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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도시우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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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 제53대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
THEODOSIVS II | Θεοδόσιος Β'
파일:800px-Theodosius_II_Louvre_Ma1036.jpg
<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플라비우스 테오도시우스
(Flavius Theodosius)
출생 401년 4월 10일
로마 제국 콘스탄티노폴리스
사망 450년 7월 28일 (향년 49세)
로마 제국
재위 기간 로마 황제
408년 5월 1일 ~ 450년 7월 28일 (42년 88일)
전임자 아르카디우스
후임자 마르키아누스
부모 아버지 : 아르카디우스
어머니 : 아일리아 에우독시아
배우자 아일리아 에우도키아
자녀 리키니아 에우독시아
종교 그리스도교
1. 개요2. 생애
2.1. 즉위2.2. 섭정 안테미우스
2.2.1. 서로마와의 관계 개선2.2.2. 테오도시우스 성벽
2.3. 누나 아일리아 풀케리아2.4. 아일리아 에우도키아(아테나이스) 황후2.5. 이교(Paganism) 금지 정책2.6. 테오도시우스 법전(Codex Theodosianus)2.7. 누나와 아내의 실각과 환관 크리사피우스2.8. 페르시아, 반달족, 훈족2.9. 종교 문제2.10. 사망
3. 여담

[clearfix]

1. 개요

로마 제국 제53대 황제이자 동로마 제국 테오도시우스 왕조 제3대 황제. 본명은 할아버지 테오도시우스 1세와 같은 플라비우스 테오도시우스(Flavius Theodosius). 402년부터 아버지 아르카디우스와 함께 공동통치를 했으며, 7세의 나이에 단독 황제로 즉위해서 42년간(408년부터 450년까지) 동로마 황제로 재위했다.

후술되는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테오도시우스'라는 이름으로 회자되는 유명한 것들(법전, 성벽)은 소위 '대제'라는 할아버지가 아닌 대다수 이 사람의 재위기간에 만들어졌다. 42년이라는 긴 통치기간 내내 내우외환에 시달렸지만, 나름 이를 잘 처리하면서 위기에 처한 동로마제국이 1000년간 지속될 수 있는 기반을 만든 황제다. 어린 나이에 즉위했지만 나름 뛰어난 위기 대처능력을 보여주었는데, 다만 치세 내내 훈족의 침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끌려다니면서 상당히 어려움을 겪었다.

2. 생애

2.1. 즉위

동로마 황제 아르카디우스프랑크족 출신의 황후 아일리아 에우독시아 사이에서 서기 401년 4월 10일,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위에는 누나로 아일리아 풀케리아(Pulcheria)가 있다. 3세이던 404년에 어머니 에우독시아가 아이를 낳다가 사망했고, 이어 아버지 아르카디우스마저 408년 병으로 30세/31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기에 겨우 7세의 나이에 즉위했다.

사실 아버지였던 부황 아르카디우스는 무능한 점에서 서로마 제국 황제인 동생 호노리우스와 큰 차이가 없었다. 다만 그가 임종할 당시 나이 어린 자기 아들의 신상문제를 걱정해서 궁전 대신 중에서 섭정을 고르려고 하였으나 아내이자 황후 아일리아 에우독시아가 진작에 사망했기 때문에 이마저 여의치 않았다. 또한, 서로마 제국 황제 호노리우스와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 문제로 사이가 나빠져 있었고, 크게 도움을 줄 수 없는 존재라는 판단에 고민하며 망설였다.

결국, 아르카디우스는 진지하게 고민한 끝에 몇 세기 동안 싸워 온 이웃나라인 사산조 페르시아 황제 야즈데게르드 1세에게 후견인이 되어 줄 것을 대담하게 부탁하기로 하고 사신을 보냈다. 이때 페르시아는 예상치 못한 제의에 영예로운 신뢰라고 하며 보답했다. 야즈데게르드 1세는 아르카디우스의 결정에 감사를 표하고, 그가 생존하는 동안에는 직접적인 적대관계였던 동로마 제국을 침공하려 하지 않았다.

동시에 아르카디우스는 궁정 안에서 나이 어린 황제를 성실하게 수호하고 훌륭하게 섭정으로서 통치를 도와줄 인물로 안테미우스(Anthemius)[1]을 선정하였다. 그는 405년에 집정관 겸 민정총독에 임명되었던 자로 탁월한 행정가이자 외교가이기도 했다[2]. 동시에 어린 테오도시우스 2세를 위한 또 다른 섭정으로는 2살 위의 누나 풀케리아가 9세의 나이에 선정되었다.

2.2. 섭정 안테미우스

7살짜리 황제를 보필하게 된 친위대장 안테미우스는 제위를 노리기보다 성실하고 탁월하게 어린 황제를 보필하고 노력했다. 그는 행정과 외교, 국방에 있어서 큰 공을 세웠다. 그는 414년 사망하였고, 그 뒤를 이어 새로운 섭정으로는 황제의 누나 풀케리아에게 넘어갔다.

2.2.1. 서로마와의 관계 개선

먼저 그는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 문제[3]로 사이가 벌어져있던 서로마와의 관계 개선에 힘을 쏟았다. 서방황제 호노리우스를 돕기위해 라벤나에 동로마군을 보내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동방 황실과 서방 황실은 다시 손을 잡게 되었다.

2.2.2. 테오도시우스 성벽

파일:external/2.bp.blogspot.com/byzantine_constantinople_eng_jjy0501.png
테오도시우스 성벽 건설 이후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

서로마와의 관계 개선과 동시에 안테미우스는 기존의 콘스탄티누스 성벽만으로는 거세지는 야만족의 침략으로부터 제국 수도 방비를 효과적으로 할 수 없다는 점을 인지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추가로 난공불락의 육지 성벽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아르카디우스의 정권 때부터 시작되어 테오도시우스 2세 치세 하에 건설이 마무리가 된 이 성벽은 바로 테오도시우스 성벽이다. 이 성벽 건설은 테오도시우스 법전과 함께 테오도시우스 2세의 최고의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파일:external/ss.textcube.com/XSlSwfwJFA.jpg
파일:external/i.jjang0u.com/123686062234737.jpg
테오도시우스 성벽
파일:external/2.bp.blogspot.com/AjL2WkgCQAAq7tI.jpg
테오도시우스 성벽의 구조

테오도시우스 성벽은 3중 성벽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 서쪽으로는 마르마라(프로폰티스) 해부터 북쪽의 금각만(콘스탄티노폴리스의 내항)까지 이어진 육중한 성벽으로, 이 성벽 건설의 결과 과거 콘스탄티누스 1세 때 건설한 성벽으로 방어할 수 없었던 넓어진 시가지[4]를 방어할 수 있게 되어 더욱 난공불락의 요새가 되었다.

구조를 살펴보면 테오도시우스 성벽은 해자를 갖추고 있는 성벽으로, 해자 뒤의 흉벽과 너비가 2미터 높이가 5미터인 내성벽, 너비 5미터 높이 12미터인 외성벽의 삼중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특히 내성벽과 외성벽에는 각각 96개씩의 망루가 설치되어 있어 적을 견제하기에 용이했다. 이 성벽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전체를 감싸고 있었는데, 육로에 면한 6 km 정도만이 앞서 설명한 구조로 되어 있었고 해안가의 성벽은 보통의 단일구조로 되어 있었다.

이렇게 건설된 성벽 방위력은 매우 강력해서 동로마 제국이 약화되어 수도가 침략을 받았을 때조차 정공법으로 이 성벽을 넘어 수도를 점령할 수 있었던 군대는 15세기까지 아무도 없었다.[5][6] 이 성벽은 그 유명한 훈족아틸라가 성벽만 보고서는 공략할 엄두를 내지 못한 채 퇴각하게 만들었고, 수도를 포위해 쳐들어온 아랍 군대를 모조리 토양의 양분으로 만드는 등 여러 위대한 업적을 쌓았다.[7] 그러나 영원히 적의 침입을 허락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이 성벽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두 대륙에 걸친 신흥 강국의 새로운 수도로 삼고자 했던 21살의 젊은 술탄의 야심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고[8], 결국 콘스탄티노폴리스도 함락, 2천 년 역사의 로마 제국은 멸망에 이르고 만다.

다만 이 오스만 투르크의 공격조차도 정공법으로 성벽을 완벽하게 넘은 것은 아니었다. 수비대장의 부상으로 병력의 통제가 무너진 상황에서 성문을 열고 닫는 과정에 미스가 있었는데 그걸 집요하게 파고든 결과였다. 즉 마지막 순간까지 정면 돌파 및 수비군 궤멸을 통한 성벽 함락은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 심지어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최초로 뚫은 것은 적의 공격이 아니라 이스탄불지하철트램 공사였다고 말하는 곳도 있을 정도다. 현대의 테오도시우스 성벽은 이스탄불 시의 행정구역인 파티흐(Fatih) 구의 경계 역할을 한다. 이 파티흐 구는 옛 콘스탄티노폴리스 시가지 전체이다. 성벽의 대부분이 남아 있으나 앞서 말한 지하철과 도로가 일부 성벽을 관통한다.[9]

대한민국 전쟁사학자 임용한 박사는 허준의 유튜브 채널에서 '만약 칭기즈 칸이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했다면?' 컨텐츠에서 얘기가 나오자마자 "절대 함락 못시킨다. 역사적으로 못시켰어" 라고 단언할 정도였다. #

2.3. 누나 아일리아 풀케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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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4년, 친위대장이자 섭정인 안테미우스가 병사하자 황제의 누나 풀케리아가 불과 16세의 나이에 아우구스타에 올랐다. 아우구스타는 황제의 누이나 아내, 어머니 등 매우 가까운 황실 여성에 대한 존칭으로써 그녀는 죽기 전까지 그 지위를 유지했다. 신앙심이 깊고 의지력이 강한 풀케리아는 섭정이자 아우구스타로 도덕적, 정치적으로 동생 테오도시우스 2세를 직접 교육하고 보호하였다.

그 결과, 궁정 문화와 생활은 수도원을 연상시킬 정도로 경건하게 바뀌었고[10], 황제와 풀케리아의 두 여동생은 풀케리아의 설복에 평생 정절을 지키며 살기로 서약했다. 하지만 이 때문에 테오도시우스 왕조가 오래 이어가지 못하게 되었다. 풀케리아는 공식적으로 테오도시우스 2세가 15세 생일을 맞은 날부터 섭정으로써 임무가 끝이 났지만, 그 뒤에도 오랫동안 실세로 남았다.

아랫 문단의 에우도키아 황후와 궁정 암투를 벌였지만 남동생이자 남편인 황제가 아내보다도 누나 편을 들어주는 경향이 컸고, 궁정생활에 지쳤으며 남편과도 멀어지게 된 황후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443년에 황궁을 나가서 460년 죽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기거했다.

2.4. 아일리아 에우도키아(아테나이스) 황후

풀케리아는 421년 동생 테오도시우스 2세의 배필로 그리스 아테네 출신의 처녀를 골랐다. 이 소녀는 '이교도'이자 아테네 철학자 레온티우스(Leontius)의 딸 아테나이스(Athenais)였다. 아테나이스는 아름답고 최고의 교육을 받았으며, 점잖았기에 점잖고 학구적인 테오도시우스 2세의 배필로 손색이 없었다. 아테나이스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여 시어머니와 같은 이름인 아일리아 에우도키아라고 새로이 이름을 취했다. 특히, 그녀가 황후가 된 사건은 당시 동로마 상류층 인사들 사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교' 지식인들에게 충격적인 일이기도 했다.

테오도시우스 2세와의 사이에서 이듬해 리키니아 에우독시아[11]라는 딸을 낳았고 423년 아우구스타(Augusta), 즉, 황후의 지위를 갖게 되었다. 에우도키아는 황궁 안에 그리스적인 분위기를 많이 가져왔고 동로마 제국이 그리스와 융합되는 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 결과, 425년 테오도시우스 2세는 알렉산드리아, 아테네의 대학들과 경쟁할 수 있는 본격적인 대학교를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세웠다. 대학의 강의실들은 원로원 의사당에 마련되었고, 그리스어 문법과 라틴어 문법에 각각 10명의 교수들이 배정되어 학생들을 가르쳤다. 또한 그리스 수사학에 5명의 교수를, 라틴 수사학에 3명의 교수를, 법학에 2명, 철학에 1명의 교수를 두어 학생들을 길렀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그리스 수사학에 배정된 교수가 5명으로, 라틴 수사학의 3명보다 많다는 점이다.

2.5. 이교(Paganism) 금지 정책

425년에 모든 미신은 근절되어야 할 것, 그리고 '이교도'에게는 법원 재판에 당사자로서 참여할 수 있는 권리와 군복무 자격을 박탈할 것[12], 이렇게 두 가지를 규정하는 법을 반포했다. 다음 해인 426년, 그리스도교를 버리는 배교행위를 불법화했다. 사실 그라티아누스와 할아버지 테오도시우스 1세 때도 배교를 불법화했지만 유명무실해졌었다. 여하튼 435년에는 이전 황제 시절에 반포되었었던 '이교' 의식과 희생물을 바치는 행위를 불법으로 재강조할 구상을 했고, 그 구상 속에는 형량이 최대 사형까지 올라가 있었다. 또한 지방관들에게 해당 지역 소속의 잔존한 '이교' 사원을 파괴할 것과, 그것에 실패할 경우 사형[13]을 명하는 내용도 들어있었다. 이 구상은 438년에 법제화되나, 그것과는 별개로 그도 현실을 깨닫고 현실적으로 이교 제물 의식을 모두 없앨 수는 없음을 인정하는 그의 의견이 'Corpus Legum Novellarum Theodosii'에 실려 있다고 한다.

2.6. 테오도시우스 법전(Codex Theodosianus)

테오도시우스 2세 치세 중 테오도시우스 성벽과 함께 치세 중 최고의 업적으로 불린다. 이 사업은 대학교 설립(425년) 4년 뒤에 직속위원회가 설치됨으로써 착수되었다. 그 안에는 콘스탄티누스 1세부터 자신의 치세에 이르기까지 공포한 법, 칙령 등 제국 내 모든 법들이 단권의 참고서 안에 집대성되었다. 이 법전은 9년 뒤인 438년 2월 15일, 16명의 법학자들의 노력으로 동로마 제국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와 서로마 제국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공동 명의로 발행되었으며, 법의 영역에서는 동서로마의 마지막 합작이다. 이 이후에 서로마 멸망까지 서로마가 법제를 한 번도 손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동로마와의 협의 없이 서로마 영역 내에서만 적용되는 것이었다.

2.7. 누나와 아내의 실각과 환관 크리사피우스

황후 에우도키아가 궁정에서 발휘한 헬레니즘 문화 등의 영향력은 자연스레 풀케리아의 영향력과 상호 경쟁을 일으켰고, 이 관계는 20년 간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하지만 테오도시우스의 정권 말기에는 환관 크리사피우스(Chrysaphius)가 권력을 쥐게 된다.

에우도키아는 443년 불륜 혐의를 뒤집어 쓰고 실각하여 예루살렘으로 가서 남은 17년간의 여생을 보냈으며, 그 가운데 파울리누스라는 황제의 친구이자 고위 관료도 그 불륜 혐의의 상대로 몰려서 희생당했다.

2.8. 페르시아, 반달족, 훈족

페르시아의 왕 바흐람 5세(Varanes, Vahram, Varahan, Bahram)은 421년 테오도시우스2세가 페르시아에서 망명한 그리스도교도들을 보호하고 있다는 구실로 선전포고를 했다. 이에 동로마는 이들의 침략을 단호히 격퇴했다.

테오도시우스 2세 치하에서 동로마는 주기적으로 페르시아, 훈족에게 위협을 받았다. 특히, 훈족은 제국이 페르시아와 전선을 형성할 때마다 어김없이 도나우 강을 건너 침입했다. 실제로 바흐람 5세의 선전포고로 양국이 전쟁을 벌일 때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훈족의 왕 루아는 트라키아를 침공했고, 테오도시우스 2세와 동로마는 매년 금 350파운드를 주겠다는 약속을 하며 그들을 돌려보내야만 했다.

434년, 서로마의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반달족과 싸우고 있었다. 이에 테오도시우스 2세는 서로마를 지원하기 위해 병력을 지원했는데 부대는 패했고, 훈족의 루아는 동로마 전력의 공백을 틈타 평화유지비로 더 많은 것을 요구했다. 그런데 이때 루아가 갑자기 죽었고, 새로운 후임자 블레다는 연례 공납금으로 700파운드로 증액하여 받아내었다.
440년, 반달족을 공격하기 위해 동로마의 다른 대병력이 서로마로 떠난 사이, 페르시아가 다시 공격을 감행했다. 동시에 블레다는 더 많은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에 테오도시우스 2세는 442년 페르시아 군대를 완전히 격퇴했지만, 한동안 블레다에 대해서는 많은 도시들이 유린되고 로마인들이 살해당하는 것을 묵인해야만 했다. 동로마는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할 준비를 하다가 결국 443년 블레다에게 금 6000 파운드를 일시불로 지불하고 매년 2100파운드라는 살인적인 공납금을 바치는 조건으로 마무리되었다.

447년, 동로마는 아틸라의 공격을 받았다. 훈족은 동로마군을 쳐부순 다음 도나우 강 유역의 로마 점령 지대를 5일간 여행할 길만큼 비우라고 요구했다. 이에 449년 실권을 쥐고 있던 크리사피우스는 아틸라를 암살할 계획을 세우고 시도했다가 실패하는 일까지 벌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크리사피우스의 이런 시도는 아틸라의 응징보다는 훈족의 공격대상을 바꾸게 만들어 아틸라는 공격의 칼을 서쪽으로 돌려 이동했다.

계속되는 굴욕 속에서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부자들과 원로원 의원들은 훈족에게 바치는 거액의 공납금에 대해 분노했다. 이들은 크리사피우스의 정책들로 부담해야하는 금액들이 자신들이 부담해야 된다는 것에 더 화를 냈다. 또한 크리사피우스의 아틸라 제거 계획도 실패하면서 제국의 위신이 떨어졌다는 것도 이들을 화나게 만들었다. 결국 크리사피우스는 위신이 크게 추락하고 말았다.

2.9. 종교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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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7년, 테오도시우스 2세와 총리대신 노무스는 단성론(單性論,Monophysitism)[14]에 대해 내려진 단죄를 철회함으로써 고위직에 있는 여러 정통파 그리스도인들을 격분시켰다.

한편 427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 임명된 네스토리우스는 열성적으로 아리우스파를 배척했고 그리스도가 니케아 신경에서처럼 단일한 위격(位格)을 가진 것이 아니라 인간의 위격과 신의 위격, 서로 다른 두 개의 위격을 가지고 있다고 설교했다. 그의 설교는 급격히 대중의 호응을 얻어 세력을 확대해 갔는데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인 키릴로스의 반대에 부딪혔다. 테오도시우스 2세는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에 찬성했다. 그러나 키릴로스 총대주교는 황제의 누나 풀케리아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 431년 에페소스 공의회에서 네스토리우스파는 파문당하게 된다. 이때 테오도시우스 2세는 435년 네스토리우스를 아라비아페트라로 유배보내게 된다.

2.10. 사망

450년 테오도시우스 2세는 취미였던 사냥을 나갔다가 낙마사고로 척추가 심하게 손상되었고 몇 달 있다가 죽었다. 그에게는 아들이 없었기에 새로운 계승자로 트라키아 출신의 장군 마르키아누스(Flavius Marcianus, 396년 - 457년)가 형식적으로[15] 풀케리아와 결혼하여 뒤를 이었다. 이렇게 황녀가 정통성을 갖고서 군주로서의 남편을 택군(擇君)하는 제위계승 메카니즘은 후대 레오 왕조아일리아 아리아드네마케도니아 왕조조이에게서도 똑같이 나타났다. 하지만 여제까지 오른 것은 조이뿐인데, 이는 마케도니아 왕조의 통치기간이 테오도시우스 왕조나 레오 왕조와는 달리 당시 기준으로 150년이 넘었을 정도로 오래되어서 정통성 내지는 통치정당성을 더욱 높게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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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도시우스 2세는 그림그리기와 필사본 제작이라는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아울러 아버지와 누나처럼 종교에 관심이 있기보다는 철학, 라틴 사상, 그리스 사상에 심취해 있었던 인물이었다. 이런 까닭에 그는 "칼리그라포스(서예가)[16]"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또 그는 사냥을 즐겼으며 오늘날의 폴로에 해당하는 추칸이라는 경기를 페르시아에서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입했다.

[1] 훗날인 467년에 서로마 황제 자리에 오르게 되는 동명인(안테미우스 황제)의 외조부되는 사람.[2] 결론부터 말하면 이 선택은 옳았다.[3] 아르카디우스 참조.[4] 테오도시우스 성벽 내 시가지 면적은 약 15.5km2로 기존의 성벽 내 시가지 면적에 비해 2배 가까이 넓어졌다.[5] 1453년의 오스만 제국군도 15만 명을 투입했지만, 성내의 1만 남짓한 군대를 상대로 50여 일 동안 고전해야 했다.[6] 1261년에 니케아 제국군 8백 명이 테오도시오스 성벽을 넘어 도시를 점령한 일이 있다. 다만 이는 내부의 호응이 있는 가운데 밤중에 몰래 성벽을 넘은 것이라, 정공법으로 성벽을 넘었다고 하기는 조금 뭣하다.[7] 물론 희대의 사기템 그리스의 불의 도움도 컸다.[8] 사실 메흐메트 2세라고 해서 결코 쉽게 함락시킨 것이 아니었다. 상기했듯이 비록 극한까지 내몰리기는 했지만 로마군은 오스만군을 치열하게 막아내는 중이었고 오스만 궁정의 실세들은 콘스탄티노플의 점령을 통한 술탄의 지배권 강화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사건건 철군을 요구하는 상황이었다. 하물며 서방의 지원군 당도 역시 중요한 변수였기 때문에 메흐메트로서는 '천운 + 지속된 공격으로 인한 방어측의 피로 누적'이라는 아슬아슬한 승부수를 운좋게 잡은 셈이다.[9] 관리는 꽤 허술하여 대부분의 지역이 그래피티나 술래잡기 핫스팟 정도로 사용되며 방치되고 있다. 가끔 무너진 외벽을 시멘트로 때우는 정도로 관리가 부실한 곳은 무수히 많은 이끼와 잡초로 망해버린 고대 유적처럼 되어있다. 전통적으로 무슬림이 이교도의 유적에 무관심한 것도 있지만 생각보다 인지도가 크지 않은 점이 한몫한다. 이교도의 유산을 파괴하지 말라고 했지 열심히 보수공사하란 말은 없기 때문.[10] 어머니 아일리아 에우독시아의 궁정생활이 매우 화려하여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 콘스탄티노플 대주교[17]에게 사치스럽다고 비판받았던 것과 완전히 대조된다.[11] 리키니아 에우독시아는 훗날 한국식으로 따지면 5촌 당숙(아버지 테오도시우스 2세의 배다른 고모인 갈라 플라키디아의 아들)되는 서로마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와 결혼한다. 즉 근친혼이다.[12] 군대의 힘으로 도시국가에서 세계 그 자체가 된 로마에서 군면제는 절대로 좋은 게 아니다.[13] '최대' 사형이 아니고 그냥 딱 '사형'.[14] 그리스도가 하나의 본성, 곧 신성을 지녔고 그것이 인성(人性)을 흡수했다는 에우티케스의 견해.[15] 마르키아누스에 대한 후계자 선정 단계에서 풀케리아의 순결서약을 상기시키며 이 결혼은 제위계승을 위한 상징적인 결혼일 뿐, (성관계가 동반되는) 진짜 결혼이 아니라고 못 박았다.[16] 영어 calligraphy로 그대로 남아 있다.


[17] 당시에는 대주교(Archbishop)가 맞다. 451년 칼케돈 공의회의 결과로 '총'대주교(Patriarch)로 승격되었다.