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심지인 초라 일대
초라의 시가지
1. 개요
그리스어 Κύθηρα
영어 Kythira / Cythera
그리스 남부의 섬. 이오니아 제도에 속하지만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크레타 사이에 위치하여 동떨어져 있다. 19세기까지 이오니아 해에서 에게 해로 향하는 선박들의 경유지로써 다양한 세력이 거쳐갔다. 다만 20세기 들어 중요성이 감소했고, 현재는 인구 3600의 섬으로 남아있다.
2. 역사
팔레오초라 유적
키티라 성채
상고대 시기 그리스와 이집트, 메소포타미아를 이어주는 무역 거점이었고 티레처럼 자주색 염료 생산이 가능했기에 페니키아인 식민지가 형성되었다. 이후 그리스 도시인 팔리카스트로가 형성되었고, 페니키아의 주신인 아스타르테와 유사한 아프로디테 우라니아를 모시는 신전이 있었다. 기원전 6세기 무렵 아르고스가 섬을 점령해 키테로디케스를 두어 통치하다가, 기원전 4-5세기에 아테네가 스파르타와 전쟁을 치르며 3차례 (기원전 456년, 기원전 424 ~ 410년, 기원전 393 ~ 386년)나 점령하기도 했다. 기원전 195년 라코니아 전쟁으로 스파르타-아르고스 연합이 몰락하자 키티라는 독립하여 자체 동전을 발행했다. 다만 아우구스투스 시기에 키티라는 다시 스파르타에 복속해 있었고, 로마와 스파르타 2중 시민이던 가이우스 율리우스 유리클레스의 소유였다. 4세기 들어 기독교가 전래되었고, 전설에 따르면 라코니아의 성 엘레사가 섬 주민들을 개종시켰다 한다.
동로마 제국의 약화 및 사라센 해적의 준동과 함께 700년경 키티라는 일시적으로 버려졌고, 크레타가 수복된 962년에야 성 테오도로스가 유랑민들이 장악했던 섬에 라코니아 인들을 재정착시켰다. 그는 필로초라에 수도원을 세웠고, 이를 중심으로 도시가 형성되었다. 1204년 4차 십자군 후 키티라는 베네치아 공화국령이 되었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가는 길목으로써 해안 경비대가 배치되었다. 베네치아 시기에 지명은 체리고 (Cerigo)로 알려졌고, 1207년 마르코 베니에르의 부임 후 베니에르 가문이 통치했다. 1279년에 동로마에 복속한 롬바르드인 기사 리카리오가 섬을 점령했으나 1308년 다시 베네치아 령이 되었고, 1310년 동로마 황제 안드로니코스 2세도 이를 인정했다. 1530년 베네치아 의회는 베니에르 가문을 내치고 카티라를 직접 지배하기 시작했다.
16세기 중반에 오스만 대제독 하이레딘 파샤 바르바로스가 약탈한 후 얼마간 주둔하기도 했다. 이후 수도원들은 방어를 위해 바위 언덕 쪽으로 옮겨졌고, 17세기에 키티라는 사피엔차 (칼라마타스) 및 프사라 밑 푸르니 섬들과 함께 주요 바르바리 해적 거점 중 하나였다. 본래 크레타 관할이던 키티라는 1669년 칸디아 함락 후 코르푸 관할로 이관되었다. 7차 베네치아-오스만 전쟁기인 1715-18년에 오스만 군이 키티라를 점령했으나, 파사로비츠 조약으로 반환했다. 1797년 베네치아의 멸망 후 키티라는 다른 이오니아 제도처럼 프랑스 령이 되었고, 1799년에는 셉틴술라르 공화국 령이 되었다. 1807년 프랑스를 거쳐 1809년 영국령이 된 후에는 이오니아 합중국 령이 되었고, 카리고 (Carigo)로 불렸다. 다만 1859년부터 그리스 합류 요구가 빗발쳤고, 결국 1864년에 이루어졌다. 키티라는 이오니아 제도에서 코르푸 다음으로 많은 양의 사료를 소장하고 있다.
3. 볼거리
* 키티라 성채
13세기에 세워져 1503년에 보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