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텔레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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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계식 TV
셀레늄의 광전효과, 즉 빛을 받으면 전기가 흐르는 효과를 아일랜드 전신기사 조지프 메이가 발견하면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이후 이 원리를 이용하여 빛을 셀리늄판에 투과시켜 전자신호로 바꾸고, 역으로 과정을 거쳐서 빛을 발산하여 화면을 보이게 하는 기술을 알렉산더 베인이 개발하였다. 다만 기계식으로만 동작했기 때문에 단일사진만 보낼 수 있었다.
이후 독일 전기기술자 파울 고틀리프 닙코라는 사람이 닙코 디스크라는 것을 개발하였는데, 디스크에 24개 구멍을 나선형으로 뚫고, 각 부분을 영화처럼 전기 신호를 한 프레임씩 보내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좀 더 쉽게 말하면, 영화필름을 세로로 24조각으로 나눈 후 각 조각마다 순서대로 빛을 보내는 식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영국 사업가 존 로지 베어드가 텔레바이저(televisor)라는 이름으로 상용화하였고[1], 러시아에서는 여전히 이 표현을 사용하여 'телеви́зор(찔리비자르)'라 부르며, 독일어로는 저 '텔레바이저'를 번역차용하여 '페른제엔(Fernsehen, 멀리 있는 것(fern)+보다(sehen))'이라고 부른다.[2]
1929년 BBC에서 최초로 기계식 TV방송이 시작되었다.
2. 전자식 흑백 TV
독일의 카를 페르디난트 브라운이 1897년에 전자를 쏘아서 형광 물질을 때리게끔 하여 형상을 나타내게 하는 브라운관을 발명한다. 1926년, 일본의 다카야나기 겐지로가 브라운관을 이용한 텔레비전을 만들었지만 화면 표시만 전자식이고 찰상 과정은 여전히 기계식이었다.2015년 샤프전자 및 인도 업체들을 마지막으로 브라운관 TV 생산은 중단되었다. #
아날로그 TV 방송 중단으로 인해 못 쓰게 된 브라운관(아날로그) TV는 KODI와 라즈베리 파이 조합을 이용해 스마트 TV로 개조되거나 레트로 게임용 디스플레이로 재활용되고 있다. 일본에서는 흑백 TV를 패미컴용 디스플레이로 재활용하고 있다.
3. 컬러 TV
컬러로 방송한다는 생각은 19세기부터 존재했었지만 본격 컬러방송을 시도한 것은 1950년 4월 미국 CBS에서 '필드 연속 컬러 시스템(Field-sequential color system)'이란 방식을 선보인 것이 최초이다.이 방식은 브라운관과 유리막 사이로 3원색이 칠해진 원판을 모터로 돌려서[3] 컬러신호를 주고받는 방식으로 당연히 전용 촬상관이 있는 카메라로 제작된 프로그램이어야 한다. 아무 프로그램이나 저 색원판을 돌린다고 컬러화면이 되는 게 아니란 소리. 그래서 구조가 복잡하고 소음이 당시로서도 심했으며[4] 실용성이 떨어졌기 때문에 자연히 수상기가 필요 이상으로 비싸져 상업적으로 실패한 데다 하필이면 1950년 6월 25일 한반도에서 전쟁이 터져버리는 바람에 얼마 못가서 사장되었다. 전시상황으로 주파수 자원을 통제하기에 보편적인 라디오와 흑백 정도만 남긴 것으로 보인다.
이후 1954년 1월 1일 우리가 아는 NTSC 방식이 등장하면서 디지털 TV가 생겨나기 이전까지 오랫동안 북미권과 한국, 일본의 방송 시스템으로 군림했었다. 그리고 1960년 9월 10일 NTSC 방식을 받아들인 일본이 컬러방송을 시작한다. 1974년 네덜란드 필립스가 예열없는 '퀵스타트(순간수상방식) 브라운관'을 개발해냈다.
NTSC가 본래 원본과의 색상 왜곡에다가 나라별로 조명이 다르듯 커스텀도 있고 채도와 색상 등이 다르고 노이즈가 타는데 CBS의 방식처럼 대역을 뺏기고도 기존 전파자원뿐이라 음성신호를 컬러신호에 눌러담는 식이어서이다. 고급영상단자가 아니라 단순 RCA만으로도 안테나 수신과 다른 것도 그 때문.[5]
역시나 NTSC 음성신호는 FM과 동일한 규격이고 일부 대역은 국가나 수신기에 따라 라디오에서 TV 방송이 그대로 청취도 가능하다. 이것도 자원을 아끼며 호환성을 챙긴 것으로 보인다. 물론 아날로그 TV는 6번과 7번사이(국내기준이라 살짝 판이하지만)가 보호대역삼아 그 틈에 들어간 것이라서 FM대역이 연속성은 살짝 멀지만 동일한 라디오 방송규격이고 수신기기가 살짝 걸려야만 들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3.1. 외국의 상황
196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세계적으로 컬러 방송을 송출하는 나라는 한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적었다. 실제로 1965년까지 정규적인 컬러 TV 방송을 송출하는 나라는[6] 미국(1954년 1월 1일[7], 이하 날짜는 정규 컬러 방송 시작 날짜), 일본(1960년 9월 10일), 멕시코(1963년 2월 8일)[8] 단 3개국에 불과했고,[9] 1966년에 필리핀(1966년 6월 12일), 캐나다(1966년 7월 1일) 2개국이 추가되어 겨우 5개국으로 늘긴 했어도 이 역시 극히 적은 건 마찬가지였다.세계적으로 컬러 TV 보급의 분수령이 된 해는 1967년인데, 유럽의 주요 강대국들인 영국(7월 1일), 서독(8월 25일[10]), 프랑스(10월 1일), 소련(11월 7일[11])이 PAL과 SECAM 등의 방식으로 컬러 방송을 개시하였고, 같은 해에 홍콩, 레바논,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태국, 우크라이나[12]도 컬러 방송을 시작하며[13] 전세계 컬러TV 수요가 급속히 늘기 시작했다.
다만 이 나라들은 처음부터 올컬러로 방송을 개시했던 것이 아니었으며, 미국과 일본은 물론이고 서유럽권도 전체가 컬러화된 건 1970년대 초중반부터이다. 일례로 프랑스는 제1텔레비전이 1974년 TF1로 분리 독립한 뒤에도 1976년 1월까지 흑백으로 방송했다.[14] 반면 동유럽은 널리 보급되는 데에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흑백 TV에 비해서 몇 배나 비쌌던 데다가 1970년대 후반 경기침체로 인해서 보급이 더뎌졌기 때문이다.
또한 북유럽은 1970년대 말까지도 뉴스는 흑백으로 내보냈으며, 교육방송은 어린이들이 컬러 영상을 보면 모방심리를 가질 수 있다고 우려해서인지 1980년대 초까지도 흑백으로 방송하는 비중이 높았다.
3.1.1. 미국
미국은 여러 시범 방송을 거친 끝에 1951년 6월 25일 오후 4시 35분(동부 표준시 기준)에 CBS가 뉴욕에서 전세계 최초로 상업적 컬러방송을 시작하고[15] 9월 28일부터 자체적으로 제작한 컬러 TV 수상기 판매도 시작했으나 상업적으로도 참패하고[16] 6.25 전쟁의 여파로 동년 10월 20일에 국가 제작 당국(NPA)의 요청으로 컬러 방송을 중단하면서 말이 상업적 컬러방송이지 사실상 시험방송이 되고 말았다.[17] 이후 1953년에 RCA의 시스템으로 시범 방송을 거친 끝에[18] 1954년 1월 1일에 NBC가 캘리포니아 패서디나 지역에서 열리는 신년행사 로즈 퍼레이드 토머넌트를 미국 전역에 중계 방송하며 다시 컬러 방송을 재개하긴 했다. 1956년에 만들어진 컬러 TV에 관한 단편 다큐멘터리현존하는 최초의 컬러 TV 녹화 영상. 15:26 부분에서 흑백에서 컬러로 바뀐다.[19] |
초기 컬러 방송은 1947년에 도입된 흑백 키네스코프 방식으로만 보존될 수 있었고,[20] 이 때문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컬러 TV 영상은 1958년 5월 22일에 앰펙스가 개발한 컬러 비디오레코더를 이용해 NBC가 녹화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이 워싱턴 DC의 WRC-TV NBC 스튜디오를 방문해 신기술(컬러 방송)의 장점을 치하하는 연설을 한 것이다. 물론 NBC는 1956년 9월부터 라이브 컬러 방송의 일부를 보존하기 위해 컬러 필름을 썼다고 하니 미공개 컬러 방송 필름이 현존하고 있을 가능성도 높다.
그러나 컬러TV 자체의 가격이 상당했고,[21] 무엇보다 흑백프로그램보다 컬러프로그램의 제작비가 몇배 이상 비쌌다는 이유로 컬러 프로그램이 적었고, 컬러 송출이 안되는 지역도 많았기 때문에 컬러TV의 보급은 지지부진하기만 했다. 실제로 1954년에 생산된 컬러 TV 수는 겨우 8,500대였고, 1958년에는 35만 대의 컬러 TV가 미국에 있었다고 전해지며, 1960년 초에는 이 수치가 50만 대로 증가했다. 참고로 이는 쉽게 말해 1950년대 후반까지도 미국의 컬러 TV 보급률은 1000명당 2~3대, 그러니까 가구당 보급률도 1% 미만에 그쳤다는 뜻이다.
사실 컬러TV 가격대 자체는 당대의 미국인들이 감당못할 수준까지는 아니었지만, 컬러방송이 시작되었어도 대부분의 TV프로그램이 흑백으로 송출되는것은 여전했기 때문에[22][23] 비싸고 사봤자 컬러 방송도 별로 안 나오는, 한마디로 가성비가 극악인(?) 컬러TV를 살바에 그냥 값싼 흑백TV로 만족했던 것이었다.[24]
이러한 상황이 반전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부터이다. 1960년대부터 주요 방송사에서 컬러프로그램의 수를 크게 늘렸고, 이 시기 즈음해서 컬러 텔레비전의 생산량이 크게 늘고 가격도 합리적인 수준으로까지 떨어지고 나서야[25] 컬러 텔레비전의 대중화가 시작되었다.
미국에서는 1964년을 기점으로 컬러 TV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기 시작해 '컬러 댐이 터졌다'라고 표현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1964년에 미국의 컬러 TV 보급률은 3.1% 정도에 그쳤다. 이후 1966년에 미국에서 처음으로 컬러 TV 판매량이 흑백 TV 판매량을 넘겼고, 그럼에도 미국에서 컬러 TV 수가 흑백 TV 수를 넘기고 미국 가정의 과반수가 컬러 TV를 보유하게 된 것은 1972년의 일이었고,[26][27] 몇몇 지방의 방송국과 교육 방송국들은 1970년대에도 흑백으로 송출하기도 했다. 물론 주요 방송국인 NBC는 이미 1966년 초에 거의 100% 컬러화를 달성했으며,[28] 비슷한 시기에 NBC와 CBS도 거의 절반을 컬러화하고는 1967년까지 전면 컬러화를 달성했다.
미국의 초기 컬러 TV 보급에 관한 자료
3.1.2. 일본
1959년 후지 테레비에서 테스트 컬러 방송을 한 후 1960년[29] 9월 10일에 컬러 방송을 시작한 일본도 초기에는 컬러 방송이 미국과 비슷하게 시범적인 수준에 머물렀는데, 대부분의 프로그램과 광고들은 여전히 흑백으로 방송했고 컬러로 제작된 프로그램을 1~2편 정도 따로 편성하는 식이었다.[30] 그래서 당시 컬러 프로그램들을 보면 밑에 '컬러방송'이란 식으로 자막이 뜨거나 본방송이 시작되기 전에 "컬러로 방송됩니다"라는 안내방송과 컬러 방송임을 나타내는 기호가 떴고,[31][32] 편성표에는 컬러 방송 프로그램 앞에 '컬러'라고 적기도 했다.[33]옛 일본을 배경으로 한 매체를 보면 1960년대 중반까지는 일본에서도 아무나 쉽게 살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단 걸 알 수 있다. 1960년대 초반에는 컬러 TV 1대가 샐러리맨의 1~2년치 봉급을 넘는 수준인 데다가[34][35] 기껏 사와도 컬러 프로그램이 많지 않아서 그다지 큰 메리트를 가지지 못해 부잣집에서나 가졌던 물건이었다. 1960년대 중반 도쿄 올림픽의 영향으로 컬러 TV의 생산, 판매 대수가 좀 늘어나긴 했지만 대부분의 가정집에서는 꿈도 못 꾸고 흑백TV로 만족해야 했으며, 컬러 TV는 밖에 나갈 일이 있을 때에나 조금 볼 수 있었던 물건이었다. 번화가나 기차역, 백화점에서 컬러 TV 홍보 목적으로 설치하는 일은 있었지만 상술한 것처럼 가격이 줄었다고 해도 거의 신입사원의 1년치 봉급과 맞먹는 수준이었기에 사는 사람은 극소수였다.[36][37][38]
1965년 기준으로도 일본의 컬러 TV 수는 겨우 5만 대에 불과했으며[39], 1966년 기준으로도 일본의 컬러 TV 보급률은 겨우 0.3%에 불과했고[40], 1968년까지도 일본의 컬러 TV 보급률은 한 자릿수에 불과했다.[41] 그나마 1968년을 기점으로 NHK가 컬러 방송 비중을 대폭 늘리고 이 영향으로 일본의 다양한 전자제품 회사가 컬러 TV를 생산하면서 컬러 TV 보급이 급증해 1969년에는 컬러 TV 보급률이 13.9%로 처음으로 두 자릿수 대를 기록하게 되었다. #
이렇게 사실상 없다시피했던 보급률과 매우 적었던 컬러 방송 빈도에 당시의 방송자료 보존 의식 미비로 인한 재활용 관행까지 겹치며 일본에서 1960년대 초중반에 방송한 컬러 방송자료는 남아있는 것이 그리 많지는 않지만,[42] 우려와는 달리 당대 일본의 컬러 방송자료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NHK 아카이브에는 당시 방영되던 컬러 방송 필름들이 상당수 보존되어 있는데, NHK 아카이브 목록을 보면 도쿄 올림픽 이전까지는 어린이용 인형극과 다큐멘터리 위주로 컬러 방송을 송출하다가 도쿄 올림픽 전후로 컬러 프로그램 범위가 확장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다가 일본의 경제가 성장하면서 일반 가정집 소득이 컬러 TV를 살 수 있을 정도가 되어[43] 1970 오사카 엑스포부터 컬러 TV 보급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1971년에 후쿠시마 중앙 TV(FCT)가 전면 컬러 방송으로 전환하면서 일본의 방송은 사실상 100% 컬러화되었고, 1973년에 컬러 TV 보급률이 흑백 TV 보급률을 추월했으며, 1977년 10월에 NHK 교육 텔레비전이 완전히 컬러화되며 일본의 방송은 완전히 100% 컬러화되었다.
3.1.3. 북한
북한은 컬러 방송 자체는 남한보다 6년 앞선 1974년 7월 1일에 시작했으나[44],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급은 남한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늦었기에 북한에서는 2000년대 초반까지도 컬러 TV가 비싼 물품이었다.[45]1984년 기준으로도 북한의 TV 수는 15만 대(가구대비 보급률 4.4%)였는데 이들 중 컬러 TV는 고작 5만 대였는데[46], 사실 이는 1988년 기준으로도 북한의 흑백 TV 가격이 당 고위간부의 2~3개월치 월급 수준일 정도로 비쌌기 때문이다. #
이후 1980년대 중후반에는 TV의 보급이 시작되었지만, 컬러TV는 여전히 값비싼 물건 취급받아서 컬러 TV는 평양시에서도 귀했던 것은 물론 중소도시에서는 한 도시마다 10가구 미만만이 가지고 있을 정도로 귀했다.[47] 참고로 비슷한 시기 기준으로 북한에서는 전술한 것처럼 평양 등 대도시에서는 TV 보급이 어느 정도는 되었으나 지방에서는 보급이 미진했다고 하고, 북한은 이전까지는 흑백 TV[48]만 생산하다가 1992년 3월(기사에는 4월로 오기되어 있다)에야 평양의 대동강텔레비전수상기공장에서 조총련과의 합작으로 컬러 TV를 생산할 수 있었다. #
게다가 당시에도 북한에서는 TV가 귀했기에 일반적인 북한 주민들은 공공기관이나 10~15가구 단위의 '인민반' 반장집에 배치된 TV를 공동으로 시청했다고 하며, 라디오도 개별로 사는것은 가격대가 상당했기 때문에 일명 제3방송이라는 유선방송으로 듣는 경우가 많았다.[49] 비슷하게 1995년에도 평양에는 TV가 10가구당 4대, 지방은 10가구당 1대 있었는데, 평양이면 몰라도 지방은 대부분 흑백 TV였고 컬러는 10대 중 1대 꼴이었기에 1970년대 한국처럼 TV 수상기를 가진 집에 저녁마다 이웃 주민들이 TV를 가진 집에 밀어닥친 경우가 많았고, TV가 있는 집은 동네 사랑방 역할을 했다.[50] # 그나마 이 당시에 전국송출되는 채널이 조선중앙TV 딱 하나인데다가 방송종료시간도 밤 10시 반 정도라서 밤늦도록 TV보는 일이 없었고, 지방에서는 채널다툼을 할 일은 없었다고 하며, 이것이 TV대수가 적었음에도 TV채널 보는거가지고 다툼이 벌어지지 않았던 이유였다.
2002년에 탈북한 탈북자 출신 기자 주성하의 말에 따르면 2000년대 초에도 북한에서는 컬러 TV 한 대의 가격이 4인 가구가 1년은 먹고 살 수 있을 정도로 비쌌기에[51] 농촌에는 컬러 TV가 있는 집이 매우 드물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중국에에서 값싼 중고TV가 들어오고나서야 컬러TV가 보편화되었다고들 한다. 2009년 시점에는 4인 가구가 두 달은 먹고 사는 수준으로 싸졌으며, #[52] 90년대 말까지는 평양에서 집에 전화기와 컬러 TV가 같이 있는 집이 10% 미만이었으면 현재는 70~80% 선까지 올라갔다고 한다. #
북한은 2000년대 초반까지도 컬러 방송 시설 등에 대한 투자를 전혀 개선하지 않다가 2005년부터는 시설 투자를 이전보다 상대적으로 많이 늘렸고, 2012년 2월에 시범적으로 디지털 방송을 시작했으며, 2015년 2월 9일에 HD 방송을 시작했고, # 2017년 12월 4일에 모든 방송을 16:9 비율로 송출하기 시작했다. #
2023년 9월 5일 통일부가 발표한 '북한의 경제·사회, 정치 동향' 분석 자료에 따르면 2011년 이후 탈북민 3415명을 대상으로 한 심층 면접 결과 평양 주민의 컬러 TV 보유율은 84.7%로 집계됐으며, 평양 이외 지방 중 '접경지역'과 '비(非)접경지역'에서는 각각 67.2%와 63.6%라고 한다. # [53] 2000년대 이후 북한 내에서 컬러 TV가 보편화되었다는 것이 잘 드러나며, 시기가 시기인 만큼 현 시점에서 흑백 TV를 쓰는 사람은 북한 내에서도 없을 것이다.
2024년 기준 평양에서 액정 TV 한 대 가격이 최소 700달러라고 한다. 북한의 경제사정을 고려하면 어마어마한 거액. #
3.1.4. 컬러 TV 보급과 관련된 진기록
2번째로 컬러 방송을 시작한 나라는 의외로 쿠바로, 1958년 3월 19일에 아바나 등 일부 지역에서 컬러 TV 방송을 시작했다. 물론, 이 때는 시험방송에 가까웠던 형태였기에[54] 그로부터 약 1년도 되지 않아 일어난 쿠바 혁명 이후 NTSC 방식 컬러방송은 종료되었고, 1975년에 PAL 방식으로 컬러방송이 재개될 때까지 쿠바인들은 흑백으로 TV를 봐야 했다.[55][56]미국을 제외한 나라 중 가장 먼저 컬러 방송을 '접할 수'[57] 있던 나라는 캐나다와 바하마를 꼽을 수 있는데, 전자는 50년대 중반부터 미국에서의 전파를 받아 컬러 방송을 볼 수 있었고[58], 후자는 1954년부터 마이애미 지역에서 송출되는 컬러 방송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59]
유럽에서 가장 늦게 컬러 방송을 시작한 나라는 루마니아인데, 실제로 루마니아는 한국보다 3년 더 늦은 1983년 8월 23일이 돼서야 컬러 TV를 볼 수 있었다.[60] 이는 북한 저리가라 수준으로 폐쇄적이던 엔베르 호자의 알바니아(1981년)[61]보다도 2년 늦은 거였다. 그러나 당시 루마니아는 경제난을 겪고 있었기에 '전력 절약'을 명분으로 평일 TV 방송을 단 2시간[62]으로 제한했던 데다가 컬러 TV 가격이 자동차 가격의 절반에 육박할 정도로 비쌌다보니 1989년에도 루마니아의 방송은 전면 컬러화가 이루어지지 못했고[63], 컬러 TV는 민주화 혁명이 이루어지고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부부가 처형된 후인 1990년대에야 대중화되었다.[64]
아프리카에서 처음으로 컬러 방송을 시작한 나라는 1970년에 컬러 방송을 시작한 코트디부아르[65]이고, 가장 늦게 컬러 방송을 시작한 나라는 1985년에야 컬러 방송을 시작한 가나이다.[66][67]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늦게 컬러 방송을 시작한 나라는 한국과 같은 1980년에 컬러 방송을 시작한 우루과이이고, 북아메리카에서 가장 늦게 컬러 방송을 시작한 나라는 1984년에 컬러 방송을 시작한 벨리즈[68]이다.
세계에서 가장 늦게까지 흑백 방송만 송출한 나라는[69] 1986년 7월 19일에야 컬러 방송을 시작한 캄보디아(당시 캄푸치아)이다. 다만 캄보디아는 원래 1966년 2월 2일에 국영 방송국이 세워진 적이 있었지만, 1975년 4월 17일에 크메르 루주가 집권하자마자 방송국을 파괴하고 스태프들을 모두 처형했기 때문에 이후의 혼란상과 경제 파탄[70]까지 겹치며 국영 방송국이 1983년 12월 3일에야 재건되었던 것은 감안해야 한다. 8년 동안 방송 자체가 중단되었다보니 컬러는 커녕 흑백 방송을 할 수 있는 인프라도 없었기에 겨우 다시 송출한 방송도 흑백이었고, 이렇게 캄보디아에서는 1980년대 중반까지도 흑백 방송만 볼 수 있었다.
가나와 캄보디아를 제외하면 세계에서 가장 늦게까지 흑백 방송만 송출한 방송국 중 하나로는 피츠버그의 WQEX(현 WINP-TV)을 꼽을 수 있는데, 실제로 WQEX는 무려 1985년 3월까지도 흑백 방송을 송출했다. 이렇게 늦게까지 흑백 방송을 송출한 이유가 더 걸작인데, 사실 WQEX는 늦어도 1957년에 생산된 흑백 송신기를 1980년대까지도 별다른 교체 없이 거의 30년간 계속 써오다가 1985년 3월 10일에 그 송신기가 세월을 버티지 못하고 완전히 고장났고, 수리에 필요한 부품도 더 이상 구할 수 없었기에 더 이상 흑백 방송을 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후 WQEX는 1년 반 동안 쉰 후 1986년 10월 16일에 다시 문을 열며 컬러 방송을 시작했다.[71] 그리고 북한의 룡남산텔레비죤의 전신인 '개성텔레비죤'은 한술 더 떠 무려 1991년이었다. 10월 10일에야 컬러 방송을 시작했다.[72][73]
세계에서 가장 늦게 TV 방송을 송출하기 시작한 나라는 2009년 5월 20일에야 TV 방송을 시작한 사하라 아랍 민주 공화국[74][75]이다. 참고로 2000년 이후에 TV 방송을 시작한 나라는 서사하라를 제외하면 보츠와나, 통가(이하 2000년), 키리바시(2002년)[76], 코모로, 팔라우(이하 2006년), 리히텐슈타인(2008년) 6개국밖에 없다. 물론 TV 보급은 이보다는 먼저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자국의 TV 방송국이 없었기 때문에 위성안테나로 외국방송을 봐야했던 상황이었던 것이다.
3.2. 한국의 상황
국내 최초의 국산 TV인 VD-191 |
하지만, 1950년대 중후반에는 텔레비전을 서울과 수도권 등 일부지역만 시청할 수 있었던 데다, 전부 수입품 밖에 없었고 사치품으로 분류되어 관세도 높았기 때문에 일반인은 범접할 수 없었다. 그 때문에 부유층의 전유물으로 취급되어서 TV보급률은 대단히 낮을수밖에 없었다. 국산 TV 수상기 생산이 시작되어 상대 가격이 내려간 1960년대에도 일본산이 10만 원, 미국산이 130,000원, 위 금성TV가 70,000원[78] 정도로 1967년 기준 월평균 임금이 정확히 8,324원,[79] 쌀 한 가마니(80kg)의 값은 3,590원[80], 서울 집값이 평당 50,000~100,000원 정도라는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고가였다.[81] 더군다나 당시에는 전력보급률이 낮았기 때문에 기껏 TV를 얻는다해도 보지 못해서 애물단지가 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으며 1960년대에는 TV수신료가 월 100원(1963)~300원(1970년) 정도였는데, 당시 한달 급여를 감안하면 매우 비싼 금액이었다.
그래서 텔레비전은 전화기와 마찬가지로 동네에서 몇 집에만 있었고, 서민층들에게 말 그대로 그림의 떡같은 존재였다. 물론 비싸다보니 도둑맞기 쉬운 물품이었던 것도 당연지사였다. 하여튼 그렇기 때문에 한일전이나 인기 드라마 같은 대박 프로그램이 있는 날이면 온 동네 사람들이 동네 한두 군데 있는 텔레비전 있는 집으로 몰려들어서 방송을 보기도 했고, 당대 대다수 만화방이나 다방, 일부 구멍가게에서 거금을 들여 TV를 설치한 다음에 만화책을 단골로 보는 애들이나 푼돈을 낸 청소년, 커피를 단골로 마시는 고객들을 상대로 TV를 볼 수 있게 하는 식으로 영업했다고 하며 수입도 제법 짭짤했다고 한다. 물론 프로레슬링이나 권투 세계타이틀전, 한일전 같이 인기 스포츠 중계라도 있는 날은 가격이 몇 배로 올라가기 일쑤였기 때문에 원성도 자자했고, 간혹가다가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래서 당시 TV가 있으면 엄청나게 떵떵거릴수 있었다. TV 있는 집안 아이에게 각종 아부를 떨면서 TV를 보려고 애썼던 아이들이 많았고 어른도 TV를 보기 위해서 TV 있는 집 주인에게 성격이 어떻건 간에 아부떨기 바빴다는 후문이 전해져 내려온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만화방이나 다방, 구멍가게나 전파상 같은곳에서 돈내고 봐야했으니까. 그래서 195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TV가 있는 집들이 동네 사랑방 역할을 하였고, 시골 같은 곳에서는 1970년대 말까지 지속되었다. 이 풍경은 1970년대 들어 가정으로의 TV 보급과 '아동도서 정화대책'을 계기로 없어지는 듯하다가 1980년대 VTR 보급으로 인해 비디오 상영 목적으로 만화방에 재등장한 바 있었다.
1975년 발매 당시 첨단 기술이 들어간 삼성 이코노 TV[82] |
이후 1960년대 중반~1970년대 초반까지 서서히 보급된다. 당시 정부에서 뉴스 시사 전달 목적으로 TV 물품세를 면제해주고 일명 새마을 TV라고 불린 저가형 텔레비전을 싸게 공급하는 방식으로 TV 보급을 적극 지원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TBC의 전국 방송화가 진행되지 않아서 수도권과 PK지역만 방송되거나 DBS의 TV 방송 허가가 나지 않았던 것도 그와 연관이 있다. 1971년 이전까진 진공관/트랜지스터 방식이라 TV 한 번 켤 때마다 전자총이 예열되기까지 20~30초 정도를 기다려야 했는데, 이로 인해 전기세만 먹으며 수명도 줄어들기도 했다. 게다가 튜너 접점부분이 은으로 되어 있어 일정 횟수를 돌리면 닳고, 연탄가스(일산화 탄소)와 먼지에도 취약했다.
이를 해결코자 1972년 금성사가 먼저 진공관을 버리고 트랜지스터로 채워 수상시간을 1초로 단축시켰고, 1974년 IC와 트랜지스터를 결합한 'IC-TR 회로'와 함께 '소프트화면 브라운관'을 개발해내 종전의 자극적인 화면을 부드럽고 선명하게 바꾸어 시력을 보호하게끔 만들었다. 1975년 삼성전관은 예열 없는 퀵스타트(순간수상) 방식 '이코노 브라운관'을 국내 최초로 개발하여[83] 삼성전자가 만든 '이코노TV'에 적용시켰고, 금성은 튜너 접점부분을 순금 99.99%로 바꾸어 마모율을 줄인 '황금회로'를 개발했다.
1976년 대한전선은 스네이크 현상[84], 스팟 현상[85], 에미션 현상[86] 등을 배제해 '무결점'을 강조한 '디제로 TV'를 개발했고, 금성은 녹색 형광막을 검정 글래스로 감싸 시력을 보호하는 '블랙그린 브라운관'을 개발해냈다. 뒤이어 1977년에 금성은 브라운관 핀트적중률을 높여 화질을 선명하게 하는 'GG전자총'도 개발했다. 이렇듯 1970년대 TV 경쟁은 가히 기술 싸움이라 할 수 있었다.
디자인에서 변화가 일어났는데 이전과 달리 목재 대신 플라스틱을 사용하는 TV가 늘어났고 기존에 있던 자물쇠와 미닫이문도 점점 사라져 갔다.
한편, 컬러 TV 도입과 관련해서 우여곡절이 있는데 1974년 한국나쇼날전기(현 아남전자)가 처음 생산하기 시작하고, 1975년에 삼성전자가 토종 기업 중 최초로 생산했다. 같은 해 12월에는 한국교육개발원이 2개 UHF 채널을 이용해 충북 제천 봉양송신소에서 미국 웨스팅하우스의 기구 송신방식인 'T-COM' 기술로 교육용 컬러TV 시험 방송을 실시했는데, 최초로 시도한 곳은 안양서국민학교(현 안양서초등학교)였다. 그러나 T-COM 기술을 이용한 기구가 눈과 강풍 등으로 인한 한국 기후특성 탓에 유실되어 정규 편성은 무기한 연기되었고, 1977년 2월 해당 방식이 국내 기후 조건에 적합치 않다는 판단이 내려져 12월 27일 경제장관회의에서 송출방식을 지상으로 바꾸도록 결정되었다.[87](동아일보 기사)
다만 이러한 제품들은 정부 방침상 전량 수출했고, 민간 내수판매가 규제되었다. 1978년부터 상공부가 교통부 요청에 따라 1급 관광호텔에 한해 공급을 했다. 그래서인지 방송사들(그래봐야 KBS, MBC, TBC 뿐이었지만)도 이미 1960년대 말 즈음부터 컬러방송 실시 계획이 있었으며, 그 때문에 1970년대 초반 와서는 한국교육개발원의 예처럼 컬러방송 송출용 장비를 전부 도입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기계만 컬러이지 방송국에서 컬러 송출을 하지 않아서 흑백만 나오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러한 이유로 흑백이건 뭐건 삼색 셀로판지를 브라운관에 이어붙여 컬러처럼 보이려고 용을 썼다. 대신 1976년부터 AFKN은 컬러로 볼 수 있었다. 여담으로 AFKN이 컬러 방송을 시작한 이유가 흥미로운데, 한국 온 지 얼마 안 된 주한미군 장병들이 아직도 TV 화면이 흑백으로 나오는 후진국에 왔다며 문화 충격을 느껴서라고 하며, 한국에 관광을 온 외국인들도 AFKN을 많이 시청하는 터라 사유는 매한가지였다.
당시 부산시나 울산시 등 영남 해안가 지방에선 일본방송 전파가 잡혀서 이미 1960년대 초반부터 컬러로 나오고 있는 일본 TV 방송을 볼 수 있었다. 단, 양국 TV 채널이 겹쳤기 때문에 일부 채널만 볼 수 있었다.[88] 이 때문에 일부 부유층들은 컬러 화면을 즐기기 위해 해외여행 선물로 직접 들여오든지 주한미군 PX를 통해 밀수된 일제 컬러TV 수상기를 사거나(참고 기사), 일제 VCR(U-MATIC이나 베타맥스 등)을 같이 들여놓기도 했다.
1970년대에 준비가 된 상황에서도 컬러TV 수상기 시판을 확대하지 않은 이유는 바로 박정희와 신문사들의 반발 때문이었다. 수출과 관련된 기업들의 의견은 충분히 들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전기 부족 문제"와 "계층 간 위화감 조성"을 이유로 내수판매 자체를 하지 않은 정책 탓. 실제로 이 시기 농촌도 흑백 TV가 집집마다 보급된 터라 이때 컬러 TV를 보급하면 도농격차가 생길 지 모른다는 우려도 한몫했다.
당시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었던 프로스포츠는 프로복싱이었는데 대부분 국가에서 컬러방영을 할 시기라서 국제대회 같은 경우 당연히 양 선수가 파란 트렁크, 빨간 트렁크를 입고 경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걸 흑백TV로 중계하면 둘 다 같거나 비슷한 색으로 보여서 구별하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으므로 아나운서가 설명하느라 애를 먹었다고. 물론 한국 선수가 경기하는 경우는 흑백TV 사용자를 배려, 트렁크에 흰색 띠를 부착한다든가 하는 방법으로 흑백에서도 트렁크 색상이 구분되도록 했다. 특히 1975년 10월 8일 박정희는 한국전자박람회 개막식에서 가전업체 사장들 앞에서 "컬러 TV는 아직 시기가 이르다."고 못을 박았으며 신문사들 역시 광고를 컬러 TV에 빼앗긴다는 우려를 내세워 내수 판매 자체를 거세게 반발하였다.
실제로는 유신정권의 여느 정책들이 그렇듯 풍기문란과 '퇴폐문화'를 막기 위한 의도가 더 컸다는 주장도 있다. 당시 서구권과 일본에서 컬러 TV가 막 보급되던 당시는 히피와 사이키델릭 문화가 같이 유행하던 시대였고 실제로 이런 것들을 표현하는 데는 안성맞춤이었다.[89] 1960년대 당시 미국 내 민권운동도 이 컬러 TV의 대대적인 보급으로 인해 활발해졌다는 분석도 있을 정도였다.[90]
1977년 9월 김성진 당시 문공부장관은 컬러TV 방영을 앞당긴다는 일부 언론보도에 대해 '사실 무근'이라 하는 한편, 방송 실시에 대해선 "우리나라 경제가 많이 발전했긴 하나 국민소득은 아직 700불 선이며, 컬러방송은 국민소득 2,000불 이상이 되어야 가능할 것"이라고 밝혔다. 1978년 2월 김 장관은 비슷한 이유로 컬러방송 자체를 허용할 뜻이 없다고 재확인했고, 1979년 5월 22일에 관세청은 6월 1일부로 상공부 요청에 따라 외제 컬러 TV 및 VCR 반입까지 금지시켰다. 단, 해외 근무자가 이삿짐으로 옮겨올 경우 제외되었다. 8월 정부 측은 제2차 오일쇼크 상황을 이유로 컬러TV 방송/시판 불허 방침을 밝힌 후, 다음 해에 실시할 TV 교육방송도 흑백으로 한다고 밝혔다.
관제 뉴스영화 대한뉴스는 1973년부터 컬러 필름으로 상영되었다. 당시 방송 쪽은 전부 흑백으로 송출하고 있었는데, 제작은 이미 컬러방송 중인 외국에도 중계되는 국제적 이벤트에 국한되었다. 예를 들면 1974년 당시 국내 1천여 대 TV를 통해 미국 대통령 제럴드 포드의 김포국제공항 도착 광경과 한국을 떠나는 모습이 컬러로 방영된 바 있었다. 또 1975년 9월 8일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한-일 축구 정기전 중계방송 당시 KBS가 일본 NHK로부터 요청받아 컬러로 중계했는데, 당시 국내에 있던 컬러TV 수상기로도 방영된 바 있었다.
1977년 10월 29일 정동 문화체육관에서 생방송으로 중계된 MBC 10대가수 가요제. 제작 단계에서는 흑백과 컬러가 섞여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1979년 9월 3일 방영된 KBS의 방송의 날 특집인 방송 1979도 컬러로 제작되었다. # 참고로 KBS는 1978년경부터 컬러 방송 제작을 시작했다.[91][92] 물론 두 방송국 다 프로그램은 컬러로 제작했어도 송출은 흑백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1978년 3월 하순 미국 백악관 특별통상대표부가 한국 정부에 국내에서 팔지 않는 컬러TV를 남에게 수출한다는 것이 국제 상도의에 어긋난다며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당시 컬러TV 수출 물량은 1977년 12만 대, 1978년 50만 대였는데, 대다수가 미국 시장에 팔렸던 것이다. 미국 측의 시비는 1979년부터 노골화되어 미국 측은 한국산 컬러TV 수상기 수입물량을 연 30만 대로 규제해 버리면서 수출길이 가로막히기 시작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1980년 4월 8일 이한빈 경제부총리가 삼성전자 수원공장에 수출을 하지 못한 컬러TV들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는 걸 보고 화를 낸 나머지 대만 방문 후 삼보전자를 찾아가 15일 저녁 수행기자들과의 회견에서 귀국시 컬러 송출 전면화를 허락하는 쪽으로 정책전환을 시도한다고 선언하여 다음 날 국내 신문에 대서특필되었지만, 박정희의 컬러TV 불가론을 이어받은 최규하 대통령 고집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전두환의 국보위가 정권을 잡은 뒤부터 상황이 바뀌었다. 당시 삼성전자 사장 강진구(1927~2017)는 국보위 상공분과위원장 금진호로부터 전두환 상임위원장에게 컬러방송을 건의해보겠다는 언질을 받아내면서 "꼭 되게 해 주소. 지금 전자산업은 앞이 꽉 막혀 있소. 수출도 한계에 이르렀는데, 국내시장이 막혀 있으니 큰 야단났소. 국민여론을 조사해보면 찬성하는 사람이 더 많을 거요!"라고 하소연한 뒤, 국보위는 삼성전자와 금성사 양대 업체 의견을 일부 수용하여 8월 1일부터 컬러TV 시판이 허용된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컬러 TV에 대해 국민들의 여론이 좋지 않았기에 국내 컬러방송을 전제로 시판한 것은 아니었으며, 이는 어디까지나 미국과 유럽의 수출 규제로 턱턱 막힌 국내 가전업계 숨통을 트이기 위한 정부의 임시 조치였다.
11월 30일 문화공보부 장관 이광표의 발표에 따라 12월 1일 오전 10시 30분부터 KBS가 수출의 날 기념식 생방송을 시작으로 하루 3시간 동안의 컬러 텔레비전 시험방송이 시작되었다. 첫 방송 당시 정부의 큰 관심사는 전두환의 정장 색이었다. 이에 업계 전문가들과 비서진들이 협조한 결과 회색 바탕에 가는 청색 줄무늬 옷이 적합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또 행사 당일 상공부 공무원들은 가전 3사 대리점들을 대상으로 컬러방영 색상에 대한 반응 조사를 실시하기도 했다. 사실 한국의 TV 방송은 다른 아시아, 아프리카 개도국들과 비교해도 상당히 늦은 편이었다. 공산권 국가 중에서는 중국(1973년)이나 북한(1974년), 베트남(1978년)[93], 에티오피아(1979년)처럼 남한보다 더 빠른 나라가 있었고, 미얀마(당시 버마)는 한국의 컬러 TV 방송 시작으로부터 정확히 1개월 전에 컬러 방송을 시작했다. 다만 우루과이, 방글라데시는 한국과 같은 해에 컬러 방송을 시작했고, 튀르키예는 한국보다 1년 늦은 1981년에 컬러 방송을 시작했다.
첫 컬러 방송 시작 3주 뒤인 1980년 12월 22일에 컬러 방송 송출 비중이 100%로 전환되었지만, TV 수상기 문제가 일어난다. 당시 전국에 깔린 흑백 TV 수상기는 전국에 7백만 대나 있기에 하루 아침에 수상기 전체를 바꿀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흑백과 컬러 모두를 시청할 수 있는 시스템이 요구되었다. 게다가 조명료만 해도 흑백의 네 배나 되는 컬러방송에 쓰는 비용이 너무 들었기 때문에 자연광선을 많이 쓰는 뉴스와 스포츠 중계부터 컬러방송이 활성화되기 시작하였다. 애석하게도 이는 정권홍보에 TV를 적극 활용하는 전두환 정권의 책략으로 시행된 것이었다. 결국 컬러 텔레비전은 땡전뉴스를 더욱 효과적으로 방송하는 기계로 전락하고 말았다.
또 방송 개시 바로 전날은 언론통폐합이 시작된 일자로, TBC는 컬러 시험방송은 커녕 본방조차 못 해보고 신방겸영 금지로 폐국되었다. 그래도 TBC에서 제작된 쇼쇼쇼 700회 특집이라던가 몇몇 드라마와 같은 일부 프로그램은 컬러로 제작된 것이 존재하는데, 공연 프로그램은 컬러로 제작된 것이 존재하며 고별방송 프로그램도 컬러로 제작되긴 했었다. 다만 대부분 사람들이 흑백으로 봐서 그렇지.
이듬해인 1981년 초에는 광고도 전면 컬러화되었다. 또 TV 컬러화로 인해 사람들 사이에서 그동안의 '바보상자'나 '판도라의 상자'외에 유해색소까지 첨가된 격이라는 말까지 나왔으며, 안부인사로 "컬러 TV를 구입했느냐"는 말까지 나온 데다가 심지어는 컬러TV 때문에 극장이 망할 거라는 말까지 나왔다고 한다. 물론 극장은 망하지 않았지만 당시 침체기를 겪던 영화산업이 또 타격을 입었다. 1981년 당시 영화관 관람객 수는 전년도 5,300만 명에서 4,400만 명으로 줄었고, 전국 영화관 수는 전년도 447개에서 423개로 줄어 영화제작 편수 역시 87편으로 나와 저조하였다.
이에 영화계는 컬러TV에 대항해 영화의 대형화란 대안을 모색하여 당대 1억 원 단위로만 제작되었던 통례를 깨고 평균 3~4억 원에서 최고 10억 원까지 투입된 작품들이 제작되었으며, 배우들 역시 컬러TV와 동시녹음 시대에 대비하기 위해 연기훈련을 기획했고, 영화진흥공사 역시 조감독 20명을 선발해 영화 이론과 기법을 교육시켰다.[94] 이런저런 반응에도 불구하고 컬러TV는 방영 1년 뒤인 1981년에 37억 9,100만 달러를 기록해 전년도 대비 33%를 올려 수출길을 터 주었으며, 당시 주류이던 볼록화면 형식 브라운관 컬러 텔레비전은 1980년대 이후 전성기를 누리게 되고, 1980년대 중후반 당시 연령대가 대략 만 5~6세 이상이셨던 분들이라면 대부분 텔레비전으로 1986 서울 아시안 게임이나 1988 서울 올림픽 경기 중계 방송을 시청했던 기억도 있을 것이다. 물론 당시 방영했던 각종 TV 프로나 광고들도 해당한다. 이후로 텔레비전은 크기는 더 커지면서 성능 및 기능은 더욱 향상되어 나왔다.
3.2.1. 1980년대 중반 ~ 1990년대
▲ 1990년대 당시 판매된 브라운관 텔레비전. |
1985년 10월 1일 수도권을 시작으로 음성다중방송[95]이 시작되었다.
1980년대 초반 고급형 기종을 시작으로 # 채널을 이동할 때 버튼 및 리모컨으로 바뀌었으며 1980년대 중반 이후 다이얼 방식은 RF단자와 컴포넌트가 없어 유선방송과 VCR 녹화 게임 콘솔 연결 등이 불가능한 문제로 인해 자취를 감추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컴포지트 단자가 기본으로 탑재되었으며 싸구려가 아닌 이상 S-Video 및 컴포넌트 단자가 다 있었다.
크고 무겁고 발열도 많은 CRT가 주류였는데 1980년대 중반 이후 25인치/볼록화면, 1990년대 이후 32인치/평면화면이 대세였다. 1987년 대우전자가 국내 최초로 PiP 기능 TV(TCX-2181FW)를 상품화하고 1992년 금성사가 국내 최초로 일반 평면사각(FST) 브라운관보다 2.5배 평면화된 '수퍼플랫 브라운관'을 탑재한 '슈퍼미라클 블랙(CNR-2999S)'를 시판했다. 1993년 삼성전관과 삼성전자가 세계 최초로 원적외선 원리를 브라운관에 적용시킨 '바이오TV(CT-2971B/2571B)'를 개발했으며, 1994년 '금성 와이드 비전'을 시초로 16:9 비율인 와이드 TV도 판매되기 시작했다.
한편 1992년 한국갤럽의 실태조사에 따르면 전체 가구의 TV 보유율은 99.2%이며 보유 가구 중 29.3%가 2대 이상의 TV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컬러 TV 보유율은 94.9%, 14인치 이하 44.0%, 15~19인치 31.0%, 20인치 이상 24.9%, 리모컨 방식 50.3%, 로터리 방식 49.7%로 나타났다.
또한 기존 CRT로는 38인치 이상이 될 경우 브라운관 무게 때문에 더 이상 대형으로 제작을 할 수 없었으므로 기기 아래쪽에서 상을 비스듬히 쏴올리면 거울을 통해 반사되어 화면에 비춰지는 방식인 '프로젝션 TV'가 고가의 대형 화면 제품 포지션을 맡았다. 1980년대 초반에도 있었지만 199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초고가라 보급이 잘 되지 않다가 1998~1999년부터 점차 보급되었다.
16:9 모델과 4:3 모델이 동시에 팔렸다. 프로젝터와 유사한 방식으로 동작되어서 DLP, 3색관 방식 등이 사용되었다.
프로젝션 TV는 CRT에 비해 두께는 같고 대신 아래에서 쏴올릴 공간이 확보되어야 하기에 높이가 약간 높다. 크기도 크기지만 제법 보급됐던 DLP 방식은 램프 수명 문제가 심각했다. 램프 수명이 다해 밝기가 떨어질수록 화면도 어두워지기에 보통 2년에 1번씩 교체해줘야 하는데 램프값으로 10만이 기본으로 깨지는 환상적인 유지비용을 보여줬다. 정 중앙에 앉아서 보지 않는 이상은 화면이 거무튀튀하게 보이는 게 심했다.
프로젝션 TV는 대한민국에서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사이에 학교 멀티미디어화의 일환으로 전국 각 학교 교실에 보급되었다. 그 TV가 워낙 크기에 학생들 탈의실 역할을 하기도 했다. 노후화로 현재는 옥상 거치형 LCD TV로 거의 교체되었다.
1990년대 후반부터는 PDP/LCD TV도 개발되기 시작했으며 프로젝션 TV보다 고가의 대형 제품 포지션을 맡았다.
한편 CRT 수상기가 주력이던 시절 일부 회사는 다양한 스피커를 내장한 수상기를 만들어 판매 했다. 저음을 보강해줄 서브우퍼가 가장 많았으며 상단에 5.1채널의 센터 스피커 같은 스피커를 달기도 했고 기본 스피커도 고급화해서 출시했다. 물론 아무리 고급화를 해도 결국은 TV 스피커였기 때문에 음질이 획기적으로 좋아지지는 않았다. 그래서 TV 소리를 RCA 단자로 출력 가능한 모델이라면 RCA 케이블로 별도의 하이파이 오디오 시스템에 연결하는게 더 좋은 소리를 들을수 있었다.
1998년, LG가 평면 CRT를 개발했다.
3.2.2. 2000년대 초중반
2004년~2010년 세계 TV 시장 비중[96] |
2003년 들어서 가전제품 매장에서 판매하는 볼록화면 CRT TV는 5대도 채 안 됐으며, 그마저도 인기가 없어 방치되고 있는 실정이었다.[97]
프로젝션 TV는 2000년 정점을 찍고 2001년부터 PDP, CCFL LCD 패널 보급과 함께 금방 사장되어버린 과도기 제품이 되었다. 국내기업의 경우 삼성전자와 LG전자가 2006년에 CRT 프로젝션 TV의 생산과 판매를 중단했고#, 일본기업으로는 소니가 2008년에 프로젝션 TV의 생산과 판매를 중단했다. # 대략 2007년 정도만 해도 크고 저렴하다는 점 때문인지 학교에서 많이 쓰였지만, 지나치게 짧은 램프 수명 문제와 시야각 문제로 2000년대 말부터는 전부 LCD, PDP, 빔프로젝터로 교체되는 추세였다. 다른 종류의 대형 TV가 많이 싸진 마당에 유지비가 지나치게 비싼 프로젝션 TV를 굳이 수리하지 않고 내다 버리게 된 것이다. 게다가 프로젝터는 작아서 설치하기도 쉽다. 이런 사정을 모르고 가끔 무료나눔 같은 걸로 프로젝션 TV가 나오면 얼씨구나 업어가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그러나 시장이 LCD로 바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2008년 2월까지는 LCD TV의 BLU(back light unit)로 CCFL(Cold Cathode Flourscent Lamp)이나 EEFL(External Electrode Flourscent Lanm)에 LCD 패널은 TN을 많이 사용했는데, 문제는 이런 조합의 LCD TV는 반응 속도와 가격 문제, PDP보다 가격 대비 작은 화면, TN 패널 특유의 저급한 시야각, 짧은 CCFL 백라이트 수명[98] , 잦은 고장 때문에 보급이 더뎠다. 특히 2006년 소비자보호원[99]에 접수된 디지털 TV 불만 상담건수가 1년전인 2005년에 비해 두 배 가까이 급증해 정점에 달했는데, 짧은 무상수리 보증기간에다 고장까지 자주 일어나니 몇 백만원을 주고 LCD TV를 구매한 소비자들의 속만 타들어가게 만들었다. 당시 브라운관 TV는 무상수리 보증기간이 4년이었지만, LCD와 PDP는 보증기간이 1년에 불과하였다. 이러한 짧은 보증기간 때문에 TV를 몇 년 쓰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업체들이 거액의 수리비를 요구하는 경우가 빈번하였다. 때문에 LCD TV를 구매했다가 이러한 낭패들을 직면하고 구매 이전 사용하던 브라운관 TV를 다시 사용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래도, CCFL을 썼더라도 LCD TV는 당시 시판하던 다른 종류의 TV보다는 전력소모를 덜 먹었고, TV라는 제품의 특성상 (가정주부 등이) 하루종일 백색소음 용도로 켜 놓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알게 모르게 제법 팔려나갔다. 2006년 3분기 들어서 금액 기준에서 LCD TV 시장규모(490억 달러)가 CRT TV 시장규모(265억 달러)를 크게 앞질렀으며, 이듬해인 2007년 4분기는 LCD 출하량이 브라운관 출하량을 사상 처음으로 뛰어넘었다. 시장조사기관 디스플레이서치에 따르면, 2007년 4분기 LCD TV 출하량이 2,850만대로 전체 TV 중 47%의 점유율을 보인 반면 CRT TV는 46%의 점유율을 기록하면서 사상 처음으로 추월하였다고 보도했다. # 2007년 12월 20일 삼성SDI 브라운관 공장 최후의 2개 생산 라인인 8,9 라인의 가동을 모두 중단, 폐쇄하면서 삼성의 브라운관 TV 사업은 이 날로 끝이 났다. #[100]
이 시기에는 PDP가 대형 TV 시장 주류로 자리잡았다. 비록 전기를 많이 먹는 단점은 있었지만, 당시 CCFL LCD보다 저렴하고, 색감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이 시기부터 많은 TV 제품들이 DVI/HDMI 입력과 DTV 디코딩으로 HD 해상도를 지원하기 시작했고, 2006년 LG 엑스캔버스처럼 특정 장면을 돌려보는 '타임머신 기능'이 탑재되는가 하면 2007년 삼성전자가 세계 최초로 특수 안경으로 보는 3D DLP TV를 만들었다.
디지털 TV 보급률이 더디기도 했다. 2006년 기준으로 지상파 디지털 방송이 도입된 지는 5년이란 시간이 흐른 뒤였고, 무엇보다 당시 지상파 디지털 방송은 전국 90% 지역에서 송출 중에 놓여있었다. 하지만, 여러 문제들로 인해 디지털TV가 잘 보급되지 않아 2006년 2월 말 디지털 TV 보급률은 전 가구의 18%에 불과하였다. 지상파 디지털 전환 지지부진 아날로그 TV에 비해 고가라는 점이 주요 원인이었다. 당시 아날로그 CRT TV는 30만원 대였으며, 디지털 CRT TV는 70만원이 넘었다. 거기다가 대부분 수백만원을 호가하는 대형으로 가는 추세였다. 또한 디지털 TV를 구입해도 2001년 이전에 지어진 아파트는 공시청 시설이 노후화 되어 디지털 방송 수신이 잘 안되는 것도 전환이 더딘 이유 중 하나였다. 당시로썬 모든 방송들이 디지털 방송으로 변하는 6~7년 후에 디지털 TV를 구매하는게 적합하다는 의견이 우세했다. #
결국 2006년 9월 14일, 방송위원회와 정보통신부 산하 '디지털방송활성화위원회'가 출범하였다. 당일 1차 회의를 거쳐#, 동년 12월 28일 방송위원회에서 개최된 디지털방송활성화위원회의가 이견 끝에 무산되면서 이듬해로 넘어가게 되었다. 무산된 사유는 지상파 방송사업자와 문화관광부, 산업자원부 등 일부 유관부처가 자신들에게 유리한 조항을 명시할 것을 요구하고 나선 까닭이었다. #
3.2.3. 2000년대 후반 ~ 2010년대
LCD의 패널의 종류가 바뀌기 시작했는데, TN 패널보다 색감과 시야각과 명암비가 훨씬 좋은 VA 패널과 IPS 패널이 보급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7년 말부터 VA 패널 + LED 백라이트 유닛을 사용한 LCD TV가 등장하기 시작했다.[101] LED 백라이트 LCD TV는 기존 CCFL 백라이트 TV와는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밝았고, 전력 소모도 적고, 광원의 크기도 작으니 더 얇게 만들 수 있고, 무엇보다 광원의 수명이 금강불괴 수준이였다. 때문에 등장하자마자 얼마 안되어 순식간에 CCFL LCD TV를 구형으로 만들어 도태시키고 시장을 독식하게 된다. 2010년대 초반부터는 더욱 색감이 선명한 IPS 패널도 보급되기 시작되었다.여기에 LCD 패널 자체의 가격하락까지 가세하면서 싸고 선명하고 고장 안나는 LED 백라이트 LCD TV는 2020년대인 지금까지도 TV 시장의 절대적인 주류로 자리잡고 있다.
반면 2000년대를 호가했던 PDP TV는 하락세를 맞았다. 아무리 개선을 해도 LED 백라이트 LCD보다 전력을 많이 먹었고, 밝기에서 많이 뒤쳐졌으며, 무엇보다 이 시절부터 1080p 해상도가 대중화되던 시기였는데 PDP 자체가 고해상도를 구현하기가 매우 어려웠기 때문이다. 50인치 미만 제품은 1080p 제품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을 정도. 결국 인기가 시들해지고 삼성과 LG는 2014년에 PDP TV 패널 생산을 종료했다.
LCD TV의 가격이 저렴해졌기 때문에 극소수의 남아있던 CRT TV도 시장에서 사라졌다. 삼성은 2007년, LG는 2010년 국내에서 볼록/평면 브라운관 생산을 전면 중단하였다.[102]
2012년 하반기 WOLED 방식 OLED TV와 OLED와 LED 백라이트 기반 4K UHD TV, 2013년 커브드(곡면) TV, 2015년 양자점을 백라이트로 이용한 SUHD[103] LCD TV와 HDR을 지원하는 TV가 등장했다. 하지만 초기형 OLED TV는 그야말로 시제품 수준이였고 가격도 많이 비싼것은 물론, 내구성, 특히 번인 문제가 심각해서 인기는 별로 없었다.
입력단자가 HDMI로 통일되기 시작하더니 2010년 S-Video를 시작으로 중반부터는 D-Sub와 D-Sub/DVI 음성 출력 단자가 제외되었으며, 후반부터는 컴포지트와 컴포넌트 단자마저도 점차 빠지고 있다.
인터넷을 연결해서 스마트폰과 비슷하게 쓸 수 있는 스마트 TV가 등장했다.
2010년 극초반에 3D 영상을 시청할 수 있는 3D TV가 보급되었으나, 안경이 따로 있어야 했고, 컨텐츠도 별로 없었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장기 시청시 멀미를 유발한다는 치명적인 문제점이 있어서 막상 사놓고도 3D 기능은 안쓰기 부지기수였다. 결국 이 기능은 시간이 지나며 나오는 신제품일수록 하나 둘 자취를 감추더니, 4K(UHD) 해상도의 TV가 출시되면서 사람들의 관심이 UHD로 몰리면서 잊혀졌다.
HD 비율의 TV가 대중화되어 방송, 영상컨텐츠도 죄다 16:9 비율 위주로 제작, 보급되면서 이전의 4:3 비율의 TV가 가정집에서 조금씩 퇴출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2012년 12월 31일 오전 4시부터 서울과 경기도권 지역을 마지막으로 1956년 이후 56년간 지속되던 전국 지상파 아날로그 방송이 전면 종료되면서 이때까지도 현역으로 작동되던 CRT 아날로그 TV들이 대거 폐기되었다. 물론 기존 아날로그 TV 이용자들에게는 정부에서 무상 임대 방식으로 디지털 → 아날로그 변환 셋탑박스를 제공해 주는 선택지를 제공해 주기는 했다.[104] 하지만, 방송 자체가 16:9 전용으로만 제작하게 되어 아날로그 TV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4:3 비율의 TV에서는 화면이 잘린다던가, 아니면 억지로 우겨넣어서 표시되는 정보가 심하게 홀쭉해진다던가 등의 심각한 문제가 있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내다버렸다. 결국 시간이 지나며 이렇게까지 연명하던 극소수의 아날로그 TV는 점차 16:9 비율의 저가형, 혹은 중고 LCD TV로 대체되며 사라졌다.
다만 디지털 수신기 보급이 미비한 북한 주민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정부는 전방 지역 아날로그 송출을 유지하기로 했다. 기사 1, 기사 2 전파라는 특성상 파주, 동두천, 연천, 포천 등 최전방 지역은 수신이 가능했다. 가령 송신소가 근처에 있는 동두천시, 연천군이라든가. 단, 북한과 중국의 아날로그 TV 방식은 PAL이라서 한국용 NTSC TV는 수신 불가능하다.[105] 북한을 향해 송신되는 KBS1 아날로그 전파는 PAL 방식 10번으로 통일이 될 때까지 송출될 것으로 전해졌다. 멀티 시스템 수상기[106] 또는 TV수신카드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한국에서 수신은 전혀 불가능하다. 북한지역에서는 따라서 PAL방식으로 계속해서 시청중일 것으로 추정된다. 접경지역과 평양 남부 일부지역에서는 약한 전파로도 멀리까지 신호 전달이 가능한 DTV 특성상 ATSC방식으로 DTV수신을 직접 하는 북한 주민들이 상당히 많다고. 북한 내부의 태블릿과 노트북 보급도 일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 화이트박스 태블릿 가운데 TV수신기능을 가진 모델들이 상당히 많은데, 그것들이 흘러들어간 듯하다.링크[107] 다만 평양 거주 상류계층을 제외하고 남한과의 접경 지역에서 PAL 방식으로 시청하는지는 아직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다. 보통 이런 통계들은 탈북자들의 증언에 의존하는데 알려져 있다시피 탈북자들이 많이 발생한 곳은 평안북도나 량강도, 함경북도 같은 북중 접경지대다.
KBS1의 PAL 송출 영향을 간접적으로 가늠해 볼 수 있는 방법이 한 가지 있는데, 바로 연변라지오TV방송국 등 중국 동북지역의 조선족 동포들을 대상으로 하는 조선어 채널들이 그것이다. 여기서 자체제작하는 프로그램들은 2010년대 들어 진행자의 말씨, 무대 디자인, 방송 연출 기법 등이 영락없는 KBS1의 레귤러 프로다. 다만 이는 한때 인기 있던 위성방송 수신기의 불법 수입도 영향이 있다.
2010년대 후반에 들면서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시간이 늘어나고 모니터에 텔레비전 기능이 추가된 제품이 출시되어 컴퓨터와 같이 쓰는 사람들 때문에 대형 TV의 수요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증강현실 장비를 착용할 경우 어디서나 가상으로 감상할 수 있기 때문에 증강현실 기술 발전 또한 TV의 도태에 한몫할 것이라는 전망이 있다. #홀로렌즈로 TV를 시청하는 모습 TV를 아예 보유하지 않는 가구도 1인 가구를 중심으로 급증하는 추세다.
극소수 잔존하던 프로젝션 TV는 2010년대를 못 넘기고 거의 전멸했는데 램프 수명이 남아나지 않기 때문이다. CRT TV보다 더욱 희귀하다.
3.2.4. 2020년대
LED 백라이트 LCD TV는 기술적 특성상 여전히 시장에서 잘 나가고 있고, 특히 중국 업체들이 대형 LCD 패널을 매우 저렴한 가격에 생산하면서 LCD TV의 가격도 하락하였다. 삼성전자는 LCD에 양자점 필름을 입혀 명암비와 색 재현률이 일반적인 컬러 필터를 사용하는 LCD에 비해 우수한 QD-LCD를 양산했다. 하지만 거의 비슷한 기술이면서 더 저렴한 LG 나노셀이 있으며, 삼성전자가 이를 QLED라 하며 마케팅하고 있는데 딱 봐도 OLED에 편승한 마케팅 용어임을 대번 짐작할 수 있다.대형 OLED 패널의 기술 수준이 개선되었다. 번인 수명이 조금 더 개선되었으며 가격도 이전보다는 저렴해졌으나, 아직 LCD의 위상을 뛰어넘지는 못했다. OLED는 암부 표현능력이 LCD인 QLED에 비해 크게 우수하고 얇으며 다양한 폼팩터를 구현하기에 좋다. LG에서 2020년 TV 자체가 돌돌 말려 들어가는 롤러블 TV가 출시되었다.
기존의 방송 수신장치로서의 기능은 도태되고 있다. 2010년대 후반부터는 컴퓨터에 물려쓰는 대형 모니터, 또는 화면만 큰 스마트 기기의 일종으로 변화가 진행되고 있다. 이를 테면 드라마 같은 경우 넷플릭스를 쓰는 용도로 바뀌고, 현재는 화면 잘나오는 TV에 스마트 셋톱박스를 연결한 뒤에 넷플릭스, 왓챠플레이 등을 구독하여 온라인 스트리밍으로 드라마, 영화, 유튜브 등을 본다. 아니면 아예 스마트 TV로 자체 앱을 깔든지 스마트폰과 연동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TV 프로그램 방송을 굳이 텔레비전이 아니더라도 컴퓨터나 스마트폰으로 볼 수도 있다. 즉, 우리가 흔히 알고 있던 '리모콘 딸깍거리며 채널을 돌리는 방식의' 기존 형태와는 달라지는 것이다.
선술했다시피 TV 방송은 그 기능 중 상당 부분을 유튜브 등에 빼앗겼고 1990년대~2010년대 초반에 비해 텔레비전 프로그램들 시청률이 떨어지는 실정이다. 요즘은 지상파 프로그램도 0~1% 대가 나오는 편이며, 10% 이상 받기도 힘들어진 상태다. 그나마 일부 잘 나가는 지상파나 종편, 케이블 프로그램 정도가 체면치레를 하고 있으나, 이러한 프로그램들은 거의 중장년층이나 중산층들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들인 관계[108]로 젊은 시청자들 사이에서는 'TV는 나이 든 사람들이나 고지식한 사람들을 위한 미디어'라는 인식이 강해지고 있다. # [109]
과거에 한국 전역을 휩쓸었던 예능, 개그 프로 등이 종영 및 컨셉트 변화 등으로 인해 추억이 되어버린 상황이다. 단, TV라는 물건 자체가 사라진다기 보다는, 기존 TV 프로그램들을 보는 방식이 바뀐다고 보면 된다. 즉, 유튜브 같은 데서 라이브를 보듯이 본방은 본방대로 보고 놓치면 다시보기로 보는 방식이다. 그래서 방송사들도 TV만 의존하지 않고 인터넷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110] TV는 TV 프로그램만이 아닌, 더 넓은 의미의 영상 컨텐츠들을 보는 기기로 바뀌어 가고 있으며, 대형 모니터나 프로젝터같은 포지션으로 변하고 있다는 의미다. 그렇다 하여도 가정에 TV를 두지 않는 경우 또한 늘어나고 있으며 모니터로의 사용처 변화 또한 'TV'라는 분류가 의미가 없어지고 흡수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 '텔레비전'의 범위는 아주 넓다. 유튜브, 인터넷 방송 등도 텔레비전의 정의에는 전부 포함된다. 지금 바로 이 순간 스마트폰, 컴퓨터, 태블릿 등 수많은 디스플레이들이 텔레비전의 역할을 하고 있다.
단순히 한 프로그램이 특정 시간대만 방영되고, 그것을 보기 위해 스케줄을 따로 맞춰 고정된 화면을 바라봐야 하는 기존 시스템은 자신이 원하는 프로그램을 언제 어디서든 시청할 수 있는 유튜브나 OTT 서비스를 위시로 한 스마트폰이나 PC에 비해 굉장히 불리하다.[111] 즉, 1980년대에 주류매체가 라디오에서 TV로 변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 재현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90년대 전화기와 지금 스마트폰이 모양, 기능이 같은 물건이 맞나 싶을 정도로 판이해졌듯이, TV도 같은 절차를 밟게 될 전망이다.[112]
한편 이렇게 TV가 일부 프로그램을 제외하면 사람들에게 외면받고 시대에서 도태되면서 일부 방송사들은 새로운 수요층으로 노년층과 중산층들을 찾게 되는데, TV 방송사들은 노년 시청자층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TV조선은 미스트롯 시리즈, KBS는 나훈아 콘서트를 방영하여 노년층들의 수요를 모으고 있는 한편, 예능 프로그램들도 중산층들의 돈벌이를 집중적으로 취재하는 방송들이 늘어나게 된다. 또한 각종 OTT 등에 구작과 신작을 판매하면서 사업 모델을 기존의 플랫폼 중심에서 콘텐츠 중심으로 앞다투어 전환하고 있다.#1 #2 #3 뉴스, 시사/교양 프로그램을 편성하는 주요 방송사의 경우 이들 장르의 프로그램의 편성 비중을 늘려서 다른 장르의 방송 편성을 줄이거나, 재방송 비율을 늘리고 있다.
2020년대 들어서는 TV 방송국의 시청률 파이가 줄어들었고, 장수 프로그램 정도만 명맥을 잇고 있으며 예전에 인기가 많았던 프로그램을 부활하는 경우도 늘기 시작했다. 신생 예능들은 2~3개월도 못 가고 종영되는 일이 빈번하며[113], 그나마 성공한 건 일부 드라마나 정신적 후속작, 신선한 포맷을 차용한 예능 정도고 대중매체 발달로 성공작을 딱히 찾기 힘든 실정이다. 또한 아침부터 저녁 6시까지는 방송사의 경영 악화로 교양이나 예능 프로그램 재방송으로 대체되는 경우가 많아졌고 드라마 시간대 역시 예능으로 대체되는 데다가 본방 프로그램도 줄어드는 실태다. 아울러 2021년 7월 1일부터 지상파도 중간광고가 가능해지면서 사실상 지상파, 케이블 구분이 없어진 상황이다.[114]
CCFL 백라이트를 쓰던 시절의 LCD TV가 수명 종료 등의 문제로, PDP TV는 전기를 너무 많이 먹는다는 이유로 가정집에서 퇴출되기 시작했다. 그나마 PDP는 우수한 색감 때문에 간혹 중고시장에 헐값에 팔리기도 하지만, CCFL LCD TV는 현행 LED 백라이트 LCD TV 대비 장점이 전혀 없어서 그냥 버려지고 있다. 시간이 지나며 LED 백라이트 LCD TV가 그저 필요없다는 이유로 중고시장에 나오기도 하는데, 고장이 나는 경우가 적어서 중고시장에서 인기가 좋다. 해외로 수출되기도 한다.
CRT TV는 이제 먼 과거의 유물이 되어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115] 2020년대에 CRT TV를 여전히 쓰는 경우는 NES~N64 시절 고전게임기에 꼽아 사용하는 정도 외에는 잘 없다. 오히려 서든어택 등 고전 PC게임에 쓰이는 CRT 모니터가 더 흔할 정도다.
[1] 최초로 상용화한 인물 타이틀을 달았지만, 막상 생전에는 크게 이득을 보지 못했다. 주력했던 기계식이 표준이 되지 못하자 방송사를 차리려고 전 재산을 털어놓았다가 화재로 인해 빈털터리로 전락했다. 게다가 세계 대공황과 제2차 세계 대전이 겹쳤을 때라서 널리 보급이 되지 못했던 시절이었고, 널리 보급되기도 전인 1946년에 세상을 떴다. 사실 전후 TV방송을 개시한 나라가 하나 둘 생겨났을 때였기 때문에 조금만 오래 살았어도 후학을 양성하는 등 최소한의 과실을 따 놓을 공상이 크지만, 오래살지 못해서 그 과실을 맛보지 못한 예이다.[2] 독일 제2공영 ZDF의 F가 이것이다. 즉, ZDF=Zweite(2nd) Deutsch(독일) Fernsehen(TV).[3] 여담이지만, DLP 방식의 프로젝터가 이 방식을 사용한다.[4] 리뷰한 영상이 존재하는데, 색원판이 돌아가는 소리가 상상 이상으로 거슬린다. 한밤중 고요한 방에서 보는데 색원판 모터 소리가 크게 난다고 생각해보자. TV 소리가 너무 커서 이웃집까지 들릴 정도가 된다.[5] 단자/비디오 항목처럼 크로마값이 S단자부터 다르거나 그보다 고급은 신호를 뭉개지 않고 나눈정도 차이가 나는데 S단자차럼 FM라디오와 동일한 음성대역을 간섭없이 준 것이 아니어도(컬러신호대역이 온전히 들어갔다.) RCA가 상대적으로 선명해진다는 것이다. 무선송출을 제외하고 보더라도 선명해진다.[6] 시험방송과 해외 전파를 접할 수 있던 경우는 제외. 해외 전파를 접할 수 있던 경우를 컬러 방송 시작으로 치면 한국도 1960년대 초부터 부산과 울산에 한해서 60년대 초부터 일본 컬러 방송 전파를 접해 컬러 방송을 볼 수 있었다.[7] 다만 1951년에 잠깐 시범적으로 컬러 방송을 실시한 적이 있었다.[8] 참고로 멕시코에서는 엔지니어 기예르모 곤살레스(Guillermo González, 1917~1965)가 개발한 독자적인 컬러 TV 방식을 썼는데, 이는 1964 도쿄 올림픽 중계와 나사의 보이저호도 쓸 정도로 평판이 좋았다.[9] 다만 후술할 것처럼 쿠바는 1958년부터 1959년까지 아바나 등의 지역에 한해 잠깐이나마 컬러 방송을 송출한 적이 있으며, 소련도 1960년 1월부터 몇개월간 모스크바 지역에 한해 시범적으로 컬러 방송을 송출한 적이 있고, 브라질은 1962~1963년에 상파울루 지역에 한해 시범적으로 컬러 방송을 송출하기도 했다. 물론 이때는 미국에서도 컬러 TV가 귀중품이던 판이었으니 이들 나라의 국민들이 컬러 방송을 컬러 TV로 볼 여유는 일부 부유층 정도를 제외하면 사실상 없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심지어 중국도 1960년 5월 컬러 TV 테스트 방송을 하고 1960년 10월부터 몇 달 간 공중파에서 컬러 시험 방송을 실시한 적이 있긴 하나 당시 중국 상태와 비교하면 터무니없는 목표였던지라 얼마 안 가 슬그머니 중단되었다.[10] 이 역사적인 컬러 방송 송출 버튼을 누른 사람이 바로 후에 서독 총리가 되는 빌리 브란트 부총리였다.[11] 정확히는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지역 한정.(다만 에스토니아 등은 컬러 방송을 시작하기 전에 소련의 컬러 방송 전파를 접할 수 있었다고 한다.) 첫 정식 컬러 방송은 10월 혁명 50주년 기념식 중계였다.[12] 당시에는 소련의 일부였으며, 소련의 연방 국가 중 러시아 지역을 제외하면 가장 먼저 컬러 방송을 시작한 곳이기도 하다. 참고로 소련의 연방 국가 중 가장 마지막으로 컬러 방송을 시작한 나라는 1984년에야 컬러 방송을 시작한 조지아와 우즈베키스탄이다.[13] 즉, 1967년 한 해에만 9~10개국 가량이 정규 컬러 방송을 시작한 것인데, 이는 1966년까지 컬러 방송을 송출한 적이 있는 나라 수를 합한 것보다도 많았다.[14] 당시 프랑스의 경우 흑백방송이 819주사선, 컬러방송이 615주사선으로 흑백이 화질이 좋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 거라고 한다. 이때는 어느 정도 텔레비전 기술이 발전되어가던 때였기 때문에 빠르게 대중화되었다.[15] 이 역사적 방송은 1시간 분량의 에드 설리번 쇼였다고 한다. 다만 송출 지역은 뉴욕을 제외하면 보스턴, 필라델피아, 볼티모어, 워싱턴 DC 정도밖에 없었고, 이 지역의 사람들은 강당, 백화점, 호텔 등의 공공장소에 설치된 컬러 TV로 컬러 방송을 봤다. 출처[16] 200대가 생산되었는데 정확히 100대가 팔렸다고 한다.[17] 이때 CBS는 실망한 고객들의 소송을 피하기 위해 시중에 있던 CBS 컬러 TV 수상기를 모두 환매했다고 한다.[18] 이 시스템은 기존 흑백 TV 세트와 호환되었다. 참고로 CBS의 컬러 TV는 기존의 흑백 TV와 호환이 전혀 되지 않아 컬러 방송 송출이 가능한 도시에서 흑백 TV를 보유한 사람들은 컬러 방송 시간 동안 빈 화면만 봐야 했다고 한다.[19]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당시 미국 대통령의 연설 전에 담화하며 컬러로의 전환 스위치를 누른 사람은 데이비드 사르노프(David Sarnoff, 1891~1971) 당시 NBC 사장으로, 1926년에 NBC를 설립하고 1919년부터 1970년까지 초대 RCA 사장을 역임하여 미국 방송업계의 선구자로 불린다.[20] 일례로 CBS와 로저스 앤 해머스타인이 제작하고 1957년 3월 31일 컬러로 생중계한 TV 뮤지컬 '신데렐라'는 1억 7200만 명의 미국인 중 1억 700만 명에 달하는 미국인이 시청할 정도의 대흥행을 기록했지만, 컬러 영상은 전해지지 않고 흑백 시네스코프만 전해지고 있다. 당연히 당시 본 사람들은 사실상 전부가 흑백으로 시청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21] 1954년 2월 28일 웨스팅하우스가 출시한 15인치 화면 컬러 TV '웨스팅하우스 H840CK15'의 가격은 1,295$였는데, 이는 당대 자동차 가격과 거의 비슷한 수준이었고, 2023년 환율로는 14,531$에 육박하여 오늘날 기준으로도 2022년형 삼성 Neo QLED 8K 85인치 TV(1,840만 원)과 사실상 동급의 엄청난 가격이지만, 당시 미국의 1인당 GDP는 2,412$, 평균 소득도 2,300$(남성만 따지면 3,200달러였다)에 불과(?)했기에 미국인들이 컬러 TV 하나를 사려면 반년치 급여를 써야했다. 참고로 전술한 TV는 총 500대가 생산되었는데도 1달 동안 단 30대만 팔렸기에 가격을 1,110$로 줄였는데도 이 수상기는 거의 팔리지도 않았고, 얼마 안 가 19인치, 21인치 화면의 보다 '크고' '값싼' 컬러 TV 수상기들이 나오면서 단 6개월만 생산되었다고 한다. 웨스팅하우스 H840CK15에 대한 분석 자료 1954년 3월 25일 출시되어 최초로 대량 생산된(약 5천 대) 컬러 TV RCA CT-100의 가격도 1,000$였고, 1954년 8월 495$로 반값 할인해도 당대 미국인들의 2개월치 봉급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22] 실제로 컬러 방송 극초기인 1954~1955년에 CBS가 송출한 컬러 프로그램은 다 합해야 정확히 19개에 불과했다고 한다. 쉽게 말해 한 달에 한 번 컬러 방송을 할까말까한 수준이었던 것. 반면 NBC에서는 1954년부터 황금시간대에 코미디 프로그램, TV 영화, 드라마를 컬러로 촬영해 튼 바가 있다.[23] 물론 이는 CBS가 당대에 컬러 방송에 딱히 메리트를 못 느껴서 그랬던 것으로 보인다. 1957년 CBS는 상술한 신데렐라 뮤지컬을 컬러로 생중계한 바가 있으며 같은 해 부터 1958년까지 '빅 레코드(The Big Record)'라는 음악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을 전편을 컬러로 제작하며 전편을 컬러로 제작한 최초의 TV쇼라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참고로 '빅 레코드'는 무대와 의류는 말할 것도 없고 컬러 방송에 필요한 조명과 전자 장치에 돈이 엄청 들었기에 제작비가 당대의 웬만한 영화보다 더 클 정도였다.[24] 현재 대부분의 사람들이 굳이 8K TV를 구입하지 않는 것과 같다.[25] 1960년대 중반에 컬러 TV 가격은 당시 미국인들의 1달치 봉급과 비슷한 수준인 300~400$ 정도로 떨어졌다.[26] 참고로 1964년(이하 1월 1일 기준)에 미국의 컬러 TV 수는 162만 대(1000명당 8.4대)였고, 1965년에는 286만 대(1000명당 15대)였으며, 1966년에는 522만 대(1000명당 27대)였고, 1967년에는 951만 대(1000명당 48대)였다. 그리고 1968년에는 1,413만 대(1000명당 70대, 약 25%)를 기록하여 1천만 대를 돌파했고, 1969년 4월 1일에는 2,056만 대(1000명당 101대)로 2천만 대를 돌파했다. 참고로 1970년 10월에는 2,620만 대(1000명당 128대)를 기록했으며, 1971년 7월에는 2,970만 대(1000명당 144대, 약 48%)에 이른다. 당시 출산율에 대입하면 가구당 컬러 TV 보급률이 5%/10%/50%를 넘긴 것은 각각 1965년/1966년/1970년인 셈이라고 볼 수 있다.[27] 다른 출처에 따르면 1968년에 미국의 컬러 TV 보급률은 24.2%였고, 1970년에는 39.3%였으나, 1972년에는 52.6%로 늘었으며, 1978년에는 78%에 달했다고 한다. #[28] NBC의 완전 컬러화는 1966년 11월 7일에 이루어졌다.[29] 당시 기준으로 도시에는 2.5가구당 1대의 흑백 TV가 있었고 시골에는 9가구당 1대의 흑백 TV가 있었다고 한다. #[30] 실제로 1965년 기준으로도 일본의 주간 컬러 방송 시간은 NHK, 니혼 TV, TBS, 후지 TV 합해 30시간이었다. 즉, 당시 일본은 한 방송사당 컬러 방송을 하루에 1시간씩만 했던 셈이다.[31] 미국에선 컬러방송 초기에 'In Color'라는 자막과 방송 전에 "컬러로 방송됩니다"라는 안내방송, 컬러 방송임을 나타내는 기호를 띄웠고,(1950년대 말~1960년대 초 NBC의 컬러 방송 ID 1968년 ABC의 뉴스 종료 후 컬러 방송 예고) 영국 BBC도 1969~1974년까지 ID/시보 영상마다 'BBC1 COLOUR' 식으로 자막을 띄웠다. 21세기 이후 워터마크로 뜨는 '(방송사명)HD 혹은 UHD'를 생각하면 된다.[32] 반면 일본에서 컬러 방송이 급속히 보급되어 상대적으로 흑백 프로그램 감소가 현저해진 1971년경부터는 예전과는 정반대로 흑백 방송 프로그램 방송 전에 흑백 방송임을 나타내는 기호가 떴다고 한다.[33] 예시 1968년 10월 1일 울트라 세븐 첫 방송 당시 편성표이다.[34] 일본 공무원 초봉이 월 1만 엔, 샐러리맨 평균 급여가 월 23000엔 미만이던 1962년 흑백TV(16인치 기준) 가격도 샐러리맨의 3개월치 월급에 육박하는 6만 엔이나 나갔는데, 비슷한 크기의 컬러 TV 가격은 그런 흑백 TV 가격의 6배에 가까운 37만 엔(약 1년 반치 월급)이었다. 당연히 크기가 클수록 더 비쌌다. 1962년 나쇼날의 가전제품 카달로그카달로그 2 물론 보너스까지 생각하면 샐러리맨의 1년치 봉급에 비해 터무니없이 높은 수준까지는 아니었을 것이다. 참고자료(1965년 이후 일본 샐러리맨의 연봉) 또 컬러 TV 방영 직후인 1961년 내셔널사가 출시한 21인치 컬러TV K21-10(일본에서 생산된 최초의 컬러 TV다) 가격은 52만 엔이었다. 샐러리맨 평균 월급이 2만 엔이던 시절이었으니 샐러리맨이 2년을 한 푼도 안 쓰고 모아도 살 수 없는 수준이었던 셈이다.[35] 덤으로 일본의 TV 방송 극초창기였던 1953년 일본의 흑백 TV 가격은 대졸 신입사원의 월급이 1만 엔 이던 시절에 20~25만 엔이었고, 이런 비싼 가격 때문에 일본에서 흑백 텔레비전 수상기를 가진 가구는 단 900가구에 불과했다. 때문에 사람들이 붐비는 역, 공원 같은 장소에 TV를 설치해 사람들이 몰려들었을 정도. 물론 1958년 아키히토 왕세자의 결혼으로 흑백 TV 보급률이 급증했고, 1964 도쿄 올림픽을 계기로 컬러 TV 보급도 늘어났기에 '거리 TV'는 자연스레 사라지게 되었다.[36] 당시 일본 서민들과 컬러 TV의 거리감을 오늘날 체감으로 매칭하면 PDP 초기 가격이나, 버블경제기 일본 전자 업체가 졸부도 안 사는 기기를 만든 것, 오늘날로 치면 LG전자 시그니처 롤러블 TV(LG 시그니처 TV R 모델)를 생각하면 되겠다.[37] 과거의 평균 노동 가치와 상대 임금 수준은 현재보다 대체로 낮았음을 감안. 물가차이를 보정해도 60년대 직장인이 연봉을 다 모아서 살 수 있는 물건과 현대의 직장인이 연봉을 다 모아서 살 수 있는 물건이 다른 점을 감안하면 된다. 다른 말로 하면 평균 구매력의 상승.[38] 당시 대졸 신입사원의 월 초봉은 2만 엔 수준이었고 16인치 컬러TV 가격은 20만 엔 정도였다. 그것도 1년 연봉에 준하는 비싼 가격인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39] 1966년 한국의 흑백 TV 수가 43,600대였다.[40] 참고로 동시기 일본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가난했던 대한민국의 흑백 TV 보급률이 약 0.8%였다는 것을 보면, 당시 일본에서 컬러 TV가 얼마나 귀중품이었는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거기다가 당시 한국의 흑백 TV 보급률은 1963년부터 거의 제자리 걸음 상태였던 것과 달리(1963년에는 0.7%였고 1964~1965년에는 0.6%였다고 한다) 일본의 컬러 TV 보급률은 올림픽 특수 덕에 이전보다 높아졌다는데도 이 모양이었다. 그러니 도쿄 올림픽 이전 일본의 컬러 TV 보급률은 과장 살짝 보태면 북한의 인터넷 보급률만도 못한 수준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41] 정확히는 1967년에는 1.6%, 1968년에는 5.4%에 달했다.[42] 대표적으로 최초로 컬러로 방송한 1964년 NKH 홍백가합전 영상은 전해지지 않는다.[43] 여기엔 불편한 진실도 좀 숨어있다. 당시 일본 가전업체들이 카르텔을 결성하고 국내에서는 컬러 TV를 비싸게 팔면서 미국 수출은 반값에 떨이로 판다는 사실이 폭로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44] 북한의 첫 컬러 방송은 조선중앙TV에서 방송한 1974 테헤란 아시안 게임 예선전 생중계였다고 한다. 이후 조선중앙TV의 풀컬러 방송은 1977년 9월 1일에 시작되었다. 물론 후술하듯 2000년대 초에도 북한에서 컬러 TV가 사치품이었다는것을 감안하면 북한의 컬러 방송 시작은 남한과의 경쟁에서 '우월성'을 가지고자 한 정치선전적 목적이 강했다. 사실 남한도 이미 1970년대 컬러TV 송출 시스템을 갖추고는 있었으나 북한과 달리 박정희 정부는 전력낭비와 사치풍조를 조장한다는 이유로 컬러TV 송출과 내수 판매를 제한했기 때문에 늦어진 것 뿐이다. 이미 남한에서도 1974년부터 컬러TV를 생산 및 수출하고 있었다.[45] 참고로 이때쯤이면 남한은 '컬러 TV'라는 표현도 소멸할 정도로 컬러 TV가 완전히 일상화된 것을 넘어 시범적으로나마 HD 방송도 시작한 마당이었다. 참고로 남한의 첫 HD 방송은 2001년 4월 6일에 SBS가 방송했다.[46] 이를 보면 1984년 기준으로 북한의 컬러 TV 보급률은 1.5% 미만이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는데, 물론 나머지는 전부 흑백이었다. # 사족으로 1970년에 남한의 가구대비 TV 보급률이 6.4%, TV 수는 약 38만 대였다.[47] 당시 북한을 방문한 해외교포들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평양의 가구대비 TV 보급률은 50%였으나 대부분은 흑백이었고 컬러 TV는 소수의 지배층만이 보유하고 있었으며, 인구가 4만 5천 명이던 풍산군에서는 단 8가구만이 컬러 TV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48] 그것도 품질이 조악하여 소련산 TV의 선호도가 높았다.[49] 물론 이런 상황에 북한은 김일성의 생일에 전국에서 선발된 모범노동자들에게 '김일성의 선물'이라며 보상으로 TV를 배정했는데, 정확히는 실제 TV가 아닌 TV 구입 권한을 배정한 것이라 대금을 내지 못하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게 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당시에도 흑백 TV는 노동자의 4개월치 월급, 컬러 TV는 노동자의 8개월치 월급으로 살 수 있을 정도로 매우 비쌌다. # 참고로 링크 속 기사에서는 1990년대 초까지의 북한의 방송 모습이 어땠는지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50] 참고로 당시 북한의 컬러 TV는 해외로 파견나간 사람들이 북한으로 가져온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며, 당대 북한 사람들에게는 일제 컬러 TV가 인기가 많았다.[51] 요즘 북한에서는 보급형 스마트폰 가격이 이 정도 포지션이다. 자세한 것은 휴대 전화/북한 항목 참조.[52] 사족으로 2010년 시점에서는 새 컬러 TV의 가격이 70~90달러 수준이라고 하여 당시 북한 중산층 소득까지 고려하면 2009년 언급한 것과 비슷한 수준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53] 지역별 컴퓨터, 백색가전, 휴대전화 보급률, 식량 배급 경험률도 그대로 나온다. 거의 모두가 평양의 절반 가량에 그치고 있는데, 그나마 컬러 TV와 선풍기는 편차가 작은 편이지만 PC 보급률은 평양과 지방이 3.5:1 수준이다.[54] 상술한 것처럼 미국도 컬러 TV 보급률이 1%를 밑돌던 시점이었다.[55] 다만 쿠바가 지속적으로 자본주의 체제에 있어서 컬러 방송의 명맥이 이어졌더라도 컬러 TV가 즉각 보편화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당시 한창 성장기도를 달리던 일본은 커녕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마저 컬러 TV가 1970년대 초반에야 완전히 대중화되었는데, 당대 쿠바는 1인당 GDP가 이탈리아와 비슷한 수준이었는데도(참고로 당시 이탈리아는 당대의 선진국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다) 빈민층이 국민의 1/3을 차지할 정도로 빈부격차가 매우 컸기에 컬러 TV 보급이 매우 어려웠다. 애초에 당시 미국도 가구당 컬러 TV 보급률이 1%를 밑돌았던 판에 미국보다 못 살고 빈부격차도 극심했던 쿠바에서 컬러 TV 대중화 자체가 불가능이었으니 자본주의 체제로 흘러갔어도 컬러 TV 대중화가 실제 역사보다 고작 몇년 정도 더 앞당겨졌을 수준이라는 것이 대다수의 평가다.[56] 쿠바와 같은 일은 1970년대 중반 베네수엘라에서도 재현된다. 베네수엘라에서는 1970년에 컬러방송이 시작되었지만 4년 뒤인 1974년에 갑자기 송출이 종료되는 일이 벌어졌다. 당시 오일쇼크의 영향으로 2000년대 중반과 더불어 역대 최고 호황을 누렸던 시절이었기에 왜인지 이해가 잘 안 되겠지만, 컬러 TV가 베네수엘라에서 생산되지 않아 전량 수입해야 하는 사치재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물론 당시 대통령인 카를로스 안드레스 페레스가 흑백 TV 업자들에게 뇌물을 받아 챙겨서라는 이유도 있다. 물론 베네수엘라에서는 1978년부터 몰래몰래 컬러 방송을 송출하다가 1979년 12월 1일에 컬러 TV 방송을 사실상 본격화했고, 베네수엘라 정부가 마지못해 컬러 TV 방송을 재승인한 1980년 6월 1일 시점에서는 이미 베네수엘라의 모든 TV 방송이 컬러로 방송되었다.[57] 당연히 컬러 방송 전파를 '접하는' 것과 나라에서 정규 컬러 방송을 시작하는 것은 다르다.[58] 물론 캐나다에서는 컬러 방송이 시작할 무렵인 1966년 기준으로도 컬러 TV 수상기 보급률이 1%도 되지 않았다.[59] 다만 바하마의 정규 컬러 TV 방송은 1977년에야 시작되었다.[60] 루마니아의 첫 컬러 프로그램은 국경일 열병식 실황 중계였다. 물론 시대가 시대다보니 어린이들을 동원한 매스게임을 하거나 당시 루마니아의 독재자였던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를 찬양하는 등 북한을 연상시키는 부분들이 눈에 띈다. (공교롭게도 차우셰스쿠가 가장 존경한 인물이 김일성이었다.)[61] 여담으로 1986년경 다른 국가(이탈리아나 유고슬라비아, 그리스 중 하나로 추정된다) 녹화된 알바니아의 TV 방송 자료가 유튜브에 여럿 올라와 있는데,(1986년 알바니아 TV 화면조정시간, 방송 개시, 뉴스) 컬러로 방송된 것과 달리 녹화는 죄다 흑백으로 되었다.(다만 영상의 2:46, 12:52, 13:28에서 스쳐가듯 컬러로 송출된 모습이 보인다.) 사실 이는 이웃 국가들의 컬러 방송이 SECAM 방식을 쓴 것과 달리 알바니아의 컬러 방송은 PAL 방식을 써서 호환이 되지 않아 흑백으로 전달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62] 오후 8시~오후 10시[63] 당시 루마니아 TV에서 흑백 방송이 차지하는 비중은 무려 20%나 되었다고 한다.[64] 다만 덴마크의 속령인 그린란드는 1984년에야 컬러 방송을 시작했으나, 이는 그린란드가 1982년에야 자체적인 TV 방송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감안해야 하며, 일부 오지 지역에서는 1987~1990년까지도 흑백 방송만 볼 수 있었다고 한다.[65] 당시 선진국이 되는 거 아니냐는 말까지 나왔을 정도로 엄청난 호황기였다.[66] 1985년 이후에 TV 방송을 시작한 나라들을 제외하면 가나보다 늦게 컬러 방송을 시작한 나라는 캄보디아 1개국밖에 없다.[67] 아이러니하게도 1970년 코트디부아르(266달러, 2024년 가치로 2155달러)랑 가나(250달러, 2024년 가치로 2025달러)의 1인당 GDP는 별 차이가 없었다.(...) 당시 한국의 1인당 GDP는 279달러(2024년 가치로 2260달러).[68] 참고로 벨리즈는 영국의 자치령이었다가 1981년에 독립한 나라이다.[69] '가장 늦게 컬러 방송 송출을 시작한 나라'는 아니다. 사실 1986년 이후에 TV 방송을 시작한 나라들이 적게나마 있긴 하지만, 애초에 1986년 시점에도 세계적으로 컬러 TV가 흑백 TV에 압승한 상황이라 이들은 모두 컬러로 방송을 시작했다.[70] 당시 캄보디아보다 가난하다고 할 수 있는 나라는 베트남(80년대의 혼란상에서 경제가 완전히 박살났다), 라오스, 소말리아, 네팔 4개국이 다였다.[71] 물론 대폭 수리를 한 WQEX는 피츠버그의 외곽에서 방송을 선명하게 시청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신호가 약했던 방송국에서 당대 최신의 시스템을 적용한 방송사로 재탄생했다.[72] 더 가관인 것은 이 채널은 대남방송 송출이 목적이었다고 한다. 이 덕분에 남한에서는 DMZ에서 (진작에 100% 컬러로 전환한) KBS1과 KBS2를 대북방송으로 송출하기도 했다.[73] 무엇 때문에 1990년대 초반까지 흑백 방송을 고수했는지는 전혀 알 수 없지만, 북한의 실태를 감안하면 남한이 '헐벗고 굶주리는 나라'라는 허위 선전 때문에 방송국 직원들이 '남조선은 아직도 흑백 방송을 할 정도로 가난한 나라다'라고 착각해서 흑백을 고수했을 가능성도 있다.[74] 미승인국이다.[75] 사실 국영방송인 RASD TV는 이미 2004년 2월에 설립되었으나 방송국 사무실이 있던 틴두프의 난민 수용소의 열악한 환경 탓에 시험 방송도 2008년에야 겨우 손댈 수 있었다.[76] 2004년에 시작되었다고 기록된 자료도 있다.[77] 진공관식을 뜻하는 영어 "Vacuum Desk Type"에서 앞글자 VD를, 19인치라는 의미에서 19를, 첫 텔레비전이라는 의미에서 1을 더해 만든 모델명이다.[78] 1967년 기준으로는 63,500원이었다. 참고자료 2023년 가치로는 220만 원이다.[79] 참고자료 2023년 가치로는 약 288,000원이다. 사족으로 이 통계는 한국 최초의 산업별 임금 실태 조사였다.[80] 참고자료 2023년 가치로는 약 124,400원이다. 이는 당시 일반적인 가정의 3개월치 식량 수준이었다.[81] 전술한 월평균 봉급과 비교하면 8개월치 봉급은 거뜬히 뛰어넘는다.[82] 기존 TV보다 전력소비량 30% 감소, 수명 2배, 선명도 10% 증가라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성능을 자랑하는 광고이다. 프리미엄급 TV에 속했다.[83] 상단의 광고에서 나오듯이 네덜란드 필립스, 일본 NEC에 이어 세 번째이다.[84] 화면이 갑자기 줄어들거나 일그러지는 현상이다.[85] 전원을 끌 때 브라운관 형광막이 타 들어가 점 모양 불빛이 3~4초간 뜨는 현상. 이럴 경우 수상기 수명이 줄어든다.[86] 화면이 쉽게 흐려지거나 얼룩지는 현상이다.[87] 출처: <현장기록, 방송노조 민주화 운동 20년> - 커뮤니케이션북스. 2008.[88] 당시의 TV채널에선 CATV대역이 없어 유선 95, 96, 97, 22, 33번에 해당하는 1, 2, 3, 4, 12번을 직접 수신할 수 없었고, 채널을 6, 7, 13번에 맞추고 미세조정 다이얼을 돌려서 해당 주파수를 맞춰야 했다.[89] 실제로 남아프리카 공화국 같은 다른 독재 국가들에도 이러한 이유로 악마의 산물이라면서 컬러 TV 보급을 막았다.[90] 이스라엘의 골다 메이어가 이와 같은 이유로 컬러 TV 보급을 막았다.[91] 당시 컬러로 시범 제작된 프로그램들은 KBS 아카이브 유튜브에 올라와 있다.[92] 현존하는 최초의 KBS 컬러 녹화분은 1978년 2월 7일 방영된 전설의 고향 '느티고개' 에피소드.[93] 다만 컬러 TV 시청은 1980년대 후반까지도 대도시권에 국한되어 있었고, 이 때문인지 전면 컬러화는 1987년에야 이루어졌다.[94] 이하 출처: <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 1권 - 강준만 저. 인물과사상사. 2003. p272~279.[95] Zweikanalton 방식. A2 스테레오 방식으로도 불린다.[96] 2007년까지는 CRT가 세계 시장에서 1위였으나, 2008년 LCD가 CRT를 역전하게 된다.[97] 영업장마다 케바케다.[98] LCD 패널 자체의 수명은 깨지지 않는 이상 반영구적이다.[99] 現 한국소비자원.[100] 이 사건을 계기로 많은 TV 프로그램이 LCD 및 HD 해상도를 지원하게 되었다. 쉽게 말해 네모난 화면에서 좌우 기다란 화면이 된 셈이다.[101] 참고로 보편 LED 백라이트 LCD TV를 LED TV라고 많이 표현하나 LED는 단지 백라이트 유닛 발광만 담당하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잘못된 표현이다.[102] 2010년대 초반만 해도 CRT 소지하는데가 다소 있었고 심지어 일부 판매했고 2010년대 초반에는 CRT를 소지하긴 해도 LCD TV를 대부분 구입했을 것이다. 2010년대 중반에는 시골과 도서지역, 일부 오래된 곳을 제외하면 소멸되었고 2010년대 후반 들어서는 시골집이나 도서지역도 TV를 바꾸기 시작하면서 2020년 이후로는 드물게 소지하는 곳 외에는 대부분 소멸되었다.[103] 삼성전자 측 마케팅 용어이다. 이후 LG전자도 같은 낱말을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가리키는 의미는 서로 다르다. 그러나 최초로 사용한 삼성은 2017년 들어서 플래그십 TV 라인업에 사용하던 SUHD를 QLED로 변경한다.[104] 일반 안테나를 이용하여 TV시청을 하는 가정에만 해당하며 유선방송(케이블TV 및 중계유선), IPTV, 위성방송인 스카이라이프 시청 가정은 해당 사항이 없었다.[105] 다만 KBS 통일방송연구소에 기고된 글에 따르면 흑백TV로 수신하는 경우에는 상관없다는 듯 하다,북한에서도 KBS드라마를 본다?, KBS 통일방송연구소 2006-03-18[106] 중소기업 TV들은 대다수가 멀티시스템을 지원하지만 입/출력만 지원하며 유럽에서 PAL방식 VCR을 직구하여 연결해야 하는 수고로움이 있다.[107] 이런 제품들은 타 국가로 여행을 가거나 하는 경우로 인해 멀티 시스템 튜너를 내장하고 있다.[108] 젊은 층들을 대상으로 했던 TV 프로그램들마저 2020년을 전후하여 중산층들이나 중장년층으로 목표 대상을 옮겨가는 추세다.[109] 2021년 하반기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어쩔티비라는 유행어도 이런 인식에서 기원했다는 가설도 있다.[110] 음악 방송처럼 10~20대를 모으기 위한 프로그램은 주로 유튜브 등으로 조회수를 모아서 홍보하며 그 때문에 시청률 무용론이라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111] 당연히 TV로도 인터넷을 할 수 있지만, 검색 시 리모컨으로 한글자 한글자 눌러야하는 불편함이 있어 현재의 TV는 큰 화면 외에는 휴대폰과 컴퓨터보다 뛰어난 점도 없다는 지적도 있다. 그래서 아예 리모콘 뒷면에 키보드가 달린 제품들도 나왔다.[112] 라디오의 기능이 TV 등으로 계승된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113] 사실 2010년 대 중반부터 드라마처럼 횟수를 정하는 시즌제 예능 프로그램이 많아진 영향도 존재하지만, 시즌제 중에서도 성공한 건 거의 없는 상황이다.[114] 그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장수 프로그램들이 살아남는 확률이 높아지기 시작했는데, 이는 장수 프로그램을 대체할 만한 프로그램이 거의 없는 것도 있다.[115] TV의 수명이 서서히 다 된 탓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