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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3 01:20:56

흥해 배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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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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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be673> 사로 6촌 신라 6부 성씨 시조
알천 양산촌 급량부 이씨 알평
돌산 고허촌 사량부 최씨 소벌도리
취산 진지촌 본피부 정씨 지백호
무산 대수촌 점량부 손씨 구례마
금산 가리촌 한기부 배씨 지타
명활산 고야촌 습비부 설씨 호진
삼국사기 기준.# 삼국유사에서는 돌산 고허촌(사량부) 소벌도리를 정씨로 취산 진지촌(본피부) 지백호를 최씨로 기록했다. 또한 6촌의 순서도 셋째가 무산 대수촌(점량부), 넷째가 취산 진지촌(본피부)이라고 기록했다.# }}}}}}}}}


興海 裵氏
흥해 배씨 (興海 裵氏 배씨)
관향 <colbgcolor=#fff,#000>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흥해읍
비조 지타(祗陀)
도시조 배현경(裴玄慶)
시조 배경분(裵景分)
중시조 배전(裵詮)
집성촌 경북 안동시 풍산읍
경북 봉화군
황해도 은율군
황해도 신천군
황해도 재령군
대구 달성군
인구 34,259명(2015년)

1. 개요2. 유래3. 시조 배경분(裵景分)4. 주요 인물5. 분파6. 역사7. 관련 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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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흥해 배씨(곡강 배씨)는 배경분을 시조로 하고 배상지를 입향조로 하는 한국의 배씨이다.흥해배씨는 입향조 백죽당(栢竹堂) 배상지(裵尙志, 1351~1413)의 아들 4형제가 모두 출사한 이래로 6백여 년을 세거해 온 가문이다.

2. 유래

흥해(興海)는 경상북도(慶尙北道) 영일군(迎日郡)에 속해있는 지명(地名)으로 본래 신라(新羅)의 퇴화군(退火郡)인데 경덕왕(景德王)이 의창군(義昌郡)으로 고쳤고 고려(高麗)초에 흥해(興海)로 고쳐 현종(顯宗) 때 경주(慶州)에 속하였다가 1172년(명종 2) 감무(監務)를 두었다. 공민왕(恭愍王) 때 지주사(知州事)로 승격하였으며 조선시대(朝鮮時代)에도 그대로 내려왔고, 1914년 영일군(迎日郡)에 병합되어 그 일부지방은 1973년 이후 의창읍으로 내려오다가 1983년 흥해읍으로 개칭되었다.

흥해배씨(興海裵氏)는 고려조에 검교장군(檢校將軍)에 오른 배경분(景分)을 일세조(一世祖)로 계대(繼代)하며, 그의 6세손 배전(詮: 전리판서 영지의 아들)이 충혜왕(忠惠王) 때 호군(護軍)을 거쳐 군부판서(軍簿判書)로 조적(曺頔)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功)을 세워 일등좌명공신(一等佐命功臣)에 책록되고 흥해군(興海君)에 봉해졌으며 흥해를 본관(本貫)으로 삼게 되었다.

그러나「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와 1764년(영조 40)에 편찬된「갑신합보(甲申合譜)」에는 배씨의 중시조(中始祖)인 배현경(玄慶 : 고려 개국공신)의 6세손 배오룡(五龍 : 시중 배사우의 아들)을 파조(派祖)로 기록하고 있는데 계대 소목(昭穆)이 미상(未詳)하고 각파의 이론(異論)이 있어「곡강세첩(曲江世牒)」에 밝혀진 바에 따라 배경분(景分)을 파조로 상고(詳考)한다.

가세(家勢)를 일으킨 대표적인 인물(人脈)을 살펴보면 흥해군(興海君) 배전(詮)의 아들 4형제 중 장남 배상도(尙度)와 셋째 배상지(尙志)의 후대에서 가문이 크게 융성하기 시작하였다.

일찌기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문하(門下)에서 학문을 연마한 배상도(尙度)는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을 지냈으며, 그의 아들 배둔(屯)이 조선 태조(太祖) 때 등과(登科)하여 형조 참의(刑曹參議)와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를 역임했고 슬하에 아들 배처눌(處訥 : 맹산 현감을 역임)과 배지눌(止訥)을 두어 대(代)를 이어 가문을 중흥시켰다.

한편 형 배상도와 함께 목은(牧隱)에게서 글을 배웠던 배상지(尙志)는 고려 말에 벼슬이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에 이르렀으나 고려의 국운(國運)이 기울어지자 벼슬을 단념하고 두문동(杜門洞) 두류산(頭流山)에 둔거하다가 안동 금계촌(安東金溪村)으로 내려가 은거하면서 잣나무(栢)와 대나무(竹)을 심고 호(號)를 백죽당(栢竹堂)이라 하였다. 그후 조선조에서 수차례에 걸쳐 벼슬을 내리고 그를 불렀으나 끝까지 절의(節義)를 지켰다.

그의 아들 배권(權)은 사헌부(司憲府)의 감찰(監察)과 지평(持平)을 지내고 이조 좌랑(吏曹佐郞)을 거쳐 봉화(奉化)․횡성(橫城) 등지의 현감을 역임한 후 형조 좌랑(刑曹佐郞)에 올라, 세종 때 진주 목사(晋州牧使)로 치사(致仕)한 아우 배환(桓)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
그외 여흥 부사(驪興府使)를 지내고 원종공신에 올랐던 배효숭(孝崇: 관찰사 배환의 아들)과 옥과 현감(玉果縣監)을 지낸 배효건(孝騫), 세조 때 언양 현감(彦陽縣監)을 역임한 배효사(孝思) 3형제가 뛰어났으며, 충좌위 부사과(忠佐衛副司果) 배천석(天錫)의 맏아들 배삼익(三益)은 선조(宣祖) 때 풍기 현감(豊基縣監)과 양양 부사(襄陽府使)를 거쳐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나가 흉년으로 굶주린 백성들의 구제에 전력하여, 이퇴계(李退溪)의 고제(高弟)로 학문이 숙성했던 아우 배삼근(三近)과 함께 대(代)를 이어 가문(家門)을 빛냈다.

관찰사 배삼익의 아들로 임진왜란에 의병(義兵)을 일으켰던 배용길(龍吉)은 김성일(金誠一)의 문하(門下)에서 수학하여 천문(天文)․지리(地理)․율력(律曆)․병전(兵典) 등 다방면에 조예가 깊었고 특히 역리(易理)에 밝았다.

효성(孝誠)으로 이름난 배경(經)은 임진왜란 때 연로(年老)한 어머니를 업고 산중(山中)으로 피난가다가 돌연 적병을 만나자 어머니를 껴안고 구명(求命)을 애걸하니 그의 효성(孝誠)에 감동한 적의 무리가 안전(安全)한 길을 알려주어 모자(母子)가 생명을 보전하였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배인길(寅吉)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이끌고 용궁(龍宮)으로 가던 도중 적의 대 부대(部隊)를 맞아 격전 끝에 공수백인(空手白刃)으로 분전하다가 순절하였는데, 부인 월성 이씨(月城李氏)도 남편을 따라 자결하여 순조(純祖) 때 쌍절각(雙節閣)이 세워졌으며, 헌종(憲宗) 때 문과에 급제한 배상현(象鉉)은 전적(典籍)과 이조 정랑(吏曹正郞)을 거쳐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을 역임하여 가문(家門)의 전통을 지켰다.

흥해배씨는 고려후기에 검교장군을 지낸 배경분(分)공을 1세로하며, 6세손 배전(裵佺)이 충숙왕(1321년) 때 '조적의 난'에 큰 공을 세워 흥해군(興海君)으로 봉해져 본관을 흥해로 사용하게 되었다.

흥해(興海)는 경상북도 포항시(浦項市) 흥해읍 일대의 옛 지명이다. 삼한시대에 다벌국이 있었다고 한다. 신라 때에는 퇴화군(退火郡)이라 불렀다가,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의창군(義昌郡)으로 개칭하였고 신라 말기에는 남북미질부성(南北彌秩夫城) 이라고도 불렸다. 930년(고려 태조 13)에 남북미질부성을 다시 합쳐 흥해군(興海郡)으로 고쳤다.

안동 입향시조(入鄕始祖) 백죽당(栢竹堂) 배상지(尙志)공은, 1351년(충정왕 3년) 흥해군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공민왕조에 통훈대부 판사복시사(정3품)로 재임하던 중, 고려가 패망의 위기에 처하자 벼슬을 버리고 조정을 떠났다. 그리하여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백죽당은 고려의 절의파(節義派) 충신을 일컫는 '두문동 72현(杜門洞七十二賢)' 가운데 한 분이다.

조선이 건국되자 백죽당은 동생 공조전서(工曹典書) 배상공(尙恭)과 함께 외향이자 처향인 안동으로 낙향하셨다. 백죽당은 안동 서후 금계 마을에 정착하여 집주변에 잣나무대나무를 심어 고려 충신의 기상을 실천하기 위해 스스로 호를 백죽당이라 하고, 금오산에 은거해 있던 야은 길재(吉再) 선생과 교유하였다. 오늘날 안동 일원에 거주하는 흥해배씨는 모두 백죽당의 자손이다. 동생 공조전서 배상공하회마을에 정착하셨으나, 아쉽게도 손자 대에 무후하여 풍산 류씨 문중에서 외외손 봉사를하고 있다.
풍산 류씨 류종혜(柳從惠)는 원래 풍산 상리리에 살고 있었는데 하회마을의 아름다운 경관에 이끌려 옮겨 살게 되었다. 당시 류종혜와 허물없이 지내던 흥해배씨 배상공(裵尙恭)도 함께 옮겨 왔다고 한다. 배씨와 류씨는 예로부터 안동 지방의 죽마고우, 선비집안으로 서로가 친했다고.

백죽당의 아들 4형제 가운데 맏아들 배권(權)이 사헌부 지평, 둘째배환(桓)이 삼도관찰사, 셋째 배남(楠)이 사헌부 감찰, 넷째 배강(紅)이 이조정랑을 지냈다. 모두 문학으로 이름을 날려 당시 사람들이 배문(文)이라 하였다.백죽당이 안동에 입향한 이래 조선 중기까지는 현달한 조상이 참으로 많았다.

고려조 두문동 72현의 한사람으로 손홍량의 외손자이고 또 안동 권씨 권희정(權希正)의 사위인 흥해배씨 백죽당 배상지는 고려가 쇠퇴하자 외가와 처가가 있는 안동으로 내려와 서후에 자리잡는다. 그는 네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 벼슬길에 나아갔고 차자 배환(裵桓)은 전라감사를 역임했다.
안동 사람들은 자녀 다섯이 모두 무과에 급제한 영양 남씨 남민생 가문배상지 가문을 합하여 배문남무(裵文南武)라고 말하며, 가문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한다.

남휘주의 아들 남민생(南敏生, 1348~1403)은 호조참의를 지내고 5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 5형제는 모두 무과에 급제해 그 위상이 하늘을 치솟았다고 전해진다.그러니 남민생 가문과 쌍벽을 이룰만큼 배상지 가문에서도 문과로 뜻을 이루니, 그 위세가 끝이 없었다 전해진다.

배상지의 장자 배권(裵權)의 후손으로 봉화에 이거해 살던 배천석(裵天錫)은 조선 명종 조에 다시 선향인 금계로 돌아왔다가 예안면 도목촌으로 이거했는데 그 아들 배삼익(裵三益)은 퇴계의 제자로 과거에 급제하여 황해도관찰사를 역임했고 그 아들 배용길(裵龍吉) 임란 때 의병으로 활동하다가 후에 벼슬에 나아가 충청도사를 역임했다.

3. 시조 배경분(裵景分)

4. 주요 인물

 裵尙志(배상지) 栢竹堂(백죽당)은 지조 높은 선비면서도 덕망을 갖춘 교육자였다. 자제들을 교육함에 있어서 그 교과 과정이 엄중하면서도 대하는 태도는 너그러웠다.

어느 날 2, 3, 4째 아들을 죽림사(竹林寺)라는 절에 글공부하라고 보냈다. 얼마간 아무 기별이 없자 백죽당은 궁금한 나머지 절을 찾았다. 이 때 세 자제들은 여가를 보아 기생까지 불러서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방문에 얼른 기생을 이불에 감싸 방구석에 밀쳐두고 부친을 맞았다. 이 때 백죽당은 아무 말씀을 하지 않고 잠시 앉았다가 시 한 수를 벽에 남기고 자리를 떴다.

  一裵一裵復一裵(일배일배복일배)

三裵會處春風廻(삼배회처춘풍회)

名是竹林非但竹(명시죽림비단죽)

竹林深處桃花開(죽림심처도화개)

배가 하나 배가 하나 또 배가 하나.

배가 셋이 모인 곳에 봄바람이 감도니

이름만 竹林(죽림)이니 대나무만 있지 않고

대나무 깊은 곳에 복사꽃도 피어 있네.

첫 구절은 세 아들을 마치 ‘한잔 먹고 또 한잔 먹세(一杯一杯復一杯)’에서 따온 느낌이다.

두 번째는 세 사람의 배씨 선비들이 모여 공부하는 곳에 춘풍, 즉 술기운이 만연하다는 말이다.

선비들이 있는 곳이라면 ‘서권기(書卷氣)’ 즉 책들이 가득하며, 그래서 문자향(文字香)이 있어야 했다. 더구나 세 아들은 기생까지 불러들여 술판까지 벌이고 있었다.

매우 실망스러운 장면이었을 것이다. 셋째와 넷째 구절은 이 시의 압권이라 할만하다. 공부하고 있는 절 이름이 죽림사다.

대나무(竹)의 이미지는 곧다. 그래서 선비가 즐겨 이와 벗했다. 부친인 자신 역시 이 대나무에서 따 아호를 백죽당이라 했다.

마지막 구절의 ‘대나무 숲 깊은 곳에 복숭아꽃이 피었네(竹林深處桃花開)’는 갑작스럽게 수습해 방구석으로 밀쳐둔 기생을 풍자한 것이다. 이 일화를 보면서 교육이란 강함과 유함을 조화롭게 써야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후일 이 세 아들은 모두 문과에 급제했다. 그래서 이로부터 안동 지방에서는 ‘배문남무(裵文南武, 배씨들은 문과, 남씨들은 무과가 많이 났다)’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 ||
임연재[1][2]배삼익은(裵三益)은 퇴계의 제자로 학문이 매우 높은 분이다. 임연재 배삼익(臨淵齋 裵三益, 1534∼1588)은 이황 문하에서 (심경), (시경)의 강의를 들었다. 해서지방에 기근이 들어 방백을 몰색하는데, 조정에서 배삼익이 아니면 안되다고 하였다.
파일:임연재선생문집.jpg
임연재선생문집(臨淵齋先生文集)

배삼익은 과거에 응시를 했는데 시험을치렀는데도 어떻게 되었는지 생각 외로 낙방하여 실망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기가 과거에 떨어졌다는 것이 믿어지질 않았다.
스승인 퇴계 선생을 뵈올 낯이 없어 문을 닫아걸고 두문불출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그러던 어느 날 한양에서 손님이 찾아왔다.

<여봐라! 이리 오너라.> 꽤나 점잖은 분의 목소리다
.<예이, 누구시옵니까?> 하인이 대문을 열어주었다.
< 안에 너의 주인이 계시느냐?>
< 예, 그러하옵니다만…….>하인은 누가 어디서 왔느냐? 라고 묻는 시늉을 했다.
< 냉큼 주인 방으로 안내 하렸다.> 조금 큰소리다.
< 네, 네, 네, 알겠습니다요.> 하인은 그제야 보통 분은 아닌 줄 알아 차렸다.

밖에서 이러쿵저러쿵 소란을 떠는 바람에 주인 배삼익이 사랑방 문을 열고 내다보니 한양에서 온 관원(官員)이었다. 정중히 방으로 모시고 수인사를 마쳤다.
< 선생께서는 과거에 합격 하셨습니다.>
< 무슨 말씀입니까! 지난번 과거에 분명히 떨어졌는데……?>
배삼익 선생은 농담하지 말라고 하였다.
< 그런 것이 아니 오라 선생의 이름을 착각했을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 그 무슨 말씀을…….> 삼익 선생은 고개를 갸우뚱 했다.
사연인 즉 裵三益 선생이 시험 답안지를 제출할 때 자기의 이름을 너무 흘려 썼기 때문에 착오를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배(裵)자를 쇠(衰)자로 보았고 삼(三)자를 지(之)자로, 익(益)자를 개(蓋)자로 잘못 알고 쇠지개(衰之蓋)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배삼익의 필법이 워낙 흘려쓰는 필법이라 알아보지 못했다는 관원의 말아다.

< 이제 알겠소이까?>
< 참 그러네요. 어쩐지 그날[시험 발표] 쇠지개, 쇠지개 하는 소리가 났던겄 갔구먼요.>
< 에이! 선생도 자기 성명 석자만은 바른 글로 써야죠.><미안 하외다.> 그리고는 서로가 마주 보면서 하하하 하하하……박장대소(拍掌大笑)를 했다.

이렇게 하여 뒤늦게나마 등과(登科) 사실이 밝혀져 배삼익은 관직에 나가게 되었고 조정(朝廷)의 요직을 두루 두루 거치다가 황해도 관찰사를 거치게 되었다고 한다. }}} ||
파일:금역당집.jpg
[3] }}} ||

5. 분파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와 1764년(영조 40)에 편찬(編纂)된 《갑신합보(甲申合譜)》에는 배현경(裵玄慶)의 6세손(世孫) 배오룡(裵五龍)이 고려(高麗) 때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뒤 흥해(興海)로 분적(分籍)하여 시조(始祖)로 기록(記錄)되어 있는데, 계대(繼代)의 내력(來歷)이 자세(仔細)하지 않고 각파(各派)의 이론(異論)이 있다. 《곡강세첩(曲江世牒)》에 밝혀진 대로 배경분(裵景分)을 시조(始祖)로 보는 쪽이 지배적(支配的)이다.

6. 역사

7. 관련 유적지


[1] 흥해배씨 문중에서 운영하고 있는 홈페이지[2] 배삼익은 자신의 호를 따서 임연재선생문집(臨淵齋先生文集)을 펴내었는데 임금으로서 지녀야 할 덕목 10가지를 제시하고, 조세·혼인·해운 등 백성들의 삶과 관련된 폐해와 장려책 등을 기록하였다.동성동본금지를 주장한 글과 5개월동안 명나라에 다녀온후 느낀점을 일기형식으로 짧게 적어놓은글도 있다.[3] 배용길이 쓴 금역당집은 임진왜란정유재란을 겪으면서 시급히 개정하거나 시행해야 될 시무 8조를 적어놓았고 유학이 발전해야한다 저술하였다.지리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밝힌 「풍수변(風水辨)」 등이 적혀있다.[4] 배학순은 고종 연간 의금부도사를 지냈으며 옥동도사(玉洞都事)를 지낸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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