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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5 13:44:49

피에르 부르디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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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0> 피에르 부르디외
Pierre Bourdieu
파일:bourdieu03.jpg
출생 1930년 8월 1일
프랑스 당갱(Denguin)
(現 프랑스 누벨아키텐 피레네자틀랑티크 당갱)
사망 2002년 1월 23일 (향년 72세)
프랑스 파리
국적
[[프랑스|]][[틀:국기|]][[틀:국기|]]
모교 파리 고등사범학교
학파 구조주의, 대안세계화
경력 프랑스 고등연구원 제6분과 (1975년 이전)
사회과학 고등연구원 (1975년 이후)
콜레주 드 프랑스 (1981년 이후)
주요 저작 『재생산』, 『구별짓기』, 『실천 감각』, 『파스칼적 명상』, 『과학의 과학과 성찰성』

1. 개요2. 생애3. 사상
3.1. 아비투스(Habitus)3.2. 장(Champ, Field)3.3. 자본(Capital, Capital)
4. 영향과 평가5. 주요 저작6. 관련 영상7. 여담

[clearfix]

1. 개요

프랑스의 사회학자이자 인류학자, 철학자, 비평가.

프랑스의 유명한 석학으로 신자유주의를 전면에서 가장 강하게 비판했다. 저서인 《재생산》, 《구별짓기》 등과 '문화 자본', '아비투스', '장(field)' 등의 개념이 유명하다. 카를 마르크스, 에밀 뒤르켐, 막스 베버를 잇는 20세기 후반의 대표적인 사회학자로 꼽힌다. 미셸 푸코를 이어 논문 인용률이 2위일 정도로, 사망 이후에도 사회과학 전반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2. 생애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는 1930년 프랑스 남서부의 피레네산맥 접경지대에 위치한 시골 마을에서 우체국 직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향 근처의 도시 포(Pau)에서 고등학교(리세)를 다니던 부르디외는 곧 파리의 명문으로 불리는 루이르그랑 고등학교(Lycée Louis-le-Grand)로 전학하였고 그랑제콜 준비반을 거쳐 1951년 파리 고등사범학교[1]에 입학하였다. 그가 고등사범학교를 다녔던 50년대 프랑스에서는 사르트르로 대표되는 마르크스주의와 실존주의가 유행했다. 하지만 부르디외는 또래의 고등사범학교 동창생들처럼 이러한 유행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고등사범학교에서 가스통 바슐라르와 조르주 캉길렘[2]의 과학철학과 인식론에 많은 영향을 받았고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의 세미나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이후 프랑스의 교원자격시험인 아그레가시옹에 통과한 부르디외는 잠깐 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3] 1955년 징집되어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에서 복무하였다. 전역 후에는 1958년부터 62년까지 알제리 북부의 카빌리 족에 대한 인류학적 연구를 진행하였고 이때의 현지조사는 그의 최초의 저작인 『알제리 사회학』(1958)으로 출판되었으며 이후의 연구에서도 끊임없이 인용되었다. 카빌리 족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부르디외는 구조주의 인류학의 영향에서 점차 벗어나 행위자들의 실천에서 드러나는 역동성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다. 이후 프랑스로 돌아온 부르디외는 선배 사회학자였던 레몽 아롱에게 발탁되어 1964년부터 고등연구원(École Pratique des Hautes Études)[4]의 연구 주임을 맡았다. 이 시기에 부르디외는 프랑스의 교육, 문화 등에 내재한 불평등에 대한 다양한 연구를 시도한다. 사회과학 고등연구원의 연구자들[5]과 함께 작업한 『상속자들』(1964), 『중간 예술』(1965), 『예술 사랑』(1969), 『재생산』(1970) 등이 바로 이 시기의 저작이다.

특히 사변적인 프랑스 지식인들과 다르게 부르디외는 자신의 저작에서 통계방법론과 인터뷰 기법을 아낌없이 사용했다.[6] 1960년대에 수행된 문화와 예술에 관한 여러 연구는 그의 대표작 『구별짓기』(1979)을 통해 그 열매를 맺었다. 1975년에는 사회과학의 학제적 저널을 목표로 하는 『사회과학연구논집』(Actes de la Recherche en Sciences Sociales)을 창간하였다. 그리고 그의 이론적 프로그램을 완결지었다고 평가받는 『실천 감각』(1980)의 출판은 부르디외를 프랑스 최고의 사회학자로 만들어 주었다. 결국 부르디외는 1981년 프랑스 최고의 국립교육기관인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로 선출되었다.[7]

이후 90년대 초반부터 자신의 저서들이 영어로 번역되기 시작하면서 영미권에도 이름을 알린 부르디외는 끊임없이 저작들을 출판하였다. 『호모 아카데미쿠스』(1984), 『마르틴 하이데거의 정치적 존재론』(1988), 『국가 귀족』(1989), 『예술의 규칙』(1992) 등을 통해서 부르디외는 학계, 지식인, 그랑제콜, 문학 등에 대해 전방위적인 비판을 가했다. 그는 1993년 사회학자로서는 최초로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센터(CNRS)에서 금메달을 수상했으며 1996년에는 미국의 버클리 대학에서 고프먼 상을, 그리고 2001년에는 영국의 왕립인류학연구소에서 헉슬리 메달을 수상하였다. 그는 2002년에 화가 에두아르드 마네에 대한 글을 쓰다가 폐암으로 사망하였다. 사후에는 미완성 유고인 자전적 작품인 『자기분석을 위한 초고』(2004)가 출판되었고 그가 콜레주 드 프랑스의 '사회학 Sociologie' 석좌교수로 재직하던 시절의 강의록이 2012년부터 출간되기 시작해 2022년 사후 20주년에 완간되었다.

3. 사상

많은 저작에서 부르디외의 분석은 다음과 같은 포맷으로 이루어진다.
어떤 사람의 자원(자본)은 특정한 사회적 게임(장)의 맥락에서 특정한 종류의 행동을 만들어내는 특징적 구조(아비투스)를 생산한다. 이러한 상황은 안정적으로 재생산되는데, 이는 자본, 아비투스, 장을 함께 연결하는 과정이 기존의 불평등한 자원 배분을 정당화하는데 기여하는 일상적인 이해방식(즉 장에 참여하고 있는 이들의 이해방식)에 의해 체계적으로 왜곡되어 있기 때문이다.[8]

그러므로 부르디외의 연구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부르디외의 기본적인 개념 도구들이 어떻게 사용되는지 알고 있어야 한다. 부르디외의 개념어 목록과 상세한 설명은 부르디외와 바캉의 공저 『성찰적 사회학으로의 초대』의 국역본(2015, 그린비)에 수록된 역자의 용어해설(477-538면)을 참조할 것.

프랑스어를 할 수 있다면, 국제적인 집단적 지적 협력으로 탄생한 피에르 부르디외에 관한 가장 정확하며 포괄적인 작업이라 할 수 있는 사전(Dictionnaire international Bourdieu, Editions CNRS,2020)을 참고할 것. 1,000쪽 분량.

3.1. 아비투스(Habitus)

프랑스의 구조주의와 독일의 현상학 전통을 모두 수용했다고 평가받는 부르디외의 사회학 개념들은 매우 추상적인 것으로 악명이 높다. 먼저 그의 행위 이론에서 가장 유명한 개념인 아비투스의 분석적 정의를 보자.[9]
실존의 조건에 근거하는 특정한 계급에 관련된 조건들이 아비투스를 생산해 낸다. 지속적이면서 또 다른 것으로 전이될 수 있는 성향의 체계로서 아비투스는 구조화된 구조이며, 또한 구조화하는 구조처럼 작동하는 경향을 띤다. 다시 말해 발생의 원칙으로서 그리고 실천과 표상을 조직하는 요인으로서 이것은 자신의 목적이 무엇인지 의식하지 않은 채 객관적으로 자신의 목표에 상응하며, 그러한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동작들을 순간적으로 제어하기에, 주어진 규칙들에 복종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작동은 어느 정도 통제된 성격과 규칙성을 갖는다. 이 모든 것이 행위를 조화시키는 지휘자가 없더라도 집단적으로 조화를 이룬다.

쉽게 풀어쓰자면 아비투스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인식하게 하는 신체적 범주와 도식이며 또한 직면한 문제를 능숙하게 풀어나갈 수 있게 돕는 센스이다. 특히 아비투스는 머리로 생각하는 의식의 차원이 아니라, 그 의식에 의한 성찰에 앞선 신체적인 차원에 속하는 실천적 지식이다.

예를 들어 경기 중에 네트를 향해 뛰어가는 테니스 선수를 생각해보자. 그 순간 테니스 선수는 라켓을 왼쪽으로 휘두를지 오른쪽으로 휘두를지, 혹은 발리를 쳐야 할지, 아니면 자신이 왜 테니스를 치고 있는지 의식적으로 성찰하지 않는다. 테니스 선수는 자신에게 공이 온 순간 ‘적절히’ 대처함으로써 게임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나간다. 즉 아비투스란 주어진 상황에서 적절한 판단과 행동을 유도해주는 암묵적으로 당연시하는 감각이다. 그리고 이는 머리가 아닌 신체에 새겨진 것으로서, 여기에는 오랜 시간의 투자가 필요하다. 그리고 몸에 배는 데 시간이 걸린 만큼, 한번 체화된 아비투스는 환경이 바뀌어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운동을 오래 쉬면 감이 떨어져버리는 것처럼, 그 실천을 지속하지 않으면 아비투스도 결국은 사라지기 시작한다.

부르디외는 아비투스를 다양한 영역의 분석에서 사용한다. 그의 주저 『구별짓기』에서는 문화적 아비투스가 사람들의 취향을 통해 드러난다. 부르디외의 경험연구에 따르면 가정과 학교에서 전수되는 문화적 취향은 어떤 사람이 일상생활에서 먹고 마시고 즐기는 모든 과정에서 그가 속한 계급에 따라 차별적으로 드러난다. 한편 부르디외는 이러한 아비투스의 형성 과정이 권력과 계급에 의한 체계적인 불평등과 연관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아비투스는 불평등한 관계에서 발생하며, 아비투스를 체화한 행위자들의 실천은 이러한 불평등을 생산하는 객관적 구조를 재생산하는 데 일조한다. 부르디외에 따르면 피지배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의 아비투스는 삶을 개선하는 것이 아닌 자신들의 열등한 처지를 재생산하려고 한다.

3.2. 장(Champ, Field)

장(場)이란 특정한 행위자가 속한 관계의 총체를 말한다. 장 내에는 수직적, 수평적으로 차별적인 여러 위치가 있으며 이 위치는 위치를 점유한 행위자의 의지와는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행위자들의 위치는 그가 소유하고 있는 자본[10][11]의 양과 그 상대적 비중에 따라 결정되고 수행자, 그리고 장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다양한 전략을 구사한다.

부르디외에게 장은 단순히 경계가 명확한 물리적인 공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사회적인 공간으로서, 장에 대한 환상을 공유하는 참여자들이 모여 상징자본을 놓고 투쟁하는 장소이다. 여기서 환상'(illusio)이란, 여러 장 내의 행위자들이 자신이 참여하고 있는 집단적 활동의 정당성에 대해 가진 믿음이다. 일단 장이 열리려면, 그곳에서 행해지는 활동이나 경쟁이 정당하고, 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믿음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때 어떤 참여자가 일루지오를 가진다는 것은 그가 장에서 공유되는 규칙을 따르고자 하는 성향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하며, 장 내에서 일어나는 우연들과 변화에 조응하여 ‘적절하게’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춤을 의미한다. 그런데 상징자본은 장의 참여자들이 얻고자 하는 내기물인데, 일상 행위자들이 추구하는 물질적 이윤과 달리 오직 장에 대한 환상을 공유하는 이들에게만 가치 있다.

예를 들어 복싱 체육관에 대한 바캉의 연구에서처럼 일상 행위자들은 복싱 챔피언 트로피를 따내기 위해 몸을 희생하는 복싱선수들을 이해할 수 없다. 물론 챔피언이 되었을 때 얻는 경제적인 이윤이 있지만, 그 확률은 매우 낮으며 설령 그 자리에 오른다고 해도 신체적 후유증에 시달려야 한다. 요컨대 복싱선수에게 중요한 것은 경제적 이윤의 대차대조가 아니라 챔피언 트로피라는 상징 자본과 그에 따르는 보람이다. 만약 복싱 선수 모두가 어느 날, 자신이 그토록 추구했던 챔피언의 자리가 주어진 목표가 아니며 그가 언제든지 바꿀 수 있는 걸 알아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이 경우 복싱은 챔피언의 자리를 놓고 벌이는 숭고한 스포츠가 아니라, 그저 의미 없는 주먹질이 되어버릴 것이다. 역으로 생각해본다면, 특정한 장은 자신의 믿음을 의심하지 않는 집단적 오인을 견지하며 공모하는 구성원들의 일루지오에 의해서 성립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장의 경계는 어떻게 구획되는 것일까? 앞서 장은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일루지오를 공유하는 이들의 사회적 공간이라고 말했다. 이때 특정한 장의 경계는 말로 온전히 정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누가 들어갈 수 있고, 누구는 들어갈 수 없는지"를 통해서 드러나는 열린 개념이다. 예컨대 누군가가 사회학 장 안에 있으며, 혹은 바깥에 있음을 판단해 주는 명시적인 가이드라인을 세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특정한 틀로 장의 경계를 구획하려는 시도는 틀림없이 그것으로 다 잡아내지 못하는 잔여를 남길뿐더러, 오히려 왜곡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장의 경계는 특정한 행위자가 그 장에 진입하기 위해 얼마의 비용을 지불했느냐는 ‘자격 요건 충족’의 문제로 귀결된다.

3.3. 자본(Capital, Capital)

부르디외의 논문 「자본의 형태」(1986)에 따르면 사회적 권력과 사회적 불평등을 결정짓는 데 작용하는 세 종류의 자본이 존재한다. 세 가지 자본은 각각 소득과 소유권으로 이해되는 경제자본, 사람들과의 연결을 지칭하는 사회자본, 교육, 문화적 대상, 학위로 이해되는 문화자본으로 나누어진다.

자본의 소유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으며 이는 자본의 보유량과 보유 구조로 나누어진다. 그러므로 특정 행위자는 자본을 더 많이 갖거나 덜 가질 수 있으며(자본의 총량), 또 자본들을 상이한 비율(자본의 총량 중 경제자본과 문화자본의 보유 비율)로 가질 수 있다.[12]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한 자본을 다른 자본으로 전환시킬 수도 있다.

그 중 『구별짓기』(1979)의 중심 개념인 문화자본은 앞서 설명한 아비투스의 한 측면이다. 아비투스처럼 문화자본은 예술과 문화에 대한 객관적인 지식, 문화적 취향과 선호, 공식 자격(대학 학위, 컨테스트 입상 등), 문화적 기술과 실제적인 지식(악기를 다루는 능력 등), 스스로를 차별화하고 좋고 나쁨을 구분하는 능력 등 여러 측면을 가진다.

『구별짓기』에서 부르디외는 미학적인 판단이 무엇이 고상하고 천박한 취향인지에 대한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기준에 근거하고 있다는 철학적 사고[13]를 비판한다. 그 대신 그는 취향이 사회적으로 결정된다고 보았다. 『구별짓기』는 프랑스 사회의 특정 계급과 직업집단이 음악, 예술, 음식에 있어 구분되는 취향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문화자본이 단순한 취향이 아니라 사회적 위치를 반영하는 하나의 지표임을 드러낸다. 한편 부르디외는 문화자본이 이러한 차이를 만들어내고 동시에 구별과 불평등의 영속화를 도와준다는 점을 강조한다. 아비투스와 마찬가지로 문화자본은 무엇이 가치 있고 없는지를 규정해준다. 『구별짓기』에 묘사된 대로 문화자본을 많이 가진 엘리트집단은 자신들의 ‘고급문화’를 대중문화와 구별 짓고 정당화함으로써 문화의 위계, 더 나아가 계급 위계를 영속화하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또 하나 특기할 점은, 문화자본은 교육을 통해 상속 또한 가능하다. 그것도 경제자본처럼 눈에 보이지 않게 은밀하게 상속할 수 있다. 경제자본은 상속법을 만들어 손쉽게 상속을 제한할 수 있지만, 문화자본의 세습은 은폐되어 보이지 않게 상속할 수 있다는 게 특징이다.

주의할 점이라면, 부르디외 모델의 매력이 사회가 공식적으로는 사회이동에 있어 개방적이라고 주장한다는 데 있다는 것이다. 아비투스가 전 성찰적이고 무의식적인 성향이었던 것처럼, 문화자본을 체화한 지배계층은 결코 사회 이동을 막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이 가진 특권은 대부분이 못 보고 있는 문화적 편견의 섬세한 작용을 통해 재생산된다. 이는 사회학은 물론이요, 문화심리학에서도 비슷한 논의가 있다.[14][15]

4. 영향과 평가

사회학의 창시자인 오귀스트 콩트, 그리고 고전 사회학의 3대장 중 한 명인 에밀 뒤르켐을 배출한 프랑스 사회학은 2차 대전 이후, 미국 중심의 사회학에 밀려 힘을 잃고 있었다.[16] 1960년대까지 현대사회학은 탤컷 파슨스의 거대이론, 폴 라자스펠드의 연구방법론, 그리고 로버트 K. 머튼의 중범위 이론에 지배받고 있었다.[17] 이후에도 현대사회학은 허버트 블루머의 상징적 상호작용론, 조지 호만스의 교환이론, 어빙 고프먼의 연극모형론, 알프레드 슈츠의 현상학적 사회학, 해롤드 가핑클의 민속방법론 등 미국산 사회이론들이 강세를 보였다.

하지만 21세기에 들어선 현재, 부르디외의 위상은 2차대전 이후에 활동한 모든 사회학자보다 높다고 할 수 있다.[18] 구글 학술검색 같은 부정확한 통계가 아닌 과학정보기구(ISI)의 2008년 통계에 의하면, 부르디외는 미셸 푸코, 위르겐 하버마스, 앤서니 기든스, 어빙 고프먼을 훨씬 상회하며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사회학자이다. 적어도 유럽과 영미권, 아시아권 등 어디에서나 일정 수준 이상의 위상을 확보하고 있는 사회학자는 부르디외밖에 없다. 부르디외 사회학의 특징[19]을 정리하면,

1) 그는 분석에 있어서 미시적 수준과 거시적 수준을 통합하려고 시도하였으며, 주관적인 경험과 객관적인 구조 양자를 모두 고려하였다. 이를 통하여 “미시/거시 논쟁”에 있어 주요 인물이 되었고, 그의 저작들은 양 진영 모두에게 필독서가 되었다.

2) 그는 마르크스와 베버의 비판 사회학의 주요 부분을 교조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받아들였다. 또한 그가 자신의 연구를 비판적 프로젝트의 한 영역으로 생각했다는 점 때문에, 이론적인 통합을 하고자 했던 기든스나 신기능주의 등의 다른 시도들보다 경쟁력을 가질 수 있었다.

3) 그는 추상적인 이론적 모델을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구체화된 중범위의 경험적인 연구도 수행하였다. 이로 인해 순수 이론가와 방법론적인 측면을 보다 중요시 여기는 문화사회학자 모두의 관심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4) 그의 경험적인 저작은 (교육, 대중문화, 예술과 같은) 다수의 영역과 (인류학, 사회학 등의) 다수의 학문 분야를 넘나들었으며, 이로 인해 잠재적인 독자를 극대화할 수 있었다.

5) 그는 (장, 아비투스, 문화자본 같은) 다수의 개념을 발전시켜왔으며, 이 개념들은 학문적으로도 주목의 대상이 되었고 다양한 연구 영역에 광범위하게 적용되었다.

부르디외의 주요 목표 중 하나는 사회학적 이론 틀을 정교화함으로써 구조/행위자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객관주의와 주관주의를 통합하는 성찰적 사회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성찰적 사회학은 우리(이론가)가 만든 이론적 모델이 우리가 처한 맥락과 위치에 의해 영향을 받고 있음을 성찰하고, 그 모델에 우리의 선입견이 투사될 수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부르디외는 일상행위자들의 삶의 형식을 단순히 묘사하거나 그것에 감정이입 하는 주관주의를 넘어서, 이론가들이 보통 사람들은 파악하지 못하는 구조적 요인을 간파하고 이를 서로 토론하는 합리적 변증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부르디외의 "참여 객관화" 방법은 바로 객관주의와 주관주의 양자가 가지는 오류를 모두 극복하고 사회적 진리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5. 주요 저작

6. 관련 영상

7. 여담


[1] 파리 고등사범학교 출신 선배로는 사회학의 창시자 에밀 뒤르켐이나 철학자 장폴 사르트르, 모리스 메를로퐁티가 있었다. 또한 청년기의 부르디외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 루이 알튀세르, 미셸 푸코는 그의 가까운 선배들이었으며, 자크 데리다는 준비반 시절 그의 동창생이었다.[2] 훗날 부르디외는 알제리 민족지 연구를 바탕으로 캉길렘의 지도를 받아 "정서적 삶의 시간 구조"라는 제목으로 박사논문 연구계획서를 작성했지만 결국 포기하였다. 하지만 이 때의 연구계획은 부르디외의 저작들과 논문들에 반영되었다.[3] 아그레가시옹은 대학 교수로서 임용되기 위한 자격시험이 아닌 중, 고등학교 교사 자격시험이며, 부르디외는 당시 학문계의 관행에 대한 저항의 일환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지 않았다.[4] 고등연구원의 제6분과는 1975년 독립 설립된 사회과학 고등연구원(EHESS ; École des Hautes Études en Sciences Sociales)의 전신[5] 여기에는 뤽 볼탕스키(Luc Boltanski), 이베트 델소(Yvette Delsaut), 클로드 그리뇽(Claude Grignon), 장클로드 파세롱(Jean-Claude Passeron), 모니크 드 생마르탱(Monique de Saint-Martin)이 포함된다.[6] 또한 이는 매우 난해한 축에 속하는 부르디외의 저서들이 경험연구를 중시하는 미국 사회학계에도 좀 더 쉽게 수용될 수 있었던 이유였다.[7]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였던 미셸 푸코는 부르디외의 저작들에 매우 큰 감명을 받고 그가 선출되도록 힘을 썼다고 한다. 한편 『실천 감각』에서 "객관주의적 오류"의 대표자로 비판받은 레비스트로스는 부르디외에게 반대표를 던졌다고 전해진다.[8] Dylan Riley, 2017. "Bourdieu's Class Theory, Catalyst 1(2), 3p.[9] 부르디외의 『실천 감각』 1부 3장에 수록. 번역은 홍성민, 『문화와 아비투스』 43-4면에서 재인용[10] 경제적 의미만의 자본만 있는 것이 아니다. 부르디외는 기본적으로 경제적 자본, 문화적 자본, 사회적 자본, 상징적 자본을 토대로 장을 설명했다.[11] 경제적 자본이란 간단히 말해 돈, 문화적 자본은 여러 종류의 지식, 사회적 자본은 사람들간의 관계, 상징적 자본은 명예, 위세 등을 말한다.[12] 예를 들어 부유한 사업가와 대학교수는 똑같이 지배계급에 속한다. 하지만 전자는 경제자본을 더 많이 보유하고 있으며 후자는 문화자본의 비율이 높다. 따라서 전자는 지배 분파로, 후자는 피지배분파로 나뉘어질 수 있다.[13] 『구별짓기』의 부제는 "판단에 대한 사회적 비판"이다. 칸트의 '순수미학'에 대한 사회학적 비판[14] Marcus & Corner,'우리는 왜 충돌하는가',박세연 역,흐름,2015,pp185-221[15] 문화자본이 엘리트 교육의 형태로 공개적으로 상속되면서 사실상 새로운 귀족계급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 능력주의 비판론자들의 지적이다.[16] 물론 프랑스에도 모리스 알박스(Maurice Halwachs)나 레몽 아롱(Raymond Aron)과 같은 뛰어난 사회학자들이 있었지만 그들의 이름을 사회학 교과서에서 찾아보기는 매우 어렵다. 그만큼 2차대전 종전 이후 미국사회학이 강력했다는 뜻이다.[17] 특히 파슨스와 머튼의 사회이론을 구조기능주의(structural functionalism)라고 부르는데, 이 사조는 거시적인 구조와 체계를 강조하며 그 안에서 행위자(agent)들의 역할이 제대로 조명받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이후 68운동을 거치며 보수적인 가치를 지지한다는 혐의를 받으며 몰락할 때까지 현대사회학계를 지배했다.[18] 물론 순수한 사회학자라고 보기 어려운 미셸 푸코위르겐 하버마스를 제외한다면 말이다.[19] 필립 스미스, 『문화이론』(2008) 229-30면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