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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주화운동/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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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주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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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정신적 지주2. 5.18 민주화운동 기록물
2.1. 의의2.2. 등재 과정까지 치른 여정2.3. 기록 구성2.4. 등재 허가의 주요 사유
3. 노벨상과의 관계4. 기념행사5. 여담

1.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정신적 지주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결국 전두환신군부에게 무자비하게 진압됐지만 도리어 전두환 정권의 원죄()가 되었다. 5.18은 1987년 6월 항쟁까지 이어지는 1980년대 민주화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1980년대 학생 운동에 뛰어든 많은 대학생들은 대학교에 들어와서 1980년 광주에서 일어난 사건의 실상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았으며, 학생 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돌아오는 5월마다 5.18 추모 행사가 열렸고, 이때마다 민주화 열기는 뜨거워졌다고 한다. 이는 많은 386 인사들이 증언하는 바이기도 하다. 더욱이 5월 18일 시위가 일어난 이유는 5월 14일 서울역 시위와도 상관이 있다. 너무 많은 학생이 몰리고 군대가 진입하고 있던 학생회는 우선 시위를 해산하고 제대로 모이자하고 했으나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가 내려지며 그 약속은 전체적으로 지켜지지 못한거에 대한 죄책감이 있기 때문이였다. 자세한 내용은 서울의 봄참고

한홍구 교수는 자신의 저서에서 적길 5월 27일 새벽의 저항이 그 이후 민주화 운동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치게 됐다고 서술했다. 당시 보잘 것 없는 무장으로 공수부대와 마지막 항쟁을 했던 사람들은 여느 서민들이었다. 자신이 죽을 것을 앎에도 도망치지 않고 신군부에 정면으로 맞섰던 것. 이것은 이후 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인텔리 계층에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죽음으로 지키고자 했던 '민주주의'란 가치를 고민하고 부끄러움을 이겨내기 위해 운동권에 투신했던 사람들이 폭증했다. 1970년대에 비해 1980년대 학생운동이 격해지고 활발해진 것은 99%가 5.18로 말미암은 것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5.18을 계기로 미국에 대한 학생운동의 인식이 크게 바뀌게 된다. 극단적인 반미 구호가 대학가에서 대중화되는 데 5.18이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민주주의의 수호자라고 믿었던 미국에 대한 깊은 배신감과 한국군미국이 동의하지 않으면 병력 이동 자체가 불가능하고 대규모 병력이 투입되어 시민들을 제압했다는 건 미국의 동의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라는 NL의 왜곡된 주장 때문이었다.[1] 그래서 80년대엔 전국의 미국 문화원이 학생 운동의 주요 공격 대상이 됐으며, 현재도 운동권 출신들은 반미 사상이 깊게 박혀 있다.

5.18 이후로 군부정권은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된다. 전두환김대중 등에게 '광주 사태'의 책임을 물어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했다. 이 외에도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 선언을 한 직후, 8월 27일 소위 체육관 선거를 통해 전두환은 대통령 자리를 탈취했다.

지역적인 면에서는 광주광역시를 비롯한 전라도 지역의 트라우마로 작용해 이후의 민주정의당3당 합당으로 이어지는 보수 세력에 대해 적대심을 가지고, 민주당계 정당의 표밭이 되는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2] 전두환이 기세등등하던 80년대는 용기 있는 운동권과 민주화 세력을 제외하면 5.18의 '5'자도 대놓고 꺼내기 힘든 상황에서 울분을 삭혀왔다. 심지어 전두환은 담양의 한 여관에 숙박하였는데, 그 여관에는 전두환이 다녀간 곳이라고 '전두환 대통령 각하 내외분 민박 마을'이라는 기념비석이 세워졌는데 이는 5.18을 겪은 광주 시민들에게 상당히 굴욕적으로 다가왔음에도 큰 말이 나오지 못했다가 민주화가 되고 난 이후에야 비로소 1989년 비석을 뗀 다음 망월동 묘역 바닥에 묻은 뒤 참배객이 즈려밟을 수 있도록 조치했다. 이미 박정희 정부 시절부터 유무형의 정치적인 차별을 받고 있었지만 5.18의 참상은 전라도가 20년 뒤 21세기가 도래한 지금까지도 다시는 보수 세력을 지지하지 않게 만들 정도로 심각했으며 호남소외론의 가장 결정적인 명분이 되었다. 이 부분은 광주광역시/정치영호남 지역갈등 문서에도 자세히 나와 있다.

2. 5.18 민주화운동 기록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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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해례본)』

『조선왕조실록』
[朝鮮王朝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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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조직지심체요절』 하권-
佛祖直指心體要節 (下卷)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고려대장경판 및 제경판
(高麗大藏經板-諸經板)

조선왕조 『의궤(儀軌)』

『동의보감(東醫寶鑑)』

1980년 인권기록유산
5·18 광주 민주화운동 기록물

『일성록(日省錄)』

『난중일기(亂中日記)』:
이순신 장군의 진중일기(陣中日記)

새마을운동 기록물

KBS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기록물

한국의 유교책판

조선통신사에 관한 기록 –
17세기~19세기 한일 간 평화구축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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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실 어보와 어책

국채보상운동 기록물

4.19혁명 기록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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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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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한국어 1980년 인권기록유산 5·18 광주 민주화운동 기록물
영어 Human Rights Documentary Heritage 1980 Archives
for the May 18th Democratic Uprising against Military Regime,
in Gwangju, Republic of Korea
프랑스어 Patrimoine documentaire des Droits de l’homme, 1980
– Archives du Soulèvement démocratique du 18 mai
contre le régime militaire, à Gwangju, République de Corée
국가·소장 대한민국: 국가기록원, 광주광역시, 대한민국 육군본부, 5.18 기념재단, 국회도서관
미국: 국무부, 국방부
등재유형 기록유산
등재연도 2011년
제작시기 1980년 ~
The May 18th Democratic Uprising not only played a pivotal role in the democratization of South Korea but also affected other countries in East Asia by dissolving the Cold War structure and achieving democracy. After the 1980s, various democratic movements took place in the Philippines, Thailand, China, Vietnam, and elsewhere in an attempt to follow in Korea's footsteps. The documentary items related to the Uprising, which took place in Gwangju, Korea between 18 and 27 May 1980, take the form of documents, photos, images, etc. relating to the citizens' rebellion, punishment of the perpetrators, and compensation.
5·18 민주화운동은 한국의 민주화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냉전구조를 녹이고 민주주의를 쟁취함으로써 동아시아의 다른 나라에도 영향을 미쳤다. 1980년대 이후 필리핀, 태국, 중국, 베트남 등지에서 한국의 전철을 밟기 위한 다양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다.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한국 광주에서 일어난 항쟁 관련 기록물은 시민의 저항, 가해자 처벌, 보상 관련한 내용이 문서, 사진, 영상 등의 형태로 이루어져있다.
유네스코
2011년 5월 25일, 5.18광주민주화운동 기록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으로 등재되었다. 등재된 페이지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페이지.

기록 유산 중 현대사 관련 자료 중 최초의 등재 자료이자, 유례 없는 대규모 자료라 총 9개의 주제로 분류되어 기록된다.

9개 주제, 4,271권, 85만 8,904페이지, 흑백필름 및 사진 2,017컷으로 구성되어있는데, 이 중 미국이 제공한 기밀 해제 문서는 국가기록원의 자료를 보조하는 참고용으로 거론되었으나, 재검토 과정에서 국회 진상규명회의에 참가한 당시 수뇌부들의 모순된 증언을 지적하는 증언 자료로 변경되었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추진하게 되자 미국에서 추가로 다량의 기밀 자료를 공개했다. 그리고 미국 내 소장 자료는 독립 카테고리로 승격되었다.

2.1. 의의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기록물은 기록 유산 중 현대사 관련 자료 중 최초의 등재 자료이자, 유례 없는 대규모 자료로 총 9개의 주제로 분류되어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물에는 광주 민주화 운동의 발발과 진압, 그리고 이후의 진상 규명과 보상 등의 과정과 관련된 방대한 자료를 포함하고 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은 한국의 민주화를 발전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으며, 국제적으로는 필리핀, 태국, 베트남 등 아시아 각국의 민주화 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현대사 자료 중에서 최초로 유네스코 기록 유산으로 등재될 수 있었던 이유는 이 기록물들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발생과 억압부터 진상 조사 활동과 보상에 이르기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기록물들이기 때문이었다. 이를 통해 민주주의 발전과 인권 향상의 과정, 그리고 인권 침해의 사례와 그에 대한 보상에 관한 절차를 가장 잘 보여주는 기록물이라는 점에서 높게 평가할 수 있다.

2.2. 등재 과정까지 치른 여정

최초의 등재 요구 제출 시기는 2010년 3월이었으나, 한국 내 유사역사학 단체들이 '광주 사태북한에 의해 조작된 것이며, 기록이 투명하지 못해 기록 유산으로 등재될 이유가 없다'는 요지의 항의 서한이 유네스코에 전해져 검토에 들어갔다. 총 7개 단체가 항의 서한을 보냈었으며, 이 중 실존 단체이자 대표자의 신원이 확인된 것은 3명으로, 각각 국가정체성회복협의회의 박세환, 한미우호증진협회의 서석구, 사회발전시스템연구소의 지만원이다.

이에 유네스코는 광주 민주화 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게 만든 수뇌부가 대한민국 헌법에 의해 법적인 처벌을 받았다는 점을 거론하며, 항의 서한은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또한 2011년 당시 국무총리 김황식도 등재에 동참하는 발언을 국정회의 중에 해서 정부 역시 광주 민주화 운동의 기록 유산 등재를 원하는 것으로 사실상 여겨졌다.

그렇게 마침내 2011년 5월 25일 등재가 확정되었다.

2.3. 기록 구성

세계 기록 유산 등재에 서포터로 참가한 국가기록원은 그간 간행해온 5.18 민주화 운동 자료를 제공했고, 광주 시민 중 민주화 운동에 참가한 것으로 확인된 이들이 증언 자료의 검토에 참가[3], 9개의 주제로 분류된 방대한 양의 자료가 만들어졌다.

2.4. 등재 허가의 주요 사유

훈민정음 등재를 '한글' 등재로 오해하는 것처럼, 이 기록물 등재를 종종 민주화 운동 자체가 등재된 것으로 오해 받고는 한다.

현대사 자료 중에서 최초로 유네스코 기록 유산으로 등재될 수 있었던 이유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발생과 억압부터 진상 조사 활동과 보상에 이르기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기록물들이기 때문이다. 즉, 민주주의 발전과 인권 향상을 보여주는 기록물이자 교과서인 셈이다.

특히 유엔 인권위원회가 진상 조사, 가해자 처벌, 명예 회복, 보상, 기념 사업이라는 인권침해에 대한 보상 규칙을 결정하였는데, 그 모범이자 기준으로 5.18 민주화운동이 언급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을 모두 모은 것이기에 당연히 높이 평가되었다.

한편, 유네스코에선 5.18 민주화 운동 기록물의 세계 기록 유산 등재와 관련하여 5.18 민주화 운동을 민주주의와 인권의 전환점으로 평가한다. 아울러 동아시아의 국가들의 민주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보았다. 즉, 이 운동이 세계적으로 중요하다고 보았으며, 그렇기에 그 기록물 또한 높이 평가한 것이다.

3. 노벨상과의 관계

대한민국의 노벨상 수상자는 김대중(2000년 노벨평화상 수상)과 한강(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두 사람의 수상 사유 모두 5.18 민주화운동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김대중의 노벨평화상 수상은 '평생에 걸친 민주주의와 인권 투쟁, 그리고 남북 화해를 위한 노력'으로, 여기에는 5.18 민주화운동이 크게 연관되어 있다. 또한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작품은 5.18을 소재로 한 소설 '소년이 온다'이다. 노벨상이 주목한 한강·김대중…‘오월 광주’가 뿌리

4. 기념행사

매년 5월 18일에 광주 운정동의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5] 정부 주관의 기념식이 열리고 있다. 5.18 민주화운동이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상징성이 남다르기에 대한민국 대통령이 임기 중 1회 이상은 무조건 참석하는[6] 기념행사이기도 하다. 대통령의 사정으로 기념식 참석이 어려울 경우 국무총리가 대통령을 대신한다. 아울러 국경일이 아님에도 지상파 3사가 기념식을 전국에 동시 생중계하는 행사이기도 하다.


정부 주도의 5.18 기념행사 개최는 민주화운동 전개 후 16년이 지나서야 가능했다. 위의 영상처럼 김영삼 대통령의 적극적인 재조사가 있고 마침내 1995년 12월에 시행된 5.18 특별법에 '정부가 관련 기념행사를 열어야 한다'는 조항이 마련되면서 1996년 5월부터 민-관 합동 추모행사가 열렸고 1997년 현재의 5.18 신묘역인 국립민주묘지가 완공되면서 정부(국가보훈처) 주관으로 기념식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는 망월동 구묘역에서 5.18 관련 시민단체들의 주도로 추모식이 열렸다. 이마저도 전두환이 집권하던 5공 시절에는 추모행사를 갖는 것이 쉽지 않았다. 대통령 직선제 부활을 통해 출범한 노태우 정부 시절부터 그나마 정부가 용인하는 범위 내에서 추모행사가 열렸다.

기념식은 주요 인사들의 헌화와 분향, 국민의례, 5.18 경과 보고, 기념공연, 대통령 or 국무총리의 기념사, 5.18 주제 노래(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등의 순으로 열리는데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에는 박승춘 등으로 인해 5.18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하는 것이 사실상 금지되면서 상당한 논란이 된 바 있다.

정부 주도의 기념 행사와는 별도로 광주광역시와 5월 단체, 광주·전남 지역 시민 단체 등이 주관하는 시민 대회가 옛 도청 앞 금남로에서 열리기도 하며 행사 전날인 5월 17일에는 각종 문화 공연이 포함된 전야제도 열린다. 과거 노태우 정부 시절까지는 시민 대회가 열린 이후 대대적인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5. 여담

TK, PK는 민주당계 정당이 두 자릿수 지지율을 얻지만, 호남은 반대로 보수 정당이 한두 자릿수를 오가는 수준으로 매우 처참하다. 광주 학살의 주범인 전두환이라면 이를 갈기 때문에 5.18 민주화 운동의 왜곡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광주의 부모 세대가 바로 그 5.18 당시 광주에 있던 사람들이다. 눈앞에서 벌어진 참극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는데 그걸 왜곡하려 들면 불같이 화를 내는 것도 당연하다. 2013년 5월 20일에는 2일 전인 5월 18일 행사를 계기로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폄하 및 왜곡을 하는 것에 대해 강력 대응한다고 강운태 전 광주광역시장이 밝혔다. 그리고 2017년 1월 17일에는 윤장현 시장도 인터넷상 악의적 광주 비하·폄훼에 대하여, 강력 법정 대응조치를 한다고 밝혔다.

보수주의 정당의 지지율(7%선)이 진보주의 정당의 지지율(8%선)과 비슷하게 나온다.# 하지만 5.18 망언이 터져나오거나 인터넷 극우 혹은 보수 언론에서 전라도 비하 논란이 터져나오면 보수정당의 지지율이 1% 미만으로 폭락하는 특징을 보인다. 이념상으로는 보수를 지지하는 보수주의자들이 있지만 5.18이라는 아픈 역사를 건드리는 일과 지역을 비하하는 행위만큼은 절대 용인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 전라도 지역의 보수지지자들 사이에서 관측되는 특이한 현상이다. 보수정당과 대척점에 서있는 진보정당이나 민주당의 지지율은 선거가 가까워지는데도 꾸준히 일정한데 반하여, 인터넷 극우들의 활동세가 강해지고 2019년 자유한국당 공청회 5.18 망언 논란이나 윤석열 전두환 옹호 발언 논란 등 5.18 망언들이 언론 카메라에 잡히기 시작하면 다시금 보수정당의 지지율이 폭락하는 일이 잦아 평시와 선거철의 보수정당 지지율이 매우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이 정치지형의 특징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주가 5월 18일을 민주화 운동 기념일로 지정했다. 5.18 민주화운동이 미국의 건국 이념과도 맞닿아 있다면서 주 차원의 기념일을 제정한 것이다.


[1] 자세한 부분은 전시작전통제권 참조.[2] 만약 5.18 때의 학살이 없었고 단순히 경제 발전에서 소외된 영향만 있었다면 마치 지금 경남 서부에서의 보수정당:민주당=65:35 싸움처럼 이곳도 민주당:보수정당=65:35 싸움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신군부가 자행한 학살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며 이 지역에서는 보수정당이 더 이상 기를 펴지 못하게 되었다. 광주, 전남 토박이의 경우에는 어지간하면 지인 중에 5.18의 희생자와 유가족이 있고, 설사 지인 중에 없다고 하더라도 5.18의 참상을 생생하게 들으며 자랄 수 밖에 없는 환경이기 때문이다.[3] 개개인이 따로 참가한 것이 아니라 광주광역시의 이름으로 모인 시의 숙원사업 진행에 가깝다.[4] 국회청문회 기록.[5] 40주년을 맞는 2020년 기념식은 40주년이라는 상징성을 더하고자 옛 전남도청 앞에서 기념식이 열렸다.[6] 5.18 당시 수감 중이었던 김대중 대통령이 2000년 2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면서 역대 최초로 5.18 기념식에 참석한 대통령으로 기록됐고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 등 후임 대통령도 기념식에 1회 이상 참석했다. 아무래도 5.18이 김대중 대통령과도 연계된 탓에 민주당계 정당 출신 대통령들의 관심과 참여도가 높은데 노무현 대통령은 임기 5년 내내 5.18 기념식에 참석했고 문재인 대통령은 2017, 2019, 2020년 기념식에 참석했다. 반면 5.18과 거리를 뒀던 보수정당 출신인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은 임기 첫 해인 2008년과 2013년 기념식에만 참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