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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1c4f1><colcolor=#7d1b7e> 조선 우찬성 증 영의정 문순공(文純公) 이황 李滉|Yi Hwang | |||
이황 표준영정 | |||
출생 | 1502년 (연산군 6년) 1월 13일[1][2] | ||
조선 경상도 예안현 온계리[3] | |||
사망 | 1571년 (선조 3년) 1월 13일[4] (향년 69세) | ||
조선 경상도 예안현 온계리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81c4f1><colcolor=#fff> 시호 | 문순(文純) | |
자 | 경호(景浩) | ||
호 | 퇴계(退溪), 퇴도(退陶), 도수(陶叟), 청량산인(淸凉山人) | ||
본관 | 진성 이씨[5] | ||
부모 | 부친 - 이식(李埴, 1463 ~ 1502) 모친 - 춘천 박씨(春川 朴氏, 1470 ~ 1537) | ||
형제자매 | 7남 1녀 | ||
배우자 | 김해 허씨(金海 許氏, ? ~ 1527) 안동 권씨(安東 權氏, ? ~ 1546) - 권질(權礩, 1483 ~ 1545)의 딸 | ||
자녀 | 장남 - 이준(李寯, 1523 ~ 1583) 허씨 소생 차남 - 이채(李寀, 1527 ~ 1550) 허씨 소생 3남(서자) - 이적(李寂, 1531 ~ 1608) 첩 소생 | ||
학력 | 성균관 | ||
종교 | 유교 (성리학) | ||
붕당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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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천 원권 지폐 속 초상화[6] |
不能舍己從人,學者之大病。天下之義理無窮,豈可是己而非人?(불능사기종인 학자지대병 천하지의무궁 기하시기이비인)
자기를 버리고 남을 따르지 못하는 것은 배우는 사람의 큰 병이다. 천하의 의리(義理)에 끝이 없는데, 어찌 자기만 옳고 남은 그르다고 할 수 있겠는가? [7]
조선의 유학자.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 퇴도(退陶), 도수(陶叟), 청량산인[8] 등이 있으나 가장 유명한 것은 퇴계(退溪). 본관은 진보(眞寶) 혹은 진성(眞城), 시호는 문순(文純). 사후 이자(李子), 이부자(李夫子)로 존숭되었다.자기를 버리고 남을 따르지 못하는 것은 배우는 사람의 큰 병이다. 천하의 의리(義理)에 끝이 없는데, 어찌 자기만 옳고 남은 그르다고 할 수 있겠는가? [7]
율곡 이이가 서인들의 정신적 지주라면 퇴계 이황은 동인[9]들의 정신적 지주라고 할 수 있다.[10] 율곡 이이와 함께 조선을 대표하는 유학자이자 대한민국에서 유통 중인 화폐 천 원권 지폐의 앞면 모델이기도 하다.
2. 생애
1501년 11월 25일 경상도 안동부 예안현 온혜리(現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11]에 있는 할아버지 이계양(李繼陽)의 집[12]에서 진사 이식(李埴)의 7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여덟 남매의 막내인 퇴계에게는 형이 여섯, 누나가 하나 있었다. 모친은 춘천 박씨인 박치의 딸로 전처인 의성 김씨와 사별한 후 이식이 들인 후처였다. 강원도 춘천시에는 현재 퇴계동이라는 지역이 있는데 모친인 춘천 박씨의 고향이 춘천이다.이식은 이황이 7개월이 될 때 40세의 나이로 죽고 성장 때까지 친어머니 춘천 박씨의 보살핌 아래에서 자랐다. 6세 때 이웃 노인에게 천자문을 배워 학문의 길에 들었고, 12세에 숙부 이우(李堣)가 병환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요양하고 있을 무렵 논어를 배우며 본격적인 학문을 시작하여 다양한 경과 시를 접했는데 19세 때 주희의 성리대전을 독파하고서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기쁨이 솟아나고 눈이 열렸는데 오래 두고 익숙하게 읽으니 점차 의미를 알게 되어 마치 들어가는 길을 얻은 것 같았다. 비로소 성리학의 체계를 친숙히 알게 되었다."는 말을 뱉을 정도로 성리학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 깊어졌다. 20세에 주역을 공부하다가 공부 중독이라도 된건지 몸을 엄청 망가뜨리며 이후에도 건강이 안 좋아졌다고 한다.
가정사는 행복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는데 21세 허씨 부인과 결혼하지만 이황이 27세 때 둘째 아들을 낳고서 죽는 불행이 닥쳤다. 이황은 사위된 바를 다하며 혼자 남은 장모를 마지막까지 챙겼다고 한다.
30세에 둘째 부인 권씨와 혼인하지만 안타깝게도 권씨의 가정사 역시 정치에 크게 희생당한 삶이였다. 권씨의 할아버지 권주(權柱)가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전달한 사람이라 갑자사화로 교살당했으며 할머니는 관비가 되고 아버지는 유배를 당했는데 이 과정 속에서 어린 권씨는 정신질환을 얻게 되었다. 권씨의 아버지 권질은 이황의 인격을 알아보고 유배되었을 때 "부디 죄인의 소원을 들어 주시게나"라며 딸을 보살펴달라 부탁한 것. 때문에 정상적인 가정사가 어려운 아내 대신 집안 살림을 하면서 아내를 물적으로도 심적으로도 보살피는 지극정성을 보였다.[출처] 그러나 결국 권씨 부인은 이황이 46세가 될 때 아이를 낳다가 죽는 비극을 맞이한다. 그리고 4년 뒤에 둘째 아들 또한 24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심근경색으로 세상을 떠난다.[14]
대학자이니만큼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 두각을 나타냈을 것 같지만 의외로 과거 시험에서 고배를 많이 마셨다. 23세인 1523년 성균관에서 공부하였고 24세부터 과거 시험에 응시하였으나 3번 낙방하였다. 27세인 1527년 경상도 향시에 응시하여 생원 2등으로 합격한 후 1528년 진사시험에 2등으로 오랜 시간 동안 고시 낭인의 시간을 거친 이황은 34세인 1534년 문과 초시 2등으로 급제했다. 어린 시절 덜컥 과거에 붙어버리고 9번이나 과거를 씹어먹는 천재 이이와 다르게 인간적인 코스를 거친 편. 이후 43세까지 종3품 성균관 대사성까지 올랐지만 정치 난맥상에 많이 엮이면서 이후 자의와 타의로 귀향과 귀경을 반복하게 된다. 45세에 을사사화에 엮이며 파직당하다가 오래지않아 복직하고 50세에 형 이해가 사화에 휘말리며 유배가는 길에 죽는다. 모진 정난과 가정사를 맞은 이황은 단양군수, 풍기군수 등의 외직을 다니며 풍기군수 재직 시절 주세붕에게 건의해 최초로 사액 서원인 소수서원을 짓게 된다. 50세가 되며 확고하게 귀향을 결심하고 60살에 고향에 도산서원을 지어 후학을 양성했다. 덕분에 현재도 도산서원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학자의 이미지로 적극적인 행정가였던 이이보다 은자의 이미지가 강한 것.
귀향 후 다양한 학문적 활동을 펼치면서 대학자로서 자리매김했다. 당대의 대유학자였던 서경덕과 논쟁을 벌여 '기를 이끄는 이'를 부각시켰으며 이러한 이황의 사상은 조선 시대 주리론(主理論)의 뼈대가 되었다. 이는 당시 정치상에 도덕성 회복과 개인의 수신을 강조하는 원리주의로 대응하려는 모습으로도 여겨질 수 있다.
기대승과의 사단칠정논변은 한마디로 이황의 사상을 만들어 낸 세기의 논쟁이다. 이황의 전성기. 이때 이황은 58세의 대사성, 기대승은 갓 과거에 급제한 32세의 신출내기였다. 대사성은 바로 성균관의 우두머리로서, 이황은 요즘으로 치면 국립대학교 총장쯤 되는 셈인데 이는 의전에서 국무위원(장관)급에 해당한다. 요즘으로 치면 국립대 총장이나 국무위원이 이제 갓 시험에 합격해 부서 배치를 받은 5급 사무관이나 7급 주무관과 토론을 벌인 것이다. 현대에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거기다 이황은 선조 임금의 스승이었다. 임금도 어려워하는 대학자였음에도 기대승은 정말 겁없이 대든 셈.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서로를 존중하는 가운데 13년동안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치열한 철학적 논쟁을 이어나갔고, 이황은 기대승의 견해를 자신의 학설에 일부 수용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오늘날의 학계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건 아니다. 후대의 학자 정약용은 정조와의 대화에서 기대승에게 판정승을 내렸다. 정약용의 집안이 이황의 학통을 이은 남인이란 점을 생각하면 묘한 구석이 있는 부분. 현대 분석철학의 논리적 도구를 이용한 분석 역시 기대승에게 판정승을 내리고 있다. 이황의 주리론은 사단과 칠정을 논리적 기준 없이 우열관계로 구분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일관성이 부족했으며, 우주론과 실천윤리를 무리하게 하나의 틀로 통합하려고 시도하였기 때문에 실패한 기획이라는 평이 있다. 하지만 그 정도 스케일의 학설을 주체적으로 제시한 것 자체가 충분히 역사에 이름을 남길만한 위업이기도 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보다 더 정밀하고 논리적이라고 해서 플라톤의 철학사적 위대함이 반감될 수 없다. 굳이 평하자면 청출어람이었을 뿐.
당대의 거유(巨儒)인 조식과의 라이벌 관계도 유명하다. 학풍도 현실 참여 vs 학문 이론 중시로 갈라졌고 사는 곳이 멀지 않음에도 한번도 만나지 않고 편지로 자주 논쟁을 벌였다. 조식은 적극적인 정치 참여와 다양한 사회 경장론을 제시한 이이와 여러 모로 비교될 만한 실천주의 유학자로 이황의 철학은 실천성이 떨어진다는 이유 때문에 수시로 조식의 공격목표가 되었다. [반론] 위에 언급된 기대승과 이황의 사단칠정논변 땐 조식이 '요즘 공부하는 자들을 보건대 손으로 물을 뿌리고 비질하는 절도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천리를 담론하고, 헛된 이름이나 훔쳐서 남들을 속이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도리어 남에게 사기나 당하고 그 피해가 다른 사람에게까지 미칩니다' 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이황은 이에 대해 제자들에게 "(조식은) 잘난 척은 심하고 하는 말은 과격하고 노장(老莊=도가)에 물들어 있다. 어떻게 그 사람을 도를 아는 사람이라 하겠는가?"라며 디스를 했다고. 그래도 명색이 당대의 대학자들이라 대립은 학문적 논쟁으로 국한되었고, 조식과 이황이 정치적으로 부딪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의리에서는 그렇지 않다. 배우지 않으면 알지 못하고 힘쓰지 않으면 능하지 못하여, 겉으로 행하는 것이 반드시 내면에 진실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선을 보고도 선인 줄 알지 못하는 자가 있으며, 선임을 알고도 마음으로 좋아하지 않는 자가 있으니, 선을 본 때에 이미 스스로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불선을 보고도 싫어할 줄 알지 못하는 자도 있으며, 악임을 알고도 마음으로 싫어하지 않는 자가 있으니, 악을 안 때에 이미 스스로 싫어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대학(大學)』에서 저 표리여일(表裏如一)한 호오(好惡)를 빌려서 배우는 자들에게 자기를 속이지 말도록 권면한 것은 옳지만, 양명이 저 형기의 하는 바를 끌어 대어 의리의 지행에 대한 설을 밝히려 한 것은 대단히 옳지 않다. 그러므로 의리의 지행을 합하여 말하면 참으로 서로 필요하고 병행하여 한쪽이 없어서는 안 되지만, 나누어 말하면 지를 행이라 할 수 없는 것은 행을 지라 할 수 없는 것과 같으니, 어찌 합하여 하나라고 할 수 있겠는가.
「전습록논변」
저서인 전습록변(傳習錄辨)을 통해 양명학의 지행합일설을 비판한 적이 있는데, 이 때문에 한동안 조선 유학에서 양명학이 자리잡지 못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이후 임명와 근무와 사임을 반복하다 선조 시절 대제학으로 일하면서 성학십도를 저술해 선조에게 올렸고, 성리학이 국가이념이 되도록 만들었다.「전습록논변」
그밖에 예안향약을 짓기도 했지만 이이의 해주향약이 더 유명해졌으므로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다.
사후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으며, 문묘에 들어가 문순공(文純公)의 시호를 받아 동국 18현의 한명으로 모셔진다.
이황의 묘비 탁본 |
이황은 자손이 끊어지지 않고 대대로 내려오고 있어 현재 종손 집안은 대강 16대, 현재 종손 이근필(李根必, 1932. 4. 10 ~ 2024. 3. 7)[16]과 17대 이치억(李致億, 1975. 10. 11 ~ ),[17] 이주현 부부, 18대 이이석(2007 ~ )이다. 2024년 현재 퇴계종택을 지키고 있는 사람은 17대 종손인 이치억이다. 이이석은 차종손인 셈. 이근필은 2009년 15대 종손 이동은(李東恩, 1909. 5. 20 ~ 2009. 12. 23)의 장례 때 무리를 하여 청력을 잃은 것을 빼면 여전히 직접 쓴 휘호를 손님들에게 선물로 주는가 하면 종택을 방문한 손님들을 대문 앞에서 일일이 배웅하는 등 정정하게 활동하고 있다. 종손이 손님 받는 거야 종손의 의무로서 당연한 일이지만, 이근필의 경우 종택 옆에 있는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의 설립자이기도 해서 종택을 찾는 손님의 규모가 좀 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일일이 해내는 것을 보면 경외감마저 들 정도. 이치억은 젊었을 적 자신이 종손이라는 사실을 굴레라고 생각해서 일본 메지로 대학(目白大學) 아시아지역문화학과로 도피성 유학을 떠났지만[18], 할아버지의 사상이 안동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동양 전체에 퍼졌다는 것을 깨닫고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해 2004년 유교철학 전공으로 유학 석사 학위[19], 2013년 2월 유학 박사 학위[20]를 각각 취득했다. 이후 공자의 79세손이자 2대 대성지성선사봉사관, 공덕성의 손자인 공수장(孔垂長)을 한국에서 맞이하기도 했다.
3. 저서와 작품
문학, 산문《단양산수기》
《유소백산록》
《무진육조소》
《도산십이곡》
저서, 문집
《계몽전의》: 주자의 역학계몽을 변석한 저서
《주자서절요》: 주자대전의 선집
《송계원명이학통록》: 송, 원, 명나라 주자학자들의 행장 및 어록집
《심경석의》: 성리학 경전인 심경 주석서
《사단칠정분리기서》: 사칠논쟁에 대해 정리한 책
《성학십도》
《퇴도선생자성록》
《퇴계집》: 이황의 문집
4. 여담
- 어렸을 때 형인 이해가 놀다가 손을 다쳐 상처에서 피가 흐르자, 이황은 형의 손을 잡고 울기 시작했다. 이황의 어머니가 이를 기이하게 여겨 "정작 손을 다친 형은 울지 않는데 어찌하여 네가 우느냐?"하고 물어보자, "형은 저보다 나이가 많아서 울지는 아니하나, 피가 이렇게 흐르는데 어찌 아프지 아니하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 이황이 첫 부인과 사별[21]한 지 2년 후인 1529년 어느 날 예안에 귀양 가 있던 권질(權礩)이 그를 불렀다. 권질에게는 집안의 참극[22]으로 정신을 놓아버린 여식이 있었는데, 권질은 이황에게 "자네가 아니면 내 딸을 맡아줄 사람이 없네"라며 간곡하게 부탁하였다. 결국 이황은 권질의 여식을 아내로 받아들인다. 그래도 이황의 성격이 무던해서 서로 잘 지냈던 모양이다. 하지만 정신병을 앓던 권씨는 이황을 종종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했는데, 한번은 제사가 시작되기 전에 제사상에 있는 배[23]를 남몰래 집어 치마 속에 숨겼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를 눈치챈 이황의 형수가 동서 권씨를 질책하자 이황은 "제사를 지내기 전에 음식을 먹는 것은 예법에 어긋난 일입니다. 하지만 조상님께서도 후손을 귀엽게 여기실 터이니 손자며느리의 행동을 노엽게 여기지 않을 겁니다." 라고 변설하여 아내를 감싸주었다. 나중에 제사를 마친 뒤 이황이 아내에게 왜 그랬냐고 묻자, 권씨부인은 "배가 몹시 먹고 싶어서 그랬다." 고 답하였다. 이에 이황은 아내를 위해 배를 가져다가 손수 깎아 주었다고 한다.
- 한번은 이황이 상가집에 가기위해 흰색 도포를 입으려하였는데, 도포가 해져있기에 권씨 부인에게 기워 달라고 부탁하였더니 권씨 부인은 붉은 천을 덧대어 기웠다. 이황은 아무 말없이 도포를 입고 상가집에 갔다. 예법에 정통한 퇴계가 상가집에 빨간색 천을 덧대 기운 흰 도포를 입고 온 것을 본 사람들은 상당히 놀랐는데, 빨간 천을 덧대는 것이 예법에 있냐고 물어보기도 했다고 한다. 이에 이황은 "붉은색은 잡귀를 쫓고 복을 부르는 것이라네. 우리 부인이 좋은 일이 생기라고 일부러 붉은색으로 기워주었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라고 답했다.
- 권씨 부인이 어느 날 이황의 두루마기를 손수 지어 내놓았다. 이황은 조금 모자라도 마음씨는 착한 부인의 정성에 감동했으나 문제는 소매의 길이가 서로 달랐고 앞깃도 엉뚱한 자리에 짧게 붙어 있었던 것이다. 이황이 어이가 없어 웃음을 터뜨리자 권씨 부인이 따라 웃었는데 이황은 아무 말없이 그 두루마기를 입으며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
- 하루는 벼루에 물이 떨어져 권씨 부인에게 “물 좀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부인은 물을 가득 채운 커다란 물동이를 이고 들어와 벼루에 붓기 시작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옆으로 새지 않고 정확하게 들이부었다는 것이다. 제자들이 웃음을 참느라 어쩔 줄 몰랐다. 그러나 퇴계는 미동도 않고 부인이 물을 다 붓고 나가기만을 기다린 뒤 조용히 글을 짓기 시작했다.
- 이황은 권씨 부인의 집안 문제로 출세에 지장을 받았다. 권씨 부인의 정신도 온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권씨 부인이 죽을 때까지 그녀를 아끼고 존중해주기 위해 노력했다. 권씨 부인은 1546년에 출산 중 사망했고 아이도 며칠 후 죽고 말았다. 이황은 이에 매우 슬퍼하였고 권씨 부인을 친어머니처럼 여기라는 이황의 당부[24]를 따라 두 아들들은 권씨 부인의 묘에서 시묘살이를 하였고, 이황 자신도 묘 근처에 암자를 짓고 한 해 동안 기거하였다.
- 이혼 상담을 하러 온 제자 이함형이 고향으로 돌아갈 때 편지를 써주었는데, 부부 금슬의 중요함을 설명한 다음, '나는 일찍이 두 번 결혼했으나 한결같이 불행이 심하였네'라고 적기도 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던 때도 있었지만 홀어머니를 보아 참는 한편 아내에게 잘 해주면서 부부관계를 원만히 유지하려 몇십년간 애쓰며 노력했다는 회고였다. 이를 계기로 이함형은 크게 깨달아 부부가 금슬을 회복하였으며 이듬해 이황이 세상을 떠나자 이함형의 부인은 삼 년간 소식하였다.
- 이황은 첫째 부인과 사별한 직후 첩실을 들였는데, 그녀는 이황 집안의 안살림을 충실히 보살폈고, 또한 권씨 부인과 이황이 혼인한 뒤에도 장애가 있는 권씨를 대신해 실질적인 안살림을 보살폈다. 이러한 첩실의 노력에 보답하는 의미로 이황은 첩실이 사망한 후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인 서자 이적을 호적에 올렸고, 행여나 그 후손들이 적서 차별을 받을 것을 염려하여 족보에 적서의 구별을 두지 못하게 금하였다. 이후로 지금까지 퇴계 가문의 족보에는 적서의 기록이 없다고 한다.[25]
- 자신의 아내를 소중히 대한 것처럼 이황은 부부관계에 대한 많은 조언을 남겼다. 부부사이에 불화로 갈등을 겪는 제자에게 이황은 집 밖에서 있었던 온갖 울분과 괴로움을 집안으로 들이지 말고 사립문에서 마음을 정화한 뒤에 집안으로 들어서라고 조언했으며 '부부는 처음 만난 남녀가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는 큰일이므로 가장 친밀한 관계를 이룬다. 한편 부부관계는 서로에게 바르게 해야 하고 가장 조심해야 하는 관계다. 그래서 군자의 도는 부부에서 시작된다.' 라는 말도 남겼다.
- 처복이 없었던 퇴계인지라 며느리 사랑이 지극했던 모양인데, 맏며느리 봉화 금씨가 시집 올 때 퇴계의 집이 가난하다 하여 친정에서 혼수를 대충 줘 버렸고, 퇴계가 사돈집에 방문했을 때 냉대를 당하기도 하여[26] 봉화 금씨가 중간에서 상당히 난처한 입장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퇴계는 성난 자신의 문중 사람들을 다독이며 며느리를 감쌌다고 한다. 또 맏며느리가 자신의 버선이나 옷을 기워 주면 잊지 않고 있다가 꼭 바늘 같은 것을 선물로 주며 고마움을 표하였다. 이런 퇴계의 사랑을 받은 봉화 금씨가 시아버지를 지극히 존경하여 '죽어서라도 아버님을 모시겠으니 근처에 묻어 달라'라는 유언을 남겨 퇴계 묘 근처에 묻혔다. 지금도 퇴계의 묘로 올라가는 길에 봉화 금씨의 묘를 볼 수 있다.
- 장가를 든 둘째 아들이 일찍 죽는 바람에 퇴계의 며느리는 청상과부가 되어 수절을 하였다. 그런데 밤마다 며느리가 외로움에 눈물짓는 모습을 목격한 이황은 사돈에게 '며느리가 불쌍하니, 데려가서 알아서 하시라.'라며 편지를 보내 재가를 허락하기도 했다. 경국대전 반포 이후 과부의 재가 및 재가한 과부의 자녀들에 대한 불이익과 규제가 적용되던 사회 분위기에서 이는 매우 파격적인 조치였다.[27] 이후 이황이 여행 중 어느 집에 묵으면서 식사를 대접받았는데 유난히 반찬들이 입에 잘 맞았고, 집을 떠날 때 선물로 버선을 받았는데 그것도 발에 편하게 잘 맞아 이상하게 여겼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집의 안주인이 바로 그 재가시킨 며느리였음을 알게 되었다는 야사가 있다.
- 율곡의 제자들과 이황의 제자들이 서로 자신들의 스승이 더 성현이라고 우기다가 결국 그들은 스승들의 밤일광경을 보았다. 율곡이 참으로 얌전하게 일을 치른데 비하여 이황은 알려진대로 격렬하게 일을 해서 다음날 이황의 제자들이 "성현으로서 어찌 그렇게 짐승처럼 일을 치릅니까!"하고 묻자 이황이 웃으며 3번 항목의 부부관계에 대한 말을 하며 "율곡은 밤일도 그렇게 너무 조심스럽게 치르니 후사를 늦게 얻을 것이다"라 말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퇴계의 종가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며 17대 종손 이치억 씨가 퇴계철학을 공부하여 성균관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는 등 꾸준히 이어지고 있으나, 율곡은 본처에게서 아들을 얻지 못하여 서자가 대를 잇는 등 후손들이 갖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대를 근근히 이어나가고 있다. 현재 율곡 종손들에 비하면 퇴계 종손들은 자손 규모에서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광범위하다. 한편 사람들이 부인에게 이황에 대해 물으니 (앞에서 소개한대로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보니) 아무렇지도 않게 "낮 퇴계랑 밤 퇴계는 다른 사람이다."라고 이야기했다는 소리도 있다. 어디까지나 야사인지라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지만 이 '낮 퇴계 밤 퇴계'는 현대에도 이황의 이중적인(?) 면을 가리키는 농담으로 자주 사용되는 말이다.
- 젊은 시절 과거를 보러 가는 길에 이황은 점심을 먹을 시간이 되어 잠시 쉬고 있는데 같이 한양으로 가던 하인이 어디선가 콩밥을 지어왔다. 이황은 하인에게 "쌀은 내것이로되 콩은 어디에서 나서 콩밥을 지어 왔느냐."라고 물었다. 하인이 답하기를 "예, 도련님. 길에 있는 콩을 몇 개 따서 지었습니다. 길에 많던데요?" 청렴결백하던 이황은 하인에게 콩 주인을 찾아 그 값을 치르고 사죄를 드리고 오라고 했으며 하인이 그리한 후에야 그 콩밥을 먹었다는 이야기.
- 정구와 정인홍이 이황의 제자가 되기 위해 도산서원으로 찾아왔다. 더운 여름인데도 예를 갖추기 위해 도포에 갓을 하고 있었는데 담화를 하기 시작할때 정구는 덥다며 도포와 갓을 벗고 수건으로 땀을 닦았으나 정인홍은 반대로 갓과 도포를 벗지 않은 채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고 정자세로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농운정사에서 쉬었는데 정구는 더위를 못참고 씻느라 바쁜데 정인홍은 여전히 정좌세로 있었음을 이황은 전해 듣는다. 다음날 이들은 폐백을 갖추고 이황의 제자가 되기 위해 찾아왔는데 정구는 제자가 되었으나 정인홍은 이황이 거절했다. 제자들이 이유를 묻자 이황은 "정인홍은 상정(常情)[28]을 무시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고 말하였다. 얼마 뒤, 정인홍은 이황의 라이벌격인 남명 조식의 제자가 되었고 벼슬자리에도 올라 승승장구하였으나 류성룡을 탄핵하고 계축옥사를 일으켰다. 결국 인조반정 때 참형을 당하고 남명 조식도 부관참시 당하였는 일화가 있었으나 이는 남명 학파에 대한 왜곡된 이야기라는 주장이 있다. 조식의 제자 정인홍이 인조반정 당시 처형된 것은 사실이나, 조식은 생전과 사후 형벌을 받은 적이 없다. 그리고 할석분좌(割席分坐)의 유래로 유명한 화흠과 관녕의 일화와 비교할때, 무척 대조적인 이야기이다.[29]
- 하루는 영의정을 지낸 권철[30]이 도산서원으로 이황을 찾아왔다. 두 학자는 기쁜 마음으로 학문을 토론했다. 그런데 식사가 문제였는데 저녁상에는 보리밥에 콩나물국, 가지잎에 명태무침이 차려져 있었다. 이황은 다른 때와 달리 명태무침이 나왔으므로 맛있게 저녁을 먹었다. 그러나 권철은 도무지 입에 맞지 않아 식사를 할 수가 없었는데 이튿날 아침 식사도 마찬가지였다. 할 수 없이 권철은 일정을 앞당겨 도산서원을 떠나기로 했다. 아쉬운 마음에 권철은 떠나기 전 이황에게 "마지막으로 선생께 좋은 가르침을 하나 받고 싶습니다."라 청하자, 이황은 옷깃을 바로하고 말했다. "대감께서 이 먼 곳까지 찾아 주셨는데 융숭한 대접을 해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러나 대감께 드린 식사는 일반 백성이 먹는 것에 비하면 성찬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대감께서 식사를 못 하시는 것을 보니 나라의 장래가 걱정됩니다. 정치의 근본은 여민동락(與民同樂), 즉 관과 민이 일체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대감께서는 앞으로 백성과 고락을 같이 하시기 바랍니다." 이에 부끄러워진 권철은 얼굴을 붉히며 "참으로 좋은 가르침입니다. 백성에게 다가가는 길은 언제나 내 안에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습니다."라고 대답했고, 이후 권철 본인도 검소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 단양 군수로 재직하던 시절 관기였던 두향과의 로맨스 또한 알려져 있다. 당시 이황의 나이는 48세, 두향의 나이는 18세. 다만 두 사람이 만난 기간은 9개월 남짓으로 그다지 길지 않았는데, 이황의 형 이해가 단양 군수의 직속상관인 충청도 관찰사로 임명되자 상피제에 따라 이황 쪽이 풍기 군수로 옮겨가야 했기 때문이다. 이황이 떠난 뒤 두향은 남한강 근처에서 살다가 사망했으며[31], 남한강 강가에 있는 그녀의 묘는 현대에도 이황의 후손과 지역민들이 관리해 주고 있다. 두향의 묘가 현대에 알려진 것은, 정비석의 소설 <명기열전>에서 두향을 언급하면서부터이다. 충주댐 건설로 수몰될 상황에 처하자 현재의 위치로 이장해 주기도 했다. 이황과 두향이 서로를 어떻게 생각했는지에 대해서는 야사 기록마다 조금씩 다른 편으로 학자의 이미지에 맞게 플라토닉 러브에 가까웠다는 이야기부터 위의 '밤퇴계' 에피소드처럼 매우 열정적인 애정 관계였다는 이야기까지 다양하다. 조선 후기의 문인이었던 이광려는 두향의 묘를 찾아가 그녀를 추모하는 시를 쓰기도 했다. 야사에 따르면, 두향이 이황에게 매화를 선물했는데 이것이 이황이 평생 아끼던 그 매화라는 설도 있다.
- 고려대 한문학과 김언종 교수의 논문 퇴계의 행적과 일화의 여러 양상에 따르면 퇴계 이황에 대한 야사들은 상당이 허구라고 한다. 정인홍(鄭仁弘)이 정구(鄭逑)와 함께 제자가 되기 위해 도산서당으로 왔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정인홍은 한 번도 퇴계를 뵌 적이 없고 정구가 집지(執贄)하러 온 것도 여름이 아니라 봄이었다. 둘째며느리 류씨의 개가는 친정에서 추진한 것이고 퇴계는 오히려 개가를 최대한 막으려 했다. 단양기생 두향(杜香)과의 로맨스도 허구인데, 실제로는 퇴계 이후 시대의 기생 두양(杜陽)이었고 그녀가 나이 스물에 죽었고 유언에 따라 강선대 건너편에 묻힌 것은 사실이나 아예 시대가 달라 퇴계와의 로맨스는 허구이다. 낮져밤이 이야기나, 퇴계 이황이 성에 개방적이었다는 퇴계호색설 일화는 근거없는 이야기라고 한다.[32] 안동대학교 신호림교수의 논문 퇴계에 대한 설화적 기억과 성 담론 고찰에서는 이러한 허구의 퇴계호색설을, 설화향유층이 교조적인 성리학적 규범과 권위에 도전하며 저항하였다는 식으로 해석하였다.
- 제자인 이덕홍의 증언에 의하면, 죽기 나흘 전인 1570년 12월 4일에 제자들을 만나고 "내 평소에 잘못된 소견을 갖고서 제군과 종일 강론하였는데 이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平時以謬見, 與諸君終日講論, 是亦不易事也.)라고 말했다고 한다.(《퇴계집》 언행록5 〈고종기〉 中) 말인 즉, "너희들이 나도 모르는 것을 물어봐서 그거 대답하고 가르쳐주느라고 무지하게 힘들었다."라는 소리.
- 인간의 도리를 지켜야 한다고 했다가 오히려 증손자를 죽게 만든 이야기가 있다. 1568년 장손인 이안도가 자식을 얻었다. 당연히 이황도 이 증손자의 탄생에 매우 기뻐했다. 그런데 하필 안도의 아내가 출산 6개월 만에 또 임신을 하는 바람에 젖이 나오지 않게 되었다. 이 때문에 안도는 이황에게 유모를 보내달라고 간청했다. 이황의 하인 중 마침 딸을 낳은 하녀를 유모로 데리고 가겠다고 한 것. 그러자 이황은 난처해하며 '내 자식 살리겠다고 남의 자식을 굶겨 죽일 수는 없다. 둘째가 태어나면 모두 살릴 수 있을 것'이라며 거절했다. 결국 안도는 둘째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첫째에게 미음 등을 먹이며 키워야 했지만 아기의 약한 소화기관이 미음을 받아들이기는 만무. 증손자는 결국 이 해의 겨울과 봄만 겨우 넘기고 동생이 태어나자마자 병으로 죽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이황은 안도에게 편지를 써서 위로하면서도, '너라면 어떻게 했겠느냐?'라는 글귀를 남겼다. 그리고 절친한 문인들에게 자신의 증손의 죽음을 얘기하며 슬퍼하였는데 이황도 증손자의 죽음에 심경이 매우 복잡했을 듯 하다.
이황의 자(字)는 경호(景浩)요, 성품과 도량이 온순하여 수연(粹然)하기 옥과 같았다. 젊을 적에 과거로 발신(發身)하였으나 나중에는 성리학에 뜻을 두어 벼슬하기를 즐기지 않았다. 을사사화 때 이기(李芑)가 그 명성을 꺼려 임금에게 아뢰어 관작을 삭탈하니, 그것을 억울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기가 다시 아뢰어 복작(復爵)시켰다. 이황이 권간(權奸)들이 세력을 잡고 있는 것을 보고는 더욱 조정에 설 마음이 없어 벼슬을 시킬 때마다 사직하고 나오지 않기 일쑤였다. 명종(明宗)은 그가 마음을 편안히 가지고 벼슬을 사양함을 가상하게 여겨 작계(爵階)를 여러 급 올려 자헌(資憲 정2품)까지 되었다. 이황은 예안(禮安)의 퇴계촌(退溪村)에 살면서 퇴계(退溪)라 호(號)하고 의식을 겨우 이어갔으며 담박한 것을 즐겼고, 세리와 화려한 것은 뜬구름같이 보았다. 말년에 도산(陶山)에 집을 지으니 자못 임천(林泉)의 정취가 있었다. 명종 말년에 여러 번 불렀으나 굳이 사퇴하고 나오지 않았다. 명종이 ‘어진 이를 불러도 오지 않는다는 탄식(招賢不至歎)’으로 시제(詩題)를 내어 근신(近臣)을 시켜 시를 짓게 하고 화공(畫工)을 시켜 이황이 사는 도산(陶山)의 경치를 그려 오게 하여 그것을 볼 만큼 그 경모하는 정도가 이와 같았다.
이황의 학문은 문(文)으로 인하여 도(道)로 들어갔고, 의리(義理)가 정밀하여 한결같이 주자(朱子)의 훈(訓)을 준수하고 여러 가지 학설의 이동(異同)을 이리저리 통하였으나 모두 주자의 학설에 절충시키지 않은 것이 없었다. 한가한 곳에 홀로 거처하면서 경전 밖에는 다른 것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 가끔 수석(水石) 사이에 산책하며, 성정(性情)대로 시(詩)를 읊으며 한가한 흥을 풀었다. 배우는 이들이 물으면 아는 대로 다 말해 주었으나 제자(弟子)를 모아 선생으로 자처하지 않았다. 평소에 긍지를 가지려 애쓰지 않아 보통 사람과 크게 다른 점이 없는 것 같았으나 세상에 나섬과 들어감, 나아옴과 물러남, 사양함과 받음, 취함과 줌의 지조에 있어서는 털끝만큼이라도 어긋나는 일이 없었고, 남들이 선사하는 것도 의(義)가 아니면 받지 아니하였다. 한성(漢城)에 우거해 있을 때 이웃집에 밤나무가 있어 두어 가지가 담을 넘어와 밤이 익어 뜰에 떨어지니, 아이들이 주워 먹을까 하여 손수 주워서 담 밖으로 던져 주었다. 그 청렴하고 깨끗한 점에는 더할 것이 없었다.
금상(今上)이 즉위하자 조야(朝野)에서는 아주 잘 다스려지는 정치를 바라, 사론(士論)이 한결같이 이황이 아니면 성덕(聖德)을 성취시키지 못한다고 하였고, 임금도 이황에게 마음을 두었으나, 이황은 스스로 자기 재지(才智)가 대사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 또 말세에 유자가 일하기 어렵고, 임금의 마음 역시 잘 다스려 보려는 정성이 부족하며 대신 또한 학식이 없는 터이라 한 가지도 믿을 것이 없었기 때문에 작록(爵祿)을 굳이 사양하고 기어이 물러가곤 했다. 도산(陶山)으로 간 뒤에는 당시 정사를 말하지 않았으나, 여론이 다시 나오길 바랐는데 갑자기 별세하니 나이 70세였다. 조야가 애통해 하고 부고가 대궐에 이르자 임금도 매우 슬퍼하고서 영의정을 추증하시고 1등의 예(例)로 장사하라 명하였다. 이황의 아들 준(寯)이 유언에 따라 예장(禮葬)을 사퇴하였으나, 조정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태학(太學 성균관)의 여러 학생들이 제전(祭奠)과 제문을 갖추어 가지고 가서 제사하였다.
이황은 특별한 저서는 없으나, 그 논의에 있어서 성현의 교훈을 발휘ㆍ선양한 것이 세상에 많이 행한다. 중종 말년에 화담 처사(花潭處士) 서경덕(徐敬德)이 도학(道學)으로 당시에 유명하였는데, 그 이론에 기(氣)를 이(理)라고 인정한 것이 많았다. 이황이 이것을 병통이라 생각하여 글을 지어 변박(辨駁)하니, 그 논지가 밝고 통달하여 배우는 자들이 믿고 복종하였다.
이황은 당세 유가의 종주로서 조광조(趙光祖) 뒤로는 그에 비할 사람이 없었다. 이황의 재주와 국량(局量)은 조광조를 따르지 못하나, 의리를 깊이 연구하여 지극히 정미한 점에서는 또 조광조가 그를 따르지 못하는 것이다.[33]}}}||
- 1970년에는 남산도서관 앞에 퇴계 이황 동상을 건립하기도 했다.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가 활동하며 동상 15기를 만들었는데 그 중에 남산도서관 앞 두 동상(이황, 정약용)도 포함된 것. 도서관 앞에 세우는 것이므로 일부러 유학자 동상을 선택한 듯하다.[34]
- 2018년 안동에 있는 권굉(1576~1652)의 무덤에서 퇴계 이황의 친필 만장 등 문화재급 유물이 대거 출토됐다.# 453년 만인 2017년 해당 무덤의 이장 과정 중 발견됐다.
- 퇴계가 가진 대학자로서의 이미지가 워낙 강해 청렴결백한 것을 넘어 빈한하게 살았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사람도 많지만[35] 실제로는 당대의 양반들이 으레 그러했듯 퇴계 역시 재산 치부에 꺼리낌이 없었으며 조금 부유한 정도가 아니라 한 지역의 대부호에 가까웠다. 이황이 죽고 나서 자식에게 상속한 재산의 분재기(分財記)에 따르면 이황 집안의 토지는 전답(논밭)이 합계 3000두락으로 약 36만 4천 평에 달하였고 노비가 남녀 합쳐 370명에 달하였다. 당대 사림 지주들의 평균적인 재산이 논밭 300두락에 노비 100여 명이었음을 비교해 보면 당시 기준으로도 꽤나 부유했던 편인 것. 뿐만 아니라 이황은 직접 집안일에 나서서 재산 치부에도 여념이 없었는데 가령 집안의 노비들을 양인과 결혼시켜 자식을 낳게 하고 노비의 숫자를 불리려는 생각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며 자식들에게도 가르칠 정도였다.[36] 청빈을 자랑으로 여긴다던 성리학자 사림파들 중에서도 조선조 최고의 유학자라고 불리는 사람조차 실제로는 수백 명의 노비를 부리던 대부호였다는 사실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기사. 미국의 위인들도 흑인 노예를 통해 부를 축적했다는 동일한 비판을 받기도 한다.
- 위의 비난과 비슷하게 북한에서는 노비제도를 옹호한 반동사상가라고 폄하한다.#
- 이언적의 사상을 이어받아 발전시킨 영남학파의 브레인이자 동인의 스승격이 되는 유학자. 이이와 함께 이기론을 형성해 성리학을 완성시켰다고 평가받으며 두 사람이 함께 대비되는 경우도 많다.[37] 그러나 실제 두 사람은 나이차가 부모자식 뻘로 나는 것 등으로 인해 대립하던 관계는 아니었다고 하며 학문적인 합의를 보지는 못했으나 지속적으로 편지를 교환하면서 이기론을 논했다고 한다.
- 기(氣)보다는 이(理)를 중시했고, 예안향약을 만들었다. 주자서절요를 저술하였다.
- 서경덕과는 지속적으로 대립해온 입장. 철저한 주기론자였던 서경덕과 주자학을 집대성한 주리론자 이황은 자주 의견을 교환하며 논쟁을 이어갔다.
- 남명 조식과는 당대에도 알려진 대표적인 라이벌. 조식은 상대적으로 부드러운 편인 이황을 권력에 굴복하는 행태로 보고 비판했고 이황은 성품이 뻣뻣하고 지나치게 의(義)를 중시하는 형태를 자기 수양에 소홀하다는 이유로 비판했다. 동갑내기에 같은 경상도에 살았음에도 평생 편지로만 교류하고 만나본 적 없을 정도.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 친우라고 할 수 있는 대표적 인물은 김인후가 있다. <퇴계집>에 보면 김인후와 교류한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 은근히 병약 체질이었는지 소화 불량이 있고 병약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래서 운동을 중요시하며 도가적 요소인 '도인술'을 바탕으로 기체조의 일종인 활인심방(活人心方)을 개발해 권하고 또 수련하기도 했다는 야사가 전해진다.
- 매화 사랑으로도 유명했는데 매화를 '매형(梅兄)', '매군(梅君)'이라고 부를 정도였으며 죽기 직전에 "저 매형에게 물을 주라"고 했던 일화도 유명하다. 현대에도 후학들이 이황을 기리는 의미에서 도산서원에 매화나무를 많이 심어 놓았다. 다만 아쉽게도 이황이 직접 키우던 매화나무는 이미 말라 죽고 없다.
- 임진왜란, 정유재란를 통해서 이황의 저서가 일본으로 넘어갔는데 도쿠가와 막부 성립 이후 쇼군가의 지시로 이황의 저서가 훈점본 형태로 발간되었고 이후에 쇼군가, 일본 황실에서도 강의하는 책으로 사용되었다.[46]
- 그의 필적들.
- 정신 수양을 위해 투호를 하였다. 그래서 "정심투호"라고 하며, 2007년까지 사용된 천원권 지폐에 투호가 그려진 이유도 그것이다.
- 문정왕후가 사망한 후 그녀가 지원하던 승려 보우를 극형으로 처벌해야 한다는 유생들의 상소가 쏟아졌다. 당시 유림의 유력자인 이황도 보우에 대해 처벌하라는 상소를 올릴 법 했지만, 의외로 이황은 상소를 올리지 않았고 오히려 그를 처벌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했다. 이황 본인도 평소에는 숭유억불에 따라 불교를 배척하던 입장이었던 것을 보면 특이한 면.
보우와의 연결은 이후에 또 이어지는데, 이황이 관직 생활을 완전히 끝내고 고향 안동으로 귀향할 때 중간에 숙박한 곳이 바로 보우가 주지로 있었던 봉은사였다.
- 젊은 시절 과거에 세 차례 낙방했을 당시 스트레스가 심했던 모양인지, 집에서 쉬고 있을 때 밖에서 '이 서방'하고 부르는 소리에 자신이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니 저렇게 하대하듯 부르는구나 싶어 슬쩍 밖을 내다봤는데, 알고 보니 자신이 아니라 이씨 성을 가진 하인을 부르는 소리였더라는 일화가 있다.
- 이황의 외모에 대해 유추할 수 있는 숙부인 이우의 초상화와 기록이 있는데 제자들이 이황을 "성격이 온후하고 인자해 가까이 하면 훈풍을 대하는 듯하다"고 평했고, 임형수는 '대나무와 청수(맑은 물)'에 비유했다. 이황의 생전 초상은 배순이라는 인물이 제작한 철상이 있었지만 현재는 전해지지 않으며, 위의 표준영정은 상상화다.
5. 대중매체
-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과 이를 원작으로 한 이두호 화백의 만화 <임꺽정>에서는 이황이 임꺽정에게 은혜를 입은 장면이 나온다. 을사사화로 이황의 형인 이해가 귀양을 가다가 길에서 죽자 임꺽정과 형인 가도치가 시신을 수습해 주고 이에 이황이 직접 임꺽정에게 감사를 표하러 찾아온다. 하지만 양반에 반감을 가졌던 임꺽정은 이황의 인사를 탐탁지 않게 여긴다.[47] 임꺽정 형제는 천한 백정이 양반의 시신에 손댔다는 이유로 관아에 끌려가 곤장을 맞고 말았다.
- 1995년 KBS1에서 방영된 <역사의 라이벌>의 마지막편으로 방영된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에서 배우 신구가 이황의 역할을 맡았다. 이후 2001년 1월 KBS1에서 <굿모닝 미스터 퇴계>라는 신년 특집을 방영한 적이 있는데 이 때 재현극이 20분 가량 삽입되어 있었고 배우 신구가 여기에서도 이황의 역할을 맡았다. 이때는 앞서와 달리 당시 롯데리아 광고와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 등으로 약간 개그 캐릭터화된 상태였으나 배우와 배역의 싱크로율이 상당해 눈길을 끌었다.
- 2004년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배우 이순재가 연기했다. 젊은 시절의 류성룡이 관료 사회의 현실에 실망해 가르침을 얻으려고 안동의 이황을 찾아갔는데 도중에 물가에서 낚시를 하던 한 노인에게 도산서원[48]으로 가는 길을 가르쳐 달라고 하자 "자신의 집으로 가면 된다"는 답이 돌아오는데 노인이 바로 이황이었던 것. 류성룡에게 진정한 학인(學人)의 길이 무엇인지 일깨워 주고 하성군을 소개시켜 준다. 다만 류성룡이 이황에게 가르침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로는 잠시 만난 수준이 아니라 오랫동안 이황이 가르치고 아껴준 수제자가 류성룡이다.
- 조선 유학자들의 생애를 주제로 한 최인호의 소설 <유림>에서는 밤퇴계 일화나 두향과의 이야기 등 이황의 생애에 대해 비교적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 2013년 <SNL 코리아> 최수종편의 '쌍꺼풀 메이커' 스케치에서는 천 원짜리 지폐 도안의 눈만 최수종의 눈으로 바꿨는데 엄청난 싱크로율을 자랑한다. 최수종이 맡았으면 하는 사극 배역 중 이황이 추가된 계기가 된 에피소드.
6. 관련 문서
[1] 음력 1501년 11월 25일, 율리우스력 1502년 1월 3일. 한국은행권 천원권이나 대부분의 위인 전기에는 음력 생일에 맞춰 1501년생으로 표기한다.[2] 이이와 같이 지폐에 들어가는 인물인지라 둘의 나이가 비슷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둘의 나이 차는 아버지와 아들뻘이다. 실제로 이황의 나이는 이이의 아버지인 이원수보다 1살 어리고, 어머니인 신사임당보다 2살 많다.[3] 현재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 지역이다. # 조선 후기에는 예안군 지역이었으며 1914년에 예안군이 안동군에 통합되었고 1995년에 안동군이 안동시에 통합되었다.#[4] 음력 1570년 12월 8일, 율리우스력 1571년 1월 3일. 한국은행권 천원권이나 대부분의 위인 전기에는 음력 날짜에 맞춰 1570년 사망으로 표기한다.[5] (족보)[6] 참고로 진성 이씨 집안에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황은 "복건은 중이 쓰는 두건과 같은 모양이라 쓰기에 영 좋지 않다"는 말을 남겼다고 하며 대신 정자관(程子冠)을 썼다고 하는데, 정자관은 오천원권 지폐에서 이이가 쓰고 있는 것이다. 창작물의 반영 오류의 대표적인 사례이다.[7] 퇴계집에 실린 표현이다. 이황의 이기론과도 통하는 말로 곱씹어 볼만하다. 이황은 理와 氣가 구분되면서도 각각 따로이 있을 수는 없다는 전제 아래에, 이가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면서, 사단의 선함이 이와 가깝기 때문이라고 해명하는데, 끝없는 세상의 이치를 성찰할 것이지 사물에 대한 이해에 집착하여 다투지 말라는 위의 말은, 이황의 理에 대한 신뢰를 드러내는 말이라고 볼 수 있겠다.(사단칠정논변) 아래에 더 자세히 나오겠지만, 이황의 理는 근본주의자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8] 청량산에 오르기를 즐겨했다 한다.[9] 더 정확히 말하면 동인 중 남인 쪽이다. 북인 쪽에는 남명 조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단 17세기 중반부터 북인은 아예 정치에서 비주류(북인과 편먹고 설치던 광해군의 몰락 후 북인 대숙청)가 되었으므로, 이후 200년 정도 (권력을 갖고 활동하는 동인 = 죄다 남인)이었으니 동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지도 모르기는 한데, 북인은 그때부터 더 조식이 생전에 주장하던 학문적 주장을 연구하는 식으로 명맥을 이었었다.[10] 사실 서인들 중에도 이황의 문하에서 수학한 사람들이 많다. 붕당이 본격적으로 심해진건 이황이 죽고 꽤 시간이 지나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후대에 동인 중 남인 쪽이 주로 퇴계를 추종했는데, 북인 측이 망한 것도 있고 북인은 전반적으로 남명 조식을 추종했기 때문이다.[11] 인근의 의촌리, 토계리, 원천리, 단천리와 함께 현재도 진성 이씨 집성촌이다.[12] 이 집이 현재의 노송정종택(노송정은 이계양의 호면서 당호.)인데 퇴계가 태어난 방, 퇴계태실이 있다.[출처] 퇴계학부산연구원, 《퇴계학논총 제26집》 (퇴계학부산연구원, 2005)[14] 이황은 그 해에만 형과 둘째 아들을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게 되었다.[반론] 그러나 이황의 철학이 실천성을 배제했다는 해석은 과도하는 주장이 있다. 16세기 조선은 내부에서 갖가지 위기 상황이 발생하고 있었으며 당시 사림파들의 학문 탐구는 이를 극복하기 위한 사회 개혁론을 겸하고 있었다. 물론 양반 계층의 입장에서 민중의 입장을 내려다보는 것이 한계점으로 보일 수 있으나 이는 붕당 정치 전반의 문제점으로까지 연결되기 때문에 이황만의 책임을 묻는 것은 어폐가 있다는 것.[16] 족보명은 이돈환(李惇煥).[17] 2021년 9월부터 공주대학교 사범대학 윤리교육과 조교수에 임용되었다.[18] 딱 이 시기에 방송사에서 퇴계 종가 다큐멘터리 촬영을 나왔었는데 일본 유학을 준비하며 결혼은 포기한 상태였다. 15대 종손 이동은 옹의 생전 신문기사를 보면 결혼을 하지 않은 이치억씨로 인해 이동은 옹과 이근필씨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알려지진 않았지만 아예 반항할 마음으로 기독교 학교에 입학한 적도 있다고 한다.[19] 석사 학위 논문 : 『中庸』의 中思想 硏究(『중용』의 중사상 연구, 2004).[20] 박사 학위 논문 : 退溪哲學의 主理的 特性에 관한 硏究 : 理發說을 중심으로(퇴계철학의 주리적 특성에 관한 연구 : 이발설을 중심으로, 2013. 2).[21] 첫째 부인이 많은 유산을 남겨놓고 죽었기 때문에 이황은 그 덕을 보았으며, 첫째 장모를 그녀가 죽을 때까지 보살폈다고 한다.[22] 부친 권주(權柱)가 갑자사화에 휘말려 사사당하는 바람에 집안이 기울었고(이 때 권주의 아내도 남편을 따라 순절했다), 중종반정으로 나아지는가 했으나 얼마 안가서 권질도 '신사무옥'에 휘말려 유배당했고 동생 권전(權磌)은 국문중에 매를 못 이기고 장살(杖殺)당해 죽었으며 권전의 아내는 관비로 떨어졌다. 그야말로 집안이 완전히 망해버린 것.[23] 대추로 전해지는 이야기도 있다.[24] "너희는 모두 어머니의 초상을 치르지 않았으니 이 초상은 너희 어머니의 초상이라는 마음으로 어떤 사람은 계모가 친모와 차이가 있다고 말하지만 이것은 대개 뜻을 알지 못하여 경솔하게 하는 말이다. 사람은 의(義)가 아닌 것에 빠져서는 안된다.”[25] 물론 20세기 초반부터는 다른 가문에서도 적서 기록을 없앴으나, 당시 족보에서 적서의 기록을 없애는 행보는 매우 파격적이었다.[26] 심지어 퇴계가 떠난 후 그가 앉았던 마루가 더러워졌다 하여 마룻바닥을 대패로 모두 벗겨내버렸다.[27] 이는 퇴계가 조선 전기의 인물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일 수도 있다. 조선 전기의 가족사회는 비교적 남녀평등에 가까운 시스템을 갖고 있었으나 18세기 이후 조선 후기는 교조적인 성리학과 가부장제가 가족을 지배했기 때문에 과부의 재가에 대해서도 전기보다 엄격한 기준이 적용되어갔고, 평민보다 사대부 계층의 재가가, 재가보다 삼가(2번째 재혼)이 훨씬 나쁜 것으로 취급되어 자녀의 관직 진출에도 지장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단 예외는 있다. 19세기 중엽의 학자 조병덕이 자신의 셋째 며느리가 가난한 집에 시집와 고생만 하다 병을 얻자 친정에 아들과 함께 보낸 사례가 있다.[28] 평범한 사람의 인정.[29] 화흠과 관녕은 같이 공부를 하며 살았던 친한 사이였는데, 화흠이 재능이 더 뛰어났다고 한다. 어느날 둘이 밭을 갈다가 금을 발견했는데, 관녕은 신경도 안 썼지만 화흠은 오랫동안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고 한다(혹은 그대로 가지고 갔다는 얘기도 있다). 또 어느날은 방에서 공부를 하다가 귀인의 행차인지 거리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도 관녕은 방에서 공부만 했고, 화흠은 밖에 나가서 구경을 하다가 왔는데, 이 일 이후로 관녕은 화흠을 상대하지 않았다고 한다. 훗날 화흠은 손권 밑에서 벼슬을 하다가 더 큰 부귀영화를 탐하여 조조 밑으로 들어가 한 황실 찬탈에 큰 역할을 하게 되고, 반대로 관녕은 요동으로 가서 흰 옷을 입고 살며 위나라에서 벼슬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30] 권율 장군의 아버지이자 백사 이항복을 손녀사위로 둔 그 권철이 맞다.[31] 이황이 사망하자 그의 제를 지낸 후 이황을 따라 남한강에 뛰어들어 자살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야사일 뿐 근거가 없다.[32] 퇴계학연구원 논문검색 2015년 vol., no.138, 통권 138호에서 열람 가능하다.[33] 석담일기 상권 융경 사년 경오(隆慶四年庚午) 1570년(선조 3년)[34] 현재 남산타워로 오르내리는 산길에 동상이 세워져 있다. 서울에서 남산타워로 가는 2번이나 5번 버스를 타고 끝까지 간다면 볼 수 있다.[35] 아닌게 아니라 <선조실록>의 이황 졸기(卒記)문에는 이황이 빈약(가난하고 검소함)을 편안하게 여기고 분분한 영화 따위는 뜬구름 보듯 하였다 라고 나와 있다.[36] ”범금(范金)과 범운(范雲) 등을 불러다가 믿을만한 양인 중에 부모가 있어 생업을 의탁할 수 있는 자를 골라 시집을 보내고, 죽동에 와서 살게 한다면 더욱 좋겠다.“ (『도산전서(陶山全書)』 中) 이황이 노비들을 양인(百姓)들과 적극적으로 맺어주려고 했던 까닭은 당시 노비와 양인 사이에 태어난 자식은 모두 노비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일천즉천’(一賤卽賤〮부모 중 한 명만 천인이면 자식도 천인)이라고 합니다. 노비끼리 결혼시키는 것보다 이처럼 양천교혼(良賤交婚)을 시키면 노비를 손쉽게 늘릴 수 있었기 때문에 조선 중기의 사대부들은 노비들이 양인과 결혼하도록 유도했다.[37] 둘의 이론이 대조적이고 둘의 학파가 후에 동인과 서인으로 대립하기 때문에 혼동하기 쉬운데 두 사람은 붕당의 형성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았다. 이황은 붕당이 만들어지기 전에 사망했고 이이는 붕당을 막기 위해 가장 노력했다.[38] 조식의 문하에도 있었다.[39] 심의겸과의 대립으로 동인의 영수가 된다. 조식의 문하에도 있었다.[40] 조식의 문하에도 있었다.[A] 서인[A] 서인[43] 성수침의 문하에도 있었다.[A] 서인[45] 서경덕의 문하에도 있었다. 허균, 허난설헌의 아버지.[46] 근거: https://ja.wikipedia.org/wiki/%E6%9D%8E%E6%BB%89[47] 이황이 돌아간 뒤에는 "고맙다고 인사하러 오는게 무슨 특별한 은혜를 베푸는 것 같소"라며 투덜거리고 돌이(임꺽정의 아버지)는 "그래도 양반이 직접 백정을 찾아오는 것만으로도 무던한거다"라고 달랜다.[48] 도산서원은 이황이 죽은 후에 도산서당 뒤에 세워진 서원이므로 반영 오류이다.[49] 퇴계 이황의 14대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