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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증 영의정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충무공(忠武公) 김시민 金時敏 | |
충민사에 모셔진 김시민의 영정.[1] | |
<colbgcolor=#a52a2a><colcolor=#fff> 출생 | 1554년 9월 23일 (음력 8월 27일) |
충청도 목천현 갈전면 백전촌 (現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가전리 백전마을)[2] # | |
사망 | 1592년 11월 21일 (음력 10월 18일) (향년 38세) |
경상도 진주목 진주성 (現 경상남도 진주시 진주성) | |
본관 | 구 안동 김씨 |
이름 | 김시민(金時敏) |
자 | 면오(勉吾) |
봉호 |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
시호 | 충무(忠武) |
부모 | 부친 - 김충갑(金忠甲) 모친 - 창평 이씨(昌平 李氏) 이성춘(李成春)의 딸 |
형제자매 | 6남 2녀 중 3남 |
부인 | 부여 서씨 - 서팽수(徐彭壽)의 딸 |
자녀 | 양자 - 김치(金緻) |
진주성 공원에 있는 김시민 동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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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김방경의 12대손이다.임진왜란 당시 진주 대첩을 승리로 이끌며 왜군의 침입 경로를 봉쇄하고 큰 전사자를 내며 패퇴시켰다. 김시민의 활약 덕분에 이순신은 해전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고, 왜군들은 보급에 직격타를 맞아 큰 손실을 입었다. 그야말로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지킨 구국(救國)의 영웅. 사후 그의 충정과 공로를 기려 이순신과 동일하게 '충무공'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2. 생애
2.1. 출생과 성장
1554년 9월 23일, 충청도 목천현 갈전면 백전촌(현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가전리 백전마을)에서 중훈대부(中訓大夫:종3품 문관의 품계) 행 사헌부 지평(行司憲府持平:정5품) 겸 춘추관 기주관(兼春秋館記注官)을 지낸 아버지 김충갑(金忠甲)과 어머니 창평 이씨(昌平 李氏)[3] 사이에서 6남 2녀 중 삼남으로 태어났다. 김시회(金時晦), 김시람(金時灠) 등 형 2명과 김시신(金時愼), 김시진(金時進) 등 남동생 2명이 있었다. <국조인물고>에 의하면 8세 때 마을의 가축들에게 해를 입혔던 큰 뱀을 활로 쏴 죽였다고 한다. <국조인물고>는 정조 때 편찬된 서적인데, 정조 때에도 김시민의 고향 사람들 사이에서 "저 곳이 바로 김시민 공께서 뱀을 쏘신 곳이다"라는 소문이 구전되었다고 한다. 장성해서는 몸집도 크고 도량이 넓었으나, 힘이 강한 것만 믿고 공부는 덜 하면서 목소리만 크게 냈다는 식으로 평가받기도 했었다.2.2. 공직
1578년 무과 훈련원시에 급제해 겸사복(兼司僕)이 되었다.[4] 1583년 니탕개의 난 진압에 참여했으며, 1584년 별시 무과(대과)에 전체 4등인 을과 3위로 급제하였기에 단숨에 품계를 건너뛰어 훈련원 주부(訓練院主簿:종6품)에 제수되었으나, 병조판서에게 군사에 관한 일을 건의한게 받아들여지지 않자 사직하고 낙향했다. <국조인물고>에 따르면 병조판서가 자신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자 격분한 김시민이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던지고 발로 밟으면서 "장부가 이것이 아니라면 어찌 남에게 모욕 받을 수 있는가!"라며 소리치고는 바로 벼슬을 던지고 물러갔다고 한다. 흔히 말하는 다혈질이고 남성적인 면이 강한 천상 무인이었고, 자존심도 강했다. 이후 다시 벼슬길에 나아가 군기시 판관(軍器寺判官:종5품)이 되었고 1591년에는 진주목 판관에 제수되었다.2.3. 임진왜란 공적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조선군이 패주하자 진주목사 이경이 지리산으로 달아나 은신했다. 그러자 김시민이 임시진주 목사로 임명 되었다. 당시 진주는 목사 이하 병사들이 다 도망가서 비어 있었는데, 김성일은 김시민을 독려해 병사들을 모으고 방어 준비에 만전을 기하게 했다. 이 때 왜적은 진주의 방어가 허술함을 알고 창원도호부, 진해현, 고성현으로부터 사천현에 집결한 다음 진주로 향하려 하였다. 이에 곤양군수 이광악, 의병장 이달, 홍의장군 곽재우 등과 합세해 적을 격파하고 도망치는 적을 추격해 십수교에서 재격파하여 고성, 창원 등 여러 성들을 수복하였으며, 의병장 김면의 원병 요청을 받고 정병 1,000여 명을 이끌고 호응하였다. 거창의 사랑암에서 김산으로부터 서남진하는 왜적을 맞아 크게 무찔렀으며, 여러 차례의 전공으로 1592년 7월 26일, 진주 목사(晋州牧使:정3품)로 승진하였다. # 김시민은 진주목사로 취임하자 곧바로 염초 150여 근과 총통 70여 병을 만들고 정병을 뽑아 사용법을 연마하게 하는 등 성을 지키는 방책을 강화하였다. 이어 9월에는 진해로 출격해 적을 물리치고 적장 평소태를 사로잡아 행재소로 보내는 공을 세우자 조정에서는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임명하였다.[5] 임진왜란 초기의 행보를 보면 과감한 작전을 벌이는 모습을 종종 보였는데, 위의 개인적 성격 역시 그의 전법에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도 있다.김성일 막하에서 종군한 이로의 <용사일기>에 김시민이 거창에서 왜군을 격파할 무렵의 재미있는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김성일이 진양의 수비를 김시민에게 맡겼지만 경상감사 김수의 구원 요청이 오자 김시민은 진양을 비우고 거창에 주둔하던 김수와 합류해 거창의 왜군을 격파했는데, 앞장서서 싸우다가 그만 왼발에 총상을 입었다. 이 때 김성일은 진양을 지키고 있어야 할 김시민이 본인의 확인도 없이 성을 비우자 놀라서 김시민을 당장 잡아오라고 시킨다. 당시 김성일은 경상도 초유사로써 경상도 일대의 군사를 총괄하는 그 곳의 제일 높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런 사람의 허락도 없이 임지를 멋대로 이탈한 행동이니 문제가 있는 행동이며, 또한 김시민은 이미 1번 도망가 숨은 전력도 있었기 때문에 김성일 입장에서는 김시민이 말도 안 하고 임지를 함부로 비우고 도망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었다. 이를 들은 김시민은 싸우다가 발을 다쳤다는 것을 핑계삼아 가마를 타고 사람들에게 업혀 와서 일부러 김성일 앞에서 다친 왼발을 보여주는 기행을 벌인다. 김성일은 이를 보고 가볍게 훈계만 하고 허락 없이 진양을 비운 일을 불문에 붙였지만, 장수된 처지에 몸을 아끼지 않아 부상을 입은 저돌적인 행동이 결국 그의 목숨을 위협할 것을 예견하고 "시민의 정신이 어지러워졌으니 아마 오래 가지 못하겠구나..."라는 말을 남겼다. 사람들이 곧잘 간과하는 사실인데, 김성일은 이미 김시민과 비슷한 일을 겪은 사람을 손수 목격한 바가 있는데, 바로 홍의장군 곽재우. 곽재우도 일본군에 대한 적개심과 전투 의지가 어마어마했고 윗사람에게도 굽히지 않는 강직한 성격이라 자주 트러블을 일으켰다. 하지만 곽재우와 김시민에게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었으니, 전투 의지는 충만했으나 철저하게 계산하여 불리한 싸움은 최대한 회피하고 몸을 아꼈던 곽재우와 달리[6] 김시민은 앞장서서 싸우는 걸 결코 마다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2.4. 진주 대첩과 전사
1592년 10월 전라도 진공에 실패한 일본군은 진주를 통해 전라도로 진공할 목적으로 나가오카와 하세가와가 이끄는 3만의 대군을 진주성으로 보내 진주성을 공략하게 했는데, 이것이 바로 진주 대첩이다. 이에 김시민은 3,800여 명의 병사로 10배에 가까운 3만 대군에 맞섰고 곽재우, 최경회 등의 의병들도 일본군의 배후를 습격해 진주성에 힘을 보탰다. 10월 5일부터 11일까지 엿새 동안 치열한 혈전이 벌어졌는데, 성 안의 백성들까지 합세하여 수적으로 많았던 일본군의 공세를 물리쳤다. 그러나 김시민은 전투 마지막 날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지는 도중에 일본군의 탄환을 맞아 쓰러졌고, 그의 부장인 곤양군수 이광악이 김시민을 대신해 지휘하면서 남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김시민은 이후 사경을 헤매다 얼마 후 숨을 거두었다. 이때 그의 나이 38세였다. <임진록>에서는 김시민이 전투가 끝나고 군사들과 함께 사상자를 수습하고 있는데 죽은 척하고 엎드려 숨어 있던 일본군 조총병 하나가 김시민의 이마를 쏘아 전사했다고 기록되었다. 물론 임진록은 소설이기에 이건 사실이 아니지만, 아마 제2차 진주성 전투 당시 성벽에서 적군의 시체를 바라보다 죽은 척하던 일본군에게 총을 맞은 황진의 오마주인 듯 하다. 조정에서는 진주성에서의 승전을 보고받고는 김시민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제수했지만, 애석하게도 교서가 당도한 것은 김시민이 죽은 이후였다. 이후 김시민은 원균도 제수된 선무1등공신이 아닌 선무 2등공신에 제수되고 진주의 충민사에 배향되었으며, 충무라는 시호를 받았다.[7] 진주에서는 죽은 후에도 영웅으로 대접받았는데, 김시민이 전사하자 성 안에 울음소리가 천둥같았고 호남과 영남의 인사가 다 조상하고 눈물을 흘리며 "우리는 어찌하는가?"라고 하였다. 1593년 김시민의 묘를 고향으로 이장할 때도 운구할 때 백성이 앞다투어 수레를 끌고 눈물을 흘리며 "우리 공이시여, 우리 공이시여! 우리 공이 없었으면 우리가 죽은지 오랠 것입니다."라고 통곡했다고 한다.[8]한편 일본은 김시민의 분전으로 인해 진주성 공략에 실패한 뒤 김시민에 대한 원한을 불태웠으나, 정작 김시민이 전사한 줄도 몰랐다. 1593년 6월, 일본군은 10만의 대군으로 진주성을 재침공하였는데, 진주성은 일주일 동안 일본군 10만 대군을 상대로 버텨왔으나 끝끝내 함락되었고, 다수의 장수들과 진주성으로 모여들었던 6만명 가량의 백성들이 학살당했다. 그러나 일본군 역시 다수가 전사하여 전력 소모가 매우 컸다.[9] 이 때 일본군은 진주성을 지키던 진주 목사 서예원[10]을 잡아다 죽였는데, 서예원을 김시민으로 착각하여 "목사를 죽였다."라고 보고하며 서예원의 목을 본국에 보냈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김시민의 조카 김유가 진주를 지나게 되어 한 초가에 묵게 되었다. 김유가 김시민의 조카였음을 안 초가집의 노인이 "제가 임진왜란 때 진주성에서 김시민 장군을 모셨습니다."라고 하며 김유의 손을 잡고는 "어찌 김 사또의 공적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라며 울었다는 기록이 있다.
3. 사후
1604년(선조 37) 선무공신 2등에 책록하면서 영의정으로 추증하고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으로 추봉하였다.[11] 1711년(숙종 37) 충무(忠武)라는 시호를 내렸다.4. 기타
- 아이가 없어서 형 김시회의 아들 김치를 양자로 들여 가문을 이었고, 김득신이 바로 김시민의 손자다. 인조 때 도원수를 지낸 김시양(金時讓)은 김시민의 사촌 동생이다. 본래 김시민의 위패는 진주의 충렬사에 배향했으나, 고종 때 전국의 서원 및 사당을 철폐하면서 충렬사도 덤으로 훼철하여 김시민의 숙부 김제갑의 사당인 충렬사에 합사했다가 충민사로 고쳐 세운 것. 김시민의 묘지는 처음에는 충청북도 괴산군의 선산에 있었다가 후에 충주시 살미면 무릉리로 이장되었다. 그러다가 충주댐 건설로 수몰 위기에 처해서 1976년, 현 위치인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로 재이장함과 함께 사당 충민사를 세웠다.
- 진주시에서는 김시민의 시호를 따 경남진주혁신도시 지역의 동 이름을 충무공동이라 명명하였으며, 충무공동과 상평동 사이를 흐르는 남강에 새로 사장교를 지었는데, 이게 바로 김시민대교다.
- 이순신과도 공통점이 많은데, 시호가 같은 '충무'라는 점, 패주하는 아군을 수습한 뒤 벌어진 대전투에서 승리한 점이라는 점, 승리가 코 앞인 상황에서 적의 탄환에 의해 전사했다는 점 등이다.
- 추후 건조될 세종대왕급 구축함 Batch-II의 명칭에 충무공 김시민이라는 명칭을 쓰자는 제안이 천안시의회에서 나있다. 김시민 장군도 이순신 못지않게 훌륭한 인물이니 함명으로 쓰이는데 모자람이 없지만, 대한민국 해군에서 충무공은 예부터 이순신 한 사람만을 가리키는 명칭으로만 사용되고 충무공 이순신급 구축함 역시 있으며 민간에서도 충무공이란 시호는 거의 이순신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문제점이 있다. 실제로 세종대왕급 구축함 Batch-II의 명칭은 정조대왕으로 결정되었다. 추후 KDDX나 충무공 이축함의 후속함에서 사용될 지는 지켜보아야 할 듯하다.
- 에도 시대에 접어들면 일본의 소설이나 연극에서 모쿠소 판관(木曾判官)이라는 괴물이 일본군을 공격해 곤경에 빠뜨리지만 용맹한 일본 장수에게 최후를 맞는다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앞의 모쿠소(木曾)는 일본인들이 이름으로 착각한 김시민의 직책인 목사이며 뒤의 판관(判官)은 벼슬이다. '모쿠소란 이름의 판관'이란 뜻. 목사가 모쿠소가 된 이유는 김시민의 직책이었던 목사의 '사' 자를 16세기 중세 한국어에서는 'ᄉᆞ'로 발음하였는데 이 소리를 'そう'로 알아들고 모쿠소(木曾)라 음차한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만들어질 만큼 진주대첩 이후 일본의 무장들과 병사들이 진주성의 목사를 두려워하고 증오했다. 일본인들의 착각이었지만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한 후임 목사의 수급이 일본 본국에 김시민의 것으로 보고되었다는 점도 유명해진 계기일 것이다. 비슷한 예로 거북선을 목해선(沐海潛)이라고 부르면서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 배를 퇴치한다는 내용 또한 성행했다고 한다. 우습게도 정작 고니시는 거북선 때문에 순천왜성에서 탈출하지 못해 아사할 뻔하였다. 18세기에는 덴지쿠 도쿠베에(天竺德兵衛)라는 사람이 지라이야라는 악역 마법사 괴도라고 나온 《텐지쿠 도쿠베 이국 이야기》라는 소설이나 연극이 유행했는데 지라이야의 정체가 '조선의 악마 모쿠소 판관의 아들', 즉 김시민 장군의 아들이어서 아버지의 복수를 하러 일본을 침입한 요괴라는 소설까지 나왔다고 한다.[12] 물론 해당 작가들이 김시민을 거론하지 않고 있고 모쿠소란 이름을 주관적으로 해석하고 확대 적용을 한 주장으로 학계에서 합의된 정설은 아니다. 비슷한 인물로 임진왜란 당시 북병사(北兵使)였던 한극함이 있다. 김시민이 '모쿠소'라고 불린 것처럼 한극함은 '세루토스(せるとうす)'라고 불렸는데, 절도사라는 뜻이다.
- 김시약이라는 아우가 있는데, 김시약은 김충갑의 서자로, 형 김시민 휘하에서 종군해 제1차 진주성 전투에 참전해 공을 세운 뒤 정유재란 당시 영남 방면에서 조선군 선봉장으로 활약했으며, 인조 대에는 창성부첨절제사에 임명되어 정묘호란 당시 벌어진 창성진 전투에서 분투하다가 두 아들과 함께 전사했다.
- 김시민 장군의 공신교서가 일제시대 당시 헐값에 무단 반출되어있었다가, 2006년 7월 경 MBC의 느낌표의 코너인 '위대한 유산 74434'를 통해 그 존재가 공개됐다. 방송분에 따르면 2005년 11월 경 일본의 한 고서적상에서 이 문서를 경매에서 1천 200만엔에 낙찰받으면서 존재가 공개된 것이었는데, 당시 교토대학교에서 근무중이던 김문경 교수가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물건'이라며 팔지 말아 달라고 간곡히 부탁해 해당 고서점상에서 약 반 년 간 그 약속을 지켰으나, 고서점상의 주인도 더 이상은 기다릴 수 없기에 제작진 및 시민단체들이 뜻을 모아 환수를 결정했다. 당시 기사 최초 협상된 금액은 1천 500만엔(당시 환율로 약 1억 3천만원)이었고, 이 프로젝트가 범국민 캠페인으로 커지면서 해당 고서점상 주인도 이에 호응해 100만엔을 깎은 1천 4백만 엔(당시 환율 1억 2천만원)으로 인하했다. 하지만 당초 약속했던 날짜가(2006년 7월 21일) 일주일 가량 남은 시점에서도 5천만원 가량 부족해 실패할 위기에 처했으나, 다행히 최종적으로 금액 모금을 성공하면서[13] 환수에 성공했다. 이후 잠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했다가, 그 후부터는 국립진주박물관에서 영구전시하고 있다.
5. 대중매체
5.1. 게임
- <임진록 2: 조선의 반격>에서는 시나리오상으로 임진왜란 한참 후의 시기이므로 원래는 죽었어야 할 사람이나 영웅 수를 맞추기 위해서인지 죽은 김덕령과 함께 등장하며[14] 거의 마지막 시나리오에서 명나라의 3시 진영을 초토화시키고 전사한다. 명나라의 이여송과 더불어 임진록 2의 창장으로 아이템인 흑철창을 장착할 경우 쐐기찌르기라는 기술을 사용하여 원거리 공격을 할 수 있는게 특징이다. 레벨업을 다한 김시민이 사용하는 흑철창은 근접 영웅이나 줄법한 데미지를 원거리에서 주기 때문에 강력하다.[15]
- <천하제일상 거상>에서는 초보자 퀘스트를 깨다 보면 김시민 고용권을 그냥 주기에 초보자들이 초반에 장수가 없을 때 사용하는 장수.[16] 김시민의 기술인 연옥술 자체는 임진록 2 및 거상 초기에는 엄청 강력한 기술이였는데 너프먹고 구멍 뚫린 연옥술로 바뀌면서 망한 케이스. 또다른 기술인 쐐기찌르기는 평타 기반 스킬이기에 한계가 뚜렷하고 신립 등의 더욱 강력한 평타 기반 장수에 밀려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임진록 시절과 달리 여기선 마나를 소모하기에 마나가 없으면 오직 근접 공격만 한다). 단, 김시민의 진가는 레벨 100이 넘어서야 발동하는데 근처의 팀원들에게 마법 저항력을 증가시키는 패시브 스킬 '격려'가 발동된다.(최초 마법 저항력 10%) 100 이후부터 레벨이 높아질수록 마법 저항력이 더욱 증가하기 때문에[17] 후반에 괴수로부터의 공격을 버티기 위해 데리고 다니는 편이며 주력 장수가 아닌 보조 장수로 쓰이는 편. 뒤늦게 패치된 김시민 2차는 신라 시대 대장군 김유신인데 스킬은 총 3개로 땅에 불이 붙는 쐐기찌르기인 화염찌르기, 데미지가 높은 범위 마법인 회전창, 결정적으로 격려 패시브가 짤리지 않고 역시 가지고 있다.[18]
5.2. 드라마
- 2004년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배우 정의갑[19]이 연기했다. 변복한 이순신이나 권율과 접선하여 책략을 짜는 등 지장으로서의 면모가 더욱 강조되어 묘사되었다. 진주성을 지킬 때 지원군을 끌고 온 유숭인을 성 안의 지휘 체계가 무너질 것을 염려하여[20] 들이지 않는 부분이 나오는데 두 장수의 카리스마가 폭발한다. 두 장수는 눈빛으로 대화를 주고받은 뒤 유숭인은 적의 1/20도 되지 않는 군사로 닥돌을 감행했으나 큰 피해를 입히지는 못했고 모두 장렬히 전사했다. 실제 역사는 드라마에서 묘사된 모습이 아니었으나 진주성 전투를 예고하는 장치로써 상관인 경상우병사 유숭인의 자기 희생으로 비장하게 각색하여 "삶과 죽음이 뒤엉킨 6일"이라는 예고에 걸맞도록 처절한 전투 장면을 예고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진주 대첩은 제79회~제80회에 걸쳐서 등장하는데[21] 김시민의 최후는 실제 역사와 다르게 묘사했다. 실제로는 저격당한 후 며칠간 사경을 헤매다가 순국을 하였으나 드라마에서는 성벽을 넘어 쳐들어오는 적군을 막던 중에 저격을 당하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사망 시기 또한 역사와는 다르게 일본군을 물리치고 휘하 장수인 곤양군수 이광악에게서 승전 보고를 듣던 도중에 그 자리에서 눈을 감는 것으로 표현됐다.
김시민: "성문을 열지 못함을 용서하시오, 우병사 영감. 지금 성문을 열면 왜군은 밀물처럼 성문으로 몰려들 것이오. 허면 진주성은 싸워보지도 못하고 적의 수중에 떨어지고야 말 것이외다."
유숭인: "앞으로의 싸움이 꽤나 고단할 겝니다, 김 목사."
김시민: '우병사 영감...'
유숭인: "우리의 분전이 진주성 사수에 작으나마 보탬이 되었으면 하오이다. 무운을 빕니다."
유숭인: "앞으로의 싸움이 꽤나 고단할 겝니다, 김 목사."
김시민: '우병사 영감...'
유숭인: "우리의 분전이 진주성 사수에 작으나마 보탬이 되었으면 하오이다. 무운을 빕니다."
[1] 충무공 김시민 장군 기념사업회에서는 2007년 1월 22일 표준영정을 바꾸기로 했다. 표준영정은 1977년 장우성 화백이 그린 것인데, 김시민 장군은 사망할 당시 38세였지만, 영정은 나이가 많은 노인과 같은 인상을 풍기고 있기 때문이다. 표준영정은 각계 전문가의 고증과 자문을 통해 다시 제작될 예정이다.[2] 인근의 송정리와 함께 안동 김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김구응·김상철도 이 마을 출신이다.[3] 참봉(종9품) 이성춘(李成春)의 딸이다.[4] 1581년 부평부사로 있다가 백성들을 제대로 구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직된 기록이 선조실록 15권, 선조 14년 4월 5일 무술 2번째 기사에 있지만, 이는 사실 맏형 김시회(金時晦)의 회(晦)를 김시민의 민(敏)으로 잘못 기재하여 나타난 폐단이다. # 솔직히 이제 막 훈련원시에 급제한 하급 무관에게 전국 40여 개밖에 없는 도호부(都護府)의 목민관을 임명할 리가 없다. 도호부사는 종3품관이 임명되었기에 품계상으로도 임명될 리 만무하다.[5] 하지만 진주성에서 전사한 뒤 상여가 함양에 이르렀을 때야 임명장이 뒤늦게 도착해서 실제로 맡지는 못했다.[6]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곽재우의 병력은 일본군에 비해 숫자에서 열세인 터라 상대가 될래야 될수가 없었기에 게릴라전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7] 한때 김시민의 선무공신첩은 일본인에게 팔려 영원히 보지 못할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MBC "느낌표 - 위대한 유산"에 사연이 소개된 뒤 전국민적인 성원에 힘입어 국내로 돌아왔다.[8] 인조 시대가 되어서야 '충무공' 시호를 받은 이순신도 노량 해전에서 전사했을 때 백성들이 통곡을 하며 운구를 붙잡아 앞으로 나가기가 힘들었다.[9] 제2차 진주성 전투 당시 일본군의 10만 대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협박성 명령으로 인해 꾸려졌고, 가토 기요마사, 타치바나 무네시게, 고니시 유키나가, 우키타 히데이에, 구로다 나가마사 등 일본군의 적장 대부분이 모두 달려든 규모였음에도 함락에만 일주일이나 걸렸고, 일본군도 진주성 장악 및 군사 재정비 이후 전라도 침공을 하지 못할 정도의 크나큰 피해를 입었다.[10] 서예원은 의병 도대장 김면의 중위장이다.[11] 선조실록에는 선무공신 2등에 책록하면서 관작을 내리고 군(君)으로 봉했다고만 기록되어 있다. 숙종실록을 보면 의정(議政)으로 추증된 사실을 알 수 있다. 더 상세한 내용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을 참조해 추가하였다.[12] 주간조선, 2014년 5월 16일, 유럽 종교전쟁 동남아서 연장전 日 끌려간 조선인들 종교탄압도[13] 여기에는 MC인 서경석, 조혜련, 정형돈이 출연료도 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기사[14] 게임의 시나리오는 조선이 이시다 미츠나리와 연합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공격한다는 허구의 스토리다.[15] 이 게임의 원거리 영웅들의 기본 공격력은 이령을 제외하고는 60인데, 근접 영웅의 기본 공격력은 조승훈을 제외하고는 100이다. 그런데 김시민이 흑철창을 끼면 기본 140 정도의 공격을 원거리에서 퍼붓는다는 말 하지만 장수의 격려 효과가 방어력이라 매우 성능이 나쁘고 쐐기찌르기로 교전 상황이 급변하는 것도 아니라서 전비 땜빵용 장수로 기용 되는 경우를 제외하곤 권율보다도 평가가 나쁘다. 권율의 경우 병영 생산이라 아예 본영 생산인 허준보다는 늦어도 빠르게 나올 수 있으며 폭마혈도를 들려주면 건물 테러, 대규모 교전 중 광역, 등이라도 커버 가능하다. 심지어 김시민은 공격력 격려 효과가 있는 방천화극을 들면 버그로 기존의 방어력 격려 효과가 제대로 안나오는 괴랄한 점까지 겹쳐서 전비땜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16] 원래는 창잡이가 레벨 40에 전직하는 장수였다.[17] 최대 레벨인 250레벨이 될 경우 마법 저항력이 85%다! 3만원짜리 캐시템과 맞먹는 가격의 해왕갑옷이 40%라는 것을 고려하면 어마어마한 저항력.[18] 주력 스킬인 회전창은 범위가 좁고 데미지가 불안정해 항우보다 안 좋다고 하지만 신수 등의 더욱 강력한 주력 용병을 갖게 되면 해고가 답인 항우에 비해 올체찍고 패시브용으로 데리고 다니는 김유신이 활용도가 더 높다. 그러나 회전창의 묘한 성능으로 인해 보통은 군모의창이나 현명창을 채워주고 그것을 이용해 레벨업을 하거나 올체찍고 쩔경 먹인다.[19] 2003년 KBS 드라마 <무인시대>에서는 이의민의 차남인 이지영 역.[20] 오늘날로 치면 김시민은 2스타인데 유숭인은 3스타라고 볼 수 있다.[21] 제79회는 전투의 서막이고 본격적인 전투는 제80회에서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