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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3 02:23:30

산상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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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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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c5b356> 고구려 제10대 국왕
산상왕 | 山上王
파일:칠성산 871호분.jpg
산상왕릉으로 추정되는 칠성산 871호 전경.
출생
(음력)
<colbgcolor=#fff,#1f2023>155년 전후[1] 또는 173년 전후[2]
고구려 국내성
사망
(음력)
227년 5월
고구려 국내성
능묘 산상릉(山上陵)[3]
재위기간
(음력)
고구려 제10대 국왕
197년 5월 ~ 227년 5월 (3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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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 고(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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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부왕 신대왕
모후 미상
형제자매
5남 중 4남 혹은 3남?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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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 고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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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후 왕후 우씨, 후녀[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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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8]
왕손 고연불
시호 산상왕(山上王) }}}}}}}}}

1. 개요2. 생애3. 여담4. 《삼국사기》 기록5. 대중매체에서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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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구려의 제10대 왕. 휘는 연우 혹은 이이모.

2. 생애

신대왕의 4남이었다. 고발기의 반란 사건 기록의 연대적인 모순 때문에 실제로는 신대왕의 3남일 가능성이 높다.[9]

고려시대 중반에 편찬된 《삼국사기》 즉위조에 산상왕은 태어날 때부터 눈을 뜬 것이 증조부인 고궁(태조대왕)과 같아서 이름을 따 '위궁'으로 이름지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중국측 역사서이자 3세기 때의 정사인 진수의 《삼국지》에는 완전히 똑같은 기록이 동천왕과 관련된 내용에 기록되어 있는데 김부식이 《삼국지》를 참고하다가 신대왕 백고의 뒤를 이은 이이모는 고국천왕, 이이모를 이은 위궁은 산상왕일 것이라 착각해서 잘못 옮겨 적었다는 것이 정설이다.[10]

정확한 출생년도는 추정할 수가 없으나 현존하는 기록 등을 검토해 추측은 가능하다. 우선 아버지 신대왕이 태어난 때와 자신이 죽을 때의 나이 차이가 140여 년이 난다. 그렇다면 위에 형이 발기, 고국천왕, 발기[11] 3명이 있다 치고, 신대왕이 늦게 장가를 갔다고 쳐도 90세다. 이리 되면 아들 동천왕이 209년생인데 상식적으로는 나이 차이가 너무 난다. 재위에 오른 뒤 동천왕을 낳았으니 승하할 당시 나이는 50세 전후이거나 많이 잡아도 60대다. 실제로 아들 동천왕은 성인이 되어 즉위하여 40대 가까운 나이인 39세에 승하했고, 뒤를 이은 손자 중천왕은 즉위 당시 20대였다. 이리 되니 태조대왕에서 차대왕, 신대왕에 이르는 왕들이 형제들이 아니라 할아버지 - 아버지 - 아들 3대라고 볼 수 있다.

중국측 사료들을 기준으로 차대왕은 95년~96년[12]이고, 신대왕은 113년~114년[13]이며, 165년(52세)에 즉위해서 179년(66세)에 죽었을 것으로 산출된다. 신대왕과 고국천왕의 나이차를 24살로 추정하면 이미 179년 즉위할 때 42세 근처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따른다면 고국천왕의 출생년도는 대략 137년생일 것이고, 197년 60세의 나이로 승하한 것이다. 선대 왕들의 나이가 계속 24살이나 18살로 조작되는 흔적을 감안하여 출생년도가 고국천왕과 부자 관계라면 173년 근처이며, 형제 관계로 보면 155년생으로 추정해볼 수가 있다.

둘째 형인 고국천왕이 후사를 남기지 못한 채 승하하자 넷째 동생인 연우가 형수인 왕후 우씨의 지지를 받아 산상왕으로 즉위했다. 더불어 산상왕은 형수인 왕후 우씨를 부인으로 맞이하는 (이미 사라진 풍속인) '형사취수제'를 택했다.

그러나 이에 불만을 품은 산상왕의 셋째 형 발기(發岐)가 거세게 반발했다. 고국천왕에게 반기를 들은 첫째 형 발기(拔奇)와 한국어 독음이 같은데다가 첫째 발기는 기록상 모순이 있어서 현재는 김부식이 정사 《삼국지》를 인용하는 과정에서 진수가 누락한 고국천왕에 산상왕 시기의 사건을 기록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신대왕의 아들들은 4형제인 것이 맞고 첫째가 고국천왕, 둘째가 고발기, 셋째가 산상왕, 넷째가 고계수였다.

처음 왕후 우씨는 고국천왕이 승하하자 발기에게 먼저 찾아갔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왕의 승하 소식을 알지 못했던 발기는 형인 고국천왕이 자신을 떠보려는 줄 알고 거절했다. 하는 수 없이 우씨는 발기의 동생인 연우를 찾아갔는데 연우가 직접 고기를 써는 식으로 정중히 대접하다가 손을 다치게 되었다. 이를 본 왕후 우씨가 직접 치료하면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고 한다.

결국 발기가 소노부(消奴部) 세력을 끌어들여 반란을 일으켰고 왕궁을 포위했으나 따르는 자가 없어서 실패했다. 다만 발기가 망한 건 맞는데 산상왕도 이 일로 꽤 내상을 입었다. 발기가 산상왕의 처자식을 다 죽여버린 탓에 산상왕은 10년 넘게 독수공방하며 지내야 했기 때문이다.

결국 발기는 요동으로 도망쳐 당시 그 곳에서 국가에 버금갈 정도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한 동연의 군대까지 끌어들여 당시 고구려 수도인 국내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산상왕이 자신의 동생인 고계수(罽須)를 시켜 반격하면서 발기는 참패했고, 이때 발기를 추격하던 계수가 발기한테 다음과 같이 일갈했다.
계수가 형제의 정을 버릴 수 없어 감히 그를 해치지 못하고 말했다. “연우가 왕위를 사양하지 않은 것은 비록 의가 아니지만, 당신이 한때의 분함을 못 이겨 나라를 멸하려 함은 무슨 뜻입니까? 죽은 후에 무슨 면목으로 조상들을 뵐 것입니까?”
쉽게 말하면 "아무리 연우 형님이 왕위에 오른 게 괘씸하다 해도 외세를 끌어들이다니 부끄러운 줄 아셔야죠!"라며 형을 질타한 것이다.

결국 꿈도 희망도 없게 된 발기(發岐)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렇듯 맏이 발기(拔奇)와 셋째 발기(發岐)는 여러 차이가 있다. 맏아들 발기는 연나부(=절노부)의 세력을 끌어모았고, 셋째 발기는 소노부(=연노부)의 세력을 끌어모았다. 맏이 발기는 공손씨의 군대를 끌어들였고, 계수가 이기지 못해 고국천왕이 좌원 전투에서 격파했다. 이후 맏이 발기의 최후는 요동에서 여생을 보냈다는 설과 고국천왕이 용서하고 투항을 받아들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사실 맏이 발기는 배신하기는 했어도 그냥 말 그대로 '배신'이지 셋째 발기처럼 군대를 이끌고 '변란'은 안 일으켰으니 이런 얘기가 나왔을 수 있다. 또 고국천왕이 인자한 성격이었다고도 하니 맞을지도 모르겠다.[14]

어쨌든 셋째 발기의 반란에 대해서는 고구려의 5부 중 왕을 배출하는 계루부와 왕비를 배출했던 연나부(=절노부)가 작당해 왕위 계승자를 정한 것에 완전히 배제된 발기(拔奇)와 소노부(=연나부)가 이 결정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보는 견해[15]가 있다. 소노부가 원래 고구려의 서쪽을 세력권으로[16] 하고 있어 요동의 공손강과 연대할 수 있었던 것도 있고, 이 사건으로 소노부는 고구려에서 완전히 이탈해 요동의 공손씨 정권에 신속했다.

198년 2월, 국내성 바깥쪽에 위치한 산성인 환도성(丸都城)을 쌓았다. 203년 8월에는 국상 을파소(乙巴素)가 세상을 떠나 고우루(高優婁)를 후임 국상으로 삼았다. 이후 208년 11월 관노부[17] 주통촌(酒桶村) 출신의 후녀소후(작은 왕후)로 맞아들였는데 《삼국사기》에 그 비화가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을파소는 왕후 우씨의 압박속에서도 산상왕이 소후를 들이는 걸 지지한 몇 안되는 인물이기도 했다.[18]

설화에 따르면 그 소후는 평민 출신인 것으로 추측된다. 제사에 쓸 돼지가 달아나자 한 처녀으로 돼지를 사로잡으니 신하가 처녀의 지모를 눈여겨봐, 이를 산상왕에게 알려서 몰래 바람 피는 걸 주선했다고 한다... 결국 산상왕의 아이까지 가지는데 이에 우씨가 분노해 자객까지 동원, 그녀를 죽이려했지만
''폐하의 아기가 있는 나를 죽이면 너희들도 무사치는 못할 것이다."
라고 해 자객들을 몰아냈다. 이후 산상왕의 노력까지 더해져 마침내 소후가 되어 아들을 낳았다. 한마디로 해피 엔딩 + 인생 역전인데 그 이후로는 전해오는 이야기가 없다.

한편, 소후에게서 태어난 동천왕은 왕후 우씨가 사망할 때까지 학대에 가까운 눈칫밥을 먹으며 살아야 했다.[19]

환도성을 쌓은 10년 뒤인 209년 10월에 환도성으로 천도했다고 하나 이를 부인하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삼국사기》 대무신왕 11년(서기 28년) 기록에 있는 을두지의 발언으로써 묘사되는 위나암성의 지형[20]이 환도산성으로 비정되는 산성자산성보다 환런 일대의 오녀산성과 더 유사하고, 산성자산성 내에 3세기 전으로 편년되는 유물이 거의 발견되지 않아 산상왕 시기에 집안으로 천도했을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주목받고 있다.[21]

217년에는 후한 평주(平州)의 하요(夏瑤)가 1,000여 가(家)를 거느리고 투항했다, 산상왕은 책성(柵城)에 이들을 안치시켰다. 227년 5월에 승하하니 산상릉(山上陵)에 장사지냈고, 그 이름을 따서 '산상왕'이라고 불렀다.

3. 여담

4.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三國史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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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열전(列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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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산상왕 본기〉
一年夏五月 산상왕이 즉위하다
一年秋九月 발기를 왕의 예로 장사지내고 우씨를 왕후로 삼다
二年春二月 환도성을 쌓다
二年夏四月 사면을 단행하다
三年秋九月 사냥을 하다
七年春三月 아들을 갖기를 원하다
七年秋八月 국상 을파소가 죽다
十二年冬十一月 주통촌의 여자와 관계를 맺다
十三年春三月 주통촌의 여자가 아들을 임신하다
十三年秋九月 주통촌의 여자의 아들 이름을 교체라 하다
十三年冬十月 환도로 천도하다
十七年春一月 교체를 태자를 삼다
二十一年秋八月 한인들이 투항해오다
二十一年冬十月 천둥과 지진이 일어나고 혜성이 나타나다
二十三年春二月 일식이 일어나다
二十四年夏四月 이상한 새가 왕궁에 모여들다
二十八年春二月 왕손이 태어나다
三十一年夏五月 산상왕이 승하하다

5. 대중매체에서

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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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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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왕실의 계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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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국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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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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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국천왕의 동생이라 할 경우[2] 고국천왕의 아들이라 할 경우[3] 칠성산 871호 또는 마선구 626호 추정.[4]삼국사기》에 따르면 이는 고국천왕의 다른 이름으로, 진수의 《삼국지》를 따른 것이다. 하지만《삼국지》는 신대왕의 후계를 산상왕으로 본다.[5]삼국사기》의 기록이다. 그런데 이건 또 진수의 《삼국지》에는 동천왕의 이름으로 나오는데, 동천왕의 이름일 가능성이 높다.[6] 기록상 모순이 보여 실제로는 셋째로 기록된 발기와 동일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7] 소후(小后, 작은 왕후), 동천왕의 어머니.[8] 동천왕의 출생 이전에 산상왕의 처자식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니 산상왕은 적어도 자녀가 동천왕 외에 자녀 1명 이상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9] 조금 높은 정도가 아니라 4남인 것이 잘못된 기록이라는 것이 정설로 취급될 정도이다.[10] 고국천왕은 중국 측 기록에서는 누락되었다. 참고로 차대왕도 《삼국지》에서 누락되어 있다.[11] 발기가 두 명이나 있다는 것은 《삼국사기》의 오류로 산상왕과 고국천왕을 착각한 김부식의 뻘짓이다. 발기는 고국천왕 고남무의 동생 하나뿐인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12]삼국사기》에는 71년생[13]삼국사기》에는 89년생[14] 이와 관련된 후일담이 있는데 형인 발기가 자결하자 계수는 형의 시신을 묻어주고 장례까지 치러줬다. 이에 산상왕이 따지자 계수는 오히려 형을 데꿀멍시켰고, 산상왕은 계수의 말을 따라 발기를 정성스레 장사지내주었다고 한다. 이와 관련되어 자세한 건 고계수 문서 참조.[15] 한영화, <고구려 지모신 신앙과 모처제> (《한국고대사의 재조명》, 신서원, 2001)[16] 고국천왕 때의 행정명 개편으로 서부[17] 灌奴部(=관나부=남부)[18] 당시 산상왕은 처자식을 전부 발기에게 잃었고, 왕후 우씨와의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19] 동천왕이 태자였을 때 자주 때리기도 했고, 왕이 되었을 때도 궁녀를 시켜 왕의 옷에 뜨거운 국을 엎지르게 했으며, 왕이 말을 못 타게 하려고 말의 갈기를 자르기까지 했다.[20] 암석지대에 있고, 물이 나오는 샘이 있다.[21] 출처: 노태돈, 〈고구려 초기의 천도에 관한 약간의 논의〉 (한국고대사학회, 2012)[22] 자신의 성에서 시녀를 우씨와 비슷하게 꾸며 이를 훔쳐 보며 자위행위를 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 이전 장면은 부인이 만나러 왔지만 바쁘다고 거절당하는 장면이다. 바쁜 건 물론 자위행위 때문.[23] 이 드라마에선 사이코패스 살인광으로 묘사됐기에 도저히 선택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24] 물론 단순한 유모인 건 아니고 평소엔 집사 역할을 하며 뒤치다꺼리와 조언을 하고 위급할 땐 무장하고 나서서 경호까지 맡는 만능형 인물이기는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