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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2 08:12:46

5.18 민주화운동/왜곡/북한 개입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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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주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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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역사 왜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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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설명과 실상3. 왜곡사례
3.1. 북한군 개입설 원조3.2. 5.18 북한개입설 보도사건3.3. 자유한국당의 북한군 개입설 주장3.4. "5.18 광수" 특수부대 안면분석3.5. 조선인민군 군관 김동원의 작전 참여
4. 북한개입설이 거짓이라는 근거 및 개입설에 대한 반박
4.1. 김일성: "미국과의 전쟁을 촉발할 수 있기에 개입 못했다."
4.1.1. 미국 정부 및 CIA 등의 기밀문서 관련
4.2. 북한의 개입 세력과 진압군 간의 문제4.3. 20사단 지휘차량을 쉽게 탈취한 이유는 시민군이 훈련받은 북한 간첩이었기 때문이다?4.4. 시민들의 장갑차 및 군용차량 운용4.5. 시민들이 전차를 운용하고 개발하였다4.6. 북한제 무기가 다수 발견되었다4.7. 무기고를 습격하고 총기를 탈취하는 건 전문 군인들만 가능하다?4.8. 5.18을 북한에서 기념하니 북한의 소행이다?
4.8.1. 5.18 남파간첩 위령비4.8.2. 북한에서 출판한 《광주의 분노》
4.9. 시민군 측 카빈소총 사상자는 북한군의 소행이다?4.10. 탈북자의 증언?4.11. 윤기권 월북사건을 보면 북한의 개입 내지는 종북세력의 준동을 짐작할 수 있다?4.12. 5.18 당시 수습된 신원미상 사망자들은 북한에서 내려온 간첩들이다?

1. 개요

"518 당시 북한특수군으로 광주에 갔다."
# 북한특수군 출신 김명국(정명운)의 주장
북한이 600명의 특수부대를 침투시켜 광주를 점거하고 무장봉기를 일으켰으며 시위를 지휘하고 계엄군을 폭행했다.
지만원

5.18 민주화운동 당시 북한광주에 특수부대를 투입했다는 설. 대체로 5.18 당시 북한군이 투입되었다는 주장과 일어나기 이전부터 주민들을 선동하여 5.18이 일어났다는 주장 등 북한이 개입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끼리도 내용이 어긋난다. 아래 내용들은 인터넷에서 주로 돌아다니는 내용이라는 것을 밝힌다. 5.18 북한개입설 보도사건처럼 이따금씩 수면 위로 올라오지만 곧 묻히는 쉰 떡밥들이다.

2. 설명과 실상

파일:북괴는오판말라.jpg
5.18 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에 잠입취재를 했던 조갑제 기자가 찍은 사진
"북괴는 오판말라!"
광주 시내에 걸린 현수막
[1][2]

이름대로 5.18 민주화운동에 북한이 개입했다는 설. 이를 주장하는 대표적 인물 및 단체로 지만원[3], 전사모, 일베저장소, 디시인사이드, 스카이데일리 등이 있다.

이 주장은 자유민주연합 문서를 봐도 알 수 있듯이, 5.18 특별법이 통과되기 이전인 1990년대 초·중반만 해도 호남 외의 지역에서는 정설로 보는 시각이 많았다. 특히 전두환, 노태우의 지지 기반이었던 대구광역시경상북도에서는 중장년 세대를 중심으로 지금도 거의 사실로 취급받는다.[4] 이것은 5.18 직후 계엄군의 학살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만들어진 설로, 정권의 정당성을 위해 4.19에도 역시 북한의 개입[5]이 있었다고 조작하고 있었다.#

당시 한국의 치안 상태를 보면[6] 특수부대를 호남은커녕 북서울 지역까지 보내는 것도 천운의 도움을 얻어서 겨우 해낼 지경이었다. 또한 광주는 주요 군사 거점으로 삼을 곳이 절대로 아니다. 부산이나 목포처럼 항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대규모 부대가 포진한 것도 아니었다. 있어봤자 당시 퇴역 기체들이 있었던 광주공항, 상무대, 31보병사단 정도가 전부였다. 전라도가 곡창지대라고는 해도 임진왜란, 병자호란 일어나던 시절도 아니고, 비행기를 땅굴로 가져와서 광주공항에서 날릴 것도 아닌데 굳이 600명의 특수부대라는 국보급 인재들을 보내서 인명 피해를 내면서까지, 파괴 공작이나 총력전이라면 모를까, 무리해서 점령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게다가 정말 북한의 특작부대가 1개 대대 규모로 광주까지 잠입했다면 책임자들이 즉각 경질되고 엄히 문책해야 정상이다. 수십 년 동안 군인들이 정권을 잡고 흔든 엄중한 경찰 국가의 안보가 이 정도 수준이라면 그만큼 국가 안보가 미비했다는 소리를 넘어서 안보를 최우선 정책 중 하나로 내세운 독재국가의 근간이 뒤흔들린다는 뜻이다. 하지만 관련 정부 공식 문서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2013년에는 김명국이란 자가 자신이 특수군 출신으로 광주에 침투했다고 말한 방송으로 인해 이 내용은 점점 살이 붙었다. 그러나 2021년에 들어서 김명국이 밝힌 바론 자신은 광주에 침투하기는커녕 소문이었던 데다가 이 대화가 촬영되는지도 몰랐으며, 자신은 지만원 같은 사람들에게 이용당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를 밝히기 힘들었던 이유도 이렇게 논란이 커지면서 거짓말이었다고 고백하기에 겁이 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2018년 SBS에서 미 국무부의 기밀 문서를 바탕으로 보도한 바에 따르면, 5·18 북한군 침투설을 처음으로 거론한 것은 바로 전두환 당시 국보위 상임위원장이었다. 그것도 그것도 5·18 직후인 1980년 6월 4일에. 보도에 따르면, 당시 전두환은 신원 미상의 사망자 22명을 북한의 침투 요원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으며, 5·18의 책임이 김대중에게 있다고 주장하였다. 전두환 신군부는 5·18 진행 도중에도 간첩이 광주에 침투했다거나 북한의 남침 징후가 있다는 등 미국에 각종 가짜 정보를 흘려보냈지만 미국은 이에 속지 않았다. 이후 분석된 CIA의 “체로키” 문건에 의하면, 당시 전두환 신군부는 광주에서 시위대가 인민재판을 시행하고, 무장투쟁 장기화를 위해 폭도 2천여 명이 산악지대로 도주했다느니, 간첩이 광주에 침투해 독침사건 등 공작 활동을 하고 있다느니 하면서 마치 북한의 남침 징후가 있다는 식으로 거짓 정보를 미국에 흘렸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당시에도 미국은 북한군의 특이 동향이 없는 등 신군부가 새빨간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과 계엄군의 실세는 이희성이 아닌 전두환이라는 것 등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계엄령이 떨어져서 광주에 배치된 130여 명의 정보과 형사들의 감시망을 뚫고 북한군이 단 1명이라도 들어왔다면, 그리고 그 북한군을 사살하였다면 그 치적은 국방사에 있어서 오랫동안 남을 최고의 자랑거리에 일선 장병부터 장성급 지휘관까지 그 이유로 훈장이 쏟아져야 했겠지만 그런 이야기도 없다. 당시 직접 취재했던 기자 조갑제 역시 단 1명의 북한군과도 연관이 없다는 주장을 꾸준히 주장하고 있다. 오히려 그는 5.18 자체가 숭고한 반공 민주화 운동[7]이자 계엄군의 총에 힘없는 민간인이 맞아 죽은 사건임을 강조하며 그 논조는 지금도 변함없다. 북괴는 오판말라!라는 현수막이 찍힌 사진 역시 조갑제 기자가 찍은 것인데, 이 말의 의미는 혼란스러운 틈을 타 북한군이 개입하는 일을 막기 위한 시민의 순수한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정설이다. 이 현수막만 봐도 북한군이 개입할 틈이 없다는 것이 드러난다. 한 일화로 간첩으로 의심되는 사람을 시민들이나 시위대가 잡아서 군에 넘겨준 적도 있었다고 한다.

또한 국민행동본부의 대표이자 5.18 당시 계엄군 인사참모부였던 서정갑 역시 "당시에 개미 새끼도 하나 그거 하지 못할 정도로 정말 우리 정보기관이 샅샅이 다 뒤졌어요. 그러면 (북한군) 6백여 명 중에 한 놈이라도 안 걸렸다. 그 자체가 그게 말이 됩니까?"라고 말하면서 이 부분은 3대 거짓말 중 하나라고 발언했다. 극우 행동으로 악명높은 보수 인사마저 이를 부정하는 것이다.

북한 정치군사대학 출신 탈북민인 김정찬(가명) 씨에 따르면 1980년 당시 대만인 유학생으로 위장해 남한에 침투해 있던 교관이 "광주폭동(5ㆍ18민주화운동) 때 내가 서울에 있었는데, 광주에 우리(공작원들)가 모여야 하는지를 (상부에) 물었더니, '지금 예측불허다. 너희들을 어떻게 키웠는데 (몰살이라도 당하면 큰일나기 때문에) 가지 말라'는 답을 들었다."라고 말했다. 이외에도 김정찬 씨는 북한 정치군사대학 출신이라서 내세울 수 있는 여러 근거들을 토대로 '5.18 때 북한이 개입했다'는 일부 극우 세력들의 주장은 완전 틀린 말이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1981년 4월 18일, 중국 심양에서 열렸던 덩샤오핑-김일성 회담에서 김일성이 "우리가 광주 사태와 같은 인민봉기에 개입하지 않은 데 대해서 …(중략)… 이에 대해서 우리 정치국은 여러 번 토의를 했다. 미군이 남조선에 있는 한, 만일 우리가 개입하면 또 미국과 싸워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남조선 사건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 차례 천명한 바 있다."라며 개입하지 않았다고 인정한 바 있다.[8]

미국 기자 Timothy Scott Shorrock 가 "체로키(Cherokee)"로 알려진 CIA 문건을 폭로하며 600명의 북한군 개입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밝혔으며, 결국 CIA가 직접 5.18 관련 기밀 문건을 공개하면서 북한 개입설은 거짓이라는 사실에 쐐기를 박았다.

5.18이 재조명되었던 1996년, 대법원은 계엄군의 사실상의 국헌문란의 폭동행위로 간주했다. 당시 계엄군은 '폭동'을 진압한다는 같잖은 명목으로 무고한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폭력을 휘둘렀고 닥치는 대로 죽이기까지 했는데, 이를 폭동적 시위진압 행위로 규정한 것이다. 전두환 씨의 판결문에서도 이들의 진압 행위를 폭동으로 분명히 명시했다.
피고인들이 국회를 봉쇄하고 정치활동을 금지하며 주요 정치인들을 구속하고 비상계엄을 부당하게 전국으로 확대한 행위는 이미 앞에서 본 바와 같이 국헌을 문란케 한 행위이고 위의 시위 상황에 의하면 광주 시민들은 위와 같은 피고인들의 국헌문란 행위를 항의하기 위하여 대규모의 시위에 나온 것이므로 이것은 주권자이며 헌법 제정 권력인 국민이 헌법 수호를 위하여 결집을 이룬 것이라고 할 것이고 피고인들이 국헌문란의 목적이 없는 계엄군을 동원하여 위에서 본 것처럼 난폭하게 이를 제지한 것은 강압에 의하여 그 권한 행사를 사실상 불가능하게 한 것이어서 국헌 문란의 폭동에 해당한다.
(서울고법 1996.12.16, 선고, 96노1892, 판결)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폭동적 시위진압행위가 국헌문란에 해당하는지 여부(적극)
5·18내란 행위자들이 1980. 5. 17. 24:00를 기하여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등 헌법기관인 대통령, 국무위원들에 대하여 강압을 가하고 있는 상태에서, 이에 항의하기 위하여 일어난 광주시민들의 시위는 국헌을 문란하게 하는 내란행위가 아니라 헌정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정당한 행위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난폭하게 진압함으로써, 대통령과 국무위원들에 대하여 보다 강한 위협을 가하여 그들을 외포하게 하였다면, 그 시위진압행위는 내란행위자들이 헌법기관인 대통령과 국무위원들을 강압하여 그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한 것으로 보아야 하므로 국헌문란에 해당한다.
(대법원 판례 96도3376)

물론 5.18 이전에 기존에 광주 지방에 내려와 있던 북한 출신 공작원들이 5.18 당시 정보 수집 활동을 했을 가능성까지는 배제할 수 없다. 정보원이 적국의 소요 사태에 관련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직적인 대규모 침투설은 물론, 공작원들이 나서서 시민들을 선동했다거나 직접 시설물을 파괴하고 다니면서 치안을 어지럽혔다거나 계엄군과 전투를 벌였다고 볼 증거는 전혀 없다. 또한 5.18이 북한 출신 공작원이 공작활동에 의한 사건이었다 한다면 대한민국 역사의 큼직큼직한 사건은 모두 북한의 공작이라고 주장해도 반박하기 힘들 것이다. 실질적으로 북한 공작원이 남한에 없었던 적은 없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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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왜곡사례

3.1. 북한군 개입설 원조

"북한 비정규군 2,000~3,000명이 전정 기획..."
전두환

일본 외무성 문서에 따르면 전두환이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신문사 편집국장을 모아놓고 5.18북한군개입설을 직접 언급했다는 기록이 발견되었다.

일본 외무성 보고서에는 1980년 5월 24일 보안사령관이자 중앙정보부장 서리였던 전두환이 편집국장단과 비공개 간담회에서 "김일성은 영리하게 2,000~3,000명의 비정규군에 의한 전쟁을 기획하고 있다'고 발언한 것으로 적혀 있다. 전두환의 80년 5월 24일 발언 전에는 미국을 포함, 그 누구도 구체적으로 북한군 병력 숫자까지 거론하며 북한군 침투설을 언급한 적이 없다.

파일:일본외무성_극비문서_전두환_518_북한군개입설.jpg

3.2. 5.18 북한개입설 보도사건

자세한 내용은 5.18 북한개입설 보도사건 문서를 참조. 2013년 5월 15일 보도되어서 물의를 빚은 보도 사건에서 주장된 내용에 대해서는 5.18 민주화운동/왜곡/채널A, 5.18 민주화운동/왜곡/TV조선 참조.

3.3. 자유한국당의 북한군 개입설 주장

자세한 내용은 2019년 자유한국당 공청회 5.18 망언 논란 문서를 참조.

지만원의 5.18 민주화운동에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주장이 자유한국당에게 기어이 먹혔는지, 2019년 2월 8일 자유한국당 소속 의원들이 국회에서 "북한군 개입 여부를 밝히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라는 발언을 하였다. #
이종명(자유한국당 의원): 첨단과학화된 장비로 북한군이 개입됐다는 것을 하나하나 밝혀나가는 그런 역할들을 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김순례(자유한국당 원내대변인):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역사적인 이 진실을 파헤치기 위한 여러분들의 노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게을렀습니다.
김진태(자유한국당 의원): 제가 제일 존경하는 지만원 박사님, 5·18 문제에서만큼은 우리 우파가 결코 물러서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5.18 왜곡 문서에서 언급되었듯이, 한국의 극우 세력들은 정적인 더민주를 비롯한 좌파 세력들이 정통성으로 내세우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정당성을 부정하기 위해 북한군 개입설을 계속 붙들고 있을 수밖에 없다. 만약 이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더라도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파급력이 있다면 TK 같은 콘크리트 지지층이나 태극기 부대 같은 극우 세력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극우 정당과는 다르게 대한민국의 제1야당이자 거대 양당 중 하나인 자유한국당은 선거 승리를 위해선 중도를 포용해야 하는데, 이런 극우적인 발언은 중도를 멀어지게 할 뿐이며, 결국 후신인 미래통합당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역대급 참패를 당하는 결과로 이어졌다.[9] 그리고 2020년 5월에야 이 망언에 대해 제대로 사과하였다.

3.4. "5.18 광수" 특수부대 안면분석

지만원의 사이트에서 생산되는 소스인데, 당시 광주를 촬영한 사진들에 등장하는 시민군의 얼굴들을 분석(?)해 보니 북한 군부의 유명 인사 및 실세들과 동일인물이라는 주장이다. # 즉 이들이 광주로 유유히 들어와서 봉기에 성공한 후 유유히 북으로 돌아가 그 공적으로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는 식의 논리. 여기서 말하는 '광수'는 '주에 잠입했던 북한 특군 이라는 뜻이다.[10]

더 말할 것도 없이 SBS "마부작침" 팀에서 각잡고 달려들어서 처절하게 깠다. 전문 분석기관에 의뢰한 뒤 실제 당사자를 찾아서 인증하고, 그들의 등본까지 떼어다가 확인사살했다. 그와 동시에 시리즈물로 왜곡의 현실왜곡의 메커니즘, 왜곡의 원인까지 전부 다루기도 했으니 한 번 읽어보자.

3.5. 조선인민군 군관 김동원의 작전 참여

이 또한 마찬가지로 지만원의 사이트에서 생산되는 소스인데, 1980년에 북한군에서 군관 김동원[11]에게 처음으로 공화국영웅이 수여되었다. 물론 정황상 김동원은 1996년 대좌였으므로[12] 1980년 당시에는 중위나 상위, 잘해야 대위였을 가능성이 높다.[13] 게다가 김동원에게 공화국영웅이 수여된 날짜도 5월 이후가 아닌 3월 28일이라서 광주 민주화 운동과는 하등 상관이 없는 날짜이다. 상을 먼저 주고 해당 상에 대한 일을 시켰다는 것부터가 이미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다. 그런데 지만원의 사이트에서는 김동원 군관에게 공화국 영웅을 수여한 사유를 광주의 폭동 작전에 참가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김동원은 그 당시 임관한 지 얼마 안 된 제일 밑바닥 군관이었으며 남파공작원의 경우 이 정도 계급이면 거의 최하위 전투원 급이다. 따라서 절대 혼자 안 보내며, 보내지더라도 누군가를 선동하는 작전이라면 최소 대좌급 이상이어야 한다.

4. 북한개입설이 거짓이라는 근거 및 개입설에 대한 반박

가장 먼저 미국이 북한군의 개입을 묵인했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는지부터 생각해봐야 한다. 5.18이라는 일련의 사태가 모두 광주에 침투한 북한군의 공작이었다면, 이것을 군사적으로 진압하지 않은 미국은 북한과 한패가 되는가?

4.1. 김일성: "미국과의 전쟁을 촉발할 수 있기에 개입 못했다."

미국과 중국이 외교 관계를 맺은 뒤 북한의 미국에 대한 태도를 잘 보여주는 자료가 있다. 1981년 4월 심양에서 김일성과 등소평이 회담을 한 내용이다.
김일성: 1979년 12.12 군사반란 이후, 남조선 인민들의 봉기가 전국적으로 파급되는 등 혁명적 상황이 앞으로 다시 재현될 수도 있고, 군대 내에서 혼란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문제의 결정적인 관건은, 미국이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는가 하는 데 있다.

미국은 전두환 정권을 등장시켰다. 그러나 남조선 정세발전을 보면 한동안은 안정될 것 같다. 등소평 동지가 아는 바와 같이우리는 남조선 문제를 처리하는 전략방침에 대해서 모택동 주석과 주은래 총리가 살아 계실 때 연구 결정해 놓았는데 미군이 남한에 주둔하는 상황하에서, 우리가 남조선 인민봉기에 개입한다면 전쟁이 일어난다. 때문에 우리는 개입하지 않는다. 우리가 광주사태와 같은 인민봉기에 개입하지 않은 데 대해서 남조선의 혁명가들은 우리를 비판하였다. 인민들이 죽는 것을 우리가 수수방관했다는 것 이다.

이에 대해서 우리 정치국은 여러 번 토의를 했다. 미군이 남조선에 있는 한, 만일 우리가 개입하면 또 미국과 싸워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남조선 사건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 차례 천명한 바 있고, 남조선 혁명가들에게 무조건 문제를 너무 단순하게 보아서는 안 된다고 설득했다.

세계는 지금 조처에 제 3차 대전이 폭발할 위험성을 내포하는데, 조선에서 먼저 싸움을 일으켜 세계를 재난으로 끌고 갈 수는 없다. 우리는 남조선 인민들로 하여금 민주화투쟁을 강화해서, 담판(협상)을 통해서 평화적인 방법으로 통일문제를 점차 해결할 수 밖에 없다. 부차적인 방법으로는 해결될 가능성이 크지 않다. 그러니 시험해 볼 만한 것이다. 다른 방법이 없기 대문이다.

요컨대 지금 상황화에서는 혁명의 방법, 폭력의 방법으로는 정권을 쟁취할 수 없고, 합법적인 방법으로 정권을 쟁취한다는 것은 환상이다. 지금 유일한 방법은 연방제를 쟁취하는 것이다. 그것은 주로 미국에 대해서 공작을 해서 미국이 연방제를 동의하도록 하는 것이다. 연방제는 남조선의 현행 사회제도와 정권을 그대로 유지하고, 우리도 변경하지 않으며, 두 정권 위에 최고민족회의를 설치해서 동등한 인원으로 의회를 구성하고, 남북이 각기 1년씩 의장을 맡는 것이다. 이것은 쌍방 모두 유익하다. 여러 분야에서 협력의 폭을 넓히고, 교류를 해서 정치상으로 오해를 제거하고 남북 이산된 가족이 서로 왕래하게 한다.

미군 문제에 관해서, 미국과 남조선이 미 군사기지를 보유하는 것이 서울이 염려되고, 또 소련의 남하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라면 다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만약 미국이 연방제에 동의한다면 쿠바관타나모와 같이 진해만을 미국에 제공해서 미군을 그곳에 집결할 수 있게 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우리가 원하는 바는 아니지만 부득이한 상황을 말한 것이다.

만약, 미국이 소련을 견제할 군사기지가 곡 필요하다면, 이런 양보를 해서 우리의 연방제에 대한 미국의 동의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우리를 믿지 않을 것이다.

재작년에 등소평 동지는 나에게 적당한 시기를 선택해서, 조선반도에서 미국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을 것이라는 설명을 발표하는 것을 고려해보라고 말한 바 있다. 원래 작년 봄에 그런 성명을 발표할 작정이었는데 남조선 형편의 변화로 그만두었다. 우리는 미국과 적대관계에 있었지만, 앞으로는 친선관계를 수립할 수 있다.

우리는 반드시 미국과 손을 잡아야 하며, 중국이 조선·미국 관계개선에 협조해 주기 바란다. 지금 남조선 경제가 우리를 초월하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경제 문제는 밑에 사람들이 토의할 것이다. 끝으로 말할 것은, 우리가 먼저 전쟁을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니 동지는 안심하라.』 - "심양(瀋陽)에서 등소평과 김일성의 대담기록". 1981. 4. 18., 오진용, 김일성시대의 중소와 남북한, 2004, 나남출판, 81~83쪽에서 재인용.
『김일성의 미국에 대한 이런 식의 '짝사랑'은 좀처럼 식지 않았다.』- 오진용, 김일성시대의 중소와 남북한, 2004, 나남출판, 71쪽
『김일성과 등소평의 대화를 주의해서 보면, 김일성이 대남전략과 관련해서 매우 세세한 부분까지도 상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김일성은 등소평에게 '대미 전략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을 털어놓고 있다.

심지어 김일성은 미국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라면 쿠바의 관타나모처럼 '연방제 통일 후'에 진해항을 미국에게 내줄 용의가 있다는 점까지 밝히고 있다. 김일성의 미국에 대한 '짝사랑'의 정도가 이런 수준이었고, 매우 단순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오진용, 김일성시대의 중소와 남북한, 2004, 나남출판, 84~85쪽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러하다.
보이다시피 그 김일성이 직접 나서서 개입하지 않았다고 했다. 진짜 개입했다면 그 사실을 적극적으로 선전에 써먹고도 남았을 자가 김일성인데 말이다. 물론 내부적으로는 선전으로 써먹었다.(...)

4.1.1. 미국 정부 및 CIA 등의 기밀문서 관련

2017년 1월 18일, 미국 CIA는 관례대로 기밀보존기간이 끝난 과거 기밀문서들을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했는데 이번 공개된 과거 기밀문서 중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문서도 있었다. '북한은 한국의 정치 불안 상황을 빌미로 한 어떤 군사행동도 취하는 기미가 없다', ''현재까지 북한은 남한의사태에 대해 합리적으로 대처하고 있다. 김일성은 남한에 위협이 되는 북한의 행동이, 전두환을 돕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북한은 남한의 사태에 결코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당시 미국 CIA의 정보분석 내용으로 밝혀졌다. 기사

파일:5.18  미cia.jpg

저 원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1979년 10.26과 12.12 사태가 일어났을 때는 그게 북한을 놀라게 하는 위기 국면이었지만(그래서 미국이 오판해서 한반도 문제에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면 군사개입 가능성도 없지 않지만) 문제는 지금은 전혀 그런 상황이 아니며 지금은 그 당시와 전혀 다른 상황으로 북한군의 움직임은 현재(1980년 5월 9일로 표시된 당시) 전혀 없다고 단언하고 있다. 기사

지만원 등 일부 극우는 1979년 당시 위기상황에 미국이 오판해서 한반도 문제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게 된다면 이런 조건하에서 북한이 오판해 군사개입할 가능성이 있다고 한 부분을 가지고 또 거짓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명백하게 1980년 5월 9일 그 당시 북한군의 움직임은 전혀 없었다. 그 뒤 1980년 5.18 전후해서도 북한군의 움직임에 관한 그 어떤 구체적인 언급 자체가 없었다.

그리고 핵심적인 대목이 여기도 나온다.

5·18이 끝난 직후인 같은 해 6월 2일에 작성된 미 NIC 문건에는 "현재까지 북한은 남한의 사태에 합리적으로 대처하고 있다"며 "김일성은 남한에 위협이 되는 어떤 행동도 전두환을 돕는 결과를 가져올 것을 알고 있다"고 나와 있다.기사

1980년 5.18 전인 5월 9일 그리고 그 뒤인 6월 2일 미국의 핵심적 문서에서 북한군의 움직임을 부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나아가 5.18일 전후 북한군에 관한 그 어떤 언급자체도 없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극우 인사들은 지속적으로 5.18의 북한 개입설에 미국 측 문서를 가져다붙이고 있으며, 이에 대해서도 최근까지 팩트체크가 이루어지고 있다. 2020년 5월 15일에는 한 극우인사의 페이스북 게시글을 통해 '최근 기밀해제된 미국 측 문서에서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 북한의 개입이 있었다고 써놓고 있다'는 주장이 퍼져나갔는데, 이 문서는 1980년 5월 31일 당시 이루어진 계엄사령부의 공식발표를 전달한 것에 불과하다.

4.2. 북한의 개입 세력과 진압군 간의 문제

광주광역시는 대한민국 국군 주둔지 기준으로 제주도 이외의 전군 최후방에 해당된다. 게다가 전략적으로 차라리 부산광역시를 타격한다면 모를까 광주광역시는 그 머나먼 거리에 비해 전략적 활용도가 매우 떨어지는 곳이다.

게다가 북한에서 광주까지 가는 동안 몇 개의 부대의 위수지역을 지나가야 하는지를 생각해보면 답이 나오는데 그 부대들이 전부 직무유기를 해야 비로소 북한개입설이 성립한다.[17] 게다가 한 번 북한이 개입해서 전투가 벌어지면 작계상 그 지역의 모든 부대가 동원되는 것이 상식[18]이다. 그런데 광주에서 북한군이 개입했다면서 당시 광주광역시내 한복판에 있던 부대인 육군보병학교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만약, 5.18 민주화운동에 북한이 개입했는데 실제로 진압을 이렇게 했더라면 육군보병학교가 진압 작전에 불참했으므로 육군보병학교장은 문책을 받아서 최대 총살형에 처하는 것까지 가능했고 1980년 당시에는 실제 집행도 가능했다. 육군보병학교상무대의 리더에 해당되는 부대이며 상무대를 총괄하는 상무대 통합방호사령관은 육군보병학교장이 겸직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육군보병학교장의 입장[19]에서 보면 영원히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중장에 진급할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인데 가만히 있는 것도 역시 이상하다. 한마디로 5.18 민주화운동 당시 육군보병학교는 뭘 하고 있었느냐만 물어보면 바로 답이 나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이 문제로 인해 북한 개입설을 비꼬기 위해서 이런 식으로 농담하고 있다.
북한군이 광주 사태를 일으키기 위해서 1974년육영수 영부인을 암살하자마자 신의주를 출발해 오호츠크해를 향해 가서, 알류샨 열도를 거쳐 알래스카로 이동한 뒤 거기서 노바스코샤까지 어떻게든 간 다음, 조용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쿠바로 직행한다. 쿠바에서 물자를 조달받은 후 베네수엘라로 간 다음 베네수엘라에서 브라질로 건너간 뒤 다시 아르헨티나로 건너간다. 아르헨티나는 곡식이 엄청 많은 나라이므로 거기서 군량을 최대한 조달받은 뒤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가서 거기서 마다가스카르에 간 다음 거기에서 쉬었다가 스리랑카를 거쳐서 말레이시아에 간 다음 필리핀을 거쳐 대한민국광주광역시에 도착해서 작전을 개시한다. 사실상 세계일주나 다름없는 코스이므로 작전을 개시하는 데 6년 가까이 소요되었다.

4.3. 20사단 지휘차량을 쉽게 탈취한 이유는 시민군이 훈련받은 북한 간첩이었기 때문이다?

"시민군이 어떻게 사단 지휘부가 지나가는 길목에 대기하고 있었으며, 사단 지휘부라면 경비 또한 매우 삼엄했을 텐데 시민군이 이를 어떻게 빼앗았는가?"라는 신박한 논리도 존재한다. 이는 5.18의 성격이나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례이다.[20]

당시 20사 전투상보상에서 추산한 시위인원은 10만 명이었는데, 10만 명이라면 당시 약 70만 명이었던 광주 인구로 따지면 1/7 수준이지만, 연령 인구로서 20세 이상 60세 미만 인구였던 약 34만 명(국가통계포털)을 전체로 잡으면 전체의 약 1/3 정도였다.[21] 즉, 도시 청장년 인구의 1/3이 넘는 인원이 19일부터 격분하기 시작해서 광주 전역이 들끓는 상황이었기에, 요즘의 "시청 앞", "OO광장" 등처럼 특정할 수 있는 지역 내에서만 국지적으로 일어나는 시위가 아니었다.

시위는 18일부터 시작된 무차별 구타 및 발포로 인한 시민들의 사망으로 인해 학생들 뿐만 아니라 시민들까지 합세하여 분위기가 완전히 고조된 상태였고[22], 더군다나 20사단 지휘부가 광주 공단으로 진입한 21일 아침의 상황은 바로 전날 밤 11시에 광주역 광장에서 다수 시민들을 향한 발포가 있었던 다음날이었다. 따라서 군 병력을 대하는 태도는 고왔을 리가 없다.

따라서 시민들이 그 지점에서 사단 지휘부의 이동을 알고 대기하고 있다가 조우한 것이 아니라, 어떤 루트로 들어왔든 조우하여 충돌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비유하면 마치 평상시 사단 지휘부가 회식하러 가다가 도중에 시민을 만났는데 갑자기 멱살 잡고 "당신, 왜 우리를 여기서 기다린 거지? 대체 누가 우리 정보를 흘린 거야?"라고 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다.

또한 왜곡된 서술과 유족에 대한 모욕으로 인해 2018년 출판이 금지된 전두환 회고록 1권[23]에서 전두환 본인조차도 21일 오전에 광주 시내로 진입하려다 지휘차량을 탈취 당한 20사단 지휘부 병력은 사단 주력이 아니라 단순한 차량 행렬이었다라고 서술했다. 지극히 왜곡되고 편파적인 서술을 하고 있는 전두환의 회고록에서마저 20사단 지휘부 병력에 대해서 "단순한 차량 행렬이었다"라고 밝힌 것과, 20사단 지휘부가 당시 광주 시내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진입을 시도했던 정황을 살펴보자. 참고로 이때의 20사단은 세계 최강 기계화 전력 보유 타이틀로 유명한 그 20사단이 맞지만, 당시에는 81년 차량화보병, 83년 기계화보병으로 개편되기 이전이라 일반 보병사단이었다. 즉, 왜곡 세력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세계 최강 정예 기계화 부대의 사령부가 훈련 받은 특수전 병력에 의해 공략당한 상황" 따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여담이지만 전두환 회고록 1권은 20사단 병력의 증파원인에 대한 사실관계가 왜곡돼있다. 전두환은 해당 저서에서 "군 사망자 발생과 MBC 방화를 보고 받고, 질서 유지를 위해 20일 밤 10시 경에 20사단을 파견했다"는 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시위대 버스 돌진으로 인한 함평경찰서 사망자(4명)는 20일 밤 9시 20분 경이며, MBC 방화는 9시 40분 경이었고[24], 트럭 전복에 의한 계엄군 사망자 발생(3명)은 20일 밤 10시경이었다. 반면, 전두환의 회고록 서술과는 달리 20사단의 전투상보 상에는 1개 연대 병력 투입 지시를 접수한 시각이 20일 밤 8시, 곧이어 1개 사단 병력 투입 지시를 접수한 시각이 20일 밤 8시 30분으로 기록돼있다.#

4.4. 시민들의 장갑차 및 군용차량 운용

"일반 시민들은 군용 장갑차를 몰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북한 특수부대가 개입하여 장갑차를 몰았을 것"이라고 하는 주장.

주로 "장갑차가 트럭이랑 같아? 그걸 일반인들도 몰 수 있다니 가당키나 한가?" 같은 논조로 주장되는 내용이다. #, # 하지만 이런 발언들은 대한민국 예비역들을 한참 무시하는 발언일 뿐더러, 장갑차에 대한 개념 자체가 잘못 잡혀있는 소리다.


파일:external/www.fiammeblu.it/Iveco_Oto_Melara_6614_PS_023.jpg 파일:M113_Drivers_Compartment.jpg
시민군이 탈취해 운용하던 KM900 장갑차의 오리지널 모델인 피아트 6614의 조종석 내부. 핸들과 기어가 존재하며 민수 상용차와 다를게 없다. KM900 역시 내부는 동일하다. 계엄군이 운용하던 M113 장갑차의 조종석 내부. 스틱과 조향핸들이 존재한다.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장갑차는 대부분 이런 궤도형이다.

가끔 전차 조종수 출신들이 나서서 "장갑차 몰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일반 차량 운전이랑 완전히 달라. 몰아는 봤냐?"라고 반문하는 경우가 있다. 이들이 가장 오해(혹은 호도)하고 있는 점은, 1) 장갑차라고 하는 것은 넓고도 모호한 개념으로, 일반인들이 전차와도 곧잘 헷갈리는 궤도형 장갑차만을 장갑차라고 하지는 않는 점[27], 2) 일반 차량과 같은 차륜시스템을 적용한 장갑차의 운전은 스틱이나 조향핸들로 하는 궤도형 장갑차의 조종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점[28]이다. 즉, 본인들도 차륜형 경장갑차 운행은 해보지도 않고 "장갑차 몰아는 봤냐?"라고 주장하는 셈.[29]

대한민국 국군의 대다수는 육군이고, 그 육군 병력의 대다수는 전방에 배치돼 있으며, 그 전방에 배치된 대부분의 장갑차가 험지개척에 용이하도록 궤도가 장착된 K-21임을 생각해보면 대부분의 민간인들이 군용 장갑차 하면 궤도형으로 오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장갑차라는 이름이 뭔가 특별해서, 혹은 생긴 게 일반 차량과는 달라보여서 차륜형 장갑차의 컨트롤이 궤도형 장갑차와 다르다는 것을 실감을 하기 힘들다면, 차륜형 장갑차에 대한 아래의 자료들을 한번 살펴보자.
파일:external/www.fiammeblu.it/Iveco_Oto_Melara_6614_PS_023.jpg
}}}파일:바라쿠다 장갑차.jpg}}}
이래도 차륜형 장갑차의 구동이 일반 차량의 그것과는 전혀 달라보이는가?
비유하자면 K-9 자주포 조종수였던 사람이 "105mm 자주포가 민간인 손에 탈취당했다"는 얘기에 "자주포를 어떻게 일반인이 탈취하느냐, 택도 없는 소리, 그건 분명 훈련된 특수부대 공작원이었을 것이다"라고 하는 얘기와 같다.

참고로 궤도차량이지만 일반차량처럼 운전하는 K532 차량의 경우에도 조종수가 아니라 운전병이 운전하는 차량이다. K532 소개 (운전석을 살펴보자)

제대로 활용을 하려면 당연히 숙련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장갑차를 운전할 수 있느냐 없느냐"와는 다른 문제다. 애초에 관측창은 해치를 닫지 않는 이상 볼 이유도 없고. KM900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운전석 전면의 관측창 높이가 높지 않기 때문에 머리를 빼꼼히 내놓은 상태에서 운전할 수 있고, 교전상황이 아니라면 실제 그렇게 운용한다. 애초에 대부분의 군용차량(심지어 탱크까지) 비전투상황에서는 관측창을 잘 이용하려 하지 않는다. 당연하지만 저러면 보병과의 연계 작전에서 사고위험이 대폭 증가하기 때문에.
파일:518_KM900_riders.jpg
만약 장갑차를 운용한 시민군이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특수전 병력이었다면 탈취한 장갑차를 이런 식으로 타고 몰진 않았을 것이다. 즉, 전문적인 훈련을 받지 않은 일반인들이었다는 것.

4.5. 시민들이 전차를 운용하고 개발하였다

시민들이 장갑차를 운용했다는 주장에서 더욱 악질적이고 판타지스러운 얘기로 변질된 주장이다.

시작하기 앞서 일러두자면 이 설을 최초로 주장한 이들은 다름아닌 사이버민족방위사령부로, 종북주의자들이다.[34] 그리고 극우 단체들은 이런 사실도 모르고 무작정 이들이 하는 말을, 즉 자기들의 왜곡의 구실로 삼기에 좋은 말만 골라서 듣는 것이다.

대체적으로 이들의 주장은 북한이 시민군에게 전차를 수십 대를 공여해줬는데, 공여된 전차의 대부분은 T-72였으며, T-80T-90은 소량을 지원해줬으며, 공여된 전차들은 모두 시민군에 의해 운용되었고, 대부분이 시민군에 의해 자폭 처리되었다고 한다. 거기에 시민군이 독자적으로 전차를 설계했는데, 이 전차의 프로토타입이 매우 뛰어나서 이 프로토타입과 설계도를 이후 입수한 계엄군이 이 설계도를 약간 손봐서 서방식 전차처럼 수정해서 전차를 생산했고, 그 전차가 바로 K-2 전차라는 것. 이후 이 설계도는 한국이 중국과 러시아에게 팔았는데, 중국은 이 설계도를 99식 전차를 개발했는데 참고했으며, 러시아는 아르마타를 개발했는데 참고했다고 한다.

밀리터리에 관한 지식이 조금만 있어도 이 주장을 뜯어 보면 완전한 헛소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단 T-90은 5.18이 일어난 한참 뒤에 개발된 물건이며, 북한은 T-72와 T-80을 전혀 보유하지 않고 있다. 자기들도 보유하지 못한 물건들을 어떻게 북한이 시민군에게 공여해줬고, 도대체 북한이 어떤 능력으로 사방이 봉쇄된 도시에 전차 같은 중장비를 수십대씩 보내줄 수 있겠는가?[35] 한반도에 T-80이 처음 들어온 것도 90년대 한소수교로 인한 1차 불곰사업 때이다. 그리고 시민군이 전차를 설계했다고 하는데, 전차는 그렇게 쉽게 설계하고 프로토타입을 한 달도 안 되는 기간에 뚝딱 찍어낼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36] 인도의 아준 전차가 괜히 악명을 떨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K-2 전차는 K-1 전차의 후계 기종이기에 K-1의 설계를 바탕으로 설계가 되었으며, 아르마타는 T-95를 바탕으로 제작됐으며, 현대 전차와의 설계 사상과 운용 사상부터가 판이하게 다른데, 뭐하러 구세대 전차의 설계를 참고하겠는가?

사족으로 이런 허무맹랑한 얘기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더 나아가서 시민군이 전투기와 헬기를 운용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쯤 되면 오히려 이런 장비를 갖고도 허무하게 무너진 시민군의 전술 운영은 매우 문제가 많았고 무능했다는 이야기 밖에 안 된다. 결국 시민군에게도 결례인 주장이다. 참고로 당시 광주공항에 있던 기종들은 퇴역 기종들로, 그 엔진들은 지금 활주로에서 겨울마다 눈 녹이고 있다. SE-88 참조.

4.6. 북한제 무기가 다수 발견되었다

북한군의 무기가 다수 발견되었으며, 실제 그 증거 또한 가지고 있다고 하는 주장. 주로 AK소총이 발견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또한 먼저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당시의 국시는 반공이었다. 광주민주화 운동 또한 빨갱이를 잡는다는 명분하에 계엄군이 진군한 것이다. 근데 AK소총이 실제로 다수 발견되었다면 분명 전두환 정권이 이를 증거삼아 자신이 저지를 행위를 옹호했을 것이다.[37] 그러나 인터넷을 아무리 뒤져도 실제로 AK소총이 발견되었다는 뉴스나 정확한 증거 자료는 찾을 수 없다. 애초에 북한제 무기를 가져와 대량으로 운용했다면, 탄약 체계[38]부터 모든 게 호환되지 않는 무기들을 대량으로 운용했다는 것부터 말이 안 된다.[39] 한마디로 말해서 증거 자료에 동구권 무기에 대해 언급이 돼야 하겠지만 그런 것조차 없다.

파일:attachment/광주폭동설1.jpg

한때 5.18에 관련된 박물관에서 북한제 총이 나왔다는 말이 나돌았는데, 그 무기의 정체가 PPSh-41이다. AK 소총도 아니고 2차 대전 당시에 쓰이던, 5.18 시점 기준으로도 유물(고물)이다. AK-47이 베트남전에서 쓰인 지 10년이 더 넘은 시점에서 북한이 왜 그런 유물을 줄까? 그것도 일반군이 아닌 특수부대라는 사람들에게. 하지만 폭동설 신봉자들은 PPSh-41이 시가전에서 굉장히 뛰어나며, 내구도도 오히려 높았기에 주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40]

그런데 반론이 나왔다. 위 사진의 확성기를 자세히 보면 Q마크가 있는데, Q마크는 82년도부터 나왔다. 게다가 유물 전시회도 아닌 그냥 시민군 체험 행사. 그냥 촬영용 소품을 가져다 전시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장전 손잡이도 없는 데다가, 방아쇠울이 제대로 구현되어있지 않고, 무엇보다 안전장치가 없다. 가까이서 찍은 사진을 보면 총기 전체가 나무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안전장치도 없는 실총을 유리막과 같은 어떠한 보호 장치도 갖추지 않은 채 저런 식으로 전시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애초에 불가능하다. 행사 주최 측에서 소품 고증을 제대로 확인하지도 않고 소품을 가져온 심각한 실수에 가깝다.

4.7. 무기고를 습격하고 총기를 탈취하는 건 전문 군인들만 가능하다?

이런 주장을 하는 인물의 대표로는 2차대전 태평양 전쟁사를 집중적으로 파고드는 파워블로거로 유명한 대사가 있으며 황상무 시민사회수석도 회칼 테러 얘기 꺼낼 때 이런 부류의 주장을 한 바가 있었다. 당시 시민들의 무기고 습격 전개를 보면 최소 1천명 이상의 인원을 조직하고 각 습격대의 책임자와 목적지를 정해서 동시 습격을 지시해야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무기고 습격에는 이런 전문성은 당시에 전혀 필요없다. 직장 예비군 무기고의 추억 (답글 내용 유) 이와 관련해서는 심지어 일베 내부에서조차 이런 글이 올라온 적 있다. (일베용어주의) 광주 민주화운동이 여전히 폭동이라고 생각하는 일베유저마저 지적한 무기고 습격 및 장갑차 탈취의 비전문성[41]

1990년대 초에 예비군 무기 이관 사업이 있기 전까지는 전국의 경찰서나 파출소, 출장소에 무기를 보관했다. # 당시 무기고는 보안이 허술한 경우가 상당했고 그에 따른 범죄가 여럿 일어났다.[42]
카아빈 3정 모두 예비군서 훔쳐

한편 문과 이가 3년동안 범행에 사용한 총은 카아빈 3정으로 이총들은 이들이 자살한 후 현장에서 각각 발견됐다. 이들 총은 모두 72년 9월 4일 밤 9시부터 이튿날 새벽 6시사이 경기도 평택군 팽성면 모 예비군 분산 무기고에서 도난당했던 총으로 확인됐다.[43]

경찰에 따르면 도난당일밤 무기고를 지키던 야간근무자 4명은 무기고에 자물쇠를 잠가놓은 채 근무지를 이탈, 마을로 내려가 있었다는 것인데 경찰은 그동안 수사결과 총기의 행방을 찾지 못 하고 있었다.
동아일보 1974.07.29#
예비군 교육중 카빈 도난
김씨 총기 수사서 드러나

이정수씨 피납사건의 용의자로 검거된 김지홍 씨가 숨겨둔 카빈 총의 출처 수사에서 서울 성동구 신사동 예비군 중대에서 카빈총 1정을 잃어버린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예비군의 무기관리가 소홀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동아일보 1972.10.10#
예비군무기고서 총 훔쳐
청년 구속

[대전] 1일 보령경찰서는 예비군 무기고에서 총을 훔친 서울 서대문구 연희1동 108 김영국 씨(20)를 특수절도 혐의로 구속했다.

김씨는 지난달 29일밤 본적지인 보령군 웅천면 독산리 예비군무기고의 문을 부수고 카빈1정과 실탄60발을 훔쳐 달아난 혐의다. 충남도경은 현지무기고 관리책임자를 문책할 방침이다.
동아일보 1971.12.02#
영등포 공포 3시간
카빈 든 10대 둘 다방서 난동
경관 두명 사살
백여발 난사
네명 중경상
예비군무기고 총 훔쳐 심야인질 손님이 검거

17일 밤 10시 30분경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4가 2 제일나사 2층 대호다실(주인 박동근, 42)에서 강원도 영월서 상경한 박모(17) 김모(16)군 등 2명이 예비군 무기고에서 훔쳐 갖고 온 카빈총을 난사, 손님과 종업원등 팔 명을 인질로 삼고 영등포 경찰서 중앙 파출소 정윤종 순경과 행인 김봉주 씨 등 2명을 쏴죽이고 행인 한병호 씨 등 4명에게 중경상을 입혔다.
동아일보 1971.08.18 #
또 카빈 5정 도난
예비군 무기고 실탄 9백발도
직장예비 무기고에서 보관중이던 소총과 훈련용 실탄이 관리소홀로 대량 도난당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9일 경찰에 따르면 전남 여수시 충무동 한전 여수 지점 직장 예비군 무기고에서 보관중이던 카빈소총 5정과 훈련용 카빈 소총 실탄 9백발이 지난 4일 상오 9시부터 7일 사이에 도난당했다는 것.

이 같은 총기류 도난 사고는 지난 7일 하오 3시 한전 여수 지점 경비원이 순찰근무중 무기고 출입문을 잠가놓은 철제 빗장이 파손돼 있는 것을 발견, 무기고 내부를 확인한 결과 밝혀졌다.
경향신문 1982.03.09 #
허술한 예비군 무기고
두 중학생 소총 3자루 훔쳐

예비군 무기고에서 소총 3자루를 훔쳐낸 중학생 2명이 경찰에 붙잡혀 구속영장이 신청되었다.

경찰에 따르면 같은 마을 친구인 대구시 D 중 3년 조모군(15)과 경북 달성군 D중 3년 이모군(15)등 2명은 지난 1월 22일 밤 9시경 달성군 옥포면 모 예비군 무기고에서 담을 넘어 환기창을 뜯어내고 침입, 이 무기고에 있던 M1소총 1자루와 카빔[44] 1자루를 훔쳐내 무기고에서 1백m가량 떨어진 비닐하우스에 숨겨두었다가 다음날 3km정도 떨어진 야산 바위틈에 묻었었다는 것.

또 이 들은 1월 25일밤 9시 경 같은 방법으로 이 예비군 무기고에서 M1 1자루를 다시 훔쳐냈다.
동아일보 1982.03.05 #
보면 알겠지만 무기고 습격의 전문성은 전혀 없다. 5.18 당시 경찰과 예비군 무기로 무장한 광주시민군을 경험했던 전두환 정권은 유혈진압 이후에 전국의 경찰서와 예비군 무기고 관리를 강화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보안점검을 진행했다. 그런데도 바로 그 다음해에 중학생 2명이서 소총을 훔쳐서 달아나는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대한민국의 무기고 관리 실태라는게 이 정도였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여러 시민들이 무기고의 위치를 인지한 상태이며 그 무기고 습격에는 어떠한 전문성도 요구되지 않지만 미리 조직하지 않으면 일어날 수 없다는 주장은 상식적으로도 납득이 되지 않는다.

4.8. 5.18을 북한에서 기념하니 북한의 소행이다?

북한이 5.18을 기념하므로 북한 개입은 사실이라는 주장이다. 이런 논리를 믿는 사람이라면, 선교사 케네스 배의 북한 억류 당시 박근혜 정부에서 이 사람을 석방하라는 성명을 발표했으므로, 케네스 배는 우리 정부에서 보낸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것이다.

북한은 4.19와 6월 항쟁도 기념한다. 통일부 북한자료센터 2010년 4월 20일 동향(4.19 혁명) 통일부 북한정보포털 2007년 6월 11일(6월항쟁) [45] 에 들어가면 더 자세하게 볼 수 있다. 북한은 4.19 혁명, 6월 항쟁, 부마항쟁, 미군 여중생 압사 사고도 자기들 입맛에 맞춰 왜곡해가며 기념한다. 이것은 단지 위의 사건들을 반정부 투쟁으로 내부 선전하기 위해 써먹는 것에 불과하다. 중국에서 2.28 사건을 기념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극우 중에서 아주 극단적인 경우 4.19 혁명이승만에게 대항했다는 이유로 북한 간첩이 일으켰다고 생각하는 사례도 있다. #[46] 그런데 이 말은 곧, "나는 헌법 정신을 부정하겠다."라는 주장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47]

잘 알려져 있다시피 북한은 국제적으로 신뢰도가 가장 최악인 나라이다. 그런데 평소 그렇게도 북한 및 종북 세력을 싫어한다는 사람들이, 막상 5.18을 비하하기 위한 목적 하나 때문에 이런 때에만 북한의 행보를 근거로 삼는 모순이 생긴다.

4.8.1. 5.18 남파간첩 위령비

북한에서 위령비가 나왔다. 남파간첩에 대한 위령비라고 한다.

하지만 애초에 위에서 언급했듯 북한 고위간부 출신의 탈북자들이 줄줄이 광주에 군대를 보낸 적이 없다고 언급한 것이 유머러스한 부분이다.[48] 이 사실을 배제한다 하더라도, 저 위령비가 실제 광주에 남파된 간첩을 위한 위령비라는 증거 자체가 없다. 단순히 5.18 사건 발생 후로 한 달 뒤에 만들어진 비석이란 이유로 이것이 북한 개입설의 증거가 된다는 것은 억지와 추측에 불과한 주장일 뿐이다.

저 위령비에 쓰여진 대로면 사상자가 150여 명이다. 광주에서 시신 100여 구가 어딘가에 묻혀 있다는 말이 돌았다고 한다는 주장 때문에 이것이 더 사실처럼 들린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나타난다. 당시 계엄군의 사상자는 20여 명. 그러면 나머지 130여 명은? 그나마 가장 가능성 있는 가설은 위의 4.19 혁명과 6월 항쟁의 그것과 같은 내부 선전용이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주장에 의하면 사진에 광주에 파견된 간첩들이라고 나온다는데, 사진에서는 전혀 광주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 수도 없고 이러한 위령비는 북한 도처에 산재한다고 한다.

4.8.2. 북한에서 출판한 《광주의 분노》

1985년 조선로동당 출판사에서 출판한 《광주의 분노》 라는 책에 북한의 특수부대가 개입하여 직접 보고하지 않았다면 도저히 알 수 없는 상세한 정보가 담겨있고, 이것이 북한 개입의 증거라는 주장이다. 책 내용을 구체적으로 보면, 사망자들의 명단과 정보(직업, 나이 등)가 담겨있고, 어느 무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했는지까지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어서 이 주장은 그럴 듯해보인다.

하지만 이 책은 북한이 당시 남한에 널려있던 흔한 정보들을 수집하여 짜깁기하여 만든 선동용 불쏘시개에 불과하다. 사망자들의 명단은 사건이 끝난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언론사들에 의해 공개되었다.광주사태 사망자 명단-1980년 6월 5일자 동아일보

무기고를 탈취했다는 것도, 당시 언론사들에 의해 어느 무기고를 탈취했는지 정황이 상세히 보도되었다.광주 데모사태 닷새째-1980년 5월 22일자 동아일보

당시 언론과 출판은 계엄공고 제2호에 의해 검열을 받고 있는 상태였다.계엄공고 제 2호-1979년 10월 27일자 동아일보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킨 소요사태'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선전하던 당시에는 언론사들을 앞세워 당시 상황을 낱낱이 밝힐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신군부는 언론사들의 사건 보도를 허용하고, 보도자료를 자신들이 날조한 '시나리오'에 버무려 선전한 것이다.

당시 국내 신문에서도 상세히 보도한 내용을 북한이 구하지 못했을 가능성은 0%에 가깝다. 무함마드 깐수 사건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남한에 침투한 간첩들의 간단한 업무가 남한 신문자료 전송이다. 북한 특수부대 수백 명이 계엄령이 발령된 남한의 방어선을 뚫고 침투하여 광주에 들어갔다가 다시 계엄군을 따돌리고 북한으로 복귀할 확률과 남한의 신문 한 장을 구할 확률 중에서 어느 게 더 높을지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4.9. 시민군 측 카빈소총 사상자는 북한군의 소행이다?

카빈에 대한 노컷뉴스 기사

시민군이 사용했던 카빈 소총에 의한 사살이 시민군 측에서도 발생했으니까 이것은 북한군이 쏜 것이 아니냐는 주장. 한 술 더 떠서 카빈 소총을 북한제의 카빈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계엄군은 광주의 7개 주요 통로를 봉쇄했는데 그 중 하나가 광주교도소였다. 광주교도소는 호남고속도로와 국도 옆에 붙어있는 교통요충지이다.[49] 계엄군이 봉쇄한 7개 도로에서는 사상자가 많이 발생했다. 대표적으로 17명이 사망한 주남마을 미니버스 총격사건이 있다.

하지만 당시 카빈소총과 계엄군이 사용하던 M16소총 중 어느 총에 맞았느냐에 대한 분류는 육안으로 판명해야 했었다고 당시 관계자가 밝혔다고 한다. 이 부문은 위키백과에 정리되어 있으니 참고하자.

또한 1996년 부검 전문가 황적준 교수가 검찰 사체 검안서를 검토한 월간지 기사가 있다. 관심 있는 사람은 읽어보길 바란다. 완전 공개 검찰 작성 5·18사망자 165명 부검 자료[50] 몇몇 희생자는 계엄군의 총격으로 사망했음에도 검시 보고서에 카빈으로 인한 총상이라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밖의 사체검시에 대해서도 여러 의혹점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다만 5.18 당시 사체검시를 했던 전남대병원 의사 문OO 씨는 1995년 6월 21일 검찰 진술에서
"당시 사인 판단에 있어 계엄당국이나 기타 외부로부터의 주문이나 소위 '압력' 같은 것은 없었는가요?"
라는 질문에 대하여
당시 군의관이나 검찰, 경찰관이 입회하기는 하였지만 그들이 사인 판정을 할 만한 의학적 지식이 없는 상태라 전적으로 저희 의사들이 사인을 판정하였으며, 판정 기준은 검시조서에 나와 있는 대로 총상, 자상, 타박상, 차량사, 미상으로 대별하고, 다시 총상의 경우에는 M16, 카빈과 함께 M16인지 카빈에 의한 사망인지 확정할 수 없는 애매한 사체에 대해서는 기타로 판정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총상의 경우 판단 기준은 저희가 검시현장에서 사체를 살펴보며 사입구와 사출구를 확인하고 그 크기를 재었는데, 사입구와 사출구의 크기가 상당한 차이가 있으며, 사출구의 크기가 큰 경우와 사입구만 확인되고 사출구는 확인이 되지 않는 경우 또는 사체 상태가 불량하여 사입구와 사출구가 명확하게 식별이 되지 아니하나 손상 부위가 상당히 큰 사체는 M16에 의한 사체로 판단하였고, 그렇지 아니한 사체들은 카빈으로 구분을 하였으며, 그러한 기준에 의하더라도 판단이 불가능한 경우는 기타로 분류를 하였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한도 내에서 일체 그러한 압력이나 주문은 없었습니다."
라고 답변을 한 바 있다.

사체검시에 참여했던 윤OO 전남대 의대 교수도 같은 질문에 대해 1995년 6월 15일 전화통화 진술에서
"당시가 계엄 상황이기 때문에 군의관이 입회를 하였지만 단순히 참여만을 하였고 사진촬영은 경찰관이 하였으나 사인에 대한 판단은 전적으로 담당의사가 하였습니다."
라며, 문OO 씨의 진술과 일치하는 답변을 하였다. 또한 1985년 5월에 국가안전기획부에서 작성한 광주사태 상황일지 및 피해현황에서는 총상 사망자들의 경우 사망원인을 M16 총상, 카빈 총상, 기타 총상으로 명확히 구분하고 있다. 따라서 이는 사체검시를 했던 의사들의 주장과 일치한다. 직접 사체검시를 한 문OO 씨 및 윤OO 씨의 주장과 황적준 교수의 주장 중에서 정면으로 대치되는 부분[51]이 있다. 다만 95년도는 이미 문민정부 시기였고, 당시 사체검시를 했던 전남대병원 의사들이 신군부를 위해 거짓 증언을 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점, 그리고 일관된 진술을 한 사람이 한 명이 아니라는 점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국방부는 검시 결과에 따라 1985년 7월 광주사태의 실상이라는 제하의 자료에서 총상으로 인한 사망자 128명 중 군이 보유한 M16에 의한 총상 사망자는 29명(안기부 광주사태 상황일지 및 피해현황에서는 36명)에 불과하다고 하였으나 1988년 2월 소준열 장군은 민족화해위원회에서 그 숫자를 45명이라고 증언하였고 1988년 7월 당시 오자복 국방장관은 국회 본회의 답변에서 M16 총상 사망자가 98명이라고 번복했다. 1995년 7월 검찰은 M16 총상 사망자가 96명, 카빈 총상 사망자는 26명이라고 발표했다. 이렇게 M16 총상 사망자가 급격히 늘어난 이유는 사체검시 당시 사망원인을 기타 총상으로 분류한 경우가 다수였으며, 따라서 어떤 총에 맞았는지 부정확한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M16에 의한 사망자 수가 심하게 변동하는 것은 외부 개입이라고 볼 수 있는 증거라 할 수 있겠다.

또한 당시 2선급 화기로 지방 향토사단 및 경찰에서 사용하던 총기가 바로 M1 카빈이었다.[52] 당시 사진을 보면 향토사단이었던 제31보병사단은 카반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으며, 분명한 것은 제31보병사단에 의해서도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점이다.

4.10. 탈북자의 증언?

사실상 위의 반론들이 격파된 이후 우익들이 꺼내든 마지노선이 바로 탈북자 임천용 씨를 비롯한 몇몇의 증언에 따른 주장들이다. 북한의 고위층이 포함된 탈북자들의 증언이니 100% 진실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들의 주장은 그저 허점 투성이이며 사실이라고 하기에는 허접한 점이 너무 많다. 애초에 이들의 주장은 매번 달라져 일관성이 하나도 없다.[53]

한국논단 인터뷰
2006년 기자회견
뉴스한국 인터뷰

세 번 주장 모두 침투경로와 다시 돌아간 경로, 그리고 투입된 병력 수 모두 다르다. 결국 신뢰성이 없다. 게다가 투입된 병력들도 가장 적게 잡은게 400명 이상으로, 1개 대대에 준하는 수준이다. 상식적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세계의 군사학, 전쟁, 게릴라 전투를 연구 하는 사람들의 연구 대상이 되었어야 한다. 그리고 꼭 연구학자가 아니더라도 전쟁에서의 승리 비책을 찾는 국가라면 돈을 주더라도 배우고 싶은 사례나 다름없다. 적국 최후방의 내륙 도시에 400명 이상이나 되는 인원이 몰래 들어와 폭동을, 심지어 단순 선동과 시위, 파업도 아니고 무장까지 시켜서 정부군에 대항한 이후에 흔적도 없이, 피해도 없이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는데 성공했다면 어느 나라라도 비법이나 전술을 배우려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세계의 그 학자도 이 사건을 그런 방향으로 연구했다는 기록은 없고, 어느 나라도 북한에게 '비법'을 배우고 싶다며 매달렸다는 언론 보도 등은 없다. 하다못해 이런 큰 사건이 다시 일어나지 못하도록 국방부나 정부에서 백서라도 편찬해야 정상이다. 이런 대규모의 전술공격이나 사보타주, 간첩 행위가 있었다면 다시는 같은 피해를 당하지 않기 위해 대책을 세워야 하는 게 국가와 국토를 방위하는 군대가 해야할 일 아닌가?

1968년 1.21 청와대 습격 사건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20~30명 규모의 침입도 주민들의 신고로 발각되는 현실에서 어떻게 600명씩이나 내려올 수 있었을까? 대한해협 해전에서 전멸한 북한군의 수가 대략 600명이다. 다 더해도 10척이 안 되는 전투함, 소해정, 상륙정이 해군력 전부였던 시절에도 후방으로 쳐들어오려던 부대를 잡아냈는데 30년 후의 군대가 600명을 못 잡아낼까? 애초에 이 정도 숫자의 무장간첩들이 내려올 수 있었다면, 그리고 이들이 대한민국의 가장 남쪽 지역인 전라도, 광주까지 와서 봉기를 일으킬 때까지 몰랐다는 건 이 설을 지지하는 몇몇 우익 세력들이 옹호하는 신군부의 무능함만 증명하는 꼴이 된다. 애초에 600명씩이나 되는 정규군 특수부대원들이 내려왔는데 아무런 반응을 하지 못했다는 건 군인으로서는 최대의 치욕이자 노무현 말마따나 최대의 직무유기며, 진심으로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할 일이다. 만약 이들이 광주로 가지 않고 청와대로 가서 정부가 마비되었다면, 이건 당시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의 책임이 더 막중해진다.

만약 정말로 400명 이상의 특수부대가 광주에 침투했다면 이건 일개 침투가 아니라 전시 상륙작전 수준이다. 광주에서 벌어진 일을 갖고 작정하고 월남하여 제2의 6.25 전쟁을 계획하려고 하는 게 아닌 이상 불가능한 인원 수다.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당시 침투 인원도 25명이었다. 상식적으로 북한이 정말 한국을 무너뜨리기 위해 6백 명의 특공대를 파견하려고 했으면 굳이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광주로 가지 않고 곧바로 청와대로 직행했어야 정상이다. 김신조의 1.21 사건 때도 그랬고.

또한 이 무장간첩설이라는 게, 신군부의 당시 주장으로 제시되는 79년 말 거제도 지역 간첩사건과 일본 정보부의 첩보에 의한 80년대 남침 음모설과 짬뽕되었던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 당시 침투 관련 자료는 단 3명이었다.

또한 탈북자의 증언이 화제가 되자 다른 탈북군인 협회에선 이 주장이 현실성 없다고 반박했다. 또한 마찬가지로 탈북자 출신인 주성하 기자 역시 북한개입설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했다.# 여기서 언급했듯이 이런 식으로 일부 탈북자들이 고의로, 혹은 다른 세력에게 악용당해서 이런 왜곡을 행하는 사례가 5.18 외에도 여럿 있다. 이에 대해서는 북한이탈주민 문서의 '일부 탈북자들이 일으키는 사회문제' 소항목을 참고.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광주에서 벌어진 일들은 이 특수부대들이 서로가 공수부대와 시민군으로 분장하고 소요를 일으키고 실제 해외 언론에 보도된 잔학행위는 모두 이 사람들이 저지른 일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런 잔학행위를 찍어서 실시간으로 북한에 생중계하여 북한 사람들도 그 상황을 알았다는 이야기다.

광주에서 벌어진 일들에 대해서 북한에서 심도있게 보도한 건 '사실'이고 광주를 소재로 한 여러 영화나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것도 '사실'이지만 거기에서 묘사된 광주는 다분히 불순한 목적을 가지고 평양에서 재현한 것에 불과하다. 신의주 학생 의거나 북한 내의 반정부 투쟁을 영화화하면서 '북한산'에서 촬영하는 상황을 예시로 생각하면 된다.

아휴 JTBC의 수 차례의 보도를 통해, 이러한 주장을 펼친 탈북민 중 한 명인 북한군 출신 정명운 씨('김명국')가 지금껏 광주에 가 본 적이 없다고 실토함으로서, 북한 개입설은 전면 부정된 상황이다. 더 나아가, 김명국은 자신을 유혹한 세력에 대해서도 폭로했다. 2019년 자유한국당 김진태 의원이 개최한 518 공청회에도 초대받았지만, 거절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JTBC와의 인터뷰에서, "이것만 잘하면 수만금 준다는 사람도 있었고. 이런 거 갖고 자꾸 자기네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더라"고 말했고, 취재진이 뭘 요구했냐고 묻자 "내가 기자회견을 해달라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그는 기회가 된다면 광주를 찾아가, 사죄하겠다고 말했다.# 결국 탈북민을 이용한 북한군 개입설 또한 북한 내부의 과장된 선전 선동행위에 5.18 민주화운동을 왜곡하려는 세력들의 준동이 덧입혀지면서 만들어진 가짜 주장이라는 것만이 밝혀진 셈이다. 알다시피 궁핍하게 살아가는 편이 많기도 한 탈북자들 입장에서 돈으로 유혹한다는데 이를 뿌리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2021년 2월 17일,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2020년 하반기 조사활동보고서에서 5.18 북한군 개입설을 검증해본 결과, 일부 탈북자들과 음모론자들이 주장하는 북한특수군 침투가 상당 부분 사실이 아니거나 역사적, 그리고 사실적 타당성이 없는 무리한 주장으로 파악됐다고 보고했다. 이미 십수년 전에 결론난 것을 조사 끝에 다시금 확인한 것이다. #

4.11. 윤기권 월북사건을 보면 북한의 개입 내지는 종북세력의 준동을 짐작할 수 있다?

윤기권은 현재 5.18 유족들에게도 흑역사로 간주된다. 어차피 핵심 지도층도 아니었고, 당시 그와 함께했던 시민군 출신 인사(윤기권의 동창 이덕준 씨 증언)들의 증언은 그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많았다는 게 중론이다. 무엇보다도 윤기권은 당시 광주대동고등학교에 다니던 고등학생이었고[54] 학적부 등 이를 뒷받침하는 정확한 증거도 있다.[55] 철없는 고등학생이 남파간첩이었고, 계엄당국의 포위망을 뚫고 폭동 주도세력에 합류했다면 이걸 막지 못한 신군부의 실책이 아닐수 없으며, 북한 역시 남반부 해방이라는 중요한 공작행위를 일개 청소년에게 맡긴 아마추어적인 행태를 저지른 것이다.

개인의 문제를 조직 전체의 용공행위로 침소봉대하는 논리라면 마찬가지로 가족중에 공산주의자였던 형 박상희가 있으며 젊은 시절 남로당에 몸을 담았던 박정희가 일으킨 (극우 기준으로) 5.16 군사"혁명"여순 사건과 다른거 없는 좌빨폭동이고,[56] 김일성에게 나름의 외교적 수사를 갖춰 편지를 보낸 적이 있으며 심지어 도움까지 받은 전두환대한민국 제5공화국종북 좌파정권인 셈이다.

4.12. 5.18 당시 수습된 신원미상 사망자들은 북한에서 내려온 간첩들이다?

당시 신원미상 변사체의 신원 확인 작업은 육안 식별이 대부분이었다. 전 국민의 지문과 증명사진의 전산등록은 2000년대가 되어서야 완성되었으며,[57] 그 이전에는 파출소나 동사무소에 비치된 증명사진/지문 장부를 경찰관, 공무원이 시신과 일일이 확인하는 식으로 신원 확인이 이루어졌다.

DNA 분석도 도입되지 않아서, 5.18이 진압되고도 한참 시간이 흐른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 당시에도 경찰의 DNA 수집은 걸음마 단계에 머물러 있었기에 현장에서 지문이나 정액, 혈액 같은 단서를 수집하기는 했으나 이것이 변질되어 분석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분석조차 못하고 있다가 30년이 지나고 공소시효가 다 끝나서야 이춘재로 범인이 밝혀졌다.

그렇다보니 안면부에 곤봉이나 총격을 맞거나 부패로 인해서[58] 훼손이 심한 시신, 또는 아예 생전에 전입신고는 물론 주민등록조차 되지 않았거나[59] 또한 독신자나 고아 출신, 가출인 등의 이유로 실종 사실을 신고해주고 시신의 신원을 확인해줄 연고자(인우보증인)조차 없는 시신은 육안으로 이루어지는 신원확인 작업에서 경찰이 확보한 관내 거주민 증명사진/지문철과의 대조가 불가능했을 것이고, 그렇게 신원미상으로 남았을 가능성이 크다.

항쟁 후 계엄사의 수습과정, 이후 진상 규명 과정에서 실종자로 분류된 인원 중에서 이들의 신원이 존재할 것이며 실제로도 광주시는 2001년부터 신원미상으로 분류된 시신들을 DNA 대조작업을 거쳐 유가족에게 인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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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까지 신원미상으로 남아있는 시신은 총 5구였으나, 2020년대에 접어들며 과학기술의 발달로 유해와 실종자 가족간의 DNA대조가 이루어지면서, 신원 미상 사망자는 2구로 줄어들었다.

이중에는 4세 가량의 남자아이 시신도 발견되었다. 나머지 시신 1구도 50대 장년 등 북한군 시체라는 주장에 대한 신빙성이 없는 일반인이며, 신원이 밝혀진 3구도 일용직 노동자나 고등학생, 근로청소년 등 주변에서 흔히 볼수 있는 시민들이었다. 막말로 전쟁 중이라도 비무장 민간인이나 영유아를 사살했다는 것 자체가 전쟁범죄라는 걸 안다면 계엄군이 얼마나 잔혹하게, 무차별적으로 시위를 진압했는지 단적으로 말해주는 사례라고 볼수 있겠다.

최근 신원이 밝혀진 희생자 3명을 포함한 사망자 5구의 주 신상정보는 다음과 같다.

남구 효덕동 야산에서 발견된 4~5세 추정 남자 어린이에 대해서는 2021년 새로운 증언이 나오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이 아이의 시신이 발견된 곳은 또다른 어린이 피해자인 광주효덕초등학교에 다니던 전재수 군과 전남중학교에 다니던 방광범 군이 피살당한 곳과 가까운 곳에 있다. [단독]5·18항쟁 때 군 버스에 실려 간 ‘4살 남아’는 누구? 어디로?, 4살, 품속엔 1천원 한장…어린 5·18무명열사의 이름은 더 자세한 내요은 5.18 민주화운동/학살 참고.

이외에도 광주교도소 부지를 발굴하며 수습한 신원미상이었던 유골의 신원이 친구를 만나러 광주로 향했다 실종된 화순군 출신의 23세 남성 실종자였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

[1] 썸네일의 제복 입은 인물들은 대한민국 경찰에 해당하는 치안조직 사회안전성 소속 조직원들이다.[2] 영상 내용을 요약하면 북한 특수군 600명에 대해 전두환이 처음 듣는 이야기라고 했다는 것, 그리고 2012년 북한군 노크 귀순 사건 당시 귀순 병사 한 명을 놓친 일로 장성급까지 문책을 받았는데 진짜 북한군 600명이 시골 해안마을이나 섬 같은 곳도 아닌 광주처럼 그 지역의 제일 큰 도시에 아무런 징조도 없이 들어왔다는 게 사실이라면 신군부 인사들부터 박살을 내야 하는 것이 아니냐, 600명이면 군사작전 수준인데 그 600명이 어떻게 의심을 받지 않고 동화가 될 수 있겠느냐며 게다가 당시는 계엄령 상태였는데 사실상 그 정도 규모는 불가능하다며 확실히 간첩이라고 할 이들을 밝혀내지 못했고 신군부가 확실히 북한군 개입을 밝혀냈으면 자신들의 무능 부분이 드러날지언정 명분을 가져갔을 것이라고 하는 등의 내용이다.[3] 온라인에 북한 개입설을 조직적으로 유포한 최초의 인물.[4] 일부 노년층은 지금도 5·18이 폭동이라는 인식에서 별로 변한 것이 없는 경우가 있다. 이들은 당시 광주에서 "폭동"이 일어났다는 것만 기억하지, 이후 진상규명 과정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이 없었거나, 혹은 정치적 편향이 심하여 자신의 정치적 신념과 배치되는 정보를 그냥 거부하는 경우 등이 있다.[5] 또다시 그들은 우리의 최근 국내 정세를 이른바 OO 적화의 호기로 판단하고, 제 2의 4.19로 유도하기 위해, 간첩과 무장공비를 대량 침투시켜, 혼란을 가중시키려 하고 있습니다.-대학총학장들을 대상으로 한 북괴 및 국내정세(시나리오)[6] 1970년 말에는 북한의 대남 도발 중에서도 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등 특히 굵직한 안보 사건들이 있었던 데다가 냉전이 심화되면서 반공 교육을 강화했다. 특히 군이 권력을 잡은 이후 사회 안정을 위해 삼엄한 통제를 하면서 겉보기 치안은 매우 안정된 상황이었다.[7] 조갑제는 군사정권 시절에도 5.18을 반공 민주화 운동이라고 보았다.[8] 등소평사상연보, pp.188~189, 오진용, 『김일성시대의 중소와 남북한』 p.81.에서 재인용.[9] 5.18 관련 발언이 총선 패배의 유일한 원인은 아니지만, 유사한 망언이 이어졌고 자유한국당은 이에 제대로 대처 못하면서 극우 이미지가 누적되었다.[10] 저 약어 자체도 조악하다 못해 어거지로 쥐어 짠 흔적이 보인다. 약어는 역 두문자어가 아닌 한 어절의 첫 글자를 따는 것이 관례로, 저 단어 구성을 사용한다면 광수가 아니라 광특이라는 단어가 되어야 한다. 5.18과 관련해서 매우 자주 언급될 단어인 공수특전단의 약어는 공수가 아니라 공특이다.[11] 강릉 무장공비 침투 사건의 북한측 책임자이다.[12] 강등이 빈번한 북한군이라지만 일단 강등당한 적이 있는 군관에게는 이런 임무를 안 맡긴다.[13] 조선인민군 군관은 백두혈통이나 이에 준한 신분만 처음부터 장령으로 임관하며 나머지 군관들은 전원 병 생활을 하다가 직발군관으로 뽑히는 인원이기 때문에 30살이 넘어야 소위로 임관한다. 대신 위관급 시절에는 참모를 안 하고 소대장과 중대장만 지내거나 반대로 중대장을 안 하고 참모만 하다가 좌관급 장교로 진급하기 때문에 소좌 내지는 중좌 정도에 가면 대한민국 국군 장교들과 나이가 비슷해진다.[14] NLPDR 주사파들은 한반도 전역에서 '미제'를 몰아내자는 북한의 선전을 문자 그대로 순수하게 믿었지만, 정작 북한의 진짜 속내는 초지일관 미국과의 외교관계 수립이다. 김일성-김정일-김정은 3대에 걸쳐 계속 유지되고 있는 북한 외교의 제1목표가 바로 미국으로부터의 체제 보장 약속이다.[15] 이건 국제 정세의 영향이 크다. 냉전 시대에 미국은 대한민국과의 관계를 고려해서 북한에 대해선 봉쇄정책으로 일관했다. 등소평 이하 중국공산당 정권이 어찌할 여지가 없었다. 또한 중국이 북-미 관계에 중재자로 나설려면 또한 북한도 중국이 대한민국과 대화에 나서는걸 용인해야 하는데, 이 문제에 대해서 김일성이 어떤 입장이었는지는 알려진바 없다. 그리고 1989년 냉전 종식으로 북-미 대화의 가능성이 열렸을 때에 마침 중국은 천안문 사태로 미국 및 서방권 과의 관계가 최악으로 치달으면서 북미관계를 중재할만한 상황이 못되었다. 그 뒤로는 북한의 핵개발 문제가 불거지면서 북한은 대한민국도 중국도 다 패싱하고 직접 미국과 협상에 나선다.[16] 냉전 시대 미국의 대북 봉쇄정책이 어느 정도였냐면, 공식적인 자리는 물론 사석에서 조차 미국 외교관이 북한 외교관과 간단한 인사를 하는 것조차 금기시했다.[17] 육로의 경우 수경사부터 시작해서 경기도, 충청남도, 전라북도, 전라남도가 위수부대인 모든 부대가 해당되며 해로의 경우 서해안에 주둔하는 모든 해군이 해당된다.[18] 실제로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발생했을 때, 군대는 물론 대한민국 경찰청까지 합세해서 무장 공비와 맞서 싸웠다. 유사시에는 경찰도 적과 싸워야 하는데 육군보병학교는 명백한 정규 군부대다. 북한이 개입했는데 정규군이 진압작전에 투입되지 않는다는 것부터 말이 안 된다.[19] 일반적으로 중장에 진급하기 가장 힘든 소장이 보직되는 게 육군보병학교장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조건 진급이 되는 무장공비 진압에 안 나설 수가 없다.[20] 이는 공교롭게도 시위진압 초기에 광주로 진입했던 20사단 지휘부도 마찬가지였는데, 시스템 클럽에 공개되어 있는 20사단 62연대 2중대장 최종원 대위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현장에 있었던 대대인사장교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좌우로 서있기에 환영인파인 줄로 알고(!) 답례로 손을 흔드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광천동이 바로 일부 넷우익 성향의 유튜버들이 '광주 톨게이트'로 착각하고 있는 예전 광주 공단 입구, 즉 현재 유스퀘어 쪽이다.[21] 참고로 이 중에서 20-30세 인구가 약 23만, 20-40세 인구가 약 30만이다.[22] 19일 이를 보다못한 시내 기관장들과 지역 유지들이 시위진압을 완화해달라, 그게 안 되면 공수부대원들에 대한 시각이 좋지 않으니 공수부대원들이라도 철수시키고 일반 군인으로 바꿔달라는 식으로 계엄사에 건의를 했으나 오히려 1시간 30분 뒤 실탄 사격이 가해져 당시 조대부고 학생이었던 김영찬 군이 부상을 입었다.[23] 이 회고록은 2018년 출판 및 배포금지 조치가 되었다.[24] 최근에 MBC 방화 등을 유도했던 편의대의 실체가 알려졌다.광주매일신문 한국경제 부산MBC 전두환이 말한 훈련받은 특수공작원의 실체가 사실은 이거였나..[25] 현재도 동일함[26] 청소년들 역시 근로청소년을 제외한 학생들은 학교에서, 대학생들은 문무대 훈련을 통해 교련을 받아본 경험이 있었다.[27] 해외파병부대에서 운용하는 바라쿠다 장갑차, 경찰 특공대에서 운용하는 구형신형 장갑차도 전술적 용도가 다를 뿐 엄연히 장갑차임을 떠올려보자. KM900 퇴역 후 도입된 K806/808 장갑차도 마찬가지. 게다가 전술용도로 구분하자면 K-21 장갑차 같은 IFV와, KM900 같은 APC는 같은 장갑차라도 스펙이나 용도가 완전히 다르다.[28] 참고로 궤도형인 K-21 장갑차의 조종석 내부는 이렇게 생겼다. #[29] 좀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자면, 일반적으로 차량이 스티어링휠을 사용하는 경우 병과는 수송(=운전병=비전투병과)으로, 후반기 훈련은 야수교(현재는 군수교 예하)로 가게 된다. 반대로 차량이 조종간을 사용하는 경우 병과는 기갑(=조종수=전투병과)으로, 후반기 훈련은 기계교(혹은 자주포의 경우 포병병과로서 포병학교)로 가게 된다.[30] 참고로 KM900은 중형면허, K806/808은 대형면허로 분류된다.[31] 6자리 특기번호로 세분화되기 전 2812 중형차량운전병 직무개요를 보면 "소형/중형차량 운전면허로 운전할 수 있는 차량, 5/4톤 및 21/2톤 전차종(유조차 제외), 16인승이하 승합차(13인승이상 구급차량 제외), 적재중량 11.5톤미만 상용화물차, 경장갑차(궤도차량 제외), K-532차량, 105㎜포견인차량(특수면허취득자)을 운전하며 인원 및 화물을 수송하는 업무수행"이라고 분명히 소개되어 있다. 이래도 KM900을 전차조종수만 몰 수 있는가?[32] (45초부터) "사람들은 APC 운전이 엄청 어려울 꺼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실제론 정말 쉽습니다. 자가용 운전하는 거랑 같죠. 차륜형이잖아! 하지만 다른 점은 좀 크다는 점? 그리고 할인마트에 끌고 가면 주차장 찾기 좀 빡셀 꺼라는 점?" 실제로 차량 무게가 현격하게 다르므로 가속이나 브레이크 조작감 등은 물론 다르다.[33] 실은 원래 이걸 도입하려고 했지만 당시 서독이 분쟁국에 대한 무기 수출을 금지하고 있었으므로, 밀수 형식으로 몰래 들여와서 쓰다가, 아세아자동차에서 이탈리아 피아트 사의 CM6614를 면허생산하는 식으로 마무리 된다.[34] 종북 세력은 종종 이 설을 신봉하면서, '북한은 광주에 전차를 대규모로 보낼 정도로 강하다!'라는 발언들을 했다.[35] 정말 장난 삼아서 말해 김일성이 축지법을 쓸 수 있다고 하더라도, 수십대의 중장비를 봉쇄된 도시에 단기간에 보낸다는 건 불가능하다. 기본적으로 20톤이 넘어가면 항공수송은 물론이고 작은 화물선으로 나르기도 힘들다. 이는 미군마저도 공수전차를 개발하면서 상당히 애를 먹었던 부분이고, 결국 M551 셰리든을 퇴역시킨 이후로는 사실상 포기. 그나마 뒤에서 안전하게 화력지원하는 자주포도 너무 무겁다며 자주포보다 견인포를 더 선호한다.[36] 아무리 선진국이라고 해도 전차는 설계에서, 프로토타입 생산까지 최소 1년 이상은 걸린다.[37] 실제로 악명 높은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증거물로 내세운 게, 시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라디오였고 이것으로 북한 방송을 청취했다라는 식으로 증거 자료라고 내놨던 시절이다. AK나 북한 혹은 중국제 총기 한점이라도 발견되면 이만큼 좋은 자료가 어디 있을까?[38] 당시 시민군이 쓰던무기는 5.56×45mm를 사용하는 M16이나 .30 카빈를 사용하는 M1카빈이었다. 반대로 동구권 AK에 들어가는 총탄은 7.62×39mm이며, 그당시 최신 소총인 AK-74의 경우 5.45x39mm이기 때문에, 북한에서 총탄을 지급하거나 하지 않으면 총이 있어도 쏘지 못한다. 여기서 일부 사람들이 "구경이 달라도 약간의 개조만 있으면 사격이 가능하다!" 라고 주장하면서 외국의 건스미스 영상을 가져오는데, 거기에서도 언급하다시피 이렇게 구경을 바꾼 총기들의 경우 그 구경에 맞는 부품들을 전부 구입해다가 총을 새로 만드는 수준으로 개조한다. 하다 못해서 그런 식으로 총기를 굴렸다가는 한 발 쏘기도 전에 기능 고장이 일어난다.[39] 애초에 이런 후방 침투 공작부대는 자기 나라에서 적성국 무기 훈련을 받고 오며, 무기도 최소한의 무장만 하고 온다. 지하에 KTX를 깐 것도 아니고 최소한 차를 타고 5시간 거리를 아무런 소리 없이 오가면서 탄약을 보급 받는다는 게 과연 가능이나 할까? 하물며 광주보다 훨씬 가까운 청와대를 습격할 때도 1인이 겨우 기관단총 한 자루에 탄창 몇 개만 가져올 수 있을 정도였는데 말이다. 차라리 먼저 가져온 AK 등으로 총기 관리인을 죽이고 무기 탈취 후 가져온 총을 어딘가 숨겼을 거라는 게 더 현실적이다. 그리고 만약 진짜로 그랬다면 AK에 대한 사망자(사람이 총에 맞으면 동공, 쉽게 말해 몸에 구멍이 나는데, 이러한 구멍은 총기별로 제각기 다르게 생긴다. 즉 만약 북한제 소총으로 인한 사망자가 발생했다면 증거물로 써먹기에 충분하다.)가 발생했다고 발표하며 진짜 북한이 쳐들어왔다고 대대적으로 광고 할 수 있었을 건데, 그러한 언급은 전혀 없다.[40] 하지만 이 주장도 웃기는 것이, 정작 북한군은 6.25 이후에 특수부대들에겐 PPSh-41의 개량형인 PPS-43을 줬다. 단적인 예로, 북한군이 청와대를 습격할 때도 이 총을 들고 왔다. 오히려 PPSh는 특유의 드럼 탄창이 수시로 문제를 일으켰으며 바나나식 탄창은 특유의 구조 때문에 PPS-43이 훨씬 나았다. 그리고 후술하겠지만 이 사진은 결국 행사 장비 배치 실수로 인한 해프닝으로 끝났다.[41] 무기고 관련 언급한 부분의 원본을 찾아본 결과 다음과 같다. : 국가법령정보센터, 제주신보, 제민일보, 양평백운신문, 2003년 하동 예비군 관리대대 M16 도난사건[42] 이는 6.25 당시에 경찰도 유사시에 군인과 같이 합동작전을 자주했기 때문이다.유격대들이 설치고 다니는데 군인들은 그 주변 지형에 대해 아는게 없고, 당연히 이러면 주변 지형과 환경, 주민에 대해 잘 아는 경찰과 합동작전을 해야하기 때문이다. 또한 유격대중 상당수가 밤에 경찰서와 같은 관공서를 자주 급습했기 때문에 다시 전쟁이 일어난다면 이러한 문제점을 방지하기위해서 지구대나 파출소도 어느정도 무장이 돼있었다. 실제로 후에 무기정리사업을 하면서 M1919경기관총을 유사시 대공사격을 위해 가지고 있던 파출소도 있었다.[43] 구로동 카빈 강도사건에 대한 기사이다. 해당 항목 참조.[44] 카빈의 오타[45] 내부 동향란에 보면 '北, 6.9 南 6월 인민항쟁 20돌 기념 평양시 보고회 중앙노동자회관에서 진행' 이라고 적혀있다.[46] 이 기사를 쓴 사람이 지만원이다.[47] 대한민국 헌법 자체가 4.19혁명 정신 자체를 계승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것도 대한민국 헌법이 수차례 변경되는 와중에도 4.19 혁명 이후의 헌법 개정안에는 4.19 혁명 정신이 빠진 헌법 개정안은, 심지어 박정희, 전두환 정부 시절 헌법에서조차 빠진 일이 없다. 애초에 박정희가 5.16 군사정변을 '5.16 혁명'으로 정당화할 수 있던 것도 5.16이 '4.19 학생혁명의 뜻을 이어받았다'는 것을 내세웠기 때문이다.[48] 황장엽의 발언, 문서에서 광주로 검색 #[49] 원래 2차전 비포장 국도 밖에 없었지만, 1970년대 호남고속도로가 개설되고 기존의 국도가 4차선으로 포장되는 바람에 교통요충지가 됐다고 한다. 2014년 광주교도소는 삼각동으로 이전했다.[50] 링크가 깨졌는데, 여기서 읽을 수 있다.[51] 황 교수는 M16과 카빈 소총, 그리고 기타 총상으로 분류된 기록은 당시 의사들이 아닌 검찰이 작성했다는 점이 분명하다고 주장한 반면, 당시 사체검시에 실제로 참여한 의사들은 외부 개입은 없었다고 일관된 진술을 하였다.[52] 향토예비군의 오랜친구란 별명에서 알 수 있듯이 카빈은 정말 오랜시간동안 쓰였다. 실제로 예비군에서 완전 도태시킨다고 계획한 시기가 5.18 민주화 운동이 끝나고도 34년이 지난 2014년이다.[53] 당연하겠지만, 북한은 우리나라와 달리 여행을 자유롭게 다닐 수 없어서 당국의 허락을 받고 려행증을 따로 발급받아서 다녀야 한다. 따라서 탈북자들이라고 해도 북한의 상황에 대해서 모두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또한 북한의 세뇌 교육에 오랫동안 익숙해져있기 때문에 북한군이 '난 광주에 다녀온 간첩이다'라고 허풍을 떨어도 그대로 믿을 수밖에 없기도 하다.[54] 1962년 1월생으로 1980년 당시 고등학교 3학년.[55] 이게 왜 중요한 사실인가 하면, 당시 학생을 포함해 미필자들에겐 집총을 금지했다. 당시엔 교련으로 인해 학생들도 총을 조금은 다룰줄 알았는데도 말이다.[56] 실제로 북한은 박정희 군사혁명위원회의장의 과거 전력을 알고 5.16 군사정변에 기대를 걸어보기도 했다. 박정희의 형 박상희와 한때 절친한 사이였던 무역상 부상(차관급)인 황태성을 밀사로 보낸것이 그 예. 그러나 황태성은 처형당했고 김일성은 박정희에게 우호적이었던 협상파들을 대거 숙청한다.[57] 단적인 예시로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로 자국 내에서 이산가족을 찾던 게 1983년의 이야기다. 이전까지는 주민등록번호가 있었지만 제도 자체가 미비하거나 출/사망 신고가 잘 되지 않던 시절이다 보니 대한민국에 살고는 있는데 전산상으로 등록이 되어 있지 않았다든지 하는 문제가 많았다.[58] 항쟁이 마지막으로 진압된 날이 5월 27일이다. 거의 6월을 향해 가는 초여름 날씨다.[59] 당장 주민등록번호 제도를 실시한 지 10년을 겨우 넘는 시기였다. 주민등록증은 1968년 1.21 사태 이후 국민들에게 배부되기 시작했다. 항쟁 사망자는 공식 자료보다 더 많을 것으로 추측된다.[60] 발굴 당시 유해 척추 부분에 스테인리스제 와이어가 감겨있어 척추 질환자로 추정되었다.[61] 1960~1980.05.21 실종. 그동안은 실종자로 분류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