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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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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도 기니 공화국 초대 대통령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
Francisco Macías Nguema
파일:집권 직전의 응게마.jpg
<colbgcolor=#e32118> 출생 1924년 1월 1일
프랑스령 적도아프리카 오옘
사망 1979년 9월 29일 (향년 55세)
적도 기니 북비오코주 말라보 블랙 비치 교도소
약력 적도 기니 제1대 대통령
임기 1968년 10월 12일 ~ 1979년 8월 3일
종교 무종교 (반종교적 무신론)[1]
자녀 모니카, 마리벨, 파코, 아들
1. 개요2. 생애
2.1. 초기 생애2.2. 집권 과정2.3. 대통령 집권2.4. 독재의 시작2.5. 독재 행각
2.5.1. 우상화2.5.2. 반지성주의/극단적인 반서방 정책2.5.3. 반정부 인사 탄압과 학정
2.5.3.1. 열악한 교도소
2.5.4. 소수민족 탄압2.5.5. 1973년 이후 연도별 행각들2.5.6. 응게마 치하의 인명 피해
2.6. 경제 파탄2.7. 대외 관계
3. 몰락
3.1. 조카의 쿠데타로 쫓겨나다3.2. 재판3.3. 최후
4. 평가5. 사생활
5.1. 가족 관계5.2. 호화 생활
6. 정신적, 육체적 질환7. 기타
7.1.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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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위 지식인은 오늘날 아프리카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를 나타냅니다. 그들은 그들의 외국 문화로 우리의 풍토를 오염 시킵니다.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
Francisco Macías Nguema

적도 기니의 초대 대통령이자 독재자. 11년간 대통령으로 재임했으며 이후 그에게 협력했던 조카 테오도로 오비앙 응게마 음바소고의 쿠데타로 축출되어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총살형에 처해졌다.

이디 아민, 장 베델 보카사, 시아드 바레,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 등과 함께 1970년대 아프리카의 대표적인 독재자 중 하나로 유명하다. 인지도는 다소 떨어지는 편이나 학정의 정도는 위의 독재자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정도로 악질적이며, 그의 학정이 어느 정도였는지 그가 집권하던 11년 동안 인구가 300,000명 남짓이던 적도 기니에서 전란도 없이 최소 50,000명이 사망하고 100,000명이 해외로 망명을 나가 인구 손실이 인구의 절반에 달할 정도였다고 한다. 말 그대로 현실판 타노스인 셈.

다만 이것은 출생아 수를 배제하고 계산한 것이기에 출생아 수 포함해서 진짜로 인구의 절반을 학살한 라나발로나 1세의 사례처럼 인구수가 정확히 절반으로 줄어든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전쟁도 없이 이 정도 인구 손실을 이끌어낸 것은 경이로운(?) 일이긴 하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는 1924년 1월 1일 스페인령 기니에서 팡족[2]의 유명한 주술사인 아버지 밑에서 오늘날의 가봉 지역의 월뢰은템주의 오옘에서 태어났다. 태어났을 적의 본명은 메즘 응게메(Mez-m Ngueme)였다.

메즘의 유년기는 매우 불우했는데, 아버지는 씨족 대표로서 임금 조건을 합의하기 위해 추장 칭호를 쓰려다 이에 반대한 스페인 관리에게 어린 메즘이 보는 앞에서 맞아 죽었고, 그 충격으로 일주일 후 어머니가 10명의 자식을 남기고 자살을 하는 바람에 메즘은 삼촌 집에서 양육되었다. 특히 아버지가 정치적 권력을 얻으려면 사람의 뼈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본인의 형제 중 한 명을 제물로 바친 일은 어린 메즘에게 영구적인 충격을 초래했다. 그 외에도 메즘은 형 2명에게 집단적인 괴롭힘을 당하고 여러 번 결핵으로 죽을 뻔했다고 한다. 이런 험난한 인생을 살던 어린 메즘은 사람들과 교류하는 것을 싫어하고 까다롭고 수줍음이 많고 내성적인 아이였으나 위대해지려는 야망을 가졌다고 한다.

이후 스페인인의 손으로 양육된 어린 메즘은 '자신의 언어로는 자신의 공부가 아무 소용이 없을 것'라며 스페인식 가톨릭 계열의 초등학교에 입학하는데, 이때 메즘은 스페인의 가톨릭 선교사에게서 세례를 받고는 이름을 '프란시스코 마시아스'로 개명했다.[3] 그러나 마시아스를 가르친 교사들은 어릴 적의 불우한 경험으로 인한 PTSD의 영향을 받은 응게마의 정신 상태가 위태롭다고 느꼈다. 여하튼 응게마는 이런 양육 환경의 영향으로 팡어 억양이 심하게 섞인 스페인어를 구사하게 된다.

초등학교 졸업 후 마시아스는 잠깐 부유한 스페인인 집안의 하인과 노점상으로 일하다가 하급 관리 임용 시험에서 3번이나 불합격한 끝에 1938년에 식민 당국의 배려로 4번째 시험에서 합격하며 공공사업부의 삼림국 직원으로 일하면서 비타, 리오 베니토, 몽고모 등지에서 근무했다. 겨우 만 14살에 관리가 된 셈이다. 이후 응게마는 1947년에 잠깐 공무원 직을 그만두고는 커피 농장 주인, 가톨릭 성직자들의 교리 강사 등 다양한 직업을 일을 하다가 1951년에 몽고모 지구의 행정 대표로 임명된 후 몽고모의 식민지 행정관의 통역 보조로 일하면서 뇌물이나 선물들을 챙기고 스페인 식민 당국에 협조했다.

당시 응게마는 망명 중인 적도 기니의 독립운동가들과 결코 접촉하지 않았을 정도로 스페인 식민 당국에게 적극적으로 충성했지만[4], 이는 실제로는 '개인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냉정하게 계산된 책략'이었다고 한다. 서기로 일하던 응게마는 뇌물을 받고 피고인들을 훈방하거나 유죄를 선고하기 위해 번역을 조작하는 기행을 보였으며, 스페인 측은 이러한 그의 모습을 리더십에 대한 영향력과 재능의 증거라 보고는 그를 빠르게 승진 시켜줬다.

2.2. 집권 과정

1960년부터 1964년까지는 몽고모 시장으로 일했고, 1964년에는 보니파시오 온도 에두(Bonifacio Ondó Edu, 1922~1969) 자치정부의 공공사업부 장관으로 임명되었고 이어서 부통령이 되어 1968년까지 재직했다. 이후 그는 스페인 식민당국이 독립국이 될 적도 기니의 새 헌법을 제정하는 과정에 있어서 리더십에 타격을 입은 온두 에두를 제치고 점차 새 지도자로 떠오르게 되는데, 여기에는 식민당국에 우호적이었던 그를 이용하기 위한 많은 스페인 기업가들의 지원이 있었다. 또한 정부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인구 밀도가 높은 마을, 추장 집회, 팡족 거주지 등을 찾아다니며 맹렬한 연설을 통해 인지도를 크게 높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팡족 우월주의 성향을 보였고, 팡족의 주요 지도자가 되었다. # 사실 스페인이 응게마의 집권을 원했던 이유는 겉보기에는 만만해 보이는 인물이었던 응게마를 집권 시켜 독립한 후에도 적도 기니에서 영향력 행사를 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던 것도 있다.

1968년 8월 11일 치러진 국민투표에서 유권자의 63%가 새 헌법에 따른 독립을 지지했고, 1968년 9월 22일 치러진 적도 기니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 공명 선거였던 대통령 선거[5] 및 국회의원 선거에서 그는 온도 에두와의 결선 투표 끝에 62.9%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선출되었고 그가 소속된 당인 적도기니인민이념(IPGE)도 선거에서 승리했다. 이 선거에서 응게마는 '노래와 함께 아침을 알리는' 수탉을 캠페인에 이용했는데, 이 수탉은 1973년부터 1979년까지의 적도 기니의 국장에 쓰였고, 그 국장은 동 시기에 쓰인 적도 기니의 국기에도 사용되었다.[6]

2.3. 대통령 집권

파일:macias nguema.jpg

1970년경의 응게마. 원본.

1968년 10월 12일 응게마는 적도 기니의 독립과 함께 대통령에 취임했다. 취임 후 첫 연설에서 응게마는 "자유는 인간의 가장 깊은 속성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개인의 자유를 가장 절대적으로 존중하는 것부터 시작합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응게마는 건강하고 단순하며, 악덕이 없고 합리적인 사람으로 알려졌다.

2.4. 독재의 시작

그러나 1968년 12월 응게마는 이미 '이념을 통합'할 단일 정당이 곧 있을 것이라는 발표를 하며 독재자가 될 것임을 암시했고, 1969년 3월 5일 응게마는 쿠데타를 일으키려던 외무장관 아타나시오 은동고[7]를 체포한 후 마시아스 본인이 손수 대통령궁 2층 창 밖으로 내던지고는 5시간 동안 부하들에게 땅바닥에 쓰러진 은동고를 구타하게 했다. 이때 응게마는 고통스러워하는 은동고의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고 한다.[8] 결국 은동고는 투옥된 후 3주 뒤인 3월 26일 총살형에 처했으며 그의 아내도 구금되고 고문을 당했다가 카메룬으로 추방되었다.

사투르니노 이봉고 이양가(Saturnino Ibongo Iyanga, 1936~1969) 유엔 주재대사도 쿠데타 가담 혐의로 기소한 후 감옥에 끌려간 지 하루 뒤인 3월 6일 살해당했다. 덤으로 응게마의 당선 후 가봉으로 도피했다가 오마르 봉고 가봉 대통령의 강제 송환으로 인해 투옥된 온두 에두도 교도소에서 1969년 3월 5일 처형되고는 자살로 사인이 조작되었다.

통상적으로 알려진 쿠데타 진행 과정은 상술한 바와 같지만, 응게마 시기의 적도 기니가 엔베르 호자알바니아[9] 이상으로 극단적으로 쇄국 정책을 펼쳤던 나머지 이 쿠데타의 진상도 명확하게 드러난 것이 없어 쿠데타의 과정이 기록마다 다른 데다가 이 쿠데타는 사실 '마시아스의 해임을 막기 위한 반(反)쿠데타'였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으며, 심지어는 응게마가 장관 회의를 명목으로 은동고를 궁전으로 불렀다는 점을 들어 이 쿠데타가 사실 응게마가 자행한 친위 쿠데타, 즉 자작극이 아니었냐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10] 여하튼 응게마는 이 쿠데타 시도를 진압한 3월 5일을 '승리의 날'이라는 기념일로 삼았다.

이후 응게마는 1969년 3월 8일 '이제부터는 단 하나의 당만 있을 것이다.'고 선포한 후 국회의장과 산타이사벨 시장 등 200명 이상의 부비족 출신들을 고문 끝에 죽이고는 수도 산타이사벨의 대부분의 행정관료를 리오무니의 팡족 출신으로 채우기 시작한다. 이 때문에 어떤 사람은 '적도 기니의 독립은 1968년 9월 12일부터 1969년 3월 5일까지 지속되었다'[11], '스페인이나 유엔의 개입이 없는 한 세계에서 가장 현대적인 국가가 가차없이 무정부 상태로 접어들기 시작했다'라고 평했을 정도였다.

1969년(혹은 1975년)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186명의 반정부 인사들을 쿠데타 모의 혐의로 공개 재판을 거치게 한 후 수도인 말라보의 축구 경기장으로 옮긴 후, 엠프로 당대의 히트곡이자 응게마가 좋아하던 곡이던 'Those Were The Days'을 배경 음악으로 깐 채 한 군인들이 이들 중 150명을 총살하거나 교수형하고 나머지 36명은 스스로 구덩이를 파게 한 후 그 구덩이에 목까지 묻은 후 붉은불개미를 풀어놓는 방법으로 죽게 했다. 특히 후자의 형벌을 당한 사람들 중 다음날까지 살아난 사람은 겨우 2명밖에 없었다.

1970년 1월 19일 '정당 탄압령'이 선포되었고, 같은 해 7월 7일 단일민족당(PUN)을 창설한 후 공식적으로 일당제를 선포했으며, 1971년 5월 7일 두 차례의 쿠데타 시도와 '적도 기니의 국민이 선출한 대중적이고 민주적인 대통령 암살 시도'를 극복했다고 주장하며 칙령을 통해서 입법, 행정, 사법을 아우르는 절대권력을 손에 쥔다.

1971년 7월에는 당의 이름을 단일민족노동자당(PUNT)로 개명하고는 7세 이상의 모든 적도 기니 국민들에게 의무적으로 PUNT 당원으로 가입하게 했으며, 동년 10월 18일 응게마와 자신의 정부를 비난하면 사형을, 대통령을 모독하는 행위에 대해서 30년형을 규정하는 법을 통과 시켰고, 1972년 4월부터는 14세부터 군 복무를 해야 한다고 명령하고는 동년 7월 14일 모든 정당을 PUNT로 통합하고 종신 당수와 종신 대통령, 국방부 장관, 외교부 장관, 법무부 장관에 취임했다. 응게마는 군대에 복무한 경험이 전혀 없었음에도 스스로를 육군 소장으로 추대했고, 정부와 군대의 요직들에 자신의 가족들과 친척들을 임명했다.

1973년 7월 12일 개정된 헌법이 채택된 후, 1973년 7월 29일 열린 국민투표가 (공식 기록에 따르면) 99%의 찬성으로 가결되면서 응게마는 대통령으로서 절대적 권한을 부여 받게 된다. 이 시기가 되면 모든 정부 조직이 붕괴되고 의사결정 과정도 사라졌으며, 적도 기니는 사실상 '응게마의 개인적 영지'가 된 것이나 다를 바 없게 되었다.

여기까지만 봐도 충분히 악질 독재자의 행보였지만, 더 큰 문제는 이후의 기이하고 추악하기 그지없는 행보들이었다. 응게마의 만행들은 이디 아민, 장 베델 보카사, 모부투 세세 세코,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 시아드 바레와 같이 남북조시대의 폭군을 연상 시킬 만큼의 기괴하고 끔찍하다 못해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의 학정을 벌인 독재자들이 많았던 1970년대의 아프리카 지도자 중에서도 가히 최악의 수준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응게마 시기 적도 기니는 가히 전 국민의 집단농장 강제 이주와 가족 해체 정책 없이 지도자를 북한 수준으로 우상화한 민주 캄푸치아라고 봐야 할 수준의 극단적인 국가였다.

2.5. 독재 행각

일당제 하의 종신 대통령이 된 응게마는 공식적으로 군 통수권자가 되었으며 30개 이상의 직책을 겸임했다. 모든 명령, 예산 집행, 결정은 그가 직접 내렸으며 입법, 사법, 행정의 모든 영역에서 무제한 권한을 보유했고, 외국인에 대한 비자까지 직접 관장했다.

언론 탄압도 극악하여 응게마가 직접 승인한 뉴스만이 공개될 수 있었고, 라디오에서 방송될 내용도 응게마가 손수 감독했으며, 당시 발간했던 적도 기니의 국영 신문 2종은 1975년에 '종이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폐간된 데다가, 외국의 특파원들도 '국가에 대한 잘못된 이미지를 전달한다'는 이유로 1970년부터 입국이 금지 당했다. 편지 검열도 극심하여 응게마가 자신을 나라의 '유일한 우체부'라고 선언하며 우편을 직접 검열해 응게마의 책상에 편지가 가득 쌓인 채 예정된 수신자에게 가지 못하는 일이 수두룩했다.

물론 집회와 결사의 자유는 여당인 PUNT를 제외하면 허용되지 않은 것은 물론 모든 시위가 금지되었으며, 이동의 자유도 없어져 도로가 검문소로 가득 찬 것은 물론, 심지어 당시 적도 기니의 국민들은 북한민주 캄푸치아처럼 국내 여행을 하려면 정부의 승인을 받아야만 했다.[12][13] 그러던 판이었으니 해외 여행은 마시아스 본인의 특별 허가가 있어야만 가능했다. 그리고 매주 토요일에 국민들은 거리 쓸기 같은 무급 노동을 의무적으로 해야 했으며, 마시아스 정권의 공개적 행사에 참여하지 않은 국민들은 처벌을 받았고, PUNT 당원증은 학비와 근료 계약 등 모든 것에 필요했다.

또한 그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을 금지어로 지정하며 예수에게 '매춘부의 자식'이라는 막말을 남겼고,[14] 결혼식과 장례식도 법으로 금지 시켰고, 술집과 같은 오락 시설들도 폐쇄되었다. 그리고 응게마는 정권의 비전에 따라 적도 기니의 역사를 여러 번 조작하기도 했다.[15]

심지어 응게마는 부족한 외화를 채우기 위해서 스페인인들을 납치해 인질로 잡아 거액의 몸값을 받기도 했는데, 비록 스페인인은 아니긴 하지만 응게마가 인질을 외화벌이로 이용한 것의 일례로 1976년 6월 1일 아에로플로트 소속 Tu-154가 말라보 공항 인근의 바실레 봉우리에 충돌해 46명의 목숨을 앗아간 아에로플로트 418편 추락 사고가 있다. 소련은 동년 12월 11구의 시신을 인도하는 대가로 적도 기니에 500만 달러를 지불해야 했는데, 500만 달러는 당시 적도 기니 GDP(1.073억 달러)의 5%에 달하는 거액이었다고 한다.

다만 아이러니하게도 1972년부터 집계를 시작한 세계의 자유 지수에서 적도 기니는 북한도 능가하고 민주 캄푸치아와 동급의 생지옥이던 실상에 비하면 지나치게 후하게 등급이 잡혔다. 1972~1974년 조사에서는 정치적 권리(이하 PR) 6에 시민 자유(이하 CL) 6,[16] 1975~1976 & 1979년 조사에서는 PR 6에 CL 7을 기록했으며, 1977~1978년 조사에서만 PR 7에 CL 7을 기록했다. 응게마 치하 적도 기니보다는 아주 약간 나은 독재 국가인 북한도 1972년 이래로 매 해마다 PR 7, CL 7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등급인 셈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응게마 치하의 적도 기니가 통계 업데이트에 필요한 최신 자료 수집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극단적으로 폐쇄적이었다고 해도 응게마 정권이 오늘날의 북한 이상으로 정치적 권리와 시민 자유가 말살된 국가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어떻게 이렇게 높은 점수가 나온 건지 미스터리할 지경.[17]

2.5.1. 우상화

응게마의 우상화는 문자 그대로 북한도 능가하는 수준이라는 말까지 들었을 정도로 심각했다.[18] 아프리카에서도 그와 비슷한 수준으로 본인을 우상화한 독재자는 중앙아프리카공화국장 베델 보카사 말고는 없을 정도. 응게마는 집권 직후인 1969년부터 화폐에 자신의 얼굴을 새기고는[19] 국민들에게 자신을 '적도 기니의 독특한 기적(Milagro Único de Guinea Ecuatorial)', '교육과 과학, 문화의 총수', '강철의 지도자', '적도 기니의 위대한 대중 혁명적 지도자', '국가의 최고 건국자', '적도 기니 혁명의 최고 추장', '존경스럽고 위대한 동지', '모든 혁명적 어린이들의 아버지', '적도 기니 국민의 해방자', '결함 없는 강철의 사도' 총 45~50개에 육박하는 호칭들로 부르게 했다.

사제들은 미사 전에 대통령에게 감사 기도를 올려야만 했으며, 수업 전과 축구 경기 시작 전에는 마시아스를 찬양하는 구호를 외쳐야 했고, 전화번호부에도 마시아스에 대한 헌정사를 포함해야 했으며, 모든 성당에 '신이 마시아스 덕분에 적도 기니를 창조했다. 마시아스 없이는 적도 기니도 없다.(Dios creó Guinea Ecuatorial gracias a Macías, sin Macías no hay Guinea)[20]'는 문구와 함께 응게마의 사진이 배치되었다. 그리고 응게마의 생일인 1월 1일과 '승리의 날'인 3월 5일, 응게마가 당선된 9월 28일은 의무 휴일로 지정되었고, 특히 3월 5일에는 1969년의 쿠데타 시도 진압을 찬양하는 연극이 상영되었으며 다리, 거리, 학교, 항구, 병원 및 기타 중요한 공공 시설의 이름에는 응게마의 이름이 붙었다. 물론 응게마는 국민들에게 자신에 대한 '충성과 사랑'을 보여줘야 한다는 이유로 자신의 초상화가 심장 높이에 배치된 PUNT 유니폼을 착용할 것을 강요했다.

심지어 적도 기니의 초대 부통령이던 에드문도 보시오(Edmundo Bossio, 1922~1975)마저 1974년 말[21] 집 문에 붙인 마시아스의 초상화가 찢어져 있었다는 이유만으로[22] 가택연금을 당한 후 재판 없이 가장 악명이 높던 수용소인 플라야 네그라[23] 수용소에 감금된 후 1975년 2월 21일 처형당하고 자살로 사인이 조작된 판이었으니, 평범한 국민들이 응게마의 초상화를 훼손했으면 어떻게 되었을지는 두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일례로 1972년 4월 중순에는 학교 교실에 훼손된 응게마의 초상화가 발견되자 교사와 학생들이 투옥되고 14세 학생을 포함한 여러 명의 학생들이 살해 당했다.

거기에 응게마는 북한의 김일성, 김정일과 비슷하게 초자연적 힘을 가지고 마법을 쓸 줄 아는 존재로 선전되었다. 일례로 응게마가 수도인 말라보를 떠날 때면 '전기는 응게마의 마법의 힘으로 생산된다'는 것을 각인 시키기 위해 말라보의 모든 전기 공급이 차단되었고, 응게마가 말라보에 돌아올 때에만 수도에 전력이 돌아왔으며, 그 후 응게마는 발전소의 노동자들에게 윤활유를 쓰지 못하게 하고는 '마법의 힘으로 기계를 계속 돌려 전기를 만들 것'이라고 속였다. 물론 이 때문에 응게마가 고향으로 잠적하고 공장이 고장 나 1977년에 발전소가 폭발했을 때 말라보는 완전히 암흑에 빠지게 되었으며, 이때부터 말라보의 시민들은 촛불로 밤을 버텨나가야 했다. 그러면서 응게마는 자신의 별장들과 대사관[24]에는 강력한 발전기를 둬서 항상 밝게 빛나도록 했다.

그리고 응게마도 키가 컸던[25] 본인에 대해 "나는 대통령이다. 그러므로 나는 너희 모두보다 크다", "나는 말라보의 호랑이다!"라고 선언했으며, 노래도 응게마를 찬양하는 것만 만들게 했다. 물론 외부와 완전히 고립된 아프리카 오지의 작은 국가에서 응게마는 '세계적으로 열광적인 추종자를 거느리고, 그의 연설은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키며, 스페인은 그를 두려워한다'고 선전되었다.

1976년 시점으로 적도 기니의 학교는 사실상 '정치·대중·혁명 교육'이라며 어린이들에게 응게마의 사상을 세뇌 시키는 곳으로 변해 45~50개에 달하던 응게마의 호칭들을 모두 외우지 못한 어린이들은 낙제생으로 분류되게 되었으며, 적도 기니의 어린이들은 "신이 마시아스의 명령으로 적도 기니를 창조했다" 같은 내용은 물론 스페인제국주의에 대한 증오를 표현하고 응게마의 인격을 미화하는 그의 '불변의 결정' 텍스트를 읽고 암송해야만 했고, 심지어는 때때로 응게마 본인이 직접 학교에 찾아가 어린이들을 세뇌 시킨 적도 있었다고 한다. 물론 어린이들에게 '정치 노선과 혁명적 구호'를 가르치지 않은 교사들은 즉시 쫓겨나고 재판을 받게 되었다.

심지어 1978년에는 아예 샤하다를 모방하여 '마시아스 응게마 외에 신은 없다(No hay otro Dios que Macías Nguema)'라는 정부의 슬로건까지 만들었다.[26] 북한조차 김씨 3대를 '인간 태양'으로 표현한다는 것과 비교하면 응게마 우상화의 극단성을 짐작하고도 남는 수준.

이 정도면 진지하게 불우한 가정사로 인한 애정결핍에 대한 보상 심리로 인해 우상화에 집착한 게 아닌가 의심이 들 수밖에 없을 정도. 실제로 응게마에 비견되는 수준으로 우상화에 집착했던 독재자들 상당수가 불우한 가정사로 인한 애정결핍 정황이 농후한 부분이 있다.

2.5.2. 반지성주의/극단적인 반서방 정책

사실상 초졸이었던 데다가, 머리가 별로 좋지는 않았던 응게마는[27] 이러한 학력, 지적인 면에서의 극심한 콤플렉스와 열등감 때문인지 '교육, 과학, 기술은 제국주의의 상징'이라고 여길 정도로 반지성주의가 강해 자신보다 똑똑한 사람을 대대적으로 숙청했다. 적도 기니 내에서 '지식인', '지적'이라는 단어는 사용이 금지되었고, 교육장관이 각료회의에서 저 단어를 사용했다가 즉시 처벌 받았다. 그나마 1970년에 유네스코중남미 출신의 교사를 파견한 덕분에 한동안 교육 시스템이 유지될 수 있었지만, 응게마가 1972년 7월 내뱉은 말 한 마디로 적도 기니의 지적 유산은 완전히 없어져버렸다.

응게마가 '모든 책을 불에 태워라'는 지시를 내리자 적도 기니의 모든 도서관이 폐쇄되고 기록보관소는 파괴되었으며, 서양에서 출판된 모든 책들과 식민지 시절 교과서는 공개적으로 불살라졌다. 타자기 사용과[28] 출판 활동 또한 금지되었고 안경을 쓴 사람과 책을 가진 사람은 지식인으로 몰려 처형되었다. 이는 응게마는 문서 최상단의 인용문에서 말한 것처럼 외국 문화와 교육이 아프리카의 순수한 정기를 오염 시킨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반지성주의 정책은 그 유명한 킬링필드보다도 몇 년 앞선 행각이었다.

당시 적도 기니에는 대학교는커녕 중고등학교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과학과 문화를 가르치는 것과 문학 작품 제작도 금지되었고, 스페인으로 유학 간 학생들은 국적을 박탈 당한 후 살해되었다. 그리고 1969년에서 1976년 사이에 적도 기니에서는 장관 3명을 포함하여 교사 또는 교육공무원 75명이 처형되었고 교사 수백 명이 쫓겨났으며 학교 수백여 곳이 폐교되었다. 이런 터무니없는 정책 탓에 식민지 시절에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교육 시스템이 잘 갖춰진 나라였던 적도 기니가 응게마가 몰락한 후에는 일부 특권층을 제외하면 대학 졸업자가 거의 없어졌고, 기술 학교 졸업생이 4명, 의사는 단 2명[29]밖에 없었다고 한다.[30] 거기에 군인들과 행정을 맡는 관료들마저 대부분 교육 수준이 낮은 사람들 위주로 등용되었고[31], 당연히 나라 운영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제국주의의 상징'인 지적 유산의 잔재를 없애는 것을 넘어 '제국주의의 잔재' 자체를 모조리 없애버리는 정책도 실시되었는데,응게마는 병원 주방에서 음식을 제공하는 '식민지 관습을 끝내기 위해' 환자 가족이 직접 병원까지 가서 음식을 가져오게 했고, 후에는 서구식 의료 체제도 '아프리카 전통 의약품 사용을 장려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금지되어 응게마의 말기에 적도 기니에는 주술사가 의사를 대신해야 했고 (서양식) 약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또 신발 역시 '아프리카적이지 않다'며 중지되었다.

1973년 가을부터는 '스페인 식민지 시대의 흔적을 모두 지워야 한다'는 이유를 들며 몇 달 동안 홍위병의 제복을 모방한 옷을 입은 '마시아스와 함께 행진하는 청년' 대원들이 집집마다 수색해가며 스페인이 적도 기니에 남긴 문헌들과 예술 작품들, 심지어 식민지 시대에 촬영된 사진, 식민지 시대에 만들어진 옷과 물건들까지 '제국주의의 잔재'로 간주하고는 이들을 무더기로 파괴하게 했다.

그러나 반지성주의 정책에는 예외가 있었다. 훗날 쿠데타를 일으킨 최측근이자 조카 테오도로 오비앙부터 스페인 대학에서 석사를 취득했고 자기 장남만큼은 생전에 쿠바로 유학을 보냈다. 이는 태반이 부농 집안에 프랑스 유학을 다녀온 교사 출신이었던 크메르 루주의 수뇌부처럼 응게마의 최측근이었기 때문에 면죄부를 받아서였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2.5.3. 반정부 인사 탄압과 학정

응게마의 정적 탄압과 잔혹성은 동 시기의 악명 높은 독재자들인 이디 아민[32]장 베델 보카사의 그것보다는 인지도가 낮아도 악랄함에서는 이 둘과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았고, 어떤 면에서는 이 둘을 능가했다. 오죽하면 당대에 응게마에게 붙은 별명이 무려 '아프리카의 폴 포트'였을까? 거기다가 그의 학살이 다른 독재자들의 학살과 차별화되는 점은 바로 응게마 정도는 상대도 안 될 대규모의 학살을 자행했으면서도 적어도 비뚤어진 명분이라도 내세웠던 다른 독재자들과는 달리 응게마는 최소한의 명분조차 내놓지 않은 채 문자 그대로 묻지마 식으로 자국민 학살을 자행했다는 것이었다.

응게마 내각 관료들은 대부분 투옥되거나 살해 당하는 등의 정치적인 탄압을 받았다. 당시 상황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시로, 독립 직후에 선출된 의원들의 2/3가 1974년 말까지 처형되거나 '실종'되었다고 하며, 첫 내각의 장관 12명 중 10명, 국회의원 35명 중 9명이 독립 1년도 안 되어 살해 당했다. 게다가 내각회의도 거의 없었으며 식민지 시절 정치인들부터 적도 기니의 독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던 독립운동가 출신 정치인들까지 대부분의 정치인들이 암살되었으며, 거의 모든 판사들이 해외로 도피하거나 투옥되었기 때문에 정적들에 대한 재판은 민병대가 조직한 임시 법원에서 행해졌다. 그리고 응게마는 대법관으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직접 사형을 선고하기도 했으며, 재판 과정도 피고인의 변호사들이 피고의 사형을 요구하는 등 불공정하기 짝이 없었다. 심지어 응게마의 학정이 지속될수록 재판이 줄어들다가 후반의 몇 년은 아예 모든 정적들이 재판도 거치지 않고 감옥에 가게 되었다. 그리고 정부에서 승진하는 것은 '권력의 축적', 다시 말해 응게마에 대한 잠재적인 위협으로 간주되어 위험한 일로 간주되기까지 했을 정도였다. 또 나라의 행정부 요직에는 응게마의 친구와 친척, 응게마의 부족들로 채워졌다.

반정부 인사로 의심되는 사람이 투옥되면 이와 동시에 수감자의 가족들에게 연좌제가 적용되어 그 사람의 아내와 자녀들 등 가족 전체, 심지어 그들을 동정한 사람들까지 무기한으로 투옥되고 처형 당했으며, 그들의 아이들은 투옥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교육을 받는 것이 금지되었다. 그리고 정적들은 재판도 안 거친 상태로 총알이 비싸다는 이유로 고문을 가하기 전에 밧줄로 꼰 막대기로 사지가 결박되거나 채찍, 쇠파이프, 나무 몽둥이로 구타 당한 후 공개적으로 교살 혹은 생매장하거나, 긴 도랑을 파게 한 뒤 그 도랑의 썩은 물에 익사 시키거나, 삽이나 곡괭이, 심지어 쇠창살로 머리를 가격하는 방식으로 처형되었는데, 이렇게 처형된 응게마의 정적들은 효수되었다. 또 응게마의 부하들은 남편이 보는 앞에서 여성 수감자를 강간하거나 15세밖에 안 된 소녀들을 공개적으로 강간하기도 했다.

그리고 응게마는 1969년 2월 22일 '마시아스와 함께 행진하는 청년(Juventud en Marcha con Macías)'이라는 준군사 조직을 만들며 이 조직을 자신의 친위대로 삼았는데, 이 단체에 가입한 청년들은 남녀 상관없이 응게마를 절대적인 숭배 존재로 만들고자 응게마의 반대파들에 대한 고발, 약탈, 고문, 강간, 처형에 가담했으며, 그들의 감시가 너무 심한 나머지 적도 기니에 사생활은 실질적으로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게다가 이들은 가족을 위시한 모두를 감시하며 '반혁명분자'로 의심되면 부모까지 고발하는 등 나라를 온통 밀고 속에 빠트렸고, 덤으로 이들은 오만 악행들을 저질러도 전혀 처벌받지도 않았으며, 종종 술에 취한 채로 목격되었을 정도로 기강도 해이했다. 응게마는 이에도 만족하지 않아 1972년에는 '인민 민병대(Milicia Popular)'라는 이름의, 팡족의 민간 자원봉사자 2천 명의 회원을 가진 또 다른 준군사 조직을 만들기도 했다. 이렇듯 응게마가 민병대에 집착한 이유는 적도 기니의 군대를 식민지 시절과 밀접하게 관련된 조직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반체제 인사 한 명을 없애기 위해 반체제 인사가 사는 마을 전체를 파괴하라는 명령을 대통령이 손수 내려 젖먹이 아기부터 노인까지 모든 연령대의 무고한 사람들이 살해되는 일이 잦았고, 대통령이 직접 장관들의 부인들이 갇힌 감방을 찾아가고는 그들을 강간한 뒤 장관들에게 이 광경을 강제로 지켜보게 했고 이 사람들을 군대에게 넘겨주던 판이었으니, 응게마가 정적들을 마체테로 찔러 죽인 뒤 이들의 시체를 상어 먹이로 던져줬다거나, 응게마가 단순히 인육을 먹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대통령궁으로 보내진 정치범을 손수 처형하고 그 인육을 먹었다는 소문까지 있었다. 응게마가 인육을 먹었다는 주장에 따르면 응게마는 인육을 정력제처럼 여겼다고 한다.[33]
2.5.3.1. 열악한 교도소
적도 기니의 교도소는 응게마가 '이 죄수들을 너무 잘 대우한다'고 불평(?)하자마자 생지옥으로 바뀌었다. 침대와 덮개는 물론이고 변소조차 없는 비위생적인 감방에 나체로 감금된 수감자들은 발이 묶인 상태로 거꾸로 매달린 채 무자비한 구타를 당하거나 전기고문, 맹견의 공격, 신체 절단,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강간을 당하는[34] 등의 가혹행위나 카카오 농장에서 일하는 등의 강제노동을 당해야 했던 것은 기본이고, 죄수들에게 음식은 커녕 물도 주지 않아 굶어 죽거나 괴저로 죽는 죄수들이 상당했다고 한다. 이런 가혹한 심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심지어는 고인의 시신조차 친족에게 넘겨지지 않고 자상과 핏자국만 있는 피해자의 의복만이 전달될 때도 있었다. 심지어 응게마는 직접 감옥에 방문하여 수감자에 대한 가혹행위를 명령하기도 했다. 게다가 감옥이 가득 찰 때면 정기적인 대량 처형으로 이 '과밀'을 해결했다.

특히 응게마의 조카인 테오도로 오비앙 응게마 음바소고가 소장을 맡은 적이 있던 블랙 비치 교도소는 당시 교도소 중 가장 악명이 높았던 곳이었다[35]. 이 수용소에는 최대 6천 명이 감금되어 있었으며[36], 이곳의 수장이던 테오도로 오비앙은 심문과 수감자에 대한 약식 재판을 주관하며 수감자에 대한 생살여탈권을 가진 것은 물론이고 가혹행위를 개인적으로 감독했는데, 이 교도소에서의 가혹행위와 처형은 오비앙의 명령에 직접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 오비앙은 교도소의 어둡고 좁은 구석인 '사무실'에서 자정마다 개인적으로 심문과 수감자에 대한 약식 재판을 주관하며 수감자의 운명을 결정지었는데, 물론 대다수가 사형을 선고 받았다.

블랙 비치 교도소에서는 죄수들로 하여금 서로 투견처럼 싸우게 하고는 살아남은 사람마저 간수를 시켜 살해했고, 일반적인 처형 방법이 수감자의 얼굴을 땅에 대고 눕힌 뒤 쇠창살로 머리를 여러 번 가격하는 것이었으며, 심지어 매 주 토요일 밤마다 수감자들을 끌어내어 모닥불 주위에서 5~6시간 동안 끝없이 춤을 추면서 마시아스를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게 했는데, 쉬지도 못하는 상태로 춤을 추며 엄청난 정신 착란에 빠진 죄수들은 다시 감방으로 끌려갔으며, 죄수 중 한 명이 지쳐서 넘어지면 경비병이 그 모닥불로 달군 쇠창살로 그 죄수를 때렸다고 한다.[37] 그리고 가끔씩은 수용소 인근의 숲으로 수감자들을 이송하면서 그 과정에서 처형하기도 했는데, 이렇게 죽은 시체들은 마대자루에 담긴 후 근처의 강에다가 유기되고는 며칠 후 카메룬의 해변가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심지어 응게마의 별장에 있는 교도소에서는 여성이 출산하면 그 즉시 갓난아기를 수용소 근처에 있는 강에 던져 죽였다고 한다.

2.5.4. 소수민족 탄압

스페인 거주민에 대한 탄압도 제노사이드에 가까운 수위로 자행되었는데, 1969년 2월 25일 해안을 걷다가 스페인의 시설물에 스페인 국기가 걸려있는 것을 보고 '독립 후에도 변화가 없었다'고 판단한 응게마는[38] 스페인 총영사에게 스페인 국기를 내리라고 했으나 총영사가 이를 거부했다. 이에 분개한 응게마는 1969년 2월 27일 국영 라디오로 송출된 연설에서 대놓고 "백인을 죽이고, 여성을 강간하고, 전리품을 취할 권리가 있습니다. 백인을 돕는 사람은 누구든지 사형에 처합니다! 우리는 스페인 제국주의와 전쟁 중입니다!"라는 연설을 하기도 했다.

정작 응게마 본인은 식민지 시절에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스페인 당국에 협력하며 뇌물까지 수수 받은 사람이었고, 아내는 스페인계 혼혈이었으니 마시아스 응게마가 정한 기준대로라면 본인이 가장 먼저 사형 당해야 했다. 그나마 마시아스 응게마는 실무 부역자 출신이라 그럭저럭 넘어갈 수 있더라도 그의 최측근이던 조카 오비앙은 한술 더 떠 적도 기니의 독립 전에 적도 기니 영토 수비대 중위로 일하며 적도 기니에 정착한 스페인인들을 보호했던 빼도 박도 못할 식민지 부역자였다.

이 연설을 들은 적도 기니인들은 스페인인들의 농장을 습격하고는 스페인인들에게 강제 노동을 시키며 무자비한 구타성폭행을 가한 것은 물론이고 의무적으로 속옷 차림으로 일하게 하는 굴욕을 느끼게 하거나 불개미를 풀어놨으며, 심지어 스페인의 외교관까지 폭행을 당했다고 한다. 이후에도 응게마는 '스페인이 식민지 기간 동안, 그리고 마지막에 나라를 폐허로 남겼다'[39]라고 주장한 것은 물론 '자녀들에게 스페인 사람을 싫어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라며 공공연하게 선동했다.

이런 탄압 속에서 스페인인들이 거의 모두 적도 기니를 떠나자,[40] 이번에는 포르투갈 이민자들에게도 이와 같은 탄압을 실시했고, 포르투갈 이민자들이 전부 추방된 후에는 적도 기니의 원주민들에게도 이와 같은 탄압을 실시했다.

응게마는 상대적으로 부유하고 교육 수준이 높았던 부비족을 증오하여, 부비족이 살던 페르낭 포 섬을 침략해 군인들이 점령하게 한 후 주민들의 분리주의 운동을 가혹하게 탄압했으며, 이런 부비족에 대한 탄압은 제노사이드로까지 평가받을 정도로 잔혹했다고 한다. 안노본(Annobón) 섬[41]은 1968년 선거에서 응게마에 대한 투표율이 50%를 넘기지 않았고 섬 주민들이 스페인에 우호적이었다는 이유로 1972년부터 외부와 고립되었다.

1973년에 안노본 섬에서 콜레라가 발생하자 응게마는
서양의 의약품은 아프리카적이지 않다.
는 핑계를 들며 구호품 제공을 금지해 100명 이상이 콜레라로 사망하게 되었으며, 1976년 크리스마스에 배 한 척이 몇 년간 완전히 고립되었던 안노본에 도착하자 이를 본 안노본 주민들은 의료 지원과 구호품을 받을 생각에 들떴지만, 배에서 나온 마시아스의 경비병들은 16세에서 40세 사이의 모든 남성을 체포했다.

물론 모든 소수 민족의 고유어와 스페인어는 금지어가 되었고, 덤으로 응게마는 자신의 부족이 쓰던 팡어가 당시 적도 기니의 공식 언어가 아니었음에도 팡어를 모든 국민들에게 사용할 것을 강요했으며, 1973년자 헌법은 '단일 민족 국가'를 명시했다.

2.5.5. 1973년 이후 연도별 행각들

헌법 개정이 이루어진 1973년에는 국민들의 해외 여행은 물론이고 민간 상업 활동까지 전면 금지 시키며 적도 기니의 시장, 노점, 우체국 등은 소멸했다. 그리고 모든 종교인들을 가택 연금 시키고 교회를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벌금을 부여했으며, 고문 당하는 종교인들은 '신은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마시아스만이 참된 신이다. 마시아스 만세!'라는 말을 암송해야만 했다.

그리고 응게마는 같은 해 개정한 헌법에 따라 개인 자동차, 주택, 돈, 농장을 포함한 사유재산을 강제로 몰수하는 정책을 수립하여 토지와 영토 내에서 발견되는 모든 것에 대한 국가의 소유권을 확립했고, 응게마는 이에 따라 몰수된 많은 농장을 소유했다고 한다. 그리고 영공도 사실상 폐쇄되어 응게마의 허락 없이는 그 어떤 비행기도 착륙이 불가능했으며, 많은 관광객들은 '정부가 허락하지 않은 신문'을 읽었다는 이유만으로 비행기에서 하기하자마자 강제로 출국 당했다. 더군다나 스페인인 방송 기술자가 모두 쫓겨나며 응게마의 연설과 회의 정도만을 방송하던 적도 기니의 TV 방송은 전면 중단되었다.[42] 이렇게 응게마가 집권할 동안 적도 기니에 언론은 응게마 찬양만 하는 국영 라디오 방송국 2곳을 제외하면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같은 해에 응게마는 병원장 자리를 의학과 전혀 관련이 없는 축구 선수와 그의 친위대 관계자에게 주기도 했다.

1973년 8월에는 모든 인명과 지명을 아프리카식으로 바꾸도록 하여 수도인 산타 이사벨(Santa Isabel)은 말라보로, 말라보가 있는 페르난도 포(Fernando Poo) 섬은 독재자의 이름을 딴 'Isla Macías Nguema Biyogo'로,[43] 안노본은 파갈루(Pagalu)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거기에 같은 해에 응게마는 나병 환자 집단이던 미코메셍(Micomeseng)을 폐쇄하고는 환자들에게 고향 마을로 돌아가도록 명령했고, 이에 사람들은 나병 감염을 두려워하며 정글로 피신하며 많은 사람들이 또 다시 죽어나갔다. 같은 해 1월 실제 쿠데타가 발생했지만 스페인의 도움으로 진압할 수 있었다.[44][45] 이해 시점으로 이전 인구 중 이미 25%가 외국으로 망명을 떠났다.

1974년 응게마는 편집증이 심해지며 수도 말라보에서 고향 몽고모에 있는 별장으로 사실상 거처를 옮겼다.[46] 별장에는 쿠바와 북한 장교 등을 포함한 155명의 호위병이 상주하는 요새처럼 만들었고, 3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개인 교도소도 갖춘 이 별장에서 응게마는 정적들의 참수된 머리를 성별, 날짜로 분류하여 보관하거나 죄수 일부를 직접 곤봉으로 때리는 등 고문에 가담하는 것을 넘어 손수 창으로 찔러서 처형했고, 지팡이로 두개골을 때릴 때의 '청각적 즐거움'을 분석하기도 했다. [47]

이 해 이후로 적도 기니의 국가 예산은 '인쇄기가 없다'는 이유로 배정되지 않게 되었으며, 같은 해 6월 쿠데타 시도가 발각되었다며 이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90명을 재판에 넘긴 후 6월 22~25일 3일 동안 열린 재판 끝에 27명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나머지에게는 장기 징역형을 선고했으며, 이들은 26일에 모두 처형되었다. 이때 응게마는 수감된 118명[48]의 정치범의 처형을 지시하고는 이들이 모두 자살했다고 사실을 완전히 왜곡했다. 이 대량 처형에서도 응게마는 잔악무도함을 보여줬는데, 응게마는 이 정치범들을 처형하기 전에 가족들에게 이들의 즉결처분과 사형에 동의하도록 강요했고, 이를 거부한 가족들은 곧 처형될 정치범들보다도 먼저 처형되었다.

1975년 3월 18일부터는 법령으로 서양식 교육을 금지 시켰고, 교회가 에드문도 보시오 전 부통령과 전직 야당 의원들에 대한 살해를 비판하자 응게마는 같은 해 4월 무렵부터는 인구 95%가 믿던 가톨릭을 금지 시키며 모든 성당의 폐쇄를 지시했다. 이후 적도 기니의 종교 탄압은 세계 최초로 '무신론 국가'를 선포한 엔베르 호자알바니아에 견줄 수준이었다고 평가 받는데, 외국인 사제들은 모조리 추방된 것은 물론이고 당시 말라보에 있던 대성당은 문자 그대로 무기고로 변경되었고, 성탄절과 성체성혈대축일 등 종교적 기념일은 대량 처형일로 바뀌었으며, 심지어 몇몇 기독교인들은 문자 그대로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응게마가 이렇듯 종교를 가혹하게 탄압한 이유는 응게마는 종교를 식민지 시절의 잔재로 여겼기 때문이었다.[49] 그리고 1975년 12월부터 응게마는 말라보를 완전히 떠나 몽고모의 별장에 완전히 안착하게 되었으며, 때때로 모닥불 주위에 앉아 친척들, 마을 장로들과 국가 정책에 대해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내거나 고향 마을에서 어업, 사냥, 농업에 종사하는 소박한 모습도 보였다. 사실상 아무 예고도 없이 수도를 시골로 천도한 셈이다.

1976년에는 모부투 세세 세코마냥 본인의 이름을 아프리카식으로 '마시에 응게마 비요고 녜게 은동(Masie Nguema Biyogo Ñegue Ndong)'으로 바꾼 것을 시작으로 모든 스페인식 인명과 지명을 아프리카식 이름으로 바꾸도록 지시했으며, 같은 해 3월에는 가톨릭을 사이비 종교라 규정하고는 '사이비 종교인들과 접촉하는 사람들은 엄벌에 처한다'고 지시하고는 기독교와 관련된 모든 것을 소유하는 것은 반정부 음모나 쿠데타 시도를 지원한다는 혐의가 적용되는 중범죄가 되게 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응게마는 같은 달에 "7세부터 14세까지의 모든 어린이들은 의무적인 군사 훈련을 받아야 하며, 이들을 인도하기를 거부하는 부모는 투옥되거나 총살될 것이다"라는 명령을 내렸는데,[50] 물론 이 아이들은 소총의 무게조차 견딜 수 없었다고 한다. 거기다가 적도 기니의 모든 어린이들에게 소년병 훈련을 시키도록 한 바로 그 날, 응게마는 '세례를 받을 때 교회에서 부여한 이름을 표시하는 것과 아프리카 이름을 유럽식 억양으로 '잘못' 발음하는 것을 금지한다'고 지시했다. 이해 시점으로 적도 기니의 모든 무역과 산업은 물물교환으로 대체되었으며, 적도 기니에 응게마에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사람은 거의 남지 않게 되었다.

여기에 같은 해 4월 응게마는 자기가 타던 헬리콥터가 한 마을에 추락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마을을 불태우라고 명령했으며, 이에 하루 아침에 고향을 잃은 주민들은 가봉으로 도피했다. 1976년 11월에는 정부의 공무원들이 그의 정책을 비판하며 그에게 국가 개혁을 촉구했으나 응게마는 이들을 고문하고는[51] 무려 500명 이상을 죽이는[52] 피바람을 불러들인 후 이 사건을 공식적으로는 '스페인의 도움을 받은 쿠데타 모의'로 허위 발표하고는 이 모두의 사인을 자살로 조작했다. 이 무자비한 숙청에 오비앙이 핵심적으로 관여했다는 말이 있으나, 다른 소식통에 따르면 오비앙도 진압이 너무 과하다고 여겨 새로운 블랙 비치 교도소 소장인 살바도르 온도 엘라(Salvador Ondo Ela)에게 진압을 그만 두고 일부 수감자를 석방하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같은 해에는 응게마가 탄 비행기가 착륙하다가 활주로가 갑자기 정전되자 응게마는 애꿎은 항공기 조종사들을 수감시켰다. 이런 적도 기니에 대해 국제앰네스티는 1976년 연례 보고서에서 "아프리카에서 가장 억압적이고 전체주의적인 국가 중 하나"라고 평가했다. 1976년 3월 14일, 미국은 적도 기니와 단교하기에 이른다.[53]

한편 1976년 3월 나이지리아 정부는 '잔혹한 학대'[54]를 이유로 들며 적도 기니의 카카오 농장에서 일하던, 7천 명에 달하던 나이지리아인 노동자들을 본국으로 송환하여[55] 카카오 생산량이 급감해서 경제 상황이 악화되어갔다. 이에 응게마는 카카오 생산량을 감소 시키지 않게 하기 위해 같은 달에 '노예제'를 도입하는 것으로 응수했다.

응게마는 전국의 각 도시와 각 가족이 카카오 작물을 구하기 위해 할당량의 노동자를 수도가 있는 섬으로 보내야 한다고 지시했고, 이에 따라 응게마의 경비원들이 발견한 적도 기니의 국민들 약 2.8~4만 명은 정부 관리나 일반인 관계 없이 무급으로 비오코 섬에 있는 국영 카카오 농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만약 이 농장에 '자발적으로'[56] 들어가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즉시 체포되어 농장으로 이송되었고, 집에서 몇 마일이나 떨어진 카카오 농장에 가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즉시 체포되었다. 노동에 끌려간 사람 중에는 7~14세밖에 안 된 어린이들도 있었으며, 자식들의 강제 노동에 항의하는 부모들은 처형되었다.

국영 카카오 농장의 노동자들은 의료 지원은커녕 식량 배급마저 빈약하게만 받았고, 생존을 위해 의지할 지인과 친척도 만날 수도 없었으며, 이동의 자유도 박탈 당해 마을로 돌아가는 것도 특별한 경우에만 '증명서'를 발급받아 이동 허가를 받아야만 가능했다. 이들이 일을 잘 못하거나 게으름을 피우면 구타나 강간, 식량 배급 중단을 당하거나 아예 처형 당하기까지 했고, 강제 노동에 시달린 대다수는 섬 주민들의 농장에서 물건을 훔쳐야 할 정도로 생활고에 시달렸다. 이렇게 강압적인 정책과는 달리 노동자 대부분이 농장에서 일한 경험이 전혀 없어서 생산량은 전혀 늘지도 않고 오히려 줄어 아주 작은 할당량조차 제대로 채울 수 없었다.[57] 이렇게 강제 노동으로 생산된 제품들은 지방자치단체에 압류 당한 후 대통령의 개인 창고에 쌓이게 되었다.

1977년 3월 스페인은 응게마의 스페인인 탄압과 스페인 정부에 대한 '언어 공격'[58]을 이유로 적도 기니와의 외교 관계를 중단하게 되었으며, 같은 달에는 응게마의 경제 정책에 반발하던 중앙은행 총재 헤수스 은동 부엔디(Jesús Ndong Buendi, ?~1977)는 카카오 판매로 번 외화 10만 달러를 횡령했다는 혐의로[59] 바타에서 공개처형되어 적도 기니에는 은행이 사실상 없어졌으며, 응게마는 국고에 남아 있는 모든 돈들을 여행 가방에 넣은 후 자신의 별장의 침대 밑과 욕실로 옮겨 대통령이 중앙은행 역할을 하기 시작한다. 응게마는 부엔디를 공개처형하고는 이도 모자라 그의 고향에 민병대를 보내 집들을 모조리 불태우고 여성을 모조리 강간한 후 염소와 닭을 몰살하며 마을을 완전히 파괴했다. 헤수스 은동 부엔디의 최후를 정리한 글. 동년 5월 21일 유럽 경제 공동체(EC)는 1978년부터 적도 기니 정부에 대한 경제 제재와 함께 경제적 지원을 중단하겠다고 결정했다. 이 해 시점으로 적도 기니에는 산업이라 할 만한 게 코카콜라 공장밖에 존재하지 않았으며, 몇 년 동안 사법 절차나 서면 판결, 재판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고, 법원도 소집되지 않았다.

1978년에는 "반정부 인사들이 '배를 타고' 카메룬으로 도주해 종신 대통령에 대한 음모를 꾸미려고 했다"는 말같지도 않은 이유를 들면서 국민들이 해외로 도피하는 것을 막기 위해 국민들에게 카누를 위시한 나라에 있는 모든 개인 소유 선박들을 파괴하라고 지시했으며,[60] 그것도 모자라 국가 밖으로 나가는 유일한 도로를 파헤치게 하고는 지뢰를 설치한 후 가봉과 카메룬 사이의 국경에 창이 박힌 위장된 구덩이를 설치하고도 모자랐는지 맹견도 풀어놨다. 응게마의 황당한 명령으로 적도 기니의 어업은 완전히 마비되었으며, 적도 기니의 국민들은 살기 위해 가봉으로 망명을 가려고 적도 기니와 가봉 사이의 강을 헤엄치다가 목숨을 잃기도 했다.

이 시점에 대부분의 장관직은 공석이었고, 국회는 사실상 해산된 데다가[61] 통화와 외환은 없어졌으며, 공무원에 대한 급여 역시 응게마 자신을 제외하면 사실상 동결되었고, 모든 종교인들은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수도는 밤이면 완전한 어둠에 빠져들게 된 데다가[62] 열대에 사는 곤충과 파충류들이 거리를 돌아다니는 문자 그대로의 '유령 도시'가 되었으며[63], 나라는 '적도 기니에는 법이 없으며 중요한 것은 정글의 법칙뿐'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치안이 사라진 무법천지가 되었다.

당시 적도 기니의 경제 파탄이 어느 정도였냐면 응게마의 경호원들조차 수렵채집으로 살아가야 할 정도였다고 하는데,[64][65] 이런 상황 속에서 응게마의 친위대에 가까웠던 민병대가 전국 곳곳에서 이전보다 빈번하게 자국의 민간인들을 학살해대니 적도 기니 국민들의 삶은 완전히 도탄에 빠졌다. 게다가 정부의 기능도 '내부 안보' 하나를 제외하면 모두 마비된 상태였으며[66], 그가 집권할 동안 군사 쿠데타 시도는 무려 20회에 달했다고 한다[67]. 거기다가 응게마의 극단적인 쇄국 정책은 적도 기니와 외부와의 단절을 초래했고, 국가 내부에서도 수도와 본토와의 연락마저 뜸해지게 되었다. 한 예로 1978년 2월 적도 기니를 잇는 항공편을 점차 줄여나가던 스페인의 이베리아 항공은 적도 기니를 잇는 항공편을 중단했고, 응게마가 물러갈 때까지 말라보와 본토를 잇는 교통편은 작은 여객선[68] 하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렇게 기존부터 외부와의 문을 완전히 걸어잠궜던 나라가 사실상의 무정부 상태에까지 빠져들었다 보니 세계은행도 1978년과 1979년의 적도 기니의 GDP에 대한 집계를 포기할 정도였다.[69] 이때 시점으로 응게마는 팡족도 '많은 것을 가졌다'며 억압하게 되었다.

그런데도 1978년에 응게마는 적도 기니 독립 10주년을 기념하여 경찰과 주방위군에게 '새로운 음모의 위험'을 경고하기 위해 "반동적 폭력, 혁명적 폭력에 반대한다"라는 슬로건을 만들었으며, 같은 해 3월 적도 기니는 아프리카 최초이자 알바니아에 이어 세계에서 2번째로 '공식적인 무신론 국가'가 되었으며,[70] 7월 4일에는 가톨릭을 '완전히' 금지했다. 같은 해에 미국 하원은 종교 박해와 제노사이드 행위[71]에 대해 응게마를 규탄하는 공동 결의안을 제안했고, 동년 10월 10일에는 국제앰네스티가, 동년 12월 19일에는 국제법학자위원회(ICJ)가 적도 기니 정부의 인권 유린을 규탄했다.

1979년 응게마는 PUNT 회의를 주재하며 적도 기니를 공식적으로 공산주의 국가로 선포하려 했지만,[72][73] 후술할 쿠데타로 이 계획은 취소되고 이 회의도 마지막 PUNT 회의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같은 해 3월 응게마는 항공사 설립을 발표하기도 했다.[74][75] 그리고 1979년 초 여름 말라보에 있던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응게마는 적도 기니에 방문했던 소련 군함을 보고는 "우리 나라(적도 기니) 전체보다 더 가치 있다"고 말했으며, 시내 상점에는 중국산 녹차 외에는 어떠한 것도 없었다고 한다. #

이런 응게마의 학정에 대항하여 해외로 망명한 적도 기니 사람들은 응게마를 전복하고자 고국에 게릴라를 보내기도 했으나, 그들이 망명한 나라의 정부들의 배신으로 인해 이들의 반 응게마 운동은 번번이 실패했고, 더구나 망명자 조직들은 단합하기는커녕 저항 운동자들에 참여한 사람들이 각자 제멋대로 행동한 것을 넘어 아예 서로를 배신할 정도로 내분이 심했으니 제대로 된 활동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2.5.6. 응게마 치하의 인명 피해

응게마의 집권 11년 동안 나치의 유대인 강제 수용소에 비교되며 '아프리카의 다하우', '아프리카의 아우슈비츠'라고 불리던 적도 기니에서는 기록적이라고 할 만한 끔찍한 인명 피해가 통계로 잡히게 되었다.[76]

응게마의 집권 직후인 1969년에 31.9만 명이던 적도 기니의 인구는 응게마가 몰락한 1979년 기준으로 약 14.1% 정도가 감소한 27.4만 명에 불과하게 되었으며, 응게마의 집권 말기에는 국민들 중 무려 60%가 수감과 친척의 살해를 경험했다고 한다.

그리고 응게마가 집권한 단 11년 동안 적도 기니의 국민들 중 5만~8만 명이 죽고 1만 명이 실종되었으며, 10만~15만 명이 해외로 도피한 것으로 추정되는데,[77] 이 수치를 1969년자 적도 기니의 인구에 대입하면, 10년 동안 전 국민의 15.6~25.1%가 살해 당하고 3.1%가 실종되며 31.3~47% 정도가 해외로 도피한 셈이다. 최소치로만 합해도 이전 인구의 절반, 최대치로는 무려 75%가 증발한 거나 다를 바 없는 셈. 더구나 이 기록들은 모두 어떠한 전란도 없는 순수 폭정만으로 이뤄낸 것이다. 그나마 다행히도(?) 이는 10년 간의 누적 수치라 실제로는 이전 인구의 1/7이 줄었다.

참고로 그와 비교되던 폴 포트 시기의 캄보디아에서는 4년 동안 인구가 이전의 10% 정도가 감소했고 최소 25.3%의 국민들이 사망했다. 이 수치를 적도 기니의 수치와 비교하면, 응게마가 '아프리카의 폴 포트'라 불린 것은 허투루 말한 것이 전혀 아니었던 셈이었다.[78] 그런데도 응게마는 망명을 간 국민들을 '이유 없이 도망 친 사람들'이라고 모욕했으며, 적도 기니가 파탄난 것을 스페인 제국주의와 가톨릭 때문이라고 우겼고, 당연히 자신의 모든 인권 탄압을 전면 부인했다.

2.6. 경제 파탄

물론 이런 학정과 산업을 '파괴되어야 하는 외국 자본주의의 또 다른 상징'이라고 간주해 경제 개발 자체에 관심을 전혀 가지지 않았던 지도자 하에서 나라가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으니 적도 기니의 경제도 완전히 망가졌다. 1970년대의 적도 기니는 경제 개발 계획과 공공 지출에 대한 회계 시스템이라는 것이 문자 그대로 존재하지 않았으며, 통계학자들에 대한 탄압 때문에[79] 70년대의 적도 기니의 경제 데이터는 거의 없을 정도다. 그러면서 응게마는 '내가 집권하는 한 이 나라에 자본주의란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80] 그리고 응게마는 외국 기업을 '우리의 부를 훔치려 오는 제국주의 거머리'로 간주하여 이들을 모조리 쫓아내고는 식품에서 의약품까지 모든 제품은 적도 기니에서 생산된 것만 사용할 수 있게 했다.

적도 기니의 GDP는 응게마가 집권할 1968년에는 6751만 달러였지만, 응게마가 퇴진하고 1년이 지난 1980년에는 5064만 달러로 12년 만에 이전의 75% 정도로 추락했으며, 응게마 집권기의 적도 기니의 평균 경제 성장률은 -2.4% 정도였다. 특히 1977년에 1.04억 달러 정도였던 적도 기니의 GDP는 불과 3년 뒤인 1980년 기준으로 5064만 달러로, 3년 만에 무려 이전의 48.7% 정도로 폭락했다. 심지어 1978년 기니의 수출량은 1970년대 초보다 5배나 적었고[81] 당시 적도 기니의 GDP 중 무려 90%가 외국의 원조로 구성될 정도였기에 적도 기니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많은 외채를 진 나라 중 하나가 되었다. 비록 응게마 하에서 마지막으로 GDP 통계가 잡힌 1977년 기준으로 적도 기니의 1인당 GDP는 383달러(2023년 환율로 1890달러) 정도로 집계되긴 했지만, 당시 적도 기니 GDP의 90%를 외국의 원조가 차지했을 정도였다는 것과 인플레이션율이 당대 아프리카에서 가장 높았다는 것, 적도 기니에서 통화와 상업 활동의 개념이 사실상 소멸했다는 것, 대통령 경호원 조차 수렵채집으로 살아갈 정도로 경제라는 개념이 소멸한 수준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적도 기니 국민들의 실질 소득은 이것보다 훨씬 낮았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당시 적도 기니의 수준을 고려하면 조작된 통계를 제출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리고 응게마는 의료에는 돈을 전혀 쓰지 않았기에 식민지 시절에 우수한 수준이었던 적도 기니의 의료 인프라는 문자 그대로 초기화되었다. 1979년 시점으로 적도 기니의 국민들 0.8%에 달하는 2천 명이 한센병 환자였고, 나라에는 광범위하게 말라리아가 퍼졌으며, 원래 아프리카에서 영유아 사망률이 제일 낮던 적도 기니가 응게마 시기에는 비공식적으로는 무려 60%가 되어 아프리카 내에서도 영유아 사망률이 가장 높은 나라가 되었으며[82], 평균 수명은 43.73세(1968)에서 40.5세(1977)로 추락했고, 심지어 1976년에 적도 기니의 평균수명은 무려 28.9세였다.

게다가 서구권과의 무역도 금지되었던 적도 기니는 인플레이션율도 당시의 아프리카 국가들 중에서도 가장 높은 국가였고, 독립 직후 기준으로 아프리카에서 가장 경제 인프라가 발달하고 부유한 나라 중 하나에서 살던 적도 기니의 국민들은 영양실조에 시달리게 되었지만, 응게마는 식량들을 매우 저렴하게 매입한 후 의도적으로 평시 가격의 80~100배나 되는 고가에 재판매하며 폭리를 취했다. 심지어 응게마는 음식이 판매될 시기도 손수 결정하여 시판된 음식들은 대부분 유통기한이 한참이나 지난 상태가 되었다. 게다가 빵, 토마토, 설탕, 우유 등의 '서구식 음식'들은 금지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대통령과 군대, 경찰, 경호원들에게만큼은 봉급이 꼬박꼬박 주어졌다.[83] 노동은 전국민의 가장 중요한 의무로 간주되었으나, 노동권은 전혀 존재하지 않아 모든 노동권 요구는 '반혁명적이고 전복적이며 전형적인 국가의 적'으로 간주되는 중범죄가 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농업도 파탄 났다는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2.7. 대외 관계

적도 기니는 1971년부터 비동맹 국가였고 자본주의 국가들과도 관계를 유지했지만, 공산권 국가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중국은 400여 명의 기술자와 건설업자, 의사 등의 전문가를 파견했고 5000만 달러의 융자를 지원했으며, 또한 아스팔트 도로와 수력 발전소, 라디오 방송국, 그리고 2개의 통신 빌딩을 관리했다. 이 덕에 응게마는 중국인들이 국내에 거주하는 최고의 외국인이라고 생각했고 마오쩌둥 사망 당시 공개적으로 울었으며, 중국산 쌀이 너무 많이 수입된다는 불평을 한 국민을 '중국과 수입 협정을 맺기 위한 대통령의 노력을 모욕했다'고 몰아 구금하기도 했다. #

쿠바북한은 응게마에게 군인과 경호원을 제공했으며, 소련은 산 카를로스 데 루바 항구의 어업권과 사용권을 대가로 무기와 대통령 전용기, 차량 등을 지원했다. 특히 북한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여, 김일성을 존경하며 김일성을 '형님'이라고 부르고 서로 친구로 지냈다. 또한 그는 한반도 통일[84]하나의 중국 개념을 지지했다고 한다.

그리고 응게마는 '반식민주의'라는 명목으로 사실상의 백인 식민지 국가였던 남아프리카 공화국, 나미비아, 로디지아[85] 지역의 흑인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하며 아프리카의 흑인 지도자들을 '나의 형제'라고 부를 정도로 밀접한 관계를 맺었고,[86] 팔레스타인사하라 아랍 민주 공화국도 우호적으로 보았다.

그러나 프랑스와는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는데, 응게마는 다른 서유럽 국가들과의 관계는 끊어도 프랑스와의 관계는 끊지 않으면서 프랑스에 전기, 공공 공사 및 항공 분야를 돕게 했다. 그는 프랑스와 영국은 스페인과 달리 아프리카에서 괜찮은 식민지 정책을 수행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프랑스는 사실 다른 아프리카의 식민지 출신 국가들처럼 적도 기니를 자신들의 세력권으로 만들고 싶었다고 한다.

당시 미국 영사의 보고서에 따르면 응게마는 한 공산국가와 너무 가까워지면 다른 공산국가가 자국의 이익을 위해 그의 제거를 지지할 수도 있다고 믿었다고 하며, 마시아스 응게마가 파트너로서 신뢰할 수 없는 인물이었기에 어떤 사회주의 국가도 응게마에게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고 한다. #

3. 몰락

3.1. 조카의 쿠데타로 쫓겨나다

1979년 6월 중순 국가보안부 소속 장교 6명이 응게마가 상주하던 몽고모로 이동해[87] 수 개월째 밀린 입금 체납을 시정할 것을 요구하자 그는 경호원들을 동원해 급료를 요구한 장교들을 모두 총살시켰다. 이들 중에는 응게마의 조카도 있었는데, 이 사건으로 막내동생을 잃은 방위군 대장 테오도로 오비앙 응게마 음바소고는 그에 대한 충성심을 접고 쿠데타를 획책하기 시작한다. 오비앙은 삼촌을 호위한다는 명목으로 군인들을 보내 삼촌을 암살하거나 체포할 계획이었으나 오비앙이 보낸 중위가 투옥된 그의 형제에게 그 계획을 밀고했고, 그 형제는 감옥에서 쿠데타 음모 소문을 알렸다. 이것을 안 응게마는 격분하여 6월 16일 그들의 형제와 부모를 처형하라는 지시도 내려 공식적으로는 '종신 대통령에 대한 음모 및 암살 미수'로 선포된 사건으로 100여 명이 살해당했다. 이 사건 직후 마시아스 응게마는 오비앙 응게마를 만난 후 조카에 대한 심문을 주관하며 그를 반역자라고 질책했다.

이후 오비앙은 조용히 있다가 1979년 7월 말부터 쿠데타를 재계획했고[88], 1979년 8월 5일 쿠데타를 일으키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계획이 유출되자[89] 오비앙은 '더 이상 물러날 수 없다'며 일정을 앞당겼고, 결국 1979년 8월 3일, 적도 기니를 도탄에 빠트린 희대의 독재자의 몰락이 시작되었다.

마시아스 응게마는 전보를 통해 '국가를 이끌 수 없다는 이유'로 '해고' 당했다는 것을 통지받았고, 이 전보에 경악한 응게마는 다음날에 가봉에 쿠데타를 진압해 달라는 군사적 도움을 요청하지만,[90] 당연히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79년 8월 3일 밤 8시, 적도 기니의 국영 라디오 방송국에서 마시아스 정권의 전복 소식이 공표되고 새 정부가 공포한 일련의 법령이 선포되었다. 쿠데타 과정에서 쿠바중국의 지원을 받은 응게마측과 쿠데타측이 전투를 해 12명이 사망하는 유혈사태가 벌어졌다.

마시아스 응게마는 정글로 도피하기 전에 고향인 은젱 아용의 별장 내 개인교도소에 있던 30여 명의 죄수들을 손수 처형하고 자신이 보유하고 있던 1억 달러 상당의 화폐 대부분을 불태운 이후 400만 달러 정도의 현금과 마약이 가득 든 2개의 여행 가방을 들고 카메룬으로 도피하려고 했는데, 이 과정에서 응게마는 중국의 지원을 받은 300명 정도의 추종자들을 이끌고 쿠데타군에 저항하려고 했다. 이들은 최후의 발악으로 응게마의 숙청과 생포 등으로 겨우 40명 정도만 남았는데도 지나가는 마을마다 약탈하고 불을 지르며 여성, 어린이들이라도 봐주지 않은 채 2주 동안 400여 명의 민간인을 살해했지만, 남아 있는 부하들도 모두 생포되거나 사살당해 응게마는 홀로 남게 되었다.

응게마를 몰아낸 쿠데타군들은 적도 기니 안에 있던 응게마의 동상들을 모두 파괴하고 모든 정치범과 망명자들을 사면했으며, 스페인의 지원을 받으며 응게마 시기에 완전히 파괴된 성당들과 학교들, 여러 인프라들을 복구하며 응게마의 상흔들을 지워나갔다. 1979년 8월 21일에는 적도 기니의 국기와 국장이 현행으로 변경되었으며, 4일 뒤에는 PUNT가 해산되고는 헌법도 독립 당시 헌법으로 되돌아왔다. 응게마 정권이 무너진 뒤 적도 기니는 다시 외국과 수교하게 되었는데, 첫 대상은 9월 14일 수교한 대한민국이었다.[91]

11년간의 지옥과도 같은 학정에 시달린 적도 기니 국민들은 응게마가 쫓겨나자 이 날을 기다렸다는 듯이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고 거리를 행진하면서 여당의 본부와 사무실들을 습격했고, 응게마의 조각상들을 모조리 부쉈으며, 응게마의 초상화들은 보이는 즉시 모두 총검으로 찢거나 불태웠고, 당연히 쿠데타군은 열광적인 환호를 받았다. 그리고 응게마의 학정 때문에 고국을 등지고 떠날 수밖에 없었던 망명자들은 응게마의 공개처형을 요구하기도 했다.[92] 쿠데타 직후 적도 기니 국민들의 반응.

1979년 8월 18일 지나가던 한 할머니가 무니 강 유역 인근에 있는 나무 아래에서 홀로 정신 없이 사탕수수를 먹는 응게마를 찾았고, 그는 이내 쿠데타군 병사가 쏜 총에 왼쪽 팔뚝을 맞고 붙잡히게 되었다. 응게마의 곁에는 상술한 여행 가방과 총알이 없는 리볼버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3.2. 재판

파일:체포된 응게마.jpg

재판을 받는 응게마의 모습. 상술한 이유로 왼쪽 팔뚝에 총상을 입어 붕대를 감고 있다.


응게마의 재판을 담은 컬러 기록 영상.[93] 재판장에 대놓고 오비앙의 초상화와 십자가가 걸림으로써 응게마의 몰락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응게마는 블랙 비치 교도소에 수감된 후에도 대통령처럼 대우해달라고 요청을 했다. 한 예로 응게마가 물을 달라고 한 후 군인들이 근처 샘에서 물을 가져오면 응게마는 화를 내며 '대통령의 물'을 가져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또한 자신을 찾아오는 외국 기자들에 대해서도 '그들은 우리나라를 나쁘게 말할 것이다'라고 거부하는 반응을 보였다. 수감 당시 응게마의 모습을 보면 동정심까지 들 정도로 너무나 초라한 모습이다.[94]

1979년 9월 24일 응게마는 낡은 영화관에서 열린 특별군사재판에 회부되어 부비족에 대한 제노사이드, 횡령, 인권 위반 및 반역 등의 혐의로 기소되었다. 응게마의 판사 탄압의 영향으로 적도 기니에는 이미 유효한 법적 시스템이 사라졌기 때문에 이 재판은 스페인 군법에 따라 치러졌다고 한다.

이 재판 과정에서 응게마는 상상을 초월하는 뻔뻔함을 보려주었다. 응게마는 처음부터 자신에 대한 모든 혐의와 비난에 대해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라고 일축하며 법원에 관용을 요청했고, 법원에서 자신을 재판하는 재판관을 '편파적'이라고 하며 '부하들의 독단적 행동에 나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95], '나는 국가원수였다. 나는 교도소 소장도 교도관도 아니었다.', '나는 내가 집권할 동안 일어난 살인과 고문 등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 '나는 이 나라의 유일한 기적이다', '나의 재판은 적들의 시기와 증오에 의한 것이다', '나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기 때문에 명예롭게 죽을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리고 응게마는 자신이 국가를 위해 수행한 광범위한 선행에 대해 설명하는 성명서를 법원에 제출하며 자신의 혐의를 부인했으며,[96] 최종 변론에서도 '나는 국가의 아버지이자 지도자로서 스페인 식민 세력을 추방했으니, 용서를 구하며 재산을 돌려주고 석방 시켜 고향에서라도 살게 하라'는 말을 남겼다. 물론 재판에서 응게마의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물며 정신질환을 앓고 있으니 심신미약을 감안해 감형해 달라고 주장할 수도 있었지만,[97] 응게마는 법원에서 정신질환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검사는 그런 응게마에게 사형, 다른 피고 5명에게 30년형, 다른 4명에게는 1년형을 구형할 것을 요청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응게마는 소련 대사관 관리에게 도움을 요청하려고 했지만 이조차 기각당했다.[98]

여담으로 응게마는 재판 당시 판사들의 말에 제대로 귀를 기울이지 않았는데, 이는 처벌을 면하기 위해 꾀병을 부린 것이 아니라 응게마가 실제로 난청을 앓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3.3. 최후


재판 당시 응게마의 변론[99] 출처 다큐멘터리

1979년 9월 29일 정오에 열린 군사재판에서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는 응게마 정부의 구성원 6명[100][101]과 함께 사형과 재산 몰수를 선고 받게 되는데, 이 재판에서 다른 피고 2명은 징역 14년형, 또 다른 피고 2명은 징역 4년형을 선고 받았다. 이는 검사가 구형한 형량보다도 더 많은 형랑이었으며, 이 재판의 판사들은 응게마에게 사형 선고를 무려 101번이나 내렸다고 한다.[102]

마지막 재판에 회부되기 전에 응게마는 사형당할 것을 예감하고는 감방에서 이마에 식은땀을 흘리고 몸을 떨면서 흐느껴 울었지만, 사형 선고를 받고는 완전히 체념하여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선고 후 가톨릭 신부가 고해성사를 하자고 하자 '고백할 것이 없다'고 했고, 처형장에 갈 때에는 당혹감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얼굴을 가렸으며, 처형 직전에는 거친 목소리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며 가족을 도와줄 것을 요청했다. 응게마의 판사 탄압의 여파로 적도 기니에는 사실상 상소를 받아들일 수 있는 상급 법원이 없었기 때문에 군사재판의 단심 판결은 최종 판결이 되어 사형 선고를 받은 7명은 살바도르 온도 엘라[103] 외에는 같은 날 오후 6시에 블랙 비치 교도소 내에서 모두 총살당했다. 처형 집행 당시에 응게마는 '조용하고 위엄이 있었다'고 한다.

응게마가 마법을 쓸 줄 아는 초자연적인 존재라고 믿었던 적도 기니의 군인들은 공포에 떨며 그를 죽이기를 꺼렸기 때문에 모로코인 용병이 그의 처형을 대신 맡아야 했는데,[104] 이렇게 처형된 6명의 시신은 이들을 쏜 모로코인 용병들에 의해 트럭에 실린 후 처형장 근처의 공동묘지 근처에 큰 구덩이를 판 후 이 구덩이 안에 비문은 커녕 그 어떠한 표식도 없이 매장되었다. 이렇게 아프리카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는 악행을 감안해도 너무나 초라하게 최후를 맞이했다.

한편 응게마에 대한 최종 판결이 국민들에게 전해지자, 적도 기니의 모든 국민들은 당시 이를 지켜본 스페인 사람들이 '장기간의 천둥'이라고까지 표현했을 정도로 엄청난 환호를 했으며, 사람들은 너무나 기쁜 나머지 얼싸안고 울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응게마가 처형되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당연히 모든 적도 기니의 국민들은 '광기'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응게마의 처형을 널리 축하했다. 이후 응게마가 쫓겨난 8월 3일은 적도 기니에서는 '자유 쿠데타의 날'이라는 공휴일로 지정되었고, 테오도로 오비앙은 이 날을 '나라를 구한 날'로 기리게 되었다. 그리고 마시아스 응게마를 피해 외국으로 돌아왔던 주민들도 악마와도 같던 독재자가 처참하게 몰락하자 고국으로 돌아오기 시작해 1982년 ~ 1983년 무렵에는 마시아스 응게마 집권 이전의 인구 수치를 복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삼촌을 몰아낸 조카도 정작 집권하고 보니까 삼촌보다는 낫긴 해도 극도의 인권탄압과 부정부패를 저지른 악랄한 독재자였으며,[105] 집권 45년 차인 2024년 현재까지도 권력을 내려놓지 않고 있다. 또한 한동안 적도 기니 주민들 사이에서는 "조카가 삼촌을 처형한 후 '도살'하고 먹었다"는 끔찍한 루머까지 돈 적도 있다고 한다.

여담으로 응게마가 처형된 후인 1980년부터 1995년까지 적도 기니는 (1992년을 제외하면)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20개국 중 하나[106], 1980년부터 1989년까지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10개국 중 하나로 꼽혔으며, 1981~1985년에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5개국 중 하나에 들었고[107][108], 심지어 1983~1984년에는 캄보디아마저 제치고 지구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3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얘네보다 가난했던 소말리아미얀마는 뭔 일을 겪었던 거냐[109] 진짜 석유가 안 나왔으면 적도 기니는 2024년 현 시점에서도 '아프리카의 북한'으로 불리는 에리트레아[110]가 천국으로 보일 정도의 지옥이 될 뻔했다.

4. 평가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하고 무능한 독재자 중 한 명을 꼽을 때 반드시 언급되며, 동시에 유송유자업[111]유욱[112], 남제소보권[113], 아이티프랑수아 뒤발리에[114], 우간다이디 아민과 함께 정신적 문제가 야기하는 정치적 영향을 보여주는 인물.

일단 인류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로 널리 알려진 아돌프 히틀러이오시프 스탈린은 물론이고 북한 3대 김씨, 마오쩌둥, 이디 아민, 폴 포트처럼 응게마와 비교할 만한 학살 및 탄압, 국정 파탄[115]을 저지른 다른 독재자들과 비교하자면 이들 독재자들은 뒤틀렸거나 결과가 안 좋았을 뿐이지 그들만의 입장에서는 나라를 발전 시킬 의지나 비전 혹은 명분만큼은 확실히 있었다.

그러나 응게마는 자신이 통치하는 나라를 제대로 이끌 능력은 말할 것도 없고 의지도, 비전도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오히려 자신에게 반대한다는 이유 외에는 어떠한 이유도 들지 않은 채 국민들을 학살하여[116] 전란 하나 없이 타노스, 땅울림[117]이 현실에 강림한 것마냥 인구의 무려 50~75% 가량에 달하는 인명 손실을 입힌 것도 입힌 건데, 이도 모자라 폴 포트와 판박이로 '제국주의에서 벗어나 아프리카의 순수한 정기를 찾아야 한다'는 이유를 들며 나라의 인적, 물적 인프라를 고의적으로 모조리 파괴하며 적도 기니를 사실상 석기시대로 되돌려놓는 정신 나간 악행을 저질렀다. 단순히 비전이 부족한 것만으로 비난을 받는 것을 넘어, 인명살상 규모와는 상관 없이 순수한 악행의 질 역시 상술한 이들과 다를 바 없거나 그들보다 훨씬 심각한 정도였다. 농담이 아니라 1996년 적도 기니에서 석유가 발견되지 않았더라면 적도 기니는 지금도 지구상에서 손에 꼽는 수준의 극빈국 중의 극빈국이자 에리트레아가 천국으로 보일 수준의 생지옥으로 남았을지도 모른다.[118]

비록 그의 비극적인 어린 시절과 후술하듯 그가 마약 중독에 여러 정신병을 심히 앓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해도 그의 상상을 초월하는 악행들은 절대로 참작될 수 없을 정도로 극악무도했기에 여전히 큰 비판을 받고 있다. 적도 기니가 인구 수가 적은 소국인 것[119]동 시대에 다른 악명 높은 독재자들이 난립했다는 점, 그와 동급으로 평가 받는 타 독재자들에 비하면 죽인 사람이 확연히 적다는 것[120] 때문에 인지도가 매우 낮음에도 불구하고 상술한 원인으로 현재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 중 한 명을 꼽을 때 가장 먼저 언급되는 인물들 중에 하나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당시 적도 기니가 미니 국가였던지라 그의 학정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사람 수가 동렬에 놓인 타 독재자 대비 극히 적은 편이었다는 것 정도이다.[121]

이렇게 모두에게 버림 받은 응게마는 결국 누구보다 자신에게 충성하던 조카에게 배신 당하고, 응게마가 사형을 선고 받았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국민들이 기뻐서 얼싸안고 울기까지 했을 정도로 민심을 잃었고, 끝내 죽은 뒤 무덤조차 찾을 수 없게 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무능하고 극악무도한 악인이었음에도 정권 유지력은 발군이었다. 저 만한 폭정을 무려 11년[122]이나 했는데, 그에 비견되는 학정을 펼치던 유자업, 유욱, 소보권은 전부 집권하고 폭정을 시작한 이래 권력 유지 기간을 응게마 집권기의 절반도 안되는 5년도 채우지 못하고 잔인하게 죽임을 당했고 응게마 이상으로 잔인하고 극악무도했던 민주 캄푸치아아프가니스탄 이슬람 토후국 역시 일반적인 민주주의 국가의 정권 교체 기간에 불과한 4~5년도 가지 못했다는 것과 비교하면 응게마의 정권 유지력이 더더욱 부각된다. 물론 당시 적도 기니는 과거 식민지배국이던 스페인조차 별 관심을 주지 않던 아프리카 변방의 미니국가였다는 것도 감안해야 하지만 응게마가 기본적인 정치력이 없었더라면 이런 환경도 제대로 못 써먹었을 것이다.

5. 사생활

5.1. 가족 관계

응게마는 일생 동안 총 3명과 결혼했는데,[123] 1945년경 처음 만난 첫째 아내 아다(Ada)와는 여러 자녀를 뒀지만[124] 10대의 스페인인과 불륜을 저지른 것이 발각되어 이혼 당했고,[125] 1964년에 결혼한 둘째 아내 클라라 앙게 오사(Clara Angué Osá)와의 사이에는 3명의 자식이 있었는데[126] 스페인 정착민의 혼혈 딸로, 금발을 가졌던 모니카 빈당 아용(Monica Bindang Ayong)을 첩으로 삼았다가 사랑에 빠진 나머지 둘째 아내를 버리고 모니카를 셋째 아내로 삼아 2명의 자식을 낳았다. 응게마는 모니카의 이전 애인들을 모두 처형하고 자기가 원하는 여성의 남편을 살해하도록 지시하기도 했으나, 셋째 아내에게 육체적 폭력을 일삼고 모니카가 나라를 떠나자 그녀를 '국가의 반역자'로 선포하고는 국민들이 '모니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도 금지 시킨 것도 모자라 중앙은행 총재에게 아내를 추적하라는 지시까지 내린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응게마는 클라라와의 결혼 생활 속에서도 독일계 물라토였던 간호사 프리다 크로너(Frida Kroner)와 부적절한 관계를 가지며 그녀의 남편의 살해를 지시했으며, 전직 산타 이사벨 시장 아빌리오 발보아 아르킨스(Abilio Balboa Arkins, 1906~1967)와의 관계에서 아이를 가졌다는 소문도 있다.[127] 여하튼 응게마의 여자들은 거의 모두 남편을 버리고 해외로 도피했다.

살아남은 자식들(아들 2명+딸 2명) 중 이미 쿠바로 유학을 간 장남 필리베르토 은투투무(Filiberto Ntutumu Nguema Nchama, ?~)[128]를 제외한 나머지 3명[129]은 1979년 4월 중순에 이들의 어머니와 같이 북한의 평양으로 보내졌기 때문에 쿠데타를 피할 수 있었다.[130] 이들은 계속 북한에서 지내며 북한에서도 최고위층 자녀만 들어갈 수 있는 만경대혁명학원에 다니며 좋은 대우를 받았으며, 모두 1990년대에 북한을 떠났다.[131]

특히 7살에 피부색, 언어가 완전히 다른 머나먼 이국으로 떠난 막내딸 모니카(Monica, 본명은 모니크(Monique). 1972~)는 아버지가 처형되었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고 모국어인 스페인어를 완전히 잊어버렸다. 이후 평양에서 '검은 피부의 북한인'으로 살며 만경대혁명학원에 진학한 후 평양경공업대학 피복공학과에 진학한 후 1994년 여름에 북한을 떠나고는 중국을 거쳐 10년간 스페인 사라고사에서 살다가 미국 뉴욕을 거쳐 2006년 말에 대한민국으로 이주하여 서울의 한 의류회사에 취업한 후 2009년 봄에 한국을 떠났으며, 이후 모국과 스페인을 오가며 서울 동대문에서 원단을 구입해 옷을 만들어 팔았다. 2013년에 '모니카 마시아스'라는 이름으로 '나는 평양의 모니카입니다'라는 제목으로 한국어 회고록을 출판했고, 현재 모니카는 영국 런던에서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에 체류했던 기간이 15년이나 되다 보니 한국어가 매우 유창하다. 그리고 모니카는 서울에 도착한 후 "평양보다 복잡하고 사람이 많을 뿐, 고향에 돌아온 느낌이었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덤으로 모니카에게는 북한과 남한이 '완전히 다른 나라'가 아닌, 똑같이 자기가 사랑하는 배달민족이 사는 땅처럼 느껴졌다고 한다. # 모니카는 아버지에 대해 "우리에게 정원의 잡초를 제거하는 방법을 알려주면서 이마에 키스를 해주고, 숙제는 했는지, 밥은 먹었는지 물어보는 평범한 사람"이라고 평했다.[132] #


한편 응게마의 장남인 필리베르토 은투투무 응게마는 아버지의 극단적인 반지성주의 행각과는 정반대의 행보를 걸었는데, 아버지의 생전부터 쿠바, 소련 등지에서 유학 생활을 하며 토목공학을 공부한 후 테오도로 오비앙 정권에서 말라보 국립 중등교육원 교수와 이사, 교육과학부 사무총장과 차관 등을 역임하다가 2003년 2월 11일부터 2010년까지 여당인 적도 기니 민주당(PDGE)의 사무총장을 역임했고,[133][134] 2009년 대선에서는 PDGE 캠페인의 이사로 일하기도 했으며, 2010년에는 교육과학부 장관으로 임명되었으나 얼마 안 가 스페인 외무부 장관 미겔 앙헬 모라티노스(Miguel Ángel Moratinos Cuyaubé, 1951~)가 부여한 대학 장학금을 활용하기 위해 스페인 여행을 준비하고 있던 기니 학생들의 출국을 막은 것이 알려지며 2011년에 장관직에서 퇴출된 후 러시아의 적도 기니 대사로 좌천되었다가 2015년 4월 9일 적도기니 국립대학교의 총장으로 임명되어 2023년 현재까지도 총장직을 수행하고 있다.

5.2. 호화 생활

본인은 국민들에게 적용된 억압된 통치를 전혀 따르지 않았는데, 아프면 주술사에게 가야만 했던 일반적인 적도 기니 국민들과 달리 응게마는 몸이 아프면 스페인의 병원으로 가 치료를 받았고, '믿을 수 있는' 사람만이 만든 빵, 와인, 햄, 치즈, 올리브 등의 '스페인식' 음식을 즐겨 먹었다고 한다.[135] 또 응게마는 단지 관전하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한 번에 여러 대의 자동차를 사들이기도 했다.

또 응게마는 퇴진할 무렵까지 개인적으로 1354만 달러[136]나 되는 재산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1973년에 1,200만 달러의 돈을 들여 만든 베르사유 궁전을 모티브로 한 호화로운 대통령궁에서 살았는데, 이 대통령궁에는 프랑스산 가구와 에어컨, 독일에서 수입한 도금된 욕실 수도꼭지가 있었다고 하며, 안뜰에는 메르세데스 벤츠 2대가 주차되어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응게마는 몇 km나 떨어진 인근 마을에 사는 여성들이 자신의 궁전까지 걸어와 노래로 그를 깨우라는 황당한 요구를 하기까지 했다. 1974년에는 다른 국민들과 자신을 구별하기 위해 말라보 시의 주거 지역의 절반을 둘러싼 성벽을 대통령궁 주변에 둘러싸고는 이 지역에 살던 모든 주민들을 추방 시켰다. 당대 가치로도 수백만 달러를 들여 건설된 이 '수치의 벽'은 고압 케이블과 무장부대, 탱크로 보호되었으며,[137] 1981년에 철거되었다. 정작 응게마는 이 대통령궁이 완공된 지 고작 1년 후에 몽고모로 떠났고, 2년 뒤에 몽고모에 완전히 안착했기에 이 대통령궁은 오래 쓰지도 않아 돈만 날린 셈이 되었다.

6. 정신적, 육체적 질환

응게마는 개인적으로도 걸어다니는 정신병원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소위 말해 미쳐 있었는데, 후술할 내용들을 보면 응게마는 애초에 정상적으로 나라를 통치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여러 분석들에 의하면 술은 하지 않았지만, 불우한 유년기의 경험과 상습적인 대마초 복용으로 인해 학창 시절부터 성병두통 같은 질병과 건망증, 조울증, 정신분열증 등의 여러 정신질환들을 앓고 있었다고 하며, 사이코패스였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주변에서도 그의 정신 상태에 대해 염려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응게마 자신도 정신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근거.

특히 응게마는 지독하기 짝이 없는 편집증에 시달렸다. 응게마는 외국에 가면 누가 자기를 암살할 것이라는 망상에 시달리며 해외 여행 계획을 완전히 취소하기도 했으며, 외국으로 순방을 가기 전에는 정적들이 감옥에서 자신에 대한 음모를 꾸미지 못하게 하도록 여러 정치범들의 처형을 명령했고, 약간의 온도 변화에도 민감해한 데다가, 심지어 아내도 믿지 못해 부부끼리 한 방에서 자는 일이 거의 없었다. 또한 그는 완전히 침묵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갑자기 발작하는 모습을 보이는 등 불안정한 모습을 보여줬으며, 겁 또한 많았다고 한다.

게다가 응게마는 육체적으로도 지속적인 편두통과 위장병, 뇌종양을 앓고 있었으며, 체포될 당시에는 이미 매독 말기에 다다른 상태였다. 결국 상술했듯 재판 당시에는 부축해주지 않으면 걸을 수도 없는 수준으로 쇠약했다. 상술한 1967년의 회의에서 한 스페인인 의사는 응게마가 편집증과 분열증을 앓고 있다고 비밀리에 진단했으며, 1968년 대통령 선거 때에도 사람들은 응게마를 보고 미쳤다고 했을 정도였다.[138] 이 때문에 삼촌을 몰아낸 조카는 삼촌에 대해 "심판에 가기 전에 정신과 센터를 거쳐야 했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30개 이상의 직무를 겸임하고 국가의 모든 언론과 편지까지 손수 검열하는 등 격무에도 시달려야 했으니, 당연히 몸과 정신 모두 집권 이전에 비해서도 성했을 리가 없다. 어쩌면 진짜로 심하게 아파서 국가 운영에 완전히 손을 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셈.[139] 특히 상술한 것처럼 1977년부터 응게마가 새로 실시한 정책 수가 급격히 줄어든 것을 보면 이때부터 상태가 겉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을 가능성이 있다.[140]

게다가 마시아스는 굉장히 심각한 중증 마약중독자였는데, 일상적으로 방(Bhang)[141]이라고 불리는 대마 잎을 가공한 식품을 먹거나, 이보가(iboga)라는 LSD와 비슷한 효과[142]를 내는 음료를 즐겨 마셨고, 집에다가 나라의 모든 마약 재고를 보관하며 이른 아침마다 마약을 복용했다. 상단에 기재된 것처럼 축출될 당시에도 마약을 소지했을 정도였으니, 이 때문에 빈번한 환각 증세를 겪거나 자신을 '전능한 치료사'라고 착각하기에 이르렀다.[143] 이 정도면 걸어다니는 종합병원 + 정신병원 + 마약중독자라는 희대의 그랜드슬램을 기록한 셈이니, 당연히 제대로 된 판단과 나라를 제대로 통치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또 응게마는 '다른 적도 기니인들보다는 우월하지만 스페인인보다는 열등하다'는 콤플렉스에도 시달렸으며 심각한 건강 염려증, 정확히는 심각할 정도의 죽음에 대한 공포증이 있어 측근들이 자기 옆에서 기침을 하면 자신을 '오염' 시키려는 그들에게 제재를 가했으며, 결핵을 앓다가 완치된 후에도 몇 년간 계속 결핵 약을 먹었으며, 모든 내복약 개봉과 주사 준비는 자신의 앞에서만 이루어지도록 했다.

7. 기타

마시아스 응게마의 연설 녹음

7.1. 참고자료



[1] 집권 후반기에 '마시아스 응게마 외에 신은 없다'고 주장하는 등 사실상 본인을 신격화했다.[2] 가봉 인구의 1/4, 적도 기니 내륙 인구의 85%를 차지하며 카메룬에도 일부 거주하고 있다.[3] 이 이름은 그가 평생을 존경해오던 스페인의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이름과 같다. 응게마는 후에 스페인인 탄압 정책을 실시해도 프랑코에 대한 존경심만큼은 변하지 않았다.[4] 응게마는 스페인 식민지 시절의 다른 적도 기니의 활동가들과는 정반대로 스페인에게 투옥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응게마는 직접적인 독립투쟁을 '무익하고 위험하다'고 생각했으며, 자신이 적도 기니의 독립운동에 전혀 참여하지 않고 스페인 식민 당국에 부역한 것에 대해 '나는 제도 안에서의 독립투쟁을 선호한다. 적을 속이기 위해 복종하는 척할 뿐이다.'라고 변명했다.[5] 이 선거는 1989년까지는 적도 기니에서 열린 유일한 대통령 선거였다. 여담이지만 응게마는 1968년 선거에서 바티칸이 음모와 협박, 쿠데타 시도를 했다고 믿었다고 한다.[6] 현행 적도 기니의 국기는 1979년 8월 21일 채택되었으며, 독립 당시의 적도 기니의 국기에는 국장이 없었다.[7] Atanasio Ndongo, 1927?~1969. 마드리드에 위치한 육군 본부에서 음악 부국장으로 일하면서 오늘날에도 쓰이는 적도 기니의 국가의 가사를 쓴 사람이었다.[8] 참고로 당시 응게마가 찍은 은동고 사진이 적도 기니의 독립(여기서는 탈식민지화로 언급되었다) 관련 스페인의 다큐멘터리에서 공개되었다. #[9] 우연히도 적도 기니와 알바니아는 면적이 거의 동일하다. 둘 다 경상도보다도 좁으며, 알바니아가 적도 기니보다 (서울특별시 면적과 엇비슷한) 697km² 더 넓다.[10] 그를 몰아낸 조카 테오도로 오비앙 응게마 음바소고도 2017년에 부정으로 얼룩진 총선을 치른 후에 발각된 쿠데타 시도에 대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무자비한 보복을 가해 이 쿠데타 시도가 자작극 아니냐는 말까지 나왔다.[11] 실제로 이 날 이후 차라리 스페인 식민지 시절이 더 양호해 보일 수준에 이른 적도 기니의 비극이 시작되었다.[12] 실제로 북한이 다른 지역 주민들의 평양 여행을 통제하듯 당시 적도 기니의 국민들은 수도 말라보가 있는 비오코 섬과 본토를 서로 오고가려면 '비자'를 발급 받아야 했다. 다만 비오코 섬/본토에 사는 주민이 각각 비오코 섬/본토의 타 지역으로 이동하려면 허가를 받아야 했는지는 불명.[13] 북한, 민주 캄푸치아, 마시아스 응게마 치하의 적도 기니를 제외하면 전 국민에 대한 국내 여행 통제 제도를 실시한 독재자는 이디 아민, 사파르무라트 니야조프,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처럼 당대에 최악으로 꼽히는 독재자들밖에 없으며, 그나마 니야조프는 응게마처럼 일부 지역에 한해 이를 적용하는 정도(?)에 그쳤다.[14] 심지어 여기 기술된 말조차 매우 순화된 것이고, 원문은 북한에서 탈북자들에게 쓸 법한 수준으로 추잡하기 이를 데 없는 말투였다.[15] 흡사 북한이 소련의 위세가 강했을 적에는 한반도 해방에 있어서 소련군의 역할을 숨기지 않았으나 점차 김일성의 권력이 강화되면서 김일성이 조선인민혁명군이라는 (날조된) 빨치산을 이끌고 한반도로 진공해 일본군을 몰아내며 한반도를 해방했다고 역사를 날조한 것을 연상 시킨다.[16] 참고로 둘 다 1등급이 가장 높고 7등급이 가장 낮은 등급이다.[17] 사실 이는 진짜로 정보가 부족해서 평가를 좋게 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세계의 자유 최초 연감인 1978년 연감에서 대놓고 "처형, 투옥, 고문, 강제 노동이 흔한 것으로 보인다(Executions, imprisonment, torture, and forced labor appear to be common)"라는 언급이 나오면서 적도 기니의 정세를 알기 어렵다는 것이 간접적으로 드러났는데, 하다못해 해당 연감에서 알바니아민주 캄푸치아도 학살이 확정적으로 언급된 것을 감안하면 더더욱 부각되는 편이다. 1979년 세계의 자유 연감에서야 "처형, 학살, 투옥, 고문 및 강제 노동이 흔하여 인구의 3분의 1이 나라를 떠나게 되었다.(Executions, massacres, imprisonment, torture, and forced labor are common, leading perhaps one-third of the population to flee the country.)"고 제대로 언급되었다.[18] 참고로 응게마가 현역이던 70년대 북한의 지도자 우상화는 현 북한보다 더 극심했다고 하는데(일례로 당시 북한은 김일성 초상화에서 언제나 향기로운 냄새가 풍겨야 한다며 초상화에 향수를 뿌리게 했다), 그렇게나 극단적이던 북한의 우상화조차 능가한다는 말까지 들었을 정도였으면 응게마의 우상화의 극단성을 짐작할 수 있다.[19] 여기까지는 평범한 독재자들 상당수도 하던 일이긴 하다.[20] 응게마가 신 위에 있는 존재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21] 다만 보시오는 1974년 3월 2일 부통령직에서 해임되었기에 수감 당시에는 전직 부통령 신분이었다.[22] 사실 이 초상화 훼손은 응게마 정권의 관리들의 자작극이었다고 한다.[23] Playa Negra, 영어식 표현인 블랙 비치(Black Beach)로 더 유명하다. 이하 이 문서에서는 플라야 네그라 수용소를 '블랙 비치' 수용소로 칭한다.[24] 그나마 응게마가 극미량의 판단력은 있었다는 증거다. 외국 대사관에까지 전기가 안 들어갔다면 외국 외교관들의 적도 기니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만 극대화되어 양국간 외교 관계에 지장이 생길 수밖에 없었기 때문.[25] 1977년 방북했을 때 찍은 사진으로 볼 때 키가 177~180cm 가량이던 김일성과 비교해 보면 응게마의 키도 그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 기준으로도 적도 기니의 평균 신장이 168.18cm 남짓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오늘날 한국에서는 184.7~187.8cm도 훌쩍 넘는 포지션의 거구였던 셈. 1970년 찍은 응게마 사진만 봐도 손이 엄청나게 크다. 참고 자료. 참고로 응게마와 김일성 사이에는 응게마의 막내딸인 모니카가 있다.[26] 국가 모토였다고 널리 알려져 있으나 그나마 그렇게까진 하지 않았다고 한다. #[27] 얼마나 무식했냐면 응게마가 (이디 아민, 엘레나 차우셰스쿠마냥) 반문맹이라는 소문까지 있었을 정도다. 다만 젊었을 적에 서기로 일했던 경험과 후술하듯 나의 투쟁을 여러 번 정독하고 일부 구절을 암송까지 했다는 것, 저런 정권을 무려 11년 동안 유지한 정치력을 감안하면 반문맹은 낭설일 수밖에 없다.[28] 전술한 발언을 하기 전인 1972년 3월 응게마를 '살인자'로 묘사하고 '국민이 선출한 정부가 군사 정부라는 사실에 질렸다'고 적힌 팸플릿이 나돌자, 응게마는 모든 타자기를 몰수하라고 명령했다.[29] 그 중 1명은 마시아스 응게마의 주치의였다.[30] 킬링필드 당시 캄보디아에서 살아남은 의사 수도 40명 정도였다.[31] 응게마가 저학력에 무식했던 것의 콤플렉스에 더해 식민지 시절 교육 받은 군인과 관료들을 식민지 시절 부역자로 간주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사실 객관적으로도 이들이 부역자였던 것은 사실이긴 했고(...) 정작 응게마 본인도 식민지 공무원이었던 게 함정이다.[32] 유유상종이라고 아민은 집권할 적에 적도 기니를 지원해주겠다고 약속한 적이 있다.[33] 이와 비슷한 식인 루머는 아민과 보카사에게도 돌았으나, 이 둘의 식인 루머는 후에 무혐의로 결론났다. 이후 조카인 테오도로 오비앙과 에티오피아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 라이베리아찰스 테일러도 식인설이 돌았다.[34] 이 수용소에서는 심지어 미성년자마저 강간을 당했다고 한다.[35] 국제앰네스티의 1979년자 보고에 따르면, 1979년까지 10년간 이 감옥에 수감된 사람 중 정치적 이유로 처형되었거나 감옥에서 고문 및 기타 형태의 학대로 사망한 사람은 총 600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를 입증하듯 블랙 비치 교도소의 한 생존자는 1971년부터 1975년까지 4년 동안 수감된 동안 157명의 수감자가 감방 밖에서 금속 막대로 구타되어 사망했다고 보고했다.[36] 1969년 적도 기니 인구를 기준으로 놓으면 무려 인구의 1.9% 가량이 정치범이었다는 이야기다!!![37] 다만 적어도 수용소에서의 춤 증언은 블랙 비치에서의 사망자 수와 맞지 않기에 과장된 증언일 가능성이 높긴 하다.[38] 사실 이 무렵까지도 적도 기니의 경제는 스페인에 종속되었고, 식민지 시절의 관리들이 요직에 그대로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독립 직후의 적도 기니는 1인당 GDP가 214$(2023년 환율로 약 1,866$)로 집계되어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1인당 GDP가 가장 높은 나라 중 하나이긴 했으나, 대부분의 돈은 스페인인들과 스페인에 협조한 기득권층들의 손에 있었기 때문에(당시 전체 인구의 2.5%에 불과했던 스페인인이 국부의 25.5%를 차지했다고 한다.) 일반적인 적도 기니의 원주민들은 여전히 가난하게 살아가야만 했다. 사실상 오늘날의 적도 기니의 악명 높은 빈부격차는 이미 이때부터 조짐이 보였던 셈이다.[39] 1908년부터 존속한 적도 기니 영토 수비대가 토착민의 복종과 '문명화'를 위해 많은 적도 기니 원주민들을 고문, 살해한 것과 카카오커피 농장에서 노예처럼 일하게 한 것은 사실이긴 하다. 그리고 응게마는 스페인이 적도 기니 주민 수백 만을 학살했다고 주장했고(실제로 적도 기니 인구는 2009년에야 100만 명을 돌파했다), 이렇게 스페인의 적도 기니인 학살을 과장한 내용을 책으로 출판하려고 했다(...)[40] 이전까지 7,500명에 달하던 적도 기니의 스페인인이 위의 연설이 있던 때로부터 1개월 정도밖에 안 됐을 시점에 대부분이 적도 기니를 떠났으며, 1978년 시점으로는 단 50명만 남아 있었을 정도였다.[41] 면적이 울릉도의 1/5 정도인 17km2밖에 되지 않는 조그만 섬으로, 본토로부터는 남서쪽으로 500km, 수도가 있는 비오코 섬로부터는 600km 이상 떨어진 외진 섬이다. 어느 정도로 멀리 떨어진 거냐면, 인천-제주도간 거리가 453km다. 2015년 기준으로도 인구가 5314명에 불과하다.[42] 당시 방송국의 이사 중에는 응게마의 조카의 남편도 있었다고 한다. 다만 응게마는 서구 문물을 증오하던 응게마답지 않게 TV 방송 지속을 위해 쿠바인 기술자에게 지원을 요구했다고 하나, 방송 장비를 수리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망가졌기에 적도 기니의 TV 방송은 한동안 멈추었다. 적도 기니의 TV 방송은 응게마가 축출된 1979년에야 재개된다.[43] 이후 1979년에 비오코 섬으로 이름이 변경되었다.[44] 생각해보면 아주 웃긴 상황인 게, 스페인 때문에 부모님을 잃은 사람이 스페인에 빌붙어 출세, 집권한 주제에 집권 후에는 배은망덕하게(?) 본인의 입지 강화를 위해 스페인과 관련된 모든 것을 말살하고자 했다가 자신이 쫓겨날 위기에 처하자 그 스페인에게 도움을 청하며 겨우 살아난 주제에 계속해서 자신의 생명의 은인(?)이나 다를 바 없게 된 스페인을 내다버린 꼴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신의 일신의 영달을 위해 자기의 원수나 다를 바 없던 대상의 단물을 쪽쪽 빨아먹은 후 쓸모가 없어지자 곧바로 내다버린 뒤 다시 그 대상이 쓸모 있을 때가 생기자 파렴치하게 다시 그 대상을 써먹고 다시 내다버린 꼴로, 한 대상을 2번이나 토사구팽한 꼴이다. 응게마가 얼마나 파렴치하고 이기적인 인간성을 가졌는지 잘 보여주는 증거.[45] 유사 사례로는 프리츠 하버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고국을 떠나는 데에 일조 시켜놓고 그가 오래 전에 만들어놓은 치클론 B만큼은 홀로코스트에 애용한 아돌프 히틀러와(다만 히틀러는 하버가 유대인이라며 하버를 처음부터 쫓아낼 생각이었고, 하버가 망명을 떠난 것도 나치 집권으로부터 약 반 년 후라 나치는 하버가 독일에 있었을 때 하버로부터 단물을 빨아먹지도 못해 응게마와 후술할 사례들보다는 그나마 양심적인(?) 편이다) 황장엽을 숙청하려 했다가 이를 눈치챈 황장엽이 남한으로 망명 가자 황장엽을 사실상 기록말살형에 처해놓고 그가 만든 주체사상만큼은 북한 체제의 주축으로 삼은 것을 넘어 황장엽의 재월북을 종용해 황장엽을 다시 써먹으려 한 김정일, 명나라의 장수로서 명나라의 녹봉을 받아온 주제에 청나라에 빌붙어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그 후예들까지 자기 손으로 몰살한 명나라의 역적이지만 청나라가 자신을 내치려 하자 명나라의 부흥 운운하며 삼번의 난을 일으켜 청나라의 역적까지 된 이중 역적이자 내란죄외환의 죄를 모두 저지른 초유의 인물 오삼계가 있다. 다만 어떻게 보면 김정일과 오삼계가 응게마보다도 더 막장인 게 응게마는 정신이상자+마약중독이라 온전한 판단이 불가능한 인물이었다는 참작 요소가 있었던 것과 정반대로 김정일과 오삼계는 정신이상도 전무했는데도 저런 천륜을 거스른 수준으로 파렴치하기 그지없는 모습을 보여줬다.[46] 이후 응게마는 수도는 극도로 위급한 경우에만 가끔씩 드나들게 되었다.[47] 여담으로 팡족은 사람의 두개골과 뼈를 마을 근처의 개방된 상자나 나무 상자에 보관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서양인들은 이를 보고 팡족을 식인종이라고 오해했지만 실제로는 이미 죽은 그들의 가족, 조상들을 일상적으로 기억하고 종교적인 존경심을 갖기 위해 보관한 것이었다. 물론 응게마는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정적들의 두개골을 부쉈으니까 팡족의 전통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48] 정황상 쿠데타 연루자로서 사형에 선고되었거나 단순히 장기 징역형을 선고 받은 사람이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49] 응게마는 독립 이전부터 교회를 '식민주의자'라고 비방해왔으며, 교회에 대해 "(교회는) 적도 기니의 만연한 평화를 방해하기 위해 암살에 가담하고 고행의 비밀을 폭로했으며 전문 폭력배와 용병을 모집했다. 그들은 가톨릭 교회의 완전한 패배를 의미하는 (적도 기니의) 독립과 그 위대한 지도자(응게마)에 반대하여 하느님께 악의적인 기도를 드렸다."라고 말하기도 했다.[50] 사실 1972년 4월에도 응게마는 이미 남성, 여성, 어린이를 포함한 모든 국민들에게 나무 소총으로 매일 군사 훈련을 하도록 강요한 적이 있었다.[51] 이때 미겔 에예게 은투투무(Miguel Eyegue Ntutumu, 1933~1979) 부통령도 부통령직에서 쫓겨난 후 고문 당했고, 1978년 5월까지 적도 기니의 부통령직은 공석이었다.[52] 1976년 적도 기니 인구가 27.6만 명이었으니, 이는 인구의 0.18%를 죽인 수준이라는 말이 된다.[53] 이후 1979년 12월 19일 재수교하게 된다.[54] 적도 기니인 농장주들은 나이지리아인 노동자들에게 임금도 전혀 주지 않으며 노동자들을 그 어느 때보다 빈번하고 가혹한 처벌로 노예처럼 부려먹었다. 이들이 노동 조건에 항의하면 응게마는 경찰과 군대를 보내 무자비하게 진압했으며, 나이지리아 계약직 노동자들 95명이 임금 지불을 요구하자 이들을 모두 살해했고, 이런 상황인 만큼 농장에서의 작물 생산량도 급격히 악화되었다. 심지어 원래에는 나이지리아인 노동자 수가 5만 명이었는데 1972년에 이들 중 2만 명이 열악한 환경 때문에 외국으로 탈출했다고 한다.[55] 1976년 1월 나이지리아 정부는 미리 자국인 노동자들을 송환하고자 했으나 배가 부족해 1500명밖에 태우지 못했고, 이에 항의한 나이지라인들에게 응게마는 군인들로 하여금 자동 무기로 발포하게 하여 최소 11명의 노동자를 살해했다. 심지어 응게마는 나이지리아인과 결혼한 적도 기니인들이 도피하는 것을 막기까지 했다.[56] 정황상 북한의 탄원처럼 강제로 농장으로 끌고 간 것을 '자발적으로' 지원했다고 포장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57] 응게마의 집권 기간 동안 적도 기니의 카카오 생산량은 3만 8천 톤에서 3천 톤으로 감소했으며, 수출량은 5만 톤에서 5천 톤으로 줄어들었다. 물론 커피 생산량도 이전의 1/10으로 줄었다.[58] 후안 카를로스 1세를 "꼭두각시 범죄자이자 파시스트, 파시스트 범죄자이자 살인자인 프랑코 장군의 사생아"라고 맹비난했다.[59] 후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오히려 응게마가 리오 무니 주지사에게서 그 10만 달러를 수수 받았다고 한다.[60] 응게마에게 순종해야만 살 수 있었던 국민들은 이 명령을 충실히 따라야만 했다. 후술하겠지만 응게마의 학정과 응게마가 파괴한 적도 기니의 처참한 모습을 생각하면 당시 적도 기니 사람들에게는 이 명령이 절대로 우스꽝스러운 발언이 아닌 '그냥 적도 기니에서 잠자코 있다가 죽으라'라는, 한 마디로 사형 선고보다 더 끔찍한 발언으로 다가왔을 것이다.[61] 게다가 당시 적도 기니는 완벽한 일당제 국가였는데, 이렇게 여당만 있는 국회까지 자기 말을 안 듣는다고 판단해서였는지 해산했다는 것은...[62] 1979년 기준으로 말라보의 95%가 완전히 단전된 상태였으며, 그나마 전기가 들어온 곳도 자체 발전기를 둔 대사관 및 외국 공관, 정부 건물 한두 개 정도밖에 없게 되었다. 하다못해 야간 위성사진이 모가디슈보다도 어두울 정도로 전력난이 극심한 21세기의 평양조차 선전 차원이 강하다는 것은 감안하더라도 평양 내 신시가지들과 중구역에는 나름 화려하게 불을 밝혀놓는데, 응게마 시기 말라보는 아예 도시 전체에 전력이 전무한 수준이었다.[63] 당시 말라보는 명색이 일국의 수도라는 곳이 상점도 선반이 거의 비어 있는 작은 상점 몇 개만 남은 데다가 식당도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한다.[64] 그나마 이들은 사냥이라도 할 수 있었기에 망정이지, 응게마는 대규모 시위를 두려워하여 국민들에게 무기를 포기할 것을 지시했기에 일반적인 국민들은 사냥할 무기가 없어 수렵도 할 수 없었다.[65] 응게마가 경호원에게조차 월급을 제대로 주지 않았다는 것이 생각보다 더 심각한 게, 원래 응게마같은 극악무도한 학살자, 독재자들일수록 본인의 신변 안전에 극단적으로 집착하기 마련이라서 자기 나라 경제가 아예 막장이 돼서 군대나 경찰한테는 돈이나 먹을 것을 전혀 주지 않는 상황이라고 해도 자신을 지키는 경호원들만큼은 반드시 엄청 챙기기 때문이다. 일례로 자이르(오늘날의 콩고민주공화국) 경제를 완벽히 거덜낸 모부투 세세 세코마저 나라 경제가 완전히 파탄난 상황에 다른 공무원들과 (지지 기반이던) 군인들의 봉급은 동결하면서도 대통령 경호원에 한해서는 봉급을 꼬박꼬박 줬으며, 북한에서도 김정은을 호위하는 호위사령부가 최정예 부대고, 한국에서도 차지철 대통령경호실장이 월권으로 악명이 높았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그만큼 독재자를 경호하는 직책이 요직 중의 요직으로 대우받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방증이다. 이들과 비교하면 응게마는 아예 독재자로서의 기본적인 소양조차도 없었던 자였던 것이다.[66] 응게마 집권 말기에는 전술한 것처럼 은행과 전력은 물론이고 운송, 우편, 전화 등의 통신까지 사실상 정지 상태가 되어 정글에 뒤덮인 도로도 생긴 데다가 적도 기니의 공공 행정의 90%가 먹통 상태가 되었다고 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내부 안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안 봐도 뻔하다.[67] 이는 쉽게 말해 1년에 2번 꼴로 쿠데타 미수 사건이 발생한 셈이다. 다만 이는 후술하듯 편집증에 시달리던 응게마 본인의 주장이라는 것과 전술했듯 응게마가 쿠데타 시도를 조작한 적이 상당히 많았다는 것만큼은 감안해야 한다. 허나 응게마의 주장이 사실이면 내부 안보를 가장 중시했으면서 내부 안보도 제대로 지키지 못한 셈.[68] 적어도 개인 소유가 아니었던 것만큼은 확실하다.[69] 2024년 11월경 드디어 오랫동안 공란이었던 1975~1992년 캄보디아와 1991~2012년 소말리아, 2020~2022년의 투르크메니스탄, 1960~1969년 서독의 GDP 산정에 성공한 세계은행조차 1978~1979년 적도 기니의 GDP만큼은 완전히 공란으로 둔 채 손도 대지 못하고 있을 정도라고 하면 말 다한 셈이다. 덤으로 2012년/2015년 이후 통계를 잡지 못한 에리트레아/베네수엘라남수단은 아예 기존 통계까지 무효화했고, 1982~2001년 통계를 잡지 못한 아프가니스탄 역시 2000년 이후 통계만 인정하게 되었다.[70] 응게마와 엔베르 호자 못지 않게 종교를 탄압한 민주 캄푸치아북한은 공식적으로 '무신론 국가'를 선포하지는 않았다.[71] 정황상 부비족에 대한 탄압을 지칭한 것으로 추정된다.[72] 전술한 것처럼 그의 정책이 공산주의 국가와 비슷한 모습을 강하게 띄긴 했으나(사유재산 몰수, 국가 무신론, 집단농장 등) 응게마 시기 적도 기니는 공식적으로는 공산주의 국가로 분류되지 않고 있으며, 전문가들도 응게마 정권은 '뚜렷한 이데올로기가 없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명목상으로는 공화정 국가인 북한사실상전제군주제 국가로, 명목상으로는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을 사실상의 자본주의 국가로 보는 사람이 많은 것에서 알 수 있듯 응게마 치하의 적도 기니를 사실상의 공산주의 국가라고 보는 것은 그렇게까지 이상하지는 않은 관점이다.[73] 1978년 프리덤 하우스세계의 자유 연감에서도 응게마 정권을 대놓고 '사회주의 일당제(socialist one-party)', '겉보기에 마르크스주의적인 정권(ostensibly marxist regime)'이라고 표현했을 정도.[74] 이전에 적도 기니에는 적도 기니 항공(LAGE)라는 국영 항공사가 있었다. 1970년경 설립되었으며, 바타에 거점을 두고 이베리아 항공에서 임대한 컨베어 440 항공기 2대로 두알라, 리브르빌, 말라보를 운항했다고 하는데, 사실상 국경을 접한 나라와 본토로부터 멀리 떨어진 수도만 운항한, 기본만 겨우 갖춘 군소 항공사였던 셈이었다. 그리고 적어도 응게마가 항공사 설립 발표를 했을 무렵에 운항을 중단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애초에 국내 여행도 허가를 받아야 가능했던 나라였던 만큼 해외 여행은 대통령의 허가를 받아야 가능했는데, 해외 여행을 허락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완전히 '잠적'했으니 항공사 운영이 제대로 될 리가 없다. 물론 당시 적도 기니의 실태를 감안하면 극소수 부자들과 정부 고위층, 외국인 귀빈들을 제외하면 이 항공사의 비행기를 탈 사람도 전혀 없었을 것이다.[75] 사실 아무리 폐쇄적인 독재국가라 할지라도 항공사까지 두지 않을 정도로 고립적이었던 국가는 엔베르 호자 시기 알바니아민주 캄푸치아 정도밖에 없다. 당장 북한만 하더라도 고려항공이 있다. 알바니아는 겉으로는 국영 항공사를 두긴 했지만, 정규 비행은커녕 정규 비행기조차 없어 공군으로부터 임대 받은 비행기로 산발적인 운항만 했다고 한다.[76] 아니나 다를까,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본인은 스스로를 히틀러-마르크스주의자라고 자칭하기까지 했다.[77] 1978년 8월 망명한 적도 기니인들의 단체 ANRD가 발표한 바에 따르면 적도 기니의 국민 중 6만 명은 가봉에, 4만 명은 카메룬에, 1만 5천 명은 나이지리아에, 8천 명은 스페인에, 300명은 상투메 프린시페에 망명을 갔다고 한다.[78] 다만 그런 응게마도 오늘날의 마다가스카르 지역에 존재했던 메리나 왕국라나발로나 1세의 대기록에는 미치지 못했는데, 라나발로나 1세는 단 6년 만에 영토 확장을 위한 내전으로 문자 그대로 인구를 절반으로 줄였다. 물론 관점에 따라서는 전란으로 6년 만에 인구 절반을 없앴고, 19세기 중반에 활동하여 사진은커녕 생전에 그린 초상화도 남아 있지 않은 머나먼 옛날 인물인 라나발로나보다 전란 없이 10년 만에 인구의 50~75%를 없앴고, 20세기 중후반에 활동하여 컬러 영상 자료도 남아 있는 비교적 최근 인물인 응게마가 더 심각하다고 볼 여지도 있다. 덤으로 라나발로나는 정신이상자는 아니었지만 응게마는 중증 정신이상자였고, 후술하듯 처참할 정도로 죗값을 제대로 치른 응게마와는 정반대로 라나발로나는 인구의 절반을 죽인 후에도 천수와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83세에 사망했으며, 순수 인명 살상규모로 따지자면 라나발로나는 응게마는 말할 것도 없고 폴 포트도 능가한다.[79] 그 일례로 1970년에 적도 기니의 인구가 22만 5천 명으로 잡히자 적도 기니의 인구가 백만 명 정도라고 생각했던 응게마는 이 통계 데이터가 너무 낮아 보인다고 판단하여 '숫자를 세는 법을 배워야 한다'며 통계청장 사투르닌 안토니오 은동고(Saturnin Antonio Ndongo)의 손과 발을 잘랐다고 한다. 근거.[80] 물론 응게마는 우표 수집가들을 위해 몰래 희귀 우표를 만들어 판매하고 있었다.[81] 그나마 이들도 절대다수가 카카오 수출이었다.[82] 다만 공식 기록에 따르면 응게마 시기에도 영유아 사망률은 지속적으로 감소한 것으로 나온다.[83] 그러나 이것도 응게마가 오래 집권하며 나라가 완전히 파탄나면서 옛말이 되어 군대와 경찰은커녕 경호원조차 봉급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애초에 전술한 것처럼 응게마의 경호원조차 수렵채집으로 연명해야 했던 판에 당시 적도 기니의 일반적인 군대와 경찰이 제대로 먹고 살 수 있었던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84] 물론 응게마의 성향을 보면 북한 주도의 적화통일을 지지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85] 응게마의 몰락 1년 후인 1980년에 독립하여 짐바브웨가 된다.[86] 이는 어찌 보면 자신이 스페인에 부역하던 과거에 대한 콤플렉스와 무관하지는 않다고 볼 수 있다. 비슷하게 식민지배국 군대에서 복무하던 박정희모부투 세세 세코도 집권 후 민족주의를 강조했다.[87] 전술했듯 응게마가 중앙은행 역할을 겸임(?)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88] 사실 하필이면 오비앙이 쿠데타를 계획한 것은 오비앙이 마시아스의 최측근이었기 때문에 타인이 마시아스를 축출시키면 오비앙도 군대나 대중에게 보복당할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는 뒷이야기가 있다.[89] 실제로 스페인과 미국 등 외국 대사관들도 오비앙의 쿠데타 계획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90] 그나마 1973년 쿠데타 시도와는 달리 스페인에 쿠데타 진압 요청을 했다는 말은 없다. 사실 이때쯤이면 프랑코가 사망한지 4년 정도 된 민주화 초창기라 스페인도 응게마를 도울 이유가 전무했지만.[91] 공교롭게도 대한민국도 적도 기니와 수교한 후 한 달 뒤에 대통령이 암살당한다.[92]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만약 공개처형이 확정되었다면 공개처형이 시작되기도 전에 그의 악행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었던 적도 기니 국민들의 린치 속에 후대의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무아마르 카다피는 말할 것도 없고 모하마드 나지불라, 새뮤얼 케니언 도의 최후까지 호상으로 보일 정도로 참혹하게 처형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93] 원본에는 1979년 9월 23일 영상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오기로 보인다.[94] 걸어갈 때 병사들이 부축해줘야 하고, 음식도 다른 사람이 따로 떠먹여줘야 할 정도로 몸이 심각하게 약해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영상 후반에 삼촌을 내려다보는 오비앙의 모습도 보인다. 이후 응게마는 재판장으로 갈 때에도 부축을 받아야 했다.[95] 당시에 많은 관리들이 마시아스의 명의로 마시아스가 승인하지 않은 범죄를 저지른 것은 사실이긴 하나, 어쨌든 이런 범죄들의 최종 책임자는 국가의 최고 지도자였던 응게마이다. 애초에 인구의 절반을 없애버리고 고의적으로 나라를 석기시대로 되돌려버린 수준의 악행이면 겨우 도의적 책임으로 넘어갈 수 없는 수준의 문제다.[96] 응게마는 외교 사절단을 수용할 목적으로 1972년의 2개의 고급 호텔과 은행, 건물, 교육 센터 및 국제 항구도 건설하는 등의 공공 사업에 거액을 썼다고 한다. 그런데 이 시설들은 적도 기니 사람들이 전혀 사용할 수도 없었던 것은 물론이고 제대로 쓰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 전시행정을 국가 인프라 건설로 진지하게 여긴 응게마는 자신이 국가에 '진정한 호의'를 베풀고 있으며 자신의 이니셔티브가 국민들의 일반적인 이익을 대표한다고 믿으며 이 모든 작업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고 한다.[97] 하술하듯 응게마는 정신병원에 입원한 적도 있었던 만큼 자신의 정신적 문제를 인지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98] 참고로 현대 법에서는 피고인의 정신질환이 인정되면 심신장애 판결을 받고 사형을 면제받는다. 아마 정신병력이 인정되었더라면 응게마는 사형을 피하더라도 남은 일생을 스페인에 있는 정신병원에서 보냈을 것이다.[99] 오비앙을 '중령'으로 일컬으며 블랙 비치 교도소에서의 모든 인권침해의 책임을 '중령'에게 돌리는 내용인데, 전하는 바에 따르면 오비앙은 재판 전날 삼촌에게 자신의 이름을 말하지 않으면 목숨을 건져주겠다고 전했다고 한다.[100] 전직 부통령 1명, 수용소 소장 2명, 응게마의 경호원 2명, 경호실장 1명. 이들 중에는 미겔 아이게 은투투무 전 부통령과 살바도르 온도 엘라 블랙 비치 전 교도소장도 있었다.[101]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현직 부통령이자 마시아스 응게마의 사촌이던 보니파시오 응게마 에소노 은차마(Bonifacio Nguema Esono Nchama, 1936~2015. 이전에 외무부 장관을 역임했다)는 재판에 넘겨지지 않았는데, 이는 에소노 은차마가 오비앙의 쿠데타 후에 마시아스 응게마를 버리고 재빨리 오비앙의 적도 기니 최고군사회의에 빌붙은 덕이었다. 이후 은차마는 마시아스 응게마의 처형 후 독립훈장 대십자장을 수여 받고 에티오피아 주재 대사, 몽고모 시장을 역임하며 승승장구하는 듯 싶었다가 오비앙에게 토사구팽 당하자 1990년에 스페인으로 망명했고, 1995년에는 다른 전직 정부 인사들과 함께 야당인 공화당 민주군(FDR)을 창당했다가 오비앙의 탄압을 받았으며, 2015년 4월 14일 고국으로 돌아왔다가 13일 후인 동월 27일 심장마비로 병원에 실려갔다가 의문의 의료사고로 사망했다. 가족들의 말로는 "의사들에게 살해 당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적도 기니 정부의 저명한 인사가 남긴 말에 따르면 오비앙의 소원 중에는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시대와 내 정부 초기 몇 년 동안 내가 저지른 모든 살인에 대해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보다 먼저 죽지 않는 것"이 있었다고 하는데, 어쨌든 오비앙은 소원을 이루긴 했다.[102] 이 마지막 재판에는 14년형을 선고 받은 피고 2명만 참석했다. 이후 징역형을 선고 받은 이들은 1명 빼고는 모두 1981년 7월 사면되었다.[103] 선고 당시 일흔을 넘긴 노인이었기에 형 선고 거의 직후에 오비앙에 의해 사면되었고, 1982년에 몽고모 지역의 정부 대표로 임명되었다고 한다.[104] 이 인연(?) 덕인지 오비앙은 대통령 경호원을 자국민이 아닌 모로코인 용병으로 뽑았다.[105] 실제로 이 쿠데타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이 숙청되어 구금된 것을 넘어 처형 당한 사람까지 있었다고 한다.[106] 1993년에는 가장 가난한 나라 11위였다.[107] 네 윈의 집권과 함께 환율이 소멸한 수준이 된 미얀마를 논외로 하더라도 이디 아민을 겪은 우간다(그나마 이쪽은 1984년 급성장했다), 시아드 바레를 겪은 소말리아, 폴 포트를 겪은 캄보디아, 히말라야산맥의 고산국가 네팔이 이 명단에 들었다.[108] 1987~1989년 조지아 1인당 GDP가 0달러(...)를 기록한 적이 있지만 소멸한 환율로 인한 것인 만큼 당연히 논외.[109] 전자는 원래는 아프리카의 흔한 최빈국 수준이었으나 시아드 바레오가덴 전쟁을 일으키며 국력을 소진했고, 후자는 네 윈의 집권 하에 환율 자체가 소멸한 수준이었다.[110] 게다가 이쪽도 독립전쟁으로 독립한 후 에티오피아랑 대규모 전쟁을 겪었다는 핑계라도 댈 수 있다.[111] 사치와 향락에 빠져 약 1년여 동안 지속적인 악행을 선보였고, 패륜을 일삼았다.[112] 그야말로 쾌락살인만 일삼은 최악의 폭군으로, 수양제와 해릉양왕과 비교될 수준이다. 다만 적어도 후폐제는 소도성이 찬탈 명분을 내세우기 위해 일부러 희대의 인간 말종으로 기록을 왜곡한 게 아니냐는 주장이 있다.[113] 만행의 질만 따지면 저 둘을 초월하고도 남는다.[114] 1959년 인슐린 과다복용으로 심장마비에 걸려 잠깐 혼수상태에 빠졌을 때 신경에 손상을 입어 정신이 악화되었다고 한다.[115] 다만 스탈린에 한해서는 나치 독일을 패퇴 시키고 소련을 양대 초강대국으로 만드는 확고한 업적이 있긴 했다.[116] 이는 이디 아민과도 유사하며, 그 이디 아민 역시 통치기 동안 온갖 기행들을 저지르는 등 심각한 수준의 정신이상 증세를 보였다.[117] 이 역시 인구의 80%를 없애버리고 모든 문명의 요소를 파괴했다는 것이 응게마(최대 인명 손실비율 75%)와 매우 유사하다.[118] 상술했듯 응게마로부터 해방된 후의 적도 기니가 오랫동안 세계 10대 최빈국으로 꼽혔던 것 외에도 1995년 적도 기니의 1인당 GDP가 고작 253달러였다. 1995년부터 2022년까지의 세계 평균 1인당 GDP 성장세를 고려하면 석유가 발견되지 않은 적도 기니의 1인당 GDP는 세계 평균 수준의 속도로 성장했어도 고작 592달러 안팎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참고로 이는 마다가스카르, 모잠비크와 비슷한 수준이다. 게다가 적도 기니가 응게마 때문에 입은 피해를 감안하면 세계 평균보다 느리게 성장해 592달러 밑으로 나왔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특히 마시아스가 거의 폴 포트급 악마라 상대적으로 나아 보일 뿐이지 오비앙의 독재도 객관적으로는 매우 극악한 수준인 데다가 석유 발견 전까지 적도 기니가 세계 평균에 비해서도 경제 성장 속도가 33% 가량 느렸다는 것을 감안하면...[119] 지금도 적도 기니는 인구가 150만 명 남짓인 소국이지만, 응게마 집권 초기 적도 기니 인구는 30만 명에 불과한 미니 국가였다. 이는 서울특별시 도봉구 인구와 비슷한 수준이다. 도봉구 대통령 응게마 덤으로 적도 기니의 면적은 경상도보다도 좁다.[120] 물론 그 적다는 살인 규모도 만 단위다. 애초에 당시 적도 기니가 미니 국가여서 죽일 사람도 부족했던 거에 더 가까웠긴 했지만. 만약 응게마가 어느 정도 인구를 갖춘 국가에서 집권했으면 백만 단위의 학살은 기본이었을 것이다.[121] (민주 캄푸치아의 축소판격인) 북한 정치범수용소 수감자가 20만 명 안팎인데, 응게마의 적도 기니는 인구가 30만 명 안팎이었다.[122] 1973년 개헌 이후까지 감안해도 6년이다.[123] 여담으로 집권 전에 팡족들 사이에서 응게마가 동성애자라는 소문이 돌았지만 동성애자는 아닐 가능성이 높다.[124] 정황상 모두 어릴 적에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125] 그 불륜 상대와 가족들은 응게마가 자치 정부의 부통령으로 일할 때에 추방되었다고 한다.[126] 그 중 1명은 어릴 적에 죽은 것으로 보인다.[127] 그러나 그녀는 마시아스 응게마의 전복 직후 마시아스 응게마와 어떤 종류의 감상적 관계도 맺지 않았다고 주장했다.[128] 1953년생이라는 설이 있지만 확실치 않다. 정황상 1964년 이후에 태어났을 가능성이 더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129] 장녀 마리벨(1968~), 차남 파코(1970~), 차녀 모니카(1972~)[130] 사실 응게마가 자식들을 북한으로 보낸 이유도 응게마가 자신이 실각할 것을 예감하고는 자식들이라도 안전한 곳에서 지내게 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응게마는 전술한 것처럼 김일성과 친한 관계라 김일성이 가족들을 안전하게 보살펴줄 수 있을 거라고 굳게 믿었다고 한다. 최악의 독재자에게도 의외의 인간미(?)는 있었던 셈.[131] 마리벨은 의학 공부를 더하기 위해 중국으로, 파코는 조국 적도 기니로 떠났다고 한다. 모니카는 후술할 내용을 참조.[132] 이와 함께 김일성도 "카리스마가 있었지만, 항상 미소를 짓고 우리에게 배움을 멈추지 말라고 따뜻하게 조언해주던 사람"이라고 평했다.[133] 적도 기니 민주당은 명시적인 당대표, 원내대표가 없으니 응게마가 사실상 당의 1인자나 다를 바 없던 셈이다. 물론 PDGE가 장악한 적도 기니의 의회는 정부의 결정에 반대하는 일이 없다시피한 거수기 수준이니 PDGE가 정계에 미치는 실질적 영향력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134] 다만 여당 사무총장으로서 그는 과도한 족벌주의와 독단적인 행동으로 물의를 빚었는데, 그의 남동생(파코)은 '사무차장'이라고 불릴 정도로 당에 막대한 권한을 행사했다고 한다. 출처.[135] 의외로(?) 식생활이 소박한 편인데, 사실 응게마의 유년기를 보면 도저히 호화로운 생활을 접할 수가 없는 환경이었기에 그리 이상한 것은 아니다. 이와 비슷하게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로버트 무가베도 호화 별장을 짓고 명품을 사들이는 호화 생활을 즐기면서도 식생활은 채식 위주로 간소하게 했다. 다만 마르코스는 가난한 출신이었던 다른 독재자들과는 달리 필리핀의 대명문가 출신으로 매우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음에도 필리핀 전통 요리를 선호했다고 한다.[136] 2023년 환율로는 대략 5580만 달러로, 한화로는 약 733억 7,700만 원이다.[137] 이 때문에 응게마의 대통령궁은 자금성의 서양식 명칭(Forbidden City)을 따와 '금지된 도시(Ciudad Prohibida)'라고도 불리게 되었다.[138] 이에 대해 응게마는 '나는 자유에 미친 사람'이라고 응수했다.[139] 물론 만력제도 이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은 상황이다. 게다가 만력제도 응게마처럼 유해가 유실된 상황인지라...[140] 특히 1977년에는 진짜로 중앙은행 총재 처형을 제외하면 이렇다하게 한 일이 없다. 같은 해에 베이징, 평양, 하노이 순방을 가긴 했다. 이 해 김일성과 같이 찍은 사진에서 지팡이를 짚은 것에서도 암시되듯 이때 응게마의 몸 상태가 유독 심각했을 가능성이 높은 상황.[141] '방'이라는 이름은 힌디어 'भांग'에서 유래되었다. 대마를 막자로 분쇄해 만든 식품으로 주로 우유나 향신료 등을 첨가해 먹으며 아유르베다 의학과 종교 의식 등에 사용된다. 인도에서는 공식 규제 대상은 아니지만 일부 주에서는 자체적으로 판매가 금지된다. #[142] 항정신성 약물 이보가인(ibogaine, C20H26N2O)의 원료가 되는 타베르난테 이보가(Tabernanthe iboga)를 가공한 음료로 추정된다. 이 물질은 종교적 의식 혹은 부족 성인식 등에 주로 사용되며 마약 중독을 치료하는 데 사용되기도 했다. # 이 물질의 분자 구조 및 화학적 성질은 링크 1링크 2에 기재되어 있다.[143] 정작 적도 기니에서는 식민지 시절부터 마약이 금지된 상태였으며, 이 마약 금지령은 테오도로 오비앙이 집권한 후에 소비는 허용하나 거래는 금지하는 식으로 완화되었다. 오비앙은 식민지 시절에 사관학교에 재학하면서 마약을 복용했던 적이 있고, 삼촌의 집권기부터 마약 밀매에 가담하기도 했다.[144] 사실 응게마의 모습을 담은 사진도 당대의 타 지도자 대비 드문 편이다. 특히 1970년대 중반부터 축출 직전까지는 해외에서 찍은 사진을 제외하면 사진이 없다시피 할 정도.[구글검색수]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 검색 결과 약 715개, 'Francisco Macías Nguema' 약 11만 3천 개, '마시아스 응게마' 1630개, 'Macías Nguema' 22만 1천 개, '적도 기니 초대 대통령' 약 2만 6천 3백 개, 'first President of the Republic of Equatorial Guinea' 약 1970만 개, '응게마' 약 1만 9백 개, 'Nguema' 약 173만 개. 그런데 '응게마(Nguema)'는 2대 대통령 테오도로 오비앙 응게마 음바소고에 대한 검색 결과도 포함되었다.[146] TheTopTens에서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 순위 Top 10에서 히틀러(2위), 스탈린(3위), 마오쩌둥(4위), 폴 포트(5위), 김정일(7위), 이디 아민(8위)은 물론 사담 후세인(9위)도 이름을 올렸으나, 마시아스 응게마는 고작 95위에 머물러 있다. 참고로 10위는 칼리굴라, 6위는 블라드 3세이며, 1위는 뜬금없이도 셰이크 하시나 방글라데시 총리다(...) 중국사의 폭군들은 Top 10은커녕 Top 100 안에도 진시황(90위) 1명 외에는 오르지 못했는데, 이는 TheTopTens가 서양권 사이트이기에 서양권의 폭군들이 더 익숙했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147] 다만 이와 관련한 법을 따로 제정했다는 말은 없다.[148] 이와 관련하여 2013년 논문이 작성된 바가 있다. # 여기서는 적도 기니를 '스페인의 사유지'로 바라본 (방임주의 비스무리한 것으로 보이는) 식민주의 전략 유지와 아프리카 식민지에 대한 스페인의 역사적 무관심, 국가로부터 검열 받을 것을 우려한 스페인 언론인, 편집자들의 자기 검열이 요인이라고 보고 있다. 또 응게마가 1973년 이후로 지독한 쇄국 정책을 벌여 적도 기니의 새 소식을 입수하는 것이 극히 어려웠던 것도 적도 기니에 대한 보도 감소에 한 몫 했다. 로버트 무가베의 악행이 유명해진 게 과거 짐바브웨를 식민지배하던 영국 언론들의 적극적인 보도의 역할이 컸던 것과 대조적이다.[149] 실제로 응게마의 축출 전까지 한국 언론에서 응게마 치하 적도 기니에 대해 다룬 기사는 단 2개(모두 동아일보 기사)가 전부다. 1975년 2월 22일, 1978년 2월 11일.[150] 응게마의 지적 수준을 감안하면 독일어 판본일 가능성은 전무하고 100% 스페인어 번역본이었을 것이다.[151] 다만 응게마는 "나는 자본주의자도, 사회주의자도, 공산주의자도 아니다. 그것들은 모두 유럽 이론이고 나는 유럽인이 아니라 아프리카인이다."라고 주장한 바가 있다.[152] 그 '혼란스러웠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는 불명. 말이 너무 난잡한지라 제대로 된 해석이 힘들다.[153] 당연히 이에 대해 회의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은 응게마의 주장이 '일관성이 없다'며 부정적으로 봤다.[154] 심지어 마시아스 응게마에 대해 다루는 자료조차 조카 테오도로 오비앙에 대해 다룬 자료에서 '조카에게 배신 당하고 살해 당한 비운의 대통령'이라는 식으로 언급된 자료가 대부분이다. 예시. 이 기사는 탈북자 출신 기자인 주성하가 2013년에 오비앙이 국제김정일상을 수여 받았을 때 쓴 오비앙을 비판하는 기사이며, 더욱이 주성하는 마시아스 응게마를 테오도로 오비앙의 사촌형이라고 잘못 알고 있다.[155] 국내에서도 이 셋을 소개한 저서인 류광철의 '살아 있는 공포 아프리카의 폭군들'이 2019년 출판되었다. # 이 저서에서는 위 셋과 함께 모부투 세세 세코, 로버트 무가베, 오마르 알 바시르에 대해서도 간략히 다루었다.[156] 물론 북한은 2010년대 중반부터 최고 지도자에게 초자연적 힘이 있다고 선전하는 것은 중단한 상태인데, 이는 북한 주민들도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진실을 알기에 이런 허무맹랑한 선전을 전혀 믿지 않기 때문이다.[157] 사실 어느 국가마다 과거의 극악무도한 독재자들이 미화되는 것은 흔한 현상이다. 우간다, 중앙아프리카공화국에서도 이디 아민, 장 베델 보카사를 위대한 지도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 농담이 아니라 무려 캄보디아에서 폴 포트를 위대한 지도자라고 찬양하는 사람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