마 어깨가 강해서 도루저지율이 괜찮았지만, 투수 리드는 말할 것도 없고 폭투가 나오면 블로킹은 커녕 공을 피하기 바빠서 걸핏하면 공을 뒤로 빠트린 데다 간단한 뜬공조차 깔끔하게 처리하지 못하는 등 포수로서의 장점을 정말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었다. 반대로 타격 실력은 이미 프로에서 충분히 통할 수준이었기 때문에 구단 측에서는 장점을 최대한 살릴 만한 외야수나 1루수로 전향할 것을 권유했으나, 조지마 본인이 포수에 대한 집착이 워낙 컸던 탓에 이 제안을 거절한다.
데뷔 첫 해인 1995년엔 본연의 타격 실력을 살린 대타 요원으로 그럭저럭 활약했지만 포수로서의 기록은 형편없는 수준이었으며, 이듬해인 1996년엔 아예 개막 초부터 2군으로 강등당하는 굴욕까지 겪는다. 그러나 선배들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가르침을 구하면서 스스로도 계속 연구하고 노력한 덕분에 점차 포수로서의 기량이 향상되었으며, 마침내 프로 3년차인 1997년에 주전 포수 자리를 차지함과 동시에 사상 최연소 올스타 투표 1위와 포수 최연소 3할을 기록하는 성과를 거뒀고, 1999년엔 호크스의 공수의 핵심으로써 팀의 후쿠오카 연고이전 이래 첫 퍼시픽리그-일본시리즈 제패의 주축으로 활약했다.[6][7]
조지마의 성장엔 본인의 노력뿐만이 아니라 그를 아낀 주변 인물들의 도움이 컸는데, 특히 베테랑 투수였던 쿠도 키미야스는 자신의 승리를 포기하는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그를 조련했으며[8] 오 사다하루 감독도 매 이닝마다 조지마를 부동자세로 옆에 세워 놓고는 잘못을 지적하고 설교를 했다고 한다.[9] 또한 와카나 요시카즈나 타무라 후지오, 요시나가 코이치로 등의 선배 포수들 역시 조지마를 붙들고 조련했는데, 젊은 시절부터 불같은 성질로 유명했던 조지마는 그런 선배들의 애정어린 갈굼 속에서도 그게 전부 다 맞는 소리였기에 단 한 번의 항명조차 하지 않고 그들의 가르침을 묵묵히 따랐고 그 결과 실전에서도 좋은 결과를 거둘 수 있었다.
조지마가 내는 사인을 거부하는 쿠도[10]와 덕아웃에서 갈굼받는 조지마[11]
이후 본격적인 전성기가 시작된 2000년엔 일본시리즈에서 4개의 홈런을 쏘아올려 활약했지만 감투상을 수상했고, 2003년엔 무려 전이닝 출장 기록과 함께 .330/.399/.593 34홈런 119타점[12]의 활약으로 팀을 일본시리즈 우승에 올려놓고 시픽리그 MVP를 수상했다.
2004년에는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어 2004 아테네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따낸다. 또한 올림픽 차출 때문에 누적 기록에서 손해를 봤음에도 타율 .338 36홈런 91타점 OPS 1.087의 뛰어난 성적으로 여전히 정상급 포수의 자리를 지켰다. 다만 팀은 정규시즌 1위를 했음에도 플레이오프에서 2위 세이부 라이온즈에게 패퇴하며 홈에서 리그 우승을 내주는 굴욕을 당하고 말았다.
2005년, 부상으로 정규시즌 폐막 약 한달 정도를 남겨두고 시즌아웃을 당하며[13] 이탈하기도 했으나 타율 .309 24홈런으로 여전히 준수한 성적을 찍으며 팀의 3년 연속 정규시즌 1위에 기여했다. 다만 조지마의 이탈로 공수의 주축을 잃은 호크스가 플레이오프에서 치바 롯데 마린즈에게 2년 연속으로 하극상을 당하며 그 해 일본시리즈에 진출조차 못하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호크스에서의 11년 간 조지마는 MVP 1회, 베스트나인 6회, 골든글러브 7회를 수상하면서 퍼시픽 리그를 대표하는 포수이자 호크스의 중추로 활약했다.
3.2. 시애틀 매리너스 시절
2005년 시즌을 마치며 FA 권한을 획득한 조지마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의 시애틀 매리너스와 3년 계약을 맺으며 이적에 합의한다.
2006년, 데뷔 첫해 성적은 0.291, 18홈런, 76타점으로 포수로서 뛰어난 타격 성적을 거두었고[14] 수비쪽에서도 수비율과 도루 저지율 리그 1위를 기록하며 신인왕 투표에서도 4위에 올랐다.
2007년에는 이보다는 성적이 약간 떨어지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봤을 때는 그리 나쁘지 않은 기록을 남긴다. 특히 수비쪽에서도 활약하여 전포지션을 대상으로하는 올해의 수비수상 투표에서 표를 받기도 하였다.#
조지마의 홈 수비 장면[15]
이에 크게 고무된 시애틀 매너리스 구단 측은 2008년 조지마와 3년 추가 계약을 하지만, 이후 갑작스런 부상으로 인해 0.227, 7홈런이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받게 된다. 또한, 성적이 떨어지면서 구단 안팎으로 투수진과의 불화설이 차츰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분분하지만, 보통 리드 성향의 차이와 언어 소통 문제가 가장 큰 원인으로 지적되곤 한다. 즉, 리그에 따른 포수 리드에 대한 관점의 차이가 있는 데다[16] 언어 소통에 어려움이 따르는 만큼 이를 조율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란 이야기.[17] 타격이라도 괜찮았다면 그나마 비난이 덜했겠지만, 타격 성적까지 저랬으니 실상 답이 없었다. 무엇보다 당시 극투수구장인 세이프코 필드를 썼다는 점도 컸다.[18]
2009년 3월에는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 일본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서 참가했다. 그는 대회 내내 일본팀의 4번타자와 주전 포수라는 가장 중요한 두 역할을 병행하며 조국의 대회 2연패를 이끌었다.
2009시즌이 시작될 당시 조지마는 절치부심하며 부활을 다짐하지만, 시즌 초기부터 또 부상을 입으며 메이저와 마이너를 계속 오르내렸고, 심지어 펠릭스 에르난데스, 제로드 워시번, 에릭 베다르 같은 투수들이 의사소통 문제로 조지마와의 배터리 짜기를 힘들어하자 출장 기회 자체가 크게 줄어들었다.[19] 타격은 지난해보다 조금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0.247, 9홈런으로 어디에 내세울 만한 성적은 아니었다. 이를 두고 언론에서는 조지마를 두고 "출루율은 낮고, 장타력조차 찾아볼 수 없는 늙다리 포수"라며 비꼬기도 했다. 이에따라 조지마 켄지는 다시 일본으로 복귀하게 되었다.
하지만 팀 서포터들에게는 상당히 좋은 인상으로 남아서 2020년 시애틀 매리너스 역대 최고의 포수를 뽑는 투표에서 2위를 하였다.
또한 MLB 기자가 뽑은 역대 시애틀 매리너스 포수 순위 중에서도 4위를 차지하였다.#
하긴 포지션상 타격이 제일 약할 수 밖에 없는 포수가 그것도 신인이 리그에서 손에 꼽히는 투수 친화구장에서 홈런을 20개 가까이 쳐댔으니 말이다.[20] 데뷔 당시 임팩트는 상당히 컸다고 할 수 있다.
3.3. 한신 타이거스 시절, 그리고 은퇴
많은 이들은 친정팀인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로의 복귀를 예상했고 실제로 교섭을 진행하기도 했으나, 끝내 호크스가 아닌 지마 영입에 가장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 한신 타이거스와 4년 총액 20억엔[22] 계약을 맺으며 일본프로야구에 복귀했다.
참고로 이런 조지마의 일본 복귀로 인해 희비가 갈린 두 사람이 있는데, 바로 소프트뱅크의 주전포수인 타노우에 히데노리와 한신의 주전포수인 카노 케이스케였다. 둘 다 이제 막 주전포수로 발돋음 상태였던 터라 조지마의 복귀 소식에 크게 긴장했다고 하며 결과적으로 한신을 선택한 조지마 덕분에 타노우에는 죽다 살아난 셈이 됐지만, 카노는 힘들게 얻은 주전 자리를 다시 내주게 되고 말았다(...)
사실 호크스의 경우 타노우에가 주전자리를 거의 굳힌 상황이었던 탓에 조지마의 영입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당시 호크스 측은 "몇 년을 고생해서 겨우 타노우에를 키워 놨는데, 이제 와서 복귀하면 우리 보고 뭘 어쩌라고?"라는 식의 분위기였다고 한다.[23] 그에 비해 실질적으로 2009년부터 주전 자리를 물려받은 카노는 기대에 크게 못 미치는 더딘 성장세를 보였던 터라 한신이 영입 경쟁에서 보다 적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카노는 2009년에 처음 주전자리를 꿰찼는데, 2009년 딱 한 시즌을 제외하면 100경기 이상 나온 시즌도, 100안타 이상 친 시즌도, 심지아 100타석 이상 타석에 오른 시즌도 없다.(...) 프로 통산 17시즌 402경기를 치렀는데, 그중 127경기를 2009년에 치렀고, 나머지 16년간 275경기를 치렀다. 2009년을 빼면 1년 평균 20경기도 못 나온 셈.
일본으로 복귀한 첫 해인 2010년 타율 .303 28홈런 91타점 OPS .859의 준수한 성적을 거두면서 한신 타이거즈의 선전에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2010 시즌 종료 후 왼쪽 무릎 반월판이 손상되는 부상을 입으면서 2011 시즌의 정상 참가가 어려워졌다. 이에 한신은 그 대안으로 FA 선언을 한 후지이 아키히토와의 협상에 들어갔고, 결국 후지이와 2010년 11월 22일, 2년 계약에 합의했다.[24]
스토브리그 중에는 2011년 시즌 출장이 비관적일 거란 이야기가 돌았지만, 예상보다 빠르게 부상이 호전되면서 2011년 시즌에도 6월 초까지 38경기를 주전포수로 출장했다. 하지만 부상의 여파가 남았던 탓인지 이 기간 동안 고작 타율 .189, 5홈런, 13타점을 올렸을 뿐이며, 작년보다 경기당 실책수까지 크게 늘어나는 등 본인의 이름값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최악의 기록을 남겼다. 결국 6월 10일에 등록 말소, 미국으로 건너가 정밀 진단을 받은 뒤 수술을 받았다. 비교적 간단한 수술이긴 하나, 재활 기간이 필요한 만큼 사실상 시즌 아웃.
한편 교류전 기간부터는 라쿠텐에서 이적한 후지이 아키히토가 주전포수 자리를 꿰어차며, 공수에서 그럭저럭 준수한 활약을 보인 터라 부상을 빨리 떨쳐내지 못한다면 이후 조지마의 입지가 크게 좁아질 거란 예측도 나왔다.
수술 후의 재활 훈련은 성공적으로 끝냈지만, 결국 포수 포지션을 소화할 정도로 회복되진 못하였다. 그에 따라 구단 측은 조지마에게 일시적 포지션 변경을 권유했고, 조지마도 이를 받아들이면서 2012 시즌 동안에는 포수가 아닌 1루수로 출장하게 됐다. 덕분에 스프링캠프 중에도 포수가 아닌 1루수로서 수비 훈련을 받았으며, 훈련 기간 동안 포수 미트는 아예 껴 보지도 못했다고 한다. 인터뷰 내용에 따르면 2012년 시즌 중에 포수로 선발 출장하는 것은 이미 포기한 상태이지만 포수란 포지션 자체를 포기한 것은 절대 아니며, 감독과 코치 역시 궁극적으로는 포수로 복귀해 줄 것을 기대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당시 후지이가 주전 포수를 맡는 동안 한신 성적이 계속 추락했던 터라 코치진은 물론 한신 팬들로서도 조지마의 복귀가 매우 절실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2012 시즌에는 1루수와 대타로 24게임에 출전, 타율 .179 무홈런 5타점에 그치는 등 부진했으며, 도중에 또다시 부상을 당해 수술을 받고 재활을 거쳐 복귀를 시도하다 2군 경기에서 수비 도중 또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결국 거듭된 부상으로 더는 포수로 뛰는 게 불가능한 수준에 이르렀고, 구단 측은 1루수로의 완전 전환을 권유했지만, 조지마는 "포수로 뛸 수 없다면 차라리 은퇴를 선택하겠다."며 전격 은퇴를 선언했다.[25] 더욱이 이에 앞서 가네모토 도모아키도 같은 달 은퇴를 밝혔기 때문에 한신 팬들로서는 여러 모로 더욱 씁쓸해질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인 9월 29일, 그는 1군이 아닌 2군에서 은퇴 경기를 가졌다. 부상 여파로 시즌 내내 1루수나 대타로만 나오던 조지마였지만, 은퇴 경기인 만큼 이때는 3번 타자 겸 포수로 출장했다. 조지마는 이 경기에서 1회말 무사 1, 2루 상황에서 적시타를 때린 직후 교체됐고, 꽃다발과 함께 동료들의 헹가래를 받으며 자신의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그가 일본을 대표하는 포수 중 하나로 불리며, 한때 메이저리그에까지 진출하여 활약했던 대선수였다는 걸 감안하다면 아무래도 상당한 초라한 은퇴식인 셈이었다. 본래 구단 측은 따로 은퇴식을 계획하기도 했으나, 조지마는 이를 거부하고 다음 2군 경기를 끝으로 바로 은퇴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4. 은퇴 이후
은퇴 이후 한동안 지도자나 해설자 등 야구와 관련된 일체의 활동은 하지않고 취미였던 낚시 등으로 세월을 보내며 유유자적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동안 벌어놓은 연봉을 까먹으면서 마냥 놀고 있는 건 아니고 규슈지역 방송국의 낚시 프로그램과 골프 프로그램 등의 메인 호스트로 고정 출연했는데, 프로그램이 나름대로 인기가 있어서 방송국에서도 만족했다고.그래도 야구와 아주 연을 끊은 건 아닌지, 2018년 자이언츠 - 호크스 OB전에서 호크스의 OB 선수로 참여하기도 했다.
2019년 도쿄돔에서 열린 시애틀과 오클랜드의 개막전에서 첫 시구를 받았다. 공을 던진 사람은 대마신 사사키 가즈히로.[26]
2019년 12월 20일부로 오 사다하루 회장보좌 특별자문역에 취임하면서 15년 만에 호크스에 복귀했다. 공들여 키운 제자가 은퇴 이후 야구와 관련없는 인생을 보내는 것을 두고 못 본 오 사다하루 회장의 간곡한 부탁 때문이라고. 5년 전쯤부터 오 회장이 매년 오프시즌 때마다 끈질기게 요청을 해왔다고 한다. 일각에서는 쿠도 키미야스 현 감독의 후임감독을 염두에 둔 복귀가 아닌가 하는 시각도 있다.[27]
5. 기타
- 열혈남이라는 이미지답게 성격이 화통하고 화끈한 터라 대인 관계가 비교적 원만한 편이며, 후쿠오카 야구의 상징적 존재다 보니 인기 역시 상당히 높다. 또한 기자들에게 껄끄러운 질문을 받아도 특유의 시원시원한 성격으로 가볍게 잘 받아 넘기는 모습을 자주 보인다. 다만, 반대로 지나치게 다혈질인데다 안하무인에 너무 멋대로 군다고 보는 이들도 상당히 많은 터라 항상 이런저런 질 나쁜 루머가 그를 따라다니기도 한다.
워낙 고집불통이다 보니 고등학교 때부터 선배들에게 꼬박꼬박 말대답을 하며 멋대로 개긴 통에 엄청나게 얻어맞았다고 하며, 당시 같은 학교에 재학했던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야구부 창고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무슨 고기 두들기는 듯한 소리가 걸핏하면 들렸는데,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아, 또 조지마가 얻어터지고 있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신인 시절엔 킨테츠 버팔로즈와의 경기에서 데드볼을 맞았다고 7살 연상의 선배 투수 타카무라 히로시[28]에게 죽일 듯이 달려들는가 하면, 경기가 안 풀리는 날엔 덕아웃에 앉아서 어린 투수들을 갈군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 야구 해설가 토요다 야스미츠가 신문 논평으로 자신에 대한 악평을 쓰자, 이를 보고 단단히 빡쳐서 토요다의 사진을 자신의 방에 도배해서 붙여놓고 이를 바득바득 갈며 몇날 며칠을 지내가다 딱 한 번 마주치자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서 토요다의 기를 확 꺾어 놓았다는 일화도 있다. 이때 조지마가 얼마나 기세등등했는지 야구계 대선배를 떠나 나이 차이가 40살이나 나는 토요다가 조지마의 고함에 받아치긴커녕 미안하다는 말만 연발하며 그를 진정시키기 바빴으며, 그 이후부터 토요다는 절대 조지마에 대한 악평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재밌는 사실은 토요다 역시 선수 시절에는 조지마와 마찬가지로 다혈질에 악동으로 유명했던 터라 걸핏하면 선배들한테 덤벼들기 일쑤였다는 것이며 뛰어난 타격 실력과 그에 반비례하는 나쁜 수비까지 서로 똑같은 판박이였다는 것이다. 물론 조지마 쪽은 노력을 통해 그 나쁜 수비를 어느 정도 극복하긴 했지만 말이다.
- 포수 대선배이자 호크스를 넘어 일본프로야구의 레전드인 노무라 카츠야[29]와는 그에게 "넌 일단 인간부터 되거라."란 소리까지 들었을 정도로 매우 사이가 나빴다. 이유는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1라운드 때 일본이 한국에 0:1로 패배하자 노무라 감독이 조지마의 볼배합 문제를 지적했는데, 이에 조지마가 "그럼 감독님은 선수생활 할 때 한번도 실점을 안 하셨나 봅니다?"라며 곧바로 직격탄을 날려 버렸기 때문. 그래서 이 일이 있은 후엔 서로 얼굴조차 마주치지 않는다고 한다.[30]
- 자신이 퍼시픽리그 출신이라는 사실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2000대 초반 퍼시픽리그에서 정상급 활약을 펼친 선수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당시 퍼시픽리그에서 활약한 선수 대부분은 센트럴리그는 단지 요미우리 자이언츠 덕에 중계를 자주 배정받아 인기가 높은 것일 뿐이며, 죄다 돈지랄로 퍼시픽리그의 좋은 선수 훔쳐가는 구단들이라는 식의 생각을 품고 있다고 한다.
- 의사소통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하긴 했던 모양인지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2회 대회에선 MLB TV 해설자들이 그의 영어 실력을 칭찬하기도 했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는 것 정도이지, 절대적인 수준으로 보자면 그리 뛰어나지 않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일례로 샌디에이고에서 펼쳐진 한국과의 본선경기 당시 삼진을 당한 뒤 억울하다는 제스처를 취하고 덕아웃으로 돌아갔는데 그 직후에 퇴장을 당한 적이 있다. 이유인 즉슨 타석에 놓고간 배트를 다시 가져가라는 주심의 말을 못 알아들었던 것. 조지마는 퇴장 이유에 대해 설명하는 심판을 향해 계속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통역원이 나서서 내용을 해석해 주자 그때서야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었다고 한다.
- 폭스 스포츠에서 공수교대 시 틀어주는 BGM이 일본의 야구팬들 사이에서 '조지마 분노의 테마'(城島怒りのテーマ)라는 명칭의 밈이자 마성의 BGM이 되어 있는데, 2006년 파드레스와의 경기에서 이치로의 송구를 받아 3루 주자 조시 바필드를 태그 아웃 시키는 과정에서 포수 차징을 맞고 한바퀴 구른 후 바필드를 쏘아보는 장면의 리플레이에서 이 음악이 흘렀기 때문. 해당 BGM 당시 상황
- 우타자임에도 불구 하고 좌완 투수에게 약했다. MVP를 수상한 2003년에도 우완 투수에겐 .355의 높은 타율을 기록했지만 좌완 투수에게는 .223으로 굉장히 약한 모습을 보여줬다.
6. 둘러보기
[1] 2001년 4월 13일 고베 오릭스 버팔로즈전에서 9회초에 기록[2] 현 메이호 고교(明豊高校)[호크스시절] 凄い若鷹だ こまでも飛ばす レフト越えフェンス越え スタンドまで飛ばせ대단한 젊은 매다 어디까지라도 날려라 레프트 넘어 팬스 넘어 스탠드까지 날려라[한신시절] 燃える闘志を バットに込めて 打てよ城島 炎のアーチ 불타는 투지를 배트에 담아 쳐라 조지마 불꽃의 아치[5] 오 사다하루가 직접 중재에 나선 시점에서 코마자와대학도 한 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일본 야구를 대표하는 레전드가 사과의 뜻을 전하려고 직접 학교까지 방문했는데 이때조차 고자세를 취하면서 망신을 줬다가는 호크스뿐만 아니라 향후 코마자와대학 야구부 졸업생 전체가 프로야구 진출을 단념해야 할 상황이 생겼을 수도 있고, 이러면 졸업 후 사회인야구밖에 진로의 길이 없는 대학으로의 진학을 고교야구 학생들이 선택할 리가 없기 때문에 야구부 존폐의 기로에까지 설 수도 있었기 때문.[6] 조지마를 조련하던 쿠도 키미야스가 이 해 팀의 에이스로 맹활약하며 리그 평균자책점 1위 타이틀과 MVP를 수상했다. 그러나 쿠도는 시즌 종료 후 연봉 문제로 프런트와 불화를 빚게 된 탓에 FA를 선언해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하게 되었다.[7] 다만, 투수 리드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시각도 있다. 투수 리드는 여전히 형편없지만, 이젠 짬밥이 쌓이고, 팀내 위상까지 높아진 탓에 주변에서 대놓고 까기 어려워졌을 뿐이라는 이야기다.[8] 조지마의 리드를 거부하고 끝내는 자기가 원하는 곳으로 던지는가 하면, 조지마의 사인대로 공을 던져서 얻어맞고는 덕아웃에 돌아와 조지마를 자기 옆에 앉혀 놓고 계속 갈궜다고 한다.[9] 조지마는 후에 "그들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자신이 있다는 생각이 한다". "쿠도 씨에게 정말 여러가지 일을 배웠다 "고 말했다. 이에 대해 쿠도는 "내가 키운 것이 아니라 그가 스스로 자란 것이다" "엄격하게 꾸짖어도 받아들이는 강인한 정신력이 그에게는 있었다"고 술회했다.[10] 상대팀 덕아웃에서 보고 있는데 대놓고 "커브? 커브? 슬라이더?"라는 제스처를 취하고 마지막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커브 맞지?"라고 대놓고 다 까발리고 있다. 한마디로 상대팀에게 보여줘도 상관이 없을 정도로 조지마의 리드를 제대로 취급조차 안 해주고 있다는 얘기.[11] 여담으로 저 움짤들이 나온 해는 상술한 일본시리즈 제패를 달성한 1999년이었는데, 이미 주전 포수로 정착한지 시간이 꽤 흐른 데다 팀의 공수의 핵심으로 활약하던 와중에도 여전히 갈굼받았을 정도로 쿠도의 눈엔 조지마에게 여전히 부족한 점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12] 당해 호크스 타선은 일본프로야구 역대 최고 기록인 타율 .297을 기록하며 맹타를 휘둘렀고, 조지마를 비롯해 이구치 타다히토, 마츠나카 노부히코, 페드로 발데스 등 4명의 타자가 100타점 이상을 기록하며 100타점 중주라는 별명을 얻었다.[13] 자기가 친 파울타구가 정강이에 맞았는데 워낙 타구가 강해서 골절상을 입었다.[14] 역대 아시아 출신 선수 데뷔 시즌 홈런 1위였으나 이후 2018년 오타니 쇼헤이가 22홈런으로 경신했다.[15] 외야에서 저 레이저 송구를 한 선수가 바로 스즈키 이치로다. 실제로 희생플라이로 3루주자 태그업 상황시 이치로가 외야에서 총알송구를 하고 그걸 조지마가 잡아 좋은 태그 능력으로 주자를 아웃시키는 상황도 꽤 볼 수 있었다.[16] 볼배합 등의 결정에서 포수의 결정권을 중시하는 동양과는 달리 메이저리그에서는 투수의 의사를 보다 중시하기 때문이라는 지적. 다만 다른 평자들은 리그 차이보다는 조지마의 블로킹 성공률이 낮은 탓이라는 지적도 제기했다. 자기가 받기 편한 공을 중심으로 볼배합을 하다 보니, 내용이 단조로워져서 읽히기 쉽다는 것이다.[17] 자세한 것은 포수 항목을 참조.[18] 지금도 그나마 펜스를 상당히 당겼음에도 중립 구장에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다.[19] 덕분에 투수진과의 불화설이 점점 설득력을 얻었으며, 이때부터는 기껏해야 대타로 간간히 올라오는 처지가 됐다.[20] 당장 2010년대 최고의 공격형 포수라고 할 수 있는 버스터 포지가 커리어하이 홈런 개수가 24개다.[21] 설령 지명 할당으로 방출되더라도 계약된 연봉은 전액 지급해야 한다.[22] 메이저리그에서 복귀했다는 점을 내세워 좀 더 많은 돈을 요구할 수도 있었지만, 의외로 무리한 요구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 더불어 주요 요구 사항은 돈이 아닌 주전 보장이었다.[23] 그러나 호크스가 조지마를 택하지 않은 것은 최악의 한 수가 되었는데, 타노우에가 1년 만에 몰락해 버리는 바람에 주전 포수 자리에 큰 구멍이 생기게 된 것. 결국 소프트뱅크는 2010년대 후반에 카이 타쿠야를 키워낼 때까지 호소카와 토오루, 츠루오카 신야 등의 FA 자원들을 데려와서 포수 자리를 돌려막아야 했다. 원채 수비력이 모자란데다 물어깨인 공격형 포수 유형이던 타노우에가 타격마저 망했으니 도저히 쓸 수 없는 상태가 된 것. 그리고 1군 백업 포수자리도 야마자키 카츠키에게 밀리며 2013년을 끝으로 은퇴했다.[24] 참고로 후지이 아키히토의 영입 이후 카노 케이스케는 결국 외야수로 보직을 전환하였다.[25] 사실상 이미 9월 초순 경부터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은퇴 결심을 알렸다고 한다.[26] 참고로 가운데 있는 사람은 리키 헨더슨이다.[27] 그러나 2020년 12월 3일 고쿠보 히로키가 쿠도 키미야스 감독을 보좌하는 위치인 수석 코치로 다시 호크스에 들어오면서 호크스의 다음 감독으로 고쿠보를 임명할 수도 있다는 의견도 있다.[28] 1992년 퍼시픽리그 신인왕.[29] 다만 노무라는 난카이 호크스 시절 말기에 당시 불륜관계였던 아내의 갑질 문제로 구단을 떠나게 된 탓에 호크스와는 다이에에게 팔려 후쿠오카로 떠날 때까지 인연을 끊었다.[30] 그래서 노무라 카츠야는 포수로써의 실력은 조지마보다 호소카와 토오루가 더 뛰어나다는 발언까지 한 적도 있다. 호소카와도 수비력은 좋았지만 컨택이 매우 나쁜 공갈포였던 데다 롯데의 공수겸장 포수였던 사토자키 토모야에게 국대 백업포수 경쟁에서 밀려 국가대표 승선 경험이 없었던 것을 감안하면 명백하게 조지마가 싫어서 호소카와를 밀어주는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