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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8 14:40:27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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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멘트 보로실로프
Климе́нт Вороши́лов | Kliment Voroshilov
파일:클리멘트 보로실로프 (흑백 사진 3).jpg
본명 클리멘트 예프레모비치 보로실로프
Климе́нт Ефре́мович Вороши́лов
Kliment Yefremovich Voroshilov
출생 1881년 2월 4일
러시아 제국 예카테리노슬라프현 바흐무트군 리시찬스크읍 베르흐네예
(現 러시아 루간스크 인민공화국 리시찬스크)
사망 1969년 12월 2일 (향년 88세)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묘소 크렘린 벽 묘지
재임기간 제3대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
1953년 3월 15일 ~ 1960년 5월 7일
서명 파일:클리멘트 보로실로프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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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0000><colcolor=#ffe400,#ffe300> 부모 아버지 예프렘 안드레예비치 보로실로프
어머니 마리야 안드레예브나 보로실로바[1]
배우자 예카테리나 다비도브나 보로실로바[2]
종교 무종교 (무신론)
소속 정당
[[소련 공산당|]]
복무 노농적군
1918년 ~ 1946년
소비에트 연방 지상군
1946년 ~ 1969년
최종 계급 원수 (소비에트 연방 지상군)
주요 보직 육해군인민위원
국방인민위원
주요 참전 제1차 세계 대전
러시아 내전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겨울전쟁
폴란드 침공
레닌그라드 공방전
주요 서훈 레닌훈장 (8회)
사회주의노력영웅
소비에트 연방 영웅 (2회)
수보로프 훈장 1급
적기훈장 (10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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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아이작 브로드스키가 그린 초상화
1. 개요2. 약력3. 생애
3.1. 어린 시절과 혁명 활동3.2. 내전과 스탈린의 군사적 동지3.3. 국방장관으로서의 오해와 실상3.4. 겨울전쟁3.5. 독소전쟁3.6. 이오시프 스탈린 사후3.7. 말년
4. 평가
4.1. 무능한 야전지휘관4.2. 군부와 정치권을 잇는 가교
5. 기타6. 주요 수훈 내역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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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시아 내전,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소련 육군 장성이다. 최종 계급은 원수.

소련 초기 5원수(보로실로프, 부됸니, 투하쳅스키, 블류헤르, 예고로프) 중 하나였으며 이오시프 스탈린의 친구였다. 초기 소련 공산당 역사에서는 빼 놓을 수 없는 인물. 내전기에는 매우 유능한 지휘관으로 중요한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시대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겨울전쟁에서, 그리고 독소전쟁레닌그라드 공방전에서 졸전으로 결국 야전 지휘에서 손 떼야 했고, 전후 니키타 흐루쇼프 시대에 실권을 잃은 후 막판에 정계에 복귀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2. 약력

3. 생애

3.1. 어린 시절과 혁명 활동

보로실로프는 러시아 제국예카테리노슬라프[4]에서 가까운 베르크네예에서 태어났다. 1896년 공장 노동자로 일하다가 파업에 참가하여 해고되었다. 1903년볼셰비키에 참가했다. 1906년에는 파업을 선동해서 체포되었으나 석방되었고 스톡홀름에서 열렸던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5]의 제4차 대회에 대표로 출석하여 블라디미르 레닌이오시프 스탈린을 알게 되었다. 이때 그는 스탈린과 한방을 썼고 그 인연으로 스탈린과 안면을 텄다. 1907년 런던에서 열린 제5차 대회에도 출석하여 미하일 프룬제미하일 칼리닌 등을 알게 되었다. 동년에 다시 체포되어 북쪽의 아르항겔스크로 유배되었으나 1913년 사면되었다. 이렇듯 청년 시절부터 꽤 굴곡진 삶을 살았다.

3.2. 내전과 스탈린의 군사적 동지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시작되었을 때 보로실로프는 우크라이나 임시 정부 수반과 내무인민위원(내무장관)을 맡았다. 러시아 내전 기간 동안 공산당의 차리친(훗날의 스탈린그라드) 방위전 때 스탈린과 친해졌다. 이 스탈린-보로실로프 인맥은 나중에 붉은 군대의 중추가 되는데 대숙청에서 무사했던 군인들 중 상당수가 이 인맥이었고 대숙청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대거 승진한 것도 이 인맥이었다. 세묜 티모셴코이반 코네프가 바로 이 인맥이다.

2차대전 때 보로실로프가 무능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적백내전에서의 그의 전과를 과소평가할 필요까지는 없다. 이전의 서술에서는 그가 얇게 무장하고 지휘 체계가 엉망이며 고립되었던 반혁명군을 진압했을 뿐이고 전략전술적으로 의미있는 승리를 거둔 적은 없다고 심하게 폄하하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오히려 백군쪽이 영국에서 원정온 전차 사단이 동행할 정도로 높은 무장 수준을 가지고 있었고 지휘관도 데니킨, 브란겔, 크라스노프 등 남러시아 백군에서 쟁쟁한 인물들 뿐이었다. 지휘 체계라고 하면 지휘관을 투표로 선출하는 적군쪽이 훨씬 엉망이었다. 무엇보다 그가 방어하던 볼가 강 유역은 남러시아 백군과 시베리아 백군의 공격을 동시에 막아내야하는 요충지였고 실제로 이곳을 잘 막아내면서 두 세력이 하나로 합류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그는 고참 볼셰비키(10월 혁명 이전에 볼셰비키에 참여한 자)로서 트로츠키 몰락과 프룬제 사후 붉은 군대의 넘버 원이었다. 1935년에 군에 계급이 부활되자 다른 4명(투하쳅스키, 예고로프, 블류헤르, 부됸니)과 함께 원수 계급을 받았다. 다섯 원수 중에서도 그가 가장 서열이 높았기 때문에 당시 선전매체나 군가 등에서는 보로실로프를 따로 '제1원수'라고 호칭하기도 했다.
파일:attachment/St_060.jpg
1935년에 제작된 국방장관 시절 이오시프 스탈린(左)과 함께 영웅으로 숭배되던 시절의 포스터.[6]

당시 붉은 군대는 국방장관 겸 군사 혁명 위원회 의장 레프 트로츠키가 총지휘하고 있었고, 러시아 내전을 승리로 이끈 트로츠키의 명성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화려한 언변으로 무장하고 적과 동지를 동시에 많이 두고 다녔던 트로츠키에 비해 언변이 서툴고[7]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성격을 지녔던 스탈린은 무명의 당 간부였으며, 10월 혁명에서 큰 두각을 끼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스탈린이 차르의 은행이나 열차를 강도질해 혁명자금을 모아오는 일을 맡았고 그 와중 범죄조직과의 관계도 많아져서 당 입장에서 드러내기 곤란했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트로츠키와 처음부터 사이가 매우 나빴는데, 보로실로프는 트로츠키가 이끈 군사 혁명 위원회에서 트로츠키에 맞서서 스탈린을 옹호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스탈린은 그럴 위치도 아니었고 그렇게 어리석지도 않았다. 스탈린은 처세술에 뛰어나[8] 당시 얌전하고 별 문제되지 않는 인물이란 평판을 받고 있었고 트로츠키는 유능하지만 남들을 깔보는 일이 많아 적이 많았다. 이때도 트로츠키가 일방적으로 모스크바에서 남러시아 전선을 잘 지키고 있던 스탈린을 공격했다. 이렇게 스탈린이 어려웠을 때 보로실로프가 나서서 스탈린을 적극적으로 옹호했기 때문에 그는 스탈린의 가장 믿을만한 정치적 동지가 되었다고 봐야할 것이다.

트로츠키는 혁명의 일등공신이었으나 오만한 성격 탓에 적이 많았고, 초기부터 블라디미르 레닌을 따르던 볼셰비키가 아니라 뒤늦게 참여한 인물이라서 볼셰비키 당 내에 추종자들이 별로 없었다. 더구나 다른 볼셰비키 지도자급 인물들은 군부를 장악한 트로츠키가 제2의 나폴레옹이 되어 혁명을 전복시키고 독재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힘을 모아 트로츠키가 내전 당시 드러냈던 여러 약점을 들춰내며 공격했으며, 트로츠키는 이 때문에 군직에서 사임하고 미하일 프룬제가 그 자리를 맡았다. 스탈린은 당시엔 그렇게 요직은 아니란 평가를 받던 서기장 직위와 민족문제위원직을 이용해 하급 당원들과 소수민족들의 지지를 받아갔다. 레닌이 뇌일혈로 와병하자 당은 스탈린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덩달아 보로실로프의 지위도 강화되었다. 레닌은 유언장에서 스탈린을 극렬하게 비판하고 서기장직에서 해임하라고 했지만, 다른 간부들이 오만한 트로츠키보단 겸손한 스탈린이 낫다고 여겨 스탈린을 지지해 무시됐다.

3.3. 국방장관으로서의 오해와 실상

"개는 개처럼 죽어야 한다."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스탈린이 서명한 사형집행명령서에 서명하면서 남긴 코멘트.[9]
보로실로프는 1921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61년까지 그 자리를 유지했다. 1925년 미하일 프룬제의 죽음 이후, 보로실로프는 국방장관과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을 맡았다. 이 자리는 1934년까지 맡게 된다. 프룬제의 지위는 당시 소련의 최고 권력을 나눠가졌던 그리고리 지노비예프, 레프 카메네프와 더불어 스탈린의 삼두 체제(트로이카)와 맞먹는 자리였지만, 스탈린은 지노비예프 파인 프룬제보다는 자신의 사람이 맡는 것을 더 선호했다. 프룬제는 지병인 위장종양을 절제하는 수술을 하라고 권유받았고, 수술대 위에서 마취제인 클로로포름 과다 흡입으로 사망했다.[10] 어쨌든 보로실로프는 1926년 새롭게 생긴 정치국의 정규 위원이 되었고 이 자리는 1960년까지 유지되었다.
파일:external/incognita.day.kiev.ua/tyxa_s.jpg
1935년 11월 11일 창설되고 촬영된 5명의 원수. 위의 왼쪽부터 세묜 부됸니, 바실리 블류헤르, 아래 왼쪽부터 미하일 투하쳅스키, 보로실로프, 알렉산드르 예고로프. 사진에서 보듯이 보로실로프가 넘버 원이다. 이 사진을 찍은 지 얼마 안 가서 투하쳅스키, 예고로프, 블류헤르는 목이 날아갔다.[11]
파일:클리멘트 보로실로프 (흑백 사진 3).jpg
1930년대 젊은 시절.

보로실로프는 1930년대 스탈린의 대숙청에 깊이 관여하였고 특히 미하일 투하쳅스키의 처형에 큰 역할을 하였다. 보로실로프는 군의 기계화를 추진하던 투하쳅스키의 급진적 관념을 매우 비판하였고, 반역죄로 기소된 투하쳅스키를 재판하는 군사 재판에서도 재판관으로 참여했다.

하지만 통설과 달리 기계화 자체에 반대한 것은 전혀 아니며, 오히려 군의 기계화에 대해 스탈린과 함께 지원 가능한 한도 내에서는 전폭적인 지원을 해줬다. 투하쳅스키를 비판한 이유는 투하쳅스키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수만 대의 전차항공기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당시 소련군은 소화기도 제대로 통일시키지 못하고 체코제를 비롯한 여러 수입산 총기를 병사들에게 지급했으며 기갑 전력과 항공 전력도 매우 부족한 실정이었다. 알거 다 아는 원수가 비현실적인 요구를 해오니 국방장관인 보로실로프로서는 당연히 비판할 수 밖에 없었다.[12][13] 통설로는 대숙청으로 투하쳅스키를 비롯한 기계화론을 주장하던 장교들이 처형되고 소련군의 기계화 과정이 완전히 중단되었으며 이것이 이후 독소전쟁 초기의 소련군의 출혈을 유발했다고 평가되었으나 이는 스탈린 사후 스탈린 격하과정에서 보로실로프가 함께 격하되며 나온 프로파간다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결과로 실제로는 오히려 대숙청에서 기병 장교들 역시 많이 숙청되었고 보로실로프는 부됸니의 툴툴거림에도 불구하고 기병을 감축하고 반대로 기갑 사단의 수는 두배 이상 증강했다. 더 중요한 점은 독소전쟁 개전 당시의 서유럽 최고의 기갑부대를 보유했던 독일보다도 소련의 기갑차량 보유수가 더 많았다. 당시 소련군의 전차 보유수는 세계 1위였다.

1939년에 뮌헨 협정 등 독일의 팽창으로 위기를 느낀 소련에선 서방 측과 접촉해서 영국, 프랑스와 동맹 관계를 맺으려 시도했다. 이 때 협상단장을 보로실로프가 직접 맡았다. 하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협상에 소극적이었고, 결국 서방 측과의 회담은 흐지부지 끝났으며 대신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게 된다.

3.4. 겨울전쟁

1939년 나치 독일과 은밀하게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은 후 아돌프 히틀러폴란드 침공, 프랑스 침공 등을 일으켜 중유럽, 서유럽을 유린하는 동안 동쪽의 발트 해, 흑해 연안 약소국(발트 3국, 몰도바)들을 병합하던 스탈린은 핀란드레닌그라드 수비를 위해 핀란드 영토를 할양하고 핀란드 주요 영토를 조차해 줄 것을 강요했다. 당연히 핀란드가 보기에 이는 터무니없는 것이어서 협상은 결렬되었고, 11월 30일 겨울전쟁이 시작되었다. 당시 국방장관이던 보로실로프는 친히 침공군을 이끌었고, 처음에는 4개 전선군 42만 명을 동원했다. 스탈린은 히틀러가 폴란드를 한달만에 조진 것처럼 자기도 핀란드군 정도는 금세 쳐부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소련 성립 후 독립한 러시아 제국 시절의 영토를 되찾는 것을 목표로 삼았던 스탈린은 발트 3국처럼 핀란드도 소련의 한 공화국으로 편입시킬 참이어서 소련 내의 핀란드 망명객을 중심으로 핀란드 민주 공화국이라는 괴뢰국을 출범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당연히 그렇게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침공군의 총지휘를 맡은 보로실로프는 1940년 1월까지 소련군을 지휘했으나, 이미 시대에 뒤처진 군인이었던 보로실로프에겐 대숙청 여파로 지휘관 공백이 큰 상황에서 40만, 축차 투입된 병력까지 추가하면 물경 100만에 이르는 병력을 통솔할 역량이 없었다. 소련군은 한줌 병력의 핀란드군에게 대패했고, 보로실로프는 책임을 지고 총사령관과 국방장관에서 경질되었다. 이후 세묜 티모셴코가 소련군을 총지휘했다. 티모셴코는 양적 우위를 바탕으로 핀란드군의 만네르하임 방어선을 돌파했다. 그러나 소련군의 인명 손실이 워낙 극심했기에 스탈린은 이후 핀란드가 강화를 요청했을 때 유리한 조건으로 강화 협정을 맺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스탈린은 옛 친구인 보로실로프가 처참히 패한 후 돌아오자 보로실로프에게 크게 화를 냈고, 보로실로프는 이때 무능을 질책하는 스탈린에게 접시를 던지면서(!) 대들었다. 이 광경을 본 흐루쇼프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스탈린은 격분했다. 군부는 카렐리야 지협(Isthmus)에 있는 핀란드의 방어선, 이른바 만네르헤임 선에 대해 알지 못했다고 설명하면서, 정보기관에 대한 비난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모든 상황이 결국 하나의 주된 비난으로 모아졌는데, 이는 바로 보로실로프를 겨냥한 것이었다. 그는 국방인민위원이었으니 말이다. 엄밀히 말해 군사적 실패에 대해 비난받을 사람이 그 외에는 없었다. 적어도 스탈린은 비난받을 이유가 없었다. 따라서 책임은 보로실로프에게 있었다. 그는 사전에 예상하지 못했고, 철저히 준비하지 못했으며, 이 모든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당시 샤포슈니코프가 참모총장이었다. 그의 참모들이 핀란드에 대한 작전 계획을 세우는 일을 맡았고, 우리 군 내 주요 직책들을 차지하고 있었다. 샤포슈니코프는 유능한 전문가로 평가받았지만, 결정적인 발언권을 가진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문 역할에 머물렀다. 군사 문제는 그 당시 적군을 대표하는 보로실로프에 의해 결정되었던 것이다. (...) 스탈린은 비공식적인 대화에서 우리 군부와 국방인민위원부, 특히 보로실로프를 자주 비판했다. 때로는 모든 책임을 보로실로프 한 사람에게 집중시키기도 했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이 점에서 스탈린에게 동의했다. 왜냐하면 실제로 보로실로프가 가장 큰 책임을 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오랜 기간 국방인민위원의 자리에 있었으며, "보로실로프 사수(Voroshilov marksmen)"[14]라는 이름까지 생겨났을 정도였다. 보로실로프의 자만심은 우리 인민의 경계를 무디게 하고 긴장감을 낮췄다. 그러나 책임이 온전히 보로실로프 한 사람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한 번은 우리가 모스크바 근처 스탈린의 다차에 방문했을 때를 기억한다. 스탈린은 화가 난 상태로 보로실로프를 심하게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는 매우 격앙된 나머지 자리에서 일어나 보로실로프를 호되게 꾸짖었다. 이에 보로실로프도 분노하여 얼굴이 붉어지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스탈린의 비판에 대항하여 이렇게 외쳤다. "이 모든 것은 당신 책임입니다. 군 간부들을 파괴한 사람은 바로 당신이었어요!" 스탈린은 이에 적당히(appropriately) 대답했다. 그러자 보로실로프는 삶은 새끼 돼지가 담긴 접시를 집어 들어 테이블에 내리쳐 깨뜨렸다. 내가 아는 한, 이러한 사건은 단 한 번뿐이었다.
Memoirs of Nikita Khrushchev vol. 1

그런데 스탈린은 놀랍게도 이런 불경한 짓을 한 보로실로프를 별로 탓하지 않고 이후 티모셴코로 교체하는 선에서 일을 마무리지었다. 보로실로프는 스탈린이 적백내전 때나 레닌 사후 트로츠키와 권력투쟁을 할 때 철저하게 스탈린의 편을 들었던 공신이자 스탈린 권력의 핵심 승리연합의 일원으로 그를 다짜고짜 제거하는 것은 스탈린의 입장에서 부담스러운 일은 물론이고, 자신의 권력을 스스로 잘라내는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그럴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그 의심병 스탈린이 소련 정치판에서 "인간적인" 모습을 보일 수 있는 사람은 친구였던 보로실로프 한 명 뿐이었다. 물론 이후 그에 대한 스탈린의 신뢰가 날이 갈수록 떨어지면서 이 역시 그의 리즈 시절을 증명하는 일화 정도로 남게 된다.

3.5. 독소전쟁

파일:external/russiapedia.rt.com/kliment-voroshilov_4-t.jpg
독소전쟁 당시의 보로실로프

이렇게 겨울전쟁에서 과를 범한 보로실로프는 1941년 독일 국방군바르바로사 작전으로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기용되어 레닌그라드 공방전에서 레닌그라드 방위사령관을 맡게 되었다. 빌헬름 리터 폰 레프 원수가 지휘하는 독일 북부집단군은 순식간에 발트 3국을 거쳐 레닌그라드로 쇄도했다. 보로실로프는 어떤 때는 스스로 권총을 빼들고 진두에 서서 독일군 전차 부대의 공격에 대한 반격을 지휘하는 용맹을 보이기도 했으나 작전 지도에 있어 총체적 난국을 보였다.[15] 그 결과 러시아 제국의 수도였고 소련 제 2의 도시였던 레닌그라드가 함락 직전에 처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사람은 군사적으로 무학이었으니. 레닌그라드가 위기에 처하자 스탈린은 보다못해 보로실로프를 해임하고 당시 자신과의 의견 충돌로 총참모장에서 해임된 게오르기 주코프를 파견하였다. 주코프가 사령부에 나타나자 보로실로프는 그제서야 자신의 해임을 알았고, 주코프에게 지휘권을 넘겨주면서 "내가 싸우던 방식으로는 지휘하기엔 전쟁이 너무나 달라졌다." 고 솔직히 자신의 부적합을 인정했다. 그리고 레닌그라드는 주코프의 지휘로 인해 1944년까지 버틸 수 있었고 레닌그라드 공방전은 소련의 승리로 끝을 맺었다.

스탈린은 이번에도 보로실로프를 용서했고 보로실로프는 이후에는 일선 지휘를 맡지 않고 후방 근무를 하다가 종전을 맞았다. 1945-1947년에는 헝가리 인민공화국 수립을 지휘했다. 하지만 보로실로프에 대한 스탈린의 신뢰는 땅에 떨어졌고 그는 명목상 지위는 유지하였으나, 주요 정책결정 과정에서 대부분 배제되었다. 스탈린은 그가 영국 간첩이라는 의심을 드러내기 시작했으며 보로실로프를 연회 초대에 배제하면서 전후 시점에서는 흐루쇼프, 말렌코프, 베리야에 밀려나게 된다.

3.6. 이오시프 스탈린 사후

1952년, 19차 당대회에서 대대적인 조직개편이 이루어지면서 정치국은 훨씬 더 거대한 규모의 간부회로 개편되었는데 보로실로프는 일단은 간부회 위원으로 재선되었고, 간부회의 최고 핵심인 사무국원으로도 선출되었다. 1953년 3월 스탈린의 죽음은 소련 최고 권력의 변화를 가져왔다. 스탈린 밑에 고만고만한 부하들 여러 명이 있었는데 누구도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고, 이들은 일단 권력 투쟁 대신 권력 분점에 합의하여 여러 자리를 나눠 가졌다.

그래서 보로실로프는 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국가원수)이 되었다. 니키타 흐루쇼프는 소련 공산당의 제1서기를 맡았고, 게오르기 말렌코프소련 장관회의 주석에 취임했다. 스탈린 치하에서 NKVD 위원이었던 라브렌티 베리야는 제1부수상 겸 기존 공안기구들을 통합해서 새로 출범한 내무상을 맡았다. 이때 권력을 분점한 말렌코프나 흐루쇼프뿐만 아니라 보로실로프나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와 같은 정치국원들은 모두 베리야를 모두 두려워했는데, 베리야는 정보 기관을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언제라도 구실을 만들어 자신들을 체포, 처형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일단 협력하여 공동의 적인 베리야를 체포해 처형했다. 그런데 흐루쇼프의 회고록을 보면 보로실로프는 베리야를 극혐했지만 베리야가 자신을 도청하고 있다는 생각에 흐루쇼프 앞에서 베리야를 찬양하며 자기 마음을 숨겼다. 그래서 흐루쇼프는 다른 정치국원들을 먼저 설득했고 이후 게오르기 말렌코프가 보로실로프를 찾아가 베리야 제거 계획을 말하자 보로실로프는 말렌코프를 껴안고 울었다고 한다.

1956년 보로실로프는 75주년 생일 기념으로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수여받았다. 수여 시기에서도 알 수 있듯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공훈 덕택이 아니라 원로 대접용으로 던져 준 것으로 보인다(...)[16] 이후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 운동 이후 보로실로프는 말렌코프, 카가노비치, 몰로토프의 보수파(소위 반당 그룹)에 일시적으로 가담하였다. 이들은 1957년 흐루쇼프의 실각을 노렸으나 실패했고, 보로실로프는 재빨리 편을 바꾸어 흐루쇼프를 지지하였다. 덕분에 일시적으로 권좌에서 물러나지는 않았으나, 노쇠한 데다가 겨울전쟁 이후 군사적으로 너무나 많은 문제를 저지른 탓에 당뿐만 아니라 군에서도 별로 지지 세력이 없었고, 그저 권력욕에 사로잡힌 노친네에 불과했다.

1957년에는 중국에 사절로 파견되어 마오쩌둥과 회담했다. 이때 베이징 동물원의 판다들을 보고 무척이나 신기해했고 그걸 본 마오쩌둥은 소련에 판다 한쌍을 보내주었다. 이것이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에 판다외교가 재개되는 계기가 되었으며,[17] 판다 관리가 체계화되기 전이라서 소련에 판다의 소유권을 넘겨주는 형태로 진행됐다. 그리고 판다에 대한 이해도 부족해서 숫놈 두쌍을 보내는 바람에 소련에서 암놈으로 바꿔달라고 요청해서 중국이 들어줬지만 바꿔준 판다도 숫놈이었다.(...)

3.7. 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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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예복을 입은 노년의 보로실로프.

보로실로프는 말년에 이르러 절대권력을 가지게 된 흐루쇼프의 공공연한 조롱거리로 전락했는데 하루는 흐루쇼프가 정치국 회의 석상에서 고참 볼셰비키들에게 스탈린 치하에서 저지른 일에 대해서 고백하라고 압박하던 도중, 보로실로프에게 "이봐 클림, 거짓말 집어쳐. 아직도 그런 짓거리를 하고 있나?"라고 공개적으로 모욕하였고, 보로실로프는 분노와 수치감으로 이마끝까지 새빨갛게 물들었으나, 흐루쇼프는 "당신은 이제 늙고 쇠약해졌어. 지금이라도 스스로의 눈으로 본 것에 대해 진실을 말할 용기와 양심을 가질 수는 없겠나?"라고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보로실로프는 흐루쇼프가 모두를 모욕하다고 불만을 드러냈으나 이미 권력과 영향력을 잃은 그가 흐루쇼프에게 저항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상무회 주석 재임 중 이란 대사에게 "우리가 니콜라이 2세를 몰아내봤는데 황제 없이도 살만하더라."라고 외교적 결례를 저지르는 뻘짓을 하기도 했다.

보로실로프는 1957년 반당그룹에 가담했으나 몰로토프, 카가노비치, 말렌코프 등이 퇴출된 것과 달리 잠시 더 지도부에 잔류할 수 있었다. 이는 보로실로프가 스탈린주의자들 중에선 제일 만만했고 흐루쇼프와의 개인적 관계 등이 고려된 결과였다. 하지만 정치가 안정화되자 그도 끝내 제거대상이 됐는데, 1960년 5월 4일 간부회 회의에서 흐루쇼프는 보로실로프가 은퇴해야 한다고 제의했고, 이것이 통과됨에 따라 5월 7일, 흐루쇼프가 뒤에 있는 소련 최고회의는 보로실로프에게 "은퇴 요구"를 하고 흐루쇼프가 영입한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를 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으로 선출했다. 1960년 7월 16일 보로실로프는 제발로 물러나는 형식으로 간부회에서도 소환되었으며, 1961년 10월 22차 소련 공산당대회에서 중앙위원 선거에서 탈락하면서 그의 정치적 퇴장은 완결되었다. 보로실로프가 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을 재임하던 마지막 나날의 어떤 식사 자리에서 모든 멤버들이 그를 외면하고 모른 체했다는 일화가 있다. 동료들의 외면에서 이미 그가 축출될 운명임을 깨닫고 미리 선수를 써서 "은퇴"를 결심했다는 것이다.

흐루쇼프의 몰락 이후,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는 보로실로프를 다시 정계에 복귀시켜 얼굴마담 노릇을 시켰다. 권위는 땅에 떨어져 있었으나, 그래도 혁명 원로였기 때문에 보수파였던 브레즈네프가 대우를 해 준 것이다. 1966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에 복귀하고, 소련군의 창설 50주년이 되던 1968년 두 번째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받았다. 그는 이듬해 1969년 사망해서 다른 원수들, 유명 정치인과 마찬가지로 크렘린 벽 묘지에 안장되었다.

4. 평가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0px-Marshal_of_the_USSR_1976_CPA_4552.jpg
보로실로프를 기념해 발행된 우표.

4.1. 무능한 야전지휘관

사령관이란 직책에 어울리지 않는 자였다. 지휘도 군사적 문제 이해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게오르기 주코프
겨울전쟁, 바르바로사 작전의 실책으로 워낙 큰 대패를 했기 때문에 세묜 부됸니와 함께 스탈린과의 친분으로 승진하여 소련군을 위기에 몰아넣은 원흉으로 꼽힌다. 이 점에 대해서는 후배 원수들도 동감하며, 주코프나 바실렙스키도 보로실로프의 일선 지휘는 형편없었다고 낮은 평가를 내렸다.

그래도 부됸니는 자신의 전공 분야인 기병에 관해서는 꽤나 큰 기여를 했고, 보로실로프는 적백내전 때 전차부대를 포함한 백군의 대규모 공세를 막아낸 공이 있기 때문에 아무 능력도 없이 자리에 오른건 아니다. 보로실로프 본인도 자신의 단점을 인정하긴 했다. 그리고 대숙청을 비난했던 일화처럼 스탈린을 진정시키고 그에게 일갈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인물이다.

보로실로프가 크게 활약한 러시아 내전은 기본적으로 세계대전과 같은 총력전과는 거리가 먼 전쟁이었으며, 여기서 군공을 쌓은 것은 그가 아주 무능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보로실로프는 혁명가-정치인 출신으로서 현대적인 군사교육을 전혀 받지 못한 군사적 무학자임을 감안하면 2차대전에서의 참혹한 결과는 예상되었던 바이다. 즉, 이는 보로실로프 개인의 문제도 있지만, 이런 사람에게 100만대군을 두번이나 맡긴 스탈린의 문제이기도 했다.

적백내전 이후 야전 지휘관으로서의 자질은 없었지만 개인 화기 사격 솜씨는 무척 뛰어났다고 한다. 어느 날, 소련군 장성들이 보로실로프 앞에서 나강 M1895 사격 시범을 보이고 있었는데 한 장군이 한 발도 맞추지 못하자 총에 이상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러자 보로실로프는 장성에게 권총을 받아들더니 그 자리에서 모든 탄환을 명중시키고는 그에게 "문제가 있는 것은 총이 아니라 동지의 사격 실력이오."라고 말했다. 이후 소련군 전군에 한동안 '보로실로프처럼 쏴라' 라는 운동 아닌 운동이 벌어져서 소련군의 개인 화기 숙련도가 약간 늘었다고 한다.[18]

레닌그라드 공방전에서 권총을 빼들고 독일군 전차를 막으라는 지휘를 한 것을 보면 용맹스럽긴 하지만 최고 지휘관이 할 짓은 아니다. 직접 총 빼들고 최전선에 나가서 지휘하는 건 소부대 전술 지휘자가 하는 일이다.

이런 것을 보면 혁명 이전 자금책으로 임명되어 은행 강도와 열차 강도, 각종 적색 테러로 잔뼈가 굵은 스탈린처럼 내전기에 다져진 개인 전투력과 소부대 전술 지휘 능력은 높았을 것이다. 이렇게 소대장-중대장 혹은 특수부대의 최소 단위 제대 팀장에나 어울릴 인물이 집단군사령관급 위치에 임명되었으니 문제였다.[19]

4.2. 군부와 정치권을 잇는 가교

야전군인으로서는 저렇게 소련군의 거대한 패배를 초래했다는 점에서 무능한 사람임에는 틀림없고, 스탈린의 대숙청을 도왔다는 점에서도 평가가 박할 수밖에 없지만 정치권과 군부를 잇는 가교역을 하면서 정부의 예산을 끌어와서 효율적으로 전력을 배분한 군사행정가로서는 상당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보로실로프의 동료원수들이 숙청된 이유는 사실 소련 체제 입장에서는 이유가 있었다. 어떤 지휘관이 유능하냐 무능하냐 이전에 따져야할 더 중요한 부분은 체제에 복종하느냐 안하느냐이다. 이런 면에서 프랑스 혁명군을 이끌다가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해 프랑스 혁명을 사실상 끝장낸 나폴레옹은 소련공산당에서 두고두고 반면교사가 되었다. 투하쳅스키는 귀족-제국군 장교 출신으로 처음부터 공산정권과 맞지 않는 사람이었고, 내전시기부터 작은 나폴레옹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듯이 그는 당에 대한 충성심에 의심을 받고 있는 인물이었다. 예고로프도 제국군 장교 출신에다가 당내분란을 일으킨 전력이 있으며 블류헤르는 극동에서 독립 군벌마냥 행세했다. 부됸니조차 기병 병과를 개인왕국-사병화하고 있었다. 이런 사람들은 스탈린의 권위가 흔들리면 언제든지 자기를 따르는 부대를 몰아 반란이나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었다. 보로실로프가 국방장관이 된 까닭이 바로 여기 있다. 보로실로프는 정통군인 출신은 아니지만 적백내전부터 군부에 몸담으며 군부와 혁명세력을 잇는 가교역할을 했고, 군부에 전반에 대한 장악력이 있었다. 일단 군대나 지휘관은 통수권자에 복종을 해야지 유무능의 여부는 그 다음 문제다. 당장 무력을 행사하는 집단이 통수권자에게 복종을 하지 않는다면 중요한 순간에 총구가 어디로 향할지 모르는 시한폭탄이 되니 말이다. 게다가 특히 일반적인 나라의 군대도 아니고 당시 소련이라는 근본적으로 군대, 경찰 같은 조직과 불편할수 밖에 없는 좌익 혁명가들이 설립한 공산주의란 특정 이데올로기를 강하게 지향하는 신생정권이란 특수한 상황에선 더더욱 그렇다.

당시 신생 공산 혁명정권이었다는 근본적인 체질 때문에 소련에서 보로실로프 같은 최고 지도자와 군부의 관계를 조율할 정치군인의 존재 자체는 불가피했다. 그나마 보로실로프 같이 정계에서 목소리를 내어 예산과 인력을 끌어 올 수 있는 군인이 있었고 1920-30년대 아직도 실험적인 국가였던 소련에서 그나마 군부와 정계를 연결하면서 혁명가들에게 선동되어 가담한 의용병 및 제국군 탈영병의 집합이었던 붉은군대가 기계화를 앞세운 기술군으로 탈바꿈할 수 있었다. 보로실로프가 국방장관을 맡고 있을 당시의 붉은 군대의 기계화율은 그후 야전에서의 삽질 때문에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1930년대말에 세계에서 선두권을 다투었다. 예를 들어 당시 서유럽에서도 전차전 이론이 개념에 머무르고 있을 때, 소련에서 여러 실험적인 전차가 개발된 것이 바로 그의 국방장관 재임시였고 개발 중이던 KV 전차의 개발이 중단 위기에 몰렸을 때 도움을 줘서 이후 T-34와 더불어 파죽지세로 몰려 오던 독일군 기갑 부대에 대적할 수 있는 강력한 장갑의 중전차가 나올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보로실로프가 붉은군대의 기계화를 반대했다는 오해가 있는데 투하쳅스키의 급진적 기계화는 반대했지만, 점진적인 기계화는 찬성했다. 국방장관을 맡았을 때, 후임 세묜 티모셴코와 마찬가지로 점진적 기계화를 주장했다.

최선임원수로서 보로실로프는 대숙청때 다른 동료원수들을 죽음으로 몰기는 했지만 공범자들로 몰려 처형될 위기에 있던 여러 유능한 군인들을 구하기도 했다. 숙청대상이었던 이반 코네프를 구하고, 주코프를 발탁해 키예프 군관구 사령관을 맡기고 일본과의 국경분쟁이 나자 바로 할힌골 전투의 지휘관으로 임명해 승전한 것은 모두 보로실로프의 공적인 것이다. 사실 이런 야전 지휘관이 아닌 정치군인으로서의 능력은 보로실로프가 당장 공포스런 절대권력자 앞에서 할 말은 하면서도 객관적으로 필요한 정책, 인사는 군말없이 지지했다는 점에서 업적이 없다고 할 수 없다.

이런 국면에서 자신의 야전지휘에서의 무능을 순순히 인정하고 주코프, 코네프 같은 유능한 인재에게 맡겼다는 면에서 소련군이 초반의 재앙과 삽질을 극복하고 숙련된 강군으로 거듭난 발전에 아예 기여한 바가 없다곤 할 수 없다. 그나마 자기 객관화는 되었다는 점에서 히틀러보단 확실히 나았다.

결과적으로 야전지휘관으로는 무능했고 2차대전 초반 참패의 원흉이며, 대숙청의 공범이기도 했지만, 국방장관으로 재직하면서 군인정치가로서나 군사행정가로는 나름대로 상당한 업적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스탈린이 격하되던 흐루쇼프 시기에도 그는 실권을 잃었지만 군부에서 상징적인 위치는 계속 가지고 있었고, 소련이 망할 때까지도 붉은 군대 창건자의 한명으로 기념되었다.

5. 기타

파일:external/ona.c.blog.so-net.ne.jp/Stalin2C20Voroshilov.jpg
파일:attachment/Joseph_Stalin_and_Kliment_Voroshilov,_1935.jpg
1935년, 두 명의 단란한 한때.

6. 주요 수훈 내역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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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최전방에서 단독으로 부대를 배치 · 지휘한 장군을 전선 사령관(Командующие войсками)으로 임명했다. }}}}}}}}}

파일:소련 국방부 휘장.svg 제2차 세계 대전 소련군 장성급 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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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서가 있는 인물만 종전 당시 계급으로 서술
※ 병과원수랑 병과상원수는 대장과 동급이나 의전서열상 대장과 원수 사이에 있었다
※ 포병·기갑·통신·공병·공군 장교는 상장→대장이 아닌 상장→병과원수로 진급
※ 윗 첨자 : 전사
1. 반공 및 지시불이행 혐의로 총살당했으나 전후 1957년 7월 31일 무죄로 판결나면서 복권
2. 1944년 4월 20일 대장에서 상장으로 강등, 전후 1953년 8월 3일 대장 계급 복권
3. 1942년 3월 17일 원수→소장으로 4계급 강등 및 1945년 7월 19일 중장→소장으로 강등
4. 1942년 7월 12일 독일군에게 생포당한 이후 나치 독일에 전향, 종전 후 체포되어 나치 부역 혐의로 사형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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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혼전성은 아가포노바(Агафонова).[2] 혼전명은 골다 다비도브나 고르브만[3] 제3대 혁명군사위원장 겸임.[4] 현재의 우크라이나드니프로. 1932년 드네프로페트롭스크(드니프로페트로우시크)로 개명되었고 2016년 우크라이나 정부가 전국 각지에 존재하는 러시아어식 명칭을 대거 청산하면서 드니프로로 개명되었다.[5] 소련 공산당의 전신 격인 정당.[6] 아랫쪽 가운데에 그려진 전차T-35이다.[7] 스탈린은 고향 조지아에선 시인이었지만 러시아어는 모국어가 아니라서 그런지 고교생 수준 밖에 안되었다.[8] 그는 자기가 통제할 수 없는 사람, 이를테면 부하가 아닌 외국인들 앞에선 절제를 잘했다. 대소련 봉쇄정책으로 유명한 조지 케넌은 자기 후임자인 찰스 볼렌이 스탈린이 부하를 노려보던 순간을 목격하지 않았다면 자신도 다른 사람들처럼 그를 예의바르고 합리적인 사람이라고만 생각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회상했다.CNN 인터뷰번역문[9] 이는 20차 당대회에서 스탈린 격하 운동이 벌어지기 시작한 이후에 동참한 주코프가 22차 당대회에서 폭로한 기밀문서에서 나온 것이다.[10] 스탈린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 수술은 프룬제를 암살하기 위한 음모로 시행되었다고 주장했다.[11] 세 사람 모두 무능한 사람은 아니었다. 이들은 나름대로 러시아 내전에서 엄청난 활약을 한 사람들이었다. 이때 원수들은 사실 다 그럴 만한 공적이나 이유가 있어서 원수가 된 것이었다. 그러나 기동전의 선구자 중 한명이었던 예고로프와 달리 블류헤르의 경우 러시아 내전에서 신화적인 기병 지휘관이었던 부됸니와 마찬가지로 현대전 수행 능력은 투하쳅스키 수준에 미치지 못했다. 바실리 블류헤르는 하산 호 전투 당시 그가 지휘했던 소련군의 피해가 일본군보다 많았던 것이 스탈린의 노여움을 샀고 극동군을 사유화한 것도 미움받아 처형되었다.[12] 군인들은 정치를 잘 모르기 때문에 군사적 효율성만 가지고 정부에 비현실적인 요구를 하는 일이 잦다. 최근에 있었던 일로는 2003년 이라크 전쟁에서 에릭 신세키 미 육군 참모총장이 50만 병력을 요구했는데, 럼스펠드가 "비현실적이다"라고 씹은 것을 가지고(결국 임기보장된 에릭 신세키를 이런 하찮은 명목으로 해임할 수는 없어서 후임자를 일찍 지명하는 것으로 그를 거세해버린다) 럼스펠드가 멍청했다는 이야기가 회자되지만, 이라크 침공 당시 10만 정도였던 육군 병력을 50만으로 늘리는 것은 순환하는 병력을 포함해 100만 이상으로 병력을 늘려야 하는 것이다. 이는 미국의 재정으로도 감당이 안되는 일이다. 군사적으로만 보면 신세키의 말은 백번 옳았지만, 정부가 이런 식으로 예산을 쓸 수는 없는 일이다. 굳이 지적을 하자면 그럴 예산이 없는 정부가 전쟁을 시작한게 잘못이긴 하다. 2차 대전 당시 미 육군의 최대 규모가 800만이었으니 육상병력의 중요성이 당시보다는 많이 낮아진 현대전을 따져보면 거의 준 총력전 체제로 돌입하자는 얘기인 것이다.[13] 사실 이는 2차 대전의 적수였던 독일 국방군이 훨씬 심각했다. 전투에서는 이기지만, 전쟁에서는 패하기로 이름난 독일 답게, 전투에 뛰어난 용장들이 즐비한 집단이었지만 전술, 작전술에 뛰어났을 뿐, 전략에는 아주 무지했다. 독일 일반참모 교육과정을 이수한 미 육군 주재무관 콩거 대령은 전략과 전쟁사 관한 내용은 아주 미흡하다고 평가할 정도.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이 이런 대전략의 천재인 조지 C. 마셜을 전선으로 보내고 싶지 않았던 건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14] 보로실로프 문서에 있듯이 보로실로프처럼 사격실력을 높이자는 운동을 얘기하는 것으로 보인다.[15] 당연하지만 현장 최고 지휘관인 사령관이 직접 전투에 뛰어들어야 하는 상황은 좋은 상황이 아니다.[16]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무려 4회나 수여받은 게오르기 주코프는 4회 중 2회의 수여 시기가 각각 1939년 8월, 1944년 7월로 한창 활동하던 시기였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주코프와 보로실로프의 엄청난 차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영웅 칭호를 3번 받은 세묜 부됸니도 2차대전에서는 무능으로 해임당했고 3번 다 스탈린 사후 수여받은 것이다.[17] 중화민국 시절에도 서방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미국 측에 판다를 보내주기도 했다.[18] 사실 여부가 의심되는 일화인데 공산주의 국가에는 이런 식의 억지춘향 캠페인이 매우 흔하다. 당장 북한만 봐도 김일성이 무슨 훈시, 지도를 했다 혹은 김정은이 어릴 적부터 권총 사격에 능했다는 식의 프로파간다는 지금도 널렸다. 다만 당시 공산당원들은 스탈린처럼 은행강도, 테러 활동 등을 거쳐 전투력이 높은 자들이 꽤 있었기에 보로실로프도 그런 과정에서 사격 실력이 숙달되어 정말로 뛰어났을 수는 있다. 레닌그라드 공방전 당시 직접 권총 빼들고 최전선에서 설쳤는데도 살아남은 걸 보면 신체능력이 좋은 건 사실일지도...[19]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대규모 정규전을 상정한 냉전 시절 미국에서는 특수부대를 오래 거친 장교들은 일반 부대 출신보다 지휘 계통에서 요직으로 빠지는 경우가 드물었다. 전쟁 양상이 달라진 테러와의 전쟁 이후에나 간간히 나오는 편이다.[20] 비슷하게 인물의 이니셜을 딴 소련 전차로는 IS 시리즈가 있다. 이쪽은 스탈린의 이니셜.[21] 조제프 코틴이 보로실로프의 사위라 후원을 받았다는 낭설이 있는데 아래 서술되어있다시피 보로실로프 부부에게는 아이가 없었고 코틴도 그의 사위가 아니다.[22] 조지아계 고참 볼셰비키 중 하나로 스탈린과 친했으나 대숙청으로 사망.[23] 강철(steel)이 스탈린(stalin)과 비슷한 점을 이용해 스탈린에게도 찬사를 보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