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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8 19:34:03

사마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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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진 제5대 황제이자 동진(東晉)의 초대 황제 사마예에 대한 내용은 원제(동진)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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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욱 · 사마요 사마덕종 · 사마덕문
※ 11권 ~ 30권은 志에 해당. 진서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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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 105권 「석륵재기(石勒戴記)」 106 · 107권 「석계룡재기(石季龍戴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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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권 「저거몽손재기(沮渠蒙遜戴記)」 130권 「혁련발발재기(赫連勃勃戴記)」
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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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왕(八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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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무민왕
사마경
초은왕
사마위
장사려왕
사마예
성도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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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자 * :실제 행적을 바탕으로 사마량 대신 예장왕 사마치를 포함시키는 학자도 있다. 사마량은 팔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전혀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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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무제 사마염의 아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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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정후임성왕 릉임성왕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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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평정후 안평정후[40][41]
경조부군 이전[추존][43]
정서부군 - 예장부군 - 영천부군
※ 문서가 있는 경우만 기재
※ 황제는 추존황제를 포함해서 자황색()으로 굵게 쓰고 팔왕은 빨갛게 쓴다. 그리고 8왕의 난에 관련된 종실은 갈색으로 쓴다.
※ 출계(出系)는 취소선을 치고 계자(系子)는 밑줄을 친다.
각주 [ 펼치기 · 접기 ]

[추존] [2] 황제로서의 뚜렷한 존호를 헌상받지 못했으나 다른 추존 황제와 동격배향(同格配享).[3] 친부는 의양성왕[4] 친부는 안평헌왕[5] 숙부(실제로는 종숙) 창무정후에게 출계(出系)[추존] [추존] [8] 친부는 진문제[9] 종숙(실제로는 숙부) 요동도혜왕에게 출계[10] 종숙(실제로는 숙부) 광한상왕에게 출계[추존] [12] 적장자나 두 살에 요절하여 혜제가 사실상 장남이 되었다. 항목이 존재하고 추봉(追封)되었기에 기재[13] 친부는 회남충장왕[14] 여기까지 서진[15] 친부는 오효왕[16] 백부 진헌왕에게 출계[17] 숙부 성양애왕에게 출계[18] 친부는 사마유(동래왕)[19] 백부 진헌왕에게 출계[20] 적장자였던 비릉도왕처럼 한 살에 요절했으나 추봉(追封)되었기에 기재한다.[21] 직접 난을 일으킨 적은 없는 여남문성왕 대신 팔왕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22] 백부 진세종에게 출계.[23] 친부는 진무제[24] 친부는 제헌왕[25] 백부 성도왕에게 출계[26] 친부는 제헌왕[27] 숙부 연왕 경에게 출계[28] 난을 일으킨 적은 없기에 팔왕에서 빼고 대신 효회황제를 넣는 시각도 있다.[29] 여기부터 동진[30] 친부는 진문제[31] 윤통(閏統)[32] 숙부 사마익에게 출계[33] 숙부 사마형에게 출계[34] 백부 사마랑에게 출계[35] 숙부 하비헌왕에게 출계[36] 숙부 안평왕에게 출계[37] 친부는 남궁현왕[38] 진안이 장사만 황제의 예로 올리고 시호는 왕으로 하였다.[39] 종조부 사마민에게 출계했다지만 이러면 소목에 어긋나 항렬이 꼬임[40] 종실에서 팔왕의 난에 아니 가담하고 난이 끝나가는 직전까지 살았다.[41] 친부는 단수현후. 다만 종조부에게 출계하면 항렬이 꼬여서 친부가 법적으로 종형이 되는데 이 문제는 어찌 된 건지 몰?루[추존] [43] 아니 추존되었으나 칠묘에 동격배향(同格配享).
}}}}}}}}} ||
서진의 황족
장사여왕(長沙厲王)
司馬乂 | 사마예
<colcolor=#ece5b6> 시호 <colbgcolor=#FFFFFF,#191919> 여(厲)
작위 장사왕(長沙王) → 상산왕(常山王) → 장사왕(長沙王)
최종직위 표기장군(驃騎將軍)
성씨 사마(司馬)
(乂)
사도(士度)
아버지 친아버지: 사마염(司馬炎)
생몰기간 277년 ~ 304년
장사왕 재위기간
(1차)
289년 ~ 291년
상산왕 재위기간 291년 ~ 301년
장사왕 재위기간
(2차)
301년 ~ 304년
1. 개요2. 생애3. 평가4. 여담

[clearfix]

1. 개요

司馬乂
277년 ~ 304년

서진의 황족이자 무제 사마염의 17남으로 자는 사도(士度). 사례 하내군 온현 출신이자 미인 심씨의 아들로, 사마위의 동복아우다.

골육상쟁의 한복판이었던 서진말의 팔왕의 난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안위보다는 백성과 나라를 먼저 생각하면서 최선을 다해 헌신했으나, 결과적으로는 욕망에 찌들어있던 혈육에게 배신당해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2. 생애

289년 12세의 나이로 형주장사왕에 봉해진 사마예는 291년 동복형인 초은왕 사마위가남풍의 모략에 휘말려 여남왕 사마량, 위관 척살에 이용당한 뒤 처형되었을 때 다른 왕들은 거들떠 보지도 않는 그의 죽음을 홀로 애도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초왕이 조서를 받았으니 어찌 그 잘못을 알았겠는가!

이후 사마위와 같은 어머니를 두었다는 이유로 상산왕으로 격하된 사마예는 그곳에서 선정을 베풀며 백성들의 신망을 얻었다. 그는 신장이 7척 5촌이었고, 명랑하면서도 결단력이 뛰어났으며 남보다 뛰어난 재능을 갖추면서도 매사에 겸허한 자세로 임했고 명예를 중시했다. 301년에 제왕 사마경, 성도왕 사마영, 하간왕 사마옹, 신야군왕 사마흠과 손을 잡고 황제를 참칭한 조왕 사마륜을 주살했다. 그 후 표기장군에 임명되었고 본래의 봉국이었던 장사왕에 복직할 수 있었다. 신야군왕 사마흠은 조왕 사마륜이 토벌된 뒤 자신의 진수 지역인 형주로 돌아가려고 제왕 사마경과 함께 수레를 타고 진무제의 능묘에 배알하러 갔다. 이 때 그는 사마경에게 권했다.
성도왕(사마영)은 아주 가까운 친척으로 함께 큰 공훈을 세웠으니 지금은 의당 그를 머물게 하여 함께 정치를 보필하게 해야 하고, 만약 이렇게 할 수 없다면 마땅히 그의 병권을 빼앗아야 합니다.

이때 장사왕 사마예 역시 사마영과 함께 능묘를 배알했는데, 그는 사마영에게 다음과 같이 권했다.
천하는 먼저 돌아가신 황제께서 만드신 대업이니 대왕께서 오직 이를 바로잡으셔야 합니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사마예의 말을 들은 사람은 걱정하고 두려워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사마영은 "사마경에게 권력을 양보하고 번국으로 돌아가서 사해의 인심을 거둬들이라."는 노지의 권유를 받아들이고 조정에서 물러났다.

제왕 사마경이 혜제 사마충을 보좌하면서 실권을 잡은 후, 측근들을 요직에 앉혀 권력을 독점하고 공사 간의 집들을 수백 채나 헐어버리며 왕부를 크게 지어 서궁(즉 황궁)과 같은 규모로 만드는 등 지나친 사치를 부렸다. 이때 하간왕 사마옹의 장사 이함은 양주 자사 황보상과 불편한 관계였는데, 황보상이 제왕 사마경의 참군사에 발탁되자 불안감을 느꼈다. 게다가 사마경의 우사마인 조양과도 틈이 생기자 이러다간 목숨이 위태로워질 것을 걱정해 말 한 필을 타고 사마옹에게 달아나서 사마경을 토벌할 것을 권유했다. 이때 그는 사마옹에게 다음과 같이 건의했다.
성도왕은 지친이며 커다란 공로를 세웠는데도 미루고 양보하며 번국으로 돌아가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얻었습니다. 제왕은 지친을 뛰어넘어서 정사를 전횡하고 있으니 조정에서는 곁눈질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장사왕에게 격문을 보내어 제를 토벌하도록 하면 제왕은 반드시 장사왕을 주살할 것이고, 우리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제왕의 죄를 드러내어 그를 토벌한다면 반드시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제왕을 내쫓고 성도왕을 세우며 다그치는 무리를 제거하고 지친을 세워서 사직을 안정시키면 큰 공훈일 것입니다.

사마옹은 그 말에 따라 군대를 일으켜 이함을 도독으로 삼고, 장방 등을 거느린채 낙양으로 진군했다. 여기에 사마영에게도 가담할 것을 권했고, 사마영 역시 이에 따랐다. 하지만 두 사람은 당장 낙양으로 진군하지 않고 사마예에게 격문을 보내 사마경을 토벌하라고 지시했다. 그들은 세력이 약한 사마예가 사마경을 당해내지 못하고 주살당할 게 뻔하다고 여기고 사마예가 사망하는 즉시 그의 복수를 명분으로 삼아 사마경을 토벌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사마예는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얼마 후 사마예가 사마옹의 격문을 받았다는 소식을 접한 사마경은 동애를 파견해 사마예를 습격하여 치게 했다. 그러자 사마예는 좌우에 있는 100여 명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말을 달려 궁궐로 들어가서 여러 문을 닫고, 혜제를 받들어 대사마부를 공격했다. 이에 동애는 궁궐의 서쪽에 군사를 늘어놓은 후 불을 질러 천추신무문을 태웠다. 제왕 사마경이 사람을 시켜 추우번[1]을 가지고 가서 "장사왕이 조서를 고쳤다."고 외치게 하자, 사마예는 "대사마가 모반했다."고 맞받아치게 했다. 이후 사마예는 사흘 동안 격전을 벌인 끝에 사마경의 무리를 격파했고, 사마경은 부하 조연에게 배신당해 전각 앞으로 끌려갔다. 혜제가 사마경을 측은히 여겨 살려주려 했지만, 사마예는 좌우에 있는 사람들을 나무라며 사마경을 끌고 나가게 한 뒤 창개문 밖에서 목을 베고 그의 수급을 6군에 돌리며 그를 따르는 무리의 삼족을 멸하니 죽은 사람이 2,000여 명이었다. 또한 사마경의 아들 사마초, 사마빙, 사마영을 금용성에 가두고 사마경의 동생인 북해왕 사마식을 폐위시켰으며 천하에 사면령을 내리고 연호를 영녕에서 태안으로 고쳤다.

사마예는 조정을 장악한 뒤 일이 크고 작고 간에 모두 업성에 가서 성도왕 사마영에게 자문을 받았으며 다른 왕들과도 널리 의논해 협치를 이루고자 노력했다. 또한 파촉에서 조정에 반기를 든 저족의 수령 이류를 토벌하고자 시중 유침을 파견해 나상, 허웅 등의 군사를 통제하게 했는데, 도중에 하간왕 사마옹이 유침을 장안에 머물게 하여 자신의 군사로 삼고, 그를 대신해 석원을 파촉으로 보냈다. 그리고 형주에서 만이인 장창이 반란을 일으켜 만족들을 선동해 세력을 키워가자, 사마예는 둔기 교위 유교를 예주 자사로 삼고, 영삭장군 유홍을 형주 자사로 삼아 장창을 토벌하게 했다.

유교는 여남에 주둔한 뒤 예주를 향하던 장창의 부하 황림의 20,000명을 격파했다. 얼마 후 사마흠이 섣불리 번성에 이른 장창과 싸웠다가 전사하자[2], 사마예는 유홍을 진남장군 겸 도독형주제군사로 삼아 사마흠을 대신하게 했다. 유홍은 남만 장사 도간을 대도호로 삼고 참군 괴긍을 의군독호로 삼았으며, 아문장 피초를 도전수로 삼아 진군해 양양을 점거했다. 그러나 장창이 완을 포위하고 조양의 군사를 격파하며 양이를 살해하자, 유홍은 물러나 양양에 주둔했고 장창이 양양을 공격하자 격파했다. 이후 유홍은 도간, 피초와 함께 장창을 잇달아 격파해 끝내 격멸했다. 이무렵 황보상이 다시 장사왕 사마예의 참군이 되고 황보상의 형 황보중이 진주자사로 임명되자, 이함은 위기감을 느끼고 하간왕 사마옹에게 유세했다.
황보상은 사마예가 일을 맡겼지만 황보중은 끝내 다른 사람이 채용할 수 없을 것이니 의당 일찍이 제거해야 합니다. 표문을 올려서 황보중을 내직으로 옮기게 하고 그가 장안을 지나는 것을 이용하여 붙잡으십시오.

황보중은 이를 알고 노격을 상서성에 올리고 농상의 군사를 발동해 이함을 토벌하겠다고 건의했다. 하지만 사마예는 병사들이 지쳐 있다는 이유로 사자를 파견해 황보중에게 군사 행동을 중단하게 하고 이함을 징소하여 하남윤으로 삼았다. 이함은 징소에 응했지만 황보중이 명령에 따르지 않자, 하간왕 사마옹은 금성 태수 유해, 농서 태수 한치 등을 파견해 네 군의 군사를 합하여 그를 공격하게 했다. 또한 사마옹은 비밀리에 이함과 시중 풍손, 중서령 변수로 하여금 장사왕 사마예를 암살하게 했다. 그러나 이 음모는 황보상에게 적발되었고, 사마예는 이함, 풍손, 변수를 잡아 죽였다. 하간왕 사마옹은 이함 등이 죽었다는 보고를 받자 "어진 대신을 죽인 역적을 토벌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즉시 군대를 일으켰다.

한편, 성도왕 사마영은 사마예가 비록 자신을 존중해주고 매사에 자문을 구하긴 하지만 황태제가 되려는 야욕에 사로잡혀 있어서 내심 사마예를 꺼렸다. 그러다가 하간왕 사마옹으로부터 함께 힘을 합쳐 사마예를 토벌하자는 건의를 받자, 그는 이에 따르기로 마음먹었다. 이에 노지가 말렸다.
공께서는 전에 큰 공로를 세우셨지만 권력을 버리시고 총애받는 자리도 사양하셨기에 당시의 명망이 아름다웠습니다. 지금 만약에 관문 밖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문관의 복장을 입고 조정에 들어간다면, 이는 패권의 주인이 할 일입니다.

참군 소속도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사람에게 형제가 있는 것은 마치 좌우의 손과 같습니다. 명공께서 천하의 적이 되는 사람을 감당하려고 하시면서 먼저 한 손을 끊는 게 옳겠습니까?

그러나 사마영은 끝내 그 말을 듣지 않고 303년 8월 사마옹과 함께 표문을 올렸다.
사마예는 공로를 처리하는 일이 불공평하였으며, 우복야 양현지, 좌장군 황보상과 더불어 조정의 정치를 오로지 농단하면서 충성스럽고 선량한 사람을 살해하였으니 청컨대 양현지, 황보상의 목을 베시고 사마예를 보내어 봉국으로 돌아가게 하십시오.

이에 조정은 장사왕 사마예를 태위, 도독중외제군사로 삼아 하간-성도 연합군을 방어하게 했다. 하간왕 사마옹은 장방을 도독으로 삼고 정예군 70,000명을 이끌고 함곡관 동쪽에서 낙양으로 달려가게 했다. 또한 성도왕 사마영은 군사를 이끌고 조가에 주둔해 평원 내사 육기를 전장군 겸 전봉도독으로 삼고 군사 20만을 거느려 낙양을 향하게 했다.

303년 8월 24일, 사마예는 황보상에게 10,000여 명을 거느리고 장방의 하간군을 의양에서 막게 했다. 이후 사마예는 9월 7일에 성도왕 사마영의 부하 견수를 낙양성 동문 밖에서 패퇴시켰고, 8일엔 혜제를 받들고 건춘문에서 육기의 성도군과 맞붙었다. 사마예의 사마인 왕호가 수천 기병에게 창을 말에다 묶고서 마함의 진지로 돌격하게 하니, 마함의 군사들이 혼란스러워졌고, 마함은 도중에 잡혀 참수되었다. 육기의 성도군은 대패해 칠리간[3]으로 도주했고, 칠리간은 쌓인 시체로 인해 흐르지 않았다. 사마예는 이 전투에서 대장 가숭 등 16명의 목을 베었다. 이후 육기는 사마영을 배반하려 한다는 모함에 시달린 끝에 참수되었고, 그의 삼족이 주살되었다.

사마예는 여세를 몰아 장방의 하간군을 공격했다. 이때 장방의 병사들은 멀리서 혜제가 탄 승여가 사마예의 장사군과 함께하고 있는 걸 보고는 사기를 잃고 달아났다. 결국 장방은 5,000명의 전사자를 내고 패주했다. 하지만 장방은 도망치려는 병사들에게 "승리와 패배는 군사 작전에서 항상 있는 일이고 군사를 잘 운용하는 사람은 실패한 것을 이용해 성공을 거둘 수 있다."고 다독인 뒤 밤에 몰래 낙양성에서 7리 떨어진 곳에 보루를 여러 겹으로 구축하고 밖에서 창고의 곡식을 끌어다가 군사들에게 먹였다. 사마예는 장방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여겨 가볍게 여겼다가 장방이 보루를 완성했다는 보고를 받자 11월에 군사를 이끌고 공격했지만 이기지 못했다.

조정은 장사왕 사마예, 성도왕 사마영이 형제 사이이므로 말로 하여 풀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중서령 왕연 등에게 사마영에게 가서 설득하게 하고 사마예와 섬(陝)을 기준으로 나눠 가지라고 했지만 사마영은 듣지 않았다. 사마예는 이 기회를 이용해 사마영에게 편지를 보내 이로운 점과 해로운 점을 진술하고 그와 더불어 화해하려 했다. 그러나 사마영이 "황보상 등의 목을 벤다면 군사를 이끌고 업성으로 돌아가겠다."고 답하자 차마 그럴 수 없었던 사마예는 화해를 포기했다. 이후 사마영은 군대를 진격시켜 경사 낙양을 압박했고, 장방이 낙양성 동쪽에 있는 제방인 천금알을 파괴하니 물레방아를 돌리는 물이 모두 말라버렸다. 이에 사마예는 왕공 집안의 노비들을 징발하여 손으로 방아를 찧어서 병사들에게 식량을 공급하게 했는데, 1품 이하의 관리로서 징집되지 않은 자로 13세 남성 이상은 모두 이 노역에 종사하게 했고 노복을 징발해 군사들을 돕게 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공사 간에 모두가 궁핍해졌고 쌀 값은 1석에 10,000전으로 치솟았다. 이에 조적이 사마예에게 건의했다.
유침은 충성스럽고 의로우며 과단성이 있고 강합니다. 옹주에 있는 병력으로 하간왕을 충분히 제압할 것이니, 의당 황상에게 계문을 드려서 조서를 유침에게 내려 군사를 일으켜 사마옹을 습격하게 하십시오. 사마옹이 궁색하고 급하게 되면 반드시 장방을 부르는 자구책을 쓸 것입니다.

사마예는 이에 따라 유침에게 구원을 청하니, 유침이 7개 군의 무리를 합해 10,000명을 모아 장안으로 진격했다. 또한 사마예는 황보상에게 몰래 샛길로 가서 황제가 손수 쓴 조서를 품고 가서 유해 등에게 명령을 내려 군사 행동을 중지하게 하고, 황보중에게는 칙령을 내려 사마옹을 토벌하게 했다. 황보상이 샛길로 가서 신평에 이르러 그의 5촌 생질을 만났다. 그러나 생질은 평소 황보상을 증오해서 사마옹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결국 황보상은 사마옹에게 잡혀 죽었다. 이후 사마예는 1년 가까이 사마영과 여러 차례 전투를 치러 번번이 격파해 목을 베거나 포로로 잡은 이가 6~7만 명에 달했다. 당시 성안의 양식은 날로 궁핍해졌지만, 사마예가 황제를 진심으로 받들며 정사를 게을리 하지 않고 군심을 잘 다독였기에 사졸들은 끝까지 그에게 충성을 바쳤다. 장방은 사마예의 기개가 굳건한 것을 보고 낙양을 공략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장안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낙양에 있던 동해효헌왕 사마월이 계해일에 전중에 있는 제장들과 더불어 밤중에 사마예를 체포해 다른 관청으로 보내버렸다. 이후 사마월은 황제에게 표문을 올려 사마예의 관직을 면직시키고 금용성에 가두게 했다. 전중에 있던 장사들은 뒤늦게 외부에 있던 적이 많지 않음을 보고 사마예를 배신한 걸 후회해 다시금 사마예를 빼내 사마영과 대항하려 했다. 이에 사마월은 두려워해 사마예를 죽이려 했지만, 황문시랑 반도의 만류를 받아들여 장방에게 낙양으로 들어와서 사마예를 처리하라고 요청했다. 이에 장방은 낙양으로 들어와 약탈을 심하게 벌이는 동시에 사마예를 처형하기로 결정했다. 이때 사마예는 훙서 전 혜제에게 표를 올렸다.
폐하께서는 독실하시고 온화하시어 신하들에게 조정의 일을 맡기셨습니다. 신은 충효를 조심하고 천신과 지기(地祇)를 본보기로 삼았습니다. 여러 왕이 잘못을 되풀이하고 여러 사람의 견책을 받들었으며, 조정의 신하들이 정처없이 각자의 곤란함을 근심하고 반역자를 따로 섬겼습니다. 신은 몸을 아끼지 않았으나 대진은 쇠미해지고 있으며 도당이 극에 달하니, 폐하께선 외롭고 위태로우십니다. 신하가 국가의 안녕을 위해 죽는다면 이는 집안의 영광입니다. 그러나 흉인을 가까이 두지 마십시오. 그들은 폐하께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304년 정월 25일, 장사왕 사마예는 하간왕 사마옹의 부장인 진무장군 장방에 의해 분살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 향년 27세. 장방이 적대 세력을 제거하는 방식이 워낙 잔인해서 그의 부하들도 치를 떨고 눈물을 흘릴 정도였다고 한다.

후일 그의 죽음을 명분삼아 동해왕 사마월과 예장왕 사마치(회제)가 사마영과 사마옹의 사형을 합리화했다.

사마예의 아들로는 사마석(司馬碩), 사마선(司馬鮮) 형제가 있었는데 사마석은 진회제 영가(永嘉) 2년(308) 12월에 장사왕에 복봉되었다. 사마석의 관직은 산기상시에 이르렀는데 영가 5년(311년) 6월에 전조유총낙양을 격파했을때 유총의 난군에 살해당했다. 사마선은 사마석이 장사왕이 될 때 임회(臨淮)왕이 되었는데 뒷일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역시 낙양이 함락될 때 이후의 행적이 없어 이 때 살해당하지 않았나 추측된다.

3. 평가

"사마씨 가문의 양심은 두 말인데, 사마예가 한 석을 독점하고, 그 나머지 여덟말은 (다른 사마씨들이 사마예에게) 함께 빚진 것이다."
(司马家良心两斗,乂独占一石,其余共欠八斗。)
중국의 팔왕의 난 관련 민간풍문.#[4]

자신의 형인 혜제를 충실히 보필하고 다른 왕들과 협치를 하여 엉망이 된 제국의 체제를 재정비하고 지방을 통제하려고 노력하는 등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던 서진 사마씨 황실의 마지막 준걸이다. 사마예는 팔왕의 난에서 권력을 잡았던 다른 왕들과는 다르게 백치였던 혜제를 존중하고 다른 왕들[5]과 협치를 하려고 무척 노력했다. 결과적으로 하간왕 사마옹의 농간에 놀아난 사마영의 폭주로 비극을 맞게 되었지만 혜제는 기본적으로 동생 사마예를 충신으로 알고 있었고 실제로도 그런 사람이었다. 진서 역시 '장사왕(사마예)은 재주가 뛰어나고 충성과 절개가 있었으며 열사의 기풍을 떨쳤고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으나 남긴 절개는 처음부터 끝까지 볼만하였다'라는 식으로 높게 평가했다.

장방의 부하들까지도 눈물을 흘린 데는 이 사람의 죽음이 잔인했던 것 뿐 아니라 나름대로 덕망있다고 인정받는 사람이었기에 그런 것도 있었다. 동생 사마영의 통수만 없었더라도, 하다못해 사마월의 분탕질만 없었더라도 서진을 중흥시킬만한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팔왕의 난의 비극성을 더해주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시호가 《일주서》 〈시법해〉에 따르면 '사납고 교만하여 친한 이가 없음', '무고한 이를 죽임'의 뜻인 려()인데, 이는 백성을 도탄에 빠뜨린 이들에게 주어지는 악시이다. 아마도 사마경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많은이들이 죽은 것이나 사마경의 일족을 숙청한 일화, 사마영에게 저항하는 과정에서 낙양의 민생이 도탄에 빠진것을 감안한 시호로 보인다. 사실 사마예가 죽은 후 바로 사마예랑 대적하던 사마영이 정권을 잡았기에 악시가 내려진 것일수도 있고, 이후로도 시호를 고치기엔 다들 정신 없었어서 시호가 고쳐지지 않은 걸 수도 있겠다. 사마예의 아들들도 영가의 난 때 낙양이 함락되면서 살해되었기 때문에 시호를 선시로 추숭해달라는 후손들도 없긴 했을 것이고 말이다.

4. 여담


[1] 무력 사용을 금지하는 깃발[2] 다만 여기서는 사마예의 잘못이 좀 있기는 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사마예에게 찍혀있던 처지에 제대로 지원도 못 받은 채로 토벌 책임자랍시고 봉지인 신야쪽으로 자의반 타의반으로 내몰린게 문제였던 것이다.《삼국지》 아는 사람은 잘 알겠지만 번성과 신야는 매우 가까운 거리로 이 때 사마흠은 장창에게 이미 본진이 털린 상태라 일이 급했는데 사마예가 별다른 지원을 안 해 준데다 출진하는데조차 눈치를 줘서 준비도 제대로 못한 처지였다.[3] 낙양의 동쪽에 있는 작은 시내다.[4] 토탈 워: 삼국 팔왕의 난 DLC를 설명하는 글의 댓글에서는 '사마씨는 모두 똥같은 놈들이야'(司马家就是一坨屎啊。)라는 말에 어떤 사람이 '사마 가문의 양심은 여덟말인데, 사마예, 사마위 두 형제가 한 석을 독점하고, 그 나머지 제왕들이 두 말을 빌렸다'(司马家良心八斗,司马乂司马玮哥俩独占一石,其余诸王共欠两斗。)고 대답하기도 한 것으로 보아 바리에이션이 꽤 있는 드립으로 보인다.출처[5] 특히 이복동생이자 명망이 높았던 성도왕 사마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