캡틴 비프하트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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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캡틴 비프하트 Captain Beefheart[1] | |
본명 | Don Glen Vliet (돈 글렌 블리엣) |
출생 | 1941년 1월 15일 |
캘리포니아 주 글렌데일 | |
사망 | 2010년 12월 17일 (항년 69세) |
캘리포니아 주 아르카타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가족 | 아버지 글렌 알론조 블리엣, 어머니 윌리 수 블리엣 |
배우자 자넷 반 블리엣 | |
학력 | 앤텔로프 밸리 대학 (미술학 / 중퇴) |
신체 | 181.6cm |
종교 | 무종교 |
링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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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싱어송라이터, 화가, 영화감독.2. 생애
2.1. 초년
캡틴 비프하트는 캘리포니아 글렌데일의 네덜란드계 미국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미술에 큰 재능을 보였는데, 특히 전문 조각가 아고스티뉴 로드리게스에 의해 발탁되어 견습생이 되고 8년간 주간 TV 쇼에서 활동했을 정도로 조각에서 출중한 능력을 자랑했다.그가 13살이었을 때 더 외딴 농경도시인 랭커스터로 이주했고, 모하비 사막에서 음악에 흥미를 붙힌 그는 손 하우스와 로버트 존슨의 델타 블루스, 오넷 콜먼, 존 콜트레인, 델로니우스 몽크, 세실 테일러와 같은 재즈 아티스트, 하울링 울프와 머디 워터스의 시카고 블루스 등을 들으며 음악에 대한 꿈을 키웠다, 또한 십대 초반에 블리엣은 때때로 오멘스, 블랙아웃과 같은 지역 밴드 멤버들과 교제하곤 했다. 오멘스의 기타리스트 알렉시스 스누퍼와 제리 핸들리는 후에 매직 밴드의 멤버가 되었고 블랙아웃의 드러머 프랭크 자파는 음악적으로 여러 도움을 주게 된다.
2.2. 음악 활동
이후 프랭크 자파와 스투츠(Soots)라는 이름의 듀오로 활동하다가 프랭크 자파가 1964년, 독립적으로 더 마더즈 오브 인벤션(The Mothers of Invention)을 결성하자, 그는 예명을 '캡틴 비프하트'로 정한 뒤 그의 매직 밴드(The Magic Band)를 조직하게 된다.1967년, 캡틴 비프하트와 매직 밴드의 이름을 달고 첫 앨범 Safe as Milk가 발매된다. 부다 레코드에서 발매된 이 앨범은 원래는 A&M 레코드에서 발매될 예정이었는데, 당시 사장인 제리 모스가 그들의 난해한 음악에 대해 난색을 표하고 일방적으로 계약을 해지하였다고 한다. 캡틴 비프하트는 앨범 발매 비용을 지원하기 위해 몬테레이 팝 페스티벌에서 공연을 하기로 결정하는데, 이 시기에 기타리스트 레이 쿠더가 갑작스레 탈퇴하고 비프하트 본인은 심한 불안 증세에 시달리는 등[2] 큰 악재를 겪었다.
1968년 블루 툼(Blue Thumb) 레이블로 옮긴 그는 It Comes to You라는 이름의 더블 앨범을 기획하는데, 당시 사장이던 밥 크라스노우가 밴드가 유럽 공연을 하던 틈을 타 멋대로 Strictly Personal라는 이름의 한 장짜리 앨범으로 발매하게 된다. 앨범 자체의 평은 좋았지만 그는 사장의 독단적인 행동에 큰 분노를 표하고 로스앤젤레스로 돌아가게 된다.
로스앤젤레스로 돌아간 이후 프랭크 자파와 재회한 그는 1969년 자파가 자체 설립한 레이블인 스트레이트(Straight) 레코드에서 익스페리멘탈 록 역사상 최고의 명반인 Trout Mask Replica를 발매하게 된다. 비프하트의 난해한 음악 세계가 한껏 발휘된 이 앨범은 평론가들에게 굉장한 호평을 얻었으며 영국 차트에서 21위까지 진출하는 등 괜찮은 성적을 내었다.
1년 뒤 발매된 Lick My Decals Off, Baby 또한 비프하트의 가장 실험적인 앨범이란 평과 함께 평론가들에게 큰 호평을 받았고, 상업적으로도 전작보다 훨씬 크게 성공하였다. 그 중 영국에서 특히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었고, 영국 차트 20위로 생전 가장 높은 차트 순위를 맛보았다. 1971년에 발매된 Mirror Man 또한 영국에서 49위에 올랐다. 평론가들은 보통 이 시기까지를 최전성기로 본다.
1972년 The Spotlight Kid, 같은 해에 발매된 Clear Spot은 밴드가 사실상 돈을 거의 못 벌었기 때문에 이전까지의 앨범과 분위기를 좀 바꿔 대중성을 살짝 가미하였으며, 이전 앨범들보다는 살짝 평이 안 좋았지만 전체적으로 호평을 받았다. 그 동안의 앨범들에서 형성되어온 마니아 층들에 의해 빌보드 200에 최초로 진입해 보기도 하였다. 최고 성적은 각각 131위, 191위.
1974년에 소속사를 머큐리 레이블로 옮기고 이전의 두 앨범들 보다도 좀 더 부드럽게 고전 블루스 스타일로 만든 Unconditionally Guaranteed를 녹음한 직후 그에게 불만이 쌓여 있었던 매직 밴드의 오리지널 멤버들은 전부 밴드를 떠났다. 이후 그는 급히 새 멤버들을 뽑고 Bluejeans & Moonbeams를 발매하게 된다. 두 앨범 모두 평이 상당히 안 좋았으며, 본인도 이 두 앨범을 평생 끔찍히도 증오했다.
두 앨범의 실패 이후 계약 해지로 곤란하던 차에 프랭크 자파가 또 다시 손을 내밀었고, 비프하트는 이 시기에 마더즈 오브 인벤션의 보컬로 잠깐 활동하게 된다. 그가 보컬로 재직하고 있을 당시 발매된 마더즈 오브 인벤션의 앨범 Bongo Fury는 빌보드 200에서 66위까지 오르기도 하였다.
1978년 마침내 계약의 어려움에서 빠져나온 그는 다시금 매직 밴드에 새 멤버들을 영입하고 워너 브라더스 레이블에서 Shiny Beast (Bat Chain Puller)을 발매하게 된다. AllMusic은 '비프하트가 전의 두 앨범에서 길을 잃었다고 느끼는 사람들을 위해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라는 표현으로 극찬하였으며, 다른 매체들도 호평을 하였다.
2년 뒤 버진 레코드에서 발매된 Doc at the Radar Station 역시 큰 호평을 얻었으며, 포스트 펑크에 경도되어 있던 젊은 층들에게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 Trout Mask Replica 이후 최고의 앨범이라는 평도 있었다. KABC-TV 채널 7에서 인터뷰를 가지기도 하였으며, '뉴웨이브의 아버지이자 지난 50년 동안 가장 중요한 미국의 작곡가 중 한 명'이란 말을 듣기도 하였다.
이후 1982년에는 비프하트의 마지막 스튜디오 앨범인 Ice Cream for Crow를 발매하였다. 이 앨범의 뮤직비디오는 비프하트 본인이 직접 감독하였는데, MTV는 그들의 뮤직비디오가 너무 이상하단 이유로 방영해 주지 않았다. 비프하트는 레터맨과의 인터뷰에서 MTV의 "I want my MTV" 마케팅 캠페인을 언급하며, "나는 그들이 내 비디오를 원하지 않는다면 MTV를 원하지 않는다"고 공개적으로 불만을 표시하기도 하였다. 이 앨범 역시 큰 호평을 얻었으나 비프하트는 이후 미술 활동에만 전념하기 위해[3] 앨범 딱 한 장만 더 녹음하라는 주위의 목소리를 뿌리치고 음악활동을 완전히 은퇴하게 된다.
2.3. 말년
음악계에서 은퇴하고 본격적으로 미술 활동을 시작한 비프하트는 처음에는 "자아를 위해 예술에 손을 대는 또 다른 록 뮤지션"이라는, 쉽게 말해 예술병 걸렸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미술 활동을 꾸준히 이어가면서 큰 호평을 받았다. 1985년에는 그의 팬이었던 유명 포스트모더니즘 화가 줄리안 슈나벨의 도움을 받아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 성공적으로 전시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그의 화풍은 아방가르드 그룹 코브라(CoBrA)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며,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 관장을 하였던 존 레인 박사에 따르면, 비프하트의 작품은 주류 추상 표현주의 그림과 관련이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가 독학한 예술가였고 그의 그림은 "음악이 가진 것과 같은 장점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큐레이터 데이비드 브루어는 뉴욕의 추상적 표현주의자들의 분주하고 보헤미안적인 도시 생활과는 대조적으로, 비프하트가 영향을 받은 시골 사막 환경은 뚜렷하게 자연주의적인 환경이라고 표현하였다.
안타깝게도 말년에는 다발성 경화증에 걸려 고생했으며, 휠체어를 타고 돌아다녀야 했다. 대외 활동은 거의 하지 않았는데, 1993년 안톤 코빈의 비프하트의 말년을 다룬 13분짜리 다큐멘터리에 출연한 것이 공개 석상에서의 마지막 비프하트의 모습이 되었다.
이후 2010년 12월 17일 금요일, 캡틴 비프하트는 캘리포니아 아르카타의 한 병원에서 그의 70세 생일을 한 달 앞두고 끝내 다발성 경화증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사망하였다. 프랭크 자파의 아들 드위질 자파와[4] 유명 배우 제프 브리지스는 NBC의 토요일 밤 라이브 에피소드가 끝난 후 그를 추모하였다.
3. 음반
- Safe as Milk (1967)
- Strictly Personal (1968)
- Trout Mask Replica (1969)
- Lick My Decals Off, Baby (1970)
- Mirror Man (1971)
- The Spotlight Kid (1972)
- Clear Spot (1972)
- Unconditionally Guaranteed (1974)
- Bluejeans & Moonbeams (1974)
- Shiny Beast (Bat Chain Puller) (1978)
- Doc at the Radar Station (1980)
- Ice Cream for Crow (1982)
- Bat Chain Puller (2012)[5]
4. 평가
캡틴 비프하트는 1960년대에 떠오른 가장 중요한 음악가로, 비틀즈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광범위하다. 레스터 뱅스 (음악 평론가) |
역대 최고의 록 음악가이자 20세기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영향력 있는 천재 중 한 명인 돈 밴 블리트는 캡틴 비프하트로도 알려져 있으며, 모든 음악적 교조주의를 완전히 지우고 자신의 방식대로 음악을 재창조했다. |
미술 분야로도 큰 호평를 받았는데, 1982년 음악계에서 은퇴한 이후로는 쭉 미술가로서 활동하였으며 그의 표현주의 회화와 드로잉은 높은 가격을 받았고[6] 지금도 전 세계의 미술관과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1] 예명에 대한 다양한 설이 있는데, 화장실 문을 열고 소변을 보는 습관이 있던 비프하트의 삼촌의 음경을 목격한 여자친구가 중얼거린 말에서 따왔다는 설이 있고, 사회에 대한 비프하트 자신의 마음 속 괴로움을 표현한 이름이라고도 하며, 프랭크 자파가 지어줬다고도 한다.[2] 당시 그는 LSD 등 마약의 영향으로 자신이 심장병을 앓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의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는 사실도 한 몫 했다.[3] 80년대 초에 만난 미술가 마이클 베르너는 비프하트에게 화가로서 존경받기를 원한다면 음악을 연주하는 것을 그만둘 필요가 있다고 말했고, 그렇지 않으면 그는 단지 "그림을 그리는 음악가"로만 여겨질 것이라고 경고한 바가 있었다. 비프하트는 이 충고를 따른 것.[4] 프랭크 자파는 1993년 사망했다.[5] 사후 발매, 1972년경의 레코딩을 사용.[6] 작품 중 하나는 25,000달러에 팔리기도 하였다. 음악 활동 때 번 돈보다 미술 활동을 하며 번 돈이 더 많았다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