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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보나파르트/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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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4a94><colcolor=#e8cd54>생애<colbgcolor=#fff,#1f2023>생애 · 정치 경력 · 신체적 특징 및 사생활
가족 아버지 샤를 보나파르트 · 배우자 조제핀 드 보아르네 · 마리 루이즈 · 아들 나폴레옹 2세
호세 1세 · 동생 루이 보나파르트 · 제롬 보나파르트 · 조카 나폴레옹 3세
평가 평가
사건사고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 · 나폴레옹 전쟁
기타 기타 · 프랑스 민법전 · 나폴레옹의 정리 · 나폴레옹 콤플렉스 · 병조림
관련 틀 프랑스인의 황제 · 위대한 프랑스인 · 이탈리아 국왕 · 라인동맹 보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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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설명3. 프랑스 내부의 평가4. 영웅 또는 전쟁광5. 군사적 능력6. 꼬마 부사관(Le Petit Caporal)7. 외교력8. 정권관리 능력9. 해외의 평가
9.1. 스페인, 포르투갈9.2. 이집트9.3. 아이티9.4. 영국, 러시아9.5. 덴마크9.6. 폴란드9.7. 미국9.8. 아시아
10. 후세 독재자들의 동경, 추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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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평가를 적은 문서.

2. 설명

역사 vs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 알렉스 젠들러[1]
히틀러와 나폴레옹이 자주 비교되긴 하지만, 그러한 비교는 허상에 불과하다. 히틀러는 12년간 권력을 행사한 뒤 군대를 제외한 분야에서는 독일에 해골과 쓰레기만 산더미처럼 남겼다. 반면 나폴레옹은 단 한 번도 전투에 임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프랑스에 남긴 행정체제와 시민개혁만으로도 여전히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들의 하나로 평가될 것이다.
앨리스터 혼 (영국의 역사학자)
"결과적으로 나폴레옹은 19세기의 아돌프 히틀러에 불과하다...대중의 일반의지라는 것이 존재하고 그것을 한 개인이 대표할 수 있다는 믿음의 최상위에 올려놓은 것이 황제(L'Empereur)냐, 영도자(Der Fuehrer)냐의 차이 정도일 뿐이다...그에 비한다면 최후까지 프랑스 공화국의 집정관으로 공화주의의 테두리 하에서 행동했고, 황궁은커녕 일개 하숙집에서 숙식했던 로베스피에르가 황제 폐하만큼이나 야박한 평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That Sweet Enemy: Britain and France: The History of a Love-Hate Relationship, Robert Tombs, Isabelle Tombs 공저[2]
아돌프 히틀러와 동급의 악한으로 보는 관점들도 있는 반면에 천재적인 전쟁 수행 능력을 빼고도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 중 하나로 뽑는 관점이 나올 정도로 나폴레옹을 바라보는 시각의 스펙트럼은 다양하며 이는 그만큼 그가 인류 역사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 인물임을 드러낸다. 이러한 복잡한 평가는 그가 근대의 인물이라는 특수성에서 기인하는데 호쾌하게 군대 끌고 적군을 신나게 쳐부수면 영웅으로 떠받들었던 고대, 중세와 달리 근대부터는 훨씬 복합적으로 역사적 인물들을 평가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3. 프랑스 내부의 평가

현대 프랑스에서 나폴레옹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린다. 나폴레옹을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정치 성향을 대강 가늠할 수 있을 정도이다.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이들은 주로 우익 성향이다. 이들의 관점에서 나폴레옹은 두말할 것 없이 프랑스 역사상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가졌던 개인으로, 전 유럽을 휩쓸며 프랑스의 군사력, 문화, 사상의 선진성의 정점을 부족함없이 드러낸 인물이다.

반면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이들은 주로 좌익 성향이다. 프랑스 내에서 나폴레옹에 대한 가장 큰 비판은 그가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 공화국의 전통을 첫 단추부터 엉망으로 만들었다는 것에 집중된다. 나폴레옹 1세 사후 보나파르트주의 등 왕당파의 득세, 그리고 이로 인한 제2공화국 수립 이후로도 끊이지 않던 혼란, 나폴레옹 3세라는 웃픈 인물의 등장으로 가까스로 봉인되었다가 다시 나락으로 가버린 프랑스 정치사의 원죄를 나폴레옹 1세에게 묻는 것이다. 이들은 비슷한 시기에 건국된 미국이 훨씬 건강하고 신념 있는 정치 지도자들에 의해 공화국의 전통을 발전시켜나간 것을 비교하며 프랑스의 근대정치사를 너무나도 뼈아프게 여긴다.

현대 프랑스 정치에서 혹시라도 나폴레옹이 등장하면 십중팔구 드골과 엮여서 등장하기 마련이다. 프랑스 우익 세력은 현 제5공화국의 강력한 대통령제를 옹호하는 편인데, 이는 직접적으로는 드골에 의해서 세워진 것이지만, 역사적 인물을 주워섬길 때 나폴레옹(심지어 루이 14세까지)이 등장하는 식이다. 대강 "프랑스는 역시 중앙집권화돼야 잘 나가!"하는 논조. 같은 이유로 대통령제에 부정적인 의견을 가진 사람은 드골을 비판하다가 나폴레옹까지 걸고 넘어지는 식으로 나간다.

현대 프랑스에서는 국가의 영웅이라는 찬사[3]나라를 전쟁으로 이끈 전쟁광이라는 비판이 공존하고 있는 논란의 대상이다.

4. 영웅 또는 전쟁광

허나 좋게 보든 나쁘게 보든 봉건주의의 잔재를 완전히 종식시킴과 동시에 프랑스 혁명 이후 극도로 불안정했던 프랑스의 정국을 안정시키고 근대 유럽의 시작을 알리며 시대의 흐름을 넘어 미래를 내다본 인물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이를 상징하는 것이 법치주의를 내세우며 만든 나폴레옹 법전으로 현재도 대륙법》체계의 원형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전까지 프랑스 법률 체계는 고대 로마로부터 잔존한 로마법의 잔재를 기초로 지역과 상황에 따라서는 《교회법》이나 지방의 《관습법》이 통용되고, 거기에다가 왕이 공표하는 칙령이 뒤섞인 아주 복잡한 구조였다. 단지 복잡하기만 한 게 아니라 너무나 방대하고 지방이나 상황에 따라서 다르기도 해서 상당히 혼란스러웠는데,[4] 이걸 전부 다 《나폴레옹 법전》 한방으로 완전히 갈아엎어 버렸다.[5] 또한 이 《나폴레옹 법전》의 편찬으로 절대왕정의 요람이던 유럽에 시민 평등 사상이 널리 퍼지게 되었고 그로 인해 《나폴레옹 법전》은 현재 바빌로니아 함무라비 대왕의 함무라비 법전, 동로마 제국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때 편찬된 로마법대전과 더불어 세계 3대 법전으로 불리고 있으며 나폴레옹 본인도 "나의 진정한 영광은 마흔 번에 걸친 전쟁의 승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이 민법전을 말살할 수 없는 데 있다."며 한때 전 유럽을 군사적으로 제패한 것 보다《나폴레옹 법전》편찬을 더욱 자랑스러워 했다. 실제로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법[6]의 구성과 기본 논리는 모두 《나폴레옹 법전》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리고 가문이나 혈연이 아닌 능력 위주로 운영되는 관료제를 확립하고[7] 이러한 인재를 키워내기 위한 근대적 엘리트 육성 교육 제도인 그랑제콜 제도를 도입하였으며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나폴레옹 지적법(Napoleon's Cadastre)을 제정하여 토지 측량 및 관리 체제를 확립함으로써 근현대적인 지적 측량 및 부동산 등기 체제의 효시를 세웠다. 또한 현대 정치 체제의 근간인 정교분리 역시 나폴레옹 시대에 비로소 완전히 확립된 것이다.

군사 면에서도 기동력을 중시하고 국민군의 전투력을 애국심의 고취로 끌어올리는 등 19세기 전쟁의 개념과 체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 이것이 지금도 전쟁의 신으로 추앙받는 이유다. 즉, 단순히 잘 싸우기만 한 것이 아니라 전쟁의 개념과 방식 자체를 바꿔 버린 인물이라는 것. 비록 실패하긴 했지만 대륙 봉쇄령으로 물가를 최고점[8]으로 끌어올리는 등의 결과로 당시 최강국으로 성장했던 영국을 얼어붙게 하기도 했다. 참고로 당시 영국의 경제력은 동원 가능한 재원 기준 나폴레옹 프랑스의 거의 10배에 가까웠다. 쇼미더머니를 치고 끝까지 나폴레옹을 잡으려고 든 영국의 경제력이 사기였다.

그의 몰락을 기회삼아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 등 유럽의 구(舊) 세력들은 유럽을 프랑스를 혁명 이전의 구(舊) 체제로 돌려놓으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나폴레옹 몰락으로부터 한 세기 만에 19세기 중후반 유럽은 각종 혁명이 발발하며 나폴레옹의 비전은 대부분 실현되고 유럽 대부분 국가의 왕정, 제정 체제는 붕괴했다. 또한 나폴레옹이 도입한 법률과 제도 역시 워낙 각 국가들의 사정에 잘 맞게 짜여져 있던 까닭에 나폴레옹의 흔적을 지우고 싶어 안달이던 그의 정적들조차 나폴레옹이 남긴 유산을 크게 바꾸지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나폴레옹이 근대 유럽사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나폴레옹의 역사적 위치는 영국의 역사학자 토머스 칼라일에게 영향을 주어 영웅이 역사를 만들고 이끌어간다는 영웅사관을 창시할 정도였다. 즉, 한 사람의 어마어마한 존재감 때문에 역사를 보는 관점마저 영향을 받았다.

나폴레옹은 백일천하 동안 불리한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 자유주의자들과 동맹하여 "자유 제국"을 약속했다. 짧은 지배기간 때문에 사실상 이 약속은 이루어지지 못했고, 실제로 그 약속을 지킬 의지가 있었는지도 의문이지만... 실제로 나폴레옹은 몰락 이후 "내가 그런 헌법 만든다고 시간이나 낭비했다니! 어차피 다시 유럽의 지배자가 되면 전부 없애버릴 의회였는데!"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래도 이 약속 때문에 그는 "자유주의 황제"라는 하나의 환상을 추가했다. 특히 부르봉 왕조 복고 왕정의 무력함과 혁명의 성과를 부정하려는 퇴행성은 나폴레옹에 대한 향수를 강하게 불러일으켰고 결국 군국주의내셔널리즘, 자유주의, 혁명과 일인 독재가 결합한 "보나파르티즘"이라는 프랑스 특유의 기묘한 정치사상을 만들게 된다.[9] 그의 조카 나폴레옹 3세가 보나파르티즘을 통해 권력을 획득했고, 나폴레옹 3세까지 몰락한 뒤에도 그 영향력은 지속되었다. 국가 내 계급과 출신 배경에 따른 봉건적 사회적 차별 관계를 시민 개병제를 통해 평등하게 만들고 이러한 자유주의적 사회적 비전을 강력한 1인 군사 독재자의 권위를 통해 이룩하자는 얼핏 보면 진보적이면서도 그 방법은 지극히 권위주의적인 정치적 풍조는 19세기, 20세기 들어 유럽, 나아가 세계사 전반에서 강력한 영향을 발휘해왔다. 20세기 전간기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를 비롯한 중동부 유럽의 군사정권, 내셔널리즘과 평등 사상이 기묘하게 결합된 파시즘, 박정희장제스 같은 동아시아 국가들의 소위 스트롱맨 군사 독재자들, 극우적 내셔널리즘과 과격한 평등주의를 설파하며 하층 대중의 지지를 끌어모으는 21세기의 우파 포퓰리스트에 이르기까지, 보나파르티즘의 영향을 받은 사상들은 근대 세계사 속 하나의 이데올로기적 풍조로서 굳어졌음을 볼 수 있다. 사실상 현대의 독재자의 기준을 만든 인물이라고 볼 수 있으며[10][11], 후술하겠지만 독재자들에게 있어 나폴레옹은 동경의 대상이기도 하다.

혼란스러웠던 프랑스 초기의 공화정이나 무기력하고 퇴행적인 부르봉 왕조의 복고 왕정과 비교해 보면 나폴레옹 시대는 문제도 많았지만 분명 영광과 번영이 있었던 시대였다. 그러나 그 번영은 무수한 전쟁을 통해 주위 나라들에게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받아내며 일구어낸 것인 만큼 무작정 칭송하기는 곤란하다. 나폴레옹이 법전의 완성을 위시하여 여러 선구자적 정책들을 도입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 당시 사회의 난맥상은 단기간에 해결하긴 어려운 것들이었다. 결국 정부 재정의 문제나 당대 사회의 혼란들을 해결한 것은 그런 선구자적 정책이나 제도 개혁이 아니라 아이러니하게도 전쟁의 승리였다. 그 승리가 계속되었을 때는 아무 문제도 없어 보였지만 지속적인 전쟁은 착실히 국력의 소모를 불러왔고 전쟁에서 패배했을 때 그는 너무나 쉽게 몰락했다.

참고로 똑같은 구국영웅이라는 점에서 잔 다르크와 비교되기도 한다. 실제로 잔 다르크와 나폴레옹을 제도권 언론에서 비교한 자료도 많다. 차이점이 있다면 나폴레옹은 유럽 전역+북아프리카 까지 여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고 행정체계 등 군사 외적으로도 엄청난 영향력이 있어 잔 다르크보다 큰 족적을 남겼으나 대신 나폴레옹이 현재 프랑스 내에서 평가가 극과 극으로 갈리는 반면 잔 다르크는 아직도 프랑스 국민들에게 국민영웅으로 칭송받고 있으며 그녀의 반지가 반환되었을 때[12] 축하 행사를 매우 크게 열었고 오를레앙에서는 그녀를 기리기 위한 축제가 몇백년 째 매년 열리는 등 후한 대접을 받는 것과 대비된다.

5. 군사적 능력

전쟁의 신 그 자체(der Kriegsgott selbst).[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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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의 아서 웰즐리에게 한 기자가 찾아와 이렇게 물었다. "공작님은 나폴레옹을 워털루에서 이겼는데, 공작님의 군사적 재능이 나폴레옹보다 훨씬 낫지 않나요?" 웰즐리는 정색을 하며 이렇게 대답했다.
"현재에도, 과거에도, 언제라도, 최고의 전략가는 나폴레옹일 뿐이오."("In this age, in past ages, in any age, Napoleon.")[14]

나폴레옹의 전술적 능력은 동시대인들의 수준을 몇 수나 앞서 나갈 정도로 뛰어났고 다른 나라들은 그의 용병술을 분석하고 모방하기 바빴다. 특히 군사적 재능만 놓고 보면 동서고금을 통틀어 최고[15]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인물이며 그를 잡기 위해 프랑스를 제외한 전 유럽의 강국[16]들이 7차례에 걸친 동맹[17]을 해야만 했다. 애초에 유럽은 지리적, 역사적 배경 및 민족 구성 등 다양한 요인들 때문에 하나의 절대 강자가 헤게모니를 장악하기가 매우 매우 어려운 대륙이다. 그런 점에서 로마 제국 멸망 이후 오늘날까지 유럽 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패권을, 그것도 사실상 혼자 힘으로 구축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그의 군사적 능력이 뛰어나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포병장교는 수학적 계산능력과 탄도학 지식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똑똑하고 머리 회전이 빠른 인재들이 많았고 당시 프랑스 포병대는 다른 나라들에 비해 특히 그 엘리트적인 성격이 강한 편이었다. 그랑제콜 중에서 최상위에 속하는 에콜 폴리테크니크부터가 원래는 프랑스군 포병장교 양성기관이었다. 이 때문에 상당수의 포병 장교들이 혁명이 발생하자 외국으로 망명했지만 나폴레옹은 드물게도 프랑스 혁명에 적극적으로 투신한 케이스였다.

게다가 군사 유년학교와 사관학교를 거치며 제대로 훈련받은 엘리트 장교임에도 불구하고 병사들과 고락을 함께하기를 주저함이 없었기에 병사들 사이에서의 인망은 대단했다. 나폴레옹은 선천적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었고, 평생 아무리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휘하 병사들을 장악하는 데에는 거의 어려움을 느낀 적이 없었다. 이는 엘바 섬을 탈출했을 때 그를 체포하러 간 군대가 오히려 나폴레옹의 연설을 듣자마자 힘차게 황제 폐하 만세를 외치며 그의 휘하로 흡수된 사건에서 아주 잘 드러난다. 아무리 작전 입안이나 전술 수행능력이 뛰어나도 인간적인 카리스마가 없으면 지휘관으로 활약하기는 힘든데, 나폴레옹처럼 두 가지 재능을 다 갖추고 있는 사람은 정말 드물다.

포병장교 출신이지만 나폴레옹의 전술은 포병 / 기병 / 보병의 환상적인 조화와 협동을 이용한 것이 그 진수였다. 포병이 먼저 공격하고 기병이 치고 빠지며 유린하고 최종 타격으로 보병이 결정타를 날리는 전술을 선호했고, 이를 위해 병과 간의 칼로 잰 것 같은 타이밍 맞추기를 매우 중요시했다. 나폴레옹이 익힌 이러한 군사 기술과 제병 합동 전법의 재능은 다른 나라에 비해 선진적이고 효율적이었다. 거기다 병사들의 사기 또한 높았던 혁명기 프랑스의 병참 제도 하에서 카리스마를 갖춘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 대육군은 당시 유럽에서 당해낼 장군이 어디에도 없었고 이는 나폴레옹의 적들도 인정했다.

전술도 전술이지만 나폴레옹의 천재성을 진정으로 돋보이게 하는 건 전략 및 작전술에서의 능력이다. 현대적 의미의 작전술이라는 개념 자체를 정립한 것은 소련의 알렉산드르 스베친이지만 최초로 인지하여 작전술을 인식할 수 있게 만든 배경을 만든 것이 바로 나폴레옹이다. 작전술이란 전략지침에서 제시된 군사전략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유리한 상황을 조성하는 방향으로 일련의 작전을 계획하고 실시하며 전술적 수단들을 결합 또는 연계시키는 활동으로 쉽게 설명해서 전략을 달성하기 위하여 전술들을 결합하여 유리한 상황을 조성하는 것이다. 손자병법의 이상적인 조건인 이겨놓고 싸운다를 누구보다도 잘 실천한 사람이다. 즉 광범위한 정보를 수집하고 이 정보를 통해 적군의 이동 경로 및 작전 진행을 사전에 예측하고 부대를 빠른 속도로 이동시켜 유리한, 원하는 장소에서 적보다 많은 병력으로 적을 상대하는 것에 무서울 만큼 집착했고 또 잘해낸 것이 나폴레옹이 거둔 수많은 승리를 가능하게 했다.

사실 나폴레옹 이전에도 당연히 병법에서 굳이 아군이 적군보다 적은 수인데 싸워야만 하는 상황이라면 적을 분리시켜서 아군보다 적은 단위로 만들고 각개격파하는 걸 이상적인 상황으로 상정하긴 했다. 이를테면 사르후 전투천명제가 명나라의 10만 원정군이 4길로 나뉘어서 진격해오는 걸 보고 4만에 불과한 후금 군대가 바로 각개격파한 것처럼, 기회를 날카롭게 포착하고 과감하게 움직일 줄 아는 지휘관들은 이런 전술을 애용했다. 다만 나폴레옹은 단순히 적군이 알아서 분리되었을 때 바로 기회를 잡는 수준을 넘어서서 연락책, 기만책, 병참술 등 온갖 가능한 방법을 총동원해서 적군을 순식간에 자기 의도대로 분리시키고 틈을 만들어냈다. 게다가 나폴레옹의 부대는 적군 유인을 위해 흩어졌다가도 적군이 그 작전에 넘어가 서로를 지원하기 힘들 정도로 충분히 분리되었다고 판단되는 순간에는 즉시 분리했던 부대를 결집해서 결전을 벌여 각개격파하는 기술을 매우 잘 선사했다.

나폴레옹이 한 말로 알려진 "폐하께서는 항상 소수의 병력으로도 다수의 병력을 이기셨습니다."라고 부하가 감탄하자 "아니다. 나는 (내가 싸우는 곳에서는) 늘 다수의 병력으로 소수를 이겼다."라는 말도 여기에서 기인한다. 사실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은 영국, 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 등 대프랑스 동맹군에 비해 해당 전역에 동원한 전체 병력 자체가 처음부터 수적 우위를 차지한 적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위에 언급한대로 적군을 분산시키고 아군은 집중시키는 그의 능력으로 인해 직접적인 교전 상황에서만큼은 오히려 프랑스군이 수적 우위를 차지하게 만들었다. 나폴레옹 스스로도 "대군(大軍)에는 병법이 필요없다."라고 할 정도로 교전 상황에서의 수적 우위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굽시니스트 오만잡상툰

특히 나폴레옹의 병참술은 단순히 뛰어난 수준을 넘어서 전쟁의 패러다임을 바꾼 혁명에 가까울 정도였다. 물론 철도가 나오기 전까지는 외국으로 출정간 군대의 모든 보급을 자국에서부터의 보급만으로 지원해줄 순 없었기에 주둔한 외국 현지에서 사실상 약탈에 가까운 강제 징발에 대한 의존은 여전히 상당할 수 밖에 없었지만, 당시의 기술력과 행정력을 총동원해 보급소, 분배소를 설치하는 제도를 새롭게 정비하고 보급품과 수송 수단에 대한 생산 체계와 신기술도 중점적으로 지원해서 현지 징발에 대한 의존도를 최소화했다. 나폴레옹은 군대가 외국 원정을 나가서도 보급 열세 상황에 놓이지 않기 위해 가능한 모든 역량을 구사했고, 이는 수십년 후에 철도가 보급되면서 군대가 국가에서 주는 보급만으로 운용될 수 있는 시대를 여는 발판을 제공했다.

유럽 역사상 손꼽히는 난세였던 만큼 명장도 많았으며 당대에 전술적인 면에서 나폴레옹과 붙어볼 인물이 아주 없던 것은 아니다.[18] 하지만 전략과 작전술에서는 그를 따라갈 만한 인물은 사실상 없었다.[19] 심지어 그가 완전히 몰락하고 건강마저 잃었던 백일천하 때조차, 전략 및 작전술 단계에서는 아주 훌륭한 모습을 보였다. 웰링턴마저 나폴레옹에게 완전히 낚여 허겁지겁 병력을 집결했을 정도.[20]

다만 나폴레옹은 전술-작전술 단계까지는 불세출의 천재가 맞지만, 더 크게 봐야하는 대전략 차원에서는 실책을 제법 저질렀다. 나폴레옹은 대륙 봉쇄령 이후 벌어진 이베리아 반도 전쟁에서 웰링턴의 영국군과 게릴라들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상태에서[21] 러시아 원정을 감행하여 양면전쟁을 하는 무리수를 두었다. 이게 치명적인 실책인 것이, 나폴레옹은 이후 라이프치히 전투까지 모든 전투에서 이베리아 전선 유지를 위한 병력[22]을 항상 계산하며 전쟁을 치러야 했다.[23] 그리고 러시아 원정에서는 미하일 쿠투조프의 청야전술에 제대로 말려 그렇게 본인이 중시하던 보급이 망해서 끝내 실패해 버렸다.[24][25]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나폴레옹은 큰 전략적 실책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또한 워털루 전투의 패배 요인은, 이전까지 이루어졌던 병과간의 상호작용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게 인기 있는 분석이다. 당시 나폴레옹은 지병인 치질이 악화되어 하루 종일 엎드려 있어서 잠도 자지 못하여[26] 정상적인 지휘가 불가능했다고 전해진다. 여기에 , 뮈라, 마세나, 베시에르, 베르티에, 모르티에, 다부 등 나폴레옹을 보좌했던 오랜 측근들이 전부 빠졌다. 워털루 전투 시점에서 란, 베시에르, 베르티에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고[27] 뮈라는 나폴레옹을 배신하고 그의 몰락에 기여한 전력 때문에 합류를 거절당했다. 마세나는 나폴레옹에 합류하길 거부했고 모르티에는 신경통으로 쓰러졌으며 다부는 마르몽에게 배신당한 기억이 뼈아프게 남은 탓인지 전쟁장관직을 맡겨 파리에 남겨두었다. 이런 여러 악재로 인해 기병포병이 따로 놀게 되어, 기병은 사지로 돌격하고 포병은 같은 편의 기병에게 포격을 가하는 촌극이 연출되었다. 기병대를 맡은 미셸 네는 포병과의 협력 없이 혼자 돌격해서 기병을 격파하고 에마뉘엘 그루시도 나폴레옹이 원한 곳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싸우는 등 난장판이었다.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의 참모장이었던 술트참모로서의 재능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프로이센군을 추격, 섬멸하는 임무를 맡은 그루시는 처음부터 원수감이 아니었다. 사실 그루시만 정상적으로 움직였어도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이 압승을 거두었을 가능성이 높다. 애초에 전장에서 여러 해프닝이 있었지만 나폴레옹이 짜놓은 판대로 돌아가고 있었고 웰즐리조차도 이거 우리가 당했다라며 멘탈을 잃기 직전이었다.

기병을 지휘한 는 용맹하고 성실한 장군이었지만 기병의 천재였던 뮈라와 달리 기병 운용능력이 평범했다. 뮈라는 지성은 보잘것 없었지만 언제, 어디로 기병대를 돌격시켜야 할지를 정확하게 판단하는 탁월한 감각을 갖고 있어 기병 지휘에서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반면 네는 일선에서 부대를 이끄는 능력은 뛰어났지만, 전략적인 판단능력은 결여되어 있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게다가 워털루 당시의 네는 이중 배신을 한 입장상 평정심을 유지하기 힘든 상태였다. 아무리 나폴레옹이 제대로 활약을 못했다지만, 워털루 전투에서 뮈라가 나폴레옹의 기병을 다뤘다면 오히려 프랑스가 이겼을 거라는 의견이 큰 힘을 얻고 있다. 사실 워털루 전투에서도 끝내 주요 요충지를 함락시켜 아서 웰즐리가 후퇴를 고려하고, 나폴레옹은 샴페인을 터뜨릴 준비를 하는 상황까지 갔으나 그루시는 오지 않았고, 반대로 블뤼허 장군의 증원이 있었던 영국군에게 패했다.

나폴레옹은 이런 군사적 업적을 쌓기 위해 건강을 희생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폴레옹의 토막잠 전설에서도 알 수 있지만, 군무로건 공부로건 소싯적부터 워낙 목표를 이루기 위해 모든 것을 다 쏟아부으며 과로하는 스타일이었으며 성장 환경도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신경과민 증세도 있었다. 또 병사들과 고락을 함께하며 절대적 신임을 받은 것까지는 좋았지만, 당시 병영 생활이라는 것이 원체 개판이었던지라 열병, 위궤양과 탈장, 치질 등의 여러 가지 병을 앓아 사관학교 과정을 거쳐 소위로 임관했던 소년 장교 시절부터 내내 아프지 않을 때가 없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가 위암으로 사망한 것을 생각하면 체질적으로 위가 안 좋았던 모양이다.[28]

한편, 해군해전 쪽에 대해서는 완전히 문외한이었다. 해군 장교들에게 육군식 명령 체계를 강요하는 등, 해군 쪽 인사들에게 미운털이 단단히 박혔다. 당시 그가 내렸던, 해군의 특성을 완전히 무시한 명령을 보면 나폴레옹이 얼마나 해전에 무지했는지 알 수 있다. 당시 범선은 바람과 해류를 이용하여 움직이는 것으로, 육지에서처럼 "며칠 몇시까지 어디로 이동한다"같은 식의 명령은 바람이 따르지 않으면 실현이 거의 불가능한 것이었다. 게다가 당시 통신기술의 한계로 항해하는 쪽과 명령을 내린 쪽이 이런 함대의 현재 상황과 갱신된 명령을 서로 전달할 수 없었다. 허나 나폴레옹은 이를 알지 못했고 관심도 없었기에 육지에서처럼 "언제 어디까지 어느 함대가 이동한다" 같은 불가능한 명령을 수시로 내렸고, 문제가 생기면 제독 탓을 하기 바빴다. 이는 프랑스의 해전 참패라는 결과를 낳는다.[29]

이 시기 제조된 군함의 품질은 프랑스가 영국보다 우세한 경우가 많았으며 대포 등 양국의 무기 품질도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영국 해군이 프랑스 해군에 비해 압도적으로 월등했던 점이 딱 하나 있었는데, 바로 수병 및 장교들의 숙련도였다. 오로지 이 하나 때문에, 영국 해군이 군함 숫자나 전력이 열세인 해전이 수없이 많았으나 이를 이겨내고 승리를 밥 먹듯이 거둔 것이다.

현대의 다른 동력원이 있는 배를 다루는 것도 기술적 난이도가 높지만, 바람과 해류로만 이동하는 범선이라는 물건은 다루기가 극히 까다로웠다. 범선이 단순히 180도 선회를 하는 동작도 배의 각 부분을 담당하는 수병들이 바람과 해류에 맞추어 정확한 타이밍에 기계장치처럼 움직여야 했다. 영국 선원들은 이런 정교한 중노동의 반복을 통해 배의 조작에 숙달되었으나, 프랑스 수병들은 영국의 해상 봉쇄 때문에 재해권을 빼앗겨 군함이 항구에서 출항할 수 없었으므로 숙련도를 쌓는 것이 불가능했다. 설상가상으로, 당시에는 전 세계 어떤 국가도 예외없이 지상에 함대가 정박한 동안은 선원들을 해고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지상의 군함은 돈 먹는 애물단지일 뿐이라는 이 논리는 더욱 더 프랑스 해군의 질적 향상을 어렵게 하였다.

또한 제독들의 경우 그 질이 영국에 비해 크게 떨어졌는데, 프랑스 육군은 숙련된 장교진들 중 상당수가 프랑스 혁명에 동참해서 육군의 질이 유지된 것과 달리 프랑스 해군의 숙련된 장교들은 대부분이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자 외국으로 망명해버렸고, 신규 교육을 담당할 교관 자원조차 붕괴되어 버렸기 때문에 해군 장교진의 수준을 복구하는데에는 함대 재건 이상으로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이로 인해 프랑스 해군은 함대의 규모가 영국과 얼추 비슷하게 회복했음에도 실제 해전에서는 제대로 힘을 쓰지 못했다.

정리하자면, 이 모든 사정을 알지 못하거나 알아도 관심이 없던 나폴레옹은, 자기 자신이 해군에 문외한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휘하 해군 제독들에게 억지로 작전을 강요하여 프랑스의 해군을 말아먹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어린 시절의 나폴레옹은 사실 해군이 되고 싶어 했다

그리고 새로운 과학 기술을 통해 만든 '신무기'에는 큰 집착을 보이지 않았다. 얼리 어답터(early adopter)와는 거리가 멀었다는 소리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에 등장한 그 '신무기'들 중에는 몽상가들의 장난감 수준이 아니라 이후 전쟁의 개념을 크게 뒤바꾼 장비들도 있었음에도 그러했다. 한 예로 미국인 발명가인 로버트 풀턴이 기초적인 수준의 증기선, 잠수함을 소개하며 이것으로 영국 해군을 물리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나폴레옹은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결국 받아들이지 않았다.[30] 1782년 개발되어 정찰용 등으로 군에서 시험용으로 사용하던 비행 기구에 대해서도 단순한 유흥거리 정도로 여겼다고 한다.[31]

다만 보존이 용이하고 휴대가 간편한 전투식량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져서 최초로 병조림을 도입하기도 하였고, 훗날 통조림으로 발전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를 통해보면 보급 부문은 모르겠으되 자신의 특기인 전투분야와 그에 사용되는 장비에 대해서 보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단 이는 결점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 신무기가 제대로 된 야전운용 적합성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에 걸쳐 검증과 개선이 필요하다. 실제로 나폴레옹이 받아들이지 않은 무기들은 정석으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이후 50년(일부는 100년)에 이르는 시간이 걸렸다.

수많은 전쟁을 치러야 했고 자신의 군사적 능력을 통해 유럽의 패권을 유지하던 나폴레옹으로서는 언제 상용화될지도 모르는 신무기보다는, 다른 데다 자원을 투자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할 법 했다. 한정된 예산으로 최적의 편성을 하기 위해서는 무기의 성능 뿐만이 아니라 신뢰성과 병참이라는 측면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신무기는 실전이나 충분한 시험 운용으로 검증되기 전에는 신뢰하기 어렵고 대량 생산이 확정되어 단가가 낮아지기 전까지는 병참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더군다나 신무기에 대한 훈련도까지 합치면 비용이 장난이 아니게 들었기 때문에 오히려 더 전술적으로도 군사적으로도 쓸모가 없었다. 중국의 양무운동이 좋은 예인데 아무리 신병기를 만들고 가져왔다고 한들 무기는 아무리 개발을 해도 훈련이 필요하다. 그런데 신병기 생산에 훈련까지 합치면 비용이 어마어마하게 들기에 차라리 어느 정도 위력이 있고 전쟁을 속전속결로 끝낼 수 있는 구식취급 받는 무기가 오히려 더 쓸모가 있을 수 있다. 증기선은 외륜이 피격되기 쉬운데다 일단 외륜이 피격되면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으므로 스크류 추진장치가 발명될 때까지 주력으로 쓰이지 못했다. 로버트 풀턴은 나폴레옹에게 차이고 이번엔 영국으로 갔는데, 거기서도 제대로 된 실용성이 없단 이유로 물 먹고 신기술에 목말라 헤매던 미국에 가서야 어느정도 성공을 이룰 수 있었다. 프랑스가 1850년 마침내 증기 전열함을 도입하여[32] 일시적으로 영국에 쇼크를 주긴 했지만, 영국인들은 금세 그보다 더 많은 수의 증기선을 양산해냄으로써 결과적으로 프랑스와 영국의 해군 전력비는 더 벌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잠수함은 전략적으로 유의미한 병기가 되려면 증기선보다 더 긴 시간이 필요했다. 열기구 역시 여러가지 약점 때문에 당시 기술 수준으로는 실전에서 정찰용으로 쓰기도 어려웠다. (어딘가의 얼리 어답터랑은 확실히 다르지) 링크

게다가 나폴레옹이 개인적으로 관심이 없었다고 말하는 것도 어폐가 있다. 왜냐하면 이 시기에는 다른 장교들도 전부 그런 신무기 같은 것엔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새로 발명된 신무기가 몇 년만에 바로 전장의 흐름을 뒤바꾸어 놓는건 산업혁명 이후인 19세기 후반부터나 현실화되기 시작한 일이고,[33] 그 이전엔 기술의 발전 속도가 그다지 빠르지 않았다. 당장 예를 들면 나폴레옹이 막 임관하던 신참 장교 시절에서부터 그가 퇴역하는 워털루 전투까지 20여년 전장에서 구르는 동안 전쟁의 양상을 바꿔놓은 신병기 같은 건 존재하지도 않았고, 기존 병기들에 아주 약간의 성능 개량만이 있었다. 게다가 신무기의 개발 속도가 상당히 빨라진 이후로도 신무기의 가치에 대해 일선의 장교들이 무시하는 경향은 굉장히 빈번했다. 이를테면 1차대전 시기 장군들은 대부분 항공기를 그다지 고평가하지 않았다. 당시까진 항공기를 이용한 직접적인 전술 타격의 효과는 미비했으며 야포에 비해 훨씬 보조적인 역할에 그쳤기 때문. 항공 폭격이 전술적으로 두각을 드러낸 건 제1차 세계 대전으로부터 최소 20~30여년 후의 일이며, 당장 전투를 해야 하는 장교들은 해당 시점에서 눈에 보이는 효과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근미래에 굉장히 강력해질 거라는 가능성을 파악한 장교들도 몇 명 없었고, 그런 가능성을 파악했다한들 당장 내일의 전투와 이번 전쟁의 결과엔 아무 영향을 줄 수 없었다. 신무기가 언제든지 전장을 뒤집을 수 있으니 항상 긴밀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개념이 장교들에게 보편적으로 안착된 건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이다.

나폴레옹의 군사적 역량과 별개로, 나폴레옹 본인은 역사상 7대 명장을 꼽으며 그 인물들을 높이 평가했다. 시대순으로 마케도니아 제국알렉산드로스 3세, 고대 카르타고한니발 바르카, 고대 로마율리우스 카이사르, 스웨덴 제국구스타브 2세 아돌프, 프랑스 왕국앙리 드 라 투르 도베르뉴, 합스부르크 제국사부아 공자 외젠, 프로이센 왕국프리드리히 대왕이다.

6. 꼬마 부사관(Le Petit Caporal)

나폴레옹의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에 대해서는 말이 많지만, 웰링턴 군대에서도 "보니[34]가 프랑스 놈들과 함께 있으면 4만 명의 군대와 맞먹는다."고 논평했을 정도였다니 당대에는 인정받았던 이야기이다. 심지어 나폴레옹 이후 빈 체제를 정립한 메테르니히조차 "황제와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매혹당하지 않을 때가 없었다."고 고백할 정도였다. 로르 쥐노의 증언에 따르면 목소리가 상당히 근사해서 연설할 때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고 한다.[35] 확실히 다른 사람들을 휘어잡는 카리스마만큼은 정말 엄청났던 것 같다. 또한 황제가 되기 전에 보여준 정치적 행동들을 보면 자기 PR에도 역시 천재였다. 실제 아래와 같은 훈훈한 일화는 소문이 널리 퍼지도록 하고 나폴레옹 사생활 문서에 써있듯 말단 병사에게 주먹을 날려 코피를 터지게 하거나 시종들을 구타하는 행동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나폴레옹이 사람 다루는 법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일화들이 있다.
한 포병장교가 4년 동안 똑같은 계급을 달고 있는 것에 불만이 생겼는데, 나폴레옹이 군대 점검을 위해 한 요새를 찾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나폴레옹에게 승진을 청원하려고 결심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나폴레옹이 시찰을 위해 요새에 도착하였는데… 장교는 새삼스레 쑥스러워져서 나폴레옹에게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결국 나폴레옹이 떠날 시간이 되었다. 그제야 장교는 허겁지겁 달려가 떠나려는 나폴레옹을 불러세웠다.
장교: 폐...폐하, 폐하!
나폴레옹: 왜 그러는가?
장교: 저는 14년 동안 복무했으나 4년 동안 대위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내년에 있을 진급평가 때 명단에만 올려주시면...
나폴레옹: 알겠네, 소령.

그리고 나폴레옹은 다시 갈 길을 갔다.
참고로 이 일화는 나폴레옹이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회고록을 작성하며 직접 언급한 내용이다.

추가적으로 대위의 요청을 들은 나폴레옹이 갑자기 멈춰서더니, 수행원으로 데려온 소령의 계급장을 떼서 손수 달아주면서 "소령."이라고 더 짧게 말해주는 더더욱 폭풍간지스러운 이야기도 있다.

단순히 진급만 시켜서 계급 인플레를 일으키지도 않았다. 다른 일화에선 장교의 계급이 소위로, 복무 기간이 5년으로 바뀌고, 나폴레옹은 장기간 진급 못한 장교에게 "나도 7년 동안 소위였는데 이 자리까지 올랐다. 너무 불평하지 마라."하며 타이르는 식으로 180도 바뀐 내용도 있다.[36]
공훈을 세우거나 성과를 낸 부하에게는 아낌없이 칭찬을 하였으나, 잘못을 한 자에게는 무자비하게 갈굼을 시전하였다. 이는 사람이 많은 장소나 손님이 와 있는 자리에서 더욱 심했는데, 나폴레옹은 다른 이들에게 일종의 경고를 주기 위해 일부러 그런 장소를 택하는 것을 즐겼다. 하지만 다음날이 되면 그 질책했던 부하를 다시 불러서, 전날 자신이 그런 의도를 설명하며 친근하게 달랬다.
한 번은 숙영하는 야전 부대를 순시하던 중 졸고 있는 초병을 보았는데 깨우는 대신 자기가 잠깐 그 자리를 맡아 보초를 섰다. 잠시 후 초병이 깨어났지만 그를 질책하는 대신 조용히 자리를 돌려주고 돌아갔다.
초병의 중요성은 총사령관이라도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자리라는 것을 몸소 보여준 셈이다. 더불어 지친 병사를 대신해 임무를 수행했다는 이미지로 장병들에게 큰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조지 워싱턴도 비슷한 일화를 가지고 있다.
오스트리아 전쟁 당시, 영국을 침공하기 위해 배치된 군을 시찰하면서 병사 및 하급 장교들을 일일이 만나며 신상명세를 확인해 주고 고충을 들어주기도 했다. 그러니까 "여기서 만나다니 오랜만이네. 자네는 지난 이집트 원정 때 피라미드 전투에서 용감하게 싸운 용사가 아닌가? 그런데도 훈장을 받지 못하다니 내 잘못이네. 당장 훈장을 수여해 주겠네!" 하는 식. 이 덕분에 장병들의 사기 및 나폴레옹에 대한 충성도는 크게 올랐다.

물론 나폴레옹이 처음부터 이런 내용들을 기억했을 리는 없고 사전에 장병들을 뒷조사했다. 그렇다고 해도 평소 장병들의 나폴레옹에 대한 인망이 높지 않았다면 나폴레옹의 이런 행사가 진정성을 얻긴 힘들었을 것이다. 원래부터도 군대의 신임이 대단했기 때문에 이러한 이벤트도 효과가 있을 수 있었던 것
장 란 원수와는 너, 나 할 정도로 말을 낮춘 사이였는데, 직설적인 편이었던 란 원수는 황제에게 화가 날 때마다 "내가 저런 매춘부에게 애처로운 열정을 품었으니 죽어도 싸지!"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그래도 나폴레옹은 슬쩍 자리를 피한 뒤, 그 다음 날이면 언제 싸웠냐는 듯 사근거렸다고 한다. 심지어 나폴레옹은 '병사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면 엉덩이에 입이라도 맞추겠다'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37]
조아킴 뮈라 원수와도 너, 나 할 정도로 말을 낮춘 사이였다. 조아킴 뮈라는 185cm에 달할 정도로 키가 컸으며 힘은 엄청 장사라 나폴레옹이 맨 처음 출세하게 된 계기가 된 왕당파, 즉 부르봉파의 반란을 진압할 때 혼자 대포를 짊어지고 뛰었을 정도로 괴력을 갖고 있었다. 뮈라는 나폴레옹 측근 중에서도 눈에 띄게 용맹하여, 각종 전투에서 작전을 성공시킨 공로는 물론 나폴레옹의 목숨을 구한 적도 많았다.

그 때문에 나폴레옹은 자신의 여동생 카롤린을 뮈라의 아내로 내주었다. 무엇보다 뮈라가 왕 하고 싶다니까 나폴레옹은 바로 나폴리에서 왕 노릇 잘 하고 있던 자신의 형인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돌연히 스페인으로 옮겨버리고 뮈라를 나폴리의 왕으로 봉해줬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측근 서열에서 뮈라를 자신의 형보다도 우위에 뒀다. 이 정도면 말 다했다.

정작 나폴레옹이 뮈라를 좋아해서 뮈라에게 시집보낸 그 여동생 카롤린은 뮈라에게 자신의 오빠를 배신하고 오스트리아로 붙으라고 꼬드겼다. 나폴레옹 자신은 뛰어난 군인이자 군주였으나, 그 집안은 이토록 콩가루였던 것이다.[38]
1806년 아우어슈테트 전투가 끝난 직후 승장인 루이니콜라 다부 원수가 보고를 위해 나폴레옹을 찾아왔다. 승리를 치하하는 나폴레옹에게 다부는, 자신의 는 나폴레옹의 것이라고 강조했다. "어떤 경우에라도 기꺼이 폐하를 위해 제 피를 흘리겠습니다. 폐하께서 저를 인정해주시고 따뜻함을 베풀어주시는 그것으로 저는 족합니다." 후에 다부는 이날의 공로로 아우어슈테트 공작이 되었다.[39]
베두아예르 남작이 아들 이야기를 하면서 나폴레옹을 즐겁게 한 일화가 있다.#
나폴레옹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출신이자 자신의 휘하 원수 중 하나였던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를 대할 때 프랑스군 원수가 아닌 폴란드의 왕으로 대우해 줬다. 비록 포니아토프스키가 나라를 빼앗기고 독립 운동을 하는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은 포니아토프스키에게 폴란드를 되찾아주겠다고 했으며, 포니아토프스키를 항상 폴란드 왕이라고 불렀으며, 프랑스군 내부에서 자신과 똑같은 의전절차로 예우해 줬다. 이에 감동한 포니아토프스키는 나폴레옹을 위해서라면 죽을 힘을 다했고, 결국 나폴레옹을 위해서 죽었다.
라스 카즈의 회고록에는, 세인트헬레나 유배 시절 나폴레옹을 수행한 시종들이 나폴레옹의 총애를 다투는 바람에 나폴레옹이 대놓고 "내가 자네들 아내도 아니고, 자네들과 내가 잠을 잘 수는 없지 않은가?"라고 투덜거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르노블로 진군하던 나폴레옹의 병력이 길가에 제5보병연대가 포진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지역 주민들은 "신경쓰지 마세요. 쏘지 않을 겁니다."라고 말했으나 측근들은 좀 걱정된 표정이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우리가 속았는지도 모르겠군. 뭐 상관없지, 전진!"이라는 말과 함께 맨 앞으로 나아가 제5보병연대를 정면으로 바라본 뒤 이렇게 말했다.

"제 5 보병연대여! 짐을 알아보겠는가?"
"예, 폐하."
"짐이 자네들의 꼬마 부사관(별명)이다. 자네들 중 짐을 쏘고자 하는 자가 있다면 여기 짐의 가슴이 있다!"

이에 병사들이 "황제 폐하 만세!"를 외치며 백색 휘장을 떼어내고 황제의 손을 만지기 위해 달려나갔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이제 혼자 남겨진 그들의 지휘관을 향해 나아갔다.

지휘관 레자르는 나폴레옹의 앞에 항복의 표시로 칼을 던졌다.

"무슈 레자르, 짐은 자네를 잘 아네. 자네를 대령으로 만든 것이 누구인가?"
"바로 폐하입니다."
"그러면 그 전에 자네를 중령으로 만든 것은 또 누구인가?"
"그 역시 폐하입니다."
"그러함에도 자네는 짐과 싸우기를 원했는가?"
"저는 그저 명령을 받았을 뿐입니다."

이에 나폴레옹은 레자르의 칼을 돌려주고 항복한 제 5연대를 규합해 그르노블로 전진을 재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백일천하 항목 참조. 영화 워털루와 프랑스 드라마에서 재현한 장면[40][41]
독일·폴란드 원정 중 폴란드에서 보급에 징발까지 제대로 안 돼서 병사들이 굶주리고 있었다. 그런데 병사 중 하나가 용감하게도, 대열 옆을 지나가던 나폴레옹을 향해 폴란드어로 "Papa, kleba!(아빠, 빵 주세요!)"하고 외치자 나폴레옹도 폴란드어로 "Nie ma!(없어!)"하고 답했다는 일화가 있다. 병사들은 빵 터져서 불만이 좀 수그러들었다.

이 일화는 나폴레옹의 시종인 콩스탕의 회고록에서 나온다.
나폴레옹이 병사들이 끓인 수프로 함께 식사를 하려는데 머리카락이 나오자 슬쩍 치우고 다 먹은 후 한접시 더 달라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두번째 접시에서도 머리카락이 나왔다고... 이 역시 콩스탕의 기록이다. 이 밖에도 나폴레옹은 종종 병사들과 함께 식사를 한 일이 있었다. 당시 장교들은 병사들과 겸상을 하는 것은 물론이요, 심지어 뭔가를 먹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금기시되어 있었다.[42] 즉 나폴레옹이 스스럼 없이 병사들의 식사 자리에 어울리며 그들의 음식을 함께 먹은 건 굉장히 파격적인 행위다.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고 미국으로 망명하려다 영국 해군에게 걸려서 전열함 벨레로폰에 탑승하여 잠시 이곳저곳을 떠돌게 되었다. 배의 선원들은 '코르시카의 괴물'로 불리던 그를 보고 처음에는 경멸의 눈초리를 보냈지만, 이윽고 황제의 아우라에 감화되어 그가 갑판에 나올 때마다 진심으로 존경을 표하며 인사를 했다. 나폴레옹은 해병대원들을 직접 사열해보기도 하고, 영국식 집총자세와 프랑스식 집총자세의 차이점을 설명하기 위해 머스켓을 들고 시범을 보이기도 했다. 황제가 병사들과 격식 없이 어울리는 것을 본 영국인들은 "저 분은 항상 저러시냐?"며 매우 놀라워했다.
나폴레옹이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가기 직전 영국의 플리머스 항구에 잠시 머물게 됐다. 그런데 황제가 플리머스에 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그를 보려고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측근들은 영국인들이 폭동을 일으키기라도 할까봐 걱정했지만, 대중들은 갑판에 등장한 황제를 향해 모자를 벗으며 인사를 하고, 환호를 하며 경의를 표하였다.
아우스터리츠 전투 바로 전날 밤, 나폴레옹은 밤에 자는 병사들이 깰까봐 횃불 하나 없이 시찰을 돌고 있었다. 그런데 황제가 자신들의 텐트 옆을 지나가는 것을 본 일부 병사들이 짚으로 횃불을 만들어 나폴레옹을 보러 나왔다. 이렇게 병영이 어수선해지자 다른 부대원들도 횃불을 들고 황제의 모습을 보러 나오는 통에 나폴레옹의 주변은 수많은 병사에게 둘러싸였다. 그때 누군가가 '오늘이 황제 폐하께서 즉위하신지 1주년 되는 날이다!'[43] 라고 소리쳤고 이윽고 병사들은 '황제 폐하 만세!' 를 외쳐댔다. 이 광경은 건너편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 진영에서도 보였다고 기록되었다. 나폴레옹도 훗날 이 일화를 '내 일생 최고의 순간'이었다고 말할 정도로 감격스러워 했다.
사랑하는 아내여, 우린 뙤약볕 아래 골프주앙에 상륙했소. 굉장해. 황제 폐하가 가는 어디든 사람들이 달려나와 그 앞에 무릎을 꿇는다오.
황제 폐하를 저지하기 위해 파견된 부대들도 그를 보자 감동에 못 이겨 우리와 합류했네. 황제 폐하를 따라 전투에 임할 것이오. 황제 폐하 만세! 프랑스여, 영원하리라.
- 나폴레옹을 따라 엘바 섬까지 갔던 44세의 근위대원 피에르 랑텔름이 그의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워털루 전투에서 전사했다.

친근감의 표시로 상대방의 를 비틀어 꼬집는 행동을 했다. 사적으로 친한 사람이나 전투에서 공을 세운 부하들에게만 해주던 거라서, 이걸 당한(?) 사람들은 그 자체를 영광으로 인식했다.#
여러 일화에서 나폴레옹은 부사관으로 불린다. 당시 사관학교에서 생도라는 별도의 계급이 아니라 실무 병사, 부사관의 계급을 부여 받아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44] 과거 그의 사관학교 일화와 더불어 1차 이탈리아 원정 당시 로디전투에서 직접 소규모의 부대를 이끌고 승리를 쟁취한 실사례, 평소 그의 행보가 맞물려 병사들이 긍정적인 의미로 별명을 붙여준 것이다.

7. 외교력

나폴레옹의 몰락은 결국 전 유럽을 적대하게 만든 것이 원인이었기 때문에 나폴레옹의 외교 능력에 대해 혹평하기도 하지만, 역사적 맥락을 따지자면 나폴레옹이 전 유럽을 적대한 것은 나폴레옹 개인의 성향에서 불거진 문제가 아니었다. 애초에 프랑스 자체가 프랑스 혁명을 일으킨 이래로 절대주의 왕정 체제가 유지되고 있는 전 유럽의 구(舊) 체제와 사생결단을 낼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1제국도 어디까지나 프랑스 혁명을 통해 탄생한 프랑스 공화국을 계승한 국가였고, 전쟁을 통해서라도 절대왕정을 분쇄하고자 했던 프랑스 제1공화국의 이념과 외교 구도를 계승했기에 주변 국가들도 그렇게 인식해서 관계가 좋을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폴레옹의 전략은 근본적으로 1.)프랑스 혁명을 통해 탄생한 공화국과 그 공화국을 승계한 자신의 프랑스 제국이 기존 유럽 질서와 화해하는 것. 2.)유럽 질서를 프랑스의 주도하에 재편하는 것이다. 실제로 나폴레옹은 가장 강력한 적이었던 영국과도 통령 취임 직후 계속 화해를 시도했고, 실제로 아미앵 조약을 통해 화해를 이루어내었다.[45] 그런데 화해 조약이 아직 유효하던 중에서도 영국은 구(舊) 부르봉 왕족들을 계속 후원하고 나폴레옹에 대한 중상모략을 계속했으며, 나폴레옹에게 접근하는 러시아 제국의 궁정 혁명을 지원 또는 방조하여 러시아의 반(反) 프랑스 정책을 고착화시킨다. 이후의 일이지만, 프로이센과의 관계에서도 나폴레옹은 가급적 전쟁을 피하려 했고, 가장 큰 실책으로 꼽히는 러시아 원정조차도 러시아 제국과의 화평을 계속 시도한 끝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일차적인 문제는 영국의 대륙 정책에 있었다. 해상대국으로서 당대 최강을 자부하던 영국으로서는 덩치는 크지만 후진적이고 아직 경제력으로 상대가 되지 않는 러시아, 약소국으로 추락한 스페인, 자기들이 보기에는 지역 강국들의 군집체에 불과한 오스트리아, 무섭게 치고 올라오고 있지만 아직은 체급이 안되는 프로이센이나 다 망해가는 오스만 제국은 경계할 대상이 되지 않았지만, 3천만에 육박하는 인구를 보유하고 있으며 당대 유럽 문명을 선도하는 입장에 있던, 게다가 기존 질서에 도전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까지 확보한 프랑스라는 강적이 유럽 대륙의 질서를 주도하는 것을 무슨 일이 있어도 허용할 수 없었다. 프랑스가 유럽 대륙 전체의 헤게모니를 확보하고 가공할 인적 자원을 활용하여 영국과 맞서게 된다면, 영국으로서는 국가의 존망이 걸린 문제였던 것. 실제로 불완전한 상태에서 행해진 대륙 봉쇄령에 의해서도 영국이 겪은 고생은 상당한 수준이었다.[46] 이러했으니, 안 그래도 강력한 적수인 프랑스에 나폴레옹 같은 무서운 녀석까지 나타난 상황을 영국으로서는 좌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영국은 자신들이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유럽 대륙을 고만고만한 강국들이 병립하면서 균형을 유지하는 구도로 유지해야 했는데 그 균형을 깨뜨릴 유일한 잠재력을 지닌 프랑스, 그리고 그 프랑스를 이끌어 다른 유럽 국가들을 압도할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지닌 지도자라면, 나폴레옹이 아닌 다른 누구라도 타도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즉 나폴레옹이 아닌 누가 지도자가 됐더라도 (그리고 어떤 외교적 노력을 기했더라도) 영국은 프랑스를 몰락시키려 들었을 것이다. 영국은 이후에도 러시아가 강성해져 전방위로 남하 팽창을 시도하자 그걸 막기 위해 크림전쟁, 아프간전쟁, 러일전쟁 지원 등으로 막아내는데 국력을 모조리 투사하는 그레이트 게임을 벌이기도 하고, 독일이 유럽내 최강 육군을 만들고 해외 식민지까지 노리자 오랜 앙숙이었던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독일을 견제하기까지 하는 등 항상 유럽 대륙의 최강국을 견제한다는 외교적 노선을 유지했다.
또한 유럽의 다른 제국들에게도 프랑스 제국에 의한 유럽 질서 재편은 절대적으로 막아야 할 사태였다. 프랑스 혁명은 시민세력에 의한 구(舊) 질서의 붕괴라는 당대 기준에서는 묵시록적인 사태의 실현이었고, 그런 프랑스 제국을 인정한다는 것은 자국 내에 있던 시민 세력들에게도 왕조 타도의 명분을 쥐어주는 행위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여기에 이탈리아와 나폴리, 네덜란드, 베스트팔렌, 스웨덴, 나아가 스페인에 이르기까지, 보나파르트 일족이나 그 인척들을 왕으로 앉히기 시작한 나폴레옹의 방식도 반감을 샀다. 물론 그건 원래 타오를 불에 기름 끼얹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전쟁의 원인은 유럽이 나폴레옹을 일방적으로 공격한게 아니라, 나폴레옹이 오히려 전쟁을 원해 도발한 것도 있다. 혁명전쟁 중후반부에는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과 타협하고 휴전을 원한 유럽국가들이었지만, 프랑스의 무분별한 확장 및 약속 불이행, 혹은 용납할 수 없는 요구로 인해 발발한 전쟁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나폴레옹은 처음에는 이러한 복잡한 국제 사정을 잘 인지했고 이를 충분히 고려한 결정을 내리려고 했다. 하지만 전 유럽을 상대로 계속해서 이겨버리자 교만해져서 자신과 프랑스 제국의 역량을 과신하게 된다. 무엇보다 프랑스 혁명을 거치며 정립된 프랑스군 특유의 현지 보급 및 프랑스 제국의 경기 회복을 위한 가혹한 배상금과 무자비한 약탈 정책이 문제였다. 그리고 이 정책의 가장 큰 피해자가 바로 훗날 프랑스의 원수가 되는 프로이센이었다. 프로이센은 나폴레옹의 약탈로 1,000억원대의 손해를 입었는데 2조 가량을 합법적, 공식적으로 뜯겼고 결국 프랑스의 속국 수준으로 떨어지게 된다. 이 때문에 처음에는 나폴레옹을 구체제를 타파하고 자유를 전파하는 영웅으로 환영하던 주변 나라들의 시민 세력들이나 학생들이 결국 나폴레옹에게 등을 돌리게 된 가장 큰 원인이다.

여기에 군주로서 그렇게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던 자신의 형, 동생과 친척들을 여러 나라의 왕으로 앉히는 무리수를 감수했던 것도 한몫 했다.[47] 이런 짓을 시도하다가 당초 프랑스 제국에 우호적이었던 스페인도 결국 적으로 만들어버렸고,[48] 러시아 원정은 그런 나폴레옹 체제의 모순이 한꺼번에 폭발한 것이나 다름없다. 낙하산으로 왕 자리에 앉힌 친인척들이 능력이 뛰어나고 선정을 펼쳤으면 유럽 대륙이 하나의 프랑스 체제로 단결해 기능하면서 나폴레옹의 시대도 연장되었을지 모른다.[49] 하지만 애초부터 나폴레옹이 제대로 지원도 안 하고 허수아비로 만들어 버린 조제프 보나파르트[50] 네덜란드 시민들에게도 호평받았던 루이 보나파르트 정도를 제외하면 하나같이 능력 없고 부패한 인물들 투성이어서 해당 국가의 사람들이 나폴레옹과 프랑스 제국에 대한 적개심을 품게 한다. 스웨덴 국왕으로 임명한 베르나도트 원수가 칼 14세 요한이 되어 오히려 등에 비수를 꽂은 것은 덤이다.

통령 취임 이전부터 이집트 원정 등으로 나폴레옹 개인의 군사적 야망이 지나친 수준이었다고 주위에 인식되었던 것도 문제. 원래 이집트 원정의 목적은 인도에 압력을 가해 인도를 비롯한 중근동 토후들의 반영 정서를 자극해서 영국을 뒤흔드는 것 정도였는데, 프로파간다로 알렉산더 대왕을 비롯한 고대 정복자들의 이름을 끌어다 쓰는 바람에 실제 이상으로 부풀려진 측면이 크다고 볼 수 있다.

8. 정권관리 능력

일찍이 루이 16세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에게 처단당한 것을 나폴레옹은 알고 있었고[51] 이는 국민들에게 생각할 시간을 줬기 때문이라고 나폴레옹은 생각했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징병제를 도입해서 루이 16세를 때려잡는데 가담했던 민중들을 싸그리 군대에 때려박아 놓았고 계속되는 전투로 국민들이 불만을 가질 틈 자체를 아예 없애버렸다.

나폴레옹은 전투에서 이기든 지든 간에 백성들을 계속 전쟁터로 몰아넣음으로서 불만을 가질 틈을 아예 없애버려서 시민혁명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국가구조로 만들어 놓았다. 이게 비슷한 방법으로 국민들의 불만을 잠재우려 했던 니콜라이 2세와 공통점이기도 하지만 차이점이기도 했는데 통치능력과 군사적 재능 양쪽 모두 천재 수준인 나폴레옹은 이 수법이 먹혔지만 군사적 재능도 젬병이고 통치능력도 꽝인 니콜라이 2세는 이게 전혀 먹히지 않아 러시아 혁명을 얻어맞고 퇴위 후 총살당했다.[52]

9. 해외의 평가

나폴레옹에 관한 해외 각국의 평가는 갈린다. 그 외에도 이집트 및 유럽 각지에서 문화재 약탈자라는 악명도 얻고 있으며 때문에 모나리자를 약탈했다는 오명을 쓰기도 했다. 정작 모나리자는 프랑스 르네상스의 아버지라고 불릴 만한 문화군주인 프랑수아 1세의 초청을 받아들인 다빈치가 프랑스에서 말년을 보내다 눈을 감으면서 자신의 말년을 편안하게 후원해 준 국왕에게 감사하는 의미로 바친 것이다.

9.1. 스페인, 포르투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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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코 고야의 《마드리드, 1808년 5월 3일

이웃나라인 스페인, 포르투갈이베리아반도에서의 평가는 거의 악마 수준이다. 한국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받는 평과 비슷하다. 이베리아 반도 전쟁으로 자국에 지옥을 초래했기 때문. 나폴레옹과 격전을 치른 나라들은 많지만 반도 전쟁의 경우는 공방 양자 모두에게 매우 잔혹한 양상으로 진행되었다. 정규전 보다는 게릴라전 양상으로 진행되다 보니 보복과 보복이 끊이질 않았다. 게릴라라는 명칭부터가 이 전쟁에서 비롯되었다. 가령 스페인군에 점령당한 야전병원을 프랑스군이 나중에 다시 탈환한 적이 있는데 환자와 의무병들이 배가 갈린 채 발견되기도 했다. 자세한 내용은 이베리아 반도 전쟁 문서 참고.

현대에 와서야 이베리아 반도 전쟁 당시 군사 피규어도 팔리고 프랑스군 리인액트먼트도 하는 등 표면적으로야 유럽 전반의 자유주의적 풍토에 희석되었다고 하지만 마드리드 시내의 프라도 박물관 옆에 있는 역대 스페인 군주가 대관식을 치르는 교회인 성 예로니모 성당부터 나폴레옹 전쟁 시기 탄약창으로 쓰이다 박살난 걸 재건축했을 만큼 이베리아 반도 전쟁 당시 스페인이 입은 피해는 스페인 역사에 진하게 녹아 있다. 상술한 프라도 박물관에서 프란시스코 고야의 그림을 보며 성장하고, 나폴레옹 전쟁때 한번 털리거나 박살난 사적만큼은 진짜 갈리시아에서 카탈루냐까지 그 지역색 강하고 서로 단합 못 하는 걸로 유명한 스페인인들을 묶어주는 집단적 기억인데 악감정이 없을 리가 없다. 나폴레옹의 침략 당시 대불항전은 당시 스페인의 자유주의자, 보수파, 세속주의자, 가톨릭 교회, 카스티야인, 카탈루냐인 모두 합세하여 싸웠던 유산이고 베니토 페레스 갈도스 같은 스페인의 문호뿐만 아니라 프랑스인 빅토르 위고마저도 경의를 표할 만큼 치열했던 사라고사 공방전 같은 사건은 스페인 근대사의 집단적 기억에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스페인 본토에서는 아예 이베리아 이베리아 반도 전쟁스페인 독립 전쟁(Guerra de independencia)라고 부를 만큼 중요한 사건이고 현대까지도 은연중에 모습을 드러내는 뿌리 깊은 반불 감정의 핵심을 차지하고 있다.

나폴레옹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아프리카라고 깐 적이 있다. 정확히는 "피레네 산맥 아래에 있는 나라들은 유럽이 아닌 아프리카다."[53] 이 말에 스페인은 폭발했다. 참고로 그 당시 말하는 아프리카는 우리가 아는 아프리카가 아닌 북아프리카, 아랍을 말한다. 즉 이 두 나라는 유럽이 아니라 아랍이라고 깐 것. 이건 단순히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을 후진국이라 깐 것을 훨씬 넘어서는 모욕이다. 스페인은 이슬람에게 정복당한 적이 있으며, 그 후 700년에 걸친 성전 레콩키스타로 아랍인을 쫓아냈고 이것이 곧 스페인 국가 정체성의 시작점이고 스페인인들의 자부심인데 그 감정을 건드렸던 것이다. 대충 한국으로 치환하자면 한국? 일본제국과 같잖아?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

9.2. 이집트

1798년 이집트 알 이즈하르 마스지드에서 무장반란 진압 도중 4천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사살되었기에 이집트에서 그에 대한 평가는 학살자 및 침략자다. 이런 사태가 난 이유는 나폴레옹은 이집트에서 무리한 징발을 요구하고 심지어 마스지드에 세금까지 매겼기 때문이다. 결국 현지 아랍인들의 저항과 적군에 대한 협력으로 이집트 주둔 프랑스군은 보급에서도 곤란을 겪었다. 나폴레옹은 자신이 오스만 제국의 술탄을 대신하여 역적 맘루크를 토벌하러 왔다고 선전했고 여차하면 자신과 부하들이 무슬림으로 개종할 수도 있다며 립서비스를 하며 이슬람 율법학자들을 비롯한 현지 지도층을 포섭하려 했지만[54]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고 영국의 해상 봉쇄로 고생을 했고 팔레스타인 원정에서 영국 해군의 방해와 중포의 부재로 결국 오스만의 견고한 요새를 뚫지 못하고 점령한 팔레스타인 지역을 돌려주고 이집트로 돌아온 다음 알렉산드리아에 상륙하는 수만 명의 오스만군을 바다로 처넣어 지위를 굳건히 했다. 하지만 한술 더 떠 페스트까지 발생한데다가 프랑스 내부에서의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자신의 부재로 약화되는 것을 감지한 나폴레옹은 부사령관에게 이집트를 맡기고 겨우 2척이라는 적은 수의 함선을 타고 몰래 프랑스로 돌아갔다. 남은 프랑스군은 1년 반이 넘게 견뎠으나 계속되는 오스만군과 이집트 저항군, 영국군의 공격과 질병, 보급 문제로 결국 1801년 전면 항복했다. 덕분에 로제타석을 비롯한 문화재가 영국 손에 들어갔으므로 어딜 봐도 이집트 입장에서 좋게 볼 구석이 없다.

1989년 4월 21일, 28일, 5월 4일까지 3부작으로 KBS-1에서 밤 10시에 더빙 방영한 <나폴레옹과 조세핀>이라는 드라마가 있었는데 이 드라마에선 심지어 오스만 포로들이나 민간인들에게 프랑스군이 총을 겨누며 스스로 바다로 들어가게 하여 빠져 죽게 하는 장면도 나온다. 여기서 한 이집트인 떡대 사내가 프랑스군 두엇을 잡고 같이 물귀신이 되자고 투신해 같이 동귀어진하기도 한다.

9.3. 아이티

아이티에서의 평가는 좋지 않다. 나폴레옹의 매제 르클레르가 죽은 후 지휘권을 이어받은 로샹보 장군[55]아이티 혁명을 잔혹하게 진압했기 때문이다. 다만 나폴레옹이 아이티의 흑인들을 다 죽이려 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나폴레옹이 원하는 것은 아이티의 노예제를 복구하는 것이었지 인종청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카리브계 작가 클로드 리브가 주장한, 가스선을 이용해서 흑인노예들을 대량학살했다는 설 또한 학계에서는 인정하지 않고 있다. 물론 프랑스군에게 많은 이들이 학살당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프랑스군은 풍토병으로 많은 군인들이 죽어나갔고 아이티인들은 악마같이 재앙을 내리던 전염병이 이번에는 침략자를 죽여주네~라고 기뻐했다.

9.4. 영국, 러시아

러시아영국에서는 그런 엄청난 적을 이긴 우리는 더욱 위대하다는 논리의 설파를 위해 치켜 세워주면서도 으로 묘사하고 있다. 와키자카 야스하루임진왜란을 다루는 사극이나 영화에서 띄워주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특히 영국에서 아기들 자장가에서 "망태 할아버지" 급으로 묘사하고 당시 러시아 성직자들은 나폴레옹을 적그리스도의 화신으로 표현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하지만 영국의 당대의 지식인들은 나폴레옹을 높이 평가했다. 나폴레옹이 사망한 직후 《아이반호》를 지은 스코틀랜드의 국민 작가 월터 스콧이 지은 《나폴레옹전》에서는 나폴레옹이 국가를 안정화하고 자국에 진보적 개혁 조치들을 취한 것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후 나온 토마스 칼라일 같은 경우는 아예 나폴레옹을 들어 영웅사관을 정립했을 정도다. 또 《제인 에어》로 너무나 유명한 영국의 전설적인 여성 작가인 샬럿 브론테도 '웰링턴 공작'을 매우 존경하는 것과는 별개로 '나폴레옹'도 매우 존경해 나폴레옹이 세인트헬레나에서 비극적으로 죽은 것을 애도하는 에세이를 쓰기도 할 정도로 열렬한 나폴레옹의 팬으로 그녀가 벨기에에 있는 브뤼셀의 여학교에서 자신의 동생이자 《폭풍의 언덕》의 작가로 더 이상의 말이 필요 없는 에밀리 브론테와 같이 유학했을 시절 학교의 교장이었던 '콘스탄틴 에제'는 그녀가 나폴레옹을 매우 존경하는 것을 알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나폴레옹의 유품을 그녀에게 주었다고 한다. 그와 맞서 싸운 영국 장군들이 알아서 띄워주는 지경이다.

코난 도일이 쓴 《여섯 개의 나폴레옹 석고상》에서도 극중 영국인들도 나폴레옹을 존경하여 석고상을 가지고 있다는 게 묘사되는 게 허구 속 이야기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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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모자를 본 딴 나폴레옹 케이크
레프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보면 나폴레옹이 침략한 러시아에서도 나폴레옹 애호가들이 상당히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56]1812년 서곡이나 나폴레옹 케이크처럼 나폴레옹을 물리친 것을 기념하기 위한 음악이나 요리도 있지만 나폴레옹의 이름을 딴 보드카가 고급 보드카로 소문나 불티나게 팔리는 등[57] 인기가 아직까지도 식지 않았다. 프랑스 문화가 러시아에서 인기가 많은것도 한몫한다.

9.5. 덴마크

프랑스의 동맹국이었던 덴마크에선 애증의 대상이다. 물론 영국의 잘못도 있는 걸 감안해도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해 덴마크도 의도하지 않은 전쟁에 휘말렸고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패전국 신세가 됐기 때문이다. 다만 덴마크 일반인들 중에는 나폴레옹에게 강한 매력을 느끼고 흠모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의 아버지가 그 일례이다.

9.6. 폴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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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수도 바르샤바에 있는 나폴레옹 동상과 헌화하는 폴란드 의장대
폴란드에서는 구세주 수준의 평가를 받고 있다. 사실 프랑스인 입장에서는 혁명의 의의를 없앴다던가 하는 비판 의견이 있으나 폴란드 입장에서는 알 바 아니기도 하고 나폴레옹이 자신들의 조국갈기갈기 찢어버린 오스트리아 제국프로이센 왕국러시아 제국을 줘패고 바르샤바 공국까지 세워줬기 때문이다. 비록 바르샤바 공국은 10년[58]도 지속되지 못한 괴뢰국에 불과했지만, 폴란드인들에게 독립의 희망을 가지게 해줬다. 그래서 그 누구보다 프랑스 제국에 적극 협력했고 제일 충성했다. 나폴레옹은 폴란드를 말 잘 듣고 부려먹기 좋은 빵셔틀 수준으로 여겼을지도 모르지만 나폴레옹이 폴란드를 토사구팽할 생각을 하기도 전에 나폴레옹이 먼저 몰락해서 알려지지 않았고 나폴레옹은 자신의 폴란드 장군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를 자신과 같은 동등한 위치의 폴란드 군주로 대해주었기 때문에 빵셔틀로만 생각했는지도 불명이다.[59] 위 항목에 일화 같이 나폴레옹은 폴란드 말도 한두마디 할줄 알아서 보급문제로 폴란드 군인들의 사기가 떨어졌을 때 간단한 농담으로 불만을 잠재우기도 했다. 어쨌든 폴란드는 다른 나라들이 전부 나폴레옹에게 등을 돌리는 와중에도 끝까지 프랑스 편에 서서 싸웠다. 이렇기 때문에 그에 대한 폴란드인들의 인식은 매우 좋다. 심지어 폴란드 국가폴란드는 아직 죽지 않았다의 가사에도 보나파르트가 우리에게 승리의 방법을 보여주었다라는 구절이 있을 정도다.

따라서 현재도 폴란드인 앞에서 폴란드를 깔 의도가 없어도 나폴레옹이 폴란드를 이용만 했다고 비하하는 것은 큰 실례가 될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하지만 그래도 이용하지 않은 건 아니라서 폴란드인들을 아이티 혁명 당시 진압군으로 끌고가서 학살을 시켰던 것도 있다. 이 학살에 되려 폴란드인들이 경악하고 마음이 흔들렸으며 수백여명이 한꺼번에 탈영했을 정도였다. 폴란드인들도 아이티인들을 보고 자신들과 같은 신세란 걸 알았기에 흔들렸던 것. 때문에 아이티 혁명 수뇌부들도 폴란드어로 이런 선전문구를 뿌렸다. 거기에 프랑스군과 차별대우에 열대지방에서 풍토병으로 폴란드인 다수가 죽어감에도 몇 년이고 파병을 해 대니 폴란드인들로서 반발이 거셌고, 탈영하여 아이티인들과 손잡고 프랑스군과 싸우던 폴란드 징집병들도 상당수였다. 이들은 나폴레옹 몰락 이후에 폴란드로 돌아가는 이들도 있었으나 그냥 아이티에 남은 이들도 적지 않아서 지금도 이들 후손이 사는 폴란드계 혼혈 마을이 있다.

9.7. 미국

미국에서는 주로 자유주의를 전파한 지도자 혹은 유럽 전역을 공포로 몰아넣은 독재자로 인식된다. 하지만 대체로 미국에서의 평가는 호의적인 편이다. 미국 본토에 전쟁 등 직접적인 타격을 주지 않았을 뿐더러[60] 무엇보다도 제3대 미국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 재임 기간 동안 프랑스가 전쟁이나 이렇다 할 추가 요건도 없이 그 당시 단돈 1500만 달러(7300만 프랑)으로 현 미국의 4분의 1 면적의 국토를 차지하는 루이지애나 포함 중부지역을 미국이 매입하면서 광활한 영토를 얻었다는 것에 있다. 또 반(反)불파인 전임 대통령인 존 애덤스와 달리 토머스 제퍼슨은 친(親)불파이기도 해서 프랑스와 말이 잘 통했다.

9.8. 아시아

아시아 쪽에선 나폴레옹이 뭔가 해를 끼친 것이 거의 없다보니 인기가 좋은 편이다. 독재자라며 비판하는 일부 아시아인도 있지만 그다지 언급은 없는 편.

특히 중국의 경우 나폴레옹이 "중국은 잠자는 사자이며 깨어나기만 하면 세계를 진동시킬 것"이라고 평했던 것 때문에 좋게 본다. 사실 이 발언은 중국이 지금 당장 강하다는 것이 아니라 중국을 깨우면 중국인들이 언젠가 유럽을 비슷한 수준까지 따라잡을 것이고 제국주의의 보복을 할 것이라는 내용의 이야기였지만 시진핑이 프랑스-중국 수교 50주년 기념대회 강연에서 이 발언을 언급하는 등 중국에는 인상깊게 남는 발언이었다. 연합뉴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중반까지는 중국이 유럽 열강의 각축에 휘둘리는 형국이었지만 개혁·개방을 이루고 일대일로 정책을 펴는[61] 상황에선 나폴레옹의 예언이 어느정도는 적중한 셈이다.

나폴레옹은 조선에 대해선 자세히 알진 못했지만 주간조선에서 나폴레옹에 대한 기사로 유배지인 세인트헬레나에서 영국 탐험선이 짧게 섬을 방문했을 때 영국 탐험대 대장이 나폴레옹에게 조선 여행담과 삽화를 보여줬다고 한다. 나폴레옹은 삽화에 담긴 조선인의 갓과 담뱃대에 꽤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나라라는 평이다.

독립운동가 김경천 장군이 나폴레옹을 존경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공업을 배우라는 아버지나 형의 권고에도 굳이 일본육사를 지원하게 된 것도 나폴레옹의 영향을 받아서였다... 실제로 김경천 장군의 별명 중 하나가 '조선의 나폴레옹'이었다고 한다.[62]

그리고 한국의 전설적인 독립운동가인 매헌 윤봉길 의사도 나폴레옹을 존경해 자신의 두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에서[63] 사상가 맹자, 혁명가 나폴레옹, 발명왕 에디슨을 배우라고 했다고 한다.[64]

북한에서는 대단히 부정적으로 보는데, 김일성은 "나뽈레옹은 구라파의 패권을 장악하고 식민지 제국을 만들 것을 꿈꾸면서 구라파를 전쟁의 동란에 몰아넣고 수많은 민족과 인민들에게 재난과 불행을 강요한 근대의 악명높은 침략자였습니다."라고 교시하였으며 북한 중학교 세계력사 교과서에서는 나폴레옹을 대부르주아 이익의 대변자, 포악한 군사독재자, 전쟁 미치광이라고 욕이란 욕은 다 퍼붓고 있다.

이스라엘에선 매우 긍정적이다. 나폴레옹은 유대인의 종교활동에 자유를 부여하면서 차별을 금지시켰기 때문. 오늘날 이스라엘이 프랑스에 매우 긍정적인 이유가 이것도 있다. 물론 그러거나 말거나 로스차일드 가문은 나폴레옹의 적으로 나폴레옹을 몰락시키는데 온 지원을 다했다

10. 후세 독재자들의 동경, 추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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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발리드를 방문해
나폴레옹의 석관에 참배하는
히틀러[65]와 수행원들
많은 독재자들의 추종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이들 대부분은 압제나 전쟁으로 나라를 망쳤고 스스로의 말로 역시 나폴레옹처럼 영 좋지 않았다.

당장 프랑스 본국에서는 나폴레옹 3세가 큰아버지의 이름을 팔아 대통령이 되고, 황제가 되는 데 성공했지만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으로 몰락했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과 함께 프랑스 제국은 멸망하고 프랑스는 공화국이 되어서 현재까지 이어지게 된다.

나치 독일아돌프 히틀러가 나폴레옹을 동경했다고 한다.[66] 그는 프랑스 제3공화국를 점령하고 나폴레옹 2세의 관을 나폴레옹의 곁으로 이장시켜 주기까지 했다. 공교롭게도 히틀러는 나폴레옹과 비슷한 운명을 겪었는데 똑같이 유럽 대부분의 지역을 점령했으나 섬나라인 영국을 정복할수 없었고 이후 소련을 침공하여 전선을 2개로 만들었고 패망했다.[67]

대한민국박정희도 학창 시절에 나폴레옹을 매우 동경했다고 한다. 단 박정희가 유별나게 영웅주의적이고 출세 지향적이었다기보다는 나폴레옹 숭배 자체가 당대 식민지 조선 청년들의 보편적인 입장이었다고 보는 게 무난할 듯하다. # 물론 박정희의 롤모델중 한명으로 남았다.

중앙아프리카공화국 - 중앙아프리카 제국장 베델 보카사는 아예 그를 흉내내어 황제가 되었다. 보카사의 황제 선포식도 사실은 나폴레옹의 것을 흉내낸 것이다. 하지만 3년뒤에 황제위에서 폐위되었는데 그를 폐위시킨 군대가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존경하는 나폴레옹의 조국 프랑스의 군대였으니 어찌보면 기구한 운명이었다.

중화민국장제스도 젊은 시절에 나폴레옹을 동경했으며 나폴레옹의 혁명 정신을 잡지까지 내놓으며 칭찬했었다. 대륙이 아니라 중화민국 한정으로 본다면 강토는 축소되고 외교는 침체되었지만 경제 발전과 번영을 이뤄 오늘날까지 이어졌다.

리비아의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 역시 나폴레옹을 추종했는데 통치 체제 등에서 나폴레옹의 통치 수단과 비슷한 시스템을 운용했다.

이집트가말 압델 나세르인도네시아수카르노도 나폴레옹을 영웅으로 높이 샀다.

[1]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대한 엇갈리는 평가를 다룬 TED 강의[2] 해당 저서를 찾아봤으나, 해당 내용이 보이지 않으니, 페이지수도 표기 바람[3] 라인강-알프스산맥으로 이어지는 고대 갈리아의 자연국경을 프랑스 역사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확보했던 시기가 나폴레옹의 집권기이다.[4] 이는 사실상 봉건제의 잔재로 봉건제 당시에 지방마다 다르던 것을 절대왕정 시기에도 고치지 않아 같은 나라인데 지방마다 법이 달라 개판이 된 것이다.[5] 한국의 법 체계도 대륙법(나폴레옹에게 자극을 받아 정비된 독일법+그 독일법을 이어받아 나름대로 정리한 일본법)을 바탕으로 영미법을 받아들인 절충 형태이니 나폴레옹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6] 특히 민법[7] 정작 나폴레옹 본인은 무능한 가족들을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자리에 앉히거나 본인에게 충성하는 장교들을 적극 기용하여 자신의 몰락을 재촉했다.[8] 1위는 나폴레옹 시대, 2위는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이다. 단순 비교는 할 수 없지만 영국이 역사상 가장 핀치에 몰렸던 시대라고도 할 수 있는 것.[9] 정확히는 원래 정의되었던 것이 아니라 카를 마르크스가 정의한 것이다.[10] 과대망상에 빠진 인물이 국가를 장악하고 자신을 위한 정치체계를 만든 형태를 뜻한다.[11] 이런 이유로 서양을 제외하거나 군사학으로 한정했을 땐 나폴레옹을 전쟁 영웅으로 높게 평가하지만, 유럽에선 나폴레옹을 독재자로 가차없이 내려치는 성향을 보인다.[12] 다만 영국에서 자국 법률상 정식 반환이 아니라며 재반환을 요구하는 해프닝이 있었다.[13]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 지음, 김만수 옮김, <전쟁론 제3권>, '제8편 전쟁계획 - 제3장 A. 전쟁의 내적인 연관성', 갈무리, p.132[14] 워털루 전투의 승리는 아서 웰즐리만이 아니라 게프하르트 레베레히트 폰 블뤼허 장군의 적절한 증원 도착도 큰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자기 에고가 엄청 강했던 웰즐리조차도 스스로가 나폴레옹을 넘어서는 전략가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일례로 이베리아 전역 당시 가까운 사람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군의 졸렬한 움직임으로 피해가 컸던 것을 한탄하며 만일 나폴레옹이 상대였다면 아군은 궤멸당했을 거란 식으로 얘기한 적도 있다. 세인트헬레나 생활을 기술한 '라스 카즈의 회상록'에도 당시 전투에 참가했던 영국군과의 대화를 기술하고 있는데(1816년 7월), 당시 영국군은 완전히 진 전투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에마뉘엘 그루시의 배신(이를 배신으로 알고 있던 영국군들이 있을 정도였으니 당시 그루시의 판단이 얼마나 어이없는 것이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이 없었더라면 실제로 패배했을 거라고 여기고 있었다고 한다.[15] 나중에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유명한 빠였던 리델 하트는 다른 유명한 명장들은 다 스키피오에 비하면 한 수 아래라고 평가했지만 유일하게 나폴레옹만이 스키피오와 그래도 동급이었다고 평했고 특히 병참술에 있어서는 나폴레옹을 우위에 두었을 정도이다.[16] 영국, 프로이센 왕국, 오스트리아 제국, 스페인, 스웨덴, 러시아 제국 등.[17] 대(對)프랑스 동맹[18] 웰링턴 공작, 카를 대공 등.[19] 다만 러시아 원정을 놓고 봤을 때, 미하일 쿠투조프가 그의 전략적 맞수라고 볼 수 있다.[20] 나폴레옹이 벨기에로 들이닥칠 때 웰링턴은 브뤼셀의 무도회에서 춤추고 있었다. 문제는 미셸 네가 카트르브라에서 이 상황을 제대로 이용하지 못했고, 이것 때문에 시간을 번 웰링턴이 워털루에서 싸울 수 있었다.[21] 스페인 민중들이 게릴라로 돌변한 이유는 나폴레옹의 민사 작전의 실패 때문이고, 이베리아 반도 전쟁은 나폴레옹의 발목을 제대로 잡았다. 민심을 저버린 군대는 승리할 수 없는데, 나폴레옹은 이 점에서 큰 실책을 저질렀고, 영국은 이를 제대로 캐치해서 포르투갈에 영국군을 상륙시켰다.[22] 1808년 11월부터 1813년 4월까지 상시로 최소 20만 명 이상. 러시아 원정 때 프랑스, 바르샤바 공국, 라인동맹 합산 병력이 45만여명임을 고려하면 엄청난 병력이 이베리아 전선 유지에 동원되었다.[23] 웰링턴이 명장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는 워털루 전투보다는 이베리아 반도 전쟁에서의 활약 때문이다. 그는 스페인을 점령한 프랑스군이 스페인 민중의 민심을 저버린 것을 정확히 간파하여 영국군을 반도에 상륙시켰고, 수비 위주의 전투로 전쟁을 질질 끌어 6년 동안 25만여 명의 프랑스군을 잃게 했다. 즉, 웰링턴은 나폴레옹의 전략적 실책을 간파하고 이를 이용하여 나폴레옹의 발목을 잡을 능력은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24] 흔히 러시아 원정 때 겨울이 추웠다고 생각하는데, 실제로 영하 39도의 동장군은 원정이 끝나기 일주일 전부터 찾아왔다. 이전에는 평년 기온보다 되려 따뜻했다. 결국 그렇게 비전투 손실이 많았던 것은 보급에 실패했기 때문이다.[25] 물론 나폴레옹은 보급 문제를 생각하여 동유럽에 대규모 병참 기지를 설치해 두었지만, 프랑스군은 여름부터 이질, 발진티푸스 등 질병으로 사상자가 나오고 있었고, 라스푸티차와 카자크의 보급로 습격으로 의료품 및 식량 등의 보급이 안돼서 진군 속도가 느려지고 있었다. 이 와중에 러시아군의 청야전술까지 겹쳤다. 즉, 스몰렌스크 함락 이후는 진군을 하면 안되는 상황인데 모스크바 진군을 강행한 나폴레옹의 전략안은 명백한 하책이었다.[26] 고통 때문에 주치의에게 아편을 처방받기까지 했다.[27] 특히 워털루 2주 전 죽은 베르티에에 대해 나폴레옹은 '이제 누가 내 명령을 이해해주냐'며 크게 슬퍼했다고 전해진다. 표면상 자살이었지만 자살로 보기엔 석연찮은 점이 많아 왕당파의 암살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28] 이 때문에 나폴레옹의 초상화에서 한쪽 손을 배 부위에 넣고 근엄한 표정으로 서 있는 모습이 '배가 아파 문지르는 포즈'로 잘못 알려졌지만 이는 다른 역사적인 인물의 초상화에도 등장하는 당시의 유행하고 있던 포즈로 관련없는 낭설이다. 일부 음모론자들은 이 포즈를 일루미나티와 연관지어 무리한 주장들을 하곤 한다.[29] 트라팔가르 해전도 사실상 영국 상륙 이전, 나폴레옹이 계획한 영국의 해상봉쇄를 풀고 프랑스 함대를 모으기 위한 양동작전에서 시작된 것인데, 정작 원하던 '각 항구에 퍼져있는 프랑스 함대의 결집'은 여러 이유가 겹쳐 무산된다. 결국 나폴레옹이 지정한 시간에 함대가 모이지 않았고, 그나마 운좋게 봉쇄를 피한 '빌뇌브넬슨을 이기고 도착하면 영국 가는 거고, 못 오면 영국 치려던 병력 빼서 오스트리아 치는 거' 수준으로 작전이 저열하게 변하게 된다. 그 결과, 프랑스 해군은 말 그대로 영국 해군에게 '영광의 제물'이 되어버렸고, 그나마 영국을 견제할 수준 정도는 되었던 프랑스 해군 전력은 전쟁 내내 쭈구리 신세를 면치 못했다. 이 해전의 결과로 100년간 프랑스 해군은 영국 해군에 비비지 못하게 된다.[30] 먼 훗날 닐스 보어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맨해튼 프로젝트에 대한 허가를 받으러 갔을 때 이 일화를 말하면서 핵무기 제조의 중요성을 어필했고 이에 루스벨트 대통령은 바로 프로젝트를 허가해주었다.[31] 다만 훗날 엄청난 위력을 발휘한 신무기들이었지만 이 시점에서도 유용했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거기다 나폴레옹에게 이런 신무기들을 시험해볼 만한 여유가 있지도 않았다. 당시 나폴레옹의 상황이라면 신무기에 투자할 돈으로 기존의 무기를 사들이는 편이 더 나았을 것이다.[32] 재밌게도 이 증기선의 이름은 "나폴레옹 호"였다.[33] 후장식 소총, 기관총, 발전된 야포 등이 있다.[34] Boney. 나폴레옹의 별명. #[35] 다만 음색에 걸맞지 않게 음치여서 노래를 부르면 돼지 멱따는 소리로 꽥꽥거려서 사람들이 싫어했다고 한다. 게다가 황제 즉위 후 아무데서나 노래를 불러서 분위기를 망쳤다고 한다.[36] 물론 전혀 위로가 되는 말이 아니다. 나폴레옹은 1769년생으로 1785년에 사관학교를 조기졸업하여 16세에 소위가 되었으며, 1793년 툴롱 포위전이 끝났을 때는 장군이 되어 있었다. 그때 나이 24세. 거의 소설에서나 볼 수 있는 폭풍승진을 한 것.[37] Ronald Zins, Le maréchal Lannes, 1994.[38] 사실 어처구니없는 게 애당초 뮈라가 왕이 된 것도 결국은 다 나폴레옹 덕분이었는데 그가 몰락하면 당연히 뮈라가 다스리던 나라도 원래의 왕가로 돌아가려 하지 뮈라를 왕위에 놓아둘 리 없었을 게 뻔했고 실제로도 그랬다. 물론 장바티스트 베르나도트같은 경우도 있지만 이쪽은 아예 스웨덴 왕의 양자로 들어가서 정당하게 왕위를 계승했고 이후 나폴레옹과는 완전히 손절했기 때문에(즉, 장바티스트는 거의 자신의 능력과 인망으로 스웨덴 왕이 된 것이다) 전혀 이야기가 다르다.[39] Pierre Charrier, Le maréchal Davout, 2011.[40] 드라마에서 처음 나오는 권총을 두고 오가는 실랑이는 측근이 위험하니 권총이라도 챙기라는 것을 나폴레옹이 필요없다고 만류하는 장면이다.[41] 영상에서는 1회용 배우 추가하는 게 귀찮아서 그랬는지 뜬금없이 5보병연대를 직접 지휘하는 것으로 나오는데, 원수씩이나 되면서 연대기를 들고 나타나는 것은 급이 맞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실병력은 연대 하나만 주어졌더라도 원수면 그 지위에 맞는 깃발이 따라다니게 마련이므로 명백한 재현 오류. 게다가 네의 경우에는 그 원수 계급장을 직접 달아 준 것이 바로 나폴레옹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상대방이 딱히 저항의사를 보이지 않고 있는 상태에서 체포도 아닌 사살을 명령하는 것은 지나치게 어색하다. 실제 역사상으로도, 레자르가 그로노블의 책임자인 마르샹 장군으로부터 받은 명령은 사살이 아닌 체포, 압송이었으므로, 네 장군은 물론이고 실제 지휘관이었던 레자르조차도 직접 발사를 명령한 사실은 없다. 영상에서의 네와 같은 발사 명령이 실제 있기는 했는데, 그것은 레자르가 아니고 마르샹의 조카였던 Randon 대위가 한 것이다. 그는 독단적으로 일부 병사들을 데리고 앞으로 나아가 발사를 명령했으나, 병사들은 지휘관인 레자르의 명령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 명령을 거부했다. 미셸 네 원수의 합류 시기는 제5보병연대의 투항으로부터 며칠 후이다.[42] 1805년 영국의 다이아몬드 록이라는 바위섬에서 울콤 중위가 자리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병사들과 나란히 식사를 했다가 신사로서 부적절한 행위를 한 죄로 군사재판을 받고 견책 처분을 받은 기록도 있다.[43] 정확히는 대관식을 한 날이다.[44] 현대에도 흔적이 남아있기는 하다. 미군을 비롯한 유럽 국가에서 각군 사관학교, 신병교육대에서 간부역할을 맡는 교육생, 훈련병에게 부사관 계급장을 주는 것이 그 예시.[45] 이 방침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가 바로 틸지트 조약 때였다. 틸지트 조약으로 유럽은 프랑스와 러시아의 공동 통치하에 놓이게 되었고 대불동맹을 주도하던 오스트리아는 적들로 묶인 식물인간, 프로이센은 국토가 반토막난 걸로도 모자라 경제적으로 파산하여 프랑스의 속국 수준으로 떨어졌다.[46] 실제로 대륙 봉쇄령 당시의 영국은 물가가 영국 역사상 가장 빠른 속도로 폭등하던 시기였다.[47] 이들의 문제점도 문제점이려니와 애초에 보나파르트 가는 기존 유럽 왕실에게 '근본도 없는' 가문으로 그들 입장에서 보나파르트 가는 '코르시카 촌뜨기'나 다름없었다. 그런 가문이 벼락출세하더니 유럽 각국에 '분봉'하는 것마냥 왕 자리를 턱턱 꽂아주니 기존 왕실들 입장에선 기가 막힐 수 밖에 없다.[48] 다만 이는 당시 스페인 왕으로 즉위한 페르난도 7세의 반(反) 프랑스 정서에서 기인한 바도 크다.[49] 물론 그래도 오래 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유럽의 각국은 문화와 민족구성 상 워낙 개성이 강한 나라들이다.[50] 스페인 보르본 왕조의 왕이었던 전임자 카를로스 4세페르난도 7세는 군왕으로서는 명백히 모자란 인물이었다.[51] 모르는 게 이상하다. 그렇게 했기 때문에 나폴레옹 본인이 황제로 즉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52] 다만 나폴레옹도 마냥 성공했다고 보기도 힘든게 저러느라 전유럽에 어그로를 왕창 끌어버렸고 그래도 본인은 군재가 뛰어나 어느정도 캐리할 수 있었지만 본인 부하들까지 다 자기만큼 유능한 것도 아니고 그 와중에 이베리아 전쟁이나 대륙 봉쇄령 같은 실책에 이겨도 전투 때마다 어쨌든 병력(=인력)이 손실되어 러시아 원정 이후 빠르게 몰락하는 계기가 되었다.[53] 다만 나폴레옹이 진짜로 이런 말을 했다는 기록은 없다. 정확히는 이베리아 반도 전쟁 당시 주스페인 프랑스 대사였던 도미니크 뒤푸르 드프라드(Dominique Dufour de Pradt)가 자신의 저서에 "스페인은 유럽이 아니라 아프리카다"라고 쓴 구절이 와전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원복도 만화에서 이걸 나폴레옹이 말했다고 그린 바 있다.[54] 이슬람교를 믿으면 술을 못 먹는데 우리 프랑스인들은 술 못 마시는 건 안 된다고 둘러대어 결국 개종은 안했다. 근데 일부 프랑스 장교들은 이슬람으로 개종하여 현지 여자들과 결혼하기도 했다.[55] 로샹보 자작 도나티앵마리조제프 드 비뫼르(Donatien-Marie-Joseph de Vimeur,1755~1813). 하지만 이런 학살로 진압하려 했지만 결국 패배하였고 돌아오던 길에 영국군과 충돌하여 포로가 되어 8년 가까이 영국 포로 수용소에서 지냈다.[56] 주인공 중 하나인 피에르부터 유학을 프랑스로 다녀왔으며 보로디노 전투 전까진 열렬한 나폴레옹빠였다.[57] 나폴레온 양주와 다르다.[58] 러시아령에 세워진 폴란드 입헌왕국까지 본다면 35년.[59] 아시아로 치면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도자 김구-중화민국의 총통 장제스의 관계와 비슷한 케이스다. 장제스는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면서도 대한민국을 위성국으로 삼으려고 했다는 의혹이 있었지만 김구와의 관계는 꽤 좋았던 데다 국공내전으로 인해 대만으로 쫓겨나면서 결과적으로 한국에게 도움만 준 케이스라는 점. 차이점이 있다면 폴란드와는 달리 한국은 어쨌든 독립했다는 것이다.[60] 사실 엄밀히 말해서는 타격을 줄 수 있는 여력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루이지애나를 스페인에게서 뜯어내자마자 바로 미국에게 팔아넘겼다.[61] 이로 인해 미국, 일본, 영국, 인도 등의 견제를 받고 있다.[62] 출처: KBS 뉴스 2018년 11월 20일자 기사 '조선의 나폴레옹' 김경천 일기 러시아서 출간, YTN 뉴스 2019년 1월 27일자 기사 더 큰 사람들 '조선의 나폴레옹' 김경천 장군[63] 편지의 제목은 '강보에 싸인 두 병정들에게'[64] 중앙일보 2019년 1월 7일자 기사 윤봉길 증손 윤호석 "할아버지는 맹자, 나폴레옹, 에디슨을 배우라 하셨죠"[65] 사진에 흰 옷을 입은 사람이 히틀러다.[66] 아이러니하게도 유대인들을 차별하다 못해 홀로코스트 같은 전범 행위를 저지른 히틀러와는 달리 나폴레옹은 전술했듯이 유대인들을 딱히 차별하기는 커녕 유대인들을 대우해줬다.[67] 러시아 원정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며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 전에 찾아가 다짐을 했다.그래놓고 라스푸티차, 동장군에 똑같이 고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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